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문학인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1.09.07 반석 위의 벽?
  2. 2012.12.07 수필 「마지막 책」 - 『그곳에 그가 있다』
  3. 2010.08.15 병든 고향
수필-기고2021. 9. 7. 02:13

 

[산문] 반석 위의 벽?

 

 

오늘 36도의 바깥 온도는 신기한 숫자이다. 체온이라서다. 이 여름 폭염 속 모든 것은 태양열에 녹아내린다. 인간은 에어컨으로 무장했노라고 자만한다면 큰 오산이다. 오늘 순간전력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다면, 더위와 벽을 쌓고 냉방으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우리를 열기에서 지켜줄 벽은 반석이 아닌 전기 위에 세워져 있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 버스는 정차하고 한 겹 비닐포장 뒤에서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의 벽은 버스를 덮친다. 굵은 플라타너스가 서있던 아래는 플라타너스가 살려내지만, 누가 플라타너스 아래 멈출지는 하늘이 정하는가.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 플라타너스 …… /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 플라타너스 /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 - 더러는 시를 외우고 있음을, 플라타너스, 너는 알더냐.

 

한탄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멀리 플로리다 해변의 풍광 좋은 12층 아파트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인간에게 안전한 벽이란 정말이지 없는가 보다. “건물이 상당 부분이 무너졌어요. 싱크홀로 빨려 들어갔어요.” 911 구조대에 그 순간 걸려온 SOS신호들! 한 순간에 함께 레테의 강을 건넌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갇혔던 벽의 배신에 스러진 것이리라.

 

문명사회 속 인간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줄 벽은 온전하지 못하다. 견고한 반석이라고 믿었던 문명은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지마할의, 가우디의 아름다움이 영원하리라 믿어도 될까. 반석 위에 주춧돌을 놓고 벽을 쌓아야 한다고 배우지만, 인생에서 반석은 대체 무엇일까. 하물며 마음의 피난처가 되어줄 벽은 있기나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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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 한국여성문학인회 대표선집 , , 2021 코드미디어,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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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12. 7. 22:56

 

마지막 책

 

 

  오래 살았다, 라고 말해야 옳다. 그러면서도 지난 세월의 무게가 두께가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시간은 늘 지나가기 때문일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일이 무엇일까. 과거를 반추하는 일을 시작해보려 해도 화면은 현재에 멈추어 있다. 너무 아득해서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한 기억이라해도 너무 멀리 와서는 희미하다. 내 머리는 아마 현재밖에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녹슬었는지도 모른다.

 

  청춘은 아름다워라, 라고 누가 그랬던가.

  헤르만 헤세가 중년의 대작들인 『데미안』과 『싯다르타』 그리고 『황야의 이리』를 쓰기에 앞서 쓴, 어찌 보면 가벼운 단편 제목이 그것이다.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내었을 때가 40을 바라보는 나이. 이미 청년이 아니었다. 부친의 사망, 갓 세 살 난 막내아들의 뇌수막염, 아내와의 파경이 드러나던 무렵이다. 아내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 자신도 청소년기에 정신요양원 신세를 진 경험이 있었다. 기숙신학교를 탈출해 짝사랑의 절망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결과였다. 일반 김나지움으로 옮겨서도 학교는 망쳤다. 그의 청춘은 일상에서의 탈출로 점철된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자전적인 『황야의 이리』에서도 주인공의 우울과 분열의 원인은 청소년의 ‘의지의 분쇄’를 기본으로 하는 교육 탓이다. 작품마다 아팠던 청춘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청춘에 대한 그리움은 원초적 인간본능의 하나일까.

 

  현대문명은, 물론 교육을 포함하여, 자연과 유리될수록 성공적이라 간주되고 있다. 개인은 거대 문명의 주변인으로 밀려나서 소외는 점정에 이르렀다. 어찌 제정신으로 살랴. 멘붕의 시대 - 우울과 정신적 불안 속에서 청춘은 아름답다고 외치면서도 헤세는 놀랍게도 노년에 이르는 삶을 누렸다. 생애 후반에 더욱 빛나는 책들을 썼고, 충분히 인식되고.

 

  왼손에 책을 펼쳐든 채로 고꾸라진 그의 마지막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섬뜩하다. 그래서 잊지 못하는 것 목록에 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책 가운데에서도 하필 『고백록』이라니.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오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할 수 없나이다.’ - 이 구절 때문에? 평생 달아나고자 했던 신앙으로? 아이러니다.

 

  책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들. 우연히 마지막 밤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할애했을까. 헤세에게 가장 잊지 못할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고 가정한다면, 나에게는 누구일까, 어떤 책이 될까, 마지막으로 읽게 될 것이. 혹은 쓰게 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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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그가 있다』, 한국여성문학인회, 2012, 책만드는집, 196-197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0. 8. 15. 23:58

병든 고향

 

 아따 거 뉴스 한번 징허데.

징헌 뉴스 한 두 번가.

아 거 즈 각시 죽이고 목매단 놈 말여.

그런 놈 한 둘가.

그래도 이거는 참 험채, 으째 그랄 수가. 친딸 아니던가, 친딸. 친딸을 그래놓고 형살고 나와서는 각시를 차로 밀어?

무슨 일인데들 그러우?


마침내 미아리가 나설 때까지 공능과 월곡 두 여자가 뉴스가지고 죽일 놈 살릴 놈 재판을 한다. 이 청소아줌마들이 잠시 만나는 것은 점심시간이 고작이다. 지하 4층, 그것도 계단 아래. 퀴퀴한 냄새. 바닥은 물이 듬성듬성 고여 있다. 하지만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한 귀퉁이에 이불을 괴어놓았다가, 지난 번 대청소 때 어느 방에선가 내다버린 소파를 가져다 놓았으니 지금은 부러울 게 없다. 이곳은 대학교 평생대학원 건물. 누가 밖에서 들여다본다면 떡 하니 ‘접근엄금’이라는 푯말이 적힌 전기실 맞은편 이 계단아래가 섬뜩하겠지만 대순가.


어마 저거 또 쥐 아이가?

설마, 요샌 아니드만.

나가 그라므 헛소리라?

아니 뭐 헛소리라니. 그냥 당신 겁이 안 많소! 각시 죽인 놈 야그도 벌벌 떨고…….

그기사 암데 가치도 없는 거라서리.


거야 공능이 이해해요, 월곡 저이가 남정네 얘기람 원래……. 미아리가 끼어들어서야 둘은 입을 다물고 김치를 깨문다. 총각김치는 소파 아래 넣어둔 통속에서 익다 못해 쉰내가 나지만 맛있다.


요건 이래 뵈도 중국산 김친 아닌기라.

당신 어깨고 허리고 아파 죽겠다면서도 김친 꼭 해먹나 봐.

그거라도 해 줘야지 어메가 어디 해주는 거이 있어야 말제.

우린 덕분에 돈 안들이고도 웬만한 식당밥보단 낫게 묵네.

그럼 우리가 단돈 86만원 월급 챙기며 식당밥 묵겄어, 미쳤제.


다시 숨을 죽이고 사각사각 총각무우 깨무는 소리만 울려퍼지는 사이 월곡동아줌마는 눈을 감는다. 미쳤제, 하모 미쳤제. 결혼식을 해준다니까 미쳤었제.


친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는 연속극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자리가 국군이었는지 도망친 인민군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 많았다는 피난민 중 하나였는지 가르쳐줄 수 있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기도 하니까. 그렇게 자란 여자애는 더러 밥이다. 남들의 밥이자, 그것이 내 밥이었다. 한 물 두 물 갔을 때서야 뜻밖에 배가 불러왔지만, 반가움 반. 미래가 깜깜한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이었을까? 이리 키울 거라면 말이다.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던 나날. 정말 상처한 사람이 정말 구원처럼 다가왔었다. 처음으로 들어 앉아 살림이라고 차렸고, 처음으로 따뜻한 나날이었다. 따뜻한, 멍청한 나날은 짧게 끝났다. 무섭게 끝났다. 못된 의붓아비는 연속극 말고도 널렸다. 점잖게 생겨도 소용없다. 악마는 원래 여러 얼굴인 것을. 코앞의 홍당무에 팔렸던 내 발등을 찍고 싶었다. 세상 모든 귀신들에게 빌어서 그날 이전으로 땅덩어리를 돌려놓을 수는 없을지. 밤이면 밤마다 하도 용을 쓰다가 그것이 빠지고 말았다. 그것이 빠진 여자들은 원통한 여자들이다. 그것이 빠져도 내 딸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내사 외롭다 못해 불행을 자초했건만, 내 딸은 어밀 두고서도 요모양이라니. 죄인 어미한테 해죽이 웃으려고 애쓰며 시들어가는 내 딸을 어쩔꼬. 딸 데리고 시집가는 죽일 년! 딸 놓아두고 죽을 수도 없는 죽일 년!


고향을 멀리 떠나왔음 머하노.

밥 묵다말고 갑재기 무슨 소리요?

게서 고향 이야기가 왜 나와, 누구 울리고 싶으우?

고향이 어데면 머고. 그래, 고향이 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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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흐름 위에 멈춰 선 시간>  한국여성문학인회 6.25 60주년 기념 특집, 246-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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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