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10 - 베네딕트 보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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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보이언은 승욱에게 매력적인 출구로 다가왔다. 독일에서, 유럽에서 몇 달을 바닷가를 탐닉하며 보내는 동안 원천적인 소통부재에서 오는 침묵은 실은 놀라운 작용도 있었다. 반작용이었을지, 밤에 또는 혼자서 방 안에 있을 때면 소리 없는 장광설이 피어오르곤 했다. 침묵인지 말인지 모를, 어떤 단어로도 설명 안 되는 충족이었다. 그는 주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을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글로 쓰곤 했다. 그럴 즈음 그는 슈베비슈 할로 돌아왔다. 원래의 출발지였을 그곳이었다. 괴테 인스티투트에서는 당연히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 독일 대학에 진학하려는 외국인들 틈에 한국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덕분에 식사 시간은 활기를 찾았고, 연극을 함께 본다거나 명소를 함께 찾기도 했다.
침묵과 수다의 변주곡 속에서 특이하게도 한국 신부님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조금 동선이 달랐다. 가롤로 신부님은 안동교구에서 로마에 유학 오신 분이었다. 독일어 공부가 더 필요하셨던지 한 코스를 하러 오신 곳이 슈베비슈 할이었다. 신부님과 더욱 친해진 것은 코스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다시 로마로 돌아가시는 길에 승욱을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해주신 것이다. 아니, 승욱이 적극적으로 따라 나섰다. 이냐시오 신부님, 어머니의 신부님의 길을 따라서 로마에는 반드시 가보려던 참이었으니까. 그 여행길에서 구체적으로 베네딕트 보이언 신학교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베네딕트 보이언은 바이에른 주 끝자락, 알프스를 면하고 있는 해발 1,800미터에 위치한 아주 작은 도시다. 8세기에 성 베네딕도가 수도원을 세운 이래 이루어진 도시였는데, 19세기 초에 베네딕도회가 그곳을 떠났다 했다. 그 뒤 100여 년 동안 군병원이나 대피소 등으로 쓰였고, 20세기 들어 이번에는 돈 보스코의 살레지오회가 들어와서 신학대학을 설립한 곳이라고 했다.
사실 승욱이 무턱대고 독일어 연수를 하려고 떠나오면서 슈베비슈 할로 마음을 먹었을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곳이 가톨릭 도시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냐시오 신부님이 독일어를 공부하셨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믿었다. 게다가 한국 신부님을 또 만났으니 당연히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슈베비슈 할은 베를린이나 함부르크처럼 아주 일찍 종교개혁을 단행한 도시였다. 종교개혁이 싹텄을 때 성 미카엘 교회에 부임한 B.목사님이 루터의 대단한 추종자였고, 교회와 학계를 빠르게 복음주의(개신교)로 개편했다. 남부의 가톨릭에 둘러싸여서, 결과적으로 종교전쟁 30년 동안에는 너무도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보았다. 다행히 소금 생산과 와인 무역으로 회복 또한 빨랐다 했다. 그러니까 이곳을 좋아하셨던 이냐시오 신부님은 종파는 중시하지 않으셨었나? 직접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 알 수 없다. 키가 커서 어딘지 하늘 한 구석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았던, 독특한 멋의 신부님은 어른이 되어서 소통해보기 이전에 투틸로의 곁을 떠나셨다. 머릿속에는 마음속에는 여전했다.
그래서였을까. 승욱은 슈베비슈 할에서 처음 가롤로 신부님을 만났을 때 무척 기뻤다. 수강 분반이 급이 달랐지만, 점심시간이면 젊은 일행들 보다는 신부님을 따라 다녔다. 가롤로 신부님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오셨고, 어머니의 신부님 이냐시오 신부님은 살레지오회 신부이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가롤로 신부님의 ‘가롤로’는 예수회 신부이셨다 했다.
가롤로 신부님을 따라 로마로 가기로 한 며칠 전부터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일찍이 마음속에 두었던 상상이 실제로 이루어지다니.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당에를 찾아가리라, 천장화 〈성 이냐시오의 영광〉을 보리라 했다. 더욱 떨리는 것은 시스티나 경당에 가보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5년인가를 한 작업에 몰두하여, 그것도 벽화도 아닌 천장화를 그렸다는 사실. 아, 그 유명한 〈아담의 창조〉를 보리라. 아니 그보다 앞서 〈어둠과 빛의 분리〉를 보리라.
···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창세 1:2-4). 영, 하느님의 영이 무엇일까. 영이 태초의 거대한 물과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태동하지 않은 것이라 했다. 우선 어둠에서 빛을 생기라 하신 뒤에야. 어둠에서 빛을. 그런 다음에 영에서 비롯된 생명이···.
승욱은 몇 번이고 꿈속에서 그곳을 다녀왔다. 어둠과 빛을 알아보기에 앞서, 그의 왼쪽 손가락 하나가 전율했다. 감촉이 없이도 그냥 전율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오른손으로 발가벗었을 몸을 가렸다. 손에 잡힌 것은 흐트러진 이불자락이었다. 방은 어둠과 빛의 분리 이전, 암흑이었다. 천장은 여느 때처럼 어두웠고, 하늘과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망망대해였다. 바다와 하늘은 어디에서 분리되는가. 둘은, 아니 전체는 분리가 되는 물질인가. 그것들은 물질인가. 가르기도 했으니까 물질이다. 어려서는 더더욱 물과 물질이 비슷한말인가 아닌가 어려웠던 기억이 새로웠다.
엄마, 모세의 막대기는, 지팡이는 왜 한 번만 물을 갈랐어?
투틸로, 뭐? 모세의 지팡이?
응. 왜 옛날 옛날에, 그때, 왜 한 번만 바닷물을 갈랐어?
왜 한 번만?
응. 한 번만 말고, 사람들이 바닷물에 들어가면 맨날맨날 바닷물을 막아줘야잖아. 저리로 잘 건너가라고.
그건, 모세가···.
모세가 죽었어? 죽어서 없어? 어디로 갔어? 바닷물을 갈랐는데 바닷물로 갔어?
응, 그건 신부님한테, 이냐시오 신부님한테 여쭤보자이.
신부님에게도 물었다. 철없는 아이였다.
신부님, 이냐쑈 신부님, 모세의 막대기는, 지팡이는 물을 어떻게 막았어요? 근데 왜 한 번만 막았어요?
투틸로, 그것은 기적이야요!
신부님, 기적이 뭐야요? 물이 멈추니까 기적? 근데 기적은 왜 한 번만 나요? 울 아빠가 바닷물에 들어갈 때···.
신부님, 이 아이는 투틸로는··· 가끔씩 엉뚱한 소리로 놀래키네요이.
어머니는 모세의 기적을 아쉬워하는 투틸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 알았지만 놀래킨다는 말로 넘어갔을 것이다. 바닷물에 빠진 사람들을 지팡이 한번으로 뭍으로 인도해주지 못한, 기적이 일어나지 못한 사고들, 숱한 해양사고들을 신부님인들 어떻게 설명해줄까.
기적은 왜 있고 왜 없을까. 많은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들, 특히 신들이 나타내는 불가사의한 힘의 작용이라고, 상당히 자랄 때까지도 들은 말이었다. 심지어 승욱은 어머니의 목걸이 ‘기적의 메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냥 목걸이가 아녀, 투틸로! 이건 기적의 메달이다이. 메달이 기적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제. 그람 미신잉께. 우리가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믿고 살라는 말이제. 엄니는 또 구하면 되니께 투틸로 니가 갖고 댕겨라이. 꼭 갖고 댕겨! - 어머니의 목소리는 여린듯하면서도 깊었다.
기적처럼 다가올 은총. 그 은총으로 시스티나 경당에를 간다는 생각에 들떴다. 가롤로 신부님도 시스티나를 우선적으로 추천하셨다.
로마에 오면 이곳 한 곳만 보고 가도 되지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 저런 높이의 천장에 그림을, 한 편도 아닌 천장화 시리즈 전체를. 그 중에서도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바로 그 순간을. 생명이 손끝에서 손끝으로! 숨이 손가락 끝에서 끝으로 전해진다는 그 발상 그 창의력 그 창조성··· 여기서 창조라는 단어가 신성모독이려나.
···.
4년이면 1,000일이 넘어요. 사람들은 4년간 꼬박 책상에서 글 쓰는 일도 못하는데.
신부님, 미켈란젤로가 그냥 사람은 아니지요.
맞네! 그냥 사람은 아니었지. 수백 편 소네트도 쓴 것 알아요?
소네트···.
당시 유럽에 흔했던 14행시, 정형시죠. 미켈란젤로는 시인이었지요.
시를 썼다고요? 수백 편을요?
그래요. 말년의 소네트들 보면, 아, 예술가는 예술에 대해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구나 그리 느꼈을밖에.
육안으로 쳐다보아서는 겨우 손바닥만큼 작아 보이는 저 그림들에 4년을 매달려놓고도, 코끝이 아니라 저 손가락 끝에 숨결을 그려 넣고도, 예술은 만족을 모르는 것인가 보구나. 400년도 넘게 사람들이 감탄과 경외심을 보이는데도. 승욱은 천장과 신부님을 번갈아보기를 그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신부님은 서쪽 벽의 〈최후의 심판〉 앞에 아예 붙어 서 계셨다. 승욱이 그쪽으로 다가갔을 때 신부님은 혼자 중얼거리셨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벗겨진 피부에다가···.
예? 누구요?
미켈란젤로가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는 것은 알지요? 저거네, 저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자신의 벗겨진 피부를 들고 있는 저어기! 하필 거기에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니까. 바르톨로메오 사도, 잘 모르나. 예수님 승천 후에 아르메니아로 가서 선교 생활을 하던 중 가장 끔찍한 혹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분.
···.
승욱은 그렇게 자세히는 알지 못했고,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로마로 오셨지요. 지금은 저 티베르 강 가운데 섬, 거기 세워진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에 계시지요.
성당, 성당들. 사람들은 하늘을 하느님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다. 살아왔다. 그랬구나. 시스티나 경당을 나와서 정작 성 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안내하시는 신부님을 뒤따르며, 승욱은 이제쯤은 혼자서 보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몇 번을 보셨을 성당을 또 함께 가시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하지만 신부님은 오히려 승욱을 충분히 안내해주셨다. 유명한 성 베드로 청동상 앞에서는 사진도 찍어주셨다. 고대 로마식 복장이라는데, 왼손에는 열쇠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내리는 모습의 성 베드로. 청동상이 거기 자리한 이래 몇 백 년 동안 내세에 천국행을 꿈꾸는 순례자들이 만지면서 입맞춤을 해 온 탓에 닳고 닳은 발까지, 무엇이든 다 설명해주셨다. - 그때는 아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님의 순교자 성상은 없었다. 그때로부터 꼬박 30년 후 2023년에 안치되었으니, 이제 또 다시 베드로 성당에 가볼 이유가 생겼다. - 그러고는 이젠 밖으로 나가서 돔 중반까지를 직접 올라가서 로마를 내려다보고 오라고, 당신은 성당 내에 더 머무르시겠다고 하셨다. 관광객들을 따라서 돔에 올라간 그는 놀랄 만큼 놀랐다. 특히 그 수학적으로 정교한 원주들의 자리매김에는 뭔가에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전혀 진화하지 않아!
내일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당엘 가려고요.
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왜 특별히 거기를? 신학과로 전과를 할 생각, 진지한가?
아뇨 뭐. 어머니의 신부님 이냐시오 그 이름이 오랫동안 귀에 박혔고, 그냥 머릿속에 들어있나 봐요. 자라서는 이런 저런 내력들을 찾다보니 예수회 관련 일들도···.
아, 그럼 예수회 잘 알겠네. 교육과 성사를 통한 교회 개혁, 이단 혁파를 목표로 하지.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들을 많이 세웠지요. 유럽 전역에, 나중에는 세계 곳곳에. 우리나라에는 서강대학교를. 지금 박홍 총장님이 바로 예수회 출신이시네. 요즘 문제 좀 일으키셨지만, 암튼.
그 박홍 총장이 예수회···?
승욱은 놀랐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오죽 사고들이 많았었나. 하필 서강대학교 건물 옥상에서 전민련 회원의 분신자살 사건이 터지자 총장이 혹독한 기자회견을 했었다. 본교 학생이 아니어서 더 냉정했나. 많이 심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취지였다. 죽음을 선동한다니! 자살 방조, 심지어는 자살을 획책한다는 말로 들릴까 아찔했었다. 오비이락이었나, 유서대필사건이 터졌다. 한 젊은이가 죽었고, 그 여파로 다른 한 젊은이는 감옥에 쳐밖혔다. 맙소사! 총장이 예수회 신부님이셨어? 승욱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가롤로 신부님 앞에서 표를 낼 수는 없었다. 친절한 가롤로 신부님 앞에서.
예수회는 그때 종교개혁으로 휩쓸린 중부유럽에서 어쩌면 가톨릭의 마지막 방어력이었어요. 청년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 프랑스군과 교전 중에 부상을 입고 고향 로욜라 성에 돌아왔답니다. 여기까지는 귀족 가문 아들의 전형적 여정이죠. 그러고는 독서, 주로 예수와 성인들의 행적에 관한 독서에 몰두했다가 생의 전환점을 맞았다는 분이죠. 회심의 길에서는 실제로 동굴 속의 기도와 고행으로 수련했고, 그 체험을 골격으로 『영신수련』을 저술했지요. 필독서!
예, 신부님.
청빈과 순결 그리고 순명을 맹세하는 일, 쉽지 않지요.
예.
흐음. 독서만이 아니라 실행, 4주간 수련을 되풀이해보는 것인데. 첫 주에는 무지 속의 삶, 죄를 회심하여 신앙의 터전을 닦는 일, 둘째 주부터는 묵상이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전까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로마에서의 일주일은 가롤로 신부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일 년 가까이 강요된 침묵 속에서 살았던 시간들에 대한 한풀이처럼 한국말을 실컷 나누었다. 가롤로 이름은 순천의 성가롤로병원 때문에 알고 있었다. 역사 속 그 분도 궁금해졌다.
가롤로 그 이름은 더러 들었어요. 원래 어떤 분이셨나요?
가롤로 이름으로는 성인들 복자들 여럿 있지요. 내 세례명은 일본에서 순교하신 카롤루스 스피놀라를 따랐어요. 우리가 보통 가롤로라고 하는데, 카롤루스는 이탈리아식 본명이고요, 대단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셨고.
수학자이고 천문학자인데 신부님요? 일본에서 순교를?
맞아요, 일본에서.
어떻게···.
도쿠가와 막부라고 아나, 사학과 학생 노승욱 군!
예, 임진왜란 그 막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멸하고 쇼군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 도쿠가와가 집권 초기 완강한 쇄국정책을 폈지.
아, 그럼 일본 선교도 시작부터 난관이었군요.
아니, 그 이전, 그러니까 예수회 초기 하비에르 신부가 동양 선교에 중점을 두고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하비에르 신부님은···.
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맞아요. 처음에는 호의적인 다이묘들을 만났어요. 화승총도 선물했고. 다이묘라면 서양식 영주쯤인데. 기리스탄에게, 뭐냐, 그리스도교 신자며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일본에서는 그렇게 부르는데, 포르투갈어인가. 아무튼 처음 한 50년쯤 기독교에 호의적이다가 돌연 박해로 변했어요. 한국으로 말하면··· 임진왜란 뒤쯤. 1597년 일본 26성인 순교 사건은 시작에 불과, 십여 년 후 선교사 추방령 이후에는 더 끔찍했거든.
그럼 그때···.
아니, 추방령을 내렸을 때는 가롤로 신부님은 교토의 예수회 대학에서 강의하던 중이셨고, 그대로 숨었을밖에. 암튼 나중에 겐나元和의 대순교로 악명 높았을 때는 50명 넘게···.
언제까지 그런 일이. 하긴 우리나라의 경우도 1791년 정조 때에 시작되어 고종 때까지 갔으니까요.
역시 사학도 답네, 신해박해를 연도로 알고 있군요. 일본도 박해는 끊임이 없었고. 화형은 기본, 산 사람을 태우는 것이 기본이었다니! 몇 시간에 죽는 것은 은총, 며칠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니 원. 곧 이어 도입된 희한한 배교 고문도 악명이 높아요. 후미에라고,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말인데, ‘밟는 그림’이란 뜻. 못 박힌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판 또는 금속판을 밟으라는 명령,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한테 밟고 지나가라고! 차마 밟지 못하거나 동요를 일으키면 바로 체포!
악랄한 고문이었군요.
보자, 1633년 쇄국령, 악몽의 반세기, 아무튼 그쯤 해서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면서 쇄국은 완성되었다고 할까. 천주교는 잠복시대로 들어갔지요. 공식적으로 금교령이 해제된 것은 메이지 유신 들어서야, 그러니까 19세기 중반이네.
50년, 100년 끔찍한 박해를 견디어 낸 것, 그것이 신앙의 힘일까요. 내세의 천국을 믿는. 그런데 내세의 천국을 탐내는 것과 현세의 천국을 탐내는 것에 차이가 있나요? 친구 하나가 있는데···
가롤로 신부님한테 광식이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망설여졌다. 광식이는 입만 열면 현세의 천국이 중하다고 했다. 이쁜 색시한테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꿈이랬다. 사실 이쁜 색시를 얻느라 무리(?)도 했고, 아들딸을 빨리도 낳았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우와, 혼신의 힘을 다하리라 믿는다. 우선 녀석은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준비에 돌입했었다. 소방학개론, 소방관계법규, 행정법총론 그것들만 내리따 파불면 될 겅께, 근디 법규가 어렵겄냐, 개론이 어렵겄냐, 하고 다녔다. 국어와 한국사 까짓것, 근디 문제는 영어여, 왜 영어시험을 보고 난리인지! 영어가 불을 꺼준다냐! - 아니, 졸업을 할라면 낙제를 말어야제! 다른 녀석들이 놀려도 힛힛 웃기만 했다. 아버지를 닮아서 구레나룻 자리가 풍성한 녀석은 소방관이 되어도 남성미 넘치고 멋있을 것 같았다. 녀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해버렸다. 광식이 제대했을 때는 대학생 승욱이 입대했을 때였고, 이듬해 승욱이 휴가 때 만난 광식은 풀이 죽어 있었다. 한 번의 고배를 들이킨 직후였다. 승욱을 만난 것도 딱 한번 뿐, 나 공부해사제! 그러고는 꼴도 안 보였다. 그러더니 승욱이 제대했을 때 만난 광식은 빛이 났다. 내가야 빛날 광자 광식이란 말이지, 라고 실제로 뻐겼다. 다행이었다. 군대 때 낳아놓은 딸 말고도 벌써 아들도 있었다. 속전속결이었다.
광식은 털투성이 제 아버지처럼 거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일찍 이쁜 각시를 얻고는 철이 들었다. 현세에서 줄 수 있는 행복은 다 주겠다고, 훔쳐다가라도 주겠다는 품새였다. 죽자사자 판께 되더라이. 체력시험이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제! 긍께 빡세게 논 것도 시험준비였당께! 일단 어떠냐! 소방관 아부지, 멋있제! 근디 실속이 있어사제! 인자 두 번째 목표는 재테크여! 돈이 목표랑께! 일반직 중에, 아니, 토목직 머시기덜 쫌 알면 무슨 숨통이 트일랑가. 아니, 절대로 비리는 말고 방법론 같은 거 말여.
수염자리가 깔끔하지 않아도 거침없이 빛나는 피부를 하고서 광식은 떠들어댔다. 긍께 현세에서 행복이, 현세에서 천국을 사는 것이 중요하잖냐. 현세의 일도 다 못함서 내세의 행복을 위해 살겄다, 그렇게 말하는 건 쫌 허풍에, 뭐시랄까, 오지랖 아녀?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있잖여. 근디 정말로 죽어서 천국 그것까장 원한다, 그건 진짜 지독한 욕심 아녀? 좋은 사람 될라믄 욕심부터 버리라며! 투틸로, 말혀 봐 어디!
광식은 내근이고 외근이고 화재 구급 출동이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충천했다. 가족의 현세를 책임지기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르겠다는 친구 앞에서 딱히 목표 없이 막 제대한 승욱은 그를 응원할밖에. 스스로는 왜소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현세의 천국이 아닌 내세의 천국을, 아니 둘 다, 그것까지를 바라는 것이 욕심입니까?
그러니까 승욱이 가롤로 신부님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 말이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침묵은 어떤 종류인가. 제대 후 복학도 하지 못하고 한국을 도망쳐 나온 주제에···. 승욱은 입을 꾹 다물고 성 이냐시오 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성당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한없이 높아 보이는 성당의 돔 – 안드레아 포초라는 화가의 천장화 〱성 이냐시오의 영광〉은 연극적 효과를 집약해서 구현해낸 것으로 정평난 작품다웠다. 디테일들을 승욱은 미리 다 외우고 있었다. 천장으로 가면서 저절로 소실되는 벽면의 효과까지를 포함하여 방대함을 실감케 했다. 이어서 중앙 통로 천장쯤에는 나오게 되어있는 교회의 돔, 그 돔이 실제로 고개를 들면 눈앞에 있었다. 그동안 설명들을 외우다시피 했던 승욱으로서는 그것이 ‘그려진’ 돔인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성당을 완공할 즈음 재정난으로 돔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돔이 없는 성당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화가가, 평평한 천장에 없는 돔을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실제였지만 사람들은, 승욱도, 착시현상으로 돔과 하늘을 드높고 드높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만 시각적으로 공간을 무한 확장했는데, 두 눈으로 보면서 눈속임에 빠져들고 있었다. 더구나 데자뷰라고 하는 환상, 그가 어찌 이곳을 와봤단 말인가. 너무도 디테일들을 상상했었던 나머지, 너무도 친숙한 감정 때문에 어떤 감동도 없이 그냥 돔을 바라보면서 하늘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가롤로 신부님을 만났을 때 대뜸 말했다.
신부님, 저는 아무래도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해야겠어요.
아니, 밤새 마음을 굳혔나요? 성당에서 부름을 들었나요?
오래 갈등이 자리했던 것 같아요.
같아요? 자신의 마음을 그런 것 같다고 표현하나요? 가슴에 두 손 두 발 얹고 생각해 보아요, 하하.
예, 두 손 두 발을요?
그때 가롤로 신부님이 추천해 주신 학교가 베니딕트 보이언 신학대학이었다. 로마에 가까운 남부독일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대규모 신학대학이 아닌 점도 어쩐지 승욱 자신에게 맞는 선택일 것이라 믿었다. 가롤로 신부님, 이냐시오 신부님의 분신처럼 여겨지는 가롤로 신부님의 추천이었으니까.
베네딕트 보이언 신학대학은 유서 깊은 대학교는 아니었지만 철학신학대학(PTH)으로서 철학부와 신학부가 정식 대학으로 공인된 곳이었다. 가톨릭신학과 교회신학 학위과정까지도 인증되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성직자 양성 위주의 신학대학이라는 성역에 비해서 더 열린 대학이었다. 성서신학, 조직신학과 외에도 ‘청소년 사목학과’는 독일 내에서 유일하다고 했다. ‘참된 목자 및 평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영성적으로 교육을 받을 마음의 준비는 되었더냐. 자문해 보면 그것은 그리 확신적인 일이 아니기도 했다. ‘스승이요, 사제이며,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 그 부분은 더욱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에는 역사라는 학문에 대해서 회의가 일었다고 할지. 어떤 이유라 해도 사학과를 피해서 도망 중이었으니까.
아무튼 학사 없이 바로 석사에 해당하는 신학 디플롬(Diplom Theol.) 과정만 해도 10학기였다. 철학과가 일반적인 선택일 것이었다. 실천신학과 등을 선택하면 사제양성과정이 아니라 신학 교육에 종사할 수 있는 증명으로 졸업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 수는 줄고 있어서, 개신교도 마찬가지였지만 각각 30퍼센트를 웃도는 정도라 해서 조금 놀랐다. 30년 하고도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종교전쟁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독일이니만치 전 국민이 양대 교회에 나뉘어 속하는 줄로 알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사실 가톨릭이건 복음주의교회이건 신자들은 크게 감소하고 있었다. 옛날 듣던 대로 인구 거의 절반이 가톨릭이고 나머지 거의 절반이 개신교도라는 말은 전설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두 종파를 합쳐서 절반을 조금 웃도는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유럽국가 독일의 가톨릭 인구가 동아시아 한국의 가톨릭 인구와 어슷비슷한 지경이 되어 있었다. 승욱은 그때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막연히, 하늘에 다가가는 길로서의 가톨릭 신앙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신학부로 마음이 쏠린 것은 가롤로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독일 가톨릭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서와 달리 청소년을 위한 미사 자체가 봉헌되고 있지 않았고, 세상에나, 주일학교도 없었다. 주일학교가 없다니! 그러한 추세가 한국 성당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복사들도 없어질라! 주일학교를 대신해서 정규 교육과정에 종교교육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다. 성당에 오기를 기대할 수 없으니, 의무교육 장에서 종교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수도자가 상주하는 본당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종교교육은 본당 신부님들이 맡는 것이 아니라 주로 종교학 학위를 받고 국가자격시험을 거친 평신도가 맡는 것이다. 우습게도 그들 또한 일요일 미사에 불참하기도 한다니. 아예 평신도도 아닌 경우라니. 신자가 아닌 일반인, 그러니까 다만 종교교육 종사자인 그냥 교사가 청소년들에게 첫 영성체와 견진교리를 가르치는 아이러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위기의식이 그를 신학대학 쪽으로 밀었나 싶었다.
로마의 가롤로 신부님과 헤어져 다시 슈베비슈 할로 돌아오던 날, 신부님은 돈 보스코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발로서 땅 위에 서서, 가슴으로 하늘 안에 살다.’ – 발로는 땅을 밟고 가슴은 하늘에 살라는 말씀이셨다. 제자로 받아들이시는가? 가슴이 떨렸다.
베네딕트 보이언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자 지난 코스 수강생들 중 혼자만 남겨져 재수 느낌이었을 독일어 과정에도 긍정적 힘이 실렸다. 부족한 독일어 때문에 한국어로 된 신학서적이 필요했다.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 이나 샤를 앙드레 베르나르의 『영성신학』은 번역이 되어 있는지, 사목학연구소 같은 것이 한국에도 있는지. 어떤 기초 서적들이 있는지도 모르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일단 독일어에 매진하자, 그랬다. 읽을 수 있어야 들을 수 있다. 0의 수준에서의 이 시작은 시작이라고 이르기도 너무 빈약한 상황이었다.
성서 읽기에 돌입했다. 어쩌면 독일어 공부의 첩경인 것을 몰랐다니. 구약성경부터 차례대로! 그것은 쉽지 않았다. 가롤로 신부님의 예상 대로였다. 신부님은 당신이 좋아하시는 미카서를 추천하셨다.
소예언서들은 짧다는 점도 좋아요! 미카는 주님도 이스라엘의 왕도 아닌 ‘나의 백성들’을 먼저 챙기신 예언자라고 하셨다. 잘 모르던 사실이었다. 부정한 지배층 엘리트들을 위협하셨고, 선지자들의 소유욕에도 일갈을, 소농을 착취하는 대지주들을 나무라시고, 일상의 권리 실현을 위해, 범법자들의 단호한 처결를 위하여 목청껏 싸우셨다고.
미카서를 읽었다. 미카 예언자가 ‘나의 백성’이라고 하실 때는 나의 백성의 적인 대지주들(미카 2:8), 나의 백성의 살을 뜯어먹는 정치가들(미카 3:3), 나의 백성을 호도하는 다른 예언자들(미카 3:5)은 제외하셨다. 친구의 반대말: 적들 – 프로인데: 파인데, 먹다의 파생어: 뜯어먹다 – 에센: 프레센, 인도하다의 왜곡: 호도하다 - 퓌렌: 페어퓌렌···. 그렇게 독일어를 배워나갔다.
시간은 무서운 존재다. 무섭게 흘러가버린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 30년이 흐른 뒤, 2024년 늦은 가을, 승욱은 눈을 의심했다. 11월 27일자 신문에서 그 미카서 구절을 읽게 되다니. Y대학교 교수들의 시국선언이었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거기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말라. 머리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리라. 재앙이 내릴 때가 가까웠다.’(미가 2:1,3) 선언문은 공동번역 구약성서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승욱이 보는 낡은 가톨릭 성경과 조금은 달랐지만, 쿡쿡 웃음이 났다. 웃다가 썰렁해졌다.
가롤로 신부님이 새삼 그리웠다.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라고 하시며 당신은 으스대며 걸으셨을. 오직 ‘공정을 바로 아는 것’만이 지도자들이 할 일이라고, 그렇지 못하면 재앙의 때를 맞으리라, 그러시면서 눈을 반짝이셨을.
하지만 가롤로 신부님은 침묵이셨다. 벌써 하늘나라에 계셨다. 그러니까 시국은 좀 험했다. 좀이 아니라 많이, 확실히 험했다. 그 며칠 후 벌어질 시국은··· 살과 뼈를 가진, 그리고 눈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경천동지할한 그런 일이 닥쳐오고 있었다.
다시, 신학으로 향하던 그때, 승욱은 시간을 거슬러 베네딕트 보이언 입학을 위해 제법 정진하던 그때를 돌이켜 보았다. 밖으로는 여전히 침묵 속에 숨은 것 같았지만 승욱은 열심이었다. 우선 괴테 인스티투트에서 독일어 능력시험의 성적을 높이고자 애를 썼다. ‘제어 구트’는 못해도 ‘구트’는 받고 싶었다. 베네딕트 보이언 여름학기 4-9월 입학을 위해서 1월 15일까지 입학신청서를 제출해야 했다. 첨부서류들도 찬찬히 준비했다. 김나지움 졸업에 13년이 걸리는 독일 학제 때문에 승욱이 사학과에서 3학기를 마친 것은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으로는 1년이 부족한 것을 커버할 수 있었다. 입학허가증이 나오면 학생비자로 바꾸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 새로운 학문,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 속에 알 수 없는 불안도 자리했다. 입학허가증을 기다리는 동안 독일어 성서 읽기에 더욱 열중했다.
어머니에게는 항공엽서로 빼꼭히 알렸다. 엽서 그대로 크기가 아니라 BY AIR MAIL / PAR AVION / MIT LUFTPOST,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위아래로 스탬프로 인쇄되어 있는 얇고 얇은 우편봉투였다. 봉투를 펼치면 열리는 안쪽 전체가 편지지였다. 이냐시오 신부님처럼 예수회 신부님을, 한국 신부님을, 가롤로 신부님을 만났고, 많은 조언을 들었고, 내년 여름학기에는 알프스 자락 신학대학에 입학하려고 한다고. 신학 공부만 하는 것이라고, 사제직이 아닌 교직에 갈 것이라고. 한국에 우편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우체국에 가서 전화도 드렸다.
투틸로, 알았어. 이냐시오, 아니, 가롤로 신부님 고마우셔라이. 신부님이 인도해주시는 길이람서, 엄니는 그저 기도만 할겨. 어째등가 밥 잘 묵고···. 밥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북독일에서는 흔하던 굴라쉬 접시가 그리웠다. 그렇다고 밥이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정말 밥도 입학허가서도 아니었다. 기도만 하시겠다는 어머니였다. 지난해는 3월 윤달이 들어서 이번 설은 양력 2월에 가서야 10일에야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기일은 1월 말일이었다. 그 날이면 입을 열어 말씀을 하시지도 입을 열어 음식을 먹지도 않으시는 어머니. 며칠이 가도 다만 조용하시다가 까치설에 이르러서야 배시시 웃어주시곤 했는데. 웃어 보일 외아들 승욱 투틸로가 멀리 있는 설날에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 계실까. 승욱은 1월 말에도 설날에도 전화를 드렸다.
투틸로, 또 전화냐. 엄니 괜찮은디 그라냐. 대보름까진 할 일도 밖에 내다볼 일도 없는디. 기도만 하면서 그냥 이라고 있제이. 먼 걱정이냐이. 그래, 이모, 이모도 가끔 오시제. 겨울엔 여가, 촌이 나스제. 군불 때는 요런 따순 디가 어디 있가니.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의 소식이 전보로 왔다. 전보가 왔다는 사실 자체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영어문자로 왔다. 맘 펠 다운. 돈 써프라이즈. 허트 리틀. 콤 투틸로. 신부님이 틀리게 쓰셨을 리 없었지만, 시골 우체국에서는 서툰 철자로 내용 전달만 타이프를 해서 보낸 것 같았다. 어머니가 넘어지셨다고! 다치셨다고! 우체국으로 달려 가서 전화로 당숙한테 들은 소식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사실 전보부터가 그랬다. 어머니는 정말로 성당에 열심이셨제. 니도 알제. 눈이 와도 가셨다. 때늦은 눈이 쌓인 길에서 넘어지셨다. 엉덩뼈 뭐라냐 고관절을 다치셨고, 사진 찍고 검사도 다 했고, 수술 날짜 잡혔다. 수술은 간단하다네. 그 다음은? 다음 말씀은 없으셨다. 설명 보다 침묵이 훨씬 겁이 나게 했다.
고관절이 어딜까. 알아보니까 고관절 골절은 노인들에게서 흔한 사고였다. 가볍게 넘어져도 부러진다는. 말도 안 돼, 어머니는 노인 아니잖아. 승욱은 서둘러 간단히 짐을 꾸렸다. 일단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어머니 곁에 있어야 했다.
베네딕트 보이언 신학대학에서는 곧 입학허가서가 도착할 것이다. 서류가 부족하다는 연락은 없었으니까. 규모가 크지도 이름이 난 대학도 아니라는 이상한 안도감은 과신이었을까. 비행기에 앉아서 의심은 없었다. 이번에 한국 가서는 한국어 신학책들을 구비해 오자. 일단 기본 지식들을 알아야 돌아가서 독일어로도 잘 하지. 아차, 가롤로 신부님께 연락드릴 정신도 없었네. 승욱은 어머니 때문에 정신 나갔던 자신을 책망했다. 신부님께 연락드리는 일이 무에 시간 드는 일이라고!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드려야지. 아니, 도착하는 대로 어머니에게 달려가야지. 비행기의 지정 속도가 있겠지만 유럽을 향했을 때에 비해 무척 느린 것만 같았다. 몸이 뒤틀렸다. (끝)
---- 전남여고문학 2025, 11호, 271-2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