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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96.12.30 Why read Sueskind?
English1996. 12. 30. 22:57

Why read Sueskind?

 

<전남대학교 영자신문> Winter 1996, pp.26-27

   

   The works of Patrik Sueskind(1949-) have been introduced en messe in this country. What's more, they are off the shelf. In the pundits' eyes, "such a thing as a useless fiction in the world" lords it over. There is, of course, a role played by commercial skills manipulated by -- in sociologists' terms -- the post-capitalistic market economy logic. However, we can't deny it is human property that we all have in common a yearn for and fear of something 'unknown,' and that he/she can take even his/her life in his/her own hands  amid so much bread. "The sun exists not for growing cabbage"(Flaubert). Directing his remark, we know that literature exists not for anything such as an ideal human socialization. As far as keeping the fixed idea that literature should be moralistic, we can not gain anything from Sueskind's works. There is no bit of assertion at all that "literature can afford the esthetic supreme bliss"(V. Nabokov). Literature ought not to be observed from an idée fixe. With reason that the moral value we make it sure can't guarantee the absolute objectivity, arts and letters in general do justify themselves. The genuine function of literary work(arts) is to re-examine and reflect all our assertions including moral values.

   After studying history, Sueskind sets forth writings. In his first successful work Contrabass(1981), we see a contrabass player(35 years old, unmarried) speaks out his meditation about life through the contrabass as his object of affection and hatred. He determines to become an artist because of his hatred against his non-artistic father and chooses the contrabass, the biggest instrument which isn't suitable for a solo performance because of his revenge against his mother who only loves father. For him, an orchestra represents the model of the human society. The cruel class-reigning society resembles an orchestra in that players are classified depending upon their physical skills as well as the horrible class of their abilities. For him, nonetheless, music is something humanistic; a substantial element given inherently to the human soul and spirit. Far beyond the physical, phenomenal existence, beyond the rich and poor, and beyond the life and death, music exists forever. So does he try to play his contrabass perfectly. Falling in ardent love for a soprano, hardly befitting for his contrabass, he daydreams in that he cries "Sarah" in the middle of a performance one day.

   While going to his working bank and coming back to his room "where his life can be safe from the accidents-ridden outside improper for him" for 30 years, Jonathan Noel, a protagonist in The Dove(1987), faces a catastrophe only because of a stray dove. Jean-Baptiste Grenouille, another protagonist in The Perfume(1985), makes "the absolute perfume" for himself to attract others but finally turns out a murderer, as having extracted the fragrance from maidens' dying bodies. The protagonists in Sueskind tend to persue a perfection (i.e., a perfect instrumental performance, or a seducing-absolute perfume manufacture), and an absolute do-nothing state "gained from his utmost effort," when he can not help but recognize the impossibility of loving and being loved. Those protagonists in searching for a perfection come only to realize their existential deficiency in emotion. "Being outcast" means no other than the absence of human relations. Love keeps life even in the form of hallucination. Hatred can manage life, too. A utopia of reason (excluding emotion) will not come to in any future.

   In Sueskind's works, besides the issues with human relations, we can find the author's particular respect of artisanship through his persistence of descriptions in a perfect performance, best perfume manufacture and so forth. This point is much forceful in Mr. Sommer's Story(1991) and Three Stories(1995, translated with the title 'Forcing to the Depth' in Korean version). Mr. Sommer is depicted from a viewpoint of a seven-year-old boy in his autobiographic experiences. The boy wonders about Mr. Sommer, an ever eccentric person, who "constantly" scares other people. Suffering from mere "claustrophobia" in common people's eyes, Mr. Sommer tries to escape from people and death, but in fact, he looks for death and is drowned in a lake at a chilly night. The unheroic hero here is an example of the person born not to socialize properly. The readers can confirm freshly the ever conflict between artists and critics, when they read a story of a young paintress. The beautiful, talented artist finally comes to commit suicide because of her despair caused only by a critic's accidental comment on her work, saying that "shallow depth in spite of talent and emotion." Whereas those faultfinders who can neither draw nor write a line enjoy themselves in cosmetic demonstration of their junk knowledge in criticism, the artists who are exhausted in producing something or anything, are frustrated with their own too serious endeavors, as seen a death choice of the young paintress.

   With these inner manifestations, Sueskind may justify his secluded life somewhere in southern France, refusing any prize and proposal for public mass communications. For common people who surrender to the daily conventions and come back home late evening from all day long work, the author may let them get angry and be aware that a day is being passed away with nothing but fatigue, anger and a bit of wage. Writers like Sueskind touch our heart that is whether still regularly pumping blood or getting hardened like "shell fossilization" (Three Stories) by everyday burden, a Sisyphusean stone. Even if our one-dimensional, standardized heart functions normally today, it anew starts unpredictably tomorrow.


Patrik Sueskind(1949)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대거 소개되었다. 게다가 잘 팔리기도 한다. 사회학이나 그런 거창한 학문을 하는 식자들의 눈에는 “세상에 쓸모없는 소설 류”가 판을 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업적 수완 - 사회학자들의 용어로는 후기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논리에 조작되어 - 이 큰 몫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낯선 것에 대한 겁과 동경을 공유한, 빵이 넘쳐도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인간의 속성이 맞물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양은 양배추의 생육을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플로베르). 그 형식을 빌어 말하자면, 문학은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를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문학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은 어떤 개별적 민족의 애국심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박이문) 문학은 그냥 거기에 있다.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혹은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만일 ‘문학이 사회를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고정관념에서  Sueskind 와 그의 작품들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심지어 ‘문학은 미적 지복을 주는 것’(V. Nabokov)이라는 주장도 들어있지 않다. 문학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보아서도 안된다. 우리가 확신하는 도덕적 가치가 절대적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예술일반, 여기에서는 문학의 필요성이 생긴다. 문학(예술)의 본래의 기능은 도덕적 가치를 포함한 우리의 온갖 확신들을 재검토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학도의 첫 성공작 <콘트라베이스 Kontrabaß>(1981)는 작품성보다는 정교한 무대효과로 성공한 작품이다. 이 단촐한 일인극은 중년( 이 말은 이미 어중간한 개념이므로 35세를 밝히자)의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애증의 대상으로서의 콘트라베이스를 통한 자신의 생에 대한 묵상을 관객에게 토로하는 극이다. 비예술적 공무원 아버지, 예술에 빠진 허약한 어머니, 그는 어릴적 어머니를 우상처럼 사랑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는 그의 작은 누이들을 사랑하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은 그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예술가가 되기로,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손으로 다를 수 없고, 독주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악기 콘트라베이르를 선택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병들게 하고 아버지를 무덤에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가게 하려고 공무원( 국립오페라단 주자)이 된다. 그에게 콘트라베이스는 여성적인 악기이자, 죽음처럼 아주 심각한 악기이기도 하다. 그에게 “죽음은 그 숨겨진 잔인성에서 혹은 죽음이 지닌 불가피한 자궁기능에 있어서 여성적이다.”  자신의 악기인 콘트라베이스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소프라노 가수에 대한 열정으로 밤이면 망상에 빠지는 그는 어느 날엔가 공연 도중 “Sarah”를 외치는 백일몽을 꾼다.


오케스트라란 그에게는 인간사회 자체의 모형이다. 잔인한 계급능력이 지배하는 사회(= 오케스트라), 물리적인 계급과 재능이라는 가공할 계급으로 존재하는 오케스트라. 그렇지만 그에게 음악이란 뭔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음악은 순전히 현상적인 물리적인 존재의 피안에, 역사와 빈부의 피안에, 생사의 피안에 존재하므로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콘트라베이스를 완벽에 달하도록 연주하고자 한다.


1738년 시체썩는 냄새에 버금가는 생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생선좌판대 아래, 한 젊은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다. 어머니의 예상외로 버려둔 쓰레기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내아이는 어머니를 영아살인죄로 참수형 당하게 하면서 그의 일생을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향수 Das Parfum>(1985)는 부제처럼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Jean-Baptist-Grenouille는 추한 외모와 강인한 생명력과 독특한 특성으로 자라난다. 수천가지 향기를 멀리에서고 구별할 수 있고, 심지어 기억 속에 저장한다. 그는 자신의 소외적 현실을 보상하기 위해 “절대적 향기”를 민들어내고자 한다, 이 향기를 지닌 그를 사람들이 무조건 사랑하게 될 향수를. 이 마법의 향기의 에센스를 그는 갓 죽은 젊은 여인들이 발산하는 마지막 향기에서 구한다, 즉 그는 엽기적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 향기로서 교수대의 위기를 빠져나오게 됨으로써 그의 발명의 위대함을 만끽하지만, 그것은 카니발의 비밀제(Orgie)에서처럼 아비규환으로 끝난다: “그들은 천사에게로 달려들어 그를 덮쳐 바닥에 쓰러뜨렸다. 누구나 그를 만지고 싶어했고, 그의 일부분이라도 갖고 싶어 했다. 작은 깃털하나, 날개 한 조각, 그의 놀라운 불꽃의 불티 하나라도 가지려고 다투었다. 그들은 그의 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피부를 잡아 떼었으며, 그의 육체를 물어뜯었다. 손톱과 이빨을 세우고 그들은 하이에나처럼 그의 육체에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천사는 서른 조각으로 찢겨졌으며, 그 패거리들은 모두 그걸 하나씩 움켜쥐고 음탕한 욕망에 이끌려 뒤로 물러앉아 먹기 시작했다. 반 시간 쯤 지나자 Jean-Baptist-Grenouille 는 살점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의 옷을 입고 (18세기 프랑스의 문화사적 정신사적 조류들을 파로나마), 사회의 Parabel이자, 시민사회의 발전소설 기법으로(추한 주인공의 천재성과 혐오감 사이의 긴장을 예리하게 묘사), 또한 후반부는 현대의 Krimi-Suspense의 기법으로, 이런 요소들은 문학적 mixtum compositum 으로서 비평계의 관심을 차지했다. 주인공들은 장인정신에 투철하다. 콘트라베이스 주자처럼 향수제조인 또한 직업윤리에 매우 정직하다, 비록 그것이 살인에 이른다 하더라도. 시대의 진정한 향료(Aroma)로서의  분뇨, 땀, 피, 부패의 불협화음은 향수제조인의 화장품 기술과 극단의 대비를 이룬다.


상대적으로 간소한 <비둘기 Die Taube> (1987) 역시 어느 Outsider의 이야기이다. 은행의 수위 Jonathan Noel은 “삶의 마땅치 않은 불상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과 은행만을 오간다. 무서운 어린 시절, 사라진 (사실은 유태인이기에 집에서 잡혀간) 부모들, 도피와 성장, 아내의 불륜 등의 사건들이 Trauma가 되었기에 사건들을 기피했고, 파리에서의 30년간 그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질서를 광적으로 고수하는 그의 생은 단 한 마리 길잃은 비둘기로 인해 파국 Katastrophe을 맡는다. 오로지 그가 바라는 “단조로운 안정감의 상태”를 잃은 그는 싸구려 호텔을 찾아가 자살자의 고독한 마지막 성찬을 든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며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외친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빗소리라는 응답을 받고 돌연 공포가 사리진다. 그는 자유를 향해 걸어나간다. 다시 돌아간 그의 집에는 비둘기의 흔적도 없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만 어쩌면 그가 때로는 질투와 혐오의 심정으로 바라보던 벤치위의 거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 번도 골치아픈 표정을 짓지 않고, 무슨 고통을 받고있나거가, 두려워한다든가, 지겨워하는 구석도 전혀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인생살이의 태평스러움에 대한 노여운 질투심이다. 우리 또한 그런 일종의 부러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주인공들은 사랑을 구하지 못할 때 또 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확신할 때 완벽추구(악기의 완벽한 연주, 유혹적-절대적 향수 제조, “지독히 애써 얻은” 절대적 無爲의 상태)의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 주인공의 극단적 완벽추구는 실존적 결손감정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실팍하지 못한 삶, 사랑할 수 없음, 내팽겨쳐진 존재. 내팽겨진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부재를 뜻한다.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수 없다”는 내면의 표출만으로도 우리의 Noel 씨는 스스로를 구한다. 사랑은 착각의 형태로서일지라도 생을 지켜준다. 미움의 감정 또한 생을 지켜줄 수 있다. 감정를 배제한 이성의 역사는 어느 미래에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 <좀머Sommer씨 이야기>(1991)는 7세 소년의 시작으로 에피소드적인 경험들은 자전적으로 묘사하며,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Starnberger See를 무대로 한다. 소년이 만난 영원한 기인 Sommer씨, 그에게는 인형제조로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가 있지만, 그는 사람들을 겁내고 “끊임없이” 길을 떠돈다. 어른들은 소년에게 그가 <불안정증 (Klaustrophobie)>을 앓고 있다고 말해준다. 이 명확한 개념제시로 앞서의 작품들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평생을 죽음을 피해 도망다녔지만, 기실은 죽음을 찾아다녔고 실제로 찾는다: 어느 시월 밤, 그는 “마치 커다랗고 환한 거울같은” 차가운 호수속으로 걸어들어가버린다.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소년은 구원 요청 대신 점점 작은 점으로 사라지는 Sommer씨를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그가 호수를 -  어디나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므로 -  걸어서 건너려는 것이구나’ 하는 어린이다운 인지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가 항상 사람들에게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라고 애원하던 것에 대한 회상때문이었다. 


이어 단편집 <세 이야기>(1995)는 우리나라에는 그중 한 작품인 <깊이에의 강요로> 번역되었다.“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이 숙명적 비평 한마디가 젊고 재능있는 화가를 회의와 절망 그리고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의 영원한 갈등 관계 -  한 획의 그림도 한 줄의 글도 쓸줄 모르는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비평으로 일갈하는 동안 생산의 고투에 녹초가 된 예술가들은 그 진지성 때문에 좌절하거나 투항한다: 투항은 비평가의 취향에 추파를 던지거나 아예 예술을 포기하고 일 자리 하나를 구하는 짓이다. 좌절은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의미한다. 쉬스킨트는 이로써 언론대중을 위한 인터뷰나 심지어는 모든 수상을 거부한 채 남불 등지에 은거한 자신의 은둔자적 생활을 정당화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저녁이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로 하여금 “내 인생에서 또 하루가 그저 사라졌구나, 권태와 분노와 돈, 내일 또 일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져다 준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하루가.” 라고 화를 내도록 부추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 Version

Patrik Sueskind가 읽히는 현상

Patrik Sueskind(1949)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대거 소개되었다. 게다가 잘 팔리기도 한다. 사회학이나 그런 거창한 학문을 하는 식자들의 눈에는 “세상에 쓸모없는 소설 류”가 판을 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업적 수완이 큰 몫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낯선 것에 대한 겁과 동경을 공유한, 빵이 넘쳐도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인간의 속성이 맞물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양은 양배추의 생육을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플로베르). 그 형식을 빌어 말하자면, 문학은 그 어떤 무엇을 의해서, 예를 들어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를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만일 문학에 사명감을 부여하는 고정관념에서 Sueskind의 작품들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심지어 ‘문학은 미적 지복을 주는 것’(V. Nabokov)이라는 주장도 들어있지 않다. 문학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보아서도 안된다. 우리가 확신하는 도덕적 가치가 절대적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예술일반, 여기에서는 문학의 필요성이 생긴다. 문학(예술)의 본래의 기능은 - 기능이 있다면 -  도덕적 가치를 포함한 우리의 온갖 확신들을 재검토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역사학도의 첫 성공작 콘트라베이스 Kontrabaß(1981)는 작품성보다는 정교한 무대효과로 성공한 작품이다. 일인극의 콘트라베이스 주자(35세, 미혼)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고 자랐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예술가가 되기로,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에서 가장 거대하고, 독주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했다. 오케스트라란 그에게는 잔인한 계급능력이 지배하는 사회, 물리적인 계급과 재능이라는 가공할 계급으로 존재하는 사회 그 자체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음악이란 뭔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음악은 순전히 현상적인 물리적인 존재의 피안에, 역사와 빈부의 피안에, 생사의 피안에 존재하므로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콘트라베이스를 완벽에 달하도록 연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의 악기인 콘트라베이스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한 소프라노 가수에 대한 열정으로 밤이면 망상에 빠지는 그는 어느 날엔가 공연 도중 “Sarah”를 외치는 백일몽을 꾼다.


30년간  “삶의 마땅치 않은 불상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과 은행만을 오가다 단 한 마리 길잃은 비둘기의 침입으로 인해 파국 Katastrophe을 맡지만, “다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침묵 속의 외침으로 자신을 구하는 Jonathan Noel(비둘기 Die Taube, 1987), 다른 사람의 사랑을 구하기 위한 “절대적 향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엽기적 연쇄살인자가 되는 Jean-Baptist-Grenouille(향수 Das Parfum, 1985). Sueskind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구하지 못할 때 또 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완벽추구(악기의 완벽한 연주, 유혹적-절대적 향수 제조, “지독히 애써 얻은” 절대적 無爲의 상태)의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 주인공의 극단적 완벽추구는 실존적 결손감정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내팽겨진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부재를 뜻한다. 사랑은 착각의 형태로서일지라도 생을 지켜준다. 미움의 감정 또한 생을 지켜줄 수 있다. 감정를 배제한 이성의 유토피아는 어느 미래에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내팽겨진 존재’의 사랑에 대한 거부-집착 등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 이외에도 장인기질에 대한 존중이 엿보인다. 완벽한 연주, 최고의 향수 제조에의 집착등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7세 소년의 시각으로 자전적 경험들을 묘사한 좀머 Sommer씨 이야기(1991)나 우리나라에 깊이에의 강요로 번역된 단편집 세 이야기들(1995)에서 더욱 강한 목소리를 낸다. 소년이 만난 영원한 기인 Sommer씨, 그는 사람들을 겁내고 “끊임없이” 길을 떠돈다. 보통 어른 들의 눈에는 “불안정증 (Klaustrophobie)”을 앓고 있을 뿐인 그는 평생을 사람들과 죽음을 피해 도망다녔지만 기실은 죽음을 찾아다녔고, 실제로 어느 시월 밤 차가운 호수속으로 걸어들어가 버린다. 그는 사회화를 위해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본보기이다. 또는 ‘재능과 감동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부족하다’는 숙명적 비평 한 마디가 젊고 재능있는 화가를, 예쁜 여자를, 회의와 절망 그리고 마침내 자살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의 영원한 갈등 관계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한 획의 그림도 한 줄의 글도 쓸줄 모르는 비평가들이 오직 지식취향에 따른 비평언어로 목청을 돋구는 동안, 생산의 고투에 녹초가 된 예술가들은 그 진지성 때문에 좌절하거나 - 여주인공 처럼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 또는 투항하리라는 것이다. 투항은 비평가의 취향에 추파를 던지거나 아예 예술을 포기하고 일 자리 하나를 구하는 짓이다.


Sueskind는 이로써 대중매체를 위한 인터뷰나 심지어는 모든 수상을 거부한 채 남불 등지에 은거한 자신의 은둔자적 생활을 정당화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저녁이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들 투항자로 하여금 “내 인생에서 또 하루가 그저 사라졌구나, 권태와 분노와 약간의 돈을 가져다 준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하루가.” 라고 화를 내도록 부추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Sueskind 같은 작가들은 우리들의 심장을 아직 살아있는지 건드려본다, 겨우 규칙적으로 피를 뿜어내거나 일상의 무게(시지프스의 돌)에 짓눌려 점점 “조개들의 화석”처럼 굳어가는 심장을. 그리고 매우 표준화된 일차원적인 우리들의 심장이라해도 일단 다시 뛰기 시작하면 그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