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24. 1. 15. 18:40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 프란츠 카프카 1904    

 

*                                                                    

의 시작을 생각해 보았다. 기억할 수 없을 유년기 어느 날 ㅁ이라는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시작되었을 말, 어머니를 향했을 그 말 그 언어가 한국어였다. 말을 애교 있게 재잘거리는 귀여운 아이는 아니었던 것이 말과 관련한 처음 기억이다. 첫 아이였으니 또래는 없었고, 온통 어른들로 둘러싼 환경에서 사실은 내 ㅁ자로 시작되었던 어머니 찾기도 쉽지 않았다는 기억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하긴 생명체라면 모두 적응을 통해서 살아남을 것이다. 세상은 경이 그 자체였고 아이에게 변별력은 최소 능력, 사물과 말의 연결은 엄청난 어려움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며 사물들을 어떤 소리로써 지칭할 수 있단 말인가. 어른들의 팔에 안겨 시장을 구경하면서 김이 모락모락 쪄서 팔고 있는 고구마를 어찌 고구마라 말하며, 뜬 눈알 때문에 무서워 보이는 생선들을 뭐라 칭할 것인가. 한번은 소금 가게 앞 ‘소금팝니다’라는 비뚠 글자를 읽고 와서는 소금을 보면 ‘소금팝니다’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더란다. 그렇게 그림책도 시원찮던 시절, 무언가를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이 우선이었다. 아무 말 않기 – 그것이 상책이었다. 말 수 적은 아이는 그다지 흠은 아니었다. 머피의 법칙은 존재한다. 애가 어른 말을 먹어버리네! 어른들은 말을 먹어버리는 것이 반항이 아니라 수줍음 때문인 것을 잘 몰랐다.

 

학교에 들어갔다. 글자로 말하기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글자를 익히자 글자로 말하기가 말로 말하기보다 나았다. 글자로 말하기는 순발력이 없어도 괜찮았고, 글자로 말하면 기특해 했다. 말을 먹어버리는 아이에서 글을 좋아하는 아이로 살짝 변신하면서 말에서 조금 해방된 느낌이었다. 글자는 질문 같은 요구사항도 없었다. 글자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글자들의 집합, 책은 제법 편한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고립이 된다는 것 따위는 누구도 관심두지 않았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어른, 대학생 말이다.

독문과 대학생 – 왜 하필 독문과? 중고등학교 시절,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겠지만 운동장 활동을 면제 받았던 터라 도서실은 무궁무진 소설책들이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명문이라고는 해도 240명이 졸업한 지방도시 중고등학교의 작은 도서관이 더 이상 소설책들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칸트가 손에 잡혔다. 『순수이성비판』 - 한 줄도 읽어낼 수 없었을 때, 나의 기본 지식의 결함과 미진한 독해력 탓을 하지 않고 번역문 탓을 했다니. 무지가 용맹이었다. 독문과로 진학해서 기필코 이 글을 원전으로 읽으리라. 고백하건대, 독문과 시절 내내, 대학원 시절에도 그 뒤로도 칸트의 원전을 통째로 펼쳐보지 않았다. 근시안인 내게 독일어는 눈앞의 숙제였고, 독일어로 쓰인 소설들에 푹 빠져버렸다.

 

소설들은 경이였다.

 

인생의 동반자, 반세기를 함께 한 동반자가 곁에 있지만, 나의 뇌 속에는 소설들이 녹아 살고 있다. 어려서 만났던 글자들은 뇌의 딱딱한 표피를 뚫고 증발해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하기, 철학이 녹아있는 독일 소설들은 소설 이상이었다. 칸트 철학은 2천년 본질주의적 존재론에서의 대전환이었고, 비로소 개별자가 된 인간들이 진리와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 인간들이 소설 속에 살아있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혁명적 사고는 2차 대전 직후 빈곤한 독일 정신세계에 폭발적으로 수용되었다. 실존에 대한 탐구는 무궁무진한 보고인 것 같았다. 아니, 주체로서가 아닌 구조로서의 인간! 욕망 또한 타자의 욕망! 현대독일소설은 작은 뇌세포 하나하나를 풍선처럼 부풀게 하는 작용으로 들끓었고, 다른 어떤 것, 현실 속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꺼버린 아이러니로 작용했다. 겉으로는 숨길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내면은 불균형의 존재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소설이자 문학이자 예술의 세계는 언어종속적인 무엇이라는 진리가 뇌를 때렸다. 카프카가 말한 의미에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말이었다. 외국말로 된 외국 소설들을 파먹으며 살아가던 나는 스멀스멀 꼬리가 돋아나는 느낌에 화들짝 소스라쳤다. 다른 누군가가 사냥해 놓은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말로 내 글을 쓰고 있었다. 소설이라는 이름의 무엇을 쓰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시작의 무서움을 모르는가. 누군가가 읽을 수도 있는 글자들을 어쩌라고 내놓는가! 내가 나이고 싶어서 나의 말로 나의 글을 썼노라는 변명은 서툴고 못나기 그지없었다. 한국문학의 대양에 수영의 초보 지식도 없이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뛰어든 이방인이었다. 잘해야 의붓자식이었다.

 

겁이 났다. 가장 무서운 것은 독자라는 존재다. 미지의 누군가가 글을 읽는다는 상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아니, 누군가 읽기나 할까, 그것도 무서웠다. 글을 쓰는 작가들 중에도 더러 지인이 생겨났고, 누군가는 스스럼없이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솔직히 독자로서 정말 재미는 없더군요! 긴박한 갈등이 있어야……. 엄청 고마운 일이었다. 읽었으니까.

그렇게 소위 문우들을 만났다. 내가 공부했던 존경하는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서독과 세계 PEN International 에서 활동했다는 기억으로 PEN을 기웃거린 늦깎이는 이화동창문인회라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졌고, 서울 그리고 고향에서도 더러 동지들을 만났다. 누구나 문학소녀였다는 그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의 선후배들과도 의미 있는 공간을 나누게 되었다. 의미는 늘 무의미를 동반하지만, 어찌되었건 큰 범주로 문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외국문학 연구보다는, 취업 효율성 떨어지는 강의보다는 소박한 소설가로의 변신이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피는 피다. 정신의 묽은 피는 몸속의 빈혈과 마찬가지로 현기증과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전혀 괜찮지가 않다. 짝사랑 출판사는 무심하고, 자존심과 품위를 무기로 활동을 하는 위상 드높은 작가를 만나기라도 하면 무참히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나이하고도 키하고도 비례할 리 없는 낮은 함량의 속아지 때문에 앓는다. 그러니까 문제는 나다. 덜 떨어진 나다.

우물 안 개구리, 개구리도 되지 못한 우물 안 올챙이 – ‘우올’로 생긴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하늘과 해를 달을 별을 볼 수는 있겠지. 늘 평강을 빈다! 스스로 안부를 한다. 그런데도 편치는 않다. 외부의 어떤 무엇보다 빈약한 글 때문에 앓고 있다. 글과의 만남은 진정 숨쉬기의 단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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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 『아름다운 만남』, 이화동창문인회, 317~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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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27. 23:02

자유를 증오한다

 

 

자유를 동경했다, 동경했었다.

 

1997년 겨울, 세 번째 독일에 갔던 그때만 해도 내게 자유는 아름다운 가치였다. 저 남쪽 어느 대학의 교수를 우연히 만난 것은 일종의 인문학 강좌에서였다. 쾰른에 거주하며 뷔페탈 대학에 오가느라고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코앞의 별다른 과제가 없다 보니 야간의 가벼운 강좌도 기웃거리다 유명한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갔던 참이었다. 연사였던 그 교수는 자신의 책과 논문들을 읽었다는 이역만리 한국의 시원찮은 독문과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이 기분 좋은 일에 속하겠지만, 이상한 질문을 했다. 마치 뭣을 구하러 가정과 애들이 있는 나이 든 여자가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실제로 전문자료를 구하게 위해서 독일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는 시대였으니까. 또 이미 교수자리에 있는데 - 독일에서는 교수 자리가 대단해서 그랬겠지만 - 뭣 때문에 애써 독문학의 본고장을 쓸쓸히 배회하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어차피 독일 사람들처럼 독일 정서에 함몰되어 독문학을 완벽하게 체득할 수도 없으면서? 문학이 뭐라고?

질문의 저 깊은 회의를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입술에 달고 있었다. 일상으로부터의, 강의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어쩌면 생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혹은 학교당국의 연구비로, 연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를 어찌 예찬하지 않았겠는가.

 

추상적인 자유는 아름다운 무엇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건배라도 할 일이 있으면 자유를 위하여, 라고 외칠 뻔도 했다. 이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시장경제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해온 우리들, 이 아니 자랑스러운가, 라고. 자유시장경제가 자유민주주의와 합심해서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우리들로부터 온갖 원래적 자유를 침탈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나는 막연히 자유를 예찬하고 있었다.

 

시장경제체제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하므로, 다른 말로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기업경제다. 기업경제가 자유를 보장받는다. 이 자유는 상대에게 창끝을 겨눈다. 창끝은 가진 자유가 적은 사람의, 창을 든 손은 가진 자유가 넘치는 사람의 몫이다. 기업의 순이익이 상승해도 노동자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최악의 경우, 기업이 투자는 미루면서 몇 년 하다가 타산이 안 맞다 하면서 손을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잘 준비된 시나리오만 있으면, 경영위기를 서류상으로 증명만 하면, 문 닫을 권리가 생긴다. 사람 내쫓는 것도 권리가 된다. 기업의 자유는 노동자들을 단박에 해고할 자유까지를 말한다. 자유가 보장된 세상이 그렇다.

 

이러고서 자유를 예찬해야 하다니. 나는 언젠가부터 자유를 증오한다.

원론적으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를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상충이 일어난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

 

고도성장의 시대에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 했다. 상당 수 자수성가를 꿈꾸던 사람들은 계층 상승을 이루어 냈다. 계층 상승을 이루다 - 이 말 자체가 사회에 상존하는 계층의 구분을 인정하는 씁쓸한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꿈을 준다. 자유 경쟁을 통해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꿈을. 경쟁할 자유? 그것도 자유인데 경쟁에서 낙오된 것은 낙오된 자의 무능이다, 라고들 한다. 자유 경쟁이란 어불성설이다. 같은 조건이 아닌 자유 경쟁은 자유 경쟁이 아니다.

 

느닷없는 생각. 내가 자유 경쟁으로 대입을 뚫었지만, 딸을 낳으면 꼭 이화여대에 보내겠다는 우리 어머니의 성화와 딸을 무슨 대학공부 시키냐는 다른 어머니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나는 분명 무심한 어머니의 딸 대신에 대학에 합격했을 것이다.

 

나의 자유는 많은 사람들의 부자유를 담보로 하기가 십상이다. 내가 마시는 물과 먹는 쌀은 누군가의 부자유의 대가이다. 쉬고 싶어도 하기 싫어도 물과 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쏟은 노력과 그 일의 결과다. 그들이 내게 물과 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과 가족의 생계비를 벌고자 했을 뿐이더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를 대가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퍼 쓴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 대가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내 자유를 담보로 나와 가족의 생활비를 버는 노력이 그 생활비를 충족하지 못할 때, 나는 내 자유를 다 내어 주고도 먹고 입고 사람답게 살 자유 - 인격을 유지하면서 살 자유 - 를 건지지 못한다. 내 자유는 저당잡힌다,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이 자유시장경제 체제 내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자유를 증오한다. 증오해야만 자유를 누릴 심보를 줄이게 된다.

자유를 누리고픈 심보가 문제다. 나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는 상대를 보면, 나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상대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은커녕 말도 자유롭게 못할게 뭔가, 하지만.

 

내가 자유를 느낄 때 그 자유가 온전히 내 몫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닐까. 내가 덜 자유로울 때 나 아닌 타인들의 자유가 덜 침해받으리라는 것이 공식이니까. 지구상에 자유의 부피와 무게는 일정한데, 내가 덜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누리는 자유만 해도 73억분의 1, 그 만큼의 자유로 만족하려면 아예 자유를 외면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지구는 온통 인간들의 소유물만도 아니다. 셀 수 없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의 자유는 인간들의 자유의 희생이 되고 있다. 땅과 물 또한 인간들의 자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태고의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미식의 자유를 위해 커피재배 단지로 변하고, 사육동물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변해간다.

 

자유라는 가치를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증오한다, 자유를. 원래는 꿈꾸었던 아름다운 가치, 자유를.(15.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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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0. 『바람으로 별빛으로 또 가슴으로』, 이화동창문인회, 개미, 230-233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27. 23:01

더불어 살기

 

오랜만에 강의를 준비했다. 독문학 강의 몇 십 년을 늘 낯설어하며 결국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었는데. 그 뒤 외국인대학생들에게 교양과목 한국어강의를 몇 학기 했었지만 그건 말하자면 강의는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인문학 - 스무 개의 강의로 이루어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 인문학 강좌라 했다. 그 중 두 강좌를 맡게 되어 제목을 결정하기에 앞서 내가 어느 속성에 속하는가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무명이지만 소설가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강의를 할 수 있는 소설가로는 어림없다고 느껴졌다. 어쨌거나 독문학 분야에서라면 너스레를 떨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망설여졌다. 인문학이 쓸모없다고 홀대 받으니까 권장하는 이런 (억지)강의에서 - 물론 자발적인 수강생들의 숫자는 예상 보다 많아서 흐뭇하기까지 했다 - 전문적인 독문학 강의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인류의 지적 진화와 사회의 발전 단계’라는 주제로 1)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2) 인간에게서 물질에게로 라는 강의 제목을 잡았다. 마음으로는 두 번째 강의에 역점을 두기로 하면서, 물질이, 물질의 풍요가 어떻게 인간을 ‘삼켜버리게’ 되었는가를 역설하고 싶었다. 초봄의 일이었다, 강의 계획은.

 

그리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가 현실이 되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그 정도면 얼마나 좋았을까.

강의는 6월이었지만 말하면서 속으로는 울었다. 물질을, 돈을 숭배하는 우리의 가치관이, 교황님의 말씀처럼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가 몰고 온 참극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인문학 강의가, 무슨 소설이, 무슨 시가…….

 

우리는 먹고 사는 일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의를 끝냈다. 아프리카 최빈국 에티오피아는 커피를 수출한다. 하지만 커피 농장 노동자의 하루 평균임금이 1달러도 안 된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무리 높게 잡더라도 소비자 가격의 1%도 되지 않는다. 유엔식량기구의 발표대로라면 오늘날의 농업시스템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일일 성인 기준 2,200칼로리로 계산해서 120억 인구가 먹고살 수 있는 양이다. 현재 세계 인구는 71억5,500만 명이다. 그러니까 식량이 절반 가까이 남아도는데, 매일 기아로 5만7000명이 죽고 8억4,200만 명이 기아상태라고 한다. 기아로 죽는 사람은 암살당하는 것이고, 살인자는 동족을 잡아먹는 식인적인 ‘글로벌’ 경제 질서다.

 

이 경쟁에서 질 새라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한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심한 수준이다. 스위스의 1,636시간과 비교하면 엄청나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시민계급은 사유와 학문이나 하고 노동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개신교에서 노동은 ‘신의 소명’이 되었다. 인문주의 시대에는 인간은 주체요 자연은 객체로서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과학 기술이 전권을 쥐더니 인간노동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추출하는 (귀)신이 되었다. 우리는 컨베이어벨트의 리듬이 명령하는 대로 정확히 인간노동을 제공해야한다. 그러므로 인간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저열한 것이다.

 

노동은 소득과 비례하지도 않는다. 미국 CEO의 연봉이 일반 사원 평균 보다 331배라고 한다. 1983년에는 46배였었는데. 우리나라도 어느 그룹 회장은 301억 원, 다른 어느 그룹 회장도 140억 원을 급여로 받으셨다고 한다. 대기업 일반 직원들 평균 연봉의 500배, 200배에 해당한단다.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 이근호의 연봉이 178만8000원으로 이번 월드컵 출전 선수 700여 명 중 최하라고 했을 때 우리는 (군인이라서 당연한 일인데도) 다 놀랐다. 선수들 중 최고 연봉 742억 원은 4만 배, 우리나라 선수 최고 연봉 40억 원도 2천 배가 넘는다니 ‘살인적인’ 격차다. 군인들 상호간도 예외가 아니다. 창군 당시 이등병과 대장의 월급 차이는 30배였지만, 지금은 200배라고 한다.

 

노동시간은 삶을 위한 필요 정도로 규제되어 마땅하다. 생명과 안전 그리고 환경 관련 규제는 강화되어도 모자라다. 필립 제닝스 국제사무직노조연합 사무총장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규제완화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올드 버전이며,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친다. 규제완화가 아니라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대도 우리 코끝엔 ‘474목표’라는 홍당무가 걸려있다. 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말이다. 지금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라 해도 대부분의 4인 가족 가정이 연 1억을 전혀 체감하지 못한다. 4만 달러 소득은 어느 계층 소수에게만 집중될 것인지? 허무한 꿈이다.

 

우리는 경쟁이 성공의 열쇠라고 교육받았고 또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열매 많은 것이 곧 진리라는 생각,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값있는 무엇, 태환권이라는 생각,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라는 생각이 미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 초창기 교육자들의 정신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행복한가? 이럴 때엔 노자의 ‘절학무우’가 떠오른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그 구절을 순 한글로 번역하시면서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라고 쓰셨다.

 

독일어에서는 경쟁사회를 ‘팔꿈치사회’라는 단어로 말한다. 동료를 친구를 심지어 형제를 팔꿈치로 젖히고서야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 - 결국 승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승자의 팔꿈치에 밀려 떨어져나간 많은 패자들이 함께 누렸어야할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구상의 자원도 재화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봉건 피라미드 위에 ‘신 대신 돈이 자리한’ 시대에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빈곤 못지않게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 인구 10만 명 당 33명,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연속 8년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 - 우리는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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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20. 「더불어 살기」, 『어디쯤일까』, 이화동창문인회, 개미, 128-131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5. 10. 11:57

 

자유를 증오한다

 

 

자유를 동경했다, 동경했었다.

1997년 겨울, 세 번째 독일에 갔던 그때만 해도 내게 자유는 아름다운 가치였다. 저 남쪽 어느 대학의 교수를 우연히 만난 것은 일종의 인문학 강좌에서였다. 쾰른에 거주하며 뷔페탈 대학에 오가느라고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코앞의 별다른 과제가 없다 보니 야간의 가벼운 강좌도 기웃거리다 유명한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갔던 참이었다. 연사였던 그 교수는 자신의 책과 논문들을 읽었다는 이역만리 한국의 시원찮은 독문과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이 기분 좋은 일에 속하겠지만, 이상한 질문을 했다. 마치 뭣을 구하러 가정과 애들이 있는 나이 든 여자가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실제로 전문자료를 구하게 위해서 독일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는 시대였으니까. 또 이미 교수자리에 있는데 - 독일에서는 교수 자리가 대단해서 그랬겠지만 - 뭣 때문에 애써 독문학의 본고장을 쓸쓸히 배회하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어차피 독일 사람들처럼 독일 정서에 함몰되어 독문학을 완벽하게 체득할 수도 없으면서? 문학이 뭐라고?

 

질문의 저 깊은 회의를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입술에 달고 있었다. 일상으로부터의, 강의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어쩌면 생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혹은 학교당국의 연구비로, 연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를 어찌 예찬하지 않았겠는가.

추상적인 자유는 아름다운 무엇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건배라도 할 일이 있으면 자유를 위하여, 라고 외칠 뻔도 했다. 이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시장경제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해온 우리들, 이 아니 자랑스러운가, 라고. 자유시장경제가 자유민주주의와 합심해서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우리들로부터 온갖 원래적 자유를 침탈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나는 막연히 자유를 예찬하고 있었다.

 

시장경제체제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하므로, 다른 말로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기업경제다. 기업경제가 자유를 보장받는다. 이 자유는 상대에게 창끝을 겨눈다. 창끝은 가진 자유가 적은 사람의, 창을 든 손은 가진 자유가 넘치는 사람의 몫이다. 기업의 순이익이 상승해도 노동자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최악의 경우, 기업이 투자는 미루면서 몇 년 하다가 타산이 안 맞다 하면서 손을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잘 준비된 시나리오만 있으면, 경영위기를 서류상으로 증명만 하면, 문 닫을 권리가 생긴다. 사람 내쫓는 것도 권리가 된다. 기업의 자유는 노동자들을 단박에 해고할 자유까지를 말한다. 자유가 보장된 세상이 그렇다.

 

이러고서 자유를 예찬해야 하다니. 나는 언젠가부터 자유를 증오한다.

원론적으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를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상충이 일어난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

 

고도성장의 시대에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 했다. 상당 수 자수성가를 꿈꾸던 사람들은 계층 상승을 이루어 냈다. 계층 상승을 이루다 - 이 말 자체가 사회에 상존하는 계층의 구분을 인정하는 씁쓸한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꿈을 준다. 자유 경쟁을 통해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꿈을. 경쟁할 자유? 그것도 자유인데 경쟁에서 낙오된 것은 낙오된 자의 무능이다, 라고들 한다. 자유 경쟁이란 어불성설이다. 같은 조건이 아닌 자유 경쟁은 자유 경쟁이 아니다.

느닷없는 생각. 내가 자유 경쟁으로 대입을 뚫었지만, 딸을 낳으면 꼭 이화여대에 보내겠다는 우리 어머니의 성화와 딸을 무슨 대학공부 시키냐는 다른 어머니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나는 분명 무심한 어머니의 딸 대신에 대학에 합격했을 것이다.

 

나의 자유는 많은 사람들의 부자유를 담보로 하기가 십상이다. 내가 마시는 물과 먹는 쌀은 누군가의 부자유의 대가이다. 쉬고 싶어도 하기 싫어도 물과 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쏟은 노력과 그 일의 결과다. 그들이 내게 물과 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과 가족의 생계비를 벌고자 했을 뿐이더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를 대가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퍼 쓴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 대가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내 자유를 담보로 나와 가족의 생활비를 버는 노력이 그 생활비를 충족하지 못할 때, 나는 내 자유를 다 내어 주고도 먹고 입고 사람답게 살 자유 - 인격을 유지하면서 살 자유 - 를 건지지 못한다. 내 자유는 저당잡힌다,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이 자유시장경제 체제 내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자유를 증오한다. 증오해야만 자유를 누릴 심보를 줄이게 된다.

자유를 누리고픈 심보가 문제다. 나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는 상대를 보면, 나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상대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은커녕 말도 자유롭게 못할게 뭔가, 하지만.

내가 자유를 느낄 때 그 자유가 온전히 내 몫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닐까. 내가 덜 자유로울 때 나 아닌 타인들의 자유가 덜 침해받으리라는 것이 공식이니까. 지구상에 자유의 부피와 무게는 일정한데, 내가 덜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누리는 자유만 해도 73억분의 1, 그 만큼의 자유로 만족하려면 아예 자유를 외면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지구는 온통 인간들의 소유물만도 아니다. 셀 수 없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의 자유는 인간들의 자유의 희생이 되고 있다. 땅과 물 또한 인간들의 자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태고의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미식의 자유를 위해 커피재배 단지로 변하고, 사육동물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변해간다.

 

자유라는 가치를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증오한다, 자유를. 원래는 꿈꾸었던 아름다운 가치,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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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이화문인회에 내는 수필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12. 19. 10:25

 

 

 

  만일 여러분이 기자가 된다면 누구를 인터뷰하고 싶나요? 인터뷰할 대상을 정한 후 질문 목록을 작성해보는 것이 오늘의 숙제입니다. 왜 그 사람을 대상으로 정했는지 그 이유도 함께 적어서 보내세요, 이메일로!

 

  사실 이메일 숙제는 편한 작업은 아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외국인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은 ‘말하기’는 물론 ‘쓰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 때문이다. 일일이 고쳐줘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다. 무심코 쓰던 문장이었다가도 학생들의 표현에서는 갑자기 자신이 흔들려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는다. 그 버릇은 간단한 글을 쓸 때도 여전해서 이젠 마음 놓고 글 한줄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도 그럴 것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라고 열심히 외웠던 ‘뿌리 깊은’ 기억과 아무 상관없이 이제와 표준어는 ‘나라말’이라니 말이다.

 

  그동안 표준어는 ‘만날’인데 입에서는 맨날 맨날이라고 움찔거리다가, 어느 날엔가는 그것 또한 표준어란다. 이런 조변석개를 두고 반갑다고 해야 할지, 요새 아이들 말로 ‘멘붕’이다. 국적이 불명한 멘탈붕괴의 약자로, 말 그대로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이란다. 어떤 상황이나 말에 의해 평정심을 잃고 ‘정신이 나갔다’, ‘자포자기’ 또는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식의 뜻이란다. 누리꾼들의 장난이다.

 

  - 어땠어? 쌔끈?

  - 말도 마. 폭탄이었어! 얼큰이었다고.

  소개팅에 나가서 섹시하고 멋있는 - ‘쌔끈’ - 상대를 만났냐는 질문에, 소개받은 사람이 외모나 성격 등이 마음에 안들 때 쓰는 ‘폭탄’이란 답을 보낸다. ‘얼굴이 큰 사람’이었다고!

 

  은어를 피하면 돌아오는 것은 ‘은따’ - 은근한 따돌림이다. ‘리하이’라는 예법을 몰라도 당근 은따. 대화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인사는 그냥 ‘하이’면 부족하다. ‘re-’를 붙여야 예의(?)란다.

 

  음절 줄이기는 귀여운 부류에 속한다. 게임은 ‘겜’, 서울은 ‘설’, 애인은 ‘앤’, 어서 오세요는 ‘어솨요’로 줄인다. ‘아뒤’를 멋진 프랑스식 인사말인줄 알고 대꾸했다가는 혼난다, 곧 ‘강추’다. 그것은 강력 추천일 때도 있으나 강력 추방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아뒤’는 누리꾼들에게는 아이디의 준말이다.

 

  제일 따라가기 어려운 말들은 모음 비틀기다. ‘다덜, 모냐, 알쥐, 안뇽, 안냥하세엽, 화났나여? 넵’은 ‘다들, 뭐냐, 알지, 안녕, 안녕하세요, 화났나요? 네’의 비틀기다. 비트는 데 시간이 더 걸려도 비튼다. 왜? 모른다.

 

  ‘절친’에게서 문자가 날아온다.

  - 열공중? 반반무, 반반무마니 시켜노코 ㄱㄷ!

  - ‘베프, 방가방가. 냉무 아니쥐?’

 

  베프는 물론 베스트 프렌드의 준말이다. 영어도 막 줄인다. 한국어가 재미가 쏠쏠해 보인다. 그러나 신세대 누리꾼들이 아니고서는 불행하다.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야? ‘후라이드 치킨 반 마리, 양념 치킨 반 마리, 무 많이’ 시켜놓고 기다릴게! - 이것을 알아듣는 ‘사오정’이 몇이나 있을까. 실세(?)에서 물러난 것은 기정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가상세계에서는 아예 출입금지다. 어디에 살꼬?

 

  본론을 잊고 있었다. 이메일을 열어 숙제를 점검해야 한다.

이들이 인터뷰하고 싶은 대상이 누구일까? 에임 하이! 그렇게 권장 받으며 자란 대학생들임이 드러난다. 중국 학생이 버락 오바마를, 안젤리나 졸리를 인터뷰하고 싶단다. 셀레브리티에겐 이미 국경은 없다.

 

  독특한 것은 중국의 성전환 무용가가 여러 학생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진성 - 중국식 발음이 그러하지만 조선족이니 김성이라 불러도 되겠다. 1968년 조선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가족의 뜻과는 달리 인민해방군에 합류하여 무용과 군사훈련을 받고 청소년 무용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곧 현대무용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이어서 로마에서는 무용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세계적 무용수가 26세에 고국으로 돌아가 28세가 되던 1996년에 ‘성확정’ 수술을 받았단다. 그러니까 본래 여성적이었던 그가 그녀가 되었다, 용감하게도. 세상은 그녀를 더욱 반겼고, 2004년의 <상해 탱고>는 유럽 순회공연에서 “우리의 현대무용이 어디로 발전할지 망설일 때 동방에서 온 무용예술가가 우리에게 방향을 잡아주었다.”라는 찬사를 들었을 정도. 이미 아들을 입양했던 그녀는 38세가 되던 2005년에 독일인 남성과 결혼하여 현재 3명의 입양아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산단다. 무용의 열정은 더해서, 지난해 2월에도 이탈리아의 로마공원극장에서 <제일 가까운 것과 제일 먼 것>을 공연하여 극찬을 받았다고.

 

  내가 왜 이리 긴 이력을 말하는가. 그냥 놀라워서다. 말로는 다 못할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이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일까. 말로서 표현한 것은 진실인가. 말은 진실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혹은.

 

  학생들이 뽑은 인터뷰 상대가 점점 놀랍다. 터키에서 온 여학생은 신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단다. “왜 세상은 힘들고, 왜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보다 행복하지 않고, 세계를(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주(시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물론 서툰 표현이다.

 

  갑자기 전혀 다른 유창한 말이 떠오른다.

  정말 결혼을 잘 한 것 같아요! - 30년 넘은 결혼 생활 후에 남편의 면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말. 다른 남편들이 모두들 감탄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나는 믿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줄 모른다, 라는 생각에 압도되며.

 

  발이 시린 여름밤이 깊어간다.

  발이 시리면 맘도, 맘이 시리면 말도 시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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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빛깔』, 이화동창문인회 2012, 142-145.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12. 7. 22:56

 

마지막 책

 

 

  오래 살았다, 라고 말해야 옳다. 그러면서도 지난 세월의 무게가 두께가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시간은 늘 지나가기 때문일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일이 무엇일까. 과거를 반추하는 일을 시작해보려 해도 화면은 현재에 멈추어 있다. 너무 아득해서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한 기억이라해도 너무 멀리 와서는 희미하다. 내 머리는 아마 현재밖에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녹슬었는지도 모른다.

 

  청춘은 아름다워라, 라고 누가 그랬던가.

  헤르만 헤세가 중년의 대작들인 『데미안』과 『싯다르타』 그리고 『황야의 이리』를 쓰기에 앞서 쓴, 어찌 보면 가벼운 단편 제목이 그것이다.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내었을 때가 40을 바라보는 나이. 이미 청년이 아니었다. 부친의 사망, 갓 세 살 난 막내아들의 뇌수막염, 아내와의 파경이 드러나던 무렵이다. 아내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 자신도 청소년기에 정신요양원 신세를 진 경험이 있었다. 기숙신학교를 탈출해 짝사랑의 절망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결과였다. 일반 김나지움으로 옮겨서도 학교는 망쳤다. 그의 청춘은 일상에서의 탈출로 점철된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자전적인 『황야의 이리』에서도 주인공의 우울과 분열의 원인은 청소년의 ‘의지의 분쇄’를 기본으로 하는 교육 탓이다. 작품마다 아팠던 청춘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청춘에 대한 그리움은 원초적 인간본능의 하나일까.

 

  현대문명은, 물론 교육을 포함하여, 자연과 유리될수록 성공적이라 간주되고 있다. 개인은 거대 문명의 주변인으로 밀려나서 소외는 점정에 이르렀다. 어찌 제정신으로 살랴. 멘붕의 시대 - 우울과 정신적 불안 속에서 청춘은 아름답다고 외치면서도 헤세는 놀랍게도 노년에 이르는 삶을 누렸다. 생애 후반에 더욱 빛나는 책들을 썼고, 충분히 인식되고.

 

  왼손에 책을 펼쳐든 채로 고꾸라진 그의 마지막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섬뜩하다. 그래서 잊지 못하는 것 목록에 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책 가운데에서도 하필 『고백록』이라니.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오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할 수 없나이다.’ - 이 구절 때문에? 평생 달아나고자 했던 신앙으로? 아이러니다.

 

  책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들. 우연히 마지막 밤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할애했을까. 헤세에게 가장 잊지 못할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고 가정한다면, 나에게는 누구일까, 어떤 책이 될까, 마지막으로 읽게 될 것이. 혹은 쓰게 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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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그가 있다』, 한국여성문학인회, 2012, 책만드는집, 196-197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1. 3. 1. 22:00
                                                                        
                                                                           중독

 

건강한 사람들은 늘 환한 꿈을 꾼다. 꿈은 꾸는 사람은 열정에 사로잡히고, 꿈을 실현하려는 욕망에 밤낮을 잊는다. 나태는 물론 잠조차 죄악일 것만 같아서 제대로 편안한 잠에 들지도 못한다. 더러는 생의 무의미 때문에, 생각을 하는 대신 일만을 택하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부정적인 말로 일중독이라고 걱정했을 때조차 나는 그것을 다만 하나의 특징, 그것도 부지런하고 일에 정직한 특성인 줄로 알았다. 중독은 나쁜 것에 중독일 때가 문제라고 믿었다. 자신의 육신을 조금 홀대하면서 그저 조금이라도 더 일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랴. 그렇게 미련스럽게 된 데는 선친의 말씀에도 원인이 있었다. 무슨 일에 몸을 사리는 것을 저열한 짓이라고 하시던 말씀 중에, 편하게 살고서 보람을 찾는 것은 도둑심보라셨다. 그러다보니 선택의 갈림길에서는 늘 덜 편한 길이 마음에 더 편했다. 그러나 도가 지나치면 무엇이든 탈이다.

이태 전 여름의 끝자락, 방학이 끝나는 주말이었다. 힘든 외출 끝에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온통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넘실거리는 이상한 현상에 들렸다. 가스가 새는 소리도 수돗물이 흐르는 소리도 아닌데 세상천지가 알 수 없는 소리로 그득했다. 샤워를 하고 진정을 해봐도 소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이상하게도 걸려오는 전화마다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만큼 아득했다. 그날따라 전화도 많았다. 월요일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전화기 고치러가야 할 일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다른 일의 시작이었다. 월요일 새벽에는 전화소리가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으므로 전화통 문제는 간단히 끝난 것 같았다. 아니, 통한 것은 잠결에 왼손으로 받은 전화였고, 일상 오른손으로 든 전화는 거의 불통이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토요일 오후부터 고장이 난 것은 전화기가 아니라 내 오른쪽 귀였다.

그렇게 해서 대학병원을 찾게 되었다. 안과나 이비인후과 등은 1차 진료병원을 거치지 않고서도 대학병원에서 진료가 가능하다는 상식(?)덕택이었다. 당장 개학이고 화요일 오전부터 강의가 있는 입장이라 치료가 급했다. 수십 년을 강의하면서도 강의 전날이면 늘 안절부절못하는 나로서는 진료대기 중에도 첫 시간 매력 있는 강의를 위해서는 준비내용을 다시 점검해야 할 일만 걱정하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러셨나요?”

“엊그제요, 갑자기 귀에서 파도소리가…… 전화소리도 통 못 알아듣고.”

“저, 이 병은 응급상황입니다.”

“병이요? 응급상황이라뇨?”

이해할 수 없기는 이렇게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을 두고 병이라는 말도 그랬지만, 응급상황이라니! 젊은 의사의 친절한 설명은 이어졌다. “이 상태에서 별 일 아니겠지 하고서 두어 주 지난 다음에야 병원을 찾으면 복구가 거의 불가능한 병입니다. 돌발성난청이라고, 병이 오는 것도 돌발적이지만 치료도 그만큼 즉각 대처해야 합니다. 바로 입원해서 12일간 스케줄 따라 스테로이드 주사요법을 쓰고, 그렇게 해도 1/3 정도만 완치 가능성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일 첫 시간 강의를 어떻게 하고! 그래서 입원치료 대신 제2의 방법을 택했다. 열흘간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귓속에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는 방식. 그런데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막을 통해서? 그런 전문적인 것은 잘 몰랐지만, 귓속에서 나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성화도 거셌다. 울며 겨자 먹기로 화요일 아침엔 학교를 포기하고 병원으로 짐을 쌌다.

그렇게 개강 첫 2주간을 희생하고 입원치료를 감행했지만 쉽지 않은 병원생활이었다. 우선 몸은 멀쩡한데 환자로 적응하기는 중증환자이면서 포기해야할 때보다 더 나빴다. 한밤중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들을 실제인지 이명인지 환청인지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내가 이러다가 미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불안에, 소리의 진원지를 알기 위해서 몽유병환자처럼 병실 안팎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밤 근무 간호사선생님이라도 마주쳐 숨으면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밤새 분한 마음에 떨었다. 내가 왜? 마치 선한 의지로 살면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무구한 옛날사람들처럼 천지신명을 한탄했다. 부지중에 지었을 죄를 생각해내며 손가락으로 세어보기도…….

돌발성난청이라는 부분청력상실은 나에게 큰 위기가 될 수 있었지만, 전남대학교병원은 내 청력을 70, 80% 회복시켜냈다. 병은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결국 나는 평생의 일을 놓게 되었다. 그 학기말시험지 보퉁이들을 안고 어둑어둑해진 연구실계단을 내려오면서 퇴직을 결심한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강박중독을 벗으면 훨씬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사람이 나이 들면서 현명해진다는 말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일상에서 내팽개쳐진 병중의 성찰이 그에 한발 다가가는 것이리라. 굳이 병이 나서 입원을 하지 않더라도 템플스테이나 어디 한적한 곳으로 한 일주일 정도의 혼자만의 휴식여행 같은, 생의 중독을 깨닫는 계기가 필요하다. 건강할 때 사람들은 환한 꿈에 중독되어 그늘을 망각한다. 하지만 빛은 늘 그늘을 드리우고, 그늘도 때로는 그윽하다.


* <푸른 무등>, 2011년 봄호 (통권 165호),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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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