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2. 11. 19. 00:04

 

 

등돌림의 문학

 

 

문학이란 무엇일까 - 늘 있어 왔고 여전히 의심쩍은 이 질문과 더불어 살아가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어른들이 말리는 말씀에 속으로 토를 달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어른이 되어 정말 옛 어른들 말씀대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

 

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축제가 있어, 세상 각처에서 모여들어 함께 하는 콩그레스가 9월 우리나라 경주에서 열린다. 이름 하여 ‘제78차 국제 PEN 경주대회’ - 세계 최대 문학축제인 이번 대회는 전 세계 102개국 회원국에서 해외 문인들만 해도 300여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이다.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 터키의 오르한 파묵 등 혁혁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도 참가하여 대회의 위상을 높인다. 더러는 펜은 칼보다 강함을 역설해 낸 사람들이다. 강함에는 부와 명예가 따르고. 이 대회는 이들에게 경주라는 역사적 도시를 배경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알리는 기회도 될 것이다.

 

경주대회 참가를 앞두고, 개인적으로는 소잉카를 직접 만나는 일에 조금 설렌다. 다는 몰라도 우리는 비아프라의 내전을 기억한다. 한때 누군가가 영양실조에 걸리다시피 마르면 비아프라 사람 같다고들 놀렸다. 그 비아프라 독립전쟁을 막고 싶었던 젊은이, 그 일로 오히려 투옥되고 감시받고……. 그는 늘 급진적인 글들로 나이지리아 정부와 빈번히 충돌하고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자의적인 사실상 망명 중에 궐석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독재자가 사망하고서야 귀국이 가능했던 소잉카.

 

그의 경우 흥미로운 것은 종교적 혼재와 상이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라서 서양문학에 정통한 그가 아프리카의 전통과 가치를 어떻게 조화 속에서 지켜내고자 했는가 하는 과정과 답에 있다. 세네갈의 시인 대통령 셍고르로 대표되는 네그리튀드 - 공통의 흑인 전체성 속에서 일치를 발견한 네그리튀드 운동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흑인 유산만이 프랑스의 정치적이며 지능적인 패권과 지배에 반대하는 싸움에 있어 최고의 도구라고 믿었던 문화운동이었다. 그러나 소잉카는 네그리튀드에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흑인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이자 무분별한 찬미일 뿐으로, 근대화의 잠재적 혜택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한민족은 한민족이어야 하되, 가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민족주의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소잉카가 “인간의 첫째 조건은 문화이고, 메아리 없는 예술은 독백일 뿐”이라고 말할 때, 문화는 대결이 아니라 그저 인간다움의 본태다. 문화를 빼앗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박탈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을 모독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문화 예술의 본질은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 타협보다는 저항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고.

 

예술은 곧 자유다. - 이런 생각은 70년대 국제 PEN 회장이었던 하인리히 뵐의 주장에서도 분명했다. 예술은 자유로움 이전으로, 자유 그 자체이다. “예술은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유이니까.” 그러므로 문학을 예술로서 이해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곧 표현의 자유이다. 어떤 가치를 표현하는가?

 

그러나 세상의 가치들은 부유하는 구름 같기 마련이다. 세상이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늘 변화무쌍해서 종잡을 수 없다.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 오늘의 가치들 속에 분명 가난은 퇴물이다. 가난한 아빠는 아빠도 아니기에 『부자 아빠 되기』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부자에게도 인생은 공평하게 덧없다. 아무리 뜨거운 해라도 곧 있어 지평선 너머로 지듯이, 아무리 빛나는 왕후장상의 인생이라도 저물기 마련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히포크라테스의 이 옛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유한한 인간은 의식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창조해 내는 예술과 더불어 살고 싶어 한다. 빛과 모양과 소리와 글 등으로 인생을 재창조하는 일에 심취한다. 문학은 우리의 정서와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 말과 글, 곧 언어로서 나타내는 예술이다. 문학을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이 예술은 분명 언어 안에서 시작되고 언어 안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 언어는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음성적 기호의 체계를 넘어선다.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기호체계인 언어를 조직하여 만든 문학은 ‘기호의 기호’라는 특성을 지닌다. 메타언어일 수밖에 없는 이 추상적인 속성은 문학의 이념적ㆍ실천적 기능을 증대시켜 준다. 인류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넘어서 문학이라는 상징의 언어로서 공간과 시대를 넘어 교감하며, 총체적인 문화유산을 집적하는 것이다.

 

예술은 학문과 달리 세계를 탐구하고 수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주관적 감수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 특징이다. 이성이, 계산적 머리가 각광받는 이 시대가 살만한가, 우리는 고개를 젓게 된다. 감수성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줄 마지막 보루를 염원할 일이다. 초인간적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적 부족함이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최강 인공지능의 로봇은 나노 수준의 오차로도 작동을 멈춰 버리지만, 다리를 절면서도 집을 향해 걸을 수 있는 내가 인간이다. 인간인 나는 해야 할 일을 못하기도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을 안 할 줄도 안다.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우수한 결심 아닌가.

 

지능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문학 - 문학에서는 픽션일수록 진실하며 진실할수록 픽션이라는 모순이 가능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인간을 현실적 존재에서 초월적 존재로 승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문학의 변용된 세계가 현실의 파괴를 전제로 하지 않고 비판과 개선을 지향하는 한에서 그것은 유희가 아닌 자유정신이다. 반어와 풍자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이다.

 

더구나 문학텍스트는 혼자말로서 존재하지 않고 ‘누구에겐가 말하려는’ 의지를 갖기 때문에, 형상화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인하며 심리적 공감을 소망한다. 그러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가치로의 이입을 꿈꾼다. 유의미한 문학은 독자의 인생에 역시 유의미하게 작용한다. 독자는 예술미의 형태로서의 문학 감상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유추를 지닌 간접적이고 상상 가능한 경험을 얻음으로써 문학의 기능을 완성한다. 이 간접경험이 인생에 대한 성숙된 평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한 청소년의 문학 독서가 그의 인식의 틀을 형성하며 지적인 발달을 돕고, 개인의 정신세계는 사회의 정신세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시대사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인류의 정신사에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혁명적 전향에 문학의 힘이 절대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이상한 힘이 인류의 역사에 작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밥이 없으면 살지 못하지만 밥만으로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만찬장에서 음식을 토해내는 도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계속 먹는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누군가 그렇게 밥이 넘쳐나는 풍요로운 생을 산다고 해서 그에게 조화의 감정까지 지속적이지는 않다. 어떤 행복한 인간도, 어떤 조건에 있는 인간도, 완벽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E. 블로흐가 말했던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특질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을 느끼며, 여기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육체적 유형의 결핍보다는 정신적-영적 유형의 결핍에 예민한 것이 인간이다. 상대적 박탈감이 그 뚜렷한 증거이다. 이 결핍은 문학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힘으로 줄거리를 전개시키는 힘이다. 이 힘은 문학을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나 모사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잠재적 비판으로 존재하게 한다. 현실에 개입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매체로서, 나아가서는 현실에서 이탈하는 경험의 매체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문학은 현실에 등을 돌리는 경우에조차 여전히 현실과의 관계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등돌림은 강한 반발이며 부정으로서, 가장 강력한 현실비판 중의 하나로 작용할 수 있다. R. 무질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문학은 “다른 상황”에 대한 꿈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은 존재이유도 존재할 공간도 없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렇게 썼다, 친구에게.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언감생심,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쓰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렷다. 누구에게나 허용된 시간도 유한하다.

 

 

등돌림의 문학 - 오늘 그 일을 시작하고프다, 글을 쓰는 것이 숙명이라면. 빛과 그림자가 어울림을 넘어 대결하면 그림자를 향할 일. ‘앞으로 나란히!’ 하고 외치는 경쟁문화가 살인적이라면 뒤돌아서서 살인에 동참하지 않을 일. 또는 강물의 물줄기가 인위적으로 왜곡되면 아무리 더워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을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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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프리즘』 2012 Vol.2,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52-55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