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2010. 3. 17. 23:30

      광주일보                                 

獨문학자 서용좌씨 소설·논문집 동시 출간

2010년 03월 17일(수) 00:00

독일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소설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용좌(64 ·전 전남대 독문과 교수)씨가 소설집 ‘반대말 비슷한말’(전남대학교출판부 펴냄)과 논문집 ‘창작과 사실’을 동시에 출간했다.

소설집 ‘반대말 비슷한 말’은 늦깎이 소설가의 십 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물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단편‘쪽지 붙였음’, ‘네번째의 죽음’, ‘마리아 막달레나’, 중편 ‘부나비’, ‘태양은’ 등 12편의 중·단편을 엮었다.

표제작 ‘반대말 비슷한 말’은 명예퇴직을 고려하는 교사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제자를 통해 옛 동료와 시공을 뛰어넘어 펼치는 감성과 지적유희를 다룬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논문집 ‘창작과 사실-양심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고찰 1983∼2009’은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서씨가 그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발표한 연구성과를 엮은 것이다. 서씨의 전공분야인 하인리히 뵐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페터 슈나이더, 파울 첼란 작품연구 등 학회지와 잡지 등에 발표한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으며 독일어 원문 논문도 실렸다.

광주 출신인 서씨는 전남여중고와 이화여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북대 독어교육과, 전남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독어독문학회 부회장, 한국하인리히뵐학회장을 역임했다.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그림’과 연작소설 ‘희미한 인(생)’, 중편 등을 발표한 바 있다.

한편, 이번 소설집과 논문집은 서 교수의 갑작스런 명예퇴임을 맞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위원회를 꾸려 석별의 정으로 펴낸 것이다.

/김대성기자 bigkim@kwangju.co.kr
Posted by 서용좌
서평2008. 9. 15. 23:30
  그 여자의 글쓰기
                 

                                     //소설 「네 번째의 죽음」을 읽고 //


이 소 림 (전남대학 독문과 박사과정 2학기)

2008년 9월 30일


단편 「네 번째의 죽음」은 마리루이제 플라이서 Marieluise Fleiβer(1901~1974)의 『심해의 물고기 Der Tiefseefisch』(1930)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남자주인공 라우렌츠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 생각, 말, 남자에 대한 태도를 순종적으로 할 것을 여성에게 종용한다. 대등하지 않은 이성간의 관계에서 억압받던 여자는 결국 이젠 결코 다시는 잡아먹히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며 남자를 떠난다는 것이 플라이서의 소설 내용이다. 이러한 서두는 「네 번째의 죽음」의 큰 틀이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벌어질 것을 시사한다. 더불어 인용된 소설의 남녀주인공들이 작가라는 것과 「네 번째의 죽음」속 일인칭 화자 '나'와 친구인지 누구인지 아무튼 가까운 '그'라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설정도 공통적이어서, 독자는 「네 번째의 죽음」에서 남녀의 지배관계와 글쓰기의 문제가 주제를 이끌어가는 동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인칭 화자 '나'와 '그'를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소설의 주체로서 그녀의 시각에서 남과 여 각각의 세계가 그려진다. 이들 두 세계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세계의 양극단으로 분리 되어있다. 그들은 비슷한 날에 (사실은 한 날에) 태어나고 지적인 교육을 함께 받으며 자라났음에도, 그의 지성은 명철함과 합리성으로 그녀의 지성은 표현하지 않고 적당히 감추어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이다. 여성 고유의 생물학적 특질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는 모범과 질서와 선행의 세계 속에 있어, 그녀가 글쓰기에서 보여주는 무질서함과 산발성과 초보성은 늘 그의 비난대상이 된다. 남과 여 이원의 세계는 그녀에 대한 그의 힐책으로 소통될 뿐이다.

 

이 소설은 화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더욱 자세하게 들려주기 위해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소설 속에 삽입해 넣은 액자소설이다. '독서-글쓰기-싸움-병-죽음'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진행된다. 다섯 단계의 내부이야기는 (독서-글쓰기를 '생'으로 묶어) 자연의 법칙인 '생-노-병-사'에 병렬 할 수 있다. 각각의 주제 속에서 그녀와 그의 인물성향이 나타나고, 에피소드가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적 세계 안에서 여성의 글쓰기 문제와 작가로서의 창작의 문제는 '실존(삶)'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다음은 액자소설 속 에피소드의 내용이다.


<독서>

그는 친구와 관념의 차이를 보이며 논쟁을 한다. 그와 친구가 서로를 반박할 때, 그는 혁명적, 반항적, 이방인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친구들과 멀어져 갈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한다.

독서의 문제로 그녀와 그가 티격태격 할 때, 그는 평생 주워 읽은 모든 것을 버릴 때라야 네 글 한 줄 쓸 수(236)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녀는 너무 많이 읽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글쓰기>

글쓰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그다. 독서를 한 후 그와 친구와의 토론에서 이데올로기의 색깔이 드러난 것처럼, 그의 글쓰기도 그 시대의 문단에서 요구되는 성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담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글에 타인의 글이 섞이는 것,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에 대해 고민한다.


<싸움>

그는 자기 스스로 창안한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그녀를 힐난한다. 네가 산소라고 들여 마시는 그것이 네게 일산화탄소야. 일산화탄소 중독.(241) 결국 사랑에 빠질 듯한 그녀에 대한 힐난이기도 하다.


<병>

정신과 육신은 하나라고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신의 일산화탄소중독은 그녀의 신체적 병으로도 나타난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 후반부에 그녀가 바흐만 Ingeborg Bachmann(1926~1973)의 작품 『말리나 Malina』의 여주인공이 벽 속으로 사라지며 자살하는 것을 패러디 함의 전조이다. 그녀 삶이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되는 것이 문제라는 소설창작의 문제는, 역으로 그녀 삶(논픽션)과 소설(픽션)이 혼합되는 문제와 교차된다.


<죽음>

그와 그녀는 남성(작가)의 문학작품 속에서 '대상화된 여자'(245)에 대해 토론한다. 대상화된 여자를 두둔하는 그녀를 그는 '골통나부랭이들'(246)이라고 비난한다.

그녀가 작품을 처음 썼을 때 작품에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것에서부터 그는 그녀를 비난해왔다. 그는 그녀에게 규칙적이고 표준적인 글쓰기 과정과 내용의 논리 정연함과 개연성, 그리고 그 안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완벽한 픽션을 창작하기를 요구해왔다. 그는 그녀 앞에서 곧 질서이자 상징이자 규칙으로 군림한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는 그가 제시한 지배적 글쓰기 체계가 그녀의 창작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규칙들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는 인간은 몰취미하거나 질 나쁜 작품을 내놓지는 않겠지, 법규나 복

지를 모델로 삼는 자가 참을 수 없을 이웃이나 특별한 악인이 될 리가 없듯이. 그렇지만 규칙이란

자연의 진실한 감정들과 그 진실한 표현을 망치고 만다고 말해도 될 게야. (244)

 

이 단계에서 그녀가 창작하는 이유도 드러난다. 그녀는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보상을 위해 외부에서 유발된 상처들을 속절없이 치유하는 과정(246)으로 창작을 한다. 창작의 문제가 실제 삶의 문제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면서 군림해온 그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자신이 사라지는 수 밖에 없다고 다짐하며 말리나의 죽음을 패러디 한다.


삽입된 다섯 개의 에피소드에서 남성의 규칙을 여성에게 내면화시키려는 '그'의 모습과 그와의 상호관계에서 억압받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글쓰기라는 모티브를 통해 심화되었다. 주지할 것은 그녀가 빛나는 상상력과 창작에의 열정과 상상력을 필력으로 옮길 수 있는 지성을 갖추었음에도 상징적으로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상황과, 일인칭 화자인 그녀가 내레이터로서 고백적 에세이의 '글을 쓰고 있다'는 모순적 상황이다. '픽션'과 '팩션'의 문제를 창작의 고뇌로 안고 있는 그녀의 글쓰기 문제는 글을 쓰면서도 쓰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소설을 써내려 가는 그녀 삶 자체다. '생-노-병-사' 삶의 법칙을 글쓰기에 대위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세계문학사에 남은 명작들을 독파하며 은근히 여유(233)를 부렸다. 세계문학사의 남겨진 고전명작들의 작가들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과 정통을 그의 전유물로 만들어 글을 쓰지만,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소설에 팩션 형태로 용해시키며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소설에서의 개연성(233)이란 남성 본위의 가치 판단 하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총체성에 다름 아니다. 한편, 그녀는 무작정 세상의 이름 있는 소설들을 섭렵(237)하고 자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조적 정신을 발현시키기 이전에 기계적으로 가부장적 사유체계로 점철된 대가들의 글을 읽었고, 남성의 전유물로 구성된 외부세계의 틀에 맞추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그녀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인 작업을 규정화된 조건에 맞출 수 없는 데 기인한 자기비하이다.

그녀는 기존의 전통과 정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한 후에 생겨나는 자의식을 비정통적이고 불분명한 척도라 생각해 부유하고 있다.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 가늠 지어진 사회적 성 차별의 이데올로기  성 역할의 내면화  여성의 자의식의 발현을 향한 욕구- 욕구발현의 실패- 주체로서의 자아 정립 실패'의 과정이 그녀의 글쓰기 문제에서 나타난다. 상식적 '글쓰기', '언어'라는 것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며, 이러한 가부장적 사유체계의 지배 속에서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언어, 여성의 자아는 억압되어 왔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 <죽음>에서, 그녀가 이와 같은 상황을 깨닫고 자살을 연출하는 것은 큰 전환점이다. 그런데 뒷방 서랍 속에 자살의 형태로 가두어 버린 '나'는 남성의 규범에 얽매인 '외부적 자아'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고픈 원래의 나'이다. 그녀는 '자신의 방'의 종이쪽지들, 물건들을 가리키며 "택배 방"(251)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의 방에서 글을 쓸 수 있다고 자부했던 그녀이지만, 그 곳에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기만의 방'이라고 생각했던 그 공간은 여성에게 주인이자 절대자로서 행하는 남성들의 물건들(택배)로 오염되어, 그 방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될 수 없다. 비관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이제 '나'를 버리고 '그'가 되기로 한다. '그'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면서 다만 내면화 되어 일인칭 화자였던 '나'는 '그'에게 투항한 것이다. '그'가 기실은 남성적 질서 속에서 능란하게 적응하고 있는 건강한 여자임이 마지막에 언니와 남편의 등장에서 확인된다.

 

「네 번째의 죽음」은 바흐만의 『죽음의 방식들』 연작 3부작에 이은 네 번째 죽음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3부작 중『말리나』와 외부액자 속 '나'의 이야기, 액자 속 내부 이야기는 삼중의 메타픽션 구도를 이룬다. 『말리나』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남녀관계와 문학세계의 불평등성, 늘 훈계하거나 야단치는 남성의 모습, 여성의 정신세계와 실존을 무시하는 남성상 등이 차용되고 있다. 말리나의 정신이 남과 여로 분열된 모습은 남성적 세계 안에서 원래의 자신이기를 바라는 여성성의 발현으로 이해되는데, 결국 말리나의 여성성이 살해(강요에 의한 자살)된 것처럼,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도 같은 형식의 죽음을 취한다.

여성이 결국 아무런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결말은, 이 소설의 자서전적 성격과 더불어 남성들의 발전교양소설의 내용과는 대치되는 것들이다. 기존의 문예학은 여성들의 자기산출적인 텍스트들을 폄하해왔다. 자기고백적 성격, 줄거리의 부재, 주인공의 비 발전성 등은 여성의 자기고백적 텍스트에서 보는 일부 특징이다.


자서전적인 것의 혼합, '삶'에의 천착 그리고 작품을 위해서가 아닌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출

판의 소망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한에 있어서 문학사 서술에 의해 통속성이라는 낙인이 찍히

게 된 문학표지들인 것이다.1)


페미니즘 문예학자 뷔르거 Christa Brger는 여성의 글쓰기를 삼 단계로 설필한다. 첫 번째 단계는 19세기의 요한나 폰 쇼펜하우어나 샬로테 폰 칼프 등을 예로 들어, 여성들이 기존의 제도 문학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소피 메로 등이, 완전히 비고전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일기 책과 편지 글을 통해 소위 '고급'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는 요구를 따르지 않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카롤리네 슐레겔-쉘링, 베티나 폰 아르님 등이 글쓰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들에 의해 산출되는 자아에 대해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단계라 한다.2) 페미니즘 문학사에서, 세 번째 단계는 여성의 글쓰기가 삶과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미학적 실천3)으로 실행되어 온 시기이다.

뷔르거의 견해에 따르면,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는 위의 세 번째 단계에 있다. 글을 쓰지 못한다고 자기를 비하하는 그녀의 생각은 기존 문예학적 입장에 기인한 것일 뿐,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한다. 그와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알력다툼은 기존 문예학의 전통에 반하는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문제로 확대되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가 글을 쓸 수 없다며 상징적인 자살을 감행하고 체념하는 것을 비극적 결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 여성고유의 것을 표현하기 위한 규범이 부재한 현실을 비관하고 그 상황을 기술하는 것이 부지 중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전통을 따르는 '그 여자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
1) 레나 린트호프, 이란표 역: 페미니즘 문학이론, 인간사랑, 1998, 110쪽 재인용.

2) 참조 : 앞의 책, 113~114쪽.

3) 참조 : 앞의 책, 110쪽.


Posted by 서용좌
서평2005. 4. 1. 23:30

http://cafe.daum.net/novelworld


카페 소설시대   류경빈

 

 서평 ...............................<춤꾼> 서용좌


처음에는 춤꾼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 듯 했으나, 춤꾼을 통해서 주인공의 삶과 연관 시키고 있는 내용으로 발전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딱히 어떤 비평으로 해야 할지 그 구분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심리적인 측면이 더 드러난 것 같아서 심리주의 비평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 작품 속에는 춤꾼을 바라보는 정식의 관심사가 자신의 삶과 비추어 보았을 때, 흐른 세월 속에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게 한다. 춤꾼이 남자라고 생각했었지만,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는 외모로만 보고 판단했던 자신의 의식 속에 여자라는 사람은 생김새가 예쁘고 머리도 길고, 화장을 하는 등을 생각했기 때문에 춤꾼의 모습에서는 짧은 머리와 헐렁한 셔츠 등이 남자라고 확신 하게 되어, 그 모습은 자신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서 회의감에 젖어 든다.

아내를 처음 보았을 때 얼굴빛이 도화 빛의 얼굴 이었고 지금의 아내는 누렇게 변해 버린 얼굴과 화장이 다르므로 춤꾼과 마찬가지로 여자가 아닌 중성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주인공은 남자이지만, 작가는 주인공의 입장, 곧, 남자의 입장에서 여성을 바라보고 그 시선이 어떠한지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 된다. 작가 의식 속에서는 아내의 세월이 나성의 눈으로 보았을 때, 여성이 아닌 중성 인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모습만이 남아 있고, 남편이 집에 돌아 왔을 때, 여자로써 매력이 없는 그런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짐작이 된다.

남편인 정식은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내와 이야기 거리가 없이 홀로,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며, 세월의 흐름 속에 정신없이 앞을 향해 왔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하고 ,중년의 나이에 자식도 있지만, 어느 정도 빠른 시간을 보냈다면 ,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지위, 그리고 가정에서의 위치가 곧, 가정의 살아남기 작전이 되어 불안감을 갖고 있다.

왼쪽 뇌와 오른쪽 뇌가 상태가 달라서 감성과 이성의 충돌이 아내에 대한 불만족스런 생각들로 아내 흉보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춤추는 것과 아내의 흉보는 것 중에 아내의 흉보기가 더 좋다는 생각은 아내에 대한 불만족이 춤추는 몸의 동작이 즉, 행동으로 나타내기 보다는 그저 혼자만의 생각으로 덜어내고자 하는 자신감이 없는 주인공의 모습을 짐작 하게 한다.
 

 


Posted by 서용좌
서평2004. 5. 3. 23:05

표현의 능청·부드러운 빈정거림… 카프카의 세계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카프카의 편지 1900∼1924
프란츠 카프카 지음 / 서용좌 옮김 / 솔


 

 

 

“나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뒤에서 그림책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같았지. 이따금 그 아이는 창 틈으로 길거리를 언뜻 보고, 그러고는 곧 그 귀중한 그림책들에 되돌아가는 것이야.”

 

카프카<사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적으로 생각하고 느낄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글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지만 이들 작가와 대부분의 많은 작가들의 글이 보다 보편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해에 기대어 또 다른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데 비해 카프카의 글은 보편적인 것들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 그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 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허물고 무효로 만드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와 이미지와 문장 속에는 최종적인 해석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또 다른 비유로만 파악하고자 할 수는 있지만 끝내 파악할 수 없는 암시와 비의들로 넘쳐나는데 그것들 또한 붙들려고 할수록 우리의 이해로부터 빠져나간다.


“트리시 사람들은 묘하게들 살아가고 있어, 그러니 내가 오늘 나의 지구본 위에서 트리시의 대략적 위치에다가 붉은 점을 표시해 놓았다 해도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오.”

그 점에 있어 카프카의 세계는 그것을 포착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것 스스로가 현현하는 식으로, 카프카적인 비유를 들자면, 어떤 거실의 어둠 속에 서 있던 날개를 펼친 공작이 어떤 조명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듯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공식처럼 얘기되는 불안·소외·부조리 등의 코드를 지참하고 그의 작품에 다가서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의 핵심으로부터 비껴가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는 카프카가 자신과 주위 사물과 세계와의 때로는 불편하거나 무안하거나 절망적이거나 유쾌한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묘사한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서, 가령 그가 늘어놓는 종기와 류머티즘과 삔 엄지발가락에 대한 불평 속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엄살 속에서, 동생 엘리에게 보낸 편지에 실린 “내 행복이 마음에 걸리거든 이제 만족해도 좋을 거야”라는 표현의 능청 속에서, 그리고 부드러운 빈정거림과 귀여운 심술 속에서 관념을 넘어서 있거나, 관념의 이전에 있는 그의 세계의 핵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이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로부터 끝없이 이탈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형식의 편지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의 편지들은 카프카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카프카는 거의 광적인 편지 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습작을 했으며, 1900년과 1924년 사이에 주로 친구 막스 브로트와 주변 사람들에게 쓴 편지의 많은 부분들이 장차 쓰여지게 될 그의 소설의 소묘로 읽힐 수 있다. 우리는 그 특성상 내밀할 수밖에 없는 그의 편지를 통해 그의 소설의 바탕이 되는 그의 일상적인 사고 작용의 기제와 그의 문체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그의 기질적인 특성을 확인할 수 있고, 그를 인간적으로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잠시 졸도해서 의사에게 소리 지르는 기쁨도 잃은 채, 그의 소파에 누워야 했고, 그리고 그동안-그건 매우 이상한 느낌이었다네-마치 손가락으로 치마를 아래로 잡아당기려는 한 소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니까.”

여전히 카프카의 세계는 이와 같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 속에 무한한 용적으로 매장되어 있으며, 누군가의 손에 의해 채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여름 대낮에 낮잠을 잘 때 퇴침으로 쓰기에 알맞은 부피의 이 번역서를 내는 데 가담했을 모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해 마땅한 이 두꺼운 책을 읽은 후면 카프카가 이 편지 속에서 묘사한, 어느 짧은 낮잠 후 눈을 떴을 때 그의 어머니가 정원에 있는 한 여인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정원에서 간식을 들고 있는 중이어요”라는 대답을 들으며 느끼는 삶의 낯설음이 주는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영문·소설가)

입력 : 2004.04.23 19:06 26' / 수정 : 2004.04.23 19:12 03'
Posted by 서용좌
서평2004. 4. 30. 00:07

 출판- “책이란… 도끼여야만 해”
                                                                     [한겨레21 2004-04-29 05:07]

 

 

부조리한 어리광을 담은 카프카의 편지모음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권혁란/ <이프> 전 편집장

새벽녘에 내린 프라하 중앙역. 허름하고 음침한 역엔 ‘빨간 그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우중충한 도시에 비마저 내려 ‘프라하의 봄’으로 유명한 바츨라프 광장이 젖고 있었다. 밑천을 드러낸 영어실력으로 믿을 것이라곤 오로지 <론니 플래닛>을 닮은 짝퉁 여행 안내서뿐. 광장에는 비에도 꺼지지 않은 작은 촛불 하나가 죽은 청년의 사진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세상에. 비가 촛불의 심지를 피해가다니! 그 거리 끝에서 투어버스를 발견한 난 무심코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의 독어와 영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이윽고 버스는 나를 카프카의 생가 앞에 내려놓았다.

‘불안과 고독, 소외와 부조리, 실존의 비의와 역설’이라는 카프카 문학의 테마를 내가 제대로 알고나 있었던가. <변신>? <단식하는 광대>? <성>? 읽었던 듯도 하다. 눈썹과 눈이 바로 이어붙은, 그래서 더욱 깊어 보이고 불안해 보이는 그의 눈빛과 얼굴만이 익숙했을 뿐. 체코. 프라하. 카프카. 문자 그대로 중세의 향기만이 간당간당 휘돌다 사라지던 그 여행을 끝낸 지 벌써 2년, 오늘 카프카의 편지모음을 만났다.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솔 펴냄). 제목부터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이른바 ‘카프카적’이다.

사실 카프카의 편지글이 처음은 아니다.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카프카의 엽서> <카프카의 편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등이 이미 나왔다. 외롭고 수줍고 병약한 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외로움과 마주하고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기대하며 편지를 써왔는지를 알 수 있는데, 기막히게도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는 1088페이지로 마감하는 엄청나게 두꺼운 편지모음이다. 누워서 들고 읽다가 졸기라도 하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두께다. 편지는 거의 그의 편집자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것인데, 연인과 친구에게 보낸 것도 꽤 된다. “많은 책들은 자신의 성 안에 있는 어떤 낯선 방들에 들어가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하네”라던 카프카는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할 게야.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곤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게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만 야행성 동물로 살아가야만 한다네. 그렇지만 기꺼이 자네를 다시 한번, 그러니까 어느 저녁에 보고 싶으이. 내일 수요일이나 그 밖에 자네가 좋아하는 어느 때라도.’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과 소외와 불길한 꿈을 쓴 카프카의 이런 앙탈 같은, 애교 같은, 어리광 같은, 끝내는 ‘오프라인’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그의 편지를 읽는 재미는 꽤나 오졌지만, 나는 중간에 책을 덮었다. 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선 말을 말겠다던 혼자만의 계율을 깬 까닭은 무진장 두꺼운 책의 분량도 한몫했지만 그것보다는 25년의 세월 동안 골방에서 숲에서 거리에서 쓴 그의 절절한 영혼의 편지를 하루나 이틀 만에 읽고 치워버리고 싶진 않아서였다. 곁에 두고 자주, 천천히 펼쳐볼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