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7. 3. 7. 14:50

“집착할수록 곤두박질 치는 게 ‘명예’일진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1. 내려놓기의 미학
2017년 02월 06일 (월) 14:11:51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눈이 가끔 내렸나 보다. 눈이 하얗게 덮인 산자락들의 풍경이 카톡카톡 소리를 내면서 내게 날아들곤 했다. 그러도록 나는 겨우내 눈 쌓인 산야를 보지 못하였다. 소설 쓰는 젊은이들이 태백으로 눈꽃기차여행을 떠나자고 했을 때에도 손을 내저었다. 늙은이 물 흐릴까 지레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여행이 힘들어서이다. 소풍도 힘들기는 어려서부터이니, 또래들이 보름씩 해외여행을 떠난다 해도 부럽다 만다. 이 겨울에 따뜻한 섬나라? 한껏 멋이 있지만, 멋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도 오늘은 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씩 둘씩 내려놓아야 할 일들이 밀려옴을 체감한다. 몸 따로 맘 따로, 명절이 다가올 때는 차례상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지 은근히 겁이 났었다. 그렇게 설은 닥쳐왔고,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세배 오는 사람들도 북적대는 집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겠지만, 그렇게라도 모이지 않는다면 ‘함께’ 산다는 것을 어찌 느낄 수 있으랴.

 

이번 설에는 초등학교를 잘 마친 손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했다. 중학생이 되는 시작을 격려해 줄 수도 있지만, 의미를 초등학교 졸업으로 하기로 했다. 주어진 일을 잘 마친다는 것은 초등학교도 어렵다. 보통은 대졸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졸업은 영어로는 시작(commencement)이라는 단어로도 쓰는 것을 보더라도, 또 실제로 엄청난 새로운 시련의 시작임이 틀림없다. 그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다 살았다 싶은 때에 찾아오는 정년은 그 자체로의 허무함과 여생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어려운 고비이리라.

 

누구나 나이를 먹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언젠가는 정년이 되고, 일을 놓고,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죽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무원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업장의 정년이 60세로 정해져있다. 교육공무원은 조금 예외이고, 가장 늦은 교수사회도 만 65세면 정년이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교수는 아예 정년이 없는데도 70세 정도가 되면 스스로 퇴임을 한다고 한다. 메스를 드는 의사는 어떤가. 농사라 해도 본격적인 농사에는 스스로 정년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기대수명이 늘었다고 해서 정년이 늦춰져야 한다는 것은 산술적 주장이다.

이 엄청난 실업과 미고용의 사회에서, 혹시라도 정년을 늦추자는 말은 기득권의 연장과 비슷한 말이 되고 만다. 노동시간을 줄여서라도, 임금을 줄이는 아픔 속에서라도, 일자리를 나누어야 하는 세상이 아닌가.

 

내가 재직했던 학과에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전통이 있다. 칼퇴직이다. 퇴임교수는 단 한 시간도 시간을 맡지 않는다. 내가 조금 남은 정년을 못 채우고 명예퇴직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학과들의 경우 대부분은 갑자기 출근을 그만두게 되는 교수들의 적응을 위해서라도, 또 듣기 좋은 말로 그 아까운 학식을 썩히기에 아깝다는 권유에 못 이긴 채 이삼년 더 시간강의를 맡기도 한다. 평생 하던 일, 이젠 쉬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우리 과의 전통 속에는 후속세대에 대한 배려가 숨어있을 것이다. 아무도 대놓고 말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럴 것이다.

 

강단 떠난 지도 벌써 한참 되었지만, 그러니까 옛날에는, 젊은 강사들의 학식이 내 또래 학자들보다 더 낫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학회지 논문심사 경험들을 되돌아보아도 그렇다. 이름을 가리고 심사할 때 우수하다고 보았던 논문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중에 인쇄되면 강사들의 것일 때가 많았다. 평가기준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내 의식으로는 그랬었다. 연구조차도 세월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옛날, 밥이 귀했던 시절에 노인들은 밥상에서 먼저 수저를 놓았다. 손님을 가더라도 밥을 반드시 남겼다. 젊은 사람들과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기본이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사뭇 다르다. 소위 ‘능력 있는’ 노인들에게서 양보지심이 적다. 특히 정치판이라는 동네에서는 멈춤을 모른다. 노회함으로 포장하여 세를 과시하며,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 드물다. 그런 곳이다 보니 탄핵소추 중의 대통령에게 충언하는 사람 하나 없는 모양이다.

직무태만과 왜곡의 정도가 임계점을 넘었음에도 그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나, 어찌하여 주변의 그 많은 경륜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들이 탄핵정국의 표류를 멈추도록 하지 못할까. 손익 계산을 내려놓을 일이다, 다함께. 내려놓을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현명함의 쓸모가 아니겠는가. 미국의 떠오른 권력자 신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의사를 명쾌히 표명하는 출중한 여야 정치인들을 보는 심정은 오직 부러움뿐이다. 그렇게 할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너 나 없이 내려놓기를 불사해야 한다, 내려놓기만이 마지막 아름다움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을 것이리라. 

 

그렇다. 내려놓기의 미학은 비단 노인들에게가 아니라 그 때가 도래한 이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온 대지가 신춘을 꿈꾸는 동장군의 시절이지만, 도종환의 「단풍 드는 날」을 미리 되뇌어 본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후략]

 

물론 시를 읽고 감동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깨달음과 실천이다. 무엇들을 내려놓기 위한 첫걸음의 시작으로서, 년 전에 새해의 계획으로 무엇들을 사지 않기를 다짐해 본 적도 있다. 늘 그렇듯이 완전한 계획 달성이 되었을 리 없지만, 해가 거듭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새해의 계획은 그 해에 이루지 못한다 해도 앞으로의 삶에 조금은 방향설정이 되는 듯하다. 한번 결심했었던 기억만으로도 머릿속 마음속 어딘가에는 남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내려놓기라는 것이 비단 물건들에 국한되지 않기에 더욱 어려운 것 같다. 보이고 만져지는 물건들에서는 다소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진정으로 버려야할 것들이 켜켜이 쌓여있음을 느낀다. 궁극적으로는 비물질적인 것들까지, 특히 명예 따위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집착할수록 곤두박질치는 것이 명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연의 덫까지도 내려놓아야 아름다운 마무리라 할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4:46

‘노인’ 넘쳐나는데 ‘어른’ 찾아보기 힘든 사회라니…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0. 어른스러운 어른
2017년 01월 09일 (월) 14:19:41 교수신문 editor@kyosu.net

동지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더니, 어느새 2017년 깨끗한 달력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한 해가 밝으며,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또 한 살을 더한다. 저항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개개인의 철학이자,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젊어보이시네요!” 

누구나 싫어하지 않는 입발림 말의 1순위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어려보여요!”라는 변형으로 쓰인다. 나이보다 젊어보인다, 또는 어려보인다. 이 말은 과연 칭찬의 말일까. 

어리다는 말의 어원은 『용비어천가』(1447년)에서 ‘어리다(愚)’로 등장한다고 한다. 중세국어에서 ‘어리다’의 의미는 이처럼 ‘어리석다(愚)’였다가 ‘나이가 적다(幼)’로 변화하면서 17세기부터는 ‘어린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라 한다. ‘어린 소견’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현대어에서도 여전히 ‘생각이 모자라거나 경험이 적거나 수준이 낮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옛날에는, 뭔가 잘못을 하면 철이 없다고 속이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 반대로 듬직하고 조신하다는 말은 칭찬이었기 때문에, 어른스럽다는 말이 오히려 좋은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변화가 생겼다.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1979)에 이르면 ‘젊은 여자끼리 몇 살쯤 어리다는 게 우월감이 될지언정 열등감이 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고 당시의 세태가 표현되었다. 어리다는 것이 여자의 우월감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론 젊은 여자들에 한한 이야기였고, 어른은 어른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언제부턴가 봇물이 터지듯 경계가 무너졌고,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서는 도통 나이를 짐작도 못한다. 

딸을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가 이모 같다느니, 심하면 언니 같다느니, 그런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게끔 ‘어려보이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남자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 아저씨보다는 오빠로 불리기를 좋아한다던가? 어리(석)게도!

   
 

등산복이 노인의 교복이 된 시대 

 

어려보인다는 것, 어린 것이 아니라 어려보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젊음만이 아름다운 가치일까. 온 나라가 운동과 건강식 붐이고, 건강관리를 받는 1년 회원권이 집 한 채 값인 곳도 있다는 뉴스에도 놀라움에 슬쩍 부러움이 섞인다. 

나이 들면 젊게 오래 살자고 운동을 하는 것이 생의 최종목적이 되어버린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웃도어가 노인들의 교복이 될 줄이야. 알록달록 옷들은 노구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고 겉돌아서 보는 눈이 다 피곤하다. 구부정하고 일그러진 자태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은 것이 아웃도어다. 히말라야 원정을 가는 것도 아니면서 온갖 기능성의 이름으로 너무도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도 않을까. 

그렇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돈이 소모되고 있다. 거기에 소모된 시간만큼을 더 산다고 해도, 연장을 위해서 그만큼의 시간이 사라졌으므로 플러스-마이너스로 답은 같다. 

 

또 젊어보이는 것이 생물체의 사멸과도 무관하다. 이 시대의 철학은 그런 진실에 눈을 감는 듯하다. 위아래며 애어른 할 것 없이 미모 집착증이 온 나라를 삼키고 있다. 벌써 10여 년 전에 영국의 BBC에서 <한국에서의 미모의 값>이란 특집방송이 있었다. ‘미모 광(beauty craze)’에 사로잡혀 천차만별의 값을 지불하고 때로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완벽한 몸을 갖기 위해 애쓰는 이상한 사람들이란 취지였다. 취업에도 필수적이라고 하니, 어쨌거나 젊어서는 미모가 중요할 것도 같다. 또 슈퍼리치들은 천문학적 투자로 미모를 사들이므로, 부와 미모는 동일 차원에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노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젊어보이는 가짜 얼굴들이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삶에까지 침투했다. 무작정 시커먼 눈썹과 억지로 파놓은 동그란 눈 때문에 오히려 밉상스러워진 이 얼굴들을 어쩌란 말이냐. 이것은 차라리 미학적 쇼크다. 우리들 원래 동그란 얼굴은 눈썹도 가늘고 눈도 가늘 때 훨씬 더 예쁜 것을! 

한글문서를 작성하면서 순간 느낀다. 문서처럼 쉽게 ‘되돌리기’를 할 수는 없을까. 요양병원에 내팽겨져서도 그 짙은 억지 눈썹이 낙인처럼 시커멓게 살아있으면 어쩌나. 소용없다. 우리는 옛날부터 따라쟁이다. 영이네가 세탁기 들여 놓았으니 순이네도 빚을 내어서라도 세탁기를 들여놓아야 했던 그 시절부터다. 영이엄마가 했으니 순이엄마도 해야 하는 그것, 야매(!)성형과 미용주사들. 자유성형공화국 만세!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 들어 예쁜 얼굴이야 있을까만, 옛날에 우리가 어려서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괜찮았다. 어려보이는 어른이 아니라 어른 같은 어른들이었다. 그것은 세월을 초월한 조화다. 지금도 기억한다. 적당히 늙고 주름진 얼굴에 적당히 센 머리에 적당히 굽은 등을 하고 널부렁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걷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른 나이에 있었을 많은 어려운 순간들을 이기고, 이제 다가오는 종착역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편안하게 보였다. 가지고 갈 것도 남기도 갈 것도 많지 않아서 뭔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삶이야말로 넉넉해 보였다.

 

내가 늙은이가 된 지금은 주변을 돌아보면, 파리하고 살짝 빛바랜듯 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노인들의 자태가 여간해선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초록도 단풍이 들듯이, 황홀한 단풍도 우수수 바람에 날리듯이, 자연을 닮은 노인들이 그립다. 왜 지금은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른스러운 어른되기가 힘들까. 거짓과 우격다짐으로 불린 명성과 재산이 많으면 잃을까 걱정이고, 없으면 없어서 분통나고 그러는 것일까. 통계수치로 보면 옛날보다 잘들 사는데, 어른들도 젊은이들 따라서 헬조선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새 달력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다르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중하차하지 않고 나이를 먹는 것은 축복이다. 지구가 아직은 허락한 또 한 번의 봄을 맞게 되다니!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어려서 골목 양지바른 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또래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제 손녀들은 고무줄놀이 같은 것을 모르니 노래를 가르쳐줄 수도 없게 되었나? 할 수 없게 되는 일은 어차피 많아진다. 다만 한 계단 더 오른 어른으로서 덜 어리(석)자고 다짐할 일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2. 30. 06:02

‘정치적 올바름’을 불편해 하는 사회… 內面 숙고할 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9. 옳은 것, 좋은 것
2016년 12월 26일 (월) 14:07:35 교수신문 editor@kyosu.net

한국과 미국에서 PC가 회자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태블릿 PC 한 대가 과거를 정화하는 실마리가 돼 있는데, 전혀 다른 뜻으로 미국의 PC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정치적으로 옳은(politically correct)’을 줄여서 말하는 PC 현상이 미국의 대선에서 현 정부의 패인 중의 하나였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치적으로 옳은, 인권이 고려된, 차별적 편견이 없는’ 가치들은 사회적 불편부당을 개선해가려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가치라 하겠다. 우리는 갑자기 현대 문명권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관계 규범과의 충돌이 있었지만, 전후의 빈곤 탈출이 최선의 가치였던 시절에는 감히 정치적으로 옳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강자가 부강해지는 동안 약자는 밥을 굶지만 않아도 된다는 편향적 의식이 지탄의 대상도 아니었다. 빈부의 양극화를 낳은 사회경제적 갈등으로 인한 계급의식과 근거 없는 지역주의로 인한 차별과 불만이 여전한 우리 사회로서는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란 부러운 것이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기도 하다.

 

우리가 달성하지 못한 ‘정치적 옳음’이 최선으로 추구되고 있으면서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나라도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진다. 예컨대 현재 오바마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사회는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를 추구하려고 애쓴다. 크리스마스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공식적으로는 삼가자는 문화는 다민족국가에서 타 종교인을 의식한다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이자 예의바른 처사다. 절대다수인 기독교를 무조건적으로 최우선이라고 하는 대신에 소수 비기독교인의 감성을 ‘좀 봐주자!’ 그런데 전통적 기독교인 대다수는 그것이 싫었다는 말이다.

또 학교에서 펄럭이는 국기를 보면서 자라온 수많은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미국 국적이 아닌 몇몇 소수의 학생들의 불편감을 걱정해서 교정에 국기를 내걸지 못하는 현실에 황당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옳음도 싫으면 싫다는 반응은 감성적 판단이다. 감성적 의미에서는 옳고 그름 보다는 좋고 싫음의 대립이 일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 지도층의 독선이 이러한 편향적 가치와 합쳐졌을 때 생겨나는 폭발력이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옹호하며 ‘위대한 미국’을 외치는 트럼프 당선자의 거침없는 목소리에서, 그의 금발머리와 푸른 눈에서, 무엇보다 그가 이룩한 엄청난 부의 성채에서 강하고 우수한 인간의 승리를 본다. 궁핍을 모르는 사람, 자유경쟁이 도덕적이라고 믿는 슈퍼리치들은 가난이나 열등함을 죄악시하기 쉽다.

예컨대 인간을 우열로 판정하려했던 우생학에 젖어있던 히틀러 시절에 독일은 학생들의 세뇌에 탁월했다. 전국 장애인들 총 숫자가 얼마인데, 곱하기 일년에 그들을 위한 보조금 총액이 얼마인데, 그 액수를 젊고 건강한 신혼 커플에게 일정액씩 지급한다면 몇 커플을 지원할 수 있는가 따위로 방정식 문제를 풀게 하는 식이다. 그러한 교육현장에서는 장애인들은 우생학적으로나 국가경제적 이유로 ‘처리’돼 마땅하다는 인식을 가진 국민들을 길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환영을 하필이면 다양성이 존중받는다고 믿는 선진사회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트럼프의 대선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미국을 다시 하얗게’라는 낙서로 변형돼 길거리나 교정의 담벼락에 나타난다고 한다.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문양도 함께 등장한다는 뉴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건 기우이겠지만, 만일 미국의 학교교육에서 멕시코로부터의 무단 월경해온 사람들의 숫자가 일년에 몇이고 그들을 지원하는 액수가 총 얼마인데, 그 총액을 장학금으로 바꾼다면 몇 명의 학생들을 지원해줄 수 있나, 하는 식으로 산수를 가르치고, 그러므로 불법이민자는 악이고…. 만일 그렇게 세뇌된다면 백인계의 우월감과 인종주의는 예측 불허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소년 유격대원들이 미국놈들에게서 뺏은 총의 숫자를 더하는 식의 북한의 산수교과서를 미국의 입장에서 질 낫다고 탓할 수나 있겠나.

 

‘불안감’ 악용하는 정치세력

 

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우수한 유럽인종들이 원조 인종주의자들이다. 19세기 중반 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가 쓴 『인종 불평등론』은 ‘세계문명의 발전은 백색인종이 창조한 것이며, 열등인종과의 혼혈에 따른 인종적 퇴폐로 문명은 몰락한다.’는 공언을 내놓았다. 나치의 소위 ‘퇴폐예술’ 말살 정책도 거기에서 출발했고, 아리안 인종의 우월주의에 따른 전대미문의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인류가 선한 의지로서 진화해간다는 믿음은 불완전한 것 같다. 유럽에서는 벌써 네오나치즘이 고개를 들었다. 1960년대에 독일 국가민주당(NPD)에서 시작해, 프랑스의 민족전선, 이탈리아의 북부동맹,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등도 네오나치즘을 지향하며 목소리들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프란츠 보아스의 연구서 『원시인의 마음』(1911)에서 증명된 바, 인종은 생물학적 차원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예컨대 미군을 대상으로 한 IQ검사 분석에서 북부의 흑인들이 남부의 백인들보다 지능이 높다는 결과나, 인류형질학적 연구와 가계도 분석에서도 흑인과 백인의 혼합으로 태어난 소위 ‘잡종’ 인구가 ‘순수 유럽계’로 알려진 사람들보다 오히려 인종적으로 더 동질하다는 결과 등을 내놓았다. 궁극적으로 인종적 문화적 상대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최근의 인종주의는 생물학적인 차원보다는 종교적 문화적인 차이와 민족성의 문제를 표방하는 일종의 사회적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민족적 정체성과 번영을 위협받지 않으려는 본태적이자 맹목적 저항심과 그에 따른 두려움 같은 것에서 기인하는데, 정치세력이 이를 이용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까 심히 우려되는 것이다.

 

우리도 정치적 옳음에 대해 깊이 숙고해야할 단계에 이르렀다. 우선 백만이 훨씬 넘는 외국인과 다문화가정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 나 아닌 이웃, 다른 인종에 대한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일까. 굳이 면벽수도를 하지 않아도 조금만 마음을 가다듬으면, 타인을 향한 불안감은 기실은 근거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다음 순간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지 알 수 없는 나, 나 자신 외에는 두려운 존재가 없다.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가 되기를, 그를 따름에 있어서도 감성보다는 차분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80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2. 18. 23:09
       

그들은 왜 檀紀를 못쓰게 했을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8. 역사 배우기
2016년 12월 12일 (월) 14:44:14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대통령 탄핵소추가 국민의 불같은 염원 속에서 들끓고 있다. 그렇다고 탄핵 정국에 파묻혀 어물쩍 지나가서는 아니 될 정말 중요한 것이 역사 교과서 문제다. 문자 그대로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는 중대 사안이다. 교육부가 “균형 있는 역사관과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수 있는 교과서”라고 현장본을 제시했지만 오류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올바르다’는 말은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는 뜻인데, 이치나 규범은 누가 정하고 옳고 그름을 누가 정하는가. 바로 그런 이유로 ‘역사 국정교과서’은 그 자체로서 위험을 내포한다. 특정 시대의 특정 정권이 ‘옳다’고 정하는 것이 영원 무궁히 옳을 확률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몸소 체험했으니 전문가가 왜 필요하냐는 집필진의 인터뷰를 보고는 많이 놀랐다. 체험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역사서가 아니라 장님 코끼리 관람기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됐다(1948.8.15)”는 문장은 엄청난 오류와 저의를 지녔다. 역사 기술에서 오류는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지만, 저의는 더욱 문제다. 역사 기술의 객관적인 방법은 기록물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관보』가 현존한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이 실려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당시에 이 문구의 뜻은 분명했다. 대한민국은 애초에 ‘기미 3·1운동으로 건립’됐고, 광복 후에는 다만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 

그 관보의 발행 일자에는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는 연호가 사용됐다.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기미년(서기로 말해서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확인이었다. 엄연한 사실, 팩트다. 저의로 보이는 부분은 바로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다. 제헌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재건’을 어물쩍하게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려는 목적은 다분히 수상하다. 


‘광복 후 건국’이라는 논리는 기미년 임시정부 구성 이래의 대한민국 30년 기간을 부정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세력의 주장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30년 동안을 부인함으로써, 국가가 없었으므로 우리 민족이 일본에 붙어살았건 만주국에 붙어살았건 그다지 죽을죄가 아니라는 해석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주군에 복무했건 일본군에 복무했건 나라가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는 해석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희생된 넋들은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저항에서 그리된 것으로 격하될 위험에 처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도 해방 후 이념 투쟁에서 적대시된 인사들은 애국은커녕 좌익 빨갱이로 낙인찍히는 것이고, 만주국이나 일본국에 복무를 했어도 여차여차 노선을 바꾸어 몸을 세탁하고 나면 애국적인 인사가 될 수도 있다는 횡재 아니겠는가. 아니, 대박인가?

 

역사 기술의 규범은 감계(鑑戒)다.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경계’만이 실록과 사초를 지켜낸 정신이다. 그러므로 ‘뼈아픈 진실(home truth)’을 마주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버지를 미화하려는 효도가 결코 효도가 아닌 것이, 권력자의 자화자찬은 후안무치일 뿐이다. 뼈아픈 진실을 외면하려다가 닥친 오늘날의 현실을 직시하시라.

저간의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의심한다. 기업인단은 국정교과서 편찬에 또 얼마를 선의로(?) 출연하고 ‘역사돋보기’같은 그 좋은 코너를 할당 받았을꼬! 가차 없는 무한경쟁으로 엄청난 부자가 된 이야기가 무에 그리 교육적일까.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축재에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너무 못 가진 사람들의 몫이 치우쳐 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부들이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이 사는 동네에 더 많은 산소농도를 보유하기위해서 가난한 마을의 공기마저 빼앗아갈 기술을 개발할지도 몰라, 그런 불안감마저 들 정도로 그들은 두렵고 막강한 존재다.

또 하나 엄연한 사실이 있다. 광복 후 재건된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우리는 단군기원으로 역사를 배웠다. 재건된 대한민국은 그 처음에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지만, 곧바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라고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은 『삼국유사』에 기록되기를 환웅이 웅녀와 결혼해 낳은 아들로서 단군왕검이라고 불렸다고 배웠다. 곰이 변한 선조할머니라는 이야기는 약간 꺼림칙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자연친화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곰일 수도 있었을 우리들, 고기를 먹기 싫으니 차라리 토끼였으면 좋겠다고 깔깔대던 시절이었다.

 

훈민정음 3779, 임진왜란 3925, 을사늑약 4238, 경술국치 4243, 기미 독립선언 4252…. 네 자리 숫자 외우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4000년 전 사람들이 아득하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그렇게 단기를 살다가 4295년이 되려는 아침에는 갑자기 1962년 1월을 맞게 됐다. 우리는 난데없이 모든 연도에서 2333을 빼서 외워야 했다. 훈민정음 3779-2333=1446, 임진왜란 3925-2333=1592, 을사늑약 4238-2333=1905, 경술국치 4243-2333=1910, 기미독립선언 4252-2333=1919…. 역사 공부는 뭔가 엉켰고 힘들어졌다.

 

누가 단기를 없앴는가. 쿠데타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군부세력은 집권하자 괜스레 공식연호부터 변경했다. 단기연호를 폐지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문명국가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 우리나라의 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니, 단기를 사용하면 야만국이라는 논리는 무슨 근거였을까. 우리 역사의 상징인 단기를 버리고 서양을 따라가는 문명국가, 바로 그러한 사관이 사대주의다. 단기가 없고서는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가 아니다. 역사 배우기를 단기로 시작했던 늙은이의 단순한 향수나 푸념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52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2. 18. 23:06
不義·不正 휩쓸려간 교수들… 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7. 인식과 행동 사이
2016년 12월 01일 (목) 10:44:4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옛날에, 청소년기에, 가슴을 떨게 했던 한 문장이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생각, 즉 사유의 주체인 내가 존재한다는 개념은 순수존재로서의 순수의식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라는 의식은 존재하지만, 그 문장이 완전하지 않음은 한참 뒤에야 터득하게 됐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다는 의미로서 의식에 가깝다는 것.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 오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인식에 가까운 이 의식은 의식할 무엇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 즉 대상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육신이 우리가 섭취하는 것의 총체이듯이,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의 집합이다. 그러다보니 먹고 싶은 것을 좇아 먹이를 구하듯이, 인식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서 인식하려는 본능이 발동하게 된다.

자유의 개념에 걸면, 우리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무한 자유에 내맡겨진 존재다.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라는 카테고리를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 심지어 생물학적인 질서를 거스르는 동성애자가 되는 일도 가능하다. 이슬람이 될 수도 이슬람을 저주하는 십자군이 될 수도, 아예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다. 되어도 좋다. 다만 무엇이 되건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안과 더불어 그 책임도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책임을 뺀 그 극단에 가면 곡학아세의 상태가 되는가 보다. 바른 길에서 벗어난 학문, 세상 사람에게 아첨하는 학자가 많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오늘 한국의 수치스런 민낯을 만들어낸 장본인들 중에는 학자 출신이 적지 않다. 폴리패서라고 불리는 모두가 그러할 리는 없지만, 상당수의 빼어난 폴리패서들이 정치권력 앞에서 곡학아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사전에서 설명하는 '정치'란?

정치의 속성이 학자를 삼켰나? 궁금하면 사전을 찾는 버릇대로 사전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 집 서재에 최초의 영어사전이라는 로버트 코드리의 『알파벳 순서로 된 단어일람표』(1604년)는 아니지만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1755년) 사본이 있다. 언젠가 ‘귀리’ 항목에서 너무도 쓰라진 진실을 발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잉글랜드에서는 주로 말에게 먹이는 곡물,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의 생계를 담당한다.’ 그래, 18세기에는 그랬구나. 어휘를 정리해주는 사전이야말로 시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느꼈다. 그래서 ‘정치’란 옛날에는 어떤 뜻이었을까 찾아보기로 했다.

정치적이라는 단어 ‘political, politic’의 뜻에 ‘artful, cunning’이라는 의미가 있고 보면, 예로부터 정치란 교묘하고 교활한 어떤 것을 포함하는가 싶다. 그래서 고결하게 학문에 정진하던 학자들도 정치판에 가면 교묘하고 교활한 면모를 갖게 되나 보다. 그러니까 고결성을 지켜내는 첩경은 아예 정치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학자로서 정치적 야망이 있다면 자신의 고결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촌철의 수행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권의 과잉 호의에는 검은 그림자가 따라오게 돼 있다. 불의와 부정의 블랙홀로 휩쓸려 들어간 일부 교수들의 행태를 신자유주의의 덫이라고 이데올로기 탓만 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타당도와 선악도를 생각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이 바로 학자요 교수의 책무이거늘. 

이것은 그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지는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최근에야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칠레의 밤』을 읽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노벨상이라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연설에서 “암흑 속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으로 뛰어내릴 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직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글”만이 그 품격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흠칫 놀란 적이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첫 페이지에서 말한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다.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공부했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생각났다. 볼라뇨에 비하면 반세기 전인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권력자에게 굽히며 자신을 바치는 작가는 강도보다도 살인다도 더 악랄한 수법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강도나 살인에는 명백한 법조항이 있고, 선고받은 죄인에게는 법이 속죄의 길을 열어준다. 결국 산수 계산문제처럼 딱 잘라서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그런대로 얼마만큼은 죄의 정산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배반을 자행한 작가는 그의 언어가 말하는 모든 전체를 팔아넘기는 것이며, 불문율 앞에 던져진 까닭에 처벌도 불가능하다. 작가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가서는 오류였음이 밝혀질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발설하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순수한 진실임을 믿고 있어야 한다.”

교황의 무오류성을 예외로 하면, 모든 인간은 많건 적건 오류 덩어리다. 오류란 사유의 혼란이나 감정적인 동기 때문에, 또는 부주의나 태만의 결과로서 발생한다. 선의의 당의정을 입힌 악행은 악행일 뿐이다. 자신의 속성을 배반하는 것은 거짓이다. 어미가 어미임을, 의사가 의사임을 배반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정치가, 학자, 작가, 예술가 등이 자신을 배반하는 일은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파장이 크다. 소위 폴리패서들이 학자의 본성을 포기하는 순간 곧 ‘교묘하고 교활한’ 정치가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검은 세상의 블랙리스트

그렇게 학자들이 정치판에 묶여있는 동안 후안무치의 일들이 온 나라를 삼켰다. 문학예술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과 함께 믿거나말거나 명단마저 돌아다닌다.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작가들을 존중한다. 세상이 검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들어가야 하얀 사람이라는 증명이 된다. 블랙리스트에도 못 들어간 나 같은 회색분자가 가장 비열할지도 모른다. 문학이 세상의 고결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위험한 직업이라는’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식과 행동 사이 불안한 공간을 뚫고 나가는 의지를 갈구할 일이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는 생각한다.’ 비판은 누구나 한다. 인식이 아니라 행동에 이르렀을 때만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벌써 옛날에 괴테의 파우스트는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라고 외쳤지 않은가.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30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1. 22. 01:22

대학마저 집어삼킨 권력 … 악명 높던 공평 다 어디갔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6.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

2016년 11월 16일 (수) 12:18:5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알 수 없는 것이 선거인가 보다. 부도덕의 집합으로 보이던 인물도 자유 천국이라는 국가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 지난 대선에서 우리나라도 국정원 관련 엄청난 의혹 속에서 가까스로 이긴 대통령을 낳았다. 가까스로 이겨도 권력은 통째로 주어지는데, 아뿔싸, 우리는 “개인사도 홀로 챙길 줄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을 뽑았었나 보다. 그러니 국사와 역사를 어찌 감당했겠는가.

예쁜 옷 갈아입혀주면 입고, 우아한 미소 지으라면 짓고, 가끔 레이저 광선 쏘라면 쏘고. 나머지는 개인사와 국사를 통틀어 전권을 위탁했으니,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그들이 권력을 쥐었으렷다. ‘권력이란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이 갖는 합의를 통해 나오는 힘’(한나 아렌트)일진대, 저들의 손에 바쳐진 권력은 온 국민들을 향한 폭력이 되어버렸다.

 

이화여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이 위탁정치의 전횡은 방방곡곡에서 깃발을 날렸다. 그 하나, 대학입시에서 휘두른 폭력은 모든 청소년과 그 부모들을 슬픔과 한탄에 빠뜨렸다. 대통령이야 자녀가 없으니 부모 마음을 몰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 상상을 절하는 국정농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2013년 5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여자대학 체육과학부에서 체육특기자 종목을 갑자기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승마가 포함됐다. 한 특정 여학생이 전국 승마대회에서 2위를 한 다음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2위에 불만을 품은 여학생 측의 명령(?)으로 승마협회가 곤욕을 치르고, 문체부 공무원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지목돼 경질됐다. 이상한 촌극이었다.

이듬해 그 속편은 경악의 수준을 넘었다. 우리들 가슴에 지금도 현재형으로 가라앉고 있는 잔인한 4월의 세월호 참극이 공교롭게도 그 여학생의 승마 국가대표 선발 의혹의 와중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대통령께서 세월호 난 그 다음날, 체육개혁 확실히 하라고 오더(지시) 내려왔다”는 차관의 전언이 드러났다. “세월호 난 그 다음날”, 아직도 에어포켓에 살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지도 모를 수백명의 생명들을 버려둔 채, 최고 권력자가 ‘조카’를 위해서 체육개혁이나 명령하는 이런 세상에선 아무도 살아서는 안 된다. 아니, 그 폭력에 우리 모두 이미 죽었다.

무소불위의 폭력이 된 권력은 대학마저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위한 산학협력의 한 부품으로 전락시켰고, 이화여대 집행부도 굴했나 보다. 2015년도 체육특기자 모집 요강 중 어떤 자격도 없던 학생이 면접일에 금메달을 걸고 입장한다. 월등한 면접점수는 정성평가 항목이니 법적 책임을 면한다고 치자. 그 메달은 원서접수 마감일 이후의 단체전에서 받은 것이라서 입시 요강에 명백히 어긋나지만 ‘승마공주’는 버젓이 입학한다. “돈도 실력이야…”라고 거들먹거리는 못된 아이, 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폭력 속에서 잘못 키워진 아이.

그 아이(?)가 짓밟아 뭉갠 결과는 참담하다. 하긴, 입학 후 정상적으로 학교생활을 하지 않은 것, 차마 서술하기 곤란한 행동들이 사실이라고 해도, 일탈 그 자체는 개인의 자유요 권리다. 그에 합당한 결과를 인정하고 정규교육을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다. 젊은 모두에게 꿈틀거리는 욕망일 수도 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술가들 중에는 상식에서의 일탈을 승화해 인류를 구원하는 예술작품을 남기기도 했지 않은가. 문제는 그 지저분한 일탈을 만회한답시고 권력을 이용해 학원을 난도질해 입시고 성적이고 뭣이든 “대박”을 터뜨리려는 짓거리다. 우리는 그 폭력의 저열함에 분노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옛날의 이화여대는 정직성이 생명인 곳이었다. 1960년대 학부에서는 심지어 무감독시험이 가능했던 곳이다. 교수는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나간다. 학생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독하면서 감독교수가 없는 채로 시험을 마친다. 커닝을 정직성 훼손으로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번 부정직하다고 낙인찍히는 일이 벌어지면 그 다음 학교생활은 끝이었다.

사무적으로도 봐주기 없는 경직에 가까운 공평성으로 유명했다. 거의 악명 수준이었다. 예컨대 1980년대, 지방에 거주하는 졸업생이 취업을 위해 증명서들을 떼러 간다. 방학 동안의 관례라고, 신청서를 써서 제출하면 다음날 아침 일괄 결재가 나기 때문에 다음날 받으러 가야한다. 지방에서 온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한 사람만 편의를 봐 줄 수 없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립대에서도 비슷한 서류를 떼는데, 사정을 듣더니 시간을 정해주며 다시 오란다. 그런데도 모교를 원망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을 믿었으니까.

지금은 마땅히 사라졌지만, 금혼규칙도 누구에게나 공평했었다. 같은 동기인 인문대 다른 학과 학생이 4학년 2학기를 마친 겨울에 현직 교수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총장 왈 “O교수님, 부인 졸업장 어디 쓰실 일 없으시죠?”라고 농담처럼 던졌다는 말이 법이었단다. 학칙에 결혼하면 퇴학이었고, 결혼식은 졸업식 이전이었다.

 

대통령이라는 ‘허명’

 

공평할 때 우리는 불편함이나 억울한 정황도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 이 수치스러운 현상들은 공평과 정직과는 몇 광년은 떨어져있다. 다만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낳은 결과일 뿐이라서, 온 나라가 치를 떠는 것이다. 사상 초유의 범죄, 딱히 살인을 하지 않았다지만 보통사람들 전부를 ‘혼’을 죽여 버린 그 죄상들은 더 이상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또 수백 번 죽어야하니까.

그 폭력의 정점에서 도덕적 권위와 국정 장악력을 다 잃어버린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한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깊이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아니요. 용서란 그 잘못에 합당한 구체적인 행동으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옷이 아무리 화려한들 그 옷이 맞지 않으면 벗는 것이 옳지요. 이름이 아무리 높은들 그 이름이 허명이라면 마땅히 내려놓아야지요.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1. 22. 01:16

진짜 구중궁궐은 따로 있었으니… 모멸감의 폭발력을 진정 모르는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5. 레미제라블
2016년 11월 01일 (화) 11:30:36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굳이 ‘불쌍한 사람들’ 또는 ‘비참한 사람들’이란 설명 없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레미제라블』은 지난한 소설읽기를 힘들어하는 대중들에게도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깊이 각인돼 있다. 옛날엔 불쌍한 장발장이 감옥을 탈출해 더 불쌍한 코제트에게 꿈과 같은 인생을 선물하는 줄거리만으로도 감동을 주었고, 오늘도 브로드웨이는 소설 『레미제라블』 초판에서의 삽화를 내걸고 공연을 진행한다.

실제 인생이라면 막다른 사창가의 판틴이 꿈을 꿀 수나 있는가, 흙수저 에포닌에게 사랑이 가능이나 한가. 실제 인생에서라면 그릇된 규율에 반기를 든 장발장이 시대적 정의감의 화신 자베르 경감의 대립에서 반드시 승리할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왜 시대를 초월하는 감동을 주는 것일까.

빅토르 위고는 젊은 시절에는 전형적인 근왕파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을 정점으로 확실한 공화파가 됐다. 혁명의 열매로 탄생한 제2공화국 의회에서 위고는 선출직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의 실용적 개혁주의에 적극 찬동했다. 그 대통령이 스스로 쿠데타를 통해서 황제임을 선언하는 일을 상상이나 했었겠는가. 실제로 혁명을 ‘물러버린’ 대통령의 쿠데타는 억지로 나폴레옹의 가계를 잇겠다던 그 황제는 그렇게 역사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그 지점에서 위고의 반대는 시작됐고, 시민군을 조직해 투쟁하다가 체포돼 추방당했다. 

『레미제라블』은 그렇게 스무 해 가까운 추방 생활 중에 쓴 역작이었다. 그의 공화주의 사상은 더욱 심오해졌고, 민중과 민중의 실패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졌던 것이다. 작품 속 민중봉기 장면은 성공한 1848년 혁명이 아닌, 단 이틀 만에 진압돼 실패해버린 1832년 파리의 6월 봉기다. 바로 그 실패로 인해 더욱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리라. 

그대 듣고 있는가 / 분노에 가득찬 노래 / 굴종의 삶을 거부하는 / 우리들의 노래를 / 너의 심장소리와 / 북소리 울려 퍼지면 / 어둠 뚫고 새날이 / 밝아 오리라…… 

영화와 뮤지컬에서의 원제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 혁명을 선도하는 학생회 지도자 앙졸라가 선창하고 학생회 회원들과 군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를 육성으로 들은 것은 아직은 여름의 혹서를 예감하지 못했던 초여름, 광주 5월의 달거리 공연에서였다. 어둠에 쌓인 무대를 손에 든 촛불만으로 밝히며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를 노래하는 김원중과 작은 시민합창단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환하게, 장엄하게. 이 마지막 곡이 끝나고도 한참을 무대며 객석은 움직일 줄 몰랐다. 

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은 위고의 작품 도처에 스며있다. 또 다른 작품 『비참한 세월』에서의 광부들의 일상도 비참 그 자체다. “주인은 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빵이 모자라서 석탄을 깨물고 있었다. 우리는 [……] 일을 조금 줄이고 임금을 조금 낫게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총탄이다.”

임금 대신 퍼붓는 총탄! 현대의 한국어로 바꾸면 총탄을 세금폭탄 정도로 바꾸면 될까. 허나 세금폭탄도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증세는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쓰일 것이라고 믿을 수 있으니까. 세금폭탄도 좋으니 제발 모멸감만은 주지 마시오! 21세기 한국의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모멸감을 견뎌내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이 오늘의 일상이다.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경찰의 물대포 직사와 관련된 실험과 디테일을 제 정신으로 볼 수 있었을까. 철판이 날아가는 방송 제작진의 실험보다는 유리도 안 깨진다는 경찰의 실험을 믿어야 하는가. 물대포 현장에서 쓰러진 응급환자의 수술을 집도한 교수는 ‘단순 외상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임상적 소견’을 피력했었다. 결국 300일 넘게 의식불명이던 환자는 사망했고, 사인은 병사라고 작성된다. 의학을 모르는 우리는 의대교수의 전문가적 견해를 믿어야 한다.

경찰은 어떤가. ‘대한민국 경찰이 설정한 15bar는 안전한 수압’이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사망사고가 있어도 사과를 하는 것이 법적으로 어긋난단다. 법을 모르니 경찰의 견해를 믿어야 한다. 믿으라면 믿어야 ‘혼이 정상인’ 국민이 될 터인데!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혼돈의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모멸감은 증폭해 망연자실에 이르게 한다. 온갖 재단이다 법인이다 설립하기를 무슨 종이접기 정도로 해대는 ‘실세’는 우리를 모욕하다 못해 돌게 만든다. 오늘날에도 왕자와 공주가 버젓이 존재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시중드는 시종들이 즐비한데, 공주들이 동화에서처럼 순결하고 착한 성품을 지닌 것도 아니라면 어찌 하오리까. 진짜 구중궁궐은 따로 있고 정치는 수렴청정을 거치는 모양새라는데, 이를 차마 어찌 믿으오리까. 아뿔싸,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셨단다! 차라리 절대로 아니라고 부정을 하실 것이지, 그렇게 대놓고 국민을 능멸하시다니! 우리가 위임한 성스러워야 할 국가권력이 길거리에 그리도 너절하게 굴러다니다니!

레미제라블! 국가의 품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삶의 근간은 불안하기만 하다. 불쌍한 사람들은 여전히 ‘임금을 조금 주더라도 일정한 일자리를 주시오!’라고 절규한다. 밥은 먹어야 하는데, 전망은 어둡다. 한국의 우상인 미국에서 최저시급을 올리겠다는 대선 선거공약에 그 반작용으로 생산비 절감의 묘수가 봇물을 텄다고 한다. 패스트푸드점 직원만 해도 36.5도의 온도를 가진 성가신 인간에서 무감각한 존재인 로봇으로 바뀔 전망이란다. 로봇은 원래 혼이 없으니 혼의 유무를 걱정 안 해도 돼서 좋아할 사람 많겠다. 인간을 로봇보다 저열한 위치로 끌어내리는 갑의 모욕질에 을의 모멸감은 도를 넘는다. 

그런데 ‘돈 있어 실력 있는’ 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의 가공할 힘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모멸감의 폭발력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밀폐된 공간, 썩은 가스의 압력은 철판도 뚫고 폭발하는데. 역사는 「민중의 노래」를 기억하라고 하는데. 무지해서 모를까, 겁이 나서 외면할까. 충분히 불행한 오늘, 그것이 알고 싶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전남대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인리히뵐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등을 썼다. 퇴임 후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내고 PEN문학활동상,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의 다른기사 보기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무단전재 및 재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1. 22. 01:08

민중의 노래

 

내 고향 광주는 봄이 늘 고통이었다. 그러기를 수십 년, 한 세대가 바뀌어도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른다. 진혼곡이든 무엇이든 불러 목이 터져도 시원치 않을 그날이 오면 더욱 서럽다. 이 노래는 저 노래는 된다 안된다, 합창은 제창은 된다 안 된다, 해서 상처는 더 벌어진다. 근년에는 T.S.엘리엇의 의미에서 잔인한 달이 아닌, 숨이 멎도록 잔인한 4월이 더해져서 남도의 5월은 이미 먹구름 슬픔 속에서 시작된다.

그런 5월이 끝나가는 즈음 사직공원에 위치한 작은 음악당에서 ‘김원중의 달거리’라는 음악공연이 있었다. 매월 있는 공연이라는 의미로 달거리이며, 2003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82회째에 이른 이 굿마당은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부제가 ‘빵 만드는 공연’인만큼 출발할 때부터 실제로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을 후원해오고 있다고. 지금은 정치적 여건으로 공장 가동이 멈추었다고 하니 한 구석 씁쓸해진다.

올해를 여는 달거리 5월 공연 무대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막이 올랐다. 악기 없이 목소리의 화음만으로 연주하는 아카펠라 그룹이 부르는 아름다운 선율에 청중은 그만 숨이 멎었다. 장내에는 완벽한 고요만이 흘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이 노래는 80년 5월의 한이 녹아내린 광주의 노래가 맞다.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보루 도청에서 제 나라 계엄군의 총탄에 산화한 시민군 대변인 윤OO과 먼저 떠난 노동운동가 박OO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다. 하지만 유족이건 시민들이건 아무런 연유도 작정도 없이 저절로 옛 5월을 추념하면서 불러온 노래다. 어느새 민중가요가 되어,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의 자리에서 늘 불리게 되었다. 마침내 1997년에 이르러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어 정부 주관으로 첫 기념식이 열렸을 때는 기념곡으로서 공식적으로 제창되었다. 그제야 ‘사랑도 명예도’ 한을 푸는가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야속했다. 지난 정부 들어서 돌연 제창이 공식 식순에서 제외되고 식전 행사로 밀려나더니, 어느새 제창 자체가 폐지되고 합창단의 메뉴로 변질되었다. 한술 더 떠 현 정부에서는 ‘별도’의 기념곡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미명으로 아예 광주의 노래를 묵살하기에 이르렀다.

광주는 봄만 늘 고통이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는 사시사철 의붓자식이요 외톨이였다.

“선배님, 요샌 괜찮으세요?”

80년대에 어쩌다 서울에서 대학 후배들을 만나면 묻는 안부의 말이 하 수상했다. 불온한 소굴쯤인 광주에서 교수노릇하면서 밥 먹고 살자니 얼마나 고생이냐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이었다.

그런 광주에서, 또 어느 5월에 열린 음악공연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불려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게 되다니. 어쩌면 당연한 선곡이었을 것이다. 공연을 주관한 김원중은 대학 재학 시절에 「바위섬」으로 세상에 나온 가수다. 소위 지방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유명해진 노래는 드물다고, 올해도 7월 초 7080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그렇게 소개한 곡이기도 하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 인적 없던 이곳에 /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 모두 사라지고 /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 [중략] //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 살고 싶어라~ //

80년 5월 이래 어쩔 수 없이 고립된 광주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였으니, 그는 광주를 노래하는 가수일 운명이었다. ‘광주의’란 형용사가 더 큰 세상으로의 발돋움에 걸림돌이 될지언정, 그가 없는 광주는 이상할 터다.

이번 5월 공연의 주제는 가수의 말 그대로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 더는 노예적 삶을 참지 않겠다는 민중의 노래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 삽입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시작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혁명을 선도하는 학생회 지도자 앙졸라가 선창하고 다른 학생회 회원들과 군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그대 듣고 있는가 / 분노에 가득찬 노래 / 굴종의 삶을 거부하는 / 우리들의 노래를 / 너의 심장소리와 / 북소리 울려 퍼지면 / 어둠 뚫고 새날이 / 밝아 오리라……

영어와 한글로 노래하는 김원중과 시민합창단의 목소리는 손에 든 촛불만으로 밝힌 어두운 무대 위에서 떨고 있었다. 환하게, 장엄하게.

노래의 배경이 된 1832년 파리의 6월봉기는 진압된 민주화운동으로서의 광주의 5월과 놀랍도록 맞닿아있다. 1830년 7월혁명으로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하원에서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선출했지만, 공화주의자들의 견해에서 보자면 왕에서 왕으로의 대체는 무의미했다. 1832년 6월 라마르크 장군의 시민장 장례 행렬이 바스티유광장으로 향하면서 시작된 봉기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터졌다. 하지만 밤새 2만 5천명 정규군이 합류했으니, 시민군의 바리케이드는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마지막 보루 생 메리 교회에서 시위대의 손실은 93명 사망에 291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로 컸다.

1980년 광주의 5월. 군부독재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을 행해 시위 나흘째인 21일에 본격적으로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 27일 새벽 투입된 2만 5천명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이란 이름으로 1만여 발의 사격을 감행했다. 진압은 훌륭하게(?) 종결되었다. 정부가 인정한 공식적인 사망자 수만 해도 154명이었다.

그러나 잠깐, 순간의 평가로 본 실패란 언제나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파리의 6월봉기는 좌절했지만 혁명의 정신은 잉태되어 무르익어 갔다. 세월은 흘러서 1848년 2월혁명이 도래하고, 그제서 성공한 혁명은 마침내 제2공화정을 이끌어 내며 온 유럽으로 확대되어 세상을 변하게 하지 않았던가. 하긴 그 대통령이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공화국을 폐지하고 제2제정을 수립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수밖에.

역사의 아이러니는 끝도 없다. 1980년 5월 광주의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했던 그 11공수특전여단이 이제서 감히 그 광주의 금남로에서 호국퍼레이드를 꾀하다니. 보훈처가 그 계획을 전격 취소했으니 망정이지, 11공수특전여단이 광주에게 누구인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그들은 잊을 수도 있다니. 때로는 무심함도 죄렷다. 광주 사람들은 어째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쉬이 잊지 못할 것이다.

..................................

「가을 속에 봄은 잉태되고」 , 이대동창문인회, 320~324 , 2016.11.7.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1. 22. 00:57

To our Readers 2016,

 

All over the planet this summer was awful with its heat. The mercury went up to 39 degrees on the Korean Peninsula, which set a weather record here. How can human beings endure the heat which is higher than their own body temperature? Meanwhile man-made catastrophes have rocked the whole world. Besides, anticipating a third war due to North Korea's nuclear bomb tests and the plan to deploy THAAD, a heated debate has arisen. Even relatively people recall Plato's word: ... he who refuses to rule is liable to be ruled by one who is worse than himself. People in a dilemma have to have a stance.

In such intense heat and underlying anxiety the members of PEN Gwangju tried to publish our annual and the editorial board was working on translating poems and essays. We did it to help our literary works be read in another corner of the world. The will itself is praiseworthy, but who knows, it could transform or even destroy the meaning of the originals.

The French words "belles infidèles" is frequently cited to suggest that translations can be either faithful or beautiful, but not both. How can we satisfy such an antinomic demand? We, the editorial board, concentrate on the Scottish historian Alexander Tytler, saying that an assiduous reading is a more comprehensive guide to a language. Sometimes more than dictionaries can do. We read the original texts so earnestly, that we had to trouble the writers with many stupid questions. These tasks are done. We just hope it will not end in great failure. Please read this annual with a somewhat Korean accent and mind.

Thank you for everyone who gathered here to bring out this shabby annual. Thanks for the decision of President Park Panseok and the executives to continue the translation publishing, partially as usual, in spite of the unfavorable financial condition. Of course, the best thanks to our readers!

Suh Yongjwa

Honorary President of PEN Gwangju (Korean Centre)

 

........................................................................................

 

『국제펜광주』 14호, 14~15쪽, 2016. 11. 15.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0. 17. 22:38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불로소득으로 부자 꿈꾸는 젊은이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4. 장래희망
2016년 10월 17일 (월) 12:17:42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장학 퀴즈 비슷한 어느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한 명 씩만 남은 상태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도중에 숨을 고르라고 여유를 두면서 아나운서가 물었다. 장래희망이 무엇입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채널을 고정하고 귀를 쫑긋했다. 옛날 같으면 남학생은 피상적으로 대통령 아니면 장군이었고, 여학생은 현모양처인 적도 있었다. 자신들의 꿈보다는 부모님들의 소원을 들어서 그렇게 말하곤 했으리라. 시대가 바뀌고 또 바뀌어 남녀학생 모두 연예인을 꼽는다는 보도가 나온 지도 오래다. 부모들도 앞 다투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만들기에 투자한다고들 했다. 그래, 공부로 승부할 것 같은 두 사람, 너희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남학생의 대답은 상식적이었던 것 같다. 의사이거나 판검사, 뭐 보통 선호하는 번듯한 직장이었다. 다음 여학생의 대답에 놀라서 앞에 들었던 단어가 확 날아가 버렸다.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 

예로부터 정석에 없던 새로운 희망직종, 건물주다. 청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꿈은 젊은이의 권리다! 다 시궁창에나 처박을 옛말들이다. 건물주가 되어 불로소득으로 생활하고 싶다! 그것이 저 앳된 소녀의 장래희망이라니. 

다음 순간 아이를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건물주를 잘 못 만나서 전전긍긍 살아가는 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구나. 커서 건물주가 되어 효도하고 싶다며 자랐을 것이다. 본심이 다 그런 세상에서 본심을 말하는 것이 정직한 일 아니냐. 갑질하는 건물주가 죄고, 일 적게 하고 돈 많이 버는 것을 효율이라고 가르친 우리가 죄다. ‘투입과 비교된 산출의 비율로 정해지는’ 효율성은 인적자원개발(HRD)이라는 이름으로 조직 내 인적 자본의 확충을 위한 활동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렇구나. 잘 되려고, 무조건 잘 되려고!

하긴 생각해보면 ‘건물주’의 위력이 도처에서 드러나는 세상이다. 오피스텔을 열도 아니고 백 채를 소유한 고위 공직자가 있었다. 최상의 대학을 나와서 최상의 시험에 합격해서 최상의 자리를 넘나들던, 참 교양 있어 보이던 엘리트도 ‘부동산 임대사업자’ 등록까지 하고서 합법적으로 부동산 재테크를 했더란다. 지도층은 주식인지 펀드인지 하는 금융투자에서도 수직 상승만을 거듭한다. 신기하다. 이렇게 운 좋은 사람들은 청문회도 통과하고 요직에도 임명된다. 이제는 투자와 부자 되는 일은 능력이다 못해 덕목이 되어버린 것 같다. 

옛날에는 달랐다. 흉년에는 논도 사지 말라고 했다. 보릿고개에 처자식 굶어 나가는 꼴 차마 못보고 내미는 땅문서를 곡식 몇 자루 내어주고 사들이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똑같이 주어진 공기를 훔칠 수 없듯이, 누군가에게 똑같이 주어진 기본적인 먹을 기회를 앗아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앗아간다. 그것이 투자다. 재화의 양은 정해져 있으므로 누군가 많이 소유하면 누군가에게는 없다.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0% 부자들이 86%를 보유하는’(크레디트스위스, 2013) 불평등 세상이 됐다. 

자본의 소유 과정도 점점 문제가 되고 있다. 옛날에는 자본가들이 제조와 생산 중심인 ‘본연의 자본주의 구조’로 돈을 벌었는데, 요즘에는 금융에서 돈을 축적한다. 자본의 본고장 미국의 예를 들면, 아버지 롬니는 1950년대 자동차 업계 최고경영자였고, 기업을 운영한 동안 소득의 36%를 세금으로 냈다고 한다. 2012년 대선 때 공화당 후보였던 아들 롬니는 무슨 캐피털에서 금융으로 아버지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었고, 부자들이 내는 세금이 1980년대 이래 최저 세율임에도 부자 감세를 주장한다.(한스 위르겐 크뤼스만스키, 2015) 

그러니 따라쟁이 한국 부자들도 생산보다는 금융으로 부를 축적한다고 보면 옳을 것이다. 보다 효율적인 방식을 위해 권력이 동원돼 부를 낳고, 부가 권력을 낳는 상부구조가 정착된다. 나머지는 그들의 우월감을 확인시켜줄 대상으로 전락한다.

자식을 낳으면 너도나도 죽자고 공부만 시켜온 나라인데, 공부만으로는 상부구조 진입이 수월치 않은 구조가 됐다. 돈은 인재를 스카우트해서 ‘패밀리’를 견고히 하는 이득을 얻고, 인재는 효율적으로 상부구조에 안착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상부구조는 거미줄 한둘쯤 뚫리어도 끄떡없다. 거미줄의 재질은 다이아몬드 가루를 둘러쓴 듯 견고하니까.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희망이 없지는 않다. 거미줄에 덤비는 일은 자멸인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누군가가 (아마 도가 지나쳤다고 믿는 경우) 책임감으로 ‘그들의’ 의혹을 폭로한다. 물론 아직은 달걀로 바위치기다. 의혹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의혹에 손을 대려는 사람은 사생활이나 형식적 사안만으로 퇴출된다.

여전히 남는 의문 하나. 충분히 상부구조에 안착해 있어도 왜 요직을 희망해 청문회장 같은 곳에 나올까. 요직에 가면 혹시 더 많은 건물주가 될 요술방망이라도 쥐는 것일까. 다만 고등동물의 명예욕일까. 청문회장이 아니었다면 다소 과한 부의 축적 과정에서의 도의적 부끄러움이나 ‘간단한’ 교통사고쯤 인간적 흠결도 완전히 숨길 수 있었을 것 아닌가.

하긴, 사고현장에서 경찰을 속이고 나라와 법을 속인 행위도 요직에 임명되고 나면 윤리적인 ‘마음의 빚’으로 치환된다. 의문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증폭된다. 신분을 속인 과거를 가진 인물이 자신이 속였던 조직의 수장이 되는 일은 모순일까, 아닐까. 우리 보통사람들은 그 조직을 존중하고 신뢰해야 하는가, 아닌가. 부적격 판정을 받아도 임명되면 장관이고 해임건의안이 통과돼도 철옹성이 지켜낸다. 이번에도 형식적 문제를 침소봉대해서 그것만 죽을 죄라고 할 것인가.

본말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됐다. 제 안전은 제가 지켜야하는데, 돈 아니면 권력, 아니면 그 둘의 합이 요술방망이다. 퀴즈 방송에서 장래에 건물주가 되고 싶다던 여학생이 다시 떠오른다. 그래, 건물주가 되거라!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세상에서, 너라고 다른 이상적인 직업을 꿈꾸어야 되는 법은 없겠다.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이 ‘성인이 되면 이민가고 싶다’던 기사에 비하면 네 꿈은 덜 절망이구나. 

하지만 미안하구나. 세상에 태어나 겨우 그 만큼만 꿈꾸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네 후손들이 더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으려면, 너희는 또 어찌 살아야 한단 말이더냐. 부디 세입자 눈물 빼지는 말아다오. 혹시 더 많은 건물을 소유하게 되더라도 학교 건물주가 되는 일은 삼가다오. 그건 교육 철학의 문제가 먼저이니까. 그리고 설마 고위 공직을 탐하거나 정치까지는…. 당부 하자니 한이 없구나. ‘착한 건물주’는 애초에 모순형용의 개념이니 어쩌겠느냐.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