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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8.26 누수
  2. 2014.03.25 단편 「목소리」
소설-시2019. 8. 26. 11:08

누수

누수 때문에 이 난리다. 우리 발코니의 누수가 아래층 발코니 천정을 망치고 있단다. 페인트를 망가뜨리고 이러저러 피해가 났다고, 방수공사를 해달라는 당당한 요청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나는 기껏 누군가의 1㎡ 공간에서 살고 있다. 우리 아파트 값이 누군가가 소유한 1㎡의 값이라니 분통이 터지다가도, 아냐, 이건 기적이야, 하는 생각을 한다. 내 키가 크진 않지만 1m 보다는 2m쪽에 가까우니, 그 금싸라기 1㎡를 갖는 것보다 이만한 아파트를 갖게 된 것이 그나마 요행 아닌가. 문제는 닭장이나 진배없는 이런 아파트에 살다보면 공동생활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 점이다. 층간소음은 기본이다. 애들은 뛰게 마련이고, 윗집에서 옛날식 제사라도 드리는 날이면 도마소리 그릇소리 밤중까지 한낮이다. 그뿐이랴. 고요한 밤중에 들리는 너무 세밀한 화장실 소리는 산다는 일에 비참함을 더한다. 노랫말에 나오는 언덕위의 하얀 집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은 곳에 괜찮은 주택을 소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줄 안다. 알면서도 비참한 것을 어쩌랴. 상황에 알맞게 구부러져야 산다, 쯤은 알게 되는 세월을 살았다. 나는 밤중에 화장실에 가게 되면 일단 수도꼭지를 세게 틀어놓아서 누군가의 귀에 들릴지도 모를 적나라한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누군가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나에 대한 예의다. 시답잖은 말인가. 아무튼 내 요상한 귀는 못 듣는 것이 많으면서도 한밤중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흘리지 않고 잘도 듣는다.

그만한 층간소음 쯤은 일상이다. 일상의 흐림은 폭우 쏟는 태풍처럼 밀려오는 누수문제와 비길 바가 못 된다. 윗집의 누수는 시간적으로 다툴 문제는 아니다. 참아가면서 기회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랫집에서 점잖게 혹은 점잖지도 않게 클레임이 들어오면 용서가 없다. 꼭 우리 집 문제만이 아니죠. 그냥 두면 아파트 전체에 균열이 번질까 봐서……. 이런 이타적인 언동에 무슨 수로 맞서랴. 당장에라도 발코니의 살림들을 꺼내고 방수공사를 해야 한다. 한 해 걸러 앞뒤 발코니 공사다. 지난 번 뒤쪽 발코니 때는 누수 원인과 상태를 전문가의 말로 들었을 때 사실 놀랐다. 소금이 범인이라니! 묵히는 소금가마니에서 염분이 흘러내려 차츰 시멘트를 부식시켰고, 그러 인해 상당한 누수가 진행되었다 했다. 발견이 다행인 셈이었다. 치울 살림들도 장독대 몇 개와 선반들에 보관하는 곡물들, 빈 통들 등 어수선한 물건들 정도였다. 이번엔 다르다. 앞쪽에도 햇빛이 필요한 장독대들이 있고, 문제는 가히 영국풍 정원이라 할 얽히고설킨 화분들 때문이었다. 천정에 닿아서 이미 비뚤게 올라가는 선인장들은 수도 없고, 물론 한 사람의 힘으로는 움쩍도 못할 종려나무 분이며, 넝쿨장미에, 세상에 시누대나무까지. 자잘한 분들도 그 숫자로는 사람 손을 타게 마련이다. 지난 번 공사도 했던 업자 양반이 물건 치우고 들이는 것도 맡아 해주겠단다. 낮 동안엔 나 혼자 뿐인 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도 아는 때문이리라.

점심 먹으러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기색이다.

커피 드셔야죠? 설탕은 어떻게요?

아무 거나 주시쇼. 다달하면 더 좋지라.

서둘러 단감도 몇 개 깎아낸다.

밥 막 묵었는디라.

어쩌가니. 아따, 근디 싱싱허요이.

보쇼, 화분 내놔붕께 베란다 엄청이나 넚소이. 저짝 끝에 하나 이짝 끝에 하나 침대도 놓겄구만이라.

텀턱스럽네.

아니 진짜여. 보쇼. 이라고 넓은 베란다 봤소? 그나 저 화분들 다 디려놓지 말고 이라고 훤허게 사시쇼.

먼 감놔라 배놔란가. 나중에 양주 간에 헐 일로 가지고서는.

그려 언능 해불게 시작협시다.

아무도 발코니라고 하지 않고 베란다라고 말한다. 사장부터 그러니까 그럴 게다. 주택공사의 설명으로는 아파트엔 베란다가 없는데……. 이런 따위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소통이면 그만이다.

우리가 발코니를 확장해서 발코니가 넓은 건 아니다. 반대로 발코니를 거실로 집어넣지 않아서 발코니가 넓은 것이다. ‘발코니 확장’은 옵션인데, 우린 그냥 발코니를 유지하기로 했다. 거실이 발코니까지 확대되어 훤히 비치는 유리창 하나로 바깥과 구분된다는 것은 아찔한 느낌이었다. 옛날 집들은 문풍지 하나로 바깥과 구분 되었지만, 창호지는 뭔가를 가려주는 맛이 있었고, 마루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방과 마당의 사이였다. 발코니 유리창 밖은 말 그대로 허공이라서, 공기가 주인인 곳, 나랑은 아무 관련도 없는 곳이었다. 발코니는 일단 완충지가 되어준다. 전체적으로 사용 공간이 좁더라도 안정감을 더해준다면 그 편이 좋을 성 싶었다.

그건 그렇고. 왜 햇빛 잘 드는 앞 발코니에서 누수가 생기는 것일까. 웬만한 습기는 하루해가 말릴 것 아닌가. 하기는, 화분들 속의 흙이 머금고 있는 습기들이 바닥을 스물 네 시간 습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화분과 화분 사이들도 늘 물기에 젖어있기 마련이다. 뒤 발코니 누수의 범인은 소금이었고, 이번에는 흙인가 보다. 흙은 물기를 품고 있어서 탈이고, 염분은 그 자체로서 시멘트를 녹인다. 물리 화학이다. 사는 것이 과학이다.

발코니가 없었으면 화분들도 없었고 누수도 없었다, 라는 말이 되나? 모르겠다. 거실로 확장되었더라면 거실에 화분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실에서 누수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실은 난방이 되기 때문에 그 정도의 누수는 스미거나 말랐을 것이다. 모르겠다.

오늘로는 다 혔소.

어, 빨리 끝내셨네요.

방수 처리허기 그거는 기중 쉽소. 요고 방수제 잘 되야라.

아 그래도 낼 내가 한 번 더 입혀야쓰제요.

낼 또 하세요?

낼은 나 혼자 와서 살짝 한번 볼라부러야제라.

그럼 타일은 언제?

그거야 이삼일 재와야 방수가 지대로 되니께로. 연락 디리께요.

우르르 사람들이 나갔다. 거실은 여전히 마당 다름없다. 문에서 앞 발코니로 기역자로 깔아놓은 은박지 통로는 흙투성이 발자국 그대로이고, 화분을 대강 들여놓은 저쪽 끝 방까지도 여전히 임시변통으로 깔아져있는 은박지 위가 지저분하다. 지저분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모자라다. 집 안에서 신발로 다니는 길과 슬리퍼로 혹은 맨발로 다니는 길이 어떻게 구분될까. 앞으로도 며칠을 더.

옛날엔 흙길 밟기가 일쑤였다. 아주 어려선 댓돌만 내려가면 그대로 흙이었다. 아니 신발 속이 흙 그대로인 어른들도 있었다. 속에 지푸라기 같은 것이며 흙모래가 들어간 신발을 벗어 놓고 샘가에서 찬물에 발을 씻던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미역 짐인지 뭔가를 한 짐 이고지고 팔러 다니는 행상이었는데, 아무튼 뭔가를 가지고 집에 가끔 들리곤 했었다. 마루 끝에 걸린 밥 바구니를 내려서 그럭저럭 나그네 밥상에서 한술 뜨고 나면 대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데, 애어른 할 것 없이 넋 놓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내 팔자 어느 세월에 비단길로 다녀볼이거나…….

그때 우리는 어렸고, 길은 길인데 흙길이니 비단길이니 하는 말이 애매하게만 느껴졌다. 비단이라고 하면 할머니 치마 지어 입으신 그런 비단일 텐데, 누가 그런 비단으로 길을 만들까 의아했었다. 그런 길이 있기나 할까. 어떻게 비단으로 길을 만들까. 비단신으로 걷는다 해도 곧 찢어질 텐데. 비단신이라는 것도 아장거리는 아이들에게 방안에서 걷게 신겨주는 장식품으로 밖에 생각이 안 되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의 아스팔트를 제외하면 길이란 원래 흙길이었다. 길은 흙이었다. 누가 비포장도로라는 말을 하면 나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필요에 따라서 포장 했으면 포장도로이겠지만, 비포장도로라고 하면 그것도 포장되어야한다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 왜 꼭 다 포장해야 하는가. 길은 원래 흙인데, 왜 어둡고 힘든 길을 흙길이라 비유할까. 요즘에는 흙길과 대비되는 말이 비단길이 아니라 꽃길이다. 내 아가, 꽃길만 걸어라! 모든 부모들의 소원이다. 순탄하고 순조로운 경로를, 평안하고 행복한 길을 살아 가거라!

행복한 - 행복이 뭘까. 심심하면 하는 버릇대로 ‘행복’을 검색해 보려다가 서점을 찾아본다. 행복이라……『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라니. 애매해서 눈에 띤다.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한 사람? 책의 부피를 보니 곧 외면할 마음이 생긴다. 1,000쪽이 넘는 책을 무슨 수로 읽나. 이런 건 폭력적이다. 어라, 『나는 행복한 불량품이다』라는 얼핏 매력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 행복한 성공작품이라야 최상이겠지. 성공해도 불행할 수도 있으며 성공하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아편서인가? 아차, 나는 행복하지도 않은 불량품이라면? 행불행과 성공여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면, 이런 것도 사절이다.

행불행의 피안이라고? 그건 못된다. 소확행이란 유행어를 듣고도 화가 나는 심보인데 뭐. 따뜻한 빵을 찢어 먹는 행복,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는 행복? 그게 무슨 행복인가. 잠시의 기분 좋음, 더러 안락함 정도가 행복일 수는 없다. 그건 어쩌면 마약이나 다름없다.

내가 왜 열을 내느냐고? 나를 위해서는 아니다. 젊음을 위해서다. 내가 젊을 때 그리 야망을 갖진 못했었다. 그건 성격 문제였을 것이다. 작은 온실에서 자라면서, 개성도 없고, 못 났으니까. ‘멍게’ - 그래서 놓쳤다. 나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삶을 놓쳤다. 마음에 있었던, 마음에 있었을 사람을 놓아버렸다. 겁이 나서. 그의 청각장애가 무서웠다고 변명하면서 살아왔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생각하고 살아왔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누수, 누수가 두려웠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가 새어나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선배가 청각장애라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속해 있을, 그에게 묻어있을 어떤 것들이 두려웠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 그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와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있는 뒷모습은 생경했다. 해는 저물고…….

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는 터부였다. 나는 질투 같은 단어를 저열하다고 생각하고 증오했으므로, 선배가 어느 다른 여학생 또는 남학생 선배 또는 후배와 단둘이 앉아있는 장면을 목격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각각의 대화는 다를 것이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믿었다. 나랑은 식물이 거의 전부다. 한번은 우연히 대학생과 노동자의 독서량에 관해서 말이 튀어 나왔을 때 얼른 회피한 쪽은 나였다. 나는 물론 안 들은 것까지도 다 듣는 귀를 가졌기 때문에 들을 필요가 없기도 했다.

너희는 입학하자마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가까워진 선배로부터 시각교정용 독서를 권유받는 거야. 여학생들은 조금 덜한가?

…….

시각을 교정한다니까. 그런데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독서량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해? 아냐. 노동자들, 월소득 5만 원 이하를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라 치자, 이 저소득층 노동자 40퍼센트가 독서를 즐긴다는 거야. 취미 독서가 30퍼센트. 전문서적과 문학작품을 읽는 것도 20퍼센트씩이야. 독서를 통해서 스스로 여타 노동자와는 다른, 소위 교양을 갖춘 인간임을 상상하고 믿는 것이지. 하긴 텔레비전이 게까지 보급되지도 않았었고.

…….

무반응인 내게 선배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가져다주었다.

이건 읽어봐야 할 거야. 교양 아냐!

제목은 동화나 환상소설 같았다. 책을 읽어나가자 곧 무거운 마음이었다. 낙원구 행복동 사람들이라니! 주택개량 사업 지구로 선정된 동네. 자진철거를 하지 않으면 강제철거 당해야 하는, 그러고도 철거비용까지 물어야 하는 기막힌 약자들의 이야기였다. 철거 현장의 비애. 초라한 밥상이 끝나기를 못 기다리고 들이닥치는 철거반원들이 더욱 초라하다. 그들 또한 상황이 열악하지는 낙원구 행복동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일 사람들인데, 권력의 하수인인 동안에는 착각 속에서 권력자가 된다.

예상은 했었지만, 내용이 너무도 무거웠다. 다만 울고 싶어졌다.

다 못 읽었어, 그만 읽을래. 다른 사람들 빌려 줘.

그때 선배에게는 다 읽지 않았다고 둘러댔었다. 말하기가 싫었으니까. 선배가 책들을 여럿에게 빌려주기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선배가 풀밭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S교육인 것도 알고 있었다. 누가 내게 슬쩍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S가 무슨 약자인지는 알지? 말할 수 없는 그것!’이라고 하면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육하는 선배들이 S라고 알고서 후배들에게 일대일로 교육하는 내용들이 ‘실은 꽁이야, 더 상부 지도부에서는 그리 알고 있는 거야.’라고 자못 조용히 일러주기도 했었다. 바로 일 년 위 고교선배였는데, 자기 오빠도 그런 일을 하니까 안다고,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주었다.

대단?

대단하지 그럼. 도시빈민의 참상과 좌절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운동인데.

고리를 끊어? 그래도 다소 폭력적인…….

아서, 잊어라.

분신자살 같은…….

잊으라니까.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폭력이라는 이해가 쉽진 않지. 드라마 속의 말이지만, 폭력만이 도움이 된다고 했어,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뭐야?

잊으라니까. 넌 잊어.

고리가 끊겼나?

최근까지도 난쟁이 동네 이야기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신도시 계획을,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표한 이래, 설왕설래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좋자고 하는 일이니 당연히 기대하고 반기는 쪽이 있겠지만, 그 반대도 있다. 만일 그린벨트 지역에 신도시가 들어서게 되면 녹지만 없어질 뿐 기존 주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개발될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농민이며 영세한 가구들이 그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 문제란다. 우리보다 어디로 가라고 하남요! 몇 억씩 갖고 새 아파트 못 산다고 아우성치는 젊은이들이 어째서 불쌍한가, 지어 준다 해도 못 사는 우리가 더 불쌍하제. 그런 말들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지나간다.

노후 아파트 단지 재개발의 경우에도 입주권만 가지고서는 새 아파트에 입주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상당수라는데……. 그러니까 행복동의 고리가 끊어 졌는가 말이다.

아니다. 아닌 것 같다. 동네 저쪽에도 아주 쇠락한 5층짜리 아파트에 내로라하는 건설의 재개발 조합원 모집 어쩌고 현수막이 걸린 지 오래다. 색이 바랄 지경이다. 그 앞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온 적이 있다.

징혀, 열 두 집인가는 절대로 도장을 안 찍는다잫아.

열 두 집이 아니라 스물 두 집이라여. 이백 세대가 고 사람들 땜시에…….

꼭 그렇게 말할 거는 못 되제. 우리야 어찌다 봉게 고 돈이 됭게 말이제만. 아무케도 아들 덕이제. 근디 아조 노인들도 있잖여, 자석들도 노인들일 턴디.

그렇기는 허지. 놈의 집 아닌게로 이대로 살다 가먼 된다, 그러고 사는 양반들도 있겄제.

새로 입주권을 통째로 준다고 안 혔냐. 일원 한 장 더 안 보태고.

근디, 그 말이 사실일까. 쪼까 걱정도 되고이.

사람 참, 준다고 혔으니 주제이. 우리라도 흔들리지 말장게.

잘은 몰라도 재개발이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라 했다. 조합인지 건설사인지에서 주겠다는 보조금 보다 조금 더 얹어 입주권을 팔게 되는 사람들이 꼭 나온다 하니까. 그럼 그들은 어디로 가나. 만일 오늘도 그렇다면 1978년의 아버지 ‘난장이’는 지금도 어디선가 굴뚝 위에 올라가서 죽는 것일까. 40년 세월, 강산이 네 번 바뀌어도 고착된 틀은 그대로다. 행여 더욱 견고해진 것은 아닐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이 200쇄를 찍는 기록을 세웠을 때, 이어서 출간 30년엔가, 작가의 인터뷰가 특이했다. 소설가로서의 보람과는 무관한 말이었다. 아직도 그 책의 내용에 공감해야 하는 현실이 괴롭다고. 그 비슷한 말로. 내 말이. 세상이 어떻게 한 발도 더 나아지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 소설가는 요샌 뭘 쓰나? 세상이 여전히 똑 같다면?

유명 소설가를 내가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 자신이 한심하다. 오늘 누수공사를 시작했으니 아직 며칠을 더 매달려야 한다. 집은 먼지투성이인데, 청소는 않고 옛 생각에 잠기다니. 하긴 바로 그 누수라는 단어 때문인 걸 어쩌나.

누수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내 인생 말이다. 청혼을 흘려들은 것은 귀나 청력 때문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었을 누수가 내 머리를 적시어갔고, 마음까지 견고함을 잃었을 것이다. 선배가 단순한 교양 교육이 아닌 S교육을 담당하는 대단한 사람임을 알게 된 순간이었을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 실은 두려웠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막연하게 작은 삶과 작은 행복을 꿈꾸었었다. 요즈음 말로 소확행이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행 어쩌고 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선다. 삶은 소확행으로 재단되어서는 아니되는 무엇이다. 살만큼 살고 보니 그렇다. 우리 아버지 보다 더 오래 살고 보니 확실히 그렇다.

강아지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가의 무릎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는 소확행이 괜찮은 가치일는지 모른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버렸으니까. 야생의 개와 고양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반려동물 말이다. 만일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생을 가치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구조의 신에게 소유되어버렸다는 뜻이 된다. 현상의 구조 앞에 무릎을 꿇었거나 외면한다는 말이다. 이 구조는 외면한다고 해도 거기 그대로 버티고 있을 것이고 더욱 강해 질 것이다. 그들이 이 구조에 굴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나면 너무 허무할 뿐이라고, 너무 허무해서 감당하기 힘든 노년을 맞게 된다고. 노인이라고 해서 시시함과 허무함을 다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아차, 이 난리 통에 혼났겠네요, 남이 씨.

그이가 현관문을 열면서 뱉는 소리다. 신발을 벗을까 말까 어리둥절해 한다.

마침 수요일이었다. 수요일엔 신경과 유 원장이 오후 진료를 쉬고 교회 일을 보기 때문에 이비인후과 유 원장도 일찍 귀가하는 날이 많다.

거기선 그냥 신고 들어와요. 화분들 좀 보고, 이쪽으로 오면서 벗으면 되죠.

와, 남이 씨 청소 제대로 못해서 어쩌나. 이제 좀 잘 참으시나? 그런데 화분들 다들 괜찮겠지? 키가 큰 놈들 옮기느라 엄청 고생했겠네. 아니, 이건 비뚜로…….

거야 거실 천정에 닿을 거라서 그렇게 놔 둔거죠. 목을 자를 수도 없고.

이 가시들은…….

방법이 없어요. 그렇게 그렇게 놓아두는 수밖에. 저것들 다시 다 들여놓을 거냐고 아저씨들이 걱정들이던데요, 뭐.

웬 걱정들! 남이사.

그냥 할 말 없으니 하는 소리들이죠.

그러게. 나 씻을게요. 오늘따라 새삼 집밥이 그립네. 점심 메뉴가 카레였거든. 난 아무래도 조선밥 체질이라.

식탁으로 오는 그이의 손에 책이 하나 들려 있다.

배고프다면서요.

으응, 밥 먹고 읽으려고. 신경과 유박 말야, 재미있는 책을 많이 읽어. 이번엔 『동물 안의 인간』 그런 책인데 왜 동물들이 생각, 감정, 행동에서 우리랑 비슷한지 그걸 쓴 거야.

아, 시원 상큼하다.

연분홍빛 물김치를 들이키면서 그가 심하게 너스레를 떤다.

이건 또, 구이보다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부추가 편육에 어울리는 것 그런 걸 여자들은 어떻게 알죠?

새 밥도 못 했는데 뭘 그래요.

아, 무슨. 이렇게 메인이 훌륭하면 새 밥 아니면 어때서. 새 밥 했으면 많아서 못 먹죠.

먹는 것 마다 칭찬하는 것은 외교일까 작전일까. 그냥 생활인가 싶다. 공동생활의 노하우 같은 것일 게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머리를 장악하고 있는 화제가 터져 나오기 십상이다.

글쎄, 쥐가 사람 뺨친다네. 전기충격을 받은 다른 쥐를 보면 보는 것만으로 그대로 얼어붙어버린다잖아.

단순히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실험에선 그렇대. 암튼 쥐에게도 공감능력이 있다는 말이지.

쥐에게만 있나 보죠.

무슨 말이 그래요?

인간에게, 현대인에게 그런 공감능력이 있나?

대개는 있지요, 남이 씨, 왜 그렇게 까칠하세요!

아니, 쥐는커녕 파충류만도 못한 경우가 하도 많아서.

뭘 그렇게 평가절하하시나. 인지기능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은 인간 고유의 뇌기능이랍니다.

인지기능이 딱히 뭔데요?

가만 있자, 어째 구두시험 보는 느낌이네요. 보자, 인지라면 지식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조작하는 능력이니까……, 에이 관두고. 암튼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대뇌피질이라는 것인데, 그 신경세포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나 가? 140억이래, 믿거나 말거나.

그만, 그만. 인간도 동물이라면서 또 동물과 엄청 다르다니. 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소리 안 들려요?

아프면 그만 둘게, 질문을 하지 말던지. 머리 아픈 소리가 다 뭔데, 참!

머리 아픈 소리, 우지끈.

소리가 들려요? 상상력도.

동물 먹으면서 이야기까지 동물 하지 말죠. 소화 잘 되게.

동물 이야기로 소화 걸리는 우리 남이 씨, 어째야 좋을까.

내 저녁밥이 끝나고, 그러니까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치고서 소파에 앉자 그이가 계속한다.

것 참 대단하네. 인간과 동물의 같은 점이, 아니 같다네 뭐. 기뻐하고 화내고 하는 것도 몸과 머리 반응이 인간과 완전 같다네.

그렇겠죠. 인간이 포유류니까요, 뭐.

포유류가 감정이입 능력은 물론 학습도 하고 의사소통을 한다는 건 알려져 있잖아. 그런데, 맙소사, 트릭을 쓰기도 한다네. 맘에든 암컷과 짝짓기 하기 위해서 대장을 따돌리는 협동이라니, 약한 놈들이 그렇게 상부상조도 하고. 심지어 개성도 있고, 똑부와 멍게 그런 차이가 있는 거래, 첨부터 개성이래. 또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니, 동물의 인간성, 이상한 말인가?

개성이요? 인간성도? 감정이입을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거야 그러겠네요. 개들의 감정이입능력 대단하잖아요. 주인의 무덤을 7년을 지켰다던가 뭐 그런.

그 정도를 넘는다니까. 쥐들이 알츠하이머를 피하는 방식이라거나, 모르모트가 사회적 스트레스를 피하는 법?

쥐가 알츠하이머에 걸려요? 그걸 예방도 하고?

뇌 구조가, 아예 기능이 같은 거라네.

알츠하이머 - 요즈음 들어 드물지 않게 듣는 단어다. 곧 죽는 질병은 아니지만 비가역적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애매해서 사전을 찾아보았던 생각이 난다. 치료해도 이전 상태로 회복될 수 없다는, 그냥 치료 불가라는 뜻이다. 정말 질병인가 아닌가 질병코드도 찾아보았다. 있다, F00. 손가락 사전 참 좋다. 온갖 지식이, 세상이, 내 손안에 있소이다!

그런데 알츠하이머 등 뭐든 치매 같은 것을 앓게 된다면, 치매환자가 된다면, 이 시시함과 허무감 대신 가벼운 만족감에서 지낼 수 있으려나? 내가 벌써 신경세포 손상으로 지능, 의지, 기억 따위가 지속적으로 본질적으로 상실되는 그 병에 노출될 리는 없다. 생각만으로도 무섭다. 언젠가 지능이 떨어지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 까지는 크게 손해될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지능과 기억으로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어질 테니까. 하지만 의지가 상실된다니! 의지가 상실된 상태 - 그런 일을 100퍼센트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소확행인가. 그저 따뜻하게 그렇게 살라고?

소확행 -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어느 일본 작가가 30년 전에 쓴 말이 이제 와서 한국에 퍼뜨려졌단다. 물론 그 자체로서는 기분 상쾌해지는 장면이다. 냄비에 갓 지어 고슬고슬한 밥에 섞박지 무 한 쪽을 얹어서……. 그런 안락한 순간을 말하자면 나라도 열 스물은 센다. 하지만 안식과 힐링, 그것도 젊은 나이에 안식과 힐링만을 구한다면 다들 늙은이야? 늙은이라고 해서 안식과 힐링만 구하하는 법도 없지.

일전에 동기들 단톡에서 누군가 말했었다.

젊어서는 눈 뜨면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랐는데, 이젠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바라네.

뭐라?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면서 눈을 뜬다?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서글펐다. 아무 일 없기만을 바란다면 사는 것일까? 무엇하러 눈을 뜨나? 잠이 깨니까 일어나고, 배가 고프니까 먹고……. 그보다는 조금 더 무엇인가를 느끼고 싶었다. 느껴야 한다고 느꼈다.

여생이라고, 그런 단어는 없어. 없어야 해. 사는 날까지 생이지.

한 마디 보탰다. 손가락이 방정이다.

무안했을까? 활동성이 줄어드는 것은 활동성에 관해서만 맞는 말이다. 활동성이야 어림과 젊음과 늙음 사이 포물선을 인정한다. 하지만 생이라고 하는 것이 활동성이 전부는 아니다. 생은 소멸 전까지 생이다. 어떤 형태로든 생이다. 그렇게 긴 말을 쓰지는 않았다. 철학 하시네! 잘난 체는! 그 다음 말들이 미리 들렸다.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어요. 누구 무서워 말 올리겠냐. 언제부터 저리 ‘까탈스럽게’ 되었다냐. 귀가 아프다. 한 마디 보탠 걸 후회했다. 삭제하고 싶다. 맨날 이렇다. 말하고 후회하고, 또 잊고서 말하고 후회한다.

후회라는 것은 요상한 놈이다. 무엇을 하고서도 후회하지만, 놓아버려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도 후회한다. 사는 일에서 무엇인가가 새는 걸 막지 않으면 정말 낭패다. 새는 줄도 모르고 있다면 더욱 난감해진다. 대부분 몰라서 방치하게 된다. 알고도 모르는 척 살기도 한다. 현상유지가 중요할 때도 있다. 나의 현상은…… 언제부턴가 근처에 있었고, 남편이 되었고,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람과의 공동생활이다. 그 나름대로 안정된 수입과 화초 기르는 취미를 가진 남자다. 이이는 모가 나지 않아서 어디에고 부딪거나 그러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렇더라도 그리 크게 부서지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의대생들은 공부가 너무 부담되어서 S주의에 물든다거나 하는 잡념(?)의 기회가 적었을까. 오빠는 의대를 그만두었지만, 개인적인 문제였지 사회와의 갈등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 오빠의 그 당찬 후배는 오빠의 맘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오빠의 상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의대 잘 마치고 성형외과를 개업해서 거의 떵떵거리고 산단다. 지방의대 출신답지 않게 강남에다 병원을 내는 배짱이 배틀의 성공이었다고! 연예인도 드나든다는 그 병원의 1㎡는 얼마나 값이 나갈까. 의대동문의 날이면 그 성공신화가 둥둥 떠다닌단다. 오빠가 그렇게 떵떵거리는 사업가(?) 아내와 살아간다는 상상은 불가능하다. 오빠가 의대를, 그 ‘후배’를 피해 달아난 것은 잘 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대개의 경우 잘 한 일이다. 무엇인가를 못 견디어서 피했거나, 무엇인가를 죽도록 좋아서 선택했거나 다 잘 한 일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 보듯, 가지 않은 길은 다만 동경으로 남을 뿐이다. 간 일이, 그러니까 걸어온 길이 잘 온 길이다. 무엇인가가 좀 빠져나간, 누수 정도의 상흔이면 좀 어떤가. 견디면 견디는 것이다. 만일 소금이 시멘트를 녹였듯 현재의 삶이 녹아내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살림집 아파트가 낙원구 행복동 어딘가에서 날마다 올라간다. 간헐적으로 누수문제가 터지고, 성가시고 돈도 들지만 공사를 하면 막는다. 막아진다. 이 아파트는 아직 단단하다. 단단해 보인다. 더구나 앞 뒤 발코니 모두 누수공사를 마치면 거의 완벽해질 것이다.

내게서 새어나가는 것은 무엇으로 막을까. 내게서 새어나가는 것은 어쩌면 실존의 파편들이다. 미세한 파편이지만 끊임없이 새는 느낌, 이 느낌 때문에 말라간다. 누수의 정체도 모르면서 살아 있으면서 말라가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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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 문학 2019. 7.8월호 vol. 150  121~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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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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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2014. 3. 25. 23:54

 

「목소리」

 

 

목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졌구나, 라고 느껴졌다. 오늘 아버지와 나누시는 가벼운 대화에서 그랬다.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되거든요. 내가 한다니까요.

빈 밥그릇 국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생소했지만, 그걸 그렇게 말리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높았다.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집으로 가자고 작정한 것은 명절엔 더욱 허전해하실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들 없이 딸 셋을 둔 부모님의 얼굴엔 딱히 썰렁함은 아니라 해도 뭔가 어색함이 어른거린다. 애써 괜찮다는 과장으로 포장되어 표피가 평상시의 부드러움을 잃는다. 부드러움을 잃은 주름은 갈라질까 말까 바스락거린다.

 

이번 설에도 막내 옥실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에 사는, 미국인이 된, 미국인과 결혼한 옥실인 만일 한국에 온다더라도 설이 아닌 추석에나 올 뿐이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이.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미국의 큰아버지에게로 입양되어 간 옥실을 어머니는 가슴에 두고 사실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지막 미토콘드리아의 전수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어머니에게서 딸들로만 유전된다는 미토콘드리아 ― 막내는 정말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름도 제이드가 되어 버렸으니까.

 

둘째 은실은 늘 가까이 있다. 바리데기 ― 일곱 번째 얻은 딸은 아니나 부모님 곁을 유일하게 지키는 은실이 바리데기가 맞다. 언니와 막내에 끼어 치인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고, 공부도 시쳇말로 다 못해서 그렇다. 은실은 고 1때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너무 가까이서 겪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대학진학을 접었다. 하지만 일찍 결혼해서, 지금까진 우리들 중 유일하게 손자 손녀를 안겨 드린 효녀다.

 

나 ― 어쩌다 막내서부터 거꾸로 설명이 되었는데 ― 맏이인 나 한금실은 교사의 자녀들이 많이 그러하듯 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일직선으로 나갔다가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땐 벌써 은실이 김실이 된 후였으므로, 나는 원래의 금실 대신에 한박사로 불렸다. 더구나 한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목소리엔 어딘가 자랑 비슷한 여운이 깔렸다. 지금도, 그 한박사가 명예도 돈도 별로 들여오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건 여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1944년생으로, 요즈음에 말하는 신중년 세대이시다. 일제 강점기 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그들은 일제 때 강제징집당한 146만 한국인의 숫자가 말해주듯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야 했던 세대다. 또한 형제들을 사상의 갈등으로 잃기도 한 세대가 그들이다. 국제평화기금이 들어오던 때에는 갑작스레 경제무대에서 은퇴 당한 신중년 세대의 운명 ― 거기에서 아버진 자유로우시다. 교사는 강제 은퇴는 없었다. 대학 공부는 겨우 열에 하나나 했을 이들 세대에서, 아버지도 사범학교 졸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가 야간대학 과정을 밟아서 대졸에 합류하신 전설적인 분들의 하나이다. 다만 아버지에겐 아들이 없다. 2008년 은퇴하시기 전에는 딸자식이긴 해도 자식인 내가 좋은 자리를 잡을 줄 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박사가 모교에서도 밀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은퇴 후 오륙년의 시간을 우울한 적응기로서 사시는 셈이다. 그 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묻지 마라 네 살 터울이시다. 6.25 때 기억은 없다 하시는데, 큰 이모는 엄마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담벼락에 붙어 선 채로 오줌을 줄줄 싸는 세 살짜리 겁쟁이였다고 놀리신다. 물론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겁쟁이란 느낌은 없었다.

 

엄마, 정말이세요?

뭘?

엄마 어려선 무지 겁쟁이셨다고?

느이 엄마 지금도 겁쟁이다.

엄마가 겁쟁이?

그래. 엄마가 뭐 딱히 하는 것 봤냐?

하루 종일 평생 하시는 건 뭐고요?

이런 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지. 엄만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만 하고 살다가 죽는 게지.

엄마는.

정말이다, 엄마는 한 것이 없다. 딸 셋 낳은 것 말고는.

우리 키우신 건 다 어떻고요.

키우다니, 그냥 너희가 절로 자란 것이지. 내가 뭘 했냐. 품을 팔아 과외를 시켰냐, 차를 태워 나르기를 했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분명 달라졌다. 무심한 듯 말 속에 심지가 생겼다. 뭘까. 설 명절의 부담 때문일까? 설은 아무래도 세배 문화 때문에 공휴일 상관없이 길어지고, 또 어떻게 된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떡국상이다. 그러려면 음식 수급도 절묘한 솜씨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라.

 

어머니가 시장보따리를 여럿 챙기셨다. 내가 유럽에서 가져다드린 낡은 무명 홑겹 가방을 여태도 쓰시며, 그 안에 다른 보자기 가방들을 넣으셨다. 모처럼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리 춥진 않았지만 추운 체 하면서 어머니의 팔을 꼈다. 생각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

 

 

외사촌의 전화번호가 떴다. 팔을 풀고, 양손 손가락에 여러 개 시장보따리를 걸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금실아, 오빠야.

아이쿠, 웬 일?

너랑 의논할 것이 좀 있어서.

나랑 의논을? 의논을? 어디 있는데?

그렇게 만난 외사촌은 더블 에스프레소를 훌쩍 마시고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따끈한 아메리카노 잔에 손을 굽던 내가 말을 꺼냈다.

오빠, 커피 취향이 바뀌었네! 참, 곤충 연구는 겨울엔 좀 쉬는가?

명색이 학문에 여름 겨울이 있겠어? 금실아, 넌 그런데 왜 결혼 안 하냐?

그러는 오빤 왜 안 하는데?

거야, 나는 남자고.

뭐야, 여름 캠핑장에서랑 똑같은 레퍼토리네. 다른 이유를 대 봐!

외사촌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환상이 깨진 지 오래였나 봐.

환상이 깨져?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래.

외숙모를? 외숙모가 왜?

그때 왜, 우리 아버지 갑상선 수술 하실 때.

언제 적 이야기를.

아버지가 수술을 앞 둔 날 밤, 어머니는 병원 침상 곁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 주무셨어. 물론 나도 보호자 노릇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었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거든. 혹시라도 수술이……. 기분이 묘했어, 어머니가 고생 덜 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머닌 만일의 사태가 걱정도 안 되셨는지.

그거야, 아버지들이 씩씩하시잖아. 울 아버지 돌발성난청 치료하실 때도 열흘 넘게 아버지 혼자서 병원에 계셨는걸.

그건 좀 다르지, 난청하고 암이 비교나 되나? 또 그 뿐이 아니었어. 수술은 잘 되었지만, 퇴원하실 때도 좀 거북했어. 아버진 동위원소 캡슐 치료하고 퇴원을 하셨는데, 퇴원 날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호텔에 가서 주무시고 오시랬거든. 식구들이 다 같이 동위원소에 노출되느니, 아버지 혼자 계시다 오시는 것이 맞다고. 생수병 둘을 챙겨 호텔로 따라나서는 날 아버지는 말리셨고, 어머닌 화까지 내셨다니까, 나더러 속이 없다고! 그 세월 지나고서도 부부라는 것이 영원한 평행선이고 남남일까, 난 혼란스러웠어.

그만 둬. 외숙모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지, 합리적이고. 다 지난 일을 왜 그래. 외삼촌도 건강하시면 되었지. 오늘은 뭔가 다른, 할 얘기가 있다는 것 아니었어?

 

외사촌은 더욱 뜸을 들였다.

그게 글쎄.

오빠 뭐? 누구 사귀는 거야? 집에선 반대하고? 아님 선 자리 나온 거야?

그게 글쎄.

글쎄 라니, 어떤 여자인데? 같이 살기라도 해?

살기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신경이 쓰인다는 대상은 …… 외사촌은 아예 더듬거렸다.

구내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 알고 보니 나이는 조금 아래지만 이웃 학과의 연구전임이 된 친구인데, 겨우 한 학기를 멀리서 보고 지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상쾌함과 긴장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단다. 그가 먼저 앉아 있다가 외사촌을 보며 갸웃하고 인사하는 동작, 함께 온 사람이 있더라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앞을 보는 순간, 상대가 아니라 사이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란다. 해서 식당에서 마주치면 자판기 커피를 함께 하자고 청한 적이 여러 번이었단다. 종이컵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마시다가 눈을 치뜰 때면 왼쪽 눈썹이 더 올라가고, 미소 또한 왼쪽 입술 끝이 살짝 더 밀려 올라가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뭐야, 같은 이공계면 철저히 다름의 매력 그런 것도 아니고.

취민 달라. 나는 사진을 찍으러 숲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편인데, 그 친구는 사진엔 관심이 없더라고. 대신 영화광이야, 안 보는 영화가 없어.

오빠도 영화 좋아하지 않았던가?

난 근년 들어선 뜨악한 편이었어. 그 친구랑 몇이 어울려 꼭 한번 함께 갔었지. <러시: 더 라이벌> ― 에프 원 그랑프리 실화라고, 뜨거운 가슴이 있는 남자라면 마다하지 못할 영화라고 부추겨서. 헌데 스크린 속의 무서운 질주나 크리스 헴스워스의 매력 대신 그 친구 옆얼굴만 훔쳐보게 되어 못할 짓이다 싶었어.

병이 깊네.

병이라고? 넌 유럽형 인간 아냐?

유럽이 왜 나와, 여기서?

네가 공부하던 파리는 자유의 심장 아냐?

웬 자유? 평등, 박애까지를 다 말하려면 또 몰라.

그게 아니라, 파리에선 동성애자 시장에, 또 대통령들도 사생활은…….

사르코지나 올랑드? 우리 눈으론 좀 고약하지. 난 성적으로 그렇게 자유분방한 쪽이 못 됩니다요, 오라버니!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석 달 만에 젊은 연예인하고 재혼을 했다! 그런 것 쯤 아무도 상관 않았었지, 프랑스 사람들은.

오빠,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어? 20년간 살았던 부부였어, 것도 이미 재혼으로. 그 사이 아이들도 셋이나 있고. 또 새 여자도 애 엄마고! 아이들 어지럽게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해?

금실이 너 고리타분 맹추구나. 그럼 지금 대통령한텐 더 욕을 해대겠네!

남의 인생에 무슨 욕까지야. 하지만 이 사람은 더 심해. 결혼이 아니고 동거관계라서 그러는 말이 아냐. 애를 넷이나 두고서도 첫 여자와 헤어졌다지, 그 여잔 사회당 당수였어. 차라리 그 여자나 대통령이 될 일이지. 암튼 따로 애가 셋 있는 두 번째 여잔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고 있었지, 잠깐. 그러다 또 여배우야? 뇌에서 분비되는 짝짓기 신경물질의 유효기간만 지나면 상대를 갈아치워? 정치적 역량은 역량이고, 난 그런 사람들 너절하다고 생각해. 섹스가 뭔데? 인간사 필수적 요인이라 치더라도 갈아치우는 게 능사는 아냐. 몸도 맘도 그렇게 둔갑을 한다면 그게 철새지 뭐야.

새는 또 왜!

 

내가 잠깐 실수를 했다. 동물학 전공의 외사촌에게 새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전문가적 지식이 쏟아질 판이 되었다. 나는 커피 잔을 얼른 들어서 식어버린 나머지를 홀짝거렸다.

 

 

갈매기도…….

뭐야, 곤충박사님께선 새를 능멸하는 것에도 분개하시나? 갈매긴 또 뭔데?

분개까진 아니지만, 갈매기도 동성애를 인정받는 세상에…….

동성애? 갈매기가 동성애를?

그래, 갈매기의 동성애.

너무 멀리 간다, 오빠.

아냐,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들 심심찮게 있어. 암컷 두 마리가 함께 둥지를 틀어서는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지.

알을 낳는다고? 암컷끼리?

아니, 미수정란이나 단위생식 그런 게 아냐.

그럼, 알은?

살림은 암컷 두 마리가 차리지만 짝짓기는 각각 주변의 수컷들을 만나는 방식이지. 어쨌거나 번식에 성공하는 거야.

그럼 그건 암컷들의 공동생활이지 무슨 동성애란 이름을 붙여?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오빠, 동성까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 동성애야? 그건 아니지. 암수 간에 사랑해서 살림을 차리고 자식 낳자고 성애와 교접이 따르는 것 아냐? 모르긴 몰라도.

로이와 사일로 이야기도 몰라?

누군데?

맨해튼 동물원의 펭귄들, 만화도 나왔는걸. 그 둘은 암컷 펭귄들일랑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뭐냐, 절정행위도 한대, 목을 감고 그러는 성관계를.

설마 아기도 낳았대?

또 아기 이야기냐! 돌멩이를 알처럼 품으려고 해서 유정란을 넣어주었더니 서른 날 넘게 품어서 알을 깨우고 또 길러냈대. 완전한 입양가족 아냐?

글쎄. 입양가족 쪽은 맞지만 부부도 부모도 아냐, 분명.

부모는 아니지만 동성애 양친!

나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천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녹청색 계열의 체크 패턴의 무늬에 집중하는 척 했다.

오빠, 난 이런 무늬가…….

소용없었다. 외사촌은 이야기를 접지 않았다. 돌리지도 않았다.

 

 

동성애 ― 외사촌의 생각으로 자신은 동성애 성향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일하다가도 문득 그 친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데……. 대체 뭐냐, 이건?

내게 그런 걸 묻다니. 외사촌은 아마도 긴 싱글 기간을 보내는 나 또한 그러한 기질이나 성향이 없는지 탐색하는 눈치였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파리에서 한 때 젊음을 보낸 내가 상당히 진보적일 것이라 믿었기에 이해받기를, 뭐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맹꽁이 답답이다. 엄격했다, 그 부분은.

 

외사촌은 알리바이 모양 역사 속 유명인들의 동성애 취향을 꿰고 있었다. 다빈치의 젊은 시절의 ‘불경한’ 행위들, 미켈란젤로가 미소년에 보냈던 소네트며 젊은 귀족에게 헌신했던 만년의 애정, 차이코프스키의 조카에 대한 비뚠 열정. 랭보는 어땠는데? 그건 부정 못할 것이라고 외사촌은 들이댔다. 푸코는 어떻고! 심지어 여자들도 마찬가지라면서, 사포의 레스보스 섬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팅게일도 사촌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거절당해서 전장으로 떠나버렸다는 둥. 외사촌은 마치 공부라도 해 둔 양,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신화며, 소위 그리스 사랑 ― 성인과 소년 간의 사랑 ― 또는 고대 아시리아의 보편적 동성애 문화까지 증거로 들이댔다.

 

나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때의 사랑은 분명 우정이 심화된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못 박았다. 철학을 사랑하듯 동료의 철학을, 철학하는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 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을 두고도 갑론을박이었다. 외사촌은 플라톤의 동성애 증거라 했고, 나는 바로 그 말이 동성애가 아닌 정신적 우정에 관한 증거라고 했다. 한 문장이 두 상반된 주장의 증거가 되었다. 나는 ―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와 가능한 번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행위는, 그러니까 의사 성행위는 암컷과 수컷의 사랑이 아니다, 결코 성애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몇 명의 잘난, 똑똑한, 개성 있는 유명인들이 동성애를 표방하고 경우에 따라서 결혼예식을 한다고 치자. 사실 파리 시장 들라노에만 해도 드러내놓고 동성애자임을 표방하고도 당선된 게 맞다. 2,3년 전 파리에선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50만 명 시위에 들라노에며 녹색당 대통령 후보며 그런 인물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력한 인사들의 성정체성이니까 특별히 존중해야할 필요는 없다. 내 주장은 이야기를 해 나가는 중에 점점 더 완고해져갔다.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 이게 결혼의 사전적 정의다. 헌법에도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한다고 된 것 같다. 불문율에서도 남녀 양성이 전제다. 남녀 아닌 두 사람이 사랑을 하든, 동거생활을 하든, 흔치는 않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결정이다. 자기결정권의 행사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 가능하다면 법적으로도. 그러나 남녀의 결혼 또는 동거와 동성의 동거를 동일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외사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예상치 않은 독설에 찔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나아가기로 했다.

 

왜냐고?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 복제를 위한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가 이루어지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의미에서 동성결합을 원하는 생물체는 특이종이다. 어쩌면 불완전하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또는 양성애는 ― 난 그런 이분적인 용어 자체의 도식이 틀렸다고 보는 쪽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닌 것이, 둥근 거울과 네모난 거울 중 어느 것을 살까 하는 소녀의 망설임이라거나, 점심에 설렁탕을 먹을지 순두부를 먹을지 망설이는 직장인의 고민과는 다른 차원이다. 거울은 거울이고 밥은 밥이고, 그런 건 늘 둘 다 똑같은 가치이니까. 하지만 동성애란 ― 성애의 변형일 뿐이다. 그저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암수의 결합이 껄끄럽고 내키지 않은 대신, 동성을 그리워하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동성애라고 할 뿐이다. 동성 간의 사랑, 동성에 대한 사랑 ― 동성애. 뭐라든지 단어는 가능하겠지만, 원래의 성애와는 성격이, 질이 다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생산적 짝짓기를 변호했다. 생물학자 외사촌 앞에서 점점 더 생물학 이야기로 빠졌다. 적진으로.

동성결합은 유전자 복제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복제라는 원초적 욕구를 모르는, 회피한, 버린 생물체들이 벌이는 사랑은 뭔가 자연의 범위를 벗어난다. 키가 병적으로 너무 작아도 커도, 정상 범위를 벗어나도 똑같이, 돈이나 생산성이 많건 적건 똑같이 그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만큼, 동성애 성향이더라도 인격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최근 교황님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말하는 성 소수자 동등권 운운도 사회적 인격적인 차별 금지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성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류의 비전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것’ ― 프랑스 추기경의 말이었다, 그때 파리의 동성애자들 시위 때. 어떤 종의 모든 생물체가 동성애 성향이라면 결과는 그 종의 도태다.

 

도태? 그 단어에서 외사촌은 완전히 함구했다.

나는 불확실한 전문용어까지를 동원해가며 개똥철학을 읊어댔다.

밈 ― 문화적 유전자라. 복제 과정에서 진을 살찌운다는 밈이라는 인자, 이 밈의 세력이 대단한 건 증명되었지. 우리가, 수백만 인간들이 예컨대 ‘신’이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처럼 확인되지 않은 믿음을 공유하게 된 것들이 그런 작용이라지? 그렇다고 동성애의 밈이 인류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체는,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 손해가 나는 방향으로 진화할 리가 없으니까.

 

외사촌은 눈도 껌벅거리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녹음기처럼 지껄였다.

알게 모르게 서양 흉내쟁이인 우리들,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글쎄. 물론 동성 간 혼인이 합법적이라고 간주되고 아니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것이 법으로 인정받는 서양 어느 곳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서양의 결정이니까 법이니까 옳은 것은 아냐. 옳지 않은 법을 몰라서 그래? 단 기간에 만들어진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 전쟁도 법의 이름으로, 인종청소도 법의 이름으로 행해졌어. 법 이야긴 접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 ― 소중한 말이지. 정치적 소수의견, 생물학적 약자, 모두 강한 다수가 배려해야할 대상이지.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 그가 그 일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것이 자랑은 아냐. 어쨌거나 프랑스에선 사정이 좋아지고 있어.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벌금형이 없어졌지, 120년 동안 ‘사회적 장애’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과했던 법이 사라진 거야. 곧 이어 정신병 리스트에서도 동성애가 삭제되었어. 그렇다고 육신이, 정서가 완벽한 건강상태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젊고 건강한 암수는 원초적 본능으로 짝짓기를 원하게 되어 있으니까.

 

넌 뭐야, 넌 왜 이렇게 사는데? 짝짓기가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라면서?

침묵하던 외사촌이 내 약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평소에 정리가 된 견해도 아닌 말들을 즉흥적으로 외사촌에게 떠들어대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침묵에 외사촌도 머쓱해졌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빈 커피 잔을 들기도 어색해진 나는 테이블보의 녹색과 짙은 청색 사이에 섞여 짜인 버건디 색상의 가느다란 올에 집중해서 비율을 셈하려고 했다.

 

 

아냐. 아니거든!

건너 편 옆 자리에서 제법 큰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다 같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오빠. 아녜요. 쟤네들 좀 봐. 요즘 젊은이들이 저래. 남자애 같은 남자애, 여자애 같은 여자애가 드물어. 유니섹스인지 옷도 저렇게 비슷하게 입고 다니지. 우리 둘 다 쟤네들 쳐다보면서 그게 여자애 목소리라고 느꼈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쪽이 여자애라니까.

그게 뭐.

남자들 입장에선 여자들이 버거워졌을 거란 말이지. 요즘 괜찮은 남자가 되려면 돈이 엄청 많은 집안이거나 빵빵한 직업이 있거나, 그러고도 키가 커야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갖춰? 다 갖췄다고 해도 연인에게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다고들 하지. 바꿔 말해도 그래. 괜찮은 여자란 돈 많은 집 딸이거나 최소한 연금이 보장된 직업이 있다거나, 그러고도 예뻐야 하는데…… 누가 그래. 다 어렵지. 이성에게 들이댈 자신들이 없어진 거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지.

 

오빤 대꾸를 않는다.

아님, 저쪽을 봐. 쟤네들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차렸네. 하지만 뭣들 하고 있나 봐. 각자 휴대폰 들여다보며 뭘 하느냔 말이야. 뭘 하러 만나서는.

우리처럼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음 아저씬가?

그래, 영락없는 아저씨 아줌마지.

그렇게까지 자조적일 필요는.

자조적이 아니라 현실이 우울하게 하지. 요즘 뉴스 안 봤어? 세계 부유층 85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이 가진 것과 같다는데 뭐. 1%의 부유층이 50% 빈곤층의 65배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거야. 인구 절반이 버러지야. 절반만 그런가. 아래 절반 보다 나아보았자 상대적 박탈감으로 꼬여있어, 마음들이. 뭔가 자연스러워야 생명력이 넘치고 짝짓기도 하고 싶고 그러지, 후손 번식에 대한 의욕이 솟구칠 것 아냐. 그런데 이렇게 움츠러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서로 위로받고, 가능하다면 유사 성애로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부의 불평등 문제까지 가냐! 넌 문학연구가 아니라 사회학 했어?

부의 불평등은 ― 전공과 무슨 상관? ― 우리를 지배하는 물신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선진국에서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하지만 후진국에서는 부패를 조장한다는 말이 맞아. 부의 완강한 대물림 속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살 맛 나지 않는 세상이지.

살 맛 나지 않아서, 이성에게 구혼하지도 후손을 구하지 않고 동성 사이에서 안주한다?

뭐,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요즈음엔 교육 자체를 포기하고 등 돌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잖아.

그래, 니트라 그러더라. 낫 인 에듀케이션, 엠플로이먼트 오어 트레이닝.

우리나라에선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니트족 통계가 70만 명도 웃돈다고 본 것 같아. 한줄 서기에 아이들이 죽어 가. 옆자리 짝꿍도 경쟁상대로 보라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를 도망치는 거야. 대학에서도 희망이 없어 자퇴하기도 하고. 자괴감이나 대인기피증은 당연, 사회구조 전체에서 비껴서있는 것이지. 가부장제로 받침 되는 건전한 사회조직? 어림없어. 반사회적, 아니, 비사회적인 건 틀림없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거야. 또 교육을 많이 받음 뭐해? 정규직이 안 되는, 못 되는 점에서 우리라고 다른가?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체제에 들어가? 결혼이 말이나 되냐고. 분업시대 이후론 싫든 좋든 어떤 톱니든 톱니가 되어야 겨우 사는데 말이야.

톱니 인생. 그래 정상적인 톱니만 되어도 다행인 것을.

틈새에도 끼이지 못하니까 다른 돌파구를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어쨌거나 우린 ―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불어났는데. 밖에 어둠이 내려앉자 커피숍 공간이 살짝 위로 솟은 느낌에 어디선가 스쳐 오는 바람기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린 ― 뭔가 위안이 그리운 시대를 사는 것 같아.

그래. 위안이 그리운 세대, 누가 누굴 위로할 줄 모르는 세대.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모르는 세대. 간혹 경쟁을 피하게 되면 우정도 사랑이라 믿는…….

 

 

사랑과 우정을 혼동한다고?

외사촌은 눈을 흘겼다. 내가 우정과 사랑을 구별 못한다는 말에 발끈했나 보았다.

넌 감정의 구분이 확실해서 위안은 그립고 누군가는 필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혼자 버티는데?

혼자, 그래 혼자 잘 지내는 편이야. 하지만 글쎄, 난 요즈음 희한하게 아기를 갖고 싶어. 그건 충동이라기보다는 딸을 낳고 싶은 소망, 낳아야 하리라는 의무감에서. 하지만 수컷이 없네! 암컷 갈매기나 같구나. 하긴 무슨 수로 애를 키워? 나 혼자도 버거운 세상에서. 많이 말고, 그냥 먹고 사는 만큼도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이참에 적극적으로 나서 볼까?

아버지 감을 낚겠다고?

감으로 괜찮은 사람이 보이기도 해. 사랑? 가슴이 뭉클하게 아프지는 않아서 사랑은 아니려나? 또 짝짓기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겠지만.

뭐야, 넌 그럼 여태?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옛날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처음 남자가 나빴어. 하필이면 극장 안에서 손을 잡았지 뭐야. 난 불 꺼진 극장 안에서 손을 잡히긴 싫었어. 그 무렵 어떤 소설을 읽었었는데, 자연 속에서, 이를테면 풀밭에서 햇볕 아래 누워서 혼자 오르가즘을 느낀 소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 그런데 극장은 어둠의 충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어. 사랑은 어둠이어선 안 되는 것 아냐? 암튼 어둠과 관련되는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소름 돋았어.

밝은 사랑?

그래, 밝은 이미지의 남자. 난 분명 남자가 필요해, 내 딸을 위해서.

딸은 무슨. 딸을 낳으라는 보장은 있고? 멀쩡한 처녀가 임신을 원한다니 세상 참.

그래, 바로 임신이야.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적 충동은 뭔가 빗나간 것일 게야. 그러니 동성애도……. 맞아, 임신이 좋은 비유야. 임신이란 100%이거나 아니거나 그거야, 누군가 절반만 임신일 수는 없어. 성교도 그래,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교란 반쯤만, 그러니까 성교가 아냐.

생물학자 밥 벌어 먹겠느냐, 어디!

미안해, 공자님 앞에서 문자네 정말. 하지만 사랑은 임신과 같아, 100%이거나 아니거나. 절반만 사랑한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야. 사랑에 어떻게 양이 있어. 양이 있는 것이라면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아길 가질 거라며!

아길 가지려고 사랑하겠다니까, 온이 사랑할 거야. 만일 누군가를…….

누군가를 만나면? 누군가를? 누구를?

그게 글쎄.

넌 말 다르고…….

아냐.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오빠, 오늘 이야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해 두자. 오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야, 어쩜 나도. 부부가 되려면 팔천 겁의 인연이 필요하댔잖아.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진.

겁?

그래, 겁.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사방 1유순 크기의 바위를 뚫는 시간.

유순?

소달구지가 하루 가는 거리라니까 최소 40리라고 하지.

평방 40리?

오빠, 내버려 두자, 단위는 잊고 그냥 시간에 맡겨 두자고. 건 그렇고, 오늘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설에 또 오기 어려울 텐데 울 아버지 뵙고 가야지.

오늘은…….

가, 가자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쪽은 내내 나였다. 왜 목소리를 높였을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소리 뿐, 말에 전혀 자신은 없는 채로. 가만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 자체가 말의 알맹이에 자신이 없다는 신호다. 아니면 진실을 감추려거나.

 

어머니는 요즘 왜 목소리를 높이실까. 혹시 감춰둔 심지가 뭘까? 집을 향하자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설을 앞둔 일시적 상황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음식 만드시면서 짜증스러운 내색을 보이신 적은 없었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늘 그러셨다. 설이래야 수십 명 씩 손님이 오는 대단한 집도 아니고, 그저 조금 북적대고 수선스럽고, 그래도 떠들썩하고 화기 넘치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받쳐주는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있는 존재라고 믿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명절이면 딸들과도 다 함께 하지 못하는 허전함에 더해 아들의 부재를 서러워하실까? 민망해 하실까? 아버지에게 미안함 대신, 그 미안함을 감추려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걸까?

 

혹시 아버지는 아들 없이 지내야 할 차례가 다가오면 우리들 몰래 한숨을 쉬시지는 않을까? 그 한숨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극할까? 유전자 복제에 실패하시고서도 한숨도 마음대로 못 내쉬는 울 아버지.

 

 

아버지이, 선준 오빠 왔어요.

집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안 계셨다.

엄마, 아버진?

내가 느이 아버지 어디 가신 줄 일일이 다 안다니?

어찌할꼬. 어머니의 목소리엔 여전히 싸한 여운이 감돌았다. 울 어머니의 목소리에 심지를 심어 넘은 범인의 정체는 뭘까. 그냥 세월일까. 내 눈으로는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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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문학』 2014. 3,4월호(vol. 119), 국제펜한국본부, 125~143쪽.

 

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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