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5. 12. 27. 23:01

더불어 살기

 

오랜만에 강의를 준비했다. 독문학 강의 몇 십 년을 늘 낯설어하며 결국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었는데. 그 뒤 외국인대학생들에게 교양과목 한국어강의를 몇 학기 했었지만 그건 말하자면 강의는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인문학 - 스무 개의 강의로 이루어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 인문학 강좌라 했다. 그 중 두 강좌를 맡게 되어 제목을 결정하기에 앞서 내가 어느 속성에 속하는가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무명이지만 소설가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강의를 할 수 있는 소설가로는 어림없다고 느껴졌다. 어쨌거나 독문학 분야에서라면 너스레를 떨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망설여졌다. 인문학이 쓸모없다고 홀대 받으니까 권장하는 이런 (억지)강의에서 - 물론 자발적인 수강생들의 숫자는 예상 보다 많아서 흐뭇하기까지 했다 - 전문적인 독문학 강의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인류의 지적 진화와 사회의 발전 단계’라는 주제로 1)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2) 인간에게서 물질에게로 라는 강의 제목을 잡았다. 마음으로는 두 번째 강의에 역점을 두기로 하면서, 물질이, 물질의 풍요가 어떻게 인간을 ‘삼켜버리게’ 되었는가를 역설하고 싶었다. 초봄의 일이었다, 강의 계획은.

 

그리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가 현실이 되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그 정도면 얼마나 좋았을까.

강의는 6월이었지만 말하면서 속으로는 울었다. 물질을, 돈을 숭배하는 우리의 가치관이, 교황님의 말씀처럼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가 몰고 온 참극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인문학 강의가, 무슨 소설이, 무슨 시가…….

 

우리는 먹고 사는 일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의를 끝냈다. 아프리카 최빈국 에티오피아는 커피를 수출한다. 하지만 커피 농장 노동자의 하루 평균임금이 1달러도 안 된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무리 높게 잡더라도 소비자 가격의 1%도 되지 않는다. 유엔식량기구의 발표대로라면 오늘날의 농업시스템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일일 성인 기준 2,200칼로리로 계산해서 120억 인구가 먹고살 수 있는 양이다. 현재 세계 인구는 71억5,500만 명이다. 그러니까 식량이 절반 가까이 남아도는데, 매일 기아로 5만7000명이 죽고 8억4,200만 명이 기아상태라고 한다. 기아로 죽는 사람은 암살당하는 것이고, 살인자는 동족을 잡아먹는 식인적인 ‘글로벌’ 경제 질서다.

 

이 경쟁에서 질 새라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한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심한 수준이다. 스위스의 1,636시간과 비교하면 엄청나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시민계급은 사유와 학문이나 하고 노동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개신교에서 노동은 ‘신의 소명’이 되었다. 인문주의 시대에는 인간은 주체요 자연은 객체로서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과학 기술이 전권을 쥐더니 인간노동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추출하는 (귀)신이 되었다. 우리는 컨베이어벨트의 리듬이 명령하는 대로 정확히 인간노동을 제공해야한다. 그러므로 인간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저열한 것이다.

 

노동은 소득과 비례하지도 않는다. 미국 CEO의 연봉이 일반 사원 평균 보다 331배라고 한다. 1983년에는 46배였었는데. 우리나라도 어느 그룹 회장은 301억 원, 다른 어느 그룹 회장도 140억 원을 급여로 받으셨다고 한다. 대기업 일반 직원들 평균 연봉의 500배, 200배에 해당한단다.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 이근호의 연봉이 178만8000원으로 이번 월드컵 출전 선수 700여 명 중 최하라고 했을 때 우리는 (군인이라서 당연한 일인데도) 다 놀랐다. 선수들 중 최고 연봉 742억 원은 4만 배, 우리나라 선수 최고 연봉 40억 원도 2천 배가 넘는다니 ‘살인적인’ 격차다. 군인들 상호간도 예외가 아니다. 창군 당시 이등병과 대장의 월급 차이는 30배였지만, 지금은 200배라고 한다.

 

노동시간은 삶을 위한 필요 정도로 규제되어 마땅하다. 생명과 안전 그리고 환경 관련 규제는 강화되어도 모자라다. 필립 제닝스 국제사무직노조연합 사무총장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규제완화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올드 버전이며,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친다. 규제완화가 아니라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대도 우리 코끝엔 ‘474목표’라는 홍당무가 걸려있다. 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말이다. 지금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라 해도 대부분의 4인 가족 가정이 연 1억을 전혀 체감하지 못한다. 4만 달러 소득은 어느 계층 소수에게만 집중될 것인지? 허무한 꿈이다.

 

우리는 경쟁이 성공의 열쇠라고 교육받았고 또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열매 많은 것이 곧 진리라는 생각,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값있는 무엇, 태환권이라는 생각,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라는 생각이 미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 초창기 교육자들의 정신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행복한가? 이럴 때엔 노자의 ‘절학무우’가 떠오른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그 구절을 순 한글로 번역하시면서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라고 쓰셨다.

 

독일어에서는 경쟁사회를 ‘팔꿈치사회’라는 단어로 말한다. 동료를 친구를 심지어 형제를 팔꿈치로 젖히고서야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 - 결국 승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승자의 팔꿈치에 밀려 떨어져나간 많은 패자들이 함께 누렸어야할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구상의 자원도 재화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봉건 피라미드 위에 ‘신 대신 돈이 자리한’ 시대에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빈곤 못지않게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 인구 10만 명 당 33명,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연속 8년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 - 우리는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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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20. 「더불어 살기」, 『어디쯤일까』, 이화동창문인회, 개미, 128-131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