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8. 1. 25. 14:21

 

 

 

 

2017년 한국하인리히뵐학회는

하인리히 뵐 탄생 100주년 사업으로

《하인리히 뵐과 행복사회》를 펴냈다.
하인리히 뵐은 전후독일문단을 대표하며

국제PEN독일본부, 국제PEN세계본부의

회장을 맡았고,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공동저자:
공선옥, 곽정연, 사지원, 서용좌, 안은영,
원윤희, 이화경, 정인모, 정찬종, 최미세 .

 

 

 

 

 

 

하인리히 뵐의 독자 구하기

서용좌

 

내 친구는 묘한 직업을 가졌다. 그는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그가 정서법의 몇몇 잠재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문장론의 몇몇 규칙들을 막연하게나마 통달했고, 이제 타이프 한 장 한 장을 문체의 연습들로 점철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런 한 뭉치를 만들자마자, 그것을 그는 원고라고 부른다.

그는 수년 간 이 문화의 황야에서 예술이라고 하는 마른 풀만을 겨우 뜯어먹고 살다가 마침내 출판사를 찾아냈다. 그의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극심하게 낙담해 있는 그를 만났다. 그의 이야기는 사실 기가 꺾일 만했다. 출판사의 정산에 따르면, 반년 동안 350권이 비평을 부탁하려고 무값으로 배포되었고, 몇 우호적인 비평도 나왔고, 실제로는 13권의 책이 팔렸단다. 그로써 내 친구에게는 5,46마르크의 대변이 발생했단다. 그런데 그는 800마르크를 선지급 받았기 때문에, 같은 비율로 셈하자면 이 선지급금은 대략 150년이 되어야 상쇄될 수 있는 것이란다.

이제 문제는 한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평균적으로 그만 못하다는 점이다. 그게 대략 몇몇 거의 전설적이다 싶은 터키인들을 제외하고는 대강 70살을 본다. 더러 우리 잃어버린 세대의 기념비적인 혹사를 생각할 때는 안심하고 한 십년을 더 칠 수도 있다.

나는 친구에게 두 번째 책을 쓰라고 충고했다. 책이 출판되자 전문가 권에서는 기쁘게 환대를 받았다. 비평용 책은 400권으로 급등했고, 반년이 지났을 때 판매고는 29권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담배 두 개비를 말아주고는 어깨를 도닥거리며 제안했다, 이제 세 번째 책을 쓰라고. 그런데 친구는 그 말을 아이러니로 이해하고는 모욕을 당한 듯이 물러서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투명작가 비트”라고 문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에 관한 평전 한 권이 나오자 평전이 그의 작품들 전체보다 더 많이 팔렸다.

근 반년동안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는 다시 고독한 천재성의 영역에서 맴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내게 와서는 후회막급하다고, 그래 아무튼 세 번째 책을 쓰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이번에는 젤라틴판 등사기로 밀어서 30에서 50권쯤을 서적상에 넘겨주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선지급금을 받았다. 둘째 아이가 태중에 있었고, 그는 말하자면 몇몇 식자공과 인쇄업자, 포장이나 발송담당 여직원들의 실직에 협조하는 죄를 짓기는 싫었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공익적 감각은 항상 정말로 강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에 관한 근 100편 정도의 호의적인 비평이 나왔고, 두 권을 합친 판매부수는 90권을 넘었다. 출판사는 “독자 구하기”이라 명명한 작전에 돌입했다. 곧 각 서점마다 쪽지가 발송되었는데, 내용인즉, 비트-구매자를 확보해놓고 바로 출판사에 알려달라고, 그러면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을 개시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이다.

이 작전의 결과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작해서 4주 만에 저 위쪽 북부에서 한 남성이 나타나서 내 친구의 책에 대해서 묻고 그것을 사고 돈을 지불했음에 틀림없었다. 서점주인은 곧 전보를 보내왔다. “비트­구매자 출현 - 다음 지침은?” 그러는 사이에 서점주인은 구매자를 대화로 붙잡아 놓고 커피를 따라주고 담뱃갑을 권하고 그랬다. 이 모든 행동들이 구매자를 놀라게 했지만, 그는 조용히 그러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자 번개처럼 빨리 출판사의 답변이 왔다. “구매자 이쪽으로 보낼 것 - 전 비용 이쪽 부담.” 다행하게도 구매자는 교사였고 마침 방학이어서 남독으로의 공짜여행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는 첫날은 쾰른까지 갔고 그곳에서 하루저녁 좋은 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아름다운 라인 강변을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며 여행을 즐겼다.

이틀째 오후 4시경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역에서 출판사까지 택시로 이동했고, 출판사에 가서는 출판업자의 매력적인 부인과 더불어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면서 조금은 들뜬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여행경비를 받아 챙겨서는 다시 역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2등 열차로 내 친구가 뮤즈에 봉사하고 있는 그 소도시로 갔다. 그곳엔 그 사이 둘 째 아이가 태어난 지 한참 시간이 흘렀고, 친구의 아내는 영화관엘 가고 없었다. - 작가의 아내에게라면 어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허해서는 아니 되는 휴식 아닌가. 구매자는 그러니까 내 친구를 마침 그가 아이들 저녁우유를 데워가지고 그들을 달래려고 노래를 부르고 있던 참에 만나게 되었다. 그 노래란 게 하찮은 어휘들로 구성되었을 밖에. 아무튼 이 말이 최근 독일문학에 언짢은 빛을 던지게 되었으니…….

내 친구는 자신의 독자에게 감동어린 인사를 하고서 대뜸 그의 손에다 커피 분쇄기를 밀어주고는 재빨리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이행했다. 곧 커피 물도 끓었고, 이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 수줍은 사람들이어서 서로 묵묵히 감탄하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을. 그러다가 마침내 내 친구가 외침소리를 토해냈다.

“선생은 천재이시오 - 제대로 자라난 천재이시란 말이외다!”

“아, 아닙니다,” 손님은 온유하게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작가선생이 그렇소.”

“틀린 말씀,” 내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침내 커피를 따랐다, “천재의 주요 특징은 그 희귀성에 있지요, 그리고 선생이야말로 저보다 더 희귀한 인간계층에 속합니다.”

방문객은 겸손한 이의를 달려고 했지만 혹독한 방식으로 훈시를 받고 말았다. “거 말 마쇼.” 내 친구는 말했다. “책을 쓰는 일은 그게 만들어지는 일에 비해 그저 반쯤 나쁜 일이오, 출판사를 발견하기란 장난질이요. 그러나 책을 산다는 것 - 그것을 저는 천재적 행위라 하는 것입니다. - 그나저나 우유와 설탕을 치시지요.”

그 남자는 우유와 설탕을 치더니만, 수줍어하면서 외투 오른 쪽 안주머니에서 그가 저 위 북쪽 지방에서 샀었던 책을 내밀며 헌정 사인을 부탁했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내 친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한 가지, 선생이 제 원고에다 헌정 사인을 해주는 조건이오!”

그는 서가에서 바인더를 꺼내더니 거기서 빼곡히 쓴 원고뭉치를 꺼내 와서 손님의 커피 잔 옆에 놓고는 말했다. “부디 저에게 기쁨을 주시오!”

손님은 혼란스러워 만년필을 덜덜 떨면서 원고뭉치 마지막 장 맨 아래 여백에다 머뭇머뭇 썼다. “진정한 존경심을 담아서 - 귄터 슐레겔!”

그러나 내 친구가 잉크를 말리기 위해서 그 원고를 난로위에서 흔들고 있던 한 30초쯤이 지나서 손님은 이번에는 외투 왼쪽 안주머니에서 타이프가 되어있는 종이 다발을 꺼내더니 내 친구에게 청했다, 그가 최근 독일문학에 대한 기여라고 간주하는 이 결과물을 출판사에 감정 의뢰해달라고.

내 친구는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자기는 실망감에서 몇 분간 말을 잃고 있었노라고. 이 남자의 운명에 대한 걱정이 그를 깊은 비통에 빠지게 했었노라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몇 분간을 묵묵히 건너다보고 앉아있었다. 마침내 내 친구가 나직이 말했다. “제발 간청하건대 그만 두십시오 - 선생의 독창성을 처분하는 일이외다!”

손님은 고집스레 침묵하고 있더니 자기의 원고를 쓸어 모았다.

“선생께선 여행경비를 받으실 수 없을 겝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생크림케이크가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요. 출판인의 부인은 찡그린 낯빛을 할 것이구먼요. 선생을 위해서 간청 드리는 것이니, 제발 그만 두시지요!”

그러나 손님은 찡그린 채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내 친구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한 인간을 구한다는 뜨거운 노력으로 출판사의 정산서를 가져오는 일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슐레겔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여기에서 내 친구는 이야기를 중단하고자 했지만, 나는 그가 방문객과 그만 드잡이를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휴지부가 발생했고, 그 동안 내 친구는 불끈 쥔 주먹을 생각 깊게 내려다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들은 것은 슐레겔이 짤막한 인사와 함께 떠났다는 것이고, 그의 원고는 놓아두고 갔었더란다.

그러는 사이에 슐레겔의 장편 『슬프도다, 페넬로페여!』가 귀향소설로서 전문가 권에서 상당한 주목을 이끌어냈다. 슐레겔은 교사직을 떠났고, 그러니까 제대로 된 직업을 떠났는데, 말하자면 다른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다. 나로서는 여전히 직업도 아니라고 간주하는 그런 직종에 종사한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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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구하기 Die Suche nach dem Leser」는 하인리히 뵐이 1954년에 함부르크의 《일요신문 Sonntagsblatt》에 발표한 단편이다. 여기에서는 Böll, Heinrich: Romane und Erzählungen 2. Hrsg. von Bernd Balzer, Köln 1977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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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공선옥, 곽정연, 사지원, 서용좌, 안은영, 원윤희, 이화경, 정인모, 정찬종, 최미세 공저,《하인리히 뵐과 행복사회》, 한국문화사, 13~18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9. 18:14

 

끊임없이 지배하려 ‘세뇌’ … 자신 위해 ‘맞설 용기’ 가져야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⑧ ‘사페레 아우데’ 감히 알려고 하라
2015년 12월 09일 (수) 14:05:05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유난히도 빨리 가을이 저물었다. 사라져가는 가을 꼬리를 잡고 매달리면 수많은 가을들이 딸려 나온다. 1968년 베를린의 늦가을, 서른 살짜리 여성이 공식 석상의 단상에 걸어 올라가서 현직 수상의 뺨을 때리는 장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만세 삼창처럼 ‘나치, 나치, 나치’를 외쳤다. 숨은 나치 전력자들을 찾아내어 진상규명(?)에 전력을 기울이는 활동가였다. 

당시 독일의 수상은 나치 12년 통치기간에 당원이자 전쟁 중엔 외무부 라디오 정책국 부국장으로 활동했었고, 패전과 더불어 체포돼 18개월간 수감된 전력이 있었다. 전후 독일, 서방측의 온건한 탈나치화 프로그램에서 4급 ‘단순 가담자(Mitlaufer)’ 판정을 받아 면책증명서를 지니고 새 인생을 시작한 식자층은 넘쳐났다. 

변호사, 기민연 연방의원을 거쳐 수상 직에 오른 65세의 거물 정치인에게 모욕을 가한 동기는 간단했다. 독일민족 일부는(특히 청년층은) 나치가 독일의 정상에 서있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함이었다고. 순간 세상이 들끓었다. 

오늘 이 이야기는 그 정치적 동기와 파장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작가가 그 여성에게 파리까지 붉은 장미다발을 보냈고, 다른 한 작가는 그 일을 비난했던 일을 말하고자 함이다. 꽃다발을 보낸 이유는 “작가로서의 행동의 철저한 연속선상에서, 1944년 공습에서 죽은 어머니, 나에게 나치를 증오하라고 심어주셨던 어머니 때문에, 또한 나의 세대, 살아남았지만 교사, TV편집자, 출판편집자 등의 직을 잃을까 염려해서 ‘꽃의 힘’으로 그 여성에게 공감을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세대 때문”이었다고 했다.(하인리히 뵐, <Zeit> 1969.1.10)

 

더보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852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9. 00:49

 

 

 

 

 

 

이 작품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제목의 '스파르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테르모필레 전투를 연관지어 보는 사람도 없다.

번역 손을 놓았다가......의무감에서. 

 

 

 

 

 


 

 

 

 

 

길손이시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하인리히 뵐 원작

 

 

  차가 정지했을 때 모터는 잠시 더 돌아갔다. 바깥 어딘가에서 문이 와락 열렸다. 깨진 창유리를 통해 빛이 차 안으로 떨어졌다. 이제 보니 천장의 전구가 찢겨나갔다. 전등의 나사선만 나사입구에 붙어있었다. 유리 파편이 붙어있는 가물거리는 철사 줄 몇 올에 불과했다. 그러다 모터가 멈췄다. 바깥에선 누군가 고함 소리가 들린다. “사망자는 이쪽으로, 사망자들 데려온 거요?”

  “빌어먹을, 여긴 등화관제도 이젠 안하나?” 운전수가 되받았다.

  “등화관제가 뭔 소용이여, 온 도시가 횃불처럼 불타고 있는데.” 그 낯선 목소리가 악을 쓴다. “사망자 있냐고? 묻고 있잖아?”

  “모르오.”

  “사망자는 이쪽으로, 듣고 있소? 다른 자들은 층계 위쪽으로 미술실로, 알겠소?”

  “예, 예.”

  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나는 다른 자들에 속했고, 사람들은 나를 층계 위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희미한 불빛의 긴 복도로 갔는데, 벽에는 녹색 칠이 되어 있었다. 구부러진 검은 색의 옷걸이 못들이 벽에 붙어 있었고, 6에이, 6비라고 쓰인 에나멜 팻말이 붙은 문들이 있었고, 이 문들 사이에 검은 테두리의 유리액자 안에 포이어바흐의 메데이아가 걸려있는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은 5에이, 5비라고 쓰인 문들, 그 사이에는 가시 뽑는 소년의 상이 신비한, 불그스레 빛나는 사진이 갈색 액자에 들어 있었다.

  층계 입구 앞 중앙에 있는 큰 기둥도 거기 있었고 그 뒤에는 길고 좁게, 기이하게 만들어진 석고로 된 파르테논프리즈 모형이 누렇게 빛을 내고 있었다, 진짜로, 고풍스럽게. 그리고 모든 것은 사필귀정, 고대 그리스의 중장병이 나왔다. 화려하고 위험스럽게, 깃털장식으로 수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계단부 까지도, 이젠 노란 칠이 되어있는 벽에 모두가 순서대로 걸려있었다. 대 선제후들부터 히틀러까지…….

  그리고 거기 좁고 작은 발걸음 중에, 내가 마침내 다시 한두 발짝 들것에 그대로 누워있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특히나 아름다운 특히나 위대한 특히나 화려한 노 프리츠의 사진이 있었다. 담청색 제복을 입고, 빛나는 눈과 크고 황금으로 번쩍이는 가슴에 달린 별모양도.

  다시금 나는 비스듬히 들것에 누운 채 인류의 초상들 사이로 실려 지나갔다. 거기에는 북구의 함장이 독수리눈과 멍한 입을 하고 있었고, 모젤 강 서안의, 약간 마르고 예리한 여인, 양파모양 코를 한 동방의 찡그린 얼굴, 키가 크고 목젖이 튀어나온 산골 배경 영화 프로필, 그 다음엔 다시 복도가 나왔고, 나는 몇 걸음을 다시 들것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운반병들이 두 번째 층계로 오르기 전에 큰 황금 철십자훈장을 위에 붙이고 돌로 된 월계관을 쓴 전몰장병기념비가 보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무겁지 않았고, 운반병들은 서둘렀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었다, 나는 열이 높았고, 온 군데가 아팠다. 머리도, 두 팔도, 두 다리도, 그리고 심장은 미친 것처럼 뛰었다. 이런 열 속에서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인류의 초상들을 지나쳐갈 때 이번엔 모든 다른 것들이 나왔다. 카이사르와 키케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셋이 얌전하게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신기한 모조품으로, 완전히 노랗고 진짜처럼, 고대 풍에다 위엄을 갖추고 벽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모퉁이를 돌 때에는 헤르메스 기둥도 나왔다. 복도 맨 뒤쪽에는 - 복도는 이 부분에서는 장밋빛 빨강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 아주 맨 뒤쪽에는 제우스의 찌푸린 얼굴이 미술실 입구 위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제우스 상은 아직 멀었다. 오른 쪽으로는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 하늘을 온통 붉었다. 검고 두터운 연기구름이 장엄하게 흘러갔다……

  나는 다시 왼쪽을 보아야 했다, 오1에이와 오1비 문들 위쪽의 현판들을 보았고, 갈색의 곰팡내 나는 문들 사이에서는 황금색 액자에 담긴 니체의 코밑수염과 코끝만을 보았다. 그럴 것이 그림의 나머지 반은 쪽지로 가려져 있었는데, “경상 외과”라고 쓰인 쪽지가……

  만일 지금, 나는 스치듯이 생각했다…… 만일 지금…… 그러나 또 토고의 그림도 있었다. 화려하고 커다란, 오래된 상처처럼 납작한, 화려한 복제품이, 앞쪽으로 식민관사들 앞에 흑인들과 무의미하게 총검을 들고 있는 병사 앞에, 무엇보다도 완전히 자연에 충실하게 그려진 바나나 더미들이 있었다. 왼쪽으로 한 더미가, 오른 쪽으로도 한 더미가, 그리고 오른 쪽 더미의 중간 크기 바나나 위에 거기 뭔가 새겨져 있었는데, 내가 직접 거기에 뭔가를 끄적거려 넣었던 게 틀림없는데……

  그러나 이제 미술실의 문이 확 열리고, 나는 제우스 흉상아래에서 흔들거리며 두 눈을 감았다. 난 더 이상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술실은 요오드며 오물 냄새에 두더지와 담배 냄새가 났다. 그리고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담배 한 대 입에 물려주세요, 왼쪽 주머니에 있어요.”

나는 어떤 누군가가 내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성냥개비에 불을 붙였고,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물렸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증거는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고등학교마다 미술실이 있는 것이고, 초록색과 노란 색으로 칠해진 벽들에 휘어진 낡은 옷걸이 못들이 있는 현관들이 있는 것이다. 결국 내가 우리 학교에 와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메데이아가 4에이와 4비 사이에 걸려있다고 해도, 니체의 코밑수염이 오1에이와 오1비 사이에 있다고 해도. 틀림없이 어떤 규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그것이 걸려있어야 된다고 지정해 놓은 훈령이. 프로이센 인문계 고등학교를 위한 경영지침이. 즉 메데이아는 4에이와 4비 사이에, 가시 뽑는 소년은 그 자리에,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키케로는 복도에, 니체는 저 위 학생들이 철학을 배우는 그곳에 붙여놓으라고. 파르테논 프리즈, 토고에서 온 현란한 그림도. 가시 뽑는 소년과 파르테논 프리즈는 마침내 훌륭하면서도 낡은, 수 세대를 지나오면서 간직된 학교의 필수소장품이 되었다. 그리고 바나나 그림 위에다 낙서를 하려는 발상을 가졌던 것이 비단 나 하나뿐일 리도 없었다. 토고여 영원하라! 라고. 사람들이 학교에서 하는 농담들은 늘 같은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열이 있다는 것, 내가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통증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차 속에서까지는 그게 아직 심했었다. 차가 작게 패인 도로들을 지날 때다마 나는 소리를 질러댔었다. 큰 분화구는 더 나았다. 차는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마치 배가 파도 사이 물고랑을 타듯이 그랬다. 그러나 사람들이 깜깜한 곳 어디에선가 내 팔에 들이밀었던 주사가 이제는 듣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바늘이 어떻게 내 피부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지, 저 아래 다리까지 어떻게 뜨겁게 변하는지를 느꼈었다.

  그게 그럴 수는 없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거리를 차가 달려왔을 리가 없다, 거의 30킬로미터를. 무엇보다도 너는 느끼지 못하잖아, 어떤 감정도 네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잖아, 다만 눈이 그럴 뿐, 어떤 감정도 네게 말을 해주지 않잖아, 네가 너희네 학교에 와 있다고, 네가 겨우 석 달 전에 떠났었던 그 학교에 와 있다고. 8년이란 세월은 사소한 게 아니야, 8년을 지내고서 그 모든 것을 겨우 눈으로만 알아보게 되느냐고?

감긴 눈까풀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마치 영화 같았다. 아래 층 복도, 녹색 칠, 층계 올라와서, 노란 칠, 전몰장병기념비, 복도, 층계 올라와서, 카이사르,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 헤르메스, 니체의 코밑수염, 토고, 제우스 흉상……

  나는 담배를 내뱉고 고함을 쳤다. 고함을 지르는 건 늘 좋았다. 그냥 큰 소리로 외치면 되었다. 외침은 장관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누군가가 내 위로 몸을 굽혔을 때도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낯선 숨소리가 느껴졌다, 따뜻하고 그래도 역하게 여송연과 양파 냄새를 풍겼다. 어떤 목소리가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래, 뭐야?”

  “마실 것을 좀, 그리고 담배 한 대 더, 위에 호주머니에 있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다시 누군가가 호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다시 성냥을 켰다. 누군가가 타들어가는 담배를 내 입 속에 넣어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가 물었다.

  “벤도르프.”

  “감사합니다.” 내가 말하고는 담배를 빨았다.

  어쨌거나 나는 정말로 벤도르프에 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고향에 말이다. 그리고 내가 전무후무한 고열에 들뜬 것이 아니라면, 지금 내가 어떤 인문계 고등학교 건물에 와 있는 것은 확실했다. 분명 이곳은 학교였다. 저기 아래 목소리가 소리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른 자들은 미술실로 옮겨!”라고? 나는 다른 자였다. 나는 살아 있었다, 살아있는 자들은 아무래도 다른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미술실이 여기에 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라면 내가 왜 잘 못 본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카이사르와 키케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알아보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오직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분들을 다른 종류의 학교 복도에 벽에 세워둘 거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가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다시금 여송연과 양파 냄새가 났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 채로 두 눈을 떴다. 거기엔 지치고 늙은,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이 소방대원 제복 위로 나와 있었다. 늙은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시게, 전우여!”

  나는 마셨다. 물이었다. 그러나 물이 훌륭하진 못했다. 나는 내 입술 끝에서 냄비의 쇠 냄새를 느꼈다.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들이마시게 될까 느끼는 것은 참 좋았다. 그러나 소방대원은 내 입술에서 냄비를 빼앗더니 가 버렸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친 듯이 어깨만 으쓱하더니 그대로 더 가 버렸다. 내 옆에 누어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소리 질러대 봤자 소용없어. 물이 더는 없거든. 도시가 불타고 있어, 보고 있잖은가.”

  “도시 이름이 뭔데요?” 나는 내 옆에 누어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벤도르프.”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 똑바로 내 앞을 보며 창문들을 응시했고 여러 번 천정을 보았다. 천정은 아직 말짱했다. 하얗고 매끄러운 것이, 고전주의 모방으로 석고 테두리를 두른 채로. 그러나 모든 학교의 미술실에는 고전주의 모방으로 석고 테두리를 두른 천장을 둔다, 적어도 양질의 유서 깊은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다 그렇다. 그건 아무튼 분명하다.

  이제 나는 승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벤도르프에 있는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의 미술실 안에 누어있다는 사실을. 벤도르프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셋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 알베르투스-학교 - 그리고 이 말을 꼭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 마지막 것, 세 번째 학교가 아돌프-히틀러-학교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에는 노 프리츠의 상이 특별히 화려하고 특별히 아름답게 특별히 크게 층계참에 걸리지 않았을까? 나는 이 학교에 다녔다, 8년 동안을. 하지만 다른 학교들이라고 해서 이 상이 똑같은 자리에 걸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첫 번째 층계를 오르면 그렇게나 똑똑히 눈에 띠어서 시선을 붙잡으리만치 그렇게?

  밖에서는 무거운 대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말고는 조용했다. 다만 섬광의 침식이 밀려닥칠 뿐이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합각머리벽이 무너져 내렸다. 대포는 조용히 규칙적으로 쏘아댔다. 나는 생각했다, 참 좋은 대포로군!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그런 놈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다. 맙소사, 대포라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것인지,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지. 어둡고 거칠게, 그러나 부드럽고, 거의 섬세한 오르간 연주였다. 여하튼 품격 있는 연주. 나는 대포라는 것이 뭔가 품격 있는 요소를 지녔다고 느낀다, 쏘아 올라가더라도. 너무도 품위 있는 인상을 준다, 그림책에서는 정확하게 전쟁을 가리키면서…… 그러다가 나는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전몰장병기념비에 등재될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더 큰 황금 철십자를 장식하고 더 큰 돌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서 또 다시 기념비 낙성식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갑자기 나는 알게 되었다, 만일 내가 정말로 우리학교에 와 있는 것이라면, 내 이름도 돌 속에 새겨져서 거기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학교 달력에는 내 이름 뒤에 쓰일 것이리라 - “학교에서 전선으로 징집되어 ……를 위하여 전사했노라고……”

  그런데 나는 점선 안에 들어갈 그 무엇을 위해서였나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지금 내가 다녔던 학교에 와 있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일을 나는 기필코 알아내고자 했다. 전몰장병기념비에도 특별한 무엇은 없었고,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어디에나 다 있는 그런 것이었다. 마치 기성복 같은 전물장병기념비였다, 그래, 어딘가 중앙에서 받아다 놓은 것일 테니……

  나는 미술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림들은 다 치워버렸고, 구석에 쌓아놓은 의자들만 몇 개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여러 개가 나란히 있는 높고 좁다란 창문들에는 빛이 엄청 쏟아져 들어왔는데, 마치 그런 것이 미술실에 소속된 것 마냥? 내 가슴은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만일 이 방에 있었더라면 무엇인가가 내게 말을 해줄 법 아니던가, 팔 년 동안 꽃병을 그렸고 서체를 연습했었던 방이라면? 미술선생님이 앞에 받침대 위에다 세워 놓은 좁장하고 섬세한 신비롭게 모방한 로마식 유리병을 그렸고, 모든 종류의 서체를, 고서체, 로마서체, 이탤릭, 장식체 등을 연습했던 곳이라면? 나는 그 시간을 학교생활을 통틀어 가장 싫어했었다. 시간 내내 지루함을 짓씹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제대로 꽃병을 그리거나 서체를 그려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답답한 칠의 지루한 벽들을 마주하고서 나의 저주 나의 증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속에는 어느 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지웠고, 연필을 깎았고, 지웠고…… 그 뿐 ……

  나는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팔들을 움직일 수 없었고, 오른 쪽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왼쪽 다리만 겨우 움직였다. 나는 사람들이 내 팔들을 몸뚱이에 묶어놓았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꽊 묶어서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두 번째의 담배도 뱉어냈다. 밀짚자루들 사이의 통로에다가. 그리고는 팔들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너무도 아파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속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언제고 좋았다. 팔들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도 났다.

  그러다가 의사가 내 앞에 왔다. 안경을 벗어들고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의사 뒤로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던 소방대원이 서 있었다. 그가 의사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의사는 안경을 다시 썼다. 나는 두꺼운 안경유리 너머로 그의 큰 회색의 눈을, 가볍게 떨리는 동공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너무도 오래 동안이라서 나는 그만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잠시 만요, 곧 당신 차례가 ……”

  그리고서 그들은 내 옆에 누어있던 병사를 들어 올리더니 칠판 뒤로 데려갔다. 나는 그들이 가는 쪽을 따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칠판을 떼어서 비스듬히 놓아두었는데, 벽과 칠판 사이에 침대보가 걸려 있었다. 그 뒤에는 밝은 불빛이 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천이 다시 옆으로 젖혀지고 아까 내 옆에 누어있던 병사가 다시 실려 나왔다. 운반병들은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문으로 끌고나갔다.

  나는 다시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넌 알아내야해, 어떤 부상을 당했는지, 지금 너희네 학교에 와 있는 것인지를.

  모든 것이 참 냉랭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나를 죽음의 도시의 박물관으로 끌어다 놓은 것처럼. 내 눈이 알아보았지만, 오직 내 눈만이 알아보았지만, 무감각하고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던 세상을 지나서. 내가 석 달 전까지 이곳에 앉아있었다는 것, 꽃병을 그리고 서체를 그려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쉬는 시간에 잼과 버터 바른 빵을 들고 내려가, 니체, 헤르메스, 토고, 카이사르,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지나서, 메데이아가 걸려있는 아래층 복도를 천천히 지나서, 그리고는 우유를 마시러, 아무리 금지가 되었다 해도 담배를 피우는 모험을 할 수도 있었던 어스름한 작은 방에서 우유를 마시러 관리인에게로, 비르겔러 씨에게로 갔던 것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분명히 내 옆에 누어있었던 그를 아래로 데려갔다, 사망자들이 누어있는 곳으로. 아마도 사망자들은 비르겔러의 잿빛 작은 방에 누어있을 것이었다. 따뜻한 우유 냄새가 나는 곳, 먼지 냄새며 비르겔러의 싸구려 여송연 냄새가 나는……

마침내 운반병들이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나른 들어 올리더니 칠판 뒤로 데려갔다. 나는 다시 둥둥 떠갔다, 이번에는 문 곁을 지나서. 둥둥 떠 지나가면서 나는 그것마저 일치한다는 것을 보았다. 문 위에는 한 때, 그러니까 아직 학교가 토마스-학교라 불릴 때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떼어냈는데, 거기에는 새로이 어두운 노란색 흠집이 생겨났다. 십자가 모양으로 단단하고 분명하게, 그건 마치 그들이 떼어낸, 낡고 희미한 작은 십자가 자체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십자가의 흔적은 벽의 퇴색한 도료 위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남아있었다. 그들은 화가 나서 벽 전체를 새로이 칠을 했는데,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칠쟁이가 색조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고, 십자가는 갈색조로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벽 전체는 장밋빛이었다. 그들은 투덜대었지만 소용없었다. 십자가는 벽의 장밋빛 위에서 갈색으로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의 페인트 예산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 십자가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잘 들여다보면, 수년 간 회양목 가지들이 걸려있었던 오른 쪽 발코니 위에 분명한 대각선 흔적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직 학교에 십자가를 걸어놓는 것이 허용되었을 때 관리인 비르겔러 씨가 그 뒤에다 걸어놓았던 것인데……

  그 모든 것은 내가 문을 지나서 칠판 뒤로, 눈부신 불빛이 타고 있는 곳으로 들려가는 순식간에 떠올랐다.

  나는 수술대 위에 누어서 내 몸을 아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주 조그맣고, 오그라든 모습으로, 머리 위 조그맣고 하얀 전구의 맑은 유리 안에는 가느다란 두더지 색 꾸러미가 마치 특이하고 섬세한 태아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저 위에 있는 그것이 바로 나였다.

  의사는 나를 등으로 돌려놓더니, 탁자 옆에 서서 거기서 기구들을 헤집어 찾고 있었다. 소방대원은 널찍하고 늙은 모습으로 칠판 앞에 서 있었고 나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는 피곤하고 서글프게 미소를 지었고, 수염 더부룩한 그의 더러운 얼굴은 잠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칠판의 끈적끈적한 이면에서 난 뭔가를 보았다. 내가 이 죽음의 집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내 심장을 느끼게 한 무엇이었다. 내 심장 속 어딘가 비밀스런 방에서 나는 깊이 끔찍하게 놀랐고,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칠판에는 내 글씨가 있었던 것이다. 위쪽 맨 위 줄들이. 나는 내 서체를 안다. 그건 마치 우리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 마냥 더 나빴다, 훨씬 더 분명했다. 그리고 내 서체의 일치성을 의심할만한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모든 다른 것은 증거가 아니었다, 메데이아도 니체도 디나르 시골 배경 영화 프로필도 아니었고, 토고의 바나나 그림도 아니었다. 문 위에 걸린 십자가도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모든 것은 어느 학교에서나 다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학교들에서 내 서체로 칠판에 글을 쓸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거기 그것이, 당시에 우리가 써야만했던 그 명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저주 받은 생에서 겨우 석 달 전으로 되돌아가서 그때.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아, 나는 안다, 칠판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미술선생님은 화를 내셨다. 나더러 제대로 분할을 못했다고, 서체를 너무 크게 잡았다고. 그래놓고서는 선생님 자신도 고개를 갸웃둥거리시며 그 아래에다 똑같은 크기로 따라 적으셨다,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모두 해서 일곱 번 거기 그렇게, 내 서체가 남아있었다. 고서체, 프락투어, 이탤릭체, 로마서체, 이탈리아 서체, 장식체. 그렇게 일곱 번 분명하게 또 가차 없이.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소방대원은 이제 의사의 가벼운 부름에 따라 옆으로 비켜섰다. 그래서 이젠 내가 그때 서체를 너무 큰 것으로, 구두점은 너무 많이 택했기 때문에 약간 훼손된 경구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좌측 상박에 동통을 느꼈을 때 나는 솟구쳐 경련했다. 기대어 억제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내 몸을 온통 감았는데, 내겐 팔들이 더 이상 붙어있지 않았다. 오른 쪽 다리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갑작스레 뒤로 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기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함을 질렀다. 의사와 소방대원은 나를 얼이 빠져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만 주사기의 플라스크를 눌렀다. 플라스크는 천천히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다시 한 번 칠판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방대원이 내 곁에 바짝 다가서서 그것을 가렸다. 그는 내 어깨를 꽊 붙잡았다. 나는 헤진 그의 제복의 탄내 나는 더러운 냄새를 맡았고 그의 지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그제서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비르겔러였다.

  ‘우유를’이라고 나는 나직이 말했다.

 

주석 ------------------------

1) 메데이아: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그림(1870). 메데이아가 두 아들을 안고서 남편 이아손의 배신에 갈등하고 있는 그림. 원본은 뮌헨의 노이에 피나테크 소장.

2) 가시를 뽑는 소년: 로마에서 발견된 73㎝의 브론즈 상으로, 고대의 유물로 간주됨. 원본은 런던의 영국박물관 소장.

3) 프리즈: 건축물에서 보는 띠 모양의 장식.

4) 선제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 황제 선거는 1198년부터 1806년까지 행해졌다.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국왕의 7인.

5) 노 프리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의 애칭.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제군주로 평가된다.

6) 헤르메스 기둥: 4세기경의 유물로, 86㎝ 석회암 난간모서리 장식. 원본은 파리의 루루브르 박물관 소장.

7) 벤도르프: 라인란트-팔츠 주의 작은 도시, 작품이 발표된 1951년 당시 주민은 13,000명 정도, 현재에도 16,538명이 25㎢ 안에서 거주하는 소도시. (광주 면적의 1/20, 인구는 1/90)

8) 인문계 고등학교 셋: 이것은 허구로, 현재에도 김나지움은 한 곳 뿐.

9) 디나르 족: 유럽 동남부, 발칸 산지 아드리아 해 주변에 거주하는 인종.

10) 제목: 시모니데스의 「테르모필레의 전몰용사의 비」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죽어가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외친다. “길손이여. 그대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게서 말해주오, 법이 명했던 바대로 우리 여기 쓰러져 있음을 보았노라고. Wanderer, kommst du nach Sparta, erzähle dorten; du habest uns hier liegengesehen, wie das Gesetz es befahl.” 히틀러의 독일이 법의 이름으로 소년들을 징집하고 그 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를 외치기 위해 작가 뵐은 레오니다스를 인용했다. 뵐은 그의 작품에서 “전몰, 전사 gafallen : 떨어져 죽다”라는 우회적 표현을 거부하고 기필코 “살해당했다 getötet”는 표현을 고집한다.

11) 프락투어: 옛 독일어 고유의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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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출처: Heinrich Böll: Wanderer, kommst du nach Spa……(195), in: Romane und Erzählungen 1, Hrsg. v. Bernd Balzer. Köln 1977, S. 195~202.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3. 1. 9. 21:31

손잡이 없는 찻잔의 운명

 

 - 하인리히 뵐

 

  이 순간 나는 창문턱 밖에 서서 천천히 눈으로 뒤덮이고 있다. 지푸라기 대롱은 비눗물 속에 얼어붙어 있고, 참새들은 내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사람들이 흩뿌려준 빵 부스러기를 놓고 싸우는 거친 새들, 나는 내 목숨 걱정에 떨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늘 떨어야 했었지만. 이 살찐 참새들 중의 하나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창턱에서부터 아래의 콘크리트바닥으로 떨어져 - 비눗물은 얼어붙은 타원형 뭔가로 남겠고, 지푸라기는 꺾이고 - 내 조각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

 

  그저 맥이 빠져서 나는 뿌옇게 변한 창유리를 통해서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들이 가물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 안에서 부르는 노래를 겨우 나직이 듣고 있다. 참새의 야단법석 소리가 모든 소리를 뒤덮고 만다.

 

  물론 안에 있는 저들 누구도 내가 정확하게 스물다섯 해 전에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스물다섯 살이라는 것이 단순한 커피 잔의 나이로는 대단한 나이임도 알지 못한다. 우리들 종족의 피조물들이라 하여도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유리진열장 속에서 그저 가물거리고 있는 놈들은 우리들 수수한 찻잔들보다는 엄청 오래 산다. 아무튼 내가 확신하건대 우리 가계에서는 단 하나도 더 살아남지 못했다. 양친, 형제자매들, 심지어 내 자식들도 이미 오래 전에 죽었는데, 그 반면에 나는 함부르크의 창틀위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참새들을 동무삼아 내 스물다섯 살 생일을 보내야 한다.

 

  우리 아버지는 케이크 접시였고 우리 어머니는 귀한 버터 통이었다. 내겐 형제자매가 다섯으로, 찻잔이 둘, 받침접시가 셋이었다. 허나 우리 가족은 겨우 몇 주간 함께 지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찻잔이라는 게 어려서 갑자기 죽는다. 그러다 보니 내 두 형제와 사랑하는 누이 하나는 벌써 두 번째 크리스마스 날 식탁에서 깨져 버렸다. 곧 이어 우리는 사랑하는 아버지와도 헤어져야 했다. 받침접시인 내 누이 조세피네와 함께 어머니를 동반하고서 우리는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서 잠옷과 때밀이 수건 사이에서 우리는 로마까지 갔다. 거기서 우리 주인어른의 아들, 고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아들에게 봉사하게 된 것이다.

이 생애의 시기는 - 나는 나의 로마시절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 내게 흥미진진했다.

 

  우선 율리우스가 - 그 학생의 이름이 율리우스였다. - 날마다 나를 카라칼라욕장, 그러니까 거대한 공중목욕탕의 잔훼로 데리고 나갔다. 그곳에서 나는 나와 내 주인을 일터로 늘 동반했던 보온병과 곧 친구가 되었다. 그 보온병은 훌다라는 이름이었고, 율리우스가 삽을 들고 작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몇 시간이고 풀 속에 함께 누어 있곤 했다. 나는 나중에 훌다와 사랑에 빠져서 로마시절 두 해째에 그녀와 결혼했다. 물론 내가 보온병과 결혼하는 것이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로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지만. 어머니는 참으로 기이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담배통으로 쓰인다는 사실 때문에 모욕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누이 요제피네가 재떨이로 강등된 것에 대해 극도의 모멸감을 느낀 것과 비슷했다.

 

  나는 아내 훌다와 몇 달을 행복하게 살았다. 우리는 함께 모든 것을 배웠다, 율리우스가 배우는 것들 말이다. 아우구스투스 영묘, 아피아 가도, 포로 로마노 - 그러나 그중 마지막 것은 내게 슬픈 추억으로 남았다. 거기에서 내 사랑하는 아내 훌다가 로마의 불량소년이 던지 돌팔매에 맞아 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훌다는 비너스 여신상에서 나온 주먹만 한 돌멩이 조각으로 인해 죽어버렸다.

 

  계속해서 내 생각을 따라올 마음이 있는 독자님 - 손잡이 없는 찻잔에게도 고통과 생의 지혜가 있음을 시인해줄 마음이 있는 독자님에게라면 나는 참새들이 벌써 빵부스러기들을 쪼아 먹어 버렸으므로 내게는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씀드릴 수 있다. 또한 그 사이 뿌옇던 유리창에 스프접시 정도 크기의 매끄러운 부분이 생겨서 내가 방안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분명하게 보고 있고, 또 코를 유리창에 박고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내 친구 발터의 얼굴도 보고 있음을. 발터는 아직 선물을 나누기가 시작되기 전 세 시간 전에 내 몸에다 비눗방울에 쓸 물을 만들었었는데, 이제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고, 그 애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는 발터가 선사받은 완전 새로 뽑은 장난감기차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도 발터는 고개를 젓고 있고 - 그리고 창유리에 다시 김이 서리는 동안에 나는 안다, 내가 적어도 반시간 후에는 따뜻한 방안에 있게 되리라고…….

 

  로마시절 향유했던 기쁨은 아내의 죽음뿐 아니라 그보다도 어머니의 괴팍함과 누이의 불만으로 흐려졌다. 둘이는 우리가 장 속에 함께 앉아있는 저녁이면 그들의 사명을 오해받는 데 대해 불평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내게도 자의식 강한 찻잔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굴욕이 닥쳐왔다. 율리우스가 내 몸으로 화주를 마시다니! 어느 찻잔에 대해 ‘그 찻잔으로 술을 마셨다네!’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인간에게라면 ‘그 인간 나쁜 데 출입했다네!’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이젠 엄청 많이 술을 마셔대는 잔이 되고 말았다.

 

  나에게는 굴욕의 시절이었다. 그 시기는 매우 길었고, 마침내 케이크 한 상자와 내 사촌들 중 하나인 달걀 담는 컵과 그 덮개와 더불어 뮌헨에서 로마로 보내졌다. 그날부터는 술은 내 사촌이 담당하게 되었고, 율리우스는 나를 한 여인에게 선사했다. 그녀 또한 율리우스와 같은 목적으로 로마에 온 사람이었다.

 

  내가 삼년 동안 우리의 로마 거실의 창틀을 통해서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바라볼 수 있었다면, 이제 이사를 했고 나머지 이년 동안은 새로운 거실에서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교회를 바라다보았다. 이 새로운 삶에서 나는 또 어머니로부터 떨어지긴 했지만, 내 원래의 생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커피를 마시는 잔이 된 것이다. 나는 하루에 두 번 깨끗이 닦여서 예쁘고 작은 장 속에 서 있곤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역시 굴욕은 모면되지 않았다. 그 예쁘고 작은 장 속에서의 동무는 후르츠였다니! 온 밤을 그리고 많은 낮 시간 동안 - 그리고 그 2년간 내내 - 나는 후르츠와의 동무를 견디어야 했다. 훌레방 종족이고, 그녀의 요람은 휘르체니히의 훌레방 선조대대로의 저택에 있었다. 그리고 아흔 살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아흔 해를 제대로 산 것은 아니었다.

 

  내 질문, 왜 그녀는 항상 장 속에 서있는가 하는 것에 그녀는 거만스럽게 대답했다, ‘후르츠로 무언가를 마실 수는 없지 않아!’라고. 후르츠는 아름다웠고, 부드러운 회백색으로, 자잘한 녹색 점들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놀라게 할 때마다 그녀는 창백해져서 녹색 점들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특별한 악의가 없이도 나는 그녀를 자주 놀라게 했다. 우선 프러포즈를 함으로써. 내가 그녀의 가슴과 손을 잡으면 그녀는 너무도 창백해져서 나는 그만 그녀의 생명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녀가 다시 약간의 색깔을 되찾기까지는 몇 분이나 걸렸고, 그러면 그녀는 속삭였다, ‘그런 소릴랑 다시는 하지 말아요. 내 신랑이 에어랑엔에서 유리 진열장 안에 서 있다오, 나를 기다린다오.’ ‘대체 얼마 동안을요?’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십 년 되었어요. 우리가 1914년 봄에 약혼을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우린 여태 떨어져 있답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의 안전금고에서 전쟁을 살아남았어요. 그는 에어랑엔에 있는 우리 집 지하실에 있었고요. 전쟁 후에 나는 유산상속 논란의 결과 뮌헨의 유리 진열장으로 가게 되었고, 그는 같은 유산상속 논란의 결과 에어랑엔의 유리 진열장으로 가게 되었지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디아나가’ - 그게 우리 주인님 이름이었다. - ‘에어랑엔의 유리 진열장 여주인의 아들 볼프강과 결혼을 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에어랑엔의 유리 진열장 속에서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된다오.’

 

  나는 그녀를 다시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 침묵했다. 왜냐하면 나는 물론 오래 전에 율리우스와 디아나가 서로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폼페이 탐사여행 중에 율리우스에게 말했었다, ‘아, 이 보세요, 내게 찻잔이 하나 있는데요, 그걸로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랍니다.’

 

  율리우스가 말했어요, ‘아, 제가 그런 곤경에서 당신을 도와드려도 될는지요?’

나중에는 내가 더 이상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지 않았기에 후르츠와 서로 잘 이해하며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저녁에 함께 장 속에 있을 때면 그녀는 항상 말했다, ‘아, 내게 뭐라도 이야기 해봐요, 하지만 가능하면 너무 평범한 것 말고요.’

 

  내 몸으로 커피, 코코아, 우유, 포도주, 물 등이 마셔진다는 사실을 그녀는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러나 내가 율리우스가 나를 가지고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다시 발작을 일으키고는 감히 (내 겸손한 의견으로는) 불가한 표현을 하곤 했다, ‘바라건대 디아나가 이런 평범한 녀석에게는 빠지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나 모든 것은 마치 디아나가 이 평범한 녀석에게 빠져버린 것 같아 보였다. 디아나의 방에 있는 책들은 먼지가 쌓여갔고, 타자기에는 몇 주 동안 단 한 장의 종이가 끼어져 있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겨우 반 쪼가리 문장이 쓰여 있었다, ‘빙켈만이 로마에 갔을 때…….’

 

  나는 너무도 성급히 씻기곤 했고, 심지어 세상일이라곤 어두운 후르츠까지도 예감하기 시작했다, 에어랑엔에 있는 그녀의 약혼자와의 재회가 점점 불가사의한 일이 되고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디아나는 에어랑엔으로부터 편지들을 받기는 하지만 이 편지들을 답장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이상해졌다. 그녀는 - 이 사실은 사실 머뭇거리면서 기록하는데 - 내 몸으로 포도주를 마셨고, 내가 저녁에 그 이야기를 이 후르츠에게 했더니 그녀는 거의 기절을 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는 말했다, ‘나는 찻잔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짓을 해대는 여성의 소유로 남을 수 없어요.’라고.

 

  그녀는, 착한 후르츠는 자신의 소원이 얼마나 빨리 성취될 수 있을지 모르고 있었다. 후르츠는 전당포업자에게로 넘어갔는데, 디아나는 ‘빙켈만이 로마에 갔을 때…….’라고 시작된 문장이 있는 종이를 타자기에서 빼버리고 볼프강에게 편지를 썼다.

 

  나중에 볼프강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디아나는 내 몸으로 유유를 마시면서 아침을 먹는 중에 편지를 읽었다. 나는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에겐 내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 단지 저 얼빠진 후르츠가 문제였어.’ 나는 그녀가 『고고학 입문』이라는 책에서 전당포영수증을 꺼내어 그것을 봉투 안에 넣는 것을 보았다 - 그래서 나는 그 착한 후르츠가 그 사이 에어랑엔에서 신랑과 합쳐져서 유리 진열장 안에 서있게 됨을 예견해도 좋았다. 그리고 나는 볼프강이 품위있는 아내를 발견했으리라 확신한다.

 

  나에게는 묘한 해들이 이어졌다. 나는 율리우스와 디아나와 함께 독일로 돌아왔다. 그들은 둘 다 돈이 한 푼도 없었고, 나는 그들에게는 값진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나를 가지고 물을 마실 수도 있었으니, 사람들이 기차역의 샘에서 마실 수 있을 그런 맑고 깨끗한 물말이다. 우리는 에어랑엔으로도 프랑크푸르트로도 가지 않았고 함부르크로 갔는데, 그곳에서 율리우스는 은행에 일자리를 얻었다.

 

  디아나는 더 아름다워졌다, 율리우스는 창백했다. -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맙소사 약간 더 만족스러워 했다. 내 어머니는 우리가 저녁에 부뚜막에 서로 나란히 서있을 때면 말하고 했다, ‘그래 뭐, 어쨌거나 마가린이니까……,’ 그리고 누이는 심지어 약간 교만해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소시지 접시로 사용되었으니까. 그러나 내 사촌 계란 컵은 계란 컵에게는 드물게 마련된 것 같은 이력을 쌓아갔다. 그는 화분으로 사용된 것이다. 데이지꽃, 민들레, 꼬마 마가렛들에게 그는 잠깐 체류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디아나와 율리우스가 계란을 먹을 때면 그들은 계란을 받침접시 가장자리에 놓아두곤 했다.

 

  율리우스는 점점 말이 줄었고, 디아나는 어머니가 되었다 - 전쟁이 닥쳤다. 그리고 나는 가끔 지금쯤 다시 은행의 안전금고에 들어가 있을 후르츠를 생각하곤 했다, 비록 그녀가 내게 가끔씩 모욕을 주긴 했을지라도, 나는 그녀가 안전금고 안에서라도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디아나와 함께 또 가장 큰 아이 요한나와 함께 나는 전쟁을 뤼네부르거 하이데에서 보냈다. 나는 율리우스가 휴가차 왔다가 내 몸을 오랫동안 젓고 있을 동안이면 그의 사색적인 얼굴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디아나는 율리우스가 커피를 그리 오래도록 젓고 있는 것을 보고서 가끔 놀라기도 했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뭘 하는 거예요 - 당신 지금 몇 시간 째 커피를 젓고 있잖아요.’

 

  디아나도 율리우스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했는지를 망각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참 묘한 일이었다. 그들이 나를 여기 이렇게 밖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고양이 때문에 위협을 받으면서 꽁꽁 얼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니 - 반면에 발터는 나 때문에 울고 있는데. 발터는 나를 좋아했다. 그 애는 내게 이름까지 붙여주며, ‘이반처럼 마시기’라고 불렀다 - 나는 그 애에게 비눗방울 만드는 통이 되고, 그 애의 동물들을 위해서 먹이그릇이 되고, 꼬마 목각인형들의 욕조가 되어준다. 나는 그에게 물감이나 풀을 섞는 그릇이 되고…… 나는 그가 지금 선사받은 새 기차로 나를 실어 나르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발터는 격하게 운다. 나는 그 애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날 저녁 그들에게 보장해주고 싶었던 가정 평화가 걱정이다. - 그렇지만 인간이란 얼마나 빨리 늙어버리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율리우스는 손잡이 없는 찻잔 하나가 갓 나온 장난감기차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그는 망각했다. 그는 완고하게 발터에게 나를 다시 꺼내라고 말린다. - 나는 그가 야단치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는 발터만이 아니라 디아나까지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디아나가 우는 것은 내게 편치 않다. 나는 디아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내게서 손잡이를 깨뜨린 것이 바로 그녀였다. 뤼네부르거 하이데에서 함부르크로 이사하려고 나를 포장할 때 그녀는 그만 내 몸을 두껍게 싸는 것을 잊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손잡이를 잃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값어치가 있었다. 당시에는 손잡이 없는 찻잔 하나도 여전히 값어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살 만한 찻잔들이 널리게 되었을 때 나를 버리려고 했던 것은 율리우스였다. 그러나 디아나가 말했다, ‘율리우스, 당신 정말로 이 찻잔을 버리려고 - 이 찻잔을?’

 

  율리우스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미안!’ - 그렇게 해서 나는 살아날 수 있었고 씁쓸한 여러 해를 면도용 비누통으로서 봉사하게 되었다. 우리 찻잔들은 면도용 비누통으로 낙착되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나중에 도자기로 된 머리핀 그릇과 재혼을 하게 되었다. 이 두 번 째 아내는 게르트루트였는데, 그녀는 내게 친절했고 현명했으며, 우리는 꼬박 2년 동안 욕실 유리선반 위에 나란히 서있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아주 갑자기. 안에서는 여전히 발터가 울고 있고, 나는 율리우스가 감사할 줄 모르는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 나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다. 이 인간들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곳 바깥은 고요하다. 눈이 내리고 - 고양이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깜짝 놀란다. 창문이 열리더니 율리우스가 나를 집어 든다. 나는 그 손의 악력에서 그나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느낀다. 나를 깨부수려는가?

 

  그런 순간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누구나 찻잔이 되어보아야 한다. 자신이 벽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을 예감하는 순간이 어떤지를. 그러나 디아나가 마지막 순간에 나를 구했다. 그녀는 나를 율리우스의 손에서 빼앗아 들고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했다. ‘ 이 찻잔을 당신은…….’ 그러자 율리우스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미안, 나는 그만 너무도 흥분해서…….’

 

  발터는 진작 울음을 그쳤다. 율리우스는 진작 신문을 들고 난롯가에 가 앉았다. 발터는 율리우스의 무릎에 앉아서 내 몸에서 아까 얼었었던 비눗물이 다시 녹는 것을 보고 있었다. 빨대는 벌써 꺼냈다. - 그리고 나는 손잡이도 없이 얼룩투성이에 낡아빠진 채로 수많은 갓 새로운 물건들 틈에 서있다. 나는 평화를 다시 가져온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에 자부심에 휩싸인다. 비록 그것을 방해했었던 존재가 나였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지만, 그렇지만 그게 내 탓이란 말인가, 발터가 새 기차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

 

  나는 일 년 전에 죽은 게르트루트가 아직 살아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아 보이는 율리우스의 저 얼굴을 그녀가 봐야만 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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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 : Schiksal einer henkelosen Tasse (1952), Heinrich Böll: Werke in 10 Bänden. Hrsg. v. Bernd Balzer. Köln 1977/78. (Romane 2: S. 57-63)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0. 12. 30. 23:30

내가 정녕 독문학 교수이기를 멈췄는가.
나는 여전히 도이치의 느낌과 글의 마력에 빠져있다.
10권의 전집 중 단 4쪽 분량의 이 단편을 보라. 글쓰는 이,
소위 작가라는 정체성을 지닌 모두여!


독자 구하기
  - 하인리히 뵐 1954 -



   내 친구는 묘한 직업을 가졌다. 그는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정서법의 몇 잠재적 지식을 소유하고, 문장론의 몇 규칙들을 막연하게 마스터하고, 이제 타이프 한장 한장을 문체의 연습들로 점유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런 한 뭉치를 만들자마자 그것을 그는 원고라고 부른다.

그는 수년 간 이 문화의 황야에서 예술의 마른 풀만을 겨우 뜯어먹고 살았다가 마침내 출판사를 찾아냈다. 그의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최고로 낙담해 있는 그를 만났다. 그의 이야기는 사실 기가 꺾일 만했다. 출판사의 정산에 따르면, 반년 내에 350권이 비평을 부탁하려고 무값으로 배포되었고, 몇 우호적인 비평도 나왔고, 13권의 책이 실제 팔렸단다. 그로써 내 친구에게는 5,46마르크의 대변이 발생했단다. 그런데 그는 800마르크를 선지급 받았기 때문에, 같은 비율로 셈하자면 이 선지급금은 대략 150년이 되어야 상쇄될 수 있는 것이란다.

이제 문제는 한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평균적으로 그만 못하다는 점이다. 그게 대략 몇몇 거의 전설적이다 싶은 터키인들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한 70을 본다. 더러 우리 잃어버린 세대의 기념비적인 신고를 생각할 때 위안적으로 한 십년을 더 칠 수도 있다.

나는 친구에게 두 번째 책을 쓰라고 충고했다. 그 책이 출판되자 전문가 권에서는 기쁘게 환대를 받았다. 비평용 샘플은 400권으로 급등했고, 반년이 지났을 때 판매고는 29권. 나는 친구에게 담배 두 개비를 말아주고는 어깨를 도닥거리며 제안했다, 이제 세 번째 책을 쓰라고. 그런데 친구는 그 말을 아이러니로 이해하고는 모욕을 당한 듯이 물러서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투명작가 비트”라고 문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에 관한 평전 한 권이 나오자 평전이 그의 작품들 전체보다 더 많이 팔렸다.

근 반년동안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는 다시 고독한 천재성의 영역에서 내닫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내게 와서는 후회막급하다고, 그래 아무튼 세 번째 책을 쓰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이번에는 헥토그래프 등사본으로 30에서 50부쯤을 출판사에 넘겨주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선지급금을 받았다. 그의 둘째 아이가 태중에 있었고, 그는 말하자면 몇몇 식자공과 인쇄업자, 포장이나 발송담당 여직원들의 실직에 협조하는 죄를 짓기는 싫었노라는 주장을 폈다. (그의 사회적인 감각은 항상 정말 강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에 관한 근 100편 정도의 호의적인 비평이 나왔고, 두 권을 합친 판매부수는 90권을 넘었다. 출판사는 스스로  “독자 구하기”라 명명한 작전에 돌입했다. 곧 각 서점마다 쪽지가 발송되었는데, 내용인즉, 비트-구매자를 확보해놓고 곧 출판사에 알려달라고, 그러면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을 개시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작전의 결과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작해서 4주 만에 저 위쪽 북부에서 한 남성이 나타나 내 친구의 책에 대해서 묻고 그것을 사고 돈을 지불했음에 틀림없었다. 서점 주인은 곧 전보를 보내왔다. “비트-구매자 출현 - 다음 지침은?” 그러는 사이에 서점주인은 구매자를 대화로 붙잡아 놓고 커피를 따라주고 담뱃갑을 권하고 그랬다. 이 모든 행동들이 구매자를 놀라게 했지만, 그는 조용히 그러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자 번개처럼 빨리 출판사의 답변이 왔다. “구매자 이쪽으로 보낼 것 - 전 비용 이쪽 부담.” 다행하게도 구매자는 교사였고 마침 방학이어서 남독으로의 공짜여행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는 첫날은 쾰른까지 갔고 그곳에서 하루저녁 좋은 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아름다운 라인 강변을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며 여행을 즐겼다.

이틀째 오후 4시경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역에서 출판사까지 택시로 이동했고, 출판사에까지 가서는 출판업자의 매력적인 부인과 더불어 좀 흥분된 시간을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면서 보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여행경비를 받아 챙겨서 다시 역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2등 열차로 내 친구가 뮤즈에 봉사하고 있는 그 소도시로 갔다. 그곳엔 그 사이 둘 째 아이가 태어난 지 한참이 되었고, 친구 아내는 영화관엘 가고 없었다. - 작가들의 아내들에게라면 어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허해서는 아니 되는 휴식 아닌가. 구매자는 그러니까 내 친구를 마침 그가 아이들에게 저녁우유를 데워서 그들을 달래려고 막 노래를 부르고 있던 참에 만나게 되었다. 그 노래란 게 하찮은 어휘들로 구성되었을 밖에. 아무튼 이 말이 최근 도이치문학에 언짢은 빛을 던졌으니…….

내 친구는 자신의 독자에게 감동어린 인사를 하고서 대뜸 그의 손에다 커피갈이를 밀어주고는 재빨리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이행했다. 곧 커피 물이 끓었고, 이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다 수줍은 사람들이어서 서로 묵묵히 감탄하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을. 그러다가 마침내 내 친구가 외침소리를 토해냈다.

“선생은 천재이시오 - 제대로 자라난 천재이시란 말이외다!”

“아, 아닙니다,” 손님은 유하게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작가선생이 그렇소.”

“틀린 말씀,”  내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침내 커피를 따랐다, “천재의 주요 특징은 그 희귀성에 있지요, 그리고 선생이야말로 저보다 더 희귀한 인간계층에 속합니다.”

방문객은 겸손한 이의를 달려고 했지만 혹독한 방식으로 훈시를 받고 말았다. “거 말 마쇼.” 내 친구는 말했다. “책을 쓰는 일은 그게 만들어지는 일에 비해 그저 반쯤 나쁜 일이오, 출판사를 발견하기란 유희이외다. 그러나 책을 산다는 것 - 그것을 저는 천재적 행위라 하는 것입니다. - 그나저나 우유와 설탕을 치시지요.”

그 남자는 우유와 설탕을 치더니만, 수줍어하면서 외투 오른 쪽 안주머니에서 그가 저 위 북쪽 지방에서 샀었던 책을 내밀며 헌정 사인을 부탁했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내 친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한 가지, 선생이 제 원고에다 헌정 사인을 해주는 조건이오!”

그는 서가에서 바인더를 꺼내더니 거기서 빼곡히 쓴 원고뭉치를 꺼내더니 손님의 커피 잔 옆에 놓고는 말했다. “부디 저에게 기쁨을 주시오!”

손님은 혼란스러워 만년필을 덜덜 떨면서 원고뭉치 마지막 장 맨 아래 여백에다 머뭇머뭇 썼다. “진정한 존경심을 담아서 - 귄터 슐레겔!”

그러나 내 친구가 잉크를 말리기 위해서 그 원고를 난로위에서 흔들고 있던 한 30초쯤이 지나서 손님은 이번에는 외투 왼쪽 안주머니에서 타이프가 되어있는 종이 다발을 꺼내더니 내 친구에게 청했다, 그가 최근 도이치문학에 대한 기여라고 간주한 이 결과물을 출판사에 감정 의뢰해달라고.

내 친구는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자기는 실망감에서 몇 분간 말을 잃고 있었노라고. 이 남자의 운명에 대한 걱정이 그를 깊은 비통에 빠지게 했었노라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몇 분간은 묵묵히 건네다 보고 앉아있었다. 마침내 내 친구가 나직이 말했다. “제발 간청하건대 그만 두십시오 - 선생의 독창성을 잃는 일이외다!”

손님은 고집스레 침묵하고 있더니 자기의 원고를 쓸어 모았다.

“선생께선 여행경비를 받으실 수 없겠습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생크림케이크가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요. 출판자의 부인은 찡그린 낯빛을 할 것이구먼요. 선생을 위해서 간청 드리는 것이니, 제발 그만 두시지요!”

그러나 손님은 찡그린 채 고개를 갸웃 둥했고, 내 친구는 한 인간을 구한다는 뜨거운 노력으로 출판사의 정산서를 가져오는 일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슐레겔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여기에서 내 친구는 이야기를 중단하고자 했지만, 나는 그가 방문객과 그만 드잡이를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휴지부가 발생했고, 그 동안 내 친구는 불끈 쥔 주먹을 생각 깊게 내려다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들은 것은 슐레겔이 짤막한 인사와 함께 떠났다는 것이고, 그의 원고는 놓아두고 갔었더란다.

그러는 사이 슐레겔의 장편 『슬프도다, 페넬로페여!』가 귀향소설로서 전문가 권에서 상당한 주목을 이끌어냈다. 슐레겔은 교사직을 떠났고, 그러니까 제대로 된 직업을 떠났는데, 말하자면 다른 직에 종사하기 위해서다. 나로서는 여전히 직업도 아니라고 간주하는 그런 직에 종사한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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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구하기 Die Suche nach dem Leser」:

하인리히 뵐 (1954), 함부르크의 ≪일요신문 Sonntagsblatt≫에 게재된 단편.

여기에서는 Böll, Heinrich: Romane und Erzählungen 2. Hrsg. von Bernd Balzer, Köln 1977 본을 번역했다. 

 

국제PEN 광주 2010년, 214-218쪽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04. 12. 1. 21:49

하인리히 뵐: 1967년 뷔히너문학상 수상자로서, 수상연설집
문학은 아직도 고혹한  피의 작업(뷔히너학회편 2004)에 실린 것.

 

                        뷔히너의 현재성


저의 감사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만, 저의 연설은 고언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이 상이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라는 명칭을 지녔기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언에서 생겨날 것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즉 앞서 간 선배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쉴 수 있을 중심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가장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저 소란스런 동시대인으로서의 감정이 주는 가장자리요, 바로 그 점이 그의 시대의 동지 게오르크 뷔히너를 이렇게 현존하게 해줍니다.

뷔히너의 생과 작품을 파악하기는 간단해 보입니다. 그의 생은 너무도 짧았고, 그의 작품은 단편적이자 독창적이며, 매끄럽게 주머니 속에 들어갈 만 한, 단 한권 분량입니다. 그런 사실은 숭배적인 단순화를 낳는데, 시적 통절함을 실은 비문에 어울릴 이상적인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완성되고, 일찍이 사망한, 이별, 결말, 영면. 그렇지만 뷔히너의 생과 작품은 이 영면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땅 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아름답고 궁극적인 광고문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뷔히너가 불러일으키는 소란은 놀라우리만큼 현재성을 지녔고, 여기 이 강당에 현존합니다. 다섯 세대를 건너뛰어서 그 소란은 우리에게 다가들며 우리를 덮칩니다. 죽음의 예감으로 명명된, 이 거친 아름다움과, 우리 문학사에 정말 드물었던 어둠의 열정을 간직한 채 말입니다. 이러한 움켜 쥠,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의 확신, 그가 붙잡은 모든 대상에서 보는 이 인간적인 물질의 정의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을 비로소 예술로 만드는, 그렇지만 인위적이어서는 아니 되는, 저 미숙함의 숨결, 또한 조바심의 숨결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모순 속에 그 정의가 있지요, 그러니까 결코 인위적 조바심, 인위적 미숙함이 아니라, 그냥 현존합니다. 마치 『레옹세와 레나』에서 레나가 설명하는 그런 사람들 같습니다. “나는 단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하고 구제불능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예술을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너무 생물학적이며, 아마추어리즘의 나락으로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뷔히너는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저는 그가 두개골 신경에 대한 강의에서 생명체에 대한 생물학도로서가 아니라 표본화된 물질에 대한 해부학자로서 발언한 그 부분에 말을 돌리고 싶습니다. “…… 개인의 육체적 현존재 전체는 철학적 방식으로 보자면 (그는 목적론적 방식과는 반대로 이 방식을 제시했습니다만), 고유 개체의 보존을 위해 내세워진 게 아니라, 태초의 법, 그러니까 아주 단순한 균열과 선들에 의해 최고의 아주 순수한 형태들이 야기되는 그런 아름다움의 법을 고지하는 것이다. 모든 것, 형식과 소재는, 그 방식으로 보자면 이 법에 메어있다.” 뷔히너의 작품에 대한 모토로 내세울 수 있을 이 발언에서 그는 자연과학자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현재합니다. 제가 또 하나 다만 구전되어 온 사회적 성격의 발언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날마다 스프와 야채와 고기 먹을 게 있다면, 훌륭한 사람 되기는 누어서 식은 죽 먹기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사실주의의 조야한 유형을 독일 드라마 상 최초이자 거의 동시에 마지막 노동자라 할 보이첵의 입으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천당에 가게 되면 천둥치는 일을 도와야 할 거라” ― 그러면 저는 한 사람에게서, 한 입에서, 두 사람의 시인을, 두 독일인을 보게 됩니다, 한 세기 후에 나타나 서로를 배제하는 것으로 보였던 벤과 브레히트, 두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뷔히너 안에서 현재합니다.

뷔히너의 정치적 미학적 현재성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뷔히너의 친구이자 대학생이었던 미니게로데가 겪은 지하 감옥에서의 고문을1) 공공 거리에서 공직자들에 의해 자행된 두 건의 살인, 저 베를린 대학생 오네조르크와2) 연방군 병사 코르스텐의 사살과 관련짓자면 말입니다. 둘 다 국가 권력으로 인한 공개 살인이라는 몸서리치는 경우입니다. 또는 「헤센 급전」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거나, 아예 독일어로 팸플릿으로 만들어서 새로이 주석을 붙여서 보급하는 일 말입니다. 물론 박지 인쇄의 고전판 포장을 해선 안 되지요, 그랬다간 게르만 학술원 취급 같은 조짐이 일어나, 거기서 정치적 가시바늘을 뽑아버릴 테니까요. 귀족과 오두막에 대한 풍자는 이 신판에서 변경할 필요가 없겠고, 다만 해석을 달면 될 것입니다. 대연정은 충분히 독재적이요, 더는 작은 투표함을 두려워할 게 없지요.3) 그것으로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면 그래도 우리의 정치적 문맹을 표현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보는 눈을 가진 이에게는 히죽거리는 합의와 정말 히죽거리는 독재성이 충분히 보이지요, 두 개의 권력에 익숙해진 왜소한 남자의 새로운 봉건주의가 보입니다. 그는 거의 전권적인 대 정당의 거대한 관료 기구에서 안전을 느끼고 있는데, 그 안전이란 게 어느 여자 가신이 어떤 궁정에서 느낄 수 있을 그런 것보다 더한 정도겠지요. 자신의 양심을 정당에 바친 자들에게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에서 강력한 일절을 인용해 드립니다. “양심이란 원숭이가 그 앞에 놓고 고민하는 거울이다. 각자는 할 수 있을 만큼 씻고 닦으며, 제 고유의 방식으로 제 재미를 찾아 나서는 것. 그건 서로 드잡이해서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팸플릿에도 어떤 장례식의4) 묘사가 빠져서는 아니 될 겁니다. 저 마비적인 행사 말인데요, 그것은 반년 전 일로서, 지난 한 시대를 종결하고 새 시대를 위한 표식이 되었고, 거의 일주일 내내 TV 우산을 장악했었지 않습니까. 국내외, 유럽, 그리고 해외 입법자들이며 정부의 수반들의 입성 행진, 제국시대의 십자훈장 수상자들이며 추기경들 사이에 유행에 걸맞게 차려입은 입법자들이 부대 부대를 이루어 입성했습니다. 그것은 현대적이었지요, 그런데 그것은 ― 어떻든 저에게는 ― 몸서리치게도 전혀 현재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장례의식을 이론의 여지없이 치러내는 이런 마비적인 당연시에 더해, 표정들, 의상들, 자동차들 하며. 현대적 정치가들, 현대적 주교님들, 현대적 정치인들, 그리고 현대적 군대, 그들은 쾰른 대성당을 장악했습니다.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할 것은, 스스로 민주주의라 하는 이 사회에서도 두 계급은 의상의 강요에 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민주주의를 창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해서 입증할 수 있을 만큼 비우호적이었던 두 계급, 곧 성직자와 군대 말입니다. 이 두 계급은 항상 현대적으로, 항상 사회적으로 유능하게 의상을 갖춥니다.

이제 뷔히너를 인용할 때인데요, 「공산당 선언」보다 13년 전에 씌어진 「헤센 급전」에서 입니다. “법은 자신들의 졸렬한 작품으로 지배를 보장하려는 고상한 자들과  학자들이라는 하찮은 계급의 소유물이다. 이 정의란 여러분을 규칙 속에 잡아두어 더 편안히 착취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저들은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법,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원칙,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파악할 수 없는 판결들에 따라서 말한다.”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할 것은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와 또 독일인들에게 타격을 입은 여타 유럽 국가의 대표자들도, 유행적 변형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제국 십자훈장을 두르다니, 비록 현대화한, 꾸며 장식한, 민주화한, 게서 갈고리를 빼낸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십자는 어쨌거나 십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는 ― 예술에서나 사회에서나 ― 현대적입니다. 어쩌면 보다 나을 유행적 변형은, ‘사람들이 여전히 십자가를 하고 다닌다.’라고 할런지요. 제 민족들의 고행을 위해 십자가는 표창으로서 수여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 부조리성에서 현대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이 몇날 며칠을 천연하며 공포심마저 자아내는 행사를 현대적으로 만들겠으며, 또 그리 해낼 수 있겠습니까만, 그러면서도 몸서리치게도 현존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로소 영상매체의 우산위에서 엄청난 제곱을 함으로써 그 행사는 능란한 방식의 서양식 픽션, 곧 연극과 편집에서, 현실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의 해설이 아니라, 다만 다시금 그의 신부에게 편지를 쓴 스무 살 뷔히너에게 말을 돌리고 싶습니다. “나는 역사의 소름끼치는 숙명론에 절망감을 느낀다오. 인간본성에서 경악스러운 유사성을, 인간의 제 관계에는 피할 수 없는 폭력을, 그것도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개인은 파도 위의 물거품이요, 위대한 자는 다만 우연일 뿐, 천재의 지배권은 인형극이요, 철칙에 거슬리는 우스꽝스런 고투라, 그것을 인식함이 최선의 것이요, 그것을 극복하기는 불가능입니다. 역사의 사열식용 폐마들과 모퉁이에 선 자들 앞에 굽혀서 절을 한다는 건, 저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아요.”

저는 이 새로운 ‘헤센 급전’에 다음 사실의 면밀한 분석을 넣고자 합니다. 곧 이 나라에서 한 요상한 외교문서에 근거하여 국가를 방문하는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번거롭고 관을 쓴 우두머리들과 압도적인 매력을 지닌 영주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영접 받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만일 새로운 의식이 자라는 대학생들이 이 외교문서에 대항해서 소란을 통해, 그리고 명백히 표명된 거부를 통해서 거역한다면, 누가 게서 놀라겠습니까? 그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식인걸요. 이 요상한 외교문서가 경찰의 폭력을 통해 그들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그런 예절에 그들이 어떻게 의무감을 갖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일들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문서 문제들로 좌절당하고 맙니다. 초대장에 쓰인 간단한 기재, 예컨대 “짙은 색 양복” 또는 “외출용 정장”이란 기재만으로도 꽤나 육중한 압력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 짙은 색인지 누가 저에게 말해줍니까? 외출 시에는 제가 무엇을 입나요? “흡연” 같은 육중한 경고문들은 아마 아이러니의 가치도 없겠지요. 누가 우리 위에서 규정하며, 누가 우리를 처리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불문율을 부여합니까? 청년의 항변이 복장과 두발에도 표현되는 것을 누가 이상하게 여긴답니까? 책임이 위임되어야 하고 다른 선택을 허용하지 않을 투표함으로 충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소란과 명백히 표명된 거부를 통해서와 또 다르게, 복장과 두발로 표현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자 스무 살의 뷔히너가 가족에게 쓴 편지 구절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일 우리 시대에 뭔가 도움이 되어야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주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승인했던 모든 것은 필연을 통해 강요된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폭력 사용이 비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폭력의 상태에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뷔히너의 미학적 현재성을 그의 정치적 현재성과 분리할 결심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역사에 의해서 놓치게 된 두 독일인의 만남을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뷔히너와 그보다 불과 몇 년 젊은 마르크스의 만남 말입니다. 「헤센 급전」의 힘에 넘치고 그렇게나 민속적이며 물질의 정의에 넘치는 언어는 의심할 여지없이 “공산당선언”만큼이나 영향력 넘치는 정치적 문서입니다. 사회적 현실의 인식과 묘사에서 보여준 뷔히너의 꿈같은 확신은 「급전」에서부터 중단 없이 바로 그의 극작품들, 산문, 편지들에 이입됩니다. 시인이자 자연과학자요 동시에 정치적 작가였던 뷔히너가 사회적 현실의 인식과 묘사에서 보여준 꿈같은 확신에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많은 오류와 우회를 문학에 관한 한 면할 수 있을 기회, 그리고 미래의 마르크스주의적 작가들의 고뇌를 탕감할 기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실제 역사에서는 놓쳐버린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사후에 성사시키게 될 수 있을지, 그러니까 오늘 날 실행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주의적 미학을, 어쨌거나 마르크스의 동시대인이었고 결코 그의 나쁜 동지가 아니었을 뷔히너의 물질의 정의와 대질시키는 것 말입니다. 뷔히너의 작품과 또한 그가 작품에 대하 언급한 모든 글에는 몰인정도 그 반대도 들어있지 않고, 오직 물질의 정의에 대한 소망만 있을 뿐입니다. 『당통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사실 경악했던 가족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맙소사 젊은 여자들의 독서를 위해 창작된 것이 아니어요, 그리고 만일 저의 드라마가 그런 데에 적합하지 않다 해도 불쾌히 여길 것도 없답니다. 저는 당통이란 사람과 그 혁명의 도당들에게서 덕행의 영웅들을 만들 수는 없어요……. 그가 그러한 소재를 선택한 것을 두고 날 비난하려면 하래지요. 그런 항변은 벌써 반박되었어요. 그 항변이 타당하다 하려면, 문학작품 중 정말 위대한 대작들이 비난되어야 하겠지요. 작가는 도덕교사가 아닙니다. 작가는 인물들을 창안하고 창조하지요. 작가는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역사를 학습해야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 속에는 너무도 많은 부도덕한 일들이 서술되고 있으니까요. 또 눈을 아예 동여매고 골목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랬다가는 추잡한 짓거리들을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신에게 비명을 질러야 할 것이에요, 세상엔 너무도 많은 방탕한 짓거리들이 일어나니까요. 그런데요, 만일 누가 저에게 작가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서는 안 되고 어떠해야 마땅한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려 한다면, 전 이렇게 대답하겠어요, 나는 세상을 신보다 더 좋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 신은 이 세상을 틀림없이 어떠해야 마땅한가 그대로 만드셨을 것이라고.”

신사 숙녀 여러분, 게오르크 뷔히너의 이름은 제게 저의 감사말씀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의무를 지워줍니다. 동시대 동지의 소란한 변두리에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확신은 부서지기 쉽고, 자기 확신이란 불가능한 그런 입장, 비판적인 것이 격분으로 오해되어 울릴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말하라고 합니다. 마치 비판도 자신을 거기에 함께 관련시키는 제안을 포함하지 않은 듯이 말입니다. 뷔히너의 생애와 작품에는 몇몇 현재성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과의 편지 왕래 특히 구츠코와의 편지 왕래에서 묘사되었던 망명의 문제, 그리고 「보이첵」에서 표현되듯이 그의 다른 작품 어느 것만 못하지 않은 뷔히너의 의사로서의 현재성 말입니다.

제가 다만 암시적으로나마 뷔히너 또는 당통이라면, 이러한 연설을 생략해도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라끄르와는 당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름 그 자체로다. 그는 나서서 연설을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단두대에 서려는구먼.” 그리고 빌헬름 뷔히너5)에게 쓴 편지에서 뷔히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내 자신 매우 만족하고 있다, 장마 비나 북서풍이 불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럴 때면 난 사실 저녁에 잠자리 들기에 앞서 발에 양말 한 쪽이 걸려있으면 그 순간 방문에 목을 매달고 싶어 하는 그런 부류에 속하게 되는구나, 다른 한 쪽마저 벗을 일이 너무 너무 피곤하니까 말이다.” 그로써 뷔히너가 공공연히 그렇게 지냈던 게으름의 장을 넘어서 그의 유머라는 거대한 장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머는 그토록 난폭하고 또 그토록 부드러울 수 있으며, 그가 그것을 잃었을 때조차 틀림없이 여전히 현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취리히에서 엘사스의 친구 뵈켈에게서 편지를 받았던 경우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 편지 중 일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에서 나는 매우 잘 지낸다네, 자네가 생각하는 절반만큼도 나쁘지는 않다는 말일세…….”

(하인리히 뵐: 번역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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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두막에 평화를! 궁정에는 전쟁을!”이라는 유명한 대목은 1834년 7월자 『헤센 급전. 최초의 전령』에 인쇄되었다. 이를 배포하다가 붙잡힌 대학생 미니게로데에 관한 기록이 1834년 10월 15일자 카셀의 내무부 문서에 나온다. http://www.digitales-archiv.net 2004-4-15

2) 베노 오네조르크는 이란의 팔레비국왕 방문 반대 시위 중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1967.6.2.)

3) 비상사태법 추진 반대투쟁에서 서독 국민들에게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을 선동하고 나선 것은 예컨대 마르틴 니묄러목사를 들 수 있다.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의 이유는 당시 현실화된 기민·기사연과 사민당 간의 대연정(大聯政)은 “히틀러가 무색할 정도”의 독재체제로 변질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4) 1967년 4월에 있었던 아데나워 수상의 장례를 말한다.

5) 뷔히너의 아우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2:30

그 이야기 하나 : 아웃사이더 『 검은 양들 』

한 사회의 "검은 양"에 관한 이야기

   Heinrich Böll의 풍자적 단편 「검은 양들 Die schwarzen Schafe」은
   가족 중에 실 인생에 실패한 삼촌과 일인칭 서술자 "나"의 이야기이다.
   삼촌은 박식하고 즐거워 보이는 위인이지만 제대로 된 직업이 없이 빚만
   늘려간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검은 양"이라 하는데, "나"는
   그의 뒤를 잇는다.
   
    "나"의 길은 삼촌과는 조금 달랐다. 예를 들어 잠깐동안 어느 가구공장
    에서 일하기도 하는데, 그 곳에서는 화폐개혁 직후인 그 시기에 알맞은
    전형적인 싸구려 감상적 물건들을 생산해 낸다. (실제로 쓸모있는 물건
    들은 사장의 부재시에 노동자들이 필요에 의해 몰래 만드는 물건이다.)
    "나"는 삼촌의 사고사로 인해  - 우연히 삼촌의 장례식 날 성년이 되어 -
    그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원래 무산자였던 삼촌의 유일한 유산은
    그가 복권에 당첨되어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겨우 몇 분간 소유
    했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당장에 대학을 그만두고 다른 계획들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확실한 검은 양으로 간주하고, 그가 검은 양이기
    이전에 대부가 되었었던 어린아이와의 접촉을 경원한다. 하지만 "나"는
    가문다운 가문이기 위해서는  검은 양이 보존되어 가리라고 믿는다.


"검은 양":

전적으로는 "그의 사상, 성격, 또는 직업 등으로 인해서 다른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구성원"을 지칭한다.
사회적으로는 유능성Tüchtigkeit을 최고의 귀감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전통에 따르는 대다수의 독일인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을  지칭한다.

뵐은 평소 이단적인 것, 배척된 것을 문학의 주제로 해야 한다는 전제를 말함으로써,문학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척도를 제시했다.

통상적 척도에 의해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강하게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왜곡된 긍정성이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검은 양들 」의 표면상 주제는 적나라한 유용성에 대한 항의?

검은 양은 실제의 세계에서 우스꽝스러운 실패자를 가리키는 메타퍼인데,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이상형으로
그려져 있다.삼촌이 유용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이상형인 이유는 그의 자질에 있다. "나"가 보기에 "오토삼촌은
통달했다. 삼촌이 실로 능통하지 못한 분야가 없었다. 사회학, 문학,음악, 건축, 모든 것을."  그러나 가진 지식을 "환전
versilbern"할 수 없었고 대신 거의 15000마르크의 빚에 700명 이상의 채권자를 남기고 죽었다.작게는 차장에게
30페니히에서부터 많게는 "나"의 아버지에게 2000마르크까지 진 빚.

빚만 지고 죽은 삼촌이 어떻게 이상형인가?

여기에 소중한 의미는 바로 그 700명의 사람들에 있다. 평균 100마르크도 훨씬 못되는 돈은 재화로서의 자산이
아닌, 다만 구체적 삶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패전 직후의 절대 빈곤기를 살아남기 위해서 '아주 조금 슬쩍하기'를
경험했고 또 용인되었던 삼촌 세대에게는 '작은 돈' 빌리기는 다만 이웃 정과 인간애를 의미할 뿐이다. 삼촌은
700명으로부터 최소한의 사랑을 받았다는 시각이다.

"나"에게 이러한 시각을 부여하는 작가의 논리는 단순하다.
1) 누군가에게 빵이 없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빵을 주어야 하고,
2) 빵을 벌었으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것!

논리 1)
공평한 분배의 문제는 전후의 절대 빈곤기를 겨냥한다.
작가는 생각한다: "모든 새들보다 더 소중한"(마태 26: 6) 인간들은 마땅히 빵을
걱정하지 않을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작은 돈" 즉 빵은 나누어야 한다.
빵을 나눌 때 사람들은 인간이 된다. 괴테의 "눈물 젖은 빵"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인리히 뵐의 인간 역시 빵 냄새에 울 수 있는 인간이다.

논리 2)
억압된 노동에서의 해방 문제는 경제 재건기의 광적인 생산성을 겨냥한다.
"검은 양"은 바로 이 경제도약 단계에서의 소외자들을 이상화한다.

 Outsider!
      " 원래 사회학적으로 내집단 밖의 외집단에 속하는 이 국외자들은 집단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객관적 거리를 특징으로 하는 특수한 관여를 한다."

           [참조] Colin H. Wilson의 『아웃사이더』(1956)
                     아웃사이더는 인간존재의 본질에 깔려있는 속물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윤리적 존재로 승화된다.    

다른 정상적인 동시대인의 유형, 예컨대 「Es wird etwas geschehen」의 사장에게는 "잠이란 죄악이다!".
그는 오직 "행동"을 해야 한다.이런 능력만이 중시되는 이 세상에서, 다른 계획이 있어 학문을 "당장에"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곧 검은 양이다. 물론 이것은 강단의 학문이나 교양보다는 실인생을 높이 사는 작가의 입장이다.
[하인리히 뵐은 반 부르주아적 동시에 반 인텔리적 성향을 지닌다.]

학문을 버린 "나"는 재능도 없이 작곡가가 되기로 했다가, 관상학, 정원사, 기계공, 선원, 교사, 세관원 등에 차례로
매료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직업적인 교육의 이수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다만 어느 것 하나 외부적 강요에서
시도된 것이 아니므로, 그 자신은 매번 즐거울 수가 있다.  "진정한 능력들을 환전 또는 직업적으로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에게는 선악의 피안에 존재한다. 돈 버는 능력은 인간의 조건에 속하지도 않는다. 현대 산업
사회의 필요일 뿐이다. 따라서 이 산업사회에의 적응은 검은 양의 시각에서는  "투항"이다:

      "[...] 나는 투항했다 - 나는 일자리를 청했다. [...]
      
나는 결코 희생해서는 아니될 것, 나의 자유를 희생했다!"

그러나 "나"의 공장 체험은 인간을 보는 인식을 확실하게 해준다. 많은 것에 정통하고  지적이지만 그 지식을 써먹을
줄 모르는 삼촌과, 실제로는 수다밖에 모르면서 "스스로를 진지하고 또 예술가라 간주하는, 전혀 지적이지 못한"
사장과의 대비이다.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장이 극도로 무의미한 실존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능력없는 삼촌의 삶은
의미있는 실존이란 논리가 성립된다.
이 유용성에 관한 논쟁은 실로 엉뚱하게도『老子』11장을 상기시킨다:

              "진흙을 비져서 그릇을 맨든데 /
            그릇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창을 내고 문을 뚜러서 집을 짓는데 /
            집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므로 있는 것이 좋음 되는건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

사회는 바로 이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포함할 때 비로소 쓸 만한 사회, 하인리히 뵐의 용어로는 "살 만한
bewohnbar"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 부적응의 주인공들은 인습에 의한 습관적 반응이 아닌 진정한 행동을 꾀한다,
비록 현실적 성공에서 더디거나 그것을 포기하더라도. 투항을 거부하거나 투항을 후회하는 부적응자들, 이들은 뵐의
후속 작품들에서 소위 검은 양의 토포스를 실현한다. 그들은 사회통념상 기인으로,공공연히 나태를 보이며 이 사회를
무시하고 내면의 자유로 만족하는 수준을 유지한다. 그들은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 예로서, 오토삼촌의 건강한
젖먹이 같은 잠은 더없이 행복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극단적 성격으로 비정상적, 병적, 노이로제적인 인상을 주며,
결국 절망적인 아웃사이더일 뿐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절망적이 아니라,상식적 인간의
눈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들 부적응자들에 의해서 이 사회는 시험되고 미리 불합격 처리된다.

그러므로 오히려 동시대인들의 행동은 그저 환경에의 수동적 반응, 즉 순응의 생을 살아간다. 인간의 적자생존을
장려하는  경제적 정글에서 정상궤도 진입자들은  이 정글의 법칙을 받아들인 것이며, 그러므로 결국은 투항자들이다.

[참조] 하인리히 뵐의 「검은 양들」과 47동인의 정신. 『독일문학』, 서울: 한국독어독문학회 1997, 제 64집(38-3호), 230-25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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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4. 2. 23. 00:00

도서출판 삼문 1994.2.1



어떤 사람들이 마약중독 또는 일중독에 걸리듯이 빵중독에 걸린 소년의 체험에서 비롯된 젊은이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원제는 하인리히 뵐의 1955년 작

 "지난 시절의 빵 (Das Brot  der frühen Jahre)", 


구체적으로는 2차대전  종전 후 기아와 궁핍의 시절의 빵을 가리킨다. 빵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성사적 의미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는 인간성의 척도가  된다. 궁핍의 시절, 배고픈 사람에게 나누어 준 빵과 그렇지 않고 부의 축적을 위해서 모아둔 빵의 의미는 그렇지 않아도 흑백논리를 비판 받는 작가의 눈에는 선악의 기준이 된다.


이야기는 어느 월요일 아침, "담요를 머리 위까지 푹 끌어 덮고만 싶었던" 주인공 젊은이가  집에서 속달편지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홀로 도시로 나와 살게 된 일곱 해 동안에" 어머니의 사망통지, 아버지가 다리 부 러진 사고 때나 받던 속달편지에 놀란  주인공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약간은 성가신 부탁을 발견한다.   
 
"좋은 일 하는 셈치고 마중을 나가거라!"

이렇게 역으로 마중을 나가게 된 그가 헤트비히를 만난 순간 그의 인생은
 바뀐다. 

자동세탁기의 수선과 정비를 담당하고 있는, 손에 적당한 일 값을 지닌, 나름대로 장래가 순탄한 젊은이. 1955년 현재 수입과 자동차를 가진 기술직 젊은이가 되기까지 ㅡ 그는 배고픈 숱한 기억들을 가지고 자랐다. 가장 끔찍한 기억은 고교 교사인 아버지의 고결성을 담보로 담임인 빵집 아들을 핑계로 빵집 가게에 "우연인 척" 들리자고 졸랐던 일이었다. 아들의 낙제점수에 빵집 주인이 화를 내고서 문을 닫아 버리기 전까지, 아버지는 배고픈 아들을 위해서 그 일을 감수했었다.   그리고는 무작위로 아버지의 책들을 내다가 빵과 바꾸는 아들을 위해서 책들을  "직접" 골라준 아버지 ---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아들의 "빵중독"은 가라 앉지 않았다. 그것은 배고픔 자체보다는 중독성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막 다 잡은 행운들을 물리치고, 게다가 그는 사장의 딸과 공공연한 약혼
 사이었다. 겨우 탄 이 "순탄한"  인생이라는 기차---  그러던 그가 갑자기, 어느 월요일, 헤트비히를 만난 순간  하차를 결심한다. 왜? 어디로? 

 "나는 내가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후퇴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느 방향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아무튼 후퇴하고자 했다."     


이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후퇴: 한 소녀와의 예기치 못했던 사랑의 격정은 지금가지 주인공이 무의식적으로 매어있던

            가치들의 무의미성을 일순간 인식케 한다. 복고적 자본주의와 패덕의 윤리라는 현실로

            부터 하차를 감행한 그의 새로운 인생은 기존문화에 대한 퇴행적 반대기투와 더불어

            제시된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가?

            이것이 작가 하인리히 뵐, 주인공과 함께 우리가 언젠가는 생각해야 할 하나의 명제로

            남는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9. 5. 20. 14:54


한신문화사 1989. 5.20.


전후 독일문학 세계문단에 끌어올린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자 전후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1917-1985)의 방대한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섭렵한 입문서. 아직은 학문의 깊이보다는 넓이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학생들에게  안내서가 되기를 바라며, 그 차례를 소개합니다
.

  1. 개괄 및 연구방향
 
  2. 앙가즈망
 
     1) 시간적 현재성           2) 공간적 연대감

  3. 인도주의 미학  
     1) 언어의 도덕성           2) 인간의 존엄성           3) 문학의 자유와 한계

  4. 전쟁과 개인
     1) 전쟁의 무의미    
                  전후 단편들/ 『기차는 정확했다』/ 『아담아, 네 어디 있었더냐?』
     2) 평등의 허위
                  50년대 풍자적 단편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빵』
     3) 과거의 부담  
                 『돌보는 이 없는 집』/ 『아홉시 반의 당구』

  5. 현실과 이상사회
     1) 사회로부터의 탈영    
                 『어릿광대의 견해』/『부대 이탈』/ 『마지막 군복무』
     2) 이상사회의 싹  
                 『문둥병』 /『여인과 군상』
    
     3) 어떤 사회주의  
                 『카타리나 블룸의 실추된 명예』/ 『국민의 성향 보고』/
                『보호라는 이름의 포위』/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6. 요약과 정리       
       각주
       참고 문헌  
       연보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9. 5. 23:30

              문 둥 병 ................

    


   
이 작품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매우 예외적 장르인 극본 <Aussatz>로서,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던 독문과의  축제인 독문학제(1996)에 번역극으로서
   공연하기 위해서 급히 번역되었다.  1986.9.5. 전남대학교출판부

   
                        
 얼마나 급했던지 등장인물의  이름 중 Gerta를 Greta로 보고서
                         잘못 번역하기까지 했다. (가끔은 그 이름이 시사적 이름(telling name)
                         으로서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암시하지만, 다행이도 이 경우는 그것을
                         면했기에, 부끄러운 가운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위안한다.)  


  
 하인리히 뵐은 방송극 분야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지만, 첫 극본
 
  『 한 줌의 흙  Ein Stueck Erde 』(1961)은 초연에 실패했고, 이 두 번째

   극본인 이 작품은 그러나 아헨의  무대에서는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문둥병은 누구나 알 듯이 천형의 벌이라 간주되는 격리치료의 질병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문둥병에 감염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인물을 위해서  사회가 빙자한 질병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어떤 인물

  이라서 격리가 필요한가? 성직자의 독신 계율을 구체적 소재로 다루는 이 작품은 사실

  평신도에게도 의무로 되어있는 정절의 덕행마저 이미 기만적인 현상에 처해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혼인에 관한 "추상적 질서원칙"( 63년 작 『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 』참조!)에 대한 기만적 복종은 대기업주 부르의 <민주적> 작태에서 드러난다.

  아내에게 아내의 자유를 준 남편!  매우 민주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선행(?)은 그러나

  그의 성공적 사회생활을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사회적 명성을 위해서 그는 자산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도 필요한 것이고, 또 가톨릭 신자로서의 평판을 위해서sms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임을 과시해야 하는 것이다. 성직자이나 APO의 동조자인

  젊은 쿰페르트신부가 외치는 장면이다:
 
 
 
              
저는 다만 성직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성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내연의 관계나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성직자들은 독신 생활의 의무뿐만이
              아니라 순결의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 또한 이미 결혼 한
              사람들까지도  […] 순결을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은 우리가 정말이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너그럽고, 죄악 자체에만 혹독하지요
  
  심지어 "신앙을 버리거나 여자를 보더라도 눈감아 줄" 여생의 성직 대신 "특권을 부여

  받고서 특권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일, 그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젊은 신부, 그리고 "포도주를 즐기고, 신학서보다는 소설 읽기를 즐기는, 그것도 최근의

  초현대적 소설을, 또 음악을 즐기며,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들의 자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고 고백하면서도,  감히 "부랑자 신세"를 택하지 못하고 조금 타협하고 신학 안에 남아있

  겠다는 매우 인간적인 면모의  노 신부. 작가는 어느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검역소에 억류된다. 젊은 신부의 자살이 '신원미상의

  문둥병자 사망'으로 둔갑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낌새>를 알아챈 형사 -- 그는

  시체에 접근했었으므로 잠정적 감염자로  분리된다 --, 죽은 신부의 <동쪽> 친구 --

  그는 신부의 동구행 잠적이라는 시나리오에 어울리도록 함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의 연인이자 대 부호의 아내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여자,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알고 뛰쳐나온 주인공 쿰페르트신부 등이다. 이 특이한  문둥병

  아닌 문둥병의 치료 또는 해결은 여기서는 비밀로 남겨둔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