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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09 쇼 - <광주문학>
소설2010. 12. 9. 23:56

 

 



 

거울 앞에서 입 꼬리에 힘을 주어 웃음기를 흘려 본다. 몸과 맘이 수고로울 일을 앞에 두면, 집을 나서기 전에 꼭 거울을 본다. 아직 쓸쓸한 봄, 할아버님의 기제사가 마침 주말에 걸리다보니 여느 때보다는 맘 편하게 집을 나선다. 형님네 대문은 빼곡히 열려있고, 부엌 쪽에서는 벌써 생선 익어가는 냄새가 먼저 내달아와 코를 맞는다.


잘 계셨어요, 숙모님. 일찍 나선다는 것이 늘 늦고 마네요, 형님.

어서 손 씻고 와 앉소. 자네 형님만 뭔 죈가.

형님이 대꾸할 틈도 안 주시고 가닥을 잡으실 양이니, 오늘도 숙모님이 주인공이시다.


동서, 빨리 왔구먼. 오늘은 시간 넉넉하겠어.

고구마 색이 곱네요.

채반에 노랗게 익어있는 얇은 고구마 조각들이 내 손을 기다린다. 뒤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열어 젖혀놓아도 수건 사이로 머리카락 올올이 기름 냄새로 범벅이 될 하루가 시작된다.


어디 쓰겄는가, 밀가루를 되직하게 하소, 뽀얗게 색 내려며는. 고구만가 호박인가 너무 노랗잖은가.

소생이 없어 늘 외로우신 숙모님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런 날이면 더 외로움을 타신다. 다행히 음식 솜씨며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단정한 맵시로 젊은 여자들을 누르신다. 형님의 입장에서는 어머님이 안계시고 보니 숙모님께 상의도 하고 도움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둘이서 조금 엇박자 느낌이 든다. 숙모님은 이말 저말을 섞어 하시고 형님은 그저 시늉만 대꾸를 한다.

식혜 솥 열어볼 때 되었네. 밥풀 서너 개 떴는가.

예.

이 꼬막은 씻은 건가 아닌가. 뻘이 그냥 붙어있네.

예.

그런데 참 늦네. 몇 시야, 지금. 여섯시가 되가는데 왜들 안 와?

이번엔 내가 놀란다. 아니 웬 여섯시 말씀을. 여기 아직 육전도 안 끝났습니다. 고추전쯤 마치고 점심 상 보잖아요. 아직 점심도 안 드시고 여섯시라뇨!

박실이는 또 안 오겄지? 숙모님은 엉뚱한 말씀으로 둘러대며 자리를 뜨신다.


형님, 오늘따라 왜 저러셔요? 이 제사 때면 애기씬 시어르신 일이 겹쳐서 언제나 시골에 가잖아요. 설마 다 아시면서.

아마 기다리는 사람 생각에 시계를 헛보신 게지.


그렇게 점심상을 차리고 치운다. 다시 번철이 열을 낸다. 벌써 두부 조각들이 기름에 지글거리고 있다. 점심 후로는 숙모님이 속이 불편하시다고 소파에 누워 계시니 우리만의 부엌에 능률이 더 나는 느낌이다. 실제로 거들어주는 손이 빠졌는데도.


갑작스레 집안에 활기가 차며 숙모님이 몸으로도 부산해지신다. 드디어 서울 사는 시동생 내외가 들어선 까닭이다. 오매, 우리 원장님 오느라 애썼네. 차는 안 막혔나? 답은 거의 듣지 않으시고 바쁘시다. 술참 때가 겨웠으니 시간이 애매하지만 일단 밥상이다. 오래 서울 물 먹다보면 냄새가 너무 진하다고 할 진짜 굴비하며, 홍어, 토속적 음식이 든 접시들로 손이 바쁘다. 부엌은 이제부터는 완전히 조용할 터다. 원장조카 턱 앞에서 음식 먹이는 맛에 푹 빠지신 동안. 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진설 시간이 될 때까지다. 해마다 기제사 때 되풀이 되는 훈계가 시작되면, 할 말은 아니지만 숙모님 입엔 작은 게거품이 돋는다. 게거품은 싸울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그래서 안다. 신바람이 나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진설을 위해서, 심지어 상에 올리는 순서까지 정하시는데 어쩌랴. 그것이 이 근년에는 순서가 조금씩 섞이는데, 그걸 종잡을 수가 없다. 좀 있으면 핀잔의 시선이 전자빔처럼 따갑게 공간을 가를 것이다.


아니, 그런데 큰 변형이 생긴다. 오늘따라 진설 시간이 되어서도 원장조카 시선만 붙잡고 계시는 것이 이상 일이다. 제기들이 죄 닦이어 줄을 서 있어도 소용이 없다. 고개는 아예 비뚜름히 고정되어 있다. ‘한 시 오 분 전’이란 별명의 여학교 때 선생님 생각이 난다. 다른 점이라면 그 선생님은 ‘한 시 오 분’과 ‘오 분 전’을 가끔 바꾸셨던 것이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조카 쪽으로 굳은 고개. 주름만 빼면 표정이랑은 영락없이 연인을 바라보는 드라마 주인공의 모습이다. 숙모님이 오 분 전이면 조카는 계속 오 분을 유지해야 서로를 보게 되는 것이라 그것이 썩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뉴스 시간이라도 되면 좋겠다 싶다. 


형님이 그냥 알아서 하세요. 조금 아까부터 부엌으로 섞인 막내동서가 조바심을 낸다.

숙모니임, 저희들이 대충 올려 보아요? 기다리다 못해 형님이 묻는다.

대충이 무에야. 자네들 할아버님 들으실라. 시간이 이르잖아.


서너 시간 서울사람 곁에 앉아계시더니만 신기하게도 서울 말씨에 가까운 억양이 나오신다. 심지어 모음들이 바뀐다. ‘이거 묵어보소’ 라고 할 계제면 ‘요거 먹어 봐’가 된다. 입술을 동그랗게 하면 나이 불구하고 조금 더 귀엽다. ‘응’ 할 자리에는 ‘잉’이라 하시며 웃음기를 흘린다. 원순모음과 평순모음이 둘 다 귀여운데 사용되니 이상하다. 이 말은 순전히 내 직업병에서 온다. 국어선생 기질이 어디 가랴.


신기하셔. 형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들으시려고요.

하긴. 귀도 참 밝으시니 조심하자.

형님 그런데 요즈음 좀 힘드신 일 있어요?

뭐 그냥. 사는 것이 쇼 같아서.

아무 일 없어 보이는 안정감을 특징으로 하는 형님의 입에서 조금 놀라운 단어가 튀어 나온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왠지 조금 뜨끔하다.

아니 내 말은 누구나. 조금은 억지로 참기도 하고.

그럼 속내 다 내놓고서야 어떻게 매끄럽나요? 기름칠을 좀 하는 거죠. 입가에 다시 한 번 힘을 준다. 여기는 시댁이다. 불편해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 사이.

그 정도가 아니라 내 말은. 숙모님 어제 오셨잖은가. 여전히 사뿐 걸음이시긴 한데, 뭔가 조금. 뭐라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암튼 근년 들어 느닷없이 가리는 음식들 땜에 옆에서 손을 못 쓰니 참.

거야, 티비가 범인이죠 뭐. 소가 농약 묻은 풀을 뜯어 먹는다니 우유 못 마셔, 허리둘레를 줄여야, 탄수화물을 줄여야 장수한다는 뉴스에 떡도 뭣도 못 먹고. 막내는 범인을 따로 정한다.

하긴, 내가 괜한 걱정이네. 총하시니까 뉴스 따라 사시지.


찜솥이다 냄비들이다 번철 가에서 눈을 들어 잠시 숨을 쉰다는 게 어째 말들이 샌다. 숙모님 쪽에선 반응이 없다. 막무가내로 당신 조카만 올려다보고 계신다. 살짝 미소 짓다가 조금 찡그리다가. 몇 미터 거리에서, 식당과 거실 사이 커튼 사이로 건너다보니 표정일랑은 그대로 영화다. 디카든 셀카든 등장해야할 판이다.


평소에도 저러세요?

동서는 새삼. 당신 감정에 솔직하신 거지. 지난번엔 며칠 화장실 출입 못한다고 자네한테 전화하셨다며?

거야 내 차로 움직이실까 해서……. 

그래도 오밤중에는 심하시지.

겁을 내셨더라고요, 응급실 가야하는가 싶어서. 가진 않았고요.

겁이란 것이 무서움일까 욕심일까? 암튼 오늘은 우리끼리 그냥 해보세.


사실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조율시이로 시작해 첫째 줄을 다 놓아도 여전히 꼼작 않고 조카만 쳐다보시다니. 시동생의 입장에선 숨이 막힐 지경이라. 손을 끌로 내려와서 진설을 도와달라고 하자 숙모님은 갑자기 깨어나신 듯하다.


감이 곶감이제 뭣들 하는가?

요즘 세상엔 시절이 좋아 감과 곶감이 늘 함께 있다 보니 문제다. 평상시에 숙모는 감이 있어도 곶감자리 다음에 반드시 배를 올려 ‘법에 맞게’ 하라던 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곶감 다음이 나란히 감이라신다.

어머나, 생선 배들이 왜 이쪽인가? 거 산적이 빠졌구먼, 마저 좀 하지. 어머나, 꼬막 색은 왜 이래, 새꼬막을 샀던가?

산적은 닭찜이 있다고 말라시고, 꼬막 껍질은 덜 깨끗하다고 몇 번을 물리셨잖아요.

어머나, 오늘 내가 그랬어? 내가 요새 이러네. 통 기억이 읎어서는.

거야 저희들도 그럽니다. 숙모님 건강 염려는 마세요. 아까 보니 손도 따뜻하시고, 혈색도 아주 좋으시고요.


혈색 -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시동생의 입에서 의사의 전문용어로 혈색이란 말이 튀어 나오자 그것이 울타리를 넘는 신호였나 보다.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키시다 말고 숙모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눈을 이상스레 치뜨시는 듯, 새침해져 말없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신다. 우리는 또 어린양이 시작되셨나 보다 하는 생각에 별 신경을 안 쓴다. 무엇보다 나머지 진설을 마쳐야 하고, 우선이라도 부엌 정리를 하고 또 저녁 밥상 차릴 준비를 해야 하니까. 우리 집은 제사 중에 진찬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다 진설해놓고 진찬 때는 메만 올린다. 그리고 초헌 절차가 끝나면 그대로 음식을 드시리라는 여유 시간에 자손들도 저녁을 먹는다.


진지 드시지요.

식사들 하세요.

거실에 큰상 펴고 남정네들이, 부엌 식탁에는 여자들이 이런저런 의자들 보태서 둘러 끼어 앉는다. 숙모님은 어른대접으로 거실 상에 자리한다. 늘 시동생 옆자리다. 아니면 반찬 얹어주시느라 다른 사람들이 수저질하기가 불편할 정도가 되니까. 요거 맛있어, 요거도. 그런데 안 나오신다.


자네가 좀.

형님의 말 따라 숙모님 모시러 들어가 보니 그만 말이 안 나온다. 당신의 빨간 색 바바리를 내려놓고 - 원래 놀라운 옷 치례를 하신다. - 웬 잔잔한 꽃무늬치마에 발을 꿰려는 몸짓으로 버둥거리고 계시니. 형님이 오늘 무색으로 갈아입느라고 벗어 둔 모양인데.


형님, 아니 원장님 좀 와보세요.

급히 물러난 나는 우선 시동생을 불렀고, 밥상에 막 앉아있던 사람들이 방으로 내달으려 하자 시숙이 말렸다. 뭐 별일이시겠나. 다들 저녁을 먹어야 마저 제사를 지내지. 원장도 식사나 하고 들어가 보소.


숙모님은 완전히 정신을 놓으신 것 같다.

이그, 이그 내 농이 어디 간 거야? 난데없이 애들 옷장을 보며 탓을 하신다. 앉은걸음으로 농을 미는 시늉을 하니 겁이 날밖에.

숙모님 농이라뇨. 여기 애들 오면 쓰는 방이잖아요. 숙모님 댁 아니고, 저희 집.

자네네? 내가 그럼 왜 왔어?

할아버님 기일에 오셨잖아요.

그랬어? 그런데 왜 안와? 우리 김 원장 왜 안와?

다시 또 시작이시다. 거의 성화다. 그렇게 몇 번씩을 묻는데 시동생이 들어와 우릴 내보낸다.

걱정 마시고 우선 식사들…….


그렇게 성급해진 마음으로 저녁을 해치우는 동안 귀는 거실로 쏠린다. 물소리 그릇들 소리 사이로 남정네들 이야기가 심상찮게 건너온다. 시동생이 서둘러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일어서는 모양새를 보니 일단 응급실로 가야한다고 결정하나보다. 하필 제삿날 숙모님이 이러셔서 좀 뭣하지만 별 수 있나, 뭐 그런 논리인가 보다. 그리고 산 사람이 우선인 것은 맞다. 숙모님 입장으로는 시아버님 기일에 무슨 동티인가. 어쨌거나 산 며느리가 우선이다. 시동생이 숙모님을 모시고 응급실 행이다. 이곳 의대 출신이라 병원이야 훤하겠지만, 노인 모시고 혼자서는 힘들 것이니 부부동반이다.


크게 도움이 안 되기는 동서가 나보다 더하다. 설거지는 늘 내 차례다. 막내동서가 서열 잘 안 지키는 데 대해서는 숙모님이 이상하게 너그러우시다. 여전히 부엌에서 물소리 그릇소리로 실제인가 이명인가 혼동하고 있을 때 전화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라 더 크게 들리는가. 시숙이 전화 받는 음성만 들어도 일이 예상보다 안 좋은 것 같았다.


거 병원 상황이 썩 안 좋다네. 엠알아이도 해야 할 거라요. 원장 네는 오늘 못 올라가려나 보오.

그건 잘 되었네요. 한 밤중에 차 몰고 가느니.

당신도 참. 시동생 걱정하길 이녁 애들 걱정 같소.

거야 누구라도 밤운전은 좀.


자시에 시작한다는 제사지만, 어머님 살아계실 때 벌써 일찍 차리기 시작한 내력이다. 숭늉이 올라간 지도 한참이고 자정이 되기 전에 벌써 철상이다. 사실 시동생이 의사로서 의심하는 대로 심각한 그 증세의 초기라면 큰일이다. 요조숙녀의 경우에 치매 가능성이 더 많다던 설이 맞나? 그런 불안한 상황이다 보니 함부로 내던져지는 그릇들만 불쌍타. 수저 젓가락이며 국자 등 쇠붙이들을 따로 걷어 내다말고, 컵이나 잔들은 왼쪽으로, 오른 쪽은 사기그릇이라는 규칙도 오늘따라 우왕좌왕이다.


저 여보, 그런대로 일단 퇴원하실 것 같다는 군요. 그러니까…….

다시 시숙의 전갈에 형님은 시동생 내외까지 재울 잠자리 준비에 정신이 없고, 나는 한없는 그릇과 씨름한다. 손아래 동서는 이 대단원이 끝날 즈음에나 숙모님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나머지는 나중에 형님에게 들은 대로다. 밤이 늦었다고 형님이 자꾸 밀어내는 바람에 병원 간 사람들을 채 기다리지 않고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밤으로 일단 퇴원은 하셨단다. 입원실이 마땅찮고, 또 응급상황도 아니고 해서. 그런데 분명 뇌파에 뭔가는 있더란다. 그래서 숙모님은 김 원장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서 요양병원에 가시게 되는 거란다. 형님은 마리오네트마냥 김 원장이 김 원장 친구에게 가라는 대로, 김 원장 친구가 또 어디로 가라는 대로 여차 여차 날을 받아서 숙모님을 모시고 가면 되는 거란다.


*


숙모님이 나흘 밤을 요양병원에서 보내는 동안 나는 그곳을 찾을 시간이 절대로 없었다. 금요일엔 잠시 시간이 났지만 숙모님 핸드폰 구입을 내가 맡아서 그 일로 시간이 빠듯했다. 토요일이 되어서야 면회시간 맞춰 찾아간 나에게 환자의 첫마디는 완강하시다.


이 바보들, 더러운 것들과 여기서 못 지내.

그렇게 까진 예상을 못했던 터라 말문이 막힌다.

자네들 귀찮게 안할 것이니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내나 같이 말하다가 ‘당신 누구요’ 그러는 바보가 없나, 밥 먹다 토하고, 기저귀에…….


우선 나는 핸드폰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시동생과 통화하시라고 핸드폰을 건넨다. 1번 하나만 누르시면 시숙, 2번은…….

그러는 순간 내 핸드폰이 울리더니 시동생이다. 여기 숙모님, 마침 김 원장이네요.


전화를 바꿔드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다. 목소리를 금세 바꿔서 저리 나긋나긋 통화하는 숙모님은 멀쩡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쩌면 이것도 내 의무일까. 시동생이기 전에 의사인데, 의사에겐 그러니까 실상을 말해주어야 한다. 숙모님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첫째, 너무도 깔끔하시다. 둘째, 우리들 모두 생활에 균형이 무너진다. 요 며칠 사이 형님은 숙모님이 평소에 드시던 약 갖다드리랴, 다음날은 성당의 월보 갖다드리랴 정신없었을 것이다. 왜 한꺼번에 부탁을 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어렴풋이 안다. 그것이 숙모님의 방식이다. 이태 전에도 어지럽고 몸이 가라앉는다고 요양병원에 한 스무날 계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날마다 무슨 핑계로 사람들 오게 하시고, 병실 내에서 공주다 각시다 하는 별명을 들어가며 사뿐 걸음으로 병원생활을 즐기셨다. 누군가 해온 음식을 다음 찾아온 누군가에게 자랑하시며 나누어 드시면서. 그러니까 장기입원으로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풀죽어있는 다른 할머니들을 더 풀죽이면서 숙모님은 기세가 살아나셨다.


세상의 기운은 온이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많이 가지면 누군가에겐 모자라다. 기운을 돈이나 권력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많이 가지면 누군가에겐 모자라다. 욕심 중에 기운 욕심이 제일 큰 욕심 같기도 하다. 호주에선가 인류의 수명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수명에도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고 하더니. 하지만 퇴원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비겁하게도 의무를 접는다. 아예 둘째네 의견은 없는 편이 낫다. 애들 아버지가 일 년이면 파견근무 나간 날이 더 길기 때문이다. 또 집안 장손과 의사의 결정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몇 달이 흐른 지금 이 유난한 더위 속에서 숙모님은 어떻게 사시는가. 심기증이라고 하는, 쉬운 말로 건강염려증이라는 병 때문만으로 저리 되신 양반. 병이 아니기에 약도 없는, 아프지 않기 때문에 낫지도 않는 병, 마음의 병. 거식증에 가깝게 몸을 말려가며 어린양이 조금 과했던 숙모님. 십여 년 전과 비교하면 20 킬로그램은 족히 줄었을 몸무게가 더 줄었을까 무섭다.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진짜 의사들에게 ‘걸려서’ 환자복을 입고 지내노라면, 옷맵시도 음식 솜씨도 다 무슨 소용인가. 그 ‘더러운’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되면 숙모님의 어린양은 과녁을 빗맞힌 셈이다.


다 저녁에 전화다.

낼 숙모님 모시고 나와서 계곡에나 잠깐 가볼까 하는데 자네 시간이…….

예, 그러죠. 아직 방학이니까요. 수박이나 미리…….

준비는 되었고. 쇼는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녀.

수더분하기만 한 형님이 전화기를 놓으며 흘리는 말에 흠칫 놀란다.


광주문학 2010겨울호, 186-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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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