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2013. 11. 2. 18:18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창립 50주년 기념

 

 

 

 

 2013.10.31. 늦은 5시

 이화여자대학교 ECC관 이상봉홀

 

 

 

 

 

 

                                                                                            이화뉴스에서 펌

 

  의자 줄: 나(1회), 남재은(2회), 이정화(8회), 이난희 교수, 이병애 교수,

             김선욱 총장, 김영호 교수, 조종남 회장, 이재돈 학장, 차범근 내외.

  왼쪽: 맨 앞 최민숙 교수(5회), 다음 엉거주춤 박종재 아나(40회), 끝 유현자(18회).

 

 

 

 

 

   1회: 나, 김영애, 정수자(대구), 이병애 교수님, 김영호 교수님, 민용자, 김경희

식사 끝이라서 미리 간 친구들도 있어는데...

 

 

       

         답사 - 서용좌(1)

 

          이화뉴스에서 펌

  공로패 증정

 - 이정화 동창회장(8) to 남재은(2), 민용자(1)

 

 

 

답사: 추억의 인사말씀 -

 

  2013년 시월의 마지막 날, 우리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 창설 50주년을 맞아, 이렇게 여러 귀빈들 와주시고, 김선욱 총장님, 이재돈 학장님, 또 조종남 총동창회장님께서 축하말씀들 해주셨으니,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말씀 밖에 더 드릴게 없겠습니다. 특히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이 자리를 준비하신 독문과동창회 임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격려해주신 독문과 교수님들,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멀리에 산다는 핑계로 힘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우리 동창회장님께 듣기로는, 오늘 제 역할은 독문과 초창기 추억이나 풀어놓는 것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중후한 분들의 뒷순서인 것을 몰랐다가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1963년 새 봄, 우리들 열여덟 아홉 살 소녀들은 고만고만한 꿈들을 안고 이화 교정에 들어섰습니다. 선배도 없는 독문과 신입생들의 낯섦. 낯설고 서툴기야 어디 그 봄부터였겠습니까?

 

  기억은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 저장됩니다.

  입학시험 치르던 꽁꽁 언 겨울, 지금 보아선 아기자기 아름다운 캠퍼스는 당시 초중고 12년을 코앞에서 걸어 다녔던 시골아이의 눈에는 거대한 미로에 다름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점심시간 후 다시 시험장을 향하다 처음 오르막길에서 운동화 끈 한쪽이 풀리고 말았으니 낭패였습니다. 미욱한 성정에 끈을 매고 가는 것과 그냥 좀 천천히 걷는 것 사이를 고민하면서 터덕거리며 고사장 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사방은 쥐 죽은 듯 시험이 한창이었죠. 그때 갑자기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학생, 여긴가요?" 하시면서 열린 문 사이로 빈 책상을 가리키시며 들여보내주셨습니다. 시험지를 뒤집어 글자들을 올려놓으시며, 어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감동의 눈물이 눈을 가렸고, 시험지는 뿌옇게 변했습니다. 하필 전공과목 독일어였는데, 1번 문제 ‘voll의 반대말’ 고르기부터 틀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김영호 교수님의 너그러움 덕택으로 이화독문과 식구가 되었습니다. 선배가 없어도 우리는 잘 자랐습니다. 무감독시험으로 학점을 주셨던 특별한 경험까지, 우리를 무한정 신뢰해주셨던 고 한영기 교수님, 고 강희영 교수님, 저 개인적으로는 석박사과정까지 배우면서 전부를 다 베껴먹어 고맙고 죄송한 이병애 교수님, 대학원 시절 만난 양혜숙 교수님, 또 이난희 교수님…… 다시 50년 전으로 돌아가자면, 여름에도 까만 스카프를 쓰고 신입생 우리들에게 독일어로 말을 걸어서 정신 번쩍 들게 하시던 고 전혜린 선생님, 사상계에 『북간도』를 연재하시면서 교양국어를 가르쳐주신 소설가 고 안수길 선생님, 그리고 구약성서에선 배울 것이 없노라고 버릇없는 리포트를 써내도 괘념치 않으셨던 기독교문학 교수님들…… 그분들 모두는, 병아리도 닭도 아니었던 우리를 성인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병애 교수님의 독일어발음이 시냇물소리 같다고 느꼈기에 ‘시냇물 Bächlein’이라는 이름의 스터디그룹도 만들었고, 그 친구들을 50년 동안 만나며 살았고, 오늘 이렇게 여기 모여 뿌듯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서 하던 대로 공부만 하며 살면서, 주변을 돌보지 못하고, 저 자신만 무탈한 삶을 살아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남습니다.

 

  삶을 살기 - 인간의 특성 중 하나가 강한 적응력이라고 합니다. 적응력은 인간을 지구상의 생물체들 가운데 우뚝 서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적응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적응해야할 세상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오늘의 문화에 이르지 못하고 한낱 약육강식의 동물계에 파묻혔을 것입니다.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 - 그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동인이라고, 여기 이화독문과에서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또 만나서, 우리의 젊은 날의 고향 이화 캠퍼스와 독어독문학과 시절을 추억하게 될지 기약 없으나, 내빈 여러분, 존경하는 스승님들, 사랑하는 동기들과 후배 여러분들의 앞날에 하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이쯤해서 어눌한 추억의 말씀을 마치렵니다. 감사합니다.

1회졸업생 서용좌

 

 


[부록]

 

 이병애 교수님께서 찍으셔서 가져오신 사진 -

 2010년 김영호 교수님 팔순 때  

 

 여겨 볼 것 - 3년 전의 내 옷, 자세히

 

 

 

  오늘 50주년에 입은 옷과

  블라우스까지 일치, 어쩌나!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3. 1. 9. 21:31

손잡이 없는 찻잔의 운명

 

 - 하인리히 뵐

 

  이 순간 나는 창문턱 밖에 서서 천천히 눈으로 뒤덮이고 있다. 지푸라기 대롱은 비눗물 속에 얼어붙어 있고, 참새들은 내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사람들이 흩뿌려준 빵 부스러기를 놓고 싸우는 거친 새들, 나는 내 목숨 걱정에 떨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늘 떨어야 했었지만. 이 살찐 참새들 중의 하나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창턱에서부터 아래의 콘크리트바닥으로 떨어져 - 비눗물은 얼어붙은 타원형 뭔가로 남겠고, 지푸라기는 꺾이고 - 내 조각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

 

  그저 맥이 빠져서 나는 뿌옇게 변한 창유리를 통해서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들이 가물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 안에서 부르는 노래를 겨우 나직이 듣고 있다. 참새의 야단법석 소리가 모든 소리를 뒤덮고 만다.

 

  물론 안에 있는 저들 누구도 내가 정확하게 스물다섯 해 전에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스물다섯 살이라는 것이 단순한 커피 잔의 나이로는 대단한 나이임도 알지 못한다. 우리들 종족의 피조물들이라 하여도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유리진열장 속에서 그저 가물거리고 있는 놈들은 우리들 수수한 찻잔들보다는 엄청 오래 산다. 아무튼 내가 확신하건대 우리 가계에서는 단 하나도 더 살아남지 못했다. 양친, 형제자매들, 심지어 내 자식들도 이미 오래 전에 죽었는데, 그 반면에 나는 함부르크의 창틀위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참새들을 동무삼아 내 스물다섯 살 생일을 보내야 한다.

 

  우리 아버지는 케이크 접시였고 우리 어머니는 귀한 버터 통이었다. 내겐 형제자매가 다섯으로, 찻잔이 둘, 받침접시가 셋이었다. 허나 우리 가족은 겨우 몇 주간 함께 지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찻잔이라는 게 어려서 갑자기 죽는다. 그러다 보니 내 두 형제와 사랑하는 누이 하나는 벌써 두 번째 크리스마스 날 식탁에서 깨져 버렸다. 곧 이어 우리는 사랑하는 아버지와도 헤어져야 했다. 받침접시인 내 누이 조세피네와 함께 어머니를 동반하고서 우리는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서 잠옷과 때밀이 수건 사이에서 우리는 로마까지 갔다. 거기서 우리 주인어른의 아들, 고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아들에게 봉사하게 된 것이다.

이 생애의 시기는 - 나는 나의 로마시절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 내게 흥미진진했다.

 

  우선 율리우스가 - 그 학생의 이름이 율리우스였다. - 날마다 나를 카라칼라욕장, 그러니까 거대한 공중목욕탕의 잔훼로 데리고 나갔다. 그곳에서 나는 나와 내 주인을 일터로 늘 동반했던 보온병과 곧 친구가 되었다. 그 보온병은 훌다라는 이름이었고, 율리우스가 삽을 들고 작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몇 시간이고 풀 속에 함께 누어 있곤 했다. 나는 나중에 훌다와 사랑에 빠져서 로마시절 두 해째에 그녀와 결혼했다. 물론 내가 보온병과 결혼하는 것이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로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지만. 어머니는 참으로 기이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담배통으로 쓰인다는 사실 때문에 모욕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누이 요제피네가 재떨이로 강등된 것에 대해 극도의 모멸감을 느낀 것과 비슷했다.

 

  나는 아내 훌다와 몇 달을 행복하게 살았다. 우리는 함께 모든 것을 배웠다, 율리우스가 배우는 것들 말이다. 아우구스투스 영묘, 아피아 가도, 포로 로마노 - 그러나 그중 마지막 것은 내게 슬픈 추억으로 남았다. 거기에서 내 사랑하는 아내 훌다가 로마의 불량소년이 던지 돌팔매에 맞아 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훌다는 비너스 여신상에서 나온 주먹만 한 돌멩이 조각으로 인해 죽어버렸다.

 

  계속해서 내 생각을 따라올 마음이 있는 독자님 - 손잡이 없는 찻잔에게도 고통과 생의 지혜가 있음을 시인해줄 마음이 있는 독자님에게라면 나는 참새들이 벌써 빵부스러기들을 쪼아 먹어 버렸으므로 내게는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씀드릴 수 있다. 또한 그 사이 뿌옇던 유리창에 스프접시 정도 크기의 매끄러운 부분이 생겨서 내가 방안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분명하게 보고 있고, 또 코를 유리창에 박고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내 친구 발터의 얼굴도 보고 있음을. 발터는 아직 선물을 나누기가 시작되기 전 세 시간 전에 내 몸에다 비눗방울에 쓸 물을 만들었었는데, 이제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고, 그 애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는 발터가 선사받은 완전 새로 뽑은 장난감기차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도 발터는 고개를 젓고 있고 - 그리고 창유리에 다시 김이 서리는 동안에 나는 안다, 내가 적어도 반시간 후에는 따뜻한 방안에 있게 되리라고…….

 

  로마시절 향유했던 기쁨은 아내의 죽음뿐 아니라 그보다도 어머니의 괴팍함과 누이의 불만으로 흐려졌다. 둘이는 우리가 장 속에 함께 앉아있는 저녁이면 그들의 사명을 오해받는 데 대해 불평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내게도 자의식 강한 찻잔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굴욕이 닥쳐왔다. 율리우스가 내 몸으로 화주를 마시다니! 어느 찻잔에 대해 ‘그 찻잔으로 술을 마셨다네!’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인간에게라면 ‘그 인간 나쁜 데 출입했다네!’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이젠 엄청 많이 술을 마셔대는 잔이 되고 말았다.

 

  나에게는 굴욕의 시절이었다. 그 시기는 매우 길었고, 마침내 케이크 한 상자와 내 사촌들 중 하나인 달걀 담는 컵과 그 덮개와 더불어 뮌헨에서 로마로 보내졌다. 그날부터는 술은 내 사촌이 담당하게 되었고, 율리우스는 나를 한 여인에게 선사했다. 그녀 또한 율리우스와 같은 목적으로 로마에 온 사람이었다.

 

  내가 삼년 동안 우리의 로마 거실의 창틀을 통해서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바라볼 수 있었다면, 이제 이사를 했고 나머지 이년 동안은 새로운 거실에서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교회를 바라다보았다. 이 새로운 삶에서 나는 또 어머니로부터 떨어지긴 했지만, 내 원래의 생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커피를 마시는 잔이 된 것이다. 나는 하루에 두 번 깨끗이 닦여서 예쁘고 작은 장 속에 서 있곤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역시 굴욕은 모면되지 않았다. 그 예쁘고 작은 장 속에서의 동무는 후르츠였다니! 온 밤을 그리고 많은 낮 시간 동안 - 그리고 그 2년간 내내 - 나는 후르츠와의 동무를 견디어야 했다. 훌레방 종족이고, 그녀의 요람은 휘르체니히의 훌레방 선조대대로의 저택에 있었다. 그리고 아흔 살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아흔 해를 제대로 산 것은 아니었다.

 

  내 질문, 왜 그녀는 항상 장 속에 서있는가 하는 것에 그녀는 거만스럽게 대답했다, ‘후르츠로 무언가를 마실 수는 없지 않아!’라고. 후르츠는 아름다웠고, 부드러운 회백색으로, 자잘한 녹색 점들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놀라게 할 때마다 그녀는 창백해져서 녹색 점들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특별한 악의가 없이도 나는 그녀를 자주 놀라게 했다. 우선 프러포즈를 함으로써. 내가 그녀의 가슴과 손을 잡으면 그녀는 너무도 창백해져서 나는 그만 그녀의 생명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녀가 다시 약간의 색깔을 되찾기까지는 몇 분이나 걸렸고, 그러면 그녀는 속삭였다, ‘그런 소릴랑 다시는 하지 말아요. 내 신랑이 에어랑엔에서 유리 진열장 안에 서 있다오, 나를 기다린다오.’ ‘대체 얼마 동안을요?’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십 년 되었어요. 우리가 1914년 봄에 약혼을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우린 여태 떨어져 있답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의 안전금고에서 전쟁을 살아남았어요. 그는 에어랑엔에 있는 우리 집 지하실에 있었고요. 전쟁 후에 나는 유산상속 논란의 결과 뮌헨의 유리 진열장으로 가게 되었고, 그는 같은 유산상속 논란의 결과 에어랑엔의 유리 진열장으로 가게 되었지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디아나가’ - 그게 우리 주인님 이름이었다. - ‘에어랑엔의 유리 진열장 여주인의 아들 볼프강과 결혼을 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에어랑엔의 유리 진열장 속에서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된다오.’

 

  나는 그녀를 다시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 침묵했다. 왜냐하면 나는 물론 오래 전에 율리우스와 디아나가 서로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폼페이 탐사여행 중에 율리우스에게 말했었다, ‘아, 이 보세요, 내게 찻잔이 하나 있는데요, 그걸로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랍니다.’

 

  율리우스가 말했어요, ‘아, 제가 그런 곤경에서 당신을 도와드려도 될는지요?’

나중에는 내가 더 이상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지 않았기에 후르츠와 서로 잘 이해하며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저녁에 함께 장 속에 있을 때면 그녀는 항상 말했다, ‘아, 내게 뭐라도 이야기 해봐요, 하지만 가능하면 너무 평범한 것 말고요.’

 

  내 몸으로 커피, 코코아, 우유, 포도주, 물 등이 마셔진다는 사실을 그녀는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러나 내가 율리우스가 나를 가지고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다시 발작을 일으키고는 감히 (내 겸손한 의견으로는) 불가한 표현을 하곤 했다, ‘바라건대 디아나가 이런 평범한 녀석에게는 빠지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나 모든 것은 마치 디아나가 이 평범한 녀석에게 빠져버린 것 같아 보였다. 디아나의 방에 있는 책들은 먼지가 쌓여갔고, 타자기에는 몇 주 동안 단 한 장의 종이가 끼어져 있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겨우 반 쪼가리 문장이 쓰여 있었다, ‘빙켈만이 로마에 갔을 때…….’

 

  나는 너무도 성급히 씻기곤 했고, 심지어 세상일이라곤 어두운 후르츠까지도 예감하기 시작했다, 에어랑엔에 있는 그녀의 약혼자와의 재회가 점점 불가사의한 일이 되고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디아나는 에어랑엔으로부터 편지들을 받기는 하지만 이 편지들을 답장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이상해졌다. 그녀는 - 이 사실은 사실 머뭇거리면서 기록하는데 - 내 몸으로 포도주를 마셨고, 내가 저녁에 그 이야기를 이 후르츠에게 했더니 그녀는 거의 기절을 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는 말했다, ‘나는 찻잔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짓을 해대는 여성의 소유로 남을 수 없어요.’라고.

 

  그녀는, 착한 후르츠는 자신의 소원이 얼마나 빨리 성취될 수 있을지 모르고 있었다. 후르츠는 전당포업자에게로 넘어갔는데, 디아나는 ‘빙켈만이 로마에 갔을 때…….’라고 시작된 문장이 있는 종이를 타자기에서 빼버리고 볼프강에게 편지를 썼다.

 

  나중에 볼프강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디아나는 내 몸으로 유유를 마시면서 아침을 먹는 중에 편지를 읽었다. 나는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에겐 내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 단지 저 얼빠진 후르츠가 문제였어.’ 나는 그녀가 『고고학 입문』이라는 책에서 전당포영수증을 꺼내어 그것을 봉투 안에 넣는 것을 보았다 - 그래서 나는 그 착한 후르츠가 그 사이 에어랑엔에서 신랑과 합쳐져서 유리 진열장 안에 서있게 됨을 예견해도 좋았다. 그리고 나는 볼프강이 품위있는 아내를 발견했으리라 확신한다.

 

  나에게는 묘한 해들이 이어졌다. 나는 율리우스와 디아나와 함께 독일로 돌아왔다. 그들은 둘 다 돈이 한 푼도 없었고, 나는 그들에게는 값진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나를 가지고 물을 마실 수도 있었으니, 사람들이 기차역의 샘에서 마실 수 있을 그런 맑고 깨끗한 물말이다. 우리는 에어랑엔으로도 프랑크푸르트로도 가지 않았고 함부르크로 갔는데, 그곳에서 율리우스는 은행에 일자리를 얻었다.

 

  디아나는 더 아름다워졌다, 율리우스는 창백했다. -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맙소사 약간 더 만족스러워 했다. 내 어머니는 우리가 저녁에 부뚜막에 서로 나란히 서있을 때면 말하고 했다, ‘그래 뭐, 어쨌거나 마가린이니까……,’ 그리고 누이는 심지어 약간 교만해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소시지 접시로 사용되었으니까. 그러나 내 사촌 계란 컵은 계란 컵에게는 드물게 마련된 것 같은 이력을 쌓아갔다. 그는 화분으로 사용된 것이다. 데이지꽃, 민들레, 꼬마 마가렛들에게 그는 잠깐 체류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디아나와 율리우스가 계란을 먹을 때면 그들은 계란을 받침접시 가장자리에 놓아두곤 했다.

 

  율리우스는 점점 말이 줄었고, 디아나는 어머니가 되었다 - 전쟁이 닥쳤다. 그리고 나는 가끔 지금쯤 다시 은행의 안전금고에 들어가 있을 후르츠를 생각하곤 했다, 비록 그녀가 내게 가끔씩 모욕을 주긴 했을지라도, 나는 그녀가 안전금고 안에서라도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디아나와 함께 또 가장 큰 아이 요한나와 함께 나는 전쟁을 뤼네부르거 하이데에서 보냈다. 나는 율리우스가 휴가차 왔다가 내 몸을 오랫동안 젓고 있을 동안이면 그의 사색적인 얼굴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디아나는 율리우스가 커피를 그리 오래도록 젓고 있는 것을 보고서 가끔 놀라기도 했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뭘 하는 거예요 - 당신 지금 몇 시간 째 커피를 젓고 있잖아요.’

 

  디아나도 율리우스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했는지를 망각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참 묘한 일이었다. 그들이 나를 여기 이렇게 밖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고양이 때문에 위협을 받으면서 꽁꽁 얼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니 - 반면에 발터는 나 때문에 울고 있는데. 발터는 나를 좋아했다. 그 애는 내게 이름까지 붙여주며, ‘이반처럼 마시기’라고 불렀다 - 나는 그 애에게 비눗방울 만드는 통이 되고, 그 애의 동물들을 위해서 먹이그릇이 되고, 꼬마 목각인형들의 욕조가 되어준다. 나는 그에게 물감이나 풀을 섞는 그릇이 되고…… 나는 그가 지금 선사받은 새 기차로 나를 실어 나르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발터는 격하게 운다. 나는 그 애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날 저녁 그들에게 보장해주고 싶었던 가정 평화가 걱정이다. - 그렇지만 인간이란 얼마나 빨리 늙어버리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율리우스는 손잡이 없는 찻잔 하나가 갓 나온 장난감기차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그는 망각했다. 그는 완고하게 발터에게 나를 다시 꺼내라고 말린다. - 나는 그가 야단치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는 발터만이 아니라 디아나까지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디아나가 우는 것은 내게 편치 않다. 나는 디아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내게서 손잡이를 깨뜨린 것이 바로 그녀였다. 뤼네부르거 하이데에서 함부르크로 이사하려고 나를 포장할 때 그녀는 그만 내 몸을 두껍게 싸는 것을 잊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손잡이를 잃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값어치가 있었다. 당시에는 손잡이 없는 찻잔 하나도 여전히 값어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살 만한 찻잔들이 널리게 되었을 때 나를 버리려고 했던 것은 율리우스였다. 그러나 디아나가 말했다, ‘율리우스, 당신 정말로 이 찻잔을 버리려고 - 이 찻잔을?’

 

  율리우스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미안!’ - 그렇게 해서 나는 살아날 수 있었고 씁쓸한 여러 해를 면도용 비누통으로서 봉사하게 되었다. 우리 찻잔들은 면도용 비누통으로 낙착되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나중에 도자기로 된 머리핀 그릇과 재혼을 하게 되었다. 이 두 번 째 아내는 게르트루트였는데, 그녀는 내게 친절했고 현명했으며, 우리는 꼬박 2년 동안 욕실 유리선반 위에 나란히 서있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아주 갑자기. 안에서는 여전히 발터가 울고 있고, 나는 율리우스가 감사할 줄 모르는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 나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다. 이 인간들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곳 바깥은 고요하다. 눈이 내리고 - 고양이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깜짝 놀란다. 창문이 열리더니 율리우스가 나를 집어 든다. 나는 그 손의 악력에서 그나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느낀다. 나를 깨부수려는가?

 

  그런 순간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누구나 찻잔이 되어보아야 한다. 자신이 벽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을 예감하는 순간이 어떤지를. 그러나 디아나가 마지막 순간에 나를 구했다. 그녀는 나를 율리우스의 손에서 빼앗아 들고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했다. ‘ 이 찻잔을 당신은…….’ 그러자 율리우스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미안, 나는 그만 너무도 흥분해서…….’

 

  발터는 진작 울음을 그쳤다. 율리우스는 진작 신문을 들고 난롯가에 가 앉았다. 발터는 율리우스의 무릎에 앉아서 내 몸에서 아까 얼었었던 비눗물이 다시 녹는 것을 보고 있었다. 빨대는 벌써 꺼냈다. - 그리고 나는 손잡이도 없이 얼룩투성이에 낡아빠진 채로 수많은 갓 새로운 물건들 틈에 서있다. 나는 평화를 다시 가져온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에 자부심에 휩싸인다. 비록 그것을 방해했었던 존재가 나였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지만, 그렇지만 그게 내 탓이란 말인가, 발터가 새 기차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

 

  나는 일 년 전에 죽은 게르트루트가 아직 살아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아 보이는 율리우스의 저 얼굴을 그녀가 봐야만 했을 것을…….

 

...................................................................

원저 : Schiksal einer henkelosen Tasse (1952), Heinrich Böll: Werke in 10 Bänden. Hrsg. v. Bernd Balzer. Köln 1977/78. (Romane 2: S. 57-63)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2. 8. 23. 23:45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하인리히 뵐 / 서용좌

  안팎으로 열렸다 닫치곤 하는 현관문의 통풍 속에서 성냥 한 개비가 꺼졌다. 두 번째는 마찰면에서 부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변호사가 라이터를 대주었으니 친절했다, 보호하듯이 손을 그 앞에 대고서. 그래서 그녀는 드디어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둘 다 좋았다, 담배도 태양도. 그건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영원, 어쩌면 끝없이 긴 마루의 영원성과 불변성이 시계바늘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밀려닥치는 군중, 방 번호를 찾아든 사람들은 슈트뢰셀의 여름 바겐세일을 연상시켰다. 이혼과 여름 바겐세일에서 고르는 목욕수건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두 경우 모두 줄서기인데 - 그녀 생각에는 - 이혼의 경우에 마지막 결정이 더 빨리 고지되는 것이고, 그녀는 빨리 긍정적 답을 듣고 싶었다. 쉬뢰더 대 쉬뢰더. 이혼. 나우만 대 나우만. 이혼. 블루츠 대 블루츠. 이혼.

 

  이 친절한 변호사가 이제 정말 말할 것인가, 그가 말해야 하는 것을? 그가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말을? 그는 그 말을 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물론 그는 그녀가 전혀 힘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 말을 친절하게 말했다. 그 말을 친절하게 한 것은 정말 친절한 일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다음 출두시간에 다시금 법정에, 다시금 줄을 서야 했으니까. 클로츠 대 클로츠. 이혼.

 

  여름 바겐세일에서도 그건 비슷했다. 참을성 있게, 점잖게, 밀치지 않고, 그렇지만 긴장해서 기다리기. 새 목욕수건을 한 장이나마 닳도록 쓰기에는 너무도 늙은 부인이 한 다스 모두를 집어들 때까지, 그리고 이어서 다음 고객이 목욕가운 셋을 집을 때까지. 결국 슈트뢰셀 상회에서는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방식이 있는 셈이다. 뭐든 금방 매진되어버리는 도떼기시장 같은 싸구려 가게는 절대 아니었다. 결국 변호사는 여러 시간을 그녀 곁에 머무를 수 없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이외에는 다른 할 말도 없는 곳에서. 계단 맨 위쪽의 위치는 그녀에게 또 다른 위치를 생각나게 했다. 7년 전에 있었던 시청 앞 맨 윗 계단에서의 위치를. 부모님, 들러리들, 시부모님, 사진사, 이름가르트네 사랑스런 두 꼬마,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던 우테와 올리버. 꽃다발, 하얀 장미로 장식한 택시, 귀에는 여전히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소리가 남아 있는데, 그리고는 택시를 타고서 두 번째 예식장으로 갔었지,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때는 교회 식으로 했다,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신랑도 거기에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적인 결과 때문에 빛을 발하면서, 약간은 당황해서. 그리고 이날의 두 번째 성공적인 결과 때문에 분명 자부심을 지녔다. 바로 이 계단 앞에서 이 도시의 가장 힘든 주차장들 중의 하나인 이곳에서 차를 세워둘 장소를 발견해냈다는 사실에서. 여러 다른 종류의 성공적인 결과들이 이혼소송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었다.

 

  이제 죽음이 아니라 법정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것이 그렇다고 덜 엄숙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혼이 고지되는 법정이 죽음을 결정했다면 - 그렇담 왜 최소한 장례식이 거행되지 않았을까? 시신을 안치해놓은 단, 문상객들, 추도 연설은 왜 없었나? 아니면 최소한 결혼을 되감는 예식은? 사랑스런 작은 아이들, 이번에는 아마도 헤르베르트의 아이들일 테고, 그레고르와 마리카는 그녀에게서 드레스 옷자락을 떼어내고, 신부의 화관을 머리에서 벗겨내고, 하얀 옷을 평상복으로 바꿔주고. 장례식까지는 아닐지라도 공식적으로 결혼식 벗기기 같은 뭔가는 있어야 했다.

 

  물론 그녀는 그가 여기에서 그녀를 기다릴 것을 알았다. 죽음이 결정된 마당에 무의미한 토론의 하나일 뿐인데. 그녀가 아들애를 데리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나온 이후로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음을 그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할 뿐이다. 돈도, “함께 취득한 재산”에 대한 그녀의 지분도, 심지어 명명백백히 그녀 소유였던, 친정 할머니의 유산인 루이 6세 - 몇 세인가는 똑같은 거지? - 때 의자들마저도 원치 않았다. 아마도 그는 어느 날 그녀의 대문 앞에다 그것들을 가져다 놓을 것이다, “불분명한 소유관계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녀는 의자들은 물론 마이센 도자기 그릇들도 (서른여섯의 한 세트), 결코 어떤 “가치보상”도 원치 않았다. 아무 것도. 그녀는 참 아들애를 데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잠정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서 다른 여자랑 - 로테였던가, 아니면 가비였던가? - 아무튼 동서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로테인가, 아니면 가비이던가 (아니면 코니였나?) 결혼식을 하게 되면, 그때 가서는 아들애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나누어야 할 아이 머리 위에 검을 들고 있는 솔로몬 왕도 없었다.) 양육권과 관련해서 이 구역질나는 세부사항들은 정리되고 결정되었다. 그러면 의무적인 방문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를 정 떼기로 내몰 것이다. (“정말로 생크림을 더 먹지 않으련, 그 새로 산 아노락은 정말 네 마음에 들 거야, 물론 모형비행기도 사주지.”) 하루 동안, 이틀, 아니면 하루 반, 그리고는 아이를 다시 데려다 준다. (“아니, 난 정말 네게 새 아노락을 사줄 수가 없구나, 첫 성찬식에도 안 돼 - 아니면 그게 입교식이었나? - 휴대용 텔레비전도 아냐, 안된다고.”)

 

  담배 한 대 더 피울까? 안 피우는 게 낫다. 이 반회전문이 야기하는 회전력은 그녀로 하여금 새 담배를 피우던 담배에 잇대어 불을 붙이고 싶게 만든다, 지금 예쁜 라이터를 든 이 친절한 변호사가 그녀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하지만 그러한 작은 사소한 일이 헤픈 인상을 강조할 것이고, 궁극적으로 아이 문제에 이르면 분명히 탓을 입게 될 것이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 습관은 벌써 이혼 서류에도 기입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듯이 그녀 자신이 간통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사람에 앞서서, 그 역시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혼서류에 창부라고 기입되어 있었다. 여자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서는 안 좋은가, 피울 수 없는가, 피우면 안 되는가, 왜 안 좋은가, 왜 할 수 없는가, 왜 안 되는가 등 헛소리는 반대편 변호사로부터 그녀의 “교육 수준”에도 합당하지 않는 “사이비 여성해방론자적” 야단법석이라고 탓을 입었다.

 

  그가 계단으로 올라오지 않고 초대하는 듯이 팔 흔드는 동작만 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녀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피우던 담배에다 붙이지 않고 새 성냥으로, 이번에는 여름 바겐세일 (같은 법정의) 반회전문이 끊임없이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은 성냥불로 불을 붙였을 때,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드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목사님도 등록청 관리도 오지 않았다면, 눈물에 젖은 어머니들 시어머니들도, 사진사도, 사랑스런 꼬마들도 오지 않았다면, 최소한 장의사를 오라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장의사라면 무엇인가를 - 무엇을? - 관 속에 넣어 끌고 가 화장을 해서 어딘가에 - 어디에? - 은밀하게 흩뿌릴 것인데.

 

  아마도 그는 그녀 때문에 약속시간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호커 대 호커와의 합병협상들 말이다, 거기서는 인사문제들을 들어야 했을 것인데). 그러나 그는 정말로 의자 몇 개 때문에 호커 대 호커 협상들을 놓치려들까? 그는 이해를 못했다, 그녀가 그를 증오하는 것이 아님을, 그에게서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음을,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져버린 것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낯설어진 것을, 그녀가 잘 알았었고 결혼까지 했던 누군가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 승진에, 집도 지었다. 다만 한 가지, 죽음을 유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 뿐 아니라 그녀도 죽었다는 것, 심지어 그에 대한 추억마저도 실패했다. 그리고 아마도 교회들도 - 또 관리들도 이해 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 이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말이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육신의 죽음 이전의 죽음이라는 것 말이다. 그것은 다만 완전히 낯선 사람이 혼인관계의 침실로 들어오는 것이니, 더 이상 소유하지 않은 권리를 끄집어내려는 낯선 이가. 이 사망증명서를 발급하고 그것을 이혼이라고 명명한 법정의 역할은 목사님의 역할이나 등록청 관리의 역할처럼 그렇게 부차적이었다. 그 누구도 망자들을 되살려 놓거나 죽음을 되돌려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담배를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눈짓으로 그를 궁극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더 이상 토론할 말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를 데리고 어디로 갈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이든파크에 있는 야외 카페로 갈 것이다. 이 시간쯤이면 터키인 여종업원이 막 튤립이거나 히아신스 한 송이가 꽂혀있는 왜소한 청동 꽃병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식탁보를 가지런히 펴고 있을 것이었다. 그곳 - 이 시간쯤이면 - 어딘가 뒤쪽에서는 진공청소기가 돌아가고. 그는 그곳을 늘 “추억의 카페”라 말하곤 하며, 생색내는 듯한 표현으로“섬세하지도 그렇다고 세련되지도 않았지만, 아주 좋았다”고 확인했다. 아니야, 하고 그녀는 다시금 궁극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마침내 그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실제로 빨간 자동차에 올라탈 때까지. 그는 그렇게 주차장에서 빠져나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눈길을 주는 일도 없이 떠나갔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그녀가 늘 보아왔듯이 그렇게.

아직 아홉시 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계단을 내려와 신문을 한 장 사들고 건너편 카페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계단을 비우고 가버렸으니 그 얼마나 홀가분했던지. 그녀는 시간이 있었다, 생각해 봐야할 일이 좀 있었다. 열두시에 아들애가 학교에서 오면, 아이에게 설탕에 절인 체리를 넣은 팬케이크를 만들고 구운 토마토를 곁들여 줄 것이다, 그리도 잘 먹는 것이니까. 함께 놀아도 주고, 숙제도 하고, 어쩌면 영화관에 갈지도, 어쩌면 심지어 추억의 궁극적 죽음을 확인시켜줄 하이든파크에 갈지도 모른다. 아이는 설탕에 절인 체리며 팬케이크며 구운 토마토를 보며 물론 질문을 할 것이다, 엄마가 재혼을 하려는지.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리라, 아니라고. 그녀에게는 죽음은 하나면 충분하다. 다시 또 슈트뢰셀 상회에서 일할 것이냐고도 물을 것이다. 거기 뒷방에서 아이는 과제를 하거나 원단샘플들을 가지고 놀 수도 있었다. 또 그 슈트뢰셀 아저씨가 그의 머리를 친절하게 쓰다듬어 주곤 했던 곳이다. 아니다. 아니다.

 

  카페의 식탁보가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손의 감촉에 좋았다. 그건 정말로 순면이었고, 은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있는 어스레한 분홍빛이었다. 그녀는 하이든파크에 있는 카페의 식탁보를 생각했다. 그때 칠년 전, 처음 것들은 옥수수빛 노랑으로 상당히 거칠었다. 그 다음 에는 데이지 꽃무늬가 프린트 된 초록색, 그러다 마지막으로는 샛노란 단색으로, 한쪽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그는 닳은 부분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가 정말로 보상받을, 적어도 만 오천, 어쩌면 이만 마르크쯤의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설득하려고 했고, 오늘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정도는 흠 없는 집에 대한 저당으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그녀는 그에게 늘 “좋은 아내, 분별 있고, 절약하면서도 인색하지 않은 아내였다고, 비록 불충한 아내”였지만. 또한 “그들의 생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전적으로 적극적이었고 생산적으로” 동참했었고, 루이왕조 때의 의자들과 마이센 도자기 세트는 실제로 그녀의 자산이라고 설득하려 들었다. 그녀가 이 모든 것들 중 어느 것도 가지려 하지 않는 데 대한 그의 분노는 그녀가 슈트뢰셀과 저지른 불륜에 대한 분노보다 더 격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싸구려 식탁보 닳은 부분을 조각조각 뜯어서 (아마 오늘도 그랬을 것이다.) 바닥에 팽개쳤다. 마침 차와 커피를, 그에게는 차를 그리고 그녀에게는 커피를 가져오던 터키인 종업원의 의심쩍은 눈길하며 - 그건 그녀의 건강에 대한 위협적인 발언과 비웃듯이 재떨이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재떨이는 말하자면 흉물스러웠다, 어두운 갈색으로, 마룻바닥 색깔에다 - 실제로 벌써 세 개비의 꽁초가 들어있었으니.)

 

  네. 커피요. 그녀는 벌써 다시 한 잔을 마시고는 신문을 넘겼다. 여기 카페에서 그녀는 방해받지 않고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무례하게 건네다 보는 눈길이나 아예 떠밀리는 일 없이. 법원 건물의 끝없는 통로 속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일을 생각했다. 그들은 모욕적이라 느꼈던 것 불쾌했던 것 일체를,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았거나 받지 않았던 것 일체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했다. 그곳에서는 죽음을 유예할 수 없었던 상냥한 변호사들과 상냥한 판사들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었고,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이혼시킨 죽음의 시점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며 미소를 흘리다가 스스로 들켰다. 그건 일 년 전 그들이 그의 사장네 집에서 저녁을 했을 때 시작되었었다. 그가 갑자기 그녀에 관해서 “섬유” 관련업 출신이라고 말했을 때, 그게 꼭 마치 그녀가 카펫 짜는 직공이거나, 베틀 직공, 아니면 일러스트레이터나 된 것처럼 들렸고, 실은 다만 섬유상회의 점원이었지만 그랬다. 그녀는 그 일을 너무도 좋아했다. 두 손으로 모든 것들을 펼쳤다가 다시 개켰다가 하면서, 그건 손에도 눈에도 좋았다. 그리고 구매고객이 뜸한 시간에는 타월들, 침대시트들, 손수건들, 속옷들이며 양말들을 다시금 정돈을 하고, 선반이며 서랍 또는 간에 맞춰서 다시 집어넣곤 했다. 그런 어느 날 이 상냥한 젊은이가 들어와서는, 그는 이제 사망하고 없지만, 속옷들을 보여주라고 했다. 속옷을 살 계획도 아니었고 (돈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서), 다만 그의 성공체험에 관해서 따끈따끈할 때 이야기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야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른 뒤 3년 만에 (“저는 전기공학 출신입니다.”라고 했는데 - 그는 다만 전공이었을 따름이었다.) 디플롬 증서를 땄고, 벌써 학위논문 테마를 받았노라고. 그리고 바로 “제 아내는 섬유업 출신입니다”라는 표현은 직접 미술까지는 아니라 해도 공예미술 정도의 느낌을 줄 것이었고, 그녀가 “예, 저는 섬유상회의 점원이에요, 때로는 파트타임으로 돕기도 하고요.”라고 말했을 때 그가 얼마나 심하게 화가 충천해서 거의 병이 날 지경에 이르렀던지. 돌아오는 길 내내 차속에서 그는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음절도. 다만 핸들만 경련적으로 붙들고 있던 그 얼음장 같은 침묵.

 

  커피는 놀랍게도 맛이 좋았지만, 신문은 지루했다. (“기업가의 이윤은 너무 낮고, 임금은 너무 높다”라니.) 게다가 그녀가 우연히 엿듣게 되는 것들은 모두 법원 냄새를 풍겼다. ( “사실왜곡.” “소파는 분명히 내 것인데.” “아이는 못 빼앗아가게 할 테요.”) 변호사 예복, 변호사 서류가방. 사무실의 급사 한 사람이 서류들을 가져왔다. 서류는 신중하게 펼쳐졌고, 페이지들은 조심스럽게 넘겨졌다. 그리고 정말로, 이제 두 번째 커피를 그녀에게 가져온 젊은 종업원은 손을 그녀의 어깨에 대면서 말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다 지나간답니다. 저는 일주일 내내 울었다고요, 다시 말씀드리죠, 일주일 내내요.” 처음에는 그녀가 화를 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벌써 다 지났는걸요.” 그러자 종업원이 말했다. “그리고 저 역시나 잘못한 쪽이었답니다.” 역시나라니?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잘못을 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사람들이 내게서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는 걸까? 어쩌면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그럴까?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으며 미소를 짓고 있어서? 물론 그녀가 잘못을 했다. 이 죽음을 일찌감치 결정하기를 거부했고, 이 치명적인 몇 달을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살았으니. 그가 어느 날 저녁 새 야회복을 가져와서는, 그건 새빨간, 어깨를 깊이 드러낸 스타일이었는데, “회사 파티에 오늘 저녁에 입어요, 우리 회사 사장님과 춤도 추고, 사장님한테 당신이 지닌 모든 매력을 보여주었음 싶네.”라고 말했을 때까지도, 그런데 그녀는 그날 예쁜 유리구슬 장식이 달린 은회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슈트뢰셀과의 사건이 알려지자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당신이 우리네 사장님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을 당신네 사장에겐 죄다 보여주었구먼.”이라고 소리쳤다.

 

  그랬다, 그녀는 그런 짓을 했다. 그가 침실에서 손님방으로 나가고 난 뒤, 그리고 그가 포르노 잡동사니와 채찍을 들고 다시 침실로 되돌아와서는 그의 성적인 성공체험들에 대해서 끔찍한 논쟁을 시작했던 다음날 아침에, 그것들을 그녀는 그에게서 거부했지만 그는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의 직업상의 성공체험들이라는 것에 대한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가 노이로제에 빠져있다는 것, 거의 정신병이라는 것. 그녀는 그를 그러한 성공체험에 빠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에게서 채찍을 빼앗았고, 그를 내몰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 물건은 그녀를 얼음장처럼 차갑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죽음을 결정하지 않은 것, 아들애를 데리고서 택시를 불러서 떠나버리지 않은 것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집의 확장에도 동참하고 있었다니. 손님방, 손님욕실, 텔레비전 방, 서재, 사우나, 아동실, 그리고 목욕 타월, 타월, 침대시트, 쿠션용 솜이나 커튼 천들 때문에 슈트뢰셀에게 가서 할인가격을 부탁해보자고 한 것은 그녀의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슈트뢰셀이 그녀의 눈 속을 깊이 꿰뚫어보며 할인 비율을 20에서 40퍼센트로 올렸을 때, 물론 그것은 그녀로서는 약간 불편해졌다. 그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며 진열대 너머로 그녀를 잡으려고 했을 때 그녀는 중얼거렸다, “맙소사, 여기서는 안돼요, 여긴 안돼요.” 그리고 슈트뢰셀은 그 말을 잘 못 (혹은 제대로) 알아듣고는 어디 다른 데는 그녀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그와 더불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이 남자랑. 그리고 그와 함께 누웠을 때 그는 지극히 행복해했다. 그는 그러는 동안 상점을 활짝 열어놓았고, 계산대도 감시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옷가지를 벗고 입는 동작마저도 그녀에게는 창피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아래층 계산대에서 물건들을 포장해줄 때, 그는 할인가격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고 소매가격 그대로 지불하게 했고, 그녀가 문을 잡고 서있을 때에도 입맞춤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확증된 호감에도 불구하고 할인가격을 적용하지 않음”이라는 이 주장을 상대측 변호사는 실제로 슈트뢰셀에게 증언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 쪽 상냥한 변호사가 슈트뢰셀이 빠질 수 있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랬다, 그녀는 그 뒤로 여러 번 슈트뢰셀에게 갔었다. “물건을 사려고 간 것이 아니고요?” “아니요.” “얼마나 자주 갔죠?” 그것은 그녀가 알지 못했다, 정말로 몰랐다. 그것을 세어보지 않았다.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장밋빛 방석에 가라앉아버릴 것 같은 불안을 만들어준 것은 슈트뢰셀에게서의 이 부드럽고 감동되고 감동적인 기쁨이었다.

 

  아니다, 그녀는 그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지만 그의 구식 풍의 상점은 그녀에게는 제대로 된 상점이었다. 모든 박스들, 상자들, 서랍들 그리고 실제로 오직 모직과 면제품만을 넣어두었던 창고를 알고 있었다. 틀림이 없는 두 손으로 아주 조금 섞여 들어간 인조섬유 올들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일이라면. 아니다, 그녀는 슈트뢰셀이 늘 그렇게 말하곤 했던 도떼기시장 같은 싸구려 가게들에서는 일할 수 없었다.

 

  아니다,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다시는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 지금은 살아있는 누군가가 죽으면, 그리고 또 다시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으면. 어쩌면 기혼 남자들이 잔인한 방식으로 음란해지는 시대가 온 것이리라. 그리고 연인들은 구식으로 너무도 장밋빛이라고 할 방식으로 부드럽고 행복해 하는 시대가.

 

  “이 보세요,” 그녀가 계산을 할 때 여종업원이 말했다, “이젠 우리가 더 잘 지내게 되는 거예요. 당신은 아직 젊고 예쁜 여자고,” -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 - “생이 아직 당신 앞에 놓여있어요, 그리고 아이가 당신을 붙잡아 줄 거예요.” 그녀는 카페를 나서면서 종업원에게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들애에게 또 호두케이크를 구어 줄 것이다, 가는 길에 재료를 사가지고 가서.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묻는다면, “내가 정말로 이 여자에게 가야하냐고?”(코니, 가비, 로테?) 묻는다면, 그녀는 “아니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틀림없이 정확한 손을 갈망하고 있을 하운쉬더 크렘 주식회사가 있었다, 슈트뢰셀의 오랜 경쟁사였다. 그리고 또 배송회사도 있었다. 거기라면 그녀는 속옷을 펴거나 매끄럽게 펼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때 막 디플롬을 끝내고 학위논문 테마를 받았던 그 호감이 가는 젊은이 곁에서처럼은. 그녀는 설탕에 절인 체리 대신 훈제청어를 집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그것도 좋아하니까. 청어가 프라이팬 안에서 바삭바삭해지고 반죽이 그걸 감아 돌며 갈색이 될 때, 아이는 엄마 곁에 서 있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하운쉬더 크렘 주식회사에서 점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두 손에 의존할 수 있었다. 어떤 섞여 들어간 인조섬유 올들도 그녀의 손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 

원전 : Bis daß der Tod Euch scheidet, in: Heinrich Böll Werke, Romane und Erzählungen 5 1971-1977, hrsg. von Bernd Balzer, Kiepenheuer & Witsch, 1978, S. 504-512. (L 76, Frankfurt/M-Köln, H. 2, 1976)

『하인리히 뵐 Heinrich Boell』, 제11집, 157-167쪽.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1. 8. 26. 23:12

<그리운 친구여. 카프카의 편지 100선> 번역이 출판되었다. 
                                                          - 아인북스 411쪽.( 2011. 8. 15.)

얼마나 공을 들였나, 100편을 선정하는 데에도 한참 걸렸다.
번역은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만큼 점점 더 공을 드리게 되었다, 원고지 1400장.
출판사가 믿음직스러웠다, 꼼꼼한 교정과정에서 참으로 신뢰감이 무르익었다.

표지를 여기에 올리고 싶지 않다. 사실은 울고 싶었다. 조금 울었다. 억울하다.
표지보다 무거운 알찬 내용을 자부심으로 느끼기에는 표지가 너무 가볍다.
나는 중 2 때도 무거운 책들만 읽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읽었다.
이렇게 가벼운 표지에 내 이름이, 그것보다 카프카의 이름이 들어있다.
아이러니다. 아니, 수치다.
젊은 출판인에게 울고싶었다고 말했다. 그 다음은 할 말을 잃었다.
젊은이는 젊은이다. 늙은이는 늙은이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1. 4. 9. 23:20

이곳이 원래의 홈페이지  ▷  http://altair.chonnam.ac.kr/~yjsuh/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0. 12. 30. 23:30

내가 정녕 독문학 교수이기를 멈췄는가.
나는 여전히 도이치의 느낌과 글의 마력에 빠져있다.
10권의 전집 중 단 4쪽 분량의 이 단편을 보라. 글쓰는 이,
소위 작가라는 정체성을 지닌 모두여!


독자 구하기
  - 하인리히 뵐 1954 -



   내 친구는 묘한 직업을 가졌다. 그는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정서법의 몇 잠재적 지식을 소유하고, 문장론의 몇 규칙들을 막연하게 마스터하고, 이제 타이프 한장 한장을 문체의 연습들로 점유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런 한 뭉치를 만들자마자 그것을 그는 원고라고 부른다.

그는 수년 간 이 문화의 황야에서 예술의 마른 풀만을 겨우 뜯어먹고 살았다가 마침내 출판사를 찾아냈다. 그의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최고로 낙담해 있는 그를 만났다. 그의 이야기는 사실 기가 꺾일 만했다. 출판사의 정산에 따르면, 반년 내에 350권이 비평을 부탁하려고 무값으로 배포되었고, 몇 우호적인 비평도 나왔고, 13권의 책이 실제 팔렸단다. 그로써 내 친구에게는 5,46마르크의 대변이 발생했단다. 그런데 그는 800마르크를 선지급 받았기 때문에, 같은 비율로 셈하자면 이 선지급금은 대략 150년이 되어야 상쇄될 수 있는 것이란다.

이제 문제는 한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평균적으로 그만 못하다는 점이다. 그게 대략 몇몇 거의 전설적이다 싶은 터키인들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한 70을 본다. 더러 우리 잃어버린 세대의 기념비적인 신고를 생각할 때 위안적으로 한 십년을 더 칠 수도 있다.

나는 친구에게 두 번째 책을 쓰라고 충고했다. 그 책이 출판되자 전문가 권에서는 기쁘게 환대를 받았다. 비평용 샘플은 400권으로 급등했고, 반년이 지났을 때 판매고는 29권. 나는 친구에게 담배 두 개비를 말아주고는 어깨를 도닥거리며 제안했다, 이제 세 번째 책을 쓰라고. 그런데 친구는 그 말을 아이러니로 이해하고는 모욕을 당한 듯이 물러서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투명작가 비트”라고 문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에 관한 평전 한 권이 나오자 평전이 그의 작품들 전체보다 더 많이 팔렸다.

근 반년동안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는 다시 고독한 천재성의 영역에서 내닫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내게 와서는 후회막급하다고, 그래 아무튼 세 번째 책을 쓰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이번에는 헥토그래프 등사본으로 30에서 50부쯤을 출판사에 넘겨주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선지급금을 받았다. 그의 둘째 아이가 태중에 있었고, 그는 말하자면 몇몇 식자공과 인쇄업자, 포장이나 발송담당 여직원들의 실직에 협조하는 죄를 짓기는 싫었노라는 주장을 폈다. (그의 사회적인 감각은 항상 정말 강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에 관한 근 100편 정도의 호의적인 비평이 나왔고, 두 권을 합친 판매부수는 90권을 넘었다. 출판사는 스스로  “독자 구하기”라 명명한 작전에 돌입했다. 곧 각 서점마다 쪽지가 발송되었는데, 내용인즉, 비트-구매자를 확보해놓고 곧 출판사에 알려달라고, 그러면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을 개시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작전의 결과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작해서 4주 만에 저 위쪽 북부에서 한 남성이 나타나 내 친구의 책에 대해서 묻고 그것을 사고 돈을 지불했음에 틀림없었다. 서점 주인은 곧 전보를 보내왔다. “비트-구매자 출현 - 다음 지침은?” 그러는 사이에 서점주인은 구매자를 대화로 붙잡아 놓고 커피를 따라주고 담뱃갑을 권하고 그랬다. 이 모든 행동들이 구매자를 놀라게 했지만, 그는 조용히 그러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자 번개처럼 빨리 출판사의 답변이 왔다. “구매자 이쪽으로 보낼 것 - 전 비용 이쪽 부담.” 다행하게도 구매자는 교사였고 마침 방학이어서 남독으로의 공짜여행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는 첫날은 쾰른까지 갔고 그곳에서 하루저녁 좋은 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아름다운 라인 강변을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며 여행을 즐겼다.

이틀째 오후 4시경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역에서 출판사까지 택시로 이동했고, 출판사에까지 가서는 출판업자의 매력적인 부인과 더불어 좀 흥분된 시간을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면서 보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여행경비를 받아 챙겨서 다시 역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2등 열차로 내 친구가 뮤즈에 봉사하고 있는 그 소도시로 갔다. 그곳엔 그 사이 둘 째 아이가 태어난 지 한참이 되었고, 친구 아내는 영화관엘 가고 없었다. - 작가들의 아내들에게라면 어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허해서는 아니 되는 휴식 아닌가. 구매자는 그러니까 내 친구를 마침 그가 아이들에게 저녁우유를 데워서 그들을 달래려고 막 노래를 부르고 있던 참에 만나게 되었다. 그 노래란 게 하찮은 어휘들로 구성되었을 밖에. 아무튼 이 말이 최근 도이치문학에 언짢은 빛을 던졌으니…….

내 친구는 자신의 독자에게 감동어린 인사를 하고서 대뜸 그의 손에다 커피갈이를 밀어주고는 재빨리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이행했다. 곧 커피 물이 끓었고, 이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다 수줍은 사람들이어서 서로 묵묵히 감탄하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을. 그러다가 마침내 내 친구가 외침소리를 토해냈다.

“선생은 천재이시오 - 제대로 자라난 천재이시란 말이외다!”

“아, 아닙니다,” 손님은 유하게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작가선생이 그렇소.”

“틀린 말씀,”  내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침내 커피를 따랐다, “천재의 주요 특징은 그 희귀성에 있지요, 그리고 선생이야말로 저보다 더 희귀한 인간계층에 속합니다.”

방문객은 겸손한 이의를 달려고 했지만 혹독한 방식으로 훈시를 받고 말았다. “거 말 마쇼.” 내 친구는 말했다. “책을 쓰는 일은 그게 만들어지는 일에 비해 그저 반쯤 나쁜 일이오, 출판사를 발견하기란 유희이외다. 그러나 책을 산다는 것 - 그것을 저는 천재적 행위라 하는 것입니다. - 그나저나 우유와 설탕을 치시지요.”

그 남자는 우유와 설탕을 치더니만, 수줍어하면서 외투 오른 쪽 안주머니에서 그가 저 위 북쪽 지방에서 샀었던 책을 내밀며 헌정 사인을 부탁했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내 친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한 가지, 선생이 제 원고에다 헌정 사인을 해주는 조건이오!”

그는 서가에서 바인더를 꺼내더니 거기서 빼곡히 쓴 원고뭉치를 꺼내더니 손님의 커피 잔 옆에 놓고는 말했다. “부디 저에게 기쁨을 주시오!”

손님은 혼란스러워 만년필을 덜덜 떨면서 원고뭉치 마지막 장 맨 아래 여백에다 머뭇머뭇 썼다. “진정한 존경심을 담아서 - 귄터 슐레겔!”

그러나 내 친구가 잉크를 말리기 위해서 그 원고를 난로위에서 흔들고 있던 한 30초쯤이 지나서 손님은 이번에는 외투 왼쪽 안주머니에서 타이프가 되어있는 종이 다발을 꺼내더니 내 친구에게 청했다, 그가 최근 도이치문학에 대한 기여라고 간주한 이 결과물을 출판사에 감정 의뢰해달라고.

내 친구는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자기는 실망감에서 몇 분간 말을 잃고 있었노라고. 이 남자의 운명에 대한 걱정이 그를 깊은 비통에 빠지게 했었노라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몇 분간은 묵묵히 건네다 보고 앉아있었다. 마침내 내 친구가 나직이 말했다. “제발 간청하건대 그만 두십시오 - 선생의 독창성을 잃는 일이외다!”

손님은 고집스레 침묵하고 있더니 자기의 원고를 쓸어 모았다.

“선생께선 여행경비를 받으실 수 없겠습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생크림케이크가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요. 출판자의 부인은 찡그린 낯빛을 할 것이구먼요. 선생을 위해서 간청 드리는 것이니, 제발 그만 두시지요!”

그러나 손님은 찡그린 채 고개를 갸웃 둥했고, 내 친구는 한 인간을 구한다는 뜨거운 노력으로 출판사의 정산서를 가져오는 일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슐레겔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여기에서 내 친구는 이야기를 중단하고자 했지만, 나는 그가 방문객과 그만 드잡이를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휴지부가 발생했고, 그 동안 내 친구는 불끈 쥔 주먹을 생각 깊게 내려다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들은 것은 슐레겔이 짤막한 인사와 함께 떠났다는 것이고, 그의 원고는 놓아두고 갔었더란다.

그러는 사이 슐레겔의 장편 『슬프도다, 페넬로페여!』가 귀향소설로서 전문가 권에서 상당한 주목을 이끌어냈다. 슐레겔은 교사직을 떠났고, 그러니까 제대로 된 직업을 떠났는데, 말하자면 다른 직에 종사하기 위해서다. 나로서는 여전히 직업도 아니라고 간주하는 그런 직에 종사한답시고……


----------------------------------

「독자구하기 Die Suche nach dem Leser」:

하인리히 뵐 (1954), 함부르크의 ≪일요신문 Sonntagsblatt≫에 게재된 단편.

여기에서는 Böll, Heinrich: Romane und Erzählungen 2. Hrsg. von Bernd Balzer, Köln 1977 본을 번역했다. 

 

국제PEN 광주 2010년, 214-218쪽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0. 7. 16. 02:56

헤르타 뮐러가 노벨문학상 탄 일로 걱정? - 말도 안되는 말이렸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었다. 다음호 <소설시대> 편집회의 결과 헤르타 뮐러에 관한 글을 누군가가 집필했으면 한다는 계획때문이었다. 주초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주말이 오기 전에 결정이 났다, 평소에 각인되었던 젊은 독문학자 중에서 퍼뜩 떠오른 얼굴. 조심스럽게 연락을 했다. 밀린 글들로 힘들 것이나 흔쾌히 맡아주겠다고 했다. 난 언제나 행운을 느낀다.
K (곽정연교수), 독특한 열정을 느끼게 하는 그가 마침 헤르타 뮐러 낭독회에 참모 격으로 전체를 꿰뚫게 되어 있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를 조금 아무렇게나 하고서 맨 앞줄에 앉아 경청하며 골몰하겠지...... 좋은 글은 따놓은 당상이다.
아 정말 너무나도 행운인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0. 2. 25. 23:30

창작과 사실 - 양심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고찰 1983-2009

서용좌서용좌교수명예퇴임기념 논문집소설집간행위원회편,  전남대학교출판부 2010


 



        차례


간행사  ........................ 5


머리글  ........................ 6


하인리히 뵐과 쾰른  ........................ 11


길항작용에서 정체성 추구로

- 하인리히 뵐의 『어느 광대의 견해』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세대 간의 문제........................ 25


창작과 사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 나타난

                                                           언론보도의 문제        ........................ 49


행동으로서의 부적응 - 하인리히 뵐의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 76

 

인도주의와 미학의 긴장: 하인리히 뵐의 풍자물에서 본 서술전략 ....................... 93


“Was ist der Mensch ohne Trauer?”

- Heinrich Bölls Stimme klingt weltweit.   ....................... 113


에.테.아. 호프만의 「모래귀신」의 서술자 ....................... 131


하인리히 뵐의 작가 정신: 예술가 - 시민간의 정체성 문제 ....................... 156


하인리히 뵐의 「검은 양들」과 47동인의 “정신” ....................... 183


하인리히 뵐의 유토피아의 가능성  ....................... 203


하인리히 뵐의 『흔적없는 사람들』의 사제의 침묵: “소수에 대한 이해”....................... 224


기구화된 사회속에서 원시기독교정신의 회복:

하인리히 뵐의 풍자물 「무르케박사의 침묵수집」 ....................... 251


독일의 전후 상황에서 하인리히 뵐의 작품에 등장하는

부적응의 인물들의 기능  ....................... 276


페터 슈나이더의 『렌츠』 연구: 개념과 인지의 불일치      ....................... 302


Heinrich Böll의  『Das Brot der frühen Jahre』에 있어서

 “Aussteigen”의 의미  .......................331


Peter Weiss의 『Die Verfolgung und Ermordung Jean Paul Marats

dargestellt durch die Schauspielgruppe des Hospizes zu Charenton

unter Anleitung des Herrn de Sade』 연구

- 시민사회의 억압하에서 예술의 표현자유를 위한 실험 ....................... 357


Heirich Böll의 『Gruppenbild mit Dame』: 성취거부의 생활원칙  ....................... 400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에 있어서 대위법적 구성의 기능과 효과....................... 439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에 있어서의

순간과 현실에 대한 의미 분석 .......................      471

 


 

간 행 사

 

늘푸른 나무가 고목이 되어도 아름다운 것은, 오랜 세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늘을 넓히고 그 그늘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쉬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저 굽어가는 것이 아니라 표 나지 않게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키워낸, 조용하고도 뜨거운 열정 때문일 것입니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독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신 서용좌 교수님의 명예퇴임에 많은 동문들과 한 목소리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가을밤이면 우리의 전통이 된 독문학제를 함께 기뻐하시던 선생님, ‘적나라한 동영상을 접할 때 보다 암시적인 문자책을 읽을 때 우리의 상상력이 무한대로 확장된다’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손가락 하나만 클릭하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미디어시대에 책과의 소통과 대화의 즐거움을 선물하기 위해 손수 창작활동에 매진하여 자신의 그늘을 넓히신 선생님의 모습에도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냅니다.

이러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모아 그동안에 선생님이 남기신 열정을 두 권의 책으로 담아 보았습니다. 이 책 안에는 선생님의 냉철한 비평가로서의 모습과 상상력 가득한 창조적인 작가로서의 모습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캠퍼스를 떠나시는 선생님께 후학들과 제자들의 작은 정성이 기쁘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책안에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아쉬운 마음도 함께 담아봅니다.

이후에도 선생님의 열정은 변함없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이 책들에 아직 담기지 않은 아름다운 작품들이 선생님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태어나는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전남대학교인문대학독일언어문학과 동창회장

김낙현


머 리 글

 

뭘 많이 들고 다니시네요, 무겁게!


남보다 느린 걸음으로 늘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오갈 때면 듣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웃고 말 때가 많지만, 조금 힘이 남아있을 때는 대꾸합니다. 머리가 가벼우면 책이라도 무겁게 들고 다녀야지요. 그러고는 함께 웃습니다.


둔탁한 울림부터 멋스런 도이치 - 거기에다 제대로 사람이 되려면 『순수이성비판』 쯤은 원서로 읽어야 하리라는 막연한 선택으로 독문학도가 되어 그렇게 규정되어 살아온 밤낮, 한 세월. 어느 결에 인문학이란 젊은이들을 밥벌이 못하는 무능력자로 키워낼 뿐이라는 오명 속에 어딘지 부끄러운 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질의 막강한 권세에 눌려 인간이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져버린 오늘. 나•너의 유일무이한 소중함을, 문학•예술의 무궁한 가치를 논하다보면, 조금 엇박자라고 취급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가치가 이렇게 바닥에 주저앉은 지금이야 말로 시쳇말로 출구전략을 내놓아야할 때임을 절감합니다. 더 늦기 전에 목소리를 높여 말해야겠지요. 이 물질적•기계적 인생관의 세상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수호할 유일한 균형의 역할로서 인문학이야말로 진정 유용한 학문임을. 인류의 원천적인 무엇, 시공간을 초월한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 분명히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인간을 효용성의 수치로 파악하려는 시대의 어리석음에 그리 쉽게 굴복해버리기에는 청춘이란, 생이란 너무 아까운 것임을.


그런데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벅차다고 느껴졌습니다. 평소에 궂은 일, 힘든 일 면해준 동료들 덕분에 일없이 그저 강의와 글쓰기에 몰두해온 미온적 자세로는 이제 부족합니다. 지구상에서 우리를 누르고 있는 바위산보다 무거운 세력, 기술에 바탕을 둔 거대자본과 권력이라는 이름의 괴물과 맞싸워 인간의 가치를 찾는 데 힘을 더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새로운 피, 들끓는 정열이 사람냄새 나는 새 기운을 일으키는 모습을 이제는 간절히 지켜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해방은 간단한 일입니다.

지난 가을학기의 마지막 수업들은 언제나처럼 시험답안지 보퉁이를 껴안고 끝났습니다. 교수직의 나날 중 가장 우울해지는 계절병을 앓는 시간. 아무 쓸모없다는 문학수업을 해놓고서 또 아무 쓸모없을 등급으로 나누는 작업을 더 이상은 견디고 싶지 않았습니다. 해방은 이렇게 아주 급격한 염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행복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것도 - 무엇보다 불합리를 - 참을 수 없는, 참고 싶지 않은 세월을 살았나봅니다. 정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려는 몸살도 시들하고, 그렇게 얻은 시간들을 허송하게 될까 두려움도 일지 않습니다.


다만 제대로 가르침을 주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늘 미안함에 더해서 이제 논문집․소설집 출간에 마음써준 모두 - 전남대학교독문과 제자들과 동료들, 전북대학교사범대학독어교육과 그리고 광주제일고등학교 제자들 - 에게 감사마음을 전하자면, 어중간한 교수의 어떤 논리로도 늦깎이 소설가의 어떤 필력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또한 아무 것도 아닌 이 부피의 논문들을, 또 다른 무턱대고 엄청난 양의 글들을 쓴답시고 혼자 몰두한 그 시간들을 곁에서 참아준 가족들에게도 새삼 고마움을 느낍니다.


분에 넘치는 정에 감사하며……


2020년 2월

 

                             서용좌교수명예퇴임기념 논문집•소설집 간행위원회



고창수 공양환 김낙현 김동중 김득환 김명희 김미선 김민근 김선규 김순임 김용대 김윤숙 김은주 김중웅

김태훈 김형국 김홍섭 남경호 노재봉 류성호 문광일 문미영 문영희 민춘기 박도하 박병옥 박양희 백경철

서기수 서명희 서선호 소현숙 송경안 송원근 신유진 심공섭 심택성 심현주 안영근 안평환 양미경 양우천

유명희 윤중원 이공근 이상훈 이상희 이선화 이소림 이연정 이재인 이희동 임우정 전경수 전영희 정구수

정명순 정문화 정선경 정숙미 정신석 정찬만 정찬종 정현정 정호길 정후식 조경화 조길예 조윤재 조자경

최명규 최   숙 최유영 최향동 하희자 한봉수 한창환 홍진선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0. 2. 24. 23:30

통일 도이칠란트 문학의 변화 추이


11회 영호남문학인 교류한마당

2009년 5월 30일~31일

 

 

1. “하나의” 도이칠란트

21세기로의 길목에서 ‘정보오락 Infotainment’의 시대라고 하는 범세계적 문화 패러다임의 교체보다 중요한 문제는 도이칠란트의 경우 통일이라는 변수에 있다. 양 도이칠란트 국가의 정치적 통일이 곧 ‘하나의 도이칠란트’라는 통합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속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합의가 없는 통일”이고, “장벽은 무너졌지만 분단은 계속”되고 있고, “문화적 식민화” 속에서 “통합이 신속히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환상”이었다는 생각에서 ‘동인-서인 Ossi-Wessi’이 “머리속 장벽”을 두고서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전후문학은 패전과 함께 양심의 가책으로 전쟁포로상태로 귀향한, 또는 히틀러소년• 소녀단 유니폼을 벗어던진 세대에 의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친서방정책으로 경제재건을 우선시한 서쪽과 사회주의 이상 실현을 위해 독서대중의 교양화를 꾀하던 동쪽에서, 도이치문학은 크게 다르게 발전할 운명이었다. 서독의 입장은 보수적 문학비평의 취지에서 도이치문학의 통일성이 존재한다고 간주했다. 서독의 자유문학과 동독의 몇몇 비판적이고 수준높은 문학을 포함하면서, 동독의 문학 일반은 정치적으로 교조적이며, 미학적으로는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전혀 문학이 아니라고 간주해왔다. 반대로 동독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본주의에 문학적 상상력을 저당잡힌 서독의 문학은 작가를 먹여 살리는 상품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동독에서는 문학이 인민대중의 사회주의 정향을 고무시키는 교육적인 사명감에 찬 위대한 그 무엇이었고, 작가 또한 약간의 특권계층으로 대접되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역사의 승리자로서 문학의 황금시대를 맞았던 동독의 경우, 도이칠란트의 통일은 그 자체로서 충격이었다. 통일은 동독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해체라는 의미에서 문화체제의 해체를 포함하기 때문에, 통일 후 소위 청산작업과 변화의 대상은 곧 동독의 문학인 것이다. 서방에서는 ‘이데올로기문학’이라고 격하되는 동안 스스로는 도이칠란트 정신사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믿어온 문학이 청산되어야 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글쓰기 방식의 붕괴와 더불어 문화의 시금석이 사라진 공황기를 초래했다.

 

 

1) 통일의 순간 -  폴커 브라운

통일의 순간에 시집 『우리들이지 그들이 아니라 Wir und nicht sie』(1970), 장편 『미완성의 이야기 Unvollendete Geschichte』(1975) 등이 어렵게 출판되어 동• 서독에서 호평 속에 팔리고 있던 중견작가 브라운 Volker Braun(1939~  )은 울먹였다.

 

 

추도사 Nachruf」 (1)

나는 그대로 있는데 내 나라는 서쪽으로 떠나간다.

오두막집에는 전쟁을 왕궁에는 평화를. (2)

내가 내 나라에 발길질을 해댔구나.

내 나라는 몸을 던지고 알량한 장신구마저 던져 버린다.

겨울이 지나면 탐욕의 여름이 오겠지,

그러면 나는 어디론가 먼 곳으로 사라지리라.

내가 쓴 모든 글도 이해될 수 없으리.

나는 여태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것을 빼앗길 것이고,

아직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것을 영원히 아쉬워하리라.

희망은 덫이 되어 내 갈 길을 가로 막고 있다.

나의 소유물을 이제 너희가 움켜쥐고 있구나.

언제 다시 내 것이라고 말하며 모두의 것을 의미하게 될까.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인 브라운은 동독의 이념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거기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이 소유물은 다름 아닌 “여태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이다. 현실사회주의가 허위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판명된 뒤에도 진정한 사회주의는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고집스런 우울은 수십 년에 걸쳐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비전이었던, 기회가 균등한 곳, 생산적인 인간들의 연대공동체를 집요하게 그린다. 이 시의 정취는 통일과 더불어 발아래 땅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과 일치했지만, 브라운은 양쪽 비평계에서 비판을 받았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마당에 ‘진정한 사회주의’가 도래하리라는 환상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또 새로 얻은 개인주의적 자유를 예찬하지 않았다고 해서.

 

2) 통일소설 / 전환기소설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더불어 동쪽 도이칠란트 문단의 새로운 변수는 작가들의 세대교체를 들 수 있다. 동독 최고의 극작가 뮐러 Heiner Mueller(1929~1995)나 “비유적 사고”의 모르그너 Irmtraud Morgner(1933~1990)는 유명을 달리했고, 통일을 불안과 불만으로 받아들이는 브라운이나 아예 하임 Stefan Heym(1913~2001)볼프 등 기성세대는 좌표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대신 젊은 작가들에게 통일은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강요받아온 소위 문학에 대한 외세로부터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통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했다. 그들만이 가진 ‘두 체제’와 ‘두 사회’의 경험은 서독의 작가들에 비해 유리한 관점을 확보하는 것도 사실이다. 통일 후 가장 성공적인 신진이라 할 브루시히 Thomas Brussig(1965~  )는 아예 동독은 이야기하기에 좋을 것이라며, 지루한 자본주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야기의 무궁무진한 보고라서 “소설가의 천국”이라 호언했다. 이것은 연령의 의미에서의 세대교체 뿐 아니라,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그의 『우리같은 영웅들 Helden wie wir』(1995)이 대중적인 괄목한만한 성과를 낼 때, 시대소설로서 ‘통일- 또는 전환기소설 Wenderoman’(3)이 화두로 떠올랐다.


 

소설은 울치트 Klaus Uhltzscht라는 일인칭 서술자의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장벽붕괴 후 2년쯤 되었을 때 그는《뉴욕 타임즈》기자와 인터뷰를 자청하여, 그의 비정상적 ‘물건’이 전적으로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울치트의 21살 생애가 이야기되는데, 그가 태어난 것은 하필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군이 체코에 진입한 날이다. 그는 유명해지고 싶은 이기적인 관점과 한편 봉사하고자하는 이타적인 관점에서, 사회주의 선전에 기울어 슈타지(4)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지만, 아버지 역시 슈타지였다는 사실에 놀란다.

특히 마지막 장 “분단된 성기 Der geteilte Pimmel”는 동독 최고의 소설가 볼프의 

<분단된 하늘 Der geteilte Himmel>(1963)을 그대로 조롱한다. 슈타지요원 울치트는 1989년 11월 4일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에서 장벽붕괴가 임박한 순간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연설자를 비웃는다.  연설자는 유명 피겨스케이팅 선수출신의 트레이너 뮐러 Jutta Mueller(1928~  )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음 날 밝혀지기로는 볼프였다. 주인공은 분노하여 외친다. “‘장벽은 없어져야 한다!’라는 한마디 외침이면 되는 것인데 그런 외침은 크리스타 볼프의 입에서가 아니라 로널드 레이건의 입에서 나왔다.” 작가는 이처럼 적당히 소신을 기피해온 볼프가 국민작가로 존경받았던 사실에 분개하며 볼프의 전 작품활동을 ‘얼음 위에서 미끄럼타기’(피겨스케이팅)로 비하한다.

문제는 공격당하고 매도되는 동독의 대들보 작가들이다. 그들은 이처럼 직접 동쪽의 후배 작가들에게서 또는 외곽에서 직격탄을 맞으며, 또한 서쪽으로부터는 “길들여진 반대자들”이었다고 매도당하는 협공에 처해있다. 동독이 “문화보호지역”이었다고 보아도 되는가? 민족의 대변자로서 ‘인간적 사회주의’의 유토피아를 당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견지했던 지식인 작가유형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의구심은 폭등하고 있다.


2. 분단기의 거장들

1) 도덕성 시비 - 크리스타 볼프

누구보다도 통일과 더불어 논쟁에 휩싸인 볼프 Christa Wolf(1929~  )의 문제의 1989년 11월 28일의 베를린광장 연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독의 독립을 고수할 것인가? 우리의 재정적 도덕적 가치의 폐업 정리세일을 할 것인가? 조국을 위하여 아직도 우리에겐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도 출발점이었던 반파시즘적 인본주의적 이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파시즘적 인본주의적 이상’을 위해 조금 더 노력하자는 취지의 발언이라면, 중견 지식인 성직자 정치가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해야 하는 발언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남은 것 Was bleibt』(1990)의 출판이 그로서는 악의적인 숙명과도 같았다.


 슈타지로부터 공개적으로 추적/감시되는 여성작가의 하루가 이야기되면서 감시와 그로부터 파생된 감정들, 불안, 변화의 결과가 보고된다. 작가는 내면의 독백, 끊임없는 자문과 자기시험을 통해서 정신분열적인 행동을 보인다. (자아의 분열은 국가에 대한 관계에서 볼프의 분열성을 말한다.)

볼프에게 실제로 ‘남은 것’은 거짓과 자기기만, 굴욕에 속수무책으로 내맡겨지는 일이었다. 이미 볼프에 대한 평가는 서독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1987년 11월 FAZ에서 비평계의 황제 라이히-라니츠키의 Marcel Reich-Ranicki(1920~ )는 볼프를 “동독-국가시인”이라고 폄하하더니,『남은 것』이 출판되어 시중에 깔리기도 전에 ZeitFAZ에 악의적 서평이 실렸다. 국가시인이 감시를 받았다니 어이가 없다는 논조에, 국가와 가족처럼 지냈고, 국가로부터 혜택을 누린, 나치스에 복무한 지식인의 후예라고 비판되었다. TV 프로그램 문학 4중주는 “도이칠란트에 혁명이 일어났다. 동독의 작가들은 승리했는가, 불발인가?”라고 비꼬았다. 이는 동독의 작가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로서, 이 순간에는 마치 작품의 질이란 글이 쓰인 장소와 동의어인 것 같았다.

논쟁의 제2기는 정치적 참여를 표방하는 지식인들의 상호 공격으로 번졌고, 1993년에 터진 슈타지 서류철 문제는 볼프의 ‘비공식 협조자 IM’ 활동(1956~1962) 고백으로 비롯되었다.(5)볼프 자신은 이 모든 혹독한 비판을 전환기의 청산이라고 받아들였다.  상당 기간을 미국에 체류함으로써 언론을 피했고, 육신의 병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화신 Leibhaftig』2002)에 기록되어 있다. 『메데이아. 목소리들 Medea: Stimmen』(1996)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번갈은 독백에서 메데이아신화가 재창조된다. 그리스신화, 아니 세상의 모든 신화와 전설 가운데 최고의 악녀로 각인된 메데이아가 이 작품에서는 강한 자의식의 여성으로 묘사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근거한 사건들은 다른 방향에서 해석되며, 다른 시각으로 조명된다. (『카산드라 Kassandra』1983)를 그리스 아닌 트로이의 시각에서 쓴 것과 상통한다.)

볼프는 12권 전집의 출판과 특별호 등을 출판하고 있고, 에세이, 대담, 서간모음집에서는 그 시대에 증후적이고 감동적인 열정이 확인된다. “문학은 오늘날 평화연구이어야 한다.”(뷔히너문학상, 1980)는 입장은 2002년의 도이칠란트 서적상 수상에까지 변함없이 이어진다.



 

2) 신념문학. 신념의 변화? - 귄터 그라스

도이치문학 특유의 전통인 ‘신념- 또는 신조위주의 미학’에서 출발한 전후의 작가들은 이제 거의 역사적 위치에 들어갔다. 하인리히 뵐 Heinrich Boell(1917~1985), 렌츠 Siegfried Lenz(1926~ ), 그라스 Guenter Grass(1927~  ), 발저 Martin Walser(1927~  ) 등 대부분 ‘47동인’과 관련된 서독의 전후문학은 끈질기게 책임의 문제를 공개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이 된 세대였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은 대체로 ‘양심으로서의 작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신념 자체도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1959년 프랑크푸르트서적박람회에서, 뵐의 『아홉시 반의 당구 Billard um halbzehn>와 더불어 그라스는 『양철북 Die Blechtrommel』으로 세계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통일의 순간 뵐은 세상을 떠나있었고, 그라스는 콜 수상 주도의 (흡수)통일 방식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통일 후 그는 통일이 작가에게 그 신념에 따라 소재상의 전환기는 될지언정 흥망성쇠의 분기점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무당개구리 울음 Unkenrufe』1992)에서 정년을 앞둔 홀아비 노교수와 예술품복원사인 홀어미의 로맨스그레이를 전경에 배치하고, 통일 후 정치 및 경제적 현실을 형상화하면서 화해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장편을 썼다.

  때는 전환기로 도이칠란트 남자와 폴란드 여자의 만남은 민족적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이 둘은 각각 실향민들이고, 각각의 양친들은 언젠가 고향 땅에 묻히기를 소원했었다. 그래서 ‘도이칠란트-폴란드 공동묘지’라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실향민들은 시신으로나마 “화해의 묘지”에 되돌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말은 이들의 사고사로 끝난다.

 

『넓은 지평 Ein weites Feld』(1995)에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기류에 따라 끊임없이 좌우되는 도이칠란트인의 성향을 ‘배신’이라는 낱말로 함축했고, 『나의 세기 Mein Jahrhundert』(1999)에서는 20세기 100년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이 매번 다른 서술자에 의해 연대기적으로 서술된다. 이 작품 후에 그라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6)

그라스의 사회활동은 나이가 들어서도 엄청나다. 동ㆍ서독 통일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수상의 정책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1997년에도 콜의 5차 연임을 저지하기위해 전 도이칠란트 지식인들의 결집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런 그의 장편 『게걸음으로 Im Krebsgang』(2002)는 2차대전 말에 민간인 9천명 이상이 숨진 선박침몰사건을 다루어, 발표되자마자 독자와 비평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문학적으로 뛰어난 성공작이란 평가 외에도 도이칠란트 사회의 깊은 터부였던 소재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정전 무렵에 발트해에서 발생한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침몰사건은 우선 참사의 규모에서도 1912년의 타이타닉호 침몰사건 때보다 사망자 수가 무려 5~6배나 되는데도 역사적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해왔다. 구스틀로프호는 ‘대도이칠란트제국’이란 오만한 꿈의 상징이었고 ‘히틀러의 타이타닉’이었다. 따라서 그 배의 침몰은 나치스 범죄에 대한 당연한 응징으로 조용히 덮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라고 간주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 등은 곧 잊혔다. 그와 함께 소련과 동유럽에서 추방된 1250만 도이칠란트 민간인이 겪은 고통도 잊혔다. 특히 나치스 파시즘의 청산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한 ‘68세대’는 도이칠란트를 희생자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그런데 이제 소설 속에서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노인의 입을 빌려, 그라스는 “동프로이센 피난민의 참상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세대가 해결할 과제였다.”고 말했다.

이제 게의 옆걸음, 가능한 한 적을 속이려는 걸음이 어제와 오늘을 왔다갔다하는 서술관점을 상징하며, 긴장을 지닌 짜임새로, 예술적이고 유머러스한 대작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팔이란 안으로만 굽을지라도, 한 번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던 그라스가 이 터부를 건드려 도이칠란트인을 감싸려는 속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행동주의 지식인에게서도 노년의 향수란 결국 고향과 동향인이라는 보편감정에 파묻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향은 그라스의 동년배이자 동지적 정서를 지녔던 발저에게서는 더욱 노골적이다.(7) 1960년대와 70년대를 공산당에 동조했던 전력과는 다르게, 그는 80년대 후반부터는 나치스 과거에 대한 논란에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했다. 통일 후 베를린에 ‘홀로코스트기념관’을 건립하려는 거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맹공을 펴면서, “축구장 크기의 악몽”이 될 기념관 따위를 건축하는 것은 수치를 “기념화”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실제로 1980년대 소위 ‘역사가논쟁’(8)을 거치면서 도이칠란트인들의 정서는 바뀌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를린대학의 법학교수 슐링크 Bernhard Schlink(1944~  ) 또한 나치과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들세대의 성찰을 담은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1995)로 세계의 문학시장을 휩쓸었다.(9) 슐링크는 문학계에서는 신인이다. 그는 외도(?)로서 이러한 성공을 거두면서 엄청난 걸음을 내딛는다. 나치스의 집중수용소 간수였던 주인공을 모든 괴물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면모를 지닌 가해자로 창작해서만이 아니다. 일인칭 서술자가 세대간의 길항작용을 극복하고 전후세대의 자기정체성을 확보해냈기 때문이다. 제3제국의 범죄적 계책에 얽혔던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를 도이칠란트의 죄과와 관련시키고, 그것을 앞 세대에게 “밀쳐두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 안에 보듬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한편 온 세계를 통틀어 전반적인 문학계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도이칠란트의 도서박람회는 위용을 유지해가고 있다. 또 수많은 문학상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지닌 뷔히너문학상 수상 면면을 보아도, 시장성과는 다른 치밀한 발굴과 격려 그리고 존중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통일 이후 수상자들에는 이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작가들의 이름과 함께 더러는 생소한 이름들이 들어있다. 헝가리 혈통의 극작가 타보리 George Tabori(1914~2007), 스위스 작가인 무슈크 Adolf Muschg(1934~  ), 동독 출신의 힐비히 Wolfgang Hilbig(1941~2007), 남쪽 튀빙엔 출신의 슈타들러 Arnold Stadler(1954~  ), 루마니아 계로 다다이즘의 음향시 영향을 간직한 파스티오어 Oskar Pastior(1927~2006) 등이 그들이다. 최근 수상자 모제바흐 Martin Mosebach(1951~  )는 『무형식의 이단. 로마 리투르기와 그 적 Haeresie der Formlosigkeit. Die roemische Liturgie und ihr Feind』(2002)에서 가톨릭 신앙의 전사처럼 옛 미사전통의 부활을 외치며 수상했다. 2008년의 오스트리아인 빙클러 Josef Winkler(1953~ )는 죽음과 동성애를 주요 테마로 쓰며, 올해의 수상자 카파허 Walter Kappacher(1938~  ) 역시 오스트리아인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낙관론자는 종종 비관론자이다 Hellseher sind oft Schwarzseher』2007) 등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기층 근무자들의 일상을 써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

통일이 가져온 지각변동의 일렁임을 살던 젊은 문학도 장년기를 맞은 지금, 여러 의미에서 (도이치)문학의 현재는 한 마디로 무질서한 복수성 또는 무한대의 다양성 속에 있다. 최소한의 공통점이라면 문명비판적인 기본자세, 한때는 그렇게도 익숙했었던 진보의 믿음에 대한 거부, 단순한 의미구성에 대한 회의 등이다. 다양성은 획일성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고유한 입장과 방향을 선호하는 가운데, 철저한 미학적 구상, 글쓰기의 실천 방식, 다양한 지역들과 사회적 기능들, 다양한 작가 세대들과 그 정치적 입지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은 유의미하지 않겠는가.

※ 졸저: 『도이칠란트 •  도이치문학』, 전남대학교출판부 (2008), 846~966쪽 발췌요약.

-----------------

1) 나중에 「소유물 Das Eigentum」로 개칭되었다.

2) 뷔히너 Georg Büchner의 『헤센 전령』(1834) 중 “오두막에 평화를! 왕궁에 전쟁을!”이란 글의 패러디이다.

3) ‘Wende’는 특히 도이칠란트 통일과 관련해서는 1989년 5월 도이칠란트민주공화국의 부정선거로 인한 동요에서부터 시작되어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변혁기를 총칭하는 넓은 의미의 통일기라고 쓴다.

4) 1950년에 발족한 국가안전부[Stasi]. 자체적으로는 “회사”라 불렀고, 국내외 첩보국과 특정범죄수사국을 겸했다.

5) 영화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2006) 참조.

6) 뵐의 1972년 노벨상수상은 전범국가 도이칠란트에 대한 국제적인 문화적 면죄부라 평가되었다.

7) 이 노벨상 지명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주의자’ 그라스와 도이칠란트의 ‘민족주의자’ 발저가 경합했다는 후문도 있다. Cicero가 선정한 500대 지성인 명단은 교황 베네딕트 16세 - 발저 - 그라스 순이다.

8) 1986년 놀테 Ernst Nolte(1923~  ) 교수는 「사라지지 않을 과거」라는 짧은 글에서 나치스범죄는 볼셰비키 혁명의 “아시아적 야만”에 대한 반응에 불과했다고 주장해서 역사가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9) ‘죄없이 죄의식을 느끼는’ 한 젊은 도이칠란트인의 보고서는 도이칠란트 내에서 50만부, 미국에서는 100만부가 팔렸다. 그라스의 『양철북』이래 처음으로 대영제국 한 해의 베스트셀러목록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뉴욕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슐링크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된 최초의 도이칠란트 작가가 되었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08. 2. 28. 11:56

                 ∣ 머리말                     ...............................             005

제1장   ∣ 신성로마제국 도이칠란트  .......................             021

제2장   ∣ 저무는 중세                  ..........................            052

제3장   ∣ 각성의 시대                    ........................            104

제4장   ∣ 이상의 시대                    ........................            161

제5장   ∣ 도이칠란트연방            ...........................            234

제6장   ∣ 도이칠란트제국           ............................            287

제7장   ∣ 바이마르공화국           ............................            414

제8장   ∣ 제3제국-망명의 시대     .........................            468

제9장   ∣ 전후 도이칠란트           ............................           521

제10장 ∣ 도이칠란트민주공화국    ...........................           571

제11장 ∣ 도이칠란트연방공화국    ..........................            663

제12장 ∣ 통일 도이칠란트            ...........................           846

           ∣ 맺 는 말                       ..........................           980

           ∣ 참고문헌                     ...........................           984

           ∣ 주   석                         ..........................          1014

           ∣ 찾아보기                     ............................         1166



 

표지의 글


“세상에서 가장 울림이 그득한 언어는 도이치


“독서는 다른 낯선 두뇌를 가지고서 생각하는 것”이라 했던 보르헤스는 특별히 도이치를 예찬했다. “세상에서 가장 울림이 그득한 언어는 도이치”라고 해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도이치문학은 유럽의 문학이자 세계문학의 흐름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왔다. 르네상스, 각성의 시대, 이상의 시대를 지나 근대성을 획득하는 동안 꿈을 통한 예시로서 “다른 상황”, 즉 상상력에 의해 제안된 세계를 창출해왔다. 그러면 도이치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는가?                                           - 머리말 중에서

.........................................................................................

 

8세기에 있었던 그리스도교화 이전에 도이치권에서 게르만 작가들이 있었던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은 360년 서고트의 불필라주교가 성경을 게르만어로 번역한 일, 9세기경에 풀다의 수도사가 썼을 『메르제부르크 주문』이나 작자 미상의 『니벨룽의 노래』에서부터 천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의 작품들을 가능하면 많이 들여다보려고 한다. 인류의 영원한 미궁이라 할 괴테의 『파우스트』 등 무궁한 걸작들을 거쳐, 2006년 세계를 놀라게 한 “고백”이 들어있는 그라스의 자전적 소설 『양파껍질 벗기기』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이 작품들을 다시 천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가 기억하게 될 것인지는 예감도 못하는 채로.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