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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01 콩나물 - <문학저널>
소설2007. 11. 1. 23:30
나물


 문학저널 2007

 

맛있겠다, 정말. 

뿌리도 채 덜 다듬어서 아무렇게나 무쳐낸 콩나물 그릇으로 젓가락을 길게 내뻗으며 은미가 말했었다. 나도 덩달아 콩나물 가닥을 집어 들었다. 친구들이 깔깔대고 웃었을 때야, 나는 은미가 순 장난으로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맛있다는 콩나물무침 쪽으로 몰릴 때, 혼자서 진짜 맛있는 것을 먹는 수법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일 하찮은 것이 콩나물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정말 그늘에 큰 콩나물이란 별명처럼 콩나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콩나물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맛을 좋아할 뿐이다. 맛있는 것, 맛없는 것의 차이를 배울 나이에 나는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다가 가치를 혼동하게 된 것 같다. 많은 식구들이 좋아하지만 아끼는 음식접시가 할머니의 손을 거쳐 내 앞쪽으로 오면, 나는 그만 맛을 잃었다. 다져 구워서 다시 간장에 졸인 소고기처럼 진한 맛이나, 고기완자가 들어있는 버섯볶음 같은 기름진 것들은 왜곡된 애정의 표시이자 내게는 독이 되었다. 나는 비뚤게도 아무 것도 아닌 맛을 좋아할 의무를 느꼈다. 어린 시절의 의무는 습관이 되어 굳어버리나 보다. 사람들이 맛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내게는 맛이 없는 것이고, 사람들이 맛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내게는 맛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미가 콩나물을 맛있다고 할 때 나는 동지를 만난 줄 알았다. 물론 그 장난기에 다들 깔깔대며 손을 놓고 주 메뉴를 기다렸다. 모처럼 섬진강변 나들이이다 보니, 둥근 그릇 속에서도 여전히 펄펄 뛰고 있는 은어쌈과 은어튀김이었다. 은미는 유난히도 펄펄 날며 날은어를 삼켰다. 난 정말 콩나물만 먹었다. 튀김은 먹을 것 같았지만 옆에서 퍼덕거리고 있는 날은어의 시체만 같아서 그것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은미는 동지이기에는 사실 사뭇 달랐다. 우선 우리가 처음 만났던 여고 시절에는 - 아마 중학교 때도 같은 학교를 다녔겠지만 특별한 사건으로 부각되지 않는 한 어찌 동창들을 다 알고 지낸단 말인가 - 그 시절에는 은미가 단연 압권이었다. <토요일 밤의 열기>를 훔쳐보고서 곧 바로 흉을 낸다는 춤 솜씨. 원래부터 존 트라볼타의 엉덩이 같이 튀어나온 톡 튕기는 뒷모습과 그에 어울리는 발걸음은 바람소리를 일으켰다. 가발을 쓰고 디스코텍에 출입한다는 뜬소문에 놀랐던 우리들은 은미가 회장인지 이사장인지의 고명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때 아버지들은 잘해야 회사원 아니면 가게나 농업에 종사했으니까.

우리가 정말 놀란 것은 은미가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였다. 웬만큼 아파도 입원 같은 것은 드물던 시절이었다. 자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 땐 지금처럼 무감각한 세상이 아니었기에, 우리들은 감히 앞 음절은 발음도 하지 못하고 “미수래, 미수”라고만 입소문을 옮겼다. 병원에 입원한다는 그것만으로도 대 사건이었던 때였으니. “미수”의 원인을 두고서 (헛)소문은 바오밥나무처럼 부풀어만 갔다.

바오밥?

그래. 실제로 높이는 20미터도 넘고, 가지의 길이가 10미터도 넘는대. 구멍을 뚫으면 사람이 살 수도 있다니까.

지금 생물 시간이야?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 말이지. 교회만큼 큰 바오밥나무는 별을 다 덮어버리고, 장미나무가 자랄 자리를 안준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게 암적 존재라는 거지. 거대한 자본 같은 것. 지구의 외면을 깔아뭉개는 자본이 결국 지구의 내부까지도 좀 먹겠지. 환경 파괴로.

저애, 뭐야. 너도 그런 것 학습한거야? 야학에 다녀? 거대한 자본이 어때서. 난 기어코 열대를 구경하고 말거야. 거대한 바오밥나무의 숲, 거대한 풍요……


평소에 바오밥나무를 입에 걸고 다닌 것은 정작 은미였었다. 열대여행이라니, 특별한 집의 특별한 아버지들 말고는 그 당시에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데 감히 여자애 주제에 열대여행이라고? 말을 잘 섞지 못하는 나는 속으로만 은미를 비웃었다. 비웃으면서도,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부러울 것이란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부러웠다고 해야 정직하다. 나는 여행은커녕 움직임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움직임 속에는 은미의 걸음걸이며 그에 걸맞은 디스코라고 하는 춤도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몸치의 눈으로 은미를 관찰하는 것은 미움이자 경이였다.

아무튼 나는 병문안 친구들 틈에 끼어 가게 되었다. 우선 예쁜 과일과 통조림이 섞이어 담긴 바구니를 사서, 서로를 앞세우며 들어간 병실. 은미는 ‘슈미즈 차림으로’ 벌떡 일어났다. 지금처럼 환자복이었으면 더 놀랐을지, 그건 모른다. 우리는 학생 티가 아닌 ‘새색시’ 같은 야한 차림에 놀라고, 그것이 부잣집이나 아무튼 앞서 나가는 집의 여름 잠옷이라고 아는 대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하얀 속옷 위로 드러난 살빛은 얼굴처럼 가무잡잡했다. 그래서 이빨만 허연 얼굴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

어쩌다 이러니. 왜 병이 난거야.

응 뭐, 유전이지. 울 엄마 일찍 돌아가셨잖냐.

어머니가 무슨 병인지를 오래 앓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초등학교부터 함께 다닌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집은 커도 침침하고, 그 애 엄마를 본 적이 없었다 했다.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계속 하거나 울거나 할까봐서. 다행하게도 은미는 침대에 앉은 채 몸을 흔들며 말했다. 난 좀 달라, 시집을 안갈 거니까.

시집을 안 가면 어머니와 다르다? 맞는 말일 성싶기도 했다. 어머니가 결혼과 출산의 과정을 다 거친 뒤에 무슨 병인지 발병했다면. 그렇지만 처녀가 시집 안 가겠다는 말은 3대 거짓말이라던 걸. 그 말도 나는 삼켰다. 애매한 미소만 흘렸다. 말을 내뱉기에 언제나 알맞은 시점을 놓치기 때문이다. 기껏 생각해서 무슨 말을 하려 하면, 어느새 화제는 두어 걸음 앞으로 나가 있다. 그러니 뚱딴지 소리를 듣게 되거나 힐난의 눈빛을 받지 않으려면 함구다. 그냥 알지도 모르지도 않는 듯한 미소가 쉽다. 평판도 따라오니까 일석이조다.

넌 한상 열대지방을 여행하고 싶댔잖아, 바오밥나무 무성한. 그 힘으로 가겠어? 어서 나아.

그래. 우선 졸업을 해야지. 외국어대학에 진학할 거야. 여행을 하려면 외국어가 필수지.

은미, 또 너 말을 앞세워!? 다른 친구들이 놀렸다.

꿈은 자유야. 꿈이 있어야 실현이 되고 말고 하지. 난 적어도 서너 개 외국어를 마음대로 구사하며 세계 곳곳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삶을 살 거야. 정 안되면 스튜어디스가 있잖아! 키 되지, 이거 - 두 손을 펴서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똑똑히 보았다. - 되지! 아아, 날고 싶어.


그런 뒤 곧 우리는 명색 고3이 되었고, 그 나름대로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정작 대학에 진학했던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급우들이 대학을 포기했는지, 그것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서울의’ 대학생활에 젖어들기에 어리둥절했다. 첫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 기차역에 내린 순간에야, 그 특권의 표시가 부끄러워 예컨대 배지나 가방 등에서 무슨 표지물들을 떼어내 감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후로 대학 친구들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아니 대학에 별 마음을 두지 않았다. 상급학교 진학의 꿈을 포기했었던 부모님을 위안해드려야 한다면, 졸업은 잘 할 계획이었다. 그 나머지는 대학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다보니 같은 서울의 대학에 다니는 4년 동안 은미를 만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가끔 통틀어 향우회 등이 있었겠지만, 내가 잘 안 나갔거나, 참석했더라도 구석 참이었던 내게 별 기억이 없던가 그랬다. 은미가 정말로 스와힐리어 - 이름도 외우기 힘든 어느 아프리카 언어를 공부한다는 사실에 우린 차라리 웃었다. 그 실력이면 영어과를 가고도 남았을 앤데, 정말 『어린왕자』를 읽고 바오밥나무를 보러 가겠다는 그건 치기였을까. 대충해도 있는 집 아이들의 사치나 기껏해야 응석이었다. 그래서 더욱 소문이 밀려 다녔는지 모른다. 긴 겨울이 끝난 뒤엔 더했다. 한 번은 은미가 봄날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는데, 그것이 휴학을 하고서 “남자 집에서” 쉰다는 해괴망측한 소리로 되어 떠다녔다.

입소문의 상대는 시골에선 제법 내노라하는 집안이었다. 큰 먹칠의 과거로 실제보다 더 유명했는지도 모른다. 사건사고를 잘 기억하는 사람들은 딸의 비극적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없었던” 일이 벌어지긴 했더란다. 반도 남단 하잘 것 없는 해수욕장에 지금 같은 인파도 아닌 한가한 때, 땡볕의 낮 시간. 총성과 함께 쓰러진 남녀. 누구는 쓰러진 사람이 셋이라고도 했다. 누구는 그냥 다같이 바다로 떠내려갔다고도 했다. 신문보도도 간결하고, 말하거나 듣는 사람들도 스스로 쉬쉬한 일. 믿기 어려운. 믿고 싶지 않은. 괜히 부풀려진?

아무튼 그 집안의 외아들은, 죽은 누이도 미인박명이라 했었지만, 정말 미남이었다고 했다. 그는 위 아래로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는데, 당당한 은미에게로 일단락이 되는가 싶었더란다. 그러던 차에 그 민망한 소문이 돌았다.

아서라, 세상에 그런 일이!

아니야, 그 애 엄마가 안 계시잖아.

그 애 엄마 돌아가신 것하고 이게 무슨 상관인데?

뭘 몰라요. 여대생이 갑작스레 휴학하고 몸을 추스르는 것이 뭔데? 누가 들을까 싶은 말이다 뭐.

그럼 왜 떠벌이는데?

떠벌이긴. 그게 정말……

소설 쓰지 마라 느들.

소설은 은미가 스스로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더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런 해괴한 소문의 실제 주인공은 다른 선배인가 후배이고, 은미는 다시 그 “미수”를 저질렀다고도 했다. 실연의 고통 때문이라고도, 떠난 남자를 위협하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아니, 복수의 방법이랬다. 글쎄. 이 모두를 나는 직접은 들은 적이 없어서 어느 것도 다 소설만 같았다. 상상이 잘 안되는 일들을 왜 소설이라 했을까? 지어낸 이야기라는 뜻이었겠지만, 세상에 지어낼 것이 없어서 처녀가 총각 집에서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지어낼까? 요즘 같으면 악플로 사람을 죽음에까지 몰고 간다니 그렇다지만, 그 옛날엔 그리들 심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눈사람 붓듯 불어난 이야기 정도였을 것이다. 구를 때마다 엄청나게 커져버리는데, 처음 알갱이는 아예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어쨌거나 휴학으로 인해 은미는 우리보다 일 년 늦게 졸업을 했다. 그리고 곧 은행에 취직했다는 소식이었다. 은행은 은미완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동색조합으로도, 보색관계로도, 어떤 식으로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얼음 같은 강물에 숭어가 뛰노네…….” 대학 시절 학과별 합창 경연에서 우리가 슈베르트의 <숭어>를 연습하는 동안 갑자기 은미가 떠올랐던 때가 있었다. 숭어는 도약력이 뛰어나 수면 위 매우 높은 곳까지 뛰어오른다. 뛰어오를 때에는 꼬리로 수면을 치면 거의 수직으로 뛰어오르며 내려올 때는 몸을 한 번 돌려 머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진다는 날쌘 물고기다. 공으로 말하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다. 이 곡의 경쾌한 멜로디와는 달리 노랫말은 권력자와 음모에 대한 아린 비판을 담고 있다. “얼음 같은 강물에 뛰노는” 이 날쌘 숭어를 낚시꾼이 영 낚을 길이 없자, 꾀를 내어 물을 흐리게 해서 낚아 올린다는 내용이다. 숭어는 주로 연안에 서식하다가 강물에도 들어간다지만, 이렇게 흙탕물이 된 강물에서 잡힌 숭어가 안쓰럽기만 했다. 우린 합창연습을 했던 4월 5월 내내 이 숭어를 불쌍타 하면서도, 일단 노래를 하게 되면 화음에 고개를 맞추며 즐거워했다. 나도 가끔 은미의 경쾌한 발걸음을 떠올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니까 은미가 제복을 입은 직장인이라는 영상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똑같은 디자인의 제복에 갇혀서, 그 톡톡 튀는 엉덩이를 의자에 죽치고 앉아 돈을 세고 있을 장면이 떠오르자, 퍼뜩 강물에 밀려올라와 파닥이는 숭어 생각이 떠올랐다.

그 펄펄 나는 애가 은행에? 그것도 좁디좁은 고향에서?

왜, 은행이 어때서? 미모도 한 몫 했겠지만, 집안도 한 몫 했겠지.

그래, 직장 내에서도 사람들 다 휘어잡고 웃기고 그럴까? 유머 하나는……

여자애들에겐 대학을 졸업하고도 교사 아니면 별로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던 때라서, 더러는 은미를 부러워했다. 은행원들은 보통 소심하고 단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은미는 이런 저런 내기로 남자직원들을 골탕 먹이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마침 친구의 친구가 같은 은행에 다니게 되어서였다. 그러다가 서로 전근이 되었던지 잠시 소식이 끊겼다. 다들 결혼으로 갑자기 연락이 안 되거나, 심심찮게는 이민으로 소식이 아예 없어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은미의 결혼소식이 뒤늦게 날아왔다. 그냥 결혼을? 미모에 매력덩이 여행원에게 어떤 고객이 반하기라도 했담? 그러나 신랑은 서울의 어느 지점에서 동료 행원으로 만난, 너무도 평범한 상대였다. 뭔가 우리 보통 아이들에게 특별한 연애를, 특별한 인생을 보여줄 듯했던 은미의 수월한 결혼에 우리는 괜히 허탈했다. 평소에 은미의 기발한 행각에 실었던 우리의 일탈의 소망이 함께 사라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워낙 근엄하시니 별 수가 있었겠나, 그 정도로 이해하고자 했을 뿐이다. 하물며 신랑이 얼마나 근검절약형 행원인지, 그것도 뉴스거리였다. 사보에 싣는 토막글도 오직 원고료 때문에 쓴다는 위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비상한 머리에 통이 대통인, 재즈와 디스코의 여왕이자 유머의 고수가 푼돈에 쓰기 싫은 글을 쓰는 자린고비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단하고 미래를 걸 수 있을 남편감일지 모르나, 은미에겐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당시엔 여행원은 결혼과 동시에 퇴직이었다. 이제 은미가 시할머니 층층에서 시집살이를 한다? 해방의 선두주자를 놓친 우리들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그 신랑을 존경어린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인물이면 은미를 들여앉혀서 살림을 하게 하나, 것도 시집살이를?


우리들 중에 시집살이로선 가장 마지막 후보였던 은미가 소도시의 한옥지구에서 시커먼 가마솥에 물을 끓여 시할머니 목욕을 시키고, 밥상은 시할머니 따로 시아버지 따로 시어머니 따로, 그리고 나서야 아이들끼리. 정말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다 한두 번 은미가 고향에 다니러 오면 급조한 동창모임에서, 콩나물무침에 젓가락을 쑤셔대며 우리를 놀리던 그런 자리에서, 드문드문 은미의 생활상이 내뱉어 나왔다. 몇 친구들이 펄펄 뛰는 은어를 어렵게 상추에 몰아넣으며 식당에서의 상추가 위생이 어쩌고 하던 때였다.

상추? 난 집에서도 다 안 씻어. 그걸 언제 다 씻냐고. 어른들 밥상엔 대충 해서 올리고, 아이들 줄 것만 제대로 씻는다니까.

상추를 다 안 씻어? 아니 너……

어때. 너희도 식당에서 그냥 잘들 먹잖아. 한 끼에 밥상이 몇 갠데, 그것 다하고 언제 우리 방에 들어가. 애들하곤 놀아야 하는데.

놀아?

그래. 문 닫아 걸고, 아이들 하고 디스코 추지 뭐. 갓 투비 데어…… 패러독스!

난데없이 패러독스는! 아무튼 너 몸매 하나 잘 가꾼 거구나. 얘 날은어 삼키며 파닥거리는 것 좀 보라니깐. 여전히 애들 똑 같네! 우린 모두 ‘배둘레햄’이야. 봐, 이 뱃살을 어쩌냐. 넌 우리 몇째 동생 같구나. 얘 또 이 옷 입는 것 좀 봐!

옷차림은. 총대처럼 붙은 청바지에 총대같이 붙은 청조끼라니. 그것도 아무리 보아도 작아질 대로 작아진, 아무리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고 또 날씬해 보이려고 꼭 끼게 입는다 해도 그건 아니었다. 이 옷차림은 그나마 골목 어귀의 구멍가게 주인여자에게 보관했다가 살짝 몰래 입는 것이랬다. 집에서나 보통 시장 출입 때에는 ‘월남치마’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회장인가 이사장집 외동딸로, 반장, 부반장 뭐든 다 하고서, 뭐든지 입고, 누가 보든지 엉덩이를 제 마음대로 흔들고 다녔던 은미가. 우수한 인간의 뛰어난 적응력일까?


결국 은미 같은 날렵한 튀는 자태에서 왜소한 처량한 몰골로의 변화란 십년 남짓으로 족했다. 불쑥 나타나서 여전히 기발한 유머를 날릴 법한 은미의 표정이 점점 서늘해갔다. 우리들이 점점 덜 웃게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세상에 코미디 프로가 퍼진 탓이었나? 우리들의 재미가 달라졌을까? 우리는 무엇을 향해 살았을까?

어쩌다 나타나도 항상 은미가 중앙무대의 상석을 휘어잡던 분위기가 언제부터인가 차츰 달라져 갔다. 아니 역전되었다. 말에 힘을 싣는 쪽은 새 귀족이었다. 혈통(?)귀족 대신 나타난 새 귀족. 그들은 아무래도 냄새를 풍겼지만 막강한 실세였다. 향수와 돈 냄새의 묘한 뒤범벅이었지만, 누구도 조금 고약한 그 냄새를 그리 탓하지 않았다. 우선 넉넉하고, 또 편했으니까. 가끔 새 귀족이 양반자리까지 넘보고 교양의 고지마저 점거하려들면 조금 마찰이 있긴 했다.

아니 와인 잔을 그렇게 들면 어떻게 하니. 여기 손잡이를 이렇게 들어야지! 다 마시는 법이……

우리가 움찔하면서 손을 고쳐 잡으려고 하면, 한 괴팍한 친구가 태클을 건다.

어디를 잡으면 어떻고. 내 잔 내 맘대로 들지 뭐. 서양 술 얼마나 마신다고 법석이야. 따지자면 와이트는 그래. 하지만 레드는 특별히 차갑게 할 필요가 없으니 아무래도 되는 것 아냐?

이도 저도 모르는 우리들은 머쓱해도 좋지만, 은미가 쥐죽은 듯해서 맘에 걸렸다. 이젠 은미가 확실히 마이크를 뺏겼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러고는 정말 더 멀어갔다. 그래도 일단 은미네가 다시 서울로 전근을 간 남편을 따라 분가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는 괜히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는 제 삶에 부대끼면서 동창의 삶쯤은 잊어갔다.

일찍 결혼 한 친구들은 벌써 아이들의 입시에 들어갔고, 그러자 우리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대입’이었다. 매일이다 싶게 차 마시며 오가는 같은 아파트 이웃들도 ‘자녀들의’ 학교에 관해서는 서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대화 자체가 멎었다. 잦은 이사들로 이웃이 자꾸 바뀐 때문이기도 했다. 동기 친구들도 신축 아파트 따라 이사하는 속도가 다르다 보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800미터 달리기 할 때 속도가 한참 달라서 누가 세 바퀴째인지 네 바퀴째인지 구별이 되지 않던 때처럼, 누가 어디쯤 서 있는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서로 모르게 되었다. 수준 차가 벌어지는 속도가 급격했다. 점심은 백배, 시계는 천배로 갈라졌다. 누군가의 연봉을 한 번에 통째로 입고 두르고 있는 명품 친구 앞에서, 은미의 여전히 총대 같은 청바지는 날씬한 몸매와 상관없이 초라했다. 이제는 민물고기같이 잽싼 몸놀림보다는 약간의 나른한 굼뜬 동작에 화려한 장신구가 더해지면 그대로 우아미를 발산했다. 어떻게 가꾼 것인지, 충분한 영양 탓인지, 피부들도 엄청 차이가 났다. 볼이 톡톡 튀던 은미의 표피는 앙상한 싸구려 파운데이션으로 뒤범벅되어 있었고, 속까지 비치는 부들부들한 살결들 사이에서 아무래도 이물질 같았다.

은미 너! 몸매 하난 여전히 끝내 준다만 웬 파운데이션을 그리 발랐어! 논바닥처럼 갈라지네, 너무 두껍게 발라놓으니 말야.

아닌데, 나 파운데이션 많이 안 발라, 진짜 아껴. 여기 봐, 이마 쪽은 안 발라, 안 보이잖아. 그리고 볼도……

놀라워라. 단발처럼 눈썹까지 내린 앞머리를 걷어 올리니 정말로 위아래가 다른 이마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깔깔 웃었다. 못 말린다, 못 말려.


여고 때에도 이런저런 기발한 착상과 뉴스들로 우리를 웃기고 놀리던 은미였다. 어디서 그렇게 놀라운 뉴스들을 퍼왔었을까? 아무래도 덩치 크고 잘 나가던 오빠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갓 투비 데어, 갓 투비 데어, 인 더 모닝 웬 쉬 새즈 헬로 투 더 월드 / 갓 투비 데어, 갓 투비 데어, 빙 허 굿 타임즈 앤 쇼우 허 댓 쉬즈 마이 거얼 / 오 왓 어 필링 데얼 비 더 모우먼트 아 노우 쉬 럽스 미 / 코즈 웬 아 루크 인 허 아이즈 아 리얼라이즈 아 니드 ……

잘 들어야 겨우 알아들을 노래와 함께 문워크래나 뭐래나 뒤로 걷는 춤은 일품이었다. 독특한 것은 우리가 “아이”라고 발음해야한다고 믿는 것을 꼭 “아”로만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누구도 미국사람의 발음을 제대로 아는 일이 없었으니, 잘 나가는 은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은미는 학교도 가끔 불신했고, 특히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란 “콩글리쉬”라고 우겼다. 그것도 우리가 덩달아 “콩그리쉬”라고 하면, “콩글리쉬”라고 다잡았다.

페임 / 암 고나 리브 포레버 / 암 고나 런 하우 투 플라이…… 암 고나 메이크 잇 투 헤븐 / 라잇 업 더 스카이 라이크 어……

결혼들을 하고도 한 참 뒤였을까. 큰 동창회 행사에서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신곡’으로 혼자 목청을 뽑을 때에도 우리가 “아이”라고 발음해야한다고 믿는 것을 꼭 “아”로만 발음하는 건 여전했다. 알라뷰! - 요란한 박수소리에 깜짝 응답으로 손을 쳐들고 무대에서 뛰어내려오던 모습은 숭어든 망둥이든 이름 하여간에 펄펄 나는 물고기였다.


천천히 그러나 어느새 세월이 갔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아예 잊혀갔다. 이웃에 살아도 서로 다치지 않고서 말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나는 점점 서로 말 주고받음 없이 제 이야기만 하는 텔레비전에 익숙해갔다.

코미디. 난 코미디 프로를 가장 슬퍼한다. 그래서 싫다. 슬픈 영화는 괜찮지만 코미디가 슬픈 건 참지 못한다. 내가 틀리는 지도 모른다, 코미디가 우습지 않고 슬프다고 말하면.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우습다고 말하는 코미디가 제일 슬프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정말로 웃게 되고, 웃으면 그때마다 젊어진다고 해도 싫다. 나는 코미디를 보면 슬프고, 슬프기 때문에 더 늙을 것이다.

시트콤. 그것도 아니다. 단편집을 읽을 때처럼 지속적인 줄거리가 없는 것도 그렇지만, 웃는 사람들이 따로 있어 방해가 된다. 무엇보다 웃음은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고, 관객이 따로 있고, 그 다음에 내가 그것들을 함께 보는 상황이 정리가 잘 안되는 것이다.

딱히 일정한 취향은 없었지만, 연속극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그 다음 장면 그 다음 발전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밉살스럽게 꼭 궁금증을 유발할 때쯤에 끝을 내고 다음 시간으로 넘기는 수작에 성가시지만, 가능하면 다음 시간에 눈을 대게 되었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이야기”에 정신을 판다고, 유익할 것이라곤 조금도 없는 프로나 기다린다는 식의 남편의 시선엔 익숙해졌다. 그가 보는 뉴스는 인생에 도움을 주는가? 하긴 날씨는 하루 일을 조금 편케 해줄지 모른다. 교양강좌 시간? 더 이상의 교양과 지식이라 해도 내 인생을 바꿀 리 없다. 업그레이드? 무엇을 향해서? 나는 그저 드라마라고 하는 남의 인생살이 모형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들 살아가는가, 살아 갈 가능성이 있는가 따라갈 뿐이다. 이웃이 있는 느낌이고, 적어도 혼자는 아니라는 착각에 든다. 나는 그냥 “어떤 다른” 인생들을 바라보면서, 이웃의 그렇게 서러운 더러는 힘든 딜레마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분에 빠지려는 것이다. 그러면 서러워지지 않고 진지해진다. 감정이입이라고, 어렵게는 그리 말한다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여자인 내가, 드라마 속의 남자에게도 그런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자: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 어머니가 버린 딸 -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어서 죽고 싶다.

남자: 너 살아 있는 것이 내 의미야. 이렇게 고운 네가 자학에 빠지다니. 내가 너를 지켜주겠어. 여자와 남자는 사랑에 빠진다.

다른 남자: 아버지가 실수로 비천한 가운데 뿌린 씨앗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부정하는 아들 -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어서 죽고 싶다. 여자가 위로한다, 오빠 태어난 것이 기뻐요.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여자가 심장에 박힌다. 여자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있다.


어쩌냐. 원래 큐피트의 화살은 한 방향으로만 난다. 여자와 남자의 결속은 다른 남자가 여자를 심장에 박아두고 있는 한 온전치 못할 운명이다. 누군가의 심장 속에 박힌 여자는 언젠가는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가 여자와 남자의 행복을 위해한다. 행복은 깨진다. 여자는 남자를 가슴에 품고도 떠나야 하고, 그런데도 여자 시청자인 내가 극중의 다른 남자를 이해하는 마음이 된다. 여자는 자신이 남자를 향해 연연하듯이 다른 남자가 자신을 향할 수도 있음을 이해한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이해한다. 나도 덩달아 사랑을 이해하는 마음이 된다.

물론 영화가 가장 편할 것이다. 후속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압축된 인생이 거기 있으니까. 그러나 영화관도 아니고 방에 박혀서 여기 저기 채널을 돌리다 보면 그것이 어차피 토막인 채다. 프로그램을 미리 찾아보고 특정 영화를 찾아 볼만큼 광도 못되고, 무엇보다 게으른 탓이다. 뒷부분 절반만 보았던 것을 조금 더 앞서부터 보게 되거나, 계속 그런 뒤쪽만 보다가 오래 지나서야 그 앞쪽을 보는 일도 있으니 뭔가. 시간이 나면 낮밤 할 것 없이 텔레비전이나 보고 사는 내 인생이 어찌 보면 더 한심하다. 사람이 실 인생에 무관심하고서 그리 픽션을 탐하게 될까? 저 거짓 타령에 눈을 떼지 못하고 사는 난 무엇인가. 무용지물. 남편 밥상 차려주고, 함께 먹고, 설거지하고, 손 씻고, 물기 닦고, 로션 바르고. 그것을 세 번 되풀이 한다. 그것을 두 번만 하는 날은 그 변형을 즐긴다. 아무렇게나 한 끼 먹고, 그릇을 조금만 씻고, 손 씻고, 물기 닦고, 로션 바르고. 하긴 그게 그거다. 안 먹고 건너뛰어야 진짜 변형일 텐데. 나는 굶거나 폭식을 싫어한다. 배고픈 것도, 배부른 것도 싫다. 이렇게 오직 적당히 먹기 위해서 사는 날이 부쩍 늘었다.


매형, 뉴스 시간이네요. 동생이 뉴스 쪽으로 채널을 바꾼다. 제 댁이 몸을 풀고 친정집에 가 있는 동안 아예 우리 집으로 - 우리 집은 무엇보다 빈 방과 밥이 있다 - 퇴근하는 막둥이가 말한다.

논픽션의 단골 메뉴, 중동에서의 폭탄 테러, 이미 벌어진 다음 어쩌란 말이냐. 이래서 난 뉴스를 싫어한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되풀이이다. 하긴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도 이미 낡은 이분법이 되었다지. 창조론을 믿는 유전과학자,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줄기세포 논란의 중심에 섰던 특별한 신앙인-과학자 또는 과학자-신앙인이 그에 속하리라. 하지만 검고 흰 것이 따로 없다면? 기름과 물이 구별이 안 된다면? 모든 가치의 종말이리라. 가치, 가치.

지난여름엔 지상 최강대국 수장이 지적설계론 교육문제에 개입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미친 놈, 현대판 십자군전쟁의 주범이 실전이 모자라 이론영역까지 침범해? 남편이 난데없이 뉴스에 흥분했다.

뭘 먼 나라 뉴스 가지고 그래요?

힘을 가진 놈들의 맹신은 아주 무서운 거야. 히틀러의 반유대주의하고 한 개인의 반유대주의가 같냐고. 지적설계론이란 우회적이지만 분명 사기적인 표현이오. 신앙의 영역을 들고서 과학을 침범하겠다? 부시의 보수개신교가 문제라, 착한 늙은이가 보수개신교도라면 도덕적이고 선할 뿐이겠지마는.

것도 가부장제도만 빼고요? - 참, 애기아빠야, 너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그림 봤어? 그것으로……. 뇌관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싶어서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건 또 뭐라는 거요? 아니 그보다, 뉴튼도 창조론을 신봉했던 것 몰라요, 누님?

뉴튼이 신앙인이건 아니건 중력은 기적이 아니라 실체로서 살아있는 거지.

누난 참. 과학의 뭘 안다고 진화론 옹호자가 된 거요?

그보다, 넌 어떻게 초음파로 사람 들여다보며 사는 사람이 진화론을 의심해? 그러고도 자연과학자야?

누님, 그러네. 내가 내과라 그런가. 아니 외과 친구들 중에도 가톨릭의사모임에 열성인 경우가 많아. 확실히는 무엇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약을 처방해야 하고, 같은 약물로도 반응이 다르고, 한 알이냐 한 알 반이냐 정해야할 때 내가 무슨 수로 나를 의지한단 말이오. 나는 도구고 하느님이 역사하신다는 생각의 틀이 도움이 돼. 내가 훨씬 덜 힘들어.

자신이 없기는. 그건 네 영혼을 위한 네 신앙이지, 환자를 치료하는 과학적 사고는 아니다.

그래도, 내겐 힘이 되고 있어.

거야 좋은 일이겠다. 믿음이 널 지켜주는 한. 하지만 나 같은 무용지물은 전체 그림을 생각할 겨를이 없지. 우연적으로 발생한, 그러나 유일무이한 생명체, 그 자체로서 의미가 담겼다고 해야 겨우 살아가지. 생명 말고는 내가 무슨 가치가 있어 살아.


아니 잠깐, 이번엔 투신자살이다. 자살은 요사이 뉴스다운 뉴스도 아니다. 엽기적 연쇄살인에 밀려 제 죽는 것이 무슨 뉴스랴. 자살사이트가 어쩌고 젊은 연예인들이 어쩌고 하면서, 자살이 놀이처럼 번져가는 낌새도 수상쩍긴 하다. 열악한 환경에, 실연의 고통에…… 진부하다면 진부한 이유들. 보통 사람이라면 열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못 만져볼 재산을 두고서 목을 맨, 보통 사람이라면 올라가보지도 못할 성공에 이르러서 죽은 …… 사치라면 사치스런 이유들.

사람들은 때론 악랄하리만치 잔인하다. 여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목을 매는 것은 약을 삼키는 것과 비교해서 의지가 얼마큼 강한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약을 삼키려다 말거나, 삼켰다가 토해내거나, 목을 맨 줄을 다시 풀 확률과, 풀려 했는데 못 푼 상태에서 발이 미끄러져버리는 비극적 경우까지 죄다 노닥거렸다. 칼로 베는 방식은 아예 제외였다. 웬만해선 죽게 베지는 못한다고. 가장 강력한 의지는 투신일걸, 누군가 그러면, 이번에는 다리 난간에서 강물에 투신하는 것과 옥상에서 투신하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였다. 제1의 강자 자리는 고층빌딩 옥상에서 추락하는 방식이 차지했다. 기울기가 잡힌 순간 되돌릴 수가 없다는 점. 누군가 함께 뛰어들어 구해줄 수도 없다는 점. 한 마디로, “쇼가 아닐 다름에야” 고층옥상이 가장 완벽한 선택이라고. 상처만 입고 병신 되어 살아날 가망도 없이. 그러니 얼마나 완벽한가. 하늘을 향해 한 번 비상하는 것. 그것으로 끝이다.

뉴스란 그러나 이래저래 소용이 없다. 이미 떨어져버린 사람에 대한 소식 - 그것으로 어쩌겠다는 말이냐. 떨어진?

그러니까 이번 소식이란 바로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여자에 관한 것이다. 한 때, 아이 엠 에프로 몰락한 한 가족이 고층 옥상에서 투신했는데, 다 고스란히 살아났더라는 우스개 뉴스가 있었다. 애비는 제비족, 어미는 날라리, 자식은 비행청소년이었으니까. 저 여잔 날라리가 아니었군! 잘 좀 날아 보시지! 나는 법을 안 배워뒀나? 갑자기 아이린 카라의 불타는 눈매가 떠오른다. 가무잡잡한 피부까지 닮은 은미의 불같은 눈매가 겹친다.

페임 / 아임 고나 리브 포레버 / 암 고나 런 하우 투 플라이……

영원히 살겠다,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겠다? 갑자기 등줄기에 찬물이 인다. 설마.


하긴 은미는 한동안 조용했다. 아예 동창회 네트에서 사라진 것이다. 삼삼오오 필드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늘고, 산악회다, 해외여행이다 몰려다니기 시작할 때, 은미가 사라지고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누군가 오전 10시에 집에 전화했을 때 전화를 받는 여자는 병든 년, 돈 없는 년, 그리고 또 하나 성질 나쁜 년, 세 종류뿐이라는 우스개가 돌았다. 은미는 어느 부류에 속할까? 나는 어디일까? 프랑스 사람들은 휴가에 자존심을 건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 생각이 난다. 여름철 휴가를 못갈 형편이면, 앞문을 잘 잠그고서 휴가 떠난 빈집처럼 해놓고 뒷문으로 드나든다나. 그러다가 빈집털이 좀도둑에게 들키면, 제발 다 가져가도 좋은데, 휴가 못 떠난 사람이 있더라는 소문만 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나. 그러니 나는 10시경에 걸려오는 전화를 안 받으면 되겠다. 은미도 그럴까.


따르릉. 아침 정리가 대충 끝나고 막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르는 참이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나를 사람들은 어떤 부류라 취급할건가. 몹쓸 병이 든 것도 아니고, 돈이 아주 없지도 않고, 그럼 성질이 나쁜? 나쁜 사람이 스스로 나쁜 줄을 알랴마는, 난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럼 그만 두자. 나도 나다니는 척 하자. 전화는 끊겼다가 곧 다시 요란스레 울렸다. 설마 중요한 일이?

나는 작정을 하고 윈덱스 병과 마른걸레를 들고 앞 베란다 쪽 유리창으로 향한다. 해가 비치는 오전 이른 시간이라야 창에 난 손자국들이 선명해서 잘 보이고, 또 자국들은 한낮보다는 아직 공기 중에 습기가 많아야 잘 닦인다. 몇 개의 화분들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풀냄새가 아련히 졸음을 불러온다. 따르릉 따르르릉. 이번에는 예사롭지 않게 끈질기게 울려댄다. 전화 숨이 긴 것이 조금 불안하다. 아서라, 양쪽 집안에 노인들 계시는데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배짱은 또 뭐람. 스스로를 나무라며 문을 젖히고 수화기 쪽으로 내닫는다.


*


서울에 올라갈 수야 있겠냐.

서울 친구들은 그럼 다들 가 봤대냐?

다들은 뭐. 요 근래엔 통 소통이 없었대. 애 유학 보내놓고 마찰이 많았었다네. 은미는 애 따라 나갈 계획이었고, 남편은 결사반대고.

조기유학도 아니었다며 애 따라 나갈 건 왜. 집에서 합의가 안 되면 못가는 거지 안 그래.

남편이 못 가게 한다고 못 떠나? 이 나이에?

이부자리 보고 발 뻗는다잖냐. 아예 손발이 묶이면 꼼짝 못하는 거지.

손발이 묶이다니. 옥상 그거 아니었어?

아니 뭐 손발이 묶였다는 게 그게 아니라.

아님 뭐?

경제권이 아예 없었단 얘기지. 평생 시장비 타 쓰는 형국을 참고 살았다는 거야. 몇 대째 있는 집에서 자라, 남편이 이재에 밝아 한 재산 해 놔두고 말야.

설마. 남편 통장 고스란히 받아 챙겨 관리하는 것이 한국형 경제 아냐? 처녀 때 성 쓰지, 통장 갖지, 선진국보다도 여권이 신장된 나라에서 웬 말!

훨훨 떠난 사람 두고 무슨 뒷말들이야. 결국 날아갔네 훨훨. 아임 고나 리브 포레버 아임 고나 런 하우 투 플라이……

비보를 전해 들으며 어안이 벙벙했던 우리들은 일단 모였다. 어라? 급한 대로 연락이 잘 안된 모양인지 평소의 반도 안 되었다. 더구나 다들 제 형편 따라 문상 갈 처지가 아니고 보니, 대표로 누구에겐가 짐을 씌울 셈으로 모인 것이다.

밥이 벌써 나온다, 어쩌냐. 우리 아직……

어쩌긴, 산 사람은 먹어야지. 먹고 이야기 하자. 인생이 그리 녹녹하다더냐. 아무튼 우리 더 단단히 맘 다져먹고 살자. 아이들 어중간하게 참 어쩌라고. 짝들은 맞춰줘야 부모책임을 다하는 거지.

암 고나 리브 포레버 / 베비 리멤버 마 네임 ……

실팍한 친구의 다독거림 사이로, 어디선가 환청일까 ‘아이’를 ‘아’로 고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말 날고 싶었던 거야? 날아서 바오밥나무를 보러 간 거야?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 애가 해외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지 않았다. 아프리카는커녕 아무데로도 못 떠났었나, 설마? 나가면 나가고 떠나면 떠나지, 뭣 하러. 논픽션에 등장하면 어떻게 해, 바보같이……. 어디라고 할 데 없는 곳을 향해서 속으로 뇌이고 있다.

뭐해, 어서 먹지 않고.

무심코 한 친구가 콩나물 그릇을 내 가까이로 옮겨준다. 풋마늘무침과 자반무침 사이에서 노란 콩나물이 오늘따라 애처롭다.

그래, 맛있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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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