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4. 3. 25. 23:54

 

「목소리」

 

 

목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졌구나, 라고 느껴졌다. 오늘 아버지와 나누시는 가벼운 대화에서 그랬다.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되거든요. 내가 한다니까요.

빈 밥그릇 국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생소했지만, 그걸 그렇게 말리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높았다.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집으로 가자고 작정한 것은 명절엔 더욱 허전해하실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들 없이 딸 셋을 둔 부모님의 얼굴엔 딱히 썰렁함은 아니라 해도 뭔가 어색함이 어른거린다. 애써 괜찮다는 과장으로 포장되어 표피가 평상시의 부드러움을 잃는다. 부드러움을 잃은 주름은 갈라질까 말까 바스락거린다.

 

이번 설에도 막내 옥실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에 사는, 미국인이 된, 미국인과 결혼한 옥실인 만일 한국에 온다더라도 설이 아닌 추석에나 올 뿐이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이.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미국의 큰아버지에게로 입양되어 간 옥실을 어머니는 가슴에 두고 사실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지막 미토콘드리아의 전수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어머니에게서 딸들로만 유전된다는 미토콘드리아 ― 막내는 정말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름도 제이드가 되어 버렸으니까.

 

둘째 은실은 늘 가까이 있다. 바리데기 ― 일곱 번째 얻은 딸은 아니나 부모님 곁을 유일하게 지키는 은실이 바리데기가 맞다. 언니와 막내에 끼어 치인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고, 공부도 시쳇말로 다 못해서 그렇다. 은실은 고 1때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너무 가까이서 겪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대학진학을 접었다. 하지만 일찍 결혼해서, 지금까진 우리들 중 유일하게 손자 손녀를 안겨 드린 효녀다.

 

나 ― 어쩌다 막내서부터 거꾸로 설명이 되었는데 ― 맏이인 나 한금실은 교사의 자녀들이 많이 그러하듯 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일직선으로 나갔다가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땐 벌써 은실이 김실이 된 후였으므로, 나는 원래의 금실 대신에 한박사로 불렸다. 더구나 한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목소리엔 어딘가 자랑 비슷한 여운이 깔렸다. 지금도, 그 한박사가 명예도 돈도 별로 들여오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건 여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1944년생으로, 요즈음에 말하는 신중년 세대이시다. 일제 강점기 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그들은 일제 때 강제징집당한 146만 한국인의 숫자가 말해주듯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야 했던 세대다. 또한 형제들을 사상의 갈등으로 잃기도 한 세대가 그들이다. 국제평화기금이 들어오던 때에는 갑작스레 경제무대에서 은퇴 당한 신중년 세대의 운명 ― 거기에서 아버진 자유로우시다. 교사는 강제 은퇴는 없었다. 대학 공부는 겨우 열에 하나나 했을 이들 세대에서, 아버지도 사범학교 졸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가 야간대학 과정을 밟아서 대졸에 합류하신 전설적인 분들의 하나이다. 다만 아버지에겐 아들이 없다. 2008년 은퇴하시기 전에는 딸자식이긴 해도 자식인 내가 좋은 자리를 잡을 줄 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박사가 모교에서도 밀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은퇴 후 오륙년의 시간을 우울한 적응기로서 사시는 셈이다. 그 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묻지 마라 네 살 터울이시다. 6.25 때 기억은 없다 하시는데, 큰 이모는 엄마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담벼락에 붙어 선 채로 오줌을 줄줄 싸는 세 살짜리 겁쟁이였다고 놀리신다. 물론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겁쟁이란 느낌은 없었다.

 

엄마, 정말이세요?

뭘?

엄마 어려선 무지 겁쟁이셨다고?

느이 엄마 지금도 겁쟁이다.

엄마가 겁쟁이?

그래. 엄마가 뭐 딱히 하는 것 봤냐?

하루 종일 평생 하시는 건 뭐고요?

이런 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지. 엄만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만 하고 살다가 죽는 게지.

엄마는.

정말이다, 엄마는 한 것이 없다. 딸 셋 낳은 것 말고는.

우리 키우신 건 다 어떻고요.

키우다니, 그냥 너희가 절로 자란 것이지. 내가 뭘 했냐. 품을 팔아 과외를 시켰냐, 차를 태워 나르기를 했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분명 달라졌다. 무심한 듯 말 속에 심지가 생겼다. 뭘까. 설 명절의 부담 때문일까? 설은 아무래도 세배 문화 때문에 공휴일 상관없이 길어지고, 또 어떻게 된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떡국상이다. 그러려면 음식 수급도 절묘한 솜씨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라.

 

어머니가 시장보따리를 여럿 챙기셨다. 내가 유럽에서 가져다드린 낡은 무명 홑겹 가방을 여태도 쓰시며, 그 안에 다른 보자기 가방들을 넣으셨다. 모처럼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리 춥진 않았지만 추운 체 하면서 어머니의 팔을 꼈다. 생각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

 

 

외사촌의 전화번호가 떴다. 팔을 풀고, 양손 손가락에 여러 개 시장보따리를 걸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금실아, 오빠야.

아이쿠, 웬 일?

너랑 의논할 것이 좀 있어서.

나랑 의논을? 의논을? 어디 있는데?

그렇게 만난 외사촌은 더블 에스프레소를 훌쩍 마시고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따끈한 아메리카노 잔에 손을 굽던 내가 말을 꺼냈다.

오빠, 커피 취향이 바뀌었네! 참, 곤충 연구는 겨울엔 좀 쉬는가?

명색이 학문에 여름 겨울이 있겠어? 금실아, 넌 그런데 왜 결혼 안 하냐?

그러는 오빤 왜 안 하는데?

거야, 나는 남자고.

뭐야, 여름 캠핑장에서랑 똑같은 레퍼토리네. 다른 이유를 대 봐!

외사촌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환상이 깨진 지 오래였나 봐.

환상이 깨져?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래.

외숙모를? 외숙모가 왜?

그때 왜, 우리 아버지 갑상선 수술 하실 때.

언제 적 이야기를.

아버지가 수술을 앞 둔 날 밤, 어머니는 병원 침상 곁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 주무셨어. 물론 나도 보호자 노릇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었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거든. 혹시라도 수술이……. 기분이 묘했어, 어머니가 고생 덜 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머닌 만일의 사태가 걱정도 안 되셨는지.

그거야, 아버지들이 씩씩하시잖아. 울 아버지 돌발성난청 치료하실 때도 열흘 넘게 아버지 혼자서 병원에 계셨는걸.

그건 좀 다르지, 난청하고 암이 비교나 되나? 또 그 뿐이 아니었어. 수술은 잘 되었지만, 퇴원하실 때도 좀 거북했어. 아버진 동위원소 캡슐 치료하고 퇴원을 하셨는데, 퇴원 날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호텔에 가서 주무시고 오시랬거든. 식구들이 다 같이 동위원소에 노출되느니, 아버지 혼자 계시다 오시는 것이 맞다고. 생수병 둘을 챙겨 호텔로 따라나서는 날 아버지는 말리셨고, 어머닌 화까지 내셨다니까, 나더러 속이 없다고! 그 세월 지나고서도 부부라는 것이 영원한 평행선이고 남남일까, 난 혼란스러웠어.

그만 둬. 외숙모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지, 합리적이고. 다 지난 일을 왜 그래. 외삼촌도 건강하시면 되었지. 오늘은 뭔가 다른, 할 얘기가 있다는 것 아니었어?

 

외사촌은 더욱 뜸을 들였다.

그게 글쎄.

오빠 뭐? 누구 사귀는 거야? 집에선 반대하고? 아님 선 자리 나온 거야?

그게 글쎄.

글쎄 라니, 어떤 여자인데? 같이 살기라도 해?

살기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신경이 쓰인다는 대상은 …… 외사촌은 아예 더듬거렸다.

구내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 알고 보니 나이는 조금 아래지만 이웃 학과의 연구전임이 된 친구인데, 겨우 한 학기를 멀리서 보고 지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상쾌함과 긴장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단다. 그가 먼저 앉아 있다가 외사촌을 보며 갸웃하고 인사하는 동작, 함께 온 사람이 있더라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앞을 보는 순간, 상대가 아니라 사이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란다. 해서 식당에서 마주치면 자판기 커피를 함께 하자고 청한 적이 여러 번이었단다. 종이컵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마시다가 눈을 치뜰 때면 왼쪽 눈썹이 더 올라가고, 미소 또한 왼쪽 입술 끝이 살짝 더 밀려 올라가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뭐야, 같은 이공계면 철저히 다름의 매력 그런 것도 아니고.

취민 달라. 나는 사진을 찍으러 숲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편인데, 그 친구는 사진엔 관심이 없더라고. 대신 영화광이야, 안 보는 영화가 없어.

오빠도 영화 좋아하지 않았던가?

난 근년 들어선 뜨악한 편이었어. 그 친구랑 몇이 어울려 꼭 한번 함께 갔었지. <러시: 더 라이벌> ― 에프 원 그랑프리 실화라고, 뜨거운 가슴이 있는 남자라면 마다하지 못할 영화라고 부추겨서. 헌데 스크린 속의 무서운 질주나 크리스 헴스워스의 매력 대신 그 친구 옆얼굴만 훔쳐보게 되어 못할 짓이다 싶었어.

병이 깊네.

병이라고? 넌 유럽형 인간 아냐?

유럽이 왜 나와, 여기서?

네가 공부하던 파리는 자유의 심장 아냐?

웬 자유? 평등, 박애까지를 다 말하려면 또 몰라.

그게 아니라, 파리에선 동성애자 시장에, 또 대통령들도 사생활은…….

사르코지나 올랑드? 우리 눈으론 좀 고약하지. 난 성적으로 그렇게 자유분방한 쪽이 못 됩니다요, 오라버니!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석 달 만에 젊은 연예인하고 재혼을 했다! 그런 것 쯤 아무도 상관 않았었지, 프랑스 사람들은.

오빠,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어? 20년간 살았던 부부였어, 것도 이미 재혼으로. 그 사이 아이들도 셋이나 있고. 또 새 여자도 애 엄마고! 아이들 어지럽게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해?

금실이 너 고리타분 맹추구나. 그럼 지금 대통령한텐 더 욕을 해대겠네!

남의 인생에 무슨 욕까지야. 하지만 이 사람은 더 심해. 결혼이 아니고 동거관계라서 그러는 말이 아냐. 애를 넷이나 두고서도 첫 여자와 헤어졌다지, 그 여잔 사회당 당수였어. 차라리 그 여자나 대통령이 될 일이지. 암튼 따로 애가 셋 있는 두 번째 여잔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고 있었지, 잠깐. 그러다 또 여배우야? 뇌에서 분비되는 짝짓기 신경물질의 유효기간만 지나면 상대를 갈아치워? 정치적 역량은 역량이고, 난 그런 사람들 너절하다고 생각해. 섹스가 뭔데? 인간사 필수적 요인이라 치더라도 갈아치우는 게 능사는 아냐. 몸도 맘도 그렇게 둔갑을 한다면 그게 철새지 뭐야.

새는 또 왜!

 

내가 잠깐 실수를 했다. 동물학 전공의 외사촌에게 새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전문가적 지식이 쏟아질 판이 되었다. 나는 커피 잔을 얼른 들어서 식어버린 나머지를 홀짝거렸다.

 

 

갈매기도…….

뭐야, 곤충박사님께선 새를 능멸하는 것에도 분개하시나? 갈매긴 또 뭔데?

분개까진 아니지만, 갈매기도 동성애를 인정받는 세상에…….

동성애? 갈매기가 동성애를?

그래, 갈매기의 동성애.

너무 멀리 간다, 오빠.

아냐,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들 심심찮게 있어. 암컷 두 마리가 함께 둥지를 틀어서는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지.

알을 낳는다고? 암컷끼리?

아니, 미수정란이나 단위생식 그런 게 아냐.

그럼, 알은?

살림은 암컷 두 마리가 차리지만 짝짓기는 각각 주변의 수컷들을 만나는 방식이지. 어쨌거나 번식에 성공하는 거야.

그럼 그건 암컷들의 공동생활이지 무슨 동성애란 이름을 붙여?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오빠, 동성까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 동성애야? 그건 아니지. 암수 간에 사랑해서 살림을 차리고 자식 낳자고 성애와 교접이 따르는 것 아냐? 모르긴 몰라도.

로이와 사일로 이야기도 몰라?

누군데?

맨해튼 동물원의 펭귄들, 만화도 나왔는걸. 그 둘은 암컷 펭귄들일랑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뭐냐, 절정행위도 한대, 목을 감고 그러는 성관계를.

설마 아기도 낳았대?

또 아기 이야기냐! 돌멩이를 알처럼 품으려고 해서 유정란을 넣어주었더니 서른 날 넘게 품어서 알을 깨우고 또 길러냈대. 완전한 입양가족 아냐?

글쎄. 입양가족 쪽은 맞지만 부부도 부모도 아냐, 분명.

부모는 아니지만 동성애 양친!

나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천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녹청색 계열의 체크 패턴의 무늬에 집중하는 척 했다.

오빠, 난 이런 무늬가…….

소용없었다. 외사촌은 이야기를 접지 않았다. 돌리지도 않았다.

 

 

동성애 ― 외사촌의 생각으로 자신은 동성애 성향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일하다가도 문득 그 친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데……. 대체 뭐냐, 이건?

내게 그런 걸 묻다니. 외사촌은 아마도 긴 싱글 기간을 보내는 나 또한 그러한 기질이나 성향이 없는지 탐색하는 눈치였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파리에서 한 때 젊음을 보낸 내가 상당히 진보적일 것이라 믿었기에 이해받기를, 뭐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맹꽁이 답답이다. 엄격했다, 그 부분은.

 

외사촌은 알리바이 모양 역사 속 유명인들의 동성애 취향을 꿰고 있었다. 다빈치의 젊은 시절의 ‘불경한’ 행위들, 미켈란젤로가 미소년에 보냈던 소네트며 젊은 귀족에게 헌신했던 만년의 애정, 차이코프스키의 조카에 대한 비뚠 열정. 랭보는 어땠는데? 그건 부정 못할 것이라고 외사촌은 들이댔다. 푸코는 어떻고! 심지어 여자들도 마찬가지라면서, 사포의 레스보스 섬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팅게일도 사촌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거절당해서 전장으로 떠나버렸다는 둥. 외사촌은 마치 공부라도 해 둔 양,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신화며, 소위 그리스 사랑 ― 성인과 소년 간의 사랑 ― 또는 고대 아시리아의 보편적 동성애 문화까지 증거로 들이댔다.

 

나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때의 사랑은 분명 우정이 심화된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못 박았다. 철학을 사랑하듯 동료의 철학을, 철학하는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 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을 두고도 갑론을박이었다. 외사촌은 플라톤의 동성애 증거라 했고, 나는 바로 그 말이 동성애가 아닌 정신적 우정에 관한 증거라고 했다. 한 문장이 두 상반된 주장의 증거가 되었다. 나는 ―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와 가능한 번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행위는, 그러니까 의사 성행위는 암컷과 수컷의 사랑이 아니다, 결코 성애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몇 명의 잘난, 똑똑한, 개성 있는 유명인들이 동성애를 표방하고 경우에 따라서 결혼예식을 한다고 치자. 사실 파리 시장 들라노에만 해도 드러내놓고 동성애자임을 표방하고도 당선된 게 맞다. 2,3년 전 파리에선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50만 명 시위에 들라노에며 녹색당 대통령 후보며 그런 인물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력한 인사들의 성정체성이니까 특별히 존중해야할 필요는 없다. 내 주장은 이야기를 해 나가는 중에 점점 더 완고해져갔다.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 이게 결혼의 사전적 정의다. 헌법에도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한다고 된 것 같다. 불문율에서도 남녀 양성이 전제다. 남녀 아닌 두 사람이 사랑을 하든, 동거생활을 하든, 흔치는 않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결정이다. 자기결정권의 행사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 가능하다면 법적으로도. 그러나 남녀의 결혼 또는 동거와 동성의 동거를 동일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외사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예상치 않은 독설에 찔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나아가기로 했다.

 

왜냐고?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 복제를 위한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가 이루어지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의미에서 동성결합을 원하는 생물체는 특이종이다. 어쩌면 불완전하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또는 양성애는 ― 난 그런 이분적인 용어 자체의 도식이 틀렸다고 보는 쪽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닌 것이, 둥근 거울과 네모난 거울 중 어느 것을 살까 하는 소녀의 망설임이라거나, 점심에 설렁탕을 먹을지 순두부를 먹을지 망설이는 직장인의 고민과는 다른 차원이다. 거울은 거울이고 밥은 밥이고, 그런 건 늘 둘 다 똑같은 가치이니까. 하지만 동성애란 ― 성애의 변형일 뿐이다. 그저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암수의 결합이 껄끄럽고 내키지 않은 대신, 동성을 그리워하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동성애라고 할 뿐이다. 동성 간의 사랑, 동성에 대한 사랑 ― 동성애. 뭐라든지 단어는 가능하겠지만, 원래의 성애와는 성격이, 질이 다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생산적 짝짓기를 변호했다. 생물학자 외사촌 앞에서 점점 더 생물학 이야기로 빠졌다. 적진으로.

동성결합은 유전자 복제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복제라는 원초적 욕구를 모르는, 회피한, 버린 생물체들이 벌이는 사랑은 뭔가 자연의 범위를 벗어난다. 키가 병적으로 너무 작아도 커도, 정상 범위를 벗어나도 똑같이, 돈이나 생산성이 많건 적건 똑같이 그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만큼, 동성애 성향이더라도 인격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최근 교황님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말하는 성 소수자 동등권 운운도 사회적 인격적인 차별 금지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성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류의 비전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것’ ― 프랑스 추기경의 말이었다, 그때 파리의 동성애자들 시위 때. 어떤 종의 모든 생물체가 동성애 성향이라면 결과는 그 종의 도태다.

 

도태? 그 단어에서 외사촌은 완전히 함구했다.

나는 불확실한 전문용어까지를 동원해가며 개똥철학을 읊어댔다.

밈 ― 문화적 유전자라. 복제 과정에서 진을 살찌운다는 밈이라는 인자, 이 밈의 세력이 대단한 건 증명되었지. 우리가, 수백만 인간들이 예컨대 ‘신’이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처럼 확인되지 않은 믿음을 공유하게 된 것들이 그런 작용이라지? 그렇다고 동성애의 밈이 인류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체는,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 손해가 나는 방향으로 진화할 리가 없으니까.

 

외사촌은 눈도 껌벅거리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녹음기처럼 지껄였다.

알게 모르게 서양 흉내쟁이인 우리들,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글쎄. 물론 동성 간 혼인이 합법적이라고 간주되고 아니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것이 법으로 인정받는 서양 어느 곳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서양의 결정이니까 법이니까 옳은 것은 아냐. 옳지 않은 법을 몰라서 그래? 단 기간에 만들어진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 전쟁도 법의 이름으로, 인종청소도 법의 이름으로 행해졌어. 법 이야긴 접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 ― 소중한 말이지. 정치적 소수의견, 생물학적 약자, 모두 강한 다수가 배려해야할 대상이지.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 그가 그 일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것이 자랑은 아냐. 어쨌거나 프랑스에선 사정이 좋아지고 있어.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벌금형이 없어졌지, 120년 동안 ‘사회적 장애’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과했던 법이 사라진 거야. 곧 이어 정신병 리스트에서도 동성애가 삭제되었어. 그렇다고 육신이, 정서가 완벽한 건강상태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젊고 건강한 암수는 원초적 본능으로 짝짓기를 원하게 되어 있으니까.

 

넌 뭐야, 넌 왜 이렇게 사는데? 짝짓기가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라면서?

침묵하던 외사촌이 내 약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평소에 정리가 된 견해도 아닌 말들을 즉흥적으로 외사촌에게 떠들어대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침묵에 외사촌도 머쓱해졌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빈 커피 잔을 들기도 어색해진 나는 테이블보의 녹색과 짙은 청색 사이에 섞여 짜인 버건디 색상의 가느다란 올에 집중해서 비율을 셈하려고 했다.

 

 

아냐. 아니거든!

건너 편 옆 자리에서 제법 큰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다 같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오빠. 아녜요. 쟤네들 좀 봐. 요즘 젊은이들이 저래. 남자애 같은 남자애, 여자애 같은 여자애가 드물어. 유니섹스인지 옷도 저렇게 비슷하게 입고 다니지. 우리 둘 다 쟤네들 쳐다보면서 그게 여자애 목소리라고 느꼈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쪽이 여자애라니까.

그게 뭐.

남자들 입장에선 여자들이 버거워졌을 거란 말이지. 요즘 괜찮은 남자가 되려면 돈이 엄청 많은 집안이거나 빵빵한 직업이 있거나, 그러고도 키가 커야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갖춰? 다 갖췄다고 해도 연인에게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다고들 하지. 바꿔 말해도 그래. 괜찮은 여자란 돈 많은 집 딸이거나 최소한 연금이 보장된 직업이 있다거나, 그러고도 예뻐야 하는데…… 누가 그래. 다 어렵지. 이성에게 들이댈 자신들이 없어진 거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지.

 

오빤 대꾸를 않는다.

아님, 저쪽을 봐. 쟤네들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차렸네. 하지만 뭣들 하고 있나 봐. 각자 휴대폰 들여다보며 뭘 하느냔 말이야. 뭘 하러 만나서는.

우리처럼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음 아저씬가?

그래, 영락없는 아저씨 아줌마지.

그렇게까지 자조적일 필요는.

자조적이 아니라 현실이 우울하게 하지. 요즘 뉴스 안 봤어? 세계 부유층 85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이 가진 것과 같다는데 뭐. 1%의 부유층이 50% 빈곤층의 65배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거야. 인구 절반이 버러지야. 절반만 그런가. 아래 절반 보다 나아보았자 상대적 박탈감으로 꼬여있어, 마음들이. 뭔가 자연스러워야 생명력이 넘치고 짝짓기도 하고 싶고 그러지, 후손 번식에 대한 의욕이 솟구칠 것 아냐. 그런데 이렇게 움츠러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서로 위로받고, 가능하다면 유사 성애로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부의 불평등 문제까지 가냐! 넌 문학연구가 아니라 사회학 했어?

부의 불평등은 ― 전공과 무슨 상관? ― 우리를 지배하는 물신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선진국에서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하지만 후진국에서는 부패를 조장한다는 말이 맞아. 부의 완강한 대물림 속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살 맛 나지 않는 세상이지.

살 맛 나지 않아서, 이성에게 구혼하지도 후손을 구하지 않고 동성 사이에서 안주한다?

뭐,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요즈음엔 교육 자체를 포기하고 등 돌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잖아.

그래, 니트라 그러더라. 낫 인 에듀케이션, 엠플로이먼트 오어 트레이닝.

우리나라에선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니트족 통계가 70만 명도 웃돈다고 본 것 같아. 한줄 서기에 아이들이 죽어 가. 옆자리 짝꿍도 경쟁상대로 보라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를 도망치는 거야. 대학에서도 희망이 없어 자퇴하기도 하고. 자괴감이나 대인기피증은 당연, 사회구조 전체에서 비껴서있는 것이지. 가부장제로 받침 되는 건전한 사회조직? 어림없어. 반사회적, 아니, 비사회적인 건 틀림없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거야. 또 교육을 많이 받음 뭐해? 정규직이 안 되는, 못 되는 점에서 우리라고 다른가?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체제에 들어가? 결혼이 말이나 되냐고. 분업시대 이후론 싫든 좋든 어떤 톱니든 톱니가 되어야 겨우 사는데 말이야.

톱니 인생. 그래 정상적인 톱니만 되어도 다행인 것을.

틈새에도 끼이지 못하니까 다른 돌파구를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어쨌거나 우린 ―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불어났는데. 밖에 어둠이 내려앉자 커피숍 공간이 살짝 위로 솟은 느낌에 어디선가 스쳐 오는 바람기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린 ― 뭔가 위안이 그리운 시대를 사는 것 같아.

그래. 위안이 그리운 세대, 누가 누굴 위로할 줄 모르는 세대.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모르는 세대. 간혹 경쟁을 피하게 되면 우정도 사랑이라 믿는…….

 

 

사랑과 우정을 혼동한다고?

외사촌은 눈을 흘겼다. 내가 우정과 사랑을 구별 못한다는 말에 발끈했나 보았다.

넌 감정의 구분이 확실해서 위안은 그립고 누군가는 필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혼자 버티는데?

혼자, 그래 혼자 잘 지내는 편이야. 하지만 글쎄, 난 요즈음 희한하게 아기를 갖고 싶어. 그건 충동이라기보다는 딸을 낳고 싶은 소망, 낳아야 하리라는 의무감에서. 하지만 수컷이 없네! 암컷 갈매기나 같구나. 하긴 무슨 수로 애를 키워? 나 혼자도 버거운 세상에서. 많이 말고, 그냥 먹고 사는 만큼도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이참에 적극적으로 나서 볼까?

아버지 감을 낚겠다고?

감으로 괜찮은 사람이 보이기도 해. 사랑? 가슴이 뭉클하게 아프지는 않아서 사랑은 아니려나? 또 짝짓기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겠지만.

뭐야, 넌 그럼 여태?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옛날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처음 남자가 나빴어. 하필이면 극장 안에서 손을 잡았지 뭐야. 난 불 꺼진 극장 안에서 손을 잡히긴 싫었어. 그 무렵 어떤 소설을 읽었었는데, 자연 속에서, 이를테면 풀밭에서 햇볕 아래 누워서 혼자 오르가즘을 느낀 소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 그런데 극장은 어둠의 충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어. 사랑은 어둠이어선 안 되는 것 아냐? 암튼 어둠과 관련되는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소름 돋았어.

밝은 사랑?

그래, 밝은 이미지의 남자. 난 분명 남자가 필요해, 내 딸을 위해서.

딸은 무슨. 딸을 낳으라는 보장은 있고? 멀쩡한 처녀가 임신을 원한다니 세상 참.

그래, 바로 임신이야.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적 충동은 뭔가 빗나간 것일 게야. 그러니 동성애도……. 맞아, 임신이 좋은 비유야. 임신이란 100%이거나 아니거나 그거야, 누군가 절반만 임신일 수는 없어. 성교도 그래,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교란 반쯤만, 그러니까 성교가 아냐.

생물학자 밥 벌어 먹겠느냐, 어디!

미안해, 공자님 앞에서 문자네 정말. 하지만 사랑은 임신과 같아, 100%이거나 아니거나. 절반만 사랑한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야. 사랑에 어떻게 양이 있어. 양이 있는 것이라면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아길 가질 거라며!

아길 가지려고 사랑하겠다니까, 온이 사랑할 거야. 만일 누군가를…….

누군가를 만나면? 누군가를? 누구를?

그게 글쎄.

넌 말 다르고…….

아냐.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오빠, 오늘 이야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해 두자. 오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야, 어쩜 나도. 부부가 되려면 팔천 겁의 인연이 필요하댔잖아.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진.

겁?

그래, 겁.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사방 1유순 크기의 바위를 뚫는 시간.

유순?

소달구지가 하루 가는 거리라니까 최소 40리라고 하지.

평방 40리?

오빠, 내버려 두자, 단위는 잊고 그냥 시간에 맡겨 두자고. 건 그렇고, 오늘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설에 또 오기 어려울 텐데 울 아버지 뵙고 가야지.

오늘은…….

가, 가자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쪽은 내내 나였다. 왜 목소리를 높였을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소리 뿐, 말에 전혀 자신은 없는 채로. 가만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 자체가 말의 알맹이에 자신이 없다는 신호다. 아니면 진실을 감추려거나.

 

어머니는 요즘 왜 목소리를 높이실까. 혹시 감춰둔 심지가 뭘까? 집을 향하자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설을 앞둔 일시적 상황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음식 만드시면서 짜증스러운 내색을 보이신 적은 없었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늘 그러셨다. 설이래야 수십 명 씩 손님이 오는 대단한 집도 아니고, 그저 조금 북적대고 수선스럽고, 그래도 떠들썩하고 화기 넘치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받쳐주는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있는 존재라고 믿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명절이면 딸들과도 다 함께 하지 못하는 허전함에 더해 아들의 부재를 서러워하실까? 민망해 하실까? 아버지에게 미안함 대신, 그 미안함을 감추려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걸까?

 

혹시 아버지는 아들 없이 지내야 할 차례가 다가오면 우리들 몰래 한숨을 쉬시지는 않을까? 그 한숨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극할까? 유전자 복제에 실패하시고서도 한숨도 마음대로 못 내쉬는 울 아버지.

 

 

아버지이, 선준 오빠 왔어요.

집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안 계셨다.

엄마, 아버진?

내가 느이 아버지 어디 가신 줄 일일이 다 안다니?

어찌할꼬. 어머니의 목소리엔 여전히 싸한 여운이 감돌았다. 울 어머니의 목소리에 심지를 심어 넘은 범인의 정체는 뭘까. 그냥 세월일까. 내 눈으로는 오리무중이다.

........................................

 

『PEN문학』 2014. 3,4월호(vol. 119), 국제펜한국본부, 125~14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1. 25. 21:23

삼포세대 

 

 

 

 

 

솔직히, 나는 정복한 것보다는 패배한 것이 낫고, 영구적  소유의 독점적 고형성보다는 임시성과 불확정성의 느낌이 좋다. - 에드워드 사이드, 『도전 받는 오리엔탈리즘』 중에서

 

   

  삼포세대라네, 삼포!

  삼천포가 아니고?

  삼천포는 무슨, 삼포라니까. 우리 같은 루저를 삼포세대라요!

  삼포? 어디선가 듣긴 들었는데.

  그래요, 쓰리 포세이큰 제너레이션!

  뭐요, 셋을 포기한 놈들이라고?

   쳇, 영어라야 얼른 소통되는 우린 바로 바나나족이지, 무슨 삼포족. 겉만 누런, 속은 허여니 뼛속은 양놈들이지.

   김박은 삼천포로 빠지는 게 특지지. 뭘 포기해서 삼포냐, 그럴 물어야지요!

   뻔한 것 아뇨.

  이박, 그래도 읊어 봐요!

  입에 담기도, 그게. 그러니까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모두 포기한 세대란 말이외다.

하나마나 한 소리. 그게 다 직장 문제, 돈 문제 아뇨.

  그래도 그게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청년층’ 그 비슷한 정의가 있어요. 재작년인가, 신문의 취재팀이 만든 신조어이지만 정곡을 찌를 밖에.

 

  우린 그렇게 삼포세대라 낙인찍혔다. 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공부 때문에 공부에 심취해서, 그러니까 제법 고상한 삶의 방식 때문에 연애도 안하고 사는 줄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나도 그들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꼼짝없는 삼포세대.

 

 

  평균인 - 평균인은 누굴까.

  그날 저녁도 외주둥이 굶는다고 소보로빵 한 개로 끼니를 때웠다. 소주와 냉수를 1:3으로 타서 음료수 대신 마셨다. 왜소한 저녁상을 물리고 - 상에서 먹은 것도 아니었지만 - 하릴없이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헤아릴 수 없는 아메바들의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나 아메바는 갑자기 이 시대 평균 아메바 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평균치는 수많은 통계에서 찾아보아 골라내면 될 것 아닌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우리’ 중에서 평균적 수입을 갖고, 평균적 자녀 수, 평균적 기대 수명, 평균적 학력, 평균적 직업, 평균적 취미활동 …… 등을 고려하여 대표적 가정의 대표적 사람을 꼽는 일이다. 무엇부터 찾을까. 잠시 통계의 무시무시한 망망대해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사는가가 우선일 것이었다. 우선 가족의 평균 수입, 그런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수치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므로 통계를 찾기도 쉽고 평균이나 적절한 대표를 찾기도 분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중소기업을 가정하자! - 사장을 포함한 직원 전체는 70명이고 이들의 총 급여의 합은 2억 1000만원이다. 그러면 이 회사 직원들의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이 통계는 산술평균에 의거한 것으로 결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자. 대부분의 직원들은 월 300만원은 평생 가도 못 만져 볼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한다. 직원 50명이 1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10명의 작업반장들도 겨우 150만원씩 받을 뿐이다. 이들에게 300은 비현실적인 수치이다. 왜 그런 300만원 평균치가 나오는가. 그것은 과장들 3명이 500만원씩을, 부장 5명이 1000만원씩을, 부사장은 2000만원, 사장은 50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70명 중 50명이나 되는 최빈수가 받는 월급은 고작 100만원, 그러므로 대부분의 직원들이 통감하는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하다. 70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중앙에 있는 35 또는 36번째 높은 월급을 받는 사람을 대표라고 한다면, 대푯값 역시 100만원에 불과하다. 이 회사의 최빈수와 대푯값은 100만원 월급인데,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나는 초장에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열이 났다. 좀처럼 찬물 샤워를 못 하는 내가 찬물 샤워를 하고 나왔다. 컴퓨터는 여전히 켜져 있었지만 지나쳐서 창 쪽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웠다.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아스팔트의 미세 먼지가 날아오른다. 작은 도로라서 저 아래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도 보인다. 저들이 평균인일까. 운전자가 평균인일까.

 

  다음 순간, 대한민국 평균인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을 예감이 들었다. 일을 원론적으로 생각해보려니 한참을 물러서고 만다. 처음 자리가 아니라 마이너스 어딘가로. 도대체 누가 ‘우리’인가. 우리 국민이라 함은 대한민국 국민을 말한다. 그러나 간단하지가 않다.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에서 비롯되어 그 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현 우리나라의 건국은 참 오래 걸렸다. 1945년 광복을 맞았어도 다시 미군정의 주둔시기를 거쳐서 1948년 8월 15일에야 정부 수립이 선포된 나라다. 독립 선포 후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 수립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100,210㎢ 땅에서만. 그러니까 함께 독립선언을 했던 반쪽 123,138㎢를 북에 두고, 이제와 그들의 일인당 국내총생산 1,900달러를 살짝 조롱하면서. 우리는 그들보다 10배 이상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우리를 우리에 한정한다.

  그 한정된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회원국 중에서 수출입 선 순위권에 진입했다고 희희낙락이다. 1961년 우리가 여전히 전후의 비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생한 기구에 30년도 넘게 뒤늦게 합류한 우리가. 하지만 동시에 평균 자살률도 거의 3배나 더 이룩해(?) 냈다. 인구 10만 명 당 11명이 평균인데 우리나라는 서른 명이 넘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경제 위기로 유럽공동체에서 퇴출 위기에 내몰렸다는 그리스는 세 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그러니 경제가 행복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국민총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된 것과 자살자의 숫자는 비례하여 증가 일로에 있다.  

  왜?

 

  정말이지 평균 수입을 알아보고자 했던 내 의도는 한 순간에 좌절했다. 대신 여러 경제 지표를 조금 알게 되었다. 국민총생산이란 개념은 어느새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다. 보다 합리적으로 바뀐 것이란다. 국민총생산은 한 국가의 거주자 - 국민 - 가 일정 기간 동안에 생산한 모든 재화와 용역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마손된 고정자산의 소모분을 포함한 개념이고, 또 예컨대 우리나라 국민이 외국에 진출해서 생산한 것도 모두 포함된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의 대외수취소득을 제때에 정확하게 산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어, 우리나라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총생산만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으로 바뀌었단다. 그것이 또 1995년에는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는데,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생산 활동에 참여해서 벌어들인 소득의 합계란다. 실질 국민총소득은 실제 재화나 용역을 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실제 구매력을 측정하기 위해서 산출한다. 이 지표는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를 보다 잘 반영하기 위해 실질 국내총생산에다 교역조건 변화를 반영한 실질 무역손익을 차감하고 여기에 국외순수취요소소득을 더해서 산출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국민총생산이냐 국민총소득이냐는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다. 국민총소득이 2만 달러가 넘어도 왜 이렇게 허한가. 2012년 국민총소득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34위, 오매불망 우리가 모델로 삼는 미국은 5만 달러에 육박하면서 12위로, 여전히 우리를 훨씬 앞지른다.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는 뒤지지만, 34위라면 대단하다. 물론 2007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21,632달러를 기록했을 때만 해도 3만 달러 시대가 멀지 않다고 호들갑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1만 달러대로 떨어졌다가 2010년 2만 달러대에 재진입할 수 있었고, 3년째 2만 달러대 초반에 머물고 있지만 후퇴는 아니라는 것.

 

  문제는 불평등 성장이다. 한은에 따르면 1991에서 2011년까지 20년간 국민총소득이 연평균 9.3% 늘어났는데, 그동안 기업소득의 증가율은 11.4%인데 비해서 가계소득의 증가율은 8.5%에 불과했다고 한다. 개개인의 실질적인 주머니 사정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성장의 후퇴 때문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고 있기 때문임을 역설해주는 증거가 아닌가.

  또 1인당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에서 기업과 정부 몫을 빼고 개인이 실제로 쓸 수 있는 소득은 얼마일까. 개인의 근로소득과 재산소득을 합쳐서 거기에서 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을 뺀 것을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이고 하는데,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가장 밀접한 지표다. 그런데 지난해 1인당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인당 국민총소득의 57.9%에 그쳤다. 한 나라의 소득은 크게 자본에 대한 보수 - 영업 잉여라고도 한다 - 와 노동에 대한 보수 - 피용자 보수라고도 한다 - 로 나뉘는데, 전체 소득 중에서 피용자 보수가 차지하는 비율, 즉 노동소득분배율이 57.9%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미국은 75.3%로 세계 1위, 왜 그 많은 모순을 안고서도 미국이 제일가는 나라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스페인이나 일본 등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의 평균인 62.3%에도 못 미친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총소득이 별로 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정부와 기업이 가져가는 몫이 전체에서 40%를 넘다 보니, 우리 개개인의 주머니는 허할 수밖에 없는 일. 그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의 61.1%에 비해서도 낮아졌다. 그만큼 근로자 몫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3,148달러 - 그러니까 지난해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실제로 소비에 쓸 수 있는 돈은 (발표 당시 환율 1,126원으로 환산해서) 연간 14,80,457원으로, 대략 월 123만원에 불과했다.

 

  평균급여 - 월 123만원.

이 통계는 나를 울렸다. 마치 경제를 조금은 아는 사람모양, 나라 전체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관한 상심 때문에? 그랬다면 그것은 조금은 사치였다. 수치는 통계 속에서 존재했고, 나는 양심적으로 사고하면서 양심적으로 사고한다는 자존감을 지닐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개인적인 모멸감이었다. 나는 평균 123만원 세대에도 끼이지 못했다. 교양학부의 한국어 강의까지를 내려놓은 지금은 부정기적인 수입이 내 생활을 지탱해 주는 수입의 전부였다.

   『88만원 세대 : 절망의 세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을 감히 들춰 읽지 못하는 것도 자격지심이다. 그 책이 처음 나온 2007년까지도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영순위 강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세상 물정 모르고 인문학에 파묻혀 살았다. 승자독식 게임의 법칙도 예감하지 못한 채. 그러다 곧 닥쳐온 나의 추락은 부끄러움에 무조건 움츠러들게 했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 119만을 20대의 평균 소득비율 74%로 곱한 값이 88만원이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 40을 바라보며 88만원 수입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 자리를 비집고 든다 해도 - 아직 가능성은 있다. 국립대학은 매 학기 공채가 있기 때문에. - 동료들 사정을 보면 비정규직 평균임금 수준에 불과하다. 일이 있고, 책상이 있고, 동료가 있는 것, 그것이 그들을, 어쩜 나도 그 속에 다시 끼인다면 나를 지탱해 주는 끈이다. 가족들로부터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소원해지는 세월이다.

  지금까지는 전통적으로 가족이 가족의 복지를 떠맡았다. 대학생들은 FM(아버지 어머니)장학금에 기대고, 결혼까지를 부모에게 의존한다. 부모 세대는 어렵게 마련한 집을 자녀들 대학 뒷바라지와 결혼자금으로 다시 팔아야 한다. 그러고도 둘째나 셋째에겐 더 이상 뒷받침할 여력이 없다. 중산층에서 이미 밀려나 내려앉았다. 이제는 가족의 부담이 한계점을 넘어섰다. 가족은 소리 없는 신음 소리를 낸다. 가족의 구조와 성질이 이 시대 한국의 특별한 온도와 압력에 이르러 다른 상태로 바뀌는 임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도 일류기업에 입사하지 못하면 루저가 되는 세상, 연애는 사치의 극이요, 결혼 또한 비즈니스이다. 딩크족(더블인컴노키즈)은 삼포세대의 로망이다. 너 자신을 알라, 삼포족. 형언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루저인 나 자신을 향해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엉뚱한 곳으로, 정말로 삼천포로 빠졌다. 잠깐, 삼천포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변명이 필요하다. 옛날에 한 장사꾼이 진주장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한산한, 혹은 장날이 아닌 삼천포로 가게 되어 낭패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시발일 뿐, 나는 삼천포에 아무런 유감이 없다. 발길 가본 적도 없으니 좋고 나쁠 수도 없다. 그래도 그 이름 때문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곳 목록에 든다. 진주이건 삼천포이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종류를 가늠할 수 없는 화가 치민다.

 

 

  화 - 화가 나는 일을 당하여 우리는 주로 화를 참는 것이 인자의 길이요, 인자의 도리를 모르면 화로써 망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주입되었다. 하지만 화를 끓이고만 있으면 병이 된다고도 하질 않는가.

 

  분노는 많은 경우에 백해무익이지만, 사람이 분노해야 하는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를 모른다면 더 큰 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지도 있다. 2차 세계계대전의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을 대변하는 노익장이 남긴 짧은 글, 바로 『분노하라!』는 글이다. 스테판 에셀. 1917년생이니 90을 넘어서 쓴 글이다. 유명한 1917년생들이 다 떠나고 없는 세상에서. 정치라면 러시아혁명도, 케네디도, 박정희도. 문화라면 윤동주도, 윤이상도, 하인리히 뵐도. 에셀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일찍 파리에 정착해서 거의 한 세기를 살다간 지성인. 그냥이라도 90 노인의 발언은 경청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글이고 그림이고 저작자가 죽으면 값이 올라가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신속하게 번역되었다. 노익장의 분노 예찬 발언은 애늙은이들이 대접받는 동양적인 관점에서는 다소 색다를 수 있다. 아니 온 세계가 난공불락의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된 글로벌 경제시스템 하에서는 분명코 내민 돌에 정 박힐 일이다.

  프랑스의 현실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모양이다. 알제리를 비롯하여 비 코케시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갈수록 산이다. 이건 엊그제의 일이지만 명색 프랑스 하원의원 질 부르둘레라는 인물이 히틀러가 로마족, 그러니까 쉬운 말로 집시족을 충분히 못 죽였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일에는 장-마르크 애로 총리조차 법에 따른 처벌을 운운할 지경에 이르렀다지만. 세상은 금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권력들이 세포분열을 하는 장에 불과하다. 성실한 근로세 납세자는 없다. 바보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갑과 을만 존재한다.

 

  을순이 - 내 이름은 한금실이 아니고 통상 을순이가 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을식이와 을순이들의 하나. 그러므로 거의 무명 씨. 나에게 분노의 여력이 있을까.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

 

  첫 발걸음은 관심이다. 반세기 전에, 1960년대 유럽의 사회주의대학생연맹의 여대생들은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외쳤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의 여학생들은, 여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들의 관심은 외모와 이력을 통한 개인적인 성공에 있을 뿐이다. 여자 특유의 외모로서 남성 세계를 공략하거나 남성들과 똑같은 성공적인 이력을 쌓아 권력에 이르는 길이다. 그 이외는 무관심하다.

스물 세 명인가 네 명인가, 미스코리아 본선 진출자의 외모 사진들이 똑같다고 세계 여론에서 비웃는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미의 비용」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의 유수 저널이 한국의 성형수술 풍토를 대서특필했다. 얼굴에 독을 주입하는 것은 일상이고, 가정주부가 심지어 종아리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라고.

 

  그뿐인가. 얼마 전 폴라 비라운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화장품 경찰관(?)이란 별명의 전문가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이 바로 화장품 종류였단다. 스킨, 로션, 에센스, 아이크림, 영양크림이라는 필수(?) 코스도 모자라서 앰풀, 트리트먼트, 마사지 제품, 기능성 제품의 홍수들을 보고서 하는 말이, 수많은 종류의 기초 스킨케어 제품들이라야 파격적으로 말하자면 보습제 한 종류란다. 수많은 과정의 덧바름은 오히려 모공을 막아 트러블을 일으킬 수도 있고, 과한 영양분은 타고난 피부 루틴을 방해해서 자연스러운 재생력과 유수분 유지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데……. 나처람 단순 무식한 사람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피부도 인체의 일부이라면, ‘소식하면 장수한다!’라는 말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피부나 외모가 아니지만, 나만의 이력에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나 또한 사회적 무관심자에 속했다. 죽어라, 아니 충분히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러고도 갑의 근처는커녕 을의 세상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벌이라면 벌이다. 지식을 생보다 우위에 놓는 죄를 범한 일, 지식에 종사함에 우월감을 가졌던 일에 대한 벌. 이 창살 없는 수감생활 중에 나는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제서 무엇에 관심을 가질까. 무엇을 분노해야하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시작, 모든 새로운 시작은 반성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반성 시작 -

  나는 공부만 했다. 학문이 생을 의미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공부만 했다. 목표를 초월한 학문. 유용성을 생각하는 것은 저열하리라고 믿었다. 쓸모없음 때문에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어쭙잖게 노자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집의 쓰임은 벽이 아닌 빈 공간 때문이라고, 내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것은 발바닥 크기의 땅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땅, 내가 밟지 않고 있는 너른 땅 때문이라고.

  나는 사치스러웠다. 욕심을, 특히 물욕을 초월한 삶. 그 무슨 사치였는가. 착각 아니면 거짓말. 세 끼 굶으면 군자 없고,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 없다는데. 취직을 하든지 시집을 가든지 - ‘취집’을 향하여 전진을 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취직을 향한 노력은 적잖이 해왔다. 결과가 없을 뿐이다. 일단 안정된 직장이, 돈이 없으니. 그러면 곧 삼포세대에 속한다. 연애는 무슨. 혹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쳐도 - 그 정도는 생물학적 짝짓기 본능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렷다, 희망하건대. 하지만 결혼에 이르는 것은 사투에 가깝다. 생물체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할 것이므로, 남녀 관계라는 것도 다분히 계산적이 될밖에. 생물체의 상호작용에는 다소간 이해의 충돌이 내재한다고, 어디선가 읽었고, 또 동의한다. 자기 복제를 시도하려는 충동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미화되어…….

 

  틀렸다. 나는 반성 대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정작 중요한 반성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있다. 죽어라 공부하고도 일자리가 없는 것을 내 못난 탓으로만 돌리는 반성은 무의미하다. 부족하다.

  무엇을 더 분노해야 할 것인가. 내 탓은 제 앞가림 못한 데 대한 분노, 제 욕심에서 나온 분노에 불과하다. 애초에 나를, 우리를 대학입시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이 사회. 대학정원을 너무 부풀렸던 이 사회에 분노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이 에셀이 말하는 분노, 진정한 사회참여에서 오는 분노이다.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이름의 한 줄서기를 주입시킨 교육. 살벌한 경쟁심을 자유라는 당의정을 우리에게 먹였던 교육. 제 앞가림에만 매진하라고, 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평생을 달리라고 가르쳤던 교육 말이다. 그것도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 바로잡을 것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가 독문학을, 프랑스문학을 선택했던 대입에서 어른들 - 그런 곳을 진학하게 권했던 담임선생님이나 그런 학과의 대문을 너무 홀짝 열어놓고 우리를 습인했던 대학들 모두 - 그때 어른들은 우리가 바나나족으로 성장하게 될 것을 몰랐다는 말인가.

 

  바나나 - 바나나를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바나나는 병문안과 관련된 이미지였다. 아프면 바나나를 사주셨다. 조금 더 자라서는 해괴한 모양이 눈에 들어온 때문에 싫어하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바나나를 먹기는 뭔가 민망한 노릇이었다. 금방 바나나 송이에 꼬이는 하루살이들도 성가셨다. 하필 그 싫은 바나나로 지칭되는 우리들.

가야금과 거문고의 구별도 모르면서 현악기 종류들은 정확히 배워 알았다. 피아노 연습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필수다. 자연 단음계, 화성 단음계, 가락 단음계 구별도 배웠다. 자진머리, 휘머리, 중중머리는 구별할 줄 몰랐다. 조금 알았더라도 엇중머리 라고 하면 멍했다.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한국어교원양성과정 공부하면서야 제대로 알았으니, 지식분야인들 바나나 타령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 분야가 더했다. 개화기에 생산된 신문학은 어땠는가. 신소설, 신체시, 신파극 범주를 통틀어 서구문학과의 관련 양상이 문제가 되었다. 비록 김현과 김윤식의 자생적 근대화론이 정설로 굳었지만, 해방 직후에는 이식문학론도 만만치 않았다. 신문학을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 문학의 이식이라고 단언했던 임화의 논의는 그의 정치적 이력으로 묵살되고 만 것이니. 정치는 문학이론 위에 존재한다.

 

  쇼와 시대 이전, 그러니까 1870년대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 개화기의 서양 추종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수입 또는 주입되었다는 견해는 왜 백안시 되었을까. 메이지유신의 이름으로 서구의 자유주의 이론을 통한 근대화는 한 마디로 문명개화의 기치아래 수행되었다지만, 사실 일본의 경우는 무사들의 충성심과 사회적 조화라는 전통적 가치도 여전했거늘. 오히려 수입을 통한 수입에 해당되는 우리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한 동안 망각했었고, 그 기간은 사뭇 길었다.

  예컨대 무당이나 사당패처럼 홀대받던 것이 풍물이었다. 꽹과리, 징, 장구 그리고·북 어느 것도 손데 대면 천하다고 업신여겼다. 그게 사물놀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 난 것이 1978년의 일이었으니, 장구재비 김덕수 패거리가 - 정식명칭 김덕수사물놀이패 -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또 돈을 벌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풍물도 사물도 돈이 되는구나, 성공이 되는구나 하고서 관심을 보였던 셈이다. 우리 고유의 정서라거나 문화의 발흥이어서가 아니라, 돈이, 성공이 되니까. 결국 우리는 우리 가락을 연주는커녕 감상도 할 능력을 잃은 채, 국적불명의 음악에 취해서 산다. 글로벌음악, 글로벌문화.

 

  일찍이 매슈 아널드 같은 고급문화론자들이 세속적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문화’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유럽의 제국주의 문화였음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확실히 깨달았다. 벌써 반세기 전에. 그 반세기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종속되어 왔다. 유럽세계와 아시아세계의 차이에 관한 감각을 더욱 경직화시키는 압력에, 동양이 지닌 (서양과의)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사고에, 학문적으로 동양 위를 억누르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그런 교의에. 그러므로 (서양)문화에 근접할수록 고급문화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그뿐인가. 바나나족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글로벌문화 창달에 매진하며 산다. 미국 기업과 맞선 우리 기업이 자랑스럽기만 한가. 스마트폰은 주인의 자리를 넘본다. 눈을 뜨면서 스마트폰을 찾고, 머리맡에 놓고서야 잠든다. 그것도 ‘엘티이’라야 하지, 행여 ‘쓰리지’는 큰일이 난다. 여전히 ‘투지’를 쓰고 있다면 영락없이 비사회적 죄인이 되고 만다. 인간은 가까운 장래에 번호와 기호로 분류된 코드를 팔이거나 뇌 어딘가에 이식받아 글로벌하게 통제되어 살게 될 것이다. 인간로봇, 아니 아예 로봇으로 진보하기 전에 아직은 바보 같아도 사람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세상을 음미해야할 것 같다.

 

 

  음미 - 또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의 몫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도 굶어 죽는다 하질 않는가. 돈을, 성공을 향한 허기는 끝을 모른다. 산비탈을 한번 돌면 사람들 절반이 사라진다는 무서운 동화가 현실이 되어 있다. 한 단계를 지나면 절반이, 다음 단계에선 또 절반이 탈락하고 우량종만 남는다. 우량종들도 피터지게 경쟁하여 궁극에는 일인자만 남는다. 그 한 사람은 무엇을 향해 살리.

  차라리 삼포세대 바닥 헌장으로 삶아 읊어도 좋을 시가 있다. 스물일곱에 요절했다는 천 년 전 당나라의 문인 이하의 작품이다.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

    서리 맞으면 잡목되고 말지만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비루먹은 개. 이삼십 대 젊은 사람들 거의 절반이 이 무기력에 굴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었다. 어느 온라인 취업포털의 설문에. 이제 사람들을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적응인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자기암시로서 통제하는 적응력. 어찌어찌 결혼에 이른다 해도 출산은 망설인다. 출산율은 2012년 기준으로 1.23명, 사람을 세는 정수로 말하자면 한 명이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란다.

 

  난 그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객관적인 눈으로 삼포세대 일원이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으련다. 쓸 돈, 쓸 수 있는 돈을, 주머니 사정을 잠시 잠깐 망각하는 바보이고 싶다. 미래를 계획하느라 미리 겁에 질리고 싶지 않다. 겁에 질리지 않으면 포기가 아니다. 다른 유형의 삶. 신자본주의 이론으로 평가받지 않을 삶도 삶일 것이다. 자본주의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살았다. 자식이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던 한참 낙천적인 시절에도.

  낙천적이고자? 설마. ‘모든 것이 부조리함을 의식하는 인간’에게 어차피 실존은 이유도 종극적인 목적도 없을 것이니. 그냥 살 수밖에, 그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리라, 그래야 한다. 둘이 모여서 여섯을 포기하더라도. 셋이 모여 아홉을 포기하더라도. 허기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는. 봄버들이 되는 꿈을 꾸기 위해서라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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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펜문학 2013  Vol.9., 2013.11.20. 29-42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8:07

틈새

 

이 이야기는 실제의 큰 대회에 기대어 썼을 뿐인 완전한 픽션이다.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혹시 어쩔 수 없이 실명으로 거론되는 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며, 독자에게는 순전한 픽션으로 읽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1.

유난히 태풍이 무서웠던 여름 끝자락에 경주를 향하고 있었다. 펜 회원이 아니면서 국제펜대회에 참석할 기회는 실로 행운이자 우연이었다. 프랑스어 동시통역 일을 맡게 된 것은 완전히 대타였으니까. 이래저래 작가들 틈새를 기웃거리게 될 행운으로 조금은 들뜬 채, 대회는 9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부터이지만 일요일에는 도착할 양으로 버스터미널로 나갔다. 동서를 가르는 도로는 우리나라의 눈부신 도로 문화에 비하면 턱없이 열악하다. 신라의 고도 경주행 버스는 하루에 고작 두 번뿐이다.

 

경주 - 돌이켜 생각해보니 언젠가 겨울에 이 경주에 왔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차를 처음 사고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였다고 기억된다. 인간의 상상을 절하는 석굴암이나 석가탑과 다보탑 등을 보여주시려고 그랬겠지만, 보문단지에서 묵었고 놀이기구가 많더라는 기억이 전부인 걸 보면 어린 시절 유적지 관람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보다. 나는 지금도 전혀 앞뒤 연관 없이 세계적인 문단의 거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 부담 없는 시간을 미리 즐긴다.

소잉카 - 아프리카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월레 소잉카도 참석한단다. 그가 1986년에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탔다지만, 난 그때 아직 너무 어린애였다. 문학이 다 뭔가! 불문과 학생이 되고나서야 프랑스령을 포함한 프랑스어 문화권에서 프랑스 문화의 독점적 전황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나선 네그리튀드 운동을 처음 들었고, 그 주창자들보다 더 눈에 띤 작가가 그에 비판적인 소잉카였다. 세네갈의 시인이자 대통령까지 한 셍고르,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의 하나인 마르티니크의 시인 세제르, 역시 프랑스령 기아나의 다마스 등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자행된 인종 차별을 완강히 거부하며, 흑인 공통의 정체성 속에서 일치를 발견하고자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흑인 유산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 그런데 다음 세대라고는 해도 아프리카이건 카리브 해이건 프랑스에서건 흑인의 정체성을 한 데 모으자는 이 운동에 회의적인 흑인이라? 그 부분이 소잉카에 대한 내 엉뚱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었다.

 

소잉카는 네그리튀드라는 것이 자기도취를 부추기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에 대해서 지닌 편견을 긍정할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유럽의 이성주의에 대한 아프리카의 감성주의라는 양분적 사고를. 그리고 정말 재미있는 문장이 있었다. “타이거는 타이그리튀드를 외치지 않는다, 다만 행동한다.” 처음에는 ‘타이그리튀드’라는 단어를 몰라서 낑낑댔다. ‘니그로’가 ‘네그리튀드’를 외치는 일에 대한 조롱인 것을 나중에야 알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 코 박고 찾으면 코만 막히는 것은 또 잠깐 잊었었다. 그 일로도 사전 찾지 않고 대충 이해하려고 애쓰는 습관을 기른 것은 맞다.

 

아차, 이렇게 막상 동시통역 일을 상상하자 자신이 무너진다. 정확성, 정확성을 어쩌나.

아니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소잉카는 영국에서 수학했고 미국에서도 아프리카문학을 강의했으니 영어에 능통하다. 내가 통역을 맡은 부분은 프랑스어인 만큼 한국어를 프랑스어로, 또는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참석한다. 그는 한국에 잘 알려진 외국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의 유수한 여자대학에 와서 객원교수로 강의를 하기도 했던 만큼. 그런데 불문학도로서 나는 왜 르 클레지오에게 혹하지 않았을까.

 

대학에서 전공 수업 들어간 첫해 르 클레지오의 이름이 나왔었다. 그 무렵 그는 프랑스 내의 잡지 - <독서>이었던가 -의 설문조사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되었다. 강의 시간에 그는 스물다섯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 편으로 국경을 넘어 문단을 강타한 괴테랑 비교되었다. 그러니까 괴테보다 더 이른 나이 스물셋에 혜성같이 나타난 신동에 가깝다고, 르 클레지오에 심취한 교수님께서는 ‘그 괴테보다도 더 이른 나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독문학 개론 시간에서 들은 베르테르는 ‘친애하는 벗이여, 사람의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편지글로 말문을 열며, 당시 인간이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사회적 통념을 배척하고서라도 인간 본연의 감정을 예찬했다. 해방된 마음의 고양을, 그 권리를 주장하는 적극적인 정열을 토로했다. 하지만 내게 남아있던 기억은 왜소한 인간이 무궁한 자연에 파묻히는 거대한 느낌뿐이었다. 시작하자마자 반 페이지 넘게 계속되는 자연예찬 - ‘나는 이 현상들의 찬연함의 힘 아래에서 쓰러져 간다.’라던 인상이 강력하게 박힌 탓이었을까? 하긴 편지가 계속되는 동안 불행에 빠진 그는 똑같은 자연 속에서 이젠 ‘영원히 삼키고, 영원히 희구하는 괴물’만을 보게 된다. 감상성의 과다와 감정의 무조건성은 좌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튼 당대의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한 열광으로 베르테르와 같은 옷을 입었고, 또 베르테르적인 유행이 굉장하다 못해 그것이 열병으로 고양된 곳에서는 양식에 맞게 자살도 행해졌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러나 그 시절, 인구가 훨씬 적었을 그 시절에, 이천 명쯤이나 되는 독자가 베르테르의 슬픔에 동조하여 실제로 자살을 했다는 통계는 내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무감동. ‘동조’라니! 그것도 책 속의 주인공을! 나로서는 이십대 청년의 감정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스물세 살짜리 르 클레지오의 첫 작품 『조서』도 자연 속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어쩐지 왜곡된 자연으로, 산 중턱 빈집이었다. 버려진 짐승처럼 살고 있는 젊은이. 탈영병인지, 정신병원 탈출자인지, 그는 하필 이름이 아담이고, 다행히(?) 이름이 이브는 아닌 젊은 여자와 소통할 뿐이다. 아니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르 클레지오의 독창적인 발견이던가? 신문기사 삽입, 찢어진 광고지, 미완성 문장들, 심지어 지워버린 행.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사실성을 해체하는 것이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은 벌써 트렌드였다. 그래도 너무 이른 나이에 첫 작품에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는데 무섭지 않았을까. 이것 역시 독문학개론을 들을 때였는데, 사실주의 시대던가 어느 작가가 첫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는 그 명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일찍이 ‘퇴역작가’라는 명함을 들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었다. 젊어서 벌써 보름달 인생을 살게 된 천재들에 대한 내 불안감은 차라리 오지랖이었다. 평생 보름달 인생이 되어보지 못할 수많은 군상들을 몰랐단 말인가.

 

르 클레지오의 성공은 전혀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졸업반 때 그의 『황금물고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소개되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를 두고 젊은 명성의 후속을 걱정했던 나는 허탈과 안도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30년 넘게도 계속 베스트셀러를 쓰는구나. 그렇다고 대강 소개받은 그 작품에 감동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검은 물고기, 어려서 인신매매 단에 유괴당한 검은 소녀의 파란만장한 삶. 입양된(팔려간) 집에서 신체적 성적 고초를 겪다가, 자라서는 혼자 떠돌며 가진 것이라고는 몸 밖에 없는 젊은 여자의 밑바닥 삶…… 모로코의 사창가, 스페인의 빈민가, 파리의 보헤미안, 마침내 미국 여행, 재즈 싱어가 되는 꿈을 이루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이라고 추정되는 검은 대륙으로 귀향하는 순간 그 검은 물고기가 황금물고기가 된다는 설정. 이런 것은 많고 많았던 동화와 소설들의 세상 어딘가에 늘 존재하지 않던가. 물론 탈 유럽, 탈 서구 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점에서 유럽 순종인 르 클레지오가 돋보였다는 점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이후의 소설들, 소위 누보로망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 우선 너무 어려웠으니까 - 탓이기도 했다. 졸업반 때 나는 그냥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정석이니까 프랑스에 간다는 생각, 어찌 보면 단순했지만 프랑스에 갈 준비만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것이 나를 오늘 경주로 가게 한다.

 

 

2.

현대호텔은 이름만큼 현대식인 보문호반의 호텔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덕에 호텔에서 오후는 한가로움의 극치였다. 국제적인 대회라는 인상은 준비된 플래카드나 안내 표지판들로 넘쳤지만 사람들은 아직 느긋했다. 등록처라고 안내된 지하 1층에는 요원들 수가 더 많았으니 말이다. 프런트에서는 일반 참석자들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 탓에 약간의 지체가 있었지만, 이내 방으로 들어서자 갑작스레 자유라는 단어가 온 몸에서 꿈틀거렸다. 사방 벽으로 갇힌 방에서 자유라니. 혼자인 내가 언제 부자유의 구속을 받았는가. 그러나 일상으로부터의 자유 아닌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국제펜 한국회원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했고, 혹시나 사진에서만 보던 소잉카나 르 클레지오, 혹은 터키의 오르한 파묵이라도 일찍 도착해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셋씩이나 초청한 이 행사를 보면 한국의 위상도 제법인가 싶었다. 국제펜 회장 소울 씨도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언론인 출신답게 수많은 에세이에서 표현의 자유 등을 역설했고, 그것으로 고통 받는 세계 도처의 작가들에 대한 연대 또한 대단해서 마침내 국제펜 회장이 된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문학, 미디어 그리고 인권”이란다.

 

보문호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를 상상했지만 방은 반대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높은 층이라 베란다에 나가보니 둥실 뜬 구름 속만 같았다. 얼마를 거기 의자에 앉아서 하늘 냄새를 느껴보았다. 천천히 짐을 풀고 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벌렁 누어보았다. 나에게는 분명 사치스러운 이 방. 같이 방을 나누어 쓸 사람은 내일 아침 일찍 대회장으로 바로 도착하는 대부분의 일행들과 함께 올 것이다. 밖이 어둑해져서야 뭔가 먹을 것을 구하러 로비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면 호숫가를 산책할 수 있었을 것이나 너무 늦었다.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고 들어와 먹다보니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호텔 밖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아직도 나는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서 거리를 배회함은 옛날 서양에서 모자를 쓰지 않고 나다니는 여자나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이 로맨스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파리에서 공부만 하다가 청춘을 잃은 것도 그런 가르침을 너무 충실히 따른 탓일까. 아니, 그건 아마 유전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청교도적인 열심. 하는 일 열심히 한답시고 옆길을 쳐다보지 않는 고지식함은 유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즘 세상엔 고지식으로는 밥도 못 빌어먹지만.

 

일찍 씻고 들어앉아 받아온 책자를 열어보니 오후나 저녁 내내 호텔이 조용한 이유를 알았다. 두 개의 선택으로, 불국사며 동리목월문학관 그리고 대릉원이라는 고분군 등에 사전 관광이 있거나, 뮤지컬 관람이 있었으니까 조용했었나 보다. 전체를 살펴보려니, 가방을 가득 채운 A4 그대로 크기의 책자는 두껍기도 했지만, 국어와 영어 쪽이 앞뒤로 겹쳐있으니 내용의 두 배의 두께였다.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라는 오방색을 상징화 했다는 로고도 참 한국적이었다. 무엇보다 문학포럼 <나의 삶, 나의 문학>에 나올 연사들의 글이 궁금했다. 99쪽을 찾아 열어보니, 좌장, 연사들, 소잉카, 고은, 르 클레지오…… 그런데 고은 씨의 글이 없다. 미리 원고를 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기조연설의 파묵도 프로필뿐이다. 뭐 대순가, 이 정도의 대규모 행사라면 현장에서 통역 원고를 받는 당황함은 설마 겪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일찍 잠을 청했다. 이런 예상들이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빗나가게 될 것을 모르는 채로.

 

 

3

드디어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화려한 홀에서 조식뷔페가 제공되었다. 지하층을 기본으로 해서 일층까지를 커버하는 높은 천장이 화려함의 근원지였다. 나는 어쩌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조식 뷔페를 즐긴다. 이런 곳의 빵은 다행이도 내 젊은 시절을 되돌려줄 만큼 맛이 좋았다. 보리밥을 싫어했으면서도 파리에선 왜 검은 빵 맛에 홀렸을까. 맨날 슈퍼에서 사는 토스트 빵이 아닌, 학교 식당에서 자주 나오는 바게트나 크루아상이 아닌 검은 빵, 알곡 빵이라나 뭐 그런 빵을 난 별식으로 즐겼었다. 나는 수많은, 정말 수많은 요리들 사이에서 뚜껑들을 열고 내용물을 살펴보는 시간을 잘 못 참는다. 아침을 그리 무겁게 들 생각도 없었다. 그냥 검은 빵을 두 번 썰고, 유일하게 곁들일 수 있는 동물성인 완숙한 달걀과 살라미를 발견해서 기뻐하면서.

 

저만치 옆자리에 백을 놓고 갈까 말까 엉거주춤 망설이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동양여자였다. 어디선가 스쳤던 인상일까? 그러는 찰나였다. 그때 서양 사람처럼 생긴 서양여자가 서양 사람들에 어울리는 새파란 옷을 입고서 서양사람 같은 미소를 띠고 말을 거는 듯했다. 여기 자리가 어떻고……. 예,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게 여기 제 남편이랑……. 아무래도 합석을 하기에는 적당치가 않은지 동양여자가 테이블을 양보하기로 하는 모양이다.

그러자 저쪽에서 그 남편으로 보이는 덜 서양사람 같은 남자가 이미 착석을 하고 서양여자를 부르는 것 같았다. 서양여자는 동양여자에게 정색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몇 번 씩 말하면서 자리를 떴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모습이 그랬다. 동양여자도 괜찮아요 같은 말을 여러 번 여러 번 했고, 이제는 음식을 가지러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접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서 앉을 태세였다. 그때 그 자리에는 이미 또 다른, 이번에는 큰 말소리 때문에 한국 사람이 확실한 젊은 남녀가 앉아있었다. 그 여자는 접시를 든 채로 웨이터들을 쳐다보았고, 미안해하는 웨이터를 따라 저만치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지나치게 운이 나쁜 분이네 싶었다. 혼자라서 백을 들고 다니니까 빈자리라고 오해받는가보다.

 

쓸데없이 남 걱정을 하다말고 나는 커피를 한 번 더 가져와서 뜨거움과 향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저쪽 편의 아까 그 서양여자가 그 동양여자에게 다가갔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다가 일부러 다시 찾은 모양이었다. 정말 미안했다고 자기의 이름을, 이어서 남편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간곡히 사과를 하는 모양이었다. 참 사과에 열심이구나 싶으면서 남자의 이름이 언뜻 귀에 익었다. 데이비드 맥켄……, 그래 단순 참가자가 아니라 발표자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대회 시작 11시가 가까워 오자 지하1층 컨벤션홀에 마련된 대회장은 만원사례가 되었다. 대회장 밖에 임시로 화장실이 설치될 지경이었다. 예상대로, 어느 대회장에서나 늘 그러하듯이, 중앙 앞 쪽은 지정석으로 되어있었다. 연단에 올라갈 임원들이나 기조강연 연사들을 당연하지만, 뭔지 모르게 중요한 인물들, 여기서는 중요한 작가들이 지정석에 이름을 올렸다. 드물게는 이번 행사에 저개발국 회원들을 초청하는 선행(?)을 베푼 분들도 거기에 포함된 듯 했다. 문제는 작가의 중요도라는 것으로, 지정석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 경계에 있는 상황이 애매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만치 바로 그 경계에서 몇 번이고 어색한 장면들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하지만 그것도 지정석에 명사들이 착석한 뒤에는 수그러든다. 우리 측 이사장님, 사진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들, 회장, 그 옆자리엔 노랑머리가 아니라 거의 흰머리의 여성이 보인다. 회장 부인인가 보다. 그러는 사이 오르한 파묵이 예정을 취소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왜 돌연? 그런 이유에 정신을 팔 사이 없이 식이 시작되었다.

 

오프닝은 샌드 애니메이션. 텔레비전에서 한두 번 보았지만 실제로 - 물론 여기서도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서 - 보니 더 신기했다. 모래를 확 뿌리는 동작, 그 처음 동작이 나중에 의미를 표시해내는 오묘한 기술보다 더 멋있었다. 한국본부 이사장의 환영사, 소울 회장의 개회사, 축사, 축사, 축사 - 이 모든 과정이 문제없다. 원고는 미리 있었고 (동시)통역은 일사분란. 대회장에는 1번은 한국어, 2번은 영어, 3번은 프랑스어, 4번은 스페인어로 자유스럽게 언어를 선택하는 작은 기계가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외국어 실력 때문에 뭔가를 할 수 없는 세상은 이미 아니다.

기조강연에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분 차례가 왔다. 제목은 <가장 오래된 미래의 길>. 세상사 대조적 현상들을 완벽하게 짜 맞춰 준비해 오신 명 연설임에 틀림없다. 특히 ‘좌-우’에 대한 설명이 좌뇌-우뇌 등을 넘어 한없이 상대적 대조적 개념으로서 제시되었다. 잠든 곰과 포효하는 호랑이를 비유한 판소리, ‘얽어도 장에 가고 굶어도 떡 해먹는 사람들’ - 한국인의 해학과 여유를 충분히 천착하셨다. 강연 내내 인터넷 동영상이나 이미지들도 소문대로 그 분야의 선각자답게 유려하게 사용하시고.

 

그러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로버트 리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스크린에 떠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이름이 두 번씩 흘러나왔다. 너무도 긴장해서 잘 못 들었을지 모른다. 나는 물론 로버트 리 프로스트라고 통역했다. 실은 순전히 내 귀의 착각일 수도 있었나 보다. 나중에도 다른 통역사들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니 말이다. 프루스트는 학부 내내 내겐 트라우마에 가까운 멀고 어려운 대상이었는데, 이렇게 또 나를 혼란케 한다.

그렇게 첫 행사가 끝났다. 갑작스러운 구절들은 많이 없었고, 좌중의 사람들은 작가들 특유의 진지함으로 너무 조용했다. 지정석이 끝난 바로 다음다음 줄에 아침 식당에서 낭패를 당했던 그 동양인이 유난히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혼자서. 대체 누굴까.

 

이어지는 축하공연은 뮤지컬인데, <미소 2 - 신국의 땅 신라>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미소 2’가 무엇일까. ‘미소 1’ 같은 것이 있었을까? 춤과 음악을 하는 주체에겐 숫자 2의 의미가 특별하겠지만, 관람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다만 불편한 첨가물이었다. 예상대로 볼륨이 너무 컸다. 예상대로? 공연예술들에 대한 내 인상은 늘 나의 기대보다 훨씬 큰 볼륨이 내용 몰입을 방해했다는 기억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상이 적중했다. 내겐 언제나 볼륨들이 너무 높았다.

 

점심에 통역사들 몇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더러는 함께 일한 적도 있었는지 서로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첫 행사를 마치고난 안도의 마음은 서로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에누리 없이’라던 연사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것 ‘벤또’처럼 일본말 아니냐고. 그러고 보니 그런가?

 

순간 잽싸게 표준국어대사전이 장착된 전자사전을 찾아보던 영어담당이 그건 고유어라고 했다. 한국의 고유어? 그랬군요. 처음 의심을 내놓았던 이가 얼버무린다. 우린 가끔 외래어 노이로제에 시달린다.

 

난 그것보다 갑작스럽게 통역을 더듬거렸던 일이 떠올랐다. ‘어린이들에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요, 어느 나라 아이들이건 에누리 없이 - 에누리 없이 손가락을 다섯 개로 그립니다.’ - 거기서 ‘에누리 없이’를 ‘값을 깎지 않고’라는 말로 떠올라서 당황했던 순간. ‘가감 없이’ 또는 ‘더도 덜도 아니라’라고 옮겨야한다는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동시통역이란 살벌한 일이다. 밥이 먹히질 않았다. 졸지 않으려면 커피는 충분히 마셔두어야 하리라. 첫날부터 지치면 큰일이니까.

오후 스케줄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서운하게도 파묵이 불참해서다. 그 사이 흘러든 말로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라는 효자 설에 이어 동반자 문제라는 루머도 돌아다녔다. 동반자? 그보다 그의 문학적 대성의 뒤에는 끝까지 글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에서 지원해준 어머니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쪽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섣부른 직업을 갖지 않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이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호사는 아니다. 아들의 능력을 믿더라도, 환경적으로 허락이 안 되면. 아니면 결과적으로 불발이면.

 

상관없다. 소잉카의 등장엔 그 나름대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허옇거나 대부분 누런 사람들 틈에서 시커먼 얼굴의 그가 돋보이는 분위기. 꼭 노벨상 수상 때문이라기보다 역차별이랄까 흑인으로서의 자존심 하나만으로도 돋보이는 설정이었다.

 

그가 말하는 <마법의 등불>은 다름 아닌 창조성의 마법이었다. 예술적 창조로서의 글쓰기. 권력자들이 민중에게 호기심을 누르라고 명했을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선언은 혁명이었다. ‘변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광범위하고 원초적인 테러를 상상해보라! 나는 창조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변형적인 마음’이라고 통역했는데, 나중에 한국어판을 보니 ‘변화를 추구하는 지성’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그것이 더 보편타당성 있게 느껴졌다.

 

이어서 르 클레지오는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이다>라는 제목으로 말했다. 화려한 마야문명은 사원의 화재 이후 책으로 남긴 역사가 없어서 해독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쇄술은 특권의 종말이요 지식을 분배를 뜻했다. 다만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도 식민지에서는 성서에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채찍아래 사는 노예들로 넘쳤다. 고향 모리스 섬에는 문맹이 30%. 현대에 와서 오히려 공부도 일도 않는 ‘니니’들이 생겨났다. 인간의 목소리인 언어만이 추상과 변화와 리듬에 의해 숭고함을 표현한다. 언어로 인해 인간은 완성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책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중에 접근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말문을 닫는다. 여기가 어딘가, 작가들의 잔치자리. 희망이 있구나.

 

첫날이라 긴장되었던지 방에 돌아와 조금 쉰다는 것이 만찬장에 늦었다. 아무렇게나 빈자리에 안내되어 앉고 보니 낯모르는 남성들 사이 불분명한 인종의 여성 하나만 끼어있는 테이블이었다. 그 여성도 나처럼 끼어 앉은 것일까. 까만 머리카락으로 봐서 한국인일까? 그렇지만 저리 큰 눈은? 가볍게 어디 누구라고 서로들 소개하는 틈에 보니 러시아에서 온 한국여자였다. 북소리 공연이 머리를 두둥두둥 울렸다. 큰 소리에는 정말 약하다.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4.

화요일 행사부터는 중복적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이루어진 분과회의에는 통역이 필요 없었고, 컨벤션홀의 문학포럼의 일환인 <시조>에 참가하면 되었다.

시조 포럼은 21세기 황진이 같은 여성발표자와 하버드 대학의 맥켄 교수 그리고 네팔의 만능 시인 펜다이 회장의 발표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유창한 영어의 맥켄 교수, 매력 넘치는 한국어의 홍 시인에 이은 조금 독특한 발음의 네팔인 영어 - 청중들은 미국인 교수의 한국어 ‘청산리 벽계수야……’에 탄복해버렸다. 앙코르에도 만돌린에 맞춰 청산리를 열연하는 그 교수는 참으로 특이한 존재였다. 90세 아버지에게도 영어로 시조를 쓰게 독려했고, 아버지 또한 그것을 즐긴다는 완전한 시조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후에는 평화, 투옥작가, 여성 등에 집중하는 분과회의가 있었지만 통역은 의무가 아니었다. 산책이라도 할 수 있을까 기웃거리는데, 지하층에서 카페를 통과하여 호숫가 산책로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낮 시간에 와인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여자가 문 가까이 앉아 있었다. 첫날 아침 식탁에서 이리저리 좌석을 옮겨 다닐 때 보았었고, 오늘 점심 때 합석을 하게 되어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그 한국분이다.

 

점심때는 4인 식탁에 그 사람이 혼자 앉아있었으니까 합석을 하게 되었었다. 앞에 걸고 다니는 이름표로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면서 그녀가 한국 사람이라서 괜히 편했다. 음식을 가지고 와서 앉다보니, 저쪽 창가에 가까운 식탁에 맥켄 교수 내외가 보였다. 화제는 저절로 그리로 향했다.

 

저기 오늘의 주인공 맥켄 교수네요. 참 독특했죠?

예? 전 너무 놀라서. 뭔가에 그렇게 심취할 수가 있는 것인지. 더구나 남의 문화에.

그런데 어제 서로 만나셨죠? 제가 아침에 먼발치에서 본 것 같아요. 좌석 때문에 불편해하실 때.

예?

어제 아침 식사시간에 말입니다. 맥켄 교수부인이랑 좌석 때문에.

아, 뭐 대순가요. 우리가 손님 쪽을 배려해 줘야지요. 그런데 실상 미국이나 유럽 쪽에선 별로 유명 작가들이 오지 않은 것 아녀요?

네, 뭐. 본부 쪽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절반쯤이 초청 케이스라던데요. 86개국인가 참가라면 40개국 가까이가 초청국이라던가 뭐. 외국 참가자들이 한 200명은 된다지요?

그렇게나 많아요. 전 온통 한국 사람들만 보이던 걸요.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상당수가 ‘코리언 센터’ 명패를 걸고 다니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온 교포들이래요. 한국센터 뉴욕지회, 캐나다지회 그런 거라더군요.

그렇구나. 그런데 참, 초청이라니요?

네, 저개발국가의 작가들을 대거 초청했다는.

아, 그래서 서양 사람보다는 아시아나 중동 혹은 검은 모습들이 많았군요.

실제로 오르한 파묵이 오지 않았지만 터키 사람들은 좀 왔다던 걸요. 터키는 참 그 영토로 보자면 90퍼센트 이상 아시아에 속하니까 아시아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우리 보기에는 좀 유럽 사람들 같지요?

파묵 씨 사진을 보면 아예 서양사람 같던 걸요. 사는 것도 서양인이죠. 난 처음에 그가 독일문화 쪽에 가깝다고 생각을 했어요, 왜 그랬었는지. 내가 파묵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 그게 독일어권 신문과의 인터뷰 내용 때문에 그리 되었으니.

그럼 혹시 독문과? 전 불문과라서 지금 통역으로.

예, 견원지간이네요, 후후. 그래요, 난 독문학을 전공했어요, 끝까지 해내진 못했지만. 건 그렇고, 파묵이 스위스 유명 일간지의 토요판 주간지 <매거진>에 말했던 것 때문에 독일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나 봐요. 그 전엔 몰랐거든요.

주간 매거진에요?

예, 잡지 이름이 <매거진>이었을 겁니다. 3만 명 쿠르드인이 이곳에서 살해되었고, 백만 명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되었다. 그런데 거의 아무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말한다. 뭐 그런 정도였죠. 1915년 오토만 아르메니아인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일이 터키에선 잘 감춰진 부분인데, 이제는 과거사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그게 반역죄 비슷한 재판의 빌미가 되어 한동안 떠들썩했지요.

노벨상 수상 전이었던가요?

예. 곧 바로 터키에서는 완전 보수 민족주의자 검사를 앞세워 공화국을 현현적으로 모욕한 터키인은 몇 년인가 징역형에 처한다는 헌법을 도입했어요. 파묵을 옭아 넣으려는 법이었죠. 소위 사후법에 의한 기소라서 더욱 반향이 거셌겠지요. 세계적 여론이 들끓었고, 유럽연합에선 아예 의문을 제시했어요. 파묵의 케이스를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을 것인지 실험대에 오른 리트머스시험지라고까지 했으니까요.

리트머스 시험지라뇨? 파묵을 그냥 두면 이유에 가입 아니면 불가 뭐 그런 거요?

암튼 그런 분위기였죠. 국제 엠네스티는 파묵은 물론 그 법에 적용을 받게 생긴 다른 몇 명의 고소도 함께 취하하라고, 거의 압력이었죠. 국제펜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국제인권규약 중 자유권 규약을…….

자유권 규약이라고요?

예, 사회권 규약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법률적 효력이 인정되는 것이지만. 국제 규약이라는 것이 늘 권고 수준 아니던가요? 것보다 귄터 그라스다 움베르토 에코다 또 주제 사마라구, 바다 건너 업다이크도, 심지어 남미의 바르가스 요사 후작까지 엄청난 노익장 대가들의 반대성명들이 잇따랐지요.

요사 후작까지요? 그 사람은 페루 대통령에 나오고 그런 사람 아녀요? 하긴 놀랄 일도 아니네요. 작가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실연하고…… 그런 모양새는 이 시대엔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작가들이 반 권력 투쟁을 하다가 권력에 오르기도 하니까요. 돈 권력에도 이르고, 더러는. 아니 유명해진 상당수가.

어쨌거나 파묵은 곧장 비비씨에서 자신의 발언의 근본 취지가 터키 내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의도였을 뿐, 학살 사건 자체가 아니었음을 밝혔어요. 이로써 조국의 과거사와의 한판 승부에서 후퇴하는 듯 했지요. 하지만 곧 이어 그해 가을 스웨덴 아카데미는 파묵에게 영광을 돌렸지요. 앞서거나 뒤서거나 <타임>지에 세상을 흔든 100인에 선정되었고, 소신 발언을 한 영웅과 개척자 부분에.

 

(그랬었구나. 그런 재판과정에서의 소용돌이가 그를 돋보이게 하여…….)

 

난 내 생각을 재빨리 지워야 했다. 2005년 말에서 2006년 사이의 사건에 관해 난 왜 이렇게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일까? 내가 행복했었던 시절, 모교에서 기대주로서 강의에 열중했던 시절에 난 무엇을 더 했던가. 그녀가 계속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이름은 빨강』을 보면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어요. 오래 묵은 책이라 1, 2권을 가져왔는데 헛물 켰죠.

책들을 가져와요? 헛물이라뇨?

예. 사인회에 가져갈까 했죠. 소잉카의 사인회는 지금 바로 가야되어요. 두시부터.

 

 

그렇게 서둘러 식탁을 떠난 그녀를 그날 오후 곧 바로 다시 만난 것이다. 이제 겨우 대회 이틀째인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나 자주. 그 순간, 그녀를 처음 본 것이 첫날의 아침 식탁이 아니라 그 전날, 그러니까 여기 도착했던 일요일 저녁때였다는 생각이 났다.

어머, 또 뵙네요. 이렇게나 자주.

참 그러네요. 낮술 들켰나요? 점심이 급했나 어째.

와인이 소화에 좋대죠. 그런데 저 여기 좀…….

예, 뭐. 전 그냥…….

그런데 혹시 대회 전날 오신 거 맞죠? 실은 그날 저녁에 로비 근처에서 뵌 것도 같아서요. 만물상 쪽에서 나오시는 걸.

어머나, 전혀 몰랐어요. 제가 눈도 나쁘고 또 멍하고. 그땐 감기약이 그곳에 있다고 해서 얼마나 반가웠었는지.

그럼 그 감기는?

예, 아마 버스의 냉방에서 그랬었나 본데, 약이 효과가 좋았는지 괜찮아졌어요. 약 먹기 전에 뜨거운 우동도 한 그릇 다 먹었거든요. 그것도 좋았겠지요.

다행이군요. 어떻게 아까 사인회엔 늦지 않으셨어요?

그럼요. 외려 소잉카가 거의 30분이나 늦게 왔어요. 인터뷰들에 지쳤노라고, 이해는 되었지만, 주최 측에서 하라는 대로 줄을 서있던 우리는 실은 더 지쳤는데도 암말 못했죠. 아니, 사인회용으로 준비된 신간을 살 때 받은 번호표대로 줄을 서라고 해서 좀 떠들긴 했죠. 내가 맨 앞에 서있었지만 들고 있는 표는 4번이었거든요. 세 사람 양보를 못해서가 아니라 일이 합리적이 아닌 것 같아 언성을 높이게 되었어요. 난 덤으로 『해설자들』을 가져갔기 때문에 마음이 좀 조급했었나 봐요. 그게, 우리가 미리 메모지에 사인을 받고자 하는 이름을 써내는데, 이름과 성을 혼동해서 새로 산 『제로 형제의 시련』에다는 내 이름을 잘 못 쓰더이다, 속상하게. 그게 미안했던지, 황망하게 들이민 『해설자들』 옛 판에는 제대로 쓰더군요.

그럼 오늘 사인은 일단 성공적으로…….

글쎄, 사인이 무슨 의미일 거라고. 암튼 첫날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잠깐 인사를 건넸을 때의 인상과는 달랐어요. 피곤한 기색이 너무 심했어요. 내가 네그리튀드와 결부된 그의 유명한 문구를 적어두었지만, 그렇게 사인해줄까 싶어서, 하지만 일별도 하지 않고 내 이름만을 겨우 쓰던걸요.

네그리튀드? 그럼 그 쪽으로도 공부하신 거예요?

아니, 잘 몰라요. 아프리카의 검은 유산이라는 것이 프랑스의 정치적 엘리트주의적 패권과 지배에 대한 투쟁의 도구로 선포한 것이라면 사실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도 있는 건지. 난 그것보다 타이거가 짓는 것 보았냐, 직접 행동하지, 그러니 니그로가 니그로의 유산만을 강조하는 구호가 무슨 쓸모냐, 그런 쪽에 의아심을 느꼈어요. 난 기회가 있으면 그 점을 질문하고 싶은데, 여기 운영방식을 보면 청중 측에서 질문이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질문을 준비하셨다고요?

예, 궁금했으니까요. 소잉카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나 무분별한 칭송이 자칫 현대화의 잠정적 이득을 무시하는 생각이라고 비판한 것 맞죠? 외침 대신 행동을 하라는 부분은 공감하지만, 난 그가 말하는 현대화가 무엇을 염두에 둔 말인지 궁금했어요. 유럽적인, 서양문명적인 변화를 말하는지. 또 그의 말을 확대해석하자면 한국문학의 경우에도 한국적인 것을 외쳐대는 대신 행동을 하라는 것인데…….

내일 저녁 다시 소잉카 발표가 있으니, 그때…….

질문이건 사인이건 참 부질없는 짓이지요. 알죠, 아는데, 여기 참가에 내가 괜히 자잘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나 봐요. 어쨌거나 파묵이 오는 줄 알고 가져온 『내 이름을 빨강』은 더 두꺼운데 두 권이잖아요. 그것들 들고 오느라 무겁기만 했어요. 펜에서도 파묵이 불참하는 것은 마지막에야 알았겠지요. 미리 그런 통보는 없었으니. 그런데 혹시 젊은 인도여자랑 오려고 했을까요? 그래서 그런 말들이…….

인도여자?

예, 인도 출신의 미국작가라던 걸요, 훨씬 훨씬 어린 나이이지만 첫 작품으로 무슨 상들에 빛나는 유망주라나 봐요. 파묵이 뉴욕에서 문예창작 가르칠 때 배웠을까? 서양에선 한 20년 차이는 차이도 아니지만요. 첫 결혼에서 ‘꿈’이라는 이름의 딸도 있다는데, 전 부인도 인텔리라 하던데, 역사학자라던가…… 암튼 이혼한 뒤에 인도여잘 만났나 봐요.

인도여자, 뉴욕…… 파묵에 대해서 꿰고 계시네요.

뭐, 독특한 일을 벌였잖아요. 재판도 그렇고, 필화사건을 겪는 작가들은 많지만, 무엇보다 그 박물관 말이어요. 노벨문학상 받은 뒤로 썼다는 그 『순수의 박물관』에 이르러서는 정말 뭔가 전혀 다른 문학의 콘셉트를, 난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네, 그건 나도 얼핏 들었어요. 소설에 나오는 박물관이 실제로 건립되었다고. 우리나라 어디 출판사에서도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내 친구의 친구의 동생이 거기 파견 차 나갔다왔다고 들었는데. 생각만 해도 멋있던걸요. 189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던데, 벌써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 건물을 사들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박물관을 지을 발칙한(?) 생각은 노벨상 수상 이전의 것이라죠. 그런데 그 박물관 내용은 들어 보셨나요?

아뇨, 뭐 연인의 담배꽁초 등등을 모두 수집해 놓았다고 정도.

그게 3층에 다락까지 있는 건물인데, 1층에서 벌써 4000개가 넘는 담배꽁초가 있고 그것을 일일이 비벼 끄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방문객을 압도한다는군요. 생각해 보세요, 여자가 평생 피웠다는, 피웠을 담배꽁초를 모아서 거기다 날짜를 쓰고…….

…….

2층과 3층엔 소설 전체 83장을 말해주는 83개의 캐비닛에 수천 가지 사진과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락 층에는 서술자 케말이 머물던 공간이라고 해서, 작품의 초고와 박물관 설계도, 세계 각지에서 번역 출판된 『순수 박물관』을 늘어놓은 거예요. 그쯤에 이르면 작가와 등장인물은 하나가 되고 말죠.

…….

퓌순, 그 여자, 퓌순의 귀고리로 대표되는 기념품 가게에선 온갖 잡동사니를 팔고 있고. 일단 박물관에 들어간 사람은 마취에 걸려서 기념품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죠, 자신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가 하는 착각에 빠져서.

슈퍼마켓 계산대 옆에 초콜릿이나 껌 등을 진열해놓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네요. 마지막 순간까지 고객의 푼돈마저 수탈하려는, 강력한 자본주의의 원리가……. 책은 꼼꼼히 읽으셨겠네요!

네, 뭐. 40권인가를 쓴 작가이고 보니 아직도 번뜩이는 말을 어찌 할까 싶은데 대단한 구절들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대부분의 인간에게 삶이란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야할 행복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 압력과 처벌,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말로 이루어진 좁은 공간에서 연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요즈음 처음으로 느낀다…… 등 등, 무시무시한 진단도 아직 내 뇌리에 박혀 있어요.

말장난 같아도 대가들은 다르군요.

말장난일 리가. 차라리 천재들이죠.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심각한 질병이라고? 뭐 그런 인터뷰도 있었지요, 아마? 그렇게 단언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소설가들에겐 신선한 충격을 주죠. 어중간한 소설가들은 그렇게 단언하지 못해요, 경박하다는 평판이 두려워서라도.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주인공 케말을 긍정적 인물이라고 밀고 나아가는 작가 또한 정신병 아닐까요? 그 말이 심하면 4차원의 두뇌를 지녔다거나.

암튼 독특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탈 경계죠. 소설인지 현실인지. 음악이 춤과 공연과 페스티발로 확대되어 가듯이 문학도 영화로 인터넷으로 이제는 현실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이겠지요.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로 도피했던 문학이 가상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가능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다시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제의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제의? 제의라, 그렇군요. 그런 느낌이 들곤 하더군요.

군중들이 모이기로는 경기장뿐 아니라 음악을 좀 봐요. 거의 광란에 가까운 혼돈 속에서 열광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것이 음악인지 연극인지 원시시대 종교의식인지 알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냥 도취와 마취와의 경계도 없고. 약물에도 의존하는 인공적인 도취상태라면 말입니다.

인공적인 도취상태?

심했나요? 전 그냥 맑은 정신으로 그런 퍼포먼스를 해낼 인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에요. 어떻게 5분 10분이 아니라 한 두 시간을 그런 망아의 경지에서 노래하고 춤 출 수 있죠? 알코올이든 더 강한 무엇이든, 인공적인 자극이 없이 그런 시간을 버틴다? 상상이 안 가서요.

참 별난 생각을 다 하셨군요. 난 그저 취미가 아니면 접어 버리는. 뭔가를 분석할 여지도 없이 덮어버리는 종류죠. 지금쯤이면 많은 것이 버거워서…….

아님, 일종의 경영?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재라는 건 돈과 성공으로 연결되지요. 완전히 창의적인 무엇인가만 살아남을. 이 피 튀기는 경쟁사회, 몇 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싸잡아 대중이죠. 대중은 쓰레기 인생. 주체는커녕 철저히 대상이라는 이름의 쓰레기. 그렇담 문학에도 철저한 마케팅이 필요한 세상이겠지요.

어머나, 젊은 분이라 생각이 다르군요. 천재의 전략쯤으로 본다는 말이죠. 난 그냥 소설 『순수의 박물관』 그 자체에도 질겁했어요. 그런 정도의 집착이라면 무서운 생각이 들었거든요. 고백하자면 내게도 그런 작은 집착이 있었다고 해도 될지…….

네?

이상하네요. 취기도 아니고, 왜 이런 망언이 불쑥 나오는지.

그녀는 조금 남은 잔을 훌쩍 들이켰다.

제가 바로 그 담배꽁초 때문에 타격을 입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건 핑계이고, 어쩌다가 세 마디 꽁초를 내가 가지고 있게 되었어요. 짐 속에 묻혀 있었다고나 할까. 그것을 버리는 것은 참 새삼스런 일이라서 그냥 짐 속에 남아 있었는데, 알고서도 못 버리고. 그런데 『순수의 박물관』이 나온 거예요.

『순수 박물관』, ‘의’ 없이, 책 이름은 그렇게 번역되었어요.

예, 『순수 박물관』. 거기 옛 연인의 담배꽁초를 모으는, 아니 그녀와 관련된 모든 사소한 것들을 수집하는 광적인 집착을 자랑처럼 들고 나온 주인공 탓에. 아니, 파묵 탓에 내가 상처를 받았어요, 괜히. 난 그저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더 늙어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게 될까봐. 아니, 사실은 언젠가는 정신이 온전할 때 버려야 할 물건들이었지요.

물건들? 그럼 혹시 그런 것들이 더 있으…….

더 있냐고요? 더 있다면 더 있지요. 혹시 발견이 되어도 아무도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할. 그런데 그 담배꽁초 세 개는…….

꽁초 세 개는…….

그걸 이번 경주행 이전에 버렸답니다.

경주행 이전에요? 왜죠?

왜냐고? 젊은 분이라서 이해를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여행 중엔 죽을 확률이 더 많다는 건 아시죠?

거야.

그거죠. 그래서 남아있을 추한 물품 목록에서 그걸 빼자고 한 거죠.

그럼 그동안 여행일랑은 한 번도?

아뇨, 가끔은 여행을 했지요. 그땐 『순수 박물관』을 생각한 적도 없고 또 꽁초의 존재를 어슴푸레 잊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이번에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챙기면서 아차 이건 아니다 싶은 거죠. 꽁초란 것이 너무 적나라하지 않아요? 어쩜 디엔에이마저 그대로 존재할 터이니.

디엔에이요?

내 것인지도,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도. 지금 좀 애매하게 되긴 했지만.

아니 담배를……?

물론 아니죠. 하지만 단 한 번도 입에 대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장담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나는 상황?

멀리 가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언제부터서는 기억 자체가 의심쩍게 변하죠. 왜곡된다고나, 자의적 기억이라고나. 글쎄. 암튼 누가 디엔에이에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뭔가 흔적이 있는 채로 남아있을 물건이, 온전하기는커녕 일종의 쓰레기인 그런 것이 을씨년스러워서. 아차, 이런 단어일랑 문학한다는 사람의 전유물이라서 평생 쓰지 말아야 했었는데 왜 이렇게.

잠깐만, 문학한다는 사람의 전유물인 단어들이라고요?

예, 그런 느낌이 드는 단어들이 있죠. 나 문학한다…… 그런 울림의 단어들. 유난히 문학스러운 단어들이랄까 그런 표현들.

에이, 그건 너무 편파적이시다.

편파적이라?

그럼 뭔데요?

내 얘긴 그러니까 딱 보면 문학 냄새를 풍기는 표현들 있잖아요, 이건 굳이 말하면 호불호의 문제인데, 난 냄새나는 건 좀 피하고 싶거든요. 비문을 쓴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문학 냄새나는 문장들은 가까이 하기 싫거든요.

에이, 그렇다고 무슨 단어 하나에.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스산하다, 쓸쓸하다, 그러면 되는데. 을씨년스럽다, 그렇게 말하면 뭔가 내놓고 문학하겠다는…….

재미있으시군요. 문학스러워도 안 된다, 그렇지만 문학이어야 한다.

예, 난 기실은 시인에 대해 외경심이랄까, 시인들을 무서워하는 편이죠.

무섭다면, 좀 이해가 안 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이 나을지. 종잡을 수 없어요. 시인이라면 일단은 존경스러운데, 언어의 압축이라는 미에 도달한 사람들이려니 했다가. 그런데 실제로는 가령…… 설명은 어렵군요. 너무도 표피적인, 그러니까 시인에게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서조차 너무 감상적으로 여겨지는 단어들을 직접 그들의 입에서 듣게 되면, 생활에서, 그게 순수인지 정열인지, 아니면 치기인지. 그 경계선은 어디죠? 난 물론 너무 심플하고 너무 드라이하다는 핀잔을 들었지만.

하하, 실례지만 심플하고 드라이하다면 시인이 아니신가 봐요!

시인이 못되는 거죠. 하지만 뭣보다 순수는 상처를 주지 않아야 순수죠.

상처까지야?

괜스레 상처가 되지요. 난 사람을 일반적으로 존중하는 편이예요. 각자 나름대로, 대개는 그리 달갑지도 않은 역할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모두를. 그런데 본능적이랄까, 명과 실의 간극을 보고 싶지 않거든요. 혼란은 상처가 되고…….

가볍게 생각하셔요. 여기서 만나는 우리는 대체로 다시 만날 일들이 없는 사이 아닌가요?

하긴 그렇군요. 저 그럼 손이나 씻고 저녁 순서에 대비합시다.

 

 

5.

저녁에는 경주 예술의 전당에서 행사가 진행될 것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로비에 늘어선 인파 속에서 설마 다시 그녀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인파에 밀려 밖에 나오니 버스는 여남은 대는 족히 되어 보였다. 표현의 자유를 다루는,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행사였고, 다들 참석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동시 통역기를 받아들고 회장으로 들어갔다. 좌장으로 나온 유명 소설가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이렇게나 친숙한가에 놀랐다. 육안으로는 난생 처음이지만 그의 소설 책 속표지 여기저기에서 보아온 얼굴이 저기에 있구나, 그 정도였다. 작가 특유의 있을 법한 고약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참 괜찮은 평범한 얼굴이 좋아보였다. 그가 점잖은 좌장 역할만 담당한 것이 안 되었다. 의견 발표의 기회가 없다니!

 

첫 연사인 평론가는 많은 평론가 중에서 경주 출생이라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는 경주 출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통일문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북한문학의 현황과 작가들의 인권에 관해 더 집중하고 있었다. 주체문예론, 선군문학예술에 관하여 객관적 자료들을 들어서 오직 인민군의 활동을 예찬하는 주제의 획일성을 - 예상대로 - 전달해주었다.

 

이어서 민족문제 관련 인사 역시 경북출신이었다. 한국의 필화사건을 시대별로 제시하며, 필화 사건이란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사상 및 표현의 자유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중심에서 김지하 씨의 「오적」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괜히 눈물이 났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에게 감동하면 절대로 안 된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니까.) 지난 70년에 있었던 국제펜한국대회 때 그가 바로 감옥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구속된 문인이 없이 치르는 이 대회야말로 진정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아닐는지.

 

정작 북한의 실상을 다루는 발표들은 상상을 절했다. 탈북 작가들의 ‘참으로 눈물겨운 땅’ 그곳이라는 절절한 증언들은 차라리 그들의 발언이 우리 체제의 선전용이기를 바라는 억하심정을 유발했다. 어찌 사람이 사는 곳이 그 정도일 수가……. 한 여성은 원래 전설적인 무용가 최정희 씨의 직접 제자였다는데, 지도자동지의 은밀한 총애를 받은 무용수 아무개 씨와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던 자신의 생을 회고했다. 만찬 이후 감상할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조작된 누명으로 끌려갔었다는 남성의 경우도 비슷했다. 실명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이런 포럼에도 목적이 아주 없지는 않은 듯, 탈북문인들의 단체가 펜의 일원으로 인준을 받을 예정이란다. 물론 회원국 대표들의 투표에 의해서.

 

『풀하우스』로 한국에 일시에 유명해진 재일동포 유미리 씨는 고상한 한복 차림으로 머리에 한 줄짜리 첩지까지 얹고 그림처럼 앉아있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한국어로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유창하고 빠른 일어가 튀어나왔다. 이번 포럼에서는 프랑스어가 빠져서 가능하면 영어 버전으로 듣고 있던 나는 당황했다. 얼른 통역기 채널을 한국어로 돌리려다가 그냥 꺼버리고 한국어 발표문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녀의 일본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텔레비전에서 모르는 외국 영화를 - 최근엔 독일어로 하는 <굿바이 레닌>이었던 같다 - 보게 되면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언어를 크게 틀어놓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일단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려면 소리를 들어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통역이란 참 부족한 의사소통행위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간에 쫓겨 떨고 있었다. 순서가 마지막이다 보니, 또 좌장 소설가님이 마음이 독하지 못해서 앞 선 발표자들에게 시간 엄수를 잘 못한 바람에. 아니면 한복을 차려입고서 일어로 말하고 일어로 읽는 부조화에서 도망치는 속도일까.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제한으로 질의와 응답은 형식적이었고, 모두는 서둘러 다음 행사장인 5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두 세대의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기에는 퍽 많은 숫자였다. 전망대는 서늘하다 못해 추웠다. 중앙부에선 경주시장 중심의 주행사가, 양쪽 날개에서는 자유로운 삼삼오오 대화들이 펼쳐졌다. 추위 때문에도 알코올이 필요했다. 여러 칵테일까지 준비된 즉석 바에서 와인 잔을 들고 나오다가 그 소설가를 또 만났다, 역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내가 열심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나, 정말 와인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닌데, 저 원래 소주를 좋아해요. 없으니까 이거라도. 그런데 왜 소주는 없을까요?

어머나, 술꾼이세요?

술꾼이면 다른 독한 칵테일을 마시겠지요. 그냥 뭔가 먹으려면 알코올이 필요해요. 춥기도 하고, 찬 음식은 별로거든요, 특히 고기를 먹어야 하면.

딱히 고기는 아니잖아요? 다른 것들도.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여기 케밥 같은 것도…….

예, 뭐. 사실 난 가슴이 아파서 뭘 못 먹을 것 같아요.

안되어요, 뮤지컬이 꽤나 길다던데요.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러니 드셔야죠. 그런데 왜 가슴이. 아, 그 북한의 수용소 어쩌고.

예, 뭐. 아뇨, 난 유미리 씨 때문에 더 울고 싶어졌어요. 대한민국 국적임을 말하려고 한복을 차려입었을까요? 유명하다 해도 아직 젊은 나이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어렸을 때부터 마땅히 있을 장소가 없어서 사는 것 자체가 별로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가…… 매순간이 시련인 현실을 참아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썼다고, 유토피아,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창출해 내는 것이 이야기라고, 그렇게 말하는, 아직 젊다 못해 어린 그 얼굴을 차마 올려다보지 못했어요.

전 뭐 독특하고 똑똑한 젊은 여자 - 뭐 그 정도의 인상이었는걸요. 생각해 보세요, 일본이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개화되었다고는 해도, 어머니가 가출했을 정도의 가정환경이 구김살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유부남의 아이를 가지고서 미혼모 선언을 하는가하면, 헤어졌던 연인이 말기 암이라는 걸 알고선 함께 살다니요! 의지가 확고한 작가 - 그런 인상이었는걸요.

물론 그랬죠, 저도. 그런데 오늘 갑자기 안쓰러움이 일었어요, 나 혼자. 유미리 씨가 들으면 자존심 상하려나? 암튼 정직하기도 외로울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어머, 생각보다 감상적이시네요, 갑자기. 우리가 알 수 없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말이에요.

그러게요.

게다가 오늘은 요덕수용소로 눈길을 돌려야 주류에 속하는 것 아닌가요?

주류라뇨?

프리 더 워드 - 이것이 구체적으로 북한의 언론의 자유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걸요.

정답, 정답. 난 실은 미리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한답니다. 물론 힘든 일이겠지만, 힘들기까지야, 한참 번거로울 것이라서 그냥 이렇게.

관심이 없으세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무섭죠. 그려질 광경이 미리 떠오르기도 해서. 제가 개성엘 다녀왔었거든요. 개성관광이 금지되기 한 달 전쯤이던가, 당일 코스로. 새벽에 임진각에 도착해서 어둑어둑해서 되돌아 왔어요. 물론 종일 해는 떴지만 어둑어둑했단 느낌이지만요. 전체가 그림자 도시 같았거든요. 길에 면한 아파트 창문으로 사람 그림자 하나 안 보였어요. 얇다 못해 세트 같아 보이는 벽은 곧 무너질 것 같았어요. 얇아서가 아니라 꽁꽁 얼어 있다가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갑자기 부서져버릴 것 같은 느낌.

어머나, 겨울이었어요? 차들이 많았나요?

아니 겨울은 아니었고, 늦가을. 차들이란 게, 관광용으로 줄지어 가는 버스들 이외엔 차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죠. 세워진 차 한두 대가 종일 본 전부였거든요. 차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없었어요. 그곳 인구밀도가 그리 낮은 건지. 박연폭포를 향해 걷는 길이 처음 내딛는 북한 땅이었죠.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500m 정도를 걷는데, 사람들은 남측을 통과해서 온 방문객들뿐이었어요. 평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북한 사람들은 정말 일터에만 열중하는가 싶었어요. 오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본 몇몇 사람들은 가로의 드문 나무들의 색깔처럼 짙은 밤색 아니면 짙은 다른 색 복장으로 소리도 없이 걷는 인상이었어요.

그런 인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수용소라면 미리…….

그렇죠, 하물며 수용소라면 얼마나 어두운 색깔로 그려질지.

어두움을 싫어하세요? 하긴 어둠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예, 어둠을 싫어해요. 지금까지 외면해온 어둠을 굳이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는 심정, 비겁하다고 해도 할 수 없죠. 인생을 꼭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어머나, 인생은 어둠이라고 단정해버리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얼마나 밝을까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머나, 한창 인생의 여유로움을 즐기실 차례 아닌가요? 저보단 좀 위이신 것 같은데, 자녀들 다 크고.

한참 위 맞아요, 한샘이 우리 애들 또래로 보여요. 그렇다고 여유로움 같은 건 아직.

그렇게 식은 식사가 끝나고 요덕수용소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소리도 내용도 무대라서 과장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대 위의 극을 견디어냈다. 냉방이 터무니없이 잘되어서 냉기를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1막이 끝나고 휴식 시간, 복도 구석으로 나가서 제자리 달리기를 했다. 마음 뿐 아니라 다리가 통째로 동태가 되었지만, 중간에 돌아갈 궁리는 나지 않았다. 아차, 그 사람은 어쩌고 있을까. 처음부터 아예 돌아가고 싶었다는 그 사람은. 밤은 벌써 어두웠고, 난 어둠 속에서는 유아가 된다. 함께 손을 잡고 있을 걸. 순진하게도 좌석표에 따라 앉은 우리는 각각 따로 얼고 있었다.

 

 

6.

수요일은 오전은 총회장에 있었고, 오후엔 관광이 있어서 한가했다. 저녁엔 본격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중심으로 <나의 삶, 나의 문학>에 관한 발표가 있을 것이었다.

 

어제 나보다 더 얼었을 그 작가가 오늘은 보이질 않았다. 아침 식사에서도, 점심 식사에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닐까? 다른 개인적인 일정이 있는 것일까? 아니 시내관광에 참석했을까?

내 룸메이트는 또래 통역사들과 어울리느라 방에 늘 없다. 관광에 참석했을 수도 있겠다.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누워서 천정을 보면서 쉬려는데 이상하게 좀이 쑤셨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름 석 자, 한국인이라는 것. 소설가라는 것. 그 뿐이다.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지 그것도 이야기 나눈 적이 없었다. 그래, 인터넷을 찾아보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네이버 씨, 아무개를 찾아주세요. 엔터~ 직전에서 멈췄다. 아니다, 이것은 심부름센터 짓과 무엇이 다른가, 직접 들쑤신다는 것만 다를 뿐.

 

프런트의 다이얼을 돌리고, 방을 찾아서 전화연결을 부탁하는 것. 그것이 더 정직할 터였다. 연결이 된다면 쉬고 있는 것을 방해하는 일인데. 대답이 없다면 관광에 참석했을 것이고 쑥스럽기만 할 텐데. 어느 것도 좋은 모양새는 아닐 것이다. 딱히 용건도 없질 않은가. 아니, 어제 공연장이 너무 추웠고, 또 조금 겁을 내고 있었으니 안부 정도는? 나는 벌써 프런트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방에 있었다.

 

예에.

저기, 선생님, 저 한금실이예요.

아이쿠, 한샘이 웬일이세요? 관광을 안 갔어요? 왜요?

그냥. 그보다 어제 공연장도 너무 추웠고 해서, 오늘은 어디에서도 안 보이시고 해서. 그러니까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못가신거예요?

아, 그게. 난 오늘 아침 금장대 버스를 타느라 일찍부터 서둘렀어요. 벌써 한 행보를 했으니 지쳤지요.

금장대라뇨? 시낭송회 말이어요?

예. 시낭송회요. 한샘, 이왕 방에서 쉬는 것이면 이리로 올래요? 전화로 이야기하느니.

어머나, 쉬시는데 방해가.

무슨 방해요. 그냥 함께 따로 쉬면 되죠.

네?

오세요. 여기 방에서 보문호가 다 내려다 보여요, 베란다에 의자가 둘 있잖아요.

아예 방문을 빼곡히 열어놓은 그녀는 벌써 베란다에 나가 앉아 있었다.

여기로 와요, 아직 해가 따뜻해요. 냉장고에서 뭐 하나 들고 와요.

아, 예. 괜찮은데요. 그런데 오늘 왜 시낭송 쪽으로 가신 거예요? 금장대를 보러 가셨나요? 「무녀도」의 배경이라서?

그걸 다 아세요? 난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거기 가니까 그런 소개가 다 있더라고요. 금장대 자체는 최근에야 복원했다더군요.

금장대에 가시려던 게 아니라면, 누구 시낭송하시는 분을?

아뇨. 꼭 참석해야 했어요. 나도 할 거니까.

하시다뇨? 시낭송을? 시인이 아니신 걸로…….

예, 일이 그렇게 되었답니다. 시낭송회를 본 적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그게 참 쑥스럽게 된 일이랍니다. 욕심이지 뭐겠어요. 일단 국제펜대회 참가는 망설임 없이 결정했어요. 지난 번 한국 개최 때에는 작가가 아니었고, 다음이라면 살아있을지 의문이고. 살아있더라도 그때까지도 무명이면 못 나서겠죠. 생애 한 번은 국제적인 작가대회에 참가한다 ― 순진한 발상이지만 그냥 그렇게 정했어요. 그런데 공문형식으로 ‘한/영문’으로 시를 집필하여 제출하면 대회장에서 발행되는 책자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왔어요. 첨엔 의아해 했어요, 시인도 아닌 터에. 다음엔 시를 쓸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영어로도 써야한다면 영어로 먼저 써야 운각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도 무지가 용맹이라고 참가한 흔적이라도 남길까 싶어서 시 같은 걸 짜내었죠. 그런데 이번엔 ‘영어로’ 낭송회가 있다는 전갈이 왔어요. 다시 망설였죠, 그러다 에라 내친 김에 - 그렇게 실없는 용맹을 부렸어요. 정말 시인도 아니면서.

잘 하셨네요, 그러면 은근슬쩍 시인으로 등단하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어림없죠. 우리나라 등단은 독특한 문화지요, 아주 엄숙한.

건 그렇고, 오늘 낭송회는 좋았어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던가요?

처음 프로그램 꼭 그대로는 아니지만 조금 변경된 순서가 제시되었고 그대로 진행되었어요. 한국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았고, 특히 경주지역 문인들이 잘 섞이었고, 어떤 언어를 선택하든지 하나의 언어로 진행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조금 무시되기도 하고. 이상하게 말해도 될까요?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요?

난데없이 웬 비빔밥.

아 그게. 비빔밥을 싫어하는 성미 때문인지는 몰라도.

몰라도?

외국 펜 회원들과 한국 펜 회원들이 아무렇게나 섞인 건 좀 수선스럽다고나 할까. 1부는 외국펜, 2부는 한국펜 그런 쪽이 나았을까? 정말 단아한 한국형 미녀이면서 영어가 유창한 아나운서였는데, 아나운서가 마이크로 소개해주는 대로 책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제가 또 느리기고 하고.

아, 그런 말씀이시군요.

암튼 오늘은 일찍부터 수선스러웠어요. 아침을 2층 보문에서 먹고 로비 쪽으로 서두르면서 희한한 풍경을 보았거든요. 그러니까 아침부터.

무슨?

멀리 분홍 꽃 재킷에 분홍 바지를 잘 맞춰 입은 여자가 마주오고 있었어요. 이름표를 건 것이 펜 일행이었죠. 깜작이야. 멀찌감치 보아도 우걱우걱 양치질을 하면서 걸어오는 거예요, 복도 한가운데서. 말 그대로 아침 먹은 것이 솟구쳤어요. 틀림없이 한국여자야, 라고 누워서 침 뱉는 욕을 하면서, 피한다는 것이 화장실이었어요. 멍청했죠. 곧 뒤따라온 그 사람의 피 튀기는 열정의 양치질에 기겁해서 도망치다시피 다시 방으로 올라갔어요. 방에서는 룸메이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찍 나왔던 참인데. 그렇게 출발 전부터 엘리베이터를 오르락내리락 했으니 진이 다 빠졌죠. 기러기가 쉬어간다는 금장대 구경이라고 맘먹고 기를 쓰고 올라갔어요. 시낭송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볼 것이라서 꼭 가야만 했으니까요.

그럼 시낭송 스케줄을 다 따라하시려고요.

그게 나도 낭송을 할 양이면 다른 사람의 것도 들어줘야 하는가 싶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런데 시내관광은 부러 쉬시려고 안 가신 건데 제가 이렇게.

아니 이렇게 느긋하게 ‘초추의 양광’을 즐기는 게 더 쾌적한걸요. ‘정원 한 쪽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떨어지는 해가 아니니까 즐긴들 죄로 갈 리 없겠죠. 그런데 한샘은 왜? 젊은 분이 일단 무엇이건 보고 참여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 아녀요?

저야 늦게 갑자기 참여하게 되어서 큰 관심이랄 게.

난 이만큼의 일정이 빠듯해요. 너무 많아요, 다 참석하기는.

그런데 문무대왕릉엔 가까이 가는 것 아니겠지요?

설마. 그냥 감은사지 석탑이나 둘러보겠죠, 바다 속 왕릉을 어찌.

그렇겠죠. 그때 7세기에 벌써 화장에 수장을 하다니, 그런 걸 보면 화장 개념이 불교에서 온 게 맞는데, 요샌 교인들이 앞장서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요샌 합리적인 사람들이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우리가 전통적이라고 하는 게 무속신앙, 불교에 유교가 섞여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녁에 동국대학교 캠퍼스로 갔다가 늦게 돌아올 예정이라지요? 뭐 따뜻한 걸칠 것을 챙겨가야겠지요?

네, 그전에 조금이라도 더 쉬세요.

예, 그럼 이따가.

그날의 대화는 거기쯤에서 끝났다.

 

 

시내의 대학 캠퍼스로 옮겨가려면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었다. 다들 관광을 가고 없으려니 했는데,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설가는 내가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는 로비에 나타나지 않았다. 왜, 나는 또 그녀를 기다린 것일까?

 

호텔을 출발한 여남은 대의 버스는 10킬러미터 남짓이라는 학교까지 근 30분이나 걸렸다. 시작과 꼬리가 길다보니 그럴 것이다. 호텔 팀은 알맞게 도착하였는데, 시내 관광 팀은 늦어지고 있었다. 시내 관광이 지체되어 프로그램 진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과의 변이 전달되고, 그러고도 한참 있어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예정 시각인 6시를 20분도 더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진행자 쪽 무대 한 쪽이 소란해지면서 외국 회원 두어 사람이 본부석 마이크를 행해 돌진했다. 벌써 마이크 대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왁자지껄 수상한 것이…….

사정은 일촉즉발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순간 진땀을 흘려가면서 겨우 그들을 진정시켰다. 오후 관광 코스에 원전폐기물공단이 들어있는 것에 대한 항의인 모양이었다. 이미 돌아오는 버스에서 불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작가들 중에 상당수가 원전에 반대하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인데, 특히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에, 한국의 원전은 안전하다는 식의 선전에 분개했더란다. 그러니까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간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나 보다. 다행스럽게 합의가 도출된 모양이었다. 마이크로 그런 내용들이 확산되기 이전에 주최 측에서 간곡히 말린 것이 통했나 보다. 그런 항의를 ‘이해는 하고 또 한편 동감이지만, 항의를 할 적당한 때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주최 측의 고민을 이해해야 했다. 행사지원금을 받은 터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후문이었다. 행사 지원금이라는 것이 늘 말썽이다. 순수한 지원이란 드문 세상이니까.

찰나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연사들이 연단에 올랐다. 말을 해방하라, 프리 더 워드 제 2막에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곤 하는 시인 고은 씨도 함께 <나의 삶, 나의 문학>으로 진행될 것이었다. 객석과 가까워 친밀감을 주는 무대 위에서 좌장 소울 회장의 빨간 양말과 르 클레지오의 하얀 양말이 두드러졌다. 서양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차림새에는 무신경 한 듯. 가운데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의 전통 복장을 고수했다. 그 헐렁한 원피스 같은 윗도리를 보며 생각했다, 의상은 가리게일 뿐이구나.

 

좌장인 소울 세계회장은 자유언론에 대한 수필과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만해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경주와 친해졌다고 들었다. 그는 앉은 차례대로 먼저 소잉카를 소개한다.

소잉카는 <작가와 의례>라는 제목으로 말할 것이었다. 영어로 보면 제의적 의례라는 말일 것이 분명하다. 그가 쓰는 것들은 의례와 관련된다고 한다. 사회 자체의 표현이 의례요, 사회를 확인하는 것이 의례이고, 계절을 찬미하고 곡식을 심고 수확하는 것도 의례라고 한다. 비합리적이 아니다, 미신적이 아니다, 영적인 것을 따르지 않는다 - 그렇게 자처하는 사회 속에서도 의례는 존재하는 것이란다. 의례는 어쩌면 권력과도 통할지 모르는데, 작가는 의례의 남용을 조사하고 비판하고 반대 의례를 창조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어려운 말인데 소잉카의 출발이 희곡 장르이고, 희곡 장르는 그리스 고전극의 의례에서 출발하기 때문일까? 그로서는 살아가는 것이 곧 글쓰는 일이라고 했다.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체험했지만, 그 단선적 교육이란 금기 사항뿐이었고, 그러나 창조성이란 영원한 것이라고.

 

다음 순서인 우리의 호프 고은 시인님은 청중에게 주는 원고 없이 시작했다. ‘푸른 산’과 ‘흰 구름’에 기대어, 노벨상 수상자들은 손님으로서의 흰 구름에, 자신은 주인으로서의 푸른 산에 빗대는 것 같았다. ‘관계가 의미를 만든다.’ - 자신은 구조주의에 가깝다고, 실존주의를 부정했다. 존재한다는 의미를 ‘언제 어디’에 두기 때문에, 우연의 생명체로서의 보편을 믿지 않고, 필연의 존재, 즉 특수성을 믿는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은 함께 존재하느니. 한국전 3년간 청년 1/3이 삶을 중단했다 - 그 결과로서 그가 존재한단다. 그러므로 그들의 중단된 삶이 그의 삶의 의미이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문학을 한단다. 그러므로 그의 시의 본질은 애도의 문학이라고. 우와! 자신의 문학의 본질을 확고히 알 수 있는 작가들이 몇이나 될까. 역시 출중한 분이구나 싶었다. 애도의 필요성에는 100% 공감한다. 옛날에도 그랬다고, 6만 년 전 어린아이 미라 옆에 히아신스 화석이! 장례문화는 곤충에게도 있다고. 5천년 이래의 과거가 오늘의 시가 된다, 시인들은 단명, 요절, 옥사, 자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음을 일깨운다. 겨우 30편 쓰고 죽은 시인이 그의 뮤즈이니, 그의 뮤즈는 과거에 헌신한다고. 그 발언 자체가 서사시다. 산자여 따르라…… 라던 빛고을 광주의 노래가 떠올랐다.

간단한 질문에 답할 때 나온 말, 이웃이 피해를 입을지라도 개인적으로 태풍을, 폭풍을 좋아한다고 - 어쩌나, 사회적 선한 의지만으로 뭉친 것만 같았던 그의 인간성의 다른 면이 드러난 것인가?

 

르 클레지오은 정 반대로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다. 제목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때문에 쓴다.’는 요지다. ‘손으로 씨를 뿌리고 눈으로 수확한다.’는 속담이 고향 모리셔스 섬의 크레올 말인데, 작가는 무슨 싹이 날지도 모르면서 책을 쓰고 독자는 그저 읽는다는 말이란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솔리튀드를 느끼는데, 영-불 사이 부모를 두고 프랑스령 태어나서 2차 대전 상황에서 8살에야 영국군 의사인 아버지를 만났던 기억, 영어를 원한 아버지. 그러나 그는 따뜻한 옛것을 향한 그리움으로 시를 썼고, 나중에는 오케스트라에 심취하다가 코믹을 썼는데 자신의 선생님들을 등장시켰다고. 작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몹시 더운 여름 차일을 내리고 들어박혀서 더위를 피하며 쓰고 출판하고 상 타고 그러나보니 작가가 되어 있었단다. 이어서 많은 여행 속에서 작가는 인류학자라고 느꼈단다. 미국 인디언과 3년 정도 살면서 느낀 것, 문학은 글로 쓰지 않더라도 이미 존재한다는 것.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예술은 경이, 놀라움이다. 마음은 늘 다른 책들에 사로잡혀 있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상황에 대한 갈망이다. 꿈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꿈, 다른 상황에 대한 열망,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 현실을 떠남이다?

 

한국어로 들었으면 정확했을 뻔 했다. 그의 목소리도 그가 사용하는 단어도 중요했기에 영어로 들었다가 조금 낭패였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시작된 만찬은 다른 어느 때보다 푸짐했다. 와인이 거의 무진장 제공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은 여기 저기 늦게까지 남아서 자리를 옮겨 다니며 떠들어 댔다. 나도 그렇게 해서 소울 회장의 테이블 가까이로 갈 수 있었다. 그 사이 회장은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고 부인만 내가 찾던 그 소설가랑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전 총독에 대한 예우에서인지 ‘더 라이트 호노러블’이라는 칭호를 부르는 그녀가 신기했다. 저런 걸 어찌 다 아남!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이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여기에 참석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통역사로서. 나 자신도 누군가의 메모를 정리하다가 한두 편 단편을 발표한 글쟁이에 속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 소설가가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주면서 사진을 부탁하는걸 보니 정말 이 캐나다 여성을 존경하는가 싶었다. 사람들이 또 밀려오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양반을 양보하고 우린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이 여성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되었어요. 지금은 은퇴했으니 파트너 동반여행 자체가 무리는 아니겠지만, 소울 회장보다 한참 연상인데 그럼 칠순도 넘긴 나이겠죠. 어디 동반뿐인가요. 행사마다 동참하잖아요, 걷기도 조금은 불편해보이면서. 홍콩 태생의 중국인이 어려서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건너가서 캐나다에 뿌리를 내렸다 - 것도 모자라서 총독까지 지낼 수 있었다니.

우와, 그 정도이시구나. 그런데 왜 파트너라고 하시는지?

아, 일단 소울 회장과 다른 이름을 쓰고 있고, 클락슨은 첫 결혼의 성이라죠, 아마. 제가 그냥 훑어 본 바로는 둘 사이 오랜 동반자적 관계였다가 클락슨의 총독 취임 시에 거행된 결혼식이니까 그냥.

네, 그렇군요. 그런데 난 고은 선생님 이야기 들으면서 속으로 반론을 펴보았어요, 속으로만. 보편이 없으면 특수라는 개념이 생기는가요? 보편을 향하지 않으면 특수 이익집단을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해서요. 문화란, 문학도 그 범주에서, 구체적 특수성에서 해방적 관심을 보이면서 동시에 보편주의의 형태를 대변하는 양가적 것이라는 테리 이글턴적 관점에서 하나만을 선택한다는…….

어머나, 이글턴이라면 미적인 것이야 말로 인간의 에너지들을 근본적으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모든 헤게모니적이고 도구주의적인 사고의 적수로 본다 하지 않았나요?

아, 뭐. 꼭 그런 것 같지는 앉지만, 너무 가지는 맙시다.

그래요, 실은 난 공부에서는 손을 떼었답니다.

네 뭐. 준비된 노벨수상후보자 앞에서는 조용해야지요!

내 말에 머쓱해하던 그녀는 ‘증명사진’ 하나 찍어두겠다고 텅 빈 무대에 혼자 올라가 섰다. 우리 둘은 함께 찍지 못했다. 부탁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거의 파장이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그녀는 낡은 책을 따로 들고 있었다.

식사에 책을 가지고 가셨어요?

아, 이거? 난 르 클레지오는 지한파라서 참석했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의 발언이 무척 솔직하여 감동적이었어요. 글쓰기는 자신에게 집중하기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아팠어요. 내 말을 유명인사가 대신 해주는 것 같아서. 생각하지 못했던 감동에서 저녁식사에 오면서 혹시나 하고 이 책을 가져왔어요. 첫 번역출판본 『조서』 말이어요. 여기에 사인 받았어요, 조금 아까 여기서. 한국에서 첫 출판본이라고 하니까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80년대 이었으니까요.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내일은 뵙기 어렵겠지요, 난 종일 총회이고, 선생님은 시낭송회 가실 거라고요?

그래야죠. 잘 자요!

 

 

7.

목요일은 정말이지 종일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총회장에 매어있으면서 나는 왜 그녀를 찾고 있었을까? 시낭송회에 갔을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랬다. 총회는 컨벤션홀에서 종일 계속되었고 시낭송은 근처 제이드홀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점심시간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엔 총회가 끝나자마자 시낭송 홀을 기웃거려 보았다. 그곳은 더 먼저 끝난 모양이었다. 하긴 저녁까지 이어질 인각사 관광을 위해서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인각사는 군위군이라고, 경주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예 경북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한참을 가다가 영천 쪽으로 올라갔다. 거의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린 느낌이었다. 처음 버스가 출발해서 마지막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를 서성이니까 그리 더 길게 느껴진 것일 게다.

 

군위의 동쪽에 있는 인각사는 정확히는 인각사지라고 할까.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썼다는 때문으로 유명한 곳이고, 명부전과 산령각 이외에 나머지 법당들은 새로 지은 것들이라 했다. 일연스님의 박물관이란 곳은 그 명칭에 걸맞은 자료는 없는듯했다.

 

근처 일연공원의 만찬에도 패션쇼 <삼국유사>에서도 뮤지컬 <삼국유사>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제 좀 과했었나, 여러 가지 의미로? 설마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여기에서 저녁식사 후까지 행사가 계속될 것이니까. 그보다는 ‘천년의 신앙, 천년의 기다림’이라는 부제를 단 도화녀와 비형랑의 뮤지컬 동안에도 그녀가 왔을까를 생각하거나, 무형문화재라는 줄타기 장인의 아슬아슬한 묘기의 순간에도 하늘 위가 아니라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내가 우스웠다.

 

안개처럼 부슬거리는 비 때문인지 사람들은 비닐우의를 나누어 받고서도 기분들이 가라앉았다. 외국 회원들은 실망의 표정이 더욱 심했다고 느껴졌다. ‘프리 더 워드’에 꼭 인각사가 알맞은 메시지를 준 것이었는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조금 웅성거리기도 했다. 『삼국유사』를 역사보다는 문학 쪽으로, 기록문학의 의미로 보면 빠지지 않는다고 대꾸하면서도 나도 실은 너무 힘든 선택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쨌거나 긴 하루였다. 이제 하루만 더 견디면 된다. 이제 정말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8.

그렇게 금요일이 밝았다. 오전 오후 총회가 있지만, 4시경 폐회가 선언되면 이어서 기자회견으로 일정이 끝난다. 한숨 돌리고 나면 아주 편한 기분으로 환송만찬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마침내 그녀는 시낭송을 했을 것이다. 오전 총회 후 곧장 시낭송회장으로 달려가 보았으니 벌써 끝나고 텅 비어 있었다. 제이드홀 옆 다이아몬홀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는데, 어디에도 사람들은 없었다. 벌써 점심식사 홀로 흩어진 뒤였나 보다. 시낭송회는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을 텐데. 숨바꼭질이다, 꼬박 이틀 동안을.

 

어쨌거나 저녁시간 까지는 정리할 것들이 좀 있었다. 일이 끝났으니 간단히 통역사들끼리 정리 겸 마무리인사도 나누었다. 내일 남은 것은 떠나는 일 뿐이다. 조금은 늘어놓았던 짐들도 정리해 넣고, 저녁과 낼 아침에 쓸 것들만 남겼다.

다 저녁에, 갑작스레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벌써 출발해버린 것은 아닐까. 잠시 방에서 쉬다가 그 생각이 들자 좀이 쑤셨다. 우린 전화번호를 주고받는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다. 대부분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과 눈인사나 하는 정도가 이렇게 무슨 대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환송만찬에 가려다말로 프런트에 들려 보았다. 그녀가 묵는 방은 아니까 혹시 물어나 볼까 하고. 프런트에서는 내 예상대로 체크아웃 했다는 말을 한다. 설마.

 

아, 여기 메모가 있는데, 혹시 한금실 선생님이신가요?

 

그것이 다행하게도 내 이름이었다. 나는 메모를 받아들고, 받아만 들고 그냥 서 있었다. 지나가던 영어담당이 불러 세웠을 때야 만찬장으로 함께 향했다. 만찬은 파장답게 더 편안한 가운데 공연들도 더욱 수준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참 제대로 된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들어본 것이 언제 적이던가. 중창단도 재즈밴드도 몇 년 간의 문화생활을 하룻저녁에 다 맛본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했다.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둔 메모는 방에 들어와서야 펴 보았다.

한샘, 저 벼락같이 출발합니다. 허무하게 내 일정을 끝내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졌어요. 오후 총회엔 투표권이 있는 분들만 들어간 대죠? 오후를 어슬렁거리며 환송만찬을 기다리기엔 나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고 싶어져서요, 집에서.

나를 조금 걱정했겠죠, 아마도? 낭송은 조금 떨린 채 시작하니 끝이 나더군요. 몇몇 감동적인 외국 시인들의 낭송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실한 시도 영어도 부끄러웠는데, 끝난 뒤 뜻밖에 동문들 선후배들을 만나서 외롭지는 않았어요.

사족 : 책자에서 잠비아의 니콜라스 카윙가의 「우리 자신들」, 트리에스트의 안토니오 로카의 「아직은」을 읽어보세요.

 

그렇게 사라져버린 소설가 그녀를 생각한다. 시인도 아니면서 시낭송을 하려했다는, 그때까지는 도망가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그녀를. 그리고 도망가 버린 그녀를. 나는 그녀가 부끄러움에 도망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외로움에 사무쳤을 것이라고도 믿는다. 외롭지는 않았다고 쓰는 사람은 외로운 법이다. 나는 외로운가? 나는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거나 그런 말을 하지도 쓰지도 않는다. 그러니 괜찮다.

 

나도 물론 메모를 썼다.

 

아무개 선생님, 총회 결과를 말씀드릴게요. 레바논과 망명 북한작가 펜 센터 가입안이 통과되었고, 2013년 펜대회 개최예정지는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랍니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문학수호 도시래요.

아차, 그녀는 퇴실을 했고, 나는 그녀가 있는 곳을 모른다. 안다고 하더라도 이런 내용을 뭣 때문에 써 보낸단 말인가. 메모를 습관대로 잘게 찢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 일찍 나는 첫날 아침을 먹던 자리로 가서 똑같은 빵에 똑같은 커피를 마셨다. 그날 아침처럼 자리 때문에 어색해하던 그녀는 물론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쪽을, 첫날 아침 그녀가 앉으려다 말다가 옮겨 다니던 테이블들을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순간은 반복되지 않는다.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내가 예서 누군가를 만났었나?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였다. 여기서 만나는 우리는 대체로 다시 만날 일들이 없는 사이라고 내가 그랬었다. 꼬박 일주일의 작가들 틈새 기웃거리기를 뒤로하고 일상을 향한다. 행여 내 틈새는 새나가지 않았기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

2013.6.5. 중편 「틈새」,『동리목월』 2013 여름호 (통권 12호), 233-279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8:04

포이동 266번지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포이동 226번지 - 이 지번은 픽션이어야 한다. 포이동 226번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자면 거기 사람들의 허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달을 허비한 것이 잘 한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나를 그리로 데려간 것은 아직 이른 나이에 요양병원에 들어있는 당숙모다. 아버지의 사촌동생, 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당숙의 부인, 그 당숙모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챙기신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 둘째 큰아버지는 벌써 옛날 결혼 전에 미국에 가서 안착하셨으니까 - 아버지가 집안의 연결고리가 되신 것 같았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 뒤에서 늘 분주하시다.

 

 

요양병원 로비는 정작 환자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화려한 셈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간단한 음식을 챙겨 오셨다.

(누구?)

나 금실엄마.

(금실엄마 누구?)

여기 우리 금실이. 나 금실엄마. 우린 동갑내기 한실이들!

한실이란 말이 당숙모를 움찔하게 한다.

한종남 씨 아내!

어머니가 길게 부르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머니는 아차 하는 작은 소리를 내시더니만 그냥 가져온 음식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여기, 아지매 좋아하는 파전 있어요. 동래파전! 아이쿠 다 식어버렸네, 꼭꼭 싸 왔는데.

눈동자가 음식 쪽으로 옮겨가지를 않는다.

어머나,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올 걸 그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엄마, 정구지 지짐이라뇨?

아, 부추전을 거기선 그렇게 부르나봐. 하긴 네 숙모 말 듣다보면 웃겼다. 할머니는 얇은 솔전을, 외할머니는 두툼한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주더란 말이지.

잘 드시는 것도 있군요.

응, 조금. 네 고모는 수완이 좋으시잖냐. 헌데 지금은 무릎 땜에 많이 못 다니시더라, 칠순 때까진 펄펄 날더니. 해서 네 당숙모를 이쪽 병원으로 옮긴 것 아니냐. 고모한테 대면 내가 한참 젊지 뭐.

엄마가 뭘 젊다고 그러세요. 엄마도 좀 쉬엄쉬엄 하실 나이신데.

며느리도 없는 사람이 무슨 쉴 복? 하긴 요샌 며느린 소용없다더라. 난 딸이 셋이나 되니 좀 쉬엄쉬엄 살아 볼거나. 아차, 이를 어쩌나. 아지매! 이간호사님! 이선생!

어떻게 불러도 당숙모는 영 모른 체 하시고 만다.

음식은 요양보호사가 와서 도와주니 조금 받아든다. 규칙적으로 벌리는 입이 아기 같다. 요양병원 생활에도 이력이 붙나 보다.

보세요,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먹이면 곧잘 드세요.

어떻게 요령이 좋으시네요, 다행스레.

안 먹으면 혼내준다고 그러시나요?

내가 엉뚱하게 끼어들었다.

예, 정말 그래요. 이걸 안 먹으면 뭘 안주겠다. 뭐 좋아하는 간식 같은 것. 그렇게 어르기도 하고. 차라리 아기 같은 분들이 우린 쉬워요. 말은 안 해도 크게 고집을 부리시지는 않으니까.

그럼 왕고집부리는 환자들도 있어요?

그럼요, 폭력도 있어요. 사정없이 손을 휘저어버리죠. 무작정이니까 얻어맞기도 해요. 지난달엔 신출내기 요양보호사가 울고 그만 두기도 했는걸요.

울어요?

꼭 아파서라기보다. 여기 일 작정하고 나서기 쉬운 건 아녀요. 여기가 처음인데 크게 충격이었나 봐요. 다음 직장에선 잘 하게 될 거예요. 누구나 첨엔 견디기 어려워요.

자, 어르신, 이묘순할머니, 이묘순아줌마, 한번만 더!

몇 입 먹이다가 지친 요양보호사는 소용없다 싶으니 입이 귀에 걸리는 미소를 순간 해보이고는 자리를 뜬다. 당숙모는 멍하니 멈추어 있다. 주섬주섬 그릇을 챙긴 어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 숙모 몸은 멀쩡해 보이지 않더냐?

저를 잘 모르시던걸요. 실어증뿐 아니라 아무래도 눈도 좀. 아니 기억 자체가.

그럴 것이다. 어떻게 정신을 붙들어 매고 살아갈 것이냐, 식구 모두를 다 잃고. 그런데 어찌어찌 버티다가 하필 포이동에서 장롱에 목매단 사건 이후로 더 저리 되었다고,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 설레야.

장롱이라뇨?

신문도 안보고 사냐.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모르는 것 없이 다 뒤져 본다던데.

재작년엔가 포이동 화재사건이야 알죠, 그 다음 더욱 처량해진 사람들. 하긴 당숙모가 저리 되신 건 한참 전이죠? 포이동이면 당숙모 사시는 데도 아니잖아요.

그게 가까운 거리지. 걸어서 15분, 20분도 안 되는 거리야. 네 숙모 사는 데가 물론 포이동 재건마을하고야 같겠냐. 개포 시영은 재건축 기대로 한 때 잘 나갔었다더라. 그럼 또 뭐하겠어, 당사자가 저리 되었는데. 또 성한들 24평 그런 걸 받으려면 들어갈 돈이 얼마고……. 모르겠다. 아무렴 네 숙모 정신이 돌아오려나.

그런데 장롱 사건은 뭔데요?

그게 화재사건 한참 전 일이지, 저 사람 저리 멍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어디서부터 하랴? 아서라. 말죽거리 네 고모가 저 사람들 서울로 불러들일 때만해도 희망은 있었지. 아니, 우리가 볼 때는 어처구니 없더라만.

어머니는 섣불리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그러다 결국 털어놓으신 것은 고모를 통해서 알게 된 당숙모의 얄궂은 포이동 가슴앓이였다.

1979년 마산의 작은 병원의 간호원 이묘순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늦깎이 대학생 한종남과 미래를 설계하는 사이였다. 종남을 처음 만난 것은 전방으로 오빠 면회를 갔을 때, 간호고등을 졸업하고 간호원이 되어있을 때였다. 시를 좋아했지만 언감생심 대학은 꿈도 안 꾸었던 그가 제대 후에 대학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묘순 때문이었다.

한종남은 아버지의 사촌동생이었다지만, 아직 꼬마였던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함흥에서 1.4후퇴를 피해 흥남부두를 떠나온 어머니가 거제도 피난민촌에 도착한 다음날 철 이르게 세상에 나왔다. 북에 남은 아버지 - 우리 아버지의 막내삼촌 - 생사를 모른 채 흥남이라 불리며 부산에서 자라고 있었다. 입학할 때가 되어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정문리 본가로 모자가 찾아온 뒤로 항렬자를 따라 종남이 되었지만 부산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는 많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부마사태의 와중에서 체포되었는데, 며칠 뒤 대통령 사망뉴스가 나갈 즈음 구토를 하며 의식을 잃다시피 병원으로 실려 갔다. 뇌와 관련하여 응급수술을 했지만 결과는 불행했다. 그렇게 그의 생은 졸업은커녕 그 상태에서 정지해버렸다. 중환자실로 달려온 여자 친구는 - 그이가 당숙모다 - 놀랍게도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고, 그 길로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해서 4인 가족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한 두 해를 버티다가 치료에 대한 희망으로 서울로 왔다. 아빠는 아기가 재롱을 부리면 함께 친구하며 웃었다. 아기는 겨우 아장거리다가 넘어지다가 점점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아빠는 점점 움직이는 일을 못하게 되었다.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흔한 감기에도 입원을 반복했다. 생활은 기울고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다시 직장을 구했다. 간호원 자리는 점점 대졸로 채워졌고 지방의 간호고등 출신으로는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야간 담당만을 자원하면서 준 종합병원에 취직했다. 아기는 저녁마다 자장가를 불러주는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랐다. 어머니도 아내도 온갖 힘을 쏟았지만 종남삼촌은 감기에서 폐렴으로, 폐렴에서 패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시장엘 갔으려니 했다. 그날따라 아일 데리고 어른걸음으로도 10분도 넘는 양재천엘 왜 갔을까. 징검다리 부근에서 빠졌을 리는 없다. 거긴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깊이이니까. 혹시 모른다, 먼저 아기를 놓치고 구하려다가……. 멀리서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아기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했다. 할머니는 잠깐 아기를 잃었다가 뭔가를 소리치며 물속으로 정신없이 뛰어든 것 같았다고. 그렇게 할머니와 아기가 갔다. 혼자 남은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병원에도 다시 나갔다. 낮이면 양재천엘 자주 나갔다.

당숙모가 포이동 266번지와 연을 맺은 것은 일단 양재천변 코앞의 동네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심코 천변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곤 하다가 이상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두 세 시쯤이면 폐지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시선이 박혀버린 때문이었다. 누굴까. 당숙모는 할아버지들의 얼굴과는 친숙치 않았다. 친가 외가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조차 일찍이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란 어떤 얼굴인가를 몰랐다. 그런데 등 위쪽이 마르고 아기처럼 수줍은 얼굴의 할아버지란 당숙모에겐 상상이 안가는 어떤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 할아버지는 꿈에선가 어디에선가 분명 만났던 사람이었다. 누굴까. 몇 번을 그렇게 스치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곳이 포이동 266번지였다. 개포 시영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그곳에, 사람살이인가 싶게 살아가는 동네. 아니 동네 느낌이 아니라 쓰레기하치장 같은 곳. 거기가 그 아기 같은 할아버지가 몸을 누이고 사는 데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도통 말이 없었다. 처음 쭈뼛거리는 인사에도 알아듣는 듯 마는 듯. 귀가 안 들릴까. 그렇게 기웃거리다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뉘시우? 그 양반 무신 말 잘 안허걸랑.

아유, 죄송해요. 제가 아는 분인가 싶어서 따라왔는데, 언젠가 헤어진 누군가 싶기도 하고.

에고, 잘 되었우, 행여 아는 사람이믄. 이 양반 평생가야 사고무친에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걸랑.

아니, 어떻게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게, 우리 아저씨가 하꼬방 살 때부텀 만난 사람인데 말이우.

하꼬방이요?

아, 그 청계천서 폐지 하다가 이리로들 왔다는 것 아니우. 난 여기 온 뒤로 만났다우.

그럼 아저씨께선 잘 아시겠네요?

알다마다요, 그 사람을 살렸다는데. 뭔 인연인지 여기꺼정 함께 왔으니.

아저씨는 해가 넘어가서야 판자촌으로 들고, 당숙모는 밤 근무를 해야 해서 주말에야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설명도 아리송하기만 했다.

한참 군사정권 때 일인데, 어느 새벽 청계천변 하꼬방 판자문 앞에 모로 누워서 새우잠을 자다가 발견된 사람이란다. 첨엔 자는 줄로 알았는데, 정신을 잘 못 차려서 일단 끄집다시피 하꼬방 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자기 이름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말을 시켜도 못하고 알아듣는지 마는지 그런 사람이었다. 하꼬방에서 한데 살던 둘 중에서 나이든 사람이 삼십 중반의 김 씨였다. 이 노인네를 어쩌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렇게 며칠, 가만 앉은자리에서 폐지를 혼자 정리하고 그러더니 고물 책 하나를 보고 눈이 뒤집히더란다. 그걸 품고 자는 것이 신기해서 구경거리가 났나 싶었단다. 다음날엔 두 사람이 각각 일을 나서는데 엉거주춤 따라나서더란다.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성 싶었는데도. 결국 첨엔 뒷짐을 지고 따라다니더니 오후엔 뭔가 글자가 있는 것이면 슬며시 집어 올리더니, 그제서는 버린 책이며 휴지를 집어오는 일을 곧잘 하더란다. 어수룩한 사람 버리기도 뭣하고. 그러다 하꼬방 사람들이 한꺼번에 재건마을로 쫓겨 올 때 묻어왔는데, 이름이 난감했다. 순간 김 씨가 얼른 생각을 해낸 것이 이 노인이 처음 집어든 책에 적힌 이름이었다. 그것을 비슷하게 따서 김수용이라고 둘러댔다. 일가 아저씨인데 말을 잘 못한다고 하고. 나이도 대충 적어 넣었으니까 실제 나이는 모른다. 일단 서류들을 만들어 재건대원등록증을 나누어 받았으니까 유령에서 사람이 된 것. 어쩜 다행인 것이 호적 없는 사람들도 그땐 주민등록 취득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포이동 200-1번지. 정말 다행이었다, 언제부터서인가는 이 동넬 완전히 유령 취급을 해서 아예 주민등록도 받아주지 않았으니까. 뭐 그런 정보였다.

김수용이래요, 유령이었다가 사람이 되었다네요. 참 그런 일들도. 그래도 유령처럼 되기 이전엔 분명 사람이었을 거 아녜요? 어디서 뭘 하다가 청계천 하꼬방 문간에 나타났을까요? 그 얼굴이 뭔가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설까, 알 수가 없어 고민 중이예요.

걸 뭘 고민하고말고. 거야 병원에서 그 많은 환자들 보며 살아온 세월 때문이겠지. 자네 살기도 힘 드는데…….

양재동 고모가 그렇게 말하면, 글쎄요, 난 포이동 거길 꼭 들여다봐야 숨이 쉬어지는 걸 어쩌죠, 하면서 웃곤 했단다. 이후로 고모가 당숙모의 입에서 듣는 말은 모두 그 재건마을 이야기뿐이었다.

포이동 266번지 - 장화 없인 살 수 없는 진흙탕 속. 어쨌거나 땅을 개간하고 얼기설기 판잣집을 지어 만든 마을이래요.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꼬, 했어요. 망태할아버지들 말고도 일가친척이 없는 고아 출신도 느닷없이 이리로 팽개쳐졌다고도 해요. 어쨌거나 양재천 저쪽 사람들은 여길 양아치 소굴이라 한다네요. 무슨 특별단속기간 같은 때는 난데없이 절도범이라고 잡혀가는 사람도 있고. 그게 실적을 세우려는 형사들이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도 하고. 죄 있고 없고를 누가 그리 훤히 안대요? 그래도 이렇게 여자들도 들어왔고 아이들도 생겨난 것이 사람 사는 동네죠.

포이동아재 - 숙모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언제 다리를 다쳤을까요? 보아하니 상이군인은 아닌 것 같고, 뭐 총상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요.

포이동아젠 가족이 없었을까요? 도통 가족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질 않으니. 김 씨 아저씨네가 옆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 집 꼬마 애를 보면서 눈가가 축축해지는 걸 난 봤어요.

포이동아젠 나이도 알 수 없으니. 누런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는 걸 보면 환갑이나 되었을까? 책은 고물에서 골라낸 것들. 신문도 날짜 관계없이 샅샅이 보는 것이 뭘 찾는 사람인지…….

아, 포이동아재가 처음에 꼭 껴안다시피 내놓지 않고 읽었다는 책이 뭔 줄 아셔요? 눈 큰 김수영의 시집이에요, 아마 첫 시집이죠. 『달나라의 장난』. 작은 나무상자 위에 그 책이 있더라고요. 1950년대에 나온 데다 버려진 것이니 너덜너덜했지요. 원래 주황이었을 바닥 몇 센티미터 위로 펜 하나로 그린 고층과 저층의 상징적인 집들, 그 위로 한 가운데 둥글게 뜬 달. 글자들이 종이 속으로 녹아들 시간이 지났지만, 생각보다 온전했어요. 그보다 기가 막힐 일은요, 집엔 애 아빠가, 종남 씨가 남긴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가 있거든요. 함께 샀어요, 900원 주고. 양장본인데 표지 색깔이 독특해요. 처음 그걸 샀을 때 난 무심코 바다색이라고 했더니, 제목의 달을 보고서도 우주보다 바다가 먼저 생각나느냐고 나를 놀렸던 얼굴이 떠올랐어요. 우린 「복중」에 애를 배서 조용해진 계수 이야기에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나도 그럴까? 너무 조용한 것도 병이다, 너무 생각하는 것도 병이다…… 그런 구절들을 외었지요. 그 얼굴이 갑자기 포이동아재 얼굴에 겹쳐지는 거예요. 아이 같던 그 표정에 주름이 깊어지더니……. 아, 세상에 어떻게 똑같이 김수영의 시집을 가지고 있어요. 둘 다 달 어쩌고. 세상엔 닮은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어떻게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같은 취향을 나누죠? 형님도 그 아재 한번 보면 안 될까요? 얼굴만 좀…….

물론 고모가 포이동까지 가서 그 노인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사람이 우연도 있는 것이지 뭘 그러나. 봉산가 뭔가 이젠 좀 그만 하지, 자네도 요새 보면 얼굴이 부숭부숭하고 그러는걸.

고모가 그렇게 말리면 당숙모는 이젠 포이동 들르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거기 종남 씨 얼굴이 겹쳤던 주름진 얼굴을 보러 가야만 한다고. 언제 어느 순간 옛날 생각이 나거나 입이 열리거나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게 실어증이라기보다는 함구증일지…….

그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때서. 병원에서 보는 환자들로 모자라는가. 이젠 자네도 뭔가 앞날 생각을…….

고모는 실어증인지 함구증인지 말을 거의 못하는 답답한 노인을 찾아다니는 당숙모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거긴 여름에도 방역 한번 안 나와요. 사람 사는 동네에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마을 생긴 것이 언젠데 아직 수돗물도 없어요. 어떻게 여기 한 동네만 빼놓고 공사를 해요? 사람들은 땅에 구멍을 파놓고 지하수를 길러다 먹죠. 물을 떠다 붓고 한나절이면 물이 퍼렇게 변해요. 숯을 놓거나 짚 같은 거나 베 쪼가리를 깔고 걸러보기도 하고. 몸도 불편한데 혼자 사는 포이동아재한텐 물이 젤 문젠거라요. 밭은기침도 가끔 하는데. 참 형님, 구룡사 물이 아주 좋다지요? 불공드리러 가서 안 드셔봤어요?

당숙모는 불심과는 상관없이 고모를 따라 약수라고 소문난 구룡토수를 길러 다녔다.

아, 그런데 재활근로대가 해산되었다는 것이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포이동아젠 요즈음엔 마을 출입이 통째로 통제되니까 좀 쉬겠지요?

그건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이 동네 밖으로 출입이 통제될 때 한 말이라 했다. 실제로 나라 안팎이 88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들뜬 때였다. 서럽게도 이들 빈민들의 꼬락서니가 국가의 수치라며 마을 밖 출입을 통제했단다. 고모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당숙모는 더 자주 그를 찾을 밖에.

포이동아젠 큰일 났어라. 포이동 266번지가 개포4동으로 번지수가 바뀌면서 주민등록을 안 해준다는군요. 더 큰일 났어요. 자활근로대 해산이란 게 심상치 않은 거라네요. 원래는 우선으로, 그러니까 재건마을 사람들을 먼저 선착순으로 땅을 불하해준다는 조건이었는데. 그게 글쎄, 이미 살고 있는 땅을 새삼스레 돈을 주고 사가라는 것인데. 아무튼 법이 바뀌어서 266번지 사람들이 불법점유자가 되었다네요. 첨엔 하천 가에다 잡아넣다시피 억지로 데려다 놓고서 조용히 살면 땅을 준다고 했었다는데. 고달픈 삶에서 제 각각 나름대로 꿈같은 것을 품고 왔었을 것 아뇨. 고물상 김 씨 아저씨도 청계천 사과상자보단 나은 집을 가질 줄 알았다네요. 그러다 십년 살고 나니까 불법점유라고. 원래 코에 걸면 코걸이라지만, 그게 원래 서울시 도서관 부지였다는 것이 말이나 된가요. 십년만 더 살면 일 없을 텐데, 아니, 그리 될까봐 미리 수 쓰는 거래요. 나라가 국민한테 수를 쓰다니. 고르고 골라서 제일 비참한 국민한테.

진짜 큰일 났어요. 한번 불법점유자라 딱지를 붙이니깐 이젠 무단 점유 변상금을 내라고 세금이 날아들었대요. 각 집에 30만원도 넘는데 그게…….

당숙모의 근심은 해가 갈수록 누에고치에서 실 뽑듯 이어졌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못 해내라. 옆집은 둘이 벌어도 다 못 한대요. 김 씨네 아줌만 청소일 다녀요, 벌써 언제부터. 근데 이자가 20퍼센트나 된다는데 그게 자꾸 불어나면 어쩌냐고요.

포이동아젠 분명 병이 있어라. 몸 움직이는 것이 더 근들근들한데 병원엘 가지 않으니 알 수 없지요. 내가 간호사라고 해도 들은 신청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 알아들었다는 말인지, 내버려 두란 말인지. 오늘은 피붙이는 없냐고 다그쳐 물었더니 퀭한 눈을 한번 크게 뜨더니 눈을 딱 감아버리더라고요. 말은 안 해도 분명 알아는 듣는 거예요. 무안해서 혼났는데, 얼결에 잘 계시라는 소리도 못하고 나와 버렸어요.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맘 아픈 걸 물어요…….

당숙모의 근심걱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포이동아재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진즉에 그를 등졌으므로, 그는 쉽게도 떠났다. 옆집 김 씨 아저씨가 한 이틀 꼴을 보지 못해서 들여다보았다는데 숨소리 없이 천장을 보고 누어있더란다. 그제는 놀라서 뛰어 들어가니 오른 손 검지로 나무상자 하나를 가리키더니만 눈을 스르르 감았다고 한다. 몸을 일으키려하니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계속 상자를 가리키고. 해서 상자를 열었더니 거기 몇 소장품이라는 것 중에 처음 발견해서 가슴에 품고 읽었다는 시집과 낡은 회중시계가 하나 있었고.

장례랄 것도 없이 김 씨 아저씨하고 동네 몇 사람이 구룡산 언덕에 뿌려주면서 승천하라고 빌었다. 아홉 형제들 함께 승천을 못하고 남은 막내 용이 승천을 기다린다는 구룡산, 여기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살아서 못 오른 하늘에 죽어서는 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고도 바로 흩어져버리지 못하고 포이동아재의 빈 단칸방에 돌아와 앉은 몇몇 사람들. 임자 없는 세간들, 그것이라도 대충 필요한 사람이 써보자고 챙기는 실팍한 사람들. 실팍하지 않고서야 곤곤한 삶을 어찌 살아남겠는가. 작고 낡은 나무상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이 그렇게 남아 있었다. 김 씨 아저씨는 상자를 고이 가져갈 사람은 우리 간호사 선생 밖에 누가 또 있겠냐고, 딸도 아니면서 그만큼 극진히 위했으면 당연히 뭐라도 간직하라고. 또 우리들 중 누가 책 같은 걸 보겠냐고 했다. 그렇게 동네 이웃도 아닌 당숙모에게 상자가 돌아왔단다. 『달나라의 장난』과 낡아서 서버린 회중시계가 들어있는.

이게 무슨 조화예요. 이 시집이 나한테 오다니. 또 이 회중시계는 뭘까요. 쇼와 18년 HDK - 이게 이름이면 김 씨는 맞나? 고 씨, 구 씨도 있지만 김 씨일 확률이 높고. 얼결에 붙인 이름이 성이라도 얼추 맞았네요. 참, 쇼와 18년이면 해방 전이잖아요, 사십 몇 년? 이게 포이동아재 것은 아니겠죠, 설마? 그때 벌써 이런 시계를 가진 사람이 누구였을까? 포이동아재 아버지였을까요? 젊어선 부잣집 도련님이었을까요? 아참, 성을 앞에다 썼으면 한 씨? 안 돼. 잠깐, 설마 종남 씨 아버님 항렬은 뭐죠? 규자 맞지요. 하긴 진자 규자라셨으니 그것도 아니고.

고모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다시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이북에 있을, 살았건 죽었건 북에 남았다는 진자 규자 삼촌을 떠올리다니. 아닌 건 확실하겠지만, 너무 그럴싸한 예감에. 하지만 어떻게든 가운데 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으셨단다.

세월은 또 흘렀다. 뭔가 들뜨게 하는 새천년이 되어도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더욱 풀이 죽었다. 당숙모의 말로는 원래대로라면 이제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가질 때가 되었는데 현실은 무단점유자로서 빚 방석에 주저 앉아버렸으니 말이다. 1998년에야 서초구와 강남구가 서로 밀던 수도공사가 완성되어 사람들이 순간 환성을 질렀다. 그 기쁨도 잠시, 이것이 내 집 수도가 아니라는 박탈감은 차라리 수도 없는 내 집을 원하게 했다. 마을은 여전히 결함투성이였다.

그 사이 김 씨도 젊지 않은 나이가 되고, 간호사인 당숙모의 지식으로서도 다 알 수 없는 병을 주저리주저리 달고 살았다. 심부전 등 치료가 불가능한 건 아니나 산소공급이 문제라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한 번에 몇 십만 원씩 하는 치료비 감당을 해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그가 덜컥 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의료보험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무슨 일일까. 그들은 국민건강보험도 기초생활수급자 지정도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러냐고! 난 그런 걸 정말 모르고 있었다. 재작년 초여름 심각한 화재사건 보도를 보면서도 몰랐다. 어떻게 초등학교 아이의 불장난이…… 라고 애석해 하면서도 재건마을이 뭔지 몰랐다. 아버지가 70년대 80년대를 가족을 돌보면서 묵묵히 맡은 일만 하시면서 살아온 것을 후회스럽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보다도 더 많은 공부를 하고서도 이렇게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불발인 내 처지만 통곡하면서. 주민등록이 되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 인권이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구나. 그걸 까맣게 몰랐다. 자유와 평등과 박해의 상징인 파리 복판에 가서 박사학위를 했으면 뭣 하는가.

포이동 이야기는 장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청소일로 병마 속 남편을 돌보던 김 씨의 아내가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 되어 따라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가 말이다. 장롱에 목을 맨 참극은 로맨틱 러브스토리로 먼저 간 짝을 따라 죽는 환상이 아니다. 2,3십 년 전 아웅산테러사건 뒤에 극도의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고관의 아내와도 전혀 다른 결정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렇게 끼적거린 메모를 남겨 놓고 죽어버린 참담함. 의식주 - 문자 그대로 의식주 해결을 못해서 죽어야 했던 삶. 하필 그들의 아들은 명예와 충성심과 용기로 무장하고 무엇보다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군복무 중이었다니.

이 아들은 실제로 군대에 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는 어머니가 직장이 있다는 이유로, 겨우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다고 한다. 막상 어머니마저 죽었을 때에는 이제는 돌보아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역시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고. 병마와 가난 속의 부모를 지킬 수 없는 젊은이들이 필승의 신념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이 군인에게는 15년째 밀린 토지 변상금 4,5천에 자동차세 천여만 원 등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 굴러왔다.

뭐 자동차세라고? 그럼 그 동네에도 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네.

그렇지만 차가 다 차인가. 고물 일을 하느라 고물 차 하나를 얻었는데, 명의를 이전하자마자 압류를 당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법을 모르는 그들. 설상가상. 명의만 있지 압류당해서 탈 수도 고물을 실어 나를 수도 없는 차는 그들의 저승사자였다.

하필 장롱에서, 키가 작다고 어떻게 장롱에서.

그 아줌마,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아주머니가 발견된 다음날 당숙모는 혼 빠진 사람 같았다고 한다. 사실 포이동 백 가구 가까운 사람들은 끈끈한 정이 양재천 북쪽 강남과는 사뭇 다르다 했다. 둘, 셋 모이면 비교요 갈등이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워낙 가난의 평준화 속에 가라앉으면 키 재기할 기운이 나지 않는 법인지. 설마 싶으면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회고하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안다.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그것이 숙모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더란다. 그리고는 말을 접었다. 어떻게 실어증이 걸리는가. 가족의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너덜너덜한, 눈 큰 시인의 닮은 꼴 시집 두 권을 가슴에 품고, 호주머니에 쇼와 18년의 회중시계를 감추고 방안에 들어 앉아버린 여자를.

얼음장 같은 냉기에 놀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족보를 뒤져본다. 우리할아버지 상자 규자, 그 아래 덕자 규자, 진자 규자 할아버지들. DK라면 덕자 규자의 이니셜일 순 있지만 그 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학도병에 끌려가셨다 했다. 또 확실히 돌아가셨다, 해방에서 동란 사이에. 아니다, 혹여 일본 유학생 인텔리 작은할아버지의 시계를 막내할아버지가 지니고 있었을 확률은? 해방과 동란 사이 두 할아버지들은 뜻이 맞아 늘 함께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니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 아들을 한 번도 못 만난 채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생면부지의 며느리를 마주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숙모의 혼돈은 분명 포이동 266번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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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30. 단편 「포이동 266번지」,『광주문학』 2013 봄호(통권 66호), 197-21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7:59

초혼장

 

겨울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

강의보다 몇 배 어렵고 성가신 성적처리가 끝나자 슬그머니 집이 그리웠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그리웠다. 서둘러 기차를 탔다.

엄마, 어머니이!

그래, 다 저녁에 오는구나, 날이 춥구나!

어머니는 이번에도 부엌에서 나오셨다.

뭐 하세요, 또 부엌이세요?

아, 너도 오고.

얼굴에 웃음이 핀다.

뭐 좋은 일 많으세요?

좋은 일은. 하긴 좋은 일이지. 김실이가 숨 줌 돌렸지 않냐. 김 서방이 제 자릴 찾아가는 중이니까. 지금 다시 출근한지 며칠 안 되었다.

엄마, 이제 좀 김실이라 그만 하세요. 외가에서나 엄마한테 한실이 그러지, 누가 요즈음 그렇게 불러요? 엄마니까 은실이라 이름 부르든지 애 따라 승연엄마 하든지. 김실이 때문에 금실, 한금실, 내 이름이 사라지잖아요.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시잖냐. 괜스레 이름 가지고.

그런데 아버진 안 계세요? 또 정문리에 가셨어요?

아니, 이 추운데. 방에 계시는데 너 오는 것도 모르시네, 어째.

아버지는 살짝 잠이 드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와 내가 방문을 열자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으신다.

한박사, 왔구나아. 방이 따뜻해지면서 졸음이 왔나 보다.

말씀마다 또 그 한박사다.

아버지 저 왔어요, 금실이. 더 주무실 걸 그랬네요. 요새 어디 편찮으세요? 엄마 말씀은…….

아니다, 내가 궁리가 많아서 요새 잠을 좀 설쳤드니라.

그러게, 느 아부지가 요샌 개포동 종수씨 땜에 저러신다. 그 집 일이라면 지난 윤삼월에 끝났나 했었지만 여태도…….

소생이 없질 않소. 그러니.

그렇다고 꼭 그렇게 당신이, 당신 혼자서.

아무도 없질 않소.

지난 윤삼월에도…….

그건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소. 그것이 선친의 뜻이라고 헤아리자고…….

알았어요. 하지만 또 종수씨 일이 마냥.

그게 난들……. 애한테 무슨. 거 너무 긴 긴 이야기가 되놓으니 여기서 그만 둡시다.

평상시와 다르게 불평조의 말을 털어내던 어머니는 거기서 멈추셨다.

곧 있어 이모, 이모~ 하면서 승연이 승주가 들어왔다. 은실도 함께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종이연필 한 자루 씩에 입이 귀에 걸린다.

이모, 이모~, 이게 종이라고요, 엉?

그래, 나무가 아니고 폐휴지를 재생 한 것이지.

신기하다, 승주야, 그치?

누나, 이게 안 부러질까?

야, 조심 해야지. 걱정되면 나 줘! 난 이 초록이 너무 예쁘다.

아이들 수다로 떠들썩해지자 대번에 집안에 온기가 퍼졌다. 아이들이 온기다. 엄마가 된 은실의 공이다. 둘러앉아서 먹는 저녁밥은 밥맛도 사는 맛도 넘쳐나게 한다.

아직 차가운 방바닥에 요를 펴놓고 책상에 앉아본다. 내가 썼던 이 방은 지금은 누구나의 공부방처럼 쓰인다. 아직 한 쪽으로는 내 책들이 남아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아버지가 건너오셨다.

예, 아버지. 어머닌 일찍 주무시나요?

그래 요사인 좀 일찍 주무신다. 해서 내가 보통…….

아, 책 보시다 주무시고 그러시는군요.

아니 뭐, 오늘은 너라도 알아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뭐를요?

아, 네 어머니가 좀 성가시게 여기는 그 일 말이다.

아, 정문리…….

그러게. 그게 묘를 썼다고 끝나는 건 아니지 않냐.

묘를 쓰셨다고요? 누구를?

그게…….

아버진 말을 꺼내시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고 계셨다. 그러면 나는 늘 저런 이야기는 아들이 있어 나누고 싶으셨을 종류라는 인상을 받는다. 관습적으로 부자 사이에나 나눌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잘 모른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냥 계셨다. 그러다 결국 작정하고 입을 떼셨다.

윤삼월에 새로 묘를 쓴 분은 내 막내삼촌이셨다. 내가 새삼스레 이야기를 해두려는 것은 언제라도 한번은 너도 정문리엔 가 볼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언제라도 한번은.

아차. 정문리 이야기라면 두말없이 청주 한 씨 우리 집 내력이다. 우리 아버지는 장손의 막내시다. 1910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가 장손이셨고, 그 아래로 작은할아버지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삼촌들이다. 진사를 한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농사꾼이셨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조실부모하고 일찍 가장이 되시자 동생들에게 신학문의 길을 적극 열어주셨단다. 그런 동생들이 블랙홀로 빨려들듯이 가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여기까지는 몇 번이고 들어서 알고 있는 내력이다. 어느 집안인들 일제와 동란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만은.

쇼와 18년, 오늘 아버지의 이야기는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알아듣기 어려운 시절로.

그러니까 1943년 본격적으로 징병이 난무할 때 나는 아직 잉태도 되지 않았지. 선친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는 동생 하나를 징병으로 보내야했다더구나. 학도병으로 끌려간 삼촌 이야기는 처음부터 너무도 슬펐단다. 그렇게나 가슴 아픈 것은 하필이면 당신 딸이 당신 동생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부분이야. 일제가 고향 경찰서에서 ‘아버님 위독’이라는 전보를 도쿄 등지로 보내서 유학생을 귀국을 하게 해놓고서는 부산에서 배에 내리자마자 온갖 회유와 강요로 지원서에 도장을 찍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흰 설마 하겠지. 그뿐이냐. 순진한 소학교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일본 유학 중에 고향으로 숨어든 대학생들을 색출했단다. 아홉 살 난 여자애가 스무 두 살 제 삼촌을 일러바치는 일은 누어서 식은 죽 먹기였겠지.

내겐 누이가 둘 있었는데, 큰 누이가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그런 초여름 날, 학교에서 예쁜 일본 선생님이 최면을 걸었더란다.

일본에 유학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 형이나 오빠가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 보세요!

누이는 번쩍 손을 들고 말했겠지, 우리 집엔 오빠 말고 삼촌이 왔는데요!

일본은 천진한 아이들도 이용했어. 그렇게 해서 큰삼촌은 일본군이 되었던 거야. 그렇게 해서 병을 얻었고 그리고…….

그래, 또 내 막내삼촌은 이번엔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인민위원회에 붙들려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북으로 패주하던 중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서울로 돌아오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그랬다. 실은 큰삼촌이 학도병으로 편입되었을 때 막내삼촌은 농고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만주로 보내셨다고 들었지. 종전 후 두 삼촌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학도병 때 쇄약해진 몸으로 큰삼촌은 회생을 못했더란다. 난 너무 어려서 그렇게 들은 데로만 믿었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된 비밀은 무섭고도 슬펐다.

선친이,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가 배운 것 없는 농부의 자격으로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었다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구나. 아버지는 당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삼촌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셨다고 했는데. 그게, 네 증조할아버지께서 하필 국치의 해에 태어난 할아버지에게 땅만 파고 살라고, 일제의 교육 일체를 거부하신 것과는 대조적이었단다. 아마 당신이 못 배운 것을 후회하셨을지. 어떻든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이상재 선생의 노선을 신봉했고, 신석우 선생의 문자보급운동을 숭앙했으니. 뭐 그건 그렇고.

해방에서 6.25전쟁까지는 어느 가정이나 상당부분이 덮인 채로 기억되곤 하지 않더냐. 우리 집에서도 아깝게도 삼촌 둘이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다만 병사요 납북이라는 통상적인 설명으로 어렴풋이 기억될 뿐이었다. 추억은 아름다워라 - 그런 셈이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아픈 과거를 잊으려 하니까.

해방된 대한제국에서 - 맞는지 모르겠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었다가 해방되었으면 대한제국이 맞겠지? 아니다, 대한민국 임정이 성년이 될 나이를 먹었으니, 이미 대한민국의 땅이었나? 그 사이시간에 삼촌 둘은 매우 적극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거기까지는 맞다. 그런데 그것이 비밀의 전부가 아니었구나.

나중에 알게 된 내막은, 그래 무섭고도 슬펐다. 막 일제가 떠난 땅에서 내가 태어났지만, 흩어진 가족들이 다 모이기는 어려웠더란다. 종전이 되고도 한참을 기다렸을 때야 돌아온 큰삼촌은 병을 얻어왔다고 했다.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진출했었으니까 기후인들 견딜 수 있었을까. 병중에도 큰삼촌은 막내삼촌과 더불어 청년답게 새나라 건설에 열정적인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지. 해방되던 해 스물두 살이 된 막내삼촌은 몸도 마음도 건강했고, 징용 갔다 온 형이 또 감옥을 드나들 때도 형을 우상처럼 존경했을 수밖에. 그러다 그 형은, 그러니까 학도병삼촌은 그만 더욱 쇠약해진 몸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대. 겨우 아장아장 걸었을까 말까했던 내게는 물론 손톱만큼의 기억에도 없지만.

그리고 막내삼촌 말이다, 같은 말 또 한다만, 남북이 여전히 대치 상태인 나라에서 남북과 관련된 꼭지는 공개된 비밀 아니더냐. 물론 이제는 그나마 좀 비극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러니까 막내삼촌은 납북당한 것이 아니었단다. 민전 활동 중에 뜻하는 바 있어 벌써 1948년도 봄에 월북하는 인사들을 따라가신 거래. 민전이 뭔 줄 네가 알 리가 있겠냐. 나도 한참 나중에야 알았는걸.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고, 미군정 시기에 서울에서 결성된 좌파 계열의 연합단체 이름이 그랬단다. 암튼 해방되던 그해 연말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나오자 우리 한민족이 좌우 이념으로 갈라서는 사단을 겪게 된 것 아니냐. 바로 반탁과 찬탁이 갈등의 시작이었지. 김구 선생 중심의 비상국민회의는 반탁운동을, 그에 맞서 조선공산당이 주도했던 민전이 찬탁론을 편 것이지. 아무튼 오늘 이념논쟁 이야기가 아니고…….

-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렸지.

- 우리나라하고는 무슨 상관?

- 그 무렵에 파리회담에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한 인물들이 있었지. 역사를 봐, 당연히 좌절하였지. 하지만 거기서 바로 이듬해 3.1 만세운동을 기획하게 된 것이야.

- 누가?

- 김규식 선생도 모르냐. 지금은 여운형 선생이랑 좌우합작운동을 준비하시지.

이런 대화들, 아버지는 두 삼촌들의 대화를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둘이가 민전과 관련해 활동하는 것을 알고 계셨겠지. 동생들이 만일을 위해 큰형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 했지만, 만일, 만일……. 만일 형제가 모두 위험에 빠질 수는 없다는 논리를 무언중에 나누고 있었겠지. 아버지는 동생들의 일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는데, 그러다가 덜컥 큰삼촌이 떠나버린 것이야. 폐병이 사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옥고의 후유증인 것을 다 알았다더라. 그러나 그것은 사실 약과였던 셈. 생사의 갈림길은 어쩌면 인사가 아닐지도 모르잖느냐. 그런데 막내삼촌은? 막내삼촌의 운명은 외려 사람의 책임이라고 해야지. 큰삼촌과 세 살 터울이었는데, 형을 따라서 여운형 씨를 가장 존경했다고 그러더라. 그게 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해 여름 여운형 씨도 사망하고 나서 막내삼촌은 충격과 회의 속에서 방황도 했던 모양이더라.

아버진 어려서 도통 모르셨겠죠?

그렇지. 내가 중학생이 된 다음에야 아버지한테, 네 할아버지께, 듣게 되었지. 할아버지는 동생들을 다 잃고서 넋이 나가셨을 거야. 그때가 막내삼촌의 아들이라고, 내게는 유일한 사촌동생이 집에 왔다 간 즈음에야 말씀을 하셨어. 그때도 난 잘 이해를 하면서 들었던 것은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것도 한참 지나서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본 것이지.

아무튼 그 시절, 삼촌은 좌우합작운동이란 그 말만으로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네 할아버지께 말했더래. 김규식 선생이 이어 민족의 자주노선을 표방하는 의미의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니까, 47년인가, 겨울이었대. 강령은 독점자본주의도 아닌 무산계급독재사회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했었고.

제3의 길이요? 한반도에서? 같이 분단의 운명을 겪은 독일 땅 젊은 지식인들의 노선과 같았네요. 민주주의를 사회화 하는 길, 사회주의를 민주화 하는 길 - 제3의 길. 그것이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독일도 한반도도 분단국의 운명 속으로 끌려들었던 것이군요.

그래, 너도 공부를 했으니 그만큼은 알겠지. 1948년은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더욱 불안한 형국이었단다.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어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는 생각으로,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고 해야 할지. 결국 그 결과가 우리나라니 그걸 부정해선 안 되겠지만. 2월 초에는 밀양에서 농민들이 아침 일찍 지서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져서 경찰이 발포까지 했고, 물론들 다쳤겠지,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었대. 한 보름간에 이곳저곳에서 200만 명은 참가했을 정도라니. 그때 무슨 일을 해서 그랬는지, 아무튼 막내삼촌은 그 사건이후 북으로 옮겨간 셈이지. 그해 4월에 열렸던 남북협상에 김규식 선생의 일행을 따라 간 것이 삼촌의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적극적인 참여를 천명했고 평양에서 연석회의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래. 하지만 늘 깃발에 쓰인 문구와 실상은 다르기 마련.

4월 말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로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지만, 협상의 결과는 실천과는 거리가 먼 길이었겠지. 공동성명서라는 것이 조항마다 이견이 없었겠느냐고. 김규식 선생은 김구, 김일성, 또 누구더라, 암튼 4김회담까진 참석했어도 이후 연석회의에 불참했던 모양이야.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논의되지 못하였으며, 북은 백범과 우사가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약속했던 전기와 농업용수도 다 끊어버렸다는데 뭘.

그럼 막내할아버지는 왜 돌아오지 않으신 거죠?

말 말아라. 그것은 정말 두고두고 의문이었다. 삼촌이 그토록 존경하던 김규식 선생은 분명코 반공적이었는데, 삼촌은 왜 함께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 시기 일은 종내 의문 투성이었다. 반공주의자 김구 선생은 왜 반공주의 남한에서 암살당했을까? 어쨌거나 남북협상에 참여한 탓으로 빨갱이라 의심되던 김규식 선생은 왜 북으로 끌려갔다가 사망했을까? 난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뭘 알 수가 없었다! 암튼 이듬해 6월인가 평양에서 무슨 회의가 열릴 때부터 민전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간단히 조국전선으로 통합되었다는데, 그때까지는 삼촌에게서 소식이 있었단다. 그러나 곧 함흥으로 갔던 모양이라. 함흥은 벌써 해방 이듬해 초봄에 반공학생의거가 일어난 이후 불안한 곳이었는데.

함흥에서 반공의거요?

그렇다니까. 조직된 인민위원회가 함남중학교를 인민위원회 청사로 차지하자 학생들이 학교를 빼앗기려 했겠느냐. 5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시위를 하자 시민들이 합세해서 만 명도 넘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 보안서원들이, 아니 소련군까지 동원되었다던가, 아무튼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사건 말이다. 사상자가 생겼다는 소문도 있었고. 남북이 다 같았어야. 삼촌이 그런 사건이 터졌던 곳에를 왜 갔을까. 세세한 이야기들은 결국 아무도 모르게 되었지. 함흥까지 간 사실도 전쟁으로 완전히 두절될 뻔했지. 난리는 각각 집안에서도 난리였던 거야, 생이별이 어디 한 두 집이었냐 말이다. 삼촌 소식은 1.4후퇴 전에 피난 내려온 만삭의 아내가 전해준 것이지, 단편적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거기서 결혼을요?

그래 뭐. 결혼 소식은 몰랐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무튼 만삭의 아내, 삼촌이 동지이자 아내로 맞았던 여자의 피난길은 유행가에도 나오는 처절한 흥남부두를 그대로 상상하면 된다. 삼촌이 함께 배에 오르지 못한 것인지 안탄 것인지는 이제와 누가 알랴.

아버지는 맥없이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흥남이, 너희가 어렴풋이 부산삼촌으로 들어 알고 있는 분이 그때 그 역사적인 흥남부두 철수작전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막내삼촌이 아이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헤어져버려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태어난 내 종제 말이다.

흥남은 너희 세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명이겠지만, 6.25 세대에겐 9.28 서울 수복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미연합군이 혼비백산 패주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대표하는 곳이지. 그 당시 중공군 - 그땐 그렇게 불렀어, 요즈음 말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보낸 조선전쟁인민지원군이라 해야겠지 - 40만 명 가까이가 참전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평양-원산 라인은 저들의 손에 넘어갔지. 인해전술에 맥아더라고 철수명령을 안 내릴 재간 있었겠냐.

인해전술을요?

엄청난 병력 투입을 그땐 그렇게 불렀단다. 집중적으로 투입한 전투원의 희생을 상관 않고 계속 공격하여 수적인 압도로 돌파구를 만들고 방어부대나 방어지역을 고립시켜 궤멸하는 작전 말이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수반했겠지만 일시적으론 승리를 거두었지. 퇴로가 막힌 한국군 제1군단과 미국군 제10군단 병력만 해도 10만 명에, 차량에, 보급물자 전부를 흥남항구로 철수시켜야 했으니. 거기에 몰려든 또 10만 명 피난민들을 어쩐다더냐. 그런 건 영화에서도 드물 것이다.

그때 인구로 10만이나요?

그래, 그때 인구로 피난민만 10만. 미10군단장이었다지, 그가 헬기에서 흥남부두를 시찰하다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더러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피난민들을 보고 사람들을 데리고 가리라고 결정을 했더란다. 그런 점은 서양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지는 부분이지. 결정이 내려지자 군함이고 상선이고 차출된 배가 200 척인가 뭐 엄청 동원되었단다. 그 마지막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인 거라. 그 배의 선장이 이미 실었던 모든 무기며 보급품들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은 12월 21일. 아무튼 군인과 민간인 등 무려 14,000명이 승선한 이 배가 소리 없이 마지막으로 흥남 항을 빠져나온 것은 이틀 뒤. 이 기록적인 숫자는 나중에 기네스북에 올랐지. 그렇다고 이 배가 타이타닉 수준이냐! 어림없지, 겨우 60명 정원인데, 벌써 선원들이 40여 명 승선해 있었다니까 탈 수 있는 인원은 열댓 명 수준이었나 봐. 선장이 나중에 회상하는 이야기는 처절하다 못해 공포 그 자체야.

선장이요, 직접?

그래, 선장이 쌍안경으로 본 비참한 광경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드는 피난민들 옆에 닭과 겁에 질린 아이들이었단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떻게 그 작은 배가 그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어떻게 단 한사람도 잃지 않고 끝없는 위험들을 안고 갈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이 배의 조타장치를 잡고 계시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를 느꼈다고 했대. 그거 다 어디 기록에 남아 있어. 암튼 그 모든 것이 독실한 가톨릭 신앙의 힘이었는지, 그는 50년대에 바로 바다를 영영 떠나서 수사가 되었단다. 뉴저지의 베네딕트회 무슨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더라고. 선장 라루가 아닌 마리너스라는 이름의 수사로서 십여 년 전 87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아버진 어떻게 그렇게 나중 일까지 소상히…….

그게, 그 양반이 한국과 인연이 깊게 닿아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그 수도원이란 곳이 경북 왜관의 베네딕트 수도회와도 연결이 되었다던가 뭐, 그렇더라. 또 그뿐이냐. 그 배에서 항해사였다던가, 스물두 살 항해사의 회고는 가슴이 찢어지지. 캔 속의 정어리들처럼 쑤셔 박혀서 거의 모두가 서서 어깨를 부딪치며 서서, 그런대도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이. 음식도 물도 거의 없이 사실상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아무리 극기심이 많은 한국인들이라 해도 어떻게 꿈쩍 않고 서있을 수 있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단다. 그는,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암튼 이 피난민선을 기네스북에 등재하는 데 일조를 했더래.

그래요. 2000년 대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에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 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본 기억이 나네요.

그뿐이냐, 항구에서 피난민들의 승선을 사수하던 미군은 몇 명 전사한 반면 배에서는 사상자는커녕 새 생명이 다섯이나 태어났다는 믿기지 않는 기록도 있단다. 사실 안 그러느냐, 내 사촌도 게서 태어날 뻔 했으니. 아슬아슬하지. 헌데 정작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는 피난민을 내리지도 못하게 했단다, 피난민이 하도 넘쳐서. 그렇게 해서 거제도 장승포항에 내린 이들 피난민들의 자취는 지금은 박물관처럼 되어 있다던 걸.

- 서른 시간도 넘었어요. 살을 에는 바람이 무서웠어요.

- 아기가 잘 버텨주었지만, 그 전에 죽을 것 같았어요.

- 외투 주머니 속에 붉은 지폐가 남아 있었어요. 여기서는 쓸 수 없는 돈.

- 가마니로 비바람을 겨우 막을까말까, 수용소 거적에 눕자마자 아기가 태어났지요. 아비 생사도 모른 채. 나이든 여자들이 도왔죠, 그저 앞날이 캄캄했어요. 어미의 한숨과 눈물로 맞은 아기라니.

아버지의 말씀 사이로 바람이 말하고 바람이 실어다준 속삭임들이 들려오는 듯 했다. 수용소 첫날 아기를 낳은 1927년생 함흥 여자. 애 아버지는 만삭의 아내를 배에 태우고는 그만이었다. 누군가는 양보해야할 흥남부두에서 건장한 애 아버지는 부두에 서서 아내와 작별했다, 어떻게든 부산으로 찾아가겠노라고. 그 아버지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도록 부산바닥에 나타나지 않았다.

1950년 12월 25일생 흥남이. 흥남에서 온 흥남이. 아기의 이름을 그저 흥남이라 부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서 태어난 아이 다섯 모두 흥남이가 아닌가. 흥남은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호적을 만들어야 했고, 엄마와 아들이 정문리에 나타났다. 그때서야 우리는 막내삼촌이 북에 남은 것을,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난 사촌이 있는 것을 알았단다. 사촌은 일단 가계를 찾았으니 더 이상 흥남이가 아니었지. 족보의 이름을 따라 한종남으로 불리게 되었으니까, 나에게는 유일한 사촌동생 종남이. 부산에서 피난살이 살림을 혼자 꾸리던 어머니랑 그렇게 단 둘이 부산사람이 되었지. 숙모는 함흥에서는 여고를 다닌 신식 여자였지만 따로 여자가 할 일은 없어서 수선 바느질을 업으로 살아내셨다고 해. 아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들려주려고 사고무친의 부산을 떠날 수 없었을 그 심정을 누가 알랴. 흥남부두에서 탄 배가 부산으로 향했으니까, 어떻게든 부산으로 찾아올 것이라 믿고. 배가 끊겼으니 육로라도. 차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근 삼십년을 흘러가고 있었다.

 

1979년 한종남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4학년 재학 중이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졸업반인 이유는 애초에 초등학교 입학부터 늦어진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했었던 때문이었다. 대학은 종남에게는 사치였다면 사치였으니.

종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좀 늦게 1972년. 처음 초등학교 입학부터 호적 때문에 늦어졌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그만 부산상고로 진학하겠다고 원서를 고집하는 와중에 일 년을 놓쳤단다. 어머니의 힘든 일이 늘 맘에 걸렸던 그는 그 일 년을 놀면서 제법 돈을 벌었대. 깡통시장에서 - 지금은 부평시장이라 부르는 재래시장이지 - 게서 심부름하는 마술 같은 일을. 그러니까 어머니 수선 집에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군복 같은 것들을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서 깡통시장에 낼 물건들을 받아다가 대주는 일. C-레이션 박스를 지붕으로 한 가리개 판잣집에서 시작된 미제물건이 구호물자에서 거래물자로 탈바꿈되는 세상이었지. 물론 어머니 몰래. 꼬리가 길면 들키는 것은 사필귀정, 그런 일을 들킨 뒤 종남은 손을 털고 고등학교에 잘 입학했으나 이번에는 문학에 빠졌더래. 공부보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는 일에 열중했고, 수업시간에 그런 책들을 읽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받는 것은 다반사였다더라고.

집안에 난데없는 문학 지망생이라? 내 큰삼촌은 선린상고 시절 김수영의 동기생으로, 김수영이 오스카 와일드의 영문을 줄줄 외며 두각을 나타냈을 때나 이어 도쿄상대에 진학했을 때에도 동기였다더라고. 하지만 김수영이 학병 징집을 피할 수 있었을 때 삼촌은 끌려갔고, 김수영이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할 무렵 삼촌은 이미 병사하고 말았지. 그렇다고 막내삼촌이 문학적인 자질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안 해보았지만, 종남은 그런 기질이 돋보였다고 했다.

그 예민함으로 오히려 대학을 포기했겠지. 어차피 연좌제 비슷한 일로 종남이 공무원이나 법조인이 될 길은 요원했을 것이니. 살았건 죽었건 - 그 당시에는 살아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 아비를 북에 둔 사람이라. 뿐만 아니라 대학은 그에게는 돈 지출과 같은 단어였으니까. 그 시절 우리 모두 그랬지. 나도 겨우 2년제 교육대학엘 진학하지 않았더냐. 종남인 어머니의 성화를 피해 달아난 곳이 군대였더래. 그런데 군대를 마치고 온 그가 변했다더군. 사람은 떳떳한 직업을 가져야 하리라고. 젊은이의 변화의 원인은 더러는 여자야. 군부대에 면회 온 선임병의 여동생 - 그 여자를 위해서 반듯한 직업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시인이 되는 길은 막연했으니 국어선생님이 되리라 - 그렇게 해서 국어교육과 진학을 목표로 뒤늦은 대학입시 준비를 했고, 경남대학에. 마산에 애착이 간 건 여자가 마산에서 작은 병원의 간호원이었나봐.

개포동 당숙모가 그럼…….

그래, 그 양반이다. 고향은 섬진강 어디라던데, 순천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외가 쪽 마산으로 취업을 했었나 봐. 그땐 간호고등만 졸업해도 충분히 간호원 노릇을 했었지. 아차, 지금 말로는 간호사라지. 그것 보다, 그해 1979년 여름을 아비규환의 태풍 쥬디로 마감하며 마산의 인심은 흉흉했더래. 마산-진해 간 도로도 유실되고 사람 몇 천에 차량 몇 백 대가 혼란 속에서 마비되었고, 마진터널에서는 산사태 위험으로 사람들을 철수시키던 해군장병들이 그대로 매몰되는 사고까지 났더란다. 암튼 그해 여름엔 전국적으로 백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났던 것 같아. 뭐 가물가물 하지만.

그런데 가을이 되면서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국회위원에서 제명되는 사태가 벌어진 거야. 유신정권은 데드엔드를 향해서 내리막을 달리고 있었지. 택시기사가 택시에서 대통령 욕을 한 승객을 신고하면 그 포상으로 그렇게 어려운 개인택시를 받는다는 루머까지 떠도는 지경이었어. 그 정도면 공포정치나 뭐가 달랐냐. 유신반대데모는 사필귀정이었지.

공포정치요?

그럼 뭐라 말하랴? 실체도 없는 재건윈가 뭔가로 엮은 사람들을 사형판결 해놓고, 판결 열여덟 시간 만에 처형하는 정치를 공포정치 아니고 뭐라 해? 그렇게 몇 년을 엎드려서 지냈으니 폭발할 만도 했지.

그건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이야기죠, 아닌가?

너희 중 둘은 태어났었지, 넌 다섯 살 쯤 되었을 걸. 난 참 평범한 가장에 불과했다. 초등 근무하면서 중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너무 내 앞가림만 했어. 늘 부족하여 공부는 열심히 했다지만 다 나 자신을 위해서였지, 선생을 할 자격은 한참 부족했었다 싶어.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었어야 말이지.

아버지가 아버지죠, 그럼!

들어 봐라, 그때 경남대학에서는 여학생들이 오히려 주도권을 잡았다고 알려졌어. 같은 국어교육과 3학년이던 종남은 뒤늦게야 그들에 합류했다더라고. 여학생들은 이미 9월 말에 대학 방송실 장악 기도에 실패한 뒤에,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더래. 죽음을 불사하는 모습으로 호령을 해대는 여학생들에 혼쭐나기도 부끄럽기도 해서 모두들 거리로 진출했겠지. 마산시청을 거쳐 3․15탑 주변으로까지 나갔지만, 경찰과 대치하던 초반에 모두들 연행되고 말았겠지, 수가 없어.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자꾸나. 어쨌거나 주모자 급은 아니었던 종남이도 군필에 나이까지 많은 상황이라 위험한 부류로 분류되었을지 모르지. 그때 일 주일인가 구치소 안에서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들었다더라고. 누구라도 귀를 의심했는데, 어떤 간수가 너희 놈들은 기쁘냐고 묻더래. 죽음 때문인지 그 질문 때문인지 바로 그 순간 종남이 구역질을 시작했다는 거야, 같이 있던 학생들 말이 그랬어.

종남이 구토와 어지럼증을 못 이기며 뒹굴자 일단 병원으로 이송되었나 보더라. 의식 소실이 온 것은 여자 친구가 도착한 직후였다고. 생각해 보렴. 그렇게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할까 걱정되는 상황에서 시간이 흘러 다시 눈을 뜨고 말을 하고……. 얼마간 희망이 자라는 것 같기도 했었대. 하지만 아름다운 환상은 그 다음 장면에서는 그만 깨지고 말았단다. 종남인 그길로 이미 저만치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야. 뇌수술에 이어 근 반년 간의 사투에도 그냥 그렇게 어린아이의 얼굴로 깨어난 채 퇴원을 했지. 그 후론 그대로 그냥 살았으니 산 것인지 아닌지. 심한 것은 그 사이 여자 친구가 낳은 아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지. 결혼식도 하지 않은 사람 병간호에 매달리던 여자가 곧 배가 불러와도 놀라지도 않더니, 아일 낳고는 혼인신고에 호적정리를 다 마쳤고. 종남네는 어정쩡한 그런 상황에서 서울로 옮겨왔어. 부마사태 후 한 2년인가 지난 후였지.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병원이 있을까 하고. 함흥 숙모님이, 종남 어머니가 결단을 내리신 거야. 북에서 나타나줄 남편을 기다리기보다는 아기처럼 세월을 놓아버린 아들을 구하기로 마음 잡수신 거지. 혼자 사시는 서울고모가 늘 간이역 구실을 하시지. 말죽거리가 이름부터 그런 곳 아니더냐. 나중엔 너희도 데리고 계셨었고. 암튼 종남네가 올라갈 때는 고모가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재천 건너 개포동에 방 두 개짜리 주공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셨지. 변두리라지만 그때 돈 천만 원이 쉬운 건 아니어서 조금씩 십시일반 돕기도 했어, 그렇게라도 해야 집안 우애 아닌가 하고들. 그래도 말도 말아라. 아이는 자라고 애 아빠는 더 아이 같아지고. 그러다가 종남이 결국 떠났지. 어머니의 태중에서 헤어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생사도 모른 채. 그때 깨달았지. 금실아, 난 알았어. 북에 남았다는 막내삼촌은 이미 떠도는 영혼이 되었을 것임을.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떠났음을.

 

세월이란 것 참 무심한 물건이다. 그러고 다시 삼십 년이 다 되어가더라. 그 사이 그 집안일을 말로는 다 못하지. 네 당숙모 입장에선 남편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님과 아기를 한 번에 잃었지. 그렇게 넋 놓고 살아오더니 결국엔. 아서라, 작년 윤삼월, 사람들은 윤달이라고 해서 이장들을 하는 데, 일부는 그게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나를 말리더라. 나에겐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윤달을 기다렸다.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기다려왔다. 마침내 여건이 되었으니 윤삼월을 왜 피한단 말이냐. 큰아버지도 작고하신지 언제냐, 결국 고향에 남은 당숙들 제당숙들과 어찌어찌 상의해서 전체를 손을 보았지. 성가 전에 세상을 버린 큰삼촌도 제대로 자리를 찾아드리려고. 특히 설마 설마 생사를 몰라 엉거주춤했던 막내삼촌을…….

초혼장 - 지령석을 모셔 그걸 통해서 영혼을 불러다 모시는 장사법을 그리 말한다. 양재천에 뿌려진 함흥 숙모도 함께. 그렇게 아내도, 또 어렵게 탈출해 보낸 태중의 아들을 저 세상에서나마 만나보시라고. 어떻게든 피붙이들 속으로 가서 살라고 보낸 그 서러운 아들도 죽어 삼십년이라고. 허니 이제 이승과는 연을 끊고 훨훨.

아버진 ㄹ 받침에서 멈추셨다. 나도 덩달아 입이 얼어붙었다.

아버지, 이젠 그 짐을 벗으셨나요? 대체 왜 그렇게 가슴 무겁게? 먼 먼 가족사의 짐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아버지는 아들이었고 조카였고 종형이었고…… 또 우리 아버지시군요.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묻고 싶은 궁금함을 감추느라 거짓 하품을 참는 체 손으로 입을 막아본다. 꿀꺽 보따리를 삼킨다. 앞으로도 삼십 년 세월이 흘러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는 한 자락 귀퉁이를 풀어도 될까? 핏 속으로 핏 속으로 녹아든 이해와 불가해의 접점을 찾아서. 허나 그 전에는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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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15. 단편 「초혼장」,『문학춘추』 2013 봄호 (통권 82호), 38-56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 16. 21:39

일기

 

 

 

   2011년 11월 11일. 날씨, 흐리다가 부슬비.

 

 

   어느 하루가 깨어난다. 몇 십 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점점 밝아져야할 시간임에도 점점 더 어두워지는 창밖으로 눅눅한 시선을 내보낸다.

   말라가는 식빵조각을 커피 물에 적셔 뜯으며 오늘을 시작한다. 출입문 하나로 바깥세상과 면한 줄 알았더니 모니터 화면이 더 넓고 무섭다. 사람들은 백년 만에 맞는 11-11-11을 기념하기 위해서 떠들썩하다. 산부인과 병원에 제왕절개가 밀렸다는 뉴스까지다. 누가 힘이 세서 11시에 수술을 받게 될까? 필시 아기 아버지는 ‘사’자 돌림에, 산대에 누워있을 여자는 천진하고 예쁘기까지 한 부잣집 따님일 게다. 그 누군가의 드높은 경쟁력에 임신 경험도 없는 내가 쓸데없이 기가 죽는다. 임신 경험? 그럼 내가 은근히 엄마가 된 동창들을 부러워했더란 말이냐.

삐리리리. 구원은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다.

  

   한샘, 안녕하쇼! 이박입니다.

   예?

   이박, 오얏리 이가, 이박임다.

   아니, 이샘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냐 되물으시면, 아니할 전화를 제가?

   어쩌자고 이 세월 지나 전화기 들고서도 뒤틀리세요?

   뒤틀리다뇨! 암튼 제가 지금 그리로 갑니다. 출발합니다. 기다려 주세요. 너덧 시간 후엔 도착합니다.

 

   그렇게 불쑥 나타난 이순규를 만나러 나가려는데 비가 질척거렸다. 은행잎들이 빗물에 젖어 떨어져 내려 발길에 짓밟히고 있었다. 보도는 차가운 회색의 물기였다. 찢긴 은행잎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물감이 회색을 따뜻하게 보완한다.

 

   이런 날 이런 시간에 어떻게?

   시간이 있느냐고요? 시간 있지요. 시간이 없어서요. 없어져서요. 시간 다 말아먹었어요.

   다섯 번 ‘시간’이 읊어졌는데 물론 뜻은 다르다. 첫 번째 시간은 시각, 또는 때. 두 번 째 세 번 째 시간은 여유다. 여가시간  말이다. 아무 소용없는, 시쳇말로 아무 영양가 없는 여자를 만날 시간 말이다. 마지막 두 번, 이때 시간은 수업시간이다. 시간강사가 수업시간이 없단다. 없어졌단다.

 

   역사철학 관련 수강생이 엄청 줄었어요. 10년 다 되가는 보따리장사 세월에 선배라는 게 외려 핸디캡이 되잖아요. 자리를 못 잡으면 너나 나나 동등한 것이 함께 간이역의 삶 아니던가요. 늘 추운 곳에서 지내다 보니 마음도 얼어붙더라고요. 먼저 떠나신 한샘 생각이 난 것은…….

   뭔 동병상련 정도 말입니까? 한국인, 비인기 인문학 전공, 비정규직 젊은이, 그밖에는 공통점은 적죠.

   예.

   뭐가 예? 공통점이 적다는?

   예.

   어째 목소리에 실망감이.

   예.

   공통점 적어 실망하실 일은 없지요. 남자 여자는 영원히 다른 동물인걸요. 이샘은 유난히 더듬이가 안쪽으로 휜 것도 또 다른 특징이죠.

   설마 더듬이라면.

   곤충으로 비하하냐고요? 비하라뇨. 곤충이 얼마나 위대한데. 특히 모기는. 연간 모기로 인한 사망자가 세계적으로 200만 명에 달한다는 뉴스 못 보셨나요? 킹코브라보다도 무섭다고요. 평균 몸길이 3m로 살아있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즉사시킬 수 있다는 코브라의 신경독 뺨쳐요. 치명적 촉수를 보유한 해파리, 백상어, 아프리카 사자, 악어, 코끼리, 북극곰, 아프리카 물소, 독개구리 보다도 더하죠.

   아니 뭘 외우세요? 모기, 코브라, 해파리 어쩌고. 제가 언젠가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라 했을 때, 뭐 그런 걸 외우냐고 핀잔준 분 아니시던가?

   핀잔은요.

   핀잔이었지 그럼.

  

   나는 그런 대화들을 기억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교양한국어 강의시간에 그것들이 되살아나서 나 혼자 떠들었을 때 스스로도 놀랐으니까. 그러자 뭔가 긴가민가했던 말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 났다.

   아니, 그 보다는 일본족도 동이족이라고 하시던 말이.

   그렇다니까요, 바로 그걸 잊지 말아야.

   일본인 1/4 정도에서 한국인 디엔에이를 찾아볼 수 있다던 말씀요?

   예. 그리고 지금 한국엔.

   지금 한국엔? 한국엔 뭐요?

   지금 배달의 원형인 한국인 중엔…….

  

   달변의 그가 오늘은 더듬거린다.

   아, 한국인 중에도 다른 민족의 디엔에이가 섞였다고요? 거야 당연하겠죠. 순정한 핏줄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 아닌가요?

 

   나는 벌써 그, 여기 이 이박이 아니라, 그, 배승한의 가족사에 젖어든다. 온 세상에 흩어져 핏줄을 지키거나 흩뜨려놓는 유대인 이야기는 삼가리라. 그것은 승한의 가족사에서 비밀 같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에게 금기일 리 없지만 나도 모르게 삼가졌다. 그런데 이박은 기어코 그 금기를 건드린다.

   실제로 열린사회 치고, 예컨대 유럽처럼 애매한 경계의 이웃나라들 사이에선 더욱. 암튼 열린사회 치고 핏줄이 온전할 리 없지요. 열린사회라. 그냥 조금 열린사회, 아님 ‘베륵손’적 의미의 열린사회?

   이샘, 오늘은 그쯤 하시죠. 지금 프랑스어 발음 놓고 또 토 달려고?

   아니, 폴란드 태생이라 그래야 한다면서요. ‘베르흐손’인가?

   이샘, 제발 편하게 합시다. 어째 갑자기 베르그송인데요?

   거야 그는 유대인 순종이다 그 말이고. 유대인의 경우 순종이 문제되지는 않죠. 베르그송의 공헌이라면, 정지된 인식에서 운동, 변화, 진화의 가치로! 이 문외한이 맞게 이해하나요?

   문외한이라니, 철학도가 이 경우 문외한이란 말씀은 뭔가. 그런데 뭔 말씀을 하려고? 프랑스어 좀 한다고 베르그송 아는 척은 말라 그거죠? 당연한 말씀, 맞아요, 국어로 읽는다고 모든 책이 읽어지나요? 그보다 선생님의 역사철학은…….

아, 그거 아닙니다. 저 요새 역사고 철학이고 다 보따리 싸맸습니다. 꽁꽁 동여 매버렸죠. 제가 지금 순례 중인것 안 보이시나요?

  

   그랬다. 순례자 이박.

   배낭을 짊어졌지만 배낭족이 아닌 것이 개량한복 차림이다. 순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나그네 몰골이 선했다.

   그러고 보니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어디 다녀오는 길 아니면? 제가 한샘 찾아서 여기 왔다면 믿으실래요?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럴 리 없죠, 당연히. 참 그런데 이 고장엔 어쩐 일이세요. 원래 여행을 하시는 편인지?

   여행 안 좋아합니다. 안 좋아 했어요. 존재와 영속성의 가치에 파묻힌 동안은 정말 그랬지요. 그 다음 모든 실재를 역사적  성격으로 규정하려던 시절엔 운동과 에너지에 현혹되었지만, 그 운동은 이런 여행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개념들이었죠.

   이샘, 저 오늘 머리가 무거운데요. 본원적 이야기 빼고, 오늘 이 고장엔 웬 일로?

   아 참. 거의 실직 상태인데 뭐 따로 할 일이 있나요. 먼저 서울 생활 털고 내려간 한샘이 부러웠다고나 할까. 한번 보고 싶었어요, 그냥.

   저요? 제가 부러워요?

   예, 진실로. 건 그렇고. 한샘은 식구가 단출하시다고?

   단출하다기보다, 아들 없는 집 큰딸이죠. 현상으로 말하면 오래 독신가족. 왜 난데없는 호구조사세요?

   제가 마음먹고 낙향을 할까 생각 중인데 동반자를 구하거든요.

   아뿔싸. 나는 숨을 죽였다. 그럼 지금 이순규가 하는 말이, 아니 내가 그 후보 중 하나라는 말을 지금?

 

 

   동반자 구함

 

   어색한 분위기를 뚫고 창문너머를 바라보던 내가 서둘러 실없는 말을 시작했다.

   창밖엔 아직도 비가 내리나 봐요, 음, 가장 긴 노래제목이 뭔 줄 아세요, 창과 관련되는데?

   창밖의 여자? 무관하게 밖에 서있다 그 말?

   에이, 것도 모르시네!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나는 양쪽 손가락을 다 오므렸다 펴가면서 열여섯 글자를 헤아렸다.

   아, 그런 노래도 있었네요. 창문 넘어 어렴풋이…….

   그도 따라 손가락을 구부리며 세어보다가 놀란다. 정말 열여섯 자네요? 그보다 많기는 어렵겠어요.

  

   나는 가만 노래를 읊조린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잠깐. 난 시를 외워보겠소. 염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 어떻소, 제목은.

   진달래, 김용택.

   아니 뭐 한샘은 시도 줄줄 외는 거요?

   아뇨, 제가 무슨. 이 ‘시방’ 땜에 알죠. 이샘이 만날 그렇게 했잖아요. 미처불겄다, 시방, 그렇게.

   그랬군요, 내가 그랬어요. 사투리 아무한테나 잘 안쓰는디.

   방금도 쓰시네요.

   그러니께 아무헌테나는 잘 안쓴다고라.

   에이, 치우세요. 이상합니다. 평소대로 하세요.

   그러지라.

   그만 하시래도요, 저 오늘 앉아있기가 좀 피곤하네요.

   그럼 좀 나가서 걸을까요?

   걷기는 더 힘들 것 같아서요. 이샘도 오늘 고향에 가시는 길이라 하셨잖아요. 너무 늦지 않게 시리.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군요. 예, 뭐. 그래도 제 고향 이야기나 좀. 오뎅 국물에 한잔 하면 피곤감도 풀릴 것이고.

 

 

   그렇게 이순규는 고향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두워지자 불조차 꺼진 농협인지 무슨 건물 앞 간이 튀김집에서. 튀김집에 어떻게 소주가 나오는지는 글쎄.

 

   그의 고향은 전라남도 고흥.

   고흥군 봉래면. 거의 처음 들어본 지방이다. 아니다, 우주선 발사 때문에 몇 번 뉴스의 중심에 섰던 지방이다. 봉래면은 1996년 나로1대교와 나로2대교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고립되었던 섬 외나로도에 위치한단다. 군청에서 차로 달리면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곳. 그러니까 지금은 연육교로 인해서 교통 상으로는 섬이 아니다. 물론 섬이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니.

   면소재지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있다고, 그는 장난말처럼 패밀리 마트도 들어왔고, 모텔도, 비치호텔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아직도 충무공 따라서 진터라고 부른다는 진기마을이 이웃해 있고, 나로도 항이 가깝고 유람선 선착장도 가까이 있다고. 무슨 빌라라나 아파트도 물론 있다고. 어차피 현대 사회는 방 한구석에서 인터넷으로 온 세상과 교류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니.

   그는 갑자기 머쓱해 한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도시여자라도 마음만 먹으면 살만 한 곳이라고?

   봉래면, 삼십 제곱킬로미터 쯤 면적에 인구가 이만이천 조금 더 될 뿐이랍니다. 어디나 처럼 여자가 조금 더 많고요. 경로인구가 팔백 이상. 노인들이 외롭지요. 우리 집은 좀 낫지만.

   그의 고향집은 그의 말대로 외로운 집은 아니란다. 아버지는 계시지 않으나, 동생이 결혼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단다. 바로 이웃에는 종형도, 조금 건너 또 둘째 종형도 결혼해서 살고 있다. 모두 생업에 열중해 있다. 제법 화기애애한 가족이다. 그는 어떻게 그리 멀리 빠져나올 수가 있었을까? 왜 이제서 돌아가려는 것일까? 스무 살에 떠나와서 스무 해를 떠돌다가.

지금의 OO고등학교가 봉래종합고등학교였을 때, 그곳 아이들은 모두 외나로도 내에서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가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집안일도 거들고 고등학교에도 가고. 그런 터에 그는 순천고로 진학하는 행운을 잡았다. 지금은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는 상황으로 학생들이 귀하지만, 봉래중은 6.25 후에 곧 개교한 유서 깊은 학교란다. 중학생 이순규가 유난히 수학에 두각을 나타냈으니, 시골에서 천재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개천의 용은 합심해서 키우는 것이 시골 인심인지라, 교사와 학부모들이 힘을 합쳐서, 지역사회 전체가 힘을 합쳐서 일단 순천고 진학을 가능케 했다. 순고는 전국 어디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고등학교이다 보니, 특히 수학을 잘하던 학생의 미래는 밝았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 조숙한 친구를 만난 탓에 공부는 철학이라고 방향을 돌려버린 것이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비극이 되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는 기대를 충족시켜야할 사명과 의무를 저버렸다. 법대는 아무튼 고향의 소원이었다. 서울의 다른 괜찮은 대학 진학까지만 해도 모두에게 희망을 아직 남겨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법전을 파고들기도 전에 눈이 다른 곳을 향했고, 그는 배고픈 철학도가 되었다. 여전히 고향의 기대는 살아 있었다. 게다가 장학금으로 해외유학을 떠날 때는 고향은 다시 사그라지려던 꿈을 부풀렸다. 박사 공부라니! 박사가 되어 돌아올 고향의 아들. 교수직은 따 놓은 당상일 것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꿈과 현실이 엇갈렸다. 이제 그 철학박사님이 낙향을 하시려 든다?

 

   마침 군 전체가 지역 내 사회단체와 더불어 ‘고흥사람은 고흥에서 살자’는 캠페인을 들고 나온 터요. 지역경제 활성화와 인구증가를 위해서라고. 인구를 늘리려면 우선.

   그렇겠다. 물론 그의 문제다. 난 가만 있었다.

   헤, 저 농담 잘 하잖아요. 맨 정신으로도. 아직 지칠 나인 아닌데, 어째 오순도순 사는 고향이 좀 그립더이다. 고흥. 뭘 아시요, 혹시?

   고흥 유자!

   아니 어떻게 그런 걸 다. 어쩌나 그런데, 그건 우리랑은, 우리 집이랑은 거리가 멀죠. 고흥 유자가 전국의 반에 반은 커버한대죠. 이천 가구 이상이 유자농에 종사하니까, 한집 건너 정도죠. 헌데 우린 아니어요. 우린 그냥 농사죠. 그냥 농사. 농군에게는 기회가 별로 없어요. 그것도 섬에서. 큰아버지랑 아버지랑 함께, 함께 그렇게 풍랑만나 그리되신 뒤로 우리 집에선 배타는 것도 금기고. 우리 형제들이 그러니까 겨우.

   그는 너무 멀리 갔다. 너무 깊이. 아무래도 그의 가족사를 들을 계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말을 돌렸다.

   가만, 우애와 우정은 왜 다르게 쓰이게 되었을까요? 이샘은 우애와 우정 둘 다에 지극하신 편인가 봐요?

   왜 그 다음 애정이라고 묻지는 않나요? 우애와 우정 다음 애정은?

   와, 철학자의 궤변 앞에서 내 어찌 당하려고. 그만 둡니다. 이러다 없는 우정마저 떨어지겠어요.

   우정이라고요? 그럼 우정은 있다고?

   우정까지야. 우리 모두 피 마르는 동병상련에 동류항이라 느끼는 족속들 아녀요?

   동병상련.

   예, 뭐.

   동류항.

   …….

   동반자!

   오늘 그가 실제로 동반자를 구하고 있었는지 동반자 일반에 관해서 ‘설명’을 하고자 했는지는 조금 애매했다. 오늘은 애매했다. 그는 그러다 말고 아무튼 고향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고향 집

 

   깊은 가을날에도 흐느적거리던 날씨가 오늘따라 저녁이 되자 급격히 추워졌다. 오뉴월 식혜처럼 변하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 아니라 날씨다. 어떻게, 기승을 부리는 모기 소리가 아직 어딘가에 머무는데, 책상에서는 발이 시려온다. 이박과 함께 안주삼아 먹은 오뎅 국물과 떡볶이만으로 저녁을 셈 쳤더니 시장기인가. 시장기와 추위는 오면 함께 온다.

   밤이다. 춥고 배고픈 밤이다. 자판 위의 손이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말이 좀 안 되는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마침내 그일까? 독일 또는 어딘가에서 전화를 하는 거라면 시간을 잘 못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는 독일엔가 어딘가에 있을 그가 아니라 고향으로 간 이박으로부터였다.

  

   오늘 불쑥 여름난 중의 꼴로 미안했수다. 고향으로 향하다보면 회까닥해요, 제가.

   웬 중?

   아, 여름내 입은 후줄근한 중의적삼 말이요.

   그는 딴청이다.

   이 시간에 전화하시면 제가 방해받아 발끈하는 것 모르세요?

   아 발끈 하셨구나, 허 참.

   그럼 담에!

   아 잠깐만. 오늘 아님 나 말 못해요. 잠시만, 아니.

  

   술김에, 그러고도 마주보고 말할 용기가 모자라서 밤늦게 전화를 했나? 무슨 고백이라도? 그것은 어리석은 여자의 지극히 상식적인 추측이었다. 우린 사실 그럴 수 있을 사이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그가 말을 더듬거리는 동안 내 손은 점점 더 떨렸다. 몸도 떨렸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한 시간 넘게 간헐적으로 쏟아낸 내용은 그의 늘상의 화두 ‘배달민족’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론적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 인물들에 관한. 그의 고향 집에 관한.

   우리 집엔, 사촌들까지 다 이웃해서 우리 집은 시골치고는 북적거린다고 그랬죠, 아까.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골이 아니라. 무슨 조화냐고요? 배달민족의 확장이랄까, 아주 새로운 대처방식이 먹혔던 셈입니다.

  새로운 대처방식이라뇨?

  에이, 다 아시면서.

  뭘 안다고 하셔요. 설마?

  설마 뭐요! 예, 설마요. 설마 중국, 필리핀, 베트남여자들 이야기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엄청 머리 좋으신 거예요. 종형들, 덩달아 제 동생도.

  

   이순규가 횡설수설 내뱉은 이야기들은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종형이 불행을 씻고 40을 훌쩍 넘겨서 새장가를 들었다. 동네사람 모두가 축하할 일이었다. 다만 말씨가 이상하여 사람들이 수군거리게 될 때 쯤, 조선족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동생이 필리핀의 호기심 많은 간호사를 아내로 맞았다. 어학연수를 필리핀으로 간 것이 발단이었다. 정말 씩씩한 이 필리핀 댁 때문에 국제결혼에 대한 선입견이 금세 사라질 무렵, 둘째 종형 또한 베트남 색시를 맞게 되었다. 각각 이름도 없이 중국, 필리핀, 베트남으로 불리는 세 여자들은 일곱 째 아이를 기다리고 있고, 동네는 화목하고 떠들썩하다.

  

  고향 이야기들을 조금 더 자세한 버전으로 써둘 필요가 있지 싶다. 하도 길게 말한 내용을 단 몇 줄로 쓰는 것은 말한 사람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이순규는 어느 날 인천 공항으로 도착하는 종형을 마중 나가라는 고향의 전화에 많이 놀랐다. 외국 여행을 감행할 종형이 아니었으니까. 형은 혼자가 아니었다. 동행은 놀랍게도 씩씩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네 종형 말이다, 공항에서 고향 가는 길 잘 돌보아 주거라! 하시던 어머니의 전갈이 무색했다. 왜 보살펴주어야 하는지? 인사를 건네자마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 형. 아, 축하합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고향으로 가는 금호고속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다행히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론 고향까지 직행은 아니라 해도 거기선 문제없을 것이었다.

   공항에 혼자 남은 이순규.

   잇따라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들은 정신없이 들이닥쳤다. 이태 전 금의환향처럼 귀국할 때의 힘찼던 발걸음이 생각나서 서글퍼졌다. 책으로 꽉 채운 기내가방으로 쩔쩔매면서도 발걸음은 사뿐했던 그 순간이 그리웠다. 현실은 곧 냉엄하게 닥쳤다. 기회는 희박했다. 그런데 이 공항을 통해 살러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구나. 또 다른 희망을 안고.

얼른 정리가 안 되는 것이 종형의 반전이었다. 종형은 시골에서 동창생과 결혼한 행운아에 속했었다. 여자 동창생들은 숫자도 적었지만 왜 하나같이 외지로 나가서 게서 결혼들을 해버리는지. 종형과 중학교까지 함께 다닌 동창생이 종수가 되었을 때 젊은 사람들은 은근히 부러워들 했다. 상고를 나온 것도 아닌데 주판을 잘하고 똑똑해서 단위농협 사무실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똑똑한 아가씨였으니까. 홀어머니 모시고 연애도 한번 안하고. 사람들이 다 알아줄 만큼 착실한 아가씨가 종형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였다가 마침내 혼인식을 올렸다. 당시에도 벌써 농촌 총각이 스물일곱에 제대로 장가드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종형이야 면소재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별 야심 없이 주저앉아 그 나름대로 버거운 집안일을 도맡고 있었다. 그러다 단위농협에 드나들면서 영농 후계자 문제도 있고. 드물게나마 꾸준한 만남이 옛 우정을 결혼으로 이끌었을 신실한 젊은이들. 두 사람이 결혼을 했을 때 정말 예쁜 신혼부부였다. 정말 오랜 만에 동네 처녀가 동네에 남아 시집을 갔으니까.

 

   종형이 결혼했을 때는 서울올림픽에 대한 열광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때였다. 이순규는 아직 고향에 있을 때였지만, 그 다음엔 곧 순천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들은 이야기다.

   종형은 농협대학 진학을 고려하고 있었어요. 집안의 장손인데, 아이도 태어날 것인데, 아부지 노릇 잘하려면 조금은 더 배워야겄제, 그랬답니다. 종수님이 적극 권하기도 했고. 그때 농협대학에 농업조합학과 말고 농공기술과가 생긴다고 해서 좀 편하게 준비해도 된다 했었고. 그 사고 이후로 결국 다 깨어졌지만. 그러니까 그 사고라는 것이. 제가 어찌 자세히 안답니까. 맘 찢어지니 집안에서도 쉬쉬하는 것인걸. 만삭은 아니지만 아무튼 임신 후기에 시멘트로 된 바깥층계에서 실족한 것이 그만. 그렇게만 알죠. 고흥으로 나오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 아녀요. 수술도 못해보고. 지금이야 바로 내나로도로 이어서 포두면으로 연육교들이 개통되어 있으니 일도 없지만요, 그땐 보건소 여직원이, 대개 간호사죠, 발을 동동 구르며 함께 이송 중이었지만 사람을 영 놓쳤다는 것 아닙니까. 종형의 인생이요? 더 말해서 뭐해요. 남들 장가도 안 든 나이에 상처라니, 것도 거의 두 생명을 함께.

   그러니 어떻게?

   전설이랑 같지요. 외나라도의 절경 중 하나인데, 곡두여 이야기 모르시죠. 당연히 모르시겠지요, 서울 양반이니.

   서울은 무슨, 저도 서울 촌사람이죠.

   곡두여 전설이 그냥 전설이 아니라요. 그곳 바다 밑이 고르지 않아서 지금도 비바람 모진 날에는 위험하죠. 가끔 항해주의보가 떠요. 그러니까 바닷길 건너 시집 장가가다 풍랑 만나서 빠져죽은 신랑신부의 원혼이죠. 거기 신부가 탄 가마가 벌러덩 누워있는 형상의 작은 섬, 그 반대로 뾰쪽하니 솟아 신랑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섬, 암튼 두 개의 무인도이지요. 거기 도시에서 낚시꾼들이 찾아들곤 하는데, 강성돔인가 그런 것 철 따라 잘들 온다는군요, 그런 낚시꾼들이랑 어울리지 않으려고 이상한 곳으로 낚시만 다녀서 큰어머니 애간장 좀 녹였었나 봅디다. 그러기를 십년 넘어, 그래요, 근 십오 년, 겨우 마음을 잡고 생전에 종수씨가 권했던 농협대학 일로 알아보려고 서울에 갔다가.

   그러니까 서울서 만난 조선족이었군요. 결혼소개소가 아니라?

   그게 마찬가지요. 둘이가 서로 결혼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누군들 필요에 의해서 결혼을 하지, 안 그런가요?

   아니, 종형은 재혼 권유에 시달리고 있었고, 지금 종수가 된 조선족아가씨는 한국 사람과의 결혼이 꼭 필요했겠죠. 하북성 천진에서라던가, 사촌언니 한 사람이 암튼 중국 업체와 한국 무역상들을 연계하는 가이드로 일하면서 꽤 잘나가는 또순이였던 모양입디다. 그런 걸 괜히 한국 무역상들이 바람을 넣어가지고 한국으로 왔는데. 중국어 하나로 충분했던 사업이 한국에 오니까 조금 달랐겠지요, 한국어도 배워야 했고, 그래도 다시 돌아가기에는 한국물이 좀 들었겠어요? 양고기 구이 식당을 낸 언니는 사촌동생을 어찌어찌 초청해 와서 데리고 있는데, 이 동생은 장사 체질이 아니라 힘들어 하고. 암튼 종형 입장에서는 초혼도 아닌데, 결혼이 필요하다는 사람하고 결혼해보자, 뭐 그런 심정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조선족도 민족은 같으니까 국제결혼은 아니다 싶기도 하고. 예상 밖으로 튼실한 사람이었던 거죠. 서울에서도 북쪽에서 만나서 한반도 남쪽 끝까지 따라나선 걸 보면,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낸 걸 보면. 서울에, 그러니까 고양시에 사촌이 살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위안이겠죠. 어쨌거나 한국에 혈혈단신 시집오는 동남아 등지의 여성에 비하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산에 올라갔던 길이라지요, 삼송역인가 무슨 역에서 갈아탈 버스를 잘 못 타서, 몇 정거장 다음에 분명 농협대학이 나와야 하는데, 한참을 가도 안 나오니까 두리번거리던 참이었나 봐요. 그러다가 ‘필리핀참전비’라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정류장 말이 들려서 무조건 내렸더래요. 농협대학 길이 아니니까 일단 빨리 내리려고. 거기 그 이상한 지명에 내려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만 하세요, 슬쩍 무서워지는데요. 으슬으슬 비 내리는 오후는 아니었겠지요?

   왜 아뇨. 암튼 처녀 한 사람이 달랑 눈에 뜨여서 길을 물으려고. 그런데 그 처녀가 잽싸게 어떤 식당으로 들어가더래요, 혼자서. 종형의 입장에서는 혼자서 식당으로 들어가는 처녀도 이상하려니와 간판에 양고기라 적힌 것이 희한해서 자기도 모르게 따라 들어 갔더라나. 자세히는 모르죠. 암튼 그 조선족 처녀가 종수가 되었으니.

   그럼 농협대학은 그대로 잠잠해졌고요?

   예, 아무래도 종형은 학교하고는. 허나 이번엔 행운의 기회가 된 거죠. 자세한 건 몰라요. 우리 집 남자들 내력이기도 하고, 뭔 말을 안 하지요. 누군들 속내를 아나요. 지금은 묵묵히 가업을 이어가죠.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났죠. 종수네 친정엔 딸들만 줄줄이 있었다는데, 그래서 슬펐고, 종수는 아들을 먼저 낳아서 겁 없이 아이들을 낳았더래요. 애들 씩씩하게 낳아서 씩씩하게 기르고, 씩씩하게 일하고, 무서운 것이 없다느만요. 흔히 말하는 결혼이민자의 문제 같은 건.

   웬 사설을 오늘 이렇게.

   한샘, 좀 들어 봐요.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가 한정 없어요. 그러던 차, 내 동생 놈이 말이오, 내가 서들어 필리핀으로 연수를 보내놓았더니.

   설마, 이번에도?

   예. 이 녀석이 군대를 연기하고 또 연기하고 그러다가 졸업을 딱 한 학기 남겨 놓고 군대를 간 거예요. 군대를 마치고는 명색은 짝 학기 복학하면 취업문제가 복잡하다는 핑계인데, 복학을 안 하고 놀고 있는 거예요. 서울에 데리고 있을 처지도 아니고, 강의 맡기 시작한 첫해인데 고시방 생활일 때라. 그래도 형이 대학 강사인데 싶어서 필리핀으로 단기 연수를 보냈죠, 그랬더니…….

   아, 이번에도 결혼정보회사 그건 아니네요 뭐.

   그게 그리 다른 건 아닙니다. 국제결혼은 국제결혼이에요. 피가 섞이는 겁니다. 아무튼 거기 병원에서 간호대학 실습생을 만났다는데, 어떻게 가톨릭 신자라더군요. 필리핀에 가톨릭 신자가 많다고는 들었지만, 우리 선입견으로는 우리만 못한 곳 아닌가요. 그런데 참 개화된 여성이죠, 동생이 한국에 돌아와 복학해서 나머지 한 한기 마치고도 계속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이 필리핀 처녀가 한국으로 쫒아 온 겁니다. 그렇게 개방된 곳이 필리핀이더라고요. 그곳은 흔히 국제결혼 때 신부집에 주는 거금을 요구하는 부모들도 없고, 딸만 행복하면 된다는 식이라더군요. 모르죠, 그 집만 그랬는지. 결혼 후에 이곳 간호사 자격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보건소에서 보조원으로 일도 하고, 우리말도 엄청 잘 한다네요, 결혼이민자 대상 한국어 강사노릇도 한다니 뭐. 면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무료강의이지만, 듣는 사람이 무료고, 강사료는 제법 받는대요. 큰어머니가 자랑삼아 하시는 말씀 얼핏 들으니, 우리들 강의료나 별반 차이가 없어요.

   설마.

   대학 강의료가 어디 문화원 같은데 강의료만 못하기도 하니까요. 비문해자 대상 국어강의 같은 것들. 우리들 상태라고 하는 것이 사업소득세를 납부하는 소득자이면서 방문판매자나 우유배달인과 동급의 자영업자죠.

   설마 자영업?

   한탄할 것 없소이다, 자영업이죠, 교육자로 분류되고 싶으시다? 알아서 하시지요. 오늘은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라니까.  동반자 구함.

   동반자?

   아니, 종형이나 암튼 고향 식구들 이야기요. 종수씨나 제수씨가 그렇게 행운을 가져오니, 마을 사람들은 단번에 국제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우려를 걷어냈죠. 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잘 살고 있는 국제결혼 짝들 이야기가 매주 나오고 그러잖아요. 우리 동네에선 아주 다 같이 반기는 프로그램이 되었답니다. 전에 일용엄니 나오는 프로그램 마냥.

   전원일기요?

   그게 무슨 전원이라요! 전원이라고 하면 어디 그냥 단어 그대로 논과 밭이라는 뜻으로 들리나요? 비록 청빈하다 할지라도 한가롭고 어딘지 낭만이 묻어나잖아요? 실제 논두렁 밭두렁 사이의 삶은 전원과는 별개요. 말 그래도 흙탕이지, 두엄 속, 아니 그 보다도 못한 화학비료와 싸한 농약냄새. 어머니들은, 아니 여자들은 향기가 따로 없지요. 향기는커녕 형태도 없지만요.

   형태가 없다뇨?

   형태가 없지 그럼. 농어촌 여자들이 형태가 있소? 킬힐은 아니더라도 일단 굽이 있는 신발에 달라붙은 내복 같은 걸로 다리를 가리면 형태가 쫘악 나오질 않소. 농어촌 여자 누가 굽이 있는 신발을 신는단 말이오. 그러니 여자는 아니지요.

이샘, 참 이상한 분이시네. 기껏 고향 이야기라서 참고 있었더니, 여자들 킬힐 이야기시라면.

   아, 물론 죄송합니다. 헌데 고향 여자들도 여자들인데, 여자들 이야기를 할라치면 하이힐은 빼고서는 어찌. 단도직입적으로 여자는 하이힐에서 탄생된다 이거 아닙니까!

   치우세요, 그만. 이샘과 여자들 형태 이야기를 할 군번은 아니외다.

 

   이 사람이! 하고 전화를 끊으려다, 우선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숨을 죽이고 듣고 있으려니 수화기를 놓은 줄 아는 모양이다. 한참 타령인데, 이쪽에서 듣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어조다. 에이, 한금실, 이렇게 쌀쌀 맞으면 내가 어떻게…….

   그쯤에서 정말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살짝 후회했다. 내가 어떻게…… 다음을 들어둘 걸 그랬나 싶어졌기 때문이다. 어쩜 그 다음을 속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에 필시 이 사람이 내게 조금 기대려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서면서 생각하니까 다만 이야기를 계속할 사람이 없어져서 답답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구라도 한번 빗장을 열면 그 속의 전부를 털어내고픈 순간이 있지 않겠는가. 정말 뜨거운 물이라도 마셔야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왜요, 한샘! 왜 하루 저녁 전화를 못 받아주시는 거죠?

   아예 시비조에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정말 수화기를 내려놓든지 해야 할 터인데, 나는 가만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해버려야 한다, 누구라도.

   이샘, 또 웬일이세요. 아직 이야기가 남았어요?

   예, 아직. 아까 말처럼 종수씨와 제수씨가 잘 살아주니까.

   그럼 좋은 일이겠죠.

   아니, 그게 다가 아니라, 둘째 종형이 마저. 마저 국결을 선택한 겁니다, 이번에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 그게 그리 무서울 것이 아니니까요. 헌데 그냥 조선족이나 필리핀 누구 하나를 더 알아보든지 할 것을. 첨엔 그리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두 사람이 되면 저울이 안 맞다고.

   저울?

   아, 그게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혼자인 사람이 더 외롭다고. 그러니까 조선족 둘, 필리핀 하나, 그렇게 되어도 그렇고, 그 반대도 그렇고. 그러니 공평하게 다른 나라 사람으로 결혼정보회사를 찾았답니다. 그렇게 해서 베트남 아가씨가 시집을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동네사람들이 사람 이름을 부를 생각은 않고 중국, 필리핀, 베트남 그렇게 부르는 것이오. 시집온 순서대로, 결과적으로 나이대로. 그런데 베트남이…….

 

 

   이름

 

   아닌 밤중에 이순규가 토해내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이해한대로 정리해 두고 싶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 핵심은 정리해 놓은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면 알게 되지 않겠는가. 아무튼 베트남 신부의 경우를 이야기할 때쯤엔 이야기하기가 좀 힘들었었던 모양이다. 이야기가 자꾸 끊어졌고, 그것은 그가 전화 저편에서 소주잔을 홀짝거리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베트남 신부가 시집을 올 때에는 결혼정보회사에서는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응우엔 티 탄죽 - 그렇게 써서 혼인신고를 마쳤지만, 어느 것이 성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응우엔이 성이고 나머지가 이름이라 해서, 티 탄죽이라고 불렀는데 그게 아니고 탄죽이면 되는 모양이었다. 티는 여자이름이라는 뜻으로, 누구에게나 붙어있는 이름이라 했다.  그러니까 그냥 탄죽.

   탄죽이 뭐냐. 그 여동생 이름이 죽느안인 걸 감안하면 그보다는 나은지 모르겠지만, 탄죽이라니. 왜 트엉, 완 또는 람 등으로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이름도 아니고. 하필 탄죽? 죽이 타면 뭐가 될까?

   아무튼 탄죽은 그나마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긴 손위 동서도 사람들이 이름을 무시했다. 명화는 분명 한국식 이름이었고, 조선족인 그녀를 굳이 중국식 발음인 밍화라 부를 필요가 없는 데에도 그랬다.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저 ‘중국’이 이름이었다. 탄죽의 이름은 ‘베트남’일 뿐. 그녀들은 그냥 중국, 필리핀, 베트남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베트남이 무척 힘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겉보기엔 조용했더라도. 조용하더라도.

   베트남은 무엇보다 나이가 어렸고, 어린 사람은 확실히 의지보다는 감정이 성하다는 것이 드러났단다. 외로움을 타고, 다른 여자들, 중국과 필리핀에 비해 말 수가 너무 없었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으로 전화를 해대지도 않았고, 베트남의 어머니를 초청하겠다고 조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아주 어려서 떠나버렸단다. 베트남도 남자가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릴 수 있는 나라인가? 아무튼 어머니뿐이었고, 어머니는 여행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병을 얻은 어머니의 병원비만 송금하면 그것으로 참았다. 어머니가 걱정이겠지만 고향에 가고 싶어 하는 내색도 없었다. 다만 갑자기 겉늙은 아주머니 꼴이 되어가는 것이 이상했다.

   어메, 베트남은 밥도 안 묵나? 한국 음석이 안 받는당가?

   어메, 베트남은 언제 애기 갖는당가?

   참말로, 살이 좀 붙어야 애도 서는 거인디. 애가 생겨야 확실히 살겄제.

   확실히 살다니? 젊은 새댁이 아이가 얼른 생기지도 않자 불쑥 의심들도 튀어나왔단다. 아주머니 몰골인데 미숙아 같은 것. 미숙아 상태에서 아주머니가 된 듯. 형님네가 낳아놓은 세 아이들, 그리고 한 해 전에 결혼한 사촌동서가 연년생으로 낳은 두 아이들 틈에서 베트남은 그냥 덜 자라고 늙어버린 아이 같았다. 아이들은 앞집으로 뒷집으로 깔깔거리고 다녔고, 형님과 동서는 아이들 따라 소리 지르며 달려 다니며 부산했다. 소리를 다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는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아무도 그러는 줄 몰랐다.

   탄죽이 시집왔을 때 사람들은 외톨이 외국인이 아니라서 쉽게 적응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녀 자신은 오히려 힘들었다는 것. 집안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아무래도 별로 배려를 하지 않았다는 것. 왜 다들 알아서 잘 적응하고 사는 조선족 며느리와 필리핀 며느리를 봐왔기 때문에, 무엇이 어려운지, 심지어 말을 잘 못하는 것조차 고려를 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 살이 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드디어 아기 소식이 생겼다. 삼 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엄마보다 더 까무잡잡한 여자아기가 태어났다. 웃음기 가득한 실눈인 아버지를 닮아서 눈이 퀭한 엄마 모습은 없었다. 퀭한 눈에는 실망의 빛이 어른거렸다. 아들을 원했을까? 사람들이 아들을 원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아들을 원했을까? 그래서 지금 둘째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자식 사랑이 애틋한 것이 베트남 사람이라고 하니, 아들이고 딸이고 더 바랄 것이다. 더구나 형제자매가 단출했던 서러움으로 아이를 더 많이 원할 것이다. 죽느안, 그 여동생 하나가 어머니 곁에서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을 뿐이니까. 어쩌면 형제자매들이 많았다면 한국에 시집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국으로 시집오는 것은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이었으니까. 안쓰럽게도.

   그러면 정말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심정이었겠지. 너무 흔한 비유다,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인접국가의 여자들이 이곳 한국의 농촌이라는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가? 농촌에는 용왕이란 없는데.

  

   나는 교양한국어 강의에서 만나는 외국학생들의 얼굴에서 청운의 뜻만 읽었다. 체류외국인이 140만을 넘어선 지금의 한국 땅.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심청이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부모가 한국으로 흘러들어 고국의 자녀들을 부양하고 있을까. 만주의 조선족들의 경우 절반도 넘는 가정에서 사람들이 한국으로 떠나와 있다고 한다. 떠난 한쪽 부모가 결국 한국의 양풍에 젖다보니…… 불륜에 이혼에, 남겨진 아이들은 어머니를 그리며 고모나 이모집으로 떠돌다 결국 기숙사 학교로 보내지고. 부모들이 떠나는 경우보다는 명화 씨처럼 처녀가 한국에 시집오는 경우가 훨씬 바람직하다. 조선족 형님에 비해, 용감한 필리핀 동서에 비해, 베트남 사람 탄죽의 경우는 사뭇 다른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말이 우선 서툴렀으니.

   그런데 말을 잘 못하는 것도 고려를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가 들어보았더니, 별로 말을 걸지도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이 원래도 여자이름을 그리 챙겨서 부르는 습성이 아닌 탓도 있었을 것이란다. 시집온 새색시에게는 새댁이라면 통하고, 동네에 새댁이 겹쳐 들어오면 아무개네 새댁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아이를 낳으면 여자들 이름은 아예 아이엄마이니까. 이제는 딸아이의 이름 따라 진주엄마다.

 

   그거야 이순규네 고향만 그러는 건 아니다. 한국 어딜 가도 맞대놓고 사람 이름 부르는 일이 적다. 어릴 적 기억을 해 봐도 어머니조차 ‘금실아’ 하고 이름을 많이 불러주진 않았던 것 같다.

   울 애기, 잘 다녀왔어?

   아가, 너 그렇게 꽁하면 못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말을 하실 적에도 그랬다. ‘우리 금실이가’ 라고 하는 대신에 ‘우리 큰애는’ 이라고 하실 때가 대부분이었다. 학교에 가서야 이름 석 자로 불렸다. 한금실. 발음 때문에 황금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려선 그런 뜻인 줄 알았다. 금실. 금빛이 나는 실. 그런데 한자로 쓰면 달라진다. 금으로 된 방, 최고로 좋은 방이다. 동생들이 줄줄이 은실과 옥실이다. 그 다음에도 여동생이 있었으면 어떤 이름이었을까. 설마 청실홍실이었을까. 그보다 어차피 시집가면 시댁 성씨 따라 김실이 박실이 등으로 불릴 우리들에게 왜 미리 ‘실’자를 붙여 이름을 지으셨을까? 나는 금씨에게 동생들은 은씨 옥씨에게 시집을 간다면 이름이 그대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시집을 안가서 여전히 금실인데, 둘째 은실이는 김실이 되었다. 금실이 김실이 소리가 헷갈릴 즈음해서 나는 한박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한박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한박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김실이 우세해서다. 그 대신 은실인 사라졌다.

 

 

   한박사

 

   나는 한박사라 불리자마자 곧 하현달로 접어들었다. 초승달에서 반달까지, 그 반달에서 보름달까지는 누구나처럼 꽃피어나는 시기이다. 내게도 화려하지는 않으나 어쨌거나 한 작은 꽃에 비유하더라도 괜찮을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굳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라고 읊지 않더라도, 꽃 한 송이는 많은 눈물겨운 양분들로 피어난다.

   그 나름대로 힘든 세월에 대한 대가가 박사라는 이름이면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러다 그것 또한 한쪽의 시각이란 것을 깨달았다. 한번은 모교에서 정반대 편 다른 대학까지 급히 택시를 타고 가야할 일이 생겼다. 그때 운전기사의 질문이 삐딱하게 나왔다.

   거, 학생은 아니시겄고, 강사요 교수요?

   아니, 그거야.

   아, 거 강사든 교수든 하니까 대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택시를 탈 것 아니요! 그러니까 외국서들 박사까정 해 오시고. 이런 말 좀 뭐 하지만서도, 그런데 우린 영 맘에 안든 것이 있거덩요. 내가 지금 한국 들어온 것은 얼마 안 되고, 배를 타던 사람 아니오. 원양선박 말이오. 안 돌아다녀 본 데가 없는데 그게 참. 한국선원들이 항구에 내리면, 어딜 가나 한국여자들이 나온단 말이오. 그런데 니스 항에서는 - 그 말을 듣는 나는 얼마나 놀랐었던가, 하필 프랑스라니 - 놀라운 세상입디다. 그때 나온 야무진 여자가 하는 말이, 자긴 원래 그런 여자가 아니라 유학생이라요. 내 그 말에 더욱 놀랐거덩요. 아니 그런 데 돈 벌라고 내놓고 나간 여자라믄 그렇다 치지, 한국서 나갈 때는 유학갑네 해 놓고서 그런 델 나오니, 거기 놈들하고는 그런 짓 안 하겄소 어디. 유학 가서 박사 따왔다 하면 누가 그런 상상이나 하겄소. 내 딸은 절대 유학 못 보낸다! 우리 다들 그러고 왔거덩요.

   아니 뭐 그런 심한 말씀을.

   그러다 운 좋게 거기 놈 꼬셔서 박사 대충 해가지고 나오는지 누가 알겄소.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녀요.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사람이니까. 아니, 그보다 그 유학생입네 했다는 사람이 정말 유학생인지 기사님이 아셔요? 아무도 모를 일이죠. 괜스레 죽어라 공부하는 유학생들…….

아, 거야 그렇지요. 그런데 그 여자 똑똑한 폼이 유학생 맞아보였어요. 프랑스말로 거기 사람들이랑 똑같이 야무지게 허덩걸요. 박사 아니라 뭔가라도 헐만 헌 여자여서.

   그렇다고 그리 다 뭉뚱그려서 말씀하시면.

   그냥 말이 그렇다 그 말이요. 한국 돌아와서 박사님! 소릴 듣고 있을 사람 중에 행여라도…….

   그런 걱정일랑 마셔요. 그렇게 한가하게 돈 벌어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이 공부가 아니니까요.

   허긴, 그런 사람이 박사 따기까지야 허겄소만.

  

   그래도 그런 엉뚱한 험담까지 들어가며 이 대학 저 대학을 오가던 시절이 행복한 만월의 시절인 것을 그땐 몰랐다. 조금 있으면 전임이 되어, 아니 강사 경력을 인정받으면 바로 조교수에 임용이 되어서……. 정말 보름달 같은 세월을 누릴 것으로 알았다. 그러니까 누구도 자신이 자신의 생에서 보름달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른다. 보름달에 이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 나름대로 보름달인 것이다, 한 번은. 짧게라도. 내 경우는 해외파 박사로 귀국하여 안정적인 미래를 바라보며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쏟아내어 강의를 준비했던 그 시절. 밤이면 얼마나 정성스럽게 강의안을 준비했던가. 50분이면 50분, 75분이면 75분을 단 일이 분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서.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는 것은 옛말이다. 50분 강의면 낙타 등은 하나면 된다. 75분의 경우에는 쌍봉낙타의 등을 그린다. 하나의 초점으로는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전공강의를 준비할 수 있었던 시절은 갔다. 나는 물론 다른 강의를 시작했다. 걸음마 단계.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이것이 다른 보름달을 그릴 수 있을지는 완전히 미지수다. 거의 불가능이다. 이것도 비정규직이니까. 언제라도 그쳐야 할. 그러므로 보름달일 수 있는 시절은 갔다.

   그런 나날 가운데 우리가 그냥 서로 편하게 이박이라고 부르던 이순규는 실로 엉뚱한 하루를 선사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따뜻한 가정을 꾸린 형제들이 부러운 사람. 우린 말은 통했을까. 둘 다 멋모르고 죽어라 공부했고, 설 곳이 마땅찮은 어중간한 세대로서.

   이런 현상은 시쳇말로 글로벌한 듯, 유럽 어느 작가는 이를 ‘연구직 세대’라 부르며 그들의 비애를 소설로 써냈다. 많이 읽혔다. 『서른 살 제시카』인가 『예시카』인가…… 이름이 중요할 리는 없다. 한 마디로 좋은 학벌에 최고의 능력을 지녔고, 게다가 잘 빠진 서른 살 독신녀의 이야기. 그러고도 무보수나 작은 보수로 불확실한 직업에 종사해야 하는 젊은이들. 우리 사회의 스터디 룸펜족은 넘어섰을까. ‘고급두뇌 비정규직’과 비슷한 개념이다. 나라를 불문하고 인문사회학 분야에서는 이러한 연구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식으로 취업되기가 어렵다. 주인공은 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여성주의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대도시의 원룸에 살면서 자원 형식으로 여성신문에 <섹스와 유행>이라는 테마의 기고를 연재하고 있다. 전통적인 표상으로는 벌써 가족을 꾸렸어야 할 나이이지만, 학위와 실습에 외국여행 경험까지 두루 갖춘 그녀가 경제적으로는 부모에 의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전형적인 실패자 모습. 이 젊고 예쁜 여자는 교육의 결과로서의 확고한 지성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신의 일상이 주는 통속성에 굴한다. 이상적 몸매를 잃을까 걱정하는 피트니광이고, 유행을 따르는 경박함에, 마스카라를 떡칠하는 여자.

   그래, 나는 적어도 마스카라를 떡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 년을 기다려 전임자리가 났을 때 마스카라를 떡칠한 후배에게 덜컥 고배를 마셨다. 이 나라에선 마스카라가 통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다. 유연성 없는 답답한 내 좁은 소견이 나를 제자리걸음하게 하는 것이리라. 전임 경쟁에서 밀려 모교를 떠난 이후로도 제자리걸음은 여전하다. 아니 거의 후퇴의 지경 아닌가. 해마다 신진 박사들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강의시간 지키기도 어려운 형편이니. 내가 누군가의 메모 쪽지들에 붙들려 그것을 소설화 하려고 고심했던 일도 결국 또 한 번의 자발적 후퇴인지도 몰랐다. 그 일을 마치 과제인 것처럼, 아니 나의 절대적 과업인 것처럼 착각하는 동안 제법 치열한 작업에 바깥 세월을 잊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업을 마치거나 내 화면은 늘 바닥으로 돌아간다. 배승한의 메모들. 그에게서 더 이상 소식이 없는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가락은 멈춰버렸다. 하지만 폐부는커녕 머리에서도 나오지 않은 글을 어찌 쓴단 말인가.

 

*

 

   마치 외도처럼 일기를 한 장 쓰는 데 실은 한 달이 넘었다. 그러니까 일기가 아니다. 다만 정확성에 더해서 글의 리듬감과 독창성을 꾀한답시고 이 파일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를 넘길 수는 없다. 섣달그믐에는 이 파일을 닫으려고 한다.

   또 하나 열려있던 화면에는 아직 김용택의 시들이 떠 있다.

   밥풀 같은 눈이 내립니다. / 빈 들판 가득 내립니다 / 그러나 나는 아직도 / 당신으로밖에는 채울 수 없는 / 하얀 빈 들을 거머쥐고 서서 / 배고파 웁니다.

  

   빈 들 - 빈 화면이 오버랩된다.

   실제로 눈이 내릴 겨울이지만, 근래에 눈을 본 적이 없다. 베란다 쪽 삐걱대는 유리문을 칸칸이 창호지로 발라 버렸기 때문이다. 세탁기와 가스레인지가 한꺼번에 들어있는 그곳을 통해 세상으로 향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너머 창밖이 보일 리가 없다. 희멀건 빛으로 또 하나의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느낄 뿐이다.

 

...........................................

「일기」『가로 사람 세로 인간』, 한국작가교수회, 2013, 29-57쪽

 

* 투고에서 출간까지 좀 시간이 걸렸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12. 19. 10:24

파도소리

  어머니이, 아버지!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시는 모양이 이른 저녁준비 중이셨나 보다.

  어떻더냐? 그래, 김 서방은 어떻더냐고?

  그게요, 아직 잘 모르죠. 검사다 뭐다.

  웬 검사? 몸이 부실해서 링건가 맞는다며? 은실이 어쩌고 있을꼬!

  그냥, 입원한 김에. 암튼 염려 마세요, 별일 없겠죠.

 

  아버지는 그날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5년째, 아버지는 은퇴생활에도 집에서 느긋하게 쉬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일을 본격적으로 하시는 것도 아니다.

 

  아버진 어디 가셨나 봐요.

  늘 그러시지. 요사인 부쩍 정문리엘 가시는구나. 차로 가믄 사오십분이면 너끈할 걸 기어코 버스를 타고 가시니. 오산까지 올라갔다가 게서 또 내려가는 길을 왜 우기시는지. 뭔 볼 일은 그리 있으신지.

  아버진 정문리 좋아하시죠. 어머니가 밀양 박 씨인 것도 얼마나 자랑하시는데 그러세요.

  밀양 박은 다 열년가, 네 아부지도 참.

  열녀라서 그러나요, 일단 청주 한 씨와 밀양 박 씨 하면 뭔지 어울리는 건 사실이죠 뭐.

  밀양 박은 빼고, 한 박사나 들어가서 쉬려무나. 아니, 점심은 먹은 거야?

  예, 먹었지요. 시간이 언젠데요.

  그럼 어서 들어 가 쉬어. 네 아부지 오시려면 멀었다.

 

  어려서 ‘아빠 방’이라고 불렀던 건넌방은 언제 보아도 먼지 냄새 느낌이었다. 지금은 내 책상도 거기에 끼어 있다. 한국 떠난 4년 반, 돌아와서 보니 내 물건들이 건넌방 한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내가 프랑스로 떠난 뒤 은실이 결혼을 하게 되자 우리 자매들이 함께 쓰던 부엌 옆 상하방에 자연스레 신혼살림을 차렸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또 그 사이 더 큰 변화라면, 막내 옥실이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 바로 위가 우리가 서울 나가 살던 곳 고모이시고, 그 위 셋째 큰아버지가 일찍이 미국에 가서 정착하셨는데, 다 함께 회갑에 초청받아 갔다가 옥실이 거기 남은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설마 하면서 옥실을 남겨두고 오셨다 했다. 큰아버지가 너무도 간절히 원했고, 옥실도 스스럼없이 남겠다고 했더란다. 결국 버티어 냈고.

 

  아차, 그러니까 아버지는 한 해에 딸자식 셋을 다 어딘가로 떠나보내셨구나!

늦은 봄에는 내가 떠났고, 여름엔 옥실을 두고 오시고, 그리고 그 겨울 은실이 결혼을 했으니까. 은실이 결혼해서도 함께 지낸 것이 얼마나 위인이 되셨을까. 새삼스레 제부가 고맙다. 어서 퇴원을 해야 할 텐데.

 

  내 책상은 짐짝처럼 올려진 책들로 빼곡하다. 노트북을 올려놓으면 남는 공간도 없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질서정연한 아버지의 책장에 얹어둘 수도 없다. 오늘 따라 책장 맨 위, 먼지가 누렇게 깃든 족보로 눈이 간다.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마을에서 유래한 청주 한 씨 후손들은 양절공파에 속한다던가. 아버지는 은근히 정문리 충렬문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신 편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상주목사 한 씨를 따라 자결로서 정절을 지킨 부인 밀양 박 씨를 기리는 충렬문이다.

 

  난 물론 요즈음엔 자주 집에 오지 않는 편이다. 아버지 보기가 어째도 늘 면목이 없다. 우리 셋 중 하나라도 아들이 되어드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렇다. 아버지는 실제로 첫째인 내게 기대를 걸으셨던 것 같다. 더구나 은실이 대학을 포기했고, 옥실인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셈이니까. 초등에서 시작하여 중등으로 옮기시는 동안 힘드신 기억들을 떨치고, 딸애는 보다 확고하고 늠름한 학교에 남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한때는 아버지 은퇴 전에 내가 자리를 잡게 되리라 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런 희망을 아예 접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책상 위에 덜렁 공책 한 권이 놓여있다. 읽다 둔 책처럼 종이가 끼워져 있다. 아버지가 책갈피로 쓰시는 종이들은 다양하다. 약간 두께가 느껴지는 종이들을 버리지 않고 적당히 오려두신다. 이를테면 광고지도 거기에 해당된다. 사용된 봉투들도 마찬가지다. 거기 노란 봉투를 잘라낸 종이가 끼워져 있는 공책. 나는 겨우 노트북을 올려놓았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자꾸 아버지의 공책 쪽으로 간다. 내 책상과의 경계 쪽에 놓여서 열어주기를 재촉하는 듯한 환상에 젖는다. 나는 유혹에 굴하고 만다.

 

*

 

  파도소리는 그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은실이 대입에 실패하고 집에 처박힌 겨울을 뒤로하고, 3월엔 다시 기지개를 켜게 하려고 탐색 차 서울에 나갔던 차였다. 은실을 데리고 개학 전에 입시학원 등록도 하고, 아무튼 다시 서울로 나갈 수 있게 하고픈 마음에서였다. 양재동 누님도 은실일 그렇게나 챙기셨다. 서초동까지만 가면 좋은 학원들이 엄청 많다고. 그날 은실인 어디서도 건성만 같아 보였다.

 

  갑자기 새로 완공되어가고 있다는 그 다리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은실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새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아무튼 잊을 건 잊고 털 것은 털도록. 과거는 과거의 그 자리에 두어야 쉽게 잊힌다 싶었고.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8분경.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 붕괴. 우리 아이들이 그보다 15분 쯤 늦게 8시를 막 지나서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10분 15분의 간격은 찰나에 비하면 영겁이지만, 영겁에 비하면 찰나다. 은실인 지각하더라도 언니와 재잘거리며 같이 가려고 늑장을 부린 통에 살아남았다. 꾸물대다가 지각을 자주 했다는 은실이 고맙고 아슬아슬하다. 은실이 지각하지 않게 언니인 네가 함께 서두르라고, 늘 큰애를 다그쳤던 일이 생각나서 바지를 적실 뻔 했다. 녀석은 결국 고등학교 시절 내내, 아니 그 다음에도 울렁증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아니, 고등학교를 미리 서울로 내보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집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금실인 아무 일 없이 대학엘 들어가지 않았나. 큰애 혼자 내보내느니, 아무리 누님 댁이라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누님도 이상하게 은실이랑 함께 보내라고 극성을 떠셨다. 하긴 뚱하다 싶은 큰애만 보내놓으면 혼자 사시는 누님이 아무 재미도 없으실 것 같기도 했었다. 후회가 무슨 소용, 은실이 고등학교 생활을 망친 건 아무래도 이 애비 탓이렷다.

 

  다시 찾아본 다리, 새 다리는 교하 공간이 넓어서인지 미완성인 그 자체로 광활한 한강수면에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강물은 여전했다. 아니 여전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날의 피를 삼킨 물은 아닐 터. 무심한 강물.

 

  파도소리는 그 강물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날의 강물이 씻기고 씻기어 내려난 천 날의 시간들. 밤낮으로 우는 탄식 소리가 어디로 흘러들었겠는가. 이제는 먼 바다에 흩어져 먼지만큼도 핏방울을 지니지 못한 채 흩뿌려졌더라도. 핏빛 물소리는 지금도 거슬러 올라와 강가의 아비어미의 귓전을 때리리라. 그날이면 그곳을 찾아 목이 찢어지게 뿜어내는 통곡도 눈이 찢어지게 흘리는 눈물도 다시 강물에 섞이어 뒤따라갈까?

 

  등 뒤로 학원들의 안내장을 힘없이 쥐고 있는 은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딸이, 여기 내 곁에 서있는 내 딸의 모습이. 우리는 뒤돌아서 서둘렀다. 계획으로는 뭔가 맛있는 것이라도 사 먹일 양이었지만, 무엇인가에 쫒기는 듯 집으로 내달았다. 파도소리가 뒤따라왔다. 한강물이 파도쳐 넘실거릴 리가 없는데, 그것은 분명 파도소리였다. 파도소리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다.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바람 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밤새, 그 이튿날도 파도소리가 멎질 않았다. 온 세상이 파도소리로 뒤덮였다. 소리를 막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돌발성난청입니다.

  동네 이비인후과의 나이든 의사의 말이었다.

  보통 한쪽 귀에 이런 일이 오는데, 돌발성난청입니다. 큰 병원에 가셔서, 입원치료를 시작하세요. 응급상황입니다.

  의사는 밀려든 다른 감기환자 치료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큰 병원에 가는 날엔 두 애들이 다 따라나섰다.

  큰 병원에서도 단 한 가지 검사, 그 흔해 빠진 청력검사 하나를 했을 뿐인데, 약간 애송이로 보이는 초진의사 말도 이 질병은 바로 이비인후과의 응급상황이란다, ‘물론 죽고 사는 일’과는 무관하지만. 이런 증상이 언제부터냐, 혹시 다른 병원에서 대강 치료받은 적이 없냐는 등을 두어 번씩 묻고 다짐받고서 그가 하는 말이 진지했다. 돌발성난청은 거의 대부분 노년과 관계없이 이유 없이 찾아들고, 결국 문제는 스트레스일 가능성이 높지만 심지어 1/100 쯤은 뇌종양의 가능성도 있고 또……. 이유야 어떻든 간에 치유되는 확률은 발병 일주일 이내에 시작했을 때에도 1/3 수준이라는 것. ‘난청’이란 듣기 좋은 말이고, ‘청력상실’ 그러니까 귀먹을 확률이 더 높은 질병이란다.

 

  질병이란 단어가 내 남은 귀를 의심케 했다. 내 의식을 흠집 냈다. 또 질병이라면서 치료해도 별 소용없을 수 있다는 말도 이상했다. 절대로 죽을병도 아니면서 치료확률이 절반도 안 되는 질병이라니 진짜 웃겼다.

치료방법은 입원해서 일정기간 강도 높은 스테로이드 주입식이 최선, 다음이 통원치료로서 일정 시간에 귓속에 직접 소량의 스테로이드를 주입하는 방식이란다.

  최선은 지금 입원 하시는 방식입니다!

 

  입원? 방학 잘 지내놓고서 신학년도 개학 첫날 입원하겠다는 말이 나올까? 안 된다, 못한다. 또 갑자기 2주일을 쉬게 되면 담임이며 수업은 어떻게 되는가? 요즈음은 고2도 이미 입시 체제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학기 초 2주 병가는 마음 무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귓속에 약물을 주입하고서 비뚤게 누웠다. 아마 약물이 잘 들어가도록 하는 조치 같았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 느낌이 문제였다.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애들은 입원치료가 마땅한 것이라고 종알거렸다. 은실이 더욱 졸라댔다.

 

  밤이 깊어갈 수록 치료받은 귓속에서 버걱대는 소리는 무서웠다. 파도소리를 넘어 날개달린 벌레가 파닥거리는 소리였다. 바퀴벌레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는가? 겁이 났다. 어색한 미봉책을 다 참고 입원을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입원하러 가는 환자라지만 멀쩡한 사지육신이라 어딘지 어색했다. 아내 보기도 그렇고. 아무튼 보호자가 필요 없는 환자였으니까.

 

  병실은 식구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남게 되자 오히려 호젓함으로 편안했다. 앞 침대의 환자나 병실에 들락거리는 인력들은 관계가 아니어서 편했을까? 방해받는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 신기했다. 그보다는 오른 쪽 세상, 내 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상이 방해였다. 온갖 소리를 섞어서 몇 성부의 음악일는지.

 

  노트북 앞에 앉아 보았다. 학교랑 연결은 되어야지 싶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담임을 떠맡게 된 동료선생님에게도 인사라도 쓰고. 아니, 인터넷이 안 된다. 치료 장비들에 대한 보호라는 미명에 노트북을 쓸 수 없다니. 복도 한 켠 휴게실 구석에 동전 넣고 쓰는 컴퓨터에선 가능하단다. 각종 질병과 환자들로 뒤범벅된 병원에서 공동으로 컴퓨터를 쓰라고? 그래도 이메일 정도는 확인해야겠다 싶어서 컴퓨터 쪽을 기웃거렸더니 두 대 다 젊은이들의 차지였다. 온 세상은 붕붕거리고 머릿속은 혼란하고…….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려 한 시간여를 들락날락하다가 드디어 한 쪽 컴퓨터에 않았지만 웬걸, OO학교를 치려는데 ‘교’자에서 ‘ㅛ’가 들어가지를 않았다. 어찌어찌 홈페이지엔 접속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로그인 이름자에서 ‘ㅗ’자가 먹지를 않았다. 시간은 6분, 7분이 지나는 데도 끄떡없다. 하릴없이 10분이 넘어가자 분통이 터졌다. 사방이 분통 나는 세상이다.

 

  밤이 늦었다 싶었는데 담당의가 간호사실로 불러낸다. 엠아르아이 결과 내 뇌 속은 깨끗하다고 했다. 살았다. 뇌와 혈관이 나이에 비해서 젊다면 젊은 편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는 뇌졸중의 위험은 낮은 사람이다. 혈당이 올라도 혈압은 오르지 않고, 그러니 심근경색으로 죽을 확률도 낮다. 복장이 터져서 복막염 수술을 하게 된다면 몰라도.

 

  치료방식에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을 한다. 스테로이드요법이란, 처음 4일간을 하루 한 번 80mg씩 투여하다가 차츰 줄여나가는 방식이란다. 스테로이드? 그건 간혹 욕심내는 운동선수들의 치팅용 약물 아닌가? 듣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이 끄덕이고 있다가 들어오는데 오른 쪽 세상의 소리는 더욱 자지러진다.

 

 

  진단서를 들여다본다. 그 사이 첫날의 패닉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벌써 며칠 째인가. 진단서가 꼭 필요해서 발급받은 것이다. 정식 병가서류에 첨부해 제출해야하는 서류다.

 

  우측돌발성감각신경성난청. 한국질병번호 H91.2 - 뭐? 91.2 메가헤르츠로 들리네.

  상기환자 상기병증으로 1997년 3월 4일부터 3월 14일까지 입원치료 요함.

  의사 아무개. 동그란 도장/싸인. 네모다란 큰 병원 직인.

 

  나는 그러니까 천천히 주로 왼쪽 귀로 찾아오는 노인성 난청이 아닌, 특수한 난청의 습격으로 입원치료를 요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스테로이드를 팍팍 근육주사로 집어넣는 것은 ‘기’를 올리는 방식이란다. 이명과 관련해서는 타마민이라는 약물을 하루 2회 한 앰플 씩 생리식염수에 혼합하여 혈관에 주사한다. 전에는 피검사나 혈관주사를 맞아야할 때 팔의 혈관이 잡히지 않아 무진 애를 썼는데, 요사인 조금 좋아졌나 보다. 팔에서도 곧잘, 또 여러 번 찌르다보면 손등에 바늘이 꼽힌다. 또 타마민을 주사하는 바늘은 아예 팔 어느 한곳에 심어놓는다. 3일 동안은 그대로 바꾸지 않기 때문에 팔을 뚫리는 고통은 훨씬 줄었다.

 

  물론 주사요법이 만능은 아니다. 약물마다 병발하는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이 스테로이드만 해도 평소 혈당이 높은 환자에게서는 혈당이 급격히 높아지는 문제가 병발한단다. 그것을 인슐린주사로 컨트롤해야하기 때문에 입원이 불가피하단다. 또 1/100 확률이긴 하지만 엠아르아이 검사를 해야 했다고. 왜냐고? 뇌 속의 청신경 주변의 작은 종양이 이러한 돌발성난청을 유발하기도 하는 거란다. 무섭다.

 

  하기는 그 어디에 속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입술에 조금 묻힌 만큼만 손상을 입은 것이다. 조금 우습게 보이면 어떠랴. 행동거지가 너무 바보 같다면 정년을 앞당기면 그만이다.

이제 입원 후의 내 몸은 내가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나는 그저 낮에도 침대에 누운 채 과거의 파편들을 다른 사람 이야기를 읽듯이 되돌아보고 있다. 썩 괜찮은 일들도 많았다.

 

 

  수돗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 있는 것 같은 공동 수돗가였다. 수학여행 중이었다. 화장실은 남녀가 있었지만 세면실은 그렇게 수도꼭지가 앞뒤로 여남은 개 씩 달린 공동수돗가였다. 여중학교에서 남교사들은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그때는 한참 젊을 때였고 교장선생님부터 여자인 교정에서 늘 어색한 기를 못 펴던 때였다. 젊은 수학교사는 담임 우선순위에 들기 때문에 담임을 맡게 되고, 또 담임을 맡다보면 수학여행이 따른다. 그날도 그렇게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입에는 칫솔을 문 채 수돗가 빈자리를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선뜻 내주지는 않는다. 여학생들은 남선생님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줄줄이 세수를 하는 광경은 어찌 보면 너무 적나라했다. 목이며 발이며를 드러내놓고 문질러대는 장면은 자칫 외설스럽기까지 했다. 가능하면 먼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저 끝 수돗가 여자의 동작에 시선이 빨려갔다. 귀를 씻고 있었다. 귀를, 한참 동안을 귀만 문지르고 있었다. 귓바퀴를 위아래로, 귓바퀴를 앞으로 숙이면서 뒷부분을, 귀 안쪽을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귓속을, 귓가를, 다시 귓바퀴를 위아래로, 귓바퀴를 앞으로 숙이면서 뒷부분을, 귀 안쪽을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귓속을, 귓가를.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귀를 만졌다. 귀로 손이 갔다고 하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귀, 귀가 어때서 저리 빡빡 문지르나?

 

  귀가 어때서? 물론 귀도 코만큼은 아니라 해도 돌출부분이니 대충 씻다보면 손에 걸리고 그러면 씻긴다. 하지만 저리 공을 들여서?

 

  귀를 한정 없이 씻던 여자는 얼굴에 비누거품을 내어 박박 문지르기를 한참 하더니 이내 목으로 내려갔다. 가을이라지만 산간의 아침, 추운 공기에 노출되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얄따란 스웨터가 젖어드는지도 모르고 세수에 열중한 여자. 여자의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 깨끗함 그 자체였다.

 

  상대적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의 세계는 더러웠단 말인가! 그랬다, 나는 귓바퀴를 잘 씻지 않고 아내와 함께 잠들었을 나날들이 부끄러워졌다. 그 수학여행 이래로 나는 정말 잘 씻기 시작했다. 귓바퀴만이 아니라 온 얼굴에서 후미진 곳을 찾았다. 팔다리로 나오면 팔꿈치 안쪽, 팔목, 손등, 손가락들 사이, 발가락들 사이, 발가락과 발바닥이 붙는 곳, 발뒤꿈치, 발바닥 움푹한 자리, 복숭아 뼈 아래, 몸속에도 움푹하거나 으슥한 곳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갑자기 온 몸을 후벼 씻는 내가 아내에겐 이상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피우고 들어온 남편들이 집에 들어가서는 늘 씻어댄다는, 그런 속설? 아내는 의심을 키워 갔을까? 의심이 100%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내가 욕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산간 수도꼭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교무실에서는 오른 쪽 비껴 옆으로만 보이는 그녀의 자리를 향하느라 고개가 삘 지경이었고, 운동장 조회시간이면 어떻게든 그녀가 서는 자리가 잘 보이는 곳으로 내 자리를 잡았다.

 

  그 동안에는 왜 한 번도 그녀가 눈에 띄지 않았을까? 미녀도 아닐뿐더러 젊지도 않았고, 여자냄새 없는 그냥 보통 사람 같은, 조금 깐깐해 보이는 것 이상으로는 별다른 특징 없는 아줌마교사. 그녀가 내 눈에 띄었을 리가 없다. 결국 평상시에 단 한 번도 따로는 쳐다보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은 그날 새벽 산간의 수도꼭지 아래에서 내 망막에 입력되고 말았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떨림과 불안과 환희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동 학년을 맡은 ‘우리’는 가끔 가까이 만날 기회가 생겼다. 교무실 내에서의 무심한 접촉 하나에도 전기가 일 줄을 누가 알랴. 무신경해보였던 그녀에게서 감춰진 섬세한 감각을 발견하고서는 얼마나 떨렸던가. 담임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예정이 발표된 그날부터 막혀오는 숨을 고르기가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이상한 행복을 수반했다. 방향이 달라서 택시도 한번 함께 탈 수 없었던 나날들. 무슨 일이었는지, 학기말 성찬이 끝나고 동료들이 하나 둘 술이 취해서 흩어진 어느 날 밤. 추운 겨울 밤. 어려서 한 방에 들 수 없었던 오누이마냥, 어디 한 데 참새구이 집으로 유인한 나를 따라나서 준 그녀. 내 평생 알고 있는 멋진 위인들 인용을 죄다 끌어내어 멋있어 보이고자 했던 처절한 짧은 시간. 그녀는 그렇게 함께 택시를 타고 오고간 시간만을 허락했다. 그녀의 집께 이르러 따라 내리려는 나를 말리며 잠시 내 손등에 얹어준 그녀의 손가락, 다섯 아닌 넷. 아니 짧아서 미처 못 닿은 새끼손가락 빼고 셋. 겨울이어서 차가왔을까? 오싹하리만치 얼어붙어서 꼼짝할 수 없었던 순간. 차가운 그 손가락을 마주잡지 못한 나. 그때부터 나는 내 오른 손 등을 철저히 씻어야할 몸에 넣을 것인지 아닌지 혼란 속에 살게 되었다. 나는 어느 새 오른 손을 덜 쓰는 양손잡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앙상한 손. 밖으로 뻗친 너무 짧은 새끼손가락. 완벽한 샤워. 비누칠이 아까운 오른 손 손등.

 

  그것은 참 길고도 오랜 어쩌면 영원한 이야기가 되었다. 생애에서 어떤 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 영원으로 변해있다고 깨닫게 되면서 나는 가끔씩 감정의 발작을 경험했다. 그해 겨울을 나면서 지독한 열감기에 시달리다 못해 봄방학에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녀가 타교로 전출되던 시기였다.

 

 

  소문은 멀리 빙빙 돌아서야 내게 이르렀다.

  수돗가 선생님이 다른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난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설악산 모퉁이에 이은 참새구이집 기억에 사로잡힌 내가 세상 물정과 담을 쌓고 멍하니 집과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는 진정한 진통의 시절로 들어가고 있었다. 교원이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지 못한, 대부분 타성에 젖었던 우리와 달리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첫 단추에 끼이지 못했고, 조금은 미안한 느낌과 죄스런 마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고칠 것이 기본적으로 산재해 있다는 진단 부분에는 동감했지만, 그것이 노조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천지가 그러거늘,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도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그런 우리는 그 조그만 생활안정으로 마치 기득권 세력에 속한 양, 꼭 그런 붙박이형은 아니라 해도 세상을 뒤바꿀 꿈 따위를 꾸어본 적이 없었던 셈이었다. 좀 더 열심히 좀 더 양심적으로 잘 가르쳐 보자는 것. 입시위주 공부만이 아닌 무엇인가를 더 심어주어야 하리라는 막연한 생각.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자는 정도. 무엇 보다 모든 학생을 평등하게 대한다면! 그런 변명으로 안이해져 버린 세월이었다.

 

  비겁했다. 그 동안 교육현장이 들끓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면 나는 비겁했다. 처음 전교조 결성 과정의 파장에 이어 이듬해 가을에는 조합원 교사들이 천 여 명씩 해직되었다. 그때도 가슴 아픈 한 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외면 한 것이 사실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몇 번씩 오고 가는 동안, 학교 한번 이동하고 거기에 적응하고 하다보면 생이라거나 교육이라거나 원래의 의미 같은 것에 골몰할 시간도 틈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듬해, 해직교사 거의 전원의 복직신청 뉴스와 물려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흘렸다, 나의 그녀인 것을 아무도 모르는 채로.

 

  그 새침데기 선생도 복귀했다는군요!

  누가, 그 새침데기 선생이 언제 해직되었더랬소?

  그걸 몰랐어요, 열성당원이었다던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그 꽁한 성격으로 어찌!

  성격하고 전교조하고 무슨 상관이요! 외려 꽁한 사람들이 거기 많으면 많았지.

  하기는.

  그러니까 삼년을 넘게 해직?

  그랬대요, 그게 공동운명체 아뇨!

  아니, 가정과에서 따로 무슨 참교육을 한다고!

  하기는.

  하기는 말고는 뭔 말이 없소? 아, 고로켄가 카스텔란가 그런 것 안 만들고 이밥에 쇠고깃국 맛있게 끓이는 법 가르치면 안 되겠소!

  이 양반들이, 빈정대기는. 하기는 여자가 시집가믄 밥 맛 좋게 짓는 것이 제일로 중하제요.

  아 거기선 어디 여자더러만 밥을 지으라 하는가요! 남녀평등하고 역할구분도 안하려 드니까 문제지.

  밥이 꼭 역할구분과 관련은 안 되지요, 전 혼자서 밥 잘 짓습니다.

  노총각 박샘이사 욕심에서 그리된 것뿐이고.

  욕심요?

  각시 벌어 먹이자믄 아까워서 혼자 살고.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 일로 이혼까지 갔다니까 그렇죠.

  누가? 아까 그 새침선생말여요?

  암튼, 그것도 시작하면 신앙이 될 거요.

  아무리 그것이 이혼사유가 될까요?

  것도 어찌 보면 이데올로기인데.

  그래요, 살을 섞어도 머리를 섞지 못하면 비극인거라…….

  맘 다른 사람하고 이혼 하지 않고 살면 뭐 하겠소. 더 끔찍하지.

  거 무섭네요.

  그만들 둡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가지고.

 

  1990년대 만해도 이혼율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으니 이혼이 화제감은 되었다. 그 여자가 이혼을 했다고? 이혼을 했구나! 그럼 더구나 복직이 되어야 했겠구나. 그제야 나는 전교조 관련 뉴스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이유에서. 대개 학교마다에 전교조 가입교사들이 있었으니, 조금 관심을 가지면 열성 노조원인 그 여자의 소식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전교조 탈퇴확인서를 쓰라는 정부에 맞서 위원장은 공무원법 준수 각서로 대체하는 조건에서 정부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단안을 내렸고, 교사들은 돌아왔다, 물론 나의 그녀도 함께.

 

  그러나 다시 한 번 같은 학교에서 근무 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았다. 내가 우선 여학교 발령을 원칙적으로 선호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돗가 사건 이후 그녀가 먼저 전근했고, 한 해를 더 근무하고 내가 전근신청을 할 시기부터는 단연 남학교를 택했다. 남자에게 편한 성은 역시 남성임을 절감하면서. 녀석들하고는 수학여행을 떠나도 수돗가에서 서성거리지 않아도 되고, 경이로운 어떤 장면들을 보게 될 일도 없으니 편했다. 삶이 무엇인가, 편한 것이 편한 삶이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제 다시 그녀의 해직과 복직이 화두로 떠돌 때에 이르러서야 잠복성 바이러스가 다시 활동기에 들어갔다. 또 다시 열심히 박박 문질러 씻기가 도졌다. 난 늘 그 수돗물 소리를 듣는다.

 

 

  강박증이 나를 삼켰다. 갑자기 내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지나 않을까 겁이 났다. 가슴통증 때문에 순환기내과를 찾았을 때, 내과의사는 정신신경과를 권했다.

 

  나에게는 어떤 더러운 것에 대한 억압된 생각, 감정 또는 충동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끈덕지게 되풀이하여 의식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경우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책상서랍에 열쇠를 채우고 퇴근하는 길인지 몰라서 다시 교무실에 들르곤 했다는 고백은 나를 강박신경증적 소질이 있는 소심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강박관념에 불안이나 공포가 따르는 것은 병은 아니라는 전제에서도, 나의 경우 남자가 살갗이 벗겨질 정도까지 씻어댄다면 분명 어떤 지우고 싶은, 잊고 싶은 불편한 기억의 방해라는 진단이었다.

 

  천만의 말씀. 나는 사실 내 몸이 청결하지 못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녀와 비교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녀와 비교해서. 상상 속의 그녀와 비교해서. 의사의 말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고민에 빠지게 되는 지적 강박증보다는 순한 놈이라고, 다만 나의 경우는 보통 손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강박신경증과는 달리 온 몸을 씻어대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느냐고.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은 완전한 청결을 유지할 수 없다는 대 전제를 나에게 인식시키고자 오랜 정기적인 상담을 권했다.

 

  그런 주인공들을 문학작품들에서 볼 수 있으셨겠지요?

  무슨?

  강박신경증적 행동의 주인공들 말입니다. 손을 너무 자주 씻는 사람, 또는 문은 제대로 잠갔는지 물은 잘 잠갔는지 나가다가 다시 들어가서 보고 또 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강박신경증 때문에 신경정신과에서 예컨대 그로민을 아침엔 25mg, 저녁엔 60mg 정도는 처방받아 복용중인 사람 말입니다.

  약물처방만 빼고는 제가 바로 그런데요. 남이 봤을 땐 우스워 보이지만 저로선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인도를 걷다보면 제가 무심코 빗금 선을 밟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이런 행동들이 본인 스스로도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행동이라고 인지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중지하려고 하면 심한 불안감을 경험하게 되신다는 거죠!

  예, 제 스스로는 제어할 수 없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초조해지기 때문에…….

  네, 그렇습니다. 그 정도가 생활에 장애가 된다고 느끼셔서 진료상담을 받으러 오신 게지요. 본인 스스로 인지한 것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판단하시는 건가요?

  당연하죠, 비이성적, 그래요, 비이성적 행동인 줄을 알기에 이렇게.

  그렇다면 그런 비이성적 행동을 무시하는 연습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조금 쉽게 해보는 방법으로, 머릿속으로 자신의 다른 자아를 설정해놓고, 이 다른 자아를 진정한 자아라고 간주하시고, 원래의 자아를 별개의 자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이성적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너는 참 이성적인, 비합리적인 녀석이다.”라고 큰소리로 외쳐보는 것입니다. “이런 멍청이야, 너 지금 뭘 하고 있어!” 이렇게 욕을 해보시거나.

  예, 바보 멍청이죠. (단 한 순간도 이 떨림을 말해보지 않은 너. 꿈에도 생각도 해보지 않은 너. 가슴앓이는 당연지사라고 믿고, 뭔가 낌새를 들키는 짓일랑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나서 가장 못난 짓, 몹쓸 짓이라 규정해버린 너. 거짓 평화가 최선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너…….)

  더 심한 모욕도 좋습니다. 만일 효과가 있으려면…….

  네? 꿈의 효과요?

  꿈이라뇨! 꿈 이야기는 드린 적이 없는데요. 선생께선 꿈속에서 불안감이 가중되시는 건가요?

  (아니, 꿈이라면……. 나의 꿈은 무엇이련가!)

  일반인들 가운데 유병률은 2~3%나 되니까 극히 드문 장애는 아니십니다.

  그건 그리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닌데요.

  아니 위안이란 이 경우 본인 스스로……. 그보다 발병 시기가 보통의 경우에 비해서 좀 늦게 나타나신 경우인데…….

  어른들이 걸리는 확률이 낮다 말씀이십니까? 확률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가 만일 강박신경증 환자군에 분류된다면 그건 1/2 확률이지요, 이다, 아니다.

  사실 이 경우 환자들은 대개 학력이나 지능이 높은 수준일 때가 더 많지요.

  지능이 높아서 걸리다니요? 지능을 감별하는 바이러스라?

  선생님도. 바이러스 감염이 아닌 것은 잘 아시면서. 차라리 유전성이라거나 가족성 발병 경향이 높은 셈이죠. 그러니까 가족력으로 미루어 우울증이나 대인공포증 등과 같은 정신과적인 질병이 공존하든가?…….

  그러면 저는…….

  선생께선 안정된 직장이 있으시고, 교사라는 직업 상 아무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실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문제에 대한 통찰력이 있으신 것으로 보아서 분석정신치료로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환경 여건에서 오는 자신의 증세 악화를 인정하면서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으신 것으로 보아서. 참 그런데 감정표현은 잘 하시는 편인가요?

  실은 그것이…….

  감정 표현을 스스로 억제하려는 것, 전형적으로 가부장제 하의 가장증후군입니다.

  가장증후군요?

  하하 농담입니다. 출세지향형이 아니라 해도, 이 시대 가장들께서 흔히 붙들려 계시는 군자삼락 말입니다.

  삼락? 우선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라지만, 어디 양친도 형제도 마음대로…….

  그것도 실은 자괴감을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불효로 돌아가신 것만 같고, 우애를 다하지 못함도 불효인 것만 같고. 그런데 이 시대에 효다 우애다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니지요.

  예? 우애요? (아차, 내겐 유난히 나를 따르던 사촌이 있었지. 친 동기간은 아니라 해도 유일한 동생. 밭둑을 지나다가 무도 쓰윽 뽑아 그냥 옷에다 쓱싹 문지르고 먹던 녀석.)

  남자들이 터놓고 말을 못해 그렇지, 가부장제는 안팎으로 협공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그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근거도 무너지고 있는 것이고. 게다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니 힘에 부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마지막 즐거움은 저절로 누리시겠지만.

  무엇인가 전도된 느낌이었다. 소위 정신과의사 자신이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라 할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정신과의사나 상담치료사는 자신이 말하기보다는 환자의 입을 마음을 열게 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사는 내가 사내 살갗이 닳도록 씻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병을 고쳐줄 뜻이 없어 보였다.

  다른 강박적 행동들을 수반하지 않고, 다만 강박적 씻기라면 중년남자들에게서는 흔치 않습니다. 능욕을 당한 처녀들에게서나 흔히 보이는 과민반응이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서는 병적 증후와 연관될 트라우마가 발견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숨겨진 원인이 이렇듯 애매하다면…….

  숨겨진 원인이 꼭 있어야 합니까?

  원인이 될 수 있을 심적 타격 등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대응기제를 찾아가기가 어렵다고나 할까요. 선생님께서는 혹시 마음속에 멀리…….

 

  중년남자가 혹시 ‘몸을 더럽힌’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눈빛에는 이상하게도 어스름 물기가 아닌 붉은 기름기가 번져 나오는 듯 했다. ‘마음이 더럽게’ 흔들렸으되 몸을 더럽힌 적이 없는 남자는 이곳에서 치유될 수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남자의 마음 흔들림을 상상하지 못하는 남자 의사라!

 

  선생께선 반복적인 손 씻기 이외에도 강박적 행동이 발견되시는지. 예컨대 물건 정돈은 어떠십니까? 정리정돈에 억매이시나요? 대문을 닫고서 의심하고 다시 올라간다거나, 아니, 책의 읽은 부분을 다시 읽고 확인하려는 것, 것보다 과거에는 어떠셨습니까? 학생 시절 시험답안지 같은 것을 제출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확인 또 확인해야…….

  지난 시절에까지 거슬러서요?

  아니, 뭐. 청소년 시절 손톱 물어뜯기 등도 강박행동에 속합니다만. 앞날에 대한 지나친 걱정, 걱정을 이미 걱정하신다거나?

  저는 그러니까 뭐랄까 다른 증상은, 아니 저는 실상 고민이 될 일이……. 그러니까 말씀드릴만한 일이. 해서 이만…….

  아니, 치료를 거부하실 의향이시라면…….

  아니, 제가 급한 다른 일이 생각이 나서. 그럼…….

 

 

 아차, 그럼 그 파도소리는 서러운 강물의 울음이 아니라 귀를 씻는 수돗물 소리였을까? 아니다, 지금은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는 대신에 내일을 생각하려고 한다. 나에게는 어쨌거나 내일이 있다. 아직은 병원에서 맞을 아침이겠지만. 언젠가는 새소리도 들려올 것이다. 어쩌면 벌레소리도.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복도 끝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커피봉지를 쏟아놓고 앉은 참이었다. 어느 녀석이 전화라도 하려나? 휴대전화를 살아있는 귀 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미미한 삐이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이명이거니 했다. 기다리자, 어제 오늘은 이명도 가만히 참고 있으면 더 빨리 잦아든다. 아니? 청각검사실에서 들려준 쇳소리인데 착각인가? 아니다. 그 미세한 불규칙한 것은 쇳소리가 아니라 분명 벌레 우는 소리였다. 살아있어서 불규칙하다. 아직 추운 3월 어느 아침, 내가 아직 벌레소리를 듣는다! 경이에 가까웠다. 1/6 확률을 뚫고 내 귀가 회복되어간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저 벌레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다.

 

  어라? 벌레소리를 따라 무심코 따라간 눈. 그곳엔 수풀도 동산도 아닌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시멘트벽사이에 난 나무문. 그 너머엔 길고긴 복도밖에 없는 병실건물. 벌레소리를 따라 병원복도로 향한 내 엉뚱함은 코미디였다. 청각 따라 방향감각을 잃게 되는가. 더 또 무엇을 잃어갈까.

 

  정말이었다. 내 고개는 창밖이 아닌 복도 쪽 닫힌 문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 쪽 귀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창밖의 나무는 오른 쪽인데, 벌레는 그냥 왼쪽 귀에서 울고 있었다. 내 세상은 이제 모두 왼편이다. 오른 쪽에 몸담고 왼쪽을 동경해온 삶의 귀결이런가. 내 오른 쪽 귀는 더 이상은 오른 쪽 말을 듣지 말라한다. 새가 울어도 벌레가 울어도 그것은 왼쪽 세상이라 한다. 왼쪽 온 세상. 반쪽 온 세상.

 

*

 

  아버지의 공책은 거기서부터는 하얀 여백으로 멈춰 있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남은 귀 하나로 무서움을 타시는 구나. 회갑이란 그런 것인가. 정년이란 그런 것인가. 늙으신 아버지에게 변변한 자식도 없으니…….

 

  드르륵, 어머니가 방문을 여신다.

  어둡지 않아? 불이나 켜고 있지. 아버진 아예 늦으신단다. 건너 온, 저녁 먹자.

  승연이 승주는요?

  빨리도 챙긴다. 아까 승연이가 방문을 열어도 모르고 있더니. 애들은 벌써 먹였지, 시간이 몇 신데.

 

  밥상은 늘 소박하다.

  엄마, 아버진 정문리 가심 맨날 늦으세요?

  낸들 알아. 윤달 앞두고 뭘 궁리하시는지. 느닷없이 부산삼촌 이야길 하시질 않나, 원.

  부산삼촌요?

  그래, 그 왜 부산에서……. 관둬라, 너흰 잘 모른다.

  어머닌 그 이야기를 접으신다. 그리고는 관심의 화살을 내게로 정조준하신다.

  그런데 넌 여태도 달랑 혼자서…….

  엄마, 엄마 나물들 언제나 맛있어요. 나물 맛이 어쩜…….

  나는 부지런히 밥을 먹는 척, 엄마의 화살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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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국제펜광주』 제10호, 2012, 238-260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12. 4. 01:55

 

편지

 

 

                                     베케트의 <행복한 나날들> 중에서 :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 말해버리지요. 할 수 있는 전부를.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죠.”

가을은 은행잎으로 가을입니다.

비가 오거나 아니 오거나.

연구실은 춥지 않으신가요.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을에. 이런 편지를 엿보게 된 나는 궁금증에 참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대 밖에서 진부하게라도 이야기를 꾸며봅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자신의 말 대신 명작의 인용 뒤로 숨습니다. 가을이 되어 날이 춥지 않은지 가벼운 안부가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당신은 연구실이 있는 사람이며, 연구실이 추울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린 사람이며, 그래서 당신을 잃었고,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또 한 가지 사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편지는 아니며 흔히 지금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메일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당신과 그 사람은 이메일주소를 아직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두 사람에게 남아있을 뭔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구실이 있는 사람의 이메일주소라면 그것은 감추고자 하더라도 감춰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의 이메일주소 노출 정도가 관계의 정도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계?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면 정정하렵니다. 그러나 얼마나 먼 관계인가, 얼마나 사무적인 관계인가, 그런 말을 하고자 할 때도 써야 하는 단어가 ‘관계’인 점을 강조하렵니다. 그러면 오해는 풀릴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편지에 답을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봅시다. 당신은 이런 편지를 곧 바로 지워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답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시작하지요. 어쩌면 당신은 이런 편지를 아예 열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보낸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난 일들에 대해서 돌아보는 진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편지의 성격 상 열려버리기도 합니다, 사소한 잘못으로. 여러 개의 편지들 중에서 하필 하나만 남겨져 있다가 우연히 방심한 순간에 마우스의 작동으로 열려버리는 경우 말입니다.

   이 편지는 그래서 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열고 보니 당신의 가슴이 조금 찡합니다. 평상시의 당신의 태도로 보아서 당신이 답을 쓸 리 없음을 아는 사람이 이런 편지를 쓰다니.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묻어나는 편지를 쓰다니. 한 순간, 아주 짧은 한 순간 마음이 닿았더라도, 스쳤더라도, 만남은 만남인 것을. 당신은 그것마저 부인할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만남은 순간이며, 특히 괘도가 다른 직선의 만남은 순간 중의 순간일 뿐임을 누군들 부정합니까? 그래서 아름다운 순간이 정지하기를 바라는 것이 동서고금 남녀노소의 일입니다. 만일 아름다운 순간이 허락된다면 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당신과 같이 이성적이고, 많이 이성적이고, 최고로 이성적인 사람으로서는.

 

   그러므로 당신은 회신이라는 간단한 장치를 뚫어지게 봅니다. 절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답을 쓸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읽지도 않고 지우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음에 스스로 뿌듯해할지도 모릅니다. 이성적인 동안에도 매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충분히 이성적입니다. 이 편지를 더 이상 거기 아이티 세상에 살려두지 않을 만큼 이성적입니다. 간단합니다.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서 편지는 휴지통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전에 어쩌다가 우연히 나의 편지함으로 ‘전달’되어버린 것을. 방해꾼은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휴지통에 쌓인 수많은 쓰레기들 중에 섞여 얼마를 더 연명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당신의 눈앞에 다시 존재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꿈을 꾸는 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편지는 게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꿀 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고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러나 아무 소용없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끝나지 않아도 희망은 끝납니다. 어느 날엔가는 당신이 휴지통을 말끔히 청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편지를 쓴 사람과는 참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잊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비이성적인 순간이 있었음을. 하늘과 바다가 맞닿고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는 절해의 고도. 상상의 자리에서는 당신도 마그마처럼 끓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당신이 이성적인 것은 지나간 순간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서입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훌륭하게도 이성적입니다.

   만일, 만일에 훌륭하게도 이성적인 당신이 조금 흐트러질,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시간이 올까요? 아무리 이성적인 당신도 사람이고, 사람이면 조금 흐트러지는 때가 왜 없을까요? 그래서 당신도 아주 드물게라도 흐트러질 수 있다고 해 봅시다. 물론 이 편지와 관련해서는 이미 편지는 죽어버렸을 때입니다. 그저 전혀 다른 계기로 당신의 몸속에 알코올 성분이 많아졌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인위적으로 이성의 자리를 감성이 꿰찬 겁니다. 아니, 감성이 당신을 송두리째 꿰찼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지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조금 상스럽게 들릴 테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고쳐봅시다, 감성이 우위를 점한 때.

   당신에게서 감성이 우위를 점할 때는 드문 일입니다. 그래도 가능한 일입니다. 당신도 사람이니까요. 원래도 감성을 이성으로 누른, 실은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사람이고 보니, 어느 날엔가는 감성이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니까요.

 

   그럼 이제 한번 편지를 쓴 사람을 떠올려 보시지요.

   그(녀)는 - 이렇게 굳이 괄호 속에 (녀)를 쓰는 이유는 누구의 성별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소심 때문이니, 당신도 또는 독자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로 왔습니까? 이 표현은 다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왔다는 말은 옳지 않겠지요? 어디까지나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오게 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의지가 없었을 때 그(녀)가 당신에게로 왔을 리가 없는 이유는 압니다. 당신은 누군가가 오는 것을 그냥 허용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혹은 그 순간, 당신이 찰나에 감상적이 된 때문이었겠지요?

   어쩌다가? 어쩌다가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무래도 어떤 외부적인 힘이 작용했겠지요? 말하자면 있었던 것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야 마는 자연 법칙 같은 것. 우리가 잊거나 잊으려 한다고 해도 한번 태어난 것은 사라지지 않지요. 우리가, 생명체가 한번 태어나면 그것이 죽어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성분은 어떤 형태든 모양이든 찌그러들 대로 찌그러들어도 썩어서도 어딘가에 남아있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예컨대 한 겨울 바닷가의 눈물 같은 것도 볼의 열기 때문에, 닦아준 손수건에 적셔져서, 또는 덮어버린 입술에 묻혀서, 아무튼 어떻게든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 녹아들어 남게 되지요.

 

   나는 이제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녀)가 갔습니다. 떠났다는 말입니다. 겨울은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하더니, 그때 정말 겨울에 떠났습니다. 유언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겠죠. 물론 지병으로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들이 아닌 바에야 누가 얼마나 유언을 남기나요? 어쨌거나 어느 출판사에서 기획한 책자에 <미리 쓰는 묘비명> 비슷한 코너에 보낸 글이 남았습니다. 물론 보낸 것 보다 더 길게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답니다. 연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여기에 마저 그 편지의 계속이라고 치부하고 읽어보겠습니다.

 

 

 

   마그마를 향하여

 

   은행잎 우수수 지는 어느 늦은 오후.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라는 문자를 보내 왔다. 선배 문우께서.

   아, 그런 오후이면 잠들기 좋은 시간 아닌가.

   비가 내린다면 빗물에 젖은 은행잎 따라 흘러가기 좋을 것이다.

   발길에 찢기어도 여전히 노란 은행잎 부스러기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들기 좋을 것이다.

   그들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아래로 아래로 어디까지 가는가.

   우리는 지표를 뚫고 아래로 아래로 스며들 것이다.

   몸과 맘 모든 속성들을 끌고 아래로 아래로 간다.

   속성들은 원자와 분자가 되어 밀고 당기고 마그마에 섞일 것이다.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마그마 속에 한데 섞이어

   몸도 맘도 초월한 마그마가 되어 흐를 것이다.

 

 

   마그마 - 얼마나 뜨거우면 돌덩이가 녹을까.

   얼마나 녹아서 ‘돌물’이 되어 흐를까.

   지각 바로 아래 외핵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암석층 맨틀에 이르기는 할까.

   아니, 맨틀 최상부의 섭씨 100도를 견디기나 할까.

   맨틀의 대류는 혼돈 과정. 내핵은 고체이고, 외핵은 액체이며, 맨틀은 가소성 고체라.

   지구 표면에서는 낮은 온도로 고체이던 광물질들이 마그마에 이르면 소용없다.

   암석 농축액 마그마, 그 속에 섞인 은행잎 부스러기들은 설마 불순물일까.

   마그마에 섞여 녹으면 지표면의 일들을 기억이나 할까.

   몸을 기억하지 못해도 맘도 잊을까.

   몸은 형체가 사라진다.

   맘은 무엇이 사라질까.

 

 

   몸은 실존의 현장이었다, 인간이면 예외 없이.

   겨울의 나무 - 길고 부실한 몸은 용적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첫아이라서 아이는 버리고 태만 주어다 길렀나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자라났다.

   좋아하는 움직임,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것들…… 있었을까?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탐한 적이 있었을까?

 

 

   단연 아니었다.

   손을 뻗치면 무엇이건 다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바보같이.

   준비성 만점의 (외)할머니는 욕구의 싹이 자랄 틈을 내주시지 않았나 보다.

   할머니가 엄마였다. 어머니는 우리랑 함께 할머니의 딸이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일찍 학교에 보냈다.

   네 살 때 벌써 문전옥답 값으로 가죽 란도셀 가방과 호랑이(?) 모피코트를 준비해놓으셨다 했다.

   그것들을 맸거나 입었던 기억은 없어도 작은 모피코트가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천리 길 먼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내가 부모자리가 되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할머니의 아기였다.

 

 

   맘은 늘 아기는 아니었다.

   물병자리 B형. 천성적으로 집단과 강요에 약한 고립적 고집적 마음의 소유자.

   체육시간 내내 벤치에 머물며, 소외되어, 마음은 오히려 일찍 성장했다.

   성장? 한껏 조숙하여 개똥철학에 기울었다.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시를 썼다. 첫 발표는 「무제」.

   가소롭게도 인생은 주제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표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건방짐이 오래 갔다.

  

 

   농축된 시를 쓸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유트릴로의 하늘을 따라 그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절대음감으로 피아노를 두드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책 속에 정신이 있다고 믿었다. 재능과 달리 읽으면 되는 것이 책이라고.

   책이 유일무이한 벗이었다.

   책들은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거기에 존재했고, 나는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그들과 노닐었다.

   단조로움 속에 단정한 삶이 있다고 믿었다.

   희로애락은 장신구일 터였다.

   장신구는 있어 좋기도 하고 있으면 불편하기도 한 존재가 아닌가.

 

 

   정신에 집중하기를 소망했다.

   육신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그 둘이 똑같은 비율로 섞이지 않을 것이므로.

   더 정신으로 뭉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니까.

   정신은 날개 없이도 한없이 날 수 있을 것이니까.

   어디로? 목적은 없었다.

   목적을 초월할 수 있음을 우수한 자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구체적 목적에 들린 삶을 조금은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목표지향적 삶을, 욕망이 많은 삶을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조금 안쓰러워했다. 건방지게.

 

 

   내 맘은 내 정신은 강했다고 믿었다.

   내 맘은 내 정신은 상처입지 않았다고 믿었다.

   내 상처를 두려워하여 행여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겁을 먹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구나.

 

 

   예 - 참 어려운 단어였다.

   함께 가자 하면, 예 하고 서두르지 못했다.

   확신이 안 선다는 생각에 더듬거리기만 했다.

   효, 우애, 우정과 사랑의 이름으로도 누군가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으니, 애국애족은 언감생심.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엉터리 산수를 믿지 않았다.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둘이 정직한 답이다.

   아니 넷일 수 있다는 상상을 더 신뢰했다.

   왜? 원래 하나의 마음도 늘 하나가 아니니까, 적어도 둘씩이니까.

  

   마음은 늘 갈래였다. 누구의 마음인들 그러지 않았을까. 동시에 둘을 원하기는 오히려 어려웠다. 직장을 쉬이 갈아 치운 것만 보아도 드러난다.

   한번은 다 놓고 소설만을 쓰겠다고 작정하기도 했다.

   그랬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문학작품들을 파먹고 산 세월 동안, 손가락이 하이에나의 그것들처럼 넷으로 변하고 꼬리가 돋는 기분에 소스라쳐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여러 주제를 섞어 담은 장편 출판을 계기로 어정쩡 소설가가 되었다. 시를 쓰는 젊은 선배는 소설 다섯 편을 쓸 이야기를 한 데 엮어 넣었다고 ‘비경제성’을 탓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적어도 한참 동안 무엇인가로 쏠렸다. 다른 것들을 다 잊었다. 그러다 식었다. 다른 무엇인가로 한참동안 쏠렸다. 그러다 식었다. 오래 식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식을 것이다. 아니, 이제는 시간이 없다.

 

 

   아니오 - 참 어려운 단어였다.

   비가 내리면, 아니오 하고 우산을 쓰거나 집안으로 뛰어들 만큼 신속하지 못했다. 비는 내리면 맞는 법. 사람의 마음도 어쩔 수 없다. 오는 색으로 맞는 법. 비도, 사람의 마음도, 자연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자연을 신앙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아래로 아래로 간다.

   마그마를 향하여 간다.

   뜨거운 돌물은 나의 레테의 강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남아 있던 글입니다.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그(녀)에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으니,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만 묘비명이란 단어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터, 무명 소설가에게는 사치스러운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인간적으로 문학적으로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문자를 받았더랍니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답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그(녀)는 왠지 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고 했습니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막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진다고. 그(녀)는 ‘너절한 연습’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어느 가을날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라도 만날 수 있는, 만나고 싶은 마음들이라면, 대기 속 보다는 땅속을 꿈꾸는 것이 소박할 것이라고.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하늘보다는 땅의 그런 이미지가 우리의 미래(?)에 어울린다.

 

 

   마지막 인터뷰

 

   어떻습니까? 이 묘비명의 어딘가에 편지처럼 당신에게로 뻗는 촉수가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조금은 부담이 되시려는지요? 아니, 그거야 모를 일입니다. 책임이 없다면 누구는 어떤 일에서든 자유로울 수 있는 법입니다. 꿈을 꾸는 건 꿈꾸는 사람의 자유이겠지만, 꿈의 대상은 억울할까요? 예,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억울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아는 한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언뜻 무뚝뚝했습니다.

   - 어떤 때에는 타협이 어려웠고요.

   - 많이 정직한 편이었어요.

   - 보기보다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수식어를 줄이고 말해봅시다.

   - 무뚝뚝했습니다.

   - 타협이 어려웠고요.

   - 정직한 편이었어요.

   -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덧붙일 말이 떠오르겠지요?

   - 괴팍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 타고난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치곤 했습니다.

 

   정말 그뿐입니까?

   - 순수? 바보처럼 늘 뭔가에 골몰했던 것 같아요. 그만 하시죠.

 

   아니, 하나만 더. 미안합니다. 제가 좀이 쑤셔서 그만. 골몰했다 하시면 집착 같은 것입니까?

   - 표현에 따라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굳이 말하면 긍정적인 집착, 적어도 타인에게는 긍정적인 집착으로 나타났지요. 그게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편이었지요. 자신의 잘못, 부족함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매달렸으니까요. 상대가 무슨 말을 못했지요.

 

   마지막으로, 당신과 그(녀)의 벤다이어그램을 상정한다면 어떤 형식이었나요?

   - 벤다이어그램? 참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집합이라, 합집합의 크기가 커지려면 교집합은 작을수록, 아니, 합집합을 생각할 게제는 아니었지요? 그렇다면 교집합을 키웠나? 그것은 더욱 어불성설, 두 개의 자아 중 하나가 죽지 않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의 세계인 것을.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 아니, 나는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을 잘 참을 뿐 아니라 오히려 희망했습니다. 그(녀)가 상대적으로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왜들 가벼움을 탓하나요? 이 지상의 억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존재가 왜 무거워야 합니까? 가벼울수록, 깃털처럼 가벼울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부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음을 당신의 위트와 유머와 센스와 아이러니와 패러디와 리듬과 심지어 즐겨 쓰시는 모순어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느꼈습니다. 지금도 느낍니다. 수사학에서 탁월한 당신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여 ‘달콤한 이별’이라 하시렵니까? 아예 오비디우스를 빗대어 ‘이 충만이 나를 가난케 하였도다!’라고 응수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인가 감정이 충만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은 이성의 가난이었나요?

 

   당신 : 바람 불면 은행잎 우수수 져서

   그(녀) : 당신이 스틱스 강을 말할 때에도

   당신 : 어딘 가로 씻겨 내려갈 것 아니오?

   그(녀) : 나는 그것을 암호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 내려가다 썩든가

   그(녀) : 나는 차라리 레테의 강을 믿습니다.

   당신 : 썩은 물이 어딘 가로 흘러 들어가

   그(녀) : 많은 것은 잊히는 것이라고.

   당신 : 스며들어가

   그(녀) :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들이

   당신 : 지구 복판의 마그마가 끓고 있는 곳에서

   그(녀) : 무엇인가가 지나면

   당신 : 한 조각 성분이 되어서라도

   그(녀) : 그 끝이 좋았던 고통스러웠던

   당신 : 그렇게라도 만날 것 아니오?

   그(녀) : 언젠가는 거의 잊혀진다고.

 

 

   벌써 끝나가는 이야기이군요.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고 그(녀)는 그(녀)의 말을 했습니다그려. 늘 그랬습니까?

   -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제 말만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당신은 추억에 잠깁니다. 어느 바닷가에서 밤을 지새우던 때를 불러봅니다.

   어느 바닷가. 둥지 틀고 사는 곳에서 260km 또는 450km 쯤 움직인 곳.

   싸구려 불빛에 드러난 군상. 따닥따닥 붙어있는 횟집과 손님을 불러대는 아주머니의 앞치마. 부엌의 행주치마가 아닌 돈주머니. 돈주머니들은 제법 불룩하다. 임신하기에는 늙은 여자들의 부풀어 오른 배 위에서 더 부풀러 보이는 돈주머니 앞치마. 앞서 지나간 손님들의 때 묻는 돈, 그 때 묻은 돈에서 옮겨간 인생의 때로 뒤범벅되어 갑옷처럼 무장된 돈 통.

   일행은 예닐곱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한다. 중요하지도 않은 말들만.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 중요하다. 적당한 간격의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시간을 죽이려고 할 때.

   왜 시간을 죽여야 하는가. 공적인 일들이 끝나면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 푹푹 씻고 건강한 잠을 자면 그만인 것을. 그 편이 다음날의 진행에도 합당하다. 그런데 왜 바닷가를 서성이며 시간을 죽이려드는가. 할 말도 없으니 말을 못하고, 할 말이 있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누구도 누구에게서라도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바닷가 부둣가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내가 이전에 여기 유명한 어시장을 갔더랬어요. 어부인이 워낙 생선을 좋아하니까 사가지고 갈까 했었지요. 아니, 아예 돌아오는 길에 어시장엘 다녀오라는 엄명이 떨어졌지요. 해서 시장을 갔었죠. 그런데 아짐씨들이 앉아서 영락없이 붓칠을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아예 노란 페인트칠을, 생선에다가. 멍하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 아짐씨 말이 뭐랬는지 참.

   뭘 보냐고 퉁이나 맞으셨지요?

   퉁만 맞은 게 아니라 혼이 났지요. 아자씨, 집에 아지메는 화장 안하나? 야들도 화장을 곱게 해야 시집을 잘 가는 기지, 이러는 겁니다. 노오란 물색으로 맛있어 보이는 조기가 화장발이라니. 그 다음부터는 조기매운탕 맛이 확 가버리더군요.

   참 섬세하시기는. 그게 어디 오늘 하루 이틀 일이던가요.

   조기 장사는 조기를 속이고, 고춧가루 장사는 고춧가루를 속이지요. 일가 형님이 시골서 그대로 터 잡고 사는데, 글쎄 고추 다듬고 밭두둑에 아무렇게나 버려둔 고추꼭지를 밤 새 실어 가버린다고 합디다. 그걸 어디에다 쓸 것이요, 참. 그러니 누가 고춧가루를 믿고 사 먹을 수 있나요. 그러다 중국물건이 싸고 이문이 난다 싶으니까, 깨 있지요? 야무진 주부들이 시골에 가서 깨를 사가지고 와서 의기양양 하는 것도 다 헛것이라.

   직접 시골에 가서 사도?

   그러니까 깨를 털기 전에, 깨를 터는 것이 무엇인지나 아시오? 깨를 털기 전에 아예 덕석 에다 중국산을 쫘악 깔아놓고 그 위에서 깻대를 턴다는데 말 다했지요. 온 동네가, 다시 말하면 온 나라가 그러는데, 혼자서 순수히 자기 밭에서 난 깨만 팔고 있으면 바보 되는 느낌이라서 별 수 없다지 않소. 불 보듯 뻔한 손해인데다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농촌 사람 야단 못하지요. 서로 속이고 속는 것인데. 요즈음엔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흔치 않다가 가을걷이할 때나 더러 드나든다는군요, 쌀도 실어가고 뭐 그런 정도. 헌데 시골 노인들이 다른 집 자식들을 알고 지내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긴다더라고요. 옛날엔 뉘 집 자식 할 것 없이 누가 하나라도 오면 온 동네가 다 나서서 반겼고, 또 젊은이들도 으레 동네 인사 할 줄 알고 그랬는데. 아무튼 형님네 시골에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가을걷이해서 쌓아둔 나락가마니를 통째로 실어 가버렸다지 뭐요. 저쪽에 젊은이가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 싣는 것을 노인정에 앉아서 먼발치로 본 노인이 있었다지만, 그 노인 생각으로 저리 천연스럽게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를 실어내니까 그 집 자식이나 되나보다 그랬다지 뭡니까.

   아무리 그런다고 참 노인네도! 어르신이라요, 할머니라요?

물어보나 마나지요. 할머니들이 혼자 노인정에 앉아있기를 하나요? 잔손가는 일이든 어디로든 몰려다니지. 칠십 줄 안 넘은 할아버지가 그랬답니다. 아파서, 병중이라 시들시들하기도 했더래요. 요즘 시골에도 암환자들이 많은 걸 보면 공기 좋은 시골이 별 노릇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시골도 음식들이 개화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아니,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요. 한번은 사라질.

 

 

   그렇게 당신은 그 밤의 대화에 끼었습니다.

   한번은 사라질.

   마치 생사의 암투에서 해방된 초연한 느낌을 주며 좌중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좌중이라야 어느새 대여섯으로 줄었습니다만. 이제 모두들 당신의 입만 쳐다봅니다. 당신의 개입으로 진부한 어시장 놀음이나 가을걷이 도둑 이야기에서 삶과 죽음으로 이야기의 차원이 바뀌었으니까요. 당신은 처음엔 모르는 척 입을 다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실은 언제나 철학을 시작하곤 하는 당신을 알아보고 있었으니까요. 해서 당신은 그날 밤의 강연(?)을 하게 됩니다.

 

 

   오늘 그것을 되풀이하실 의향은 없으신 거지요? 간략하게라도?

   - 그럼요. 기억도 못합니다. 강연이라니, 그저 알코올 기운에 떠들어댄 개똥철학이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날 밤의 강연(?)에서 당신의 영혼과 그(녀) 그것이 불꽃 튀는 접속을…….

   - 그만, 그만 하시죠. 순간은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때는 순간은 영원이 되어버린다고도 했고. 늘 말이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매 순간의 영원성 운운하면, 헤세가 쓴 『싯달타』에서도 나왔던 말 같습니다만. 삶마다의 불멸성과 더불어.

   - 예,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완전히 새 말을 합니까? 세상 어디에 새로운 주제가 있답니까? 쪽지 한 장에 매달리시는 댁은…….

   죄송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제가 하는 쪽이라서. 제 역할이 질문 쪽이라서…….

   - 예, 뭐. 그렇다고 제가 답변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죄송하지만 처음 주제에 한해서만큼은.

   - 주제가 있었나요? 도대체 인생에 주제가…….

   자 그럼, 그(녀)는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서 떠났습니까? 이 표현은 정말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떠났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버렸습니다.

   - (침묵)

   그럼 당신은 왜 그(녀)를 단호하게 자르셨습니까?

   - (침묵)

   당신이 침묵하더라도, 몇 백 년을 침묵하더라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녀)가 이 편지에 쓴 대로,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는데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말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물론 당신의 침묵이 그(녀)를 질식시켜서 스스로 단념했다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 (침묵)

   하긴 다시 이런 편지를 보냈다면 그 단념이라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군요.

   - (침묵)

   예, 이 편지의 답이 침묵인 것을 알았습니다. 진즉에 알고서도 궁금했습니다. 가펑클의 노래를 들어 ‘침묵의 소리’를 실현하시는 군요.

 

 

 

   여기까지입니다. 우연히 엿보게 된 이 편지와 관련해서 뭔가 의미심장한 주제를 끌어내볼까 혹했던 나는 여기서 단념했습니다. 그러면서 침묵이 얼마나 위대한 무기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빼앗겼거나, 아니 조금이라도 설레었거나 하는 정도만으로도 마음 졸이는 상대였다면 그런 무기가 치명상을 입히고도 남았으리라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편지의 수인인은 참으로 말을 아끼는 수준 높은 인격자였습니다. 그것이 내가 알아낸 전부입니다.

   고백하건대, 이야기를 창작하는 대신 누군가에게서 뭔가 실마리를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 애초에 틀렸습니다. 편지 한 마디를 실마리로 하여 쉽게 정신적 투쟁의 흔적 같은 것을 꺼내보려고 했으니. 본격적인 글쟁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음을 느낍니다.

   대신에 조금이나마 배운 것도 있습니다. 물론 사전적으로야 ‘이성’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 정의되고,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더이다. 거기까진 통상 알고 있는 것이지만, 유독 그것을 가리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할 때 늘 고개가 기웃거려졌지요. 그 의심을 이제 확신해도 될 듯합니다. ‘감성’이 ‘이성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외계의 대상을 오관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고 정의되면, 처음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감성과 이성의 대응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립개념이 아니라 충돌개념이라는 것. 두 단어를 함께 쓰는 일에는 뭐랄까 물리적 이항이 아니라 화학적인 얽힘으로 폭발성이 내재되어 있으리라는 것. 비슷하게 감성과 이성을 나누어 가졌을 두 사람의 경우에도 어떤 쏠림 현상 때문에 한 사람은 폭발해 버릴 수도, 다른 한 사람은 건재할 수 있으리라는 것. 미션이 가득한 영화에서, 폭발 직전 몇 초를 남기고 뇌관이 제거되는 폭약처럼. 그러니까 폭발 여부는 순전히 에이전트의 활약 덕택입니다. 이 때 에이전트의 이름은 언제나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최후의 보루는 이성이다? 그러한가 봅니다. 그런 것을 배웠습니다.

 

   아차, 덧붙일 말이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도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을 강조한 책을 공유합니다. 아까 당신이라고 지칭된 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 서가를 슬쩍 훔쳐보았거든요. 그리고 편지를 쓴 그(녀)의 다른 노트에서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이란 지적 정체성과 변화의 요구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메모를 본 적이 있었답니다. 그 책이 출간되었던 1996년에 - 아니, 훨씬 이후라야 되겠지요, 여태껏 그런 마음이 지속될 리는 없을 테니까요 - 누군가 누군가에게 그 책을 선물했음직하다. 어쩌면 ‘당신’ 쪽이. 간접적 이별의 통고로서. 감성 따위를 극복하련다는 통고 같은 것. 그런 경우 이성은 잔인성의 비슷한말이 되겠습니다그려. 호모 사피엔스의 독재. 물론, ‘당신’ 쪽의 철학에 얼마만큼 동조할 것인지는 좀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편지가 영영 사라져버린 데 대한 쓸쓸함을 반추할 길은 없으면서 여전히 자꾸 그쪽으로 내 마음이 적시어지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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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세계』 통권 221호, 도서출판 천우, 2012.12.1. 211-226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4. 19. 10:48

은실

 

 

『PEN문학』2012 5,6월호(통권 108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146-165쪽.

 

 

 

  은실이 거의 울고 있었다.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은실은 내 바로 손아래 동생이고, 딸 뿐인 집안에서 아버지 어머니랑 함께 사는 효녀다. 사람 좋은 제부 덕에 그만할 것이었다. 그런 은실이 전화 저 쪽에서 말을 잇지 못한다.

  언니, 어쩜 좋아.

  왜, 왜 그러는데? 아버지가 안 좋으셔? 아님 엄마가?

  아니, 승연아빠가, 승연아빠가 그래. 무서워 죽겠어. 지금 병원에 있어.

  뭐야, 이 밤에? 그럼 입원한 거야? 왜? 그리 단단한 사람이?

  강단은 무슨. 조용했지, 그냥.

  그래, 조용했던 사람이 왜? 어디가 아파서? 무슨 병이냐니까?

  모르겠어.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아. 아무 상관없는 말들을 계속 내뱉고 있어. 기계처럼. 무서워 죽겠어.

  뭐라 그러는데?

  병원에서 그대로 입원시켜놓고 집에 연락을 했다니까. 해서 그냥 쫒아왔어.

  병원에서 바로 입원을?

  그래, 옆방 놀이치료실 여선생이 퇴근하려다가 들여다보았었대. 검사시간은 벌써 끝났는데 안에서 소리가 나서. 승연아빠가 검사실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더래. 얼마나 놀랐겠어!

  뭐야?

  치료실 선생이 김샘, 김샘을 아무리 불러도 안 되니까 이비인후과 진료실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왔대.

  뭐야, 그럼 정신이 나간 거야?

  뭐 그런 거 비슷하대나 봐. 한 박사야, 나 무서워.

  거기서 한 박사는. 그래 언니가 일단 올라갈게. 낼 일찍 출발해도 한낮이 다 되겠지 뭐.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계셔?

  자세히는 말씀 안 드렸어. 어지럼증으로 퇴근 못 하고 그냥 병원에 있다고 둘러댔어. 물론 의아해하시지, 언제 아파 누운 사람이었어? 링거 꼽고 누워있으니 병원 가서 함께 있겠다고 왔지 뭐.

  제부네 집은? 누님이랑 형님이랑?

  나 좀 봐. 어머나 몇 시야, 더 늦기 전에 거기 먼저 연락해야지. 끊어, 끊어!

 

 

  은실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제부네 쪽에 연락도 않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은 그냥 본능이었을 것이다. 제 일이니까 제 언니에게! 그만큼 남편의 일과 자신의 일을 동일시 한다는 뜻에서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지금쯤 제부네 집에선 얼마나 놀랐을까. 거긴 부모님이 안 계시고 큰형이 아버지 같은 집안이라 했다. 자세히는 내 머리 속에 없다.

  달력을 올려다본다. 낼 올라가면 월요일까지는 괜찮다. 아침 일찍 서둘러 갈 생각으로 미리 간단한 짐을 챙겨둔다.

 

 

  봄은 봄인데 우중충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 같다. 나서다 말고 다시 현관문을 열고 구석의 우산을 구겨 넣는다. 살 하나가 잘 굽지 않는다. 은실은 비뚤어진 우산을 보면 칠칠맞다고 핀잔일 것이다. 한길에 나서자 물주전자를 내려놓았는지 가스를 잠갔는지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다시 집으로 향한다. 내 방이 화재에 휩싸이는 것도 문제지만, 방화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옆방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흠집 내서야 되겠는가.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성가시기도 하다. 무늬가 짝짝이 다른 양말이 눈에 들어와서 미소가 나온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양말이라고 해서 꼭 아름다울 리는 없다. 나는 괜찮다, 조금 다른 무늬의 짝짝이 양말이. 무늬도 다른 양말이 싸지도 않네, 라고 하던 은실이 생각났다.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생산가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은실은 웃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일부러 다른 무늬로 짜면서 경제성으로 그랬다고 하지는 않겠지, 하면서.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 동생이 그냥 언니보다 더 언니 같아지나 보다.

 

 

  제부가 근무하는, 아니 지금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려면 평택에 내려서도 근 한 시간을 이동한다. 집이 더 가깝지만 방향이 다르다. 짐이 짐스럽다. 이래서 사람들이 장거리운전을 마다하지 않는지 모른다. 병원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버스에서 내렸지만 건물에 들어설 즈음에는 사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긴 시간 기차에 버스에 시달려서이기도 하겠지만, 병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겁이 난 탓이리라.

 

  저, 청력검사실 김 선생님이 입원하신 곳이 어딘가요?

안내에선 청력검사실 김 선생님을 잘 몰랐다. 이름 석 자를 대고서야 안내 받은 곳은 그냥 이비인후과 병동이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귀에 문제가 있다면 그리 대순가? 일단 병원 밖의 일반인들은 이비인후과라면 조금 안심을 하게 된다. 안과라고만 해도 만에 하나 실명에 이를 병도 있어 무섭지만, 귀머거리가 된들 좀 어떠랴,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다.

 

  병동 간호사는 내가 처형이라는 말에 다소 놀란다.

  김샘이 우선 우리 병동에 계시긴 한데, 지금 들어가시기가 좀 뭣하신데요.

  예?

  놀라실까봐서요. 계속 헛소리를 하다 잠들다…….

  그렇담 간호사님 말씀을 들어야겠지요 뭐. 그런데 어쩌다가?

  모르세요? 어제 퇴근 무렵에…….

  간호사는 소리를 낮춘다.

  어제 퇴근시간에 놀이치료실 민샘이 첨 발견했대요. 검사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중얼중얼, 암튼 모두가 놀랐대요. 일단 병동에 입원해 놓고 밤엔 응급검사 몇 가지만 했고, 오늘은 보자, 지금 정신과 쪽에서 검사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피.에이.아이도 할 수 없는 상태고.

  그게 뭡니까?

  네, 성격심리검사 종류요, 그런 것이 기본인데 한 시간 쯤을 조용히 검사를 못 하죠 아직은. 그게 디.에스.엠 - 그게 혹시 정신질환 진단 관련해서요.

  어쩌나. 식사는 제대로 하나요?

  그럼 좋게요. 링거 들어가는데, 안정제랑 함께죠, 지금 다이아제팜 10미리그람 맞고 잠들었을 걸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던 나는 결국 복도 한쪽 휴게공간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은실에게 도착했다고 전화를 해야 될 일이었다. 배낭을 내려놓으니 일단 좀 시원했다. 전화기는 속 어딘가로 들어가서 얼른 잡히질 않았다. 그 사이 은실이 전화가 세 번이나 걸려와 있었는데 몰랐다. 기차에서 진동으로 바꾸어 놓은 때문이었다.

 

  나야, 언니. 병원에 왔어. 왜 승연아빠 혼자 있어?

  일단 아침 회진까지 보고 잠깐 집에 왔지. 며칠이나 걸릴지, 챙겨 갈 것도 있어서. 승연아빤 어쩌고 있어?

  병실에 못 들어갔어. 간호사가 들어가지 말래. 자다 말다 혼란스러워 한다고. 아직 검사들도 안 끝난 모양이야.

  그럼 어쩌나. 언니, 나 곧 출발 하니까 언닌 집에 와. 와서 아부지 어머니 보고 갈 거지?

  그래.

  암튼 언닌 집으로 와. 승연이 승주 좀 봐 줘. 언니, 일감 가지고 왔지, 노트북이랑?

  왜, 일감은?

  빨리 내려갈까 봐서 그러지, 며칠 좀 있어! 그럴 거지?

  우선 여기 있어 볼게, 천천히 와.

 

  휴게공간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개그프로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에겐 다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할 수 없이 병원건물 밖으로 나가볼까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구내식당 같은 데 식사는 끝났을 것 같았다. 뭔가 뜨겁고 물기 있고 매운 것을 먹고 싶은데. 왜 이런 순간에 시장기가 밀려오는지. 가끔 이렇게 느닷없이.

 

 

 

  혼자 살아온 시간들이 통째로 시장기로 몰려오면 기억은 늘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무슨 생각으로 이역만리 공부를 향해 돌진했을까. 무슨 자랑이라고 외국문학의 박사가 된다는 것에 청춘을 걸었을까.

  외환위기의 봄. 졸업식을 앞둔 겨울, 책에서만 배웠던 국제통화기금이 실체로 다가왔다. 아이.엠.에프 위기. 사람들은 장롱에 넣어두었던 금반지들을 내다 팔았다. 그보다 앞서 재미교포들이 달러를 모아 보내오기 시작했단다. 놀라운 애국애족이었다. 난 아니었다.

  세상은 안팎으로 흉흉했다. 그 한해도 뉴스는 온갖 죽음들을 날랐었다. 여름에는 대한항공이 괌에서 추락했다. 200명도 넘게 순간에 그냥 변을 당했다. 베트남항공이 뒤따랐다. 작은 비행기였던 것이 그나마 다행, 한국인도 있었다. 그 사이 세기적인 교통사고가 있어 떠들썩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 37세로 굵고 짧게 살다간 영국여자의 최후가 된 파리의 터널은?

 

  그 겨울 나는 파리를 향해 진력하고 있었다. 사실이지 도망갈 궁리를 했다. 우선 재수마저 시들시들 실패한 은실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컸다. 우리는 마주앉아도 말이 겉돌았다. 떠날 구실도 좋았다. 대학졸업장은 은실에겐 미안함이었고, 사회엔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으니까. 영문과 부전공을 했던 친구들은 예상 밖으로 입지가 넓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전격적으로 영어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영어 세상이 점점 더 확실해졌다. 그러니까 멋모르고 다른 부전공을 하지 않았던 내 불어교사 2급자격증은 별 쓸모가 없었다. 임용고시에 아예 불어과는 없었으니까. 더러 사립학교에 원서를 넣어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용기를 낼 이유가 있어야 했다. 나한테는 용기가 없었겠지만, 이유도 없었다.

  봄이 되자 꿈틀거렸다. 그동안 공들였던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내게 곧바른 길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도 대학원 진학이 틀어졌으니 일단 파리 행이 낫겠다고 하셨다. 언제까지가 상현달 인생이었을까? 아니, 조금 뒤까지도 달은 자라나고 있었을까? 손에 묻은 크루아상의 기름기를 닦고 또 닦으면서, 바게트 부스러기를 줍고 또 주우면서, 그렇게 살면서 느꼈던 허기, 시장기 속에서도.

 

 

  그때의 허기는 비단 위장의 시장기만은 아니었다. 쥬 느 꽁프랑 빠, 쥬 느 쌔 빠 - 프랑스 말 잘 못한다는 구실로서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화불량을 누군가 위의 문제라고 말한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소화불량은 귀의 문제였다. 삶은 언어로 비롯되고, 귀가 불량이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으.에프. 캠퍼스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제9구역의 캠퍼스에서 주변문화를 향유하며 또는 홈스테이를 통해 반쯤은 프랑스 사람이 되어서 대학에 들어가는데 무엇이 힘들랴! 국일관이며 참새와 방앗간 등 한국식당도 좋을 것이고.

  그때 나는 귀의 소화불량으로 영양실조에 걸려 입으로만 먹어댔다. 바게트를 먹다가 물리면 크루아상으로, 다시 곧 바게트로. 요리가 예술인 세상에서 무조건 빵들만 먹어댔다. 은실이가 - 은실은 내가 떠난 그해 겨울에 결혼을 했다 - 빈 우유깡통에 넣어서 땜질해서 보내준 고추장은 잼 대용이었다. 그렇게 탄수화물을 먹어댔으니 뚱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지고 간 옷들이 많지도 않았지만 곧 꿰어 입을 수도 없이 뚱보가 되어갔다. 패션의 중심에서 뚱보는 가만히 엎드려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공부는 가만히 엎드려야 잘 되기도 한다. 그 덕택에 공부는 빨리 된 셈, 그것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그것이 괜찮은 것인 줄 알았다. 파리에 살면서 파리도 모르고 파리 사람도 모르면서도 서둘러 학위를 끝내는 것. 그것만이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파리는 자판위에서 적당히 벌리고 춤추던 내 손가락 사이로 다 사라지고 없었다. 파리에서 살면서 파리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 그 다음에는?

  아니 그런데 속이 쓰리다. 어디 컵라면이라도 먹어야겠다. 매점엘 가자.

그런데 금의환향처럼 돌아온 모교 캠퍼스에서는 어땠나? 그러고 보면 연속…….

 

 

  언니, 어디야? 집에 가고 있어?

  아니, 그냥. 너 오는 것 보고 갈까 해서. 기다릴게.

  어, 그래?

  은실은 안절부절못했다. 계속 전화를 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금의환향인줄 알고 돌아온 그때, 맙소사,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은실은 거의 만삭이었다. 둘 째 아이였다. 세 살 승연이는 뒤뚱뒤뚱 걷다 넘어지다 했다. 웃다가 침을 흘렸다. 우리가 헤어져 있던 4, 5년 사이 은실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있었다. 튼실해진 은실이. 김실이가 된 은실이. 제부는 조용했지만 은실이 기댈 만한 어깨를 내주었나 싶었다. 나는 뭔지 모를 짐을 벗은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명치끝이 막히곤 했다. 막힘과 허기가 샴의 쌍둥이였을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은 프랑스어 때문만은 아님이 분명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모교의 괜찮은 강사시절에도 마찬가지로 허기 속에 살았던 것 같다. 입은 늘 말보다는 먹는 일을 탐했다.

  강의는 어쩔 수 없었다. 강의는 말로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무이한 통로였다. 그런데 내 강의는 살아있는 말이 아니었다. 첫 학기에는 조심스러워서 그랬겠지만, 난 늘 강의 거의 전부를 미리 써둔다. 그러니까 다음 날 가져가서 하는 강의는 이미 죽은 것들이다. 보고 읽지 않고 외워서 읽더라도 마찬가지다. 간밤에 벌써 태어나서 조금도 자라지 않은 그 물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중간에 살짝 농담이라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까지도 살짝 표시를 해 둔다. 내가 강의시간에 혹시 농담을 했더라도 그것마저 즉흥적이 아니었으니 죽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머리통은 즉흥적인 발상이라거나 융통성이 없이 꽉 막혔다. 유연성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라 해도 내겐 없었다. 속이 말랑말랑한 식빵을 뜯어먹게 된 것이 한국에 돌아와서 빵의 변형이었다. 말랑말랑한 음식을 먹는다고 유연함이 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순간은 정말 따뜻하다 뭣해 뜨겁고 매콤한 무엇이 절실히 그립다. 이 병원 마당에서. 저만치엔 틀림없이 장례식장이 있을 것이고, 장례식장에는 뜨거운 국물이 있을까?

  멍청하도록 무례한 생각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식당에는 점심이 없을 시간이지만 장례식장엔 스물네 시간 식사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맞다. 그렇지만 배가 고픈 순간 장례식장을 떠올렸다면 참 엽기적이다. 아니, 결혼식장을 돌며 하객인양 점심을 해결하는 얌체족 이야기는 들었다. 축의금 봉투를 내밀어야 식권을 나누어주는 중산층의 결혼식장이 아니라, 아예 밥표 같은 것을 초월해서 식장이자 식당인 거대한 홀로 안내하는 부유층의 결혼식에 끼기가 쉽단다. 그러려면 옷만 잘 갖춰 입으면 될 터. 의복이 날개라고, 옷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문화가 여전한 나라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난 지금 결혼식 하객 면모는커녕 장례식장에 끼어들기에도 옷차림이 말이 아니다. 또 대부분의 장례식장에선 절을 하고 봉투를 넣고 식탁으로 안내되니까 몰래 비집고 들어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니, 정녕 그런 국밥을 탐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 뜨거운 국물은 라면국물이지. 식당 내 매점에서 김치라면에 물을 부어서 텅 빈 식당 한 구석에 주저앉았다. 저쪽에 스터디쯤으로 보이는 뭔가를 하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물론 하얀 가운들이었다. 식당이 빈 시간을 이용하는 모양이다.

 

 

 

  거기, 학교 카페테리아는 천장이 높았다. 값이 싼 음식들과는 어울리지 않은 높이라고 생각했었다. 음식 냄새를 잘 참을 수 있게 하기에는 높은 천장이 옳았다. 김이 나는 고기 요리를 즐기는 사람도, 요구르트와 사과 한 알만으로 점심을 먹는 여학생도 있었다. 난 샐러드를 먹었다. 빵은 미리 썰어가지고 간다. 바게트 - 굴러다니다 조금 마른 바게트에는 참치 캔을 더해 먹으라는 어느 한국학생의 말을 따라 그가 말해준대로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진 걸 산 적이 있었다. 해바라기 기름이었을까? 올리브기름에도 적응을 못하던 나는 슈퍼에 가면 안절부절못하곤 했었다. 뭔가 먹을 것을 거의 모두 슈퍼에서 해결해야 했는데도.

 

 

  단순무식하게 살던 그 세월 동안 나는 팡테옹에도 가보지 않았다. 루소뿐이 아니었다. 빅토르 위고도 에밀 졸라도, 아, 앙드레 말로도 거기 잠들어 있다고 하지만, 거기 까까이 간다고 뭘 더 얻을 것인가.

  모딜리아니의 무덤엔 가 볼 마음을 먹었다. 감수성 과잉의 청소년기에 무한한 흡입력을 지녔던 그림, 목이 긴 여자 잔느 에뷔테른. 아직 파리가 낯선 때였지만, 페르 라세즈는 20구역의 바로 같은 이름의 역에서 내려서 올라가면 곧 있으니 찾기 쉬웠다. 그 그림에서처럼 목이 긴 장미 한 송이를 살까 하고서 꽃집에 들렸다.

  바랜 금발의 뚱뚱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뿌르 쇼팽?

  농! 뿌르 모딜리아니! 그렇게 답하자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양 여성들은 거의 쇼팽을 찾아온다는 것이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말이 서툰 동양여자였다.

  그렇게 실팍한 프랑스 아주머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딜리아니를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어쩌다?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객관적 평가도, 그의 세파르디 유대인인 혈통도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첨엔 남자가 죽은 다음날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가 어린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남서쪽 바뉴 묘지에 묻혔다가 10년이 지나서야 모딜리아니 곁으로 갈 수 있었다는 잔느. 스물세 살. 치명적 사랑, 나는 물론 사랑을 믿거나 그러지는 못한다. 믿을 증좌가 없었다. 내 가슴을 흔들어놓은 것은 나중에 화첩에서 본 그의 카리아티드 몇 점이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에 이적행위에 대한 중벌로서 카리아이 마을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여자들은 건축물을 떠받치는 벌을 받았다는 것이 신화적 설명이다. 하지만 고전적 에레크테이온 신전이며 오스트리아 국회건물에까지 카리아티드 입상들은 아름답기만 하다. 모딜리아니의 그것들은 도발이었다. 건물의 무게에 짓눌린 채 힘을 지탱하고 있는 분절된 나신들은 그 단순한 선에서도 터질듯 했다.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 낼 것인가. 나는 해석 중독자였다.

 

 

  나는 그때 모딜리아니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 안내에서 받은 묘지지도를 가지고서도 찾지 못했다. 안개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묘석들 사이를 헤매다가 화려한 검은 무덤에 닿았다. 프루스트였다. 높이보다 넓이가 큰, 반듯하게 잘라낸 매끄러운 검은 대리석은 부동의 단단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 나는 영생이다, 뭐 그 비슷한 메시지 같았다. 평생을 공부하고 글을 쓰기만 해도 되었던 사람. 약한 몸이 변명이 될까? 의식의 ‘흐름’이라니? 의식이라니?

  사교모임에 드나드는 젊은이가 홍차에 프티트 마들렌을 적셔먹는다. 순간 과거의 무의식적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로써 자신의 길을 자각한다고? 동급생 거의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넋을 잃고 매료되었을 때, 그때 그 강의를 하신 교수님은 대단한 평판이 있는 분이셨다. 반대로 그때 나는 프랑스문학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후회하는 심정이 되었었다. 자아가 시간 속에 매몰되어 해체된다고? 열아홉 살 나는 자아만이 기댈 곳이라는 독단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래서 프루스트 같은 박학다식한 회색 인물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 회색은 어스름 매력의 베일이 아니라 몽환이었다. 숨은 - 당시에는 커밍아웃이란 없었으니까 - 동성애자의 혼돈 같은 것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싫어했다. 그 특별난 취향은 예술가들의 병적 특성일까? 영혼이 있다면 그 크기가 좁쌀만 한 내게는 위대한 영혼들을 담을 공간이 부족했다.

  그것을 거스르는 과정에서 문학 아닌 문학으로서 매료된 것이 장-자크 루소였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사회 이전의 상태,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상태를 향하여 -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에는, 그때는 적어도 어떤 실체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어느 사상가나 작가의 생각을 ‘해석’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남의 나라 남의 글이나 파먹는 하이에나 …….

 

 

  전화다. 또 은실이다.

  언니, 어디야? 병원 나선 거야? 나 아직 도착하려면 30분쯤은 더 걸릴 텐데, 병실에서 보호자 오라는데?

  보호자? 그럼 내가?

  으응, 언니. 언니가 좀 가봐.

  그래.

 

 

 

  컵라면 쓰레기를 치운 둥 마는 둥 곧장 달려갔는데 병실이 비어있다. 옆 병상에도 사람이 없다. 간호사실로 내닫는다.

  염려 마세요. 검사 갔어요. 보호자가 있었대도, 따라가 보아도 할 일은 없어요.

  할 일이 없으면서…….

  근처에 계시면 따라갈 수 있을까 해서. 가도 도움은 안 됩니다, 뭐.

  무슨 검산데요?

  나중에 주치의 선생님한테 들으세요.

 

 

  다시 넋 없이 환자도 없는 빈 병실에 앉아있자니 내가 환자가 되는 기분이다. 은실인 언제 오려나.

 

 

 

  우리가, 은실이 고등학교에,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봄은 따뜻하기만 했다. 우리 둘은 집에서 보다 더 친해졌다. 은실은 서울의 여고에 진학할 수 있었던 행운을 언니 덕이라고 신이 났었다. 나는 그리 신날 것은 없었다. 여자들만의 대학생활은 고등학교의 연장선에 있었다. 딸들을 여자대학에 보내겠다던 어머니의 소망이 크게 작용했고, 또 불문과가 신설된 대학으로 진학하면 진로가 좋을 것이라는 고3 담임선생님의 권유도 있었다. 왜 하필 불문과였는지는 의외로 간단했다. 영어로 내 이름은 케이에스 에이취가 되어 아이들이 ‘미스 에취’하고 놀렸었는데, 불어로는 ‘마드무아젤 아슈’ 얼마나 멋진가. 또 불어 선생님이 그러셨다. ‘쓰 끼 네 파 끌레 네 파 프랑세.’ - 명확하지 않으면 프랑스 말이 아니라니. 더 매력적인 유혹도 있었다. 모음마다 색깔이 있다니. A는 검정색, E는 흰색, I는 빨강색, O는 파랑, U는 초록이다. 어린 내게는 랭보가 프랑스어를 대표했었다. 대학생이 되어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불문과 학생답게 세계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가 생긴 정도였다.

  도버 해협의 ‘처널(Chunnel)’ 개통 소식. ‘채널 터널’을 줄여서 그리 부르는 곳. 해저만 해도 40킬로미터를 통과하는 유로스타를 타면 파리에서 런던까지 2시간 반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인간승리! 아니, 기술의 승리! 인간승리라면 아파르트헤이트의 땅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뉴스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뉴스는 독서보다 더 직접적인 세계와의 연결고리처럼 느껴졌다. 책이 마음속으로 젖어든다면 뉴스는 곧 바로 피를 건드렸다. 물론 뉴스란 항상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해 여름 지독한 폭염에 비실거리다가 다시 캠퍼스로 돌아간 가을, 우리는 한번 끔찍한 뉴스의 중심에 들게 되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느닷없이 무너져 내린 한강 다리. 아직 8시는 안된 시간, 게을러 늘어터진 대학생들이 아직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은 고등학생들과 직장인들을 덮쳤다.

  게을러 횡액을 피하기도 하는구나, 그것은 훗날 먼 나라 911사건 때도 그랬다. 희망찬 아침이 절망과 죽음의 나락으로 변해버린 그 아침을 가까이서 경험한 우리는 갑작스레 벙어리가 되었다. 화두가 따로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휴대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사용자는 드물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도 그러려니와 손바닥 길이만큼 길고 무거운 그것을 실제로 쓸 필요를 몰랐던 때이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아버지는 ‘그날’ 모두에게 휴대전화가 있었으면, 삐삐라도 있었으면, 덜 놀랐을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는 사실 저녁때까지도 사건내용을 자세히 몰랐고, 무사하다는 연락을 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은실과 나는 양재동 고모네에 나와 살고 있었는데, 고모나 팽성 집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강바닥으로 떨어진 16번 버스는 남에서 북으로 가던 중이었고, 하필 우리도 그 방향이었으니 놀라실만했다. 은실은 가끔 나랑 함께 가겠다고 아침자율학습에 늦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금요일 아침에도 은실로서는 조금 늦은 시간에, 나로서는 빠른 시간에 함께 집을 나섰다. 한강 근처에 이르렀는데, 비뚤거리는 다른 길을 따라 다른 다리로 - 알고 보니 동호대교였다 - 강을 건넜을 때조차 은실이 지각할까봐 조바심을 내는 건 나였다. 설마 다리 상판조각이 통째로 강물로 떨어지고, 그 순간 하필 그 상판에 버스며 차들이 지났으리라고는, 더구나 은실이네 같은 학교 학생들이 그렇게나 많이 그 버스에 탄 채 추락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현실은 늘 상상보다 더 잔인하다. 그런 명제가 무서움과 불안을 동반하고 핏속으로 스며들었다. 도버 해협 바다 밑을 기차가 통과하는 세상과 다리 위로 버스가 지나갈 수도 없는 세상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각인되었다. 세상은 믿을 수 있는 세상과 믿을 수 없는 세상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럽으로의 정향이 어쩌면 벌써 그 가을에 확정되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하고 안전한 유럽의 이미지가.

  은실은 이후 학교생활을 무척 힘들어했다. 그만큼 충격을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같은 반 학생이, 그것도 한 자리 건너 친구가 국화 꽃 한 다발로 남다니. 자신이 탔을 수도 있는 바로 그 버스! 충격이라는 단어는 너무 완곡한 단어였을 것이다. 은실은 그해는 물론 2, 3학년을 다 마치도록 내내 뭔가 불안을 극복하지 못했다. 2학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행당초등학교 뒤쪽으로 방을 마련해 옮겨 주셨다. 고모는 많이 서운해 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작 은실이 양재동으로 주소를 옮겼으면 8학군 배정을 받았을 것인데, 하시면서. 대신 며칠이 멀다하고 우리에게 반찬을 나르셨다. 고모가 오셔서 은실이 응석을 부리느라 결석을 했는지, 은실이 결석을 해서 고모가 자주 들르셨는지. 아무렇거나 은실은 결석 투성이로 겨우 졸업을 하자 그냥 고향집에 틀어박혔다.

 

 

  그해 겨울, 은실이 졸업을 하고 나는 4학년만을 남겨놓은 겨울 내내 나는 서울에 남았다. 은실이 고등학교 생활을 망친 것이 꼭 나 때문일 리는 없지만, 은실이 서울로 나온 것은 분명 나 때문이었다. 나는 은실의 실패를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설날과 대보름 때는 어쩔 수 없었다. 보름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아버지는 은실을 데리고 강남의 학원가를 둘러보러 가셨다. 이제 다시 고모네로 옮기면 학원 다니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설득하시겠다고 했다. 그날 더는 건널 필요 없는 그 한강변을 왜 다녀오셨는지. 다리 붕괴사고 현장에 이제 얼마 안 있어 새로운 다리가 준공된다고 하는 때였다. 아버지는 은실에게 현장을 보여주고, 누구라도 다시금 다리를 건너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려고 하셨을 지도 모른다. 재차 충격을 받은 것은 은실이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였을지. 아무튼 집에 들어오시면서 집안에서 웬 파도소리가 난다고 하시더니, 그것이 갑작스러운 이명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원래 귀가 썩 좋은 편은 아니셨다. 우리는 그냥 아버지들은 다 그러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그 동안 한쪽 귀만으로 생활하셨던 것, 그런 걸 도통 몰랐다. 그러다 심한 이명과 함께 갑자기 전혀 말을 못 알아들으시니까 다들 놀랐다.

 

  괜찮다, 조금 만 더 크게 말해 봐라.

  아버지이!

  아버지 소리는 안다, 다른 것 말해 봐라.

  아빠가 언제부터 이러세요? 엄마도 모르셨어요?

  나도 건성이었구나. 전화 온 걸 바꾸어 드렸더니 통 못 알아들으시는 거야. 날더러 뭔 소린가 들어보라고 하셔서 깜작이나 놀랐지. 전화 끊고 말을 걸어보니까 통 못 알아들으셔야. 이게 어찌된 일이라니!

  아빠 아빠, 내 목소리 안 들려요? 막내도 방방 뛰었다.

  괜찮다, 머리가 좀 띵한 것이, 몸살 나려고 그러나.

  몸살 난다고 소리가 안 들려요? 큰일 났어요, 병원엘 가야지.

 

  그러다보니 다저녁때였다. 모두가 조금 어리둥절한 채 저녁이 깊어 갔다.

  아빠가 서울 갔다 오셔서 병나신 거야? 나 때문에?

  은실이 숨죽이며 물었다.

  설마.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튿날 병원에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데, 은실도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은실을 말리셨다. 가까운 이비인후과에서는 큰 병원엘 가보라고 했다.

  보통 한쪽 귀에 이런 일이 오는데, 돌발성 난청이라고.

  그럼 왜 완전히 안 들리세요? 아부진 거의 못 알아들으세요.

  모르셨어요? 왼쪽은 오래 전부터 완전히 고장이 나 있으신데요. 어쩜 어렸을 때부터.

  그럼 어떻게?

  그러니까 큰 병원에 가셔서, 지금 당장 가셔셔 입원치료를 시작하세요.

  입원을요? 청력 때문에?

  예, 응급상황입니다.

  응급상황? 응급실에를요?

  응급실이 아니라, 일단 종합병원으로 바로 가세요! 서두르세요.

 

 

  그런데 그 금요일 오후를 또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귀가 안 들린다고 큰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버티셨다. 사리분간 보다는 고집 센 시골 할아버지들처럼 우기셨다. 그렇게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이번에는 은실도 기어코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일단 학교에 출근하셨다가 병원으로 가시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학교에 들어가신 동안 차 안에서 은실은 울 것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비인후과 첫 진료는 귀 때문이면 으레 청력검사실을 거친다. 검사실에서는 말 한 마디 없이 결과지만 내밀었다. 아버지는 청력검사실에서 받은 종이를 들고 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약간은 애송이로 보이는 초진의사의 말도 같았다.

  이 병은 입원치료가 최선책입니다. 물론 생명에 지장이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죽고 사는 일은 아니다? 그러면 되었다, 나는 또.

  아버지는 난감해하셨다. 새 학년 교실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고 하셨다. 차선책으로 귓속 주사로 결정을 하셨다. 이상한 자세로 20분 이상을 앉아 계셨는데, 밖에 있는 우리는 기웃거리며 불안에 떨었다.

  그 때 청력검사실 아저씨가 복도에서 끼어들었다, 왠지 화가 난 듯.

  의사가 응급상황이라면 응급상황입니다. 아버지 한쪽 귀마저 안 들리시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요?

  입원치료가 확실히 더 좋은 거예요, 확실히?

  은실이 그에게 다가가서 불안하게 물었다.

 

 

  아버지도 밤새 고심 끝에 다음날 담임을 내놓으시고 입원을 하셨다. 병가 2주면 치료가 끝난다니 믿어볼 밖에. 그 봄학기, 티.에이. 일을 계속하면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나는 서울에 있어야 했다. 은실이가 아버지 병원 시중을 도맡았다. 그러고 저러다 그 청각사가 아버지의 사위가 되었다. 이듬 해 내가 서둘러 프랑스로 떠난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착실하다는 단어에 걸맞은 제부는 작은 종합병원의 청각사다. 단순한 일이어서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았다. 승진이나 그런 것과 거리가 멀 것이니까. 어찌 보면 그냥 하나의 부품 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이비인후과가 있는 병원이라면 꼭 한 명은 있어야 되는 중요한 자리다. 그런데 왜? 어쩌다가?

 

 

  상념에 잠긴 나를 은실이 깨운다.

  언니, 아직 있네.

  어, 벌써 와?

  승연아빠는? 아직 안 끝났어?

  모르겠어. 그냥 뒤따라 갈 것 없다고 해서.

  그렇지 뭐. 난 어디 좀 가볼래. 언닌 그만 엄마한테 가봐. 애들도…….

  아니, 잠깐. 승연아빠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는 거야. 아무 상관없는 말들이라니. 기계처럼 무슨 말을.

  그게, 그게 말이야. 청력검사 때 쓰는 말들 같이 단어들만. 뜻도 뭣도 없이.

  뭐, 청력검사?

  그래, 귀, 힘, 갓, 잔, 수도, 우유…… 그런 말들 말이야. 나중에 얘기 해. 나 어딘지 검사실로 가볼래. 몇 층이래?

  그게, 이비인후과 검사가 아니라던데…….

 

 

 

  정신없이 서두는 은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병실을 나섰다. 청력검사 때 쓰는 말들? 그걸 외워서? 귀, 힘, 논, 맛……. 그때 아버지가 청력검사를 할 때 왠지 그 좁은 공간을 꺼리셔서 내가 따라 들어갔었다. 검사자 옆에, 그가 밀어준 작은 작은 의자에서 이상한 단어들을 들었다. 솔, 잔, 국, 솜, 닭, 옆? 아니면 수도, 마포, 학교, 돼지, 접시, 기차, 바다, 전기 그런 것? 그날 밤 나는 그 의미 없는 낱말의 집합이 신기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다가 웃었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제부라면 그것을 완전히 외울 법도 하였다. 외우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늦은 오후, 바람이 차다. 봄바람은 품으로 드는 님바람이라더니.

  좌석버스에 오르니 눈이 절로 감긴다. 지하철이건 버스건 자리를 잡고 앉으면 눈을 감는 버릇이 이젠 아주 굳었다. 집으로 가자면 우선 40분쯤을 가는데 그 사이 잠이 들진 않겠지. 통복육교에서 갈아타고 나면 그땐 눈을 뜨자. 10분 정도에 내려야 하니까. 아침에 남녘에서 올라온 시간의 흔들림까지, 아득하다. 은실이 이 일을 어찌 감당할까. 은실이 다시 힘든 상황에 빠진다면 나는 어쩌나. 아버지는 또 속내를 아시면 은실이가 안쓰러워 어쩌실까.

 

________________________

 

PEN, 2012년 5,6월호 투고

* 국제펜클럽 제78차 대회(경주)를 앞두고 원고청탁을 받아 뛸듯이 기뻤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주대회에 참가한다. 9월 9~15일.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3. 29. 01:29

                            한국어


  지루한 장맛비 사이로 한줄기 태양이 스민다. 후줄근한 땀이 베이는 오후, 강의실 창밖으로 푸르다 못해 검은 느티나무 잎들이 너울거린다. 벌써 만하인가.

  베를린 다음은 어디에서 서성이는 것일까.

  그에게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 무소식이 늘 희소식일까. 어느 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내게 보낼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린다. 한 동안 내가 그 자료들에 매달려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의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정리할 과제물이 없어진 상태에서, 난 할 일이 없어진 금단현상을 겪었다. 전공논문은 접은 지 한참 되었다. 다시 그리로 돌아갈 여력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는 뭔가 잘 못되었다고 느껴질 무렵 언어교육원에서 벽보를 보았다. 한국어 -

  한국어가 무엇인지를 아는 한국인은 별로 많지 않다. 언교원에서 더러 한국어 강사들과 목례를 하고 지냈으면서도 왜 그들이 ‘한국어’ 교원인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한국어는 우리가 쓰는 언어의 객관적 명칭이란다. 우리들의 나라말 ‘국어’를 외국인들이 배우면 그들에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도 무관심한 것이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한국어는 내게 또 하나의 도피처가 되었다. 반짝 새로운 문을 가리키는 팻말이었다. 넋 놓고 그에게서 자료들이 오기를 기다리느니, 글 쓰는 형식에 다가가자! 글을 읽을 만하게 쓰고 싶었던 감춰진 욕망이 전기 스위치처럼 켜졌다. 한국인이 수강할 수 있는 한국어강의는 한 가지뿐이다. 한국어교원양성과정에 등록하기.

  그날, 모니터 화면 앞에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복잡한 마음이 일었다. 자발적으로 심문관 앞에 불려나가게 될 줄이야. 그러니까 문제는 자기소개서의 내용이었다. 단 두 개의 질문이 있었는데, 기대했던 ‘왜 한국어 교사가 되고 싶습니까?’에 앞서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선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엉뚱한 놈이 A4 반 장 크기로 버티고 있었다.

  살면서 행한 선한 일? 그것도 가장 선한 일?

그런 빈 칸을 메우려면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은 선한 일을 떠올려야 한다. 최상급 ‘가장’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어처구니가 없다. 한국어교사가 되는 일에 선한 일은? 자격증을 출원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교사양성과정 공부하겠다는데 선행 경력을 쓰라고?

  괜히 심통이 난다. 휑하니 화면을 바꾸어 <배달민족> 파일을 연다.

   …… 한번 흘린 비밀은 쏟아진 물이나 같으니까. 움켜쥔 손이 아프면 그는 또 놓을 것이다. 나는 가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가 흘려놓은 물에 덩달아 적시어진 채로.

  마지막 단어 ‘채로’에 커서가 머물러 있다. 나는 거기 그렇게 정지해 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킨 것인가. 물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보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내게 어떤 일을 주문한 적은 없다. 범인은 나다. 스스로에게 덫을 씌운 것은 나였다.

  ‘편집-찾기’ 메뉴에서 ‘배승한’을 따라가 본다. 그는 다만 파일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안도한다. 그는 적어도 내 파일 속에는 존재한다. 아주 사라질 리가 없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읽을 만하게 잘 써내기 위해서라도 국어공부를 해야 한다. 국어이든, 한국어이든, 무슨 상관이랴.

  다시 한국어교사양성과정 지원서로 돌아갔다. 눈을 질끈 감고 역설을 쓰기 시작했다.

  1.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선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 나는 그런 일을 해 본 것 같지가 않습니다. 1970년대 서울 근교 태생의 여자아이가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공부했고 유학 생활 동안에도 삶은 늘 경쟁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 오직 지적인 생활을 동경하면서 프랑스에 처박힌 동안 - 여기는 재빨리 고쳐 썼다. 컴퓨터는 고쳐 쓰기 따위 기적과 같은 기능을 밥 먹듯이 가능하게 한다. - 프랑스 체제동안에도 늘 무엇인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고,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 여기에서 정말 막혔다. 거짓말 좀 하자. 너스레 좀 떨자. 너, 문학박사! 인문학이 뭐냐. 세 치 혀, 입 잘 놀리는 학문 아니더냐. - 적어도 공동생활에서 공평했고, 강사생활 근 십년에도 알찬 수업준비와 칼끝처럼 정직한 성적관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굳이 선행이라고는…….

  눈 딱 감고 적당히 마무리를 썼다. 2번 질문, 왜 한국어 교사가 되려느냐 따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써내려가는 동안 내가 정말 한국어교사가 되려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만큼 심취해서 썼다는 말이다. 그의 메모를 이야기로 옮기는 지난 한 해 동안 감정이입 능력이 발달했나 보다. 나는 정말 한국어교사가 되려는 심정으로 나머지 서류들을 준비해서 한국어교원양성과정에 등록했다.

  그 렇게 해서 강의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학생 자리에서.

 

  스터디 룸펜

  6월 중순에 시작된 강의는 8월 초순까지 일정이 잡혀 있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과정은 A4 400쪽이 넘은 복사 교재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수료 기준’이라는 유인물에는 과정 전체 42회 중 34회 이상 출석, 종합점수 평균 60점 이상인 자에 한해 수료할 수 있다는 주의사항 등이 빼곡하다. 수료 후에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동기생들과 스터디를 계속하라는 권장사항도 친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동기생? 얼핏 둘러보니 천차만별의 집합이었다. 풋내기 대학생들과 함께 어디에선가 정년을 했음직한 어른들도 눈에 들어왔다. 성별은 여자가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하필 첫 시간이 <음성학>이었다. 수강생들은 묻지 마 전공자들로 모두 섞여 있는데, 이런 전문성이 가당키나 한가.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에 음운이 몇 개나 됩니까? 최소대립쌍에서 음운을 판별합니다. 동과 통. 여기에서 ㄷ과 ㅌ의 다름을 알아내는 것이지요. 기역, 니은…… 자음은 몇인가요?

  수강생들은 멍하다. 생각보다 더 멍하니 강사를 올려다보고 있다. 누구 하나 기역, 니은…… 하고 세어서 대답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이에 강사가 계속한다.

  제가 너무 갑자기 질문했나요? 열아홉 개죠. 그리고 단모음이 열 개. 소리는 있지만 문자는 없는 반모음도 있지요. ‘오기’에서 ‘요기’를 만드는 음.

  가나다라는 열네 줄인데……. 열아홉이면 쌍기역 등을 합한 것이구나. 그럼 복모음은 왜 빼고? 다 합치면 몇인가?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 나하고 놀자. 철수야, 가자. 영이야, 가자. 이렇게 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우리 세대만해도 음성이란 자연적인 산물인 줄로만 알았다. 무식함에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혼란스러운데, 강사는 여자 목소리로선 우렁찬 목소리에 달변이다.

  자, 먼저 자음의 발성에서 시작하죠. 기동과 발성과 조음의 과정을 거쳐서 자음소리가 나옵니다. 조음위치에 따라…… 왜 거, 훈민정음에서부터 아․설․순․치․후 아닙니까? 조음방법에 따라서 나누면 파열음, 마찰음…… 또. 마찰음엔 귀신들이 좋아하는 소리가 있죠. 이힛, 흐, ‘ㅎ’말예요!

  그리고 아무렇게나 쓱싹 칠판에 자음 도표를 그린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휙휙 그려대는 손. 이제 사람들은 강사를 거의 우러른다.

  제가 좀 빨랐나요? 아무튼 자음에서는 ‘ㅂ,ㄷ,ㄱ’ 곱하기 3만 알면 거의 다 아는 거죠. ‘ㅂ’소리가 ‘ㅃ’ 또는 ‘ㅍ’로 경음 또는 유기음이 되는 현상 말입니다. 자, 같이 해보실까요? 손바닥을 입 5cm 앞에 두세요. 소리 내어 보세요. ‘ㅃ’소리를 내려면 후두가 긴장되지만 기는 없죠. 하지만 ‘ㅍ’의 경우에는 기식이 많아져요. 자, 해보세요. 불, 뿔, 풀. 불이 났어요. 뿔이 났어요. 풀이 났어요. 조음위치가 같은 파열음의 경우에도 이런 차이가…… 괜찮은가요?

  알아듣기나 하느냐고 묻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 휴식 시간이 되었다. 물을 홀짝거리던 강사의 눈빛이 내게 머무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라도 한두 번 스쳐지나간 얼굴인 모양이다. 출석부를 훑어보는 모양새가 내 이름을 확인하려는 듯싶었다. 그냥 자수하기로 했다.

  김 선생님. 저, 한금실입니다, 프랑스어.

  아 네, 설마 했는데. 그래도 벌써 알아봤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길?

  좀 웃기죠. 저 그냥 국어공부가 좀 하고 싶어서. 새삼 국문과 대학원으로 진학하긴 너무 무겁고.

  한샘, 이거 한국어. 한국어는 국어랑.

  아, 압니다. 다르게 부르는 것 알지만 저한테는 국어공붑니다. 첫 시간부터 맹타 당했는걸요. 실은, 수강생들 모두가 그렇겠지만, 국어학개론 쯤을 기대했습니다. 교재를 막 받아들자마자, 아니 아직 목차도 채 들여다보기 전에 음운론이라니. 지레 겁먹고 도망치고 싶어지는데요.

  한샘도. 별거 아녜요. 원래 개론이 첫 시간에 잡혀요, 헌데 그 강사 샘이 다른 스케줄로.

  예, 뭐 그럴 수도. 암튼 화들짝 정신 나는군요.

  한샘, 그래도 어떻게 한국어를 등록할 생각을?

  그냥. 지금 딱히 하는 일도 없고요. 여전히 스터디 룸펜이라.

  자조적이시기는. 실은 이 길도 아직 개척단계라서 전망이…….

  전망은 무슨.

  첫 시간에 혼쭐이 난 수강생들은 꽁꽁 얼어 보였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서는 맘을 빼곡히 열고 서로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다시 경쟁자들을 만난 것인가? 한국 사람들은 미래지향적이다. 준비성이 강하다. 사람들이 슬슬 그룹이 되어 나타났다. 가을에 있을 자격시험에 도전하는 일. 가만 보니 중간 보다는 젊거나 나이 든 이분적 집단이었다. 정말 스터디 룸펜족도 끼어 있다. 연령제한에 걸려 기업체 입사를 놓쳤거나, 미래가 불투명한 직장을 집어치우고 홀로서기를 꿈꾸거나…… 설마, 국어과 자격증을 가지고서도 임용이 안 된 예비교사도 있었다. 그 둘은 강의 도중에 강사들이 가끔 내던지는 질문에 척척 답을 해서 우리 다른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나이든 쪽이 더 확실한 사정들이 있었다. 정년 후 삶의 무대를 근동 외국으로 옮길 꿈이 있기도 했고, 오지의 선교사로 나가서 벌써 한국어 강의를 벌여놓은 분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자격취득이 현지 한국어학원의 신분승격에 필수적이라서 자격증에 도전한다고 했다.

  평생의 직업을 예상하고 온 젊은 그룹에도, 노후의 종교 활동이나 보람 있는 투자와도 무관한 나는 어정쩡했다. 분류되지 않는 회색분자였다. 그래도 양쪽 그룹 모두에서 세 확장의 의미로 러브콜이 있었다. 난 젊지 않은 쪽으로 끌렸다.

  가을은 참 심란했다. 8월에 강의 일정이 끝나는 우리로서는 10월초 자격시험까지 최소한의 유예뿐이다. 한다는 대학마다 이런 수료생들을 일 년에 4회 배출해 내는데, 여름 수료생들의 공부기간이 가장 짧을 밖에. 더구나 설 명절보다는 추석을 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방식 때문에 추석명절은 결정적으로 공부시간을 고스란히 삼켜버렸다.

  추석 중심 - 별 것은 아니었다. 벌초에서 차례와 성묘까지 일습을 고향에서 함께 보내자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셨다. 설에는 교통사정도 모를 일이고! 이건 막내가 먼데서 사는 이유를 아버지가 감안하시기로 한 때문이다. 단순히 비행기여행에 기상상태가 미치는 영향 때문만은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안다. 막내는 본격 기독교문화권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면 남편의 고향집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가 온다면 언제가 되더라도 추석쯤에나 가능하다. 딸 셋 중 ‘제대로’ 결혼해서 본 둘째(?)사위 얼굴 때문에라도 나더러는 꼭 참석하길 바라신다. 둘째가 결혼을 했을 때 좀 우스운 일이 벌어졌었다. 둘째 딸 신랑이니 둘째 사위가 맞긴 맞는데, 집안에서 처음 보는 사위니까 말이었다. 결국 유일한 사위노릇을 하고 있는 제부가 장인어른 모시고 처갓집 벌초를 도맡는다. 서울에 나가 사는 것도 아니고 근거리에 살면서.

  언니, 이거 다 뭐야. 아부지가 또 미안 닦음 하라셨어?

  아니거든.

  내가 오히려 미안해. 어무니아부지 사랑 나 혼자 다 누리고 살잖아.

  네가 복 받게 하지. 너 아님 우린 얼마나 더 죄송하겠어. 더구나 이번엔 내가 시간이 너무 없어서 애기 뭐 사러 갈 틈이 없었거든.

  그래 놓고 추석날 차례가 끝나자마자 다시 내 굴속으로 돌아왔다. 스터디 그룹은 거의 비상이었다. 저녁으로만 함께 시간이 나서 대학가 공부방을 빌려서 모였는데, 각자 맡은 부분을 요약해서 ‘강의’하는 수준이 요구되었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학과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학, 언어교육론, 거기에 한국문화론이 추가되었다. 한국어학 분야에서 맡았던 ‘조사’만 해도 40쪽 분량이 가도 가도 새로운 정보였다. ‘한국어의 역사’에서는 예컨대 신라어의 특징을 어떻게 공부한단 말인가. 또 무엇 하러?

  아니, 시험 준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몇 달 사이에 수험생이 되어버린 기분은 뭔가에 코를 꿰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편한 시간이었다. 코앞에 과제가 있어서 마음속의 일 쏠림을 잠재웠으니까. 미완성 이야기에 대한 그리움을.

  기본적인 과목들을 함께 섭렵하고서도 한국문화라는 미지의 숲을 헤매는 동안 9월이 갔다. 10월 첫 일요일, 무슨 공단 지부에 출석해서 하루 종일 시험을 치렀다. OMR 카드에 수험번호 작성부터 엇나가는 손으로 200 문항에 가까운 문제를 풀어야 했다. 확실히 알고서 쓴 문제가 없다시피 했다. 처음 대여섯 문제를 일사천리로 풀고 나서, 자음이 다양한 조음 ‘방법’으로 발음이 되는 단어 고르기에서부터 막혔던 기억뿐이었다. 조음 ‘위치’를 두고 찾으려 했다니, 기본도 안 된 수험생이었다. 막혔던 문제에서 시간을 다 허비하고서는 뒷부분 절반은 지문을 겨우 읽을까 말까 4선지 내용을 채 변별해서 읽을 시간도 없었다. 자살골과 같은 오답들로, 답안 표시는 언감생심. 만 24시간 뒤에 모범답안 발표가 인터넷에 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맞춰 볼 수 있는 내 답이 없었다. 스터디 그룹 사람들의 ‘처참한’ 소식에 나도 덩달아 움츠러들었다.

  구겨졌다. 이제는 공부도 안 되는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남은 것 같지 않았다. 10월 한 달을 두 손 놓고 지내는 동안 다시 기다림이 꿈틀거리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원고정리를 계속한다면 이제는 실력이 분명 나아졌으리라는 희망이 들었다. 정말 뭔가를 써보고 싶었다.

  11월 초가 되어 정작 발표 날에는 다른 스터디 그룹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놀리는 줄 알았다. 2차 면접시험 준비는 각각 혼자의 싸움이 되었다. 누가 도와 줄 수가 없는 성격이다. 난 실은 말을 잘 하지 못하면서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 전날이면 무진장 준비를 한다. 말할 내용을 거의 다 써서 프린트를 하고, 조금 필요한 양념으로서의 농담까지를 특정 부분에 표시해 놓는다. 물론 농담의 수위도 정해 놓는다. 강의 중에 돌발사건이란 거의 없다. 교실에 가서는 어젯밤 책상에서 태어나 이미 죽은 강의를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는 것이다.

  왜 한국어 교사가 되고자 하십니까? - 면접시험에서 예상되는 이 뻔한 질문에도 답을 적어 두었다. - 서양문화가 우월하다고 배운 청소년 시기의 결정으로 외국어와 외국문학 연구로 보낸 세월 동안 국어로 논문을 쓰거나 외국작품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미진한 국어 실력에 자괴감이 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라도 그 반대로…….

  예상되는 문법 관련 질문에 대비하기는 참 방대한 작업이었다. 공책 두 권이 다 들었다. 실로 어려운 것은 소리, 음운이었다. 서울 근교에서 자란 탓으로 비교적 서울 표준말을 쓰지만 다는 아니다. 시험공부를 하다보니까 발음 마다 오갈이 든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는 사람. - 이때는 그냥 [파트로].

  팥이 풀어져도 솥 안에 있다. - 이번에는 [파치]로 구개음화다.

  구개음화는 표준발음법 18항. 아니, 17항. 표준발음법을 번호까지 외우는 것은 구구법 외우기나 같다. 앞에서 틀리면 죽 이어서 틀린다. 육칠 사십팔에서 틀리면 육팔은 당연히 틀리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표발 17항’ 하고 외웠다. 의문은 꼬리를 문다.

  ‘사건’은 왜 [사ː껀]이고 ‘사고’는 왜 그냥 [사ː고]인가?

  왜 ‘머리말’이고 ‘노랫말’인가?

  면접시험은 11월 말, 전국의 합격자들이 마포에 있는 산업인력공단 본부에 나타나야 한다. 면접관 세 명 중에는 나보다 더 젊어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고약한 과정을 다 겪고 공단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새삼 지하철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니, 어디로 가든지 지하철이 먼저이긴 하다. 서울의 정액권이 있을 리 없는 나는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공덕동, 여길 어떻게 왔더라? 그랬다. 기차에서 내려 바로 이곳으로 향했다. 이제 돌아가는 길은 바로 역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지척에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가. 느닷없이 들른 딸을 반기시겠지.

  퇴근 시간이 아직 이른 지하철은 곧 자리가 난다. 두 눈을 감자. 종점까지 시간은 넉넉하다. 아예 이렇게 편하게 고향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을까? 이쯤 해서 그냥 연줄 하나를 놓아버리면 되는 것을. 지적인 삶이라고 수놓인 연. 다른 말로는 난 정신적이고 싶었다, 내내. 왜 사람이 정신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누군가는 보다 정신적이면 안 될 것인가? 나는 가장 정신적 부류가 되고 싶었다. 공부했으니까. 공부란 본능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어딘지 뒤엉킨 세상의 소음들이 아득히 멀어진다.

 

  한국어 교실

  둘, 넷, 여섯, 여덟, 열…….

  내가 학생들의 수를 세는 방식이다.

  어, 파블로, 파블로 아모르솔로, 오늘 안 왔군요?

  대학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파블로는 필리핀 학생으로, 유일하게 결석이 잦은 편이다.

  봄 학기부터 한국어강의를 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언교원이 아닌 대학에 새로이 교양한국어 강의들이 개설된 덕이었다. 교원양성과정과 자격시험을 위한 한국어공부에 못지않게, 한국어강의는 주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레바논의 이슬람인 시망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결코 4명의 아내를 갖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어가 공용어, 케냐엔 영어가 공용어. 그래서 다비드 마카우나 패트릭 삼부 같은 이름이 있다. 타이의 잉랏은 지난 학기 학생인데 학기 내내 일주일이 멀다하고 이메일로 질문을 즐겼다. 지난 달 타이가 물에 잠겨가고 있다는 뉴스에 잉랏의 가족 안부를 물었을 정도다. 몽골에서 온 바트수흐 어용다르는 당찬 여학생이다. 수업시간 중에 모르는 말이 튀어 나오면 “OO가 뭐예요?” 하고 바로 묻는다. 대부분 수동적인 중국 학생들과 다르다.

  이 가을학기를 기준으로 대학 전체에 오륙백 명 이상의 외국인 학생이 등록했다고 하는데, 그중 오백 명은 중국 국적의 학생들이라고 한다. 중국에 한국어학과가 많이 생겨서인지, 스무 곳도 정도, 한국어과 학생들의 수준은 안정적이다. 교환학생 자격이니 우수한 학생들만 선발되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일본은 그 열 배 가까운 한국어학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유학생은 적다. 다카하시 나미는 매우 조용한 일본인이다. 수줍은 표정이 부드러워서 성숙한 여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번은 선생인 내가 나미에게 미안해 졌다. 글감 때문이었다.

 

  종달새

  피천득의 「종달새」를 감상문 쓰기 글감으로 가져갔다. 내가 늘 좋아하던 짧은 수필이다.

  피천득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의 해에 태어났습니다. 경술년에 있었던 국치가 뭐냐, 여러분 모두…….

  말을 계속하려다 턱이 굳었다. 일본 학생 나미가 맨 앞줄에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제목 설명으로 넘어갔다.

  ‘종달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영어가 매개어가 된다, 스카이라크. 종달새는 하늘 높이 까마득하게 떠서 종잘거리는 새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떤 새일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니까. ‘스카이’ 한 마디면 하늘 가장 높이 올라가 지저귀는 새라고 금방 이해한다. 한국어로 한국어 수업하기는 100퍼센트는 안 된다.

  서술자는 처음에 조롱 속의 종달새를 보고 뭐라 말했나요? “하늘을 솟아오르는 것이 종달새지, 저것은 조롱새야.” 다음은 이 말을 곧 후회하는 서술자의 생각들이 펼쳐지지요. “종달새는 갇혀 있다 하더라도…… 푸른 숲, 파란 하늘, 여름 보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가 꿈을 꿀 때면, 그 배경은 새장이 아니라 언제나 넓은 들판이다. …… 설사 그것이 새장 속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들을 모르는 종달이라 하더라도, 그의 핏속에는 선조 대대의 자유를 희구하는 정신과…….”

  이 대목에서야 다시 놀라서 목이 막혔다. 글을 읽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대 일본 저항정신에 관해 말해야하는 나 한국인은 지금은 나약한 일본 여학생을 궁지로 몰고 있다. 나미는 잘 견뎌주었다.

  며칠 전에도 음식의 의미와 관련하여 ‘백설기’를 소개할 때 실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백’은 ‘밝다’를 의미하고, ‘밝’은 옛날에는 신과 하늘이란 뜻이었죠. 그대로 태양을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 민족은 부여 및 고구려에서부터 모든 시대에 걸쳐 흰 옷을 신성하게 알고 즐겨 입었는데, 곧 순수와 평화를 추구한 민족이라고 할 수…….

  거기까지면 좋았을 것이다.

  반면에 ‘흑색’은 오정색중에서…….

  선생님, 오정색이 뭐예요?

  또 바트수흐였다.

  아, 오정색은, 그러니까 동서남북 알죠? 한국인은 동서남북 방위에 색깔을 대비시켜 생각했어요. 중앙은 노랑으로 정해놓고, 동방은 파랑, 서방은 흰색, 남방은 빨강 그리고 북방은 검정이라고. 여기서 보면 검고 캄캄한 것을 ‘흑’이라 여겼어요.

  정말 거기까지만 해도 되었을 것이다.

  흑과 백이라는 대조에서 흑은 늘 부정적…….

  아차! 이런 설명을 했어야 하는가. 까만 피부의 학생을 앞에 두고서.

  그때 다행히 곧 국제마라톤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아프리카 선수들이 1등, 2등, 3등을 모두 차지했을 때 그것을 슬쩍 언급해서 마음을 달래주면 되겠다 싶었다. 막상 교실에 그날따라 케냐 학생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큰일이다. 한국어 수업에 회의를 느낀 걸까? 세계 여러 곳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한국을 찾은 이들에게 불쾌감을 심어주다니. 졸업 후의 계획을 묻는 설문에 보면 한국회사에 취업하고 싶다는 것이 가장 많다. 한국에 살고 싶다고 대놓고 쓰진 않지만, 관심도 있어 보인다. 발표 시간의 주제로 한국음식, 민속은 물론 더러는 한국의 국제결혼 실태를 조사해 오기도 한다. 한국어를 이들에게 얼마큼 잘 가르쳐야 하는지. 한국어를, 한국을.

  이 빚진 기분을 꼬깃꼬깃 쑤셔 넣을밖에. 그러고서 종달새 이야기로 돌아간다.

  “칼멜 수도원의 수녀는 갇혀있다 하더라도 그는 죄인이 아니라 바로 자유 없는 천사다. 해방 전 감옥에는 많은 애국자들이 갇혀 있었다. 그러나 철창도 콘크리트 벽도 어떠한 고문도 자유의 화신인 그들을 타락시키지는 못했다.” 어떻습니까? 이 구절에 오면 종달새는…….

  선생님, 수녀는 원래 갇혀 있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에 와있는 한주선 선교회는 아주 자유스러운 활동을 하는데요.

  이냠바네 해변이 고향이라는 호세가 손을 들고 말했다.

  아, 여기 수녀회는 프랑스대혁명 때 집단으로 순교한 수녀회의 일화를 바이런 경이 들춰내 시를 쓴 것이고, 피천득 선생이 인용했습니다. 지금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가톨릭보건의료사업이 들어가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가요? 모잠비크에는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죠?

  예, 수도 마푸토는 로마가톨릭이 많습니다. 북쪽은 도착종교가 많고.

  도착 아니고 토착! 자, 토착이라고 발음해 보세요. 토착종교!

  예, 토착종교. 이슬람, 힌두교도 있어요. 언어도 많이 여러 개입니다. 한국 같이 한국어 하나 아니고요.

  참, 그렇군요. 한국은 배달민족이 이룬 나라라서…….

  배달이 뭐예요?

  이번에도 궁금증이 많은 바트수흐였다.

  아, 한국인의 원형이 배달민족입니다. 한민족은 크게는 몽골로이드, 몽골인종에 속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배달민족이라고 합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나라 이름이 배달이었습니다.

  발음이 이상해요, 배다르.

이번엔 나미였다. 일본인다운 발음이다. 나미로서는 수업내용에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용기 내어 표현하는 것이리라.

  배달, 다 같이 소리 내어 봅시다, 배달. 짧게요. 길게 ‘배애달’이라고 하면 우체부나 택배의 배달이 됩니다. 한국어에도 첫음절에는 장음이 올 수 있고, 가끔은 뜻을 변별해주죠.

  자, 짜장면 배달은 길게.

  다음, 배달민족은 짧게.

  왜 하필 배달인가? 그것은 국조 단군과 관계있는데, 어원에서 박달나무는 다른 말로 배달나무이자, 단군 및 단군족의 나무라는 사실이랍니다. 또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입니다. 그러므로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한민족은 백산민족, 곧 백두산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아뿔싸, 나는 언젠가 이박에게서 주입된 배달민족 신화를 외국인 학생들에게 열심히 주입하고 있구나! - 모교에서 빛나는 강사시절 함께 강사실을 사용하던 이순규 선생. 유럽대륙의 역사철학 전공인데, 자신의 말로 ‘적어도 헤겔에선 고개를 넘었는데……’라고 말하곤 했었다. ‘세계정신’ 운운하는 서양 철학자들은 동양을 우습게 본다고, 그래서 그는 거꾸로 동양에, 한국의 원류에 기대는지도 몰랐다. 나는 재빨리 현실로, 교실로 돌아온다.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로 내려왔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통일이 되어 있었죠. 한국에도 지금은 백사십만 외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점점 늘어갈 추세이고요. 자, 다시 「종달새」로 돌아갑시다. 이 글에서 저자가 가장 아끼면서 내놓은 주장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잘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겁니다.

  자꾸 멍해지려는 가닥을 다잡아 서둘러 감상문 쓰기 과제를 낸다.

  선생님이 독서 감상문을 쓰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정리해서 홈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보다 여러분이 먼저 할 일은 브레인스토밍, 「종달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모는 단어들을 써보고, 모든 생각들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해서 글의 개요를 써오는…….

 

  작문

  그렇게 다음 시간에는 좋은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하여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좋은 글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의 일이리라. 나는 밤새 ‘좋은 글을 쓰려면’ 이라는 제목을 써놓고 궁리에 빠진다. 여러 책들, 여러 사이트들이 여러 다른 조언을 준다.

  - 눈을 크게 뜨고 의미를 찾아낸다.

  - 짜임새 있게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

   - 말하려는 내용에 어울리는 리듬감 : 대구법, 대조 등을 이용할 것.

  - 생략과 확장 등을 통한 변화주기.

  부지직, 문자메시지 음이 들린다. 두 번 이어 들어오는 문자들. 하나는 인터넷 변경을 부추기는 유혹이고 다른 놈은 친절한 대출안내이다. 누군가 나를 찾는 일은 드물다. 더 드물어졌다. 나는 아마 세상에 없는 것 같다.

  느닷없이 이박에게 전화를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가 화드득 놀랐다. 내가 전화를 한다면 그가 너무 놀랄 것이다. 수업시간에 배달민족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말해도 놀랄 것이다. 다시 ‘좋은 글쓰기’로 되돌아간다.

  갑자기 나는 내가 이전에 썼던 글, 지금 쓰고 있는 글들에 생각이 미쳤다. 미쳤었구나. 미쳤구나. 나는 누구에게서 작문을 배웠던 기억이 없다. 아마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기본은 배웠겠지만, 서양말을 안고 산 세월동안 까맣게 망각했다. 국어에도 글쓰기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저 입말을 글말로 옮기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 것을.

  얼굴이 달아오른다. 분명 이것은 수치에서 오는 홍조다. ‘부끄럽거나 취하여 붉어짐. 또는 그런 빛.’ 박사논문을 초라하지만 프랑스어로 자비출판하고 말기를 잘했다. 번역했더라면 누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 이후의 논문들은 프랑스어 보다 국문이 더 많았다. 프랑스어 논문의 부족함은 용서된다,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니까. 국문 논문의 미흡함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강의하는 인간이 국어를 유린하다니.

  아니 괜찮다. 논문은 어차피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 배승한에게서 받은 메모 쪽에서 생성된 내 글은 어떠했을까. 내 글이라 할 수 있을까? 내용이나 어휘는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정리만 했으니까. 구성에 관해, 또는 리듬을 염두에 두었나? 아니다. 갑자기 하나의 명제가 떠오른다. 글은 진실하고 독창적이어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명제를 가지고 쓰면 될 것 아닌가.

  진실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 나로서 진실은 내 몫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글을 쓰면서 생각이 변하는 것을 느낀다, 완결된 생각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독창적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고갱을 훔치지 않고, 우리는 얼마큼 독창적이 될까?

  답은 나오지 않고, 모니터의 화면은 ‘자러 간다.’ 화면이 그렇게 말하면서 꺼졌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미국산 휴렛패커드라 그런가 보다. 나도 자러 간다, 한국어로.

  잠깐, 사고나 인식보다, 더 나아가 세계보다 언어가 우위에 있다고 그렇게 가르쳐야 하나? 언어를, 외국어를, 외국어 한국어를 가르치자면 그렇다.

  우리는 모국어가 설정한 선을 따라서 자연을 분석한다. - 이것이 사피어-워프의 언어 결정론적 입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적는다, 다음 시간에 할 말을.

  아니, 그건 소개해야할 이론이긴 해도.

  이론이지만, 뭐?

  자문자답이 지겹지도 않아? 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나 아파치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로 생각한다잖아. 자연언어와는 별개의 추상언어 ‘멘털리즈’, 이건 인지과학자 핑커의 말, 아니 그의 글.

  작문시간 준비를 하다가 나는 또 분열을 겪는다. 오른 쪽 뇌와 왼쪽 뇌가 다툰다. 나는 내 생각을 지원하지 못하고 늘 토론을 들이댄다. 뭐든 삼천포로 빠진다. 인터넷에서 삼천포는 겹겹으로 쌓이는 창들이다. 문어발도 아닌 것들이 어딘가로 기어가서는 달라붙어 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가. 나를 홀렸던 한국어 몸살에도 결국 틈이 보인다. 틈, 틈새로 쓰다 만 이야기를 그린다. 수십 개 열린 창을 하나씩 닫는다. <한국어>도 닫는다. 쓰다가 멈춰있는 처음 화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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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단편 「한국어」,

『계간문학』 봄호(통권 18호), 한국문인협회, 2012.3.15. 152-169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