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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1.07 빙하가 녹았다
  2. 2023.01.07 시간
수필-기고2023. 1. 7. 08:12

 

빙하가 녹았다

 

 

     빙하가 녹았다. 초여름 폭염으로 알프스 산의 빙하가 무너져 내렸다. 산 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졌고,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눈과 흙이 쏟아져 내렸다. 얼음 덩어리가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며 눈사태를 일으켰다. 맙소사, 산골 부락은 아니었지만 등산로까지도 덮쳤고, 사람들이 숨졌고 실종되었다.

     등산객 몇 사람이 숨진 일에 지구인들은 꿈쩍도 안한다. 몇 사람의 사망사고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더 많은 죽음들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우와 토네이도 할 것 없이 변화된 지구 환경으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자연재해라고 치부하는 이 사고들도 엄밀하게 보자면 지구인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역작용이다. 하물며 인재는 어떠한가.

 

     먼 데 말고, 작년 한 해 우리나라의 산재사고 사망을 보자. 3월에 KDI(경제정보센터)가 내놓은 자료다. 산재 사망자가 연간 828명이라고 하니, 하루에 두세 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했다. 이러저러 산재 통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죽음을 더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말을 하다 보니 죽음을 숫자로 말하는 자체가 죄송스럽다. 숫자에 애도를 곱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빈다. 다행인지 올해 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즈음하여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고사망 사례는 감소했다고 한다. 공동생활에서는 엄격한 법이 필요한가 보다.

     재해 유형으로는 떨어짐과 끼임 등 재래식 사고가 여전히 많다고 한다. 건설업의 기계와 장비에 의한 사고들이다. 밥 벌러 나갔다가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영안실로 조퇴 당하는 사람들이다. 왜소한 몸으로 구릿빛보다 더 붉게 탄 얼굴들, 외국인 노동자들의 죽음도 간간히 보고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사탕수수 농장 등에 홀려서 떠났던 우리들 누런 얼굴들의 수모를 새삼 일깨운다.

 

     순간에 저승으로 떠난 이 사람들은 마지막 그 순간에 힘들었던 삶을 원망했을까. 증오심을 지닌 채 죽었다면 천국에 가지 못할까. 어느 지옥으로 갈까.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 편을 보면 형벌은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되돌려 받는 형식이다. 콘트라 파소 – 정반대의 고통이란 이 말은 인과응보와 통한다. 지상에서의 악행과 똑같이 대응하는 지옥의 형벌이라면, 떨어짐이나 끼임으로 죽어간 그들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방치한 위인들이 받을 형벌이다. 기도교적 의미에서 신을 몰랐다 하더라도, 예수 탄생 이전의 선인들처럼 천국에는 갈 수 없으되 지옥의 천국이라 할 림보에 평화롭게 머물 것이다. 지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림보에서 시작하여 음욕 지옥 - 식탐 지옥 – 탐욕 지옥 – 분노 지옥 - 이단 지옥 - 폭력 지옥 – 사기 지옥 – 배신 지옥으로 깊어지는 층을 보면서 마지막 최악의 지옥에 들어가 있다는 위인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최종지옥인 코키투스 호수의 쥬데카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와 더불어 카이자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롱기누스가 악마 루시퍼의 발아래 눌려있다. 쥬데카라는 이름은 이스카리옷 유다에서 유래했으니, 말 그대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들이 가는 지옥이라고 한다. 다만 신성모독죄보다 더한 죄가 배반과 배신이라는 점이 기이하다. 21세기 자본의 시대에 생명을 배신한 죄, 안전에 무감각한 기업과 제도의 담당자들을 단테라면 최종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하다. 상상으로나마 이처럼 복수 같은 것을 꿈꾸는 글은 ‘시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용서가 될까.

 

     우리나라에도 콘트라파소 같은 것이 있었다. 인과응보라는 개념으로 있어 왔다. 전생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내세에서의 행과 불행이 생긴다고 믿는 태도이다. 인과응보 개념이 불교에서는 윤회사상의 원리가 되며, 덕 또는 업보와 연관된 실천철학에 가깝다. 악한 행위는 업보가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참회하고 덕을 쌓아 업을 없애면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선 내세에 대한 믿음이 줄고, 무엇보다도 정의라는 개념조차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라고 하면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이거나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의는 예로부터 왜곡되어 왔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견해는 이미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했다. 정권이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피통치자에게 정의로운 것이라고 공포하고, 이것을 어기는 자는 부정의한 자로 간주하여 처벌한다고. 물론 대화의 상대편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변호했지만, 글쎄다. 유사 이래 법도 정의도 늘 강자의 편이 아니었던가. 약자는 비겁한 채로 강자의 선의(?)에 기댈 뿐이고.

     강자가 어찌 약자의 설움을 알랴.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은 곱잖고, 권선징악도 헛일, 선하면 바보짓이고 악해야 겨우 사는 모양새를 내는 것만 같다. 경쟁과 대결에서 어떻게 선하냐고! 내 팔꿈치는 억수로 강하게 뻗도록만 훈련되었는데!

 

     S대학교는 만일 내가 거기 들어가면 누군가 한 사람은 못 들어가는 것이네여…….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3 아이, 그의 아이가 중3이 되도록 세상은 여전히 살벌한 경쟁터다. 아니, 더 공포스럽다. 무감각이라는 바이러스가 공기 속 무서운 전파력으로 온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우리는 다만 유능한 기능인을 흠모하며 살아가고 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커녕 무참히 사라지는 생명조차도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안톤 슈낙의 글에서 끝났다.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도 이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 이런 이미지에 슬퍼했었다니!

     알프스에서 빙하가 녹았고, 눈사태가 등산로를 덮쳤고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푸집에 노동자가 끼었다. 외국인이었다. 결국 죽었다. 그것들은 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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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빙하가 녹았다」, 『마음이 머문 순간들』, 이대동창문인회, 206~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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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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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2023. 1. 7. 07:35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간다. 돌아오지도 않는다. 어느새 그런 어른들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 나도 어른이 된지 오래다. 법으로야 스무 살이면 어른이라지만, 결혼을 하고 애기엄마라 불릴 때부터는 확실히 어른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순백이의 할머니가 되었다. 이 시간까지 살면서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일들을 비슷하게 겪었다.

     코로나도 비껴가지 못했다. 남편이 먼저 직장에서 감염되어 왔고, 양성 판정을 받자마자 바로 농막으로 퇴근해서 혼자 지내겠다고 했다. 남편이 혼자서 일주일을 지낼 일은 걱정할 일이 1도 없다. 나더러 살기 싫으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혼자 사는 일은 걱정 없는 남자다. 부지런하고 아는 것도 많다. 나는 아직 음성이었지만 조심하느라 복지센터에 알리고 일을 쉬었다.

     그렇게 집안에서 혼자 뒹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생전 처음인 것처럼, 며칠을 그렇게 낮밤 없이 혼자 지냈다. 눈을 뜰 때도 혼자, 잠을 청할 때도 혼자였다. 조금 이상했다. 적막 같은 낯선 무엇이 방안 가득했다. 낮엔 텔레비전 볼륨을 크게, 채널도 마음대로 돌렸다. 수다 떠는 모임들이 그립긴 했지만, 핸드폰은 무제한이다. 세탁소며 편의점이랑은 틈만 나면 떠들고, 젓가락 언니랑도 딸네 문제가 해결되어서 맘 놓고 수다를 떨었다. 언니는 여전히 징징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신장이식 후유증에 더해서 이런저런 의학지식들을 다 전해주었다. 간호조무사 경력이 어딘가. 그래도 심심해서 살짝만 입었던 옷들도, 이불도 세탁기에 넣어 돌릴까 했다.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안 할래! 그러고서 뒹굴기로 했다.

 

     문제는 그 뒹구는 시간이었다. 덩그러니 시간만 있으니 어리둥절했다. 밤에는 적막감이 한없이 부풀었다. 느닷없이 사과나무 묘목이 벽보다 더 높이 다가왔다. 처음부터 이상하게 내가 꽂힌 그곳, 딱 발목만큼의 자리에 뭉툭한 접목부분이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뿌리에서 발목까지 잘린 대목은 잊혀진 채로, 그 윗동강 접수라는 우수품종이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나는 어딘가 잘렸다가 접붙여진 곳이 없을까. 발과 몸통과 얼굴이 다 같이 하나일까. 발과 몸통은 그런대로 맞는 것 같은데, 내 얼굴이 문제였다. 늘 다른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니. 왜 그들이 우선인데? 그런데 그들이 우선이었다. 내가 그들을 더 조심하고 살아왔으니까. 왜냐고? 왜 그랬냐고?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어쨌거나 일찍이 그렇게 세뇌되었나 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그 말은 좋은 사람이 되라는 말이었다. 우리 집, 우리 마을, 우리 학교에선 그렇게 가르쳤다. 착하게 맘먹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보상이 따른단다. 괜찮은 믿음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믿음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믿음과 쾌활함을 무기로 물 흐르듯 살아온 내가 왜 갑자기 고민녀가 되나. 나는 처음 생각대로 좋은 사람이 되었나. 좋은 사람이라면 통째로? 내 몸통과 내 얼굴은 하나일까 서로 다를까 궁금해, 라고 하면, 그게 말이 돼? 남편에게 이런 기분을 흘린다면 당장의 반응이 그럴 것이다. 그게 말이 돼?

 

     그래, 깜깜 밤중에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냥 나야. 평범하게 사는 나. 단순한 나. 시간을 넘나들며 나와 우리 가족, 남편, 딸, 손녀를 생각했다. 아차, 지난해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초상을 치르고 다시 일을 시작했던 첫날 오전 수급자 할머니는 유난히 쌩쌩했다. 방문요양서비스가 없는 날에도 가까이 사는 딸이 둘이나 있어서 실은 큰 걱정 없이 지내신다. 이 집 엄마는 살아계시는구나. 눈물이 살짝 돌았다. 오후 어르신 집에서는 보호자 할머니가 이상한 말을 했다. 지 선샘 이제 고아가 되었네요, 무조건적으로 지 선샘 믿어줄 사람은 이제 없으니. 듣고 보니 너무도 옳은 말이었다. 부모가 다 떠나셨으니 고아다. 더 이상 기댈 데가 없구나. 현실적으로는 친정에 별로 기대지 않고 살아왔지만, 무조건적으로 나를 믿어줄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기에 그날 밤에는 한없이 울었다. 어머니 잘 보내드리고 와서 새삼스레 왜 우느냐고, 남편은 달래려다 말았다. 그냥 슬쩍 피해버렸다.

     고아가 되었네요! 그 시간이 도망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남편이란 서로 피를 나눈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확실하다. 지금도 두근거리게 좋다가도 더럭 겁이 난다. 주변에 보면 이혼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들을 보면 남편과 아내 사이란 찰떡일망정 용접까지는 아닌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자녀라는 끈이 있는데도, 그래서 완전히 끊어질 것 같지 않은 인연인데도, 마음은 끊어지면 그만인 것 같아 보였다. 시간이 범인일까.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마음이라는 것이, 자를 수도 없어 보이는 그것이 어느 순간 가장 예리하게 잘린다.

 

 

     잘리고 쪼개진 마음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주변의 이해하기 힘든 여러 사정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이혼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 이혼을 했다가 합친 집도 있다. 시간은 그 중에서도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경우에 멎었다. 남편이 갓 퇴직한 직장 상사의 모친상에 다녀와서는 이상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었다. 썰렁했어,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남편은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쉽사리 감성팔이를 하는 적이 없는 남편인지라 조금 의아했다. 상사의 모친상이라면 젊어 요절한 상가도 아닐 텐데 웬 유난일까. 그런데 그럴 만했다. 그 모친이 요양병원에 계신지 한 달도 채 안 돼서 돌아가셨다 했다. 웬 일로 밤중에 멀리 계단에 넘어진 채, 한참만에야 병원으로 옮겨서. 남편은 요양병원 이야기가 나오면 일단 침울해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내 마음도 그건 그렇다.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는 내가 시부모님을 돌보지는 못하니까.

     우리 노인복지센터의 동료직원들도 대부분 친정 시댁 부모님들이 계신다. 부모님이 방문요양서비스를 받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그렇더라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방문요양서비스를 스스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따로 사는 부모님을 일반 수급자들에게 하듯이 방문요양서비스로 맡는 경우는 더러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는 친정 부모뿐이다. 시부모님 관련해서 돈 받기가 어색해서일까. 그건 아니다. 급여야 복지센터로부터 받는 것이니 무슨 상관인가. 아무튼 시부모님을 방문요양으로 돌보는 동료는 못 보았다. 세상이 다 그래! 이것이 변명이 될까.

     남 말을 해서 뭣하나. 나는 그럼 왜 못하는가. 웬만하면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에 약한 나는 왜. 처음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보더라도 답은 마찬가지다. 일단 어머님 상태가 심했다. 변명이 아니다. 뇌졸중 후유증이 심해서 음식을 콧줄에 의존하는 상태인데 누가 선뜻 집에서 맡을까 말이다.

     나야 물론 콧줄급식에 능숙하다. 옛날에는 간호조무사가 일반주사도 다 놓았다. 그러니까 위관 뚜껑을 열어 주사기를 연결하거나 미리 공기를 주입하여 새는 소리 등을 점검하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레빈튜브를 최소한 3주 4주마다 교체하려면 그때마다 진짜 병원에 모셔가야 한다. 그 때마다 자잘한 소동이 날 수도 있다. 만일 배에다 경피위루술을 받으면 콧줄 대신 뱃줄을 달게 되고, 교체 시기도 1년 정도니까 시간을 벌 수는 있다. 하지만 경피위루술이라는 시술은 대형병원에 가서 해야……. 이유를 들려면 한정 없다. 더구나 간호조무사 경력 중 후반 십여 년은 건강관리과에서 지내다보니, 치료 중인 환자를 실제로 간호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건강검진 보조를 주로 하다보면 점점 사무직이나 비슷해졌는데 뭘.

 

     냉장고에 가서 찬물을 들이켰다. 찬물 마시고 맘 돌릴 일은 아니다. 이제 와서 집으로 모셔와 돌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결국 집에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을 어떻게. 어머님을 모셔 온다는 말은 아버님까지 오셔야 한다는 말인데 어떻게. 사는 지역이 다르니 우리가 이사를 들어갈 수도, 맞벌이를 그만 둘 수도 없는 걸 어떻게. 막상 모시겠다고 살림을 통째로 바꾸고 나섰다가 무한 책임을 질 수도 없잖아. 모두들 마음 불편한대로 현실을 그냥 견딘다. 어머님은 몇 년을, 놀랍게도 몇 년 동안을 침대에 누워만 계신다. 그러는 사이 아버님도 함께 같은 요양병원에 가 계신다. 아들 5형제 누구 하나 부모님을 모셔가진 못한다. 나이 드신 부모란 살짝 금이 간 계란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옮기려고 만지면 깨져버릴 것 같아서 망설이며 그냥 두고 보기만 하는. 또 온전한 계란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조만간 깨지고 말.

 

 

     다시 그 시간이다. 남편이 문상 다녀와서 쓸쓸해하던 날, 남편은 밑도 끝도 없이 상사에게 욕을 해댔다. 남자 새끼도 아냐! 친하게 지냈던 형 같은 사이라면 한 대 칠 뻔 했어.

     세상에나, 욕이 나올 만도 했다. 집안 속사정 같은 것은 다들 모르고 지냈었는데, 누군가 슬쩍 수군거리더란다. 사모님이 사모님이 아녀, 라고. 상복을 입고 단출한 장내를 장악하고 있는 사모님이 사모님이 아니라면, 고인의 다른 며느리란 말일까. 그게 아니라 그 선배랑 같이 살고 있는 사모님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야, 못 왔겠지. 더구나 아직 현직에 있는 직원이라잖나. 그러니까 직장 내에서 눈이 맞아 여자 집으로 옮겨 산 것이 십 수 년, 몇 년 정도가 아니라 십 수 년이라잖나. 몸만 옮겨갔다는 게, 말이 돼? 요번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본집에 냅두고 나왔다지 뭔가. 바람나서 나오면서 어머니랑 각시를 한 집에 두고 나오다니! 말이 돼?

     남편의 십팔번이 오랜만에 연속으로 터져서 우선 픽 웃음이 났다. 바람피운 남편이 아예 새 여자랑 합쳐서 그 집 애들이랑 살고, 아내더러 애들과 살라 했다니. 그것도 웃겼다. 웃을 일이 아닌데 웃겼다. 웃는다고 핀잔 들을까 봐 삼키려던 웃음이 목에 걸렸다.

     잠깐만, 바람나서 집 나가면서 자기 어머니를 그냥 내버려두고 나갔다고? 얼른 아무 말이나 했다. 아니, 그러니까 바람나서 나간 남편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라고? 그게 살아질 일이야? 스물 네 시간 남편이 원망스러울 일인데, 그 어머니랑 한 집에? 허구한 날 어떤 얼굴로! 어머니도 제 명에 못 사셨겠다!

     글쎄, 90 다 되셨다던데. 속이 문드러져도 생명과는 무관한 것인지. 설마 내가 살아있는데 지가 곧 돌아오겠지, 그런 심정일 수도 있나. 바람기도 삼 년이면 꺾인다는 말이 있더만, 것도 아니데. 십 년도 훌쩍 넘었다니. 장례식장에 애들 다 있더만. 다 큰 딸들도 보이고 아들도 있더라고. 애들한테 무슨 본이 되겠어!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애들 결혼한다는 청첩은 못 들었던 것 같네. 애들이 결혼 같은 걸 하고 싶겠나. 직장에서는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부부가 부부가 아니라니, 참. 초상집이 냉랭하더만.

 

     내가 별 대꾸를 하지 않자, 남편도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남의 이야기이고. 그 순간 장례식장에서 사모님이라 불리는 사람, 고인의 며느리의 얼굴이 다가왔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지만 얼굴은 있었다. 내 상상력 부족인가, 평범한 얼굴이 떠올랐다. 찢어진 마음과는 다른 좋은 얼굴로, 어머님! 계속 그렇게 부르면서 살았을까. 밥상에 마주 앉아서 시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얼굴은 어떤 얼굴이었을까.

     그 시간들을 견디면서, 마찬가지로 호적에만 남았다는 시어머니라는 여자에 대한 연민을 나누었을까. 어머님 또한 시골 본가에는 새색시 때 잠시 살았을 뿐이랬으니. 직장 따라 도시로 나와 살던 몇 해도 되지 않아, 본가에 새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 눌러앉은 남편. 누가 아내일까. 호적에 버젓이 살아 있는 아내, 나 몰라라 본가에서 살고 있는 아내. 흑역사의 시간. 반면교사라는 말도 있던데, 실제로는 콩 심은 데 콩 나는가 보다. 시어미 생과부도 모자라 며느리 생과부까지. 아파트 평수가 넓어봤자 그게 그거지, 어떻게 이 구석 저 구석으로 피해 다니면서 살았을까. 며느리 마음으로는 마지막 몇 달을 못 견디고 요양병원에 모셨던 것이 후회스럽겠지. 누구나 그러지. 다 먹은 밥 조심!

     임종은 코로나 시대의 병원 상황으로 아무도 못 했을 터. 이런 분은 하느님이 천국을 예비하셨겠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간 사람. 속 좋은 사람. 모르지, 그 세월 내내 아들을 원망했을지도. 아니, 이런 아들을 낳아두고 일찍 도망가 버린 남편을 죽어라 더 원망했을지.

 

     사실 그 요양병원은 내가 아는 언니가 팀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계단에서 넘어진 후유증으로 며칠 못 가서 돌아가신 환자 때문에 병원이 좀 힘들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입원 사나흘부터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질러대서 보호자랑 상의해 수면제 처방도 했었는데. 어떻게 밤중에 복도 끝 계단까지 나가서 넘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랬다. 그런데 그 환자가 바로 그 환자였다니! 내색 않고 모르는 척 했지만 좀 놀랐다. 시간이 흐르다보면 세상은 좁다.

     요양병원은 코로나 첫해에 환자들이 여럿 감염되어 사망까지 나오는 바람에 운영이 어려워지기도 했더란다. 병원 내 의료진들 사이도 감염이 퍼졌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도 바뀌고, 이제는 다시 입원이 늘어 넘쳐서 직원들을 계속 뽑아야 한단다. 나한테도 맨날 들어오라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냥 알바가 좋다. 말은 쉽게 알바라고 하지만, 이 일은 알바가 아닌 정식 직장이다. 4대 보험이 되는 일자리다. 다만 꼬박 8시간 근무가 아닌 알바 개념이라서, 그 또한 내게 알맞다. 에이, 혼자서 자유를 누리는 시간에 일터 생각이라니! 시간은 시간의 꼬리를 먹는가 하면 다시 내어놓는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올 것은 반드시 온다. 그것 또한 어김없는 시간의 작용이다. 자가키트에서 양성반응이 떴다. 피씨알 검사를 받았고, 보건소에 등록되었고, 복지센터에도 다시 알렸다. 목소리가 엉뚱하게 변해서 핸드폰 수다도 끊어야 했다. 목이 긁힌 듯 아팠고, 기침을 하면 멈추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열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코로나 처방 대상은 아닌 것 같았다. 미각장애, 설사나 두통이 있을 수도 있다는 팍스로비드나, 역시 설사나 오심 그리고 어지러움이 동반될 수 있다는 라게브리오 같은 본격 치료제를 미리 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건강에는 자신 있는 편이다.

     나도 따라 걸리고 나니까 남편은 맘 편하게 집으로 왔다. 환자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둘이서 집안에 24시간 격리, 그것은 생각 외로 그리 편한 것은 아니었다. 반가울 줄 알았는데 왜 그럴까. 평소에 야근이나 빈 저녁이면 썰렁하니 심심했고, 남편이 보고 싶지 않았나. 바로 엊그제만 해도 적막감으로 헛것도 보였고. 그런데 나갈 수 없이 갇혀 있어야한다는 생각, 붙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편감을 주는 것 같았다. 24시간 동안 또 얼굴 하나를 만들어야 했다. 뭐라더라, 페르소나! 얼굴이 여러 개인 나,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좋은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시간은 어김없이 제 갈 길을 간다. 그렇게 법적인 격리기간이 끝났지만, 근무는 우선 반쪽만 시작했다. 오전 수급자 할머니는 원래도 씩씩하시고 또 자녀들도 곧 바로 와달라고 해서 곧 바로 나갔다. 하지만 오후 어르신 집에서는 일주일을 더 쉬자고 했다. 여러 가지로 고위험군이니까. 그렇게 조각난 일상들이 완전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거의 3주가 걸렸다.

 

 

     고생 많았어요, 지 선샘!

     오후 보호자 할머니의 인사였다.

     고생이라뇨! 그냥 놀았어요, 별로 많이 아프지도 않았고요. 3주나 쉬어서 죄송해요!

     3주, 그러네요. 3주면 병아리가 알 깨고 나오는 시간이니, 어때요, 알 품은 동안 잘 자랐나요?

     자라다뇨? 지은이가 지은이죠. 그간 어르신은 좀 어떠셨나요?

이 양반, 심심해했어요. 점심 동무도 없고 산책 동무도 없으니까. 산책은 이런저런 핑계로 안 나갈 때가 더 많았어요. 그런데 좀 놀라운 일, 말이 좀 늘었어요. 친구들 이야기도 하고, 떠나버린 친구들은 이제 못 만난다는 것도 알고, 더러는 혼동해도 꽤 많이 기억해요. 뉴스에도 좀 집중하고.

     다행이시네요.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으니까 어르신 생각이 나더라고요. 웃을까 말까 그런 표정도 떠오르고.

     지 선샘, 좋은 사람이에요. 우리 노인들 생각을 다 하고. 나 좀 봐! 우선 밥부터 먹읍시다. 어서 모시고 와요!

 

     어르신은 언제나처럼 거실에 있었다. 들어오면서 바로 인사를 했지만, 그뿐. 식탁에 가자고 해야 식탁에 오신다. 앗, 어묵볶음이었다. 동그란 어묵을 어슷 썰고 생표고와 간단한 야채를 넣어 볶았다. 케첩 뿌리면 더 좋아한다고 했죠? 그렇게 묻는 것을 보면, 어묵 좋아하는 나를 위한 반찬이었다.

     어르신이 식사 후 살짝 낮잠을 청하는 습관은 3주가 지났다고 달라졌을 리가 없다. 그 사이 할머니랑 커피타임이다. 주전자에 들어있는 아메리카노를 함께 따라 마시려다가 부러 믹스커피를 털어 부었다. 믹스커피는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할머니가 믹스커피를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나를 위한 배려다. 작은 일이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계란도 사야하고……. 할머니는 시장에 가련다고 장바구니를 들고 일어서 나갔다. 어르신 머리맡 쪽 의자에 가서 앉아 잠이 깨기를 기다리면 된다. 스르르 자는 잠이니 내 기척을 느끼시면 곧 깨어나실 것이다.

     소파 옆으로 에어컨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우리 집에 비하면 더 넓은데도 에어컨은 하나뿐이다. 노인들은 더위를 덜 타는지, 이 집은 여름에도 에어컨을 켜는 일이 별로 없다. 우리 집에는 에어컨 문제가 생겼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에어컨이 필수인 것 같다. 우리도, 그러니까 주인집도 거실 에어컨 하나로 사는데, 전월세로 내놓은 앞집, 그러니까 3층 한쪽을 보러 왔던 젊은 부부가 안방에 에어컨이 없다고 투덜거리다 그냥 갔다.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저기 안방에 에어컨 들여 놔야 하나? 내가 구시렁거렸지만 남편은 들은 체 만 체였다. 전기세는 자기들이 낼 것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모르는 체. 그렇게 에어컨이 필요하면 제 집 사서 온 데 방방마다 에어컨 놓고 살지 뭣 하러 셋집을 보러 다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더위를 못 견디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만일 내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자기 속맘을 들은 것 같아서 무안해할 것이다. 내가 남편과 맞비교를 하자면 여러 면에서 훨씬 미련한 편인 것을 안다. 하지만 세월이라는 시간은 내가 남편의 속맘도 웬만큼은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아차, 이 무슨 자뻑!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다아! 결국 남편의 속마음도 모르는 것인데.

 

     할머니는 계란만 사 들고 곧 돌아왔다. 어르신의 낮잠은 길어지고 나는 다시 계란을 따라 식탁으로 갔다.

     우린 부러 큰 계란을 사는데요. 유난히 작은 꼬마 계란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크건 작건 계란 고르는 건 완전 맘대로네. 좋은 세상이야.

     좋은 세상까진 모르겠고요, 보호자님 좋은 분이세요. 저 오랜만에 온다고 어묵 해주시고! 점심 너무 많이 먹었어요. 다이어트 해야 하는데.

     다이어트는 무슨. 사람이 통통해야 보기 좋죠, 성격 넉넉해 보이고. 허벅지 근육이 건강 바로미터라고 맨날 선전에…….

     아, 근육. 그건 그렇다더라고요. 저는 근육은 좀 돼요. 남편이 운동 엄청 좋아하다 보니까. 전엔 둘이서 탁구도 치고 그랬어요. 건물 지하실에 탁구대랑 운동기구 많아요. 그런데 보호자님은 병원이랑 시장 말고는 아예 나가는 일이 없으니, 언제 걷고 언제 근육량을 늘리죠? 저 왔을 때라도 나가셔서 아파트라도…….

     비육지탄(髀肉之嘆)이라고, 모르죠? 젊은이들이라서.

     비육?

     넓적다리에 살이 붙는 것을 탄식한다는 말이죠. 사람이 일 없이 무위도식하면서 살만 찐다는 한탄. 세상이 변해서, 요새는 죽어라 운동을 해서 살은 빼고 근육을 키운다죠. 운동이나 무위도식이나.

    그러니까 찌라고요, 찌지 말라고요? 참, 어르신은 생각 보다 잘 드시는 편인데 살은 좀.

     노인들은 살 안 찌나 봐요. 좋다는 음식은 해주려는데도 역부족.

     무슨 말씀, 충분히 좋은 음식들인데요. 진짜 좋은 사람이세여!

     순진한 우리 지 선샘! 세상에 좋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좋은 사람 그런 건 없다는 말일까. 설마.

 

 

     좋은 사람 궁금해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지. 《좋은 사람》 영화도 있던데요. 최근 영화.

     어머, 영화관에도 가세요? 실로 궁금해서 물었다. 어느 틈에 갈까. 완전 붙박이면서.

     꼭 보고 싶은 건 보러 가죠. 《oo의 시간》은 개봉되자 예약부터 했는걸요.

     맙소사. 말문이 막혔다. 더러 영화관에도 간다고? 이 꽉 막힌 시간을 살면서? 대체 우리는, 나는, 영화관에 가 본 것이 언제인가. 노인들보다 못한 삶이네. 이미 노년에 접어들고서도 맨날 노후대책 걱정이나 하면서.

     《좋은 사람》 그게 무슨 영화제에 나왔던 작품인데, 제목 땜에 궁금했어요. 기다려도 넷플리스에는 안 뜨고, 그냥 유튜브 영화로 봤는데…….

     뭐야, 넷플릭스니 유튜브 영화니, 이 할머니는 별 걸 다 한다 싶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요,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는 좋은 사람, 좋은 선생님이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되는 보통 사람 이야기더군요. 진정이랍시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뭐 그런 피상적인 말을 학생들에게 하죠. 본인 스스로 그렇게 사는지는 관객의 눈으로는 의문이고요. 알코올 문제로 이혼했고…….

     거기도 이혼…….

     학생 지도가 꼬여버린 날 하필 아내가 키우는 딸아이를 잠시 맡았는데, 맙소사, 딸애가 불행한 사고를 당하는 결말이니, 살면서 이것저것 안 되는 이야기들 투성이더라고요. 부모에게서 버려진 학생을 교사로서 믿어주지도 못했고, 불행한 결혼생활은 상대를 탓하고, 딸아이의 사고도 남 탓을 하고. 사람들은 다 비슷해. 따로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결론. 그럴 줄 알았어요. 아, 주인공은 적어도 좋은 사람이 되고자 생각은 하는 사람이지만.

 

     이혼 말이 나올 때부터 알았다. 제목은 좋은 사람이었고, 결말은 좋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영화 이야기를 들었으니 뭐라고 대꾸는 해야 했다.

     좋은 사람 되기가 생각만큼 쉽진 않겠지요.

     지 선샘은 좋은 사람이라니까요. 일단 남의 일들 성근지게 봐주기도 하고, 남편도 사랑하고.

거야.

     하지만 진짜 좋은 사람이려면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신을 돕는 일을 해야죠. 의기소침하거나 불행감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죠.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면, 바깥세상을 향한 긍정적인 힘이 날 리 없으니까요. 나는 그런 긍정 에너지가 부족해서 좋은 사람 틀렸어요. 우선 행복하지 않거든요.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지 않았다는 후회감이 젤 크죠.

     후회라면.

     우리 때는 자기 자신이 되라! 그런 가르침은 없었어요.

     사람이 되라고, 그건 다른가요? 

     다르죠! 사람 중에서도 너 자신이 되라고! 그랬어야죠. 너는 수많은 모래알 중 하나일지라도 다른 모래알들이 너는 아니다. 너 모래알 하나. 세상에 하나뿐인 고유한 모래알. 다른 모래알들이 멋있어 보여도 힘 세 보여도 그 다른 모래알이 될 수가 없단다. 너는 그냥 너 모래알이야. 너 모래알을 사랑해. 너 모래알을 존중해. 너 모래알을 너만큼 사랑하고 존중해 줄 다른 모래알은 없어.

     모래알이 모래알이…….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 원하는 무엇인가를 위해 돌진하면 욕먹기 일쑤였어요. 무조건 희생하기, 우선 집에서부터 다른 형제들에게 희생하기를 덕목으로 배웠으니, 자기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로 생각되었죠. 겹치면 등록금도 먼저 포기해야 좋은 사람이고, 많이 버릴수록 좋은 사람. 옛날에는 밥부터도 포기했고.

     하긴 옛날 배경 드라마 보면, 자기 밥 안 먹고 남동생에게 먹이는 누나…….

     문제는 배가 고프고서는 자존감이 안 생긴다 그거죠. 그렇다고 지금 잘 사는 세상엔 배고픔이 없냐, 그건 아냐. 또 다른 배고픔이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죠. 절대로 채울 수 없는 배고픔, 상대적 박탈감이요. 공허감이라고 할지.

     공허감, 무슨 말일까. 듣고만 있을밖에.

     있어도 있어도 없는 느낌말이에요. 일테면 명품 백에 꽂혔다! 아끼고 아끼며 적금까지 들어가면서 그 하나를 위해서 몇 년을 살았다는 처녀, 그런 뉴스도 있더만요. 하필 그것을 편취당했다나, 뭐 그런. 그 문제가 아니라, 그 하나를 그 백을 마침내 가졌다 치고, 그 다음에 고픔이 그칠까 그게 문제죠. 다른 사람들 보면서 다른 또 하나에 꽂히고…….

     뭐야, 나도 딸애가 결혼할 때 명품 백을 선물 받았다. 원채 명품을 모르니까 실은 그 상표도 잘 모르지만, 어디 결혼식장이나 부부 모임 때는 꼭 들고 나갔다. 일단 명품이니 알아들 봐 주겠지, 뭐 그 정도였다. 딸애도 최근에 명품 백을 샀다고 기뻐했다. 시동생 상견례를 앞두고 면을 세우고 싶었겠지. 결혼 때랑 그 다음은 기간제 그만 둘 때 실업급여를 받았으니 아예 제 수입이 없는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윗동서인데 그럼! 그런 일들에 신이 났다. 남들 하는 만큼 하고 사는 게 어때서!

 

 

     혼잣말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향한 욕심이 부글거리는 동안은 늘 고픈 것. 치맥을 삼겹을 킹크랩을 배불리 먹더라도, 식탐을 놓지 않는 한 늘 고파요. 식탐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보면 음욕보다 더 아래 지옥에 가는 죄라요.

     식탐이 죄라고요? 지옥편이라면…….

     내 말은 거기서 끊겼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 대꾸할 말이 없었다. 희한하다. 노래도 아니고 무슨 신곡, 요즘 세상에 시시콜콜 이름도 모를 책을 읽는 사람이 어딨냐. 나도 그래도 2년제 대졸인데 저 할머니는 4년제라 쳐도 할머닌데, 참. 알뜰신잡에나 내보낼 사람이다. 난 그런 프로도 정신없어서 잘 안 보지만.

     거기엔 지하 9층으로 지옥들이 있는데, 식탐은 지하 3층, 탐욕은 지하 4층 그래요. 암튼 나는 죄다 뭐다 그런 건 잘 모르고, 죄 보다도 공허감이 문제예요. 좋은사람콤플렉스에 걸린 우리들, 다른 사람들한테는 미소를 띠고서도 속으로 공허감은 여전하죠. 남과 비교하고, 부족감에 그 불행을 남 탓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그런 느낌으로 자신을 미워하는데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나. 좋은 사람 코스프레죠.

     코스프레, 좋은 사람 가면이란 말인가 싶었다. 아니다, 가면은 페르소나라 했었지. 흉내라는 말인가. 난 특별히 부족감도 불행감 같은 것도 없고, 그저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뭐가 문제인가. 아리송하다. 모르는 채로 수긍이 갔다. 이 할머니 말은 설득당하기 쉽다.

     진정으로 욕심을 줄이면, 엷어지면 좀 좋아. 탐욕은 헛것이고 허망임을 느껴야 줄겠죠.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에요. 우린 좋은 사람이 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그냥 태어났고, 그냥 사는 거예요. 편한 마음으로. 쉽게 말하면 그래요.

     어렵게 말하면요?

     무위진인(無位眞人) 그런 말도 있죠. 지위의 상하나 귀천 없이, 궁극적인 경지를 깨달아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자유인 같은 것. 좋은 사람 되라는 가르침에서도 자유로운.

     정말 어려운 말이네요. 암튼 사람 사이 어떻게 차별이, 아니 차이가 없나요. 세상에 이웃이 넘치고 사람 천지인데. 사람들 속에서 돋보이진 못해도 무시당하면서 살아선 안 되죠. 좋은 사람이다, 사람이 좋다는 말 정도는 듣고 살아야죠.

     대꾸를 하면서도 말들에 체한 것 마냥 속이 부글거렸다. 나더러 좋은 사람이라던 이 할머니는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니! 좀 갖춰서 살면서 남들에게 친절하며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게 말이 돼지! 좋은 사람 되라는 것 말고 무슨 가르침이 더 좋을 수 있어!

 

     사람이 좋다 - 그게 진정 좋은 건 아녜요. 좋은 거짓 같은 것. 가끔은 까칠하게, 맘 가는대로.

     네? 까칠하게 살라구요?

     아, 젊은이는 그대로 쭈욱 좋은 사람 해요! 난 좀 맘 가는대로 살겠다는 거죠. 다른 눈들의 기준으로 살아온 시간들이 아깝다는 말. 우리 지 선샘이 나중에 나중에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암튼 까칠한 것이 어때서. 다른 사람들 불편할 일 아니면 맘대로 까칠하게. 까칠한 진실, 이미 까칠한 시간에 접어들었어요.

     까칠한 진실이라니. 좋은 사람 포기하고? 아니, 까칠한 좋은 사람. 그게 말이 돼? 속으로 남편 흉내를 내봤다.

     여전히 참아야 할 때도 있겠죠. 옛말에, 종이 어질기를 기대해선 아니 되고 주인이 어진 것이 가상타 했대요, 울 아부지 말씀!

     엥? 이 정도에 이르면 도망쳐야 할 때였다.

     어머나, 왜 이리 오래 주무시나? 어르신 열을 좀 재볼까……

 

 

     어르신, 어르시인! 그 동안, 저 안 오는 동안 낮잠만 주무셨어요? 슬슬 일어나 보셔요. 오늘은 첫 날이니 요 앞에 살짝만 나가보시게요.

      …….

     말은 없으신데 손이 꼬물거렸다. 들릴 정도가 되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우선 자몽 좀 까드릴까요? 자몽 좋아하시잖아요. 잠도 달아나실 거고. 잠은 밤에 주무세요.

     팔목을 살짝 잡아 흔들 때서야 눈을 뜨셨다. 다섯 손가락을 다 움직여 일으켜 달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따뜻한 등을 일으켜드리니 곧장 일어나셨다. 턱을 드시는 것은 물을 달라는 신호다. 차가버섯 끓인 물이다. 반 컵을 드셨다. 사기그릇이나 유리그릇을 쓰는 이 집에서 어르신 물 컵은 등산용 스테인리스다. 떨어뜨려도 깨지지 말라고. 평소 출입이 많았던 시절에 등산배낭에 달고 다니셨다는 그런 컵이 여럿이다. 종이컵 안 쓰고 스테인리스 컵을 쓰려는 그런 주의가 무슨 소용, 인지기능 문제는 위생관리와는 무관하다. 암튼 쉽고 어렵고, 가볍고 무겁고, 집안일은 온전히 할머니 몫인 것 같았다. 인지기능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이 어르신의 사는 일은 그게…… 종일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켜놓고 듣는 둥 마는 둥. 신문 잡지도 보는 둥 마는 둥. 서재에 잠시 가서도 늘 닫힌 노트북은 지나치고 창밖을 내다보거나, 얇고 두꺼운 책들을 만지작거리거나. 또 무엇이 있을까. 아, 산책!

 

     나 가 보 시 게 요.

      …….

     날 씨 가 참 좋 아 요.

​     두 눈을 끔벅이면 그렇다는 신호이다. 그런데 신호 대신 입을 여셨다.

     지 선생, 어디 갔었나?

     아, 그게요. 예.

     예가 무슨 답인가. 어르신은 채근하는 눈을 크게 뜨셨다.

     산 책, 산책 하시면서 이야기하시게요.

     그렇게 산책 준비에 들어갔다. 안방으로, 화장실로, 침대에 앉아서 옷 매무새 갖추기, 아직은 얇은 바람막이를 하나 더 걸치고, 모자를 챙겨 쓰면 그 다음에 마스크 챙기기. 다른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습관, 흰 장갑을 집어들었다. 코로나 전부터도 외출 때는 면장갑을 꼈더란다. 산책이나 병원 출입이 아니라, 일반 외출 때에도. 노인 치고 위생 관념이 높다. 티비에서 손 씻는 6단계가 자주 나오니까 그 6단계를 꼬박 지키면서 손을 씻는다. 병원이라도 다녀왔을 때는 욕실로 직행, 샤워다. 갈아입을 옷들이야 누군가 챙겨 내놓겠지, 하는 심사다. 가만 보면 두 분 다 세밀하다. 두 사람이 다 세밀하면 피곤할 텐데. 이 두 분이 평소에 서로 피곤했을까. 무슨 망상? 뭣 때문에 내가 이 분들에 관해서 관심을 갖나. 퇴근 태그를 찍고, 몸조심하셔요! 하고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면, 필연적으로 다시 만날 관계는 아니다. 물론 당분간, 특히 내일이야 다시 만나겠지만, 상황은 언제라도 달라질 것이다. 산책하면서 장갑 위로 잡는 손의 결속력은 이 시간만 유효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잎 무성해진 나무들을 올려다보면서 느린 산책을 했다. 산책을 도왔다. 오른손에 힘을 주시려고 내 왼손에 기대는 힘을 기꺼이 받으며 걸었다.

     저 그동안 코로나 걸렸어요. 그래서 못 왔어요. 죄송해요.

      …….

     못 들으셨나, 크게 말했는데. 나더러 어디 갔었냐고 묻던 생각에서는 벌써 멀어졌나 보다. 코로나란 단어를 일부러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5분 전의 생각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큰일은 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시간은 옛날이나 같다.

 

     내가 다른 생각으로 해찰하는 것을 느꼈는지, 어르신이 담장 쪽으로 심어진 찔레꽃 앞에서 멈추셨다. 한창 어우러져 꽃을 피우고 있는 찔레꽃은 찔레꽃이다. 누군가 찔레한테 장미를 접목하지 않아서, 찔레는 찔레로 사는 것이다. 장미 얼굴을 갖지 않음 어때! 찔레는 찔레일 때 온전하고 행복한 거야. 이 어르신을 만난 이삼 년의 시간 동안에 담벼락 아래 찔레는 상당히 넓게 퍼졌다. 향기는 외려 저쪽 담장 끝 치자나무에서 건너왔다. 멀리서는 보이지도 않는 자잘한 꽃잎에서 무슨 향기가 저리 뿜어나올까. 향기로 사는 치자꽃은 향기로 목소리를 냈다. 나도 답했다.

     어르신, 저기 저쪽 치자꽃 보러 가실래요? 오라고 부르는데요.

     둘이서 손을 잡고 걸었다. 부녀 같아 보일 게다. 노인과 데이트하게 해서 미안해요, 어르신이 농담을 하셨다. 데이트? 그래, 이 시간의 데이트에 충실하자. 이 어르신의 시간에 진심으로 함께 하자.

 

     갑자기 주말이 기다려졌다. 농막에 가면 애처로운 사과나무도, 흐드러져 있을 작약들도 만나겠지. 무엇보다 높게 자란 모감주나무 아래를 남편과 손을 잡고 걸어야겠다. 그 시간에 가서는 내가 오른손으로 남편의 맨살 왼손을 잡고서. 아니다. 그건 아니다. 그에게 내 손이 필요한 시간인가 알아보고 싶다. 알아야 한다. 내 시간의 의미를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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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국제PEN광주 20호, 338~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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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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