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1. 12. 31. 16:47


고아가 되었다.
올 봄.
나의 어머니는 당신 나이 이른 다섯에 고아가 되시더니만, 우리더러는 더 일찍 고아가 되라시며 떠나셨다. 막둥이는 1963년생, 겨우 마흔 아홉이다.

피를 나누어주거나 물려준 후손 27명, 법으로 후손이 된 14명을 더하면 41명의 후손을 남기셨다. 그 중에서 참석자는 29명. 290명이 훨씬 넘었을 조문객을 생각하면 불참 수가 부끄럽다. 어머니 앞선 불효녀는 어쩔 수 없다. 머나먼 외국에 아기들이랑 사는 경우도 어쩌랴. 그래도 불참이 많다. 누구도 예상 못할, 설마 하던 불참도 있었다.

*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세월은 저 뒤편에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슬하를 떠난 셈이다. 대학시절은 정신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서울 살이. 젊디젊은 ‘엄마’는 서울나들이를 즐기셨다. 우리들 -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 함께 이화캠퍼스를 누볐다. ‘누볐다’는 물론 엄마의 표현이다. 실제로 이대 앞과 명동을 누빈 것은 엄마였다.

어머니는 이대 앞과 명동만이 아니라, 설악산과 제주도를, 전국을, 나아가서 가히 세계를 누비셨다. 어머니가 빠진 저녁밥상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던 세월. 불평도 별로 없는 집안에서 나 혼자 불평분자였다.

왜 엄마는 빨리 안 들어오셔요?
우리 학교에 가면 빨리 나갔다가, 우리 돌아오기 전에 미리 들어와 있지 않고!

외할머니가 할머니였다. 외할머니가 엄마였다. 엄마가 밥을 지어주거나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등록금을 함께 걱정해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집에는 다른 여러 엄마가 있었다. 물론 엄마도 엄마 노릇을 하긴 했다. 소질이 없어도 피아노다 미술공부다 시켜서 소질을 ‘계발’해내는 극성 엄마였고, 또 엄마의 유일한 자랑인 ‘밤 채’ 솜씨 덕분에 늘 예쁜 김장김치를 먹었다. 그래도 엄마의 부재를 못 참았다. 엄마를 엄마답지 않다고 볶아댔다. 엄마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도 엄마를 닮지 않고 불평만 해대니까, 집안에선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고까지 놀렸다. 연속극을 보면 더러 첫아이는 누가 낳아놓고 죽던가 도망가지 않던가. 대체로 나는 비판적인, 회의적인 인간이었다. 속으로 진단하기를, 일찍이 엄마에게 불만이 많아서 나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고까지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참 어려운 것이었다. 참 어려운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 의사의 손에 거꾸로 매달려 자두 빛보다 더 붉어진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었을 때, 나는 기절을 했다. 산고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무엇인가 꼼지락거리는 포대기가 옆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생명체가 밖으로 나온 것이란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다. 입은 뭔가를 향해 움질거린다. 내 아기, 내 젖을 탐하고 나와의 관계를 탐하는 아기. 어렵게 어렵게 겁을 잔뜩 먹고 만져본 손가락. 작은 손가락들이 무엇이라고 종알거린다. 이것은 대체 어떤 암호인가.

손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 - 그것을 남성 화가가 어떻게 알았을까? 짐작이나 했을까? 새삼스레 위대했다. 아담의 손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그림의 발상이 이 진자리가 아니고 어디였겠는가?

그렇게 나는 기절과 함께 새로이 태어났다. 그 어려운 엄마가 되었다. 불평을 하는 자식이 아니라 불평을 받는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들은 어떤 불평을 할까, 별안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나는 계속 괜찮은 딸이었고, 엄마는 나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엄마는 부족했다. 물론 불평의 말이 단번에 줄었다. 불평의 마음은 한 치 변함없이 여전했다. 반면 나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엄마이리라고 착각했고, 애들은 정말 괜찮았다. 제 엄마에게 불평을 해대지 않았다. 적어도 대놓고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유전자가 더 좋아져서 그랬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나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죽을힘을 다하고 조금 얻어도 행복해 했다. 나는 내가 인내심이 많아진 줄 알았다.

*

어머니가 떠나셨다. 조문객들이 무슨 소용. 41명의 후손 중에서 29명만 참석한 장례식장. 어쩌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불참 속에 들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면 다 똑같이 아프다고 하셨다. 당연하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네 언니는 참 쌀쌀해야. 동생들이 그 말을 전해주어도 당연하다 느꼈다. 나는 내 불평소리가 줄었더라도 어머니가 내가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랐다. 사실이니까. 인생관이 다른 것을 어쩌라고.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는 단 한 톨의 인내심도 내주지 않았다. 그 긴 세월 동안 큰 딸년의 부당한 불평을 감내하시던 어머니. 겉으로만 화려했던 어머니가 떠나셨다.

갑자기, 너무나 늦게 깨닫는다, 얼마나 서운했을꼬. 인생관이 다른 딸을 두고 평생 얼마나 참담했을꼬. 단 한 톨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나는 또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까. 아름다운 관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참아야 할까. 내 멋대로,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엄마’가 이제는 없다. 49재를 지났으니 어딘가로 정말 떠나고 없다. 머리에 꼽았던 하얀 리본이 타들어가는 초라한 불꽃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단 하나 지지대가 무너져버린 지금.
처음으로 처연히 외로운 순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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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첫 클릭클릭』, 이대동창문인회, 2011, 8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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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