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0.09 말과 글, 그리고 경계인
  2. 2010.02.24 통일 도이칠란트 문학의 변화 추이
  3. 2004.11.04 문학, 상상력의 힘
강연-강좌2010. 10. 9. 00:00

말과 글, 그리고 경계인


“프로메테우스 - 그 의미는 선각자이다 - 는 하늘에서 불을 가져오기를, 그것으로 오직 소시지 구이들이 장사나 할 수 있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 그는 그것을 땅이 불타도록 가져온 것이었다. […] 만일 이 금기위반이 […] 부르주아들이 점점 좋아하고 점점 더 돈을 버는 데나 쓰인다면 - 문학은 되돌아가야 한다. 아니, 불을 하늘로 다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 모든 선각자들처럼 지략을 써서 문학은 어떤 길을 찾아야 하고 찾아내야 한다.”


이런, 평생 하이에나가 되어 남의 나라 남의 글 뜯어먹고 사는데 진력이 나서 도망쳤는데, 기어코 마침표를 찍으라 하니 또 그 짓을 되풀이하며 하인리히 뵐의 말과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군요. “오직 소시지 구이들이 장사나 할 수 있게?” 이 말은 자본주의에 완전히 강점된 이 세상, 이 지구를 향해 통탄의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 말을 저는 마침 한글날에 즈음하여 이렇게 변형해보고 싶습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시면서, 훗날 남북으로 갈려 살면서 남쪽 대통령이 대북제안을 내놓을 때 하필이면 외국말로 ‘그랜드 바겐’이라고 하고, 우리 땅 멀쩡한 이름 놓아두고 새 이름 짓겠다고 총리실에서 ‘새만금 글로벌 네이밍 공모’를 하라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우리가 기적 같은 문자를 누린 600년도 채 못 되는 세월을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 ‘훈민정음’으로 반포된 글자가 그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해서 한문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에게 경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갑오개혁에서야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지만, 곧 닥쳐온 국권피탈은 다시 극한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가, 말과 글이 푸대접 받는 환경 속에서 오히려 ‘한글’은 그 이름을 얻고 ‘맞춤법통일안’이 나왔습니다. 세계문학에서의 근대적 사조들인 낭만 · 자연 · 상징주의 등이 한꺼번에 들이 닥치면서 신문학운동이 폭발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죠. 그런가 하면 우리의 신문학이 서구의 문학장르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문학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는 ‘이식문학론’은  ‘조선문학’의 정체성을 화두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증거입니다.

말과 글의 예술, 문학의 속성은 바로 그러한 불모지에서 더욱 꿈틀거리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배고픈 천사”의 친구 레오를 주인공으로 한 『숨그네』의 헤르타 뮐러에게 노벨문학상이 결정되었을 때 독일문단에서도 예상작은 아니었던 것이, 바로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경계인이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변인, 경계인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 그런 이야기를 쬐끔 해보겠습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강연(?)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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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까지가 팸플릿을 위한 글이었다.

  강연은 2010년 10월 8일,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103호실에서.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0. 2. 24. 23:30

통일 도이칠란트 문학의 변화 추이


11회 영호남문학인 교류한마당

2009년 5월 30일~31일

 

 

1. “하나의” 도이칠란트

21세기로의 길목에서 ‘정보오락 Infotainment’의 시대라고 하는 범세계적 문화 패러다임의 교체보다 중요한 문제는 도이칠란트의 경우 통일이라는 변수에 있다. 양 도이칠란트 국가의 정치적 통일이 곧 ‘하나의 도이칠란트’라는 통합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속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합의가 없는 통일”이고, “장벽은 무너졌지만 분단은 계속”되고 있고, “문화적 식민화” 속에서 “통합이 신속히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환상”이었다는 생각에서 ‘동인-서인 Ossi-Wessi’이 “머리속 장벽”을 두고서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전후문학은 패전과 함께 양심의 가책으로 전쟁포로상태로 귀향한, 또는 히틀러소년• 소녀단 유니폼을 벗어던진 세대에 의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친서방정책으로 경제재건을 우선시한 서쪽과 사회주의 이상 실현을 위해 독서대중의 교양화를 꾀하던 동쪽에서, 도이치문학은 크게 다르게 발전할 운명이었다. 서독의 입장은 보수적 문학비평의 취지에서 도이치문학의 통일성이 존재한다고 간주했다. 서독의 자유문학과 동독의 몇몇 비판적이고 수준높은 문학을 포함하면서, 동독의 문학 일반은 정치적으로 교조적이며, 미학적으로는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전혀 문학이 아니라고 간주해왔다. 반대로 동독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본주의에 문학적 상상력을 저당잡힌 서독의 문학은 작가를 먹여 살리는 상품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동독에서는 문학이 인민대중의 사회주의 정향을 고무시키는 교육적인 사명감에 찬 위대한 그 무엇이었고, 작가 또한 약간의 특권계층으로 대접되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역사의 승리자로서 문학의 황금시대를 맞았던 동독의 경우, 도이칠란트의 통일은 그 자체로서 충격이었다. 통일은 동독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해체라는 의미에서 문화체제의 해체를 포함하기 때문에, 통일 후 소위 청산작업과 변화의 대상은 곧 동독의 문학인 것이다. 서방에서는 ‘이데올로기문학’이라고 격하되는 동안 스스로는 도이칠란트 정신사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믿어온 문학이 청산되어야 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글쓰기 방식의 붕괴와 더불어 문화의 시금석이 사라진 공황기를 초래했다.

 

 

1) 통일의 순간 -  폴커 브라운

통일의 순간에 시집 『우리들이지 그들이 아니라 Wir und nicht sie』(1970), 장편 『미완성의 이야기 Unvollendete Geschichte』(1975) 등이 어렵게 출판되어 동• 서독에서 호평 속에 팔리고 있던 중견작가 브라운 Volker Braun(1939~  )은 울먹였다.

 

 

추도사 Nachruf」 (1)

나는 그대로 있는데 내 나라는 서쪽으로 떠나간다.

오두막집에는 전쟁을 왕궁에는 평화를. (2)

내가 내 나라에 발길질을 해댔구나.

내 나라는 몸을 던지고 알량한 장신구마저 던져 버린다.

겨울이 지나면 탐욕의 여름이 오겠지,

그러면 나는 어디론가 먼 곳으로 사라지리라.

내가 쓴 모든 글도 이해될 수 없으리.

나는 여태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것을 빼앗길 것이고,

아직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것을 영원히 아쉬워하리라.

희망은 덫이 되어 내 갈 길을 가로 막고 있다.

나의 소유물을 이제 너희가 움켜쥐고 있구나.

언제 다시 내 것이라고 말하며 모두의 것을 의미하게 될까.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인 브라운은 동독의 이념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거기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이 소유물은 다름 아닌 “여태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이다. 현실사회주의가 허위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판명된 뒤에도 진정한 사회주의는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고집스런 우울은 수십 년에 걸쳐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비전이었던, 기회가 균등한 곳, 생산적인 인간들의 연대공동체를 집요하게 그린다. 이 시의 정취는 통일과 더불어 발아래 땅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과 일치했지만, 브라운은 양쪽 비평계에서 비판을 받았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마당에 ‘진정한 사회주의’가 도래하리라는 환상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또 새로 얻은 개인주의적 자유를 예찬하지 않았다고 해서.

 

2) 통일소설 / 전환기소설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더불어 동쪽 도이칠란트 문단의 새로운 변수는 작가들의 세대교체를 들 수 있다. 동독 최고의 극작가 뮐러 Heiner Mueller(1929~1995)나 “비유적 사고”의 모르그너 Irmtraud Morgner(1933~1990)는 유명을 달리했고, 통일을 불안과 불만으로 받아들이는 브라운이나 아예 하임 Stefan Heym(1913~2001)볼프 등 기성세대는 좌표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대신 젊은 작가들에게 통일은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강요받아온 소위 문학에 대한 외세로부터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통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했다. 그들만이 가진 ‘두 체제’와 ‘두 사회’의 경험은 서독의 작가들에 비해 유리한 관점을 확보하는 것도 사실이다. 통일 후 가장 성공적인 신진이라 할 브루시히 Thomas Brussig(1965~  )는 아예 동독은 이야기하기에 좋을 것이라며, 지루한 자본주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야기의 무궁무진한 보고라서 “소설가의 천국”이라 호언했다. 이것은 연령의 의미에서의 세대교체 뿐 아니라,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그의 『우리같은 영웅들 Helden wie wir』(1995)이 대중적인 괄목한만한 성과를 낼 때, 시대소설로서 ‘통일- 또는 전환기소설 Wenderoman’(3)이 화두로 떠올랐다.


 

소설은 울치트 Klaus Uhltzscht라는 일인칭 서술자의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장벽붕괴 후 2년쯤 되었을 때 그는《뉴욕 타임즈》기자와 인터뷰를 자청하여, 그의 비정상적 ‘물건’이 전적으로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울치트의 21살 생애가 이야기되는데, 그가 태어난 것은 하필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군이 체코에 진입한 날이다. 그는 유명해지고 싶은 이기적인 관점과 한편 봉사하고자하는 이타적인 관점에서, 사회주의 선전에 기울어 슈타지(4)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지만, 아버지 역시 슈타지였다는 사실에 놀란다.

특히 마지막 장 “분단된 성기 Der geteilte Pimmel”는 동독 최고의 소설가 볼프의 

<분단된 하늘 Der geteilte Himmel>(1963)을 그대로 조롱한다. 슈타지요원 울치트는 1989년 11월 4일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에서 장벽붕괴가 임박한 순간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연설자를 비웃는다.  연설자는 유명 피겨스케이팅 선수출신의 트레이너 뮐러 Jutta Mueller(1928~  )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음 날 밝혀지기로는 볼프였다. 주인공은 분노하여 외친다. “‘장벽은 없어져야 한다!’라는 한마디 외침이면 되는 것인데 그런 외침은 크리스타 볼프의 입에서가 아니라 로널드 레이건의 입에서 나왔다.” 작가는 이처럼 적당히 소신을 기피해온 볼프가 국민작가로 존경받았던 사실에 분개하며 볼프의 전 작품활동을 ‘얼음 위에서 미끄럼타기’(피겨스케이팅)로 비하한다.

문제는 공격당하고 매도되는 동독의 대들보 작가들이다. 그들은 이처럼 직접 동쪽의 후배 작가들에게서 또는 외곽에서 직격탄을 맞으며, 또한 서쪽으로부터는 “길들여진 반대자들”이었다고 매도당하는 협공에 처해있다. 동독이 “문화보호지역”이었다고 보아도 되는가? 민족의 대변자로서 ‘인간적 사회주의’의 유토피아를 당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견지했던 지식인 작가유형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의구심은 폭등하고 있다.


2. 분단기의 거장들

1) 도덕성 시비 - 크리스타 볼프

누구보다도 통일과 더불어 논쟁에 휩싸인 볼프 Christa Wolf(1929~  )의 문제의 1989년 11월 28일의 베를린광장 연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독의 독립을 고수할 것인가? 우리의 재정적 도덕적 가치의 폐업 정리세일을 할 것인가? 조국을 위하여 아직도 우리에겐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도 출발점이었던 반파시즘적 인본주의적 이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파시즘적 인본주의적 이상’을 위해 조금 더 노력하자는 취지의 발언이라면, 중견 지식인 성직자 정치가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해야 하는 발언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남은 것 Was bleibt』(1990)의 출판이 그로서는 악의적인 숙명과도 같았다.


 슈타지로부터 공개적으로 추적/감시되는 여성작가의 하루가 이야기되면서 감시와 그로부터 파생된 감정들, 불안, 변화의 결과가 보고된다. 작가는 내면의 독백, 끊임없는 자문과 자기시험을 통해서 정신분열적인 행동을 보인다. (자아의 분열은 국가에 대한 관계에서 볼프의 분열성을 말한다.)

볼프에게 실제로 ‘남은 것’은 거짓과 자기기만, 굴욕에 속수무책으로 내맡겨지는 일이었다. 이미 볼프에 대한 평가는 서독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1987년 11월 FAZ에서 비평계의 황제 라이히-라니츠키의 Marcel Reich-Ranicki(1920~ )는 볼프를 “동독-국가시인”이라고 폄하하더니,『남은 것』이 출판되어 시중에 깔리기도 전에 ZeitFAZ에 악의적 서평이 실렸다. 국가시인이 감시를 받았다니 어이가 없다는 논조에, 국가와 가족처럼 지냈고, 국가로부터 혜택을 누린, 나치스에 복무한 지식인의 후예라고 비판되었다. TV 프로그램 문학 4중주는 “도이칠란트에 혁명이 일어났다. 동독의 작가들은 승리했는가, 불발인가?”라고 비꼬았다. 이는 동독의 작가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로서, 이 순간에는 마치 작품의 질이란 글이 쓰인 장소와 동의어인 것 같았다.

논쟁의 제2기는 정치적 참여를 표방하는 지식인들의 상호 공격으로 번졌고, 1993년에 터진 슈타지 서류철 문제는 볼프의 ‘비공식 협조자 IM’ 활동(1956~1962) 고백으로 비롯되었다.(5)볼프 자신은 이 모든 혹독한 비판을 전환기의 청산이라고 받아들였다.  상당 기간을 미국에 체류함으로써 언론을 피했고, 육신의 병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화신 Leibhaftig』2002)에 기록되어 있다. 『메데이아. 목소리들 Medea: Stimmen』(1996)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번갈은 독백에서 메데이아신화가 재창조된다. 그리스신화, 아니 세상의 모든 신화와 전설 가운데 최고의 악녀로 각인된 메데이아가 이 작품에서는 강한 자의식의 여성으로 묘사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근거한 사건들은 다른 방향에서 해석되며, 다른 시각으로 조명된다. (『카산드라 Kassandra』1983)를 그리스 아닌 트로이의 시각에서 쓴 것과 상통한다.)

볼프는 12권 전집의 출판과 특별호 등을 출판하고 있고, 에세이, 대담, 서간모음집에서는 그 시대에 증후적이고 감동적인 열정이 확인된다. “문학은 오늘날 평화연구이어야 한다.”(뷔히너문학상, 1980)는 입장은 2002년의 도이칠란트 서적상 수상에까지 변함없이 이어진다.



 

2) 신념문학. 신념의 변화? - 귄터 그라스

도이치문학 특유의 전통인 ‘신념- 또는 신조위주의 미학’에서 출발한 전후의 작가들은 이제 거의 역사적 위치에 들어갔다. 하인리히 뵐 Heinrich Boell(1917~1985), 렌츠 Siegfried Lenz(1926~ ), 그라스 Guenter Grass(1927~  ), 발저 Martin Walser(1927~  ) 등 대부분 ‘47동인’과 관련된 서독의 전후문학은 끈질기게 책임의 문제를 공개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이 된 세대였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은 대체로 ‘양심으로서의 작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신념 자체도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1959년 프랑크푸르트서적박람회에서, 뵐의 『아홉시 반의 당구 Billard um halbzehn>와 더불어 그라스는 『양철북 Die Blechtrommel』으로 세계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통일의 순간 뵐은 세상을 떠나있었고, 그라스는 콜 수상 주도의 (흡수)통일 방식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통일 후 그는 통일이 작가에게 그 신념에 따라 소재상의 전환기는 될지언정 흥망성쇠의 분기점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무당개구리 울음 Unkenrufe』1992)에서 정년을 앞둔 홀아비 노교수와 예술품복원사인 홀어미의 로맨스그레이를 전경에 배치하고, 통일 후 정치 및 경제적 현실을 형상화하면서 화해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장편을 썼다.

  때는 전환기로 도이칠란트 남자와 폴란드 여자의 만남은 민족적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이 둘은 각각 실향민들이고, 각각의 양친들은 언젠가 고향 땅에 묻히기를 소원했었다. 그래서 ‘도이칠란트-폴란드 공동묘지’라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실향민들은 시신으로나마 “화해의 묘지”에 되돌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말은 이들의 사고사로 끝난다.

 

『넓은 지평 Ein weites Feld』(1995)에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기류에 따라 끊임없이 좌우되는 도이칠란트인의 성향을 ‘배신’이라는 낱말로 함축했고, 『나의 세기 Mein Jahrhundert』(1999)에서는 20세기 100년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이 매번 다른 서술자에 의해 연대기적으로 서술된다. 이 작품 후에 그라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6)

그라스의 사회활동은 나이가 들어서도 엄청나다. 동ㆍ서독 통일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수상의 정책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1997년에도 콜의 5차 연임을 저지하기위해 전 도이칠란트 지식인들의 결집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런 그의 장편 『게걸음으로 Im Krebsgang』(2002)는 2차대전 말에 민간인 9천명 이상이 숨진 선박침몰사건을 다루어, 발표되자마자 독자와 비평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문학적으로 뛰어난 성공작이란 평가 외에도 도이칠란트 사회의 깊은 터부였던 소재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정전 무렵에 발트해에서 발생한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침몰사건은 우선 참사의 규모에서도 1912년의 타이타닉호 침몰사건 때보다 사망자 수가 무려 5~6배나 되는데도 역사적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해왔다. 구스틀로프호는 ‘대도이칠란트제국’이란 오만한 꿈의 상징이었고 ‘히틀러의 타이타닉’이었다. 따라서 그 배의 침몰은 나치스 범죄에 대한 당연한 응징으로 조용히 덮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라고 간주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 등은 곧 잊혔다. 그와 함께 소련과 동유럽에서 추방된 1250만 도이칠란트 민간인이 겪은 고통도 잊혔다. 특히 나치스 파시즘의 청산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한 ‘68세대’는 도이칠란트를 희생자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그런데 이제 소설 속에서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노인의 입을 빌려, 그라스는 “동프로이센 피난민의 참상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세대가 해결할 과제였다.”고 말했다.

이제 게의 옆걸음, 가능한 한 적을 속이려는 걸음이 어제와 오늘을 왔다갔다하는 서술관점을 상징하며, 긴장을 지닌 짜임새로, 예술적이고 유머러스한 대작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팔이란 안으로만 굽을지라도, 한 번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던 그라스가 이 터부를 건드려 도이칠란트인을 감싸려는 속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행동주의 지식인에게서도 노년의 향수란 결국 고향과 동향인이라는 보편감정에 파묻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향은 그라스의 동년배이자 동지적 정서를 지녔던 발저에게서는 더욱 노골적이다.(7) 1960년대와 70년대를 공산당에 동조했던 전력과는 다르게, 그는 80년대 후반부터는 나치스 과거에 대한 논란에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했다. 통일 후 베를린에 ‘홀로코스트기념관’을 건립하려는 거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맹공을 펴면서, “축구장 크기의 악몽”이 될 기념관 따위를 건축하는 것은 수치를 “기념화”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실제로 1980년대 소위 ‘역사가논쟁’(8)을 거치면서 도이칠란트인들의 정서는 바뀌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를린대학의 법학교수 슐링크 Bernhard Schlink(1944~  ) 또한 나치과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들세대의 성찰을 담은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1995)로 세계의 문학시장을 휩쓸었다.(9) 슐링크는 문학계에서는 신인이다. 그는 외도(?)로서 이러한 성공을 거두면서 엄청난 걸음을 내딛는다. 나치스의 집중수용소 간수였던 주인공을 모든 괴물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면모를 지닌 가해자로 창작해서만이 아니다. 일인칭 서술자가 세대간의 길항작용을 극복하고 전후세대의 자기정체성을 확보해냈기 때문이다. 제3제국의 범죄적 계책에 얽혔던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를 도이칠란트의 죄과와 관련시키고, 그것을 앞 세대에게 “밀쳐두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 안에 보듬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한편 온 세계를 통틀어 전반적인 문학계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도이칠란트의 도서박람회는 위용을 유지해가고 있다. 또 수많은 문학상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지닌 뷔히너문학상 수상 면면을 보아도, 시장성과는 다른 치밀한 발굴과 격려 그리고 존중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통일 이후 수상자들에는 이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작가들의 이름과 함께 더러는 생소한 이름들이 들어있다. 헝가리 혈통의 극작가 타보리 George Tabori(1914~2007), 스위스 작가인 무슈크 Adolf Muschg(1934~  ), 동독 출신의 힐비히 Wolfgang Hilbig(1941~2007), 남쪽 튀빙엔 출신의 슈타들러 Arnold Stadler(1954~  ), 루마니아 계로 다다이즘의 음향시 영향을 간직한 파스티오어 Oskar Pastior(1927~2006) 등이 그들이다. 최근 수상자 모제바흐 Martin Mosebach(1951~  )는 『무형식의 이단. 로마 리투르기와 그 적 Haeresie der Formlosigkeit. Die roemische Liturgie und ihr Feind』(2002)에서 가톨릭 신앙의 전사처럼 옛 미사전통의 부활을 외치며 수상했다. 2008년의 오스트리아인 빙클러 Josef Winkler(1953~ )는 죽음과 동성애를 주요 테마로 쓰며, 올해의 수상자 카파허 Walter Kappacher(1938~  ) 역시 오스트리아인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낙관론자는 종종 비관론자이다 Hellseher sind oft Schwarzseher』2007) 등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기층 근무자들의 일상을 써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

통일이 가져온 지각변동의 일렁임을 살던 젊은 문학도 장년기를 맞은 지금, 여러 의미에서 (도이치)문학의 현재는 한 마디로 무질서한 복수성 또는 무한대의 다양성 속에 있다. 최소한의 공통점이라면 문명비판적인 기본자세, 한때는 그렇게도 익숙했었던 진보의 믿음에 대한 거부, 단순한 의미구성에 대한 회의 등이다. 다양성은 획일성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고유한 입장과 방향을 선호하는 가운데, 철저한 미학적 구상, 글쓰기의 실천 방식, 다양한 지역들과 사회적 기능들, 다양한 작가 세대들과 그 정치적 입지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은 유의미하지 않겠는가.

※ 졸저: 『도이칠란트 •  도이치문학』, 전남대학교출판부 (2008), 846~966쪽 발췌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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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중에 「소유물 Das Eigentum」로 개칭되었다.

2) 뷔히너 Georg Büchner의 『헤센 전령』(1834) 중 “오두막에 평화를! 왕궁에 전쟁을!”이란 글의 패러디이다.

3) ‘Wende’는 특히 도이칠란트 통일과 관련해서는 1989년 5월 도이칠란트민주공화국의 부정선거로 인한 동요에서부터 시작되어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변혁기를 총칭하는 넓은 의미의 통일기라고 쓴다.

4) 1950년에 발족한 국가안전부[Stasi]. 자체적으로는 “회사”라 불렀고, 국내외 첩보국과 특정범죄수사국을 겸했다.

5) 영화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2006) 참조.

6) 뵐의 1972년 노벨상수상은 전범국가 도이칠란트에 대한 국제적인 문화적 면죄부라 평가되었다.

7) 이 노벨상 지명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주의자’ 그라스와 도이칠란트의 ‘민족주의자’ 발저가 경합했다는 후문도 있다. Cicero가 선정한 500대 지성인 명단은 교황 베네딕트 16세 - 발저 - 그라스 순이다.

8) 1986년 놀테 Ernst Nolte(1923~  ) 교수는 「사라지지 않을 과거」라는 짧은 글에서 나치스범죄는 볼셰비키 혁명의 “아시아적 야만”에 대한 반응에 불과했다고 주장해서 역사가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9) ‘죄없이 죄의식을 느끼는’ 한 젊은 도이칠란트인의 보고서는 도이칠란트 내에서 50만부, 미국에서는 100만부가 팔렸다. 그라스의 『양철북』이래 처음으로 대영제국 한 해의 베스트셀러목록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뉴욕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슐링크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된 최초의 도이칠란트 작가가 되었다.

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04. 11. 4. 21:41

, 상상력의 힘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2004. 11.4.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왜 어른들은 자라는 청소년이 이야기에 빠지는 것을 저어했을까?

아침형 인간이 떠오르는 건전한 세계 속에서

   - 밤새 책을 쓰거나 읽는 비생산적인 인간의 무용성

   - 순수문화 영역의 자생력 상실


궁핍의 시대의 시인들

“어찌하여 시인은 궁핍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 wozu Dichter in dürftiger Zeit? - 횔덜린의 「빵과 포도주」7연

  [직역] 궁핍의 시대에 시인은 무슨 목적/필요가 있는가?

 

화평이 깨어지고 정신이 퇴락하는 시대를 궁핍한 시대라 했고, 그때 시인은 “영웅들이 강심장으로

득세하는 이 세상에서 시인은 차라리 잠을 자고 싶다는, 어떤 행동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인의 곤혹스러운 입장, 다만 성스러운 밤을 떠돌았던 주신 디오니소스의 성스러운 사제들일 것”

이라고 정의. 횔덜린은 사회 변화와 경제 발전에 따른 전통 가치의 와해를 퇴행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회의 도덕적 가치의 재건이 시급하다고 보았다.[복고적]

횔덜린이 추구한 근원적 의지는 생과 자연의 합일이며 영혼의 순수함을 구하는 데 있고, 기독교의

유일신과 그리스의 다신론을 총괄하는 신의 세계이다. 


“이 끝없이 풍요로울 것 같은 세상에서 시인은 얼마나 더 궁핍해야 하는가?”

삶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바로 궁핍.

인간에게서 조화의 감정은 지속이 아니다. 부단히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한다!

1904년 - 100년 전에 비해 우리는 분명 잘 살고 있다.

가히 전무후무한 풍요의 시대, 빈곤으로부터 상대적인 해방, 진정으로 잘 살고 있는가?

얼핏 보아서 개인과 사회의 욕망은 오래 전에 비인문적 방향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것 같다.

무한의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로서의 인간은 한계 앞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하고

-- 범세계적으로 인문주의 정신의 부활을 논하는 것. 인간의 자기치유 능력?


왜 쓰는가?

조정래 - 자본주의의 자기 최면 속, 인생은 무엇인가? 문학적으로 가치있는 삶을 쓴다.

          문학성: 감동, 영혼의 떨림. 민족통일에 문학이 기여할 수 있다.

서정인 -  세상은 혼돈 … 캄캄한 미로 벗어나기 위해 쓴다.

“나는 지금도 욕심이 목에까지 꽉 차서 동서남북 천지현황을 모른다. 이 세상은 나에게 혼돈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결코 그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거기에 분명히 있을 원칙도 질서도

정의도 볼 수 없다. 한 사건과 딴 사건 사이의 관계가 내게는 안 보인다. 틀림없이 별들의

운행처럼 필연일 많은 일들이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이다.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과

같다.”


카프카: 갑충으로 변한 현대인의 자화상.

「단식 광대」(1924): 단식하는 광대에서 예술의 정신성, 비생산성, 인간의 무능력.


괴테 『파우스트』:

인간으로서 모든 한계를 지닌 자,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절대적 진리”를 찾아...

“파우스트적 충동” : 다양한 인생을 편력, 체험하면서 자기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 대하려는

 충동. 영원의 여성에 의해 이상의 궁극으로 향상하려는 욕망.
 집필원칙: “모순들을 통합하는 대신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겠다.”


독서의 나라 동독

- 괴테에게로 전진 Vorwärts zu Goethe!(J. Becher)

-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에게 진리에 충실하고, 현실의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표현을

  그 혁명적 발전 속에서 하도록 요구, 노동자들의 이념적인 변형을 위한 기여와 이들을

  사회주의의 궤도 속에서 교육해야 하는 과업을 함께.

- 문화연맹 / 국민 Nation 개념, 사회주의적 독일 국민문화 Nationalkultur

- 형식주의 반대운동: Inhalt, Idee, Gedanke 중시

                     데카당스, 세계시민주의, 자연주의, 모더니즘, 형식주의 거부

- SED 인민재판: 모더니즘, 회의주의,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자유주의, 외설 추방


① 패러다임의 변화

- 테마도 아닌 테마 Un-Thema 서방 도주, 자살기도 : Ch. Wolf

- 의미내용, 서술방식에서 무정부주의 요구: F. R. Fries

- 예술의 자율성 요구: G. Kunert

- 시의 실험적 성격을 고집하면서, 신경제체제의 문화정책에서 요구했던 직접적인 사회적

   유용성에 거부하는 자세: V. Braun


*고전주의, 특히 괴테의 상을 반대, 특히 낭만주의자들에게로 방향 선회 →패러다임의 변화

- 신화수용 변화: 아폴론, 아프로디테, 프로메테우스, 헤라클레스

                → 마르시아스와 오르페우스, 다이달로스, 이카루스, 카산드라, 니오베...

- 다른 해석:

『필록테투스』 H. Müller (58년에서 64년 사이에 집필, 77년에야 동독에서 상연됨)

오디세우스를 영웅도 명장도 아닌, 거짓 술수에 능한 마키아벨리 같은 현실정치가로서 그려냄

으로써, 스탈린주의에서 정점을 이룬 공산주의의 실제 역사를 전술과 테러의 역사로, 휴머니즘의

몰락에 대한 암호로

『카산드라 Kassandra』Ch. Wolf (1983)

그리스 문명의 남성적, 전투적, 합목적적 성격 고발.

“카산드라의 운명은 그 후 삼천년간 여성들에게 일어날 것을 미리 마련하고 있다. 즉 여인은

 대상으로 되고 만다는 것... 여성들의 내면적 역사는 자율성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② 상상력/환상을 권좌로!

70년대 문학의 구호: “상상력을 권좌로! Phantasie an die Macht!”

     남성지배, 폭력, 전쟁, 오로지 기술적 합리성에서 나온 공포의 연합에 대항하여,

     생생한 상상력과 비유적 사고의 새로운 결실들이 등장 한 것.


“삶의 무한정 뒤얽힌 평면”(Musil)인 사회의 실제적 조직관계 속으로 들어온 문학 -

유일하게 유용하고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이라고 주장하는 도구적 이성의 독재에 대한 저항.

일차적인, 이미 규정된 현실 → 상상물, 환상들, 허구들로 구성된 2차적인 다른 현실로 설정

(Adorno)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Bloch): 다른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욕망은 가없다.


가능성감각

“가능성감각이란 마찬가지로 좋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가능성감각, 존재하는 것을 존재

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는 것.”  “정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 어떤 결론

에도 도달하지 않는, 샘솟아나고 꽃피어나는 그 무엇으로서 파악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간다.”(Musil)


전면만을 그린 그림에서 나무 전체를, 아예 푸르름으로만 그려진 화폭에서 숲 전체를,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체들을, 무생물이라고 생각하는 바위와 돌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게

하는 것 - 상상력

기록된 숲 - 비문학

 

※ 독일의 (철저)자연주의는 “하나의 막간극 (H. Bahr)

“최초의 현대 modern” 또는 “문학 혁명”

종족, 환경, 계기가 예술작품을 결정한다.(Taine)

3E: 타고난 천성이란 상속된 것, 교육이란 학습된 것, 생활이란 체험된 것(Scherer)

인간 역시 물질적, 육체적인 현상이므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은 생리적으로 이해

      →“신경과민의 낭만주의, 신경의 신비주의에 의해서 자연주의 극복"(Bahr, 1891)

          비일상적인 것, 비밀스러운, 매직, 경이로운 것 등장. 

 

문학이란 실증될 수 없었던 것, 픽션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듯이 구상하는 것. 허구 또는

가구(架構). 픽션은 흔히 산문으로 된 소설·이야기 등. 작가는 대상을 보고 분석하는데, 원칙적

으로는 그 중에서 우연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


한편 문학의 개연성이나 논리성을 강조하는 견해. 철학과 문화 즉 과학과 문학을 구별하여 시의

독자성을 제시했을 때에도, 문학은 진실성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가는 사실을 진실로서 기술

하지만) 시인은 진실처럼 보이게 모방한다. 소설이 사회의 거울이요 시대의 그림이라 하여 대상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이론: 현실과 시대의 반영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 소설이 현실의 복사이거나

시대의 기록일 수는 없다.

 

독자 여러분! 소설이란 큰 길을 가면서 주위의 풍경을 비치는 거울이라 볼 수 없을까. 여러분은

거울 속에서 푸른 하늘이라든가 혹은 진흙탕 등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런 거울을 들고

니는 사람들은 여러분으로부터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거울은 진흙탕을 비친다.

그래서 여러분은 거울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라리 진흙탕이 된 한길을 비난해야,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진흙탕 그래도 내버려둔 도로 감독을 비난해야 마땅하다.  --  스땅달


소설은 진흙탕이라는 사실(fact) 그 자체가 아닌, 인간성의 진실(truth)을 그리는 것이 목적.

리얼리티(실재성)는 실은 논리성이고 논리성으로 하여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작품은 설득

력이 있고, 만들어진 가공의 세계이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작품, 상상의 세계

실재성은 작품의 존재가치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것의 작가가 창조해낸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상상의 세계일뿐이다. 상상의 세계, 즉 작가에 의해 해석된 세계에는 그 밑바닥에 욕망(꿈)

이 자리한다. 현실 원칙에 억압받은 내면의 욕망은 창작할 때 작용을 한다. 외부의 현실세계와

내부의 욕망과의 갈등의 폭에 따라서 순응적 혹은 혁명적 세계가 창조된다.

 

소설 속에는 세 개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 하나는 소설가의 욕망이다. 소설가의 욕망은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욕망이다. 자기 욕망의 소리에 따라 세계를 자기 식으로 변모시키려고 소설가는

애를 쓴다. 두 번째의 욕망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욕망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 역시 소설가의

욕망에 따라, 혹은 그 욕망에 반대하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계를

변형하려 한다. 주인공, 아니 인물들의 욕망은 서로 부딪쳐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의 욕망은 소설을 읽는 독자의 욕망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슨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나아가 소설가의 욕망까지를 느낀다.

독자의 무의식적인 욕망은 그 욕망들과 부딪쳐,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부인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부인하기도 하고,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에 빠져 그들을 모방하려 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모방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읽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 자기가 세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려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그 괴로움은 나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왜 즐거워하는가, 그 즐거움에 나도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들을

따지는 것이 독자가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이다.

그 질문은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이 세계의 현실 원칙은 쾌락 원칙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같다. 그 질문을 통해, 여기 내 욕망이 만든 세계가 있다는 소설가의

존재론(存在論)이,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하는 읽는 사람의 윤리학과 겹쳐진다.

소설은 소설가의 욕망의 존재론이 읽는 사람의 욕망의 윤리학과 만나는 자리이다.

모든 예술 중에서, 소설은 가장 재미있게, 내가 사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반성케

한다. 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은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 김현 『분석과 해석.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중에서

                           김현문학전집 제7권, 문학과 지성사, 1993년.

 

 상상력

여기에서 이 가공의 세계, 다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주는 것”.

상상력은 Imagenation 그리스어 Fantasia와 관련. 공상 Fancy에서 유래, 공상이 곧 상상력은

아니다. 예술적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 힘이다.(Coleridge) 일상적인 인식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차원으로 승화된 세계를 창조해 내는 힘. 예술적

독립은 콜리지 등 낭만주의 시인들의 중요한 주장. 이 독립된 세계, 제 2의 세계는 그러니까

상상력이 창조한 세계.


상상력: “의식의 개념과 지각을 매개하는 작용”[사전적]

의식이 대상을 개념적으로 취하는 작용/ 지각으로 받아들이는 작용 사이 매개 작용(Sartre)

‘비실재물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가까이 끌어당기는 능력 * 가능성감각


칸트: ‘아름다움’,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다양한 표상들을 만들어내도록

상상력을 촉발함으로써 주관으로 하여금 연상법칙들에서 풀려난 자유를 느끼게 한다. 상상력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표상들, 즉 미적 이념(asthetische Idee)은 특정 개념으로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함을 지니게 되고, 주관은 그러한 표상들을 통해 “언표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미전개된”

방식으로지만 사유하면서 인식능력의 활기를 얻는다.[판단력비판]


사르트르:- 상상력의 본질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고 함으로써 현실에                           결여되어 있는 부분을 의식에서 보충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선험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확장?

“아시아의 별 보아”의 인터뷰:

여가 시간에 “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냉정과 열정 사이』, 『향수』

학교라는 울타리 바깥에도 공부할 것이 정말 많았다고,

소설책과 영화는 학교 이외에서 배우는 것....

학교는 상상력을 죽이는 곳이라고 하는 역설이 가능?


마녀의 이야기

인류가 가진 신화와 모든 문학작품을 통틀어서 최고의 악녀로 각인된 메데이아 이야기 -

Euripides: Medea

Obid: Medea (분실)

Seneca: Medea

Pierre Corneille: Medée  (1634~5)

Franz Grillparzer: Medea (1821)

Hans Henny Jahnn: Medea (1926, 1959)

Jean Anouilh: Médée (1821)

Christa Wolf: Medea: Stimmen (1996)

Heiner Müller: Verkommenes Ufer. Medeamaterial. Landschaft mit Argonauten


메데이아 신화:

가을하늘에 반짝이는 별자리, 양자리가 생긴 신화에서부터 시작. 황금 양피를 가진 숫양은

테살리아의 왕자 프릭소스를 흑해변의 코르키스까지 도피시켰고, 프릭소스는 제우스 신전에

양을 바쳤고, 제우스는 양을 기리고자 양자리를 만들었고, 황금양피는 코르키스의 왕에게

선물로. 왕은 황금양피를 신성한 숲 속에서 잠을 모르는 용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을 만큼의

보물이었는데....

테살리아의 이웃 이올코스의 왕 펠리아스는 적통의 이아손이 왕위의 반환을 요구하게 되자,

황금 양피를 찾아오라는 영광스러운 모험을 권유했고, 이 제안에 따라 유명한 아르고호의

용사들이 신화에 등장. 50여명의 대선단의 무용담은 간담을 서늘하게. 코르키스에 당도하여

황금 양피의 반환을 요구하는 이아손에게는 다시 엄청난 시험이. 그러나 마력을 지닌 공주

메데이아 - 우리의 낙랑공주처럼 - 의 도움으로 이아손은 황금양피를 찾아 고향으로.

이 과정에서 메데아의 동생살해라는 악명이 시작된다.

이올코스에서도 비극: 원정 동안 일가족이 모두 죽은 것을 알게 된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

으로 왕에게 복수. 펠리아스가 죽은 뒤 이아손은 아버지의 왕국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펠리아스의 아들 아카스토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코린토스로 망명의 길: 이아손과 크레온 왕의 딸 글라우케와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메데이아의 유명한 복수가 시작된다. 그 결혼을 저지시키고자 크레온과

글라우케 모녀를 불태워 죽이고, 이아손에 대한 복수로(?) 둘 사이 태어난 자식들까지 죽인 후,

날개가 달린 용(뱀)이 끄는 수레를 타고 아테네로 도망쳤다는.


에우리피데스: 흔히 민주적 시민 사회라고 알려진 폴리스에서 행해진 사회적 차별, 즉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구분은 물론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서도 존재했던 차별을 드러내

준다. 차별이 원한이 되어 복수의 회신이 된다.(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

세네카: 스토아 철학자로서 세네카가 가졌던 여성 일반에 대한 인식?

당시 로마 사회의 분위기가 여권 옹호의 풍토와는 거리가 있었는지?

소아시아 출신의 이방인으로 그리스 반도의 이올코스에서 군주 살해까지 저지르고 피신한

정치적 곤혹성, 이방인과의 결혼의 합법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자신의 딸을 이아손과 결혼시킴으로써 그리스인 이아손의 목숨을

보전하는 한편, 소아시아 출신의 이방인 메데이아를 추방한다.

꼬르네이유: 1630년대의 파리 무대에서는 잔혹한 장면이 다수 등장, 꼬르네이유는 세네카

류의 잔혹 비극(tragédie de la cruauté) 시도. 여성 옹호적인 메시지가 없고, 이후 발표되는

꼬르네이유 비극의 일반적 경향이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으로, 감정에 대하여 이성을

중시하는 남성적, 극기주의를 강조하는 영웅주의를 옹호.


아버지를 배신, 사랑을 택했던 메데이아는 그 사랑의 배신 때문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제

아들들을 살해하여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 이 이야기는 많은 허구에 의해서 덮여 있다

하더라도 그 근저에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에게 믿게 하는 이유를 가짐.

신화들의 매력은 “전혀 다른 환경 하에서 같은 것들이 되풀이된다는 것. 그럼으로써 역시

같은 것의 되풀이가 아주 다른 것으로 된다는 점.” (H. Müller)

신화의 가공작업에서는 배제되고 청산되지 못한, 단지 미뤄지기만 한 상처의 회귀가 표명

된다.(Hans Blumenberg)

       지상의 행복은 무엇이련가 - 그것은 그림자!

       지상의 명성은 무엇이련가 - 그것은 꿈!

       그림자를 꿈꾸었던 너 가엾은 자여!

       꿈은 사라졌노라. 밤만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Was ist der Erde Glück? - Schatten!

Was ist der Erde Ruhm? - Ein Traum!

Du Armer! der von Schatten du geträumt!

Der Traum ist aus, allein die Nacht noch nicht. 

                                         -- Grillparzer


비더마이어의 염세주의적 사상, 바로크 시대의 현세거부를 연상하게.

그러나 부단히 꿈을 쫒는 인간족속의 운명은 오늘 날에 그대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하인리히 뵐은 현대사회를 “소비가 자유를 주노라”는 현판을 내건 거대한 수용소에 비유.

경쟁적으로 성취업적을 만들어 내야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 창살 없는 감옥?

“인간은, 이 말의 완전한 의미로서의 인간일 때에만 놀 수 있으며, 놀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Schiller)

그리고 통독 이후에도 계속되는 악녀 메데이아 소재의 작품들 - 크리스타 볼프는 아예

메데이아의 혈육살애, 군주살해, 이어지는 자식살해 등을 ‘뼈를 깍는 아픔의’ 정치적 사회적

희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시대에 따라 작가 자신의 시대적 문제점에 따라 같은 신화를 재해석해내는 것 - 여기에,

작가의 욕망은 사회적 산물이며, 그렇다면 상상력의 무궁한 힘이라는 것도 욕망의 사회적

필요요, 토로하고자하는 그 내면에 의존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이른다.

무엇이 결핍되었는가?


결핍의 토로

그래서 문학을 보는 표현론적 관점의 출발은, 문학이란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창조적으로

표현한다는 입장. 한편의 시는 시인의 내면세계의 구현. 이것은 문학을, 한편의 시를

거울이라고 보는 모방론과 대비되는 것으로, 시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등불이 된다.

- 시인이란 신령한 힘에 접신된 상태에서 말하는, 시를 토해내는 것이다. (플라톤)

- 우주의 근본적 창조 정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이 그 자체를 나타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예술이다. (Schelling)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가? 그의 내면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창조적 개성, 독창성 등의 자유분방한 낭만주의와 더불어 다른 한편 민족의식, 사회의식이

성장했다. 문학을 한 시대의 정신과 한 민족의 성격을 표현하는 가장 뚜렷하고도 특출한

산물로 생각하여 문학의 사회 표현성이 강조됨. 개인이건 민족이건, 결핍에 반응하는 태도,

그것이 정신의 반영이라는 부분. 최소한 문제적 개인의 자기실현. 인간의 내면이 상상력으로

확장되어 반영된 것. 상상력의 진정한 힘은 인간의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

내면이 깊을수록 상상력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될 것.

-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자기 정립”(Heidegger)

 

한국문학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何)오」(1917) :

“특정한 형식 하에 인(人)의 사상과 감정을 발표한 자”

“문학은 정(情)의 기초 상에 입(立)하였나니...”


리터래처 - 하면 학문과 문장력을 의미했듯이, 글월文 - 하면 한문을 연상했던 전통.

영어의 novel이나 불어의 roman과 같은, 근대문학의 한 양식으로서의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나 당대의 이야기나 작자가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라야 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드시 작자가 전제되며, 작자가 없는 이야기는 소설이 될 수 없다.


내면의 교감

특히 우리의 근대문학이란 내면을 근거로 해서 예술적 가치를 주장. 엄정한 시학의 규칙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진자운동과도 같은 시간들을 통해서 형성된 서양문학에 비해,

20세기 초 모든 사조를 한꺼번에 경험한 우리의 경우 문학은 정적이고 내적인 인간을 발견

함으로써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문학에서 개인: 고유한 사연과 정신을 간직한 존재,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드러내는 존재

문학에서라면 누군가와 완전한 교감을? 내면을 노출할 수 있지 않을까?


내면의 결핍과 외향적인 현실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상상물, 환상들, 허구들로

구성된 2차적인 다른 현실에서는 보도와 평가를 위한 글쓰기에서처럼 이성의 논리가 중요

하지 않다. 이해와 공감을 꾀하는 문학의 글쓰기는 내면의 토로에서 비롯된다. 자신조차도

공감하기 어려운 내면을 있을 수 있는 개연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우연과 혼돈을 필연성으로 대체해서 제공하므로, 작품세계는 진정한 현실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외면세계의 고통은 내면세계를 더욱 깊어지게 할 것이다. 이 내면을 끌어내는 것,

그것은 상상력의 힘으로서만 가능하다. 문학의 현상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인생 또한 그리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확산된 저 너머 유토피아를 꿈꿀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를 읽는가?

언론의 자유, 결사에 관한 법, 선거조사의 문제 대신 “먹고 사는 빵문제”를 거론했던 뷔히너를,

감히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 근로․채식·금주·금연을 표방하고

간소한 생활의 영위와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를 지향했던 톨스토이를,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집단에 참가하여 러시아정교회 비판에 동참했다가 총살형을 언도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를,

노골적인 묘사 때문에 풍속문란죄로 기소되었던 플로베르를,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재심파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에밀 졸라를 - 하필 그들을 우리는 읽는다.

예술가의, 글쓰는 이의 열악한 생존조건이 문학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문학의 진정한 위협은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꿈을 꾸지 않을 때, 우리의 상상력이 더 이상 우리의 깊은 내면의 샘을

퍼 올리지 못할 때, 그때가 파국이다. 문학의 파국 - 우리를 꿈꾸게 하는, 다른 상황을 상상하는

문학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만의 현실은 우리를 질식하게 하거나 기계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림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문학을 놓지 마시오. 읽건 쓰건, 그 차이는 그림자를

앞에 두는가 뒤에 두는가 그 차이일 뿐이다. 


무용지용

우리가 문학을 여전히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 중의 하나로 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망이다.

이때 행여 우리는 문학의 효용성 논란에 풀이 죽어서는 안된다. 고띠에 등의 예술지상주의를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쓸데 있고 없는 것이 절대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을

성현의 말들을 빌어서 하고 싶을 뿐이다. 노자 제 11장의 무용(無用)은 말해준다. “있는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고. 장자는 혜자에게, “땅이라는 것은 턱없이

넓고 크지만 사람이 걸을 때 소용되는 곳이란 기껏해야 발이 닿는 지면뿐이요,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재어 가지고 그 둘레를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 버린다면 사람들에게 그래도

쓸모가 있겠소?”라고 했다.


디디고 선 땅을 디디고 설 수 있기 위해 무수한 땅이 필요하듯이, 우리는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 없이는 현실의 삶을 ‘아마도’ 살아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밥 먹여 주지 않으므로 쓸모없는 이야기여!

세상에 쓸모있는 것들로 하여금 조금만 부끄럽게 하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