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1. 1. 20. 23:30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글을……

                                                                      
제7회 국제펜클럽광주문학상 수상소감

 

감사합니다.

소설가 경력도 일천한 저에게 이렇게 큰 상을   안겨주신 국제펜클럽광주광역시위원회 선후배 동료 문인들께서는 제가 연구실 떠나서 완전히 손 놓고 게으름 피울까봐서 글 더욱 열심히 쓰라는 격려로 이 상을 주신 것으로 압니다.

 

이 자리에 서게 되니까 두 개의 질문을 받은 느낌이 듭니다.

첫째는 왜 소설을 쓰느냐? 둘째는 어떤 소설을 쓰려느냐?

옛날부터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소설책이나 읽고 상상의 시계에 빠져 생산성이 떨어질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지요. 21세기 한국사회에서는 아예 언어예술인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낮습니다. 뭣 하러, 왜 글을 쓰냐고? 저는 말과 글의 생명은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선 우리 인간은 진실로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각각의 자아들은 반드시 충돌하게 마련이니까요. 말에서 충돌은 더욱 심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동을 전하는 시문학이나, 지혜를 전하는 수필문학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저로서는 어려워서 쓸 수도 없으니까요. (여담이지만, 시를 못 쓰는 사람이 소설 쓴다고 하고, 소설도 못 쓰는 사람이 비평한다 하고, 비평도 못하는 사람이 교수한다고 - 조정래 선생이 저희 대학에 언제 강연 오셔서 그러시더군요.)

그래도 소설 쓰는 변명을 하자면, 소설가는 소설 속에 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소통할 수 있는 소설이라는 장치는 삶의 현장에서 비겁한 저에게 안성맞춤입니다. 소설가가 쓰는 모든 것은 픽션이요 이미지이니까요.

인생은 이미지입니다. 이미지가 아니고서는 숨이 막혀 살아갈 수가 없지요.

그동안 “지식산업의 대열에서 살아남느라 정신에 대한 죄악이라고 홀대했던 이미지에 들려 외치고 싶었습니다. 나는 상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어딘지 산만한듯하면서도 응집력을 지닌 소설쓰기에 몰입하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차례입니다. 어떤 소설을 쓰려느냐? 제가 배운 것이, 아는 것이라고는 독문학 한 조각이니 거기서 인용하겠습니다. 카프카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할 것이야.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친구 오스카 폴라크에게)

 

인생은 어찌 보면 깁니다. 무려 7년/10년에 달하는 유충기를 보내고 태어나서 열흘 남짓 살다가 가는 매미들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평균연령 80은 29220, 근 3만 번의 낮과 밤을 사는 일이니 참 긴 세월입니다. 그 수많은 낮과 밤을 살아내는 일에서, 우리의 내면을 외면하고 산다면 그것이 가장 불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진솔한 내면을 위하여, 내면에게만 토로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가는 그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을 즐거운 상상의 유희로 데려가건, 뼈저리는 고통의 면모를 들이밀건, 소설가의 선택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단 하나, 소설이, 문학이, 예술이 세상을 쥐고 흔드는 권력의 시녀가 되는 일은 거부합니다.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가 말했습니다. 대중에게는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된다고. 풍부한 물질과 매력적인 볼거리만 있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현대의 권력자들도 이것을 이용하고, 대중을 즐겁게 해줄 볼거리는 돈의 위력을 앞세운 연예와 스포츠를 망라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채 즐거움에 빠진 대중은 비판의식이 없어집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상황이 어떠한지도 무관심합니다. 행여 문학이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일만은 삼가야 된다고 믿습니다.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입니다. 저는 시인이건 소설가건 작가가 특별히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문학의 본성이 죽지 않기 위해서 저항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문학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자를 위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결국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자신의 내면을 일깨우기 위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문학의 본성입니다. 내면을 일깨운다는 것은 바로 타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타성은 우리로 하여금 다수가 정의라고 믿게 하고 강자가 옳다고 고개 숙이게 하는 무서운 복병입니다. 이 타성의 벽을 깨고 진정 자신과 소통할 때, 문학은 희망하건대 타인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국제펜클럽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상호 교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외국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 그 반대 방향의 일 모두가 매우 보람된 일 중의 하나입니다. 누군가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류보편의 문화가치를 매개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매개보다는 창작이 생명입니다.

“저는 그동안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면서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쳤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서툴더라도 제 글을 쓰면서 다시 살아나고자 했습니다. 그저 존재하지 않는 연인, 내 나라 말, 내 글로 쓰는 소설이라는 이름의 추상적인 연인을 향해서 썼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하이에나가 표범이 되기는커녕, 이도 저도 아닌 박쥐신세임을 통감했을 때 “저는 저로서 살기를 망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장 정직한 일이 독문과 교수직을 그만 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수 말고 온이 소설가로서의 첫 해, 이 뜻 깊은 문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자유인으로서의 첫해 농사는 외면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풍작입니다. 내면에서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너는 아직 너의 내면을 일깨워내지도 못했노라고!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글”을 쓰기엔 아직 멀었다고!
   이제 저에게 (겉으로는) 영광이자
(실제로는) 채찍인 이 상을 주신 국제펜클럽광주광역시위원회 선후배 동료 문인들께 부끄럽지 않도록 글 더욱 열심히 쓰며 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1년 1월 20일

서용좌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