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7. 5. 30. 23:30

마리아 막달레나

2007 월간문학 5월호


 

아직 이른 아침이다. 목소리가 행복으로 구르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딸 둘을 공주처럼 키워낸 친구는 인생에 단 하나 부족한 아들을 기어이 낳아, 할 일을 다 한 사람의 만족감으로 늦둥이의 돌잔치를 준비한다. 이런 저런 일에 나를 부르는데, 내가 솜씨나 안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겐 중학생이 된 아들아이 뿐, 다른 식구가 없어 종일 시간이 남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애처럼 생에 충일감으로 사는 사람들은 나처럼 뭔가 공연히 엇박자를 세느라 여가라곤 없이 들끓는 나날을 꿈에도 알지 못한다.


*


친구와 나는 기숙사에서 만났다. 알고 보니 같은 고향이라서 내내 단짝으로 지냈다. 그래 그녀는 내 비밀을 조금은 눈치 챘을 것이다. 비밀이라야 그저 통속적이지만. 여자대학 기숙사는 그 시절 많은 남학생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방문을 뭔가 진지한 감정이라 치부하고 깔깔대곤 했다. 모두의 관심인 오월 축제도 실은 싱거웠다. 메이퀸행사는 성의 상품화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없어진지 몇 해이고, 같은 방 3학년 언니 말로는 지난해엔 법대생들이 ‘OO민국 모의국회’를 열어 ‘여성부’의 탄생논의를 벌였단다. 그러면 4학년 언닌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들은 틈새에서 어리둥절했다.


그러던 시월의 마지막 날, 향우회 소풍이었다. 동향인이라는 공통점으로 모인 우리들은 행색만큼이나 초라한 교외선 열차를 타고 그만그만한 이름 모를 작은 역에서 내려서 푸르름이 사라져가는 산야를 어슬렁거렸다. 처음 머쓱하던 대화들도 서둘러 점심 보따리들을 풀어놓았을 쯤엔 제법 풀려 있었다. 누군가의 제의로 빙 돌아 소속과 이름 석 자를 대기 시작했고, 더러는 순간의 장기를 부리기도 했다. 유난히 소리가 흩어져서 오히려 귀를 기울이게 하는 사람, 그가 그였다. 법학과 아무갭니다, 그렇게만 소개한 사람이. 옆의 친구가 “이 놈은 꼭 학교는 뺀답니다, 자명하다나 뭐라나….” 그 말에 그는 “아니, 학교는 무슨.”이라고 잘랐다. 굳이 명문을 감추려는 모양새에서, 내 첫인상은 그가 겸손하다 못해 조금 꼬였나 싶은 정도였다.


“잠깐만,” 부산히 나무젓가락들을 부러뜨리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 기도를 자청했다. 서울 생활 반년 남짓에 배운 예절은, 물론 우리가 기독교학교를 다니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기도를 시작하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덩달아서 기도를 하랄 법은 없었고, 그냥 남의 기도를 막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니, 그게 기도라는 것이…” 하고 나섰다. 기도란 강요할 것이 아니라는 논리였는데, 모두가 어색하게 느낄 만큼 딱딱한 투였다. 그쯤은 대충 넘어가줘도 좋을 듯한 향우회 점심자리에서. 그 법대생은 법은 몰라도 상식에선 외려 부족한 부류인가 싶었다. 식사는 첫 순간에 흥을 잃었지만,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호기들을 번뜩이며 대화들은 씩씩했다. 내 귀에는 심심찮게 그가 “아니”라고 말하는 소리가 박혀왔다. 그럴 때면 모두가 썰렁하게 서로를 보곤 했다.


“자아, 그럼 일단 십팔번 노래를 한 곡조 씨익…” 누군가 노래라는 물꼬를 트자, 가무에 능한 민족성이 발휘되었다. “말없이 건네주고~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에 이어, “남기고 간 뒹구는 낙엽에 난 그만 울어버렸네”라고 울음을 울더니만,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절규도 했다. 입만 열면 사랑타령들이다. “말 한번 붙여봤으면 손 한번 잡아봤으면~ ”하는 애교도 부렸다. 여학생들은 꽁무니를 빼다가 누군가 물색없이 “세모시 옥색치마~”를 불러서 좌중의 열기를 식혔다. ‘아니 씨’의 차례가 왔는데, 그건 노래도 뭣도 아닌 중얼거림이었다.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이번엔 다들 숨을 죽였다.


얼렁뚱땅 오페라 『순교자』 이야기가 나왔다. 초여름, 국립오페라단 창단 20주년에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공연이라고 떠들썩했던 터라 다들 아는 척 했다. 그러자 다시 ‘아니’가 끼어들었다. “아니, 그 작가가 오페라에 동의했단 말여? 그 양반 마침 영문과에 들어와서 강의한다더라고. 노벨상 후보지명이면 사건은 사건이제. 아니, 그 작품이 오페라에 가당해? 아니, 그 심오한 주제를 연극도 아니고 노래로 불러댄다고? 그것 희화아녀?”


밑도 끝도 없이 그가 사용하는 접속어는 모두 “아니”였고, 그는 그것 없이는 말을 시작하지도 이어가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오페라라는 그 어려운 것을 아는 체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허영이고, ‘아니 씨’가 정직한지도 몰랐다.


“녀석, 기독교라면 왜 흥분을 하냐? 너 불교야 뭐야 무신론자?”

“아니, 기독교를 진지한 주제라 하믄 무신론자냐? 난 분명 무신론자도 아니고, 교회 반대자도 아니야. 아니, 우리 동네 보면, 제사 안 지내려면 교회가면 되니 편리하고 좋제. 아니, 우리 집은 제사가 많진 않아도 우리 어무니도 은근히 교회에 솔깃하셨제, 할무니가 막으셨고. 할무니 이론이 재밌어. 당신은 천당 갈 날 얼마 안 남았으니 교회를 나가시겄대. 대신 젊은 사람들은 제사를 받들고 교회엔 얼씬 말라.”

“신소리들 집어치웁시다. 여그가 종교 논쟁자리도 아니고, 여그 기독교학교 학생분들도 계시고….”

“신소리, 그렇네요.” 엉뚱한 소리들을 듣자니, 기독교학교 학생으로서 한 마디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나섰다. “기독교학교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은 아니죠. 반대로….”


소용없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해 본다. 예컨대 야구원년의 스타들 이야기 도중에도 무슨 이유로 그 많은 “아니”가 쏟아져 나와야 했는가를. 그리고 바로 그 주술에 내가 걸려버렸다는 것을. 나는 그날 오후 내내, 아니 돌아오는 길에 태능역까지 갈 사람들도 함께 신촌역에 내려 근처에서 어중간히 마셔댄 알코올과 잡담들 사이에서도 그의 “아니” 소리를 변별해서 듣고 있었다. 어떤 질문 어떤 말을 해서 그에게서 “아니”가 나오지 않게 할까를 골몰하느라 다른 대화들은 건성으로 들었다. 점호시간이 가까워 오자 기숙사에 들어가야 할 친구들이 일어섰다. 한 친구는 조금 취기도 있고 해서 사감선생님 꾸지람이 겁난다고, 이모집에 가기로 눌러 앉았다. 아무튼 밤길을 동행해줄 남학생이 필요했고, 누군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하자, 그가 선뜻 나섰다. 어차피 술을 잘 안하는 그가 먼저 일어나는 것이 낫겠다고, 그러더니 다른 사람들을 말렸다. “아니, 지금 짝짓기도 아닌데 두 사람씩 뭣하러.”


우리는 이미 반쯤 나서고 있었기 때문에 잘은 몰랐지만, 귓결에 들려오는 대로 ‘짝짓기’라는 단어는 너무도 격에 맞는 말이 아니었다. 아마 그는 그 단어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기껏 ‘짝을 맞추어 나갈 계제가 아니다’ 그런 뜻이었겠지만, 순간 불쾌감이 일었다. “무슨 그런 흉측한 말을 하세요?” - “예, 무슨?”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종일 기다렸던 반응을 하필 이제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옆의 친구도 까닭을 몰라 했는데, 내가 너무나 웃었나 보다. 그가 화를 버럭 내면서 내 웃음을 조롱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이건.’ 나는 속으로 답답했다. 친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교문 쪽을 바라보고 종종걸음을 시작했고, 나는 그만 눈짓 손짓으로 먼저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씩씩거리고 있는 사람을 떨치고 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간단히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친구는 걱정보다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자꾸 뒤돌아보며, 그러나 이내 교문 쪽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 우리 맥주 한잔 더 할까요?” - “저, 맥주…” 이번에도 그가 나를 웃겼다. 그렇지만 웃지 않았다. ‘아니’코드가 잠시 빗나간 모양이다. “제가 웃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잖아요.”


“아니, 좀 걸읍시다.” 그는 앞장섰다. 인적이 드문 거리를 휘돌아 따라 걸으니 곧 큰 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이 나왔다. 이어 인근 대학의 캠퍼스에 들어가게 된 것 같았다. 어둠이 아니라 그의 침묵이 무서웠다. 나는 할 수없이 ‘아니’ 이야기를 꺼냈다. 하루 종일 ‘아니’가 아닌 다른 말머리가 나올까 귀를 쫑긋하고 들었노라고. 듣고나 있는지 그는 여전히 침묵이었다. 내가 그만 벤치에 앉아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슬그머니 무서워지기 시작했을 때 그가 돌아와 앉았다. 먼데 하늘을 보며 그가 말했다.


“우리 누난 YH 김OO의 친구였습니다. 야당당사에서 사흘을 농성하다가 죽은 김OO 말입니다. 누이들은 그때 칠팔월 더위에 200명이나 모여 있었답니다. 요구조건이 무엇이었냐, 그저 공장문만 닫지 말라.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그렇게 써 붙여 놓고. 가발사업 - 끔찍하지요. 어무니들 누나들이 눈물을 머금고 내다판 긴 머리채, 가발을 만들었으면 수출로 부자가 되고 좀 좋은 일이요. 헌데 결과는 뭡니까, 죽은 누나 친군 말할 것도 없고, 병신되어 돌아온 우리 누난 또 뭐고. 죽은 친구가 한 살 더 어렸다던가, 꽃다워야 할 열아홉, 아부지는 일찍 돌아가, 어무니는 행상, 배곯아가며 일만 하다가 죽었대요. 국민학교 졸업도 못한 어린 나이부터 일판에 나섰더라요. 그러다간 죽어서도 순식간에 화장되어버렸다니, 불길과는 무슨 원한이라요? 어려서 화상으로 치마 한 번도 못 입어봤답니다. 우리누나도 그때 다친 허리를 제대로 치료만 받았어도 저 지경은 아닐 것을, 입원하면 체포될까 걱정,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돈이라서, 칼잠 자는 셋방서 견디다 못해 병신 되고서야 내려왔지 뭡니까. 집에 돌아온 누난 기독교 물이 들었다고 혼만 났지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어서지도 못하는 누나가 교회에 갈 일은 없지만요. 아무튼 누난 교회 쪽 인사들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또 용기를 내어 노조를 만들고 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대요. 나한테 이번 방학 내내도 설교를 해요. 그런데 난 누나의 신 같은 건 믿지 않아요. 그런 절대자가 있다면 이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을 리가 없지요, 또 실수로 그랬다면 곧 바로 잡았을 것 아니요? 희생자와 희생자를 내는 세상을 이리 버려두는 것이 누나가 말하는 신의 섭리라면 난 수긍할 수 없고요.”


그가 뜸을 들이며 힘들게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일종의 마비를 경험했다. 안개 속에 들어선 망망한 느낌. 누군가의 손을, 누군가의 아픔을, 분노를 보듬어 안고 싶은.


“내가 『순교자』이야기 때 정말 분노한 것은, 내겐 왜 두루마기 걸친 목사님들의 신앙과 배신의 정체는커녕 그 상도 떠오르지 않느냐는 겁니다. 나는 왜 예술에 대해선 그 이미지도 그리지 못하냐, 아니 진짜 분노하는 것은 바로 오늘의 나 자신이요. 인생관에도 생활원칙에도 어긋나고, 나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점은, 단지 죄짐 모르고 순수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그쪽의 인상에 흔들리어….”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어색해진 나는 얼결에 찬송가 구절을 읊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갖는 채플의 습관이었다.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예수의 품이라? 아니요, 그건 아니요. 지구상의 인간들을 죄다 품어주련다는 예수에게 무슨 품? 성육신이고 뭐고, 육신이란 원래 단 한 사람을 품을 품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


그것이 신호였다. ‘품’에 대한 언급은 그들의 서로 다른 머리의 아픔을 오직 몸으로 품고자하는 갈망의 폭발로 이어졌다. 연초에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서 뜻도 모르고 대한민국의 통금해제를 환영했던 두 사람은 이번엔 그 실질적인 자유를 누렸다. 12시 바늘이 넘어가는 순간, 목양신 팬의 시간, 패닉의 시간이었다. 휘영청 둥근 달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은 밖에선 상당히 쌀쌀했다. 어색한 몸짓으로 서로의 얼굴을 비껴 안고서 오들오들 날 밝기를 기다린 그들은 엉뚱하게도 다음 일요일에 대학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약속으로 헤어졌다.


그 일요일, 며칠 전 소풍날의 벌판보다 더 싱싱해 보이는 교정의 나무들은 더러는 상록수들 사이에서 아름답게 색을 내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교회로 쓰이는 중강당 건물은 보기에도 육중한, 그래서 심오한 종교성을 풍기고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의 음악은 천장이 아닌 천상에서 내려앉는 아늑함이었다. 그는 누이가 말했던 신앙의 힘이 공기방울 속에 녹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누난 내가 여기에 와 앉은 것을 상상이나 할까?’ 갑자기 그리움이 복받쳤다.


무오성 - 그날은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말씀이 있었다. ‘성경’과 ‘성서’의 차이도 모르는 그에게는 심오하면서도 난해한 말씀이었다. 목사님이 읽으신 요한복음은 정확히는 몰라도 이런 뜻이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 하심이요, 또 너희가 그 믿음에 힘을 입어서 생명을 얻게 함이다.’ 영혼을 구하려는 중차대한 목적이므로, 불확실하거나 오류투성일 수 없는 것!


‘아, 아니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목적이 숭고한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아직 논리학입문에도 가보지 못한 그의 논리로도 이건 아니었다. 세상에 숭고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오류투성이의 일들을 이 한 마디로 덮을 수 있다고? YH의, 수많은 공장의 숭고한 목적도 우선 제 굶주리는 가솔들을 먹이고 노동자를 고용해 그들의 굶주리는 가솔들을 먹이는 일 아니었나?


그러는 사이에 아름다운 선율의 찬송이 울려 퍼졌다. “아침 해가 돋을 때 모든 만물 신선해,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그는 소리 없이 울었다. ‘어둔 세상 지날 때… 아, 나는 여기에서 뭣하고 있는가? 못 배운 누나들이 여전히 어두운 세상을 헤맬 때.’ 그것은 부끄러움의 눈물이었다. 그는 영생을 갈구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무엇인가 지금 이승의 어두운 삶을 위해 살아야 할 각오가 틀어 올랐다. 그는 이 사람들과는 한참 격이 다른, 그저 척박한 땅, 열악한 현세의 사람이었다. 그의 예의는 예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앉아서 그녀를 기다려주고, 그리고 기숙사 앞까지 동행해주는 일이었다. 걷다보니 지난 소풍 때와는 달리 깨끗하게 잘 차려 입은 옷매무새가 눈에 들어왔다. 참 어여쁜 여자구나. 그러나 그는 그 성장을 교회를 위한 의식으로 간주했다. 짧은 오솔길을 돌아 기숙사 앞 잔디밭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가 고개가 떨어졌다. 두 번째 약속은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조금 과장된 당당한 발걸음으로 바로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식탁에선 기도시간이 막 끝난 참이었다. 그녀는 교회나들이 차림으로 단정한 얼굴을 하고서 점심을 먹었다. 어느 때 보다 열중하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리라. 숟가락으로 밥알을 모아서 퍼 올리고 얌전히 입으로. 국물은 숟가락의 2/3쯤 뜬다, 곱상하게. 반찬을 집어 들 땐 턱이 반찬을 향하지 않도록 시간적 여유를 둔다, 가능하면 미소와 함께. 주말 나들이로 여기저기 빈자리들 때문에 그녀의 꼿꼿한 자세가 더욱 돋보였다.


바로 그런 반듯한 얼굴로 그녀는 나머지 대학생활을 마쳤다. 절박한 조율이, 치유의 힘이 본능적으로 솟는 것에 자신도 놀랐다. 맑고 깨끗한,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보였고 스스로도 그리 믿을 만큼 단아한 젊은 나날이었다. 노력 끝에 성공한다는 말이 사실인 듯, 그녀는 졸업하면서 공립중학교에 부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 아리게 많은 것을 배웠다. 열서너 살 소녀시절엔 몰랐던 것들을. 그렇게나 철부지 얼굴 아래 가려진 그늘을 짐 지고 살아가는 아이들. 종일 깔깔 웃다가 지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누구는 왜 월요일이면 결석이나 지각을 해야 하는가, 누구는 왜 졸린 눈으로 멍하니 옆 사람을 지나쳐 보고 있는가.


*


그렇게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바로 손아래 여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문제가 거론되자, 집에서는 서둘러 언니인 내가 먼저 선을 보아야 한다는 성화가 일었다. 괜찮은 학교를 졸업하고 괜찮은 직업을 가진 남녀가 어색한 자리에서 만났다. 처음엔 매개에 대한 거부감으로 어색해했지만, 곧 교양 있는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온통 의사집안의 막둥이라는 그 사람은 집안의 반대를 뚫고 신방과에 진학한 자유주의자였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호와 연극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직업적인 전문분야 탓도 있겠지만, 단 한 번도 지루할 수 없는 알찬 시간들을 만들어주었다.


곧 남부러울 것 없는 약혼식이 있었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행로는 어정쩡한 파혼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내 몸의 불발에서 비롯되었다. 약혼식 이후 서너 번째 데이트에서 약혼자가 약혼녀에게 할 수 있을 입맞춤을 해왔을 때 난 너무나도 놀랐고, 놀람은 심각했다. 왜 그리 혼쭐나게 놀랐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갑작스러워서였을까? 상황이 나빴을까? 그대로 굳어버린 내 몸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약혼 행세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각각 집에다 “결혼 후의 계획에 의견이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대기로 했다. 집에선 동생이 먼저 결혼하기로 결정 났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선한다고, 비교적 유연한 사고를 지닌 어머니가 우기셨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일 년이 훨씬 넘었을 때, 옛 약혼자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번엔 잘 될 것이, 그의 집안에서는 “의사공부만 하겠다면 어떤 여자라도” 된다 했다는 것. ‘파혼했더라도?’ - 이 말은 모욕적으로 들리기도 했는데, 아무튼 참 엉뚱한 발상이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으로 리처드 버튼과 두 번 결혼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떠올렸던 것 같다. 한 여자와 두 번의 약혼을 두 번의 파혼으로 끝낸 카프카 생각은 접어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나이 들어 의사공부가 한국보다는 미국에서가 더 용이하다고 했을 때, 집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아버지의 반대는 “미국”보다도 “한 번 깨진 그릇”이라는 원칙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머니는 대찬성이셨다. ‘아이들 하나쯤 미국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식의 유행 따라서. 결국 파혼을 되돌린다는 의미에서 다시 약혼식을 하고 이번엔 곧 이어 결혼식을 치렀다. 시댁에 걸맞은 격을 갖춘 서울에서의 결혼식을 어머니는 정말로 만족해하셨다. “둘째 먼저 시집보내믄 큰 딸은 어렵다더니 웬걸….” 그런데 그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누구나 결혼한 여자는 결혼 당일의 피로를 잊지 못하리라. 떠들썩하고 벅찬 긴 하루가 지나고, 다소 과장된 한 껍질의 미모를 지우고 제 얼굴로 돌아올 때, 그것은 몸도 마음도 나신을 의미한다. 비행시간을 멀미기운으로 보낸 나는 숙소에 들어서면서야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곳이 신혼여행지로구나. 우리는 밤이 되면 신혼부부가 하는 일을 해야 하는구나. 저녁 시간 내내 나는 우리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와 똑같이 서로 각각 샤워를 해야 하는 순간에 이를 것을 걱정했다. 누가 먼저? 나는 가장 덜 어색한 쪽으로, 그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까지 가만히 내 차례를 기다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자아, 신부님, 취침 시간이오. 레이디 퍼스트!” 하고 그가 가리키는 것은 욕실이었다. 순간 그 문제가 정해져버렸다. ‘신랑님 먼저…’라는 말은 목에 걸려버렸고, 나는 머뭇거리다 말고 욕실로 들어갔다. ‘밖에 있는 그는 그냥 의자에 앉아있을까? 설마 벌써 침대에 누었을까? 반쯤 벗고 와인을 마시고 있을까?’ 비누 거품을 내면서 별별 생각을 다했다. 갑자기 나는 나의 나신이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불현듯 제대로 샤워도 하지 않은 알몸을 누구에게 온통 주어버렸다는 생각에 경기가 났다. 그런 기억이 왜 송두리째 사라졌었던 것일까? 신입생 때의 먼 기억. 어쩌면 불의의 사고와도 같았던 한 날 한 밤의 기억. 그것이 아리게 되살아났다. 욕실 문을 사이에 두고 내가 ‘신랑’과 함께 신혼의 첫날밤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신랑은 나에게 “침대에 누워서” 기다려주기를 청하고 욕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그러나 더 이상 없었다. 그 대신 첫 남자를 배반하고 이제 간음을 행하려는 창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락한 미래의 결혼생활을 위해서 제 몸을 팔 준비를 갖춘 창녀. 누가 하루하루 몸을 팔아 살아가는 창녀만을 나무랄까? 이렇듯 마땅한 조건을 따라 결혼하는 여자는 모두가 창녀다. 그렇다 해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자신을 팔 생각을 하는 것이라면 가상키나 하다. 이날 밤, 과거의 첫 남자를 떠올리고 있는 것 자체가 참 악랄한 창녀성이다. 나는 그렇게 꼬옥 눈을 감고 있었다.


신랑이 점점 밀착되어 왔다. 그는 내 무감각을 그리 탓하지 않았다. 우리는 약혼-파혼-약혼-결혼의 대단원을 존중해야 했다. 나는 더 꼬옥 눈을 감았다. 내 몸을 잊고 먼 데 시간과 공간으로 날았다. 갑자기 그 옛날의 ‘그’가 내 몸 속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오랜 망각 속의 그가 뜨겁게 내 몸 속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었고,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밤새 나는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서투른 허영에 들뜬 철부지 여대생, “아니”를 연발하는 그의 무서운 실존의 고백을 듣고 당황한 어린 영혼이었다. 나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이상한 공존으로 시작되었다.


신혼의 우리는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시댁에서 마련해준 아파트는 의외로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가까웠다. LA 같진 않아도 사는 일엔 우리말만으로도 불편이 없지만, 공부를 하자면 영어를 수준급으로 습득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둘이서 같이 하면 잘 안된다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내가 운전을 못해서 그냥 같은 대학의 어학코스에 등록했다. 그러다 내가 결석하는 일이 많아지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어공부를 포기한 나는 집안의 일상으로 돌아와 무료함에 던져졌다.


신혼 기간을 사람들은 임신 전까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기는 천천히 갖는 추세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에겐 적당한 몇 달이 흐른 뒤 아기가 생겼다. 어느 밤 ‘그’의 아스라이 그러나 불같이 뜨겁고 엄청난 압력이 온 몸을 꿰뚫는 희한한 느낌에 숨이 막히도록 떤 다음이었다. 남편이 학교에 가고 난 나른한 봄날 나는 가만히 욕실로 들어가 배를 안았다. 나신은 차마 부끄러워 아랫배만을 드러내고 만져보았다.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엇이 일렁였다. 나는 그가 내 몸 속에 영원히 들어왔음을 느꼈다. 그날로 나는 남편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임신이라고, 핑계는 그것이었다. 아기를 보호하고 싶다고. 남편은 기쁨과 혼란이 뒤범벅된 얼굴이었다. “어마 거참 잘 되었네. 병원 가서 확인해야지!” 친근하게 말하던 남편은 잠자리에서는 펄쩍 뛰었다. “아기를 보호해? 누구로부터? 제 아비가 누군데 보호 하느냐고!” 그러나 나는 창녀가 되는 느낌을 갖지 않고서는 남편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원에 가서 임신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그 동안 남편은 완전히 토라져 있었다. 처음엔 임신 히스테리치곤 별나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개를 저었다. “어떤 별난 자식을 가졌기에”라는 으름장에서 “어느 놈의 자식인지 두고 보겠다, 검둥이가 나올지 흰둥일지 두고 보고야 말겠다!”는 악담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는 회복할 수 없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역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뱃속의 아기가 부모를 함께 원하지 않는 경우라 했을지. 배는 불러왔고, 만삭이 되었다. 고향 떠난 이역만리에서 참으로 외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나, 시간은 정지한 느낌으로 해가 지고 또 해가 떴다. 눈이 흩날리는 날, 아기가 태어나려고 했다. 한국에서와 달리 남편들을 산실에 들여보내는 관습인 나라에서, 나는 펄펄뛰며 남편의 입실을 거부했다. 하얀 강보의 아기는 눈밭에 파묻힌 듯 쌕쌕거렸다.


남편은 내 “병”이 심하기는 해도 해산과 더불어 끝날 것이라 기대했었다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해산을 통해 아기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할 저력을 잃었다. 이 새로운 꼬마신사와의 관계만으로도 버거웠다. 칠칠을 집는 관습대로라면 아직 큰 대문에 금줄이 걸릴 기간이었다. 결혼에 이른 “히스토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라도” 이혼만은 보류하자는 남편의 논리에 특별히 반박할 이유도 나는 갖지 못했다. 남편은 여전히 약간 자유의 냄새를 풍기는, 있는 집의 조금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무엇도 아주 오래는 참지 못해했다. 남편은 내가 진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에 말없이 아기의 여권을 만들어왔다. 떠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아기와 함께 상당한 무게의 짐 가방을 찾아 들고 비행장을 나서는 기분은 이상하게도 안도감이었다. 늦은 봄, 하늘하늘 봄바람을 타고 소문이 빨리 흩어질까 걱정이었다. 우선은 친정나들이처럼 고향에 내려갔지만, 아기 주변의 부산함 속에서도 얼마큼 시간이 흐르자 이실직고를 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따로 나와서 직장을 갖고 아기를 기르는 삶을 생각하자면 고향에 머무를 고려도 해보았지만, 우선 어머니가 당신의 삶을 포기하고 딸네 집에서 아기젖병과 씨름하실 분이 아니었다. 나는 부지중에 어머니의 자존심을 좀먹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우선은 고향 멀리 서울 근교로 살 집을 찾았다. 언젠가 직장에 복귀할 궁리도 한 이유였다. 사표를 내고서 결혼했으니 새로 임용고사를 보아야 할 것이고,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 겁도 났다.


마침 남편이 여름방학이 되어 잠시 들어왔을 때, 함께 시댁에 불려갔다. 말없는 내게 시아버지는 아이이름의 통장을 건네주셨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끈이라는 것이구나. 시댁 근처로 이사하라는 ‘명령’에는 불복했지만, 대신 아이를 잠시 잠시 시댁에 데려다 주어야했다. 그것뿐이라면 내게는 과다한 행운이었다. 생활전선을 위해 내 아이를 다른 어머니에게 맡겨야하는 불행을 면했으니 말이다. 출입이 없는 생활, 종일 종알대는 아이와 보내는 많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길었다. 밤은 깊어지지를 않았다.


그러는 사이 추상적으로는 세기가 바뀌고, 구체적으로는 강산이 변하는 십년이 흘렀다. 나는 고운 태를 훌렁 벗은 사십 세가 되었다. 그러고서 후다닥 놀랐다. 나는 내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낭비해버렸다. 내 시간은 정지한 채로 세상이 휙휙 지나가버렸으니까.


아이는 4학년. 이른 봄날 펼친 책에서 ‘억’이라는 수의 개념을 보고 나도 함께 놀랐다. 혼합연산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니 3학년 때 세 자릿수 곱셈 때부터인가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아이는 대체로 시무룩했었다. 그제야 아이에게 아빠의 존재가 절실함을 깨달았다. 수학과 과학은 아빠가 챙긴다는 주변의 말들에도 신경이 쓰였다. 결국 아이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교과서에 나오는 유적지답사도 그렇다. 경복궁이야 데려 간다지만, 공주의 공산성이나 부여의 낙화암 등을 어찌 데려갈지. 『교과서를 만화로 공부해요』시리즈가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빠의 역할과, 아빠의 사랑과는 다르다.


아들아이를 이대로 어쩐다? 최소한 수학과 컴퓨터를 지도할 필요가 생겼다. 한참 큰 대학생선생님을 어려워하던 아이가 차츰 자연스럽게 ‘형’과 어울렸다. 아이가 배우는 틈에 나도 까마득한 기억을 되살려 컴퓨터 사용을 익혔다. 내 기호는 단연 ‘검색’이었다. 단순한 작동으로 이 무궁무진한 보물 길을 열면서, 가라앉았던 삶이 솜털처럼 부풀려 날았다. 하긴 내 관심이라야 기껏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폐부에 와 닿는 김현식도 임희숙도, 애절한 오현란도 몇 달을 넘기기 못했다. 영원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 옛 친구들의 이름을 검색 창에 쳐보았다. 동명이인이 줄줄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지만, 더러는 그 사이 시인이, 치과의사가, 그리고 또 무엇이 되어 있었다. 마흔 나이가 그런 것이었다. 가만히 그 이름이 떠올랐다. 무서운 유혹이었다. 그러기를 수십 번, 마침내 유혹에 굴했다. 서너 사이트가 떴다. 유전공학 전문, 혹은 근대영미소설 전공의 교수, 외국에서 활동하는 목사… 어느 누구도 그와의 관련성이 희미했다. 내과병원은 더더욱 아니리라. 뭘하고 살까, 그는?


그해 화창한 오월이었다. 컴선생이 약속을 미루었다가 왔다. 무슨 일인지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하고 있었다. “늦게서야 신부님이 되셨는데, 우리 신부님이 그만 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셨는데요, 그래갖고 일주기 추모미사 끝나고 몸이 성찮은 누님을 고향에다 모셔다 드리느라고요. 저희 한 동네 분이셨어요.”


나는 순간 고향말투를 듣고 있었다. 평소엔 무심히 들었는데, 지금 이 학생은 내 고향 말을 했다. ‘몸이 성찮은 누님?’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여 그 이름을 물을 수가 없었다. “향년 몇이나?” “향년이랄 게, 40대 초반요. 성당에서 어버이날 행사로 함께 운동하시다가 쓰러졌고요, 알고 보니까 지병이 있으셨답니다. 운동권으로 잡혀가 고생….”


‘그만, 그만 해라.’ 나는 그가 분명 법대생이었다는 확실한 기억 쪽에 매달렸다. 혹시라도 세상과 화해할 수가 없어 미리 피안을 살고자 성직자가 되었다 쳐도, 꼭 그 사람이 그 사람일까? 아니다. 김대건 신부님 이래 사제서품 받은 신부의 숫자가 4000을 넘는다는 구절을 어디서 본 생각이 났다. 그럼 확률은 1/4000이다. ‘미쳤구나, 과거의 모든 신부님들과 함께 확률을 셈해?’ 마음속은 점점 지옥이었다.


그날 밤 늦게까지 자리에 들지 못한 나는 무심코 ‘마리아 막달레나’를 자판으로 치고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창녀가 되었던 여자의 내면은 암흑이었다. 내 속의 일곱 마귀는 누가 있어 쫓아내줄까? 나는 누구의 발에 향유를 부어야 할까?


화면에 티치아노의 <막달레나> 초상화가 떴다. 광야에서 참회하는 막달레나라는데, 모습은 죄인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염의 상징이다. 순 알몸에 늘어뜨린 긴 머리타래는 육욕을 증거할 뿐, 종교적 감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막달레나 시스터즈>라는 영화도 있다. 1960년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수녀원의 일상. 거기 수용되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위험한’ 여자들. 강간을 당한 뒤 아버지의 고발로, 얼굴이 예뻐서 남자들을 유혹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혹은 아기를 뺏기고 쫓겨난 미혼모 등이다. 수녀원부설 세탁소에서의 노동착취와 성희롱 - 왜 이런 것은 인종차별이 아닌가. 러시아의 수용소군도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애석해하고 비판하는 세력들은 뭘 했나?


막달레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는 강박관념은 어떤 욕망보다도 강했다. 나는 아메바의 세포분열과도 같이 거기서 파생된 단어들까지를 한없이 쫒아가는 중병에 걸렸다. 그것이 몇 년 째, 우연히 그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킨 적이 있다. 들켰다기보다는 의아심을 샀다. “너 갑자기 교회 다니기로 한 거야?” 그 다음해인가 『다빈치 코드』가 번역되었을 때는 일도 없이 『다빈치 코드의 진실』까지 사전편과 해설편 모두를 통독했다. 이상한 안도감으로 정신이 없던 몇 달, 친구는 또 걱정했다. “너 이제 반교회파야 뭐야?”


그 뒤로는 내가 말을 더 아낀다. 아직 누구도 모르는 자료들도 많다. 최근엔 프리드리히 헤벨이란 극작가의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작품을 찾아냈다. 표면적 도덕률 앞에서 파멸하는 인간들. 신부의 지참금에 대한 탐욕과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염려하여 약혼관계를 지속시키고 있는 약혼자,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서 유년시절의 연인을 사랑하는 클라라 - 옛 연인은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임신사실을 알고는 뒷걸음친다. “그것에 관한한 어떤 남자도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남자의 변명이 당시에 유행어였다니, 남자들의 고전임에랴!


의문점들이 꼬리를 물었다. 제목은 막달레나라 하고서 왜 막달레나가 나오지도 않는가? 작가의 전기라도 훔쳐보아야 했다. 1818년 생 작가는 스물두 살에 함부르크에 나와서 곧 8년 연상의 후원자이자 연인이 된 엘리제 렌징을 만났지만, 빈에 머무는 동안 연극배우 크리스티아네 엥하우스와 결혼했다. 아내가 데리고 온 아들은 엘리제가 양육했다. 게서 18년을 자란 아들은 엘리제가 죽자 칠레로 이민 갔고, 28년 뒤 친모를 만나고자 귀국 길에 빈의 중앙역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니, 진정 친모자간의 연은 없었던 것! - 아니 이런 것을 찾고자 한 건 아니다. 기막힌 인생들에 매료되어 헛것에 심취할 뿐이다.


물론 이런 특별한 자료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폴더에 모아두었다. 서툰 영어와 더 서툰 독일어 사이트에서 뒤져내서 몇날 며칠에 한 단락 씩 읽어 모은 정보다. 엉뚱한 제목의 유래는 겨우 찾았다. 원래는 주인공을 따라 “클라라”라고 명명될 예정이었는데,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출판사의 희망에 따라 성서의 문제적 인물을 가리키게 되었단다. 출판사들의 상업성, 그것은 서적출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로구나. 글쟁이도 아니면서 괜히 허탈하다.


*


“부우부우 부우우우.” 휴대폰이 돌다 돌면서 이쪽으로 흐른다. 폰을 집어 들며 고개를 드니 느릿한 햇살이 밀려든다. “아직도 집이냐고? 그래, 간다니까. 아니, 뭘 좀 하던걸 마저. 그래 알았어.”


일단 컴퓨터를 닫고 미궁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언젠가는 이 폴더를 아예 벗어나야 하리라. 서둘러 머리를 빗으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왜소한, 마른 장작개비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교인도 아니다. 정염과 신성을 공유한 막달레나 증후군? 말도 아니다. 나는 그냥 죄인이다. 비뚠 결벽증으로 아들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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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