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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08 침묵 6 - 불으한 어리니 한태 3
  2. 2023.01.03 침묵 - 짧은 소설
소설2024. 4. 8. 12:30

 

침묵6 - 불으한 어리니 한태

 

 

 

    불으한 어리니 한태 한 노인이 성금을 보냈다는 뉴스에 그는 머리가 멍해졌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왠지 더 불안해진다. 연말이면 대단한 뉴스들이 많다. 연말이면 불우한 사람들이 많다. 성금이 필요한 사람들도, 성금을 보내야하는 외관을 하고서 성금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겨울답게 - 무엇이 겨울다운가? - 모교에 또 전임 티오가 났었다. 그는 일차 서류심사에서 탈락했다. 몇이 지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셋이 남았다고 하는데 보나마나 유학파 박사들일 것이다. 최근에 임용된 전임들은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이다 보니, 그는 서류에서 1969년생이란 숫자가 보이는 순간 탈락했을 지도 모른다. 논문 편수에는 그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소용없었을 것이다. 외국 저널에 게재된 논문이 없었으니까. 더구나 지금은 시간도 탈락한 신세이니까.

시간을 할 때가 그립다는 생각에 그는 흠칫 놀랐다. 정말 그립다니. 강의하던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정말 몰랐었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들켰을 세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빈 방, 좁아터진 빈 방에 누가 있을까 만은.

 

빈 방에 손님이 들었다. 느닷없는 친구 녀석이다. 이른 나이에 동네 여자애, 그러니까 중딩 동창이랑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그런대로 잘 사는 녀석이다. 어쩐 일로 초저녁에 불러내더니, 어슬렁거리면서 길게 길게 밥 먹고 술 먹고도 자리를 뭉개고 있었다. 마침내는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을 주워 담고는 그를 따라 오피스텔로 올라왔다.

왜? 늦어도 되냐?

엉. 그러더니 친구는 깜짝 놀랄 말을 했다. 1박 자유부부, 그게 뭔 줄 아냐. 세상에, 생일선물 주라더니, 1박 자유부부 해달란다. 하룻밤 놀다 오겠다, 이러는 거야. 애들은 울 엄마한테 맡길 테니까 자기도 자유부부 해! 내 참 환장 하겄다.

무슨 말인가. 멀쩡한 부부가 1박 자유부부? 얼핏 보아서는 그리 부정한 단어는 아닌가 싶지만, 또 어찌 보면 매우 부정한 단어다. 자유가 이리 해괴망측하다니. 자유를 그리는 아내와의 일평생이라니. 이 친구 꽤 불우한 심정이겠다. 37㎡ 오피스텔 방에는 자유가 널려 있고, 대신 자유를 갈망하는 아내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날 저녁 불우하지는 않은가, 모르겠다. 그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소리를 중얼대다가 앞으로 고꾸라진 친구에게 침대를 내주었다. 다른 침구가 없었으니까. 누구랑 밤을 함께 지새본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잠을 청할 수 없었고, 책상에 앉아서 꼬박 밤을 샜다. 불우한 친구, 그의 아내의 자유는 무엇일까. 친구의 아내는 불우해서 1박 자유를 선물이라 여길까.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그의 오지랖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 자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실업 중의 불우한 싱글일지도 모르면서.

 

 

    인간은 미래에 중독된 종이라고 하는데, 그는 미래를 별로 고려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 모양인가 싶었다. 생각이 일렁인다. 생각은 늘 그 속에서 미리 무엇인가를 한다. 목표를 세우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그가 알 수 있거나 느낄 수 있는 일은 이미 일어났던 어떤 것들뿐이다. 수많은 가르침들처럼 어떻게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가 말이다. 아직 모르는 것들에, 느낄 수조차 없는 것들에.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려서 판단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잘 해보려고 할 때, 행위는 현재에 그친다. 현재 행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기억이 미래에 무슨 일을 영향할 수 있다는 것인지.

왜 그는 과거지향적일까. 과거에 잡혀있을까. 먼 과거, 아주 가까운 과거에.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성금을…… 그 기사가 다시 떠올랐다. 한글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동사무소에서 배웠다는, 평생 비문해자로 살았던 할머니, 많은 사람들의 눈에 불우하게 비쳤을 할머니가, 더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그러니까 여전히 어린이들도 불우한 세상이다. 실제로 그가 어렸던 시절에는 밥 먹고 못 먹고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렇게 행불행을 깊이 느끼지 않았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그의 마음을 일렁이던 단발머리 여자애는 그 나름 부잣집 아이였지만, 그것 때문에는 어떤 차별도 없었다. 그냥 단발머리가 마음을 흔들었고, 그것이 전부였었다. 예컨대 아버지가 술고래라서 – 동네에서 별명이 그랬다 – 가끔 동생 광순이를 데리고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광식이도 그의 집이나 또 다른 집에 숨었다가 가곤 했어도 늘 명랑했었다. 근년 들어서는 어린이들도,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중학생들도 여러 이유로 불우하다. 심지어 불우함을 못 이겨서 세상을 떠난다. 어린아이의 자살 – 그런 단어는 입에 올리기도 무섭다.

 

몇 년 전이었을 게다. 중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충격적 기사를 본 뒤로는 자살 뉴스 따위에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극단적 선택이 왜 자살의 대명사인가. 오히려 방화나 살인이 극단적 행동 아닐까. 매우 불우한 순간의 가장 비극적 선택을 극단적이라고 말하다니. 21세기 오늘엔 밥걱정 아닌 모멸감이나 폭력 등에 시달려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란다. 이 비극을 누가 강요하는가. 살기가 얼마나 끔찍하면 죽는 쪽을 택하는가.

가톨릭에서는, 틀림없이 개신교 교회에서도,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그것을 함부로 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고 가르친다. 자살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중죄라고. 지금은 완화되었지만 자살자의 장례미사는 불가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스스로 삶을 버리는 중학생 또는 어른은 모두 기독교 신자가 아니려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몇 년 전 그 사건의 경우, 어머니가 중학교 교사인데도 중학생인 아들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유서를 쓰고 뛰어내렸다. 뛰어내리기 – 결정적인 선택이다. 약이 부족해서 또는 줄이 풀려서 미완성일 수도 없는, 단호하고 완벽한 비극적인 선택이다.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말이었을까. 아직도 그 비슷한 말이 그의 해마 어느 구석에 박혀있다. 어머니가 근무하시는 동안 그 점을 이용해서 집까지 쳐들어왔던 동급생들의 만행을 털고, 오해도 풀고 나서 죽겠다는 너무도 차분한 유서. A4 용지 4장에 쓴 유서에는 가족과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 마음도 들어있었다. 일전에 사망한 명사 스님의 유서 비슷한 메모들이 보도되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었다. 참담했다. 아이가 썼던 유서에 비하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아차, 목숨은 떠나고 없는데 유서들을 비교해서 무엇 하랴. 하지만 그 아이의 유서는 정석이었다. 그런 반듯한 글을 쓰는 열 세 살짜리가 그 불우한 시간들을 잘 버티었더라면 지금쯤 20대 대학생 – 생각의 깊이와 글 솜씨로 보아 아무래도 인문계 - 또는 군 복무 중일 게다. 역시 반듯한 언어로 살면서. 안타깝다. 아깝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그의 생각은 자신의 군 시절로 돌아갔다. 성인의 불우함은 좌절에 앞서 일단 행복의 쟁취라는 방향성을 먼저 제시받는다. 시골의 단출한 가정에서 폭 좁게 자랐던 그가 88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맞닥뜨린 현실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숙제였다. 순진했던 희망 같은 것은 무지와 비겁함이요, 세계관의 충돌은 그를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로 내던졌다. 그가 살아갈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거물이자 괴물이요, 그는 속수무책, 연대라거나 소속감 없는 무기력한 개인으로서 자아상실감에 빠졌다. 나라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숨이 막혔다. 입을 열려고 해도 적당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과묵한 인상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지만 한계가 왔다. 말을 토해내고 싶은 욕구와 강요당한 – 스스로 강요한 - 침묵 사이에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비겁한 선택, 군대를 선택했다. 어차피 사회입장권이니까 일단 현실에서 후퇴하는 기분이었을까, 비겁함을 침묵의 미덕으로 위장한 채, 조용히 학교를 떠났었다. 그러니까 그는 2학년 2학기를 스스로 망쳐놓고 그렇게 이등병이 되었다. 월급 6,600원을 받는 이등병 노승욱은 더 이상 투틸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그 이름이 그렇게 그리울 줄 그는 몰랐었다.

 

1990년의 전방은 복학생 형들에게서 듣던 그대로였다. 그가 아무 짓도 안 한 것, 다시 말해 학생운동권이 아니었던 사실은 특별한 고통을 예비하지는 않았다. 다만 군대는 전혀 다른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 치열했던 KBS 4월 사태도 수월한 여느 파업 정도로 넘어갔고, 파행이 한 달을 넘겨도 의견들은 없었다. 없어야 했다. 군인은 의견을 가지면 안 되는 사람, 사람 아닌 그냥 군인이다. 북예멘과 남예멘이 통일 되었단다. - 아, 우리도 남북통일을 이루어 냈음 바로 제대 아냐! 그 정도였다. 어디서 통일이 되건 걸프전쟁이 나건 외국은 멀기만 했다. 우리나라도 멀었으니까. 한강의 제방이 무너져 대홍수로 백 명이 넘는, 150이랬던가, 사망자가 나와도, 10만, 20만 이재민이 발생해도 군대에선 어쩔 수 없었다. 전방의 군인은 국방만이 우선이니까.

내무반에서는 다들 침묵하듯이 침묵이 미덕이었다. 이병에서 일병으로 대단한 진급에도 불구하고 짬밥 서열은 서열이었고, 졸은 졸이었다. 걸레 대신 빗자루를 든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랴. 진급을 해 봐야 상병이 있었고, 또 진급해도 병장이 있었다.

다만 일요일은 대단했다. 아침 일찍 수송대의 차량을 타고 부대 가까이 있는 다른 부대의 본당에 나가서 미사를 드렸다. 세상에나, 그때 군대 내에 공소도 아니고 성당이라니, 그가 입대 전 1989년 가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2차 한국방문에 맞물려 우리나라에 군종교구가 설립되었다. 그 전까지는 군종 신부님은 지역 교구에 속하셨다. 아무튼 군대생활 중의 미사는 입당성가를 부르면서부터 빨리 끝나버릴까 떨렸다. 날 어여삐 여기소서, 참 생명을 주시는 주~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하면서 느리게 느리게 불렀다. 봉헌성가 때면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감사하는 맘으로~ 하면서 눈물도 났다. 2절은 더욱 좋았다. 나의 삶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시어~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 하소서. 어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매번 어머니 생각을 했다. 선한 일, 그것도 숙제였다.

 

그런 군대 생활 첫해 10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일 년이 된 동서독이 정식으로 하나의 독일이 되었다. 1/365 확률로 독일재통일의 날은 우리나라 개천절과 같았다. 우리는 그저 통일이구나 했었는데, 신부님께서 독일에서는 재통일이라고 한다고, 19세기 때 독일제국의 통일과 구분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결과적으로는 흡수통일이지만, 양쪽에서 그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신부님들 중에는 유학이라고 하면 이탈리아 아니면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많았다. 군종 신부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성경> 말씀보다 더 신선한 감동을 주셨다. 군대 내의 미사는 평상시와 달리 왠지 짧게만 느껴졌다.

 

그 무렵, 앞섰던가, 뒤섰던가, 나라를 통째로 뒤흔들어버린 사건이 터졌다. 물론 군대와 관련해서였다. 탈영 Y이병의 양심선언이라 불리는, 엄청난 군대 관련 폭로 사건이었다. 자대배치를 받은 지 불과 몇 달, 여차여차 우여곡절 끝에 – 동료를 팔았던 말았던 – 보안사에 근무하던 Y이병은 어느 날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가 혼비백산했다고 했다. 1,300장인가 그만한 엄청난 양의 기밀문서들이 그 캐비닛 안에 있었으니까. 캐비닛, 오늘날 그토록 민감한 키워드가 된 그 단어 말이다. 캐비닛 속 그 문서들은 탈영의 촉진제였다. 그것들을 들고 도망쳤으니,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을 때 승욱은 자문해 보았다. 자신이라면 그런 용기가 났을까. 고개를 저었다. 용감함이라는 유전자는 분명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문제의 1966년생 Y는 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85학번이라 했다. 아, 또 외대생! 지난 해 방북 여학생도! 외대 캠퍼스에는 마약 같은 공기가 있어 폐부까지 세상을 뒤집어놓는 용감한 행동들을 감행케 하는가.

양심선언 과정은 Y의 학보사 활동이 끈이 되었다고 했다. Y는 우선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찾았다. 급히 양심선언문과 80일간의 국군보안사령부 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대학 학보사 선배 Y2를 찾아 만났더란다. 사실 이런 디테일은 승욱이 군에 있던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들이다. Y2는 지금도 막후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정치인이다. Y2는 다시 역시 대학 학보사 선배였던 〈한겨레〉 기자에게, 그 기자는 편집국장에게……. 그렇게 해서 보안사에서 운영했던 대학가의 위장카페 ‘모비딕’까지 들켜버렸단다. 그 이름은 20년쯤 지나서 동명의 영화가 나온 뒤에 널리 알려졌고, 그, 승욱도 그때서야 알고 더더욱 놀랐다. 세상은 모르는 것 천지였다.

 

암튼 그때 Y이병의 탈영에서 양심선언문 발표까지는 열흘이 걸렸다. 세상은 뒤집혔고 순간에 국방부장관과 또 무슨 장관의 목이 날아갔다. Y는 양심선언 이후 도피 생활에 들어갔고 곧 잊혔다. 1990년 우리나라 국군 졸병들은 스스로 움츠러든, 뇌가 없는 두더지처럼 살았다. 인생 어디인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밝기만 할까만, 군대는 어두운 일들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젊은 영혼들의 들끓음을 세상이라는 공간은 보듬어주지 못하는 곳인가 보았다.

그렇게 첫 군대스마스를 - 어머니의 말로는 크리스마스를 – 맞았다. 그쯤에 휴가도 나올 수 있었고, 위문편지도 기다려 보았다. 어라? 위문편지는 없었다. 그가 초등 중등시절 그렇게 열심히 썼던 ‘국군장병 아저씨에게’나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군인 아저씨에게’라는 위문편지가 없었다. 쳇, 그런 것들이 없어진 지 한 두해 되었다 했다. 곰신의 출현은 더욱 기대난망이었다. 고무신 거꾸로 신을 여친을 두고 온 일도 없었으니, 면회 올 여친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쓸쓸하게 그 한 해가 갔다.

 

 

    한 겨울, 그러니까 양력과 음력의 새해 사이는 꽤나 길었다. 2월 15일 금요일이 설이다 보니 일요일까지 나흘을 쉬게 되었다. 하지만 설 맞춰서 휴가 가는 행운이 있기 전에야 그저 쉬는 날에 불과했다. 그는 까치설날이 그리웠다. 투틸로, 이리 와 봐! 어머니가 새 조끼나 목도리를 떠서 입혀주던 섣달그믐날이었다. 그런데 까치설날은 옛 속에 묻혀버렸다.

오히려 밸런타인데이라는 말이 막 유행하던 때였다. 물론 갑론을박도 셌다. 일본 따라 하는 것이 무슨 의미냐? 웬 일본? 원래 서양에서 있던 것이라던데? 여자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니 생소했지만, 한편 수줍은 남자들에게 기대를 갖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남자라고 해서 무슨 고백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니까. 군대에서라면 연인으로부터의 편지나 면회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사실인즉슨 할 일이 딱히 없어서 그랬던 것일 터.

그런데 너절한 기대들로 어정거리던 그 때, 그 싱거운 시간들을 찢는 뇌관이 터졌다. 2월 3일 일요일 저녁뉴스였다.

 

자살 - 이번에는 탈영 정도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자대배치 첫날이었다는 N이병의 자살 소식이 터졌다. 불발탄을 잘 못 밟아서 죽었다는 사고 소식이었어도 오금이 저렸을 것을, 자살이라니. 논산인가 어디선가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는 퇴소해서 열흘 쯤 기다리다가 연대배치 그리고 자대배치를 받았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자대에 왔다. 그런데 그 첫날 자살을 했다니.

오리무중에, 알려진 원인이 없으니 수군대는 소리들만 난무했다. 입대하기 전 전대협 한라산 선봉대인가 어디서 활동했다고들, 그런 쪽으로 소식통 빠른 일병이 있었다. 소총부대로 갔더래, 그럼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것은 아닐 텐데. 아, 또 외국어대학이다! 외국어대학 영문과 89학번! 외국어대학이란 대체 어떤 곳일까.

그러고 보니 신년 초 외대생들이 높은 등록금 인상에 반발하며 학생처 사무실을 폐쇄하고 총장실을 점거해서 농성을 벌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외대생들, 주로 서양언어를 목표언어로 공부를 하다보면 서양의 사회구조나 서양의 민주주의에 관해서 정확한 눈을 뜨게 되어서일까? 그가 다녔던 지방대학에서도 숱한 학생운동을 봐왔지만, 그의 눈에는 외국어대학이라는 글자만 들어왔다.

 

나중에 알려진 것으로는, N이병은 새벽에 도착해서 곧바로 첫 번째 한 일이 교회에 다녀온 일이었단다. 이어 의무반에 가서 무릎의 상처를 치료받고, 감기약까지 타 갔더란다. 그러고서 누군가가 봤는데, 몇 사람 분의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갔다고 했다. 오전에 그랬던 사람이, 아니 군인이, 두세 시 경에 부대 밖에서 목을 맸다고? 매우 믿기 어려운 행적이었다. 무릎 상처는 훈련소에서? 곧 죽을 것이면 무릎 치료를 뭣 하러, 감기약을 뭣 하러, 빵을 뭣 하러?

더 한참 나중에 알려진 것으로는, 죽기 바로 열흘 전 전방입소 훈련을 떠나기 전에 내무반에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는데, 그때부터 아주 어두운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아무 말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을 네가 유추 해석해야 한다.’ 라거나 그 비슷한 선문답 같은 문구였다니, 믿거나 말거나. 어떤 연유건 간에 그런 심리적 불안은 자신에게 닥쳐올 끔찍한 상황을 직감해서였을까. 물론 이 모두는 떠돌던 이야기였다. 누구는 그 신병이 08에서 소총부대로 주특기가 바뀌었는데, 08 적격심사에서 탈락한 것 아니겠냐고! 사실 08이라면 보안 및 정보요원 쪽인데, 그걸 받으려면 엄격한 성분조사가 필수적인데 통과 되었겠냐고! 그것들 또한 그냥 해보는 소리들이었다. 쉬쉬하면서도.

 

우울한 설이었다. 소고기떡국은 나중에 가야 고기가 많다고 늦게 간 것이 아니라,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랬다. 떡국, 어머니는 혼자서 식은 떡국을 드실 게다. 차례상을 물리고서야 다 식은 떡국을. 그런데 군대 내 사고 소식들을 어머니들은 어떻게 견디실까. 뉴스들을 알기나 하실까? 하기는 신부님은 어떻게든 소식을 아실 것이고, 동시에 모든 어머니들께 위로말씀도 충분히 해주실 것이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 크게 걱정할 일은.

 

 

    군대라는 조직에서는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무튼 그 설 주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너무도 황망한 사건이 또 터졌다. 음력으로는 정초였지만 벌써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우수가 들었는데, 그러니까 봄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가 군인 신분을 순간 망각하고 언 몸이 조금 녹아서였을지 괜히 좀 신이 나서, 신이 난다면서 왜 슬픈 노래였는지는 모르지만, 돌아선 그대 등에 흐르는 빗물은 빗물은~ 이 가슴 저리도록 흐르는 눈물 눈물~ 송골매의 <빗물>을 흥얼거리고 있다가……

듣게 된 뉴스는 또 자살이었다. 아니 곧 다시 더 이상한 안전사고라고 발표되었다. 나이도 지긋한 S일병, 그러니까 87학번, 아, 다시 또 서문학과, 서울대라지만 외국어문학과였다, 외국어학과의 수난? 웬 수난들이 그쪽 환경들에서 빈발하는가.

나이로 보아서 재수 삼수나 아니면 일반 휴학을 했었다가 군대에 들어왔을 S일병은 포병으로 동계훈련 중이었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어떻게 한 밤중에 좁은 박스카 안에서 목이 졸린 채 발견되었을까. 그것도 ‘사고로’ 목이 졸린 채! 박스카는 이동식 상황실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 좁은 박스카 안에 다른 몇은 깊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데, S일병이 목숨을 잃게 된 여러 상처들이 아무도 모르게 어떻게 순간의 사고로 발생했는가. 소지품도 손상당한 채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안전사고사였다. 이번에도 그가 학생회 활동을 했었다거니, 녹화사업 운운 하는 뜬구름 같은 풍문만 짙은 안개처럼 내렸다. 안개는 그대로 차갑게 굳어서 그들의 몸을 꽁꽁 얼려버렸다.

 

그들 이병들과 일병들은 군인이라고 쓰고 군바리라고 읽었다. 땡보직으로 꿀을 빠는 일은 별 따기, 땅개들은 그저 고달픈 인생이었다. 최악의 영창이나 육교의 ‘o’자는 꿈에서도 피할 단어였다. 영창만 다녀와도 진급은 물론 제대 날짜도 늦어질 것이며, 아, 육교라니, 그건 교도소니까 전역하고 나서도 전과가 따라다닐 터였다. 아니, 행여나 군기교육대에라도 안 가려면 여우가 돼서는 가스 뿌려대는 선임병들을 잘 피해서 마찰 장면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기불릭 모두를 섭렵하더라도 선임병들 입맛을 맞춰주고, 그들의 짬밥 숫자를 잘 외워 두어야 한다. 군번 따라서 아버지 또는 아들 손자까지 매기는 곳에서니까. 암튼 눈만 뜨면 군번줄 확인하고 관물대부터 신성히……

 

 

    의식을 잃고서 그가 실려 나간 것은 사실 4월과 5월로 이어진 무시무시한 죽음 사태를 견디지 못할 즈음이었다. 어떻게 시위학생을 잡아서 때려죽이는가! 때려죽였다! 대학생 K군의 죽음으로 흩뿌려진 붉은 피는 5월을 뒤덮고 말았다. 입이 있어도 침묵만이 살 길이었던 그때 그곳에서, 누구라도 눈 뜨고도 의식이 없어야 했던 그때,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러니까 시초에 그가 다니던 대학에서 학생이, 여학생이 먼저 불을 지폈다. 소신공양은 그럴 때 쓰는 말인데도 그냥 분신이라 불렸다. 이어서 이어서 이어서…… 무엇이 그들 분신과 그들 투신의 행렬을 만들어냈던가. 생각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봄을 견디면서 되뇌었던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나는 군인인가 대학생인가? 군인인야, 대학생이야……. 그 무렵이었다. 어디에서 어느 순간에 기억이 멈췄는지는 모른 채로, 그가 눈을 뜬 것은 의무대였다.

여단 의무대, 군의관이 말했던 것 같다. 스트레스가 심했더냐? 사내새끼가! 꼴싸를 봉께 먹물쟁이고만, 해도 운동권도 못했겄는디. 그에게 익숙한 말투는 고향 사투리였다. 그것도 지독한 사투리. 얌마, 침상에서 넘어진 거이 다행이였제. 거그 좀 둔눴거라! 잔말 말고 둔눠!

 

며칠 못 가서 또 다시 의식 소실로 두 번째 여단 의무대에서 눈을 떴다. 야가, 참말로 뭔 일이다냐. 불안장애여, 뭐여! 인자사 일병 달았고만, 이래 싸면 지대로 전역이나 하겄냐!

사단 의무대 대신 바로 군병원에 보내진 그는 의식이 돌아온 채로 이런저런 검사들을 받았고, 거기 군의관이 부사관에게 흘리는 말에서 제풀에 엄청 놀랐다. 왜 의사들은 영어를 좋아하는지, -싸이어티 라는 말도 싸이코로만 들렸고, 소셜- 어쩌고 하는 말에서는 얼핏 비슷한 쏘시오패스라는 단어만 떠올랐고, 그에게는 모든 단어들이 설마 하면서도 무서움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름도 모르는 크고 작은 알약들을 보따리로 처방받았을 따름인 그는 내무반에 쥐죽은 듯 기어 돌아왔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여단 의무대 군의관에게 다시 보내졌다. 약 보따리를 들고 가랬다. 잘 있는가 볼라고 불렀다. 약봉지 요리 조 봐! 사투리 군의관이 말했다. 되얐네! 자세히 알 것까장은 없고! 얌마, 일단 아찔하거나 그랄 꺼 같음 우선 앙거, 둔누등가. 다리 올릴 수 있음 올리고! 참, 김치 같은 거 더 많이 묵고, 넘 보담 짜게 묵으라 그 말이여! 극도의 긴장 말고 다른 원인은 없단 말잉께. 봐라, 사회불안장애 - 소셜 엔싸이어티 디스오더 - 그리 말했겄네. 사내새끼가, 더구나 군대에서 실신이 뭐여! 평생 사회생활 해묵을 수 있겄냐. 정신 똑바로 차려, 얌마! 그는 정신 똑바로 차리기로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다행으로, 내무반 최고참 병장이라고 모두 고약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살짝 그의 머리를 쥐어박는데, 그 손길이, 조심해라 임마! 그러는 것처럼 느꼈다. 성한지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문 병장, 그는 원래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입을 열면 목소리는 테너처럼 우렁찼지만 그랬다. 군대에서 소통 할 수 있는 말들이 무엇이었을까.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10월 들어 놀란 것은 달력 때문이었다. 아니, 이미 1991년 달력이 나왔을 때부터 그들 모두를 화나게 했던 10월이 왔다. 그것은 1일 국군의 날이 시커먼 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그들의 날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 해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의식행사며 할 것은 다했는데도 뭔가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울 나라 역사에서 10월 1일이 어떤 날인지 아나. 그렇게 목청을 뽑은 김 병장의 말로는 – 그때 김 병장은 내무반 고참 순위 2번이었다. - 우리 육군 제3보병사단이 처음으로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했던 날이다 말이고. - 예, 알겠습니다. 즉각 그 아래 쫄들이 복창했다. 알겠나? 그런 말이 떨어진 뒤에야 복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상불가의 순간을 초래했으니까.

마, 잊지 말거래이. 머 한다꼬 국군의 날을 법정공휴일에서 뺀 긴가. 내 말한대이, 이그는 곧 원상복귀 될 끼다. -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10월에 일요일 빼고는 빨간 날이 3일 개천절 단 하루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공휴일 숫자를 줄이려 한다 해도 좀 심했다.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니!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니면, 한글을 경축하지 않으면 무엇을 경축한단 말인가. 이번에는 국문과에 다니다가 입대했다는 변 상병이 열변을 토했다.

공휴일을 70일에서 67일로 줄였다는 것도 우리한테는 억수 손실이지만, 하필 한글날이라니! 쉬고 안 쉬고를 떠나서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니라니! 어린이날, 현충일, 제헌절만 못할 이유가 어디 있냐. 한글 문자 없이 민족이 있냐, 나라가 있냐. 문화가 있냐.

말이 문화에 이르니까, 승욱은 첨엔 너무 나간다 싶어서 갸웃 했다가 이어 수긍이 갔다.

옳습니다! 박수!

아, 그것은 그의 섬뜩한 실수였었다. 감히 선임병장의 발언에 일병 주제가 응수를 하다니.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두 무릎을 세워 고개를 쑤셔 박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를 각오하고 머리통에 힘을 주었다. 이병들도 함께였기에 창피한 순간이 더 창피했다. 그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야, 미주! 이리 나왓!

선임들은 그가 실신했던 이래 미주신경성실신이라는 긴 병명 대신에 미주라고 놀리듯 불렀다. 홍당무가 된 그는 구부정하게 앞으로 나갔다. 불호령이나 주먹 대신 그에게는 엉뚱한 숙제가 떨어졌다.

야, 한글날 노래 외우제? 함 불러 봐라.

노래를 아무래도…….

예 말고 무슨 토를 달아! 한글날 노래도 모르나.

아니, 원체 노래를 못하는 음치…….

그만들 두지!

그때 또 한 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최고참 문 병장이 등장했다. 전역을 겨우 일주일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노래 배우자, 됐나?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돋았네~

난데없이 그들은 목청을 가다듬어 음악 수업을 했다. 문 병장은 분명 테너인가 바리톤인가 싶었다.

 

이제 나도 뭔가 들어보자! 노 일병, 문자란, 한글이란 무엇인가 연설 한 번 해봐라. 구해줬음 갚아라! 문 병장님의 명령이었다.

아뿔싸. 그것은 더 어려운 숙제였다. 그럴 것이 수업 때 발표라도 걸리면 미리 준비해 간 발표문 읽는 것도 우물거렸던 그가 준비는커녕 갈피를 잡을 시간도 모자랐으니까. 그렇지만 군대 내무반에서 머뭇거림이란 존재하지 않는, 태어난 적이 없는 단어였다. 좌중을 애처롭게 둘러보아도 문 병장 같은 흑기사가 또 나올 리 없었다.

저, 문자라는 것은 소리를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한글은 한민족의 소리를 기록합니다.

엉? 제법이네! 계속하라우! 선임들은 그를 놀려댔다.

그러니까 언어란 말과 글이라고 할 때, 한글 창제 이전의 우리민족의 언어는 소리말뿐이었다가 한글로서 비로소 글이 되어 완전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한글이라는 문자가 있어 말소리를 시공간의 제한 없이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시공간 제한 없이 전달? 편지도 쓰고, 써서 후세에도 남긴단 말이지. 야, 미주, 국문과야 뭐야? 골치 아픈 사학과라 안했나. 계속!

저,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 말을, 단어를, 창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가슴이란 문자가 있었고 아프다는 문자가 있었는데, 가슴이 아프다 가슴을 앓다 그러다가 가슴앓이 이렇게 단어를 만들고. 안 보이는 것도 보이게 만들고, 아름다움이라는 것, 보이지는 않지만 문자로는 남고. 그리고 가끔은 귀한 문자들이 되어, 감동적인 글이 되어 우리들에게 미적 향수를……

우와, 한글날, 봐라! 한글날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국경일이 아니다 그 말이다. 한글날을 엎다니, 멍청한 놈들! 인간이란 게 높은 데 올라가면 더 멍청해진다. 땅이 중요함을 모르게 되니까. 땅이 안 보이니까. 땅이. 문 병장이 모처럼 길게 말했다.

그는 우물쭈물했던 몇 마디 말로 문 병장님께 어쩐지 보답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잘 해! 너 잘 해 낼 거야. 병장님은 말없이 말했다. 이번에는 뒤통수가 아니라 어깨에 가만 손을 얹어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문 병장과의 마지막 교류였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지, 촌스럽게 신파조 넋두리를 되뇌었다. 소리 없이. 숨소리도 없이.

 

이별의 선물이 가능할까. 흔히 고참들이 나갈 때 군팔을 모아서 주기도 했었다. 군팔은 밖에서라면 600원이나 하는 담배 88라이트를 말한다. 군대에서 배급받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88디럭스도 한라산도 밖에서 700원 하던 때였다. 입대 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던 그도 조금씩 물들어 갔는데, 태생은 아닌 듯 했다. 냄새도 독했지만, 담배를 피우는 자세 그 자체가 어색하고 잘 안되었다. 담배를 피우는 남자, 가끔은 멋진 아버지들에 대한 기억이 있는 아들들은 아버지들을 따라서 담배를 즐길까. 그는 생각해 보았다. 어떤 형식으로나 어른 남자 아버지라는 모범이 없는 그로서는 모범이 그리웠다. 아버지가 그리웠다.

어떠한 선물도 징표도 없이 문 병장님과 이별했다. 겨울이 오며 상병이 되었다. 그렇게 1991년 군 생활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고향, 할머니들과 어머니만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했다. 그때의 할머니들은 할머니들끼리였다. 왜 할아버지들은 없었을까. 동네에 드물게 할아버지들이 있었지만, 그, 승욱의 주변에는 할머니들 그리고 어머니만 있었다. 그 할머니들도 이제는 없다. 고향에는 어머니만 있다. 그가 그리는 것이 고향이고 어머니라면, 그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야 마땅했다.

고향으로 가서 살까, 그는 고민해 본다. 이 37㎡ 방은 1인 가구용이다. 아내의 1박 자유부부 선언에 경악을 했다가 풀이 죽은 친구가 찾아오는 용도는 너무 가끔이다. 이 넓이의 방은 결혼은커녕 연애도 할 수 없게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어쩌다 잠시 마음 가까이 지냈던 여자들은 이 좁은 방에 올라온 적이 없었다. 그녀들이 조신해서일지 그들에게 희망이 없어서일지는 모를 일이다. 그녀들 역시 고만고만한 방에 살거나 해도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없다.

강의도 끊어진 지금, 그렇다고 학원가도 쓸쓸한 지방도시에서 일타강사의 기회도 없을, 이 무용지물과도 같은 생활을 이렇게 이어갈 명분도 없다. 올해도 이른 김장을 해서 들고 오셨는데, 오피스텔 비번을 잊어서 어리둥절했다는 어머니는 어쩌면 불안하기까지 하다. 왜 전화라도 하시지, 라는 걱정 반 핀잔에는 전화 생각을 못 하셨다는 더 놀라운 대답이 왔다.

어머니는 온전하신가. 이 뉴스 속의 할머니, 불으한 어리니 한태 성금을 보내신 할머니보다는 분명 젊은 나이다. 그런데도 곰곰 비교해보니 어머니는 최근 어딘가 총명함에 금이 간 것 같다. 홀아비 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면…… 이라고, 그를 키우실 때 단호하고 강했던 어머니가 어딘가 무디어졌다. 이 뉴스 할머니는 짐작컨대 무한 고생을 해 오신 것이 틀림없는데, 정정하고 강단이 있다. 눈뜬 멩인이라 글노자복지관 한글공부로 배운 글이라 말이 안 대는 개 있서도 라고 썼지만, 참 잘 쓰셨다. 인생길 마주막에 조훈 일 한 번 하는개 원이라…… 빈 병을 모아 팔면 돈이댈 것 같타 …… 파란는개 십원도 안 쓰고 12월까지 모운 개 15만원 내 아이들 용돈 조금 주는거 았계 쓰고 15만원을 보터 30만원…… 동장님이 잘이 해 라고 써서 맡겼단다.

 

글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 글 배워 처음으로 쓴 편지글을 떠올려 보면서, 글을 많이도 오래도 배운 그는 침묵한다. 부끄러움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잠은 내려오지 않고 천장에서 그를 노려본다. 먼 데, 아니 가까이에 어머니가 보인다. 혼자서 잠든 어머니는 자꾸 뒤척이신다. 말 좀 해 봐요! 왜 꼭 거까지 내려갈라고 했었냐고! 뭣이 당신을 불러 갔어! 왜! 거긴 남쪽이잖아! 바다잖아요, 시퍼런 바다!

이런 밤 어머니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신다. 50년이 넘은 오늘도, 아버지가 떠나시고 50년이 넘은 오늘도. 어머니는 1973년 1월 25일 아침 일찍 목포에서 조도 가는 배를 타셨던 아버지의 기일을 음력으로 12월 20일로 치신다. 채 5년을 함께 살지 못했고, 50년을 넘어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침묵이 된다.

어머니는 성당에서가 아니라면 거의 목소리가 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소리들을 다 멀리하고 살아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신 주~ 시작 없으시~며~ 마침도 없고~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말소리에 비해 노랫소리는 높고 맑다. 그만 아는 비밀이다.

 

어머니, 아버지이……. 그는 어두운 천장에 대고 불러본다.

얼굴 없이 존재하는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성스러움은 무엇입니까. 배워도 쓰임이 없는 저의 삶은 무슨 의미입니까. 투틸로는 부끄럽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이. 공기 중에는 어떤 소리도 어떤 움직임도 없다. 회색의 침묵만 내린다.

................................
전남여고문학 10호, 5월 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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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3. 1. 3. 11:29

사랑, 지나고 나면....... 김윤아


침묵

 

 

 

     침묵만이 위대하다. 다른 모든 것은 유약함이다. ‘유약하다’도 아니고 ‘유약함’이라고 한다. 했다. 「늑대의 죽음」이라는 시다. 죽어가는 늑대가 말한다, 쉼 없는 사유와 노력을 통해 영혼이 스토아적인 긍지의 드높은 경지에 이르라.

    스토아 좋아하네! 알프레드 드 비니, 잘 모르는 시인이다. 비니인가. 드 비니가 더 프랑스 사람 같은……

 

    띵똥. 띵똥 소리가 난다. 이제 막 집중했는데, . 그는 일어서려다가 앉는다. 무슨 상관, 침묵을 깰 수는 없다.

 

    뭐더라, 드 비니 - 그의 일생은 환멸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정열 때문에 이상을 단념할 수 없었고, 그 이상을 믿기에는 너무도 투명한 의식을 가졌다. 절망의 딜레마 속에서…….

어딘가에서 읽은 누군가의 글이다. 하도 여러 곳을 서핑했었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썼던 글인지 알 수가 없다. 양심이 찔린다. 표절이니 도용이니 얼마나 무거운 단어인가. 기껏 잡문이지만 글은 글이다. 드 비니가 침묵을 예찬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지, 일생까지 곁들여야 할까. 신빙성을 높이려면 그 정도는 필수려나.

     환멸의 연속 – 친가 외가 모두 귀족이자 군인 가문이었으되, 어라, 1797년생, 귀족으로 태어나려거든 한 세기 전에 태어날 일이지. 운은 운이다. 부르봉 왕가는 곧 권좌에 복귀했고,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의 젊은이는 스무 살도 안 되어 근위대 소위가 되었다. 군인이면서 시를 쓰던 드 비니는 위고가 발행하는 문학지 《뮈즈 프랑세즈》에 기고했다. 하지만 차츰 위고와는 다른 길로 갔다. 그는 상아탑으로, 위고는 민중 속으로.

     그때 1852년, 어떻게 혁명으로 추대된 대통령이 셀프쿠데타로 황제가 되나. 어머니가 남긴 장원에 은거해 있던 드 비니는 상아탑에서 살아갔다. 가난을 감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유로울 능력이 없다! 라던 위고는 쿠데타를 공공연히 반대하여 추방되었다. 근 20년을 섬으로 떠돌던 망명자는 『레 미제라블』 같은 엄청난 보따리를 안고…….

     그는 위대함에 압도당하는 자신의 속물성을 반성한다. 너는 시인의 위대성에 관해서가 아니라 침묵에 관하여 쓰고 있는 거야! 침묵은 위대한 위고가 아니라 잊힌 드 비니의 몫!

     사는 것은 하인들도 한다. 사실 그는 이 시건방진 말 때문에 드 비니를 피하고자 했었다. 정치적 염세주의는 이해가 되었다. 신념으로 충성을 바치려던 왕정의 무가치성을 목도했으니 그럴 밖에. 드 비니는 심지어 자살에 관한 명상을 쓰기도 했다. ‘엘레바시옹’이라던 시 작품들에서다.

     솟구쳐 올라 죽으라? 자살하라고? 인생이 발레라면 자살이 상위 동작이네. 아니, 침묵 속에 죽으라? 자연은 무정하다.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침묵할 뿐이다. 침묵하는 신에게 애원하지 말고 너도 침묵하라. 운명을 감수하라. 말없이. 결정적 순간의 고독을 받아들이라.

 

     아니, 고독은 처음부터였다. 침묵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우리 애가 글쎄 우리나라에 처음 추기경이 임명되신 날 태어났어요! 터무니없이 그의 탄생을 축복으로 여겼다던 어머니 루시아는 지쳐갔다. 신에게 애원하다 지쳤을까. 말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귀머거리라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서는 침묵했지만, 다른 말들은 했다. 그의 말도 알아들었다. 아버지를 모르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알랴. 침묵은 그런 뜻이었을까.

     어린 시절도 시국을 탄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서 칭찬받는 짝꿍 계집애 때문에 속상했지만, 그는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 약진이 뭔가는 설명을 들어서 좀 알았지만, 우리의 처지는 뭘까. 담임 선생님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 자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권리는 또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자유라면 광덕 아제가 목을 매단, 봉덕 아제가 저수지로 들어가 버린 그런 것일까. 자유로 땡볕에서 땅을 파고 자유로 소똥과 씨름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그리 생각했다. 아제들 얼굴은 온통 시퍼렇게 흙빛으로 그을렸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구릿빛으로 익은 보람에 찬 자랑스러운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삶은 글이 아니다. 다시 쓰자.

     어딘가 서핑 동안에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곧 죽음의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되므로,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이라고. 왜냐.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어렵다. 많은 독서는 혼란을 준다. 잠깐, 글은 말이 아닌가. 말이다. 말 안에 글이 있다. 글은 정지되어 있는 말이다. 침묵에 우선권을 주려면 침묵에 관해서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글은 더더욱……

 

    띵똥. 아니 무슨 띵똥 소리야. 짜증이 그를 압도한다. 뭡니까? 라고 소리치며 문을 열려다가 멈춘다. 이 시각 대낮에 무위도식자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 글값이 쌀값에 미치지 못함에 부끄럽다. 시인 축에 들기는커녕 강의 시간마저 달랑거린다.

 

     ‘내 주장, 그것은 세상이 시인에게 주지 않는 빵이다. 내 주장, 그것은 시인이 부득이 할 수밖에 없는 자살이다.’ 귀족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의 주장이었다.

     내 주장은, 그는 단호하다, 사람은 직업을 가진, 직업을 못 가진 부류로 나뉜다. 돈으로 말해도 같다. 돈을 가진, 돈을 못 가진 부류. 아니, 권력으로 말해야 한다. 권력을 가진, 권력을 못 가진. 권력이 가장 센 단어다. 직업도 돈도 있더라도 비굴해 지는 것은 순간일 터.

     늑대는 말한다. 탄식하고, 눈물 흘리고, 간청하는 것은 한결같이 비겁하다. 운명이 그대를 부른 길 위에서…… 나처럼, 아무 말 없이 고통을 견디며 죽으라.

 

     띵똥! 소리는 고집스럽다. 대문께가 아니라 머릿속인가. 그가 반응이 없자 다른 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사랑 빛나던 이름 그리운 멜로디 아련히 남은 상처~~ 빨간색 여자가 빨갛지 않은 서늘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웬 사랑! 침묵이라니까! 그는 고개를 젖는다. 소리는 계속된다. 아무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에 가진 모든 것을 다 소모해버리고 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남지 않았지, 그는 되뇐다. 멜로디 없이. 그날 이후 나는 죽었소. 눈물대신 말을 그는 토하고 피도 살도 영혼도 내겐 남지 않았소. 죽지 않은 것은 나의 허물 뿐~~

 

..........................................................
계간문예 2022 가을호 69,  248-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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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