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9. 10. 14. 02:45

 쪽지 붙였음

펜문학 2009


쪽지 붙였음. ― ‘우편물 넣지 마세요. 새가 살고 있어요.’ 토기로 구워낸, 입구가 제법 벌어진 통 주변으로 이름 모를 풀들이 뒤엉켜 자라있는 사진 아래에서 찾아낸 글귀다. 그러니까 이건 하얀 치자꽃 흐드러진 낮은 담장아래 숨은 편지함이다.

눈이 푹푹 내리던 어느 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이라는 시 구절이 느닷없이 생각났던 날. 일없이 검색창에 시인의 이름을 써넣다가 「꿈꽃」이라는 시도 건졌는데, 작은 풀꽃들의 사진도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이타심 덕택에 그 하얀 다섯 꽃잎의 벼룩이자리꽃 한 송이를 측면에서, 네 송이를 하늘에서 바라보려니 절로 미소가 난다. 지친 하루가 녹는다. 그렇게 꿈꽃을 따라가다 꽃들이 만발한 누군가의 블로그에 홀린 듯 들어가게 되었다. 어라? 쪽지 붙였음. ― ‘우편물 넣지 마세요. 새가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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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조그만 산골 마을에 들어가 초가지붕에 박 넝쿨 올리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을” 생각이 없었다. 밤이면 실컷 별이나 안고서 행복해 하려 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 아니 꿈도 아니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런 바보 같은 꿈을 꾸고 사는 애들은 하나도 없었다. 꿈은 적어도 산골을 벗어나서 대처로 나가는 일에서 시작될 것이었다. 내가 드디어 대처의 내 아파트에 입주하는 날 할머니는 방에서 거실로 왔다 갔다 하시며 알 수 없이 두 손 모아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셨다. 용타, 용타, 저 우게 느 엄니도 인자 참말로 눈 감겄다.


할머니는 1929년생인데, 호적에는 1924년 갑자생으로 되어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호적에 올라 있던 내력은 눈물 난다. 앞서 갓난애 태를 못 벗고 죽은 딸애가 호적에 남아 있었고, 또 딸을 낳아 그대로 두다보니 죽은 딸 이름으로 작은 애가 살아간 것이란다. 집토끼나 돼지나, 그 가축들만큼이나 딸들이 중했는지 그도 모를 일이다. 식량도 자라지 못한 빈농에서 할머니 또래 여자애들은 호적도 이름도 별 상관없는 주목받지 못한 생명들이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라고서도 할머니는 실제 나이보다도 고우신 편이니, 고생하면 늙는다는 것도 헛소리다. 입 하나 덜자고 밥이라도 먹는 벙어리께 팔다시피 딸을 보낸 친정. 벙어리남편 성깔 못 견딘 각시가 둘이나 도망갔어도, 새 며느리 본 시어머니자리는 시어머니자리만한 냉대를 알았고, 여전히 배고픈 나날.

일은 죽어라 시켜도 좋응게, 밥이나 좀 묵으먼 했지야. 밥이 작응게 그랬제, 느 증조할마니도 꼭 나쁜 사람이여서 그랬것냐. 장대같은 자식들도 배를 못채워중게 그랬것제. 밤은 질고 물레질 바느질 허고 안잤을라믄 배는 왜 그리 속없이 꼬르륵 소리를 내넌지, 부뚜막에 멀건 숭늉 둘러마셔도 속이 안 가라앉으면 싱건지 독으로 가제. 살얼음 살살 언 것을 바가지로 젓고 무시 두어 개 건져 갖고와 그놈 깍도 않고 대충 잘라서 묵으면 살 것 같제. 그 맛은 지금은 못 맛봉게 아쉽다. 어째 그 맛이 안 날꼬 몰라. 무시들은 쪽 바르고 훨씬 더 좋은디. 허기사 반백년도 훨썩 넘은 일인디 요 손맛도 가부렀겄제.

반백년? 하긴 아부지 환갑이 넘었으니까.

훨 넘었제. 그래 이 할매가 참말로 오래 산다. 느 어멘 그리 일찍으나 갔는디.


어려서 어머닐 몰랐고, 일찍 병들어 죽었다는 어머니 이야기에 나는 간호원이 되어야지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자랐다. 하지만 누가 결심대로 될 수 있는가 말이다. 나는 간호사는커녕 간호보조사도 될 운명이 아니었다. 웬일인지 병아리가 종종대다가 비틀거리는 것만 보아도 현기증이 났고, 꿈틀대는 것들에선 어딘가를 찔리거나 다치거나 피를 흘릴 수 있을 가능성만 미리 떠올랐다. 피 생각이 나면 고소하게 유혹하는 핫도그 막대도 삼킬 수가 없게 되었다. 원래 피를 지녔던 것, 그것을 먹는 상상은 무서움 자체였다. 어린 시절의 아린 기억인 살타는 냄새가 나중에 들어 알게 된 벌건 핏물을 토하고 죽었을 어머니의 이미지와 한데 섞여 더욱 끔찍해지면서 동물에 대한 두려움으로 굳어갔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접해야하는 이상한 해부도에 눈앞이 깜깜해진 나는 산수라는 탈출구를 찾았다. 아무런 의미도 붙지 않는 숫자는 가장 안전한 구원이었다. 숫자의 무더기 속에는 맘 편한 순수한 놀이의 법칙만 있었다. 게다가 수학공부 덕에 우리 쪽에겐 꿈꾸기 어려운 여상고 진학까지 해냈으니.

우리 식구는 크게 두 편으로 나뉘었는데, 한쪽은 할머니와 나와 동생 이순이고, 다른 한쪽은 새어머니와 새어머니가 낳은 동생 셋이다. 아버지는 중간이라기보다는 약간 수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그쪽에 치우쳤다. 아마 정중앙에 계셨어도 내가 그리 느꼈을 것이다.

이순은 내 생각엔 뭐든지 나랑 비슷한 줄 알았지만 자라다 보니 한참 나긋한 품성으로 제법 사랑을 받았다. 중학교 졸업하고도 나처럼 어렵사리가 아니라 당연히 고등학교 진학을 했고, 또 기어코 인문계를 고집했다. 물론 그 애라고 이어서 대학진학까지는 꿈꿀 리 없었다. 뛰어난 성적도 아니고 했으니까. 하지만 별 자격증이 없이도 졸업도 채 하기 전에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했던 통신회사라던가 사무실에 취직을 하더니만, 거기서 점장이랑 소문을 내면서 언니인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회갑도 못 치르게 하고서 시집을 갔다.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신랑은 점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동생은 나와 연년생으로 그때 갓 스물이었다.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른다는 뉴스로 세상이 변해가는 가을이었다. 또 다른 먼 데 분단국가에선 장벽이 저절로 허물어졌다는 더 놀라운 소식도 이어졌다.


세월은 쏜 살이다. 이 봄이 지나면 할머닌 팔순이시다. 할머닌 딱 나만한 나이에 첫 손녀딸을 보셨고, 생일마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루 사이다. 어려운 형편엔 할머니 생신 덕에 내 생일 하루 전에 미역국에 팥시루떡 한 입을 먹어도 신이 났다. 다른 동생들은 아예 그것도 안 되었으니까. 그러다가 어머니가 식구들 생일에 매번 미역국이라도 끓일 만큼 되자 내 생일에만 빠졌다. 연속해서 미역국을 끓이지 않는 것이 당연타? 난 결국 단 한 번도 생일을 가져보지 못했다. 물론 불평은 다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였다. 어려서 뭔가 투정을 해댈 어머니를 가진 사람들은 제대로 호사를 한 것이다.

내 어머니는 어머니를 기억도 못하는 어린 나를 떠나버렸다. 곧 새어머니가 있었지만, 새어머니는 세 아이들을 낳아 기르느라 배가 부르거나 젖을 물린 모습이 내 기억의 전부였다. 아니라도 항상 어른들은 분주했다. 아무도 잠시 앉아서 나를 바라볼 시간은 없었다. 할머니도 종일 부산했고, 저녁 먹고 나서도 또 무슨 자잘한 손일을 하시는 걸 보면서 잠들어야 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으니 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도 말이 없으니 벙어리할아버지 닮았을까 걱정하는 동네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야가 목소리는 또렷한데 말을 잘 안한다요. 노래람 곧잘 하는디․…….

새어머니가 변명해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더 말이 막혔다. 한편 아무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보곤 했다. 내 목소리가 또렷해? 


우연히 노래를 조금 잘하고 일부러 산수를 조금 잘했을 뿐, 나는 음악에서도 수학에서도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혼자서 하는 노래도 반주에 맞추려면 잘 못했고, 수학도 수만 좋아하지 응용문제에 가거나 실전에선 약했다. 특출한 것이 없는 여상고 졸업생을 면하고자 재학 중에 자격증 취득에는 열심이었다. OO화재보험회사. 지방 여상고 졸업생 치고는 괜찮은 보험회사에 취직하는 것으로 내 청춘시절은 시작되었다. 물론 S자로 시작하는 대회사의 면접시험에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그때 확인하게 된 것이 내 촌스러움, 앙상한 몰골에 뚝한 말투였다. 좁은 어깨도 컴퓨터와 의자 사이에서 굳기는 마찬가지다. 직업병이란 게  꼭 전자파니 나쁜 자세니 그런 물리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라고, 그쯤은 나도 안다. 어깨가 굳어가는 것은 그 어깨 주인의 생이 굳어간다는 의미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사무실에서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간 내 청춘. 그렇게 아무런 매력도 갈등조차도 없어보였을 이십대를 나는 절절히 어머니의 환영에 눌려 살았다. 시집을 왔을 나이, 나를 낳았을, 둘째 딸을 낳았을 어머니, 또 아이를 가지게 된 어머니, 불안한 어머니, 서러운 어머니, 세 살, 네 살 아이들을 두고도 떠났을 어머니……. 그렇게 어머니를 다 살아내고도 아직 나는 여전히 이십대였다. 마음에선 아이도 낳아보았는데, 벌써 죽어버린 느낌으로 무엇에 기댈까? 그렇게 서른 살 생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퇴직을 결심했다. 나인 투 파이브, 파이브가 뭔가. 상급자 눈치에 퇴근은 마냥 늘어지기 일쑤고, 월말이나 감사가 닥치면 별빛도 없는 밤길 퇴근. 아침이면 그대로 시계만큼 규칙적으로 일어나 버스정류장으로 내닫는 자동인형의 삶. 뭔가 이 틀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유로운 시간을 좀 갖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모든 직장은 월급생각으로 있는 한 감옥이다. 월급에서 엄청난 적금을 부어넣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 자동인형도 변신을 감행해야지. 퇴직금은 별 것 아니겠지만, 내 급여에 비하면 엄청난 적금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퇴직을 결심하고도 바로 그 적금들에 묶여서 4년 반을 더 근무해야 했다. 적금들을 중도에 해약하는 것은 바보천치나 할 일이니까.


막상 사무실을 벗어난 서른다섯 살의 여자가 일 년을 놀기로 결심했을 때. 그런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사치이자 고문이었다. 내 또래들은 여전히 일의 쳇바퀴 아니면 결혼의 굴레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나와 더불어 단 한참을 놀아줄 친구가 없었다. 물론 진짜 노는 아이들, 진짜 자유를 만끽하는 내 또래의 세계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었다. 보이지도 잡을 수도 상상조차 할 수도 없을 머나먼 어딘가에. 두어 달을 그렇게 멍하니 버티고 있자니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할머닌 그랬다, 그래도 인자 결혼을 서둘러야제. 허나 억지로는 말거라. 칠십 중반의 노인으로서는 개방된 의견이었다. 할머닌 그 뒤로도 한 오년 내 허송세월을 심하게 나무라시지도 않았다.

나는 우선 운전면허를 땄고, 할 일을 찾아 궁리에 들어갔다. 처음엔 자유업에서 탐색을 시작했다. 자유업 ― 고용자 생활 15년에 얼마나 근사한 단어인가. 사전적인 정의는 그러나 내게 한숨을 안겨주었다.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과 재능에 근거한 독립자영업자 또는 그 직업.” 내겐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없다. 전의 직장선배나 동료들은 일단 계약직으로 복직할 것을 권했는데, 그건 싫었다. 막상 뭔가를 찾아보려 해도 하나 같이 난관에 부딪혔다. 가진 돈도 빠듯했고, 또 내가 가진 전체를 투자할 생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동안 한 해가 두 해가 갔다. 대신 가끔 스산하면 고향의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할머닌 요즈음엔 마을 경로당이 좋으니 하루 종일 집을 비우신다. 낮엔 마을 입구에서 밥장사 하는 며느리, 우리 새어머니에게 가서 한 술 뜨시면, 다시 나물바구니라도 들고 경로당으로 나가신단다. 콩나물이나 미나리 다듬기, 감자대나 토란대 껍질 벗기기는 지금도 일도 아니다. 게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모두가 폭소라는데,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는 우리도 꽤나 많이 들어서 외울 지경이다.

박샌덕 안 있었든가, 나이롱바가지 첨 나왔을 적 말여. 거그다가 감자 쪄묵을라고 헌 사람이 박샌덕 아닌가. 바가지들 아 곰팡나고 쪼개지고 헌다고 죄다 내불더니, 감자 쪄묵을랑게 나이롱바가지라도 써묵어야제. 그것이 어쩌게 되었겄어. 냄새하고는, 사람 못 살제. 그러고서 헌단 소리가, 나이롱은 나이롱이네 지대로 안되는거 봉게, 그랬대야.

진짜가 아님 다 나일론이어요?

그라제. 긍게, 바가지만이 아니라 요새 시상 사람들 다 나이롱 아녀? 아따 농사라도 풀을 맹가 벌레를 잡능가, 머시든지 약만 줄줄 뿌려불제. 공부도 요새는 나이롱으로 한다며. 학교가믄 나이롱으로 놀아불고는 또 새로 돈 타서 학원댕기고. 하마 놀기도 나이롱이제. 아들이사 학원 아님 친구들 만나 놀다오곤 그라는디, 몰려는 다녀도 함께 노는 법이 없대야. 느 조카 말여, 고것 말이 껨방에 가서 각자 자기 껨하고 왔대야. 아들이 모타서도 각자 이녘 손구락 두들기며 논다 그말 아녀. 입도 뻥긋도 안허고. 나는 입도 뻥긋도 안허는 사람이 제일 미운디, 느그 할아부진 헐라도 못혀서 못혔지만, 왜 사람들이 입뒀다 뭣헐라고 말을 안헌디야. 나는 집에 들면 그렇다 쳐도 나감사 말로 산다. 사람이 뭔 말을 혀야 살제. 속에서 단내 올라와야, 말 안허고 사는 사람들은.

속에서 냄새 올라온다고? 헛구역질 비슷한 것이 올라오긴 한다, 내 경험으로 보아도. 그것은 뭔가 어지럼증 같은 토악이다. 하고 싶은, 꼭 내뱉어야 할 말을 참으면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행하게도 우스개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풀어서 타들어 가는 속내를 삭이신다. 아버지조차 거의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시는 요즈음, 할머니는 많이 외롭다. 막둥이까지 장가가고 나자 여덟 식구가 북적거리던 집안에서 덜렁 혼자 잠을 청하기 때문이다.

할머니, 뭐 잡숫고 싶은 것 있음 나 아직 놀 때 할머니랑 먹으러 갑시다.

사람이 묵어 조지면 안된다. 다 묵어감서 어쩌게 새끼들 키운다냐.

할머니, 그래도 할머니가 뭣 좋아 하신가는 알아야죠.

글먼 거 비싸기만 허고 한 접시다 이것저것 쓸어다 먹는 것 말고, 잘 차려다 준 밥상이나 받아봤음 좋겄다. 떡갈비나 한 대 뜯고.

할머니 무릎 때문에 큰 병원에 가려고 읍내로 나온 날, 나는 살아서 피를 흘렸을 벌건 살코기를 먹기로 결심했다. 할머니를 위해 단 한 번도 고기를 사다드린 적이 없었다는 죄책감을 함께 고기를 먹는 것으로라도 씻고 싶었다.

할머니, 소주 한잔 하실래요?

소주야? 어쩠거나, 너 소주랑 다 묵냐? 나이 묵어도 처년디, 처녀가 소줄 묵어!

아니, 갈비 드시려면 반주 하셔야지요.

그렇게 소주를 들여놓고 두 잔을 거푸 마셔도 고기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화장실 핑계로 가운데 홀로 빠져나온 나는 소주를 하나 더 시켜 반병을 그대로 들이켰다. 그리고 재빨리 방에 들어가 할머니 앞에 앉았다. 다 구어서 나온 갈비인데도 조금 헤집으니 피 같은 물이 보인다. 죽을 맛이다.

야가 고길 잘 안묵어라우. 요놈 좀 다 익혀갖고 오쇼. 그렇게 사람 불러 시킨 할머니가 계속했다.

너 인자는 툭툭 털어야 헌다. 말도 시켜야 겨우 허고, 먹을 것도 도통 가려쌓고. 그럼 살기가 폭폭해야. 느 동생 봐라 이순이. 니 눈엔 위태위태혀도 애기들 낳아놓고 알콩달콩 잘만 살제. 형지간에 왜 이리 다를꼬. 그아는 말이 연해야. 사람이 헐 말도 안 헐 말도 좀 허고. 묵고 잡은 것도 묵기 싫은 것도 묵고. 할맨 이 세상 두 가지만 못 묵는다.

뭔데 할머니?

뭐기는. 없어 못 묵고, 안 줘 못 묵제. 세상없이도 못 묵는 건 그 두 가지라…….

그 두 가지. 그 말이 그 말이다. 번개에 맞은 듯, 할머닌 그 말로 나를 고치셨다. 물론 난 아직 육식에 서툴다. 여전히 햄 소시지보다는 어묵이 낫고.


할머닌 소주가 들어가서인지 그날따라 옛 생각에 깊이 빠지셨다. 느 새엄니가 그 일을 다 봤단다. 그러니 느 새엄니 된 것도 다 명이제.

그 일이라뇨? 

아따 느 엄니 그리 간 사정 말여.

난 또…….

옆집 연이 아부지가 느 엄니 쫒아가는디, 느 엄니가 한참을 못달려가고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부텀 나중에 느 새엄니될 처녀가 이모네 거들러 와갔고 밭 메고 있다가 멀리로 다 보았대야. 그라고도 그 자리에 재취 들다니 그 명운도 참. 연이 아부지 말로는, 그날 아침 멋허다가 늦었는디 우리집 앞 돌아나오는 순간 섬뜩하드래야. 아까참 동네가 떠들썩혔던디 이상케 조용하드래야. 어째 꽉닫힌 방쪽이 괴괴허고. 혀서 가만히 방문을 당겨 봉게 잠겼드래야. 놀래서 문고리를 독으로 찍어 문짝을 열고 들어가 봉게 벌써 꼬구라져 누었드래야, 제초제병은 나딩굴고. 헌데 그새 옷이랑 갈아입었드래야. 놀래갖고 흔등게 눈 딱 감고, 놔두쇼 놔두쇼 지는 더는 못살어라 이왕 갈랑게, 하드래야. 연이 아부지가 이람 안되라 험서 우왕좌왕하는디 그렇게 나서서 밖으로 내닫드래야.

소주 기운이 도는지 할머닌 금했던 보따리를 푸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를 난 벌써 어려서 다 알게 되었다. 울지 않을 만큼은 자라 있을 때였다.


옆집 연이는 나보다 한 살 위로, 내가 여상고 진학을 계기로 그 마을을 빠져 나온 것 모두가 연이 덕이었다. 중학교만 졸업한 연이가 일 년을 쉬며 기어코 여상고 진학을 우겼기 때문이고, 또 여상고라면 읍이 아니라 대처로 나가야했는데, 동네에서 혹시 나랑 둘이 함께라면 내보내도 될 거라고들 말이 돌았다. 해서 우리아버지에게서도 허락이 났다.

아버진 사실 꼼꼼하시다 못해 강압적인 데가 있었다. 무엇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우리 어머니가 불쌍타 했다. 그래도 새어머니가 잘 사는 걸 보면, 탓을 아버지한테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딸만 내리 둘 나은데다가 거푸 셋째를 가졌을 때 그 가족계획이란 것이 어머니 목숨을 가져갔다고들 했다. 따져보면 외할머니가 화근이었다. 외할머니가 어머니 입덧소식에 또 딸 낳을까 걱정되어 어디 가서 물어보니 여지없이 또 딸이라 했다는데, 외할머닌 앞장서서 어머닐 데리고 뱃속의 아기를 지우러 갔단다. 물론 아버지 몰래. 외할머니 생각으로야 둘째 딸 낳은 것 보고 휑하니 나가서 이틀을 집에 안 들어왔다는 깐깐한 사위가 미리 걱정도 되었고, 시간을 두고 나으면 아들딸이 섞바뀐다는 애매한 말도 믿고 싶으셨을 게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원엘 다녀온 것을 알고는 아버지는 완전히 노발대발이셨단다.

남새스럽다아. 으쩌자고 여편네가 의사놈한테 가랭이 벌리고 추잡한 짓을 한디야! 그라고서 집엘 기어들어 온디야!

날이 가도 달이 가도 아버지의 냉대는 더해갔다고 한다. 으째 소죽이 이 모양이랑가. 곧 있음 새끼 밸 소를 잡아 뉩히고 싶나. 사람 얼굴 참 두껍제! 잡O이 성항게 잡풀이 이리 성채! 못마땅한 건수가 있음 건수가 있는 대로, 건수가 없음 건수가 없는 대로, 듣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아버지는 그렇게 화풀이를 계속 하셨더란다. 심심풀이 후렴마냥 매사에 병원 다녀온 일을 빗대어서. 이웃들 말로는 저녁으로 사립문 밖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는 어머니를 본 적이 더러 있었다 했다. 개울가 빨래터에선 웅크리고 앉아서 빨래랑 두 손이랑 다 담근 채 물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많았다 했다.


이순이 시집가던 날 연이어머닌 새어머니 눈총도 모르는지 많이 우셨다.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나서 그 옆에 앉으시려는 연이어머니를 연이가 한 줄 뒤 내 옆으로 모시고 와서 함께 앉았다. 연이어머닌 평소에도 이모도 아니면서 이모 같았다. 우리와는 다른 고향말을 하는데도 그랬다.

너이 어무이 가슴 새까매져 갔다. 미안한 말이다마넌 너이 아부지가 쪼매 그렇다. 조선 양반도 아이고 머이 그리 뻑뻑한지. 평소에도 참말 그랬다. 나이 차도 별 없으며이, 여자를 어찌 그리 알로 봤는지. 아예 무시한기라. 각시가 사사건건 눈에 안찬단 거이 되나. 또 어찌 남남이 사사건건 눈에 찰꼬. 사람은 서로 그런가부다 해야 된다이. 한 이불에서 자도 잠들면 따론 거이, 그기 각자란 이야그다. 금슬 아무리 좋아봐야 죽을 때는 따로 안 가나. 너이 어무이, 참 연하디 연한 사람인 줄로 알았다가 그리됐다. 계속 타박이 쌓여도 속말 털어놓을 데도 없제. 한 번은 이 악물고 대들라고 작정했다드라마넌, 너이 할무니 나무라신 소리에 목이 꽉 막히더란다. 부부쌈 한 번 못해보고 늙어죽을 어메 앞에서 많이들 다퉈보거라, 느들 참 재밌게도 산다, 뭐 그랬다카던가. 너이 어무이 내한테는 한두 번 속말을 했다. 그라곤 똑 입닫고 사는데 나중엔 참 못 견딜 말로 듣다가 복받친 거라. 암튼 너이 아부지 만날 허시는 거이 핀잔소린데 그날은 아침도 기운데…….

연이어머니, 고만 하셔요. 불쌍한 울어머니 오늘은 여기 어디 와 계실 거예요. 가만히 있음 알 것 같아요. 그냥 저 가만히 있을게요.

그래, 그렇고마. 연이도 니도 인자 곧 시집들 가야제. 자가, 저 쬐만한 이순이가 언니들을 앞설 줄야…….


그리고 몇 년 뒤 연이도 결혼했다. 상고시절부터는 대강 말을 놓고 지냈고, 내가 먼저 화재보험에, 이어서 연이는 농협에 취업이 되었다. 연이는 사내커플이 되었다. 연이 결혼식에서 연이어머닌 날 보시더니 또 눈물을 내보이셨다.

너이 아부지 지금도 그라시자? 부부계에 더러 보다가, 나가 연이한테 와가 잘 안가니까는 본지도 오래다. 너이 아부진 말 한번 떼면 법이라. 연이아부지도 너이 아부지라믄 학 띠었다제. 클 때도 한 번 수틀린 친구하곤 두 번 다시 안보기 선수였단거라. 다 어른들 돼갖고는 너이 아부지가 할부지랑 말 못해보고 커서 그란다카고 친구들이 이해했다제. 참 나나 너이 어무이나 돼지띠 아이가. 살았음 환갑잔치도 한 번에 묵었을 긴데. 나가 어짜다 여까지 시집온 이듬 해 너이 어무이 시집오니 동네가 복돼지들 줄줄이 들어온다 했제. 아무 소용도 없는 덕담이었제.

연이 결혼하고 나면 이제…….

참 그란데, 니는 그래 은제 시집갈래. 너이 어무이가 오늘따라 얼매나 서운할꼬. 내가라도 서들어야지 싶다. 참 너이 동생마다, 이순인 아들로 연속 턱턱 낳았으니 너이 어무이 원 풀었을 기다. 너이 어무인 거서도 어찌 사는지 모르겠다. 딸래미들 학교댕기는 것도 몬보고 가서는. 이순인 잘 걷기나 했나. 이라고 커서 애어메되았으니 알아나 볼까. 설마 즈 자석은 알아보겄제. 으짜노, 부껜가는 와 니가 안 받나. 니가 한 동네 젤로 친한 소꼽친구 아이가.


그날의 부케는 그냥 던져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 붙잡을 애가 받았다. 다들 그렇게 한다. 부케를 받고 석달인가 반년인가 기간 내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영영 못하게 된다는 말에 누군들 선뜻 부케를 받으려 하겠는가. 그 결혼식에 모였던 우리들 지방 여상고 졸업동기들도 몇 번 더 그런 자리에서 만나다간 시들해졌다. 세월이 세월이라 사방으로 흩어져서 예상외의 모습들로 살아간다. 고3교실은 취업내신으로 초긴장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어른들이 말하던 복불복이니 새옹지마니 하는 말들이 일리가 있었다. 내신이 빨라서 꼭 좋은 직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러는 한참 늦게라도 썩 괜찮은 회사에 되기도 했다. 분명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뭔가 사람들이 알파라고 대충 넘기는 묘한 작용이 진짜 힘인 듯 했다. 보통 우리 정도의 가정과 우리 정도의 학력으로는 바닥을 못 면하고 살아간다. 신데렐라는 동화나 영화다. 죽도록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우리들. 그러나 일치감치 우리한텐 그 좋은 월급을 포기하고 엉뚱한 반전으로 멀리 뛴 애들도 있긴 하다. 뉴욕이라는 데서 네일숍을 한다는 애도 있고, 특이하기로는 교회 관련해서 독일에 갔다가, 거기서 만난 성악가의 아내가 되어 돌아온 애도 있다. 미술치료학? 치료미술학? 그 둘 중 하나를 공부해 와서 전문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는. 그만하면 세상은 제 하기 나름 아닌가. 그러니 내 제자리걸음은 순전히 내 문제다.

세월은 무심타. 그러다 졸업이 20년이나 흘렀고 홈커밍행사를 하겠다고 준비하는 동창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컴퓨터라면 다들 전문가인 우리들 아닌가. 벌써 개설해둔 홈페이지에는 그 나름대로 시집 잘 간 몇이서 날마다 음악이다 시다 좋은 것들을 ‘펌’해다 놓고 있었다. 「시월의 어느 좋은 날에」,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어딘지 성스러운 교회냄새도 나는 클래식 취향의 음악들. 교회에 다닐 여가도 클래식을 들어 볼 기회도 없이 주산ㆍ부기자격증, 정보처리사 자격증에 또 무슨 무슨 자격증들에 매달렸던 우리들이 어느새 교양 있는 클래식을 탐하고 있다. 업그레이드 된 세상. 하지만 난 아직도 심정적으로 자격증에 매달린 신세다. 예상보다 높은 아파트 관리비를 보면 주택관리사자격증도 괜찮겠다 싶어지고. 아니다, 한 학기 남은 방통대학 보육과를 마치면 그 길을 가리라. 실은 재테크의 달인인 ‘아줌마직원팀’에 묶어둔 ‘재’가 쏠쏠하게 불어나고 있었기에, 종일 근무 하지 않고서도 연봉처럼 수익을 늘리는 방법을 알아버렸기에, 지금 굳이 일을 갖는다면 어린이집이다. 혹시 어머니 없는 아이들이 올지도 모르는 집.


사무실을 나오고서도 수입이 된다? 우스운 세상이다. 난 그러니까 자유업에 종사한다. 무엇 때문에 근로소득에 애달았을까? 가만있어도 근로소득을 넘는데. 난 물론 투기꾼은 못된다. 투기할 자본도 통도 없으니까. 그저 조금 길을 알고 나니 불안 가운데도 한가했다. 어찌하다가 대학가 문화도 곁눈질했다. 근처 단 하나 있는 서점을 기웃거려보아도 별게 아니다. 영어를 포함해서 취업과 성공이 화두이다. 재테크 관련 책들에 재테크강좌들 포스터도 눈에 들어온다. 내 눈이 그런 것만 입력하는 모양이다.

그러다 방통대가 아닌 진짜 대학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지 캠퍼스 내의 평생교육원까지 기웃거렸다. 그게 이태 전이었다. <소자본 투자전략>에 곁들여 미래의 내 어린이들을 위해 <POP - 예쁜 글씨강좌>에 등록했다. 그다음 학기엔 <우리문화유적의 이해>와 <교양전략 - 서구문화의 이해>에 등록했다. 유럽여행도 뭘 알고 가야 무식을 면한다는 둥, 수강생 아주머니들의 말을 귀동냥한 터였다. ‘그’는 서구문화를 처음 두 시간만 강의한 진짜 대학교수에 이어서 그 강의를 전담한 평생교육원 교수(?)였다.


후후, 피가 없기론 쇠고기에 비해 뱀 먹기가 일순씨 이론상 쉬운 겁니까?

진짜 대학생들을 흉내 낸 쫑파티자리에서 이렇게 놀리면서 시작해온 그는 교실 외의 말투로도 지식인이었다. 사람은 잡식성임다, 원래.


내가 잡식성이 아닌 특수종이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분명히 살이 타는 냄새를 기억하는 어린 시절 내내 살 느낌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 상에 오른 살코기는 그리 익숙한 좋은 맛이 아니었다가, 대모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떠난 이후 내게 친구 같은 낙이 된 것은 뭘 모르는 꼬맹이 이순이 아니라 대모였다. 대모는 이순이 몸통보다 더 큰 개 이름이었다. 원래는 이름도 없이 그냥 누렁이였는데, 내가 그 놈만 따라 다니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엄마가 쓰던 물건이었을 털실뭉치를 어디선가 발견해서 그것으로 공 던지기 하듯이 대모랑 장난을 했던 기억. 그 끝은 처참했다. 내가 잘 못 던진 털실뭉치는 하필이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고, 대모는 순간 빨려 들듯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아궁이에 남았던 지지부진한 불씨들이 대모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은 동네잔치가 되었다. 아버지랑 동네 아저씨들은 그 좋은 양식을 버릴 리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 치마폭에 숨어서 울기만 하면서도 그 날의 즐거운 양식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다. 치마에 베인 퀴퀴한 냄새도 살타는 냄새를 가려주지는 못했다. 새엄만 할머니 쪽을, 그러니까 내 쪽을 흘겼다. 아이코 저것이!


좋소, 고기를 못 먹는 사람 앞에서 할 소린 아니지만, 사람은 먹으려고 사는 것 아뇨? 살기위해 먹는다면 이렇듯 경쟁사회가 되지는 않았슴다. 내력은 좀 길지만 농경사회가 정착된 이래 인간은 양식을 비축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됬슴다. 유목민 때는 살코기를 비축해놓을 수 없으니 적당량만 사냥을 했고, 일단 사냥한 건 나누어 먹었다는 말임다. 사냥시대엔 내일을 위해 서로 사냥감들을 살려두는 것이 유리했지만, 농경시대가 되어선 다른 부족의 비축식량까지도 빼앗기 위해 전쟁이 시작된 검다. 줄여 말해도 인간은 타인들보다 더 많이 더 잘 먹겠다는 의지 때문에 피 튀기는 팔꿈치경쟁을 한다는 말임다. 그런데 누구는 라면으로 서둘러 저녁을 때우는 시간, 다른 누군가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로 나온 들큼한 와인을 마시며 대충 고기요리를 먹는다고 칩시다. 중산층은 되어있다는 만족감. 그러나 허위의식임다. 우리를 말아먹는 것이 바로 그 허위의식임다. 돈피가죽도 가죽이라고,  헝겊으로 만든 싸구려 인조스웨이드 롱부츠를 신고, 다이아처럼 빛나는 알이 박힌 귀고리나 양식진주 목걸이를 연인에게 선물하고. 마틸드 르와젤의 신세가 안 된다는 보장이 있슴까? 진짜 상류가 보면 이 가짜 중산층이나 아주 바닥치는 프롤레타리아 인생이나 별반 차이가 없슴다. 0점짜리 인생이나 10쯤으로 위장한 2, 3점짜리 인생이 90점짜리가 보기에 뭐가 다르겠소?

마틸드 르와?

모파상의 「목걸이」말임다. 남편과 자신의 십년 세월을 좀먹은 허영심. 우리는 분명 현혹되어 있슴다. 아 그 프랑스문학 얘긴 교실용임다. 자 어서들 드시죠!


그날은 그 정도로 끝났다. 그리고서 왜 그와 말을 섞게 되었을까.

우리 자랄 땐 아시다시피 과외가 법으로 금지되었었죠. 그 덕에 과외 같은 것 꿈도 못 꾼 나 같은 ‘어둠의 자식들’이 소위 일류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슴다. 그 덕에 손에 흙 안 묻히고 밥 벌고 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청소년기란 없었슴다. 오직 성공하여 부모세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선생님들 말 잘 듣고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에 간 거죠. 고3에도 조금 지루했을 뿐 흔들림도 없이, 이를테면 나 모범생은 심화반에서 돌아오는 대로 여름 겨울 없이 축축한 방 벽에 붙어 앉아 교과서와 참고서만 외웠슴다. 그 아픈 진통의 80년대를 그렇게 코앞만 보고 살았단 말임다. 이 기회균등한 사회에서 열심 하나면 뭔가 해낼 수 있다는 헛된 믿음으로. 그리고서 대학에 가서야 깨달았슴다. 말도 아니다, 말도 아니다. 불과 1, 2년 전, 바로 이 캠퍼스의 학생이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해서 죽은 날에도, Y대학 정문에서 학생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날에도 대학입시만을 위해 살아왔던 나. 이제 진짜 경쟁의 시대가 열렸을 때 나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슴다. 결과는 요 꼴임다, 울 어머닐 배신하고. 물론 처음엔 갈등했죠. 여기서 중단하면 어머닌 뭔가. 나는 홀로자식에, 어머니에게도 통틀어 하나뿐인데. 더구나 어머닌 법복을 입은 아들을 소원하셨슴다. 얼마나 많은 이 나라의 어머니들이 법복을 입은 아들을 원하는지. 어찌 보면 끔찍한 일이요. 그게 얼마나 많은 보통 사람들이 법에 억울해 법을 불신하며 살았는지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혹시…….

아니 뭐, 꼭 내 아버지의 경우라기보다는.


그는 어쩌다가 자신에 대해 조금씩 털어놓았다. 어느 해 겨울, 눈 덮인 동네가 조용해졌다 싶은 섣달에 들어서 어느 날 사라진 아버지가 설날 산마루 돌아올라 산소에 갔던 이웃들에게 발견된 일. 아버지 초상 중에 어머닌 유산까지 겹쳐 보건소에 실려 가시고, 줄초상 면한 것이 다행이라는 동정의 눈빛을 이겨내지 못한 어머니와 고향을 떴더라는 이야기 등.

함바집 귀퉁이에서 어머니와 달랑 둘이서 먹고 자며 또래 친구 하나 구경도 못하고 사는 동안, 나는 세상은 후덥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덥수룩한 사내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자랐슴다. 옮겨가도 사람들은 그저 그런 아저씨들뿐이었으니까요. 난 몸집이 작아서 취학나이가 넘어도 눈에 띄지 않았었나 봐요. 그러다 어떤 곳 사장님이 애 그리 키우면 안된다고 뭐라 그랬담다.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도 큰 죄라고. 내가 아홉 살이 되어서야 1학년이 되었으니, 못났어도 선생님 말은 좀 탔겠죠. 집엔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못 샀는지 맹모심정으로 안 샀는지, 신문도 당연히 없었죠. 나는 상식이고 뉴스고 아는 것이라곤 없이 공부에만 매달렸죠, 법으로 억울한 사람 없는 세상 만드는 데 일조할 훌륭한 판사가 되기 위해서.

그럼 왜 중간에?

다들 미친놈이라죠. 헌데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하늘을 처음 보았을 검다. 숨 쉬고 하늘을 보니 어지러웠어요. 멋모르고 학교근처 복작거리는 술집에도 따라 다녀봤죠. 학교간판으로 빛 좋은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그러다 첫 학기가 가기 전에 내 두더지 인생을 간파했죠. 이런저런 세상사 외면하고 공부에 집중하면, 육법전서를 파다보면 조만간에 사시에 합격은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엔?

다음엔?

그런 다음에 인생이 달라질 것인가? 확실한 성공을 보장받는 데는 사시합격이 전부가 아닐 것이 눈에 보였슴다. 아들 없는 법조인의 딸과, 법적인 보호가 필요한 아니면 그냥 판사 따위가 구색으로 필요한  준재벌가 딸과 그렇게 결혼하게 되겠지요. 나는 팔려가고, 어머니는 버려지는 거죠. 판사아들 두었다는 허명 하나로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보장받죠. 이름 좋은 하눌타리. 나는 계급이동이 완결된 것으로 착각하고, 새로운 계급의 취향 따라가느라 버벅거리며, 어색한 여유로움을 가장하고도 가슴 한 구석에선 어머니로 대변되는 내 진솔한 삶을 그리워하면서, 기름진 얼굴로 속은 말라갈 것이죠. 수소풍선이 터질까 수소가 빠질까 조바심하며……. 아니 난 그건 못함다. 결국 사시는 외면했지만 등록금 없이 졸업할 만큼은 공부했죠. 이어 외국장학금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하기로 했죠. 저들 세상에 턱걸이 밖에 못할 바에는 뭔가 이 부조리한 토대를 전복시킬 가치와 증거를 기대하며.

다른 가치?

그게 말하자면 덫이었슴다. 열등감을 만회하려던 또 다른 허영의 덫. 십년 세월 바치고서야 깨달은 귀한 답이지만, 답이 정말 아무 것도 들여놓지 못하더군요. 판검사는커녕 보따리장사가 된 아들인대도 우리 어머닌 박사아들 이름으로 허리를 세우신다오. 마른 등을 세워도 애들 키뿐이지만요.


몸이 아주 작고 마른, 나이 보다 늙은 여자. 그는 내가 그런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눈깔사탕 맛을 기억할 수 있어야 고깔사탕 맛을 상상하지! 그에게는 마른 등으로 살아있는 어머니가 있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 산만큼 큰 바퀴달린 괴물에 놀라 풀밭인지 보리밭인지 풀 속에 숨던 내 기억의 파편들에 섞인 한 아련한 여자. 마루 끝에서 아기를 가슴께에 안고서 불그스레한 수박 속을 연신 아기 입에 넣어주던 여자. 머리에 무언가를 얹으면 갑자기 키가 커져버린 여자. 나는 수숫대처럼 비실거리건 돼지처럼 뒤뚱거리건 엄마라고 부를 엄마가 있었음 좋겠다. 주름이 할머니보다 더 많아도 좋으니 엄마라고 부를 엄마가 있었음 좋겠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는 어머니타령을 계속했다. 이제 나는 불효자요. 학교다닐 때 효자가 졸업하고는 불효자요. 나는 울 어머니와 어머니의 소원을 버리고, 삶의 이 진부성에 넌더리를 낼만큼 정신과 관련된 인류의 궤적을 탐닉했소. 파렴치한 돈귀족이나 권력귀족이 되느니 정신의 귀족이 되는 길에 서서, 돈도 권력도 비웃을 수 있기를 탐했소. 왜 과거형으로 말하느냐고 물을 테요? 예, 그랬더랬소. 지금 난 이것이냐 저것이냐 갈림길에 섰소. 두 성공의 길이 아닌, 성공과 패배의 갈림길이오. 내게 핑계만 더 생기면 확실한 길을 택하겠소. 대학동기들 고시마치면 판검사 아님 변호사지만, 변호사나 교수하다가 정치에 들어가는 길이 즐비하죠. 의원공천 따놓은 친구가 하필 나를 필요로 한다네요. 정치권 사법권 밖에서 이미지 관리할 인사가 필요하다고. 그 친구 말로는 그건 시작일 뿐이라고. 부패와 부도덕의 누명인지 오명인지를 쓴 당의 윗선에서 나 같은 순종을 필요로 한다나. 그런데 난 전혀 순종이 아니죠. 오히려 순종 이미지를 가장한 것일……. 아무튼 “자본에도 권력에도 초연한 엘리트들”이 나서준다면 당 이미지개선에 딱이라고. 이번에만 도와주면 원하면 정치계로, 다시 돌아가려면 학계의 자리쯤은 우스운 장난이라고. 그래 이젠 보따리장사도 지쳤으니 두 손 들고 투항하는 거요. 여러 의미로 배부른 자들의 화동노릇일지라도. 호랑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미명으로. 단 한 가지 내게 핑계만 하나 더 있으면.

핑계?

난 뭔가 알리바이로서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거요. 세상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번쩍거리는 데도 눈을 치켜뜨는 법이 없는 당신. 오페라나 뮤지컬 가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것을 몰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고졸업학력을 단 한 번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진짜 순종. 이 순종을 유혹하고 싶은 내 비뚠 심보를 멈출 수가…….

비뚤어진?

나는 오염되지 않은 당신을 흔들어 보겠다 그 말이요. 내 정신으로 안 되는 것을 내 돈과 권력으로 되게 만드는 길을 가겠단 말이요. 당신인들 조건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것들을 탐하게 되지 않을까, 아니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모든 것들을 더나 탐하게 해주고 싶소. 당신이라고 그럴 권리가, 탐욕의, 흥청망청 타락할 권리가 없다는 건…….

그만 하세요. 쉬운 말로 나 호강시켜 주겠다는 핑계로 새로운 전기를 잡겠다? 유식하신 분치고는 치졸한 변명이네요. 탐욕은 어려운 말이구요, 욕심? 그래요, 전 욕심이 적죠.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그러대요. 하나 곱하기 욕심은 욕심하나, 둘 곱하기 욕심은 욕심둘…… 하지만 영 곱하기 욕심은 영이죠. 내 출발은 영이었어요. 영에는 그 무엇을 곱해도 영이더군요. 어머니 없이 시작한 인생은 영영 영이죠. 불쌍한 어머니, 불쌍한 여자, 핑계대지 마세요. 그냥 가세요. 영이 아니라, 하나에다 곱하기 이번엔 권력이든 자본이든 곱하세요. 아예 권력에다 자본을 곱해서 무슨 제곱이 나오나 보든지요. 세상에 태어나 40이 넘도록 공부만 했으니, 이제 뭘 들이려 한다고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 않을걸요. 세상은 결과주의죠. 내가 무슨 주의 운운하다니, 정말 공자 앞 문자쓰기네요. 빈정대려는 것 아니구요, 정말 결과주의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결과를 위해 애쓰지만 잘 안될 뿐이죠. 나의 불발은 순종이어서가 아니라 조건 탓이죠. 나도 보험회사라는 자본의 흐름 가운데서 십수년을 살았어요, 그러니 내가 보험을 더는 들지 않죠. 적금이나 저금을 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는 거예요. 난 오히려 돈이 없이 돈을 너무 많이 보아서 불행타 못해 비참해요. 물론 영에서 시작한 인생이 이만하면 되었죠, 우리 할머니 눈감고 돌아가실 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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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기껏 지방도시의 ‘내’ 49㎡ 아파트에 입주하는 날 할머니는 두선두선 알 수 없이 감사합니다를 되뇌셨다. 참 용타, 아가, 저 우게 느 엄니도 인자 참말로 눈 감겄다. 그리고는 한참 후 덧붙이셨다. 방도 두 개나 되구만, 근디 느 짝은 대체 어디 있다냐.


내 짝은요, 할머니. 나는 속으로 되뇐다. 어머니 가난에 절은 내게 아버지 가난으로 시린 그가 어울렸을 까요? 그는 머리가 구름까지 닿은 괴물이 되어버렸네요. 공부가 뭐랍니까? 머리만 괴물로 변한 그. 내가 그를 원한다면 난 그를 통째로 원하죠, 그런데 그의 머리는 계속 뭉게구름 속으로 흩어져 가네요. 허위의식?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죠. 그가 나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는 내가 “꾸밈없다고”, 더도 덜도 맞춰서 말할 필요 없는 때문에 내게 온대죠. 난 꾸밈없는 게 아니라 꿈이 없죠. 꿈을 꾼다는 것이 내겐 항상 사치였으니까요. 꿈은 한 치라도 내일을 보는 사람의 특권, 그렇죠? 난 오늘이 힘든걸요. 그저 못 올라갈 나문 쳐다보지도 말라던 할머니 말을 새기며 사는 것뿐. 아프기 싫어서 욕심을 못 내죠. 가슴 한 구석은 내내 아리죠. 그는 나를 아마 학문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특이한 종류라고 생각하나 봐요. 꿈이 없는 양 꾸민 날 그가 몰라요.


고향에 있는 할머닌 대답이 없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났다. 오늘 봄날이 저문다.


할머니, 것도 다 변명이죠. 사실은 난 온전한 어머니가 못 될 것이 두렵답니다.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하는 어머니. 무서워요.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엉뚱한 소원이나 하나 말하죠. 난 그 ‘우편물 넣지 마세요. 새가 살고 있어요.’라는 쪽지가 붙은, 토기로 구운 편지함이 있는 그 집엘 가보고 싶답니다. 난데없이. 편지들은 담장의 나뭇가지 아래 흩어져있을까요? 까치밥 넉넉히 달린 아름드리 감나무엔 그림 같은 그물침대가 매어 있겠지요? 요람 속의 아기는 졸려도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제 어머닐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겠지요? 꼭 붙들어, 아가! 어머니도 순간 바람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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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