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9. 8. 26. 11:08

누수

누수 때문에 이 난리다. 우리 발코니의 누수가 아래층 발코니 천정을 망치고 있단다. 페인트를 망가뜨리고 이러저러 피해가 났다고, 방수공사를 해달라는 당당한 요청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나는 기껏 누군가의 1㎡ 공간에서 살고 있다. 우리 아파트 값이 누군가가 소유한 1㎡의 값이라니 분통이 터지다가도, 아냐, 이건 기적이야, 하는 생각을 한다. 내 키가 크진 않지만 1m 보다는 2m쪽에 가까우니, 그 금싸라기 1㎡를 갖는 것보다 이만한 아파트를 갖게 된 것이 그나마 요행 아닌가. 문제는 닭장이나 진배없는 이런 아파트에 살다보면 공동생활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 점이다. 층간소음은 기본이다. 애들은 뛰게 마련이고, 윗집에서 옛날식 제사라도 드리는 날이면 도마소리 그릇소리 밤중까지 한낮이다. 그뿐이랴. 고요한 밤중에 들리는 너무 세밀한 화장실 소리는 산다는 일에 비참함을 더한다. 노랫말에 나오는 언덕위의 하얀 집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은 곳에 괜찮은 주택을 소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줄 안다. 알면서도 비참한 것을 어쩌랴. 상황에 알맞게 구부러져야 산다, 쯤은 알게 되는 세월을 살았다. 나는 밤중에 화장실에 가게 되면 일단 수도꼭지를 세게 틀어놓아서 누군가의 귀에 들릴지도 모를 적나라한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누군가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나에 대한 예의다. 시답잖은 말인가. 아무튼 내 요상한 귀는 못 듣는 것이 많으면서도 한밤중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흘리지 않고 잘도 듣는다.

그만한 층간소음 쯤은 일상이다. 일상의 흐림은 폭우 쏟는 태풍처럼 밀려오는 누수문제와 비길 바가 못 된다. 윗집의 누수는 시간적으로 다툴 문제는 아니다. 참아가면서 기회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랫집에서 점잖게 혹은 점잖지도 않게 클레임이 들어오면 용서가 없다. 꼭 우리 집 문제만이 아니죠. 그냥 두면 아파트 전체에 균열이 번질까 봐서……. 이런 이타적인 언동에 무슨 수로 맞서랴. 당장에라도 발코니의 살림들을 꺼내고 방수공사를 해야 한다. 한 해 걸러 앞뒤 발코니 공사다. 지난 번 뒤쪽 발코니 때는 누수 원인과 상태를 전문가의 말로 들었을 때 사실 놀랐다. 소금이 범인이라니! 묵히는 소금가마니에서 염분이 흘러내려 차츰 시멘트를 부식시켰고, 그러 인해 상당한 누수가 진행되었다 했다. 발견이 다행인 셈이었다. 치울 살림들도 장독대 몇 개와 선반들에 보관하는 곡물들, 빈 통들 등 어수선한 물건들 정도였다. 이번엔 다르다. 앞쪽에도 햇빛이 필요한 장독대들이 있고, 문제는 가히 영국풍 정원이라 할 얽히고설킨 화분들 때문이었다. 천정에 닿아서 이미 비뚤게 올라가는 선인장들은 수도 없고, 물론 한 사람의 힘으로는 움쩍도 못할 종려나무 분이며, 넝쿨장미에, 세상에 시누대나무까지. 자잘한 분들도 그 숫자로는 사람 손을 타게 마련이다. 지난 번 공사도 했던 업자 양반이 물건 치우고 들이는 것도 맡아 해주겠단다. 낮 동안엔 나 혼자 뿐인 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도 아는 때문이리라.

점심 먹으러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기색이다.

커피 드셔야죠? 설탕은 어떻게요?

아무 거나 주시쇼. 다달하면 더 좋지라.

서둘러 단감도 몇 개 깎아낸다.

밥 막 묵었는디라.

어쩌가니. 아따, 근디 싱싱허요이.

보쇼, 화분 내놔붕께 베란다 엄청이나 넚소이. 저짝 끝에 하나 이짝 끝에 하나 침대도 놓겄구만이라.

텀턱스럽네.

아니 진짜여. 보쇼. 이라고 넓은 베란다 봤소? 그나 저 화분들 다 디려놓지 말고 이라고 훤허게 사시쇼.

먼 감놔라 배놔란가. 나중에 양주 간에 헐 일로 가지고서는.

그려 언능 해불게 시작협시다.

아무도 발코니라고 하지 않고 베란다라고 말한다. 사장부터 그러니까 그럴 게다. 주택공사의 설명으로는 아파트엔 베란다가 없는데……. 이런 따위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소통이면 그만이다.

우리가 발코니를 확장해서 발코니가 넓은 건 아니다. 반대로 발코니를 거실로 집어넣지 않아서 발코니가 넓은 것이다. ‘발코니 확장’은 옵션인데, 우린 그냥 발코니를 유지하기로 했다. 거실이 발코니까지 확대되어 훤히 비치는 유리창 하나로 바깥과 구분된다는 것은 아찔한 느낌이었다. 옛날 집들은 문풍지 하나로 바깥과 구분 되었지만, 창호지는 뭔가를 가려주는 맛이 있었고, 마루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방과 마당의 사이였다. 발코니 유리창 밖은 말 그대로 허공이라서, 공기가 주인인 곳, 나랑은 아무 관련도 없는 곳이었다. 발코니는 일단 완충지가 되어준다. 전체적으로 사용 공간이 좁더라도 안정감을 더해준다면 그 편이 좋을 성 싶었다.

그건 그렇고. 왜 햇빛 잘 드는 앞 발코니에서 누수가 생기는 것일까. 웬만한 습기는 하루해가 말릴 것 아닌가. 하기는, 화분들 속의 흙이 머금고 있는 습기들이 바닥을 스물 네 시간 습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화분과 화분 사이들도 늘 물기에 젖어있기 마련이다. 뒤 발코니 누수의 범인은 소금이었고, 이번에는 흙인가 보다. 흙은 물기를 품고 있어서 탈이고, 염분은 그 자체로서 시멘트를 녹인다. 물리 화학이다. 사는 것이 과학이다.

발코니가 없었으면 화분들도 없었고 누수도 없었다, 라는 말이 되나? 모르겠다. 거실로 확장되었더라면 거실에 화분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실에서 누수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실은 난방이 되기 때문에 그 정도의 누수는 스미거나 말랐을 것이다. 모르겠다.

오늘로는 다 혔소.

어, 빨리 끝내셨네요.

방수 처리허기 그거는 기중 쉽소. 요고 방수제 잘 되야라.

아 그래도 낼 내가 한 번 더 입혀야쓰제요.

낼 또 하세요?

낼은 나 혼자 와서 살짝 한번 볼라부러야제라.

그럼 타일은 언제?

그거야 이삼일 재와야 방수가 지대로 되니께로. 연락 디리께요.

우르르 사람들이 나갔다. 거실은 여전히 마당 다름없다. 문에서 앞 발코니로 기역자로 깔아놓은 은박지 통로는 흙투성이 발자국 그대로이고, 화분을 대강 들여놓은 저쪽 끝 방까지도 여전히 임시변통으로 깔아져있는 은박지 위가 지저분하다. 지저분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모자라다. 집 안에서 신발로 다니는 길과 슬리퍼로 혹은 맨발로 다니는 길이 어떻게 구분될까. 앞으로도 며칠을 더.

옛날엔 흙길 밟기가 일쑤였다. 아주 어려선 댓돌만 내려가면 그대로 흙이었다. 아니 신발 속이 흙 그대로인 어른들도 있었다. 속에 지푸라기 같은 것이며 흙모래가 들어간 신발을 벗어 놓고 샘가에서 찬물에 발을 씻던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미역 짐인지 뭔가를 한 짐 이고지고 팔러 다니는 행상이었는데, 아무튼 뭔가를 가지고 집에 가끔 들리곤 했었다. 마루 끝에 걸린 밥 바구니를 내려서 그럭저럭 나그네 밥상에서 한술 뜨고 나면 대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데, 애어른 할 것 없이 넋 놓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내 팔자 어느 세월에 비단길로 다녀볼이거나…….

그때 우리는 어렸고, 길은 길인데 흙길이니 비단길이니 하는 말이 애매하게만 느껴졌다. 비단이라고 하면 할머니 치마 지어 입으신 그런 비단일 텐데, 누가 그런 비단으로 길을 만들까 의아했었다. 그런 길이 있기나 할까. 어떻게 비단으로 길을 만들까. 비단신으로 걷는다 해도 곧 찢어질 텐데. 비단신이라는 것도 아장거리는 아이들에게 방안에서 걷게 신겨주는 장식품으로 밖에 생각이 안 되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의 아스팔트를 제외하면 길이란 원래 흙길이었다. 길은 흙이었다. 누가 비포장도로라는 말을 하면 나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필요에 따라서 포장 했으면 포장도로이겠지만, 비포장도로라고 하면 그것도 포장되어야한다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 왜 꼭 다 포장해야 하는가. 길은 원래 흙인데, 왜 어둡고 힘든 길을 흙길이라 비유할까. 요즘에는 흙길과 대비되는 말이 비단길이 아니라 꽃길이다. 내 아가, 꽃길만 걸어라! 모든 부모들의 소원이다. 순탄하고 순조로운 경로를, 평안하고 행복한 길을 살아 가거라!

행복한 - 행복이 뭘까. 심심하면 하는 버릇대로 ‘행복’을 검색해 보려다가 서점을 찾아본다. 행복이라……『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라니. 애매해서 눈에 띤다.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한 사람? 책의 부피를 보니 곧 외면할 마음이 생긴다. 1,000쪽이 넘는 책을 무슨 수로 읽나. 이런 건 폭력적이다. 어라, 『나는 행복한 불량품이다』라는 얼핏 매력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 행복한 성공작품이라야 최상이겠지. 성공해도 불행할 수도 있으며 성공하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아편서인가? 아차, 나는 행복하지도 않은 불량품이라면? 행불행과 성공여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면, 이런 것도 사절이다.

행불행의 피안이라고? 그건 못된다. 소확행이란 유행어를 듣고도 화가 나는 심보인데 뭐. 따뜻한 빵을 찢어 먹는 행복,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는 행복? 그게 무슨 행복인가. 잠시의 기분 좋음, 더러 안락함 정도가 행복일 수는 없다. 그건 어쩌면 마약이나 다름없다.

내가 왜 열을 내느냐고? 나를 위해서는 아니다. 젊음을 위해서다. 내가 젊을 때 그리 야망을 갖진 못했었다. 그건 성격 문제였을 것이다. 작은 온실에서 자라면서, 개성도 없고, 못 났으니까. ‘멍게’ - 그래서 놓쳤다. 나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삶을 놓쳤다. 마음에 있었던, 마음에 있었을 사람을 놓아버렸다. 겁이 나서. 그의 청각장애가 무서웠다고 변명하면서 살아왔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생각하고 살아왔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누수, 누수가 두려웠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가 새어나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선배가 청각장애라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속해 있을, 그에게 묻어있을 어떤 것들이 두려웠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 그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와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있는 뒷모습은 생경했다. 해는 저물고…….

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는 터부였다. 나는 질투 같은 단어를 저열하다고 생각하고 증오했으므로, 선배가 어느 다른 여학생 또는 남학생 선배 또는 후배와 단둘이 앉아있는 장면을 목격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각각의 대화는 다를 것이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믿었다. 나랑은 식물이 거의 전부다. 한번은 우연히 대학생과 노동자의 독서량에 관해서 말이 튀어 나왔을 때 얼른 회피한 쪽은 나였다. 나는 물론 안 들은 것까지도 다 듣는 귀를 가졌기 때문에 들을 필요가 없기도 했다.

너희는 입학하자마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가까워진 선배로부터 시각교정용 독서를 권유받는 거야. 여학생들은 조금 덜한가?

…….

시각을 교정한다니까. 그런데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독서량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해? 아냐. 노동자들, 월소득 5만 원 이하를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라 치자, 이 저소득층 노동자 40퍼센트가 독서를 즐긴다는 거야. 취미 독서가 30퍼센트. 전문서적과 문학작품을 읽는 것도 20퍼센트씩이야. 독서를 통해서 스스로 여타 노동자와는 다른, 소위 교양을 갖춘 인간임을 상상하고 믿는 것이지. 하긴 텔레비전이 게까지 보급되지도 않았었고.

…….

무반응인 내게 선배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가져다주었다.

이건 읽어봐야 할 거야. 교양 아냐!

제목은 동화나 환상소설 같았다. 책을 읽어나가자 곧 무거운 마음이었다. 낙원구 행복동 사람들이라니! 주택개량 사업 지구로 선정된 동네. 자진철거를 하지 않으면 강제철거 당해야 하는, 그러고도 철거비용까지 물어야 하는 기막힌 약자들의 이야기였다. 철거 현장의 비애. 초라한 밥상이 끝나기를 못 기다리고 들이닥치는 철거반원들이 더욱 초라하다. 그들 또한 상황이 열악하지는 낙원구 행복동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일 사람들인데, 권력의 하수인인 동안에는 착각 속에서 권력자가 된다.

예상은 했었지만, 내용이 너무도 무거웠다. 다만 울고 싶어졌다.

다 못 읽었어, 그만 읽을래. 다른 사람들 빌려 줘.

그때 선배에게는 다 읽지 않았다고 둘러댔었다. 말하기가 싫었으니까. 선배가 책들을 여럿에게 빌려주기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선배가 풀밭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S교육인 것도 알고 있었다. 누가 내게 슬쩍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S가 무슨 약자인지는 알지? 말할 수 없는 그것!’이라고 하면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육하는 선배들이 S라고 알고서 후배들에게 일대일로 교육하는 내용들이 ‘실은 꽁이야, 더 상부 지도부에서는 그리 알고 있는 거야.’라고 자못 조용히 일러주기도 했었다. 바로 일 년 위 고교선배였는데, 자기 오빠도 그런 일을 하니까 안다고,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주었다.

대단?

대단하지 그럼. 도시빈민의 참상과 좌절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운동인데.

고리를 끊어? 그래도 다소 폭력적인…….

아서, 잊어라.

분신자살 같은…….

잊으라니까.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폭력이라는 이해가 쉽진 않지. 드라마 속의 말이지만, 폭력만이 도움이 된다고 했어,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뭐야?

잊으라니까. 넌 잊어.

고리가 끊겼나?

최근까지도 난쟁이 동네 이야기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신도시 계획을,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표한 이래, 설왕설래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좋자고 하는 일이니 당연히 기대하고 반기는 쪽이 있겠지만, 그 반대도 있다. 만일 그린벨트 지역에 신도시가 들어서게 되면 녹지만 없어질 뿐 기존 주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개발될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농민이며 영세한 가구들이 그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 문제란다. 우리보다 어디로 가라고 하남요! 몇 억씩 갖고 새 아파트 못 산다고 아우성치는 젊은이들이 어째서 불쌍한가, 지어 준다 해도 못 사는 우리가 더 불쌍하제. 그런 말들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지나간다.

노후 아파트 단지 재개발의 경우에도 입주권만 가지고서는 새 아파트에 입주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상당수라는데……. 그러니까 행복동의 고리가 끊어 졌는가 말이다.

아니다. 아닌 것 같다. 동네 저쪽에도 아주 쇠락한 5층짜리 아파트에 내로라하는 건설의 재개발 조합원 모집 어쩌고 현수막이 걸린 지 오래다. 색이 바랄 지경이다. 그 앞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온 적이 있다.

징혀, 열 두 집인가는 절대로 도장을 안 찍는다잫아.

열 두 집이 아니라 스물 두 집이라여. 이백 세대가 고 사람들 땜시에…….

꼭 그렇게 말할 거는 못 되제. 우리야 어찌다 봉게 고 돈이 됭게 말이제만. 아무케도 아들 덕이제. 근디 아조 노인들도 있잖여, 자석들도 노인들일 턴디.

그렇기는 허지. 놈의 집 아닌게로 이대로 살다 가먼 된다, 그러고 사는 양반들도 있겄제.

새로 입주권을 통째로 준다고 안 혔냐. 일원 한 장 더 안 보태고.

근디, 그 말이 사실일까. 쪼까 걱정도 되고이.

사람 참, 준다고 혔으니 주제이. 우리라도 흔들리지 말장게.

잘은 몰라도 재개발이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라 했다. 조합인지 건설사인지에서 주겠다는 보조금 보다 조금 더 얹어 입주권을 팔게 되는 사람들이 꼭 나온다 하니까. 그럼 그들은 어디로 가나. 만일 오늘도 그렇다면 1978년의 아버지 ‘난장이’는 지금도 어디선가 굴뚝 위에 올라가서 죽는 것일까. 40년 세월, 강산이 네 번 바뀌어도 고착된 틀은 그대로다. 행여 더욱 견고해진 것은 아닐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이 200쇄를 찍는 기록을 세웠을 때, 이어서 출간 30년엔가, 작가의 인터뷰가 특이했다. 소설가로서의 보람과는 무관한 말이었다. 아직도 그 책의 내용에 공감해야 하는 현실이 괴롭다고. 그 비슷한 말로. 내 말이. 세상이 어떻게 한 발도 더 나아지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 소설가는 요샌 뭘 쓰나? 세상이 여전히 똑 같다면?

유명 소설가를 내가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 자신이 한심하다. 오늘 누수공사를 시작했으니 아직 며칠을 더 매달려야 한다. 집은 먼지투성이인데, 청소는 않고 옛 생각에 잠기다니. 하긴 바로 그 누수라는 단어 때문인 걸 어쩌나.

누수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내 인생 말이다. 청혼을 흘려들은 것은 귀나 청력 때문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었을 누수가 내 머리를 적시어갔고, 마음까지 견고함을 잃었을 것이다. 선배가 단순한 교양 교육이 아닌 S교육을 담당하는 대단한 사람임을 알게 된 순간이었을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 실은 두려웠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막연하게 작은 삶과 작은 행복을 꿈꾸었었다. 요즈음 말로 소확행이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행 어쩌고 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선다. 삶은 소확행으로 재단되어서는 아니되는 무엇이다. 살만큼 살고 보니 그렇다. 우리 아버지 보다 더 오래 살고 보니 확실히 그렇다.

강아지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가의 무릎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는 소확행이 괜찮은 가치일는지 모른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버렸으니까. 야생의 개와 고양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반려동물 말이다. 만일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생을 가치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구조의 신에게 소유되어버렸다는 뜻이 된다. 현상의 구조 앞에 무릎을 꿇었거나 외면한다는 말이다. 이 구조는 외면한다고 해도 거기 그대로 버티고 있을 것이고 더욱 강해 질 것이다. 그들이 이 구조에 굴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나면 너무 허무할 뿐이라고, 너무 허무해서 감당하기 힘든 노년을 맞게 된다고. 노인이라고 해서 시시함과 허무함을 다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아차, 이 난리 통에 혼났겠네요, 남이 씨.

그이가 현관문을 열면서 뱉는 소리다. 신발을 벗을까 말까 어리둥절해 한다.

마침 수요일이었다. 수요일엔 신경과 유 원장이 오후 진료를 쉬고 교회 일을 보기 때문에 이비인후과 유 원장도 일찍 귀가하는 날이 많다.

거기선 그냥 신고 들어와요. 화분들 좀 보고, 이쪽으로 오면서 벗으면 되죠.

와, 남이 씨 청소 제대로 못해서 어쩌나. 이제 좀 잘 참으시나? 그런데 화분들 다들 괜찮겠지? 키가 큰 놈들 옮기느라 엄청 고생했겠네. 아니, 이건 비뚜로…….

거야 거실 천정에 닿을 거라서 그렇게 놔 둔거죠. 목을 자를 수도 없고.

이 가시들은…….

방법이 없어요. 그렇게 그렇게 놓아두는 수밖에. 저것들 다시 다 들여놓을 거냐고 아저씨들이 걱정들이던데요, 뭐.

웬 걱정들! 남이사.

그냥 할 말 없으니 하는 소리들이죠.

그러게. 나 씻을게요. 오늘따라 새삼 집밥이 그립네. 점심 메뉴가 카레였거든. 난 아무래도 조선밥 체질이라.

식탁으로 오는 그이의 손에 책이 하나 들려 있다.

배고프다면서요.

으응, 밥 먹고 읽으려고. 신경과 유박 말야, 재미있는 책을 많이 읽어. 이번엔 『동물 안의 인간』 그런 책인데 왜 동물들이 생각, 감정, 행동에서 우리랑 비슷한지 그걸 쓴 거야.

아, 시원 상큼하다.

연분홍빛 물김치를 들이키면서 그가 심하게 너스레를 떤다.

이건 또, 구이보다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부추가 편육에 어울리는 것 그런 걸 여자들은 어떻게 알죠?

새 밥도 못 했는데 뭘 그래요.

아, 무슨. 이렇게 메인이 훌륭하면 새 밥 아니면 어때서. 새 밥 했으면 많아서 못 먹죠.

먹는 것 마다 칭찬하는 것은 외교일까 작전일까. 그냥 생활인가 싶다. 공동생활의 노하우 같은 것일 게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머리를 장악하고 있는 화제가 터져 나오기 십상이다.

글쎄, 쥐가 사람 뺨친다네. 전기충격을 받은 다른 쥐를 보면 보는 것만으로 그대로 얼어붙어버린다잖아.

단순히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실험에선 그렇대. 암튼 쥐에게도 공감능력이 있다는 말이지.

쥐에게만 있나 보죠.

무슨 말이 그래요?

인간에게, 현대인에게 그런 공감능력이 있나?

대개는 있지요, 남이 씨, 왜 그렇게 까칠하세요!

아니, 쥐는커녕 파충류만도 못한 경우가 하도 많아서.

뭘 그렇게 평가절하하시나. 인지기능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은 인간 고유의 뇌기능이랍니다.

인지기능이 딱히 뭔데요?

가만 있자, 어째 구두시험 보는 느낌이네요. 보자, 인지라면 지식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조작하는 능력이니까……, 에이 관두고. 암튼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대뇌피질이라는 것인데, 그 신경세포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나 가? 140억이래, 믿거나 말거나.

그만, 그만. 인간도 동물이라면서 또 동물과 엄청 다르다니. 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소리 안 들려요?

아프면 그만 둘게, 질문을 하지 말던지. 머리 아픈 소리가 다 뭔데, 참!

머리 아픈 소리, 우지끈.

소리가 들려요? 상상력도.

동물 먹으면서 이야기까지 동물 하지 말죠. 소화 잘 되게.

동물 이야기로 소화 걸리는 우리 남이 씨, 어째야 좋을까.

내 저녁밥이 끝나고, 그러니까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치고서 소파에 앉자 그이가 계속한다.

것 참 대단하네. 인간과 동물의 같은 점이, 아니 같다네 뭐. 기뻐하고 화내고 하는 것도 몸과 머리 반응이 인간과 완전 같다네.

그렇겠죠. 인간이 포유류니까요, 뭐.

포유류가 감정이입 능력은 물론 학습도 하고 의사소통을 한다는 건 알려져 있잖아. 그런데, 맙소사, 트릭을 쓰기도 한다네. 맘에든 암컷과 짝짓기 하기 위해서 대장을 따돌리는 협동이라니, 약한 놈들이 그렇게 상부상조도 하고. 심지어 개성도 있고, 똑부와 멍게 그런 차이가 있는 거래, 첨부터 개성이래. 또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니, 동물의 인간성, 이상한 말인가?

개성이요? 인간성도? 감정이입을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거야 그러겠네요. 개들의 감정이입능력 대단하잖아요. 주인의 무덤을 7년을 지켰다던가 뭐 그런.

그 정도를 넘는다니까. 쥐들이 알츠하이머를 피하는 방식이라거나, 모르모트가 사회적 스트레스를 피하는 법?

쥐가 알츠하이머에 걸려요? 그걸 예방도 하고?

뇌 구조가, 아예 기능이 같은 거라네.

알츠하이머 - 요즈음 들어 드물지 않게 듣는 단어다. 곧 죽는 질병은 아니지만 비가역적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애매해서 사전을 찾아보았던 생각이 난다. 치료해도 이전 상태로 회복될 수 없다는, 그냥 치료 불가라는 뜻이다. 정말 질병인가 아닌가 질병코드도 찾아보았다. 있다, F00. 손가락 사전 참 좋다. 온갖 지식이, 세상이, 내 손안에 있소이다!

그런데 알츠하이머 등 뭐든 치매 같은 것을 앓게 된다면, 치매환자가 된다면, 이 시시함과 허무감 대신 가벼운 만족감에서 지낼 수 있으려나? 내가 벌써 신경세포 손상으로 지능, 의지, 기억 따위가 지속적으로 본질적으로 상실되는 그 병에 노출될 리는 없다. 생각만으로도 무섭다. 언젠가 지능이 떨어지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 까지는 크게 손해될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지능과 기억으로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어질 테니까. 하지만 의지가 상실된다니! 의지가 상실된 상태 - 그런 일을 100퍼센트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소확행인가. 그저 따뜻하게 그렇게 살라고?

소확행 -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어느 일본 작가가 30년 전에 쓴 말이 이제 와서 한국에 퍼뜨려졌단다. 물론 그 자체로서는 기분 상쾌해지는 장면이다. 냄비에 갓 지어 고슬고슬한 밥에 섞박지 무 한 쪽을 얹어서……. 그런 안락한 순간을 말하자면 나라도 열 스물은 센다. 하지만 안식과 힐링, 그것도 젊은 나이에 안식과 힐링만을 구한다면 다들 늙은이야? 늙은이라고 해서 안식과 힐링만 구하하는 법도 없지.

일전에 동기들 단톡에서 누군가 말했었다.

젊어서는 눈 뜨면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랐는데, 이젠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바라네.

뭐라?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면서 눈을 뜬다?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서글펐다. 아무 일 없기만을 바란다면 사는 것일까? 무엇하러 눈을 뜨나? 잠이 깨니까 일어나고, 배가 고프니까 먹고……. 그보다는 조금 더 무엇인가를 느끼고 싶었다. 느껴야 한다고 느꼈다.

여생이라고, 그런 단어는 없어. 없어야 해. 사는 날까지 생이지.

한 마디 보탰다. 손가락이 방정이다.

무안했을까? 활동성이 줄어드는 것은 활동성에 관해서만 맞는 말이다. 활동성이야 어림과 젊음과 늙음 사이 포물선을 인정한다. 하지만 생이라고 하는 것이 활동성이 전부는 아니다. 생은 소멸 전까지 생이다. 어떤 형태로든 생이다. 그렇게 긴 말을 쓰지는 않았다. 철학 하시네! 잘난 체는! 그 다음 말들이 미리 들렸다.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어요. 누구 무서워 말 올리겠냐. 언제부터 저리 ‘까탈스럽게’ 되었다냐. 귀가 아프다. 한 마디 보탠 걸 후회했다. 삭제하고 싶다. 맨날 이렇다. 말하고 후회하고, 또 잊고서 말하고 후회한다.

후회라는 것은 요상한 놈이다. 무엇을 하고서도 후회하지만, 놓아버려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도 후회한다. 사는 일에서 무엇인가가 새는 걸 막지 않으면 정말 낭패다. 새는 줄도 모르고 있다면 더욱 난감해진다. 대부분 몰라서 방치하게 된다. 알고도 모르는 척 살기도 한다. 현상유지가 중요할 때도 있다. 나의 현상은…… 언제부턴가 근처에 있었고, 남편이 되었고,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람과의 공동생활이다. 그 나름대로 안정된 수입과 화초 기르는 취미를 가진 남자다. 이이는 모가 나지 않아서 어디에고 부딪거나 그러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렇더라도 그리 크게 부서지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의대생들은 공부가 너무 부담되어서 S주의에 물든다거나 하는 잡념(?)의 기회가 적었을까. 오빠는 의대를 그만두었지만, 개인적인 문제였지 사회와의 갈등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 오빠의 그 당찬 후배는 오빠의 맘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오빠의 상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의대 잘 마치고 성형외과를 개업해서 거의 떵떵거리고 산단다. 지방의대 출신답지 않게 강남에다 병원을 내는 배짱이 배틀의 성공이었다고! 연예인도 드나든다는 그 병원의 1㎡는 얼마나 값이 나갈까. 의대동문의 날이면 그 성공신화가 둥둥 떠다닌단다. 오빠가 그렇게 떵떵거리는 사업가(?) 아내와 살아간다는 상상은 불가능하다. 오빠가 의대를, 그 ‘후배’를 피해 달아난 것은 잘 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대개의 경우 잘 한 일이다. 무엇인가를 못 견디어서 피했거나, 무엇인가를 죽도록 좋아서 선택했거나 다 잘 한 일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 보듯, 가지 않은 길은 다만 동경으로 남을 뿐이다. 간 일이, 그러니까 걸어온 길이 잘 온 길이다. 무엇인가가 좀 빠져나간, 누수 정도의 상흔이면 좀 어떤가. 견디면 견디는 것이다. 만일 소금이 시멘트를 녹였듯 현재의 삶이 녹아내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살림집 아파트가 낙원구 행복동 어딘가에서 날마다 올라간다. 간헐적으로 누수문제가 터지고, 성가시고 돈도 들지만 공사를 하면 막는다. 막아진다. 이 아파트는 아직 단단하다. 단단해 보인다. 더구나 앞 뒤 발코니 모두 누수공사를 마치면 거의 완벽해질 것이다.

내게서 새어나가는 것은 무엇으로 막을까. 내게서 새어나가는 것은 어쩌면 실존의 파편들이다. 미세한 파편이지만 끊임없이 새는 느낌, 이 느낌 때문에 말라간다. 누수의 정체도 모르면서 살아 있으면서 말라가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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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 문학 2019. 7.8월호 vol. 150  121~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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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