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2000. 4. 16. 23:30
유쾌한 편지 하나:

    

 
    Subject: Wie eine Schoene Frau sind Sie.
    Date: Sun, 16 Apr 2000 13:37:50 +0900 (KST)
    From:
    To:

    선생님 초면에 실례를 용서하십시요......... 저는 ..........ooo
    입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어 왔으므로 선생님
    께서 나이가 좀 드신 평범한 인상의 그러나 도수 높은 안경을
    쓰신 분으로 상상하였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 작은
    편지 한 장을 써놓고는 학교주소를 알까 하고 여기에 들어왔다가
    선생님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아름다움을 풍기는 분이십니다.
    내내 아름다우십시요.
    다름이 아니고 부족하지만 저도 ........
    
    끝으로 한가지 선생님의 인터넷실력 대단하시므로 존경합니다.
    오늘 멋진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나니 참 유쾌하네요.
    2000년 4월 16일  ooo 드립니다.
 


           가슴 깊고 깊은 곳에 묻어 둘 추억 하나를
                     수소풍선 잡았던 끈을 놓아 버리듯 날려 보낸 듯
                     요란한 바람이 참 서럽기만 하던 봄 날
                     움트는 싹들이 생경하기만 하던 봄 날
                     애써 "위스키~~~"하고 미소짓던 봄 날
                    "쏠"음으로 말하려고 입을 깨물던 봄 날
                     참으로 유쾌한 편지 하나가 위로가 되었소.
                                

    답장은 차마 이리 하지 못했다.
    그랬더라면 너무 놀랐을 터이니 당연히 못했고. 
    우선 그/그녀는 미지의 사람이니까.
    이 메일 이전에는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르던 그런 아무도 아닌 사이.
    사실 이러한 불특정 누군가에게서 오는 여러 메일에
    그들 중의 이 하나에 이만한 의미를 두는 것도 호들갑이다.
      

    그러나  편지가 어떠하면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지
    아이들도 아니지만 따뜻한 말에 감탄하게 되는 것을
    아이들도 아니지만 따뜻한 말을 그리워했기에 그러는지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싶어서 여기 쓰려나 보다.....
    그리고 그/그녀가 원하던 내 변변찮은 책 한 권을 보냈다.

                                      
  

 그래서 일까?
         며칠 뒤 정말 위로가 되는
메일이 왔다,

                               "꽃피는 봄사월 돌아오면..."
                                     망향을 듣다가
                                     문득 ... 생각이나서....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곳을 스쳐갔을 리 없는 누군가에게서.
         어느 날 오후 해는 저물어 가고
         그런 시간에 보낸 짧은 터치.
         사람이 위로받는 것은 순간이다.
         절망도 그처럼 순간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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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4. 7. 23:30
  2000년 봄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도 거의 끝나는데........
       그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메일을 공개합니다.
       이름만은 저작권 허락을 받지 않았으므로 생략, 나머지는 전문 그대로입니다.

 

  
   Subject: 따뜻한 봄날에...
   Date: Fri, 07 Apr 2000 21:08:48 KST
   From: ??
   To: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고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그대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그대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

    교수님, 학교를 휴학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졸업 한 동기들 보다는 가까이
    있으면서 교수님의 제자 노릇 제대로 하지 못 한 것 같네요.
    저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밖으로 튕겨나지 않음은
    같이 커났던 동기들과 저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 가고자 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신문사에 있는 친구가 막걸리 사 먹으라며
    쥐어 준 돈 몇천원을 받아 쥐고 따뜻한 봄볕 아래 서서
    한 없이 즐거워 웃었답니다.
    교수님 밝게 한번 웃어 보는게 어떻습니까?
    봄이니까! 믿음직한 제자들이 있으니까!!
    이상 00학번 000 였습니다.......꾸벅!

 

 

     이 얼마나 다정한 글인가!
      같이 커난 친구들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가리라는 다짐.
      이런 말 한 마디면 혹여 서러웠던 기억도 사라지리라.
      이런 말 한 마디면 다가올 재난(?)도 두렵지 않으리라.
      <신 지식인> 개념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인문대 사람들아!
      어디 어떻게 숨어들어 옴짝도 하지 않을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이 오아시스같은 글을 삼키자. 아까워 단숨에 들이키지 말고,
      생명수처럼
       - 아니다 이 말은 취소한다. 아주 사적인 이유로 -
[아래 주석]
          아니 새벽 이슬처럼 신선하게 간직하자.

  [주석] 우스운 주석: 난 개인적으로 "생명수"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쓸 수 없다.
            특정한 날의 특정한 물을 생명수라 했던 까닭이다.
            그 특정한 순간에 대해서는 그러나 세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 특정한 순간을 함께 한 누군가도 이미 잊어 버린 물!
            그 물 때문에 더는 생명수란 말을 쓸 수가 없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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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3. 15. 23:30
  ■  도구적 학문 vs 목적적 학문

    이야기의 발단은 대화 상대자들의 신분에 맞는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관한 관심이었다. 대화 상대자는 인문대학

    소속의 교수님, 주로 실용노선을 지지하는 소위 "신지식인" 개념에 동참하시는 분. 편의상 "가"와 "나"로 쓴다.
 

가: 요즈음에는 인문대 자연대 등에서 도전적인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경향입니다.
      학문할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당연하다고 봅니다.

나: 당연하달 수는 없지요. 확실한 직업적인 미래를 선택했다면 나무랄 수 없는 현명한 판단이겠지만, 문제는
     그 선택의 시금석이 주로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사회적 동물이 사회적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내적 필요를 무시한 데서
     처음부터 문제를 내포합니다. 개인의 내적 욕구가 고려되지 않은, 외부요인에 의한 선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사회적 성취가 이루어진 이후에라도 - 본질적 회의를 수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은 타인의 삶이 아닐까요?

가: 그러나 졸업 후의 진로가 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나: 그러니까 졸업 직후냐 훨씬 더 멀리를 보느냐 차이 아닐까요?

가: 우선 사회에 좋은 조건으로 편입된 이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요. 여건이 성숙된 이후에 자신의 필요를
     고려하자는 현실적 사고가 현명한 선택을 낳는다고 보는데요.

나: 섣불리 결정을 하고 나서 갈등하거나 다시 진로를 바꾼다면 더욱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닐지요....
      아무리 사회의
구에 의한 삶에서 라도 자신의 내적 욕구가 어느 정도는 합치되어야만 진정 의미있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대화는 끝이 없다. 마치 종교에 관한 설왕설래와 마찬가지가 된다.  

하여, 나의 주장보다는 존경할만한 분의 권위적 견해를 예로 들고자 한다.

多夕 유영모 선생님은『老子』20장 시작의 "絶學無愚"를 한글로 풀어 쓰시기를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라고 하셨다.

[물론 "하련"은 아래 아를 사용하셨고, 그 한글의 매력은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이다.]

아주 젊지는 않았을 때, 그래도 젊었을 때, 『늙은이』로 풀어쓰신 그 글을 공부했다. 실용적 필요는 아예 없던 터였다.

소위 좋은 환경에서 - 평범하므로 좋은 - 자라나서, 괜찮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적당한 직장경험, 그러다 우연히

사랑에 빠진 듯 결혼했고 이른 어머니가 되어있었던 시절, 그래도 한 가지, 필요에 의하지 않고 오직 즐거움 때문에

공부하는 버릇만은 지녔었지만, 그때는 그 취미마저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 스스로 경멸하여 대학원 진학을

완강히 거부했었던 반항기를 잊지는 못하고 있던 터였다.

해서, 그 서늘한 충격 - 공부가 죄는 아니구나, 써먹을 생각에서가 아니라면....- 그것이 나를 다소 해방시켰었다.

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실용적 학문이 못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실용적 필요에 굴하는(?) - 참으로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이 고집을 지켜갈 방책이 없기 때문임을 용서 바란다 -

다른 동시대인들을 다만 다르게, 존경하지도 멸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을 서로 존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물론 상황이 매우 다르다. 이제도 "도구적 이성" 운운하면 유행 한물간 이론에 매인 현학이라 오해된다.

오해뿐이 아니라 이제는 시대착오라고 멸시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다. 대다수의 유능한 사람들이 실용적-도구적 학문에 경도하여 이루어낸 문명문화의 혜택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소수의 다른 사람들- 즉 우리는, 인문학 따위에 매어있는 우리는 - 은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마찬가지로 사회에 기여하여 잉여인간이 되지는 말지어다. 그러나 그 기여는 바로 성취사회가 가져다 주는 그림자,

그 그늘과 그림자를 찾아 최소한의 광명을 선사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념에 잠시 눌어붙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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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9. 15. 23:30

◐◑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 <친구>라는 개념과 관련된 변명 하나 -


 
근거 1)            "이 세상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Jeder auf dieser Welt steht außerhalb jedes anderen."
                                          - 하인리히 뵐 - 전집 13권 37쪽

                                   

   
    사람은
밖에 있다 사람의

         사람은 있다 사람의 밖에

                밖에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람의 밖에 사람은 있다

                           있다 사람은 사람의 밖에

                      밖에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사람은  확실하게 사람의 밖에 있다

    사람은 있다 모든 것의  밖에

    사람은 그냥 홀로 있다

    사람은 그냥 있다

    사람은 있다.   

렵게 쇼펜하우어 등을 대입하지 않아도 그저 맹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다.
목적은 허상, 가상이요, 잘해야 꿈이다. 꿈은 이루지 못할 전제의 목적이다. 이룰
수 있는 전제라면 목적일 것이니까. 그러므로 꿈을 꾼다는 것은 조금은 도피라 할
것이다. 도피가 아니더라도 삶의 유보, 그래서 꿈이란 생을 아름답게 장식해주는
무지개와도 비견되지만, 실제로는 "다른 상황"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생을
좀먹은 도구이다.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 꿈에 매달리는 인간일수록, 예컨대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고통을 즐긴다(?). - 꿈을 접으면 사라질
고통을 꿈 때문에 끌고 다니는 것을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 그러므로
꿈을 버렸을 때 어엿한 인격의 인간이 된다는 가정이 설립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야기가 될 법한 이와 최근에 나눈 짧은 대화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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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을 준비해 본다, 마음 속으로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친구는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인간에 대한 관심 --- 어떤 와 같은 종속인,
  같은 살과 피를 지닌, 슬퍼 울고 기뻐하는 종속인 인간. 따뜻한 음식과
  따뜻한 옷과 따뜻한 눈길에 따뜻해지는 인간.

  그러나 그것이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상태는 아니다.
  인간적인 이해라 부르거나 차라리 인간적 존엄을 전제로 한,의례적인,
  온건한, 중립적인, 다행히 바람직한 이웃관계일 뿐이다. 보편적인 인류애.
  그것은 차라리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도 매번 한계에 부딪치곤 한다. 가족은 상당히 예외가
  되지만,바깥 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완전한 이해란 Liebe auf dem ersten Blick 또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론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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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결론에 승복하는 이유들]

말하기
 
요즈음 세상에 가능하지 않는 것, 그 으뜸은 아무도 자신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언어학자 또는 직업적
   글쟁이들이 말하는 언어 자체의 소통 문제, 즉 텍스트 생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진짜 이유는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성산포에서> 라는 유행가 가사이다.
   노래를 그 속삭임을 들으면 서정에 눈물나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도시의 밤 술자리에서는 술에 취하기전에 외로움에 취한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혼자서 술을 마신다. 혼자서 외로움을 마신다.
   여럿이 둘러 앉아 뼈저린 외로움을 마신다.


 편지 : 요즈음 세상에 가능하지 않은 것 또 하나, 편지쓰기가 있다.

     편지는....

  생각에 이르기가 어렵다.

   생각이 간절해도 쓰기가 어렵다.

  썼더라도 부치기가 어렵다. 우편도 몰래도...

   
                               더구나 그런 편지 자체에 발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편지란 좀 쑥스럽다거나 유치하다는 논리만으로 그리한다.              
                               차마 말로 할 수 없어서 바라보고는 말을 할 수 없어서
                               편지로 말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므로....

  Kafka의 편지 빌려오기:

         "아시겠소, 나는 웃기는 인간이오. 만일 그대가 나를 약간 좋아한다면,
         그것은 연민이며, 내 몫은 두려움이오. 서신으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 서신이란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해변가에
         철렁거리는 바닷물과 같은 것이오. 펜은 모든 문자들의 그 많은 언덕위로
         미끌어지고 그리고 이제 그것은 끝에 이르렀소. 날씨가 서늘하니
         나는 나의 텅 빈 침상에 가야겠소."
                                                                                  (1907년)

      "Ich kann mit ihr nicht leben
          und ich kann ohne sie nicht leben."
                
                                                                      (1913년)

            그녀와 함께도 그녀 없이도 살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은
            인간의 원론적인 위치 "타자의 밖"을 확인해준다?
            아니면 그 무수한 편지들에 수신인이 있었음에 그를

     
     부러워해야 할까?


 차라리  꿈꾸기:
                         
기이하게도 꿈에 등장하는 인물은 꿈의 존재를 모른다.
                             꿈은 열린 창으로 남아서 현실을 방해한다.
                             
열어 보여도 좋을 지 .......

  혹은 은행잎:
                       
예컨대 여기에 쓰이는 한낱 표시가 왜 은행잎인지
                            그냥 우연히 은행잎인가를 아는 사람도 없다.
                            있어야 했겠지만 없다.

 그러니 사람은 사람의 밖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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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9. 8. 31. 23:00
 

한국문화사 1999.8.31.


 

길고도 생소한 제목이 어리둥절한가요? 이 책은 DAAD(독일학술교류처) 파견으로  우리대학에서 88-93년 동안 객원교수로 계셨던 로스바흐 Rossbach 선생님과의 공동 저작이랍니다. "낭만주의" 에 대한 안이한 인상을 불식하고, 어떠한 문학작품도 언어학적인 접근을  일차적으로 시도해야 하는  필요성을 직접 체험하게 할  목적으로 구상 되었지요. 
하필 선정된 작품이 독문학사에서 "유령의  호프만" 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에.테.아. 호프만이냐구요? 왜 하필 모래귀신 Der Sandmann  이냐구요? 글쎄, 여기에서는 서론과 개요만을 소개합니다.  대답은 직접 책에서.......
 


서론: 서술 텍스트 이론 


이 책은 새로운 시도이다. 텍스트 해설이자 교과서인 것이다. 텍스트 해설로서는 특히 한국인 독자들을 겨냥한다.  교과서로서는 텍스트 언어학적 근간에서의 화술적 텍스트의 분석에 대한 입문서가 될 것이며, 분석 대상인 소설에  대한 이상의 것을 다룰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독문학의 가장 어둡고 환상적인 텍스트 중 하나라 할  이  작품의 구조에 대한 통찰 뿐만 아니라, 서술 텍스트의 구조법칙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는 하나의 텍스트에 관한 지식 만이 아 닌, 다른 텍스트들과 관련해서 전용할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되리라.  

해설의 특이점은 무엇보다 그 물샐틈없는 완벽함과 조직성이다. 완벽함이란 문장 하나 하나에 대한 해설에서 드러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난점들을, 즉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독자가 정복해야 할 모든 난점들을   다룬다. 그러나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의 중급수준의 독일어 지식을 전제로 한다.

 

해설의 체계는 항시 반복되는 순서에 의하되, 다음의 정보를 제공한다:  사전적 - 문장론적   - 서술적 (문장들을 포괄 하는)  각 문장마다 우선 특이한 단어들과 관용어법들을 찾는다.  단어의 설명은 때때로 일반적인 의미와 텍스트 내의  특정 의미를 포함하며, 독일어와 한국어로 의역한다. 실망스런 사전적 설명작업은 배제한다. 사전적 설명에 이어  문장론적 언급이 이어진다. 이 경우 길고 복잡한 문장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단어 하나 하나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항상  경고된다. 그 대신 문장들은 우선 그 핵으로 단축된다. 그 다음 한 걸음 한 걸음씩 구축되어 가며 독창적 복잡성을 넘어간다. 도표 제시는 문장들의 거시적 구조(대강의 구조)를 통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들의 문장론적 설명을 위해서 우리는 전통 문법의 이론과 용어들을 사용한다. 전통문법의 이점은 이것이 모든  분석의 길로 통하는 것이다. 즉 ― 단계적으로 ―- 복잡한 전체에서 전체의 성분으로 가는 길 말이다. 다음에는 발화의 논리라는 전통문법이 따른다:  주어 내지 주어부는 발화의 대상을 지칭하고, 술어는 이 대상에 진술을 부가한다.  오늘날 성행하는  전통적 주어-술어-문법(구성구조문법)과 의존문법 사이의 대립은 두 문법모델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충한다는 사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 N. Chomsky 또한 그의 다른 면에서  전통적 분석체계에 이 의존의 개념을 수용했다. 그렇지만 구성구조문법과 의존문법의 장점들을 통합하고 있는 아주  손쉬운 문법모델은 아직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문장론적 해설의 목적, 즉 복잡한 문학텍스트의 문장들의 거시구조를 통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또한 도표로서도),  전통적 용어들의 도움으로 가장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시 구조적 설명(예를 들어 원자가 제시)은  포기한다. 이것은 매우 유감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해설 분량은 이미 문제가 될 정도이므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작업에서 문장문법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은 기대할 것이 없다. 이 영역에서는 이해력의 도움을  제시하는 것이지,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들은 화술적 텍스트구조를 위한 정보들을 포함한 세 번째 분석  범주에 들어있다.


이 분석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것은 마부르크 Marburg 대학 일반 언어학 및 독일 언어학 전공학과에서 십여년 이상 수행되어 온 "화술적 텍스트 분석"에 관한 연구들이다. 우선 서술(Erza"hlen) 또는 더  상세하게 서술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서술은 일어난 사건의 재생이자, 수신자를 고려한 시점적 재생이다. 이 정의는 세 요소를 지니고 있다:  

            - 서술자 (= 화자) 

            - 사건

            - 수신자

  
 마부르크 팀의 서술적 텍스트 분석(Narrativik = 서술텍스트의 분석)연구의 관심은 모든 서술텍스트의 중심을  형성하는 서술자에 둔다. 서술자의 포괄적 활동 ( 사건의 언어화) 은 다음과 같은 부분 활동들로 분류될 수 있다:

            - 선택 (무엇을 서술하고 무엇을 서술하지 않을 것인가?)

            - 배열 (무엇을 먼저 서술하고, 무엇을 그 다음에, 무엇을 마지막에 서 술할 것인가?)

            - 시점 선택 ( 복합적 시점 대 단일 시점

            - 해설,주석 및 평가 여부


서술자는 이야기하는 "목소리"이다 (프랑스인 Narrativik학자 Ge'rard Genette 의 "La voix" 범주에 든다).그러나 그는 텍스트-의미의 원천이다. 서술자를 기술하는 것, 서술자를 그 특성에서 확정짓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이 서술자에 대하여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관념은 이 책에서 설명되고 사용될 것이다.  물론 한정 없이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 제한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전면에는 서술이론이 아닌 서술분석이 자리한다. 이 중점은 이 다음에 계획하고 있는 책에서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론이 전면에  놓이고 구체적 분석은 예로서 배경에 놓이게 된다. 이 책의 모든 텍스트 기술의 출발점은 텍스트 내재적 화자이다. 이 화자(Narrator)는 작가(Autor)와는 엄격히 구분된다.


작가는 실재의 신분을 지니며, 외적 의사소통 상황에 소속한다. 화자는 허구의 신분을 지니며, 내적  의사소통 상황에 소속한다. 도표로 보자면 : 


 작가의 입장에서 보아 모든 (또는 대부분의) 서술된 사실들은 '창안된' 것이다.


이것은 이 경우 결코 작가인 에. 테. 아. 호프만이 아닌, 오직 텍스트 내재 적 (= 허구적) 서술자만이 나타나엘을 그의   "친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결말에 가서 클라라가 어찌 되었는지를 들었노라고 주장하는 것은   에. 테. 아. 호프만이 아니라, 그만큼 애매하게 정보를 받은 서술자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요약하면:


 허구적 서술자는 허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작가에 의해 창안된 것이다. 허구의 내적 세계와  사실의 외적 세계 사이를 통제없이 넘나드는 일은 이 해설에서 방지할 것이다.


물론 텍스트 내적 현상을 텍스트 외적사건들과 상관시키는 것도 적법하다. 예를 들어 전기적, 역사적 또는 사회학적 사실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그러한 정보들을 취급하게 될 네 번째 분석 범주 ― [I] 해설: 그런 종류의 정보들을 수용하게 될 ― 를 예견했었다. 그렇지만 해설들을 네 개의 다른 분석 범주 ― [L] 사전적, [S] 문장론적, [N] 서술 구조적, [I] 해설적 정보들 ―로 분류하는 과정에서 너무 일목요연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렇기 때문에 네 번째 분석 범주의 정보들은 세 번째 범주에 수용하였다: [N]은 이제 우선 문장들을 통괄하는 성향의 텍스트 내재적 정보들, 예를들어 모티브의 회귀 (주도모티브) 같은 것을 포함하며, 다음으로는 문화사적 성향의 텍스트 외적 정보들을 포함한다. 이 외부의 포착은 원천적인 텍스트접근적 분석에 논리적 모순을 낳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외관상 그러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맥락(Kontext: 어원적으로는 "통합적 텍스트"라는뜻)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한 텍스트가 적확하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Cagliostro" 또는 "Chodowiecki"라는 이름이 기지의 것으로 전제되거나, 또는 연금술 실험자에 대한 암시를 포함할 때를 이른다. 그러나 문화사적 지식은 텍스트가 이것을 분명히 전제로 할 때에 한해서 전달된다. (문학적) 텍스트를 (문학 외적) 맥락과 연결함에 있어서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인 난제들은 당장 여기에서 논의될 수는 없고, 그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사안에만, 즉 텍스트 안에 머물기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래귀신」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를 수단으로 해서 해석하려는 유혹도 거부한다. 특히 대중적인 것은 소설 주인공의 행동을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첫째 프로이트 자신이 이 소설에 대해 언급했고, 둘째 소설 주인공 나타나엘의 이상한 행동은 심리분석적 소설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2차문헌의 제목을 보자:


 Ingrid Eichinger: E.T.A. Hoffmanns Novelle "Der Sandmann" und die Interpretation Freuds.  In: Zeitschrift fu"r  deutsche Philologie 95 (Sonderheft E.T.A. Hoffmann 1976), S. 113-132

   

이것은 그와 관련된 인식의 소득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함을 예견케 해준다: 왜냐하면우리는 하나의 해석 대상  텍스트 대신에 두 개의 텍스트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가아니라,  프로이트를 끌어대고 있는 모든 텍스트들과 프로이트에게 비판적인 모든 글들 또한 동시에 접근되 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끝없는 해석논쟁이 열리게   될  것 이다. ― 그 대신 이 소설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고 그것을 투명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충실하게 따를 것이다.


텍스트는 구조의 원칙에 따라 통찰되어야 한다 어떠한 수법으로 그렇게 하는가는 이 서문에서 설명될 수도 또는  설명해야 할필요도 없다. 앞으로의 분석이 이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줄 것이다. 문장 하나 하나에 관련된 상세한  텍스트의 설명이 곧 이 책이 학습자들에게 제공하려는 유일한 이해에의 도움이 아니다. 그 밖의 도움으로는: 소설  제목의 충분한 설명, 개관 및 중점적 내용 설명을 부가한 텍스트의 상세한 분류, 전체 소설의 보조번역, 일련의 도표  및 그래픽 등이 있다. 우리는 이 책이 한 복잡한 텍스트의 미로에서 독자에게 신뢰할 만한 안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독서의 <대상으로서는 외국어로서의 독일어(외국에서의 독어독문학) 중급과정의 학생들을고려하고 있으며,  이 분석은 그러나 그 방대한 외연으로 인하여 교육자 및 호프만 전공자들에게도 여기 저기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독자를 기다리는 것은 모험이다. 모험 중에는 때로 고생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으리라. 



 0.1 개요


독일의 어린이들에게는 "모래아저씨(Sandmann)"의 모습이 대체로 "모래아찌(Sand- ma"nnchen)"라는 축소형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아찌는 밤이면 어린이들에게 눈에 모래를 뿌려 줌으로써 아이들이 피곤을 느끼고 잠이 들 수 있게  해주는 동화의 인물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침이면 눈에서 "모래"를 부벼낸다.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밤새 그가   왔었다는 증거가 된다. 작은 키에 빨간 뾰쪽 모자를 쓰고 등에는 모래 자루를 지고 있는 모습의 모래아찌는 정말 귀엽다. 그렇지만 나타나엘(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 그는 마성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한 노파가 그에게 얘기해 주기를,  모래아찌는 착하지 않은 아이들에게서 밤새 눈을 훔쳐 가는 무서운 귀신같은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타나엘을 숙명적 공포로 내몰고, 마침내는 대 재난을 초래한다. 

눈-모티브는 "Sandmann"이라는 인물 내지는 소설의 제목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사랑스러운 동화에서는 아이의 눈이  감기기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늙은 유모의 변종 이야기에서는 영원한 실명이 위협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눈-모티브를 상세히 취급한다.  왜냐하면 전체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 눈의 상실에 대한  나타나엘의 공포이기 때문이다.                                 



줄거리: 


나타나엘의 유년 시절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유모의 말에 따르면 모래귀신은 잠을 자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서 시력을 앗아간다. 부모님은 어떤 날 저녁이면 변하는 것 같다. 어머니는 화급히 아이들을 잠자리로 보내면서  말한다: "모래귀신이 온단다". 그런 다음 실제로 나타나엘은 불길한 형상이 층계를 쿵쿵거리며 올라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아버지의 방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타나엘은 호기심에 못 이겨 숨을 곳을 찾아 들어서, 모래귀신이란  다름 아닌 음침한 변호사 코펠리우스임을 알게 된다. 나타나엘은 발각되고, 모래귀신/코펠리우스는 그를 붙잡아 눈알을  뽑으려 한다. 아버지는 간청해서 그 자를 만류한다. ―코펠리우스는 잠적했다가 일년쯤  지나서 다시 그 도시로 돌아온다.  다시금 그자의 발자국 소리가 층계를 쿵쿵거린다. 한밤 중 폭발 소리가 온 집안에 진동한다.  아버지는 바닥에 숨져 있다. 코펠리우스는 사라졌다. 아이는 그가 아버지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년이 흘러 나타나엘은 그 사이 약혼도 하고 G.시에서 대학에 다닌다. 어느 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한 행상이   ― 그는 코폴라라는 이름이다 ― 그에게 물건들을 권한다.   나타나엘은 그가 코펠리우스 (= 모래     귀신 )라고 믿게  된다. 그는 놀라고 혼란에 빠진다. 뭔가 도움을 구하는 심정에서 그는 고향에 편지를 쓴다. 그의 약혼자 클라라는 그를 안심시키고자,  그 숙명적인 코폴라는 그에게 아무런 힘이 없으며, 모든 경악은 다만 그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클라라의 논리는 완전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타나엘은 실제로 안심하지 못한다.


얼마 안 있어 그는 귀향한다. 모두가 포옹한다. 그러나 이견들이 고조되면서 그들의 행복을 흐려 놓는다.  환상가 나타나엘과 냉정한 인간 클라라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극심한 갈등이 초래된다. 나타나엘은 클라라를   "생명 없는 저주받을 자동인형"이라고 욕한다. 클라라의 오빠는 분통해 하고,  결투가 예고되지만, 결국에는 화해가  이루어진다.  


나타나엘은 대학 도시로 돌아온다. 그 동안 그의 숙소에 화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물리학 교수인 스팔란짜니 댁   건너편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 창문 너머로 그는 올림피아를 바라본다. 그때 다시 코폴라가 찾아와 그에게 망원경을  판다. 망원경을 통해서 바라보는 동안 그는 올림피아의 미에 굴복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무도회에서 그녀와 춤추게  된다. 스팔란짜니는 그들의 약혼까지를 승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팔란짜니와 코폴라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의 놀라움이 그토록 큰 것이다. 증류기, 병, 플라스크들 사이에서 그들은 텅 빈 검은 동공을 지닌 생명없는 인형  올림피아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스팔란짜니는 올림피아의 눈을 집어 나타나엘에게 뿌렸고, 그는 곧 광증에 빠진다.   (올림피아가 자동인형이었음이 밝혀진 뒤 소위 지성인들로 구성된 차 모임의 실태는 가관이다. 본문 355의 차 모임  에피소드 참조)


나타나엘이 깨어났을 때 과거의 공포는 극복되었다. 두 약혼자, 처남이 될 로타르, 그리고 어머니는 행복하게 화합한다.  그 무렵 두 사람은 정오쯤에 탑에 오른다. 먼 곳을 바라보다가, 클라라는 작은 회색의 수풀이 그들을 향해 움직여 오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 말에 나타나엘은 망원경을 꺼내  드는데, 시야를 클라라가 가리고 있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광증에 빠져, 소리치고 날뛰며 클라라를 아래로 내던지려 한다. 로타르가 급히 달려가 그녀를 구한다. 아래 군상들  사이에 코펠리우스가 서있고, 그는 나타나엘을 유혹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나타나엘은 뛰어내린다. 


이제 상당히 긴 본론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8. 1. 23:30
  R    E     N     내     E     조   N

     N     알     E      N       지     N    고    L    E    기    K
 


   서
를 전혀 모르고서 한 학기를 한 교실에서 보낸다는 것은 조금 모독입니다.
    겉보기엔 좌판을 들고 앉아서 지식을 파는 지식산업 행태로 전락되는 한이 있더라도,
    짧은 상호간의 영향이 남아 있는 한, 교수-학습 간, 학습자 상호간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얼굴과 이름은 기억해야 <없는>의미도 살아 날 수
    있으리니, 여러분 졸업 후에 <영2> 혹은<수2>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이 끔찍해서라도
    이름을 개강모임이라 하여 간단히 초대합니다.

   대상: 현대 독일소설, 독일여성문학 수강학생 따로.
   시간은 가까운 목요일, 단 미리 이야기 하기.
   장소는 상의해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우연히 두 과목 다 수강하며 열쇠담당으로
   수고하는 류oo(94학번)와 의논하세요.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3:30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욕망과 망집 없는 삶 - 그것의 허위?

 

죽음과 결부시켜서는 매우 생경한 나이에, 서른 해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젊다 못해 시퍼런
시인/글쟁이가 남긴 시들을 읽게 되었었다, 실로 우연히 지난 겨울에.그것도 시집을 선물받아서,
선물에 참 맞지 않은 시집이었는데....
섬뜩한 몇 구절은 곧 가슴에 박혔다. 입술이나 뇌리가 아니라 바로 가슴 속에.    
 아아,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고 또 쓰는 구나!

이 봄에 책방을 기웃거리다가 그 사람의 산문집을 발견했다. 10년 가까운 세월 지나서 28쇄 째의 책을 이제서야.생각보다 -- 시구절에서 얻은 표상에 비해 -- 훨씬 훤한 젊은 얼굴, 그리고 퍼뜩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욕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

 

     ■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도서출판 살림, 2000년 28쇄, 26면에서

이 글귀는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무망을 목표로......."라고 하는 입버릇과는 어긋나게, 빈 들 햇살에 녹아들면서도
안에서는 냉큼 녹지 못하는, 그래서 속이 굳어지는 잔설처럼 짓눌린 욕망에 평안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러나 그 시인은 시로써 말하였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것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겨울을 났고, 이제 미련없이 나며 우두둑 꺽어지는 나뭇가지들은 서럽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으려는 "
남루한" 나뭇가지는 추악하단다.

그는 그 "매달려있음"을 욕망이라 말하는 것으로 해석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다.  이제 산문에서 욕망없음을 위선 쯤으로 규정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한다?
시인의 글을 시가 우선하지 않을까? 산문은 지나가는 느낌일 뿐이며.
 

 또 다른 시 한편: {우연히 시집의 좌우 페이지에 해당한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두 시의 공통점은 "봄"이라는 시간이다.
봄의 이미지가 시작이 전혀 아닌 무엇인가의 끝을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봄이 무서우리만치 생경한 것은 이 시인으로서는 너무 오만하다. 그것은 우리들의, 나의, 것이다.
그는 완성되기에는 너무 젊은 인격으로 마쳤다. 그러니 불균형이 당연하다고?
그렇지만 사람이 나이와 더불어 별 되는 것도 없다. 불균형은 다른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라도 헤메는 것인가?

 누군가와 끝까지 이야기하고 싶다. 논쟁이 되어도 좋고, 마침내 서로의 몰이해에 화를 버럭내며
 나가 떨어져도 좋을 것이다.     벌써 그  "....하고 싶다"가 욕망이라고 힐난하려는 사람이어도 좋다.
 누구라도 허튼 이야기를 나눌 마음만 있으면 족하리라.
 이 세상 그러나 어디에 그 소용없는 일에 밤을 지샐 위인이남아 있을 것인가!
 혹은 속으로 왼다: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3:00

그 이야기 둘 : 스스로 격리된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中에서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치유할 수 없는 병?

 ♠  인용

아니면 사랑은 어느 날 우리 몸에 저항력이 떨어지고 발작 증세가 나타나면서 갑자기 피할 수 없는
병에 걸릴 때 까지 우리 몸 속에 둥지를 틀고 조용히 머물러 있는 바이러스처럼 침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포로처럼 우리 몸 속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가끔 씩이긴 하지만 사랑은 스스로를 해방시켜서 바로 자기가 갇혀있는 감옥인 우리를 부수고 나올 수도 있다.
사랑이 평생 갇혀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온 죄수라고 생각할 때, 왜 사랑이 자유를 맛보는 아주 드문 순간에
그렇게 날뛰고, 그렇게 은총과는 거리가 멀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희망의 나라로 이끌었다가 뒤이어 곧
불행으로 떨어뜨리는지, 나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이런 특성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허용하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랑이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용

사랑의 첫 단계, 모든 사랑의 첫 단계는 진정한 감사의 시간일 것이다.  한 인간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여러 특성들이 우리 내부에 파묻혀 있거나 아직 계발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특성들은
우리가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익숙해져 있던 특성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는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러워지며, 현명해진다.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그에게
헌신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베푼 그 기적을 위해 우리 삶을 바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그가 바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묻지 않는다. 바로 그가 우리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우리 삶의 윤곽을 분명히
그린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목표가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와의 만남의 순간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은밀히 조물주라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감지하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용

프란츠와의 관계된 문제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스스로 결정한 기억은 없다. 사랑이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결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빠져있었던
사랑의 그 완벽함으로 인해 나의 자존심이 상했을지라도 나는 오랫동안 사랑의 요구에 저항할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을 제지시키고자 한 몇 번의 나의 시도는 모두 사랑의 승리로 끝났으며, 나는 또 다시 완전히 기가 꺾였다.
그럴 때마다 사랑에게서 배운 교훈은 오로지 사랑의 계획에 따르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었다.              
                      

 인용

살아있는 동안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랑뿐........사랑은 현실의 삶 외부에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트리스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장애물을 설치해
나갔으며,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진정으로 구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불멸의 사랑을 죽을 때 까지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  우리의 의문 :

   ♤ 주인공은 "슬픈 동물"인가? 왜 "슬픈 동물"인가?

       사랑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저주를 사랑하는 - 떠나 버린 - 사람에게
       걸고  있는 일이 가능한가? 혹은 사랑에?

    ♤ 보편적인 질문: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한가?                                                                                                                                                                        

 소설의 개관

동베를린 태생의 주인공은 고생물학 전공자로, 결혼하여 남편과 성장한 딸이 있고, 1990년 당시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 중이다. 서독출신 개미연구가 프란츠가 박물관의 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왔을 때, 둘은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떠났고, 그는 어김없이 부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이다. 그에 대한 격렬한 사랑의 요구는 심한 질투로
변하고, 그의 부재 중에는 상상 속에서 그 부부의 흔적을 추적한다. 넘쳐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현실세계를 넘어서
주인공의 의지와 상상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영원히 그녀를 떠났고, 그 이후에도 이러한 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몇 십년을 회상하는 그녀에게
이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회상하는 몇 십년의 시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몇 십년은 곧 현재요
미래이다.    "뭉툭한 코와 몸을 휘감는 긴 팔을 가진 갈색 털의 원숭이" 처럼 그렇게 그녀는 꼼짝 않고 누워서 그를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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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2:30

그 이야기 하나 : 아웃사이더 『 검은 양들 』

한 사회의 "검은 양"에 관한 이야기

   Heinrich Böll의 풍자적 단편 「검은 양들 Die schwarzen Schafe」은
   가족 중에 실 인생에 실패한 삼촌과 일인칭 서술자 "나"의 이야기이다.
   삼촌은 박식하고 즐거워 보이는 위인이지만 제대로 된 직업이 없이 빚만
   늘려간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검은 양"이라 하는데, "나"는
   그의 뒤를 잇는다.
   
    "나"의 길은 삼촌과는 조금 달랐다. 예를 들어 잠깐동안 어느 가구공장
    에서 일하기도 하는데, 그 곳에서는 화폐개혁 직후인 그 시기에 알맞은
    전형적인 싸구려 감상적 물건들을 생산해 낸다. (실제로 쓸모있는 물건
    들은 사장의 부재시에 노동자들이 필요에 의해 몰래 만드는 물건이다.)
    "나"는 삼촌의 사고사로 인해  - 우연히 삼촌의 장례식 날 성년이 되어 -
    그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원래 무산자였던 삼촌의 유일한 유산은
    그가 복권에 당첨되어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겨우 몇 분간 소유
    했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당장에 대학을 그만두고 다른 계획들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확실한 검은 양으로 간주하고, 그가 검은 양이기
    이전에 대부가 되었었던 어린아이와의 접촉을 경원한다. 하지만 "나"는
    가문다운 가문이기 위해서는  검은 양이 보존되어 가리라고 믿는다.


"검은 양":

전적으로는 "그의 사상, 성격, 또는 직업 등으로 인해서 다른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구성원"을 지칭한다.
사회적으로는 유능성Tüchtigkeit을 최고의 귀감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전통에 따르는 대다수의 독일인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을  지칭한다.

뵐은 평소 이단적인 것, 배척된 것을 문학의 주제로 해야 한다는 전제를 말함으로써,문학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척도를 제시했다.

통상적 척도에 의해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강하게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왜곡된 긍정성이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검은 양들 」의 표면상 주제는 적나라한 유용성에 대한 항의?

검은 양은 실제의 세계에서 우스꽝스러운 실패자를 가리키는 메타퍼인데,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이상형으로
그려져 있다.삼촌이 유용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이상형인 이유는 그의 자질에 있다. "나"가 보기에 "오토삼촌은
통달했다. 삼촌이 실로 능통하지 못한 분야가 없었다. 사회학, 문학,음악, 건축, 모든 것을."  그러나 가진 지식을 "환전
versilbern"할 수 없었고 대신 거의 15000마르크의 빚에 700명 이상의 채권자를 남기고 죽었다.작게는 차장에게
30페니히에서부터 많게는 "나"의 아버지에게 2000마르크까지 진 빚.

빚만 지고 죽은 삼촌이 어떻게 이상형인가?

여기에 소중한 의미는 바로 그 700명의 사람들에 있다. 평균 100마르크도 훨씬 못되는 돈은 재화로서의 자산이
아닌, 다만 구체적 삶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패전 직후의 절대 빈곤기를 살아남기 위해서 '아주 조금 슬쩍하기'를
경험했고 또 용인되었던 삼촌 세대에게는 '작은 돈' 빌리기는 다만 이웃 정과 인간애를 의미할 뿐이다. 삼촌은
700명으로부터 최소한의 사랑을 받았다는 시각이다.

"나"에게 이러한 시각을 부여하는 작가의 논리는 단순하다.
1) 누군가에게 빵이 없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빵을 주어야 하고,
2) 빵을 벌었으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것!

논리 1)
공평한 분배의 문제는 전후의 절대 빈곤기를 겨냥한다.
작가는 생각한다: "모든 새들보다 더 소중한"(마태 26: 6) 인간들은 마땅히 빵을
걱정하지 않을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작은 돈" 즉 빵은 나누어야 한다.
빵을 나눌 때 사람들은 인간이 된다. 괴테의 "눈물 젖은 빵"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인리히 뵐의 인간 역시 빵 냄새에 울 수 있는 인간이다.

논리 2)
억압된 노동에서의 해방 문제는 경제 재건기의 광적인 생산성을 겨냥한다.
"검은 양"은 바로 이 경제도약 단계에서의 소외자들을 이상화한다.

 Outsider!
      " 원래 사회학적으로 내집단 밖의 외집단에 속하는 이 국외자들은 집단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객관적 거리를 특징으로 하는 특수한 관여를 한다."

           [참조] Colin H. Wilson의 『아웃사이더』(1956)
                     아웃사이더는 인간존재의 본질에 깔려있는 속물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윤리적 존재로 승화된다.    

다른 정상적인 동시대인의 유형, 예컨대 「Es wird etwas geschehen」의 사장에게는 "잠이란 죄악이다!".
그는 오직 "행동"을 해야 한다.이런 능력만이 중시되는 이 세상에서, 다른 계획이 있어 학문을 "당장에"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곧 검은 양이다. 물론 이것은 강단의 학문이나 교양보다는 실인생을 높이 사는 작가의 입장이다.
[하인리히 뵐은 반 부르주아적 동시에 반 인텔리적 성향을 지닌다.]

학문을 버린 "나"는 재능도 없이 작곡가가 되기로 했다가, 관상학, 정원사, 기계공, 선원, 교사, 세관원 등에 차례로
매료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직업적인 교육의 이수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다만 어느 것 하나 외부적 강요에서
시도된 것이 아니므로, 그 자신은 매번 즐거울 수가 있다.  "진정한 능력들을 환전 또는 직업적으로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에게는 선악의 피안에 존재한다. 돈 버는 능력은 인간의 조건에 속하지도 않는다. 현대 산업
사회의 필요일 뿐이다. 따라서 이 산업사회에의 적응은 검은 양의 시각에서는  "투항"이다:

      "[...] 나는 투항했다 - 나는 일자리를 청했다. [...]
      
나는 결코 희생해서는 아니될 것, 나의 자유를 희생했다!"

그러나 "나"의 공장 체험은 인간을 보는 인식을 확실하게 해준다. 많은 것에 정통하고  지적이지만 그 지식을 써먹을
줄 모르는 삼촌과, 실제로는 수다밖에 모르면서 "스스로를 진지하고 또 예술가라 간주하는, 전혀 지적이지 못한"
사장과의 대비이다.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장이 극도로 무의미한 실존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능력없는 삼촌의 삶은
의미있는 실존이란 논리가 성립된다.
이 유용성에 관한 논쟁은 실로 엉뚱하게도『老子』11장을 상기시킨다:

              "진흙을 비져서 그릇을 맨든데 /
            그릇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창을 내고 문을 뚜러서 집을 짓는데 /
            집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므로 있는 것이 좋음 되는건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

사회는 바로 이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포함할 때 비로소 쓸 만한 사회, 하인리히 뵐의 용어로는 "살 만한
bewohnbar"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 부적응의 주인공들은 인습에 의한 습관적 반응이 아닌 진정한 행동을 꾀한다,
비록 현실적 성공에서 더디거나 그것을 포기하더라도. 투항을 거부하거나 투항을 후회하는 부적응자들, 이들은 뵐의
후속 작품들에서 소위 검은 양의 토포스를 실현한다. 그들은 사회통념상 기인으로,공공연히 나태를 보이며 이 사회를
무시하고 내면의 자유로 만족하는 수준을 유지한다. 그들은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 예로서, 오토삼촌의 건강한
젖먹이 같은 잠은 더없이 행복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극단적 성격으로 비정상적, 병적, 노이로제적인 인상을 주며,
결국 절망적인 아웃사이더일 뿐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절망적이 아니라,상식적 인간의
눈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들 부적응자들에 의해서 이 사회는 시험되고 미리 불합격 처리된다.

그러므로 오히려 동시대인들의 행동은 그저 환경에의 수동적 반응, 즉 순응의 생을 살아간다. 인간의 적자생존을
장려하는  경제적 정글에서 정상궤도 진입자들은  이 정글의 법칙을 받아들인 것이며, 그러므로 결국은 투항자들이다.

[참조] 하인리히 뵐의 「검은 양들」과 47동인의 정신. 『독일문학』, 서울: 한국독어독문학회 1997, 제 64집(38-3호), 230-25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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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2:00

부적응의 미학   
이 페이지는 어느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을 보태려는 곳입니다. 진선미가 아니면 촌분도 할애할 시간이 없다고
확신하는 분은 서둘러 이 곳을 벗어나십시오.

   ◈  
어느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   -  하나!
 

       인문학도여, 젊은이들이여, 지금 하늘 만한 간덩이를 자랑해도   
       세월 따라 그 간이 콩알만 해지거늘, 지금 콩알 만한 간으로 적응에   
       급급한다면 나중에는 좁쌀만 한 간으로 움츠러들려는가!  

 

    ◈     그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  -- 둘!!

          Franz Kafka를 빌어서: "일찍이 많이 빈둥거려 보거라!"

    Leute, die nicht bis zum 25ten Jahr wenigstens zeitweise    

    gefaulenzt haben, sind sehr zu bedauern, denn davon bin ich

    berzeugt, das verdiente Geld nimmt man nicht ins Grab mit,

    aber die verfaulenzte Zeit ja.               

    최소한 25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빈둥빈둥 보내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참 안되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오.

                             ㅡ 1907년 Hedwig Weiler 에게 편지 중에서  ㅡ

※ faullenzen 빈둥거리다" :  "faul 굼뜬, 게으른"을 어원으로 하는 이 단어가

      여기에서 칭송되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미리 (행여나 단견으로) 사회에 편입되기에 바빠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외면치레의 인생에 대한 경각심이 아닌가 한다. 빈둥거려 보이는 가운데, 정말 게을러서가 아니라, 천천히 깊이 사색하는
      단계를 거치는 인생의 값진 미래에 대한 염원이 아닐까?
            동양의 지혜 중의 하나인 대기만성 ----- 큰 그릇은 더디 완성된다는 생각과 상통한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