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6.21 모순
  2. 2013.11.17 우빈 성빈 피아노발표회 - 이동원 장사익 음악회
소설2020. 6. 21. 00:07

 

                                                           모순

 

모순, 당신 참, 순수한 모순일까, 라고 말하는 그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비릿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말을 하자면 길어질 테니까. 말이 아닌 눈빛에 말로 대답을 할 수도 없으니까. 우선 모순에 쓴 순수하다는 덧말은 오류이니까. 내가 알기로는, 예컨대 순수한 물이라고 할 때 쓰는 것이 순수함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모순이라고 했을 때 순수는 모순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나더러, 아내더러, 순수한 것 같다가도 모순적인 사람이란 뜻으로, 둘 다로, 어쩌면 비난으로 들어야 한다. 아니, 말로 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리 읽어야 하리라.

그런 생각들도 일상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것이 새삼스레 그것뿐일까. 저녁이 깊어지면 밤이 오고, 밤이 깊어지면 잠을 청한다. 잠을 청하다 보면 잠이 들게 된다. 잠은 좋은 것.

그렇게 또 날이 밝는다.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나갈 사람은 나가고 그냥 있을 사람은 그냥 있다. 바깥 하늘은 맑을까. 물론 흐릴 수도 있다. 밝거나 흐리거나 관심이 없으니 바깥을 내다보지 않아도 된다.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 또 다른 작은 창들을,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을 켜지 않으면 세상이 조용하다. 오늘도 세상은 조용하다.

 

모순적이 아닌 인간 - 그런 존재가 가당키나 한가. 무모순적 명제 자체가 없다, 사는 일에서는.

말 한번 거창하게 하시네.

삶에서 크기를 말하는 것도 그래.

이게 크기 이야기야?

그러게, 크기가 아니지. 네가 그 쪽으로 갔지, 거창하다니 뭐니…….

아무도 없다. 내가 말하고 오른쪽 귀로 듣고, 내가 말하고 왼쪽 귀로 듣는다. 어차피 한 입으로 말하니까 너는 너다.

이런 나를 가리켜 모순적이라는 말을 그이가 하고 싶었을까? 한 사람이 다른 두 생각을 하는 일이 이상하단 말인가? 한 사람이 평생 일관적일 수는 없지. 아니, 평생 그렇기는 어렵겠지만 한 순간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이 문제지. 그렇다고 내가 모순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모순적인 사람이 아니다 - 이 말은 참인가? ‘무모순적인 사람임’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모순적인 사람임’이 부정되어야 한다. 어떻게? 수학이라면 귀류법이라도 들이대지.

귀류법? 그런 단어는 어떻게?

그거야 어렵고 모호한 단어들이 오래 남아서지.

매사에 서툰 자가 서툴음을 인지 못하고, 미친 자가 미쳤음을 인지 못하고…….

그런가? 내가 모순적임을 모르므로 모순적이다, 그 말인가? 알면 모순적이지 않다는 말인가? 너는 네가 모순적임을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톡! 작은 창이 부른다. 정말 작은데 실은 한없이 넓은 창이다.

뭐지? 손바닥 창을 열까, 말까. 열면 바깥이고, 오늘 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하고 있던 생각은 끊길 것이다. 무슨 생각이었더라? 이미 끊겼다. 문은 벌써 열렸다.

친구들, 잊지 않았슴? 10시 반 역 2층 집합! 매표소 근처.

아차, 나는 시커먼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고, 폰은 내 옆에 누워 있다가 나를 불렀다. 고맙다, 톡아. 너 아니었다면 멍하니 그렇게 오늘 나들이를 놓칠 뻔했겠지. 시계를 본다. 서둘러야겠네.

 

 

모순 어쩌고 하던 그날 밤 남편의 걱정을 덜려고 말했던 찔레꽃집 나들이는 자꾸 미루어졌다. 찔레꽃이 다 진다고 어서 다녀가라는 채근을 듣고서야 날이 잡혔다. 오늘이다. 나이가 들면 차츰 삶의 무게가 가벼워질 거라 기대했지만 그건 아닌가 보다. 모두들 이런저런 일들에 발목을 잡힌다. 처음 약속했던 날엔 바람잡이 정인이가 딸애한테 가 있었다. 애는 아니다. 제가 아이를 낳는 자식들을 그 어미는 애라고 한다. 또 딸이라고…… 낳기 전까지는 투덜거리더니, 갓난이를 보고와선 완전 날고뛰고 좋아했다. 다음엔 성주 남편이 컨디션이 나빠져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어머니한테 며칠 다녔다. 어머니들은 아무 때나 넘어진다. 화장실에서 살짝 미끄러진 것만으로도 팔목이 골절되셨다. 임시 깁스를 했고 며칠 뒤 제대로 깁스를 하자 불평이 수그러들었다. 고관절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고들 했다. 고관절이 왜? 듣고 보니 고관절 수술을 하면 자리 잡고 눕게 되고 그 길로 일어나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렇구나. 누구에게나 알 수 없는 가벼운 사고며 병들이 빈발한다. 갑자기, 섬뜩하게 큰일도 날 수 있겠지.

얼마 전엔 또래 선배가 동맥류로 떠난 놀라운 일도 있었다. 병명도 생경했고, 서울에 거뜬하게 애들 보고 왔다는 사람이 며칠 새 저 다른 나라에 가 있다니 그저 놀라웠다. 갑자기 미스터리 소설을 쓴다, 자연사일까? 남편이 의사이면 극과 극이다. 애처가라서 처와 처가가 호강하거나, 여차하면 사팔뜨기라서 속을 태우며 산다. 지구상의 능력남들은 더러 무서운 능력도 함께 갖추어서……. 도파민인지 뭔지가 분비되는 몇 년이 지나면 예뻤었던 아내를 치울 궁리를 한다는데, 눈빛을 잘 보고, 아니면 재빨리 괜찮은 조건에 도장을 찍어야 한단다. 너절하게 퇴출당하기 전에! 영화를 너무 보았나? 하지만 영화가 하늘에서 떨어진 이야기들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시계를 보니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에 대려면 더는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설거지 겨우 끝내놓고 멍하니 앉아있던 참이었다. 점심나들이에 따로 준비랄 것도 없지만, 기차 시간이란 엄중한 것이니까 대충 입고 가방을 챙긴다. 모기 기피제랑 계관은 필수지. 아차, 손수건과 칫솔……. 그러고서 나선다.

어? 친구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오늘이 아닌 거야? 180°를 돌아다 봐도 아무도 없다. 반대쪽으로 돌아도 없다. 늦지 않고 빠른 게 다행이다. 발은 커피숍으로 향한다. 급히 나오느라 커피를 담아오는 걸 잊었더니 그 향에 끌렸나 보다.

톡! 매표소 올라가지 말고 그냥 아래 있어! 기사님 뜬다.

기차로 가자더니 예정이 바뀐 모양이다. 일회용 용기에 받아왔다고 미선이 또 혼내겠지. 그래도 넉 잔을 조심히 들고 역 마당으로 내려오니 성주가 보였다.

짝꿍 괜찮아?

응, 그런 대로. 이제 출근하는데 뭐. 어머니는 어떠셔?

계속 아프다시지, 애기처럼. 마침 왼쪽 손목이라 그런대로. 다음에 나타난 건 차를 가져온 미선이었다. 5시 기차로 돌아옴 내가 넘 늦겠어서, 니들 좀 빨리 와도 괜찮지? 근데 정인이 가시나는. 차보단 먼저 와서 기다려 줘야……. 말을 하다말고 미선인 다시 차에 올랐다. 깜박이만으로 정차 할 수 없는 곳인가 보다. 순간 저쪽에서 정인이 보인다.

뛰어, 뛰어 와! 성주가 두 손을 높이 들어 불러도 정인은 느긋하게 걷는다. 정인을 기다렸다가 밀어넣은 다음에 성주가 올라타자마자 차가 출발한다.

야, 너 차를 길에서 기다리게 할래!

꼭 해야 할 말을 꼭 해야 할 시간에 내뱉는다. 정작 운전수가 아니라 조수석의 성주다.

미안혀요, 떡이 안 오잖어유. 시골에 가면서 빈손으로 가남유. 언니도 떡 좋아하고. 정인은 아예 느실거린다.

무슨 언니? 친구라 안 그랬어?

나이가 좀 있어, 친구하기는 해도.

너스레를 떠는 정인의 보따리가 그러고 보니 두 개나 된다. 무거워서 못 뛰었구나.

 

찔레꽃 향기는 정말 대단했다. 골목길이자 큰 길로 나가는 좁은 길 쪽으로 담장 전체가 찔레꽃으로 덮인 집인데, 일상의 집은 아니었다. 버려진 도자기 공방이라나. 꽤 넓은 잔디밭 어디에도 도자기의 흔적은 별로 없었다. 공방으로 썼다는 동굴 같은 초막에 들어서서야 주인장이 제작했거나 수집했을 소박한, 크기에서 소박한 그릇들이 엉성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진열이라고도 할 수 없으리만치 그냥 자연스럽게 널려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터.

정인아, 막상 어려운 친구들이랑 오면 내가 좀 부끄러운데 어쩌나. 어쩌나요.

별말씀을. 우리 안 어려운 애들이에요. 정인이가 가끔 이야기할 때면 우리 모두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죠.

찔레 향이 정말 대단하군요.

어떻게 이렇게 가꾸세요?

한 마디씩 감탄에 주인장은 겨우 대답할 틈을 찾는다.

가꾸다니요. 그냥 내버려 두죠. 잔디밭인지 풀밭인지 그냥 파란 대로 살라고 내버려 두네요. 염색물 떨어져도 편하라고.

어머, 염색도 하셔요?

도자기는 몇 년째 방학이지요. 염색도 어쩌다가, 그저 취미 정도죠.

그럼 농사를?

농사라뇨. 뭘 할 수 있겠어요. 시골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다가 뒤늦게 시골 내려와서 뭘 할 줄 아는 게 없죠. 여기 오이, 고추, 미니토마토, 이런 것 한두 개 따먹는 것이 전부인걸요.

그래도 시골인데.

저 아래 논 조금, 중간에 누가 자꾸 사래서요. 저 아랫집 텃밭, 텃밭에 뭐가 있더라. 가지랑 뭐 좀 있죠. 언덕에 호박 몇 구덩이. 감나무, 매실나무들. 그냥 저절로 있는 것들이나.

한 십년 넘은 것 아녀요? 언니, 처음 우리 발라드반들 여기 불렀을 때는 내 기억으로는 언니 의욕이 넘쳐 보였더랬는데. 정인이 보조설명자로 나선다. 저 아랫집 살 때만 해도 조금 손질해서 북카페 그런 것도 가능하댔잖아요.

아, 내가 그런 게 아니라, 팔고 나가는 사람이 꼭 팔고 나가야 하니까 동네사람들이 내게 희망적으로 권하는 말들이었죠. 어떻게든 타지 사람이 또 사들어 오는 것 보담 이왕 발붙인 우리가…….

그럼 여기 이 마을이 배타적인가요?

아아뇨. 그렇진 않아요. 도공들 마을이었으니 자존감 내세울 처지도 아니고. 중간에 문화재다 뭐다 인정받기도 하고, 정통 뭐 그런 것에 대한 우대적인 분위기도 옛날보다야 낫다지만.

암튼 공기가 엄청 다르네요.

정말 살 것 같아.

이 엄살, 어디선 죽을 것 같았냐.

이상한 해방감에 우린 그냥 맘대로 소리 나는 대로 지껄였다.

논밥들 알아요? 우리 오늘 논밥 먹을 거예요.

주인의 말도 신기하기만 하다.

논밥요? 누가 논밥을 내오나요? 왠지 솔깃해서 내가 물었다.

내오다니, 배달이겠지, 배달의 민족! 미선인 늘 정확하고 빠르다.

맞아요. 여기 논일이고 밭일 하면서 식당에 핸폰으로 전화하면 점심 배달 다 된답니다. 놉 얻어서 일하더라도 밥은 절대 안 해주요. 기대도 않고요!

놉? 놉이라뇨?

장소가 바뀌니 단어들이 생경하다.

놉이라는 말, 그게 어째 노비처럼 들리네요.

맞아. 놉이라는 말은 노비라는 말이 반절음화해서 생긴 것이지. 하지만 노비와는 다르지, 시대가 다르니까. 날품, 일꾼, 삯꾼, 품꾼, 품팔이, 여러 말들 모두 하루하루 품삯과 음식을 받고 일을 하는 건 마찬가지야. 요즘 시골에서는 일손이 귀하다보니 놉이 오히려 갑일 수도 있을 걸.

미선 씬 시골 일을 잘도 아네요. 그래서 놉이 아니라 주인네가 죽었나 싶네요. 놉 때문은 아니었지만.

누가 죽어요? 부러 죽었다고요? 정인이 울상이다. 언니, 지난 번 말씀으로는 시골 살기가 괜찮다 하셨잖아요.

괜찮지, 전반적으로는.

전반적으로는?

기본적으로 지원금이 나오죠, 이 동네는 집들이 있어도 전원 다 해당되죠.

언니만 빼고요?

에이. 뭔 그런 소릴. 저쪽 마을회관에요, 거기 가면 한더위에도 완전 시원하죠. 밤 열시까지 에어컨 빵빵, 아예 썰렁하게 틀고 살죠. 오전엔 열한 시나 되면 반찬이 와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럼 진작에 와 있던 쌀로 밥을 짓는 거예요, 나라미라 해도 매일 새 밥을 지어먹는 거예요.

나라미? 정부미 말인가요?

예, 나라미. 한글로 나라 다음에 한자로 쌀미자가 쓰여 있어요. 나라 쌀로 거저먹는데, 공짜에다 해주는 밥을 먹으니 나름 호사죠. 그 중 젤 젊은이가 밥을 짓는데, 물론 수당을 받고 하죠. 이리저리 꽤들 받아요. 누군가 가끔 파스다 뭐다 이런저런 약들도 가져다주고, 또 집으로 노인돌보미 나오죠, 어떤 집엔 목욕도우미도 와요. 이발비까지 나오니 살만한 거죠. 어떤 자녀가 그런 효도를 하냐고요.

주인언니는 우리보다 한참 위라고 들었는데, 말투가 전혀 노인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노인들 세상은 아니죠. 여전히 인간적 존엄성 유지가 안 되잖아요. 난 어쩐지 노인 편으로 말한다.

존엄성이 뭔데요. 월급처럼 수당을 주어 자식들 눈치 덜 보게 해주는데요. 농지만 있으면 건보료 그런 것들도 다 감면 혜택을 주죠. 결과적으로 땅 뙈기 가진 노인들이 더 혜택이라니까요.

농지가 있으면 외려 감면된다고요?

그래요. 믿거나 말거나 그렇다니까요. 집도 연금도 수준이 넘어서 상당한 건보료를 내야한다, 그럴 때 농지를 소유해서 농사짓는 농부로 등록되면 감면에 해당되는 거죠.

뭐가 뭔지.

아무튼 농지 소유자가 우대?

여러 가지예요. 장애인 처우도 대단해요. 저 위에 어려서부터 약간 다리를 저는 아줌마가 살아요. 얼핏 보면 모를 정도로 살짝. 한데 무슨 차량이, 복지관 차량이겠죠, 일단 데리러 와서 맨날 나들이죠. 한번은, 언니, 나 볼링 갔다 오네, 그러죠. 한번은 수영 다녀온대요. 세상에 승마도 다녀온다니, 그게 장애인이 할 만한 운동인가 말예요. 한번은, 언니 나 요것 좀 사주쇼, 그러는 거예요. 무슨 복지 상품권인데, 다 사용하기가 많으니 나더러 현금화해 달라는 거죠. 모르긴 몰라도 좀 과한, 좀 치우친 지원인가 싶기도 하고.

수중 운동이다 특수체육이다 그런 걸 하게 돼서 기본적으로는 복지가 향상…….

미선이 끼어들다 말꼬리를 내린다.

 

아름다운 찔레꽃 마을에 오면 찔레꽃에 푹 빠져서 꽃가루 범벅이 된 호박벌 이야기라도 들을 심산이었다가, 무언가 평등 같은 불평등을 체감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우리 모두는 조용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도움을 받고, 죽어라 일하는 한창 아저씨들이 죽어나가는 거라서.

우리가 머쓱해 하자 잠시 말을 끊었던 주인네가 계속했다.

놀고먹는 사람들은 느는데, 일손은 모자란다고 하고. 일당도 그게 적은 건지 많은 건지 알다가도 몰라요.

무슨 말이세요?

일을 가는 입장에서야 말이 하루 8시간 8만원이라 그러고들 가죠. 하지만 새벽부터 해 넘어 가야 일어서니 시간 초과는 기본. 그런 일도 날마다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일당이 많은 게 아니죠. 허나 일을 주는 입장에서는 사람 하나 쓰기가 무섭다고 그러더라고요. 하루 양파작업 하면 산지 값으로는 양파 열 포대 스무 포대 값을 한 사람 노임으로 주는 것이니까, 열 사람 쓰면 100포대 200포대 값이 그 자리에서 나간대요. 올해도 양파 풍년이라 여기선 다들 죽을상이더라고요. 그런 노임 다 주고 출하를 해도 양파값은 바닥이니까.

모순이네요, 모순. 풍년에 죽을상이라니. 양파 따는 사람 좋으면 양파 주인 망하고…….

무슨 모순씩이나! 게다가 누가 양파를 딴다냐, 캐지!

모처럼 끼다가 다시 핀잔소리를 듣는다. 성주는 말 틀리는 꼴은 못 참는다.

다 알아듣고서 왜 그래, 정확한 단어가 입술에 걸려 머뭇거리기도 하지, 우리 나이에.

얘 또 나이 타령이네, 남아, 제발 조옴!

내 말은 보편성이 그리 없는지, 친구들 사이에서 좀 뒤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대놓고 형광등 취급이다.

 

넌 그래 여태 그걸 몰랐어?

알았다니까. 지금 알면 어때서! 그래 나 형광등이다.

얘 좀 봐, 자신을 좀 아시네. 헌데 실은 고장난 형광등이다.

그러기 십상이었다. 언제나 별 일도 아니었다. 다만 다들 아는 이야기를 몰랐다는 것인데, 좀 억울했다. 예컨대, 미남 사회 선생님이 미녀 음악 선생님하고 그렇고 그렇게 비밀연애중이라거나, 좀 자라서는 우리 반에서 제일 얌전한 차옥순이 벌써 대학 다니던 중 살림을 차렸었다는 등,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어서 내가 꼭 알아야 하는가 말이다. 어떤 이야기는 알려고 해도 알 수 없기도 했다. 아무개가 약(?)을 먹었고 죽진 않았고 그래서 입원 중인데, 온갖 이유들이 너풀거렸을 때다. 열아홉 나이에 어떻게 정답을 아는가 말이다. 나중에, 훨씬 나중에, 우리들 마흔 아홉에 그 앤 정말로 떠났다. 비행소녀처럼 날라리처럼 옥상에서 아래로 순간에 죽었다. 누가 그 이유를 아는가. 모르면 형광등인가. 고장난 형광등.

 

멀쩡한 양파밭을 갈아엎는데……. 주인이 얼른 화제를 챈다.

왜 멀쩡한 걸 엎어요, 좀 잘 못 된 걸로 갈아엎는 것 아녜요?

그게, 아주 잘 된 상품이라야 보상금이 나와요. 안 좋은 건 갈아엎어도 소용없고요. 그러게 양파가 폭락이었으니, 이제 고추라도 잘 되어야 할 텐데.

고추가 왜요?

여기 사람들 양파 해내고 고추들 따는데요. 그게, 작년에도 양파 완전 망치고 나서 고추농사나 기대했다가 것도 안 되니까 그 사단이 난 거예요.

사단이?

탄저병 알죠, 타들어가는 병. 거기다가 컬러병이라나 노란 반점들이 생기고 그랬다네요. 양파에 고추에 둘 다를 망친 어떤 집에서 그만, 그만 세상을 떴죠.

어머나, 그렇게까지. 정인인 곧 죽는 소리다.

분통이 터지면 그럴 수도 있나보죠. 의욕이 완전 바닥이 났을 수도 있고.

맞아요, 주인네가 계속한다. 그런데 사람 목숨 모기 목숨이에요. 탁 하고 때려잡은 모기 잊어버리듯, 죽은 사람 금방 잊어요. 완전 잊죠. 바로 그러고 나서 벼농사 목돈 나왔으니까 덩실덩실이죠. 그때 태풍 차바던가, 암튼 벼들이 다 쓰러져 누어버렸잖아요. 그럼 관에서 나와서 피해 정도를 조사해 가죠. 몇 퍼센트 어쩌고, 다 죽었다고 적어가죠. 그런데 실은 다시 일어나는 벼들도 있어요. 꺾이지는 않고 살짝 눕는 경우죠. 그럼 수확이 외려 약간 느는데, 관에선 조사해간대로 보상금이 나와요. 그러니 복불복이죠.

그렇구나. 얘들아, 복중에서 최고의 복은 뭘까, 전화위복이래. 금세 기분이 좋아진 정인의 말에…….

 

글렀네.

뭐가, 나남이, 뭐가 글렀냐고? 전화위복이라니까 글렀다니!

아차, 또 들켰다. 나는 여기 들판을 본 처음 순간에, 만일 다음 생이 가능하다면, 내 죽은 양분이 모여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 행여 가능하다면, 땅 넉넉한 곳의 농부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남자로 여자로? 그건 상관없겠다. 남자 여자 차이가 무슨 대수라고. 다만 지금 생에서보다 튼튼한 몸과 맘으로 태어나서, 투박하고 든든한 집을 지어, 지금처럼 단 둘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여럿 낳아 왕창왕창 떠들썩하게 함께 살며, 무심해 보이는 땅과 대화하면서, 뭔가 씨를 심어 넣고 자라는 것을 바라보다가, 다 자란 놈들을 먹기도 하고 내어다 팔아서 다른 소용되는 물건들을 사기도 하고. 운전면허시험에도 합격하고, 튼튼한 차 하나 있음 가끔은 아이들이랑 어쩌면 읍내 문방구에도 서점에도 가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들킨 것이다.

아니, 나는.

너는 뭐? 시골 살 생각을 하려다가 글렀다 이 말이지? 성주는 뭐 넘어가 주는 법이 없다. 제 남편도 칼칼한 아내가 성가셔서 자주 아픈가.

남이가 어떻게 시골 살아. 얘는 벌레라면 질겁하는 걸 몰라. 파리모기도 호들갑인데. 쟤 지금 가방 속에 모기약 잔뜩 있을 걸. 더구나 흙속에 숨어 있다가 꿈틀거리며 나타나는 것들이라면. 얘가 어떻게 시골에서 사냐고! 정인은 모르는 것도 두둔해주는 애다.

누가 시골 산댔냐. 나는 그저.

그저 뭐냐니까.

그저, 땅이란 것도 온난화다 자연재해로 힘들 거다, 뭐. 엉망으로 작물이 안 되고, 또는 트렌드에 밀려 외면당하고. 시골도 이상향은 아니구나, 그런 정도.

그래, 남이 그냥 내버려 두자. 시골에 살고픈데 살고 싶지 않다. 이 애 모순인 것 한 두 번이냐.

누가 모……, 미선에게 대꾸하기도 전에 말은 끊긴다.

시끄럿! 그리고, 이상향이 어딨다고! 너흰 어디 이상향을 알아? 유토피아란 말의 뜻이 어디에도 없는 곳이니까, 이론상으로도 없는 거라고! 없으니까 이상향!

왜 그래, 미선아. 무섭게. 누구라도 가고 싶은 곳, 가서 살고 싶은 곳, 그런 건 있잖아. 성주도 놀랐는지 이번엔 구겨진 나를 돕는다.

그래, 그것까진 아니라 해도 가보고 싶은 곳들은 있지. 왜 버킷리스트라고. 우리 나이쯤이면 그런 것 있잖아. 언니, 안 그래요? 슬쩍 주인을 쳐다보는 정인이는 말도 동글다.

그러게. 다들 어디로 떠나고 싶어하는 건 아닐 거예요. 난 이곳이 이상향은 아니지만 이곳으로 만족하는 편이예요. 사람들 가끔 오고, 것도 나쁘지 않죠, 외톨이란 느낌을 없애주니까. 시골 사람들, 이제 정 들고, 음식에도 따라가고. 건 그렇고, 밥 오기 전에 …….

 

주인은 저쪽 부엌에 가더니 냄비를 들고 나왔다. 처음 내어 놓은 옥수수 쟁반에 이어서 두 번째다.

바지락 먹어볼래요?

바지락이요? 요즘 먹을 생각을 안 했는데요.

가까이 싱싱한 수산시장이 있어요, 버스터미널 근처요.

어머나, 알들 굵다.

국물 엄청 시원하네요.

돌아돌아 도시로 나간 놈들보다는 싱싱하겠죠. 그런데 누구 바지락 알러지는 없겠지요?

설마요.

은근히 음식 알러지들 많더라고요. 여기 가끔 오는 지인 중에 낙지 알러지 있는 사람 봤어요, 목포 살면서.

무안 사람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그게 아나필락시스라고, 알레르기 질환이지만 중증이죠. 원인 물질에 노출되면, 먹거나 뭐 그렇게, 벌에 쏘여서도 그렇지, 그럼 심각한 전신 증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은근히 땅콩 같은 식물에도 큰일 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심하면 혈압이 떨어지고, 호흡곤란, 숨이 막히죠.

봤어?

아니, 쓰여 있어.

얘 미선인 우리 도서관입니다, 언니. 정인이가 또 너스레다.

사람 무안하게시리. 미선인 웃고 만다.

아나필락시스 뭐? 음식물 알레르기 종류이겠지, 좀 심한. 복숭아 만지지도 못하는 애들 많았잖아. 우유 못 먹는 애들도.

다르지, 우유 알레르기라 해도 두드러기나 피부염 정도이지만 아나필락시스는 쇼크까지 오는 경우라니까. 다시 미선이다.

우유 참 희한 해. 우유로만 크는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그래도 우유 못 먹는 사람들 은근 많다. 소화를 못 시켜 종일 더부룩하거나 배 아프고…….

그건 또 좀 다르지. 그건 유당불내증이라고 장내에 유당분해효소가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고.

미선인 아는 것도 많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도 탁월해지는가 보다. 아마 공부가 재미있어서 이것저것 다 공부하는 것일 테다. 난 뭐가 재미있을까.

 

내 나이, 나이 탓하며 멈춰 있는 건 나이 탓하기 딱 좋은 나이라서 일까. 58년생들은 아직 법적으로 노인은 아니다. 더하기 65를 하면 2023년이 되어야 노인이다. 노인에 대한 인상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던가, 그런 옛날 옛날에도 그랬다. 노령자는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불신이 강하고 악의적이며 의심이 많고 편협하다, 그랬다던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고 노인은 노인이다. 너는 거의 노인이다.

우린 거의 노인이야.

남아, 갑자기 노인은? 그리고 거의 노인이 뭔데?

그게, 우리가 거의 노인이 되어있다는 말.

재미있네. 노인이면 노인이고, 아니면 아니지, 무슨 거의 노인?

그, 그게 말이야, 임신은 거의 임신 조금 임신 그런 말이 안 맞지만, 노인은 조금 노인 거의 노인 그런 말 되는 것 아냐?

그래서? 남이 너 거의 노인 하겠다고? 난 안 할래.

하련다고 하고 뭐 그런가…….

시끄러. 바지락 국물이나 좀 마시자.

 

바지락 국물 - 별로다. 싫다. 음식들 중 싫은 음식이 많다거나, 무엇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친구들은 차마 비정상이란 말은 하지 않지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것이다. 타고난 음식불감증, 재미불감증, 그런 것도 있을까.

아차, 불감증이란 단어는 금기어인 것을. 왜 불감증이란 단어가 금기일까. 단어 그 자체로는 감각이 둔하거나 익숙해져서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는 일에 불과한데. 예컨대 도덕적 해이 비슷한 말로, 도덕적 불감증이 문제다, 뭐 그런 데에도 사용한다. 그러니까 재미불감증이란 말을 좀 쓰면 어때서. 말 하자!

 

미선아, 우유 소화 못하거나, 재미 소화 못하거나 뭐가 달라? 난 재미를 소화하지 못한다, 그 정도. 소화불량증이라 그럴까 보다.

나남이 히트다, 오늘. 유당불내증은 아니고 재미불내증이시다고?

재미있는 말이네. 재미있는 것을 몰라?

이 정도가 무슨 재민데. 재미없어, 하나도. 재미불감증이라지 뭐. 내가 고집했다.

그렇구나, 나남이. 나남이는 오늘 재미가 없으시단다.

아니, 그런 단어들 재미없다고!

그래도 오늘 여기 나들이가 재미없지는 않다고! 그렇게 정리하자고! 정인이는 무엇이든 동글게 끝내려 한다.

미안해도.

이 얘 말꼬리 좀 봐, 기어코 재밌다 그러지는 않으시네.

친구들 참 재밌다. 참 재미있게들 사네요. 자주 와요, 여기. 난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떠들고 하는 것 보면서 신나는데요. 주인 언니가 거든다.

우리, 좋아 보이죠?

그럼, 그러믄요.

 

 

좋아 보이는 얼굴들을 하고서 하루가 간다. 툭 터진 정자에서 시골 옥수수도 먹고, 싱싱한 바지락에다 논밥을 먹으면서 담소한다. 그렇게 좋아 보이는 얼굴들로 헤어진다. 좋아 보인다는 것이 꼭 좋다는 말이 아닌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더 좋아 보이는 얼굴의 미선이 늦을 새라 서둔다. 모태싱글로 똑 부러지게 잘 헤쳐 나가는 미선이 보기 좋다. 보기에 좋다. 속으로는 어떤지 아무도 모른다. 표리부동이 꼭 나쁜 말도 아니다. 속마음 다 내비치고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살자면 그 나름대로 표리부동일밖에. 그러니까 엉큼한 표리부동은 경계해야겠지만.

 

오늘은 무슨 행사냐? 토론이야, 강연이야?

차에 오르자마자 정인이 캐물어도 미선은 대꾸가 없다. 전문적인 일에 관한한 우리들하고 별반 나누지 않는다. 답답하리라.

내가 화제를 바꾸었다. 난 외려 자꾸 뒤가 켕긴다. 양파 값, 일 값, 시소처럼 오르고 내리고 연결되어 있잖아. 양파 값이 내려도 임금은 올라야 하고, 임금 오를수록 양파 주인은 내려가고…….

미선이 곧장 들어온다. 최저임금 올라가면 영세 고용주를 죽이고, 고용주 살리려면 최저임금 못 올리고. 정책 입안자들의 기본 고민이지. 모순이기도 하고. 도처에 이해 충돌이지!

시소가 바닥을 친들, 그래도 땅속으로까지 들어가는 건 심했어. 뭔가 잘 못이야. 왜 죽어! 일 년 내 농사 지어놓고! 성주가 잽을 넣는다.

잘못인 것 한둘이냐! 어찌 보면 사는 게 다 잘못이지.

남아, 뭔 말을 그렇게 해. 켕긴다며. 그런데 죽은 게 잘 한 거야? 사는 것이 왜 잘 못! 볼에 부드러운 바람 느끼면서 한낮 살았으면 좋은 날 아니냐고! 정인이 속상해 한다.

이게 무슨 좋은 날이야, 그저 그런 날이지. 있어도 없어도 되는 숱한 날들 중 하루.

그렇다고 오늘을 버리냐, 예까지 자알 살고서.

잘 살지 않았다니까, 그냥 살았지. 나도 버틴다.

그렇다고 버리냐고! 오늘을 버리면 어제에서 내일로 어떻게 건너 뛰냐. 내일로 안 갈 거냐고?

내가 안 간다고 내일이 안 오는 것도 아니고, 있으나 마나 한 날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시간들이 허무해서 하는 말이지. 쓸모없는 생은 이른 죽음이라고 했어.

누가? 명언이야?

앗, 괴테의 이피게니다! 나남이, 그건 좀 다르지. 미선은 정말 박사다.

뭐가 달라.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숨만 쉬고 있으면, 이미 죽음이 와 있는 거라고. 죽은 거라고. 형용사 빼고 말하면, 생은 죽음이다.

누가 이애 좀 말려라. 또 시작이다. 말 수 적고 얌전하던 애가 이상한 말 터뜨리는 것 가끔 심하더라. 이것도 모순이냐?

너까지 왜 이래. 모순 소린 자꾸 듣다보니 어째 거슬린다. 찔레꽃 향기 듬뿍 묻혀 가면서 웬 철학들이냐고.

힘들어서 그래. 넌 괜찮아? 하루하루가 괜찮아?

어때서?

미선아, 분위기 좀 바꾸자, 음악 큐! 경쾌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우리들……

 

음악 소리가 들려오자 감긴 눈 안쪽에서 정인이 모습이 솟는다. 신발 소리가 사뿐하다. 앞뒤가 함께 닿는 발걸음은 맨발인 듯 가볍다.

박자 말고 선율을! 선율을 타라고요! 예, 그렇게. 아니, 고개는 들고요. 배를 등 쪽으로 민다고 고개를 내밀진 마시라고요! 앞가슴 활짝, 화알짝 펴서 쇄골까지 당기도록! 에이, 뒷가슴은 견각과 함께 앞쪽으로 밀고…….

 

선율이구나, 멜로디…….

남아, 무슨 소리? 무슨 선율?

어디에 가 있냐고! 얘가 점점…….

또 들켰다. 요즘에는 생각이 튀어 나와서 속마음을 들키는 일이 부쩍 늘었다. 싱그러운 정인이가 부러웠나? 허리를 뒤로 젖하고 걷는 모습이 우아하다.

뭐냐니깐!

아니, 갑자기 정인이 신발 소리가 멋져서. 마술이야, 천천히 걷고 싶음 천천히 사뿐히 걷고 싶음 사뿐하게.

발걸음 소리가? 어디서? 네 옆자리에 푹 앉아계신 정인이 발자국 소리가 지금 들린다고?

응. 선생님 목소리를 따라 나긋나긋, 박자가 아니라 선율을 타면서 사뿐사뿐.

박자 말고 선율을 타면서 사뿐사뿐 - 너 우리 댄스교실 와봤어? 정인이 놀란다.

아니, 그냥 생각이 난 거야. 생각하면 안 되냐 그래? 우물쭈물 변명으로 간다.

실은 우리들 다 댄스교실 다녀야 해. 운동 중에 최고라잖아, 음악이며 상대와의 교감이며, 단순운동과는 비교가 안 돼. 미선은 댄스에 관해서도 정답을 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정인아, 그게 그런데 아침 아홉시라고?

아, 그만 둬. 새벽밥 먹고 춤추러 갈 일 있남요? 정인인 취미가 되시니까 쭈욱 하랍시다!

갑자기 음악이 꺼지며 차가 멎는다.

내려, 얘들아, 오늘 여기서 한꺼번에 푼다. 알아서들 흩어지라고! 씨유!

너 여기 미국 아니다. 잘 가라고, 라이드 고마웠어.

오염된 한국어구만. 하긴 단일민족도 아닌데 뭐. 샬롬!

나마스테!

 

 

지하철 타러 내려갑니다. 오고 가는 것을 혼동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여럿이 함께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실은 지난번에 문화전당역에서 금남로 쪽을 탔어야 했는데 남광주 쪽으로 갔다가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 때문보다는 낭패감 때문에 더 속상했었던 기억을 지하철 탈 때마다 하게 됩니다. 방향을 잃는 일이 어디 지하철에서 뿐이겠습니까. 처음 순간 1°만 살짝 틀어져도 엄청 달라져버리는 인생길을 살아가노라면.

그런데 인생이 직선은 아닙니다. 아예 꺾어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슬쩍 각도를 옮길 수는 없는지요. 과제를 수행하는 중에 주위의 사물이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집중력은 우수한 성질이죠. 하지만 도가 넘으면 병입니다. 인생이 과제인 한 그렇지요.

귀를 베어가도 몰라요, 쟤가!

어려선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다가 핀잔 듣기가 일쑤였답니다. 그때는 핀잔 속에 칭찬의 냄새가 끼어 있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니 그게 꼭 칭찬받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길을 바꾸어 갈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는 길이 가고 싶지 않다면, 바꿀 수도 없다면, 어찌합니까?

모순에서 찔레꽃으로 앙파로 춤으로 숨 가쁘게 상념을 옮긴 오늘, 오늘 하루가 갑니다. 들고나는 이 없이 닫혀있기 일쑤인 현관문을 벗어났으니, 조금은 더 사는 것 같은 하루였습니다. 여럿이 섞여서 슬금슬금 앞으로 갔을지요. 앞이란 어디일까요. 목적지를 앞이라고 해야 할지요.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남은 날들 중에서 하루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몇 날이 남아있을지 누가 압니까.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 숨이 막힙니다. 모르는 것은 흔히 어둠이라고 표현합니다. 창밖에 어둠별이 떠오릅니다. 오늘밤이라는 이름의 밤이 올 것입니다. 어쩌면 밤새 숨이 막히겠지요. 아니면 내일 밤에, 어느 밤에. 아득히 혼자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0. <전남여고문학>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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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11. 17. 13:01

 

 

우빈과 성빈이 예인피아노학원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우빈이 곡명 : <하차투리안 소나티나 No. 3, 3악장>

http://youtu.be/mVk0fun8oIo

 

 

성빈이 곡명 : <눈송이 래그타임>
 http://www.youtube.com/watch?v=WynJiwZTMVw

 

 

우빈은 사정을 다 이해하지만,  

성빈은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올 수 없느냐고 '따지듯이" 졸라댔다.

하지만 11월 8일이면 서울 다녀온 일주이로 안되는데다가 9일에 일이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세 가지 일이 한꺼번에 -

그중 마지막이 이동원과 장사익 음악회에 초대받은 일이었다. 

 

                  ▼

                             

                         

 

 

가을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살아있는 자매들 넷, 나부터 민, 진, 희 - 배려가 넘쳐 병(?)이라는 민이 남편이 기사와 기사를 담당했다.(카발리에와 드라이버) 

 

넷의 공통점 - '용'자를 이름에 지니고 있고,

                  박수를 치지 않았고,

                  2G를 쓰며 활영도 하지 않은 것.

 

진이의 후회 : "심장에 남은 사람"을 녹음하지 못한 것!

                             

 

 

 

 

 

긴 어디에서 그런 노래를 들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가슴에 남을' 사람을 병원에서나 쓰는 '심장'이라 하니까.

사람이 '귀중하다'?

우리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쓰지 않고 물건을 귀중해 하니까. 

 

 

나는 <또 기다리는 마음>을 서럽게 서럽게 들었다.

정호승의 시에서 과거형을 현재로 바꾼 의미도 아프게 다가왔다. 

 

 

<찔레꽃> - 장사익은 이 노래를 위해 태어난 것일까?

               육신이 없는듯 가볍고 비장하기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래도 그 사이 나는 다른 찔레꽃 가사를 떠올렸다.     

 

 

<봄날은 간다> - 이동원, 장사익 두 소리로 들었다.

                     이 노래는 이동원이 불러야 하는가?

 

이동원 - 속 없이 말하자면 그가 또 무대에 설까?

그의 흔들거리는 건강이 염려되어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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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