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 기고2020. 6. 21. 00:39

[이 계절의 쟁점] 코너 -

험지의 유토피아 

 

험지로 가라, 험지에!

너나 가세요! 누굴 뭘로 알고!

 

새해가 밝아왔을 때, 실은 그해가 그해이고 그날이 그날이지만, 아무튼 새해가 되자 험지 타령들이 불거졌다. 짐작하건대 험지란 예상 수확이 나쁜 표밭이다.

소설쓰기 - 몸과 맘을 다해서 숙제에 고심하고 있던 소설가의 뇌리에도 불꽃이 인다. 아하, 험지가 화두로구나. 그렇게 글을 연다. 너는 과연 이 주제를 다룰 능력이 있을까. 정치 경험이라고는 좌우사방 사돈네 팔촌을 뜯어보아도 없다. 그래도 좋다, 해보지 뭐. 세상 화두가 험지인데.

화두라면 주제의 영역이다. 무엇을 쓰느냐, 소설쓰기의 시작이다. 어떻게 쓸까, 소설쓰기에서 형식은 그 다음 다음 일이다. ‘무엇’이 없고서는 ‘어떻게’란 유희에 불과하다. 표현력은 연마의 시간에 달려 있을 터, 그러니 시작을 위해 일단 주제에, 험지에 매달리기로 한다.

험지라 - 사람마다 험지는 다르다. 일을 돈과 바꾸는 곳, 밥 먹을 돈을 벌어야하는 곳이 험지 일순위이다. 갑을, 갑을병, 갑을병정……, 끝없는 사다리 관계는 올려다보기도 아찔한 아득한 험지다. 더러는 내 편 아무도 없는 시집에서 정말 남의 편 같은 남편과 한 방에 들어 사는 여자들이라면 그곳이 험지다. 제 몸으로 낳아 처음으로 제 것 같은 아이들도 한길 자라면 남이고, 남은 무조건 험지다. 타인은 험지다. 타인들로 득시글거리는 세상이 험지다. 소설가가 나선다. 험지는 타인의 마음이다. 그런 명제를 잡았다. 눈앞에 숱한 인간관계들이 떠오르며 이번에는 무엇인가 거둘 수 있을 예감이다.

그래, 도파민은 누구에게나 다소간에 작용한다. 까닭 없이 마음이 가는 것이 그것이다. 까닭 없이 미운 것도 그 탓이다. 넘치고 모자라는 차이이다. 호르몬이라고 하는 물질은 물질이라서 정서와는 크게 구별된다. 늘 그리웠던 그리운 임을 향해서도 분출이 줄거나 멎기도 한다. 토라지는 것은 애교이고 웬(!)수가 되어 갈린다. 편리하게도 화학물질 때문이라는 변명이 통하는 개명천지가 되었다. 어느 집을 파더라도 파다가 보면 불협화음 한 두 마디는 스며난다. 잘 굴려서 양념을 바르고 뻥튀기를 하자. 아차, 진부하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솔로몬의 말씀.

 

그러다 느닷없다. 봄이 오려는가 싶었더니 난데없는 험지가 태산처럼 솟아올라 앞을 가로막는다. 험지란 어려운 표밭 정도가 아니었다. 기분 나쁜 침묵 속에서 일상이 멈춘다. 처음에는 이웃나라 어느 도시가, 그러다가 얼떨결에 우리나라에서 세력 있다는 도시가 문자 그대로 험지로 둔갑했다. 아니, 세상천지 험지가 아닌 곳이 없다. 바이러스를 품은 폭우가 대지를 위협한다. 비를 멈춰달라는 기도를 해야 하나. 아쉬울 때만 하는 기도를 하늘이라고 들어줄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는 경험에 기대고 꼬리를 내릴밖에. 꼭꼭 숨고 도망다니는 바이러스를 색출하는 정부에 박수를 친다. 누구는 늦었다고 힐난한다. 아서라, 소설가가 나선다. 심판을 보겠다고? 어림없다. 체험이 중요해, 그렇게 결심하고 바이러스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 벌써, 그놈들이 문밖에 코앞에 와 있다.

두문불출, 다문다독다상량이라지. 명저들에 파묻혀 지내는 나날들, 그런데 그것이 심각한 문제다. 글쓰기 장르 중 후순이라는 소설이라 해도 몇 백 년 수를 누리는 동안 명사들이 명저들을 다 써 버렸다. 소설가는 난감하다. 누가 감히 볼콘스키를 라스콜리니코프를 카라마조프를 뛰어 넘은 주인공을 창조할 수 있을까. 누가 마꼰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위선, 아니면 적어도 사기라고 외치는 줄리앙을, 움튼 싹은 머지않아 대지를 뚫고 나오고야 말리라는 에티엔을 또 어떻게 불러올 것인가. 어쩌면 진부한 애정행각들 끝에 팀셀(!) 한 마디로 성서의 무게를 실어내는 작품들에 어떻게 맞선다는 말인가. 그냥 파우스트가 영원한 파우스트로 변신하듯이, 신화 민담 역사 속 인물들에 매달려 볼 일이려나. 아무래도 그것은 창조는 아닌 듯, 아니면 대관절……. 언젠가는 드레퓌스나 무미아 아부-자말을 위한 청원서를 쓸 수 있을 펜의 힘을 갖기 위해서라도 소설쓰기를 멈출 수는 없는데.

그렇더라도 의욕만으로는 깜깜한 앞날, 너에게 희망적이게도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정도의 플롯이 있다고 한다. 옳거니, 학이시습지, 공부하면 기쁘기만 하랴. 솔깃하다. 좋은 플롯에는 법칙이 있다고 한다. 긴장이 있어야 한다. 대립인물로 긴장을 창조하여 계속 긴장을 고조시켜라. 인물들은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변화를 겪어야 한다.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은……. 아, 다시 기승전결의 법칙인가. 법칙이라고? 생 자체가 우연이고 그 어떠한 법칙이 없거늘, 소설쓰기의 법칙을 배우라니. 법칙을 깨고 싶으면 오히려 법칙을 배우라 한다. 그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깨기 위해서, 버리기 위해서 배우라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지난 시절의 소설가들의 것이었다. 오늘의 소설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소설을 쓰려는 너에게는 빈 종이만이 펼쳐져 있다. 철저히 빈 종이일 때, 과거의 명작들의 어스름 그림자 한 자락 없는 완전한 빈 종이일 때, 너의 첫 단어가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에게 카프카는 말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너는, 너의 책은 기꺼이 도끼이고 싶다. 그렇다고 선혈을 내비쳐서는 아니 된다. 하기야 예술이라는 여러 장르에서 피가 낭자할수록 큰 상을 받는 오늘날, 그렇다면 상을 외면하라. 완강히 외면하라. 다만 험지로 가라, 어떤 색채도 지워내고, 완전한 텅 빈 우주를 마주하고, 너의 험지에 첫 발을 내딛으라. 카프카가 생전에 전적으로 이해되지 못했던 생각을 하면, 너는 너의 작품이 전혀 이해되지 못하고 있음에 위안을 삼아도 좋다.

 

험지, 소설이 이해되지 못하는 그곳에서 너는 소설 쓰기를 시작한다. 생이란 살아내는 것 자체가 주제요 플롯이다. 생을 이야기하는 소설 또한 그러하지 않겠는가. 주제와 플롯을 단단히 살아낼 뿐이다. 문체와 형식미에 이르는 일, 그것은 겸손으로 해내는 일이다. 너의 언어 모국어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담아서 행여 한 톨 누가 되지 않도록 오래 진정으로 너의 언어를 연마하라. 그런 다음 단 하나의 단어, 자음 하나 모음 하나, 네 심장을 토해 낼 실마리의 단초가 될 음절 하나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노려볼 일이다. 소설가, 너를, 네 눈을, 네 마음을.

너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가능성감각’(R. 무질)이다. ‘마찬가지로 좋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가능성감각,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는 그것.’ 비로소 너는 험지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토피아로 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험지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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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15. 『한국문학인』, 51호, 한국문인협회, 25-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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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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