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좌'에 해당되는 글 130건

  1. 2024.04.08 2023 용아 박용철 문학상 수상 소감
  2. 2024.01.15 침묵 5 - 새 1
  3. 2024.01.15 침묵 4 - 투틸로
  4. 2024.01.15 침묵 3 - 5월
  5. 2024.01.15 말의 시작 글의 시작
  6. 2024.01.15 생존반응
  7. 2024.01.15 이별 3
  8. 2023.06.18 침묵 2 - 4월
  9. 2023.01.30 글은 독백이다
  10. 2023.01.07 빙하가 녹았다
사사로이2024. 4. 8. 23:09

 

 

오늘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의 일환으로 용아문학상을 수상하게됨은 저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에 앞서 어느 지자체에서 이토록 문화융성에 중점을 두는지, 광주광역시의 관심에 감탄하게 됩니다.  물질문명이 전대미문의 최고조에 달한 21세기 지금, 인류의 미래는 이제 정신문화에 달렸음을 광주광역시는 알고있는 것입니다. 최근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했던 세계한글작가대회를 광주에서 유치하도록 적극 뒷받침해준 사실도 그것을 입증합니다.

 

한편 우리가 순수시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는 용아 박용철 선생은 비단 시인만이 아니셨습니다. 겨우 서른다섯 해도 살지 못하고 떠난 그의 유고시집만 보더라도 창작시는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유명한‘시적 변용’에 관한 평설 그리고는 괴테와 릴케의 시들, 셰익스피어와 입센 등 해외문학의 번역이었지요. 용아의 정신세계는 이미 세계문학에 깊이 경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학에는 시공간의 경계가 없음이요, 문학이란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보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작용하는 오묘한 무엇임이 확인되는 지점입니다.

이제와, 만일 그가 폐병의 저주를 극복 했더라면, 만일 서른다섯 해를 더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써 인사말씀을 갈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11.22. 서용좌

'사사로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참 무모한 사람 -  (0) 2020.12.04
제목은커녕  (0) 2020.06.20
또 한 번의 새해, 그리고 생일  (0) 2020.03.20
결혼 50주년 - 두 손  (0) 2020.03.20
88생일 -  (0) 2019.09.11
Posted by 서용좌
소설2024. 1. 15. 19:26

 

 

    새가 있었다. 아마도 그가 아는 새다. 거기 산책로는 천변이고, 얕은 물에서 살아가는 큰 새들은 서너 마리에 불과했다. 이름이 훌륭한 백로도 처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천변의 버드나무들은 운치가 있었지만, 개량사업 탓에 뽑혀나가고 한 두 그루만 남았다. 백로가 올라가 앉곤 하던 큰 나무들도 많이 사라졌다. 나무들을 뽑아내고 무엇을 개량했는지. 새들은 이전만 훨씬 못해 보이는, 시멘트로 갈무리된 물에서 살아간다. 안쓰러운 풍경이다.

 

어려서 그가 알게 된 처음의 새는 참새였다.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의 이야기에서다. 책에서만 그렇게 쓰인 것이 아니라 참새들은 정말로 전깃줄에 앉아 있었다. 전깃줄은 참새들의 철봉이거니 생각했다. 난생 딱 한 번 보았던 줄 타는 아저씨에 비하면 전깃줄 위 참새들의 묘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니, 묘기 중의 묘기였다.

장맛비가 많이 내렸던 어느 날, 경식이 엄니는 읍내 길가에서 쓰러졌고 그렇게 경식이는 어머니를 잃었다. 감전사! 전기에 맞아 감전이 되어서 사망했다는 해괴망측한 소식이었다. 참새에 비할 수 없이 큰 몸집의 경식이 엄니는 전깃줄에 올라가기는커녕 전깃줄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수군대는 말들로는 전깃줄 하나가 끊어져 내려 우체국 앞 인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 그럼 전깃줄을 밟았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는 얌전한 아짐이었단다. 남자들 그림자도 밟지 않는 사람이 전깃줄을 밟았다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라고 했다. 그때 픽 웃음이 나서 입을 틀어막았다. 죽어다 깨어날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무슨 영문인지, 하필 우체국 앞 거긴 드물게 흙바닥이 아니고 듬성듬성 패인 시멘트 길이라서 물이 많이 고였단다. 물을 밟았을 뿐인데 전기가 저절로 물을 타고 건너왔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전깃줄을 피하자면 온 하늘을 다 피해야 했다. 땅이 웬수도 아닌데 쿡쿡 차고 부비고 다녀서 신발들은 더 더러워졌고 더 닳았다. 구멍도 났다.

 

 

    감전이란 몸에 전류가 흘러 전기적인 충격을 주는 현상입니다. 감전은 몸체의 두 부분 사이에 전위차가 생길 때 전류가 흐르게 되어 몸체에 전기적 충격이 가해질 때 발생합니다. 전류는 저항이 작은 쪽으로 흐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더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했다.

학교에서 나중에 감전이란 단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는 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는 놀람에 앞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식이 엄니가 더 쉬운 길이었다니. 사람이 물건보다 더 쉽다니.

선생님, 전기라면 자기랑 짝꿍인 전깃줄 쪽으로 가야지 왜 사람 쪽으로 흘러요? 그럼 그 쪼만한 참새들은요? 사람이 참새보다도 못하냐고요? 그는 서투른 질문을 해댔다.

아, 그건, 참새는 병렬을 알아서예요. 두 다리로 전선 위에 올라 서기 때문에, 두 다리 사이의 전깃줄 부분과 새의 몸통이 서로 병렬로 연결된답니다.

…….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참새와 전선의 전위차는 ‘0’이라서 감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잖아요. 여러분,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봐요. 그대로 있지요. 물 높이가 같으니까요. 그런데 기울이면 금방 낮은 쪽으로 흐르잖아요. 물로 실험해 볼 수 있어요. 전기로는 절대 실험 금지입니다.

 

무서운 전기와 별 무서울 것 없는 물을 함께 말하다니. 선생님은 죄가 없었다. 경식이 엄니가 장맛비 오는 날 감전된 것을 모르시니까. 다만 물과 전기라는 이 두 가지 상극이 같은 성질이라는 것에서 두 배로 세 배로 화가 날 뿐이었다. 어쨌거나 여전히 어린 마음으로 그 둘을 따로 보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흔히 보게 되는 것은 물이었다. 물은 눈에 보였으니까. 숟가락 위의 물은 손을 떨기만 해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곧 수평이 되었다. 수평이 보기에 좋았다.

아들, 밥 묵다가 뭣 허고 있어어! 어서 묵어, 투틸로, 다 식는다아! 엄니는 딴 생각에 빠진 아들도 이쁘기만 했나 보다. 엄니는 아들의 이름이 승욱이라는 것을 평생 잊고 사신다.

 

옳지, 그것이구나. 수평을 이루고 나면 흐르지 않는 것, 그것은 물과 전기만이 아니었다.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훨씬 나이를 먹고 나서였다. 사랑이라는 것도 똑같은 이치임을.

ㄱ이 ㄴ을 마음에 두고 애가 단다. ㄴ도 조금 그런가. 알 길이 없다. 이런 전위차에는 무한정으로 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전류다. 헌신적인 짝사랑이 그렇다. 그 반대도 똑같다. ㄴ이 ㄱ을 마음에 두고 애가 단다. ㄱ도 조금 그런가. 알 길이 없다. 이런 전위차에는 무한정으로 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전류다. 헌신적인 짝사랑이 그렇다. 사랑은 그때에 한한다. 흐를 때가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낸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아직 어른이 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그것은 어설픈 희비극이 된다. 앞에 가는 종종걸음을 내가 스쳐 지나가면 종종걸음은 나를 눈여겨보리라. 눈길을 느끼면 돌아서서 마주 보아야지. 놀란 눈일까, 따뜻한 눈일까. 아니, 눈을 뜨고 나를 보기나 할까. 웬걸, 가슴이 뛰어서 뒤돌아보기는커녕 마구 달리다시피 교문을 들어선다. 나를 보았을까. 내가 분명 옆을 지나서 앞섰으니 내 모습을 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아니다, 종종걸음이 나를 본 것이 아니라, 내 모습이 그저 보이기만 했을 수도 있다. 아차, 지나치는 순간에 팔을 잘못 뻗은 시늉으로 가방이라도 건드려 볼 걸.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눈으로는 눈을 들여다볼 수도 있었을 것을. 그는 애가 달았다.

종종걸음의 눈은 무슨 색일까. 설마 푸른 눈일까. 그 어린 시절에 푸른 눈에 대한 오묘한 동경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쨌거나 그는 주변에서 푸른 눈을 본 적은 없었다. 서양사람이 아닌 바에야 누구의 눈도 푸를 수는 없겠지만, 종종걸음의 눈은 신선하고 푸른 기운을 내뿜을 거다. 그것은 상상에서 확신이 되어갔다. 종종걸음의 눈빛은 푸르고 눈동자는 새까만 포도알 같을 것이다. 까만 눈동자란 것도 이미지였을 뿐일까. 실제로 또래들의 눈동자는 다 같이 누런 흙빛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놀라운 상상이 피어올랐다. 종종걸음은 어쩜 내 앞에서만 종종걸음이 되는 거야. 하필 내가 교문 께에 이르는 바로 그 시간에. 종종걸음은 누군가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더욱 종종걸음이 되는 것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저만치 종종걸음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 눈에 넣고 따라가다 보면, 왼쪽 다리가 살짝 짧은가 싶기도 했다. 짧았다. 균형이 100퍼센트가 아니었다. 똑똑똑똑 걷는 것이 아니라, 또독또독 걷는 느낌이었다. 아무도 몰라, 그만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만 주는 리듬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배운 노래들 중에서 어떤 리듬인가를 찾아 맞추어보려고도 했다. 뭔가 발견한 것 같은 날에는 꾸물대다가 옆을 스쳐 지나는 일은 잊곤 했다. 종종걸음이 교문에 들어가 버리면 그때는 가방을 흔들어대면서 완전 갈지자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교실에서는 ‘내 사랑 종종이’를 볼 수 없었다.

 

칠판에 선생님이 써놓은 글자들을 배경으로 떠있는 그림, 그게 예쁜 절름발이다. 절름발이도 편차가 있다. 사알짝 두 발을 다르게 딛고 걸어가던 아이, 종종이의 걸음은 2/4 박자 강약강약. 그것이 강약중강약으로 살짝 변형되기도 했다. 수평으로 잘랐을 단발머리가 살짝살짝 수평을 깼다. 물론 다시 수평이 되었다. 그렇게 방학이 되었고, 아쉽게도 그 다음 방학은 졸업이었다. 면단위 중학교, 그 이상 인문고는 없었다. 성적이 좋아도 형편까지 좋아야 읍내로 또는 도시로 진학할 수 있었다. 졸업과 함께 종종이도 속사랑 같은 것도 사라졌다. 밋밋한 고등학교는 오직 대입준비로 지나갔다.

 

 

    88년도 대입학력고사, 12월 그날은 날씨까지 얼어붙어 기껏 13~14도에 종일 두 손을 떨었다. 답안을 작성하는 오른손 말고 왼손도 함께 떨었고, 마음은 더욱 떨었다. 논술은 없어졌지만 선지원 후시험이라니, 밤중에 고르지 않은 숲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예상경쟁률은 3.5대 1이라고 더 높아졌다 했고, 정원은 18만 6,340명이라 했지만, 전년보다 1만 명 이상이 줄었다 했다. 응시생 26.9%가 입학 가능하다고 했으니, 열 중에 셋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무서운 전망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았다. 날개 없이도 날아갈 것 같았다. 창공을 가르는 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거기에 전깃줄은 없었다.

 

노승욱에서 이번에는 새내기라고 - 새는 아니고 - 독특한 공동이름을 부여받은 1학년 생활은 일단은 희망과 부채감의 뒤범벅이었다. 경식이들은 고향에 남았고 고향을 떠나온 몇 안 되는 우리들은 처참한 날들에 내맡겨졌다. 어머니의 밥이 없는 나날들, 공부가 뭔지, 이 삭막함으로 무엇을 얻어낼 지 막막했다.

수강신청을 하면서 시작되는 대학생활에서 우선 교양과목이란 단어가 생경했다. 교양이란 ‘가르쳐서 기름’을 뜻하니까, 전체가 교육이거늘 새삼 교육과 비슷한 단어를 쓰는 것이 이상했다. 자세히 알아봤더니, 기껏 사전적 정의였지만,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교양이라 했다. 아직 사회생활다운 사회생활에 다가가지 못한 대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이란 학문, 지식, 품위, 문화 그런 단어들의 조합인 교양을 심어주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주어진 필수 교양과목들은 ‘국’자 중심이었다. 국민윤리, 국어, 국사……. 역시 나라가 주인공이었다. 선택과목들은 도무지 무슨 과목을 선택하여야 할 지, 서로 다른 열매들을 달고 손짓을 하는 나무들 앞에 선 느낌이었다.

법학개론 – 사시를 꿈도 꾸어보지 않았던 그가 굳이 법학 과목을 선택한 것은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자면 법은 어느 정도 알아야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나중에 습득한 대로 이해하자면 그의 희망은 타자의 희망들, 헛것들이었지만, 물론 당시에는 새로운 것은 늘 대단한 가치로 보였다. 우와, 법학개론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를 혼돈에 빠뜨린 문장들이 오히려 그를 사색의 바다로 안내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 - 교수님이 이 한 문장만큼은 외워야 하리라고 강조했을 때, 법은 막연히 정의라고 생각했던 그는 상식이 무식이었음을 느꼈다. ‘권리 추구자의 권리주장은 그 자신의 인격주장이다.’ 권리가 인격이라니! 이러한 문장들을 알려고, 그래서 대학생이 되려는 것이구나 싶었다. ‘자기 존재의 주장은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최고의 법칙이다.’ 처음으로 그는 ‘나, 나의 인격’이라는 단어를 직시했고, 그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탐구하고자 했다.

마침 함께 선택한 철학개론은 샘 깊은 물이 되었다. 그때 만난 책은 동서양철학이 함께 쓰인 책이었다. 하지만 개론이라는 말의 인상처럼 홀가분한 개론서가 아니라 4차원 혹은 5차원의 방정식 같았다.

서론에 쓰인 예지의 활동이라거나, 정신의 탄력성을 길러 삶의 의미를 깨닫고 바른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문장들, 아, 어려움 그러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인간다움의 조건으로서의 철학 공부, 근원적 진리 탐구, 나아가서 이런 책을 집필할 수 있는 인간, 그를 철학인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 역시 기꺼이 철학인이 되고 싶었다. 사학과 학생이니 역사학, 그 중에서도 역사철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사색의 대양에서 나침판도 없이 허둥대면서 동서남북 방향을 잃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해 여름 온 나라를 집어삼킨 열정의 도가니 올림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빈국 대한민국의 쾌거라느니,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될 거라느니, 그러려무나. 아돈케어! 오직 철학이 그의 날개가 될 터였다. 그는 좌고우면 없이 진정으로 학문에 진력했다. 가끔 최루탄 가스가 강의실까지 뚫고 들어오는 일도 있었지만, 그 그리고 상당수의 학생들은 공부만 했다.

 

 

    그렇게 2학년이 되었다. 공부만 하려는 귀에도 세상의 어수선함은 도를 넘었다. 노동절 즈음 느닷없이 부산이 전쟁터로 바뀌었다.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잡혀가자 반대로 전경 납치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결과는 처참했다. 화마에 휩쓸리거나 불길을 피하려다가, 사고 당일 현장에서 경찰관이 6명이나 사망했다. 중상자는 부지기수였다. 90여명이 잡혀갔다. 신성한 학문의 전당은 어디에도 없었다. 광주에서는 수배 중이던 대학생이 수원지에서 수상쩍은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없는 살벌한 봄이었다. 도서관에 골방에 틀어박힌 젊음은 젊음도 아니렷다 싶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폭탄이 아니라 미사일급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날개 달린 새도 아닌 한 여학생이 비행기를 타고 또 타고 공포의 철조망을 넘어갔다. 누군가가 북한을 가려면 베이징을 통해서 갔을 것을, 그 여학생은 일본 관광 핑계로 나갔더란다. 그리고는 도쿄에서 베를린으로, 거기서 모스크바로 갔다는 것이다. 아, 모스크바! 상상에도 없는 도시! 한국인 여권으로 그런 것도 가능한 것인지. 한국인 생각으로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한지. 그는 정말로 의아했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듣고 또 듣고 보고 또 보고 외운 그들 아닌가. 반공이 곧 민주이거늘, 그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13차라던가,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것이랬다. 7월의 1주일 남짓 177개 국가에서 22,000명이 참가했다는, 이전의 모스크바 대회만큼은 아닐 지나 대성황을 이루어 서울의 88올림픽과 비교될 평양축전임을 자랑했더란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대학가의 진통은 당연히 올림픽 때를 능가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해있던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아직 학생이면서 어떻게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한 달 여 행사를 마치고 나서, 세상에나, 이번에는 날개를 접고 휴전선을 두 발로 걸어서 남으로 넘어왔다. 한반도 군사분계선이 가로막힌 이후 첫 공개적 일이라 했다. 물론 그 순간 바로 안기부에 구속되었고.

 

휴전선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는 도서관에 있었다. 그때 그는 이상한 전기를 느꼈다. 볼펜이 들려 있던 오른손 엄지검지 사이에서 시작되어 순간적으로 온몸을 찌르는 전기였다. 딱딱한 나무 의자와 연결된 엉덩이가 불에 덴 것 같았다. 이건 전위차인가? 어디선가 번개 같은 전류가 흘렀다.

참새 같은 작은 새는 두 다리로 전선 위에 올라 서기 때문에 병렬로 연결된답니다. 그러면 전위차가 ‘0’이라서 감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귓속에서 소용돌이침과 동시에 그는 귀를 싸매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그를 일으켰다. 낯모르는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벤치에 뉘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하늘이 아닌 땅의 모습이 보인다. 듬성듬성한 풀밭에 흑백으로 널브러진 날개, 커다란 새. 180도를 회전해서 다시 하늘이 보인다. 전신주 꼭대기,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다른 한 마리가 유유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더니 주위를 도는가 싶다. 다음 순간, 어쩌면 전깃줄에 내려앉는 순간인가 싶다. 풀썩, 그대로 땅바닥으로 꽂힌다. 멋진 깃털 날개가 파르르 떨더니 이불처럼 몸뚱이를 덮는다. 바람에 여진이 인다. 감전사 – 왜 이 큰 새가 떨어지는가. 작은 참새들도 잘들 알고 피하는 것을.

참새류와 달리 한쪽 날개 길이가 1미터 가량 될 정도로 몸집이 큰 황새는 다른 새에 비해 전깃줄 감전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습…….

언제 적이었더라. 낭랑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는다. 뭐야, 그러니까 큰 새들이 더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경식이 엄니도, 어쩌면 나도……. 그는 의식을 잃는다.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이 황새는 참새와 달리…….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형, 쉿, 조용히! 조용히 있어 봐요! 여기 황새가 어디 있다고!

형? 여자애가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남자 선배들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애들은 다 그쪽 애들이다. 교정 풀밭에서 1:1 교육을 받는다는 애들 말이다. 네가 나를 찍었더냐, 나를 설마? 그는 눈을 감았다. 어디서 봤던 애더라? 그는 무엇인가에 감전된 것인가. 여자애는 손으로 그의 팔을 가만히 누르면서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ㄱ의 손바닥과 ㄴ의 팔은 전류가 통하는 것일까 아닐까. 생각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고, 깜깜한 세상 속에서는 가늘지만 번쩍번쩍하는 전류만 보였다. 소리 없는 마른 번개였다. 감은 눈을 치켜뜰 힘도 없었고, 뜰 수 있었다 해도 뜨고 싶지 않았다. 살살 간질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다시 한 번 전류의 습격이 왔다. 그는 팔을 떨어뜨렸다. 지면과 연결된 철탑이나 전봇대에 닿으면 참새든, 사람이든 감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말이 귀를 때렸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 몇이 몰려들었다. 인문대 벤치 쪽에서 몰려왔을 것이었다. 누군가가 건넨 찬물을 먹여준 그 여자애는 성연이, 과 후배라 했다. 그날 이후 가끔씩 만난 연이는 새내기 주제에 아는 것이 꽤나 많았다. 무슨 애가 이리 유식한가. 기분이 나빴다. 입학하자마자 소위 운동권에 포섭된 걸까. 알고 보니 큰오빠가 독일어 선생님인데, 전교조 소속 해직교사라 했다. 큰오빠에게서 이런 저런 것을 듣는 모양이었다.

전교조? 그런 단어도 모르고 있던 그는 사회 속의 인간이, 더불어 사는 인간이 아님을 느꼈다. 4.19 혁명과 함께 조직되었던 교원노조가 5.16 쿠데타로 바로 해체되어 버렸다가 정신만큼은 살아남아서 20년 30년 세월이 흐른 그해 초 교직원노동조합으로 결성되었다 했다. 봄 학기 시작하자마자 전교조 활성화 움직임이 일었고, 2만 명도 넘는 교사들이 합류했단다. 그런 활동에 따른 탄압의 소용돌이는 불 보듯 뻔했고, 1,500명도 넘는 교사들이 파면되거나 해임되었다고 했다.

교사가 노동자? 노동계급으로서의 교사? 노동자의 시각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역사 선생님이 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혼란스러웠다. 뭔가 참담했다.

 

철조망을 넘나든 새에 관해서는, 정확히는 여학생의 방북 활동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는 찬반 견해들로 정신이 사나웠다. 연이를 통해서 그 가정의 사연을 - 사연이라는 말이 왠지 미안하지만 – 그 사연을 들었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끔찍한 사연들로 점철되는 것일까. 누구라도 고2 때, 6년 터울의 오빠가 죽었다면. 하필 전방 부대에서 죽었다면. 다음 날 가족 면회가 예정되었던 오빠가 죽었다면. 그것도 자살했다고 한다면. 여고생에게 그 충격은 평생 갈 것이었다. 그 방북 여학생은 그들 또래 아님 바로 위 누나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태 전 그들이 고3 때 학교 정문 앞 시위에서 최루탄에 사망한 대학생도 그들의 바로 위 형 또래였다. 연이는 그 사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형은 운동권이면서 공부에도 엄청 열심이었고, 운영하던 만화동아리도 위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끌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또 2학기가 시작되었다. 연이는 그를 느닷없는 독일현대소설이라는 과목으로 이끌었다. 큰오빠가 추천해준 과목이라 했다. 유럽의 현대사회를, 학생운동을 곧바로 알 수 있는 과목이랬다.

나 학생운동 별 관심 없는 줄 알면서.

학생운동 빼놓고 어떻게 유럽의 현대사를 알아? 우리 역사전공 아냐!

우리 과 학생들이 읽을 필독서는 따로 있잖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못 들었어? 유럽의 역사라면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영국사』 그거면 되는 것 아냐. 또 가볍고 폭 넓게 『이야기세계사』 두 권도 있잖아. 고대 오리엔트부터 중세까지, 르네상스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젊은 사학자들이 써서 재미있어. 이건 과 선배로서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공부 좀 제대로 합시다, 성연이 학생!

형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나 해! 독일현대소설 수강하면 틀림없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소설도 공부하게 될 거래.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 모르지? 나도 몰라. 암튼 70년대 중반에 발표 되자마자 곧 영화화 되었고. 소설에 부제가 붙어 있는데,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며 어떠한 결과를 낼 수 있는가’ 라네.

기껏 폭력 이야기구만.

아니 그보다도 더한 살인 이야기. 너무도 평범한 독신 여자가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랑 마음이 맞아 자기 집에 갔어. 이튿날 아침 무시무시한 가택수색을 당한 거야. 은행강도를 은신시켰다는 죄목이었대. 강도란 물론 누명이었고. 그럼에도 순간에 매장당하는 거지. 당연히 신문들의 보도태도가 한 평범한 여자의 명예를 짓밟아버린 것이야. 여자는 가치관의 혼란 끝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기자를 살해하게 된다는.

뭐야, 멀쩡한 기자를? 다만 명예를 실추시킨 왜곡 보도 때문에? 당했으니 원수 갚고…… 그렇고 그런 평범 그 자체구만.

형! 울 큰오빠, 전교조 해직교사 이전에 독문과 졸업생이라니까, 과대도 했고! 독문과 졸업생이 독문과 강의를 추천할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어?

독일현대소설 – 이 과목 첫시간은 다른 놀람의 순간이었다. 언젠가 깨진 강의동 유리창 사이로 스며드는 최루가스에 코를 막고 달리다가 층계참에서 맞닥뜨렸던 여자, 아무에게나 치약을 나누어주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순간 멍했다. 독일현대소설은 다만 소설이 아니라 사회적 배경에 집중되는 강의였다. 연이의 말을 듣기를, 연이오빠 독일어 선생님을 믿기를 잘했다.

 

어쩜 좋아, 10월의 어느 날엔가 연이가 울상이 되었다. 흙빛 얼굴이었다.

형, 세상은 너무도 잔인해. 이번 사고가 하필 y대 그 만화동아리에서 터진 거야. 이oo열사가 그렇게 떠난 뒤에도 계속 동아리는 유지되고 있었다 거든. 어떻게 그런 일이. 하필 거기에서.

무슨 사고? 연이 넌 입만 열면 사고 소식을 물고 오더라.

듣고 보니 끔찍했다. 참혹했다. 비참했다. 예상을 상상을 모든 것을 넘었다. 그 만화동아리에 드나들던, 만화에만 진심이던, 정말 애먼 전문대생이 소위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4년제 대학생이 아니니까, y대생도 k대생도 아니니까 틀림없이 프락치라는 오해로 인해서…….

그 이름은, 그 일은 글로는커녕 말로도 옮길 수 없다. 그런 뉴스는 듣지 않은 것으로, 내 머리에 입력되기 전에 귓가만 스쳤을 때 회수해 갔으면 했다. 세상에는 입술을 달싹거려서도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인간에, 인간 세상에 관해서는 어쩌면 침묵이 답이다.

침묵은 당연한 결과였다. 말은 입술 안에 갇혔고, 글자들은 책 속에서 먼지 조각들이 되어 증발해버렸다. 강의실에서 펼쳐진 책들은 뿌연 공간으로 흐늘거릴 뿐이었다. 교수님들의 강의 목소리며 동기들의 말소리들이 귓바퀴에서 바람처럼 쓸려 나갔다. 소리들을 따라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올라가던 그는 어떤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다. 그는 여기 이곳을 피해서 날고 싶었다. 날개가 없었다. 그는 새가 아니었다.

 

    10월 초, 그러니까 그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바로 일주일 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왔었다. 두 번째 한국방문이었다. 그에게, 어머니에게 교황이 누구인가. 그가 열 살 때였을까, 어머니가 하도나 숨 가쁘게 교황님 교황님을 불러댔다.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로 교황의 이름이 바뀌던 그해, 어머니의 불안한 슬픔과 기쁨의 교차는 당시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머니에게 교황은 하느님 바로 다음이라고 각인된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국인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식이 있던 1984년의 한국 방문은 어머니에게는 천국이 이 땅에 열린 날이었다. 교황이 한국에 와서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이 전라남도 광주시, 그때는 아직 광주시였다. 미사집전을 위해서는 광주공항에서 무등경기장으로 바로 가면 되었을 것을 5.18 민주화운동 눈물의 현장 전라남도 도청을 돌아서 갔다. 그런 결정은 바티칸에서부터 했기 때문에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어머니는 틈만 나면 강조하곤 했다.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1980년 5월 이후 처음이었다고 했다. 사실 어머니는 교황의 광주 방문 전날부터 광주로 나갔고, 차가 끊겼다던가 무슨 핑계로 이모 집에서 주무셨다. 다음날 아침 미사에 늦지 않기 위함인 걸 누군들 몰랐으랴.

또 뭐냐! 투틸로! 교황님이 글쎄 그 먼 데 소록도 나환자촌엘 가시겠다고 작정하셨대. 솔직히 우리들 모두 그 무서운 사람들과는 배라도 같이 탈라고 했더라냐! 선착장도 따로따론데, 그런 데를!

아무튼 어머니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겸한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대회까지 못 가신 것을 너무도 애석해하셨다. 시상에나, 미사도 한국말로 보신다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며 ‘순교자의 땅’이라고 하셨대. 한국말이라고? 어머니가 잘 못 아신 줄 알았다. 실제로 교황님은 10개 국어를 하신다는 걸 듣고는 2개 국어도 잘 하지 못하는 그는 그때 아직 중3이었음에도 몹시 부끄러웠다. 평생 3개 국어라도 하게 될까? 하긴, 그는 뭐 사제가 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지금은 그가 대학생이니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 교황이 한국에 다시 왔으니, 시성식 때만은 못했어도 대단한 뉴스였다.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라나. 65만 명이 몰린 여의도광장 행사에서 남북한 화해를 기원하는 평화메시지를 낭독했더란다. 이번에는 또 어떤 한국인을 몰래 만나서는 ‘쉿, 혼나’라고 위트를 남발했다는. 그래서 고향의 어머니가 또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하며 무심코 흠뻑 웃었더니만.

그런데 그런 기억조차 하얗게 세어버렸다. 세상에 종교가 있는 것일까.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어떻게 대학생들이 대학생을. 살아있는 사람을. 어머니의 교황님은 무엇이라 하실 것인가. 교황님이 다녀가신 서울에 그를 통한 은총 같은 것은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1주일의 효력도 없는 은총이라니, 은총은 빈총이었다.

 

 

    형,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연이는 정말 호박씨를 물어 오는 제비처럼 소식을 물어 날랐다. 그 애는 전깃줄에서 지직~ 하고 떨어질 바보 같은 새는 아니길 빌어야 했다. 사실 그는 소식보다 찰랑거리는 단발이 좋았다. 달까말까 스치는 머리카락이 은근히 그리웠다.

저기 베를린에서, 그러니까 동베를린 군중들이 베를린장벽을 밤사이 망치로 무너뜨렸다는 뉴스요! 들었죠? 동독의 국경이 전쟁 그런 것 없이 완전히 개방되었다고요.

사실 그는 뉴스를 잘 듣는 편은 아니었다. 고향에 살 때부터 뉴스는 어머니가 성당에서 듣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 바깥일에 관심이 적었다고나 할까. 집에 라디오도 없었고, 도서관에서도 신문을 챙겨 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동구의 상황은 좀 알고 있었다. 철의 장막이 붕괴되는 소리는 여름부터 들려왔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가 사실상 개방되었다. 그 가을 라이프치히에선가 7만 명 시위대가 ‘우리는 민족이다.’를 외쳤다고 해서 ‘민족’이 무슨 뜻일까 살짝 고민도 했었다. 정관사를 썼을까, 부정관사를 썼을까. 그 문장 때문에 여름에 철조망을 높이 넘어 날아간 새가 북에서 읊었다던 표어 ‘조국은 하나다’를 다시 떠올리기도 했었다. 그렇더라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다고? 사람들 수천이 몰려드니까 밤사이에 수비대가 장벽을 열었고, 사람들은 장벽을 깼고,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서 포옹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니. 만우절도 아닌데 사실이겠지.

형! 듣고 있어요? 사람들은 왜 왕창 서베를린 쪽으로 몰렸을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아는 것도 없고. 다만 동서 할 것 없이 유명한 텔레비전 탑들로 양 방향 방송이 터진 건 오랜 일이고, 한 해 500만 600만씩 단기 방문여행이 가능했다는 기사도 보았었다. 한쪽의 풍요로운 경제지표도 다 알려진 사실이었고. 뭔가 자유로운 분위기, 강요된 안정 보다는 선택하는 무엇, 하다못해 나태 같은 것. 그러니까 실업급여 같은 것, 왠지 잠시 덜 먹고 놀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유…… 그 비슷한 것을 상상했다. 상상만 했다. 기적과도 같은 분단국 독일의 소식에도 그는 무감각했다. 세상에 대고 언급할 단어들이 사라져 버렸다.

 

 

    침묵 속은 희뿌연 공간이었다. 어딘가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나름 온전한 길이라고 믿었던, 면학을 통해서 성과를 내고 어엿한 직장인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정석은 깨어지고 없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를 어떻게 살까. 어디로 도망갈까. 돌부리를 차고 걸었다. 연이는 그를 슬슬 피하는 눈치였다. 슬픈 무서운 진실들을 날갯짓에 날라 오는 일에 스스로 소스라쳐 하는 것 같았다.

 

강의실 대신 책방을 기웃거렸다. 혼을 빼놓을 책을 읽자. 시집에서 안정감을, 언감생심 낭만을 찾게 되려나. 그렇더라도 한편으로 당시 인기 절정의 『홀로 서기』 같은 것, 그건 아니었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홀로 서 있는 인간이 웬 홀로 서기 주장인가 싶어서였다. 이렇게 날이 넘어서야 무슨 시를 읽나. 좋아, 우리들의 자화상을 읽자. 그는 ‘우리’를 골랐다.

『슬픈 우리 젊은 날』 -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는 로맨스 영화에 대한 반발로 이름 붙였다는 시집이었다. 대학가의 서클룸, 화장실 벽, 술집, 카페의 메모장에 적은 낙서까지 수집해 놓은 글들이라면 그들 대학생들 모두가 필자일 터였다. 어라, 그때의 살짝 놀람이 지금도 생각난다. ‘너무 맑아 서러운 날’이라는 1부의 맑은 서러움을 넘기면, 2부는 역시 ‘혼자 서는 연습’이었다. 홀로, 혼자가 역시 젊은이들의 화두였다.

제비 - 나는 겨울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겨울에 이땅을 찾아옵니다. 나는 날개가 있어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지 않느냐고요? 왜냐하면 따뜻한 곳으로 가면 희망이 사라질까봐 그래요. y대 자유교양이라는 써클의 누군가가 쓴 낙서의 일부였다.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얼어붙은 땅에 온다고? 눈이 내리면 얼어서 죽고 – 역시 제목이다. 정말 낙서인지 시인지 공감 가는 글들이 많았다. 게서 구한 것은 위로도 낭만도 아니고 아픔이었다. 그는 아파서는 안 되고 건강하게 학업을 마치고 건전한 직업인이 되어야할 숙제를 살고 있었는데도, 고개를 들어보니 도처에 아픔뿐이었다. 슬픔까지는 그 나름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어휘였지만, 아픔은 달랐다. 아픔은 아픔이었다.

 

멍든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청춘들, 애초에 하늘은 시퍼런 멍이 들었는지 모른다는 상상에 공감하면서, 그 가을 겨울에는 철학에도 지진이 일었다. 서적은 뒤죽박죽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68운동을 들여다보았다. 지금까지와 달리 어둠에서 구한 금지된 책들을 읽었다.

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서구의 68운동의 모토는 그냥 너무 멋있는 문구였다. 1945년 종전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영광은 기울고 있었고, 50년대 탄생한 독일 라인강의 기적도 영원치는 않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독재스타일 대통령의 결단으로 경제가 살아나고 있었던 그때, 전쟁에 팔려(?) 가서도 달러에 환호하던 그때,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시작되었다더니, 68년 베트남 구정 대공세를 기점으로 유럽의 대학생들은 폭발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성장도 사회주의 국가들의 복지제도도 모든 인간의 해방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인간들의 평등한 세상은 어느 곳에도 없다는 인식에 폭발했다.

그는 그들이 꿈도 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읽는 『희망의 원리』라는 책에서는 그런 꿈을 낮꿈이라고 했다. 낮꿈이라고? 그는 눈을 크게 떠보았다. 아무리 크게 떠도 물고기 눈이었지만.

밤꿈이 리비도의 충동에 기인한다면, 낮꿈에는 자아의 고유 의지가 보전되어 있다. 밤꿈은 정신분열적, 낮꿈은 편집광적이다. 낮꿈은 세상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결핍과 장애가 낮꿈을 꾸게 하므로, ‘만일 구운 비둘기가 식탁에 널려 있다면’ 사람들은 낮꿈을 꾸는 것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 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한편 세상에 만연한 관료주의가 자유를 억압하는 데에 지친 그들은 ‘굶어 죽더라도 지루한 건 못 참겠다.’라고 외쳐댔다. 벌써 20년 전에. 그때 그리고 20년이 지난 그날도 한국 국민들은 얌전히 반공 민주정신으로 살고 있었는데. 살아야 했는데.

 

 

   침묵 속에서, 낮꿈이 무엇인지, 구체적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아는 것도 말할 수 없어서 입을 닫아야 했던 나날들이었다. 침묵 속에서 결정한 첫 번째 행동이 입대였다. 불안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전방에 배치될까. 그는 운동권이 아님은 물론 단순 시위 전력도 없었다. 그래도 대학생이니 전방으로 가게 되려나. 가게 되면 갈 일이었다. 우연히 죽게 되면 죽나? 막연한 공포로 미칠 것 같았지만, 험할지라도, 무서울지라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러고 보니 과에는 친구가 없었다. 법학개론에 훅 갔다가 철학서에 빠져서는 단 한 치도 옆을 돌아보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를 빼먹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학기 중간에 넋이 나가버렸으니 학기를 망쳤다. 학기를 망치다니! 그런 단어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일은 그리 닥쳤다. 2년의 대학생활에서 세 학기만 건져 놓은 채 입대를 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차곡차곡 블록쌓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벌써부터 절름발이 블록이 되었다.

 

연이, 입대를 결정하고 나서 연이를 보아야 했을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을까. 모르겠다. 이제 침묵은 회색 숲을 넘어 블랙홀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덜컹거리는 맘을 접었다. 흔들리는 각도를 접는다. 사랑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수평이 되어버리면, 수평이 되어버린 사랑은 순간에 멈춘다. 안다.

사람은 어떠냐고요? 사람도 이론적으로는 참새와 마찬가지입니다. 두 손으로 전선에 매달려도 감전되지 않습니다. 제발 몸으로 시험하지 말아요. 아득히 선생님의 말이 들려온다.

전깃줄의 참새는 둥지에 넣을 사철쑥을 입에 물고 가다가 쉬는 것일까. 참새가 두 발로 한 줄에 서듯, 그도 두 손으로 한 줄에 매달리면 된다. 그는 무얼 하다가 전깃줄에 닿았을까. 그는 어쩌면 감전되었었다. 감전되기를 바랐었다. 아니, 새들은 유리창에 부딪쳐서도 죽는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왜소한 몸뚱이가 눈앞에 일렁였다. 숨은 쉬고 있을까.

 

.............................


2023.11. 『국제PEN광주 , 국제PEN광주위원회, 400~419쪽.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 6 - 불으한 어리니 한태  (3) 2024.04.08
침묵 4 - 투틸로  (0) 2024.01.15
침묵 3 - 5월  (0) 2024.01.15
생존반응  (0) 2024.01.15
이별  (3) 2024.01.15
Posted by 서용좌
소설2024. 1. 15. 18:59

 

 

 

 

 

 

 

 

 

 

 

 

 

 

 

 

 

 

 

 

 

 

 

 

 

 

 

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 교황 바오로 3세, 1541년 시스티나 성당

 

 

 

                                                                                   * * * 

 

투틸로 –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이름, 너는 오늘 너에게 빠진다.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가 한국의 김 스테파노 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신 바로 그날 세상에 나온 그는 바로 그것으로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유아세례 때 어머니는 그에게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게 하고 싶어 했더란다. 아니면 이그나시오, 주임신부님을 따라서 이그나시오라고. 하지만 신부님은 생일의 성인을 따라 투틸로라 이름지어주셨다.

성 투틸로는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은 자라면서야 풀렸는데,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단다. 지혜와 웅변술로 수도원 학교에서 학장을 역임한 시인이며, 회화, 조각, 공예를 두루 섭렵한 미술가이자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졌다는 만능 예술가였단다. 베네딕토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베네딕도라고 쓴다. 대구수녀원이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소속이다. 바른 표기라면 툿칭일까, 아무튼 뮌헨 근교의 지역이름이니까 의미는 없다. 어쩌다 베네딕도수녀원의 긴 이름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일가 수녀님 때문이다. 평생을 미국 중부 어디 오마하의 수녀원에 있는 그 수녀님은 일가이니까 한국인인데, 법적으로는 미국인이겠지만, 한국에 피정을 오면 매번 대구를 방문한다. 같은 베네딕도수녀회라서 그런다 했다. 수녀님은 그곳을 다녀오면 꼭 들려주는 말이 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한1서 어쩌고 한다. 그의 특기는 ‘예’도 아닌 침묵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영원히, 어디에 남아, 뭣 하러?

 

다른 이야기로 갈 것은 없고, 그 투틸로 수도승 같은 만능 예술인의 이름을 받은 기분은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유전이 아닌 만큼 불행하게도 그가 예술적 감각과 관련해서 유전자를 갖지 못한 것이 분명해졌다. 웅변, 글쓰기, 음악, 미술 어느 것에서도 소질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겁이 많은 사내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머나 먼 성 투틸로 대신에 그는 그에게 투틸로라는 이름을 주신 이그나시오 신부님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신부님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로는 큰 도시의 성당으로 나가셨다고 했다. 자라면서 괜스레 궁금해진 그는 이그나시오 신부님을 찾아보았고, 로마 유학을 떠나셨고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셨다는 것까지, 그리고 돌아오셔서 곧 세상을 떠나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모른 체 했다. 침묵은 말보다 편한 도구였다. 다만 마음속에 만일 로마를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레고리오 대학과 성 이그나시오 디 로욜라 성당에는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170㎡가 넘는다는 성당의 천장화 <성 이그나시오의 영광>을 꼭 보고 싶었다. 그 성당을 완공할 즈음 재정난으로 돔을 만들 수 없었을 때 – 돔이 없는 성당이라니! - 포초라는 화가가 실제로는 평평한 천장에 돔을 그려넣었다는 것 아닌가. 착시현상을 이용해서 돔과 하늘을 드높고 드높게, 그러니까 다만 시각적으로 공간을 무한 확장했단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릴 것 같은 사람들의 형상들도 함께 그려넣었다니. 두 눈으로 보면서 눈속임에 빠져보고 싶다. 물론 로마에 갈 수 있다면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놓칠 수야 없겠지.

천장화 – 그런 것들을 새들이 그린다면 또 몰라, 어떻게 사람이 그릴 수 있었을까. 4년을 천장화에 매달린 미켈란젤로, 이런 것만으로도 옛날 사람들은 그에게서 경이를 자아낸다. <최후의 심판>은 어떻고. 167.14㎡의 벽면에 391명의 온갖 모습을 7,8년의 세월에 걸쳐 그렸다니. 당시 교황님의 김탄사가 의아하면서도 이해가 된다.

하긴 모든 예술이 그렇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석고형으로 구체화하는 데에 꼬박 37년을 보냈다잖은가. 서울에 있는 No7/8 청동작품 제작만도 2년 반이나 걸렸다는데, 대중이 관람할 수가 없다니 애석하다. 작품을 전시하던 로댕갤러리는 폐업을 했고, 해서 지금은 다른 미술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니, 혼도 따라서 수장고로 들어가 잠을 자고 있을까. 그의 내면은 멀리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채워졌다.

 

왜 현대에는 지독한 완벽한 일꾼이 없을까. 우리는 현대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그는 단정했다. 어느 부분 발전을 말하지만 능력 면에서 퇴보가 더 드러난다. 혹시나 기록되지 않은 태고의 역사 속에서는 인간에게 날개도 있었을까. 그 감각으로 천장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창세기의 인물들처럼 몇 백 년을 살 수 있었을까. 최초의 인간 아담이 930세를 살았다지만, 그 기록을 노아가 950세로 므두셀라가 969세로 깬다. 현대인에게 평생의 작업이 무슨 의미일까.

몸은 그렇다 치고 머릿속은 어떻게 그렇게 심오했을까.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의 이름을 그는 수학 시간에 알게 되었다. ‘두 직선이 만나면 마주보는 두 각은 같은 각을 이룬다.’ 라거나 ‘임의의 원은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 된다.’ 이런 간단해 보이지만 완벽한 정리를 할 수 있었다니, 공책에 그것들을 눌러 쓰면서 그는 어지러움을 느낄만큼 감탄했다. 현대의 심오한 지식이라는 것들은 파편적일 뿐, 전체적으로는 위축된 인간들. 그는 자랄수록 배울수록 과거라는 시공간이 무한 매력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역사를 공부하자, 그랬다.

 

 

투틸로, 학교 이름으로는 노승욱, 그가 택한 사학자의 길은 수월한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전 대학강사에게 미래는커녕 현재도 없었다, 없다. 남사스럽다, 라고 부끄러워할밖에. 어머니의 속뜻대로 그는 신학대학으로 진학을 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종신서원까지도. 극단적으로는 카르투시오회의 모토처럼 오직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도 있었겠다. 천 년 전에 주교직도 마다하고 엄격한 은수 수도생활을 시작한 성 브루노의 후예들, 봉쇄수도원은 영화 〈위대한 침묵〉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들 봉쇄수사의 삶은 기본적으로 은둔 지향, 그렇다고 현대에 와서는 완전한 은수 개념은 불가능하고 반쯤 숨어서 생활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세상에는 스물도 넘지만 우리나라에는 두 곳, 20년 전쯤 세워진 상주시에 있는 남자 수도원에는 한국인 봉쇄수사 두 분과 외국인 몇 분이 계신다. 평수 사님들은 몇 분 더 계시고. 아, 그곳에 관한 한국영화도 있다. 그리고 수녀회는 보은에 있다던가. 믿거나 말거나 거친 빵과 밥 중 선택해서 먹는 것이 전부라니, 그로서는 그런 절제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인간의 기본 욕구, 그러니까 생리적 욕구인 의식주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안전에 대한, 소속감에 대한, 설마 존중에 대한, 자아실현에 대한 고차원적 욕구들이 채워진들 진정일까. 영화를 본 다른 누구는 봉쇄수사들이 자발적으로 시간과 미래를 버렸으므로 이미 천국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선뜻 동의는 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속세가 맞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천국인 그곳에서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초월할 것이다. 봉쇄수도원이 아니더라도 특정 종교에서는 죽음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수혈을 거부하는 사례가, 그래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는 사례가 있다. 〈위대한 침묵〉에서의 드문 인터뷰도 생각났다. 한 장님수사가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자신을 장님으로 만드신 것에 감사한다고, 그것이 영혼에 더 이로울 것이기 때문이랬다. 이 무한 신앙도 한 인간의 것이다. 다른 인간은 그런 상태를 도취라고, 마취라고, 마약이라고 할 게다. 묵상과 기도와 독서와 노동이 전부인 삶을, 그 자발적 선택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20년에 걸쳐 인내하면서 영화를 찍은 감독 또한 수사 못지않다. 옛날만은 못하지만 세상은 대단한 사람들 천지다.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존재들 또한 현실이건만. 그러니까 살아서 벌써 천국과 지옥이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속을 끓이면서 그는 답을 몰랐다. 아스팔트에 둘러싸인 방, 열린 또는 닫힌 창문 하나, 이 침묵은 봉쇄수도원의 그것과 비슷하려나. 그의 그것은 헌신도 외경도 없이, 부끄러움만 더한, 그래서 더욱 소외된 침묵일 터이다.

 

 

----------------------

2023.12.  『작가교수세계』, 한국작가교수회, 474~478쪽.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 6 - 불으한 어리니 한태  (3) 2024.04.08
침묵 5 - 새  (1) 2024.01.15
침묵 3 - 5월  (0) 2024.01.15
생존반응  (0) 2024.01.15
이별  (3) 2024.01.15
Posted by 서용좌
소설2024. 1. 15. 18:50

[짧은 소설]

 

 

5월이 되었다. 4월보다 더 아픈 5월이다. 아픔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무엇이든 꼬리가 있다. 꼬리가 밟힌다.

장미 축제에 다녀왔어요! 무심한 페친이 흐드러지게 핀 장미 정원을 보여준다. 그는 토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네요! 한 가정의 행복은 지상 최고의……. 이렇게 선한 톡을 보내와도 그는 토한다. 그해 5월 깨어진 가정은 어쩌란 말이냐. 봄은 생명이고 죽음이었다. 생명과 죽음이 혼동되었을 때, 그는 말을 잃어갔다.

그는 어린 시절에 벌써 친구를 잃었다.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흔히 이별을 생각하게 되고, 이별은 헤어짐,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가는 일,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러운 흩어짐 같은 것이 먼저다. 그러나 그들 또래의 어린 시절의 이별은 달랐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1969년 봄날, 우리나라에서 첫 추기경이 탄생한 바로 그날 태어난 그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우리 애가 글쎄 우리나라에 처음 추기경이 서임되신 날 태어났어요! 터무니없이 그의 탄생을 축복으로 여겼다던 어머니 루시아는 지쳐갔다. 신에게 애원하다 지쳤을까. 말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귀머거리라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침묵은 모르는 것에 대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다른 말들은 했다. 그의 말도 알아들었다. 어머니처럼 말 수 적은 아이, 그는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열두 살이 된 봄, 그해도 봄날의 시가지는 큰길가 푸른 나뭇잎 사이로 초파일 연등들이 내걸리면서 한껏 화려함을 더했다. 아이들은 운동회 날의 풍선들을 보듯이 그냥 좋아 뛰어다녔다. 그런 그때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 어떤 젊은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맞아죽었다 했다. 장애인, 잘 듣지 못해서 대답도 잘 못하는데 군인들한테 맞아죽었다.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린이들도 죽었다. 소문은 소문이 아니었다. 또래 아이들이 폭도라서 죽다니. 죽은 아이들은 폭도였다. 그런 뉴스들이 있었다. 그때 죽은 사람들은 폭도이니까, 어린이들이라 해도 폭도였다. 마을 앞동산에서 놀다가 드드득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려다 죽었다. 벗어진 고무신을 주우려고 돌아선 순간 서너 발의 총알이 옆구리를 관통! 관통이란 말이 너무 무서웠다. 뚫고 지나갔다는 말이라 했다. 작은 몸을! 그 바보는 고무신 때문에 죽었다. 간첩이나 무장공비만 국군들의 총에 죽는 줄 알았었다. 폭도도 국군들의 총에 죽는다.

다른 아이들도 죽었다. 저수지에서 놀던 어린이도 죽었다 했다. 두개골이 아예 없어질 정도였다 했다. 어린이에게는 총탄들이 너무 큰가 보다, 생각했다. 무서웠다. 그냥 무서웠다. 일이 이쯤 되니 중학생 아들을 마중나간 엄마도 있었겠다. 그 엄마도 죽었다. 하수관로에 숨었지만 관통상을 입고 죽었다. 엄마도, 그러니까 어른도 관통 당했다. 웅크린 채 숨은 엄마에게 죽어라고 총을 쏜 사람, 사람 아니 국군. 아니, 국군은 사람이 아니었다. 국군, 계엄군, 폭도, 어린이 - 단어들은 혼돈의 세계였다. 고무신 바보랑 함께 놀았다가 용케 살아남은 친구, 그 애는 완전 벙어리가 되었다. 또래들도 따라서 말을 잃어갔다.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자유가 최대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유의 반대인 폭력도 최대화된다. - 『자유의 폭력』이라는 책에서 읽은 글이다. 마음대로 총을 쏠 수 있었던 그들의 자유는 우리에게는 폭력이었다. 그들의 자유는 우리에게 폭력이었고, 그 폭력은 우리를 침묵케 했다.

 

 

벙어리도 내력인가 봐. 애처로운 눈길을 받으며 자라는 동안 공부 밖에 할 게 없었다. 그에게 책은 말을 시키지 않아서 편안한 친구였다. 시험도 곧잘 봤다. 등록금 걱정을 덜 하는 국립대학에 들어갔고, 무엇인가 깨어진 불균형 속에서도 학위까지는 거뜬했다. 거기까지였다. 취업은 바늘구멍이라더니, 바늘구멍이었다. 국내파 – 그런 파에 속했다. 가입한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국내파는 아무래도……. 아무래도 밀렸다. 비정규교원, 그것마저 모교에서도 밀렸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저절로 선후배 차례로라는 관행은 20세기의 법이었다. 3년마다 경쟁 입찰로 바뀌었다. 멍때리고 있다가 한 차례 밀리고는 제자리다.

그때, 다음 채용 공고에 과목 자체가 없어지고 계약종료를 통보받은 다른 누구보다는 나은가? 당사자가 중노위에 구제신청을 냈다는 뉴스에 그는 덩달아 촉을 세웠다. 신청 자체가 기각되었다. 재임용 갱신기대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장기간 3년이 만료된 이후 근로계약이 갱신되리라는 신뢰관계가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 게다가 재임용 만료 강사들이 신규채용 절차에 지원하고도 불합격되기도 하는 그것이 강사법이라고. 다만 창피한 일이다.

더 창피한 일, 그 사이에도 과에 전임이 채용되었다. 충격이 그를 덮쳤다. 신임교수는 그가 강의를 시작했던 초창기, 그의 제자였었다. 그 아이도 이제 40, 물론 해외파다. 파가 다르면 사람도 다르다. 좌파 우파만 다른 것이 아니로구나! 다시 한 번 내외가 다름을 느낀다. 단어로 풀자면 그는 ‘내’를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국내파다. 이런 말을 누구랑 나눌 수 있는가.

 

침묵이다. 선별적 함묵증이 강의의 질을 떨어뜨렸을까. 강의를 한 적이나 있었던가. 그때 내가 말을 했었나. 내 목소리는 어떤 음색이었을까. 우울한 바리톤?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강의실을 떠올린다.

강의실 – 어라, 강의를 하던 강의실 대신 강의를 듣던 강의실이 먼저 떠오른다. 최루탄을 던지며 난입하던 전경들, 깨어진 유리창, 많지 않은 여자애들이 쇳소리를 질러댔다. 층계에서 맞닥뜨린 처음 보는 교수가, 여자였다, 아무나 치약들을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은 치약을 팔자수염처럼 바르거나 광대뼈에도 발랐다. 선배들은 이건 약과라고 했다. 최루탄 하면 떠오르는 Y대학생 이야기였다. 나중에는 어느 대학병원 정형외과 수술실 근처에도 오발탄이 투척되어 수술이 중단됐었다고도 하니까. 오죽하면 영국의 유수 언론이 한국에는 최루탄 재벌과 치약 재벌이 등장했다고 모멸적인 보도를 했을까. 재벌설은 설이 아니었다. 최루탄을 독점 생산했던 S화학이 고액납세자 당당 1위를 차지했다는 국내 보도도 있었으니까. 삼성도 현대도 제치고!

 

다시 봄이다. 느닷없이 최루탄이란 단어가 떠도는 이 봄, 아카시아 향기 스멀거리던 5월은 아득하다. 어린 시절 망가져버린 봄의 기억이 칼끝 상처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동안, 천진했던 참외 서리며 그런 추억들일랑 저 멀리 가슴 구석에 짓눌려버렸다. 보리그을음, 잘 붙지 않는 불을 지피며 연기 그을음 마셔가면서 풋보리 알을 그을려 먹던 친구들은 꽁꽁 얼어붙어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가슴을 열자 해도 맞댈 가슴들이 없다. 오늘도 춥고, 그는 침묵 속에 빠져있다.

 

------------------------

2023.10. 『여성문학』 창간호: 167~169쪽.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 5 - 새  (1) 2024.01.15
침묵 4 - 투틸로  (0) 2024.01.15
생존반응  (0) 2024.01.15
이별  (3) 2024.01.15
침묵 2 - 4월  (0) 2023.06.18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4. 1. 15. 18:40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 프란츠 카프카 1904    

 

*                                                                    

의 시작을 생각해 보았다. 기억할 수 없을 유년기 어느 날 ㅁ이라는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시작되었을 말, 어머니를 향했을 그 말 그 언어가 한국어였다. 말을 애교 있게 재잘거리는 귀여운 아이는 아니었던 것이 말과 관련한 처음 기억이다. 첫 아이였으니 또래는 없었고, 온통 어른들로 둘러싼 환경에서 사실은 내 ㅁ자로 시작되었던 어머니 찾기도 쉽지 않았다는 기억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하긴 생명체라면 모두 적응을 통해서 살아남을 것이다. 세상은 경이 그 자체였고 아이에게 변별력은 최소 능력, 사물과 말의 연결은 엄청난 어려움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며 사물들을 어떤 소리로써 지칭할 수 있단 말인가. 어른들의 팔에 안겨 시장을 구경하면서 김이 모락모락 쪄서 팔고 있는 고구마를 어찌 고구마라 말하며, 뜬 눈알 때문에 무서워 보이는 생선들을 뭐라 칭할 것인가. 한번은 소금 가게 앞 ‘소금팝니다’라는 비뚠 글자를 읽고 와서는 소금을 보면 ‘소금팝니다’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더란다. 그렇게 그림책도 시원찮던 시절, 무언가를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이 우선이었다. 아무 말 않기 – 그것이 상책이었다. 말 수 적은 아이는 그다지 흠은 아니었다. 머피의 법칙은 존재한다. 애가 어른 말을 먹어버리네! 어른들은 말을 먹어버리는 것이 반항이 아니라 수줍음 때문인 것을 잘 몰랐다.

 

학교에 들어갔다. 글자로 말하기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글자를 익히자 글자로 말하기가 말로 말하기보다 나았다. 글자로 말하기는 순발력이 없어도 괜찮았고, 글자로 말하면 기특해 했다. 말을 먹어버리는 아이에서 글을 좋아하는 아이로 살짝 변신하면서 말에서 조금 해방된 느낌이었다. 글자는 질문 같은 요구사항도 없었다. 글자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글자들의 집합, 책은 제법 편한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고립이 된다는 것 따위는 누구도 관심두지 않았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어른, 대학생 말이다.

독문과 대학생 – 왜 하필 독문과? 중고등학교 시절,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겠지만 운동장 활동을 면제 받았던 터라 도서실은 무궁무진 소설책들이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명문이라고는 해도 240명이 졸업한 지방도시 중고등학교의 작은 도서관이 더 이상 소설책들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칸트가 손에 잡혔다. 『순수이성비판』 - 한 줄도 읽어낼 수 없었을 때, 나의 기본 지식의 결함과 미진한 독해력 탓을 하지 않고 번역문 탓을 했다니. 무지가 용맹이었다. 독문과로 진학해서 기필코 이 글을 원전으로 읽으리라. 고백하건대, 독문과 시절 내내, 대학원 시절에도 그 뒤로도 칸트의 원전을 통째로 펼쳐보지 않았다. 근시안인 내게 독일어는 눈앞의 숙제였고, 독일어로 쓰인 소설들에 푹 빠져버렸다.

 

소설들은 경이였다.

 

인생의 동반자, 반세기를 함께 한 동반자가 곁에 있지만, 나의 뇌 속에는 소설들이 녹아 살고 있다. 어려서 만났던 글자들은 뇌의 딱딱한 표피를 뚫고 증발해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하기, 철학이 녹아있는 독일 소설들은 소설 이상이었다. 칸트 철학은 2천년 본질주의적 존재론에서의 대전환이었고, 비로소 개별자가 된 인간들이 진리와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 인간들이 소설 속에 살아있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혁명적 사고는 2차 대전 직후 빈곤한 독일 정신세계에 폭발적으로 수용되었다. 실존에 대한 탐구는 무궁무진한 보고인 것 같았다. 아니, 주체로서가 아닌 구조로서의 인간! 욕망 또한 타자의 욕망! 현대독일소설은 작은 뇌세포 하나하나를 풍선처럼 부풀게 하는 작용으로 들끓었고, 다른 어떤 것, 현실 속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꺼버린 아이러니로 작용했다. 겉으로는 숨길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내면은 불균형의 존재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소설이자 문학이자 예술의 세계는 언어종속적인 무엇이라는 진리가 뇌를 때렸다. 카프카가 말한 의미에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말이었다. 외국말로 된 외국 소설들을 파먹으며 살아가던 나는 스멀스멀 꼬리가 돋아나는 느낌에 화들짝 소스라쳤다. 다른 누군가가 사냥해 놓은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말로 내 글을 쓰고 있었다. 소설이라는 이름의 무엇을 쓰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시작의 무서움을 모르는가. 누군가가 읽을 수도 있는 글자들을 어쩌라고 내놓는가! 내가 나이고 싶어서 나의 말로 나의 글을 썼노라는 변명은 서툴고 못나기 그지없었다. 한국문학의 대양에 수영의 초보 지식도 없이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뛰어든 이방인이었다. 잘해야 의붓자식이었다.

 

겁이 났다. 가장 무서운 것은 독자라는 존재다. 미지의 누군가가 글을 읽는다는 상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아니, 누군가 읽기나 할까, 그것도 무서웠다. 글을 쓰는 작가들 중에도 더러 지인이 생겨났고, 누군가는 스스럼없이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솔직히 독자로서 정말 재미는 없더군요! 긴박한 갈등이 있어야……. 엄청 고마운 일이었다. 읽었으니까.

그렇게 소위 문우들을 만났다. 내가 공부했던 존경하는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서독과 세계 PEN International 에서 활동했다는 기억으로 PEN을 기웃거린 늦깎이는 이화동창문인회라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졌고, 서울 그리고 고향에서도 더러 동지들을 만났다. 누구나 문학소녀였다는 그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의 선후배들과도 의미 있는 공간을 나누게 되었다. 의미는 늘 무의미를 동반하지만, 어찌되었건 큰 범주로 문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외국문학 연구보다는, 취업 효율성 떨어지는 강의보다는 소박한 소설가로의 변신이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피는 피다. 정신의 묽은 피는 몸속의 빈혈과 마찬가지로 현기증과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전혀 괜찮지가 않다. 짝사랑 출판사는 무심하고, 자존심과 품위를 무기로 활동을 하는 위상 드높은 작가를 만나기라도 하면 무참히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나이하고도 키하고도 비례할 리 없는 낮은 함량의 속아지 때문에 앓는다. 그러니까 문제는 나다. 덜 떨어진 나다.

우물 안 개구리, 개구리도 되지 못한 우물 안 올챙이 – ‘우올’로 생긴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하늘과 해를 달을 별을 볼 수는 있겠지. 늘 평강을 빈다! 스스로 안부를 한다. 그런데도 편치는 않다. 외부의 어떤 무엇보다 빈약한 글 때문에 앓고 있다. 글과의 만남은 진정 숨쉬기의 단초였을까.


........................

2023.10. 『아름다운 만남』, 이화동창문인회, 317~321쪽.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은 독백이다  (0) 2023.01.30
빙하가 녹았다  (0) 2023.01.07
반석 위의 벽?  (0) 2021.09.07
사피엔스의 언어  (0) 2021.09.07
겨울, 바닷가  (0) 2020.12.27
Posted by 서용좌
소설2024. 1. 15. 18:31

 

 



                         

 

 

 

 

 

 

 

 

 

 

 

                                                         











나이 들며 신경이 멀어지는 것은    
즐거운 일    

고통은 삐걱거리는 마루처럼    

디딜 때만 소리를 낸다.     

 - 황동규 「지붕에 오르기」 중에서 

 

 

         *   *   *

     생존반응이에요. 나 아직 살아있다는.

네? 살아있다는 생존반응, 생활반응이요? 어딘가로 실종되셨더랬어요?

 

웃겼다. 희미한 봉숭아꽃물이 들어있는 손톱을 내보이며 할머니가 말했다. 미친! 아차, 이런 표현까지는 심하지만, 오후 수급자 재가요양방문이 3년이 넘어가면서 이 보호자와의 대화가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몇 달이 지나도 불쑥 튀어나오는 머리 아픈 말들은 기가 막힌다. 성공 일변도 가치관은 남의 것이요, 그러니 가언적 명령임을 깨달아야 한다느니, 자신의 의지로 원칙을 세우고서는 그에 따른 행동을 남의 이익과 비교해서 특권적인가 살피고 피하라느니…… 도대체 21세기 사람도 아닌 것 같은 말을 한다거나.

그렇다 해도 이번에는 진짜로 웃겼다. 웃기면서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생존반응이라는 말은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기호가 아닌가 말이다. 이를테면 실종된 사람이거나 반대로 용의자가 되어 숨은 사람이거나 할 때, 그럴 때 뉴스에서 생존반응을 떠들어댄다. 수배된 사람들은 생존반응을 철저히 숨기며 숨는다. 휴대전화는 들키게 되는 1순위니까 절대로 안 쓰고, 신용카드며 교통카드들도 당연히 안 쓰고 아예 친척이나 친구들에게서 빌려서 쓴다. 수사팀들도 그런 기본을 모를 리 없고, 지인들의 신용카드가 카드 주인과는 먼 엉뚱한 곳에서 사용되는가를 포착한단다. 지능과 지능의 대립이다.

 

지능을 말하자니 속이 상한다. 시내에 3층 건물과 시골에 농막을 가진 우리의 피땀 흘린 이 작은 성공은 자세히 알고 보면 지능이 모자란 결과였다. 지능은 피땀과는 절대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능이 있었다면 이보다 훨씬 쉽게 훨씬 대단한 부를 누렸으리라. 그런데 진짜 문제는 지능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지능범들도 결국 잡힌다. 단 하나 이유는 카르텔이 없기 때문이란다. 카르텔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설명듣기에는 평소 어려운 단어를 좋아하는 오후 할머니로도 소용이 안 된다. 이 할머니는 오후 수급자 어르신의 보호자라서 그냥 할머니라고 칭한다. 아무튼 이 노인의 설명 없이 내가 느끼는 카르텔은 그냥 범죄집단 같은 말이다. 옛날에는 예컨대 막걸리공장이 담합해서 막걸리값을 올린다거나 그런 것들을 어른들한테서 들었다. 그러니까 범죄까지는 아니고. 아니, 그것도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범죄인가.

아무튼 요즘 말하는 카르텔은 억 소리 나는 큰돈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도 수천억이다. 그냥 범죄집단이다. 누군가 땅을 산다. 어떻게 모은 무슨 돈, 그런 것은 상관없다. 국회의원이나 시장 군수 또는 판검사 같은 유력인사들을 막역한 지인으로 삼는다. 사업은 완벽해진다, 뭐 그런. 온갖 국책 사업들이 저절로 알아서 그 땅으로 향한다.

자유가 최고인 시대에서는 그 자유를 최고로 누리는 사람의 지능이 최고의 지능이다. 지능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아니, 가난하면 자유 자체를 모른다던가. 아니, 뭐야! 그러니까 지능이 모자라면 자유를 모르게 되고, 자유를 모른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말이다. 지능이 모자라서 가난하고, 가난해서 자유를 모르고. 그 말이 그 말이네. 진리네. 권력자가 하는 말은 진리네. 작은 행복이 무시당하는 느낌에 자존감까지 떨어지는 시간을 보낸다. 그저 죽어라 벌고 아끼며 저축하면서 살아온 나는 거대한 케일 밭에서 케일 잎 귀퉁이를 갉아먹는 벌레인가, 겨우.

 

생존반응이 왜 지능으로 갔을꼬. 안 좋은 건 더 잘 닮는다더니, 나도 어느새 이집 노인처럼 왔다갔다인가. 다시, 생존반응 말이다. 작년이었다. 남편이 알뜰범잡인가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생존반응이 없는 실종자는 사망자다, 생존반응으로 범인도 잡는다 - 그 정도는 나도 아는데, 그보다 더한 나쁜 놈들도 그걸로 잡았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죽여 놓고, 죽은 사람의 생존반응을 조작해서 혼란을 주는 것, 그런 이야기는 들은 것도 같았다. 죽은 사람의 생존반응을 꾸미려고 그 누님한텐가 문자도 보내고, 겁대가리 없이 그 집에 찾아가서 실종자가 돈 떼먹고 도망갔다고 외려 호통을 치고, 나중에는 돈까지 받아 챙겼다는…… 정도가 심했다. 더 지독한 것도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생존반응을 조작해서 살려놓고는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는 처음 피해자를 범인으로 꾸미는 작전이다. 우와, 조작된 생존반응으로 살아있는 죽은 자가 범인으로 지목되다니, 무서웠다. 그래도 우리나라 경찰들 대단하다. 죽은 자의 생존반응에 진료기록도 신용카드 사용도 없다는 점을 의심했단다. 또 핸드폰 반응이 문자뿐인 것, 더구나 죽은 자와 산 자의 기지국이 늘 일치한다는 것으로 잡았단다. 브라보!

 

 

     화살이 바뀐다. 평소의 나의 생존반응은? 현실밖에 모르는 내게 갑자기 상상력이 발동되었나. 내 생존반응은 어디에서 잡힐까? 실종되거나 잠적할 이유는 없지만, 만에 하나 누구라도 행방이 묘연해지면 추적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 생존반응이라면 너무나도 뻔하다. 산 속 자연인이 아니니까 뭔가 소비를 해야 하고, 소비를 해서 흔적을 남긴다. 현금입출금기, 체크카드, 통장 입출금 내역, 진료기록도 다 들킨다. 내 카드는 하나뿐, 출입은 많지 않다. 병원에도, 심지어 미장원에도 거의 가지 않는다. 이 곱슬머리의 장점은 시간도 돈도 엄청 절약이 되는 보물이라는 데 있다. 비가 오는 날 더 곱슬거려서 신경을 쓰면, 웬걸, 사람들은 더 예쁘다고 난리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좋아한다.

아, 다시 생존반응! 우리는 오전 오후 출퇴근 태그를 찍으니 비밀이란 없다. 주말에는 남편 차를 타고 농막에 가고 혹시 국밥을 사먹더라도 남편 카드니 괜찮을까. 어쩌다가 딸네를 만나더라도 모두가 움직일 땐……, 아차, 내 핸드폰이 문제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한 내 프라이버시는 없다. 현대인은 무대 위에서 사는 것이란다. 무대 위에서 발가벗고, 이렇게 말한 것도 이 노인이었다. 이런저런 모임에 가더라도, 동네 친구들을 동네에서 만나더라도 발가벗기는 마찬가지란다.

동네친구라면 편의점 그리고 거기서 거의 매일 만나는 지인들이다. 세탁소랑 젓가락 언니랑 어쩌다 보니 수다 4총사가 된 것인데, 임박식품을 기다렸다는 듯이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돈이 없으면 부정식품도 먹으라는 말이 생각보다 현실적인 말씀이다. 부정식품이라 그러면은 없는 사람들은 그 아래 것도 선택할 수 있게,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해 줘야 된다 이거야. 이거 먹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 단속은 별로 가벌성이 높지도 않고 안하는 게 맞습니다요. 헐. 맞는 말씀. 우린 임박식품으로 탈 난 적이 없습니다요! 가벌성 – 이 말은 참 어렵지만, 단속과 수사 시간만 아까울 뿐 하나 마나 한 처벌이 된다는 말인지. 죄와 벌이 합당한 세상인가 뭐, 세탁소도 시큰둥이다.

그건 그렇고, 요즘에는 젓가락 언니의 표정이 밝아져서 다행이다. 작년에 딸이 신랑한테 신장 하나를 떼어 주겠다 했을 때의 넋 나갔던 얼굴은 어느새 사라졌다. 천성이 낙천적이기도 하다. 신장 띄 주고도 겉보기로는 어지간 하당께. 의술이 좋은 거인지, 이봐 3층아, 우리보담은 잘 알 것 아녀. 겉만 괘안은가, 속도 괘안컸제? 꼴도 보기 싫던 사운가 뭔가도 워쩌, 즈그들이 오강께로 봐 줘사제. 영락없는 천사표다 천사표!

 

 

     사실 오늘 생존반응 어쩌고 라고 말하는 이 노인의 생존반응은 우습도록 뻔할 것이다. 정기적으로 또는 갑자기 가게되는 병원들 기록과 식품 구매 흔적들이 전부이겠지. 시장에 나가서는 현금거래, 아파트 슈퍼에서는 카드도 쓸 것이다. 무슨 살 것이 그리 많은지, 확실히 답답한 노인이다. 한 달은, 아니 두어 달도 시장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이것저것 꽉 들어찬 냉장고를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음식을 많이 하지도 않는다. 하긴 날마다 조금씩 자잘한 재료들을 죄다 넣으려니 이것저것들이 필요하겠지. 이렇게 실컷 생존반응을 드러내놓고 사는 사람이 갑자기 웬 특별한 생존반응? 기껏 봉숭아꽃 물든 손톱을 보여주면서?

 

봉숭아 물 들이셨다고요? 들지도 않았네요 뭐!

아, 그게, 언제부턴가 꽃물이 잘 안 들어요. 손톱이 늙어서 그런가 봐요. 어려서는 하룻밤에 빨갛게 들었죠, 젊어서는 두어 번이면 충분했던 것을 작년에는 네 번이나 들였어요.

작년에도 들이셨나요? 생각 안 나는데.

지 선샘이 내 손톱 볼 여가가 어딨어요. 내가 수급잔가 뭐. 또 밥 나오는 것도 아니잖여.

히히, 제 점심밥은 그 손에서 나오는데요.

지 선샘이 시시콜콜 작은 것들에 관심 없는 것, 그것이 건강하고 예쁜 거랍니다. 이 봉숭아꽃물이야 울 할머니 땜에 습관이 돼서 들이는 것이고.

할머니요?

예. 울 할머니는 여름 밤 봉숭아꽃이 만발할 때면 여자라고 생긴 족속은 나이 불문 모두 불러 앉혀 놓고 꽃물 잔치를 했지요. 평상에 빙 둘러앉고도 모자라니, 마루 끝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이름을 부르면 가서 손을 맡겼죠. 물론 마지막에는 당신의 손톱에까지.

노인일 때 말이죠?

그때는 아직 지금의 나처럼 노인도 아니셨지요. 노인도 저승길 밝으라고 꽃물을 들이는 거랬어요. 정말 노인이 되어서는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내밀며 묶으라 하셨대요.

그런데 그게 무슨, 그게 왜 생존반응이…….

 

봉숭아꽃 물들인 손톱을 생존반응이라고 내민 것은 살짝 눈물이 나는 이야기였다. 얼마 전, 실은 이른 봄부터 수급자 어르신이 상태가 여러 면에서 더 나빠지는 듯 했다. 불쑥 병원 진료도 가야했고, 이상하게 불안 불안했다. 낮밤 구분도 문제이고, 불안정한 움직임이 더 문제였다. 어느 순간 발동이 걸리면 쉬지 않고, 정말 한참을 쉬지 않고, 말없이 뭔가를 향해 걷는 동작은 기이했다. 가끔 넘어지면서도 멈출 수 없는 듯 했고, 계속 붙잡고 따라 다니는 일은 무리였다. 내가 있는 낮에도 그러는데, 밤에는 오죽할까. 그런데 비교적 안정된 식사 시간은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음식 섭취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탈이 없으니, 지난해 나왔던 실버타운 입주 문제는 아예 조용해진 상태였다.

여름에 들면서 사정은 더욱 나빠지고. 할머니는 눈이 퀭하게 변해가고 말이 줄었다. 내가 있는 동안에는 빈 방에 가서 드러눕는 일이 전부요, 시장 나가는 일도 줄었다. 휴지라거나 공산품은 물론 멸치며 건대추 같은 식재료까지도 택배로 오고 있었다. 나중에는 해파리나 새우도 택배였다. 냉동새우는 솜 같다고 꼭 생물을 사고는 하더니만!

 

우린 어젯밤 둘 다 죽었어요!

그것이 얼마 전 나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우린 죽어버렸어요. 소통이 완전히 끊어진 순간이었어요. 내가 소리 내어 그렇게 내뱉었어요. 이 사람 듣지 못하는 줄 알면서 얼굴에다 대고 내뱉었어요. 꼭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의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원래도 물고기 눈인데, 퉁퉁 부은 실눈이었다. 이를 어째, 많이 힘드셨구나!

 

 

     그렇게 6월이 되어 있었다. 날은 유난히 더웠다. 사람들은 지쳐갔다. 어찌될꼬! 실버타운 준비는 완전 올스톱인 것이, 가정을 정리하고 도시를 옮기고 생활양식을 바꾸는 궁리를 내기엔 이 할머니부터 기진맥진해 보였다. 어느 주말에는 더더욱 힘들었던지 월요일엔 결국 어르신이 입원을 하게 되었다. 내과 병동에 입원해서 검사도 하고 영양 관리도 하고, 무엇보다 저녁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있게 해달라는 바람이라고 했다. 이태 전에도 감기인 줄 알고 갔다가 폐렴이 돼서 입원했던 병원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출근한 오후에야 함께 병원으로 출발했는데, 입원 과정은 더뎠다. 나는 퇴근 태그 찍을 시간에 맞춰서 수급자 집으로 돌아와야 해서, 휠체어를 밀 기운 한 톨도 남아 보이지 않은 할머니를 그냥 두고 병원을 나섰다. 마실 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병원 편의점에 내려가서 생수 몇 병을 사드리고 온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방이 배정되기 전이라서 짐만 늘었겠다. 내가 병원을 나설 때까지도 온다던 간병인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간병은 아무리 오후 늦게 시작해도 어차피 하루 일당이라고 하던데 빨리 좀 오지,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계산법은 좀 심했다. 퇴원하는 날엔 오전에 퇴원해도 하루치 란다. 이런 이야기를 할머니랑 나누면, 나더러 이만 일에는 신경 끄라고, 어디 가도 합리적이지 않은 일들은 널려 있다고, 세상은 부조리의 천국이라고 했다. 부조리도 잘 쓰는 말들 중의 하나다.

 

오후 수급자 어르신이 입원해 있는 동안, 갑자기 시간이 널널해졌다. 딸애한테 내려가서 꼬맹이를 보며 며칠 쉬고도 싶었지만, 오전 수급자 돌봄 때문에 불가능했다. 뒹굴고 노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사흘째가 되니까 심심했다. 눈치도 보였다. 비가 계속 계속 내렸으면 모를까, 맑은 날이 되니까 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농막에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주인은 확실히 남편이고 남편 마음대로 작물들을 심어 놓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숨어서 나를 기다리는 일거리들, 나는 농막이 정말 싫다. 그렇지만 땅이라고 하는 것은 수천수만 평이 아니더라도 대박이 날 수 있는 고리가 된다. 남편은 단순히 꼼꼼한 것 이상으로 부동산 문제에도 그 나름 전략가다. 에이, 밭에서는 무조건 풀들이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붉어가는 고추를 보면 나도 모르게 애정이 스멀거린다. 올해 처음으로 심어 놓은 케일 잎을 뜯으면 빨갛게 익기 시작한 고추랑 어울려서 기가 막히게 예쁘다.

금요일이 되었다. 어르신이 퇴원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다시 어르신을 집에서 돌보는 일정이 짜인 것이다. 케일을 몇 장 따 가야지. 처음에 초석잠을 가져갔을 때에도 얼마나 놀라던가. 얼마나 좋아하던가.

 

잠깐의 휴지를 거쳐서 새로운 만남이다. 병원에서 뭔가 나아졌을까 하는 것은 당연한 기대다. 중간에 내가 안부를 물었을 때는 수혈 중이라 했다. 수혈을? 이상했다. 작년 10월엔가 어르신이 건강검진을 받았었다. 오전에 검진이라서 내가 함께 가지는 못했지만, 받아 본 결과지에서 헤모글로빈 수치 같은 것에 전혀 문제는 없었다. 반년 좀 지났다고 빈혈이라니. 식사량과 특히 좋아하는 고단백 위주의 음식들을 생각할 때 빈혈은 너무 이상했다. 할머니가 빈혈이라면 또 모를까. 고기 종류를, 아니면 장어 같은 거라도 함께 좀 드시자고 말하면, 할머니는 웃으면서 자기는 토끼삼시랑이랬다. 어려서부터 토끼 삼신이 점지해서 보낸 아이라고 놀림을 받았더란다. 소음인들이 대개 비위가 약하고 소화를 잘 못해 그러는 것이라고도 했다. 사상의학에서, 그러니까 사람들 체질을 크게 네 부류로 나누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어르신은 소양인이라서 식단이 달라도 한참 반대란다. 보리밥에 녹두나 팥이 좋은 사람과 백미나 찹쌀이 이로운 사람의 조합이란다. 돼지고기가 좋은 사람과 해로운 사람, 심지어 감자나 고구마로 끼니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 – 듣다가 머리가 아팠다. 나는 도통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충청도 사람인 내가 전라도로 남편 따라 내려와서 못 먹는 것이 없다. 홍어를, 심지어 홍어애도 먹는 것을 보면 다들 놀란다. 그런 나는 무슨 과일까 궁금하던 차, 아마도 한국인들 반쯤 된다는 태음인일 거란다. 덜 까다롭고, 어쩌면 덜 심각하고. 좋은 게 좋은, 비판보다는 수용에 능한.

또 이 할머니의 장기가 나온다. 음식이 다른 곳으로 튄다. 입맛 말고 귀맛 말이에요, 우리는 실은 뉴스도 골라서 듣는 거예요. 소리들 중에서 솔깃한 쪽만 낚아채서.

엥? 그럼 이 노인이 귀맛에 맞는 뉴스만 듣는다는 말인가. 나이에 비해서 하는 말들이 뭐랄까 한참 진보, 어느 때는 바보 쪽이다. 나는 대충 남편에 묻어간다. 남편은 절대 싫어하는 채널들이 있다. 그런 데서 느낌은 오지만, 직장생활 때문일까, 워낙 신중한 남편의 속내는 뭘까. 남편을 궁금해야할 일이 생겼다.

 

 

     무슨 헛소리인가. 지금은 어르신이 문제였다.

월요일에 만나 본 어르신은 눈이 하도나 퀭했다. 수혈도 하고 다른 링거도 맞으셨다는데 몸무게부터 빠졌다. 병원에 입원해서 일단 저녁에 편하게 잠을 좀 재워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더니, 웬걸, 밤이면 거의 난동을 부렸다는데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까지 나 있었다. 침대에서 억지로 내려오려고 하다가 여기저기 긁힌 것이란다. 길이가 심각했다. 밤이면 잠을 자지 않고 수없이 내려오려고 실랑이를 하다가 그리 되었단다. 아무 데나 바닥에 앉아버리고 완전 떼를 쓰는 통에 간병인 혼자서는 꼼짝을 못했고, 온 복도에 울리는 소리며 소음 때문에 간호사들은 물론 옆 병실 환자까지 달려오고 난리였단다. 왜 그랬을까.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을 이기지 못했을까. 동반자 짝꿍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했을까. 분명히, 잘 자고 와요, 라고 인사를 잘 했다는데 왜. 할머니는 그동안 잠을 못 잤었기 때문에 24시간 간병을 구해놓고 집에서 잠을 자는 것이 소원이랬는데. 잠이 치료일 것을. 그런데 쫓겨나다시피 퇴원을 해야 했단다. 그럼 이 지친 할머니는 다시 어쩌라고? 내가 마치 눈치를 봐야하는 형국이 되었다. 몸은 수급자 어르신 곁에, 눈은 보호자 할머니한테 고정된 하루를 보냈다. 세 시간은 금방 지났다. 퇴근 태그를 찍고도 할머니에게로 눈이 갔다. 그래도 대문을 열었다. 닫았다.

 

다음날 점심 식탁, 내 걱정은 기우였나 보다. 난데없는 초록색 전이 나왔다. 숱한 전들을 봤었지만 처음이었다. 맙소사! 아침에 케일을 갈면서 녹즙을 계속 먹었던 시절 생각이 났단다. 녹즙을 짜내고 나면 큰 찌꺼기들이 푸석하게 남았었는데, 이제 케일을 갈아놓고 보니 고운 입자들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점심 때 간단히 먹자고 부친 것이란다. 자색양파가 많이 들어있어서 색도 곱고 부드러웠다. 홍고추와 대파 흰 부분도 예쁜 고명이 되어 있었다. 나도 케일과 감자를 갈아서 크게 부침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해먹어 보았다. 집에서 부엌에 들어가는 시간이 나도 좀 늘었다. 좋은 징조일까, 이 할머니에게 옮아서 괜스레 힘이 드는 상황으로 가는 것일까. 여기는 난데없는 해파리냉채가 나오질 않나, 이렇게 부엌이 다시 생기를 찾아갔다. 신기했다. 어르신도 입원 전과 비슷한 정도를 회복한 듯 했다. 산책일랑 전혀 못들은 체 하면서도 여전히 식사를 즐기는 편이었다. 할머니가 오리무중이었다.

 

괜찮으세요? 퇴원하신 뒤에 밤엔 좀 주무세요?

병원이 명약도 아니고, 노환에 신선초가 있겠어요. 다만 견디는 거죠. 나이 들며 신경이 멀어지는 것은 즐거운 일, 이래요. 그런 시구가 생각났어요. 고통은 삐걱거리는 마루처럼 디딜 때만 소리를 낸다. 그러니 마루가 삐걱거리지 않도록 밟지 않으면 되겠지요. 내가 밟지 않으면 고통이 달려오지는 않을 거예요. 원래 고통이란 놈은 불청객이라고 하지만. 신경을 멀리 두면 여러 감정들도, 그러니까 고통도 멀리에…….

 

 

     인내인가, 자학인가. 아프면 아프다고 화나면 화난다고 꽥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건강한 법인데.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는 봉숭아꽃물 손톱을 보이며 생존반응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제 생물 오징어를 사가지고 들어오다가 따왔어요. 슈퍼 앞 자동차들 세워진 뒤쪽으로 봉숭아꽃들이 삐죽이 보이는 거예요. 이 사람 입원 동안 내가 시간이 있을 때에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반가웠죠. 그래, 나도 살자. 생존을 느끼자. 세 끼 밥 짓고, 네 끼, 아니 이제는 취침 전까지 다섯 끼 약 챙기고, 옷 챙기고, 이부자리 챙기고…… 그런 숙제 말고, 그냥 하고 싶은 것, 아무도 관심 없는, 나에게만 중요한 것 그런 것을 하자. 내 손톱에 봉숭아꽃 물을 들이자. 어떤 의무도 없는 무엇. 이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죠. 내가 살아있다고요! 생존반응!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 선샘, 내 말 우스운가 봐요. 이 사람 입원해 있는 동안 나팔꽃들 다 치운 것 알죠? 베란다 보았죠? 장미들도 올여름 진작에 다 베어버렸잖아요. 하긴 지 선샘 장점은 그런 것에 무관심 한 거다. 맞아요, 사람은 무심해야 건강해요. 늦은 봄에 50년도 넘은 넝쿨장미를 자를 때에도, 최근에 이 사람의 귀중품이 된 백장미를 통째로 자를 때에도 그저 운 나쁘게 그물이 생겼구나, 그런 정도였어요. 응애라고, 이름도 이상하더군요, 아이들 울음소리도 아니고, 분무기에 물을 뿌려보면 고운 거미줄처럼 나타나는 응애의 존재. 대체 어디에서 묻어왔을까. 베란다를 완전히 망쳤어요. 잘라냈는데도 게서 다시 새 가지가 나오면 또 다시 응애가 피어나는. 나중에는 장미 가지들을 아예 싹둑 잘라버렸죠, 너무나 짧아서 다시 잎이 날까 의심이 들면서도. 그런데도 근처에서 자라 올라오기 시작한 나팔꽃 줄기들은 안전할 줄 알았죠. 아니었어요. 줄기들은 뻗어 나가는데 잎들은 점점 시들고, 어느 순간, 이상하게도 왼쪽감기도 잊은 거예요.

잠깐만요. 왼쪽으로 감아요?

맞아요. 왼쪽으로, 그러니까 하늘에서 보면 왼쪽감기죠. 그걸 잊고 너풀대는 거예요. 그때서야 깜짝 놀랐죠. 덩굴식물이 감아오르기를 잊는다? 이건 본능을 잊은 거구나. 화들짝 놀랐죠. 단 한 송이의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고 있었구나.

그래서 둘이 다 죽었다고 생각했고 입원으로 갈라선 다음에 처음 한 일이 나팔꽃 줄기들을 다 걷어내는 일이었단다. 우리 둘도 죽었고 너희들도 미리 죽었었구나. 초록색 포장끈으로 안방이며 서재 창문 앞으로 쳐 놓았던 보조 줄들도 다 걷어냈다고, 포장끈 1미터도 안 남기고 죄다, 너절한 반쯤 마른 잎들과 함께 검은 비닐봉지에 구겨 넣었다고. 사람도 벼랑 끝인데 나팔꽃쯤이야.

 

결과적으로 어르신은 상처투성이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왜 그리 억지 고집을 부리며 반항을 했을까. 낯설어서였을까. 돌아온 어르신은 너무도 평온했다. 할머니는 어쩌면 자포자기일까 아님 억지로 적응하는 몸짓일까. 모르겠다. 놀랍게도 무심한 표정이다. 그러더니 봉숭아 꽃잎을 따서 돌아왔다. 정말 돌아온 것일까.

그게, 지 선샘, 나팔꽃 줄기를 다 걷어내고 포기했다 했죠. 그런데 소철에 기대어 올라가는 가녀린 줄기를 내가 잊었었나 봐요. 유난히 잎들도 작고 아무래도 큰 나팔꽃씨들 사이에 섞인, 어떻게 섞였을까, 못난이 재래종이었나 봐요. 며칠 전, 올해 처음 돋아난 소철 잎들이 생각나서 물을 주러 나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창백한 연푸른 보라, 엄지손톱만큼도 크지 않은 이 작은 얼굴이 몇 십 년 묵은 소철 둥치를 배경으로 피어있는 거예요. 진분홍 큰 꽃, 진보라 큰 꽃이 피어났을 줄기들이 모두 응애에 먹혀서 사라져버린 뒤에. 어디 틈새에서, 소철 그늘에서요. 그러니까 나팔꽃이 다 죽어버린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다 쓸어서 쓰레기봉지에 구겨 넣어 죽였는데도. 죽었는데 살아있네! 우리도 나도 죽었는데 살아있나 보네. 어쩌면 꼭 필요한 숙제만을 할 것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쓸데없는 뭔가를 해야 살 것 같았어요. 그것이 진짜 사는 것! 남을 위한 것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닌 것, 아무 쓸모없는 짓, 그것이 하고 싶었어요. 나 여기 이렇게 내 멋대로 살아있다고. 그러니 생존증명……

 

나는 팔을 내밀어 말을 끊었다. 처음으로 거의 엄마 또래 노인을 안아주고 싶었다. 제대로 다 안지는 못했지만 어깨를 지나 살짝 등에 손을 대었다. 한 팔만으로도 응원을 보냈다. 응원은 생각보다 쉬웠다. 아니, 평소 무심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무척 어려운 동작이었다. 노인은 눈을 들지 않았다. 몸이 미동하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이것이 교감이구나, 생각했다.

손톱을 포함해서 손가락 끝 전체에 붉은 물이 든 채 초록색 케일전을 부쳐서 내오는 노인의 손은 유난히 심줄 투성이다. 그런데 곱다는 생각을 한다. 내 남은 평생 봉숭아꽃물 같은 허튼 짓을 따라할 일은 1도 없겠지만, 누군가는 봉숭아꽃물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더 잘 알게 될 것 같다. 그럴 것 같다.

 

 

     일들은 예상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어르신이 안정되면서 봉숭아꽃물로 생기가 돌던 집에 119가 오는 일이 생겼다. 점심시간, 보통 때처럼 숭늉과 누룽지까지를 식탁에 올려둔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떴다. 늘 그러듯이 베란다로 나갈 일이었다. 그렇게 숨을 돌리고 와서야 점심 자리에 앉곤 한다. 그런데 베란다가 아니라 소파로 방향을 틀더니 그대로 털썩! 그것이 끝이었다. 움직이지를 않는다.

놀란 나는 어르신을 식탁에 혼자 내버려두고 소파로 달린다. 숨을 쉬는 것 같기는 한데 의식이 없다. 119를 부른다. 이를 어쩌나. 119가 오면 누군가 따라가야 하는데 어르신을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할머니의 전화기를 든다. 연락처에 몇 개의 중요 번호들이 뜬다. 통화를 한다. 먼 데 사는 자식들이란…….

 

어쨌거나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급하면 혼자서라도 119에 실어 보낼 생각이었다. 내 책임은 어르신이니까. 그래도 만일을 몰라서 우리 복지센터에도 전화를 했다. 담당 사회복지사라도 와주면 둘이서 나누어 볼 수 있으니까. 다행히도 할머니는 곧 의식이 돌아왔다. 119가 도착했을 때는 또박또박 말도 했다. 평상시보다는 한참 느린 속도라 좀 이상했지만, 애써 자기가 의식이 있고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을 했다. 말의 속도가 왜 이러지…… 내 불안감에도 구급대원들은 혈압이나 맥박이 정상에 가깝다고, 의사소통에서도 괜찮을 거라고 하고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점심 식탁은? 얼마나 다행인지, 다행일까, 어르신은 거실의 소동에도 식사를 계속했다. 그럴 수 있다는 것, 신기하기도 했다.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그것이 병이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뒤 가만 앉아있던 어르신을 소파로 모셔다 드렸지만, 곁에 앉아서도 누워있는 할머니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침대로 쉬러 간 다음에야 어르신에게 상황을 설명해드렸지만, 입력이 되었을 지는 미지수다.

 

조용하다 못해 아예 말이 없었지만 나름 의사소통은 되고 있던 어르신이 상당히 변했다. 최근 퇴원한 이래 병원에서의 불편감을 기억하시는지, 집에서는 오히려 미소를 짓는다. 말은 헛나간다. 우리 여행 가요, 시원해지면. 그리스, 내가 가고 싶다고 그랬었죠. 할머니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리스, 거기 갔었잖아요 함께. 폐허들, 흔적들인가 너무 좋아하고서는. 델포이도. 어르신은 눈만 크게 떴다. 그랬나, 언제. 그럼 메소포타미아는…….

거기가 어디야. 무슨 소리인지. 여기 있는데 여기를 떠나 있는 듯 했다. 이 어르신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 적이었더라. 2019년 겨울, 12월 6일이었지 아마, 그때 벌써 미세먼지를 조심하느라 마스크와 면장갑을 끼고, 너끈히 산책을 하던 분이었다.

이듬해 초 코로나라는 역병이 온 나라를 삼켰다. 그 사이 내 인생에서 변화라면 이별이 제일 심각했다. 직접 코로나로 숨진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지만 숱한 죽음들, 영원한 이별들을 맞았다. 그 중에서도 내 어머니, 남편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그것들은 어쩌면 고아가 되면서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다.

물론 요양보호사로서 만났다가 병원 또는 요양원으로 가시면서 헤어진 수급자 어르신들의 뒷소식도 듣곤 했다. 어르신, 그것이 요양보호사인 우리가 장기요양수급자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수급자 할머니들은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러면서 우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아줌마라 불러댄다. 어이,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수급자 어르신들은 대부분 할머니들이었고, 왜 할아버지들은 적을까 했는데, 가만 보니 할아버지들은 대개는 요양원에 맡겨져 있다. 그 고약한 담배냄새 할아버지는 어찌 되었을까. 고엽제 피해자라고 했었다. 우리 요양보호사들 누구도 일주일 이상을 견디지 못해서 복지관 측에서도 손을 들고 포기했던 경우였다. 내가 돌보았던 수급자 할머니들은, 지금의 오전 할머니도 그렇지만, 재가돌봄 세 시간의 도움으로 버틴다. 그것도 이상하긴 하다. 나머지 21시간은 혼자서도 괜찮다는 말인가. 암튼 더 어려워지면 할머니들도 요양원으로 보내진다. 잠정 이별, 그리고 영원한 이별. 생존반응이 사라지는 것이다.

 

보세요, 봉숭아꽃물 그런 건 생존반응이 아니었어요! 119가 다녀가서 확실하게 생존반응이 잡힌 거죠! 다음 날 병원 가서 온갖 검사하면서 잡힌 거고요, 법적으로 확실하게. 하필 119로 생존반응을 찍다뇨! 정말 좀 조심하세요. 어르신 밥은, 밥상은 좀 대충 준비하셔도 되고요. 혼자 계실 때 또 쓰러지면 어쩌시려고요? 가족들하고 의견들…….

내가 수급자가 아닌 보호자 할머니의 건강에 참견하는 것은 월권이라면 월권이다. 내과며 신경과 여러 검사들에서 괜찮다는 결과라는 것을 듣고도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나왔다.

혼자라뇨! 놀리지 말아요. 우리 여기 둘이 살고 있잖아요. 법적인 생존반응 그런 건 모르고요. 암튼 신경과에서 뇌가 나이보다 훨씬 젊다고 하니까 안심이죠. 시타프렉스정 처방해준 것은 먹지 않고 버티려고요. 그때 깨어나서…… 이렇게 어질러 놓고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좀 무서웠어요. 밥은, 그게요, 저이가 언제 곧 못 먹게 될지, 내가 언제 못 차리게 될지, 신경이 더 쓰이죠. 낭떠러지니까 더, 할 수 있을 때 해야죠. 그럴 밖에요.

 

세 사람이 숨 쉬고 있는 공간이다. 너무 조용하다.

봉숭아꽃물 손톱 할머니가 말한다. 그런데, 오늘은 좀 어떠세요? 무슨 말 좀 해보세요.

어르신이 말한다. 할 말이 있어야 하지요.

어떻게 할 말이 없어요! 왜 할 말이 없어요!

그냥. 삶이 좋아서.

삶이 좋아서 – 라고 말하는 것, 병중에도 그리 말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어르신 나름의 생존반응일까. 미소를 머금은 초월적 생존반응.

세 번째 사람, 나는 침묵한다.

 

 

     이별이라는 단어가 다시 내 머릿속을 맴돈다. 여기 어르신과도 이별이 가까움을 느낀다. 하긴 모를 일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그렇다. 정 같은 것이 쪼끔 들었다고 해도, 젖꼭지 같은 이 집 초인종을 만지지 못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비밀인데, 소리가 나지 않은 채 달려있는 그것을 나는 늘 만지고 다닌다.

아차, 초인종 젖꼭지 말고 다른 무엇은 없었나. 뭔지 모를 인간적 대접 같은 것, 우선 출근하자마자 기다리는 갓 지은 점심밥이다. 누가 나에게 이만한 따뜻한 밥을 차려준 적이 있었던가. 엄마의, 어머니의 밥은 익숙했지만, 오랜 병석의 아버지 그리고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밥은 그냥 밥이었다.

그러고 보니 근년 들어 나는 자존감이 상승되는 기분 좋은 시간들을 보낸다. 이상한 점이기도 한데, 수급자 어르신이 불평은커녕 워낙 말이 없다 보니 오히려 보호자 할머니하고 많은 대화를 나눈다. 언젠가 들었던 가언인가 정언인가 하는 그런 어려운 말은 제발 사양하고 싶지만, 아무튼 듣는 동안에는 뭔가 심오해진 기분이 된다. 예쁜 쓰레기 사서 버리고 헌옷 수출하는 그게 수출이냐고도, 아침에 일 나가서 해도 지기 전에 영안실로 향하는 인생은 막아야 한다는 둥, 때로는 사회비판적인 예사롭지 않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런 때는 내가 3층 건물 때문에 부과되는 건보료 폭탄을 줄이려고 4대보험이 되는 이 하찮은 직장에 다니는 꼼수를 들킨 것 같아 머쓱해지기도 한다. 하긴 전직 대통령도 누구도 다들 그리 하는데, 법대로 하는 일이 무에 대수랴. 다만 나도 모르게 최저생계비, 생활임금 같은, 평소에 뉴스에서 흘려듣던 단어들을 유념하게 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정의는 생떼라는 말, 가톨릭대 교수 누구라 했는데, 암튼 모르는 이웃들과의 유대감, 공감? 귀맛대로 듣는다는 이 노인에게서 공감 능력이 전염되었을까? 들리는 대로가 아니라 생각을 곁들이는 순간이 많아짐을 느낀다. 먼지, 먼지쯤으로 취급되는 사람들도 이웃이다. 사회적 이웃들이 – 역시 이 노인에게서 들은 단어다 –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끼는 순간은 마법의 작용이다.

 

물론 이런 장면들을 이 집을 떠나면 금시에 잊고는 원래의 행복한 세상에 빠지는 것이 내 장기이다. 집안 내력일까. 심각한 고민은 먼 데 이야기다. 톡톡 튀던 작은언니가 놀랍게도 수녀님이 된 이래, 앞서거니 뒤서거니 영세를 받은 식구들 중에도 탁월한 신자는 없다. 영세 이후 언젠가, 어쩌면 곧 바로 다음 순간에 하느님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저기 멀리에 계신다. 나는 여기 오늘을 사는 단순한 지은이, 평일 아침이면 근무를 위해 집을 나선다. 4대보험이 되는 직장이 필요하니까. 그것도 오후 4시면 해방이다. 그리고는 대체로 자유로운 저녁시간을 산다. 왜 사느냐, 무엇하러? 그렇게 머리 아픈 물음들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늘도 편한 마음으로 유예된 이별의 시간을 산다. 고통도 부르지 않고 멀리에 매어둔다는 노인도 있는데, 예정된 이별쯤이야 당근 미루어 두면 될 일이다. 좋아, 생존반응 이상 없음! 그렇게 날마다 시작이다. 


--------------

2023.11.  『온빛소설문학』, 광주전남소설가협회, 134~155쪽.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 4 - 투틸로  (0) 2024.01.15
침묵 3 - 5월  (0) 2024.01.15
이별  (3) 2024.01.15
침묵 2 - 4월  (0) 2023.06.18
시간  (0) 2023.01.07
Posted by 서용좌
소설2024. 1. 15. 18:20

 

 

 

     이별은 생각할 틈 없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그런 무엇인가 보다. 그런데 실은 어려운 무엇이었다. 살면서 여러 번 겪었던 이별들 어느 하나 어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잘한 이별들도 그 순간에는 아팠다. 어린 시절 친구와의 이별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떠나가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지만, 간혹 선생님 아버지를 따라서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서 전학을 가던 친구들과 헤어질 때는 왠지 모를 부러움을 합쳐서 슬프게 울면서 이별했다. 그런데, 그러고는 끝이었다.

오히려 너무 큰 이별의 순간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것을 맞기도 했다. 그러고는 오래 앓는다. 오랜 병석의 아버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는 그 큰 이별을 말 그대로 멋모르고 맞았다. 어둡고 우울했던 나날들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았고, 막상 이별의 시간은 그냥 집안 행사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지나갔다.

 

아버지의 부재는 나중에야 천천히 실감으로 다가왔다. 난생 처음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꿈꾸던 시절에 아버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별보다 이별 후가 더 아팠다. 대학진학이 아니라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가친척 언니 하나 믿고서 서울행을 감행했던 시절, 냉골은 매서웠다. 연탄 값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불을 피울 시간이 없었다. 늦은 밤에 불을 피웠다면 언제 방이 따뜻해질 것이며, 이른 새벽에 나갈 때서야 펄펄 타는 연탄불은 아까워서 어쩌나 말이다. 이래저래 냉골에서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하면서 고향의 어머니 곁을 생각했고, 그러다가 그 곁에 누워계셨던 아버지 또는 하늘의 아버지를 그렸다. 아버지는 아득히 멀었다.

당연히 내 결혼식에 아버지가 없었다. 불쌍한 신부, 결혼식장에서 부모님을 다 누리지 못하는 불행한 신부였다. 아버지, 울 아버지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를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서럽도록 그리웠다.

 

결혼 이후로는 사는 일이란 것이 끝없는 이별의 연속임을 잠시 동안 잊었던 것 같다. 이별이니 그런 감성적인 말들은 사치라 느낄 만큼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다. 반지하에서 탈출하는 목표, 수도권에 집을 갖는 일,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기, 가능하면 빨리 건물주가 되기, 노후 준비, 노후 준비…….

반지하방은 둘이라서 덜 추웠다. 그래도 추웠다. 근무시간 때문에 잠시 잠시 혼자일 때는 여전히 추웠다. 서울 첫겨울의 냉골을 생각하면서 참았다. 그때는 간호조무사 학원 다녀오고 알바까지 하고 들어오면 연탄불을 피울 재간이 시간이 없었다. 딸아이를 낳았고, 셋이 되어서 더 따뜻했고, 반지하방을 으샤 으샤 어거지로 탈출했고, 수도권에 집을 가졌다. 분홍빛 내 인생에 이별 같은 것은 아득했다.

 

이별을 어머니와 관련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란 멀리 있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였다. 그 자리의 어머니는 마을 모두와 가깝게 지내시고, 아무튼 동네 친구들 누구랑도 잘 어울리시니까. 특별한 노인병이 없어도 마을 병원에도 성당에도 잘 다니시니까 몸과 마음이 건강하신 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레 이별이 왔었다. 엊그제 같다.

고아가 되었네요! 초상을 치르고 곧 다시 일을 나갔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고아가 되었어요, 무조건적으로 지 선샘 믿어줄 사람은 이제 없으니. 오후 수급자 어르신의 보호자였다. 요양보호사인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수급자가 대부분이지만 드물게 그들의 보호자도 있다. 간호조무사 30년 마치고 시작한 이 일도 벌써 6년째다.

고아가 되었네요! 처음엔 놀라웠지만 옳은 말이었다. 그 말과 그 시간이 도망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고아가 되었음을 깨닫고 나서는 오래 오래 울었다. 갑작스럽게 완전한 혼자가 되었다는 그 느낌은 오랜만에 경험한 것이었다. 혼자다. 혼자다. 그 때는 똑같이 내 피로 연결되어 있을 딸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남편은 어딘가 밖에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은 옆이지만 밖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꼈다. 사람은 어차피 홀로 와서 홀로 간다는 그런 말도 있지만, 새삼스럽다. 나는 혼자였다. 나는 혼자다.

 

 

     혼자 있을 용기만 낸다면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게 될까,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오랫동안 의존하고 살아온 것이 분명했으니까. 부지런하고 집안일도 잘 해주는 성실한 남편, 별로 나무랄 데 없는 남편을 의지해온 것은 당연했다. 남편은 심하다 할 정도로 절약하며 산다. 그 나름대로 충분히 단단한 내가 다 불편할 정도다. 절약 정신에 절어있으니까 바람도 피지 않을 것이다. 피지 못할 것이다. 바람에는 돈이 먼저 축이 날 것이니까. 그 점에서는 남편을 믿는다. 이상한 믿음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도 몰러? 바람이라는 것이 나고 싶어 나고 안 나고 싶어 안 난다냐? 편의점이 늘상 하는 말이기는 하다. 그려, 누구라도 바람피우자고 작정해서 바람이 나는 것은 아닝께. 다시는 그럴 일 없다고 맹세해 놓고도 또 그 짓을 벌리고 그라제. 집집마다 생각보다 심각혀. 세탁소는 세태를 많이 의심하는 투다. 요새 가만 보면 남정네들만 그라는 것도 아니더만. 너만 사람이냐, 나도 사람이다, 그 식이더만. 집안 아짐뻘인디, 긍께 나이도 솔찮혀, 아 대놓고 맞바람을 피워붕께 복잡해져불대.

됐네요. 넘의 집 야그 그만들 하쇼. 내가 여기 말로 말을 끊지 않으면 끝도 갓도 없이 바람 이야기에 열을 올리곤 한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연속극보다 더하다는 것이 두 사람이 일치하는 대목이다. 그에 비하면 젓가락 언니는 정의파에 가깝다. 사람을 그로코롬 못 믿으먼 갈라서야제, 먼 짓들이댜냐. 그렇게 일갈하고 만다.

아줌마들이 모이면 일단 처음에는 요즘 뭐해 먹어 하면서 먹거리 타령으로 시작하다가 마지막 관심사는 남녀상열지사다. 여자들이 외로움을 타서 그런가. 나는? 저 밑바닥 속내로는 나도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언젠가 보호자 할머니랑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머니 일주기에 다녀와서였다.

사람이 용기가 있음 외롭지 않다고 그러셨죠. 용기가 있다는 말은 뭘까요?

내가 먼저 말을 꺼내다니. 이런 실없는 말을 나눌 사람이 내 주변에 없었나 싶었다. 의외로 할머니는 깜짝 놀라는 투였다.

아이쿠, 지 선샘, 외로움 타는 거요? 어른이 왜 다시 소녀가 되어갈까.

어른은 뭐.

그니까 그게요, 용기라기보다, 참어른은 외로움 안타죠. 혼자라는 느낌에 외로움을 타거나 고독감에 젖는다면 덜 어른이야, 바꿀 수 없는 것을 원하니까요. 고독은 존재하는 것들의 숙명 같은 것. 솔리뛰드라고, 또 어렵게 말해볼까요? 도망갈 텐데?

도망…….

아차, 이 할머니가 어렵게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도망친다는 것을 완전히 간파했구나. 할 수 없이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프랑스말이라서 어려워 보일 뿐, 고독이라는 단어, 특히 군중 속의 고독을 말한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친구들 속에서도,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인간은 외롭다. 어차피 혼자인데 혼자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방법이 없죠, 외로움 탈밖에. 그게 놀랍게도 아까 그 솔리뛰드라는 단어에는 해방감 같은 뜻도 함께라네요. 누구나 외로움을 싫어한다지만 은근히 혼자만의 무엇인가를 탐하는 그런 속내도 있다는 거예요. 고독감이자 해방감 같은 것.

설마요. 근데 정말 어려운 말이네요.

세상의 말 다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면 그리 된답니다. 그런가보다, 라고 살면 된답니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좋아하는 가사예요, 뮤지컬 서편제에서.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

엉뚱한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내가 뭐 많은 어려운 단어들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몇 개 더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그저 고독하다고 느끼면 고독감, 해방되었구나 느끼면 해방감, 그런 거죠! 나, 이 할매는 어때 보이나?

그거야, 스물 네 시간 동반자랑 함께 있으니까 외로울 틈이…….

동반자? 지 선샘이 어느새 우리집 양반 말투를 쓰네. 그래요, 동반자, 동반자랑 거의 스물네 시간 붙어 있네, 못 말리는 바퀴벌레 한 쌍! 그런데 혹시 내 얼굴 고독해 보이지 않나? 좀 멋있게! 저이가 근래에 동반자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마찬가지로 고독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을 걸요. 그런 거랍니다. 내가 그걸 느껴, 고독하겠구나! 우선 말들을 다 못 알아듣잖아요. 얼마나 외로워요. 내가 말했었나, 눈을 못 보면 사물들과 단절된답니다, 그런데 말소리를 못 들으면 사람들과 단절된다고. 그 유명한 헬렌 켈러의 말이래요.

헬렌 켈러, 알아요. 듣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고, 아, 말도 못했다는 사람. 그런 말을 어떻게 했다죠? 글로 썼나?

호킹 박사 알죠? 젊어서부터 루게릭병을 앓던 물리학자, 그 사람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나름의 말을 했다죠. 표정을 말로 변환시켜주는 무슨 기계를 사용하면서 자기 말은 미국영어라고 했다죠. 미국산 기계니까. 그런 유머라니. 뭐, 헬렌 켈러 시대에도 그 나름의 표현방식이 있었겠지요. 표현보다는 생각이 중요하죠. 생각이, 느낌이 있으면 사람이에요.

생각이, 느낌이…….

봐요, 지 선샘, 외로움 탈 때는 반대로 말하면 행복한 시간일 수도 있어요. 고민이 너무 크면 외로움이고 뭐고. 하다못해 전에 오전 집에서 속상한 날 부글부글 화났다고 했었잖아요. 결국 그만 둔 집. 그럴 땐 외로울 틈 없죠? 그냥 맘 편히 살아요. 공을 봐요! 공 속에 공기방울들이 팽팽할 때 공이 톡톡 튀겠죠. 공기방울들이 외로움 타면 공이 흐물거리겠죠. 그냥 팡팡 튀고 살아요!

팡팡 튀고…….

 

그런데 올 여름은 팡팡 튀기에는 더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정말로 지구가 점점 더워진대나? 영국 같으면 우리나라보다 북쪽에 있을 것인데 40도를 넘었다거나, 잘 못 들었나 싶은 뉴스들도 많았다. 봄에도 동해바다 쪽 산불은 200시간도 넘게 타올랐고, 진화는 왜 그리 어려운지. 무서운 뉴스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강진으로 100명이 아니라 거의 1,000명이 매몰되었다 했다. 천재는 어쩔 수 없다지만 인재도 만만치 않았다. 테러도 무차별 총격도, 이른 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남의 나라들에서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가을 들어서 또다시 이별을 맞았다. 당연한 그러나 급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몇 년을, 놀랍게도 몇 년 동안을 침대에 누운 채 콧줄 급식으로 연명하시던 시어머님과 이별을 했다. 그 긴 시간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평안을 찾으신 것이겠지만, 이별은 이별이었다. 평소에는 냉철하다 못해 냉랭해 보였던 남편이랑 그 형제들이었는데, 정작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아들들은 말 그대로 대성통곡이었다. 그 통곡을 잊지 못하겠다. 어른 남자들이 그렇게 울 줄이야. 어머니의 옛날, 고생고생만 하셨던 옛날을 울고 또 울어댔다. 어떤 장면들을 추억하다가 울고 또 울고, 심지어 좋아하셨다는 노랫가락을 부르다가 또 울었다.

이번 이별은 실은 서러움보다는 걱정을 송두리째 안고 왔다. 혼자 남은 아버님을 어떻게. 그동안 아버님은 크게 아프신 곳은 없었지만 어머님이 계신 요양병원에 함께 계셨다. 이제 집으로 오셔도 오셔야 되겠지만 어떻게. 누가 아버님을 돌보는가. 어느 아들도 손을 들고 나서지 못했다. 홀 시아버님 모시기란 어딘지 껄끄럽겠다 싶을 며느리들의 입장을 서로 눈치 보면서. 이런저런 망설임으로 아버님은 그냥 요양병원에 남아 계셨다.

 

눈치 보기에 어색해할 시간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수년 간 콧줄 끼운 어머님 옆에 들락거리며 하루 종일을 보내셨던 아버님은 할 일이 없어져서인지 곧 바로 사그라지듯 숨을 거두셨다. 낮이면 혼자 이 방 저 방을 배회하시다가 한 달도 채 안된 어느 날 아침 깨어나지 않으셨다는 통보였다. 그 한 달도 안 될 시간을 왜 모셔오지 못했을까. 내 마음이 이럴 때 남편은 어떨까.

예상치 못했던 아버님의 장례식장은 의외로 조용했다. 눈물들이 다시 고일 시간이 짧아서였을까. 반쯤 돌아가신 상태로 연명치료를 하시던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흘린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시간 눈물을 준비해 두었던 것일까. 세월 따라 그냥 계속 쌓였었나. 세월 따라 쌓이는 것이 주름만이 아니라 눈물도 있었구나 싶다. 그 생각 때문에 나는 더 울었다. 평소의 나는 눈물이나 쌓아둘 사람은 아니었는데. 눈물 쌓일 틈이 없었을 줄 알았는데. 세상엔 예외가 없고 나도 사람이니 나에게도 눈물이 쌓였나 보다.

 

 

     눈물의 맛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니 그 전에 눈물이 쌓였을 순간들을 기억해보기로 했다. 아직 교복을 입은 여학생일 뿐인데, 아직 어른도 아닌데, 벌써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버지의 부재는 사실은 난데없는 청천벽력은 아니었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 그때는 울만큼만 울고 그쳤다. 오랜 병중에 적극적인 존재감을 놓치셔서였을까. 또 아버지들은 대강 먼저 떠나셨고 동네에도 비슷한 집들이 많았다. 집들은 비슷한 상태로 집이었다.

설움은 집 없는 설움에서 시작되었다. 냉골에서 울면서. 울면서 아버지 생각을 더 했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친척집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래서 튼튼한 집을 지어줄 것 같은 ‘선 선샘’이 좋았을 것이다. 얼마나 믿음직했던가. 새벽 시장에 가서 두 시간이나 알바를 하고 출근하는 남자. 저녁이면 앞 건물 다른 병원에서 야간을 뛰는 남자. 예쁘지도 않은 내가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학교 때 새침 얌전한 애들보다는 털털한 애들이 남편 복도 많다고 하더니!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내가 점심을 함께 먹는 오후 수급자 어르신집 사람들은 피곤과다. 매끼 반찬을 새 그릇에 조금씩 담아낸다. 김치 따로 생채 따로다. 물김치에 더러는 파김치랑 서너 가지 거뜬, 새로 만든 기본 찬이야 당근 새 접시에 담아낸다지만, 어떻게 모든 걸 매번 새 접시에다. 이 무슨 바보 짓!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까 세뇌되었나. 이런 일을 일없이 하고 있는 할머니가 답답해보이던 것에서 정갈해 보이는 쪽으로 바뀌려고 한다. 먹고 사는 일에 정성을 보이는 것이, 사는 일이 목적인 것 같아 보였다. 헌데 다른 목적은 없는 것일까.

 

저, 그런데, 특별히 하시는 일은 없는 거죠? 보호자님 말씀요.

나, 내가 하는 일요? 날마다 살잖아요.

아이참, 이렇게 사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이죠. 이게 뭔가 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사는 일은 일이 아니다. 찬성 못하겠는데요. 인생은 사는 것이 목적이요. 날마다 자~알 사는 것이.

아니 뭐, 젊을 땐 뭔가 이루려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자 붙은 직업, 건물주 그런 거요?

아니, 뭐~래도, 뭐든지요.

건물주가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 늙어서 의사 판검사 사위를 보려고 무엇인가를 한다. 그건 옆길인데요. 또 어렵게 말할까보다, 도망가라고!

언제 도망을…….

갈 거면서.

아뇨. 그럼 판사, 아니 요새 제일 잘 나가는 검사 사위가 옆길이면 옆길 아닌 것이 뭔데요?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사나요. 다만 뭔가 되려고, 뭔가 가지려고만 한다면 그건 옆길이다. 또 어려운 단어로는, 자신에게 던지는 가언적 명령이다, 그런 말이죠. 검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고시를 봐야 해, 그러니 좋은 대학에 가야 해, 그러니 일단 죽어라 공부하는 거야! 이런 명령은 모두 수단에 매달리는 것, 그러니까 가언적이고. 반대로 정언적 명령이라면 뭔가 조건 없는 명령, 절대적으로 원하는 행동을 향할 때를 말하죠. 내가 어떤 의지로 뭔가를 행하려고 할 때면 그 원칙을 세울 것 아녜요? 그때 그 원칙에 따른 행동이 나의 이익과 처지를 남의 이익과 처지에 비해서 특권적인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특권을 피하는 것이 우선……

 

아이쿠 머리야. 확실히 잘못 걸렸다. 가언 정언이 뭐야. 한국말이야? 특권을 부러 피하라고? 포기하라고? 모두가 특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달리고,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공하려는 것인데! - 이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노인과 이야기하다 보면 어디서부턴가는 뒤틀려 버린다. 이 미친 말, 내가 볼 때는 미친 말이다, 누가 이런 말을. 일단은 무조건 성공하기, 누구라도 성공을 해야 기본적으로 먹고살기 편한 세상인 것을.

 

그게,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자면 우선 특권을 피해야, 피하려고 해야만.

보편…….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정의니까요. 모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그만 둡시다. 학교도 아니고. 다만, 자유가 거의 폭력이 되어있는 세상이다보니, 진정 자유인이 어디…….

나는 벌써부터 어느 부분에서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지 않으니 대꾸도 못할밖에. 내 몸은 거기 그냥 있었지만 맘은 이미 도망쳤다. 도망친 것을 알았는지 다시 혼잣말이다.

미안! 내가 공부를 하다 말아서, 그래서인지, 뭔가 생각에 꽂히면 그만……. 그런데 참 밤새 샤워 꼭지가…….

 

자유가 폭력이라니, 뭐야! 다행히도 보호자 할머니는 전혀 엉뚱한 말로 현실로 돌아와서 화장실로 향한다. 나도 따라 들어간다. 샤워 꼭지가 정말로 끊어져 있다. 플라스틱도 아닌 쇠붙이 종류인데! 어떻게 해서 그리 되었는가는 모른단다. 한밤중에 깜깜한 화장실 안에서 소리가 들리더란다. 급히 불을 켜고 보니 어르신이 부러진 샤워꼭지를 들고 서 있더란다. 출입문 방향을 잊었는지 열지도 못하고.

지금은 낮잠치고는 곤히 잠들어있는 어르신이 밤이면 시공간 적응에 힘들어하는 일이 잦아졌단다. 깜깜한 허공에다 대고 보이지 않은, 어르신에게는 보이는 상대에게 구체적인 말을 하거나,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을 찾는 일 같은 것, 일상생활이 어려운 현상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있었다.

 

 

     이별은 늘 가까이 있다더니, 몇 년간 안정적인 재가돌봄을 해오던 관계가 끝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후 말이다. 언제라도 수급자 어르신이 먼저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조금 다르다. 보호자 할머니가 이겨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이 할머니는 빈 방에 잠깐 쉬러 가는 일이 잦아지더니만, 요사이는 아예 잠이 들어버리는지 내가 퇴근하는 시간이 되어도 조용할 때가 있다. 환자를 인계하지 않고 퇴근한다는 것은 찝찝한 일이다. 어르신을 덩그러니 거실에 남겨두고 퇴근하면, 혼자서 안방, 화장실, 부엌 냉장고 쪽으로는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물, 음료수, 심지어 아이스 바 정도는 곧잘 꺼내 드시겠지. 냉장고 특히 냉동실 문을 잘 닫아야 할 텐데. 아직까지는 그런 사고를 낸 적은 없다. 그건 사실 사고 축에도 들지 않는다. 인지장애를 겪는 환자들에게 큰 사고란 넘어진 채로 일어나지 못하거나 혹은 가스레인지를 틀거나 하는 일이다. 이 어르신은 평생 라면도 못 끓일 만큼 부엌엔 꽝이라니 그 쪽은 염려 없다.

그냥 퇴근해? 늦게 퇴근한다는 것은 내 사전에는 없는 일이다. 원칙대로다. 할머니가 낮잠에 든 첫날은 시간에 맞춰 태그를 찍고 집을 나섰다. 차에 키를 꼽다가 흠칫 놀랐다. 어르신이 내 뒤를 따라나와버리는 상상, 그것은 끔찍했다. 사고가 나기 전에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이 맞다. 다시 들어가서 깨웠다. 이 할머니가 핸드폰으로 날아오는 안전문자에, 특히 배회하는 사람들을 찾는 문자에 과민반응인 이유가 있겠지. 어르신이 어떤 날엔 아침에 신문을 들여놓기도 한단다. 어쩜 혼자서 나갈 수도 있겠다고, 할머니가 놀라곤 한다.

 

 

     하루는 할머니가 쉬고 있는 방 쪽에서 전화 목소리가 컸다.

어쩌라고! 청력장애자를 누가 일일이 돌봐줄 거냐고! 나도 함께? 난 아직 그러고 살 단계는 아니라고!

주변 사람들이 특히 의사인 친척들이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잘 지경인 할머니를 보다 못해서 어르신을 요양병원에 입원시키자 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르신을 함께 돌볼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수도권으로 모시라는 권유들 – 그들 중에는 의사들이 가장 적극적인 것 같았다.

듣기 싫은 소리도 자주 들으면 설득이 되는지, 하루는 할머니가 실버타운 이야기를 했다.

재가요양 수급자는 실버타운 들어가 살기 어렵겠지요?

글쎄요. 저는 그 부분은 아는 것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수급자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엘 가야죠. 모르긴 해도 실버타운엔 어르신 돌봐줄 사람은 없을 걸요.

재가요양 되는 곳도 있나 봐요, 수도권에는.

그래요? 실버타운이란 게 보통 호텔 비슷한 곳인가 했네요. 공동으로 식사를 해주고, 공동 프로그램도 있고. 그런데 이 살림 정리가 괜찮으시겠어요?

정리, 글쎄, 정리라면 결혼 때 더 큰 정리를 하고서 출발하지 않았을까요? 혼자 지내던 삶에서 누군가랑 삶을 합치는 일, 그것이 더 대단한 결정이었겠죠. 이제는 이사, 좀 특별한 이사 정도.

하긴 그렇군요. 결혼 하실 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난 그저 두 사람이 방을 합쳐야 몸과 맘이 편해서,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당근 씩씩한 출발이었어요.

 

씩씩한 출발선을 돌이켜 본다. 아득하다. 분명한 것은 반지하 탈출, 그리고 일차 목표는 내 집 그리고 건물주가 되는 것이었다. 하수도가 막혔어요, 2층 학원이나 어디서 불평이 들어와도 그리 싫지는 않다. 내가 월세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입장이니까. 그렇다고 세상의 지탄을 받는 건물주는 절대로 아니다. 최고위과정이나 다녀서 인맥을 쌓고 세상을 주물럭거리는 그런 건물주들, 먹물들이 죽어라 공부해서 판검사 되어도 그 밑으로 들어간다는 어마무시한 건물주들은 우리랑은 완전 다르다. 성실하게 벌고 절약 또 절약해서 이만큼 이룬 것, 그게 어때서.

물론 오후 할머니 같은 사람은 건물주라면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한번은 이 집에 자매들이 모였는데, 갑작스레 이 할머니를 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크게 부동산 재테크에 성공하여 떼돈을 벌면 그것은 누군가가 가져가야할 돈을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돈이 총 100억이고 인구는 100명이라면 똑같이 1억씩 갖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할 사람이라고. 그러자 이 노인이 말했다. 뭐야, 공산주의자 취급이네! 나 절대 아녀! 그냥 여남은 사람이 90을 독점해버려서 나머지 사람들이 허덕인다면 그런 게 문제라는 말이지. 온통 허덕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행복할 순 없지 않느냐고.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밥 못 먹을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아야 누군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뭐야, 형제자매들 사이 대화에서도 이론이구나. 아무튼 간에 누구나 더 잘 되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특혜도 피하고 재산도 굳이 집착 말라는 개똥철학이 어디 통하는 세상인가 말이다. 나는 세상 따라 사는 현재형이다. 맞벌이가 대세니까 맞벌이 하고, 절약해서 건물주 되는 것이 모두의 꿈이니까 건물주가 되었다. 재롱둥이 깔깔거리는 손녀만 봐도 기쁘다. 폰에서만 봐도 행복하다. 이 아이도 곧 건물주 되는 꿈을 갖겠지. 농막에 가서도 힘들기 보다는 뿌듯함이 크다. 땀 흘리고 나서 따끈한 국밥 사 먹으면 행복하다.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다. 이 어르신네가 실버타운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딱히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상황이 정리 되는대로 따르면 된다. 가만, 이것도 일종의 이별인가. 재가요양이란 인연은 늘 바뀌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수급자들이 오전 방문을 원하기 때문에, 이 오후 수급자가 실버타운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오후 시간 일을 찾기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그럼 오후를 잠시 쉬어도 좋고.

 

며칠을 그렇게 보냈는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실버타운에 대한 관심 말이다.

끔찍한 뉴스도 있었네요.

네?

실버타운 사건 말이에요. 80대 후반이면 꽤 노인들인데, 그때까지도 부부싸움을 하면. 그러니까 부부싸움 끝에 할머니가 목을 맸다고. 모두들 처량했을까 무상했을까.

말로만 실버타운 이야기를 했었는지, 할머니는 부정적인 소식들만 찾아보고 있었나 보다.

자살한 노인 이야기가 또 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보통 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식사며 생활 전체가 불가능한 아버지를 자녀들 입장에서는 실버타운에 모시기로 했겄제. 근데 입주 겨우 일주일 후, 노인이 아침식사에 나오지 않아 방에 가보니 가버렸다네요. 들어올 때 미리 준비했었나. 바로 옆방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얼마나 무서워. 절망할밖에.

할머니는 아직 경험하지도 않은 일들에 자기 일처럼 미리 놀라고 있었다. 그러고는 어느 날부터 냉장고 문에 〈문닫기〉라는 글자가, 식탁 옆에는 〈불끄기〉라는 글자가 붙었다. 다시 이대로 지금처럼 지내기로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유예된 이별. 언젠가 다시 검토될 이별이다. 이별 연습이 필요한가 보다.

 

그러면서도 이 노인이 어느 날부턴가는 정리에 시간을 쓰는 것 같았다. 책들도 묶어서 내놓고, 자잘한 상자들, 그 속의 자잘한 물건들은 치우신다. 실버타운 생각을 하시나.

저 그런데요, 어르신 같은 수급자는 실버타운에 노탱큐라던데요. 돌봄 필요한 수급자는 요양병원 또는 요양원에.

왜 이런 말을 꺼냈을까. 내심 이분들과의 이별이 그냥 재가요양 끝 이상의 의미라도 있단 말인가.

알고 있어요. 다들 열심히 알아 보았다네요. 다행하게도 실버타운 단지 안에 케어홈이라는 곳이 함께 있대요. 맘 정하지는 않았고요, 어차피 이제는 살림을 정리할 때죠. 울 엄마한테서 받은 장롱들, 자질구레한 선물들, 시어머님이 시집 올 때 – 상상이 되나요? - 당신 친정어머니가 넣어준 참기름병, 아주 옛날 도자기인데. 다른 자잘한 선물들, 이 마른 표주박 두 개. 전혀 뜻밖이었죠. 돌아가시기 좀 전이었어요. 평소에, 아가, 살면서 자식들한테도 한 자락 깔아라. 그래야 쓴다아. 그러시던 어른이 마른 표주박이라니.

그럼 이것은요! 이 낡은 책들은요.

거실 안쪽 시커먼 서가에 낡은 종이묶음 같은 것들이 쌓여있었는데, 평소에는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 비닐로 한 번 그 위에 예쁜 레이스 천으로 덮여서 늘 그렇게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들을 누군가 만져보는 흔적도 없었다. 오늘은 가만히 먼지라도 털어볼까 싶었다. 가만 들여다보니, 맙소사, 손으로 묶은 책들이었다. 스무 권 쯤 되어 보였다.

아, 족보잖아요. 누군가에게 물려 줘얄 텐데.

저 이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기억하고 있는지, 이야기 들어 보세요. 말을 좀 시켜봐요.

 

어르신, 저 책들이 족보라면서요?

그러지, 지파의 세보야.

그럼 옛날에 실제로 살았던 조상 분들의 이름이 쓰여 있겠네요. 우와, 몇 년이나 된 것이에요?

거기 제1권 열어보면 언제 적인가 적혀 있을 건데.

펼쳐봐도 되요? 하나 빼올까요?

그래요, 오랜만이니 나도 보게.

낡고 낡은 책들을 만지려니 부서질 것 같았다. 가만히 제1권이라고 한자로 적힌 책을 어르신 옆으로 가져가보았다. 거기 따로 끼워진 작은 쪽지에 쓰인 한자를 어르신이 ‘헌종 15년’이라고 읽었다. 헌종이라고? 조선? 게다가 전체가 필사본이라니. 필사본이라면 골동품 아닌가. 어디 박물관에나 기증해야할.

그럼 역사책에 나오는 사람 이름도 있을 수 있겠네요. 내 고향 은행리에 있는 지여해 장군의 충신각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응, 그럼. 알만한 이름도 있소. 부귀영화를 누리진 못했지만. 그래서 쇠락한 집안이 된 것이고.

 

쇠락 – 이별과 이별과 이별을 거쳐온 그런 것. 몰락 비슷한 뜻이겠지.

어려운 단어들을 쓰는 것은 어르신도 할머니도 나이 탓일 수도 있겠다. 살았던 시대가 나랑은 사뭇 다르니까. 아니, 기껏 부모님 세대인데도 달랐다. 하긴 누구나 부모랑은 쉬운 이야기만 한다. 또 이 어르신의 직업이 선생님이었다잖아. 그런데 직업과 사람은 좀 무관해 보인다. 별로 해온 일이 없다는 보호자 할머니는 어려운 단어의 도사다. 그런가 하면 밥밖에 모른다.

그런데 우선 식사가 문제예요. 사는 건 먹은 것인데.

할머니는 다시 밥타령에 가 있었다. 케어홈의 밥을 어르신이 잘 먹을지. 잘 먹지 않으면 매끼 누가 챙겨서 먹게 하는지. 그래서 나는 이 할머니가 실버타운과 케어홈에 함께 입주하는 일에 ‘O’표를 던지지 않는다. 이렇게 준비만 하다가 말 것이다. 그래도 또 모른다.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당해서가 아니라, 먼저 쓰러져서 함께 케어홈에 갈 수도 있는 것이니까.

 

 

     유예된 이별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예정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이 사람들과의 이별이 올까. 정확하게는 요양보호사인 내가 수급자 어르신하고 이별하는 날 말이다.

물론 최악의 경우는 갑작스러운 최종 이별이다. 모든 만남은 이별로 끝난다, 라는 말 정도는 이해한다. 울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이 할머니가 말해준 문장 – 천년을 함께 있어도 한 번의 이별은 있다 – 이 문장도 내가 외운다. 이 말을 했다는 원조 철학자의 이름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어쩌면 이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서 이 구절을 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 노인에게서 들은 여러 개념들을 실은 내가 잘 모른다. 그런 걸 외울 까닭이 없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해한다. 행복 중독의 사회 – 그런 말을 들으면, 나처럼, 우리처럼, 성공 일변도의 행복 추구를 중독이라 해서 머쓱해진다. 그러다 다음 순간에는 그 좋은 쌀밥을 줄여야 건강한 몸매를 갖는다는 생각과 비슷한가, 그렇게 따라가기도 한다. 좋은 것도 넘치면 병이라는 말, 과유불급과 통하는구나. 쌀밥도 고기도 포기해야하듯, 성공과 행복도 조금 포기해도 되나. 맘이 건강해지려면.

그렇게 저렇게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다른 방식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별 가진 것도 없이 평온한 이 노인들을 보면서 괜스레 나도 편해지곤 한다. 어떤 이별도 그렇게 무심하게 맞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떤 이별도. 

 

---------------------------

 

『계간문예』 2023 가을호 73, 202~219쪽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 3 - 5월  (0) 2024.01.15
생존반응  (0) 2024.01.15
침묵 2 - 4월  (0) 2023.06.18
시간  (0) 2023.01.07
페르소나  (0) 2023.01.03
Posted by 서용좌
소설2023. 6. 18. 06:51

[짧은 소설] 침묵 2  -  4                                                                                             

 

4이다.

4월이다, 4월.

 

그는 4월에는 기지개를 펴야하지 않을까 벼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래도 4월인데, 봄이 한창인데. 애초에 추위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것은 아닌데도, 봄마다 유혹에 빠지곤 한다. 그래 입이라도 떼어 보자.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이 입에서 시작되었지 않은가, 어, 어엄, 엄마.

침묵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언제 적부터였을까. 말하고 싶지 않았을 때, 말을 할 수가 없었을 때, 말을 강요받았을 때, 억지로 입을 열어야 했을 때…… 어느 것이 먼저라고는 기억도 못한다. 전문가들은 선별적 함묵증이라고 덮어씌울까. 아이들도 아닌데. 전문가들을 만나는 일은 늘 조심해야 한다. 아무튼 아예 말을 잃은 느낌은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오랜 병이 아니면 치유가 될 수는 있을 터. 침묵의 치유 – 오늘의 화두이다. 그는 컴을 연다. 글을 써야 한다. 시를.

 

침묵의 말……

이건 아니다. 말이 멈춘 자리 다시, 언어라고 차라리 학술적인 표현을 써 보자 – 침묵의 언어 / 언어가 멈춘 자리……

 

띵똥. 띵똥 소리가 난다. 이제 막 집중하렸는데, 참. 그는 일어서려다가 앉는다. 무슨 상관, 이만 일로 문을 열어 정적을 깰 수는 없다.

 

 

언어에 있어서 침묵은 말의 반대급부이니, 정반합 논리로 가자면 말로부터 시작하는 거다. 아니, 이것은 시에서는 멀어진 화두. 말로써 소통하는 인간들 사이. 말의 본질은 무엇일까. 말이 없다고 가정하면, 인간에게 문화 같은 무엇인가가 없었을까. 눈짓 손짓 발짓으로도 소통은 된다. 요 몇 년 사이 수화 잘하는 능력자들은 텔레비전에서도 한 몫을 한다. 고마운 존재이면서 방송도 탄다. 방송을 탄다고 하고 보니, 방송은 걷는 사람 옆에서 차를 타는 것처럼 대단한 일인가 싶다. 그는 웃는다. 수화도 언어다. 상대적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정착된다.

 

생각이 정착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들은 인간의 본질에 영향을 준다. 가만, 인간에게 본질이 존재할까. 인간이란……

아서라, 내가 무슨. 그는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의 요점은 침묵을 깨고 시를 쓸 것인가, 쓸 수 있을까 이다. 기존 언어의 질서에 적응하는 시에서 벗어나고픈 욕구, 그것에 매달리는 동안 스스로 침묵이 강요되었다. 이제 또 인간의 본질이니 실존 운운으로 생각이 미끄러지면 또 헤맬 것이다. 그런데 또 미끌려 들어간다.

인간의 실존 – 실존이란 말은 본질과 무관하다. ‘그냥 있다’는 말이다. 그 말 ‘실존하다’를 그냥 있는 정도를 넘어서 ‘바깥에 서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한 아무개의 책을 아무개가 번역했다. 프랑스어를 알면서……

 

띵똥. 아니 무슨 띵똥 소리야. 짜증이 그를 압도한다. 뭡니까? 라고 소리칠 기세로 일어서려다가 멈춘다. 이 시각 대낮에 무위도식자의 모습을 들키지 말자. 글값이 쌀값에 미치지 못함에 부끄럽다. 시인 축에 들기는커녕 강의 시간마저 달랑거린다.

 

 

프랑스어를 알면서 이런 책이 번역되어서야 듣게 되다니! 그러므로 너는 학자가 아니다. 학자도 아니다. 그러니 강의 차례가 오겠는가. 시를 쓰자. 시를 쓰는 데 자격증은 따로 없지 않은가. 하지만 시는 보다 고차원적…… 에라. 손에 들어온 책을 먼저 읽어야지. 책 강박증이다. 책들을 어찌 다 읽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다르다. 들은 듯 아니 들은 듯, 『탈합치』 그것 끌리는 책이다.1*

 

가만. 바깥에 서면, 안을 버리고?

다시 시처럼 시작해 보자. 바깥에 선다. 안을 버린다.

이게 무슨 시인가. 머리만 복잡하다.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적응의 과정을 성장이라고 배웠던 문화는 무엇인가. 안에 들어가 적응하며, 사다리 꼭대기로 올라라! 사람이 태어나서…… 아무렴! 그러다가 이제와 팔꿈치 문화를 폄하하면? 옳아, 경쟁에 적응하지 말라, 드디어 성선설이 득세하는가. 어, 것도 아니네.

인간이 실존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자기세계의 바깥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47-48쪽) 이 말은 도끼다. 카프카가 말한 의미에서 도끼다.2*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이전 상태에서 단절 없이 탈-합치하는 것이다. 우리를 삶 속에 유지시켜 주는 것은 필연적이고 계속적인 탈-합치다.(42) 무슨 말인가.

나, 내가 나를 이루어가는 적응도 멈추라고? 자기 적응에 균열을 내라, 우선 나를 나로부터의 일치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관성대로 살지 말고 진짜 실존하는 삶을 살라.

 

 

관성 – 아담과 이브의 관성. 지상낙원의 아담과 이브는 합치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실존하지는 않았다? 비로소 사과를 먹음으로써, 그러니까 완벽한 기존의 질서에 균열의 생산력을 들임으로써 바깥에 서서(27) 실존을 시작했다고? 낙원에서 추방되고 규탄 당함으로써 곧 실존에 진입한 것이다?

관성을 존중하지 않고 어찌 사회에 적응하며 중심에 서냐고?

시는 다시 날아가 버린다. 에라, 공부다. 이것을 예술의 근원을 묻는 사유로서 보자.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순응과 안락함 대신 삐딱함을 택한 예술, 이를테면 피카소의 《시골사람들》은 인간이라면 기네스북의 수명을 다 하고도 넘었다. 모든 면에서 적합성을 불가능하게 하며 더 정확히는 적합성의 무효화를 드러내려는 시도(21), 그것이 어쨌다고! 그것의 융성도 이미 낡은 터. 예술에 관해서 말하는 자 누구냐. 오늘날 예술을 말하자고? 하필 4월에?

 

 

4월이다.

그는 운다, 울음을 터뜨린다. 내 시는 땅부터 말랐구나.

토마스는 성인 아퀴나스만 알았더니, 엘리엇이란 시인도 있었고,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이 정도면 잔인하지도 않다.

깨어나지 않는 영혼들, 영혼이 있는지 그건 알 수 없구나, 라고 그는 쓴다. 절망한다. 시가 아니다.

 

누군가는 4월에 죽음을 그래서 생명을 말하기도 한다. 머리와 팔 그리고 다리가 잘린 몸통만의 생명을. 「4월의 가로수」3*도 그 하나다.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 전기 줄에 닿지 않도록 /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 [……]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 이런 노래다. 아니다, 시를 노래라고 하는 것은 모독이다. 시를? 노래를? 둘 다 모독이다. 시와 노래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 시인은 훌륭하다. 하지만 나의 4월은 다시 침묵이다, 그는 침묵한다.

 

떠난 이들의 4월. 4월들.

세월이 가도 가도 잊힐 수 없는 그 참사의 대홍수, 방주도 없는 홍수에 묻혀 역사가 되어버린 영혼들. 멀리 타이타닉, 아니 제암리 교회, 제주는 또. 의령의 총 든 미치광이 세계기록 갱신자, 대구 가스 폭발, 다시 또 어두운 바닷물 속으로 끌려들어간 아리따운 영혼들. 뿐인가, 바로 가까이에서 떠난 이들, 만우절 아침에, 그냥 4월에, 또 4월에.

그는 생각한다. 시는 잊었다. 고아가 된 것도 4월이었지. 사람이 고아가 되는 것은 예고 없는 일순간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그 49재 안에 은사님도 가셨다. 몸도 맘도 완전히 고아가 되었었다.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도 ‘어, 그런가.’ 믿어주셨을 은사님. 너는 누군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믿을까. 어림없다. 그는 의심이 많다. 자신의 말에도 의심이 혹 덩어리처럼 엉겨 붙어서 내뱉지 못하는 존재다. 그것을 안다, 그도. 의심만 많은가. 좁아 터졌다. 좁아터지면 시야도 인생관도 좁다. 아는 것도 좁다. 박학다식해도 글을 쓰기 시작도 못할 터인데, 아는 것이 좁으니 시작도 할 수 없다. 더구나 시를. 많은 것의, 어쩌면 모든 것의 응축인 시 한 구절을 감히.

 

띵똥! 소리는 고집스럽다. 대문 께가 아니라 머릿속인가. 그가 반응이 없자 다른 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인 더 애티튜드 오브 사일런스…… 침묵의 자세에서 영혼은 더욱 밝은 빛 속의 길을 찾으며……4*  어라, 침묵만이 답이다. 그는 침묵한다.

굳이 한 가지, 너는 너 자신의 본성을 표현해 본다. 우올 – 우와 올을 더해서 합친 것, 요즘 유행하는 축자다. 준말이라던가. 우물 안 개구리도 못된, 우물 안 올챙이. 올챙이로 살다가 갈 것 같다. 이것은 몇 안 되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올챙이의 시는 없다.

 

 

1. 프랑수아 줄리앙 저, 이근세 옮김, 탈합치, 교유서가 2021년. - 다음 ( ) 속 인용은 이 책에서다.
2.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 프라하, 1904년 1월 27일 수요일 (서용좌 역,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 , 솔출판사, 재출간 2017, 67쪽.)
3. 김광규,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문학과지성사 1983년.
4. M.K.Gandhi, TRUTH IS GOD, Chapter 18: Value of Silence.

 

--------------------
2023.5.   전남여고문학 9호, 301-307쪽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존반응  (0) 2024.01.15
이별  (3) 2024.01.15
시간  (0) 2023.01.07
페르소나  (0) 2023.01.03
침묵 - 짧은 소설  (0) 2023.01.03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3. 1. 30. 07:30

 

글은 독백이다

 

 

 

    글은 독백이다. 듣는 사람 없이 홀로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 여기 파도 흉용한 육지를 항행 하는 영혼들,* 그 누군가가 홀로 말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소통의 균형이 깨어져서다. 들려오는 소리의 범람 속에서 말하기가 어렵다. 생각을 소리로 내는 일, 그것이 어렵다. 아주 어렵다.

 

     누구에게 말하는가, 어디에서 말하는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맘 편하게 말 할 수 있는가. 한국 평균인, 나이는 대강 45세, 그가 남자 또는 여자라고 가정하자. 173센티미터 또는 160센티미터쯤 되는 키를 하고, 직장에 다니기도 안 다니기도, 결혼을 하기도 혼자이기도 한 어떤 사람. 그는 못해도 하루 여남은 시간을 어디에선가 누군가와 부딪고 살아 갈 것이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서 말을 하는가. 세상은 말의 대양이고, 그의 뇌는 포만감으로 이미 멍하다. 그는 실패적 순간들에 맞닥뜨린다. 다행히 머리가 좀 좋고 이성적이라면 그는 페르소나를 만들어 낸다. 페르소나는 상대가 희망하는 말을 할 줄도 알고 그만큼 행복하게 하루를 산다. 그의 페르소나가 열심히 말을 하는 동안, 그러나 그, 그의 인격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의 인격은 벽에 갇힌다.

 

     언어에 관해서라면 아직 읽기와 쓰기가 남아있다. 읽기에 몰입할 수도 있다. 동서고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는지, 인쇄되어 남아있는 서책들을 한꺼번에 모아놓는 일은 상상을 불허한다. 온라인 시대가 되고 보니 손바닥만 한 화면에서 열리는 글들의 세계는 망망대해 아니 블랙홀, 과문한 나는 설명할 표현을 찾지 못한다. 꼭 물병자리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작정 단호하고 확고해서 한번 무엇인가에 빠지면 귀를 베어가도 모른다는 단점투성이 물병자리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기만큼 사람을 훼손하기도 어렵다. 읽기는 시간을 죽이고 몸과 머리를 감염시킨다. 책에 쓰인 것은 진리요, 책이 삶일 것이라는 부실한 맹신으로 자라난 탓이리라.

 

     이제 하나 남은 쓰기, 그것은 우리를 구할까. 심장에서 스멀스멀 또는 쿵쾅쿵쾅 시작된 말이 긴 긴 핏줄을 돌고 돌아, 믿거나말거나 지구를 세 바퀴를 다 돌아 입술 끝에 매달려도 뱉어낼 수 없을 때, 글이다. 그때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쓰기 시작할 수 있다.

 

     누구에게 쓰는가. 그건 말을 못하는 사정과 다르지 않다. 그는, 나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글을 쓸 수 없다. 홀로 쓴다. 그것이 어쩌다 지면에 얹히면 작품 발표가 되고, 그는, 나는, 작가라고 불린다. 독자, 언감생심 독자를 향하여? 진심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아니다. 독자는 허상일 뿐이다.

     안도현이 「땅」 이란 시를 썼다. 내게 땅이 있다면 /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 [……]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 다만 [……]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 아들에게 땅 대신 꽃씨를? 누구는 감동해서 눈물 젖은 눈으로 나팔꽃을 심으리라 한다. 누구는 설마 진정일까 반문한다.

 

     보라! 글은 독백, 홀로 쓰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외로움에 잠겨서, 마침내 외로움을 벗 삼아 홀로 쓰는 것이다. 바보같이 어떤 사명감으로, 또는 예술의 길이라는 착각으로, 그러다가 다 놓고 그냥 쓴다. 토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그냥 내놓을 뿐이다. 글이라는 이름으로.

     길을 나선 글은 무심코 제 갈 길을 간다. 행여 많은 독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글은 그대로일 뿐, 더 중해지지 않는다. 외면당한다 하더라도 헐해지는 것도 아니다. 글은 거기 그렇게 있을 뿐이다. 잠시 누군가의 기억에, 서가에, 그러다가 잊히고 휴지조각으로 소멸되기까지. 그렇게 글은 독백으로 시작되어 독백으로 남는다.

 

 

-----------------------------------------------------------------

2022 광주문학 제 104호 특집 <나의 문학> 46~48쪽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시작 글의 시작  (0) 2024.01.15
빙하가 녹았다  (0) 2023.01.07
반석 위의 벽?  (0) 2021.09.07
사피엔스의 언어  (0) 2021.09.07
겨울, 바닷가  (0) 2020.12.27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3. 1. 7. 08:12

 

빙하가 녹았다

 

 

     빙하가 녹았다. 초여름 폭염으로 알프스 산의 빙하가 무너져 내렸다. 산 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졌고,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눈과 흙이 쏟아져 내렸다. 얼음 덩어리가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며 눈사태를 일으켰다. 맙소사, 산골 부락은 아니었지만 등산로까지도 덮쳤고, 사람들이 숨졌고 실종되었다.

     등산객 몇 사람이 숨진 일에 지구인들은 꿈쩍도 안한다. 몇 사람의 사망사고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더 많은 죽음들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우와 토네이도 할 것 없이 변화된 지구 환경으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자연재해라고 치부하는 이 사고들도 엄밀하게 보자면 지구인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역작용이다. 하물며 인재는 어떠한가.

 

     먼 데 말고, 작년 한 해 우리나라의 산재사고 사망을 보자. 3월에 KDI(경제정보센터)가 내놓은 자료다. 산재 사망자가 연간 828명이라고 하니, 하루에 두세 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했다. 이러저러 산재 통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죽음을 더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말을 하다 보니 죽음을 숫자로 말하는 자체가 죄송스럽다. 숫자에 애도를 곱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빈다. 다행인지 올해 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즈음하여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고사망 사례는 감소했다고 한다. 공동생활에서는 엄격한 법이 필요한가 보다.

     재해 유형으로는 떨어짐과 끼임 등 재래식 사고가 여전히 많다고 한다. 건설업의 기계와 장비에 의한 사고들이다. 밥 벌러 나갔다가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영안실로 조퇴 당하는 사람들이다. 왜소한 몸으로 구릿빛보다 더 붉게 탄 얼굴들, 외국인 노동자들의 죽음도 간간히 보고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사탕수수 농장 등에 홀려서 떠났던 우리들 누런 얼굴들의 수모를 새삼 일깨운다.

 

     순간에 저승으로 떠난 이 사람들은 마지막 그 순간에 힘들었던 삶을 원망했을까. 증오심을 지닌 채 죽었다면 천국에 가지 못할까. 어느 지옥으로 갈까.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 편을 보면 형벌은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되돌려 받는 형식이다. 콘트라 파소 – 정반대의 고통이란 이 말은 인과응보와 통한다. 지상에서의 악행과 똑같이 대응하는 지옥의 형벌이라면, 떨어짐이나 끼임으로 죽어간 그들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방치한 위인들이 받을 형벌이다. 기도교적 의미에서 신을 몰랐다 하더라도, 예수 탄생 이전의 선인들처럼 천국에는 갈 수 없으되 지옥의 천국이라 할 림보에 평화롭게 머물 것이다. 지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림보에서 시작하여 음욕 지옥 - 식탐 지옥 – 탐욕 지옥 – 분노 지옥 - 이단 지옥 - 폭력 지옥 – 사기 지옥 – 배신 지옥으로 깊어지는 층을 보면서 마지막 최악의 지옥에 들어가 있다는 위인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최종지옥인 코키투스 호수의 쥬데카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와 더불어 카이자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롱기누스가 악마 루시퍼의 발아래 눌려있다. 쥬데카라는 이름은 이스카리옷 유다에서 유래했으니, 말 그대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들이 가는 지옥이라고 한다. 다만 신성모독죄보다 더한 죄가 배반과 배신이라는 점이 기이하다. 21세기 자본의 시대에 생명을 배신한 죄, 안전에 무감각한 기업과 제도의 담당자들을 단테라면 최종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하다. 상상으로나마 이처럼 복수 같은 것을 꿈꾸는 글은 ‘시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용서가 될까.

 

     우리나라에도 콘트라파소 같은 것이 있었다. 인과응보라는 개념으로 있어 왔다. 전생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내세에서의 행과 불행이 생긴다고 믿는 태도이다. 인과응보 개념이 불교에서는 윤회사상의 원리가 되며, 덕 또는 업보와 연관된 실천철학에 가깝다. 악한 행위는 업보가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참회하고 덕을 쌓아 업을 없애면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선 내세에 대한 믿음이 줄고, 무엇보다도 정의라는 개념조차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라고 하면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이거나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의는 예로부터 왜곡되어 왔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견해는 이미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했다. 정권이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피통치자에게 정의로운 것이라고 공포하고, 이것을 어기는 자는 부정의한 자로 간주하여 처벌한다고. 물론 대화의 상대편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변호했지만, 글쎄다. 유사 이래 법도 정의도 늘 강자의 편이 아니었던가. 약자는 비겁한 채로 강자의 선의(?)에 기댈 뿐이고.

     강자가 어찌 약자의 설움을 알랴.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은 곱잖고, 권선징악도 헛일, 선하면 바보짓이고 악해야 겨우 사는 모양새를 내는 것만 같다. 경쟁과 대결에서 어떻게 선하냐고! 내 팔꿈치는 억수로 강하게 뻗도록만 훈련되었는데!

 

     S대학교는 만일 내가 거기 들어가면 누군가 한 사람은 못 들어가는 것이네여…….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3 아이, 그의 아이가 중3이 되도록 세상은 여전히 살벌한 경쟁터다. 아니, 더 공포스럽다. 무감각이라는 바이러스가 공기 속 무서운 전파력으로 온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우리는 다만 유능한 기능인을 흠모하며 살아가고 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커녕 무참히 사라지는 생명조차도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안톤 슈낙의 글에서 끝났다.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도 이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 이런 이미지에 슬퍼했었다니!

     알프스에서 빙하가 녹았고, 눈사태가 등산로를 덮쳤고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푸집에 노동자가 끼었다. 외국인이었다. 결국 죽었다. 그것들은 뉴스다.

 

------------

2022 「빙하가 녹았다」, 『마음이 머문 순간들』, 이대동창문인회, 206~209쪽.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시작 글의 시작  (0) 2024.01.15
글은 독백이다  (0) 2023.01.30
반석 위의 벽?  (0) 2021.09.07
사피엔스의 언어  (0) 2021.09.07
겨울, 바닷가  (0) 2020.12.27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