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4.01.15 침묵 3 - 5월
  2. 2018.01.25 수필 -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5월의 그날들
  3. 2015.05.11 2015년 5월 우빈 - 성빈
소설2024. 1. 15. 18:50

[짧은 소설]

 

 

5월이 되었다. 4월보다 더 아픈 5월이다. 아픔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무엇이든 꼬리가 있다. 꼬리가 밟힌다.

장미 축제에 다녀왔어요! 무심한 페친이 흐드러지게 핀 장미 정원을 보여준다. 그는 토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네요! 한 가정의 행복은 지상 최고의……. 이렇게 선한 톡을 보내와도 그는 토한다. 그해 5월 깨어진 가정은 어쩌란 말이냐. 봄은 생명이고 죽음이었다. 생명과 죽음이 혼동되었을 때, 그는 말을 잃어갔다.

그는 어린 시절에 벌써 친구를 잃었다.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흔히 이별을 생각하게 되고, 이별은 헤어짐,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가는 일,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러운 흩어짐 같은 것이 먼저다. 그러나 그들 또래의 어린 시절의 이별은 달랐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1969년 봄날, 우리나라에서 첫 추기경이 탄생한 바로 그날 태어난 그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우리 애가 글쎄 우리나라에 처음 추기경이 서임되신 날 태어났어요! 터무니없이 그의 탄생을 축복으로 여겼다던 어머니 루시아는 지쳐갔다. 신에게 애원하다 지쳤을까. 말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귀머거리라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침묵은 모르는 것에 대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다른 말들은 했다. 그의 말도 알아들었다. 어머니처럼 말 수 적은 아이, 그는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열두 살이 된 봄, 그해도 봄날의 시가지는 큰길가 푸른 나뭇잎 사이로 초파일 연등들이 내걸리면서 한껏 화려함을 더했다. 아이들은 운동회 날의 풍선들을 보듯이 그냥 좋아 뛰어다녔다. 그런 그때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 어떤 젊은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맞아죽었다 했다. 장애인, 잘 듣지 못해서 대답도 잘 못하는데 군인들한테 맞아죽었다.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린이들도 죽었다. 소문은 소문이 아니었다. 또래 아이들이 폭도라서 죽다니. 죽은 아이들은 폭도였다. 그런 뉴스들이 있었다. 그때 죽은 사람들은 폭도이니까, 어린이들이라 해도 폭도였다. 마을 앞동산에서 놀다가 드드득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려다 죽었다. 벗어진 고무신을 주우려고 돌아선 순간 서너 발의 총알이 옆구리를 관통! 관통이란 말이 너무 무서웠다. 뚫고 지나갔다는 말이라 했다. 작은 몸을! 그 바보는 고무신 때문에 죽었다. 간첩이나 무장공비만 국군들의 총에 죽는 줄 알았었다. 폭도도 국군들의 총에 죽는다.

다른 아이들도 죽었다. 저수지에서 놀던 어린이도 죽었다 했다. 두개골이 아예 없어질 정도였다 했다. 어린이에게는 총탄들이 너무 큰가 보다, 생각했다. 무서웠다. 그냥 무서웠다. 일이 이쯤 되니 중학생 아들을 마중나간 엄마도 있었겠다. 그 엄마도 죽었다. 하수관로에 숨었지만 관통상을 입고 죽었다. 엄마도, 그러니까 어른도 관통 당했다. 웅크린 채 숨은 엄마에게 죽어라고 총을 쏜 사람, 사람 아니 국군. 아니, 국군은 사람이 아니었다. 국군, 계엄군, 폭도, 어린이 - 단어들은 혼돈의 세계였다. 고무신 바보랑 함께 놀았다가 용케 살아남은 친구, 그 애는 완전 벙어리가 되었다. 또래들도 따라서 말을 잃어갔다.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자유가 최대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유의 반대인 폭력도 최대화된다. - 『자유의 폭력』이라는 책에서 읽은 글이다. 마음대로 총을 쏠 수 있었던 그들의 자유는 우리에게는 폭력이었다. 그들의 자유는 우리에게 폭력이었고, 그 폭력은 우리를 침묵케 했다.

 

 

벙어리도 내력인가 봐. 애처로운 눈길을 받으며 자라는 동안 공부 밖에 할 게 없었다. 그에게 책은 말을 시키지 않아서 편안한 친구였다. 시험도 곧잘 봤다. 등록금 걱정을 덜 하는 국립대학에 들어갔고, 무엇인가 깨어진 불균형 속에서도 학위까지는 거뜬했다. 거기까지였다. 취업은 바늘구멍이라더니, 바늘구멍이었다. 국내파 – 그런 파에 속했다. 가입한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국내파는 아무래도……. 아무래도 밀렸다. 비정규교원, 그것마저 모교에서도 밀렸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저절로 선후배 차례로라는 관행은 20세기의 법이었다. 3년마다 경쟁 입찰로 바뀌었다. 멍때리고 있다가 한 차례 밀리고는 제자리다.

그때, 다음 채용 공고에 과목 자체가 없어지고 계약종료를 통보받은 다른 누구보다는 나은가? 당사자가 중노위에 구제신청을 냈다는 뉴스에 그는 덩달아 촉을 세웠다. 신청 자체가 기각되었다. 재임용 갱신기대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장기간 3년이 만료된 이후 근로계약이 갱신되리라는 신뢰관계가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 게다가 재임용 만료 강사들이 신규채용 절차에 지원하고도 불합격되기도 하는 그것이 강사법이라고. 다만 창피한 일이다.

더 창피한 일, 그 사이에도 과에 전임이 채용되었다. 충격이 그를 덮쳤다. 신임교수는 그가 강의를 시작했던 초창기, 그의 제자였었다. 그 아이도 이제 40, 물론 해외파다. 파가 다르면 사람도 다르다. 좌파 우파만 다른 것이 아니로구나! 다시 한 번 내외가 다름을 느낀다. 단어로 풀자면 그는 ‘내’를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국내파다. 이런 말을 누구랑 나눌 수 있는가.

 

침묵이다. 선별적 함묵증이 강의의 질을 떨어뜨렸을까. 강의를 한 적이나 있었던가. 그때 내가 말을 했었나. 내 목소리는 어떤 음색이었을까. 우울한 바리톤?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강의실을 떠올린다.

강의실 – 어라, 강의를 하던 강의실 대신 강의를 듣던 강의실이 먼저 떠오른다. 최루탄을 던지며 난입하던 전경들, 깨어진 유리창, 많지 않은 여자애들이 쇳소리를 질러댔다. 층계에서 맞닥뜨린 처음 보는 교수가, 여자였다, 아무나 치약들을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은 치약을 팔자수염처럼 바르거나 광대뼈에도 발랐다. 선배들은 이건 약과라고 했다. 최루탄 하면 떠오르는 Y대학생 이야기였다. 나중에는 어느 대학병원 정형외과 수술실 근처에도 오발탄이 투척되어 수술이 중단됐었다고도 하니까. 오죽하면 영국의 유수 언론이 한국에는 최루탄 재벌과 치약 재벌이 등장했다고 모멸적인 보도를 했을까. 재벌설은 설이 아니었다. 최루탄을 독점 생산했던 S화학이 고액납세자 당당 1위를 차지했다는 국내 보도도 있었으니까. 삼성도 현대도 제치고!

 

다시 봄이다. 느닷없이 최루탄이란 단어가 떠도는 이 봄, 아카시아 향기 스멀거리던 5월은 아득하다. 어린 시절 망가져버린 봄의 기억이 칼끝 상처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동안, 천진했던 참외 서리며 그런 추억들일랑 저 멀리 가슴 구석에 짓눌려버렸다. 보리그을음, 잘 붙지 않는 불을 지피며 연기 그을음 마셔가면서 풋보리 알을 그을려 먹던 친구들은 꽁꽁 얼어붙어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가슴을 열자 해도 맞댈 가슴들이 없다. 오늘도 춥고, 그는 침묵 속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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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 『여성문학』 창간호: 167~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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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8. 1. 25. 14:19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

 

하이네의 시구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오자 특별히 부산한 일이 생겼다. 졸업 50년 홈커밍을 앞두고 흩어져 살던 동문들이 단톡으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단톡 반장이 혹시나 하면서 초대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 목소리는 참으로 신기했다. 50년 세월을 마치 축지법처럼 축시법을 쓰는 마법이었다.

 

명실공이 이 할머니들은 분주했다. 갑자기 아침 문안에서 결혼 50주년 소식까지, 미국에 나가서 그쪽 사람이 되어버린 친구들까지 불려 나와서는 다른 시간을 살면서도 부지런히 톡 시간을 맞추곤 했다. 현안은 50주년 나들이에 있었다. 전야제로서 1박2일 남도 여행, 그리고 본 행사인 메이데이에 이대 캠퍼스를 정중히 방문하는 일이 준비되었다.

 

두 번의 나들이라고? 여행과 운동, 운동과 여행을 기피하는 행동 1, 2순위로 꼽는 나로서는 둘 다는 어려웠다. 물론 더 많은 얼굴들을 만날 본 행사에 무게가 갔다. 그런데 하필 남도 여행이라니! 여수 또는 순천의 1박은 유혹적이었다. 한 시간 남짓 차를 달린다면 저녁에 숙소에 든 친구들 얼굴을 잠깐 보고 올 수는 있으리라. 돌아오는 밤길 고속도로가 좀 걱정이긴 하지만 …….

 

그런 염려는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새벽에 눈을 거의 감은 채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발이 슬리퍼 한 짝을 잘 못 꿰었고, 그것으로 여행계획은 물 건너갔다. 다행하게도 왼쪽 손목만 골절이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붓다 못해 뒤틀린 손목에 깁스를 하고 돌아오는 시간에, 친구들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하필 그날에. 내 불쌍한 왼팔, 이라고 써서 깁스한 사진을 보냈다. 오늘 못 참, 이라고 쓰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렇다고 졸업 50주년 나들이까지를 포기하기에는 단톡방에서의 늘그막 우정이 너무 진했다. 고속철도를 이용하면 전국이 일일생활권인 나라에서 50년 만의 해후를 포기할 순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병원에 실려 간 것도 아니니까. 두 발은 성하니까. 기차표를 예약해서 프린트아웃을 해 놓았다. 사진으로 단톡방에도 올렸다. 마음 흔들리는 것을 막는 방편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 날이 왔다. 깁스한 팔을 감추기 위해서 머플러로 감싸면서, 요즈음 보기 흔한 장면, 수갑을 감싸는 스카프가 생각나서 혼자 킥킥 웃었다. 그렇게 나타난 내 모습을 친구들은 정말 반겨주었다. 허리까지 늘어뜨렸던 긴 머리 소녀는 조신한 스타일 머리로 놀라게 했고, 목소리들마저도 3도 화음정도로 알토 음으로 변해 있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의 작용은 참으로 신기했다. 다행하게도 눈도 함께 노화작용을 겪는 우리는 현미경 눈이 아님으로 해서 친구들이 예쁘기만 했다.

 

흐뭇한 것은 이제는 후배들이 튼실하게 동창회를 꾸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초창기부터 오래도록 협력하던 후배들도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왜냐하면 우리가 독문과 1회였기 때문에, 졸업하고 곧 동창회를 이끌어야 했던 초창기 그룹들은 평생을 봉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당연히 눈에 띄는 후배가 있었다. 선의에 가득 찬 긍정적인 얼굴이 참 고운 사람이었다. 나를 만나면 매번 똑같은 인사를 하곤 했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무슨 뜻일까 애매하면서도, 처음엔 멋쩍어서 대답이 서툴렀다. 광주에서 기차로 오를락 거리며 뒤늦게 공부를 다니고 있는 선배의 처지가 고달파 보였거나, 비실비실한 몸으로 사서 하는 그 고생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박사과정이라는 것이 지난한 과정이다 보니 또 얼마 후에 만나게 되고, 또, 또, 모교의 행사에 가면 만났다. 그 같은 인사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 후배는 부산이나 대구에서 서울의 모교에 나들이 오는 선배들을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을. 다만 광주라는 ‘불온한’ 고장에서 사는, 살아가야 하는 선배가 내심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대학에서 살아간다니……. 그 착한 마음이 떠올라서 후배에게 진한 미소를 보냈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대신, 팔 웬일이세요? 라는 변형을 들었다.

 

그러니까 믿음의 문제다. 믿음은 믿는 마음이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의 심리가 믿음이다. 그것이 정치나 사회 또는 철학적 가치와 관련될 때는 신념이라고 주로 한자어로 쓰게 되며, 뭔가 객관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믿음이건 신념이건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의 정체를 생각하면 곧 깊은 회의가 드는 것은 우리가 신념으로 인해 빚어지는 반목을 밥 먹듯이 경험하고 살기 때문이다. 다 같이 신 또는 신들을 믿으면서도, 다 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증오와 박해를 일삼아 온 종교적 반목이 가장 큰 문제다. 다 같이 이념들을 신앙하면서도 그 이념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반목의 극치를 달리는 정치도 적 아닌 적들을 양산한다.

 

예컨대 아주 간단히 줄여서 5‧18이라고 부르는 그 해 5월 10일간의 광주의 일은 신념대로 해석되는 것이다. 만날 때마다 ‘험지’에서 고군분투 살아가야 하는 선배를 걱정해주는 고마운 후배는 광주와 광주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고, 상당 부분 오해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알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기 전에는 진실이 무엇인가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법이다.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실상에 관해서 들으면 ‘설마’ 하고서 의심하며 부인을 해버리는 쪽을 선택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참혹하니까, 차마 믿을 수 없으니까, 내심 믿고 싶지 않으니까.

 

마침 올해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광주에서는 의미 있는 두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크라운판 216쪽 분량의 『5.18 10일간의 야전병원』과 신국판 608쪽 분량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판되었다. 『야전병원』은 ‘전남대학교병원 5‧18민주화운동 의료활동집’이고, 『넘어 넘어』라고 불리는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은 32년 전의 소위 ‘지하 베스트셀러’를 전면개정판으로 내놓은 것이다.

 

특히 이번에 새로이 알려진 대학병원의 열흘간 진료기록은 광주사람들에게도 놀라운 부분이 많았다. 설마, 대학병원까지야. 적군을 정성스레 간호하는 전선에서의 간호장교의 모습들을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우리들로서는 병원만은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처참했다.

 

대학병원 구성원으로서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말하는 진솔한 실상, 수술실에도 날아드는 총탄에 대한 증언과 이름표가 붙어있는 의사가운에 뚜렷이 남아있는 관통 흔적 등은 1%도 픽션이 아니었다. 의식도 없고 신원이 확인 되지 않아서 ‘파추하(파란 추리닝 하의)’ ‘검파상(검고 푸른색 상의)’ ‘남광여(남광주역에서 발견된 여자)’ 등으로 환자를 불렀던 새내기 간호사의 증언에 가감이 있을 수 없었다.

 

울고 싶었다. 깁스한 팔은 통증이 거의 멎었는데 명치끝이 막히고 가슴이 쓰려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반가웠던 50년 친구들, 후배들, 특히 나를 늘 걱정해주던 후배의 얼굴, 아니 이화 캠퍼스를 가득 채운 그날의 행복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이 얼굴들은 오래도록 아파왔고 여전히 아프고 있는 광주를 잘 알지 못 한다. 몸과 마음이 멀어서 알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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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아름다웠던 5월의 그날들 - 『그대에게 가는 꽃길』 이대동창문인회, 에세이문학출판부, 2017.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5. 11. 21:37

2015년 5월이다.

조금은 심심해 할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아이들이 흔적들을 보낸다. 

 

 


 

우빈과 성빈 차례로 피아노 한곡씩

 

 

 

 

 

다음은 사진들 ▼

 

 

 

 

 

 

이상한 체험관도 있나 보다 ^^

 

 

           어린이날 선물 -    예쁜 티셔츠  맘대로 고르기

 

 

 

                                    어디 산책길인가?

 

 

 

 

 

 

캠핑을 좋아하는 아이들....

 

 

 

거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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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