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동창문인회'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06.12.03 내적 자유
  2. 2005.11.03 내 딸의 어머니
  3. 2004.11.15 오프라인
  4. 2003.11.20 천재와의 만남 2
  5. 2002.11.20 입시지각생의 운동화 끈
수필-기고2006. 12. 3. 20:43

 

내적 자유

                                                                                    『 만남』2006 (이화에세이)

 

 

 

“자유로” -

 이것이 올해의 에세이 주제로 추천된 단어이다. 그 동안의 특정 주제 “모교” 또는 “어머니” 등에 비해, 자유로운 주제에 대해서 첫 순간 자유를 느낀다. 자유는 사전적인 의미로,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피상적으로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나 자유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권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자유선거도 하고, 자유언론을 누린다. 자유교육을 받았고, 자유연애를 통한 자유결혼에 이르렀으니 사적으로도 자유로워 마땅하다. 나는 내적 자유에 따라 글을 시작하면 된다.


 

그럼 나의 내적인 자유 지수는 어떠한가. ‘정신이나 마음으로 누리는 자유’를 말하자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다. 예컨대 국공립학교의 교원은 학문연구와 강의에서 원칙적으로 자유롭다. 정치범 혹은 파렴치범이 아닌 다음에야 퇴출될 일이 없으니까. 사적으로도 느긋한 가족 구성원들 덕택에 자유를 제한당할 일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무엇인가가 나를 옥죈다. 조금 더 많이 연구하고, 조금 더 잘 가르치고, 조금 더 신망을 얻고, 조금 더 사랑받기 위해서 부단히 내 자유를 감춘다. 쉬고 싶은, 잠자리에 들고 싶은 유혹마저 뿌리치면서 책상에 앉아 있게 되지만, 그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다. 누가 꼭 그만큼을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탈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일탈을 꿈꾸지만, 꿈은 늘 추상적인 안개에 다름 아니다. 인간관계의 역할강제에서 거의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것 또한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다. 자유의 대단한 능력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 목욕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오랜만의 목욕 준비에 빠진 것이 많기도 하고, 또 이메일만 보고 가려다가 혹시나 학내문서까지 체크를 하려니 여러 번 들락날락 하다가 정말 집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면 큰길이다. 벌써 골목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친다. 그때 손 안에 진동이 온다. 마지막 순간에 집어 들고 나오느라 전화기가 아직 손 안에 있었나 보다. 아차, 어제 이맘때 출근길에 받았던, 같은 이의 전화다. 두어 번 만난 소설가로, 누군가의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물었는데,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저장된 때문에 말해주기가 불가능했었다. 저녁에 전화해 주기로 했었는데…….

“아 네에, 안녕하세요. 저 오늘은 마침 집입니다.”

거짓말이 술술 나오다니 스스로 놀란다. 순전히 답전화를 하지 못했던 미안함 때문이다.

“저 지금 컴퓨터를 켜놓지 않아서요, 제가 지금 열어 보고 곧 전화 드릴게요.”

이 말은 참말이다. 거짓말에 근거한 참말.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의 발걸음으로 집안으로 쫒아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최근 들어 작동이 늦어진 컴퓨터가 안타깝다. 저쪽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으레 전화 담당은 나지만, 마음이 급한 김에 그냥 있어 본다. 남편의 목소리가 받는다. 이쪽에서는 누님에게 느린 위로의 변이다. 누님에게 단 하나 혈육이 미국에서 다니러 왔다가 다시 떠난 하루 이틀째 시간이었다. 이야기 끝에 나를 찾으시나 보다.

“집사람? 목욕을 가는가 싶던데요…….”

나로서는 그냥 숨죽이고 이 급한 일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다. 거실 전화에 신경을 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바보는 손을 번쩍 들고 거실로 나간다.

“저 여기 있어요, 아직 안 갔어요.”

무슨 자랑인가.

“아니 여태 안 나갔소?”

그러고서 달려가 전화를 받으니, 딸이 미국 제자리에 도착할 시간이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없으니, 그쪽에 전화를 해보라는 당부이시다.

“제 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으니, 본원에다 전화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꼬부랑말을 알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자네가 좀…….”

“예, 예, 그런데 제가 지금 급히 하던 일이 있으니 잠시 후 다시 전화 드릴게요.”

사실 본원의 전화번호를 내가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여차여차해서 도착시간이 정확하게 언제쯤인가도 미리 알고서 전화를 해야 하니.

그러고서 서재로 달려와 컴퓨터에서 전화와 이메일주소를 찾아서 답전화를 한다. 내 급한 사정과 팔순 노인네의 더 급한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녀에게, 가능하면 바쁜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 축하 말까지를 잊지 않는다. 작가가 책을 내는 일을 산고에 비하면 산모에게 모독이 될까? 어쨌거나 축하를 받아 마땅한 그녀였으니까.

그러고서 다시 누님에게서 미국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뇌의 코드를 얼른 바꾸고 혀를 꼬부려서 여전히 부자연스런 통화를 시도한다. “프롬 코리어”라는 키워드에 금방 느리고 똑똑해지는 친절한 상대 덕에, 누님의 외동딸이 “아직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지금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상황을 듣고 전해드릴 수 있게 되기까지. 숨을 적게 쉬면서 서둘렀지만, 목욕바구니를 들고 회항을 한 시점에서부터 쉬이 2,30분이 지나갔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던 이마에 어느새 미세한 땀이 배어나 있다. 이 땀만 아니라면, 그냥 바구니를 풀고 싶다. 다시 일어서서 대문을 나가거나 아니면 주저앉거나, 이 작은 망설임에 갑자기 자유의지가 멍해진다. 어느 쪽을 내가 원하는가.


살아간다는 것은 크고 작은 갈림길의 순간순간의 합계이다. 가도 안 가도 좋을 목욕이었으니 가도 안 가도 괜찮지만, 가다가 핸드폰에 돌아온 일, 와서도 그냥 있으면 없는 줄 알 것을 있다고 설쳐서 기어코 집 전화를 받은 일, 그런 순간의 선택이 하루아침을 숨차게 만들었다. 길에 서서 집이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집으로 내달려야 했고, 그 3,4분의 속도를 낸 것만으로 내 심장은 한참을 쉬기를 주장한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 ― 그 이후로는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자유의지가 작용한다고 믿는다. 필요한 일도 하지만 괜스런 일도 하고, 잘한 선택도 있지만 후회스런 경우도 많다.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면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더구나 후회스런 경우들은 꼭 기억에 남아서 다음의 선택들을 무겁게 하고, 그 때문에 또 자유라는 이름으로 감정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 하지 않아야 했던,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하지 않았던, 했어야 했던 어떤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그날 아침의 혼란스럽지만 나름대로 친절한 일들은 어쩌면 과잉이었다. 가던 길을 돌아와서까지 전화번호를 그 시간에 꼭 알려주어야 할 만큼 급박한 이유는 없었고, 시누의의 전화를 꼭 그 순간 자청해서 받을 일도 아니었다. 누님의 외동딸은 한 시간 남짓 지나 도착했다는 전화가 온 모양이다. 그럴 걸,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며,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줄로 알고 산다. 그러니까 그 과잉은 옛날에 했어야 했던, 그러나 하지 않았던 어떤 일에 대한 평생의 보상 심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리라.


과거의 시간들이 기억으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현재의 시간에 자유의 공간이 줄어든다. 미래의 시간이 기대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그 또한 자유의 공간을 줄인다. 과거 때문에도 미래 때문에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 존재가 여기에 있다. 나의 내적 자유여 ― 자판 위를 열에 들떠 떠도는 열 손가락들은 한 조각 자유를 토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이름 석자의 피복 속에서 자유를 꾸며대고 있을까?

그렇다고 자유의지대로 되는 일도 썩 없다. 특히 창작의 경우, 그 노력과 고통만큼의 결과는 미지수다. 사람이 예술과 학문에서 완전한 독창적인 자유로 창작을 할 수는 없다던 에.테.아. 호프만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영감이란, 그 영감 속에서만이 창작이 가능한 법인데,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보다 높은 원칙의 영향”이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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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5. 11. 3. 22:45

내 딸의 어머니


                                                                『눈물향기의 어머니』2005 (이화에세이)

 

 

내 가능한 딸에겐 내가 어머니일 것이다.

내 딸의 어머니에게도 물론 어머니가 계신다.

그 어머니에게도 또 어머니가....... 

                                                                     ※


누구나 사춘기에는 자신의 평판에 예민하다. 그 시절 평판의 첫 가름은 얼굴 생김새다. 그녀는 천하미인 소리를 듣는 예쁜 여동생과 짧은 터울로 고민이었다. 겉으로는 평온을 가장할 수 있고 말 수 적은 표정으로 넘기며 할 일없이 책상에나 붙어 지냈지만, 속으로는 세상이 불공평했다. 물오리란 별명을 들으리만큼 씻고 또 씻는 습성에도 돋아난 여드름은 참을성을 폭발시켰다. 예쁜 여동생은 정말이지 상대적으로 말하면 잘 씻지도 않지만, 그 매끈한 피부마저도 동네는 물론 학교에서도 제일을 뽐냈다. 여드름이 이마에만 송기송기 돋을 때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이마에 나는 여드름은 누군가가 당신을 좋아하는 증거다 하는 속설 때문에. 하지만 볼에까지 빨간 뾰루지가 돋기 시작했을 때는 심각했다. 게다가 예쁜 여동생은, 어마, 언니도 누굴 좋아하는 거야, 그러네, 하면서 예쁘고 까만 눈을 흘겼다. 그런 어느 날 그녀는 유난히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어머니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어머닌 정말, 첫째는 조물주 실패작품을 낳았더니만 둘째는 예술작품을 낳았어요?


조물주 실패작품?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한참을 더 자라서 어머니가 되어서야 느낀 것이지만, 어느 어미가 제 자식을 낳아놓고 실패작품이라 느끼랴?


그녀의 첫 아기도 갓 때어났을 때 도저히 미남이 아니었다. 포도같이 검고 호수같이 깊은 눈동자를 지닌 둘째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작은 눈에 남달리 푸른 눈매가 오히려 신기하기만 했다. 아무려나, 아이들은 제 어미를 힐난할 좀생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아들들은 딸들에 비해 적어도 자신의 외모에는 관대한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일반론보다는, 아이들이 제 어미보다 좀 더 관대한 품성을 지닌 것이리라.


어머니 ―

첫 아이 실패작품을 낳았냐는 딸의 공박에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의외로 당당하셨다. 너희들 시집가서 나만큼만 아이들 반듯하게 낳아 보거라! 어머니로서 큰소리 치실만큼 어려선 제법이었던 자식들이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훨씬 넘긴 지금. 자식들 모두 제 아이들이야 어떻건 사는 형편들이 어머니처럼 큰소리 낼 계제가 못된다. 물질의 권능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기를 보낸 아이들은 자라서는 분명 그 물질에 굴하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보다. 물질의 중요성을 너무도 늦게 깨닫거나,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산다. 농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세상이 바뀌었으되, 사업공식에 접근하지 못하고 유아적 신뢰로 사람들을 대하다보니 건지는 것이 없다. 철없는, 더러는 기고만장하던 자식들이 재력의 손상과 함께 권위는커녕 자칫 품위도 상실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어머니. 그 아린 가슴에도 습관은 추억을 버리지 못하시는.


소도시에서 방학을 맞은 딸이 어머닐 뵈러 올라온 날이다. 실패작품과 예술작품 다음으로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 낳으시고 얻은 셋째다.

어머니 좋아하시는 맛있는 데 가서 점심이나 하시지요.

점심은 무슨, 맨 날 먹는 것이 밥 아니냐.

그래도 어머니.......

누가 운전이나 하면 어디 물가에나 다녀왔음 싶구나.


물가.

그렇다. 물가에도 가지 않고 여름을 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어머니다. 젊은 시절, 어린 아이들 살필 사람 많으니 봄가을 몇 차례씩 설악산으로 제주도로 관광 일 세대를 자랑하시던 가락이 여전하신 것. 해외여행 붐이 터지자 관광 목적지는 넓어갔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꼭 이민 가서 살겠더라!” 뉴질랜드의 경관에 감탄하신 것이 칠순 무렵이시니, 정신적인 에너지는 차치하고 건강 또한 그만하면 되신다. 그런데 팔순을 넘기신 지금, 이 근년에는 사정이 다르시다.


특히 올여름은 실패작품 큰 딸네도 고장이 나 있다. 모처럼 막둥이 생일을 핑계 삼아 모두들 며칠 쉬자는 ― 어머니의 관점에서는 며칠 사는 것처럼 살자는 ― 땅 끝 콘도 예약도 틀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며칠 전 다녀온 예술작품 둘째네 전원생활의 품은 양에 차지 않으신 것이다.


썬 크림도 안 바르는 여자가 어디 있다더냐!

어머니는 둘째네 도자기골을 가실 때마다 썬 크림을 사들고 가시지만 매번 퇴짜다.


그렇게 예쁜 딸을 낳아서 그렇게 예쁘게 길러서 ― 이 예술작품도 이화인이다 ― 시집보내 놓으니, 이제 와 시골생활이라니. 시커먼 고무신에 그보다 더 시커멓게 탄 발등을 하고, 뭣이 좋아서 저 아줌마들하고 종일 살거나. 다른 자식들에게 푸념이시다.

그 아주머니들 단체로 난생 처음 제주도 여행도 데려 갔대요. 제 신랑 말이 “몽강리 여자주민 탐라국원정대” 대장노릇 했다나요?

참 할 일도 없구나.


어머니는 “제주도”라는 지점에서 특히 속이 상하셨을 것이다. 어느 자식 하나 어머니모시고제주도 다녀올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핑계라면, 자식들 누구도 어머니는 젊어서 충분히 제주도를 가셨다는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터다.


어쨌거나 시커먼 얼굴로 흙 속에서 살아가는 예쁜 딸이 일본식 미인 기준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로서는 통탄할 일이다. 어머니는 항상 “살빛 그을린다고” 한여름에도 얇은 긴팔만을 고집하셨다. 그렇지만 이제 팔순도 넘기시지 않았나! 그것은 딸들의 착각이다. 지금도 차라리 덥고 말지 반팔을 못 입으신다. 지난 번 집에 잠깐 오실 때 과일가게에 들려 수박짐 뒤따라 몇 발 걸으시며 땀을 흘리셨기에, 더운데 좀 짧은 팔 입고 다니시라했더니 답은 의외였다. “팔꿈치가 다 늙어서야.......” 어머니도 참. 누가 어머니 팔꿈치 보고 다닐까 봐서요? 제 나이도 밖에 나가면 아무도 안 쳐다보는걸요.


그때도 어머니는 마음이 상하셨을까? 가까운 냇가에라도 드라이브를 하려던 그날, 어머니는 “지나치게 꼼꼼하게” 화장을 하시더란다. 파운데이션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 그 앞인지 뒤인지 또 썬 크림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 드라이브 다녀와서 해 안에 다시 소도시로 내려가야 하는 딸의 입장에선 바쁘기도 하고, 해서 튀어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그냥 대충대충 하세요, 누가 본다고요!” 어머니는 막 바르려던 립스틱을 홱 던져버리시더란다. 며칠 전 큰애가 했던 말이 생각나셨을까?


저녁 늦게 멀리 전화로 후일담을 나누던 두 딸은 웃고 말았다. “우리도 나이 들면 더 열심히 단속을 하게 될지 알겠어? 또 깔끔한 것이 백번이나 낫지 뭐.” 허나 웃음은 곧 썰렁함으로 바뀌었다. 화려함의 끝에 서있는 어머니의 삶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파운데이션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도 외출할 곳이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 세상은 바뀌어 전체가 업그레이드다. 그냥 멈춰선 자리매김에 혼돈스러워 추억 속에서나 자신감을 붙들고 계시는 어머니가 안타깝기만 하다.


아카시아 향기 ― 어머니는 라일락 향이라고 하시지만 ― 그 아련한 어머니의 체취가 특정 화장품을 평생 고집한 덕택인 것을, 그녀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어쩌다 아이들이 용돈 모아 선물한 이상한 크림일랑 뚜껑도 열지 않으신 결과인 것을. 그런데 그녀는 모든 브랜드를 무시하고 먼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로션을 집어 든다. 나중에 제 아이들이 선물할 모든 화장품을 쓰겠다는 시위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머니에게 화장품을 선물하고 싶어 하거나 예쁘게 낳아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딸이 없다. 딸의 귀감이 되어야할 의무가 면제된 삶은 한편 자유스러웠다. 하지만 딸의 시선이 의식되지 않은 삶에는 비판의 시금석이 빠졌을까 겁도 난다. 그 딸의 어머니로서, 딸아이가 제 어머니와 공통분모를 찾아 분석하는 일이 이제서 궁금하지만 그건 꿈이다. 사람은 꿈속에서도 논리를 지닐 수 있을까? 가능한 딸의 분석에 평균점은 되는 어머니고 싶은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듯, 큰 부채로 손을 뻗는다. 바랜 창호지 부채살이 몰고 오는 시원한 바람에 상념은 더 높이 난다.(200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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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4. 11. 15. 21:34

 

라인


                                                                『그대 안의 풍경』2004 (이화에세이)        

 

 

아직도 내겐 아파트 입구 편지함을 둘러보는 버릇이 남아있다. 그러나 건져오는 것은 고지서나 광고성 안내장이기가 쉽다. 하긴 편지가 기이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주고받는 명함에도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로만 표기된 것이 흔하다. 세상은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추월한 지 오래다.


이메일의 편리함은 말해 무엇 하리. 우선 글을 쓰다가 지우거나 구겨버리곤 하던 편지지와 달리, 매번 글자를 고쳐놓는 일이 쉽다. 마음이 변하면 강도도 조절하고 뉘앙스 다른 어휘를 고르면 된다. 상대가 읽었을까 마음 조릴 필요도 없는 것이, “읽음 확인 메일”을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한마디로, 빠르고 정확한 모든 장점 위에, 가장 중요한 배달사고가 없다. 간직하고 싶다면 보관함에, 그것도 안심이 안 된다면, <내문서>에 옮겨서 다시 <A 플라피>로 옮겨놓으면 거의 영구하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엽서 하나 손수 써 보내는 일도 드물다. 하물며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드물다. 손으로 줄은 친 듯한 편지지에 쓴 편지 하나와 그보다 앞서 그냥 종이에 세로로 쓴 편지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나는 기념사진 한 장과 예스런 학자의 고결함이 베인, 하나는 인간미가 뚝뚝 묻어나는 선배의 글이었다. 두 분의 편지글에 답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틀렸다. 실은 두 분께 전화로 답을 해야 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화의 편리성을 든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전화가 어렵다.


“안녕하셔요, 저 아무갭니다. 선생님, 사진까지 일부러 보내주시고. 그런데 지난 번 뵈었을 때…….”


그러면 저쪽에서 말씀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그 먼 데를 일부러 올라와서 고마워요. 거 얼굴이 피곤해 보여서 잘 내려갔는지 걱정되었고, 그리고 부군도 잘 계시는지…….”


그러면 또 언제 무슨 말로 대답을 이어나가야 할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팥으로 메주를 쑵니다…… 라고 했더라도, 아 그래! 하고 믿어주셨던 은사님을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몇 번이나 뵈었던가. 겨우 산수(傘壽)연에 다녀온 것을 칭찬하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이고, 대학생활 전체가 테트리스 조각처럼 한 순간에 내려와 쌓이는 바람에 꼭 드려야 할 말을 놓치고 만다.


선배님에게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초록빛 바다색 아니면 비취색 하늘거리는 가운데 단아한 얼굴모습에 압도당하던 느낌을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 혹시 모를 내 작은 잘못에, 음색만으로는 조금 노여워하시는 것인지 그냥 넘어가주시려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순간 어떤 반응도 멈춰 버리는 것이 순발력 없는 내 본바닥이다.


전화보다는 이메일을, 이메일보다는 편지를 선호하는 내 마음 바닥에는 서툰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내가 어느 결에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 때의 내 자신이 문제학생 사례연구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인데, 중 2때 나는 어떤 선생님께 집중적으로 불려가곤 했던 일이 그것이었다. 결석이 좀 잦은 것을 제외하고는, 공부도 어지간히 하고 공납금도 아무 문제없던 내가 왜 문제학생이었을까? 편모, 편부도 아닌, 계모, 의부도 아닌, 정상적인 대가족의 맏이가 무슨 문제를 가졌다고 비쳤을까?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지배성, 도덕성, 사회성 등 무슨 인성들을 수치로 조사하면서, 모든 성질에서 25~75% 안에 들어가기를 중용의 인간이라고 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회성 불량으로, 뭔가 15% 미만임을 추궁 당했던 기억이 늦게 서야 떠올랐다. 그래, 나는 사회성 문제아였구나!


그러니까 우선 부모님과의 관계였을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달한 어머니를 이해하기엔 어렸고, 나는 소설 속의 전통적 어머니상을 그렸다. 어머니에겐 모든 어머니들의 착각처럼 자식들은 최고가 될 소질이 보였을 것이고, 피아노와 미술은 기본으로, 남자애들은 웅변술까지 과외를 시켰으니, 그때 원조 치맛바람은 우리를 수소풍선처럼 띄워 올렸다. 아마 중학교의 자유는 어머니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 금지된 장난을 골라서, 부러 내리막길을 달렸던 시절이다. 실습지 토끼장의 토끼를 풀밭에 놓아주긴 쉬웠지만, 오디를 따먹으려면 날쌘 친구가 나섰다. 선생님들 눈밖에 난 친구들 사이로 스며들기는 쉬었다. 토끼들이 토끼장에서 사라지면 범인(?)들은 토끼를 다 몰아넣기 전까지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렸다. 허리까지 자란 풀밭에서 털썩 누워버리면 하늘은 풀밭과 맞닿게 내려앉고, 우리는 하늘 속에 누었다. 주머니를 함께 털어서 싸구려 꽈배기를 사먹었다. 그 순간에는 네 것 내 것 없는 완전한 공동체가 실현되었다. 불량꽈배기의 밀가루와 기름은 양분인 것이 틀림없으니, 나는 자꾸 쓰러지는 약골로 자랐지만 키가 클 대로 컸다. 가끔은 상표도 없는 아이스케이크도, 어머니가 양잿물이라고 했던 삼각 비닐주머니 속의 색소와 사카린으로 만든 물도 먹었다. 어머니의 금기는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없이 금기를 내놓으셨다. 금기에 대항하느라고, 책가위를 누구보다 가장 예쁘고 깔끔하게 싸주신, 연필 다섯 자루를 저녁마다 깎아서 키대로 나란히 필통에 넣어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책과 필통은 사랑스러웠지만, 학교에는 어머니를 대신할 여선생님들이 많았다. 요구와 간섭은 어머니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담을 쌓았고, 사회성이 전현 없는 문제아라고 주목받았을 것이다.


아니 그건 변명이다. 지금도 함께 생활하는 직장동아리에 80가까운 사람들이 한 건물에서 연구생활을 하는데, 그중 얼굴과 이름을 다 알 수 있는 경우는 반이 될까 말까다. 그들은 내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데, 간섭 때문에 사람을 기피한다는 변명이 틀리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하는 것 - 그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공부를 해도 해도 그것은 어렵고,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그것은 어렵다고. 마주쳐서는 말이 안 떨어지면 목례라도 무슨 몸짓이라도 하는데,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은 전화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에다 대고, 처음 무슨 단어로 말문을 열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라고.


그래서 편지가 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메일이건 종이편지이건. 그 중에서도 쉽게 PC에 저장되어 무생물 같아지는 이메일보다는, 여간 간직하지 않고서는 곧 사라지는 종이편지가 부담이 없어 좋다. 문제는 여전히 덜떨어진 사회성이다. 더구나 이런 감동적인 편지를 받아본 후에는, 아마 누구도 쉽게 편지지를 펼치지 못하리라. 아니 어떤 단어로도 그 시작을 찾지 못하리라. 나는 그저 저물어가는 오프라인 시대의 추억에 잠긴다.

 

 

튼튼한 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튼튼한 정신이 좋습니다.

아직도 새파랗게 날이 선

당신의 젊은 정신이 좋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정신의 튼튼함이 당신의 육체를 병들게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몸 생각해서 정신을 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웃는 부드러운 입매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엄격한 입매가 좋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굳은 입매가 싫다고,

당신을 멀리한다면

나는 참 기뻐할 겁니다.

그만큼 당신은 제 것이 될 테니까요.


                                                                       200x년 1월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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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3. 11. 20. 21:57

와의 만남

『꿈꾸던 것들은 아직도 꿈인가』2003 (이화에세이)

1.

해방의 떠들썩한 열기가 식어버린 새해 혹독한 겨울 지방도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바다 구경 한 번 못한 우물 안 개구리로 상경하여, 이화여자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르는 겨울 또한 혹독한 추위를 실감했다. 합격 통지에 한껏 누그러진 봄이라 해도 서울은 여전히 추웠다. 돌 벽으로 된 기숙사 건물만큼이나 이질감으로 추운 방은 마찬가지로 썰렁한 교회당과 더불어 냉랭한 서울 시대를 열었다.


손이 시린 봄은 마음도 시리게 한다. 왜 그래야 되는지도 모르게 대의원이 되어서, 칸막이 교수실로 학생-교수간 심부름을 다니던 걸음걸음이 얼마나 가시밭이었을지……. 유창한 독일어로 일년생 기를 죽이는 교수님 ― 나중에야 그 유명한 천재이자 당시 신분은 강사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 서슬에, 그녀는 아예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사투리건 표준말이건 우리말을 아예 더듬는, 독일어는 주눅 든 꺽다리 신세. 큰 키는 당시 그리 탄성의 대상도 아니었고, 쥐구멍을 찾고 싶을 땐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그때 주눅 든 버릇으로 지금도 등이 남달리 일찍 구부정한 것이리라.


천재 교수님은 검은 스카프를 즐기셨다. 첫 봄의 기억은 그것뿐이었다. 그분이 그녀들에게 친칭을 썼는지 경칭을 썼는지도 들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문법은 충분히 마스터했노라’ 자부했던 독일어 실력(?)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과외로 학원에서 단편소설까지도 읽었던 독해력이 적어도 대화하기에는 제로였다.


문제는 그녀가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으로 키워진 시골학생이라는 데 있었다. 남자 교수님들 보다는 친근해야할 대상으로서 여성만을 찾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여자는 드물고, 서양 선생님도 영화에서처럼 낭만적이 아니라, 새의 부리 같은 날카로운 느낌만을 받았다. 자연히 천재 선생님이 오시는 요일에만 교수실에 갈 핑계를 찾았다. 그러나 말로는, 그 천재 선생님이 왠지 싫어서 그 분 오시는 날엔 교수실 들르는 일을 피한다고 광고했다. 이율배반의 감정으로 못난 시골티를 감추며 그 선생님만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실은 너무도 훗날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럴 것이 곧 이어 ‘진짜 독일어 목소리’를 가진 여교수가 부임하셨고, 너나 할 것 없이 이성적인 교수의 표상인 독일어 목소리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들 몇몇은 그 시냇물 구르듯이 읽는 독일어 목소리에 반해서 독일어로 “시냇물”이란 이름의 스터디 그룹으로 성장했다. 스터디 그룹은 생존의 방법이기도 했다. 상당한 분량의 원서를 한 학기에 읽어야 했지만, 그녀들은 터무니없이 실력이 부족했고, 교수님들은 더러 나머지 부분을 숙제로 내주시기 때문이었다. 번역본?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공부만 하느라 세월 보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일단 나머지 분량을 몇 등분해도, 불안한 소심증의 그녀는 소설작품이건 드라마건 전체를 보아야했고, 밤샘이 습관이 되었다. 천재 선생님은 어느 새 다른 대학으로 옮겨 가셨고, 그녀들은, 적어도 그녀는 그분을 잊었다. 무수한 밤샘의 나날에서 잊었다고 생각했다.


검은 스카프는 사실 첫 학기가 끝나가는 여름까지도 여전했다.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검은 스카프는 앞쪽으로 당겨져서 턱 끝에서 묶여 있었고, 그러면 삼각형 얼굴이 드러났다. 오월 말 메이데이 행사 때면 성급한 민소매 원피스도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서 학기말까지 검은 스카프라면 조금은 섬뜩했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동기생이 있었는데, 그애 또한 놀랍게도 선생님 따라서인지 시커먼 눈매를 하고 검은 색 옷을 즐겨 입었다. 그 아인 사업가인가 장차관인가 아무튼 엄청 (돈)귀족에 미스 코리아 같은 몸매를 지닌 부족할 것 없는 친구였지만, 대개는, 그리고 그녀도, 일부러 못 본채 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혹은 신포도의 경우였다. 그리고 천재를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에겐 보다 지적이며 시냇물 구르듯이 독일어를 읽어주는 새로운 우상이 나타났으니까.

 

2.

인연은 길고 길어서 그녀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한 가지 공부를 위해 이화 터전에서 살았다. 이제와 본업은 지방대학 독문학과 교수, 현대독일소설을 중심으로 강의한다. 그녀들의 ‘독일어 목소리’ 우상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여성문학 강의도 시작했다. 잉에보르크 바흐만을 새삼 경탄하며, 바흐만의 환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심지어 작품만이 아닌, 막스 프리쉬와의 좌절된 사랑에, 좌절된 공동생활에, 의미부여를 하기도 안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깊은 밤중이면 그녀는 글을 썼다. 여중 시절 교지에 「무제」라는 시 한편을 발표한 것 이외에는 불모로, 여태 남의 글 읽는데 비겁함을 소진하고 있는 자신이 안쓰러워서였다. 마침내 어느 날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그림』으로 소설계의 문턱을 넘보았을 때, 그때 그녀는 옛 사랑을 다 들켜 버리고 말았다. 인용된 시는 물론, 많은 지면이 오직 그 천재 선생님을 위해 바쳐졌기 때문이다. 물론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변신되어 나타났지만, 누군들 이화에서 함께한 사람이라면 천재 선생님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시 중에서 「배반」은 이름조차 거명하며 인용했고,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죽음을 택하겠어.”라는 구절도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인용했으니. 그녀는 첫 애증의 대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화의 첫 학기 천재와의 만남은 쟝 아제바도를 나누어 품게 했으며, 오늘 밤새워 글을 쓰게 한다. 그녀에게는 습작이란 없다. 글쓰기가 의식적인 작업이라기보다는 그냥 살아있는 표식이니까.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게 도와 줘…… 나를 살게 해 줘…….” 적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천재의 목소리가 환영으로 다가온다. 목소리는 어스름 글씨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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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11. 20. 22:21


입시지각생의 운동화 끈

                                                         『우리 어디에 서 있어도』2002 (이화에세이)          


해마다 겨울이 오고 수능이든 입학시험이든 결정적인 시험이 있는 날은 대개 날씨가 혹독한 것 같다. 실제로 그러한지 모두들 마음이 얼어붙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기억들이다.


오전의 논술과 오후의 면접, 그만하면 교수에게나 입시생에게나 긴장된 하루가 틀림없다. 차가 밀렸다가는 큰 일이므로 학생들이 움직이기 아예 전에 서둘러야 마음놓고 학교에 이른다. 신체리듬에 따라 참새형과 올빼미형이 있다지만, 나는 새벽같이 출근할 날이면 아무리 마음을 풀어도 짜증을 이기지 못한다. 입실 시간이 지나고도 빈자리가 꽤 있었다. 입시가 여러번의 지원기회가 있어서, 첫 시간에 지각하는 학생은 예상대로 대개 결시로 이어질 것이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고, 우리는 서서히 원서대조에 들어갔다. 삐그덕 교실 문이 열리고, 놀라서 고개를 든 학생들 앞에 울상으로 지각생이 나타났다. 시계를 보니 10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규정대로 라면 입실이 거부될 상황이었다. 새벽부터의 짜증까지 겹치면 지각생이 불리하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상념은 불현듯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수십년 전 어느 이른 봄, 선배도 없는 외로운 대학시절은 신설독문과 신입생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자라서 처음 외지로 나간 지방도시 출신에게는 대도시의 낯설음까지 더했다. 낯설기야 어디 그 봄부터였었나? 입학시험을 치르던 꽁꽁 언 겨울, 백설공주가 숨어사는 산만큼이나 오르락내리락 미로를 거쳐가는 캠퍼스는 주눅들게 하기 알맞았다. 오늘날에 보아서는 그저 아기자기한 정도라 해도, 당시의 시골소녀의 눈에는 그랜드 캐년 다름없었다. 약간 비뚜름히 오른쪽으로 산을 오르다가 어디에선가 왼쪽으로 굽어 내려가다 보면 오른 쪽 아래로 펼쳐지는 거대한 건축물, 보기는 무맛이었고 우중충한 색조마저 사람을 얼어붙게 하는데... 거기서도 어렵게 몇 고개를 올라 드디어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김치 다름없었다. 종일 7과목을 필기과목으로 치르는 입시에 겁도 났고, 하루 종일은 그 자체로서 부담이었다. 어떻게든 숨을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은 축복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어머니답게 따뜻한 맛있는 점심을 자꾸 더 뜨게 했고, 가물거리는 눈...


다시 시험장을 향하는 발걸음은 아침보다 더 무겁기만 했다. 시간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잡았지만, 들어갈 때는 오르막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처음 오르막길에서 운동화 끈 한쪽이 풀렸다. 끈은 걸기적거리며 안팎으로 덜렁거렸다. 당연히 몸을 굽혀서 끈을 매어야 했겠지만, 미욱한 성정에 몸을 굽힐 시간이 없기도 했고, 몸을 굽혀서 버릴 1,2분과 끈이 풀려서 방해받을 1,2분 사이를 계산하는 머리는 실타래같이 얽히기만 했다. 누구도 실험을 해 보지 않은 두 가지 경우를 두고서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한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생각은 그 둘 사이를 헤맸고, 걸기적거리는 발은 자동적으로 옮겨 떼고 있었다. 시험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흘끗 바라본 시계로 이미 시작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 길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다면 어머니의 소원으로 지원대학을 바꾼 분풀이로서 도중하차했다는 누명을 쓸 게 뻔했다. 이제는 지각을 해도 일단 고사장에 갈 것인가 아닌가의 투쟁이었다. 계단에 이르러 넘어진 것은 꼭 풀린 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르막만 나타나도 피를 품어내기에 지쳐버리는 심장이 진짜 범인이었을 것이다. 고사장 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5분도 더 지난 상태... 아 이렇게 두 학교를 다 놓지는 구나. 층계를 올라온 가슴은 콩콩 뛰다 못해 겨울 두터운 옷 위까지 벌렁거리고 있었고, 시계는 째각거렸다. 이 벽 너머, 바로 벽에 밀착된 책상 하나에 응시학생이 없구나...


우연이었을까?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아니 다시 쓰자. 나는 문을 붙잡았다. 숨을 몰아쉬고, 시간이 흘렀다. 눈을 떴다. 문을 조금 열었다.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빈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와서 문이 안에서 열렸는지, 밖에서 열렸는지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많은 세월 동안 그 순간을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버전으로 쓰이던 그 장면이 원본을 잊어버린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손수 그 빈 책상을 가리키시며, 나를 앉게 하신 교수님의 엉거주춤한 행동이었다. 덮혀있던 시험지를 뒤집어 글자를 올려놓으시기까지 했다. 까만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구나... 나는 까막눈 비슷했다. 놀람의 눈물인지 감동의 눈물인지, 시험지는 뿌옇게 변해갔다. 그렇게 치른 5교시 과목은 공교롭게도 전공이었다, 독문과 학생들을 위한 <독일어>.


그렇게 해서 나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 덕으로 이화식구가 되었다. 60년대 학부, 70년대 대학원, 80년대 박사과정을 이화에서 공부하면서, 그 시발점에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이 계신 것을 상기하곤 했다. 오늘 이렇게 입시에 늦는 학생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꼭 선생님을 본받으려는 생각에서는 아니겠지만, 지각생에겐 언제나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은 내가 교단에 선 이래 결석생을 결코 홀대하지 않는 숨은 이유 또한 선생님께서는 짐작도 못하실 비밀로 남아 있다.


지난 학기에는 모교의 학위논문 심사에 합류해서 감시회로까지 갖춘 현대식 교수실을 드나들며, 그 옛날 칸막이 교수실의 사랑 반만이라도 나의 제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는지 새삼 코끝이 찡했다. 아슬아슬한 입학 후 여전히 지각 결석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믿어주시던 강희영교수님, 김영호교수님도 이화 역사에 많은 기여를 하시고 정년하신지 오래이다. 너무 오랜 동안 배워서 다 베껴먹은(?) 이병애교수님마저 이제 곧 교정을 떠나시게 된다니, 내년 이맘때의 모교가 얼마나 썰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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