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09. 12. 12. 02:51

 

평행선

                                                    『사랑은 아무나 한다』2009 (이화에세이)

 

 

사랑을 주제로 받은 순간 평행선이 떠올랐다. 평행선을 화두로 삼을 량이면 그건 이미 시시한 시작이리라. 그렇다. 하지만 “종교적인 긍휼”이라거나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같은 보편적 사랑이 아닌, “남녀가 서로 정을 들여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려는데 대뜸 평행선이 떠오른 것을 어쩌랴. 심장도 머리도 둘인 두 개체 간의 사랑이라면 서로 다른 선의 만남을 의미할 터인데, 그것이 잠시라도 우연이라 해도 평행선이 되어야 서로를 건네다 볼 수 있고 사랑 등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나 말이다.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선은 질풍노도처럼 만났다하더라도 곧 비껴가버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물론 이러한 염세적인 견해는 한 개체가 그리는 선이 곡선이라기보다는 직선 쪽에 가깝다고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만일 길가다 동무를 만나서 한 눈 팔 량으로 멈칫거리거나 굽어져 어울릴 수 있다면 사랑의 감정도 보듬고 어우러져 다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으련만, 어쩐지 그것은 희망이나 꿈같은 말로 들린다. 태어나면서 손발을 버둥대던 우리는 늘 어딘가로 버둥대면서 나아가고 그래서 그 길이 우리의 인생이 된다. 기껏 잘해야 비슷한 각도로 움직이고 있는 다른 길손을 동무 삼을 수 있으면 그게 낙일 것이다. 어쩌다 불꽃이 튀어 한데 어우러진 두 길이 있어, 다시 서로에게서 영 멀어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주변에서 서성대며 길을 간다면 그것 역시 축복 아닐까. 함께 세상에 새로운 길손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그 또한 잊히지 않아 더욱 버벅대고 주저앉아 그렇게 살아가는 삶. 사랑은 제 본디를 깨닫게 하는 일에도, 길을 계속 가게 하는 일에도 무르다. 사랑은 사람을 물러터지게 하고도 그것에 만족하게 한다. 사랑은 허술하고 바보스럽다. “현명한 이가 말하길, 바보들만 사랑에 빠지는 법이라 했지”라던 노랫말이 진리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무슨 그런 평생을 갈 중증의 바이러스에 옮는단 말인가.

이 병은 『폭풍의 언덕』 같은 중독된 사랑이나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치명적 사랑으로 소설 속에나 파묻혀 영생한다. 이 병은 실 인생에서는 애절하게 끝날 때가 많다. 중세 철학자 아벨라르와 제자 엘루아즈처럼 사랑 속에 결혼하여 아들을 두고도 생이별하는 연인들. 문중의 간섭으로 각각 수도생활에 들어갔으니, 그들의 “사랑의 서간”이 수백 년을 넘어서까지 세상의 연인들을 감동시키면 무엇 하리. 더러는 공권력도 사랑을 죽이는 변수다. 2차 대전 후, 보통 사람들처럼 십대에 만나서 몇 년 후 결혼하고 아들 둘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만 느닷없이 원자무기 비밀을 소련에 건넨 스파이혐의로 체포되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한 로젠버그부부. 폭력은 사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흑인이면서 명 쿼터백으로 이제 은퇴한, 네 아들의 아버지이자 멀쩡한 남편. 자선활동에서까지 돋보인 남부러울 것 없던 그가 별장에서 잠든 사이 갓 스물을 넘긴 여친에게서 네발의 총격을 받는다. 순수했던 첫 사랑을 접고 명사와의 인생을 꿈꾸었던 여자의 종말, 참혹한 비극. 허황한 것이 사랑일까. 사랑은 치기다. 사랑은 없다.

아니, 동서고금 세기적 스캔들을 뿌려댄 이들의 숨 막히는 열정들을 생각하면 사랑은 그 무엇인 것 같기도 하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끔은 가까이 이웃에서도 힘든 길을 선택한 대단한(?) 사랑도 없진 않다. 기어코 첫 연인을 기다렸다가 그녀가 아이 둘 데리고 고향 내려오는 기차간에서 훔쳐 달아난 집안 오라버니가 있었다. 그 아이들 둘하고 나중에 낳은 아이들 둘, 해서 네 자녀를 흠 없이 길러냈고, 아내의 조금 이른 임종까지 잘 지켜낸 오라버니. 더 기막힌 쪽도 있었다.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대처에 나와서 대학에 다니던 남자가 처녀 유치원선생님에게 반했다. 유치원선생님은 유부남의 구애에 발끈하여 보란 듯이 서울로 시집을 가더니만, 딸 하나를 낳았다는 소문과 더불어 곧 다시 낙향했다. 결국 각각 아들과 딸을 버리고서야 두 사람이 결합하더니 네 자식을 더 낳아서 남달리 유별나게 키워냈다. 70대, 80대 할아버지들의 청춘시절 이야기다 참. 그런 형질은 드물게 유전되는지, 속 좁은 내겐 불가사의다.

베란다 쇠창살을 저 너머로 바라보며 일요일의 늦은 아침을 먹는다. 조밀한 영국식 화단엔 이름 모를 푸르름이 가득하다. 창살 밖으로 선반에 내어놓은 몇 화분들에도 초록이 어우러져 있다. 그 밖으로는 짙푸른 나뭇가지들이 무겁게 흔들린다. 이십년도 넘은 낡은 닭장 아파트 2층에 앉아서 쇠창살 사이로 건너다보는 하늘도 하늘이다. 그런데 쇠창살 너머로 여름을 맞은 건 처음이다. 작년 추석에 다니러온 아이들의 걱정에 그제서 창살을 두른 것이다. 여름을 유난히 타느라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두고서야 잠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는 아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한숨을 쉰다니까요, 아버님 어머님 걱정에!”라던 며늘애 말이 주효했다. 원래 학교가 있었던 터에 지은 아파트라서 고목들이 즐비하고, 창살은커녕 창밖으로 너울거리는 푸른 나뭇잎은 성냥갑 아파트인 것을 못 느끼게 했다. 바로 창밖에 새들까지 집을 지어 새끼를 낳고 길러가지고 함께 날아간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꼭 네 마리를 낳아 데리고 날아갔는데,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항상 같은 울음소리의 그 새들이 날아든다. 베란다 바깥으로 내어단 화분 턱에 내어놓은 춘백 꽃잎을 갉아먹으러 와 앉는 놈들도 꼭 그런 꼬마들이다. 모양새도 목소리도 안 예쁜 놈들이 왜 예쁘기만 할까. 새들이고 사람이고 꼭 예쁠 필요가 없다 싶다. 어디 예쁜 사람들만 사랑을 하고 그러는가. 창살 속에 들어앉아 바라보는 새도 화초도 하늘도 뭐 다 괜찮다. 섬세한 감각들이 나이 따라 누그러진 탓도 있겠지만, 애들 사랑에 못 이겨 해 붙인 것이라서 창살도 답답치 않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아마도 창살에 갇힌 채로 적응하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기 시작하면 그렇게 창살 속에서도 갇힘을 모른다. 신기하게도 새 생명들이 태어나면 아예 바깥세상은 바라다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현혹되어 산다. 그때부턴 그리 많이 흔들리지 않고 평행선을 이루어, 왼쪽에서 오른 쪽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따라가며 산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우리를 걱정할 만큼 더 커버렸는데도, 우린 그저 그들을 뒤쫓느라 ‘거의 반듯이’ 평행선을 그리며 산다. 아주 엇갈리지 않으려면 조심히 평행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너무 서로에게 끌려 들어가면, 그 각도로 조금 더 내달으면, 그만 상대를 뚫고 지나가버리게 되니까. 그래서 조금 비겁한 채로 평행선을 따라 산다. 혹시 우리들의 가슴 한 편에 묻힌 작은 파편 같은 추억 하나도 진정 어떤 사랑의 증거가 되기엔 미미하다. 그건 그저 잠시 호수에 비친 구름의 그림자이거나 아예 호수 저 혼자의 일렁임이거나.

복숭아 껍질을 벗긴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따 들인 것들이라 당도도 높고 무엇보다 벗겨 드러난 속살에서 물기가 둑 둑 듣는다. 두 개를 벗길 양이면 늘 어느 하나가 더 먹음직스럽다. 너무도 당연히 더 맛있어 보이는 쪽을 당신의 접시에 올려놓으면서 느낀다, 누군가에게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내밀면 그것이 사랑일 것. 나란한 두 베게 깃을 새로 갈아놓으면서 풀기 더 고슬고슬한 쪽을 그리로 밀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 이 시시한 진부한 존중이 어우러져 나란히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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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