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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1.03 침묵 - 짧은 소설
  3. 2021.07.10 초겨울
소설2024. 1. 15. 18:20

 

 

 

     이별은 생각할 틈 없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그런 무엇인가 보다. 그런데 실은 어려운 무엇이었다. 살면서 여러 번 겪었던 이별들 어느 하나 어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잘한 이별들도 그 순간에는 아팠다. 어린 시절 친구와의 이별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떠나가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지만, 간혹 선생님 아버지를 따라서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서 전학을 가던 친구들과 헤어질 때는 왠지 모를 부러움을 합쳐서 슬프게 울면서 이별했다. 그런데, 그러고는 끝이었다.

오히려 너무 큰 이별의 순간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것을 맞기도 했다. 그러고는 오래 앓는다. 오랜 병석의 아버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는 그 큰 이별을 말 그대로 멋모르고 맞았다. 어둡고 우울했던 나날들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았고, 막상 이별의 시간은 그냥 집안 행사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지나갔다.

 

아버지의 부재는 나중에야 천천히 실감으로 다가왔다. 난생 처음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꿈꾸던 시절에 아버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별보다 이별 후가 더 아팠다. 대학진학이 아니라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가친척 언니 하나 믿고서 서울행을 감행했던 시절, 냉골은 매서웠다. 연탄 값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불을 피울 시간이 없었다. 늦은 밤에 불을 피웠다면 언제 방이 따뜻해질 것이며, 이른 새벽에 나갈 때서야 펄펄 타는 연탄불은 아까워서 어쩌나 말이다. 이래저래 냉골에서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하면서 고향의 어머니 곁을 생각했고, 그러다가 그 곁에 누워계셨던 아버지 또는 하늘의 아버지를 그렸다. 아버지는 아득히 멀었다.

당연히 내 결혼식에 아버지가 없었다. 불쌍한 신부, 결혼식장에서 부모님을 다 누리지 못하는 불행한 신부였다. 아버지, 울 아버지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를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서럽도록 그리웠다.

 

결혼 이후로는 사는 일이란 것이 끝없는 이별의 연속임을 잠시 동안 잊었던 것 같다. 이별이니 그런 감성적인 말들은 사치라 느낄 만큼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다. 반지하에서 탈출하는 목표, 수도권에 집을 갖는 일,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기, 가능하면 빨리 건물주가 되기, 노후 준비, 노후 준비…….

반지하방은 둘이라서 덜 추웠다. 그래도 추웠다. 근무시간 때문에 잠시 잠시 혼자일 때는 여전히 추웠다. 서울 첫겨울의 냉골을 생각하면서 참았다. 그때는 간호조무사 학원 다녀오고 알바까지 하고 들어오면 연탄불을 피울 재간이 시간이 없었다. 딸아이를 낳았고, 셋이 되어서 더 따뜻했고, 반지하방을 으샤 으샤 어거지로 탈출했고, 수도권에 집을 가졌다. 분홍빛 내 인생에 이별 같은 것은 아득했다.

 

이별을 어머니와 관련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란 멀리 있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였다. 그 자리의 어머니는 마을 모두와 가깝게 지내시고, 아무튼 동네 친구들 누구랑도 잘 어울리시니까. 특별한 노인병이 없어도 마을 병원에도 성당에도 잘 다니시니까 몸과 마음이 건강하신 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레 이별이 왔었다. 엊그제 같다.

고아가 되었네요! 초상을 치르고 곧 다시 일을 나갔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고아가 되었어요, 무조건적으로 지 선샘 믿어줄 사람은 이제 없으니. 오후 수급자 어르신의 보호자였다. 요양보호사인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수급자가 대부분이지만 드물게 그들의 보호자도 있다. 간호조무사 30년 마치고 시작한 이 일도 벌써 6년째다.

고아가 되었네요! 처음엔 놀라웠지만 옳은 말이었다. 그 말과 그 시간이 도망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고아가 되었음을 깨닫고 나서는 오래 오래 울었다. 갑작스럽게 완전한 혼자가 되었다는 그 느낌은 오랜만에 경험한 것이었다. 혼자다. 혼자다. 그 때는 똑같이 내 피로 연결되어 있을 딸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남편은 어딘가 밖에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은 옆이지만 밖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꼈다. 사람은 어차피 홀로 와서 홀로 간다는 그런 말도 있지만, 새삼스럽다. 나는 혼자였다. 나는 혼자다.

 

 

     혼자 있을 용기만 낸다면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게 될까,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오랫동안 의존하고 살아온 것이 분명했으니까. 부지런하고 집안일도 잘 해주는 성실한 남편, 별로 나무랄 데 없는 남편을 의지해온 것은 당연했다. 남편은 심하다 할 정도로 절약하며 산다. 그 나름대로 충분히 단단한 내가 다 불편할 정도다. 절약 정신에 절어있으니까 바람도 피지 않을 것이다. 피지 못할 것이다. 바람에는 돈이 먼저 축이 날 것이니까. 그 점에서는 남편을 믿는다. 이상한 믿음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도 몰러? 바람이라는 것이 나고 싶어 나고 안 나고 싶어 안 난다냐? 편의점이 늘상 하는 말이기는 하다. 그려, 누구라도 바람피우자고 작정해서 바람이 나는 것은 아닝께. 다시는 그럴 일 없다고 맹세해 놓고도 또 그 짓을 벌리고 그라제. 집집마다 생각보다 심각혀. 세탁소는 세태를 많이 의심하는 투다. 요새 가만 보면 남정네들만 그라는 것도 아니더만. 너만 사람이냐, 나도 사람이다, 그 식이더만. 집안 아짐뻘인디, 긍께 나이도 솔찮혀, 아 대놓고 맞바람을 피워붕께 복잡해져불대.

됐네요. 넘의 집 야그 그만들 하쇼. 내가 여기 말로 말을 끊지 않으면 끝도 갓도 없이 바람 이야기에 열을 올리곤 한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연속극보다 더하다는 것이 두 사람이 일치하는 대목이다. 그에 비하면 젓가락 언니는 정의파에 가깝다. 사람을 그로코롬 못 믿으먼 갈라서야제, 먼 짓들이댜냐. 그렇게 일갈하고 만다.

아줌마들이 모이면 일단 처음에는 요즘 뭐해 먹어 하면서 먹거리 타령으로 시작하다가 마지막 관심사는 남녀상열지사다. 여자들이 외로움을 타서 그런가. 나는? 저 밑바닥 속내로는 나도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언젠가 보호자 할머니랑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머니 일주기에 다녀와서였다.

사람이 용기가 있음 외롭지 않다고 그러셨죠. 용기가 있다는 말은 뭘까요?

내가 먼저 말을 꺼내다니. 이런 실없는 말을 나눌 사람이 내 주변에 없었나 싶었다. 의외로 할머니는 깜짝 놀라는 투였다.

아이쿠, 지 선샘, 외로움 타는 거요? 어른이 왜 다시 소녀가 되어갈까.

어른은 뭐.

그니까 그게요, 용기라기보다, 참어른은 외로움 안타죠. 혼자라는 느낌에 외로움을 타거나 고독감에 젖는다면 덜 어른이야, 바꿀 수 없는 것을 원하니까요. 고독은 존재하는 것들의 숙명 같은 것. 솔리뛰드라고, 또 어렵게 말해볼까요? 도망갈 텐데?

도망…….

아차, 이 할머니가 어렵게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도망친다는 것을 완전히 간파했구나. 할 수 없이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프랑스말이라서 어려워 보일 뿐, 고독이라는 단어, 특히 군중 속의 고독을 말한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친구들 속에서도,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인간은 외롭다. 어차피 혼자인데 혼자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방법이 없죠, 외로움 탈밖에. 그게 놀랍게도 아까 그 솔리뛰드라는 단어에는 해방감 같은 뜻도 함께라네요. 누구나 외로움을 싫어한다지만 은근히 혼자만의 무엇인가를 탐하는 그런 속내도 있다는 거예요. 고독감이자 해방감 같은 것.

설마요. 근데 정말 어려운 말이네요.

세상의 말 다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면 그리 된답니다. 그런가보다, 라고 살면 된답니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좋아하는 가사예요, 뮤지컬 서편제에서.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

엉뚱한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내가 뭐 많은 어려운 단어들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몇 개 더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그저 고독하다고 느끼면 고독감, 해방되었구나 느끼면 해방감, 그런 거죠! 나, 이 할매는 어때 보이나?

그거야, 스물 네 시간 동반자랑 함께 있으니까 외로울 틈이…….

동반자? 지 선샘이 어느새 우리집 양반 말투를 쓰네. 그래요, 동반자, 동반자랑 거의 스물네 시간 붙어 있네, 못 말리는 바퀴벌레 한 쌍! 그런데 혹시 내 얼굴 고독해 보이지 않나? 좀 멋있게! 저이가 근래에 동반자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마찬가지로 고독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을 걸요. 그런 거랍니다. 내가 그걸 느껴, 고독하겠구나! 우선 말들을 다 못 알아듣잖아요. 얼마나 외로워요. 내가 말했었나, 눈을 못 보면 사물들과 단절된답니다, 그런데 말소리를 못 들으면 사람들과 단절된다고. 그 유명한 헬렌 켈러의 말이래요.

헬렌 켈러, 알아요. 듣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고, 아, 말도 못했다는 사람. 그런 말을 어떻게 했다죠? 글로 썼나?

호킹 박사 알죠? 젊어서부터 루게릭병을 앓던 물리학자, 그 사람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나름의 말을 했다죠. 표정을 말로 변환시켜주는 무슨 기계를 사용하면서 자기 말은 미국영어라고 했다죠. 미국산 기계니까. 그런 유머라니. 뭐, 헬렌 켈러 시대에도 그 나름의 표현방식이 있었겠지요. 표현보다는 생각이 중요하죠. 생각이, 느낌이 있으면 사람이에요.

생각이, 느낌이…….

봐요, 지 선샘, 외로움 탈 때는 반대로 말하면 행복한 시간일 수도 있어요. 고민이 너무 크면 외로움이고 뭐고. 하다못해 전에 오전 집에서 속상한 날 부글부글 화났다고 했었잖아요. 결국 그만 둔 집. 그럴 땐 외로울 틈 없죠? 그냥 맘 편히 살아요. 공을 봐요! 공 속에 공기방울들이 팽팽할 때 공이 톡톡 튀겠죠. 공기방울들이 외로움 타면 공이 흐물거리겠죠. 그냥 팡팡 튀고 살아요!

팡팡 튀고…….

 

그런데 올 여름은 팡팡 튀기에는 더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정말로 지구가 점점 더워진대나? 영국 같으면 우리나라보다 북쪽에 있을 것인데 40도를 넘었다거나, 잘 못 들었나 싶은 뉴스들도 많았다. 봄에도 동해바다 쪽 산불은 200시간도 넘게 타올랐고, 진화는 왜 그리 어려운지. 무서운 뉴스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강진으로 100명이 아니라 거의 1,000명이 매몰되었다 했다. 천재는 어쩔 수 없다지만 인재도 만만치 않았다. 테러도 무차별 총격도, 이른 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남의 나라들에서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가을 들어서 또다시 이별을 맞았다. 당연한 그러나 급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몇 년을, 놀랍게도 몇 년 동안을 침대에 누운 채 콧줄 급식으로 연명하시던 시어머님과 이별을 했다. 그 긴 시간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평안을 찾으신 것이겠지만, 이별은 이별이었다. 평소에는 냉철하다 못해 냉랭해 보였던 남편이랑 그 형제들이었는데, 정작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아들들은 말 그대로 대성통곡이었다. 그 통곡을 잊지 못하겠다. 어른 남자들이 그렇게 울 줄이야. 어머니의 옛날, 고생고생만 하셨던 옛날을 울고 또 울어댔다. 어떤 장면들을 추억하다가 울고 또 울고, 심지어 좋아하셨다는 노랫가락을 부르다가 또 울었다.

이번 이별은 실은 서러움보다는 걱정을 송두리째 안고 왔다. 혼자 남은 아버님을 어떻게. 그동안 아버님은 크게 아프신 곳은 없었지만 어머님이 계신 요양병원에 함께 계셨다. 이제 집으로 오셔도 오셔야 되겠지만 어떻게. 누가 아버님을 돌보는가. 어느 아들도 손을 들고 나서지 못했다. 홀 시아버님 모시기란 어딘지 껄끄럽겠다 싶을 며느리들의 입장을 서로 눈치 보면서. 이런저런 망설임으로 아버님은 그냥 요양병원에 남아 계셨다.

 

눈치 보기에 어색해할 시간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수년 간 콧줄 끼운 어머님 옆에 들락거리며 하루 종일을 보내셨던 아버님은 할 일이 없어져서인지 곧 바로 사그라지듯 숨을 거두셨다. 낮이면 혼자 이 방 저 방을 배회하시다가 한 달도 채 안된 어느 날 아침 깨어나지 않으셨다는 통보였다. 그 한 달도 안 될 시간을 왜 모셔오지 못했을까. 내 마음이 이럴 때 남편은 어떨까.

예상치 못했던 아버님의 장례식장은 의외로 조용했다. 눈물들이 다시 고일 시간이 짧아서였을까. 반쯤 돌아가신 상태로 연명치료를 하시던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흘린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시간 눈물을 준비해 두었던 것일까. 세월 따라 그냥 계속 쌓였었나. 세월 따라 쌓이는 것이 주름만이 아니라 눈물도 있었구나 싶다. 그 생각 때문에 나는 더 울었다. 평소의 나는 눈물이나 쌓아둘 사람은 아니었는데. 눈물 쌓일 틈이 없었을 줄 알았는데. 세상엔 예외가 없고 나도 사람이니 나에게도 눈물이 쌓였나 보다.

 

 

     눈물의 맛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니 그 전에 눈물이 쌓였을 순간들을 기억해보기로 했다. 아직 교복을 입은 여학생일 뿐인데, 아직 어른도 아닌데, 벌써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버지의 부재는 사실은 난데없는 청천벽력은 아니었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 그때는 울만큼만 울고 그쳤다. 오랜 병중에 적극적인 존재감을 놓치셔서였을까. 또 아버지들은 대강 먼저 떠나셨고 동네에도 비슷한 집들이 많았다. 집들은 비슷한 상태로 집이었다.

설움은 집 없는 설움에서 시작되었다. 냉골에서 울면서. 울면서 아버지 생각을 더 했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친척집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래서 튼튼한 집을 지어줄 것 같은 ‘선 선샘’이 좋았을 것이다. 얼마나 믿음직했던가. 새벽 시장에 가서 두 시간이나 알바를 하고 출근하는 남자. 저녁이면 앞 건물 다른 병원에서 야간을 뛰는 남자. 예쁘지도 않은 내가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학교 때 새침 얌전한 애들보다는 털털한 애들이 남편 복도 많다고 하더니!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내가 점심을 함께 먹는 오후 수급자 어르신집 사람들은 피곤과다. 매끼 반찬을 새 그릇에 조금씩 담아낸다. 김치 따로 생채 따로다. 물김치에 더러는 파김치랑 서너 가지 거뜬, 새로 만든 기본 찬이야 당근 새 접시에 담아낸다지만, 어떻게 모든 걸 매번 새 접시에다. 이 무슨 바보 짓!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까 세뇌되었나. 이런 일을 일없이 하고 있는 할머니가 답답해보이던 것에서 정갈해 보이는 쪽으로 바뀌려고 한다. 먹고 사는 일에 정성을 보이는 것이, 사는 일이 목적인 것 같아 보였다. 헌데 다른 목적은 없는 것일까.

 

저, 그런데, 특별히 하시는 일은 없는 거죠? 보호자님 말씀요.

나, 내가 하는 일요? 날마다 살잖아요.

아이참, 이렇게 사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이죠. 이게 뭔가 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사는 일은 일이 아니다. 찬성 못하겠는데요. 인생은 사는 것이 목적이요. 날마다 자~알 사는 것이.

아니 뭐, 젊을 땐 뭔가 이루려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자 붙은 직업, 건물주 그런 거요?

아니, 뭐~래도, 뭐든지요.

건물주가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 늙어서 의사 판검사 사위를 보려고 무엇인가를 한다. 그건 옆길인데요. 또 어렵게 말할까보다, 도망가라고!

언제 도망을…….

갈 거면서.

아뇨. 그럼 판사, 아니 요새 제일 잘 나가는 검사 사위가 옆길이면 옆길 아닌 것이 뭔데요?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사나요. 다만 뭔가 되려고, 뭔가 가지려고만 한다면 그건 옆길이다. 또 어려운 단어로는, 자신에게 던지는 가언적 명령이다, 그런 말이죠. 검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고시를 봐야 해, 그러니 좋은 대학에 가야 해, 그러니 일단 죽어라 공부하는 거야! 이런 명령은 모두 수단에 매달리는 것, 그러니까 가언적이고. 반대로 정언적 명령이라면 뭔가 조건 없는 명령, 절대적으로 원하는 행동을 향할 때를 말하죠. 내가 어떤 의지로 뭔가를 행하려고 할 때면 그 원칙을 세울 것 아녜요? 그때 그 원칙에 따른 행동이 나의 이익과 처지를 남의 이익과 처지에 비해서 특권적인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특권을 피하는 것이 우선……

 

아이쿠 머리야. 확실히 잘못 걸렸다. 가언 정언이 뭐야. 한국말이야? 특권을 부러 피하라고? 포기하라고? 모두가 특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달리고,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공하려는 것인데! - 이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노인과 이야기하다 보면 어디서부턴가는 뒤틀려 버린다. 이 미친 말, 내가 볼 때는 미친 말이다, 누가 이런 말을. 일단은 무조건 성공하기, 누구라도 성공을 해야 기본적으로 먹고살기 편한 세상인 것을.

 

그게,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자면 우선 특권을 피해야, 피하려고 해야만.

보편…….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정의니까요. 모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그만 둡시다. 학교도 아니고. 다만, 자유가 거의 폭력이 되어있는 세상이다보니, 진정 자유인이 어디…….

나는 벌써부터 어느 부분에서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지 않으니 대꾸도 못할밖에. 내 몸은 거기 그냥 있었지만 맘은 이미 도망쳤다. 도망친 것을 알았는지 다시 혼잣말이다.

미안! 내가 공부를 하다 말아서, 그래서인지, 뭔가 생각에 꽂히면 그만……. 그런데 참 밤새 샤워 꼭지가…….

 

자유가 폭력이라니, 뭐야! 다행히도 보호자 할머니는 전혀 엉뚱한 말로 현실로 돌아와서 화장실로 향한다. 나도 따라 들어간다. 샤워 꼭지가 정말로 끊어져 있다. 플라스틱도 아닌 쇠붙이 종류인데! 어떻게 해서 그리 되었는가는 모른단다. 한밤중에 깜깜한 화장실 안에서 소리가 들리더란다. 급히 불을 켜고 보니 어르신이 부러진 샤워꼭지를 들고 서 있더란다. 출입문 방향을 잊었는지 열지도 못하고.

지금은 낮잠치고는 곤히 잠들어있는 어르신이 밤이면 시공간 적응에 힘들어하는 일이 잦아졌단다. 깜깜한 허공에다 대고 보이지 않은, 어르신에게는 보이는 상대에게 구체적인 말을 하거나,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을 찾는 일 같은 것, 일상생활이 어려운 현상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있었다.

 

 

     이별은 늘 가까이 있다더니, 몇 년간 안정적인 재가돌봄을 해오던 관계가 끝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후 말이다. 언제라도 수급자 어르신이 먼저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조금 다르다. 보호자 할머니가 이겨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이 할머니는 빈 방에 잠깐 쉬러 가는 일이 잦아지더니만, 요사이는 아예 잠이 들어버리는지 내가 퇴근하는 시간이 되어도 조용할 때가 있다. 환자를 인계하지 않고 퇴근한다는 것은 찝찝한 일이다. 어르신을 덩그러니 거실에 남겨두고 퇴근하면, 혼자서 안방, 화장실, 부엌 냉장고 쪽으로는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물, 음료수, 심지어 아이스 바 정도는 곧잘 꺼내 드시겠지. 냉장고 특히 냉동실 문을 잘 닫아야 할 텐데. 아직까지는 그런 사고를 낸 적은 없다. 그건 사실 사고 축에도 들지 않는다. 인지장애를 겪는 환자들에게 큰 사고란 넘어진 채로 일어나지 못하거나 혹은 가스레인지를 틀거나 하는 일이다. 이 어르신은 평생 라면도 못 끓일 만큼 부엌엔 꽝이라니 그 쪽은 염려 없다.

그냥 퇴근해? 늦게 퇴근한다는 것은 내 사전에는 없는 일이다. 원칙대로다. 할머니가 낮잠에 든 첫날은 시간에 맞춰 태그를 찍고 집을 나섰다. 차에 키를 꼽다가 흠칫 놀랐다. 어르신이 내 뒤를 따라나와버리는 상상, 그것은 끔찍했다. 사고가 나기 전에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이 맞다. 다시 들어가서 깨웠다. 이 할머니가 핸드폰으로 날아오는 안전문자에, 특히 배회하는 사람들을 찾는 문자에 과민반응인 이유가 있겠지. 어르신이 어떤 날엔 아침에 신문을 들여놓기도 한단다. 어쩜 혼자서 나갈 수도 있겠다고, 할머니가 놀라곤 한다.

 

 

     하루는 할머니가 쉬고 있는 방 쪽에서 전화 목소리가 컸다.

어쩌라고! 청력장애자를 누가 일일이 돌봐줄 거냐고! 나도 함께? 난 아직 그러고 살 단계는 아니라고!

주변 사람들이 특히 의사인 친척들이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잘 지경인 할머니를 보다 못해서 어르신을 요양병원에 입원시키자 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르신을 함께 돌볼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수도권으로 모시라는 권유들 – 그들 중에는 의사들이 가장 적극적인 것 같았다.

듣기 싫은 소리도 자주 들으면 설득이 되는지, 하루는 할머니가 실버타운 이야기를 했다.

재가요양 수급자는 실버타운 들어가 살기 어렵겠지요?

글쎄요. 저는 그 부분은 아는 것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수급자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엘 가야죠. 모르긴 해도 실버타운엔 어르신 돌봐줄 사람은 없을 걸요.

재가요양 되는 곳도 있나 봐요, 수도권에는.

그래요? 실버타운이란 게 보통 호텔 비슷한 곳인가 했네요. 공동으로 식사를 해주고, 공동 프로그램도 있고. 그런데 이 살림 정리가 괜찮으시겠어요?

정리, 글쎄, 정리라면 결혼 때 더 큰 정리를 하고서 출발하지 않았을까요? 혼자 지내던 삶에서 누군가랑 삶을 합치는 일, 그것이 더 대단한 결정이었겠죠. 이제는 이사, 좀 특별한 이사 정도.

하긴 그렇군요. 결혼 하실 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난 그저 두 사람이 방을 합쳐야 몸과 맘이 편해서,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당근 씩씩한 출발이었어요.

 

씩씩한 출발선을 돌이켜 본다. 아득하다. 분명한 것은 반지하 탈출, 그리고 일차 목표는 내 집 그리고 건물주가 되는 것이었다. 하수도가 막혔어요, 2층 학원이나 어디서 불평이 들어와도 그리 싫지는 않다. 내가 월세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입장이니까. 그렇다고 세상의 지탄을 받는 건물주는 절대로 아니다. 최고위과정이나 다녀서 인맥을 쌓고 세상을 주물럭거리는 그런 건물주들, 먹물들이 죽어라 공부해서 판검사 되어도 그 밑으로 들어간다는 어마무시한 건물주들은 우리랑은 완전 다르다. 성실하게 벌고 절약 또 절약해서 이만큼 이룬 것, 그게 어때서.

물론 오후 할머니 같은 사람은 건물주라면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한번은 이 집에 자매들이 모였는데, 갑작스레 이 할머니를 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크게 부동산 재테크에 성공하여 떼돈을 벌면 그것은 누군가가 가져가야할 돈을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돈이 총 100억이고 인구는 100명이라면 똑같이 1억씩 갖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할 사람이라고. 그러자 이 노인이 말했다. 뭐야, 공산주의자 취급이네! 나 절대 아녀! 그냥 여남은 사람이 90을 독점해버려서 나머지 사람들이 허덕인다면 그런 게 문제라는 말이지. 온통 허덕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행복할 순 없지 않느냐고.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밥 못 먹을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아야 누군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뭐야, 형제자매들 사이 대화에서도 이론이구나. 아무튼 간에 누구나 더 잘 되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특혜도 피하고 재산도 굳이 집착 말라는 개똥철학이 어디 통하는 세상인가 말이다. 나는 세상 따라 사는 현재형이다. 맞벌이가 대세니까 맞벌이 하고, 절약해서 건물주 되는 것이 모두의 꿈이니까 건물주가 되었다. 재롱둥이 깔깔거리는 손녀만 봐도 기쁘다. 폰에서만 봐도 행복하다. 이 아이도 곧 건물주 되는 꿈을 갖겠지. 농막에 가서도 힘들기 보다는 뿌듯함이 크다. 땀 흘리고 나서 따끈한 국밥 사 먹으면 행복하다.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다. 이 어르신네가 실버타운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딱히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상황이 정리 되는대로 따르면 된다. 가만, 이것도 일종의 이별인가. 재가요양이란 인연은 늘 바뀌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수급자들이 오전 방문을 원하기 때문에, 이 오후 수급자가 실버타운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오후 시간 일을 찾기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그럼 오후를 잠시 쉬어도 좋고.

 

며칠을 그렇게 보냈는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실버타운에 대한 관심 말이다.

끔찍한 뉴스도 있었네요.

네?

실버타운 사건 말이에요. 80대 후반이면 꽤 노인들인데, 그때까지도 부부싸움을 하면. 그러니까 부부싸움 끝에 할머니가 목을 맸다고. 모두들 처량했을까 무상했을까.

말로만 실버타운 이야기를 했었는지, 할머니는 부정적인 소식들만 찾아보고 있었나 보다.

자살한 노인 이야기가 또 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보통 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식사며 생활 전체가 불가능한 아버지를 자녀들 입장에서는 실버타운에 모시기로 했겄제. 근데 입주 겨우 일주일 후, 노인이 아침식사에 나오지 않아 방에 가보니 가버렸다네요. 들어올 때 미리 준비했었나. 바로 옆방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얼마나 무서워. 절망할밖에.

할머니는 아직 경험하지도 않은 일들에 자기 일처럼 미리 놀라고 있었다. 그러고는 어느 날부터 냉장고 문에 〈문닫기〉라는 글자가, 식탁 옆에는 〈불끄기〉라는 글자가 붙었다. 다시 이대로 지금처럼 지내기로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유예된 이별. 언젠가 다시 검토될 이별이다. 이별 연습이 필요한가 보다.

 

그러면서도 이 노인이 어느 날부턴가는 정리에 시간을 쓰는 것 같았다. 책들도 묶어서 내놓고, 자잘한 상자들, 그 속의 자잘한 물건들은 치우신다. 실버타운 생각을 하시나.

저 그런데요, 어르신 같은 수급자는 실버타운에 노탱큐라던데요. 돌봄 필요한 수급자는 요양병원 또는 요양원에.

왜 이런 말을 꺼냈을까. 내심 이분들과의 이별이 그냥 재가요양 끝 이상의 의미라도 있단 말인가.

알고 있어요. 다들 열심히 알아 보았다네요. 다행하게도 실버타운 단지 안에 케어홈이라는 곳이 함께 있대요. 맘 정하지는 않았고요, 어차피 이제는 살림을 정리할 때죠. 울 엄마한테서 받은 장롱들, 자질구레한 선물들, 시어머님이 시집 올 때 – 상상이 되나요? - 당신 친정어머니가 넣어준 참기름병, 아주 옛날 도자기인데. 다른 자잘한 선물들, 이 마른 표주박 두 개. 전혀 뜻밖이었죠. 돌아가시기 좀 전이었어요. 평소에, 아가, 살면서 자식들한테도 한 자락 깔아라. 그래야 쓴다아. 그러시던 어른이 마른 표주박이라니.

그럼 이것은요! 이 낡은 책들은요.

거실 안쪽 시커먼 서가에 낡은 종이묶음 같은 것들이 쌓여있었는데, 평소에는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 비닐로 한 번 그 위에 예쁜 레이스 천으로 덮여서 늘 그렇게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들을 누군가 만져보는 흔적도 없었다. 오늘은 가만히 먼지라도 털어볼까 싶었다. 가만 들여다보니, 맙소사, 손으로 묶은 책들이었다. 스무 권 쯤 되어 보였다.

아, 족보잖아요. 누군가에게 물려 줘얄 텐데.

저 이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기억하고 있는지, 이야기 들어 보세요. 말을 좀 시켜봐요.

 

어르신, 저 책들이 족보라면서요?

그러지, 지파의 세보야.

그럼 옛날에 실제로 살았던 조상 분들의 이름이 쓰여 있겠네요. 우와, 몇 년이나 된 것이에요?

거기 제1권 열어보면 언제 적인가 적혀 있을 건데.

펼쳐봐도 되요? 하나 빼올까요?

그래요, 오랜만이니 나도 보게.

낡고 낡은 책들을 만지려니 부서질 것 같았다. 가만히 제1권이라고 한자로 적힌 책을 어르신 옆으로 가져가보았다. 거기 따로 끼워진 작은 쪽지에 쓰인 한자를 어르신이 ‘헌종 15년’이라고 읽었다. 헌종이라고? 조선? 게다가 전체가 필사본이라니. 필사본이라면 골동품 아닌가. 어디 박물관에나 기증해야할.

그럼 역사책에 나오는 사람 이름도 있을 수 있겠네요. 내 고향 은행리에 있는 지여해 장군의 충신각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응, 그럼. 알만한 이름도 있소. 부귀영화를 누리진 못했지만. 그래서 쇠락한 집안이 된 것이고.

 

쇠락 – 이별과 이별과 이별을 거쳐온 그런 것. 몰락 비슷한 뜻이겠지.

어려운 단어들을 쓰는 것은 어르신도 할머니도 나이 탓일 수도 있겠다. 살았던 시대가 나랑은 사뭇 다르니까. 아니, 기껏 부모님 세대인데도 달랐다. 하긴 누구나 부모랑은 쉬운 이야기만 한다. 또 이 어르신의 직업이 선생님이었다잖아. 그런데 직업과 사람은 좀 무관해 보인다. 별로 해온 일이 없다는 보호자 할머니는 어려운 단어의 도사다. 그런가 하면 밥밖에 모른다.

그런데 우선 식사가 문제예요. 사는 건 먹은 것인데.

할머니는 다시 밥타령에 가 있었다. 케어홈의 밥을 어르신이 잘 먹을지. 잘 먹지 않으면 매끼 누가 챙겨서 먹게 하는지. 그래서 나는 이 할머니가 실버타운과 케어홈에 함께 입주하는 일에 ‘O’표를 던지지 않는다. 이렇게 준비만 하다가 말 것이다. 그래도 또 모른다.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당해서가 아니라, 먼저 쓰러져서 함께 케어홈에 갈 수도 있는 것이니까.

 

 

     유예된 이별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예정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이 사람들과의 이별이 올까. 정확하게는 요양보호사인 내가 수급자 어르신하고 이별하는 날 말이다.

물론 최악의 경우는 갑작스러운 최종 이별이다. 모든 만남은 이별로 끝난다, 라는 말 정도는 이해한다. 울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이 할머니가 말해준 문장 – 천년을 함께 있어도 한 번의 이별은 있다 – 이 문장도 내가 외운다. 이 말을 했다는 원조 철학자의 이름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어쩌면 이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서 이 구절을 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 노인에게서 들은 여러 개념들을 실은 내가 잘 모른다. 그런 걸 외울 까닭이 없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해한다. 행복 중독의 사회 – 그런 말을 들으면, 나처럼, 우리처럼, 성공 일변도의 행복 추구를 중독이라 해서 머쓱해진다. 그러다 다음 순간에는 그 좋은 쌀밥을 줄여야 건강한 몸매를 갖는다는 생각과 비슷한가, 그렇게 따라가기도 한다. 좋은 것도 넘치면 병이라는 말, 과유불급과 통하는구나. 쌀밥도 고기도 포기해야하듯, 성공과 행복도 조금 포기해도 되나. 맘이 건강해지려면.

그렇게 저렇게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다른 방식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별 가진 것도 없이 평온한 이 노인들을 보면서 괜스레 나도 편해지곤 한다. 어떤 이별도 그렇게 무심하게 맞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떤 이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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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23 가을호 73, 202~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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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3. 1. 3. 11:29

사랑, 지나고 나면....... 김윤아


침묵

 

 

 

     침묵만이 위대하다. 다른 모든 것은 유약함이다. ‘유약하다’도 아니고 ‘유약함’이라고 한다. 했다. 「늑대의 죽음」이라는 시다. 죽어가는 늑대가 말한다, 쉼 없는 사유와 노력을 통해 영혼이 스토아적인 긍지의 드높은 경지에 이르라.

    스토아 좋아하네! 알프레드 드 비니, 잘 모르는 시인이다. 비니인가. 드 비니가 더 프랑스 사람 같은……

 

    띵똥. 띵똥 소리가 난다. 이제 막 집중했는데, . 그는 일어서려다가 앉는다. 무슨 상관, 침묵을 깰 수는 없다.

 

    뭐더라, 드 비니 - 그의 일생은 환멸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정열 때문에 이상을 단념할 수 없었고, 그 이상을 믿기에는 너무도 투명한 의식을 가졌다. 절망의 딜레마 속에서…….

어딘가에서 읽은 누군가의 글이다. 하도 여러 곳을 서핑했었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썼던 글인지 알 수가 없다. 양심이 찔린다. 표절이니 도용이니 얼마나 무거운 단어인가. 기껏 잡문이지만 글은 글이다. 드 비니가 침묵을 예찬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지, 일생까지 곁들여야 할까. 신빙성을 높이려면 그 정도는 필수려나.

     환멸의 연속 – 친가 외가 모두 귀족이자 군인 가문이었으되, 어라, 1797년생, 귀족으로 태어나려거든 한 세기 전에 태어날 일이지. 운은 운이다. 부르봉 왕가는 곧 권좌에 복귀했고,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의 젊은이는 스무 살도 안 되어 근위대 소위가 되었다. 군인이면서 시를 쓰던 드 비니는 위고가 발행하는 문학지 《뮈즈 프랑세즈》에 기고했다. 하지만 차츰 위고와는 다른 길로 갔다. 그는 상아탑으로, 위고는 민중 속으로.

     그때 1852년, 어떻게 혁명으로 추대된 대통령이 셀프쿠데타로 황제가 되나. 어머니가 남긴 장원에 은거해 있던 드 비니는 상아탑에서 살아갔다. 가난을 감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유로울 능력이 없다! 라던 위고는 쿠데타를 공공연히 반대하여 추방되었다. 근 20년을 섬으로 떠돌던 망명자는 『레 미제라블』 같은 엄청난 보따리를 안고…….

     그는 위대함에 압도당하는 자신의 속물성을 반성한다. 너는 시인의 위대성에 관해서가 아니라 침묵에 관하여 쓰고 있는 거야! 침묵은 위대한 위고가 아니라 잊힌 드 비니의 몫!

     사는 것은 하인들도 한다. 사실 그는 이 시건방진 말 때문에 드 비니를 피하고자 했었다. 정치적 염세주의는 이해가 되었다. 신념으로 충성을 바치려던 왕정의 무가치성을 목도했으니 그럴 밖에. 드 비니는 심지어 자살에 관한 명상을 쓰기도 했다. ‘엘레바시옹’이라던 시 작품들에서다.

     솟구쳐 올라 죽으라? 자살하라고? 인생이 발레라면 자살이 상위 동작이네. 아니, 침묵 속에 죽으라? 자연은 무정하다.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침묵할 뿐이다. 침묵하는 신에게 애원하지 말고 너도 침묵하라. 운명을 감수하라. 말없이. 결정적 순간의 고독을 받아들이라.

 

     아니, 고독은 처음부터였다. 침묵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우리 애가 글쎄 우리나라에 처음 추기경이 임명되신 날 태어났어요! 터무니없이 그의 탄생을 축복으로 여겼다던 어머니 루시아는 지쳐갔다. 신에게 애원하다 지쳤을까. 말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귀머거리라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서는 침묵했지만, 다른 말들은 했다. 그의 말도 알아들었다. 아버지를 모르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알랴. 침묵은 그런 뜻이었을까.

     어린 시절도 시국을 탄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서 칭찬받는 짝꿍 계집애 때문에 속상했지만, 그는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 약진이 뭔가는 설명을 들어서 좀 알았지만, 우리의 처지는 뭘까. 담임 선생님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 자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권리는 또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자유라면 광덕 아제가 목을 매단, 봉덕 아제가 저수지로 들어가 버린 그런 것일까. 자유로 땡볕에서 땅을 파고 자유로 소똥과 씨름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그리 생각했다. 아제들 얼굴은 온통 시퍼렇게 흙빛으로 그을렸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구릿빛으로 익은 보람에 찬 자랑스러운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삶은 글이 아니다. 다시 쓰자.

     어딘가 서핑 동안에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곧 죽음의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되므로,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이라고. 왜냐.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어렵다. 많은 독서는 혼란을 준다. 잠깐, 글은 말이 아닌가. 말이다. 말 안에 글이 있다. 글은 정지되어 있는 말이다. 침묵에 우선권을 주려면 침묵에 관해서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글은 더더욱……

 

    띵똥. 아니 무슨 띵똥 소리야. 짜증이 그를 압도한다. 뭡니까? 라고 소리치며 문을 열려다가 멈춘다. 이 시각 대낮에 무위도식자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 글값이 쌀값에 미치지 못함에 부끄럽다. 시인 축에 들기는커녕 강의 시간마저 달랑거린다.

 

     ‘내 주장, 그것은 세상이 시인에게 주지 않는 빵이다. 내 주장, 그것은 시인이 부득이 할 수밖에 없는 자살이다.’ 귀족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의 주장이었다.

     내 주장은, 그는 단호하다, 사람은 직업을 가진, 직업을 못 가진 부류로 나뉜다. 돈으로 말해도 같다. 돈을 가진, 돈을 못 가진 부류. 아니, 권력으로 말해야 한다. 권력을 가진, 권력을 못 가진. 권력이 가장 센 단어다. 직업도 돈도 있더라도 비굴해 지는 것은 순간일 터.

     늑대는 말한다. 탄식하고, 눈물 흘리고, 간청하는 것은 한결같이 비겁하다. 운명이 그대를 부른 길 위에서…… 나처럼, 아무 말 없이 고통을 견디며 죽으라.

 

     띵똥! 소리는 고집스럽다. 대문께가 아니라 머릿속인가. 그가 반응이 없자 다른 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사랑 빛나던 이름 그리운 멜로디 아련히 남은 상처~~ 빨간색 여자가 빨갛지 않은 서늘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웬 사랑! 침묵이라니까! 그는 고개를 젖는다. 소리는 계속된다. 아무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에 가진 모든 것을 다 소모해버리고 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남지 않았지, 그는 되뇐다. 멜로디 없이. 그날 이후 나는 죽었소. 눈물대신 말을 그는 토하고 피도 살도 영혼도 내겐 남지 않았소. 죽지 않은 것은 나의 허물 뿐~~

 

..........................................................
계간문예 2022 가을호 69,  248-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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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1. 7. 10. 22:35

 

초겨울

 

 

 

초겨울이다. 느낌으로는 초겨울이 제일 춥다. 한낮인데도 쌀쌀함은 누그러지지 않는다. 뺨이 더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은 오늘 시작할 새 일자리로 인해서다. 요양보호사 – 명칭은 길지만 하는 일은 짧다, 시간제 돌봄이다. 첫날은 조건 때문에 밀당도 해야 한다. 흔하디흔한 아파트 대문 앞에서 숨을 고르는 찰나, 첫 번째 시험은 초인종이었다. 하필 초인종이 두 개가 있을 게 뭔가. 첫 동작부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신경이 곤두선다. 염려는 기우였다. 띵 똥 한 번에 재빠른 답이 온다. 예에, 하는 소리와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가 함께 다가온다. 대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얼굴은 - 누굴까? 돌봄 어르신은 80대 남자라던데, 그러니까 보호자인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시는 거죠?

아, 네. 오늘 저 혼자 오게 되었어요.

아무려나, 어서 오세요. 아파트 쉽게 찾으셨지요?

네, 뭐.

 

첫 인상은 푸른 나무들로 계절이 겨울인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집이었다. 넓지도 않은 거실인데 한쪽으로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창 쪽으로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즐비했다.

밖에선 얼겠지, 겨울 추위에. 그런데 환자 있는 집에 무슨 화분들을! 하긴 강아지나 고양이들이 튀어나오는 것 보단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는 흔한 아파트 풍경이었다. 텔레비전, 소파 그리고 탁자. 좁은 거실에 탁자는 크고, 탁자 위에는 신문 잡지들이며 뭔가가 수북하다. 노인들이라니! 소파에 누워있는 사람이 내가 돌 볼 어르신일 게다. 소파에 누운 채, 낮인데, 그래서 아픈 거로구나, 생각을 하는데, 사람이 들락거려도 반응이 없다.

저, 그런데 태그는 어디다가, 출근부 말예요.

일단 집에 들어왔으므로 출근부에 태그를 해야 시간이 기록될 테니까 그것부터 물었다. 여자가 가리키는 곳은 신발장이었다. 뭐야, 날마다 신발장부터 열어야 한다고? 하필 냄새나는 신발장을! 하긴 어떤 집은 환자가 이 낯선 물건을 훼손하곤 해서 싱크대 문짝 안쪽에 붙여놓기도 한다더라. 싱크대고 신발장이고 냄새는 피할 수 없는 자리다. 뭐, 찌든 담배 냄새만 없어도 다행이다.

 

올라오세요. 오늘 이 양반 꿈쩍을 안 하네요. 점심 다 식는데도.

그러고 보니 식탁이 차려진 채다.

집안은 음식 때문이었을지 아늑할 정도로 따뜻하다. 아, 다행이다!

그럼 어르신이 오늘 특별히 아프신 거예요? 치매 5등급, 1939년생, 남자, 그 외엔 별 특이사항 말 없었는데요.

아뇨. 뭐랄까, 반응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지요. 원래도 말이 적은 사람인데, 최근에는 아예 입을 닫고 살지요. 하고 싶은 말은 겨우 눈으로 해요.

눈으로 말을 해요?

예, 그런 셈이에요. 뭔가 필요하면 그 쪽을 쳐다봐요. 그럼 냉큼 집어다 주면 또 말없이 받아들고. 그러니까 탁자 위 신문을 쳐다보면 신문을, 리모컨을 보면 리모컨을 집어달라는 것이고, 저쪽으로 멀리 냉장고를 쳐다보면 물을 달라는 식이지요.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이 집 보호자는 내가 환자 상태를 체크를 하는데도, 내 이름이 뭐냐, 오기로 확정한 것이냐 등을 묻지도 않고, 내가 온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듯 편안하게 말을 하고 있다.

예상 외로 젊은 분이 오셨네요. 나이 지긋한 분 부탁했었는데요. 헌데 진짜 젊은 분이 오니까 집안이 갑자기 팔팔 살아나는 것 같은데요.

 

이건 또 뭐야. 그러니까 내가 기대한 것보다 한참 많이 젊은데, 그런데도 통과라고? 아무튼 이 할아버지 서비스를 맡으려면 조건은 미리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저, 그런데 여기 서비스 와달라는 시간이…….

아, 시간요. 시간이 왜요?

저랑은 딱 맞지는 않은데, 과장님이 일단 가보라고 해서요. 저는 1시에 오는 것이라야 맞거든요.

1시라야 된다고요? 그럼 1시 반이면 못 오시나요? 그런 거예요?

그게 좀, 오전 끝나고 중간에 시간이 많이 떠서요.

어쩌나. 1시부터면 4시에 끝날 것인데, 내가 가끔 4시 좀 지나서 집에 오게 되니까 4시 반까지는 봐주셔야 하는데. 참, 선생님 이름이 지은이 씨라고? 차 과장님이 전화했어요. 지 선생님은 추가시간은 안 하실 거라고도.

네, 저는 해당 서비스 시간만 봐드리고는 끝이에요. 저는 아무래도 1시부터면 좋겠는데요. 점심시간에 집에 들어갔다가 오기는 너무 멀고, 그냥 오자면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서요.

…….

저쪽에서 말을 쉰다. 생각이 길어지나 보다. 아쉬우면 나한테 맞추겠지 뭐. 난 쉽게 생각했다. 일단 세게 나가자 싶었다. 초면인데 알게 뭐야, 아니면 말고.

시간이 정 맞지 않으시면, 그게. 아무튼 오늘은 제가 일단 왔으니까 세 시간은 해드리고 갈 거고요.

아니, 잠깐만. 뭐, 1시 반부터면 못할 수도 있다고요? 그럼 서로 15분씩 양보하면 어때요? 1시 15분부터, 난 혹시나 늦어도 4시 15분엔 돌아오고.

 

이번에는 내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밀린 것이다. 스스럼없이 시간을 정하고 만다.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인데 15분을 밀렸다니!

그렇다면 나머지라도 확실히 못을 박아야 한다. 우리 요양보호사가 해드리는 것들 서비스 범위는요, 라고 말을 뺐는데 그것도 쉽게 통과였다. 환자 아닌 가족을 위한 생활지원은 금물이라는 것부터, 책에 써진 것 외우듯이 다 읊어댔다. 내가 놀라는 눈빛을 하자, 센터에서 보낸 파일 안에 다 있어서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다만 부엌에서는 점심 설거지만 부탁한다면서, ‘설거지만’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환자 밥 챙겨 먹이는 것 - 만들고 먹이고 설거지하고 - 그것과 2인분 설거지만 하는 것의 노동량을 따져보려다가 말았다. 음식 만들기가 더 까다로울 테니까. 엉거주춤, 그것도 밀린 사이에 보호자는 말을 이어갔다.

것보다 문제는, 뭐냐면 우리 양반이 말을 잘 안 들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신청도 안한다니까요. 그게 좀 힘드실 거요.

네에, 그거야 우리 일이니까요.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움직이는 반경은 멀리는 안 되는 것 아시지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쐐기를 박았다.

멀리요? 산책은 멀리 안 가시는데, 못 가는데.

심부름 같은 것 말이죠, 혹시라도 무슨 심부름이나.

심부름이요? 심부름 무슨?

심부름을 이해 못하는 것이 이 집에선 심부름은 없나 보다. 잘 되었다. 보통 혼자 사는 어르신들 돌 볼 때에는 이것저것 해달라는 부탁들이 많다. 마트며 반찬가게 들르라는 것은 기본이고, 가끔은 엉뚱한 부탁도 한다. 진짜 엉뚱한 심부름 말이다. 심지어 폐지나 병 같은 것, 모아놓은 고물을 팔아다 달라는 부탁을 해서 고민이라는 동료도 있었다. 고물을 모을 정도인데 재가방문요양 서비스라고? 잠깐 의아했지만, 아서라! 복지사회는 좋은 것, 긁어 부스럼 낼 일은 아니다 싶기도 했다.

아, 물론 병원 가실 때는 함께 모시고 가죠! 병원엔 멀리 가더라도 환자의 진료 기록이 컴퓨터에 뜨니까요. 우리 요양보호사 행동반경과 환자가 함께 있으니까요.

엄격하군요. 그래야 하겠지만요. 암튼 그럼 되었네요. 1시 15분에 오시는 걸로.

우물쭈물 일은 결정이 났다. 이 보호자는 일을 너무 쉽게 결정한다. 내가 그만 그 페이스에 밀렸다. 평상시 내 일은 아니다. 뭐, 정 아니면 한 달만 하고 말지. 아쉬운 건 언제나 노인들, 내가 갑이면 갑이지 을은 아니다. 일 할 데는 널려있다. 뭐, 잠시 안하고 쉬면 쉬는 거다. 나는 결코 생계형 노동자는 아니니까.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여기 안방이 환자가 쓰는 방. 여기 욕실 쓰고. 그런데 주로 거실에 저러고 있지요. 그런데 지금도 자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선 점심 먹을 수 있게 해야겠어요.

여기요, 일어나 보세요. 오늘 새로 지 선생님이 왔어요. 말동무 해드릴 거요. 손잡고 산책도 하고. 나는 비틀거리잖아요! 어디, 일어나 봐요!

눈치를 보니 내 차례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저는 지은이라고 하는데요. 오늘부터 어르신 돌봐드리러 왔답니다. 어르신, 일어나 보세요. 점심시간이 늦었거든요.

…….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눈매가 촉촉하다. 계속 감고 있어서 물기인가? 아니, 80대라고 했는데 소년 같은 눈망울이네. 백발의 소년이네.

어르신, 저는 지은이고요. 이제 일어나셔요, 식사하시게요. 식사하시고 나서…….

뭐? 지 - 은 - 이? 지은이라? 책을 썼다고? 지은이라면 내가 지은인데, 이게 대체?

입을 연 것은 반가우나, 하필이면 내 이름이 귀에 걸렸나 보다. 인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렸다. 어르신이 벌떡 일어나더니 탁자에서 신문이며 책들을 주섬주섬 치우면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아니, 내 책이, 책이 어디로 갔나.

무슨 상황인가. 무슨 책을 찾을까. 부엌 쪽에서는 내색이 없다.

엄마아, 준이 엄마, 내 책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아내를 찾는 모양인데, 그런데도 보호자는 무반응이다.

아니, 어르신, 뭘 찾는 건 나중에 하시고요. 우선, 인사드릴게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이 지은이라고요. 이름이 지은이.

아하, 지가 은이라고. 지씨라. 어디 지씬가?

충주 지씨예요. 어르신은 이름이,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 나는……, 에이, 애들이 어른 함자를 묻나. 내가 내 이름을 모를까 봐?

아유, 어르신, 죄송해요. 어서 일어나셔요. 식사시간이에요.

 

그렇게 해서 점심 식탁에 모여 앉는 데까지 또 십여 분이 흘렀다. 그 상황에 더해서 손을 씻고 오느라고 그런 것이다. 노인들이 화장실에 가면 십분은 기본인 경우도 많은데, 이 어르신도 그런 건가 보다. 대소변 문제는 없나? 화장실 쪽으로 따라가면서 직업적인 걱정이 섞인다. 그 사이 냄비들이 가스레인지 위로 다시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밥과 국이 올라온 뒤에도 한참을 레인지 앞에 서 있던 보호자가 숭늉과 누룽지를 내온다.

뭐야, 숭늉을 먹는 집도 있어? 의외이기도 하고, 이러다가 된통 힘든 집에 걸린 것이나 아닌가 하는 불안도 스멀거렸다.

지 선생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 네.

보통은 1시 반까지는 밥상이 끝나요. 오늘은 늑장을 부려서는.

상관없어요. 어떻게 드시나 볼게요. 근데 엄청 골고루 차리셨네요.

뭘 먹을지 몰라서요. 아무튼 이제 말 좀 걸어 보세요! 그것이 문제랍니다. 말을 들어야 뭘 골고루 먹게 하거나 말거나.

맞다, 내 차례다.

어르신, 맛있는 것 많이 차려주셨네요. 여기 동치미, 이 국물부터.

내 목소리는 원래 큰 편이다. 또 여기 사람들과는 다르게 서울말투를 쓴다. 그래서일까? 말을 듣지를 않는다던 어르신이 뜻밖에 반응을 보였다. 비뚤게 앉은 자세도 ‘달래서’바로 잡았다. 그런데 먹는 일에 조금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것 드셔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그릇째로 다 비우려고 한다. 저것 드셔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또 그릇째로 다 비우려고 한다. 아, 얼핏 보기에는 정상인데 인지문제가 있기는 있구나.

 

 

아주 엉뚱하게, 혼자 단출하다 못해 초라한 밥상 앞에 앉아있을 어머니가 아른거린다. 일하는 중에 다른 쪽으로 빠지는 일은 드문데, 스스로 갑작스럽다. 어머니는 아예 밥상을 차리지도 않는 끼니가 많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밥상을 챙기는 대신에, 돈을 번답시고 생면부지 ‘어르신’의 밥 시중을 들고 있다.

내갈비도 여적이고마 또 도가니탕을 보냈디야. 그리 보내쌓면 뭘햐. 느그덜이나 노나 먹지야. 느그 아부이가 계심사…….

홈쇼핑에서 갈비탕을 사서 보내드렸더니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는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서 아버지 생각을 하신 거다. 그러고서 냉장고에 그냥 쌓아둔다. 누가 집에 찾아가서 함께 굽거나 끓이거나 해서 드려야 드신다. ‘내’갈비라고 하시는 것은 LA를 ‘내’라고 읽으시기 때문이다. 에이자 위쪽이 넓게 쓰여서 그리 보이기도 한다. 아무려면. 드시기만 한다면. 그런데 아버지 말씀 꺼내시는 것이 수상타. 아버지가 고기반찬을 좋아하신 것은 맞지만, 돌아가신 것이 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가 말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장롱 속에서 모자로도 살아있고, 화장대 서랍 속에도 살아있다. 이 참빗이야, 느그……. 여전히 아버지를 집안 어딘가에 숨겨 놓고 사시는 통에, 우리는 어머니 앞에 가면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가 언제 되살아나서 우리랑 섞여 앉아계실지 모르는 일이니까.

점심은 드셨을까. 요즈음 엄마한테는 둘째언니가 챙겨 보내는 뉴케어가 답인가 보다. 연명은 되실 테니까. 아버지부터 우리 형제자매들, 그러니까 온통 거구들인 지씨들에 비하면 어머니는 원래 작은 체격이다. 나이 드시면서는 더더욱 작아져서 아기 같다. 아기 같은 어머니는 유난히 추위를 탄다. 내가 엄마를 닮았다. 이런 겨울 날, 추워서 방문일랑 열지도 않고 방안에서 무얼 하실까. 전화라도 하고 지낼 형제자매도 없으시다. 손위 외삼촌 한 분은 돌아가셨고, 다른 식구들은……. 어머니는 문경 외가 말씀을 극히 삼간다. 문경을 떠난 것이 하도 오래전 일일 뿐 아니라,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잠기신다. 문경의 채씨 세거지의 비극, 아니 참상, 아니 학살은 - 멍해 있는 사이 점심이 대충 끝난다.

 

점심 뒤처리를 하는 동안 - 오늘은 첫날이라고 함께, 주로 주인이 치웠다. - 어르신은 다시 거실로 나가서 소파에 ‘제 자리’하고 있었다.

커피 하죠? 점심 후엔 일단 피곤을 덜기 위해서 한 모금. 잠깐 이리 오세요.

저는 가지고 왔는데요. 두 잔째 커피를 따르던 보호자의 말을 내가 막으며 에코백에서 보온병을 꺼내왔다. 꺼내 입으려했던 오리털 조끼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이집은 정말 따뜻하다.

예? 커피를 가지고 다녀요? 우리 집에 오면서 커피를 들고 왔다고요?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나겠어요.

아니, 서비스 다니다 보면 커피를 전혀 안 드시는 어르신들이 많아서. 또 제가 원래…….

원래고 뭐고, 집에 커피 둘 다 있어요, 아메리카노도 양촌리도.

양촌리요?

아, 밀크설탕커피, 왜 옛날 농촌드라마에서 달달하게 마시던 커피요. 거기가 양촌리였나 뭐 그래요. 아무렇거나, 오늘은 우선 이 양반 병력을 보실래요? 가만, 건강메모 - 여기 맨 앞에는 평생 큰 병 앓은 내력이고, 그 다음으로는 올해 이 요상한 발병부터 간간히 메모 해 둔 것들.

아무렇지도 않게 핸드폰을 내민다. 갤럭시 노트다.

그러니까 지병이 꽤 있었다가, 아, 네, 약간의 인지문제 그거야 보통 그러지만, 루이소체? 이런 종류는 처음인데요. 가만, 환시와 악몽이 문제라고요?

엠알아이며 브레인페트까지 다 검사 했어요. 환시라는 것 첨엔 무섭더라고요. 심한 착각, 착시 그런 거죠. 가끔씩 엉뚱한 질문에 놀라곤 해요.

어떤…….

조용히 앉아 있다가, 우리 지금 둘이만 있는 사는 거 맞아? 이러는 거예요. 누군가랑 셋이서, 어떤 때는 여럿이서 함께 살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의사선생님 말로는 실제로 보여서 그렇다니, 좀 섬뜩할 때가.

그러시겠네요. 그럼 처음보다 더 나빠지신…….

내가 아나요, 병원에서도 검사를 해서 수치가 나와야 알던데요 뭐. 아무튼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지 말을 좀 시켜 보세요. 소뿔은 단 김에 빼랬다고, 1라운드가 중요할 것 같아요. 이리 오세요.

 

등을 떠밀리다 싶게 거실로 나온다. 뒤따라 나오던 보호자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소개한다. 상황을 확실하게 해두려는 것 같다.

저기요, - 남편한테, 저기요? - 조금만 앉아서 쉬다가 누우세요! 오늘 지 선생님, 여기 지 선생님 만나서 반갑지요? 우리 애들 또래 같아요. 먼 데 사는 딸이 왔구나, 그리 생각하세요! 자, 지 선생님!

공이 내게로 넘어 왔다.

어르신, 오늘 저 만나서 기쁘시죠?

대뜸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던 보호자는 자리를 뜬다. 큰일이다. 첫 번째 펀치에서 성공해야할 텐데……. 은아, 힘내자! 할 수 있어!

 

환자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나에게로 집중시키기 위해 내가 가진 기술을 발휘할 때다. 어르신들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전혀 먹히지 않는다. 빤히 쳐다보기만 할뿐 입은 꽉 다문 상태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유리창 쪽 제법 큰 화분들 앞쪽으로는 자잘한 다육식물들과 선인장들이 있었다. 촘촘한 가시들이 불안하다. 어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눈앞에 보이는 화분들로 화제를 옮겨 보기로 한다.

어르신, 아파트에서 어떻게 이렇게 큰 나무를 키우셨을까? 이 키다리, 아니 이렇게 잎들 무성한 것도 있네요. 이 가지는 제 키만 하겠어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어르신, 그런데 이것들 이름 좀 가르쳐 주실래요? 제가 처음 본 것들이라서 궁금하거든요. 요것들은 다육이라죠? 다육이라도 따로 이름이 있다던데. 이 솜털만 많은 꼬맹이 선인장들, 이것들은 또…….

이런 것들 처음 보나? 뭐가 그리 궁금하나?

옳거니. 선인장에서 끌려왔다. 계속 선인장으로 가보자.

이렇게 어찌 보면 못 생긴 것들인데, 죄송해요, 근데 귀하게 귀하게 키우시네요.

갑자기 눈을 들어 이리저리 돌린다. 사람을 찾는가 보다. 보호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아까 방문 소리가 나더니 어느 방에 들어가 있는지 아무 기척이 없다. 어르신이 턱을 들어 부엌 쪽을 가리킨다. 보호자를 오라는 건지, 보호자를 가리키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뜻을 모르겠다.

보호자분요? 할머니요? 안 보이시는데요. 왜요?

저 사람 거요.

아니, 여기서 주인이 따로요?

그것만 중하게 보듬는다 말이요.

보듬어요? 선인장을?

아, 보듬어 키우다시피 한단 말이지. 물어봐요. 밖에도 끔찍이 챙기는 것들 있어.

베란다 쪽으로 턱을 들면서 말한다. 옳거니, 화초들에 관해서 이견이 있구나. 호불호가 다르다 이 말이겠다.

밖에 또 화분들 많아요? 그러네요. 밖에도 많네요. 그럼 어르신은 어떤 것들을 좋아하시나요? 밖에 내다보고 올게요. 같이 보실래요?

아이쿠, 성공이다. 화초를 뭐라 가르쳐줄 게 있는지 부스스 일어난다.

이쪽으로, 예. 자, 가시게요.

정말 베란다에는 놀라울 정도로 크게 자란 선인장들이 고개를 꺾고 있었다. 천장에 닿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리고 자란 것들이다. 불쌍타. 이 추위에 너른 창이 반쯤 열려 있는데도 베란다 볕이 좋은 듯 했다. 아예 온실처럼 푸른 잎들이 무성하다. 넝쿨로 자라는 것들도 여럿 걸려있다.

우와, 선인장들, 소철인가, 아예 꽃집 같은데요. 어르신은 어떤 걸 젤 좋아하세요?

해피트리, 요거 해피트리야.

아, 그런 이름도 있었군요. 해피……. 그럼 이 엄청 큰 나무는요? 나무 가지 요거 젤 큰 거는 제 팔 길이만 하네요. 고무나문가요?

맞아, 요거 잎 끊어지면 그 자리에서 하얀 고무액이 흘러요. 눈물같이 뚝뚝.

눈물 같이요? 어머나 시를 쓰시는 분 같아요.

시를?

예, 시인 같으세요.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네?

몰라, 다 잊었어. 나는 다 잊었어.

입을 다시 꼭 다문다.

어르신, 어르신?

다 잊었어, 다.

그것뿐이었다. 눈을 다시 반쯤 감더니 그런 채로 소파로 향한다. 키 큰 등의자에 부딪지 않게 하려면 손을 잡아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정적이 감돌았다. 사뿐 발자국 소리와 함께 보호자가 나타났다. 뭐라고 부르지? 잠깐 고민이 되었다. 울 어머니 또래는 한참 아닌데 어머님이랄 수도 없고. 보호자님이라고 하자니 너무 딱딱하고. 이래서 독거노인 돌봄이 속 편한 것이구나. 이게 뒷북이다,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다니. 돌봄 대상과 단 둘이가 아니라 보호자와 삼각관계가 되나 보다. 삼각관계라는 것이 연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 돌봄 시간 내내 보호자가 함께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불편감이 확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말아? 집을 나서면서, 아니 나서기 전 5분 전에 조용히 말하면 된다.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요, 저한테는 시간이 아무래도 맞지 않아서요. 이렇게 말하면 감정 섞이지 않은 허물없는 이유가 되어 줄 것이다. 일단은 호칭 없이 말만 하자.

어르신이 다시 주무시려나 봐요. 정말 말씀 없으시네요. 시만 쓰면 다냐, 어쩌고 그러시던데, 무슨 말씀이셨을까요? 어르신 시인이세요?

…….

아무 대꾸 없는 것이 노부부가 똑 같네, 뭐.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무슨 반응이 저러나. 보호자는 말은 없이 무슨 주머니 같은 것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잠 잘 것 같다는데 부엌엘? 정적이 괴롭다. 부엌에 따라 들어가 보니 구석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그것을 돌리고 있다. 구수한 향기가 피어난다. 꺼내 온 것을 보니 핫백이다.

낮잠 청하니까 발 따뜻하게 해주려고요.

아, 네, 핫백 냄새가 좋으네요. 뭐예요?

현미 자루. 몇 년 쓰면 알게 모르게 점점 타버려서 바꿔줘야 해요. 한 번 바꿔 넣었어요. 이건 안심이죠. 전기방석은 온도조절 잘 못하면 큰일 나겠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러네요. 냄새 너무 좋아서 저절로 잠이 올 것 같네요.

정말 그랬다, 잠에 취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따뜻함! 향기!

 

 

서울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벌써 30여 년 전, 서울 살이 첫 해, 봄여름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고 갑자기 겨울이 닥쳤다. 갓 상경한 젊은 애들을 위한 방은 하나같이 딱 한 뼘 마루, 얄따란 방문, 그리고는 방이었다. 반대쪽에 달랑 봉창이 있었지만, 황소바람은 냉돌까지 내려꽂혔다. 시골 고향을, 따뜻한 아랫목을, 더 따뜻한 엄마 품을 떠올리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면 눈까지 얼굴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우리가 결혼을 했을 때, 그해 겨울에는 따뜻한 몸이 옆에 있었다. 아, 사람도 따뜻하구나. 엄마가 아니어도 따뜻하구나. 처음에는 나보다 더 따뜻한 몸이 내 차가운 몸을 차갑게 느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을까. 애기 기저귀가 모자라서 자다가 밤 빨래를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잠들어 있던 그이가 내 손에 깜짝 놀라 움찔했을 때서야 깨달았다. 내 손이 차가울 때마다 얼마나 차가웠을까. 깨달음이란 언제나 늦게 온다. 그 뒤로는 그이가 내 손을 잡아줄 때라도 손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방안을 따뜻하게 해놓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것이 맞다. 보일러 더 올릴까? - 뭣 하러, 충분하잖아! 정 추우면 옷을 더 입지! 혹시 이런 대답이 두려워서 추위를 그냥 견뎠다. 지금은 보일러 더 올릴까 물어보지 않고 더 올린다. 춥지 않아도, 춥기 싫어서, 추웠던 날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디에서나 따뜻해야 몸이 풀리고 마음이 풀린다. 이 집은 일단 따뜻하다. 그것은 합격점이다!

 

지 선생님, 잠이 온다고요?

아아니요!

핫백 같은 것, 이이는 전엔 뜨거운 걸 참 싫어하더니. 나이 들면서 바뀌네요, 사람이. 시만 쓰면 다냐, 그랬다면, 그거 「넋두리」란 시예요. 젊어서 술을 마냥 마시고 다닐 때면 내가 놀렸어요. 시만 쓰면 다냐 / 살림이 기우는데 / 시만 쓰면 다냐 /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그런 비슷한 시요. 그땐 못들은 척 하더니만, 그걸 어찌 기억하냐. 소싯적 이야기구만,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그런데 사람이 엄청 변해요. 먹는 것도 완전 달라져서, 게다 새우다 먹는 시늉만 겨우 했던 것들을 지금은 엄청 좋아해요. 평생을 살고도 속마음은커녕 좋아하는 음식도 짐작을 못하네요. 지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사람이 늘 한결같던가요?

 

사람이 한결 같은 존재인가, 나이 들어 또는 어떤 상황에서 성품이 바뀌기 마련인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이 할머니, 사람을 통째로 연구할 일 있나.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걸까. 인지문제가 생겨서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일까. 그래도 생뚱맞다, 우리가 언제 봤다고 철학을 하재? 그래도 대꾸는 해야 했다.

별로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그래도 사람이 변하는 거라서, 애들 두고도 이혼도 하고.

아무리 얼결이라도 그렇지, 갑자기 내 말이 왜 이혼으로 튀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내 인생에 이혼은 찾아 볼 수 없는 단어이다. 자라난 곳 청원의 시골 정서에 더해서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한 번 맺어진 인연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라고 배웠다. 요란하게 연애하다가 달리 결혼하는 일들도 가까운 주변에는 없었다. 그런 내 입에서 느닷없는 이혼 소리가 튀어 나오다니.

아니 제 말은요, 연애결혼 해놓고도 싸우기도 하고 혹시 이혼도 하고 그러는 걸 보면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순이 생각이 났다. 일하다가 만난 친구인데, 동갑이라서 친구하는 사이다. 세상에나, 시어머니 중풍 간호를 8년씩이나 해냈다는 착한 정순이. 그때는 요양병원이 흔치도 않았고, 입원한다 해도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겠지. 뇌졸중이 중풍으로 끝나도 온전히 가족의 몫이었다. 그랬던 정순이 이혼을 했다. 이혼을 당했다. 일찍 정년을 한 남편이 단란주점 여자한테 빠졌더란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하고 흔한 스토리인데, 그런 일이 드라마가 아니라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양심은 있었던지 당시 1억5천쯤 하는 너른 집을 팔아서 5천인가를 아내에게 위자료로 줬다는 소문이었는데, 쌤통, 지금 시가로는 15억도 더 간다 했다. 정순은 노총각 동창생을 만나서 재혼도 했으니 덜 불쌍하다. 그래도 흠은 흠이다, 이것이 나 꼴통의 생각이다.

우리는, 나는,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상하게도 그이에 대한 내 감정은 여전히 처음의 설렘에서 퇴색되지 않았다. 불만이 있어도, 내가 싫어하는 일을 그이가 하더라도, 내가 싫은 일을 내게 하게 하더라도, 결국 다 이해해버리고 마는 나는 바보 멍청이다.

그래도 천성이라는 것도 있고, 글쎄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나는 아무래도 흑백으로 나누어서 답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딱 잘라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하고 정해본 일이 드물다. 정식으로 이유를 대면서 이 일은 해야 하니까 한다 라거나, 하지 말아야 해서 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서지 않는다. 물론 손익은 반드시 따진다. 계산이, 예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어딘가로 쏠리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한다. 그뿐이다. 이런 대화는 머리 아프다.

 

 

익은 멜로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내 것이다. 죄송해요, 라고 하면서 얼른 집어 들었다. 속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일단 어색한 대화에서 빠져나왔으니까.

응, 데레사 언니. 나 지금 일하고 있어서. 아니, 괜찮아요. 좀 있다 저녁에 내가 전화할게, 으응.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데레사, 세례명인가 보다. 엿듣게 되네요, 들리니까. 지 선생님 성당 다니요?

아, 네. 집안이 다요. 얼른 알아들으시는 것 보니까, 여기 어르신들도 혹시?

아니요. 우린 아니에요. 사람은 결국 평생 장님이라는데, 신앙도 없고.

장님요? 평생?

예, ‘사람은 평생 장님이다.’ 괴테라던가, 어디서 본 명언이요. 산다는 게 뭘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니까 장님이라는 거죠.

 

괴테고 뭐고, 평생 장님이라니. 이 아줌마, 사람 멍 때리게 하네. 미래를 설계하고 참고 견디면서 준비하면 보람된 내일을 맞을 것이라고, 그렇게 의심 없이 살아온 나로서는 듣기 허망한 말이다. 기도하고 노력하고 주님의 인도에 따르고. 그런데 이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라니 의지할 데가 없겠다 싶었다. 일 없이 나는 신앙을 권면하는 역할놀이에 들어갔다.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 라고 무조건 시작해보시라고, 피라클리토 성령에 관해서도 말하기 시작했다. 들은 척 마는 척이었다. 이 집 사람들은 노부부가 다 내숭이다. 보호자랑 맞을 필요는 없겠지만, 뭔가 영 엉뚱하다.

지 선생님, 면전에서 좀 그렇지만,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 참 좋으요. 거기다가 신앙까지, 복 받은 사람이요.

제가 복을? 복을요? 웬 복?

전복을! 농담! 지 선생님은 전혀 50대로 안 보이요. 해맑고 건강한, 몸과 맘 둘 다 건강한 사람 인상이라서 너무 좋으네. 잘 살아왔다는 증거인가.

무슨 소리야. 언제 봤다고 농담씩이나! 요양보호사나 하고 있는 나더러 잘 살아온 것 같다고? 보통은 내가 이래 뵈도 어엿한 건물주라는 것을 알 리 없으니, 다들 그저 도우미나 알바 취급 아니던가. 물론 나는 잘 살아왔다. 당장 돈 아쉬워서 일 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시내에는 3층 건물을, 시골에는 농가주택을 가지고 안정적인 노후를 기대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맘 추슬러가며 일하고 모으고 일하고 모으면서 살아왔는데. 곁눈 팔지 않고, 곁눈 팔지 않으려고 맘 잡고, 맘 잡고, 맘 잡고! 그러니까 잘 살아왔는데, 잘 살아왔을 거라고 남이 말하니까, 갑자기 잘 살아오지 못한 느낌이 드는 건 또 뭔가. 지금 어쩌자고 두 타임씩이나 일을 하려는 것인지. 이 자체가 잘 살아왔다는 말과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도 정말 이상하다. 인상 좋다는 말, 어색하긴 해도 듣기 좋은 말들이라서 이 집을 거절하고 갈 이유가 적어진다. 당장 도움이 필요해서 나를 붙잡으려는 뻥튀기는 아니겠지, 설마. 그런데 이 할머니, 날 언제 봤다고 의심 없이 믿는 눈치네. 어쩐다?

 

보호자는 순간 어르신 쪽으로 다시 가더니 들여다본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그냥 살핀다. 살짝 건드리면서 깨운다.

보세요! 여기 지 선생님이랑 사귀어 봐야지요. 무슨 말이든 해 봐요. 심심하면 지 선생님이 내일 우리 집에 안 올지도 몰라요.

협박 아닌 협박이다. 그런데 그 말에 움찔 반응을 보인다. 어르신이 몸을 일으킨다.

아, 다행이네. 지 선생님, 이쪽으로, 여기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세요. 우리 둘만 있으면 정말 심심해요. 그동안 할 말을 죄다 해버려서 새로 할 말들이 없거든요.

정말 내 차례다.

어르신, 네, 그렇게 앉아서 기지개도 켜시고, 자리에서 운동도 하고 그러시게요. 자, 우선 두 손을 쥐었다 폈다! 이렇게요. 팔도 흔들어 보시고, 어깨도 들썩! 제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걸음은 잘 걸으시는지. 자, 일어나서 조금 걸어보실래요?

보호자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어르신이 일어나 앉았다. 어깨도 들썩들썩 해 보인다. 아, 다행이다. 반응이 너무 없었더라면 사실 할 일이 없으니 어색할 노릇이다.

자, 이렇게요! 으샤, 으샤! 그런데 혹시 밖에 나가보실 생각 없으세요? 오늘 쌀쌀해도 바람 별로 없어요, 지금 햇볕이 너무 좋아요. 조금 있음 해가 사라지잖아요.

어르신이 두리번거린다. 아내를 찾는다. 아내는 어느 새 반코트를 가지고 나온다. 체크 머플러도 함께다. 더러 산책을 나가곤 했는지, 어르신 혼자서 천천히 겉옷을 입고, 장갑도 끼고 마스크까지 챙긴다. 아내가 머플러를 고쳐 매준다. 예쁘게 매만져주기를 기대하는 소녀처럼 얌전하게 내맡긴다.

마스크까지 중무장이시네요, 요기 아파트 마당만 갈 거 아녀요?

아, 황사를 싫어해서 마스크를 꼭 끼고 나가신대요. 겨울엔 따뜻해서 좋으니 일석이조죠, 그렇지요?

아내도 겉옷을 챙겨 입고 나선다. 자, 그럼, 오늘은 셋이서 함께 산책을 나가 보죠.

오늘 셋이서 함께.

어르신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갑자기 즐거운 기운이 감돈다.

대문을 열자 찬 기운이 확 밀려든다. 좁은 대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켜서 나서면서 나는 이들과 함께 다시 이 따뜻한 집안으로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어쩌면 내일도 그 다음 날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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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21 여름호 통권 64호, 208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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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