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9. 5. 9. 09:49

발자국

 

발자국이 발단이었다. 그는 도처에 발자국을 남긴다. 거실은 그의 발자국으로 덮인다. 순식간이다. 밀걸레는 그 속도를 그 시간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어쩌다 집에 있는 주말이면 더 했다.

아침밥은 해 맥여 내보내야사제! 귓속에 박힌 암호에 따라 평일 아침은 부산하다. 불려놓은 쌀과 잡곡을 반반으로 섞어서 불에 올리면 17분이면 두 그릇 밥이 된다. 밥이 어렵지는 않다. 어려울 리가 없다. 반찬이 늘 문제다. 김치가 문제다. 맛있게 익었다고 생각되는 김치는 그에게는 시어 빠진 것이다. 신 김치에 유산균이 얼마나 많은……. 알아요, 안다고요. 설이 지나면 김장김치는 들다 나다를 반복한다. 국물도 쉽지 않다. 아침상엔 필수다. 17분에 되는 국은 드물다. 저녁에 미리 끓여 놓을 때가 많다. 토장국과 맑은 장국을 가리는 편은 아니다. 어우, 국물 좋네요! 입맛이 좋거나 국물 맛이 괜찮으면 늘 같은 감탄사를 낸다. 그 왜, 내 친구 있다고 했지, 대학에 있는 친구, 절대로 국을 안 먹는. 그 집엔 아예 국이라는 게 없대요. 뭔 맛으로 밥을 먹을까.

그래요? 그렇담 그 집 아내는 얼마나 편할까, 하려다가 꿀꺽 말을 삼킨다. 애들도 국을 못 먹어보고 자랐을까. 웬 남 걱정! 우리 집 밥상도 엉망인데. 야채를 더 챙기기 시작한 뒤로는 국적도 없는 밥상이다. 우선 양배추를 채 썬 것, 껍질 벗긴 토마토를 한 개 먹는다. 오이나 사과를 먹기도 한다. 그러고서 밥을 먹는다. 수선스럽다. 나는 반대 순서로 먹는다. 어차피 함께 먹기는 어렵다. 누룽지와 숭늉까지를 가져와서 앉으면 그의 식사는 끝난 참이 된다. 숭늉은 본채 만 채 냉장고의 찬물을 들이키고는 친절한 녹음기를 튼다.

오늘도 집에만 있지 말고요, 당신 아무튼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그래요. 에너지를 밖으로 내뿜는 게 중요해요, 우리 나이엔 특히. 날씨도 좋은데, 날씨가 나쁘더라도. 그건 날씨 따라 변형이다. 그가 그렇게 집을 나서면 시계는 다시 느리게 가기 시작한다.

일요일 아침엔 밥이 없다. 국도 해방이다. 선식이나 떡을 챙겨 쟁반에 차려 거실로 들고 나간다. 채소와 과일은 듬뿍 가져간다. 나도 따로 쟁반을 챙겨 거실로 나간다. 그러다가 눈에 띠는 것이 발자국이었다. 그의 발자국이다. 더 일찍 일어난 그는 발코니 쪽 문을 열어놓았다. 통풍이 중요해! 지론대로 창문 열기를 좋아하지만 요새는 약간의 변형이 있다. 미세먼지가 요인이다. 나는 미세먼지 주의보를 흘려듣지만 곧 알게 된다. 그가 창문을 열어놓은 날이면 미세먼지가 양호하다. 문제는 발자국이다. 그이 생각으로는 발코니는 집안이고 충분히 깨끗하다. 조금 덜 깨끗하다고 쳐도 잠깐 밟고나가서 창문을 여는 정도로 슬리퍼 바닥이 더러워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먼지며 물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거실에는 발자국이 난다. 발코니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화장실로, 심지어는 안방에까지도. 그날도 마찬가지. 쟁반과 팔 사이로 힐끗 거실의 발자국들을 보고야 말았다. 쟁반을 서둘러 내려놓고는 바로 밀걸레를 들고 나선다. 그이는 살짝 찡그린다. 음식을 두고 걸레질이라니, 병이다, 병. 아니면, 발자국 따라다니는 것 징허네. 속으로 그럴 것이다. 내 눈에는 발자국들이 줄을 잇는다.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문 입으로.

아침이 그렇게 끝나고 부엌을 나선다. 아차! 다시 보이는 발자국! 이번엔 여러 갈래는 아니다. 그래도 또 나 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을 것이다. 내가 결혼식에 갈 일이 있어서 느긋한 호사를 부릴 수도 없던 차였다. 시계를 쳐다보면서도 걸레질을 지나칠 수가 없다. 다시 거실바닥을 줄줄이 닦는다. 나도 모르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닦는다. 참지 못하고 그이의 슬리퍼를 잡아 벗기는 상상을 한다. 이렇게는 안 돼욧! 그 일이 실제로 임박했음을 느낀다.

머리에서 클립을 풀고 대충 옷을 챙겨 입는다. 결혼식장에 입고 가는 옷이야 뻔하다. 적당한 길이의 치마에 적당한 크기의 재킷을 입는다. 검정색을 피해서 적당한 색깔을 입는다. 적당, 적당, 적당.

나도 나갈 거라 했죠. 밥 잘 먹고 천천히 와요.

벌써 뉴스 채널에 빨려 들어간 남편이 손만 쳐들고 흔든다.

살짝 늦었다. 어머니들이 카펫을 밟고 있었다. 신랑신부에 앞서 누군가가 새하얀 카펫을 밟는 장면은 늘 보아도 적응이 안 된다. 주례도 없는 것이 요즘 유행인지, 서로 사랑고백을 하고 선서를 한다. 냉택없이 감상에 젖은 꼴이라니, 내가 외려 부끄럽다. 예능프로 같은 사회도 머리를 아프게 한다. 뒷줄에 끼어 앉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우르르 뷔페음식으로 자리를 옮긴다. 사람들도 그편을 선호하고, 취사선택이란 어찌 보면 합리적이겠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 닿지 않게 하려 해도 섞이는 음식들이 문제다. 1라운드로 찬 것, 다음엔 따뜻한 것, 그리고 후식. 못해도 세 번은 들락거리게 된다. 수만 가지가 차려져 있으니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담기 위한 탐색전은 필수다. 둘러보다가 벌써 지친다. 막상 가져올 때는 가짓수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한꺼번에 너무 여러 가지를 삼키면 맛을 알 수가 없다.

맞아, 『소박한 밥상』은 레시피가 있는 요리책이 아니라, 간단하게 먹자는 설교집이야.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빨리, 더 빨리,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리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곱게 바느질하는 데 쓰자고요.’ 숲속에서 손수 지은 집에서 살아가는 중년노년 부부의 이미지가 올곧이 떠오른다. 헬렌 니어링은 바느질도 스스로 했겠지. 손으로 여러 겹 덧대어 꿰맨 재킷을 입고 있는 남편의 사진이 남아있다. 필요한 만큼 자급자족하면 더 많이 일하지 않고 그냥 삶을 즐긴다. 축적하기 위한 노동을 하는 대신 그냥 사는 일에 충실한 삶,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21세기에도 가능할까. 옆 자리 사람들이 일어나는 데 맞춰서 덩달아 일어선다. 급히 마신 커피가 너무 뜨거웠는지 입안이 얼얼하다.

그이는 집에 없었다. 어머님 댁에 갔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도 가끔 어머니한테 들리는 효자다. 평소처럼 다시 혼자인 오후다. 대충 씻고 나니 개운하다. 아직 햇살이 좋다. 발코니에 무슨 바쁜 볼 일이 있어서 그리 슬리퍼도 못 갈아 신고 드나들며 발자국을 남겨놓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하나도 아니고 둘, 발가락이 터진 놈과 막힌 놈, 두 개의 바깥 슬리퍼가 있는데 왜 갈아 신지 않을까. 나는 앞이 막힌 놈을 신고 나가서 이리저리 살핀다. 어라, 풀꽃이 내팽겨져 있다. 푸르스름한 풀꽃. 어디서 뽑힌 걸까. 진달래 분에 덜 뽑힌 나머지가 있다.

작년에 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달랑 혼자서 핀 진달래를 보았다. 분홍빛이 파리하기까지 했다. 무리와는 멀리 떨어진 채 흔들리는 참꽃이 애처로워서 파오기로 했다. 마침 과일칼이 있었다. 뿌리가 그리 깊지도 않았다. 그땐 풀꽃은 없었는데, 풀씨가 묻어온 것일까. 올해 피어나서 흙이 덮이다 말다한 모양새로, 뽑힌 놈들은 뽑히고 남은 놈들이다. 아이쿠, 봄까치꽃이다. 이른 봄 진달래랑 함께 피는 풀꽃.

진달래는 뭐고 철쭉은 뭐야? 둘 다 분홍색에…….

내 색시 하렸는데 안 되겠네. 참꽃 개꽃 모르면 어떻게 해. 이거 봐, 이렇게 홑꽃이면 참꽃이야, 진달래. 수채화 같지, 화전도 해 먹고. 하지만 개꽃 따먹고 죽지 말아.

피이, 누가 색시 한댔나!

여기 요 파르스름한 게 봄까치꽃이야. 요걸 큰개ㅇㅇ꽃이라고 했다니, 이름 한번 험하지? 열매가 댑다 커서 그랬다지만 너무했지. 심한 이름들은 여럿 순화됐어. 문제는 사전엔 아직 안 바뀐 것 같아. 영어로도 되게 이쁘다. 버즈 아이, 어때, 새의 눈 같아? 학명도 이뻐, 이쁜 여자이름이야, 베로니카 페르시카. 이 납작한 거꿀심장꼴에 푸르스름 그림자를 띤 하얀 색. 듣고 있어? 남이야, 남아!

거꿀심장? 하트 모양 거꾸로?

말은 대충, 나는 풀밭에서 푸른 기운이 도는 그 네잎클로버모양 꽃들을 한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네잎클로버잖아. 어떻게 꽃잎이 네 개일까.

아니, 꽃잎이 네 장인 걸 첨 봐? 개나리도 몰라?

개나리 꽃잎이?

그럼, 완전 네 장이지. 설마 개나리 그리면서 꽃잎 다섯 개씩 그렸어? 통꽃 중간부터 넷으로 짝 갈라져서 정확하게 십자모양인걸. 녹색 꽃받침도 4개로 갈라져 있고. 십자화과 식물들이 다 그래.

난 무심코. 누가 개나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나?

응, 실은 네 닢짜리 십자화도 많고 많은데 그냥 지나쳐서 모르는 거야. 노란 색 꽃다지 알지? 냉이랑 아주 비슷한 노란 풀꽃, 다 먹는 풀들이야. 그러고 보면 냉이는 실은 이름이 없어, 나물이라는 뜻이거든. 먹을 수 있는 풀들, 우리가 즐겨먹는 채소들 대부분 십자화 종류야. 배추꽃, 갓꽃, 유채꽃 다 비슷비슷해. 뭐가 섞여있어도 잘 몰라.

우와, 그런가. 배추는 배추 무는 무만 알았지, 꽃 필 때를 봤나.

그때 나는 좀 부끄러웠을까. 화단에 피어있는 분꽃이나 맨드라미는 알았지만, 과꽃도 초롱꽃도 이름들을 알았지만, 풀꽃들은 이름을 상상도 안 해 보았다. 봄까치꽃이라고! 배추꽃, 무꽃도 있구나. 그래, 뿌리가 중요해도 꽃들이 먼저다. 연근을 먹지만 연꽃이 훨씬 더 아름답지 않던가.

선배는 내가 바보 같았을까. 시야가 좁아터진 맹꽁이, 젊다 못해 어린 시절 나는 아는 게 없었다. 지금이라고 그리 나아진 건 없겠으나, 적어도 배추꽃 무꽃은 구별한다. 오묘한 무꽃들이라니. 그리고 하나 더. 봄까치꽃이라는 단어만으로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흉측한 이름 대신 봄까치꽃이라고 부르라 당부하던 선배는 어디만큼 가 있는 것일까.

나는 진달래며 봄까치꽃을 보면 살그머니 가슴이 아프다.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나중에 선배가 정작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새소리를 따라 하늘만 쳐다보았다. 놀라서, 부끄러워서, 대답을 몰라서 그냥 못 들었다. 남아, 나랑 결혼하자고! 선배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말하지 않았다. 새의 모습도 기억하지만 무슨 소용인가. 모양은 참새지만 훨씬 큰 새. 그땐 몰랐지만 이젠 이름도 안다,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너무 큰 새. 울음이 아니라 말소리였겠지. 무슨 말이었을까? 청혼이었을까? 그놈들은 지금도 그런 찌익 찌익 소리를 내며 아파트 하늘을 누빈다. 직박구리가 먼저인지 진달래가 먼저인지 봄이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발자국 원인을 탐색하다가 웬 꽃 타령인가. 진달래에 묻어왔다가 뿌리 뽑힌 봄까치꽃을 어쩌나. 바깥 풀밭으로 보내야할까. 주먹 안에 가만히 쥐고 아파트 화단으로 나간다. 반 토막이 난 동백나무 앞을 서둘러 지나친다. 겨우내 몰랐었는데 일전에 꽃봉오리가 맺혀서야 주저앉은 동백을 보고서 놀랐다. 관리소 아저씨 말이, 새로 이사 온 1층 사람들이 그늘진다고 가지들을 다 쳐내라고 했단다. 아무런들 우아하게 자란 굵은 동백을 그렇게 잘라버리다니 너무 허망했다. 안쓰러운 동백나무를 안 보려면 풀꽃을 멀리에 심어야 한다. 꽃잔디 무리도 지나친다. 눈부시다 못해 눈이 상할 것 같은 현란한 색깔에 이 여린 놈들은 묻히고 말 것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공간, 살짝 그늘이 지는 쪽 흙을 파고 묻듯이 심는다. 선배는 봄까치꽃을 두해살이식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올해 핀 이것들이 살아 견딘다 해도 내년엔 꽃피지 않을 것이다. 푸르스름한 꽃망울이 피어나는 것을, 내후년 봄을 기다릴 일이 하나 생겼다.

그늘이 생긴다. 그이가 서 있었다. 아파트 출입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화단에 쪼그린 나를 보았나 보다.

뭐하고 있어요?

아, 풀꽃.

풀꽃을 뭐하는데?

당신이 버린 것들 여기서 크라고요.

내가 뭘 버려요? 풀꽃을 크라고? 풀꽃이 크기는 크는 건가?

그냥 살아 있으라고요. 대대로.

실없기는. 들어가요!

설마 그이가 부러 버린 건 아닐 게다, 그럴 이유를 알 턱이 없으니까. 내 눈은 뒤를 향한다.

그렇게 봄까치꽃은 해마다 이사를 했다. 오늘도 직박구리 녀석들이 울어댔다. 나도 올려다보았다. 이 동네 나무위에서 태어난 녀석들의 후손이 틀림없다. 해마다 돌아오는 것을 보면 그렇다. 놀랍게도 경칩 다음 날이던가,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우리 왔어요, 라고 떠드는 것 같았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나를 따라 온다고 느낄 정도였다. 내 앞을, 내가 가는 길을 앞서서 날며 나무를 옮겨 다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더니 며칠을 잠잠했다. 내가 헛들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이제 직박구리들이 봄까치꽃을 보았으니 이태 후에도 알아봐 줄는지 모른다. 불쌍한 봄까치꽃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알아볼 것이다. 내가 그들 직바구리를 못 알아본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거나 봄까치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설마 새들인데, 저들이 반가움 또는 기쁨이나 슬픔을 모를 리 없다.

하늘을 올려보면서 발은 그를 따라 들어온다. 그이가 번호키를 누른 다음에 나를 앞세운다. 나는 다시 현관을 살핀다. 흩어진 신발들을 가다듬고, 현관문을 확인한다. 오늘은 마감이다.

그런데 당신 일찍 들어왔네. 시간이 아직 되니까, 옷 입은 김에 영화나 보러갈까요?

영화 안 좋아하면서요. 나도 나갔다 와서 피곤하고요.

꼭 좋아하는 것만 하나?

일이라면 몰라도 여가생활인데 좋아하는 걸 해야죠! 일도 좋아하는 걸 해야…….

아차, 말을 내뱉고 보니 걱정이다. 그이가 이비인후과 의사 일을 좋아할까. 겁이 난다. 내 이상한 청력 때문에 이비인후과를 택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늘 미안하다. 내가 전원이 끊겼다 말았다 하는 것처럼 말소리를 들었다 못 들었다 하는 병을 앓기 시작할 무렵 오빠와 그이는 의과대학생이었다. 아니, 오빤 벌써 그만두었을 때였나. 아무튼 모두들 나를 걱정했다. 내가 회복이 됐더라면 덜 미안할 수도 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 실력으로도 내 청력을 회복시키지 못하니까 후회할까. 나를 위해서였다면 정신신경과를 택했어야 했다고 고개를 갸웃거릴까. 뭐야, 이건! 하고서, 나를, 내 상태를 진작 실망했을까. 오빠가 의과대학을 집어치운 것과 함께 묶어서 이상한 집안과 엮였다고 땅을 칠까? 아버지로 유지되던 집안은 기울었고, 오빠로 기대되던 집안은 서지 못했다. 게다가 이비인후과는 잘 나가는 과가 아니다. 정신신경과를 했더라도 인기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라리 근년 들어 이비인후과에는 성급한 감기환자들이 몰려서 조금은 나을 거라 위안해 본다. 감기가 들면 낫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감기라고 그러면 시원찮고, 비염에 걸렸다고 믿고 싶어 한다. 기관지염 같은 것은 위험한 병인데도, 목감기보다는 기관지에 염증이 있다는 말을 더 듣고 싶어 한다. 질병친화적인 민족? 병에 관해서 잘 알고 여러 종류 많은 약을 먹고 있어야 안심인 사람들이다. 덕택에 의사와 가족들이 굶는 일은 드물다.

가볍게 산책이든. 일요일 오후인데. 그러니까 나가요, 안 나가요? 난 그럼 씻을 테요.

그는 내가 대꾸를 않자 욕실로 향한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떠올린다. 센강 주변의 전원 속, 잔뜩 멋 부린 파리지앵들의 휴식처인가. 애 손 잡고 산책하는 아줌마, 풀밭에 누운 아저씨, 뛰어다니는 아이들, 강아지들. 수십 명 사람들을 수만 개의 점으로 그렸다는 게 신기하다. 만일 쉬라가 지금 살아있어서 ‘지구 섬의 일요일 오후’ 같은 걸 그린다면 우릴 겨우 하나의 점으로 그릴까. 혼잣말은 어차피 발화되지 않는다. 나는 듣기만 잘 못하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잘 못한다, 안 한다. 그게 뭐 문제인가.

야아, 오랜만에 달걀을 했네요. 우리 이제 달걀을 먹는 거네.

저녁 밥상에 앉은 그 기분이 좋다.

뭐, 아예 안 먹는 것도 아니잖아요.

맘 편하게 먹자고요. 어차피. 어, 명란도 넣었어요? 왜 맘이 바뀌었는데요?

뭘 바뀌었다 그래요. 그때그때 그냥저냥 뭐.

아아니, 나는. 나는 당신이 편안해지면 내가 두 배로 편안해져서 말이요. 뭘 해놓고 안 먹으면 불편해서. 무엇이든 함께 먹는 쪽으로 갑시다. 어차피 인명은…….

인명은 재천이라고! 알았어요. 누구 또 비명횡사라도?

늘 그렇지 뭐. 아는 사람은 아니고. 병원의 일상인 걸요. 정형외과 환자 하나가 패혈증으로 갔어요. 내과로 트랜스퍼 될 때는 늦기 십상이지. 뭐 새삼스런 일도 아니요. 한 원장이 혼났어요.

의사가 혼났다고요? 환자는 죽었는데, 의사가 혼났다고요? 죽은 사람도 있는데 혼 난 것이 대순가? 속으로만 내뱉는 말이다. 소리가 없으니 말이 아닌가? 말은 다르게 나간다.

벨기에랑 덴마크도 이제 수습 되었겠죠?

청청지역이 있을까마는 문명화된 지역은 다 오염지역이요. 어설픈 문명국이 더 문제고. 우리, 중국…….

중국도 우리랑 비슷할까요?

알 수 없지, 넘 거대한 덩어리라서. 그런데 달걀하면 중국 아뇨. 살충제 문제는 저리 가라지. 가짜 달걀, 아니 인공달걀이라나, 그걸 만드는 학원도 있다잖아요.

중국 가서 달걀 먹을 일은 없고요. 그러니까 우리 달걀은 먹는 거예요, 다시 예전만큼.

당신, 돼지고기는 절대로 안 먹을 거요?

앗, 또 그 이야기. 인터넷에서 너무 끔찍한 사진을 봤다니까요! 돼지가 창살을 물어뜯고 있었어. 입에서 피가 날 지경.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그런 독기가 어디로 가. 잡아먹는 인간들에게 들어가서 독이 퍼질밖에. 그래서 돼지플루가…….

걱정도 참.

걱정도 팔자라고, 못 말린다고! 그래요, 내가 심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참을 수가 없는걸요. 세상에, 한 공장에서 닭오리 100만 마리를, 돼지 2만 마리를, 소 3천 마리를 창살에 가두어 놓고 키운다고 상상해 봐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니까요.

본 것은 아니잖아, 그만 눈 감아요.

눈 감으면 더 생생하죠. 보도가 됐으니 사실이죠. 2,000㎡ 헛간마다 4만 마리 넘는 닭을 키우는 농장이랬어요. 농장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에서도 하루 종일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오질 못 한댔어요. 2,000㎡면 600평인데, 600평에 4만 마리면, 가만, 계산해 보자, 150평에 만 마리, 15평에 천 마리. 15평에, 아이쿠, 15평 아파트를 생각해 봐요, 거기에 닭이 천 마리가 우글거린다고! 우리 집이면 2천 마리가 넘게 꼬꼬댁거리겠네! 으악!

무슨 그런 상상을! 병아리 한 마리도 키우자고 안 할 테니 참아요, 참아!

생명이 있는 존재는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그 생명이 중하다고 믿기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 있죠.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동물의 죽은 몸을 나를 살리고 강하게 만들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어요. 내 음식을 위해서 살생은 하지 않겠다, 뭐 그런.

거야 새로운 말도 아니고 불교에서는 옛날부터 그러는걸. 서양 사람들이 말하면 뭐 특별해지는가. 당신 그 『소박한 밥상』에 빠진 이래 내가 피 보는 것 아뇨! 숲에서 살았다는 그 사람들, 가진 돈도 좀 있고, 유식해서 책도 쓰고, 원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서 기본적으로 건강했고. 뭣이 문제였겠소! 스콧 이어링인가 니어링인가, 그 사람 반전이다 친평화다 해봤자, 결국 공산주의자 아녔나! 그러니 대학에서 퇴출당했고, 오죽하면 스파이 혐의를.

어, 내 책들을 봤어요? 언제?

내 책 네 책이 어딨어요. 집에, 탁자에 있으니 봤죠. 좋은 머리로 미래를 내다봤는지는 몰라도. 그래봤자 온 사회가 배척했으니 죄인 취급할 만 해서지, 근거 없이 그랬을까.

무슨 말예요? 혐의라는 것 그게 어때서요, 엮으려다 안돼서 무죄판결이면 무죄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귀도 따라 운다. 맙소사, 이이도 여론재판을 거드는 것이야. 여론재판에 휩쓸리는 것은 지식인이 할 일은 아니지. 하긴 의사가 곧 지식인은 아니다. 또 지식인들이 외려 여론재판에 앞장서기도 한다.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하는 게 지식인이다. 의사들이나 지식인들이나 싫어진다. 싫다. 이런 말도 섞기 싫다.

나는 어떡하다가 당신 완전 비건이 될까 걱정이요!

비건, 비건. 헬렌 니어링의 말을 듣고 있다. 들려온다.

‘소박한 밥상, 그래요, 육신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 식사할 뿐, 미식에 빠지지 않은 검소하고 절제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썼어요!’ - ‘나는 30분 이상 걸리는 음식을 만들지 않는답니다. 가루를 섞어 반죽하는 대신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10분 15분 끓이면 맛좋은 음식이 되는데, 뭣 하러 두어 시간씩 걸려서 빵을 구울까? 사과 파이보다는 사과 소스나 사과를 날것으로 먹자. 감자를 먹으려 한다면 튀기거나 으깨려고 소란스럽게 쓸 것 없다. 튀기거나 으깨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감자를 씻어서 오븐에 넣고 구우면 끝’.

헬렌은 기막히게 유식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사실, 그런 것도 안다. 먼저 자연 속 홀로서기를 실행했던 소로우의 글이니까 당연히 읽어 봤겠지. 『우울의 분석』을 쓴 17세기 어떤 사람은 ‘배설물을 만들 것에 뭣 하러 마음을 쓰느냐’고 했다는 것, 그런 에피소드까지도 안다. 아침을 조리한 적 없고, 명절의 번잡함 속에서는 오히려 단식을 하고, 부엌에 오랜 시간 처박혀 있는 대신 음악과 책을 가까이한 덕택일가?

‘난 날 때부터 채식인이었어요. 도축한 고기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고사하고 막대기를 들고 건드리지도 않을 거예요.’ 헬렌의 말은 좀 심하다, 편파적이랄 밖에 없다. 실제로 구운 고기는 만인의 희망사항이라는 글도 있었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브런치였던가, ‘구운 비둘기가 널려 있는 놀고먹는 세상을 꿈꿀 때, 그런 곳에서라면 우선 만인이 동등하며, 유복하며, 수고도 노동도 없을 것’이란 에른스트 블로흐의 구절을 소개해놓은 글을 본 적이 있다. 블로흐의 글은 무척 어렵지만, 또한 늘 인상적이다. 여기선 왜 하필 구운 비둘기일까, 암튼 만인이 원하는 것이 채식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남편, 스콧 니어링은 철학적 채식주의자다. 두 사람의 『조화로운 삶』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숲 속의 자립, 그런 삶을 설계했다는 자체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가 말한 경제공화주의 따위 어려운 개념들은 기어코 인터넷을 찾아서 읽었다. 기회 균등, 시민의 의무, 민주 정치, 인권 - 이런 기본적 민주개념을 말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졌다고? 필화사건은 동서고금 어디서나 같구나. 헨리 조지라는 이름도 찾아보았다. 스콧 니어링이 스승으로 삼았다 해서였다. 이름만으로는 대대로 영국 왕인가 싶었는데, 왕들하고는 완전 딴판이었다. 토지공개념이라니, 책 제목도 찾아보았다. 『진보와 빈곤』, 130년 전에도 대단한 사람이 있었구나. ‘노동생산물은 생산자에게 소유권이 있어 마땅하고, 자연에서 주어진 땅이라거나 숲, 크게 보아서 환경 전체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 분명한 말에 세상은 왜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이 간단한 말을,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나, 나 좀 봅시다. 또 어디에 가 있어요? 책 속? 인터넷 속?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나는 것을 그냥 말로 해요. 내 뱉으라고요. 음식은 조금만 많아도 못 삼키면서 머릿속엔 뭘 그리 삼켜두고 있는지.

내가 뭘 또 안 들었다 보다. 헛듣고 있는 것을 또 들켰다.

나남이씨, 뭐 하나고요! 그러니까 돼지고기는 절대로 기대하지 말라고? 오늘 달걀이라도 내놓았으니 감사해야 하나? 해도 달걀찜은 좀 구식인걸, 어머니 하시던 것 고대로요.

‘튀기기보다 끓이기, 끓이기보다 굽기, 그보다 찌는 것이 낫다. 가장 좋은 것은 날것으로 먹기.’ 나는 여전히 헬렌의 소리를 듣는다. 날것으로…… 물론 야채와 과일 말이다. 태생이 채식인이라서 브라만을 만날 수 있었을까? 유럽으로 바이올린 공부를 하러 갔던 젊은 날 헬렌의 처음 상대가 크리슈나무르티였다니!

선배는 그때 저자의 이름을 읽기도 어려운 얄따란 책을 들고 있었다. 바람 불던 날, 캠퍼스 내 작은 호숫가 언덕이었다.

읽어볼래?

뭔데요? 『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라고? 아니, 뭐든 알려고 대학 다니는 것 아닌가? 알지 말라니. 어지럽네.

자유란 모든 권위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하며, 권위의 부정은 두려움의 해방이라고 했어, 독특해. 읽어봐! 지난번 시집 『고통의 축제』, 그 시인이 번역했다니까. 함께 구원받고 싶어서 번역을 했다네. 혼자만 구원받는 건 구원이 아닐 것 같다고.

구원씩이나.

어두운 연둣빛 책자는 얼핏 시시해 보였다. ‘어제가 죽어야 오늘이 있고, 매순간 죽어야 매순간 살 수 있다.’ 뒷면에 그런 비슷한 말이 쓰여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읽었지만 남은 건 별로 없었다, 너무 어려워서. ‘자유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 그런 구절은 가슴 철렁하니 좋긴 했다.

그나저나 책으로 볼 때는 사람과 신 중간 쯤 되는 존재 같았던 그 사람, 그런 ‘세계의 지도자’, 터무니없이 영적인 사람과 사적인 인연이라니, 헬렌이라는 사람 참. 하긴 현실적으로 그녀가 택한 것은 고향 미국, 스콧 니어링, 숲속의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실제로 매우 독립적으로 ‘좋은 삶’을 정하고 그대로 ‘살아간’ - 리빙 - 대단한 사람들이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대신에 아는 것을 살아간 사람들, 이 의지의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관습으로 재단된 숙제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의지란 무엇인지 가늠할 길이 없는데.

‘대충 말고 철저하게 살자. 부드럽게 말고 단단하게 먹자. 음식에서도 생활에서도 견고함을 추구하라.’ 헬렌의 이런 구절에 정말 덜컥 걸렸다. 단단함, 견고함, 그게 정확하게 뭘까. 애매하고 궁금하여 내가 어떻게든 영어 원문을 찾아보았다면 누가 믿을까. 누구라도 믿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정말로 그 구절을 찾아보았다. 소프트, 하드, 파이버. 내 멋대로 이해하자면, 그냥 단단함을 표방하는 것이리라. 음식과 생활에서 섬유질을 추구한다. 파이버, 원래 섬유질이란 말이지만 근성이나 정신력 같은 뜻도 있었다. 음식과 생활에서 근성을 추구한다. 정신력을 추구한다. 단단함을 추구한다.

어쩌나, 달걀찜은 단단함과는 완전 거리가 머네.

무슨 말요. 달걀찜이 부드럽지 그게 어때서요. 찜이 찜이지.

그런가. 간이 괜찮나 보세요! 싱겁게 싱겁게 하려니 맛도 없는 것 같아요.

맛있지. 내가 길이 들어서 그런가, 남이씨 밥상 사랑합니다.

사랑씩이나.

왜 이러세요, 맛있다는데. 좋아요, 오늘은 명란이라, 다음엔 알새우일까 기대되네. 사실 우리가 목포갈치, 흑산홍어, 무안낙지, 그런 것 빼버리면 뭔 맛으로 사는가요. 가덕대구 추가요, 고니 한 그릇 쏟아지는 대구 정도는 돼야! 남이씨, 나남이씨, 하늘같은 남편 좀 봐 주세요!

알았어요, 맨날 하잖아요.

우리라니, 혼자서 말하면서. 하늘, 하늘은 또. 하늘이면 모르는 것이 없겠구만, 이이는 내가 『소박한 밥상』을 보기 훨씬 전부터 피하는 식재료들이 많았던 것을 모른다. 느그 신랑, 저실엔 그저 생명태다이. 멋이든 매운탕으로 허면 좋아허고! 생선을 토막 내는 것이 싫어서, 무서워서, 할 수없이 자잘한 생선들을 쓰는 것을 그는 모른다. 십년을 몇 번씩 살고 나서도 모른다. 도마 위에 눈을 뜬 채로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물고기를 토막내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물고기들은 왜 죽어서도 눈을 뜨고 있을까. 온통 한데 그물에 걸려버려서 눈을 감겨줄 살아있는 이웃이 없어서일까. 눈은 안 보지만 낙지처럼 참수를 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대체 난생 처음으로 문어나 해삼들을 먹어본 용감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누구라도 먹었을까. 하긴 누구라도 배가 정말 고프면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먹을 것이다. 어라, 내가 소로우의 말을 흉내 내고 있네! 그래, 배가 정말 고프면 아무거나 먹는다. 풀들도 이것저적 먹다가 죽기도 하고 미치기도 했다지. 옛날이야기에 미치광이풀 이야기가 있었다. 먹을 것이 동이 난 보릿고개에 친정아버지가 다니러 오셨는지라 담벼락 아래 풀을 뜯어다 삶아 드렸는데, 친정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어얼쑤, 시아버지가 덩달아 저얼쑤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가 싶더니 정신을 잃고 푹 고꾸라졌다고. 실제로 참나물과 비슷한 독초가 있으니 헛이야기가 아니다. 둘 다 쌍떡잎식물이다. 언제부턴가는 식물들을 보면 인터넷을 찾아볼밖에. 선배가 더 이상 말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소량의 독은 약이 된다고, 미치광이풀 뿌리는 진통제로도 쓴단다. 그러다 보면 항암효과 최고라는 명이도 선뜻 먹고 싶지 않다. 사약으로 썼다는 박새라는 독초와 어찌 구분하느냐고! 털이 난 곰취는 먹는 것이고, 못 먹는 동의나물 잎에는 털이 없다고 구별하란다. 하지만 어떤 땐 다르다. 털이 많은 게 독초 여로이고, 잎에 털과 주름이 없어야 먹는 원추리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알랴. 선배는 알겠지, 전문가가 되었을 테니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 그런 책이 나왔을 때, 제목을 지나쳐서 흠칫 저자 이름부터 보았다면 이 무슨…….

하늘같은 남편 조옴! 아니, 하늘 빼고, 밥 잘 먹는 남편 좀 봐줘요!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 냉장고로 가더니 물병을 꺼낸다. 찬물이 성이 차지 않으면 얼음을 넣는다. 냉동실엔 제빙기가 필수다. 지난번 설 명절엔 남은 음식들 넣느라 제빙기를 빼냈다가 낭패를 당했다. 봄이 되자마자 갑자기 날씨가 더워져서 부랴부랴 제빙기를 제자리에 집어넣었는데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전화 상담만으로 가능할 것 같다며, 일단 전원을 끄랬다. 그러고 한 시간 쯤 후 다시 전류를 흐르게 하면 작동할 수도 있다는, 애매한 지시였다. 반신반의, 어쨌거나 냉장고를 통째로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아서 퓨즈를 내리기로 했다. 집의 1/4 쯤 전기를 통째로 껐다가 켰다. 그런데 정말 물이 제대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왜 그냥 섰을까. 왜 껐다 켜는 것만으로 다시 작동할 거면서 섰을까. 기계란 놈은 눈곱만치의 조건만 아니 되어도 그냥 선다. 우리가 절뚝거리거나 허리를 못 펴도 걷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냥 선다, 그 말은 죽은 것을 말한다.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진 않는다. 몇 퍼센트 이상 상해야 죽는다. 그 몇 퍼센트가 몇 퍼센트일까.

아차, 소식을 모르는 것은 죽은 것과 다를까. 무엇이 다를까. 나는 첫 번째 청혼을 흘려들었고, 두 번째 청혼에 결혼했다. 첫 번째 그 사람을 지금 모른다. 사실 어떤 친구들은 더 여러 번 청혼을 받았는데도 그 사람들 소식은 그런대로 알고서 사는 것 같다.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소식을 모를까. 얼마나 멀리 갔을까. 왜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을까. 얼마나 깊은 숲으로 산으로 갔을까. 깊고 깊은 숲속에서 산골에서 꽃을 가꿀까, 농부가 되어 있을까. 옛이야기 속 연달산 농부처럼 산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 천사를 만나 사랑하고 천사는 떠나고, 이제는 딸에게 아들에게 참꽃 개꽃을 말해주려나. 새봄에 피는 홑꽃만 따먹어라, 늦게 피는 겹꽃, 점박이 개꽃은 먹으면 큰일 난다아. 아님 주왕산에 숨어 수달래 축제에서 한 역할 하고 살아가려나. 시답잖은 상념이랑 털자. 고개를 흔들어 본다. 오른쪽은 심하게 흔들린다.

뭐해요, 밥 먹다 말고! 난 벌써 참외를 깎았고만. 참외가 일찍도 나왔네. 반은 씨 빼놨어요!

참외 껍질이 든 작은 쟁반을 들고 그가 일어선다. 아차!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다용도실을 밟을 것이다. 다용도실은 축축할 때가 많아서 슬리퍼는 또 한 번 심각한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되풀이 되는 내 녹음테이프.

그냥 두세요! 거기 그냥, 싱크대 위에 그냥 두세요!

왜, 아무가 버림 어때서요.

아니, 그냥 조옴!

당신 참 이상한 사람이야. 도와주려는 걸 그리 말리니. 무엇이 문젠지 알다가도 몰라!

그는 휭 하니 거실로 나간다. 나는 부엌에서 뱉고 싶었을 그의 성난 목소리를 듣는다. 내 발자국이 문제라고? 까짓 닦으면 되는 흔적이 문제라고? 너 그 귓구멍 속 남아있는 소리들은 뭔데? 그 흔적들은 언제 지울 건데? 지워볼 생각이라도 했냐고! 소리 없는 그의 말이 귓가를 심장을 도려낸다.

맞다. 내 발자국, 그것이 문제다. 그는 내 발자국을 알고 있다. 그저 대놓고 언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할 말이 없다. 사람들은 하려던 말 중에서 몇 퍼센트를 말할까. 이번에도 말을 삼키는 나는 엉뚱하게도 먼 데 헬렌 니어링을 듣는다. 인디언의 노랫말을.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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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 소설시대 21, 한국작가교수회, 22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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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