침묵12 - 너무나 종교적인
침묵12 – 너무나 종교적인
![]() |
우리 인간은 특권을 몹시 탐내는 것 같다. 그것도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의 출생, 이를테면 우리가 인간이고 지구 위에서 태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 우리는 그것을 인간중심적 과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과신은 인간이 신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생각에서 거의 절정에 다다른 것 같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1994) |
너무나 종교적인 – 이런 표현은 값싼 클리셰일 수도 있었다. 니체의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표현을 따라 ‘너무나’는 말 그대로 진부한 유행어였으니까. 그러나 승욱은 인간을 표현하는 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구가 다만 ‘창백한 푸른 점’임을 또렷하게 인식한 다음부터였다.
‘창백한 푸른 점’은 너무나 대단해서 그가 따옴표 속에만 쓴다. 보통형용사도 보통명사도 아닌, 너무나 특별한 표현이다. 이 함부로 내뱉기도 아까운 단어들은 먼저 사진으로 등장했다. 군대에 있을 때였다. 우주선이 보내온 우주 속 지구의 사진, ‘가족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행성들, 수금지화··· 아니, 그 차례가 아니라 해왕성, 천왕성, 토성, 태양, 금성, 지구, 목성이 찍힌 사진이었다. 저 사진 속에서 창백하게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초라한 작은 점 하나. 그것이 지구라 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는 것은 상상 속에도 없던 일이었다. 뭔가 아찔했다. 거울 속 자신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일도 드물었던 터에.
아, 아버지는 저 사진을 못 보셨구나! 그때 60억에 육박하는 인구들 중 둘이 만나서 5년도 함께 살지 못하고 헤어진, 그 두 사람은 얼마를 부딪다 간 것일까. 그 흔적은 얼마 만큼일까. 연두와 나, 겨우 한 학기를 바라보다가 만 우리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흔적들은 원론적으로 너무나 초라할 것이다. 아무리 애달프고 강하더라도. 많이 우울해졌다.
그렇더라도 군 생활도 지났고 쉬엄쉬엄 복학도 했고, 그러니까 여차여차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앞둔 1996년 겨울학기가 되었다. 졸업논문의 계절이었고, 논문 제목이나 개요를 미리 상담 받을 무렵이었다.
‘게르만족에 대한 기독교의 선교’라는 제목으로 쓸까 준비 중인데요.
지도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하필 선교의 역사? 것도 게르만족에 특정해서요? 졸업논문은 보통 폭넓고 가벼운 지식으로 쓰는 것인데.
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후에···. 승욱이 어물거리자, 다음 순간 덧붙이신 말씀은 달랐다. 계속 공부를 할 생각이라면 뭐, 괜찮겠네요.
계속 공부를 할 생각이라면 – 그 말씀은 승욱에게 뭔가 방향타를 결정해 주었다. 그는 추워지는 날씨에도 땀방울이 맺히게 열심을 냈다.
논문 제출도 끝나고 뭔가 좀 후련한 어느 날 광식이 전화를 했다. 한낮이었다. 광식은 외근직 소방관이라서 낮에도 비번인 날이 많았다.
어이, 대학생! 이참에 졸업은 하겄지. 바로 취업할 거는 아니제?
응, 뭐···.
당장 뭣 허러 취업해! 취업공부 매달리느니, 니는 대학원으로 가그라.
아마.
뭐야, 시방 남의 말 하냐? 독일 다시 갈까 말까 그라냐?
아무래도···.
아이고 답답! 암튼 신학 그거는 넵둬라 야. 니는 엄니랑 살아사제.
승욱은 중등 종교과목 교사를 은근히 꿈꾸고 있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은 교직과정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해야 했다. 주일 성당에서 깨우쳐지지 않는 계시 진리는 신학과에서 공부해야만 풀릴 무엇이었다. 늘 「가지 않은 길」 타령이지만, 다시 사학과에 대한 미련도 없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심 바라시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교사 자격증을 받을 것이니까. 오, 주여, 나의 마음이~~. 다시 어머니의 해바라기 밭에서 봄여름을 나고 싶은 생각도 간절해졌다. 그러다가 입학원서 제출 기간을 놓쳤다. 동기들에 비해서 이미 많이 늦었는데, 다시 한 학기 늦는 것쯤은 별 일이 아니었다.
일단 마지막 겨울방학을, 졸업식 전의 겨울을 어머니 곁에 가 있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책들을 빌릴 참이었다. 그 순간 잊지 못할 그 충격의 단어를 다시 발견했다. 『창백한 푸른 점』이 책으로 출판되었다니! 우주선에서 행성들의 ‘가족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동료들을 설득했었다던 바로 그 칼 세이건의 저서였다. 여린 햇살이 닿는 창 쪽에 앉아서 크고 멋진 책을 펼치던 첫 순간이 지금도 떠오른다.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점에 살았던 것이다··· 우주의 어둠에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세이건, 26~27쪽)
400쪽이 넘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처음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졸업논문을 쓸 동안에는 그런대로 잘 읽히던 이런저런 책들이 왜 갑자기 안 읽히는가. 대출 기간 내에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아무래도 사서 보아야 할 것이었다. 빌린 책, 산 책들을 들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제일 궁금해서 먼저 펼친 것은 당연히 『창백한 푸른 점』이었다. 앗, 볼테르! 3장을 열자, 볼테르의 이름과 함께 『미크로메가스: 철학사』 에서의 인용이 바로 거기에서 포문을 열고 있었다. 미크로는 뭐고 메가스는 또 뭐야? 작은-큰 그렇게 느껴지는 형용모순, 뭘까. 승욱은 사실 『캉디드』를 뭉클하게 읽은 뒤에 볼테르를 더 읽어볼 생각으로 도서목록들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그때도 『캉디드』의 쌍둥이 같은 작품이라던 『랑제뉘』 생각만 해두었지 『미크로메가스』는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았었다. 온갖 정보를 뒤져보았지만, 우선 번역이 없었다.
겨우 영어로 찾아 본 『미크로메가스』는 지구를 여행하는 두 외계인의 이야기였다. 얼핏 SF 같기도, 『걸리버여행기』를 생각나게도 했다. 풍자물 같으리라는 선입견에다 영어 읽기가 편하지 않아서 그만둘까 했다. 아니, 왜 하필 볼테르일까, 18세기에 뭘. 하지만 궁금증을 이길 수 없었다. 오류가 있겠지만 대충이라도 읽고 싶었다.
미크로메가스는 시리우스 행성에 사는 주인공이다. 지구에 비해서 둘레가 2,160만 배 더 큰 별에서 살며, 키는 대략 38km가 넘는다니 상상 불가다. 나이는 450살인데, 250년의 연구 끝에 출판한 미세곤충 연구로 종교재판을 받고 800년의 추방령을 받았다. - 숫자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 그러는 사이 우주여행을 결심했고, 중력 척력 인력 여행으로 토성에 도착했을 때, 키라고는 약 2km에 불과한 난쟁이를 만나서 그와 친교를 맺는다. 둘이서 여러 행성을 방문하는 동안, 이야기의 압권은 화성이 너무 작아서 앉을 데도 없을까봐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대목이었다.
마침내 ‘저 멀리 흐릿한 빛’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1737년 7월, 드디어 지구에 도착한 그들은 36시간 만에 지구 일주를 끝냈는데, 대양들에 ‘두더지가 파놓은 흙두둑’을 둘러보면서, 물은 난쟁이의 종아리께, 큰 사람(?)의 발뒤꿈치를 간신히 적셨을 뿐이랬다. 이 구체의 무엇인가가 ‘존재라는 영예’를 누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리우스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떨어져 집어들다가 그것이 돋보기가 되어 발트해에서 작은 점을 발견했고, ‘하찮은 미생물’ 고래를 알아차린다. 토성인은 그렇게 미세한 ‘원자’가 지각이 있음을 놀라워하는 동안, 시리우스인은 한 무리의 신사들을 나르는 배를 발견한다. 이 작은 존재들이 ‘지능이나 정신을 갖기에는 너무 작다’ 싶으면서도, 시리우스인은 ‘눈에 보이지 않은 벌레들이여···’ 하고 인사말을 건넨다.
여행자들은 온갖 노력 끝에 ‘꿀벌만큼이나 작은 동물들’인 인간에게서 지성의 폭넓음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동시에 인간의 허영심과 철학을 알게 되며, 인간의 영혼관을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 엔텔레케이아(완전 현실태), 데카르트학파는 순수정신이라는데, 말브랑슈학파는 우리가 아니라 신이 모든 것을 해주신다고 하고, 라이프니츠학파는 신의 완전성 이론을 편다. 그들 중 로크 추종자가 비물질이면서 지적인 실체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하자, 외계인들은 어느 정도 수긍을 한다. 압권은 이번에는 사각모자를 쓴 몹시 작은 동물(소르본의 신학자)이 함께 있는 아주 작은 철학자들의 모든 이야기에 훼방을 놓는 대목이다.
한 철학자(사각모자)가 자신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성 토마스의 『신학 대전』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 당신들, 그리고 당신들의 천체, 태양, 별 모두는 오직 인간만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오. 이 말을 듣자, 두 외계인은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 그칠 줄 모르고 웃어댔다.(세이건, 43쪽)
이 『미크로메가스』 본문이 세이건에 문자 그대로 인용되어 있었다. 이를 어째, 승욱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좌우를 둘러보았다. 책상 양쪽으로 늘어 쌓인 책들 사이에 감시의 눈길이라도 있는 듯 덜컥 두려웠다. 『신학 대전』이 어떤 저술인가. 종교개혁에 맞선 그 숭고한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동안 『성서』 옆에 놓아두었던 책, 인류 최고의 권위를 희화하다니!
그렇게 작은-큰 이야기가 끝난다. 마지막까지 힘들었지만, 놀라움이 더 컸다. 크게 떨었다. 책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꼭 곧바로 읽을 작정을 했다. 아니, 번역을 해버릴까. 승욱은 처음으로 자신이 외국어에 약하다는 것에 풀이 죽었다. 인간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유인원과 함께 사람과科에 속한 인간도 속屬 단계에 이르면 따로 분류를 해야 할지도 몰라. ‘영어속 / 프랑스어속’ 그렇게. 마치 코끼리들을 ‘아프리카코끼리속 / 아시아코끼리속’ 그렇게 따로 분류하듯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내용은 실상 간단했다. ‘저 멀리 흐릿한 빛 지구’는 가까이에서 보면 ‘두더지가 파놓은 흙두둑’이고, 인간은 ‘한없이 작지만 무한에 가까운 커다란 자존심을 가진··· 좀벌레들’이다.
맞다. 승욱이 바닷가에서 모래알을 보는 것만큼 우주에서 보는 지구는 그만큼, 아니 더 미세한 알갱이에 불과하리라. 성인이 되어서야 난생 처음 바닷물을 적시며 떨고 떨었던 잔트포르트 해변에서 발아래 흩어지는 모래알들을 밟았던 때를 회상했다. 모래알들이 서로 다를 것이다··· 눈곱만큼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작은 푸르스름한 점 위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인구들을 우주에서라면 어떤 망원경 현미경으로도 구분하겠는가. 우리가 오늘 바라보는 빛은 그 광원에서 3,000년 전에 떠난 것이라는데. 그 멀고도 머나먼 광원에서.
세이건은 훨씬 더 나갔다.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 위해서 위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이해를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도시』에서 ‘최초의 인간 이후 아직 6,000년이 안 되었으므로···’ 세계 혹은 우주가 10만 년이니 어쩌고 하는 고대 이집트의 전통은 ‘혐오스러운 거짓말’이라고 단호히 말했다.(세이건, 47쪽) 하지만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 정도, 우주의 나이는 대략 150억 년이라는 과학적 증명들을 어떤 방식으로 부정해야 할 것인지. 지구는 ‘엄청난 격하’를 겪는다.
머리가 아팠다. 앞서 『캉디드』를 머리통을 싸매고 읽을 때, ‘신이 주신 최고의 온전한 세계’라는 라이프니츠를 조롱하는 볼테르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른 표현들도 찾아 읽었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의 원어가 얼마나 듣고 싶었던지. 그때 승욱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것을 너무 후회했었다. 나중에 강사실 옆자리 불문과 손 선생한테 애들처럼 졸라서 그 발음을 들었던 생각이 난다. 씨 디으 네그지스떼 빠, 일 포드레 랭방떼. 씨디으···. 대단한 문장이었다. 하기야 독서의 어려움은 외국어 문제가 아니다. 다른 많은 한글 번역본도 한글본 자체도 어려운 기술들이 너무나 많다.
난해하기는 볼테르의 ‘존재’ 개념도 마찬가지였다. ‘실재’와 더불어 생각해야 했다. 가능한 문장들을 생각해 보았다. 단군은 실존 – 실제로 존재했던 – 인물인가, 유령이 존재하느냐, 우리나라에는 아직 가난이 존재한다, 가난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러면 신은 존재하는가. 볼테르는 말했다. 신의 존재에 관한 내재적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사회적 질서와 도덕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 높은 힘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승욱은 자신의 이해력에 한계를 느꼈다. 그러니까, 신(의 개념)이 정의, 자유, 도덕을 지원해줄 것이라고 했던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뭘까. 신이란 인간사회에 필요한 개념일 뿐이라는, 개념일 뿐 실체는 없다는, 그러니까 볼테르는 냉담을 넘어 이미 적대적인가. 승욱으로서는 느닷없는 유학길을 떠났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상수시 궁전을 실없이 거닐며 마주쳤던 볼테르가 끊임없이 뒤를 쫒아오는 느낌이었다. 왜 그런···
투틸로, 늦겠다이. 미사포를 손에 꺼내들고 마당에서 부르시는 어머니를 따라서 일단은 성당으로 숨기로 했다. 예, 어머니이.
성당의 거룩한 분위기에서도 거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승욱은, 투틸로가 아닌 승욱은, 눈꺼풀 속으로 향했다. 도망, 그랬다. 그가 실제로 지리적으로 한국을 떠났을 때 그 원점은? 원점은 어떠할까? 연두는 어떠할까. 잘 살고 있겠지. 연두를 원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언제부턴가는 회피할 만큼 그는 정직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그의 두려움은 다가올 인생이었다. 그의 인생이었다.
사랑에 빠져··· 요행히 호응을 얻어내고··· 어떻게든 청혼을 하고···.
아니, 다시. 사랑에 빠져··· 요행히 호응을 얻어내고··· 어떻게든 청혼을 하고··· 앗, 가톨릭이 아니었구나! 세례명이 없는 연두를 어쩌나. 어머니는 연두라는 이름뿐인 연두를···. 어서와요, 연두! 그렇게는 못하셨을···.
아니, 다른 버전. 사랑에 빠져··· 요행히 호응을 얻어내고··· 어떻게든 청혼을 하고··· 앗, 가톨릭이 아니었구나! 세례명이 없는 연두! 어머니는 승욱 투틸로에게 연두라는 이름뿐인 연두를 허락하셨을까. 다행히 관면혼이 있지. 나는 비신앙인과 결혼해도 신앙을 버리지 않겠으며 자녀를 낳으면 영세 입교시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겠습니다. - 나는 신앙인인 배우자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겠으며···. 투틸로는 연두는 서약을 한다. 고맙게도, 엄격했을 것 같던 연하오빠도 연두를 존중해준다. 그렇게 그 부모님도. 그렇게 결혼식을 하고··· 어쩌면 아들을 낳고··· 그 다음은 암흑, 아들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투틸로, 눈 떠라이. 영성체 모셔야제이!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채근하셨다. 승욱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앞서 나가시는 어머니의 미사포가 코앞에서 살랑거렸다. 그리스도의 몸! 말씀에 따라, 아멘!
잊자. 고등학교 독일어 시간에 배운 「청춘은 아름다워라」의 헤어짐을 떠올렸다. 독일어에서 동사의 위치를 배울 때였다. 여러분,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 들어봤죠? 그의 단편 제목에 ‘쇤 이스트 디 유겐트!’ 여기 칠판에 쓸게요. 직역하면 ‘아름다워라 청춘은’입니다. 동사는 반드시 2번째 자리에 오니까, ‘청춘/이다/아름다운’ 또는 ‘아름다운/이다/청춘’이라고 쓰셨다. ‘-이다’가 접미사인 국어와는 비교하지 말고요! 내용도 궁금하죠? 주인공 이름이 헤르만이니까 자전적 이야기일까. 글쎄요, 도서실에 가면··· 읽어보세요. 추억은 아름다워라, 그런 것이랍니다. 아름다운 것만 추억에 남으니까요.
그랬다. 연두는 아름다운 것으로 승욱의 추억에 남았다. 그는 다른 추억을, 추억이 될 더 아름다운 것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졸업식에서도, 어느 학번들에도 동기라는 소속감이 없이 떠나온 졸업식에서도 추억을 만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기쁨 가득한 표정을 하고, 오랜만에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는 추억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늘 현재였다. 당숙이 당숙모까지 함께 오셨고, 이모는 대학도시에 사시니까 당연히 오셨지만, 결혼한 이종 누이도 아들아이 손을 잡고 와서 감격할 뻔했다. 누이가 예약해 둔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언제나처럼 큰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광식이였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은 주말에 뭉치기로 했다고. 부족할 것은 없었다. 부족한 느낌은 뭔가 다른 기대가 있을 때나 오는 것이다. 뭔가 기대를? 승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코앞의 결정을 유보한 채 그는 독서에 빠졌다. 이어지는 독서는 그의 진로를 흔들었다. 흔들다 못해 멈추어 세웠다. 겨울방학, 정확하게는 졸업식을 기다리는 시간은 쉬이 지나갔다. 독서가 느린 탓도 있었다. 독서가 독이 될지도 몰라서 그랬다. 늘 혼자인 어머니랑 가까이 있고 싶었다. 말없이 함께. 고향은 안정된 곳, 기억에 아득한 아버지는 그를 단련하시는 대신 게으름뱅이로 살게 남겨두셨다. 알바도 하지 않았으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찔끔찔끔 휴학을 거듭하다가 난데없이 독일로 튀었더랬다. 젊은 시절의 현실도피가 맘에 걸리긴 했다. 그때로부터 먼 후일 카프카의 편지글에서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해.’(카프카 1907) 라는 대목을 발견하고서 조금 위안이 되기까지는.
독서, 무엇보다도 『창백한 푸른 점』의 세이건은 승욱으로서도 까맣게 덮어두고 있었던 지구와 우주의 관계를 확실하게 짚어주었다. 우리의 - 여기에서 우리는 아마 서양인의 - 근간을 지배하는 유일신의 개념은 우주와 지구의 부정에서 시작되었음을. 그것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을 빌려서 소환시켰다. 구형의 지구에서 ‘반대점antipode’의 존재를 부정하며, 우리의 시조는 아담과 이브 한 쌍뿐, 그런 벽지에 아담의 자손들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세이건, 13쪽) 기독교 종파를 가리지 않고 추앙받는 성인, 다양한 종교와 철학들이 경쟁하던 서로마 사회에서 여러 종교와 철학들을 전전하며 내면의 방황을 겪었던 교부, 아, 마니교에서 빠져나온 회심의 증인, 그런 성인이 이렇게나 배타적이었다니!
반대로 그보다 훨씬 전에도 지구를 하나의 점으로, 우리가 사는 곳은 그 점의 한 구석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던 철학자도 있었다. 『명상록』 (170년경)에서 이렇게 말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단호히 인간 중심의 사고를 지녔다는 사실에 놀랐다. 인간의 추론 능력을 동물과 차별된 능력이라 믿었고, 그래서 이성적인 마음이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끝없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지 마라. 죽음이 너를 덮으리라. 네가 살아 있고 능력이 있다면, 옳은 길을 가라.’ 이렇게 말했던 스토아 철학자, 그가 황제로서 박해했던 기독교가 황제의 철학을 삼켰다.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을 덮었다. 선교의 이름으로 문명 파괴가, 전쟁이···.
종교, 종교들, 수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 그 모든 것들이 이 작은 푸른 점 위에서 명멸해 갔다는 사실을 승욱은 비로소 세이건에서 깨달았다. 이데올로기야 그랬다지만 종교들도? 그가 졸업논문이랍시고 쓴 선교의 역사가 사실은···.
명멸 – 불이 켜졌다 꺼졌다, 생명이 켜졌다 꺼졌다. 생명이라는 단어를 종교를 빗대어 쓴다면 신성모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라 하더라도 생로병사의 길을 피하지 못한 것도 역사적으로는 어느 부분 사실이다. 그 위대 찬란했던 그리스 로마의 신들도 멸했고, 기독교가 그 자리에 공인되어 오늘에 이른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 그 불교는 세계로 퍼져나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으로도 남아있지만, 정작 인도에서는 수 세기 전 힌두교로 대체되었다. 인도에는 불교 유적만 남아있고 불교는 없다고들 한다. 다른 작고 큰 규모의 종교들이라 해서, 생명이 길어 보인다 해서··· 알 수 없는 일이다.
종교, 종교들 – 하염없이 무거운 단어였다. 너무도 당연한 가톨릭과 개신교, 그러니까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종교들, 지구상에 명멸했던 종교들, 현존하는 종교들··· 갑자기 종교들이라고 하는 복수명사가 눈을 감아도 떠올랐다. 눈꺼풀 안쪽을 점령했다. 검은 바닷물을 대체했다.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아, 무슨 기억인가. 기억이란 놈은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 어느 한 순간 시야에 머물렀었던 그 문구가 하필 이 혼란 속에서 솟아났다. 89년 2학기에 입력되었던 상이 6년, 7년이 지난 순간에 갑자기 해마를 대뇌피질을 뚫고 나타나다니. 기억의 독성이 밀려왔다. 폭발했다. 연두가 어느 날 가져다 준 책표지 안쪽에 적혀있던 그 문구,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연, 이게 무슨 말이야?
응, 형! 불교, 『대반열반경』의 구절일 거야. 연하오빠, 오빠가 써넣었나 보네.
‘창백한 작은 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식의 순간 하필이면 불경의 구절이 눈꺼풀 안쪽에서 시야를 막아버리다니. 독서의 독성과 기억의 독성이 합작으로 만들어낸 혼돈은 몇날 며칠을, 아니 이후의 수많은 날들에 승욱을 번민에 빠뜨렸다. 첫 순간은 메모의 내용 보다는 책을 내밀던 얄따랗고 마른 손이 손가락이 느닷없이 길고 흐릿한 기억의 바닷속에서 헤엄쳐 나왔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느리게 흐느적거리는 가느다란 팔, 짧은 소매 아래 송송 박힌 솜털을 살랑거리며. 연두의 팔 바깥쪽으로 난 솜털은 바람도 없을 천장에서도 승욱의 눈꺼풀 속에서도 풀밭의 강아지풀처럼 흔들리며 승욱을 간질였다.
강아지풀들이 돋아났으려나. 승욱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마루로 나갔다. 날은 어스름 속에서 겨우 밝아오고 있었다. 어머니랑 봄 풀꽃들을 살펴봐야지. 슬쩍 이름들을 물으면 좋아하신다. 꽃마리나 동전초는 대뜸 답하시다가도, 큰개불알꽃을 가리키면 못 들으신 척 하실 것이다. 웬 이름들이 그런지. 그 푸르스름 하늘을 닮은 예쁜 풀꽃을 그리 부른다냐. 깽깽이풀, 요놈들 짙은 옅은 보랏빛이 얼마나 예쁘냐이. 어머니는 그날따라 기척이 늦으셨다.
책은 인도불교의 쇠퇴에서 펼쳐져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기 시작한 때는 1203년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보자, 동인도에 위치했던 비크라마실라사 사원이 - 이름 참 어려웠다. - 무차별 파괴되었고, 승려들 또한 무차별 살해된 사건이 계기였다.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비판하는 평등 이데올로기로 부각됐던 이 불교 수도원에서 1,000년 전에 1,000명의 학생들이 100명의 교수들이 죽었다. 죽임을 당했다. 모든 생물은 그 문화와 함께 명멸한다! 선교는 결국 전쟁의 형태로···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을 내세운 십자군까지도.
입술을 움직일 단어가 없다. 머릿속에 그 어떤 개념도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랐다 하더라도 내뱉을 수 없다. 종교에 관해서니까. 45억 년 동안 지구 위에서 명멸했던 종교들··· 침묵만이 답이다. 침묵이다.
투틸로, 나와 봐라이!
예, 엄니, 왜, 무슨 일?
승욱의 어린양 반말 투에도 마루 아래 어머니는 웃지 않으셨다. 이것들 좀 봐라이. 누가 여기를 밟으고 지나갔을끄나.
마당 길 쪽의 풀밭에 풀꽃들이 사정없이 밟혀있었다. 방법이 없었다.
엄니, 요놈들 안 죽어! 곧 다시 올라올 거요. 요놈들 진짜로 강하거든. 엄니, 엄마아, 걱정 마셔이.
긍께이, 그래도 밟아분 데는 끝났제이. 끝나 부렀어. 허기사 사람도 죽고마는디···. 그냥 말끝을 흐리셨다.
소박한 진리 하나, 생로병사! 생명 있는 것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 눈물 나게도 정직한 말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믿어대는 인간은 필멸 필사 유한의 존재와는 다를까. 전혀 다른 선택된 존재일까. 가능할까 정말? 가능할까 왜?
사람을 생로병사에 가두지 않고, 가두지 않기 위해, 인간은 유일신을 믿고 영혼을 창조(?)했는가. 볼테르의 의미에서라면 지구상에서 말할 수 없이 작은 보잘 것 없는 생명체인 인간이 거만하기는 이를 데 없어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몽상이거나 망상으로서 그렇단다.
아니, 큰일 날 소리. 그렇게 따라가면서 독서를 하던 승욱은 좌우를 동서남북 위아래를 둘러보았다. 휴우, 유아세례를 받은 투틸로가 내뱉을 말은 결코 아니다. 생각만으로도 이미 신성모독이다. 인간이 신이라는 신성한 관념을 상실하면 그런 관념을 대신해 허상들이 들어선다는 볼테르의 생각을 어떻게든 제대로 이해해 보자! 인간은 신을 종교를 믿고 따르며, 그러니까 종교적이어야 한다. 종교적인, 너무나 종교적인 인간만이 인간다운 인간이리라.
그런 뜻에서 독서도 중요한 조건이다. 독서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유의 출발일까. 다시 세이건이다. 본격 과학자이면서 어떻게 이토록 진지한 신학적인 글들을 보여주는지. 기원전 500년 크세노파네스의 인용이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을 검은 피부에 납작코로 만들었다. 트레이스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푸른 눈과 붉은 머리털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황소나 말이나 사자가 손을 가졌고 손으로 사람처럼 그림이나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면, 말은 말처럼, 황소는 황소처럼 신을 그렸을 것이다··· (세이건, 41쪽)
꺅! 말은 말처럼, 황소는 황소처럼 신을 그린다! 그럼 신은 없다? 크세노파네스를 찾아 읽어야 했다. 신은 없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은 유일무이한 정신적 존재다. 기독교의 유일신(The only God)이 아닌 단일신. 일자(The One)! 머리를 싸매고 눈이 충혈되어도 답은 없었다. 인간의 신 놀음(?)에 대한 비판이었나!
어느 순간 철학사 시간에 간과했던 포이에르바흐가 떠올랐다. 그를 무신론 쪽으로 치부하였기에 기말고사 때 공부 말고는 관심에도 없었던 철학자였다. ‘자연인으로서 인간은 완전한 본질을 갖는다.’ 그 비슷한 말로 신학을 자발적으로 떠났다 했는데, 정작 『기독교의 본질』에서 신학적 거대 논란을 남겼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그런 궤변이었다. 이유까지 댔었다. 신이란 인간이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위로를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라고, 몽상처럼.
포이에르바흐를 무신론자라고 그대로 지나쳐버릴 일이 아니라, 무신론자인 듯 한데 신을 어떤 방식으로 존중하는가를 읽었어야 했다. 요점, 요점은 미신이나 난센스가 아니다. 다만 중요한 이슈라는 것, 그것을 놓쳤었다. 승욱은 대학을 졸업한 지금에서야 겨우 독서를 배워가는 느낌이었다.
신은 없다? 없더라도, 인간은 완전한 존재에게서 위로를 원한다. 자신의 갈망을 투사하거나 대상화하고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이 존재하지 않는 신은 그저 인간적 갈망의 투사일 뿐이다. 이것은 단순 무신론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를 포함한 인간학이다. 종교가 인간 존재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거울, 투영, 내면의 자아, 표현된 자아라는 생각. 그러면 부정이라기보다는 실체를 알고 유용성을 인정하자는, 옳거니, 신이 없다면 신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는 볼테르의 연장선이다.
다만, 다만이 중요하다. 인간이 창조한 신이 인간의 위에서 인간을 억압하게 되면, 그러면 종교는 인간의 자기소외를 불러올 것이라고.
대안은? 다시 『서양철학사』를 책장에서 꺼내서 정독하기로 했다. 관련 서적들을 어느 정도 읽고서야···. 결심만으로 부족을 느낀 승욱은 어느새 기록을 해나가고 있었다. 이해가 더디니까 써 둘밖에. 이제야 처음으로 수험생이 된 느낌이었다. 무슨 시험에 대비하는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승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단 한 번도 가톨릭 신앙 밖에서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았음을. 가톨릭 세상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가톨릭 공기를 마시며, 열심은 아니라 해도 진심인, 한 번도 회의하지 않은, 평범하다 못해 순해 빠진 너. 순명,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일 없이도 막연히 무조건적 순명의 태도는···. 평소라면 냉담자를 열등한 낙오자 정도로 생각해왔던 승욱에게, 교만의 악마 루시퍼가 눈독을 들였나. 미사 참여, 영성체, 고해성사가 신앙의 외연을 지키는 장치라면, 회의는 이미 냉담의 시작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오 4,10)
냉담자 그리고 회심의 사례는 가까이에도 있었다. 어쩌다 고향집에 와서 머물다 가는 친척 수녀님의 오빠도 그랬었다. 수녀님의 오빠라 해도, 그러니까 피를 나눈 형제자매이지만 신앙은 피와 완전 일치할 수는 없다. 어느 수녀님이 수녀님이 되면, 대개는 일가친척들이 가톨릭에 입교한다. 하지만 대개는 대개다. 아예 모른 척해도 그만이고, 일단 신자가 되었더라도 곧 냉담자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런 오빠가 나이 들어 병이 깊어진 후에야 사죄소를 찾았다고 했다. 성실치 못한 죄, 알아내지 못한 죄를 고백하면서 신부님 앞에서 흘린 눈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부님도 울고 예수님도 울고 성모 마리아도 울고 수호천사도 울었다고. 그랬었다고.
현재의 세계, 가톨릭 노승욱 투틸로에게 6,000년 창조주 이래의 세계란 과거 전체의 인간 가치로부터 우리에게 상속된 한 덩어리의 오류와 상상력의 소산일 뿐일까. 그 이전의 유산들은 그럼 무엇일까. 볼테르의 물음처럼 프로메테우스와 메시아는 얼마나 다를까, 델포이의 신탁은 선지자의 말씀들과 전혀 다른 기능이었을까. 쌓이고 쌓인 유산들로 우리는 너무나 종교적이 된 것일까.
풀꽃들 구경은커녕 해바라기가 피기 시작한 것도, 더 이상 해를 따라다니지 않는 것도 승욱은 몰랐다. 어머니가 혼잣말을 하면서 해바라기 밭을 서성거리실 생각도 잊었다. 책들만을 읽어댔다.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다. 스스로 무거운 독서나 사유에 적합하지 않은 두뇌를 지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씁쓸하게.
그런데 창백한··· 그것은 하필 창세기의 ‘창’과 울림도 글자도 같아서, 승욱으로서는 새로운 경이의 대상, 아니 경탄의, 숭배의 대상으로 대체될까 두려웠다. 어느 순간 천장에는 바닷물, 검푸른 바닷물 대신 창백하고 신비한 우주가 넘쳐나게 되리라는 상상, 불안은 현실이 되어갔다. 검고 깊은 바닷물 속의 아버지는 더 이상 하늘이 아닌 승욱과 같은 곳, 지구라고 하는 창백한 푸른 점 속에서 하나가 되어 있었다. 45억 년 지구의 나이 속에서 4년 5년의 인연은 아슬아슬 고마운 스침이었고, 셀 수 없는 모래알들 중 서로 부딪는 아찔한 행운이었다. 그 찰나의 행복을 위해서 아버지는 관면혼을 결심했고, 아들을 얻으셨다. 그러고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했다. 맞아, 나는 가톨릭으로 태어났구나. 승욱은 자신의 유아세례자임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봄여름을 조용히 어머니 곁에서 보냈다. 너무나 종교적인 어머니 곁에서. 그런 표현도 새로운 어법에 따라 괜찮다고 했다. 잘 가꾼 잔디 어느 부분을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니면, 길이 되는 것과도 같았다. 길을 내는 것이 자연스럽고 따뜻한 일이듯.
너무나 종교적인 어머니의 곁에서 어머니의 신부님, 그보다 어머니의 신에게서 내적인 냉담의 조짐을 숨겨야 하는 고통쯤은 숨길 수 있었다. 그래, 침묵은 금이다. 근언신행謹言愼行! 어머니보다 더 말 없는 아들이 되어갔다.
신은 (창조할 필요가 있는, 존재해야 할) 우수한 가치임이 분명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세의 고통과 불안을 성서에서 신부님들의 말씀에서 위로받고 있는지. 어머니만 보아도 그렇다. 어딘지 모를 그늘을 띈 어머니의 얼굴이 일요일마다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은 오직 성당에서 살고 있는 신의 마력이었다. 너무나 종교적인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우주의 어둠에 둘러싸인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신의 마력을 믿으며. 믿으려고 애쓰며. 회의는 다만 침묵의 영역이어야 한다.
------
<한국소설> 2025. 9월호, 통권 314호, 107~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