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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10.01 오늘과 이별하다 - <PEN>
소설2009. 10. 14. 02:45

 쪽지 붙였음

펜문학 2009


쪽지 붙였음. ― ‘우편물 넣지 마세요. 새가 살고 있어요.’ 토기로 구워낸, 입구가 제법 벌어진 통 주변으로 이름 모를 풀들이 뒤엉켜 자라있는 사진 아래에서 찾아낸 글귀다. 그러니까 이건 하얀 치자꽃 흐드러진 낮은 담장아래 숨은 편지함이다.

눈이 푹푹 내리던 어느 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이라는 시 구절이 느닷없이 생각났던 날. 일없이 검색창에 시인의 이름을 써넣다가 「꿈꽃」이라는 시도 건졌는데, 작은 풀꽃들의 사진도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이타심 덕택에 그 하얀 다섯 꽃잎의 벼룩이자리꽃 한 송이를 측면에서, 네 송이를 하늘에서 바라보려니 절로 미소가 난다. 지친 하루가 녹는다. 그렇게 꿈꽃을 따라가다 꽃들이 만발한 누군가의 블로그에 홀린 듯 들어가게 되었다. 어라? 쪽지 붙였음. ― ‘우편물 넣지 마세요. 새가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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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조그만 산골 마을에 들어가 초가지붕에 박 넝쿨 올리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을” 생각이 없었다. 밤이면 실컷 별이나 안고서 행복해 하려 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 아니 꿈도 아니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런 바보 같은 꿈을 꾸고 사는 애들은 하나도 없었다. 꿈은 적어도 산골을 벗어나서 대처로 나가는 일에서 시작될 것이었다. 내가 드디어 대처의 내 아파트에 입주하는 날 할머니는 방에서 거실로 왔다 갔다 하시며 알 수 없이 두 손 모아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셨다. 용타, 용타, 저 우게 느 엄니도 인자 참말로 눈 감겄다.


할머니는 1929년생인데, 호적에는 1924년 갑자생으로 되어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호적에 올라 있던 내력은 눈물 난다. 앞서 갓난애 태를 못 벗고 죽은 딸애가 호적에 남아 있었고, 또 딸을 낳아 그대로 두다보니 죽은 딸 이름으로 작은 애가 살아간 것이란다. 집토끼나 돼지나, 그 가축들만큼이나 딸들이 중했는지 그도 모를 일이다. 식량도 자라지 못한 빈농에서 할머니 또래 여자애들은 호적도 이름도 별 상관없는 주목받지 못한 생명들이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라고서도 할머니는 실제 나이보다도 고우신 편이니, 고생하면 늙는다는 것도 헛소리다. 입 하나 덜자고 밥이라도 먹는 벙어리께 팔다시피 딸을 보낸 친정. 벙어리남편 성깔 못 견딘 각시가 둘이나 도망갔어도, 새 며느리 본 시어머니자리는 시어머니자리만한 냉대를 알았고, 여전히 배고픈 나날.

일은 죽어라 시켜도 좋응게, 밥이나 좀 묵으먼 했지야. 밥이 작응게 그랬제, 느 증조할마니도 꼭 나쁜 사람이여서 그랬것냐. 장대같은 자식들도 배를 못채워중게 그랬것제. 밤은 질고 물레질 바느질 허고 안잤을라믄 배는 왜 그리 속없이 꼬르륵 소리를 내넌지, 부뚜막에 멀건 숭늉 둘러마셔도 속이 안 가라앉으면 싱건지 독으로 가제. 살얼음 살살 언 것을 바가지로 젓고 무시 두어 개 건져 갖고와 그놈 깍도 않고 대충 잘라서 묵으면 살 것 같제. 그 맛은 지금은 못 맛봉게 아쉽다. 어째 그 맛이 안 날꼬 몰라. 무시들은 쪽 바르고 훨씬 더 좋은디. 허기사 반백년도 훨썩 넘은 일인디 요 손맛도 가부렀겄제.

반백년? 하긴 아부지 환갑이 넘었으니까.

훨 넘었제. 그래 이 할매가 참말로 오래 산다. 느 어멘 그리 일찍으나 갔는디.


어려서 어머닐 몰랐고, 일찍 병들어 죽었다는 어머니 이야기에 나는 간호원이 되어야지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자랐다. 하지만 누가 결심대로 될 수 있는가 말이다. 나는 간호사는커녕 간호보조사도 될 운명이 아니었다. 웬일인지 병아리가 종종대다가 비틀거리는 것만 보아도 현기증이 났고, 꿈틀대는 것들에선 어딘가를 찔리거나 다치거나 피를 흘릴 수 있을 가능성만 미리 떠올랐다. 피 생각이 나면 고소하게 유혹하는 핫도그 막대도 삼킬 수가 없게 되었다. 원래 피를 지녔던 것, 그것을 먹는 상상은 무서움 자체였다. 어린 시절의 아린 기억인 살타는 냄새가 나중에 들어 알게 된 벌건 핏물을 토하고 죽었을 어머니의 이미지와 한데 섞여 더욱 끔찍해지면서 동물에 대한 두려움으로 굳어갔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접해야하는 이상한 해부도에 눈앞이 깜깜해진 나는 산수라는 탈출구를 찾았다. 아무런 의미도 붙지 않는 숫자는 가장 안전한 구원이었다. 숫자의 무더기 속에는 맘 편한 순수한 놀이의 법칙만 있었다. 게다가 수학공부 덕에 우리 쪽에겐 꿈꾸기 어려운 여상고 진학까지 해냈으니.

우리 식구는 크게 두 편으로 나뉘었는데, 한쪽은 할머니와 나와 동생 이순이고, 다른 한쪽은 새어머니와 새어머니가 낳은 동생 셋이다. 아버지는 중간이라기보다는 약간 수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그쪽에 치우쳤다. 아마 정중앙에 계셨어도 내가 그리 느꼈을 것이다.

이순은 내 생각엔 뭐든지 나랑 비슷한 줄 알았지만 자라다 보니 한참 나긋한 품성으로 제법 사랑을 받았다. 중학교 졸업하고도 나처럼 어렵사리가 아니라 당연히 고등학교 진학을 했고, 또 기어코 인문계를 고집했다. 물론 그 애라고 이어서 대학진학까지는 꿈꿀 리 없었다. 뛰어난 성적도 아니고 했으니까. 하지만 별 자격증이 없이도 졸업도 채 하기 전에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했던 통신회사라던가 사무실에 취직을 하더니만, 거기서 점장이랑 소문을 내면서 언니인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회갑도 못 치르게 하고서 시집을 갔다.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신랑은 점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동생은 나와 연년생으로 그때 갓 스물이었다.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른다는 뉴스로 세상이 변해가는 가을이었다. 또 다른 먼 데 분단국가에선 장벽이 저절로 허물어졌다는 더 놀라운 소식도 이어졌다.


세월은 쏜 살이다. 이 봄이 지나면 할머닌 팔순이시다. 할머닌 딱 나만한 나이에 첫 손녀딸을 보셨고, 생일마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루 사이다. 어려운 형편엔 할머니 생신 덕에 내 생일 하루 전에 미역국에 팥시루떡 한 입을 먹어도 신이 났다. 다른 동생들은 아예 그것도 안 되었으니까. 그러다가 어머니가 식구들 생일에 매번 미역국이라도 끓일 만큼 되자 내 생일에만 빠졌다. 연속해서 미역국을 끓이지 않는 것이 당연타? 난 결국 단 한 번도 생일을 가져보지 못했다. 물론 불평은 다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였다. 어려서 뭔가 투정을 해댈 어머니를 가진 사람들은 제대로 호사를 한 것이다.

내 어머니는 어머니를 기억도 못하는 어린 나를 떠나버렸다. 곧 새어머니가 있었지만, 새어머니는 세 아이들을 낳아 기르느라 배가 부르거나 젖을 물린 모습이 내 기억의 전부였다. 아니라도 항상 어른들은 분주했다. 아무도 잠시 앉아서 나를 바라볼 시간은 없었다. 할머니도 종일 부산했고, 저녁 먹고 나서도 또 무슨 자잘한 손일을 하시는 걸 보면서 잠들어야 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으니 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도 말이 없으니 벙어리할아버지 닮았을까 걱정하는 동네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야가 목소리는 또렷한데 말을 잘 안한다요. 노래람 곧잘 하는디․…….

새어머니가 변명해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더 말이 막혔다. 한편 아무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보곤 했다. 내 목소리가 또렷해? 


우연히 노래를 조금 잘하고 일부러 산수를 조금 잘했을 뿐, 나는 음악에서도 수학에서도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혼자서 하는 노래도 반주에 맞추려면 잘 못했고, 수학도 수만 좋아하지 응용문제에 가거나 실전에선 약했다. 특출한 것이 없는 여상고 졸업생을 면하고자 재학 중에 자격증 취득에는 열심이었다. OO화재보험회사. 지방 여상고 졸업생 치고는 괜찮은 보험회사에 취직하는 것으로 내 청춘시절은 시작되었다. 물론 S자로 시작하는 대회사의 면접시험에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그때 확인하게 된 것이 내 촌스러움, 앙상한 몰골에 뚝한 말투였다. 좁은 어깨도 컴퓨터와 의자 사이에서 굳기는 마찬가지다. 직업병이란 게  꼭 전자파니 나쁜 자세니 그런 물리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라고, 그쯤은 나도 안다. 어깨가 굳어가는 것은 그 어깨 주인의 생이 굳어간다는 의미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사무실에서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간 내 청춘. 그렇게 아무런 매력도 갈등조차도 없어보였을 이십대를 나는 절절히 어머니의 환영에 눌려 살았다. 시집을 왔을 나이, 나를 낳았을, 둘째 딸을 낳았을 어머니, 또 아이를 가지게 된 어머니, 불안한 어머니, 서러운 어머니, 세 살, 네 살 아이들을 두고도 떠났을 어머니……. 그렇게 어머니를 다 살아내고도 아직 나는 여전히 이십대였다. 마음에선 아이도 낳아보았는데, 벌써 죽어버린 느낌으로 무엇에 기댈까? 그렇게 서른 살 생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퇴직을 결심했다. 나인 투 파이브, 파이브가 뭔가. 상급자 눈치에 퇴근은 마냥 늘어지기 일쑤고, 월말이나 감사가 닥치면 별빛도 없는 밤길 퇴근. 아침이면 그대로 시계만큼 규칙적으로 일어나 버스정류장으로 내닫는 자동인형의 삶. 뭔가 이 틀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유로운 시간을 좀 갖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모든 직장은 월급생각으로 있는 한 감옥이다. 월급에서 엄청난 적금을 부어넣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 자동인형도 변신을 감행해야지. 퇴직금은 별 것 아니겠지만, 내 급여에 비하면 엄청난 적금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퇴직을 결심하고도 바로 그 적금들에 묶여서 4년 반을 더 근무해야 했다. 적금들을 중도에 해약하는 것은 바보천치나 할 일이니까.


막상 사무실을 벗어난 서른다섯 살의 여자가 일 년을 놀기로 결심했을 때. 그런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사치이자 고문이었다. 내 또래들은 여전히 일의 쳇바퀴 아니면 결혼의 굴레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나와 더불어 단 한참을 놀아줄 친구가 없었다. 물론 진짜 노는 아이들, 진짜 자유를 만끽하는 내 또래의 세계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었다. 보이지도 잡을 수도 상상조차 할 수도 없을 머나먼 어딘가에. 두어 달을 그렇게 멍하니 버티고 있자니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할머닌 그랬다, 그래도 인자 결혼을 서둘러야제. 허나 억지로는 말거라. 칠십 중반의 노인으로서는 개방된 의견이었다. 할머닌 그 뒤로도 한 오년 내 허송세월을 심하게 나무라시지도 않았다.

나는 우선 운전면허를 땄고, 할 일을 찾아 궁리에 들어갔다. 처음엔 자유업에서 탐색을 시작했다. 자유업 ― 고용자 생활 15년에 얼마나 근사한 단어인가. 사전적인 정의는 그러나 내게 한숨을 안겨주었다.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과 재능에 근거한 독립자영업자 또는 그 직업.” 내겐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없다. 전의 직장선배나 동료들은 일단 계약직으로 복직할 것을 권했는데, 그건 싫었다. 막상 뭔가를 찾아보려 해도 하나 같이 난관에 부딪혔다. 가진 돈도 빠듯했고, 또 내가 가진 전체를 투자할 생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동안 한 해가 두 해가 갔다. 대신 가끔 스산하면 고향의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할머닌 요즈음엔 마을 경로당이 좋으니 하루 종일 집을 비우신다. 낮엔 마을 입구에서 밥장사 하는 며느리, 우리 새어머니에게 가서 한 술 뜨시면, 다시 나물바구니라도 들고 경로당으로 나가신단다. 콩나물이나 미나리 다듬기, 감자대나 토란대 껍질 벗기기는 지금도 일도 아니다. 게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모두가 폭소라는데,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는 우리도 꽤나 많이 들어서 외울 지경이다.

박샌덕 안 있었든가, 나이롱바가지 첨 나왔을 적 말여. 거그다가 감자 쪄묵을라고 헌 사람이 박샌덕 아닌가. 바가지들 아 곰팡나고 쪼개지고 헌다고 죄다 내불더니, 감자 쪄묵을랑게 나이롱바가지라도 써묵어야제. 그것이 어쩌게 되었겄어. 냄새하고는, 사람 못 살제. 그러고서 헌단 소리가, 나이롱은 나이롱이네 지대로 안되는거 봉게, 그랬대야.

진짜가 아님 다 나일론이어요?

그라제. 긍게, 바가지만이 아니라 요새 시상 사람들 다 나이롱 아녀? 아따 농사라도 풀을 맹가 벌레를 잡능가, 머시든지 약만 줄줄 뿌려불제. 공부도 요새는 나이롱으로 한다며. 학교가믄 나이롱으로 놀아불고는 또 새로 돈 타서 학원댕기고. 하마 놀기도 나이롱이제. 아들이사 학원 아님 친구들 만나 놀다오곤 그라는디, 몰려는 다녀도 함께 노는 법이 없대야. 느 조카 말여, 고것 말이 껨방에 가서 각자 자기 껨하고 왔대야. 아들이 모타서도 각자 이녘 손구락 두들기며 논다 그말 아녀. 입도 뻥긋도 안허고. 나는 입도 뻥긋도 안허는 사람이 제일 미운디, 느그 할아부진 헐라도 못혀서 못혔지만, 왜 사람들이 입뒀다 뭣헐라고 말을 안헌디야. 나는 집에 들면 그렇다 쳐도 나감사 말로 산다. 사람이 뭔 말을 혀야 살제. 속에서 단내 올라와야, 말 안허고 사는 사람들은.

속에서 냄새 올라온다고? 헛구역질 비슷한 것이 올라오긴 한다, 내 경험으로 보아도. 그것은 뭔가 어지럼증 같은 토악이다. 하고 싶은, 꼭 내뱉어야 할 말을 참으면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행하게도 우스개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풀어서 타들어 가는 속내를 삭이신다. 아버지조차 거의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시는 요즈음, 할머니는 많이 외롭다. 막둥이까지 장가가고 나자 여덟 식구가 북적거리던 집안에서 덜렁 혼자 잠을 청하기 때문이다.

할머니, 뭐 잡숫고 싶은 것 있음 나 아직 놀 때 할머니랑 먹으러 갑시다.

사람이 묵어 조지면 안된다. 다 묵어감서 어쩌게 새끼들 키운다냐.

할머니, 그래도 할머니가 뭣 좋아 하신가는 알아야죠.

글먼 거 비싸기만 허고 한 접시다 이것저것 쓸어다 먹는 것 말고, 잘 차려다 준 밥상이나 받아봤음 좋겄다. 떡갈비나 한 대 뜯고.

할머니 무릎 때문에 큰 병원에 가려고 읍내로 나온 날, 나는 살아서 피를 흘렸을 벌건 살코기를 먹기로 결심했다. 할머니를 위해 단 한 번도 고기를 사다드린 적이 없었다는 죄책감을 함께 고기를 먹는 것으로라도 씻고 싶었다.

할머니, 소주 한잔 하실래요?

소주야? 어쩠거나, 너 소주랑 다 묵냐? 나이 묵어도 처년디, 처녀가 소줄 묵어!

아니, 갈비 드시려면 반주 하셔야지요.

그렇게 소주를 들여놓고 두 잔을 거푸 마셔도 고기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화장실 핑계로 가운데 홀로 빠져나온 나는 소주를 하나 더 시켜 반병을 그대로 들이켰다. 그리고 재빨리 방에 들어가 할머니 앞에 앉았다. 다 구어서 나온 갈비인데도 조금 헤집으니 피 같은 물이 보인다. 죽을 맛이다.

야가 고길 잘 안묵어라우. 요놈 좀 다 익혀갖고 오쇼. 그렇게 사람 불러 시킨 할머니가 계속했다.

너 인자는 툭툭 털어야 헌다. 말도 시켜야 겨우 허고, 먹을 것도 도통 가려쌓고. 그럼 살기가 폭폭해야. 느 동생 봐라 이순이. 니 눈엔 위태위태혀도 애기들 낳아놓고 알콩달콩 잘만 살제. 형지간에 왜 이리 다를꼬. 그아는 말이 연해야. 사람이 헐 말도 안 헐 말도 좀 허고. 묵고 잡은 것도 묵기 싫은 것도 묵고. 할맨 이 세상 두 가지만 못 묵는다.

뭔데 할머니?

뭐기는. 없어 못 묵고, 안 줘 못 묵제. 세상없이도 못 묵는 건 그 두 가지라…….

그 두 가지. 그 말이 그 말이다. 번개에 맞은 듯, 할머닌 그 말로 나를 고치셨다. 물론 난 아직 육식에 서툴다. 여전히 햄 소시지보다는 어묵이 낫고.


할머닌 소주가 들어가서인지 그날따라 옛 생각에 깊이 빠지셨다. 느 새엄니가 그 일을 다 봤단다. 그러니 느 새엄니 된 것도 다 명이제.

그 일이라뇨? 

아따 느 엄니 그리 간 사정 말여.

난 또…….

옆집 연이 아부지가 느 엄니 쫒아가는디, 느 엄니가 한참을 못달려가고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부텀 나중에 느 새엄니될 처녀가 이모네 거들러 와갔고 밭 메고 있다가 멀리로 다 보았대야. 그라고도 그 자리에 재취 들다니 그 명운도 참. 연이 아부지 말로는, 그날 아침 멋허다가 늦었는디 우리집 앞 돌아나오는 순간 섬뜩하드래야. 아까참 동네가 떠들썩혔던디 이상케 조용하드래야. 어째 꽉닫힌 방쪽이 괴괴허고. 혀서 가만히 방문을 당겨 봉게 잠겼드래야. 놀래서 문고리를 독으로 찍어 문짝을 열고 들어가 봉게 벌써 꼬구라져 누었드래야, 제초제병은 나딩굴고. 헌데 그새 옷이랑 갈아입었드래야. 놀래갖고 흔등게 눈 딱 감고, 놔두쇼 놔두쇼 지는 더는 못살어라 이왕 갈랑게, 하드래야. 연이 아부지가 이람 안되라 험서 우왕좌왕하는디 그렇게 나서서 밖으로 내닫드래야.

소주 기운이 도는지 할머닌 금했던 보따리를 푸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를 난 벌써 어려서 다 알게 되었다. 울지 않을 만큼은 자라 있을 때였다.


옆집 연이는 나보다 한 살 위로, 내가 여상고 진학을 계기로 그 마을을 빠져 나온 것 모두가 연이 덕이었다. 중학교만 졸업한 연이가 일 년을 쉬며 기어코 여상고 진학을 우겼기 때문이고, 또 여상고라면 읍이 아니라 대처로 나가야했는데, 동네에서 혹시 나랑 둘이 함께라면 내보내도 될 거라고들 말이 돌았다. 해서 우리아버지에게서도 허락이 났다.

아버진 사실 꼼꼼하시다 못해 강압적인 데가 있었다. 무엇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우리 어머니가 불쌍타 했다. 그래도 새어머니가 잘 사는 걸 보면, 탓을 아버지한테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딸만 내리 둘 나은데다가 거푸 셋째를 가졌을 때 그 가족계획이란 것이 어머니 목숨을 가져갔다고들 했다. 따져보면 외할머니가 화근이었다. 외할머니가 어머니 입덧소식에 또 딸 낳을까 걱정되어 어디 가서 물어보니 여지없이 또 딸이라 했다는데, 외할머닌 앞장서서 어머닐 데리고 뱃속의 아기를 지우러 갔단다. 물론 아버지 몰래. 외할머니 생각으로야 둘째 딸 낳은 것 보고 휑하니 나가서 이틀을 집에 안 들어왔다는 깐깐한 사위가 미리 걱정도 되었고, 시간을 두고 나으면 아들딸이 섞바뀐다는 애매한 말도 믿고 싶으셨을 게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원엘 다녀온 것을 알고는 아버지는 완전히 노발대발이셨단다.

남새스럽다아. 으쩌자고 여편네가 의사놈한테 가랭이 벌리고 추잡한 짓을 한디야! 그라고서 집엘 기어들어 온디야!

날이 가도 달이 가도 아버지의 냉대는 더해갔다고 한다. 으째 소죽이 이 모양이랑가. 곧 있음 새끼 밸 소를 잡아 뉩히고 싶나. 사람 얼굴 참 두껍제! 잡O이 성항게 잡풀이 이리 성채! 못마땅한 건수가 있음 건수가 있는 대로, 건수가 없음 건수가 없는 대로, 듣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아버지는 그렇게 화풀이를 계속 하셨더란다. 심심풀이 후렴마냥 매사에 병원 다녀온 일을 빗대어서. 이웃들 말로는 저녁으로 사립문 밖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는 어머니를 본 적이 더러 있었다 했다. 개울가 빨래터에선 웅크리고 앉아서 빨래랑 두 손이랑 다 담근 채 물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많았다 했다.


이순이 시집가던 날 연이어머닌 새어머니 눈총도 모르는지 많이 우셨다.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나서 그 옆에 앉으시려는 연이어머니를 연이가 한 줄 뒤 내 옆으로 모시고 와서 함께 앉았다. 연이어머닌 평소에도 이모도 아니면서 이모 같았다. 우리와는 다른 고향말을 하는데도 그랬다.

너이 어무이 가슴 새까매져 갔다. 미안한 말이다마넌 너이 아부지가 쪼매 그렇다. 조선 양반도 아이고 머이 그리 뻑뻑한지. 평소에도 참말 그랬다. 나이 차도 별 없으며이, 여자를 어찌 그리 알로 봤는지. 아예 무시한기라. 각시가 사사건건 눈에 안찬단 거이 되나. 또 어찌 남남이 사사건건 눈에 찰꼬. 사람은 서로 그런가부다 해야 된다이. 한 이불에서 자도 잠들면 따론 거이, 그기 각자란 이야그다. 금슬 아무리 좋아봐야 죽을 때는 따로 안 가나. 너이 어무이, 참 연하디 연한 사람인 줄로 알았다가 그리됐다. 계속 타박이 쌓여도 속말 털어놓을 데도 없제. 한 번은 이 악물고 대들라고 작정했다드라마넌, 너이 할무니 나무라신 소리에 목이 꽉 막히더란다. 부부쌈 한 번 못해보고 늙어죽을 어메 앞에서 많이들 다퉈보거라, 느들 참 재밌게도 산다, 뭐 그랬다카던가. 너이 어무이 내한테는 한두 번 속말을 했다. 그라곤 똑 입닫고 사는데 나중엔 참 못 견딜 말로 듣다가 복받친 거라. 암튼 너이 아부지 만날 허시는 거이 핀잔소린데 그날은 아침도 기운데…….

연이어머니, 고만 하셔요. 불쌍한 울어머니 오늘은 여기 어디 와 계실 거예요. 가만히 있음 알 것 같아요. 그냥 저 가만히 있을게요.

그래, 그렇고마. 연이도 니도 인자 곧 시집들 가야제. 자가, 저 쬐만한 이순이가 언니들을 앞설 줄야…….


그리고 몇 년 뒤 연이도 결혼했다. 상고시절부터는 대강 말을 놓고 지냈고, 내가 먼저 화재보험에, 이어서 연이는 농협에 취업이 되었다. 연이는 사내커플이 되었다. 연이 결혼식에서 연이어머닌 날 보시더니 또 눈물을 내보이셨다.

너이 아부지 지금도 그라시자? 부부계에 더러 보다가, 나가 연이한테 와가 잘 안가니까는 본지도 오래다. 너이 아부진 말 한번 떼면 법이라. 연이아부지도 너이 아부지라믄 학 띠었다제. 클 때도 한 번 수틀린 친구하곤 두 번 다시 안보기 선수였단거라. 다 어른들 돼갖고는 너이 아부지가 할부지랑 말 못해보고 커서 그란다카고 친구들이 이해했다제. 참 나나 너이 어무이나 돼지띠 아이가. 살았음 환갑잔치도 한 번에 묵었을 긴데. 나가 어짜다 여까지 시집온 이듬 해 너이 어무이 시집오니 동네가 복돼지들 줄줄이 들어온다 했제. 아무 소용도 없는 덕담이었제.

연이 결혼하고 나면 이제…….

참 그란데, 니는 그래 은제 시집갈래. 너이 어무이가 오늘따라 얼매나 서운할꼬. 내가라도 서들어야지 싶다. 참 너이 동생마다, 이순인 아들로 연속 턱턱 낳았으니 너이 어무이 원 풀었을 기다. 너이 어무인 거서도 어찌 사는지 모르겠다. 딸래미들 학교댕기는 것도 몬보고 가서는. 이순인 잘 걷기나 했나. 이라고 커서 애어메되았으니 알아나 볼까. 설마 즈 자석은 알아보겄제. 으짜노, 부껜가는 와 니가 안 받나. 니가 한 동네 젤로 친한 소꼽친구 아이가.


그날의 부케는 그냥 던져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 붙잡을 애가 받았다. 다들 그렇게 한다. 부케를 받고 석달인가 반년인가 기간 내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영영 못하게 된다는 말에 누군들 선뜻 부케를 받으려 하겠는가. 그 결혼식에 모였던 우리들 지방 여상고 졸업동기들도 몇 번 더 그런 자리에서 만나다간 시들해졌다. 세월이 세월이라 사방으로 흩어져서 예상외의 모습들로 살아간다. 고3교실은 취업내신으로 초긴장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어른들이 말하던 복불복이니 새옹지마니 하는 말들이 일리가 있었다. 내신이 빨라서 꼭 좋은 직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러는 한참 늦게라도 썩 괜찮은 회사에 되기도 했다. 분명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뭔가 사람들이 알파라고 대충 넘기는 묘한 작용이 진짜 힘인 듯 했다. 보통 우리 정도의 가정과 우리 정도의 학력으로는 바닥을 못 면하고 살아간다. 신데렐라는 동화나 영화다. 죽도록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우리들. 그러나 일치감치 우리한텐 그 좋은 월급을 포기하고 엉뚱한 반전으로 멀리 뛴 애들도 있긴 하다. 뉴욕이라는 데서 네일숍을 한다는 애도 있고, 특이하기로는 교회 관련해서 독일에 갔다가, 거기서 만난 성악가의 아내가 되어 돌아온 애도 있다. 미술치료학? 치료미술학? 그 둘 중 하나를 공부해 와서 전문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는. 그만하면 세상은 제 하기 나름 아닌가. 그러니 내 제자리걸음은 순전히 내 문제다.

세월은 무심타. 그러다 졸업이 20년이나 흘렀고 홈커밍행사를 하겠다고 준비하는 동창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컴퓨터라면 다들 전문가인 우리들 아닌가. 벌써 개설해둔 홈페이지에는 그 나름대로 시집 잘 간 몇이서 날마다 음악이다 시다 좋은 것들을 ‘펌’해다 놓고 있었다. 「시월의 어느 좋은 날에」,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어딘지 성스러운 교회냄새도 나는 클래식 취향의 음악들. 교회에 다닐 여가도 클래식을 들어 볼 기회도 없이 주산ㆍ부기자격증, 정보처리사 자격증에 또 무슨 무슨 자격증들에 매달렸던 우리들이 어느새 교양 있는 클래식을 탐하고 있다. 업그레이드 된 세상. 하지만 난 아직도 심정적으로 자격증에 매달린 신세다. 예상보다 높은 아파트 관리비를 보면 주택관리사자격증도 괜찮겠다 싶어지고. 아니다, 한 학기 남은 방통대학 보육과를 마치면 그 길을 가리라. 실은 재테크의 달인인 ‘아줌마직원팀’에 묶어둔 ‘재’가 쏠쏠하게 불어나고 있었기에, 종일 근무 하지 않고서도 연봉처럼 수익을 늘리는 방법을 알아버렸기에, 지금 굳이 일을 갖는다면 어린이집이다. 혹시 어머니 없는 아이들이 올지도 모르는 집.


사무실을 나오고서도 수입이 된다? 우스운 세상이다. 난 그러니까 자유업에 종사한다. 무엇 때문에 근로소득에 애달았을까? 가만있어도 근로소득을 넘는데. 난 물론 투기꾼은 못된다. 투기할 자본도 통도 없으니까. 그저 조금 길을 알고 나니 불안 가운데도 한가했다. 어찌하다가 대학가 문화도 곁눈질했다. 근처 단 하나 있는 서점을 기웃거려보아도 별게 아니다. 영어를 포함해서 취업과 성공이 화두이다. 재테크 관련 책들에 재테크강좌들 포스터도 눈에 들어온다. 내 눈이 그런 것만 입력하는 모양이다.

그러다 방통대가 아닌 진짜 대학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지 캠퍼스 내의 평생교육원까지 기웃거렸다. 그게 이태 전이었다. <소자본 투자전략>에 곁들여 미래의 내 어린이들을 위해 <POP - 예쁜 글씨강좌>에 등록했다. 그다음 학기엔 <우리문화유적의 이해>와 <교양전략 - 서구문화의 이해>에 등록했다. 유럽여행도 뭘 알고 가야 무식을 면한다는 둥, 수강생 아주머니들의 말을 귀동냥한 터였다. ‘그’는 서구문화를 처음 두 시간만 강의한 진짜 대학교수에 이어서 그 강의를 전담한 평생교육원 교수(?)였다.


후후, 피가 없기론 쇠고기에 비해 뱀 먹기가 일순씨 이론상 쉬운 겁니까?

진짜 대학생들을 흉내 낸 쫑파티자리에서 이렇게 놀리면서 시작해온 그는 교실 외의 말투로도 지식인이었다. 사람은 잡식성임다, 원래.


내가 잡식성이 아닌 특수종이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분명히 살이 타는 냄새를 기억하는 어린 시절 내내 살 느낌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 상에 오른 살코기는 그리 익숙한 좋은 맛이 아니었다가, 대모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떠난 이후 내게 친구 같은 낙이 된 것은 뭘 모르는 꼬맹이 이순이 아니라 대모였다. 대모는 이순이 몸통보다 더 큰 개 이름이었다. 원래는 이름도 없이 그냥 누렁이였는데, 내가 그 놈만 따라 다니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엄마가 쓰던 물건이었을 털실뭉치를 어디선가 발견해서 그것으로 공 던지기 하듯이 대모랑 장난을 했던 기억. 그 끝은 처참했다. 내가 잘 못 던진 털실뭉치는 하필이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고, 대모는 순간 빨려 들듯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아궁이에 남았던 지지부진한 불씨들이 대모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은 동네잔치가 되었다. 아버지랑 동네 아저씨들은 그 좋은 양식을 버릴 리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 치마폭에 숨어서 울기만 하면서도 그 날의 즐거운 양식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다. 치마에 베인 퀴퀴한 냄새도 살타는 냄새를 가려주지는 못했다. 새엄만 할머니 쪽을, 그러니까 내 쪽을 흘겼다. 아이코 저것이!


좋소, 고기를 못 먹는 사람 앞에서 할 소린 아니지만, 사람은 먹으려고 사는 것 아뇨? 살기위해 먹는다면 이렇듯 경쟁사회가 되지는 않았슴다. 내력은 좀 길지만 농경사회가 정착된 이래 인간은 양식을 비축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됬슴다. 유목민 때는 살코기를 비축해놓을 수 없으니 적당량만 사냥을 했고, 일단 사냥한 건 나누어 먹었다는 말임다. 사냥시대엔 내일을 위해 서로 사냥감들을 살려두는 것이 유리했지만, 농경시대가 되어선 다른 부족의 비축식량까지도 빼앗기 위해 전쟁이 시작된 검다. 줄여 말해도 인간은 타인들보다 더 많이 더 잘 먹겠다는 의지 때문에 피 튀기는 팔꿈치경쟁을 한다는 말임다. 그런데 누구는 라면으로 서둘러 저녁을 때우는 시간, 다른 누군가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로 나온 들큼한 와인을 마시며 대충 고기요리를 먹는다고 칩시다. 중산층은 되어있다는 만족감. 그러나 허위의식임다. 우리를 말아먹는 것이 바로 그 허위의식임다. 돈피가죽도 가죽이라고,  헝겊으로 만든 싸구려 인조스웨이드 롱부츠를 신고, 다이아처럼 빛나는 알이 박힌 귀고리나 양식진주 목걸이를 연인에게 선물하고. 마틸드 르와젤의 신세가 안 된다는 보장이 있슴까? 진짜 상류가 보면 이 가짜 중산층이나 아주 바닥치는 프롤레타리아 인생이나 별반 차이가 없슴다. 0점짜리 인생이나 10쯤으로 위장한 2, 3점짜리 인생이 90점짜리가 보기에 뭐가 다르겠소?

마틸드 르와?

모파상의 「목걸이」말임다. 남편과 자신의 십년 세월을 좀먹은 허영심. 우리는 분명 현혹되어 있슴다. 아 그 프랑스문학 얘긴 교실용임다. 자 어서들 드시죠!


그날은 그 정도로 끝났다. 그리고서 왜 그와 말을 섞게 되었을까.

우리 자랄 땐 아시다시피 과외가 법으로 금지되었었죠. 그 덕에 과외 같은 것 꿈도 못 꾼 나 같은 ‘어둠의 자식들’이 소위 일류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슴다. 그 덕에 손에 흙 안 묻히고 밥 벌고 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청소년기란 없었슴다. 오직 성공하여 부모세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선생님들 말 잘 듣고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에 간 거죠. 고3에도 조금 지루했을 뿐 흔들림도 없이, 이를테면 나 모범생은 심화반에서 돌아오는 대로 여름 겨울 없이 축축한 방 벽에 붙어 앉아 교과서와 참고서만 외웠슴다. 그 아픈 진통의 80년대를 그렇게 코앞만 보고 살았단 말임다. 이 기회균등한 사회에서 열심 하나면 뭔가 해낼 수 있다는 헛된 믿음으로. 그리고서 대학에 가서야 깨달았슴다. 말도 아니다, 말도 아니다. 불과 1, 2년 전, 바로 이 캠퍼스의 학생이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해서 죽은 날에도, Y대학 정문에서 학생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날에도 대학입시만을 위해 살아왔던 나. 이제 진짜 경쟁의 시대가 열렸을 때 나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슴다. 결과는 요 꼴임다, 울 어머닐 배신하고. 물론 처음엔 갈등했죠. 여기서 중단하면 어머닌 뭔가. 나는 홀로자식에, 어머니에게도 통틀어 하나뿐인데. 더구나 어머닌 법복을 입은 아들을 소원하셨슴다. 얼마나 많은 이 나라의 어머니들이 법복을 입은 아들을 원하는지. 어찌 보면 끔찍한 일이요. 그게 얼마나 많은 보통 사람들이 법에 억울해 법을 불신하며 살았는지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혹시…….

아니 뭐, 꼭 내 아버지의 경우라기보다는.


그는 어쩌다가 자신에 대해 조금씩 털어놓았다. 어느 해 겨울, 눈 덮인 동네가 조용해졌다 싶은 섣달에 들어서 어느 날 사라진 아버지가 설날 산마루 돌아올라 산소에 갔던 이웃들에게 발견된 일. 아버지 초상 중에 어머닌 유산까지 겹쳐 보건소에 실려 가시고, 줄초상 면한 것이 다행이라는 동정의 눈빛을 이겨내지 못한 어머니와 고향을 떴더라는 이야기 등.

함바집 귀퉁이에서 어머니와 달랑 둘이서 먹고 자며 또래 친구 하나 구경도 못하고 사는 동안, 나는 세상은 후덥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덥수룩한 사내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자랐슴다. 옮겨가도 사람들은 그저 그런 아저씨들뿐이었으니까요. 난 몸집이 작아서 취학나이가 넘어도 눈에 띄지 않았었나 봐요. 그러다 어떤 곳 사장님이 애 그리 키우면 안된다고 뭐라 그랬담다.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도 큰 죄라고. 내가 아홉 살이 되어서야 1학년이 되었으니, 못났어도 선생님 말은 좀 탔겠죠. 집엔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못 샀는지 맹모심정으로 안 샀는지, 신문도 당연히 없었죠. 나는 상식이고 뉴스고 아는 것이라곤 없이 공부에만 매달렸죠, 법으로 억울한 사람 없는 세상 만드는 데 일조할 훌륭한 판사가 되기 위해서.

그럼 왜 중간에?

다들 미친놈이라죠. 헌데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하늘을 처음 보았을 검다. 숨 쉬고 하늘을 보니 어지러웠어요. 멋모르고 학교근처 복작거리는 술집에도 따라 다녀봤죠. 학교간판으로 빛 좋은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그러다 첫 학기가 가기 전에 내 두더지 인생을 간파했죠. 이런저런 세상사 외면하고 공부에 집중하면, 육법전서를 파다보면 조만간에 사시에 합격은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엔?

다음엔?

그런 다음에 인생이 달라질 것인가? 확실한 성공을 보장받는 데는 사시합격이 전부가 아닐 것이 눈에 보였슴다. 아들 없는 법조인의 딸과, 법적인 보호가 필요한 아니면 그냥 판사 따위가 구색으로 필요한  준재벌가 딸과 그렇게 결혼하게 되겠지요. 나는 팔려가고, 어머니는 버려지는 거죠. 판사아들 두었다는 허명 하나로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보장받죠. 이름 좋은 하눌타리. 나는 계급이동이 완결된 것으로 착각하고, 새로운 계급의 취향 따라가느라 버벅거리며, 어색한 여유로움을 가장하고도 가슴 한 구석에선 어머니로 대변되는 내 진솔한 삶을 그리워하면서, 기름진 얼굴로 속은 말라갈 것이죠. 수소풍선이 터질까 수소가 빠질까 조바심하며……. 아니 난 그건 못함다. 결국 사시는 외면했지만 등록금 없이 졸업할 만큼은 공부했죠. 이어 외국장학금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하기로 했죠. 저들 세상에 턱걸이 밖에 못할 바에는 뭔가 이 부조리한 토대를 전복시킬 가치와 증거를 기대하며.

다른 가치?

그게 말하자면 덫이었슴다. 열등감을 만회하려던 또 다른 허영의 덫. 십년 세월 바치고서야 깨달은 귀한 답이지만, 답이 정말 아무 것도 들여놓지 못하더군요. 판검사는커녕 보따리장사가 된 아들인대도 우리 어머닌 박사아들 이름으로 허리를 세우신다오. 마른 등을 세워도 애들 키뿐이지만요.


몸이 아주 작고 마른, 나이 보다 늙은 여자. 그는 내가 그런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눈깔사탕 맛을 기억할 수 있어야 고깔사탕 맛을 상상하지! 그에게는 마른 등으로 살아있는 어머니가 있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 산만큼 큰 바퀴달린 괴물에 놀라 풀밭인지 보리밭인지 풀 속에 숨던 내 기억의 파편들에 섞인 한 아련한 여자. 마루 끝에서 아기를 가슴께에 안고서 불그스레한 수박 속을 연신 아기 입에 넣어주던 여자. 머리에 무언가를 얹으면 갑자기 키가 커져버린 여자. 나는 수숫대처럼 비실거리건 돼지처럼 뒤뚱거리건 엄마라고 부를 엄마가 있었음 좋겠다. 주름이 할머니보다 더 많아도 좋으니 엄마라고 부를 엄마가 있었음 좋겠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는 어머니타령을 계속했다. 이제 나는 불효자요. 학교다닐 때 효자가 졸업하고는 불효자요. 나는 울 어머니와 어머니의 소원을 버리고, 삶의 이 진부성에 넌더리를 낼만큼 정신과 관련된 인류의 궤적을 탐닉했소. 파렴치한 돈귀족이나 권력귀족이 되느니 정신의 귀족이 되는 길에 서서, 돈도 권력도 비웃을 수 있기를 탐했소. 왜 과거형으로 말하느냐고 물을 테요? 예, 그랬더랬소. 지금 난 이것이냐 저것이냐 갈림길에 섰소. 두 성공의 길이 아닌, 성공과 패배의 갈림길이오. 내게 핑계만 더 생기면 확실한 길을 택하겠소. 대학동기들 고시마치면 판검사 아님 변호사지만, 변호사나 교수하다가 정치에 들어가는 길이 즐비하죠. 의원공천 따놓은 친구가 하필 나를 필요로 한다네요. 정치권 사법권 밖에서 이미지 관리할 인사가 필요하다고. 그 친구 말로는 그건 시작일 뿐이라고. 부패와 부도덕의 누명인지 오명인지를 쓴 당의 윗선에서 나 같은 순종을 필요로 한다나. 그런데 난 전혀 순종이 아니죠. 오히려 순종 이미지를 가장한 것일……. 아무튼 “자본에도 권력에도 초연한 엘리트들”이 나서준다면 당 이미지개선에 딱이라고. 이번에만 도와주면 원하면 정치계로, 다시 돌아가려면 학계의 자리쯤은 우스운 장난이라고. 그래 이젠 보따리장사도 지쳤으니 두 손 들고 투항하는 거요. 여러 의미로 배부른 자들의 화동노릇일지라도. 호랑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미명으로. 단 한 가지 내게 핑계만 하나 더 있으면.

핑계?

난 뭔가 알리바이로서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거요. 세상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번쩍거리는 데도 눈을 치켜뜨는 법이 없는 당신. 오페라나 뮤지컬 가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것을 몰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고졸업학력을 단 한 번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진짜 순종. 이 순종을 유혹하고 싶은 내 비뚠 심보를 멈출 수가…….

비뚤어진?

나는 오염되지 않은 당신을 흔들어 보겠다 그 말이요. 내 정신으로 안 되는 것을 내 돈과 권력으로 되게 만드는 길을 가겠단 말이요. 당신인들 조건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것들을 탐하게 되지 않을까, 아니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모든 것들을 더나 탐하게 해주고 싶소. 당신이라고 그럴 권리가, 탐욕의, 흥청망청 타락할 권리가 없다는 건…….

그만 하세요. 쉬운 말로 나 호강시켜 주겠다는 핑계로 새로운 전기를 잡겠다? 유식하신 분치고는 치졸한 변명이네요. 탐욕은 어려운 말이구요, 욕심? 그래요, 전 욕심이 적죠.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그러대요. 하나 곱하기 욕심은 욕심하나, 둘 곱하기 욕심은 욕심둘…… 하지만 영 곱하기 욕심은 영이죠. 내 출발은 영이었어요. 영에는 그 무엇을 곱해도 영이더군요. 어머니 없이 시작한 인생은 영영 영이죠. 불쌍한 어머니, 불쌍한 여자, 핑계대지 마세요. 그냥 가세요. 영이 아니라, 하나에다 곱하기 이번엔 권력이든 자본이든 곱하세요. 아예 권력에다 자본을 곱해서 무슨 제곱이 나오나 보든지요. 세상에 태어나 40이 넘도록 공부만 했으니, 이제 뭘 들이려 한다고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 않을걸요. 세상은 결과주의죠. 내가 무슨 주의 운운하다니, 정말 공자 앞 문자쓰기네요. 빈정대려는 것 아니구요, 정말 결과주의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결과를 위해 애쓰지만 잘 안될 뿐이죠. 나의 불발은 순종이어서가 아니라 조건 탓이죠. 나도 보험회사라는 자본의 흐름 가운데서 십수년을 살았어요, 그러니 내가 보험을 더는 들지 않죠. 적금이나 저금을 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는 거예요. 난 오히려 돈이 없이 돈을 너무 많이 보아서 불행타 못해 비참해요. 물론 영에서 시작한 인생이 이만하면 되었죠, 우리 할머니 눈감고 돌아가실 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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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기껏 지방도시의 ‘내’ 49㎡ 아파트에 입주하는 날 할머니는 두선두선 알 수 없이 감사합니다를 되뇌셨다. 참 용타, 아가, 저 우게 느 엄니도 인자 참말로 눈 감겄다. 그리고는 한참 후 덧붙이셨다. 방도 두 개나 되구만, 근디 느 짝은 대체 어디 있다냐.


내 짝은요, 할머니. 나는 속으로 되뇐다. 어머니 가난에 절은 내게 아버지 가난으로 시린 그가 어울렸을 까요? 그는 머리가 구름까지 닿은 괴물이 되어버렸네요. 공부가 뭐랍니까? 머리만 괴물로 변한 그. 내가 그를 원한다면 난 그를 통째로 원하죠, 그런데 그의 머리는 계속 뭉게구름 속으로 흩어져 가네요. 허위의식?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죠. 그가 나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는 내가 “꾸밈없다고”, 더도 덜도 맞춰서 말할 필요 없는 때문에 내게 온대죠. 난 꾸밈없는 게 아니라 꿈이 없죠. 꿈을 꾼다는 것이 내겐 항상 사치였으니까요. 꿈은 한 치라도 내일을 보는 사람의 특권, 그렇죠? 난 오늘이 힘든걸요. 그저 못 올라갈 나문 쳐다보지도 말라던 할머니 말을 새기며 사는 것뿐. 아프기 싫어서 욕심을 못 내죠. 가슴 한 구석은 내내 아리죠. 그는 나를 아마 학문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특이한 종류라고 생각하나 봐요. 꿈이 없는 양 꾸민 날 그가 몰라요.


고향에 있는 할머닌 대답이 없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났다. 오늘 봄날이 저문다.


할머니, 것도 다 변명이죠. 사실은 난 온전한 어머니가 못 될 것이 두렵답니다.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하는 어머니. 무서워요.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엉뚱한 소원이나 하나 말하죠. 난 그 ‘우편물 넣지 마세요. 새가 살고 있어요.’라는 쪽지가 붙은, 토기로 구운 편지함이 있는 그 집엘 가보고 싶답니다. 난데없이. 편지들은 담장의 나뭇가지 아래 흩어져있을까요? 까치밥 넉넉히 달린 아름드리 감나무엔 그림 같은 그물침대가 매어 있겠지요? 요람 속의 아기는 졸려도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제 어머닐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겠지요? 꼭 붙들어, 아가! 어머니도 순간 바람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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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06. 10. 1. 23:30


오늘
이별하다



제법 따스한 기운이 스미는 시간, 낮이 겨워서야 깨어난 그녀는 우선 창가로 간다. 고목이 된 호야 줄기는 마른 등나무같이 완강했다. 창 아래 여린 연둣빛 봄이 지나도록 그는 새 순을 거부했다. 좁은 창으로 빨아먹는 햇볕에도 초록 잎을 나름대로 번득이던 지난 여름의 기세와는 사뭇 달랐다. 잎사귀 형상만을 간직한 채 드문드문 매달린 그것들은 플라스틱 모조 잎에 다름없었다. 아예 톡 부러지지 않을 만큼의 물기가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겨울을 버티어낸 것만으로 고맙기도 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식물 따위에 뭔가 주술을 걸어둔 자신이 야속했다. ‘해마다 꽃을 피워다오, 그러면 어쩜…….’ 막연한 기대요, 맹세였다. 혼자서 새 삶을 살기 시작할 때, 강아지도 금붕어도 없는 집에서, 그녀 말고 생명을 가진 것이라곤 이 작은 화분뿐이었다. 꽃은 없어도 맹목적으로 뻗어 나가는 줄기가 막연한 희망에 이르게 할 것처럼, 마치 누군가와의 수 미터 수백 미터의 거리를 단축해 줄 수 있을 것인 양 기분 좋은 식물. 그것이 그 초여름에 형언할 수 없는 귀한 꽃을 피워냈었다. 호야꽃이 피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건 그저 덩굴식물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렇듯 화분에 갇혀 아무렇게나 자라는 식물에도 환상이 숨어 있었다니! 누군가를 집에 불러서 증인을 세워야 했을 일이다. 그 첫 해에, 그때는 도무지 안팎으로 흥분상태에서 꽃들이 지는 줄도 몰랐다. 간신히 매달린 잔 꽃대들 몇 개를 두고서 괜히 주술을 걸었을 뿐이다. ‘해마다 꽃을 피워다오, 그러면 어쩜…….’

천천히 씻고 아무 거나 요기를 한다. 그래도 시간은 남는다. 말을 나누지 않고 움직이다보면 시간이 참 많이 남는다. 문화센터에 가는 요일도 아니다. 그녀에게 일이 시작되는 저녁까지는 길다. 정사각형 작은 식탁 겸 책상에 앉아서 초소형 노트북을 펼친다. 그녀의 재산목록에 드는 품목이자 친구다. 여러 가지 물음에 꽤 친절한 응답을 해주는, 이만한 상대가 또 없다.

“호야. 용담목 박주가리과 호야속 식물. 덩굴성이며 늘푸른 여러해살이 풀. 줄기는 갈색이고, 잎은 마주나고,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다육질이며 광택이 있다. 꽃은 5월에 잎겨드랑이에서 짧은 꽃자루가 나와 산형꽃차례를 이루고 반구상으로 달리며, 향기가 있다.”

‘것 봐, 꽃이 피잖아.’

“꽃잎은 흰색으로 별 모양이고, 중심부는 담홍색이며 광택이 있으므로 아름답다.”

‘아닌데, 연한 분홍색이었는데.’

상관할 바는 아니다. 백과사전을 어쩌지는 못한다. ‘책에 써 있다’ 하면 모든 근거가 되는 법인데, 하물며 백과사전의 글인데. 보통은 흰색 꽃이겠지만, 그녀의 호야는 연하디 연한 분홍빛일 수도 있다. 그렇게 큰 꽃대 끝에 잔 꽃대들이 살만 남은 우산대 모양으로 뻗어 내리고, 그 끝마다 별 사탕보다 작은 꽃들이 하나씩 붙어 피어나서 스물 서른씩이 어울려 한 송이를 이루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것을 산형(繖形)이라 하는 것도 처음 듣는 소리다.

오늘의 걱정은 꽃이 아니다. 그 늘푸른 여러해살이 풀이라는 게 아예 새 잎 하나가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식물이 땅속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소생하는 것을 그는 신비한 ‘오시리스의 신화’로 이야기 해 주었다. 식물의 동면은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가 죽은 오빠이자 남편을 찾아 지하로 내려가는 기간으로 설명된다고. 난생 처음 듣는 먼데 신화 이야기에 감동한 그녀가 그만 호야꽃이 피는 것에 그 마음의 부활을 걸었나 보다.


*


“어쩌다 끝나는 거야, 언제 어쩌다가, 왜?”

불안에 들뜬 영혼들은 의심에 들려 허우적거린다. 내 가게에서 보게 되는 그녀들은 대개가 그런 의심에 들린 때쯤이다. 사람 사이를 의심하고 괴로워하기 시작할 때다. 언젠가 한두 번 그녀들은 내 가게에 남자와 함께 들렀을 것이다. 남녀가 그렇고 그렇게 다닐 때에는 내가 특별히 주시하지 않는다. 흔한 것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사랑한다고 느끼며 팔짱을 끼고 혹은 팔짱을 끼지 않고 다니는 남녀이니까.

나는 그러니까 흔한 말로 카페 마담이다. 내 경험으로 보아, 언제부턴가 차를 놓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는 흔치 않다. 대개가 옆자리를 선호한다. 그러다보니 가운데 오뚝한 테이블과 의자들은 멀쩡한데, 가장가리 쪽 소파들만 더러워지고 꺼지기 시작했다. 때 국물이 찌든 소파를 당목으로 대충 씌워놓아 허옇게 볼품 사나워도, 역시 그쪽이 인기였다. 등 뒤로 걸린 싸구려 액자 속의 그림들도 그들에겐 별반 트집잡히지 않았다. 연필로 확대해서 그린 얼굴 부분이나 아무렇게나 드로잉된 나체들의 곡선은 오히려 가끔 칭찬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것이 실제로 미대에 입학도 해보지 못한 내 솜씨라는 것을 안다면 어떨지? 그걸 밝힐 이유도 틈도 없이 날은 오고 날은 갔다. 대관절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 사람들은 관대하다. 마담이 평범할수록 드나드는 여자들이 좋아한다. 장사는 그런 틈에서 되어 간다. 물장사라니, 반찬 가짓수가 많은 밥장사보단 일단 편하다. 아니 나는 반찬냄새를 많이 싫어한다.

돈을 벌면서 내가 굳이 독한 취미를 가져서 그들의 속내나 들여다보려는 건 아니다. 그냥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들이 처음엔 맥주 한 병 쯤으로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시들해 한다. 짐짓 염려스런 표정의 친구는 기실은 반질반질한 눈빛으로 마주하고 있지만, 고통의 주인공이 이런 저런 것을 개의치 않고 있으면, 그때 난 알아차린다, 벌써 심각한 상태로구나. 앞에 앉아 귀 기울이는 친구나 건성으로 보이는 마담에게서, 그러니까 상대의 본성에서 비뚤한 기쁨을 읽어낼 여력이 없는 것이 그 시기의 특징이다. 아니 그들의 특징이다. 멍청한 것들!

“사랑? 그런 것에 들리거나 환상을 갖는 사람들은 열등하다.”

한번은 한 남자가 그런 섬뜩한 발언을 해댔다. 비슷한 또래 어중간한 남자들 셋에 여자가 하나 섞인 그런 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추가 카프리를 들고 가던 참이었다.

“핑카라는 언어학자 말이, 우리의 심리적 모듈은 차에 치여 네 다리를 쑥 뻗고 나자빠져 있는 죽은 동물의 부어오르고 갈라진 뇌의 틈새보다 더 뒤죽박죽이라오.”

핑크, 또는 핑커 그 비슷한 이름이었지만 그건 대수가 아니다. 내가 들은 건, “나자빠져” 어쩌고 할 때부터야 분명했다. 어려운 단어 “모듈”도 나중에 채워 넣어 알게 된 단어다.

“그게 마인드라는 것인데, 왜 사내들은 서로 결투에 도전하는가, 왜 사내들은 전처를 살해하는가, 다 그 탓이라오.”

아니 이 남자가 웬 말을? 전처를 살해한 과거를 가졌을 리 없는, 아니 전처라는 단어를 모를 법한 이 남자가. 처와 마찰 중?

그러면서도 나는 실은 그 이상한 논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인드’는 뭔가 어렵고 애매했지만, 일단 전체적으로 은근히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나는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해볼 계획도 없기 때문이었다. 부서진 한 몸 멀쩡한 듯 살아가기도 힘들다. 사랑 같은 것은 시간 남고 배부른 사람들이 찾는 진한 양념이다. 밥냄새도 반찬냄새도 싫은 내게 자극적 양념은 더더욱 필요 없다.

나는 근처에서 얼쩡거리려고 옆 테이블의 냅킨그릇을 들었다 옮겼다 했다. 말하던 사람은 하이네켄을 마시고 있었다. 처음 그 상표를 들었을 때, 혹시 하이네 이름을 따서 지은 캔 맥주인가 생각했던 어리석은 기억이 늘 따라다녔다. <로렐라이> 같이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를 지었다는 하이네. 누군가 하이네켄을 찾으면 그 사람도 혹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 궁금해지곤 했다. 게다가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난 자꾸 이 유식한 남자에게로 신경이 쏠렸다. 아니다, 꼭 그건 아니다.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유식하기로 치면 너나 할 것 없으니까.

차츰 알게 된 것으로, 그 말을 내뱉은 사람도 언어학자라 했다. 언어학자라면 국문과 교수와 다른지, 국문과 교수는 소설가와 다른지, 어느 것도 잘 모르던 나에게는 그것이 그것이었다. 온통 유식한 사람들. 그들의 낮 세계와 동떨어진 나는 그들의 밤의 틈새를 훔치는 것으로 만족한다. 어쨌거나 인형가게에 들르는 호들갑스런 대학생들 보기보단 낫고, 왠지 영화나 브라운관이 내게 가까이 와 있는 듯한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후후, 낄낄거리는 소리에 저 쪽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근처에서 몇이 내는 소리였다. 비껴 옆의 여자를 흘끔거리는가 싶다. 여럿의 눈길이 머무는 쪽은 여기선 꽤 단골에 속한다. 동그란 얼굴에 단발머리를 고집하고 앞머리까지 동강 잘라서 내린 여자로, 사랑병에선 꽤 중증이다.

여자는 홀에 들어서면 곧 왼쪽으로 굽으면서 제 자리를 훔친다. 실은 ‘거기’로 출입하는 길목이라서 별 인기 없이 늘 비어있는 자리인데도. 여자는 앉으면 의자 등부터 쓰다듬는다. 등의자를 통째로 씌운 희멀건 당목은 몇 번이고 세탁한 나머지 제 남자의 체취는 온데간데없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행여 뭔가 호주머니의 먼지 부스러기라도 떨쳐놓고 갔다 해도, 내가 아직 세탁을 안했다 해도, 의자를 스쳐간 숱한 여자들의 머리카락도 함께 묻어있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슬며시 웃어주면, 여자는 자신을 알아주어 고맙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아니면 알아보는 것이 무색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리곤 곧 멍하니 고개를 떨군다.

여자가 주문하는 것은 남자랑 마시던 버드와이저에서 이런 저런 칵테일로, 다시 데낄라로 바뀐 지 오래다. 앞자리에 앉아 고민을 들어 줄 친구도 있다 없다 한다. 친구의 수는 술잔과 반비례한다. 마스카라가 번진 한 쪽 눈두덩이 때문에 저쪽 테이블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나 보다. 여자는 아랑곳없다. 손등의 소금을 핥다가 뭉개진 검붉은 입술이 영 서글픈 정취를 발산한다.

“자 얼른 일어서지! 오늘은 더는 안 되겠어요. 알바들도 다 퇴근해야 하고, 이제 곧 셔터맨이 올 시간이야. 내 남자는 여자 이런 꼴 못 보는 신사거든요. 업어다주려다가 동티나게? 장군아, 아니 멍군 네가 이 손님 좀…….”

그녀들이 뜸한 날엔 장군과 멍군이 심심해한다. 알바 아이들이다. 하나는 장 뭐라는 아이가 맞다. 나중에 온 녀석이 내가 선임더러 “장군아” 부르는 소릴 듣더니 저는 멍군으로 부르라 해서 그냥 그리 되었다. 이곳에선 호적상의 이름 같은 건 아무도 관심 없다. 이런 곳 이런 시간에는 얄팍한 거짓이 일상이다. “내 남자는 신사”라고, 후후? 혼자 사는 여자 행색이 이런 곳 이런 시간에 어울리지 않아서 멋대로 창조된 남자일 뿐이다.


나는 카페에 오는 멍청한 남녀들의 어리석음을 적당히 비웃는다. 그리고는 새벽이 오는 시간 책상에 앉은 나는 내 비밀을 푼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숲에 나가 소리칠 데가 없는 세상에 살자면, 그런 세상을 미치지 않고 살자면, 이런 컴퓨터란 이름의 대숲 창고가 참으로 다행이다. 암호만 걸어두면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내 글〉. 그것은 내 고백성사요 어쩌면 종부성사가 될 것이다. 누구라도 열지 못하는. 물론 해커인지 뭔지 엄청 대단한 기술을 가진 아이들은 누구의 어떤 파일도 다 연다지만,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인재들을 동원해서 시답잖은 나의 〈내 글〉을 열어볼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러니 안심이다.

나는 쓰기 시작한다,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 사는 것은 자유 그 자체다.’

‘거짓말, 그건 외로움이야.’

내가 한 마디 적을 때마다 허수가 토를 단다. 나는 정해수라는 제대로 된 이름이 있었지만, “해수애비”로 통하는 아버지 때문에 늘 ‘허수아비’라 놀림 받았다. 어렸을 때 나는 내 이름이 정말 허수인가 할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왜 ‘정 선생’도 ‘정 씨’도 못되고, 늘 그렇게만 불렸을까? “해준에미야” ― 할머니가 그렇게 부르는 엄마는 다른 아이들인 해정이 해은의 어머니였다.


나는 그냥 내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허수도 조용하다.

내 처음 직업은 경리였다. 경리직원 정양이 사장님과 사모님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피스텔은 실제로 그들의 체모로는 슬그머니라도 나타날 수 없는 곳이었다. 빌라 아니면 대형 아파트 단지 또는 호화로운 호텔의 로비가 그들의 세계였으니까. 돈이 적은 대로 단독 2층을 세 들어 살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살림으로 정착하지 못하는 내 생활 또한 오피스텔의 생리에 맞았다. 어딘가에서 김치찌개나 감자 넣고 비릿한 생선 끓이는 냄새가 넘어 들어오지 않을 잠자리 ― 그건 건 바로 이런 종류였다.

내 자신의 몰골을 이곳에 맞추려고 무진 애를 쓴다. 어디에 살건, 누군가가 삽을 들고 나와서 퍼 내 버리고 싶은 개똥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물론 처음 바로 술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빵집을 내서 빵을 가져다 판다거나, 액세서리 집을 내어볼까 궁리에 궁리를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던 경리직원 생활을 접은 순간, 제발 아침엔 늦잠을 자고도 살 수 있기를 희망했었다. 어린 시절 이래 늦잠 한번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서 어머니, 그러니까 해준엄마를 거들어야 했던 건 순전히 할머니 때문이었다. 그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할머니가 참 고마웠다 싶었지. 붓기를 잘하는 해준엄만 조그만 내게 많은 것을 의지했고, 그래서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 거야. 쓸모 있는 딸을 미워할 계모는 없어, 아주 심성이 비뚤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은 제 할 탓이다.”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아무데서고 조금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그랬다 난. 그렇지만 일찍 철들어 살림을 도맡았던 어린 시절은 내게 찌든 찬장냄새도 심지어 밥이 익어가는 냄새도 다 싫어하는 괴벽만을 남겼다. 난 정말 음식냄새가 싫다. 사람이 음식냄새를 싫어하면 뭔가, 반은 죽은 목숨이다.


야간 상고에 진학한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새벽부터 집안일과 아이들 챙기는 일 끝나고 나면 다시 집안일. 새엄마는 부성한 발등을 하고 겨우 앞마당 뒷마당으로 뒤뚱거리기 일쑤였고, 한낮이 겨워야 숨을 돌리고 마주 앉은 밥상에서 내겐 항상 미안한 마음을 내비치곤 했다.

“학교엘 못 가 어쩐데냐, 야간이라면 또 모른데, 하긴 야간은 또 집이 멀어 통금되게 생겼고…….”

“늦는 건 안 무서운데,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렇게 해서 일년 늦게 야간 공부가 가능했다. 천장이 높고 썰렁한 교실은 참 고상했다. 우선 퀴퀴한 음식냄새와 멀었다. 누군가의 피아노 연습 소리도 서툰 대로 고상했다.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 짓고……. 그러다가 어두워진 저녁 시간 교실만 밝은데, 노래공부는 교실을 천상으로 바꾸었다. 영어를 읽어도 잘은 모르지만 무슨 신기한 노래 같았다. 그 대신 답이 확실한 산수와 수학시간이 즐거웠던 나는 정작 상고 시절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의무가 되고 수단이 되려니까 그랬을지.


그나마 제대로 졸업을 했더라면 이보다는 나은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새엄마는 내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새엄마가 인생에 썩 도움이 된다는 이야긴 들어 본적이 없으니 크게 억울할 거야 없다. 어쩌면 새엄마가 병만 처지지 않았어도……. 새엄마는 그 살림으로는 죽느니 비슷한 병을 앓았다. 살아서 피를 걸러내야 하는, 일주일분 온 식구의 생활비를 혼자서 다 써야 하는 병을.

남은 한 학기를 못 마치고 학교를 접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담임선생님이 알선해준 경리 자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듬해에 복학해서 남은 한 학기를 졸업하게 해주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졸업을 하고도 직장을 옮기는 배은망덕한 꿈은 감히 꾸지 않았다. 웬걸, 대학에는 내가 책임지고 보내주마 하던 사장님.

사장님은 친절했고 그리고 도둑이었다. 어려서 죽은 딸만 같다고, 공부하라고 마련해준 뒷방은 분에 넘치게 감사했지만, 수능시험 준비를 할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밤낮없이 일감을 들고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난 어느새 나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몸도 마음도 나쁜. 머리는 썩지 않았다. 사모님과 결산을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믿었다.

“절대로 나타나지 않겠어요, 마침 결혼하자는 남자친구가 있으니.”

거짓말은 서로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전 그냥 아무 내색 없이 시집가겠어요, 사모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나름대로 목돈을 가지고 궁리를 하면서 준비한 것은 봉제 인형들을 들여다 파는 작은 선물의 집이었다. 대학을 그렸던 마음이 대학동네를 흘끔거리게 했다. 그러나 대학가 길목은 너무 비쌌고, 한두 블록 떨어진 미용실과 PC방 사이, 딱 한 팔 너비의 가게는 장소를 잘못 고른 셈이었다. 미용실에서 내다 널어놓는 수건 빨래걸이와 PC방 앞의 두들겨 패는 놀이판들 사이에서, 내 흰곰들은 누렇게 변해갔다. 너무 심심하면 나는 그놈들을 스케치했다. 그도 심심하면 바깥에 스쳐가는 사람들을 그리곤 했다. 가끔 점심 먹으러 가는 떡볶이 아줌마는 차라리 소주방을 하라 했고, 미용실 아가씨들은 빠를 하라고 했다. 떡볶이 아줌마는 다시 새벽 해장국집을 권했다. 모두가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하는 세상이랬다.

“대학가에서 곰인형이 뭐야. 그런 건 요샌 초등 애들도 별로야.”

“생긴 것과는 참 다르네여…….”

이건 미용실 아가씨 말이었다.

“내 생긴 게 왜 어때서여?”

말꼬리를 흉내 내자 모두들 피식 웃었다.

“머리를 더 길러서 확 층을 내고, 앞과 옆은 과감히 흩트려서 볼륨을 넣고 좀 섹시하게 연출한다면!”

“한다면?”

“한다면, 영락없는 카페 마담 스타일이지여.” 젊은 것 같지만 나이 들어 보이는, 그런 분위기가 여러 층의 사람들을 사로잡는다고! 미용실 아가씨는 모처럼 전공을 살리게 되어서인지 말에 기운을 얻었다.


그들은 내가 인형들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리 없었다. 아버지 없는 아일 상상하기 무서워서,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내 스스로가 무서워서 미리 포기해버린 내 미래의 아기. 난 인형들에서 사라져간 아기의 영혼의 파편들을 만난다. 동그란 눈도, 찌그러진 눈도 가능했을 내 아기. 눈웃음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갈색 곰, 놀란 토끼 눈처럼 만들어진 아기 곰. 앞치마까지 차려 입은 엄마 곰. 곰 가족, 내 인생에는 있을 수 없을 가족, 엄마와 아빠와 아기.

할머니는 처음 집을 떠나 도시로 나가는 내게 당부하셨다.

“여자는 버스를 타거나 어쩌거나 항상 양 무릎을 떼어선 안 되느니.”

그 “어쩌거나”가 무슨 의미였는지는 이미 무릎이 젖혀진 뒤에서야 깨달았다. 강요가 있었지만 뭔가 자포자기적인 충동과 얼버무려진 혼돈. 누구든 치를 것에 대한 겁 없는 대처이기도 했다. 대학의 꿈을 접지 못한, 겨우 스물한 살 때였다. 가벼운 행동의 결과는 증폭되어 나타났다. 규칙적인 피흘림을 단 한 달 걸렀을 때, 난 미련 없이 아기의 가능성을 차단하기로 결심했다. 평상시 뭉클하게 쏟아지던 행사 정도에 그칠 그냥 피의 덩어리일 뿐일 그것을. 어디에서도 제대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 그것을.

“내참, 의사 생활 몇 년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긴가민가 하는 상태에서 떼 달라 조르는 아가씨도 다 있구먼. 새파란 나이에 뭐야.”

“병적인 순결집착증 아닐까요, 원장선생님?”

“쉿, 들릴 지도 몰라. 대충 마취한 거잖아, 별 꺼낼 것이 있기나 한지 원.”

‘미친 것들! 순결집착증이 있는 여자가 이 모양 이 꼴로 여기 누워 있겠냐! 미친 것!’ 그렇게 속으로 속으로 이를 악물고 외쳤다. 치욕은 자진해서 다리를 벌린 그곳에서 더욱 심했다. 월급을 주는 남자와 월급을 받는 여자 사이를 통째로 의심하던 나에게 그들 또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미친 것!’ ― 이 말은 내 입버릇이 되고 말았다. 저기 저렇게 술병을 앞에 두고 너덜거리는 군상들을 보면, 아무에게나 그렇게 내뱉었다, 미친 것!


오늘도 그녀다. 반듯한 외모에 강사씩이나 된다는데, 여기 와서 만날 넋두리다. 대학에서 선생을 하는 여자라니, 내 처지로 보면 하늘이다. 그런데 밤에 보면 별 것도 아니다.

“같이 보따리장사 시절 동병상련 가까워 졌었지…….”

보따리장사란 여기 오는 사람들 용어로 시간강사다. 남자가 신임교수가 되자마자 여자가 채였단다. 어지간히 뻔한 일이다. 박식한 박사들이 널린 세상에서 결정적인 것은 ‘전임’이라고들 했다. 첨엔 나도, 시간강사는 하루 한두 시간만 하고 전임강사는 온종일 하는 강사인줄 알았었다. 대학가 근처에선 배워지는 것도 많다. 또 강사와 교수가 무엇이 다른지, 다같이 대학교의 선생님들 아닌가. 한번은 두 비슷한 남자 둘이 앉아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교수님”이라 호칭하고, 다른 한쪽은 상대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해서 의아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 쪽은 시간강사이고 교수님 쪽은 전임강사란다. ‘선생님’이 가장 높여 부르는 것인 줄 알았던 나는 매번 놀랬다. 어느 고장에선 ‘전(前)대통령’보다 ‘선생님’이라고 해야 존경심을 나타내는 줄 알기도 하는데.

아무튼 “결정적인 순간에 이 남자가 좋은 혼처에 안착해버렸다”는 것이다. 남자는 결혼 후로도 “마음만은…… 이런 대화를 나눌 상대는 오직……” 하면서 여자에게 기댔더란다. 습관에서 탈피하지 못하듯이 꼭 그렇게 그녀는 그의 곁에 남았고. 그가 원하면 달려갔고. 완벽하지 못한 그의 결혼에 마지막 화룡점정이 되어도 좋다고 느껴질 만큼 그는 그녀를 간절하게 원했었다고. 그러더니 코가 비뚤게 술을 마신 어느 날 느닷없이 그러더란다, 날 좀 놔주지 왜 이러느냐고, 알고 보니 여잔 다 같은 수준이더라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 자식, 논리가 대단했어. 그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그를 원한다, 유부남을.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자신을 나에게 내어주느라 죽을 지경이다. 반대로,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하지 않겠는가.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원이니 내가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것도 술 핑계로 그런 논전을 걸어왔다니까.”

‘그래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겠구나, 너, 미친 것아!’

밖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소리가 나온다.

“어마 그럴 리가……. 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어쩜 예민한 아내 쪽에서…….”

나는 마음에 없는 말로 사회적 웃음기를 흘린다.

“야아 그놈의 말장사, 보따리장사. 누가 그 말장사를 따라가겠어. 나요? 나도 강사 아니냐구요? 그래요, 저나 나나 같이 보따리장사였죠. 하지만 난 화학이요. 우린 말장사라기보다는…….”

알만 하다. 마담 퀴리가 되려는 듯이 화학과에 진학하는 여학생들. 공부는 잘 해도 인간미 없을 확률이 높은 똑똑한 부류. 보아하니 땅딸보도 아니고. 공부도 잘하고 예뻐서 같은 반 친구들 꽤나 마음 다치게 했었겠다!

그런 여자들은 죄 없이도 좀 당해도 싸다. 왜, 공부도 잘하고 예쁜 부잣집 딸이면 더욱 뒤틀린다. 그 중 하나도 갖지 못한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들을 그들은 모른다. 중학교 졸업 후 희망이 끊어진. 갈아입을 여러 벌을 다 포기하고서도 제대로 된 옷 한 벌을 만져보지도 못하는 열여섯 살 여자애를. 함부로 청바지를 입고 싶지 않고,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서 무통 다리에 스커트를 입고 싶어 하는 스무 살짜리를. 애매한 미소 속에 술을 팔아 살아가느라 겉 나이 먹어가는 여자를. 서른도 전에 마음 닫아 건 여자를.

어쩌나, 난 그 병을 지금도 못 버렸다. 대학가 가까이 집을 구하고, 요조숙녀에 가까운 대학원생쯤으로 보이기 위해서 살짝 긴 컷을 고수하는 것 하며, 향수도 레이스 치장도 피하고, 가능하면 직선 라인을 선호하여 몸매의 곡선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며……. 올빼미족을 상대로 술을 팔아서 먹고사는 여자가 사무실 분위기의 오피스텔에는 어떻게 맞추느냐고? 그건 간단했다. 오후 출근길에 노출 없는 깔끔한 옷과 맨얼굴이면 통과였다. 밤늦은 시간에는 보는 사람들이 적다. 또 술을 팔되 술은 아예 하지 않는 원칙이다. 바보들이 사랑에 빠지듯이, 바보들이 술을 마시니까. 난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


‘저 바보는 또 왜 이리로 오는 것일까?’

이번엔 굵은 웨이브의 긴 머리. 어디선가 술에 젖어 온 그녀는 들어오면서 바로 주인인 내가 왜 그를,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따졌다.

“이 그림 아래, 여기서 그가 나를 무릎에 뉘인 적도 있었는데.”

그때 실은 많이 취해서는 아니고, 그들은 술은 많이 하지 않고 토론을 즐겼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그녀가 말끝마다 내뱉는 유럽 사람들 마냥, 그 둘은 한 잔 놓고 앉아서 오래 떠드는 부류였다고 기억된다. 그녀의 남자 또한 기억한다. 왜, 무처럼 희멀건 얼굴에 안경테는 검은, 상투적 샌님. 다만 잘 코디도 안 된 채 입는 캐주얼한 복장이 얼핏 자유의 냄새를 풍겼을 뿐이다. 그 정도 자유의 냄새를 풍기는 인물은 실로 널려 있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그녀가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멍청한 것!


나는 멍청한 남녀들의 어리석음을 한껏 비웃어준다. 지열이 가시면서 새벽이 오는 시간 책상에 앉은 나는 내 비밀을 푼다.

비밀? 비밀이라 할 밖에 없는 것은, 세상에서 알 리 없고, 그 사람마저 알 수 없는 내 감정의 소용돌이다. 일층 편의점에서 햇반을 집어 들다가 만난 사람을 스물 네 시간 안에 다시 마주치면 누구라도 일순간 가슴이 움직인다. 역시 일층 문방구 계산대에서 부딪친 그의 바구니에는 말갛게 비치는 홀더 뭉치와 작은 집게 한 통, 그리고 연둣빛 형광펜 옆에는 놀랍게도 연필과 지우개가 들어 있었다. 연필? 요새도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딱풀과 크레용 그리고 작은 가위. 그 사람 역시 나를 따라서 내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어쩌나, 나를 초등학교 학부형쯤으로 보았으면 어쩌나? 내 가능한 아기가 만일 태어났다면 초등학생쯤일까?’

무슨 대수였을까? 어떤 남자가 연필로 연애편지를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곤 하거나 말거나. 처음으로 마주친 그가 그 가벼운 차림의 몰골로 미루어 같은 오피스텔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피스텔의 생리가 무엇인가? 옆방에서 통절한 싸움이 나도 모르도록 되어있는 구조를 즐기려는 것 아니었나? 홀더와 작은 집게들, 그리고 연필과 지우개를 사서 햇반을 먹으며 일하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나 또한 딱풀을 사서 얇은 화장지로 부챗살을 덧바르고, 종이가 완전히 마르면 파스텔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 넣을 참이었지만, 낡은 부채를 버리지 않고 붙이려는 나를 누가 관여한단 말인가. ‘어머나, 대단하다, 말끔히 새것이 되었네!’ 혹은, ‘처음보다 더 예쁜데!’ 하고 감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괜한 짓 하고 있구나, 거 뭐한다고 헌 부채를 가지고 몸살이냐!’ 그렇게 핀잔할 사람마저도 없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대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혼자다. 혼자라서 이곳에 산다. 이렇게 좁은 공간을 선택한 것이 돈이 적은 이유에 겹쳐서, 마치 사람들이 싫어서 반드시 혼자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시위하려는 몸짓들 같다.


난 정말이지 다시 집으로 갈 순 없었다. 떠나올 때와 너무 달라진 나 자신 때문이기도 했고, 생모도 생부도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집이 집은 아닌 것 같았다. 독립을 위해서 야멸차게 받아낸 큰 돈도 있었다. 물론 내 경우로 큰 돈. 그 돈으로 수고로운 몸을 뉘일 작은 집과 밥을 벌어먹을 가게를 꾸린다.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내가 이쯤이면 스스로 대견하다. 그 나름대로 대도시, 이런 곳에서 누군가에게 생활을 의탁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난 혼자서 잘 산다. 무엇을 특별히 기대하지 않으며, 그래서 무엇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야간에서 만난 친구들이 보통 그랬다. 기쁨과 슬픔의 표현이란 인문계 고교로 진학한 순진한 아이들, 있는 집 아이들의 것이었다. 우리에겐 미래의 꿈은 먼 것이었다. 우리에겐 우선 현실이 존재할 뿐이었다. 나 또한 지독한 현실에 내팽겨졌다가, 겨우 이리로 숨어들었다. 상의할 형제도 없이, 친구도 없이, 난 한 격랑을 탈출했다. 내가 만일 이제와 그들을 찾는다면, 만일 그런다면, 그들 중 누구라도 내 이상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나를 반길 것이다. 더한 불행들이 부도덕한 소문쯤을 가볍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은 내 불행에도 호들갑을 떨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정말 힘들어지면 누군가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나만큼 외롭고 무미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다들 성공(?)해서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 또한 가슴 아플까?

나에게 더 아플 가슴은 없다. 처음부터 잘 발달되지 못한 내 정서다. 애정 없이, 아니 증오심과 함께, 상당기간 몸을 버렸고, 내 몸은 굳었다. 피기 시작하지도 않고 시드는 꽃.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감동적인 안치환의 목소리로 들은 노래가 가슴을 저몄다. 고향의 옛 시인이 쓴 가사라 해서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내 고향엔 내 이른 죽음을 서러워할 사람도 없다.

꽃봉오리들이 다 피는가? 다 못 필 수도 있기 때문에 피어난 꽃들을 아름답다고 할 게다. 연거푸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갓난애조차 업은 채 강에 뛰어들었다는 내 어머니. 누가 크게 구박도 안했는데 무엇이 혼자 서러워서였는지, 스물두 해도 넘기지 못한 여자. 그 주검이 달구지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그 자리에 시집온 새엄마. 반은 넋 나간 남편과 아이들과 병마와 얽혀 들어간 여자. 누구도 피어본 적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할밖에.

내 생채기? 회오리바람은 도처에 있는 법이다. 그만하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산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잘 안배하며 산다. 내 어머니처럼 돌아버리지 않게, 새엄마처럼 병들어 처지지 않게. 그냥 할 수 있는 일로 밥을 벌고…….


그러다 그 스물네 시간 안에 누군가를 세 번째 조우하기에 이르면, 누구라도 뭔가 운명적이라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내가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천천히 문 쪽을 향할 때, 서둘러 계단에서 올라온 걸음걸이가 나를 지나쳐 내 방문을 잽싸게 열고 들어갔고, 그것이 그였다. 곁을 밀치듯이 지나친 뒤에도 나를 별 의식하지 않던 그가 방문을 닫기 전엔 살짝 돌아다보았다. 내가 어처구니없어 하며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나 보다. 그래도 조금 고개를 까닥하고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그 순간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속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은. 누가 내 면전에서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닫아거는가? 한두 발 더 걸어가서 확인한 방문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아직 4층이었다. 5층에서 내린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무 일도 아닌 우연한 실수에 멍해진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기가 멋쩍어 계단으로 5층을 향했다.

‘아차, 그러니까 4층에 사는 남자였구나! 내가 잘못 내린 거네 뭐!’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를 스물네 시간 안에 세 번씩 만나려고? 그런데 어디서 보았더라? 홀더와 작은 집게들, 그리고 연필과 지우개를 사서 햇반을 먹으며, 나와 천장두께만큼 떨어져서 일하고 있을 이 사람을?

그것은 경이이자 슬픔이었다. 인생의 시작부터 망가진 채, 이제는 사람 사이를 초월해서 살리라, 그렇게 마음 단단히 먹고 살기 시작한 그때, 하필 그때 그 무심한 맑은 시선과 마주친 것은.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깨끗한 눈빛. 그것이 다른 사람의 원과 소망을 자아낼 수 있음을 그땐 사실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무려나 일상은 계속되었다. 다시 하이네켄을 찾는 언어학자가 나타나는 일도 일상에 속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바로 그였다. 언어학자라던 그 남자, 그 남자가 그였다. 그 남자의 일행은 갑자기 자주 들렀고, 온갖 외국어에서 비슷한 공통점인가를 찾아 연구하는 팀이라 알려졌다.

‘혹시 하이네도 강의하시나요?’

하이네켄을 계속 들고 가면서 묻고 싶은 말이었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뭔가 그럴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슈퍼에서 문방구에서 오피스텔에서 마주친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핑계가 되어 가까이 앉으면 알아볼까? 알아보는 것이 좋을까 아닐까? 그래서 망설였다.


그쪽 테이블에서 돌연 큰 소리가 들려왔다.

“글의 주제? 아니, 난 그저 인생의 주제를 말하는 거요. 내 인생에 주제가 뭔가……”

나는 그의 목소리만을 크게 듣는다. 내 귀의 기능에는 최신 디지털 보청기들처럼 그의 목소리만 가려서 크게 듣는 장치가 되었나 보다.

‘인생의 주제? 주제라는 게 대체 뭐라는 것일까?’

그렇게 나도 덩달아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주제’가 들어간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옷주제가 뭐다냐?’ ― 그런 뜻과는 다른 무엇인 듯했다. 하지만 ‘인생의 주제라…….’ 아무래도 ‘중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중심을 가지고 사는 일, 그런 것을 말했을 것도 같았다. 인생의 주제를 두고 논할 계제가 아니었다, 나는, 술파는 여자는.


나는 술을 팔아 살아가는 내 신세를 비웃게 되었다. 새벽이 오는 시간 책상에 앉으면, 나는 내 멍청하고 슬픈 비밀을 푼다. 들킬세라.

나는 당신을 향해 오감을 열었습니다. 여럿이서, 그것도 드물게 나타나시는 당신은 나를 별로 의식하지 않으십니다. 하이네켄을 파는 여자를, 필요 이상으로 병을 들고 테이블 주위를 도는 여자를. 그러다 당신은 마침내 나를 알아보았습니다. 공휴일이 끼어서 한가한 오후였지요. 진한 커피도 듣지 않고, 아스피린도 한 알 밖에 남지 않아 약국을 향하던 나를 알아보셨습니다. 단화를 신고, 그러나 옷은 산보 차림은 아니었던 저에게 그랬습니다. “산보 가십니까?”

나는 아스피린도 잊고, “예”라고 말했습니다. 유식하고 멋스러운 당신과 산보길이라면 어떤 것도 접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가 물장사 몇 년 만에 대학 내를 산보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빠른 산보 걸음을 쫒아가지 못하는 나를 위해 당신은 벤치에 함께 앉았습니다. 감히 옆에 앉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거의 땅바닥에 앉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메마른 땅바닥에 섞여 있는 돌과 돌가루 틈새로 풀잎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풀잎으로 보아 오월이었습니다. 당신은 내 이름을 묻고는, “해수 또는 허수”라는 말에 너무 통쾌하게 웃었습니다. “허수라고요, 시니컬합니다. 좋습니다.” 그리고는 술자리에서 내가 한두 번 대화에 낄 때 속으로 놀랐다고, 산문적 현대에서 뭔가 시적인 세계 같은 순수를 보았다고. “특히 그 분위기에 맞지 않게.”

“그” 분위기는 술집 분위기겠지요. 그러니까 오피스텔에서 마주친 여자하고 술집여자하고를 동일시하기가 어려웠었다는……, 그런 고백이어도 좋았습니다. 한껏 높은 세계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것이면 되었습니다. 대학에 가보지도 못하고 대학가에서 술을 파는 나에게. 대학생도 과한 나에게 모든 것을 졸업한 대학교수라니. 알게 모르게 유린당한 내 몸뚱이가 부끄러웠을 뿐입니다. 실전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뚫린 방패, 꺾인 창.


며칠 후 다시 일행과 함께 온 당신의 모습. 그 며칠 후. 그 며칠 후. 그러나 곧 긴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학가의 여름이 그렇지만, 그해 여름은 참 길었습니다. 여전히 가시지 않은 더위 속에, 그러나 저녁이면 시원해지는 어느 날 밤, 당신이 다시 가까이 있음에 나는 돌아버릴 만큼 행복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붕 뜬 것, 아니 어지러운 멀미 같은 이것을 무어라 한답니까? 차가운 가을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려 가게 문을 못 열면 어쩌나 걱정되었습니다. 혹시 폐렴에 걸려 죽을까 더욱 겁났습니다. 더는 당신을 못 보고 죽을까 겁났습니다. 절대로 날마다 오실 리 없는 당신을 날마다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오신 것은 두 학기의 공동프로젝트 때문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8개월, 7개월…… 3개월. 줄어드는 숫자의 의미를 당신은 모르십니다. 어차피 당신이 한시적으로 있습니다. 멀찌감치라고 해도 공기를 통해 섞일 수 있는 시간을 탐하는 내 욕망이 꿈틀거렸습니다. 그것을 오래지 않아 들켰습니다. 죽을 죄였습니다. 당신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왜냐하면 당신이 곧 멈췄으니까요. 아니 찬물을 끼얹으셨던 것, 압니다.

“어련히 알아서 마실까봐서요.”

어느 날 저녁, 그날도 자꾸 당신의 테이블을 맴도는 나를 향해서, 바라보지도 않고 내뱉으신 말. 퍼뜩, 부끄러워서, 카운터 뒤로 도망쳤습니다. 아예 두통을 핑계로 알바들에게 뒤를 맡긴 채 가게를 뛰쳐나왔습니다. 콧물 핑계로 계속 울었습니다. 마음에선 어쩌면 그렇게 차갑지 못하실 것이라 생각도 해봅니다. 어쩌다 일행들과 오시면, 이제는 내가 없는 것처럼 완전히 무시하시는 당신. 당신의 무심함에 죽어갑니다. 더 빨리 죽고 싶습니다. 이사를 떠날 수는 없어, 아니 떠나지 못합니다. 떠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의 시간이 정해졌으니까요. 시간이 가면서 나는 점점 미치는 게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한 계단 내려가서 오른 쪽으로 굽는다. 정확히 열네 걸음이면 손에 잡히는 손잡이.’

몇 번씩 초인종을 눌러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나를 미치게 합니다. 수돗물을 밤새 틀어 놓아 물이 넘치고 넘쳐서, 당신의 천장을 스며, 혹은 당신의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상상을 합니다. 물은 쉽게 당신에게 이릅니다. 이 바보는, 정신 나간 바보는, 수돗물을 부러워합니다. 속을 썩힐 대로 썩혀 다 녹으면, 그게 물이 될까요?

일에 빠지자는 처방도 잘 듣지 않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야 가게 문을 여니, 긴긴 낮 시간을 잠이라도 자보려고 안간힘을 써도 소용없습니다. 수면제를 먹었다가는 가게 문을 열고서 졸게 되어 안 됩니다. 시간을 보내려고 문화센터를 기웃거립니다. 초상화반에 등록도 했습니다.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되려고. 당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되려고. 떠나신 뒤에 그리는 초상을 보고서 누가 뭐라겠습니까? 떠나신 뒤 걸려있는 초상화를 보고서 누가 뭐라겠습니까? 그러나 아주 떠나시기 전에, 몇 분간만 함께 있을 수는 없겠습니까? 한번만 버스 정류장 혹은 기차역까지 함께 가면 안 될까요? 당신은 나를 살게 하는 약이고, 나를 살 수 없게 하는 독이십니다. 나의 독, 나의 약이시여! 몇 분만 함께 할 수는 없나요? 몇 분의 약이면 몇 년은 버틸 것 같습니다. 아니 영원히 간직해 두고 조금씩 꺼내보겠습니다. 알사탕은 보기만 해도 그 단맛을 느끼듯이. 사탕이 닳을세라 그렇게 보기만 하면서, 달콤함을 조금씩 핥아가면서.

호야의 스물 서른 작은 꽃봉오리들처럼 수없이 매달려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 당신의 마음 한 조각은 귀한 만큼 그러나 여렸습니다. 애당초 열정이었을 리도 없습니다. 그저 나락에 빠졌던 내가 그 여린 줄기를 구원의 밧줄로 믿어버렸던, 초여름의 마파람 한 번이면 흩어져버릴 만큼 가벼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당신에게서 들었던 말을, 뜻도 모르고 되뇝니다. 그것이 다였습니다.


끝은 언제 오느냐고? 그것은 처음부터 병행이다. 다만 너흰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서야 화들짝 놀랄 뿐이다. 예컨대 CD 같은 하찮은 네 선물을 되돌려 받을 때, 그때도 넌 사실을 믿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댄다. 너를 위해서, 너의 필요를 위해서 돌려준 것이리라고. 그러다 혹시 조금 취한 말로 “너 때문에 힘들어” 라고 중얼거리면 다시 전부를 건다. 그러나 마침내 너는 알게 된다. 예컨대 작은 보시기에 귀한 음식을, 네 생각으로 귀한 음식을 그에게 몰래 두고 나왔을 때, 급해서 네 손가방도 문 밖에 두고, 물론 그 문을 닫는 것도 잊고 네 방안으로 숨어들었을 때. 그때 그가 그것을 거부할 때. 그것을 다시 들고 와서 고개만 내민 채, “저, 많이 있습니다.”라고 정중하게 혹은 정중하지도 않게 말할 때. 손에 닿는 현관 어디 첫 번째 가구 신발장 같은 위에 아무렇게나 두고 나갈 때. 나가려다 말고 친절하게 혹은 별 친절하지도 않게, 오히려 칠칠맞음을 나무라듯이, “여기 가방을 이렇게 밖에 놔두고 그래요!?” 하면서, 네가 밖에 잊어버리고 있던 지갑을 디밀어 넣어주고 나갈 때. 문을 닫고 아주 나갈 때.


일상은 평온했다. 사람들이 줄어든 느낌이었을 뿐이다. 웰빙 바람을 타고 좋은 것을 찾으니 술은 덜 마시는 것이다. 아니, 그가 보이지 않는 날은 홀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 무렵 자살과 타살이 나오는 책을 읽었다. 순전히 그의 테이블에서 얻어들은 때문에 읽었다. 주인공이 남자냐 여자냐, 뭔가 대단해보여서 읽었지만 오리무중이다. “이반과 함께 행복하게”로 시작해서 “그것은 타살이었다.”로 끝난다. 실제로 죽은 시체는 없다. 실제로 죽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남자 이반이 떠나기 전에 떠나는 여자가 스스로 살해되었다고 규정한다. 사랑에 목숨 건 자신을 죽이고서, 난 죽고 싶지 않았는데, 죽임을 당했다고 설명한다. 이제 남은 사람은 그 여자의 반쪽 아니무스다. 여자는 남자로 살기로 한다. 그는 남자 이반이 걸어온 전화를 ― 아마 이별을 고하고자 ― 받으면서, “이곳엔 여자가 없(었)다.”고 답한다.

남자만이 인간이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벌써 알았어야 한다. 남자가 인간이다. 인간은 남자다. 책 속의 여자는 똑똑하다. 다행히 똑똑하다. 그녀가 온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되어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작가는 여자였는데 죽었다. 실화인지 방화인지 화재로 죽었다. 책 속에서는 절반 아니마만 죽였는데, 책 밖에서는 통째로 죽었다. 혹시 이별이 아파서 죽었을까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내 검색 실력으로는 ‘1926년생, 1973년 사망’ 정도 겉핥기만 나왔다. 같이 살다가 이별한 남자는 역시 유명한 작가였는데, 15년 연상이었고, 전에도 후에도 여자들을 만났고, 20년 쯤 더 살았다. 하긴 서양의 이야기이니, 서양에선 남자가 더 장수하는지도 모른다. 그쯤이면 되었다. 내가 그런 것들을 찾아서 또 무얼 할 것인가.

그를 알았던 8개월 동안 평생에 읽었던 만큼보다 더 많은 소설책을 읽었다. 그가 떠난 뒤 다시 책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책이 읽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없기 때문에 모른다. 그는 일 따라서 어김없이 한 겨울에 떠났다. 떠났을 것이다. 봄이 되어 대학가가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보이지 않았다.


*


그를 처음 보았던 5월은 해마다 다시 돌아온다. 4월 뒤에 온다. 그런데 5월이 되도록 호야는 새 순을 낼 줄 모른다. 스물 한 개의 호야 잎이 겨울을 살아남았다. 쌍떡잎이 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살아남기는 했다. 화분들에 물을 주려고 안경을 찾아든다. 스물한 개의 잎들이 조금이라도 푸른 기운을 띠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아,” 하고 어느 날 너는 혼자서 탄성을 지른다. 저 아래 밑둥치 부분에 스물둘 그리고 스물세 번째 쌍떡잎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그 둘은 옛 줄기에서가 아니라 아예 새 순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둘을 밀어 올리는 새 줄기는 그 작은 잎들마저 무거운지 비틀거리며, 애써 그들을 위쪽으로 볕이 비치는 창쪽으로 들이밀고 있다.

다음 날이다. 물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순전히 조금이라도 자라났을 모양새를 보기 위해서 기어간다. 기어간다기보다는 기듯이 간다. 다가가는 속도의 에너지만으로도 놀라서 가녀린 줄기가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시작의 위치가 좋지 않아서인지 볕을 탐해서인지 큰 잎들 쪽으로 너무 기운다. 플라스틱처럼 완강한 늙은 잎들에 다치면 정말 굽을지도 모른다. 줄기인지 잎인지도 아직 구분이 가지 않은 연한 살이 굽다 못해서 아예 찌그러들지도 모른다. 너는 새끼손가락으로 가만히 여린 줄기를 밀어본다. 큰 늙은 잎에서 멀어지도록.

또 다음날 아침이다. 여전히 물을 주는 날이 아니다. 그래도 화분 쪽으로 향한다. 어제보다 더 자란 느낌인데 잎을 펼치는 기세는 그대로다. 해가 덜 나서 그럴까? 종일 창가를 서성댄다. 오후 늦게 방을 나서려다말고 또 한번 창가로 간다. 해는 반대쪽에서 비치고 있고 그리 맑은 날도 아니어서 앞쪽 창가는 어스름하기까지 하다. 너는 새끼손가락을 뻗어 가느다란 줄기를 바로 잡는다.

“조금만 더 바로 자라거라……, 조금만 더 바르게…….”

가만히 주문을 왼다. 아차, 그 순간 미세한 떨림이 네 손끝을 통해 온몸에 전해진다. 무언가 동강나는 움직임이다. 그것이 잘려 나동그라져 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것이 끊어졌다. 그 여린 줄기에 좁쌀만도 못한 크기의 수액으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

너는 운다, 여린 줄기와 함께 작은 희망이 잘려나갔음을. ‘바르게’에 사로잡혀서, 네가 그것의 방향을 틀다가 그것을 죽였구나. 그렇다. 그의 방향을 ‘쪼끔’ 고쳐 잡고자 했을 때, 언감생심 네 쪽으로 인위적으로 정향코자했을 때, 아니 그런 소망이 꿈틀거렸을 때, 그때 벌써 그가 ‘절단났다’는 것을 너는 불현듯 깨닫는다.


너는 서둘러 가게로 향한다. 저녁에서 밤사이, 너털거리는 불행한 군상들을 서둘러 위로하고 싶다. 조용히 바라보아줄 사람이라도 그리워하는 안쓰러운 그들. 너는 그 얼굴들을 향해서 되뇌고 싶다. “인생은 끊임없는 이별하기다. 우리는 저녁마다 하루와 이별한다. 가끔은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그러나 가끔은 고통을 느끼며.” 어떤 시인의 글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구절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리카르다 뭐라는 이름으로 보아 여자다.

‘그에게서라면 한두 마디 이 시인에 관해서도 들었을 것을.’

너는 순간 자동적으로 그를 떠올린다. 아차, 네 마인드는 여전히 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나 고통과 함께라도 너는 결국 오늘과 이별하게 된다.

예전에 녹아 굳어버린 네 몸의 층 위로 네 맘이 녹아내린다. 몸과 맘이 함께 상실 속에서 용광로에 든다. 이 소용돌이를 지나면 너는 오히려 단단해진 상처의 유약으로 치장한 어른이 될까? 너는 여태 변방에만 있었고, 네 인생의 무대는 아직 비어있음을 느낀다. 중심이 비어있다. 주제가 비어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죽은 자의 신 오시리스에 덜컥 홀려있었다. 너는 이제 비뚤어진 밤의 관찰자 역할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 느낀다.

‘할머니, 다시 밥 짓기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느닷없이 먼데 할머니를 속으로 부르면서, 삶의 중심에 놓인 것이 설마 밥일까 생각해 본다. 따뜻하게 지은 밥 한 그릇이 너의 버려진 듯 초라한 삶과의 이별식이 되어줄까? 너의 발걸음은 정상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어디로일까? 확연하지는 않지만 가게가 종착역이 아닌, 그 너머인 것을 너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끝.
                                           
<PEN 문학> 200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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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