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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3.01 침묵8 - 졸업식
소설2025. 3. 1. 12:05

 

 

 

침묵8 졸업식  

 

 

    졸업식을, 연두의 졸업식을 기다리지는 못했다. 원래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에 나타나는 일이 그때 복학을 미루고 빈둥대던 승욱이 고안해낸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가을은 유난히 빨리 지나는 법이고, 우물쭈물 예비역들과 섞여서 졸업식에 나타난다? 괜찮은 장면이었다. 아무렇지 못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채 연두를 맞닥뜨릴. 그런데 뜻하지 않게 또 한 번의 도피처가 나타났다. 다소 엉뚱하달까, 전혀 예견되지 않았던,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게 밝고 자유에 넘치는 피난처였다.

 

    승욱은 시제에 참석하고 나서도 그대로 고향집에 머물렀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대학가는 마음속에서도 멀어졌다. 종일 말없는 그를 어머니는 이런저런 말로 위로를 해주시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많이 고마웠다. 왜 저려, 벙어린가 벼, 동네에서 평소에는 그런 말을 듣는 어머니였는데.

    투틸로, 뭘 먹을끄나. 곰국도 질렸을 것이고이.

    투틸로, 밖에 좀 나와봐라이. 올해는 은행잎들 유난히 노랗네. 너 어려선 똑같은 두 잎사구 찾는다고 퍽도 좋아라 했제.

    투틸로, 쉴 때 쉬여, 평생을 살라믄. 평생 처자식들 먹여 살리기가 쉽가니.

    이런 말씀에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대로 갈기갈기 찢겼다. 아버지는 그러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나이 서른한 살 때 어디론가 사라지신 아버지에게는 평생 처자식을 먹여 살릴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을까. 그것이 늘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누굴까. 누구였을까. 승욱의 기억 속에 희미한 파편 두어 개로 남아있는 아버지. 얼굴이 맞닿았을 때의 까끌한 감촉, 품이 따뜻했지만 까끌해서 찡그리며 피했던 큰 얼굴. 또는 그의 눈에 눈꺼풀 속에 짙게 그려진 방문이 있었다. 자라면서 떠오른 흐릿한 영상에는 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이상한 그릇 위에 올려진 이상한 것들, 지금 생각하면 산자며 곶감들 어쩌면 사과도…… 그런 풍경이 있었다. 방문은 오래도록 닫힌 채였고, 그는 할머니의 품 안에 붙들려서 문을 열어볼 수가 없었다.

    1973년 1월 25일 이래 아버지는 어딘가 차갑고 어두운 물속에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뭍에서 20km도 안 떨어진 바다 위에서 배가 침몰했다고 했다. 나중에 나중에 다 커서 자세한 내용들을 찾아보았을 때 그는 소스라쳤다. 애초에 정원 50명의 배에 그 두 배도 넘는 136명의 승객을 태웠었다니! 폭풍우가 해제도 되지 않은 아침에 출발을 감행한 그 무모함이라니. 중간 기착지에서 내렸던 27명의 아슬아슬함이여. 조도로 향하던 배에 거센 폭풍우가 바닷물을 몰아넣었고, 물은 엔진을 꺼버렸다. 그러니까 사고 전까지는 이러쿵저러쿵 멀쩡했던 어른 아이 109명이 물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무 죄 없이. 그 중 48명이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19명, 바다 속으로 사라진 실종자는 42명이랬다. 1/42라는 숫자로만 남은 아버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몇 백 명씩 사망했던 선박침몰 사고들이 간혹 있었던 때라서 크게 주목을 받지도 못했다. 바로 3년 전 발생했던 남영호 사고에서는 희생자가 300명도 넘었었다. 신문에 크게 보도된, 바다를 떠다니는 감귤상자들 사진들도 그대로 함께 눈 속에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때였겠다. 그때도 화물 적재 허용량을 4배 이상 초과했다는 무지는 설명이 안 되었다. 시신 인양마저 날씨 핑계로 속전속결로 쉬 중단되었고, 구조된 생명은 고작 12명이었다니, 지금 들어도 무서웠다.

    한성호 사고쯤은 남영호 때 300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겠다. 겨우 한 달 전에도 부산에서 출발하여 남해를 다니던 흥안호 사고로 사망 십여 명. 그렇고 그런 선박사고들 중 하나로 기억되는 한성호 사고는 노 투틸로 승욱의 아버지를 어딘가로 데려가 버렸다. 어디로 가셨을까. 하느님의 뜻이셨을까.

 

    1943년 생 아버지, 승욱의 아버지는 그때 요즘 나이로는 서른도 못 되었다. 서른 살 아버지가 다섯 살 아들을 두고, 서른 살 남편이 스물다섯 살 아내를 두고 사라졌다. 먼 바다 밑으로, 어두운 세계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렸을 때 승욱은 느그 아부지는 일찌감치 하늘나라 가신겨! 라고 말하는 이웃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말로는 바닷속으로 가셨는데, 왜 하늘나라일까. 바다나라와 하늘나라가 통하는 것일까. 어느 때 그림이나 사진들 속에서 하늘과 바다가 하나일 때도 있기는 했다.

   하늘나라도 바다나라도 모두 사람들의 뇌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자란 뒤였다. 뇌 속이 아니라 마음속인가. ‘마인드’라고 하는 것이 뇌에 있는지 심장에 있는지, 그것을 그는 지금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한없이 무궁하게 넓은 나라들 말고, 코앞 방 안에 집안에 마당에 있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광식이가 가끔 동생 광순이를 데리고 도망쳐 나오는 그 집 마당에, 아님 그 집 방 안에 있을 그 집 아버지가 부러울 때가 많았다. 언제나 볼 수 있었던, 불그레한 멋쩍은 얼굴을 한, 수염도 좀 지저분한 광식이 아부지!

 

    울 아부지도 수염 있었어?

    아녀. 뜬금없이 웬 수염?

    어머니는 아버지가 수염이 없었다 했는데, 승욱은 좀 이상했다. 어렴풋이 아버지랑 얼굴을 비볐을 때의 느낌은 분명히 어딘가 까끌한 감촉이었는데. 하긴 쓸린 감촉은 남아있는데 손가락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느그 아부지는 선생님이셔 놔서.

    선생님은 수염 없어?

    글쎄. 느그 아부지는 단정한 신사이셨다.

    선생님은 신사, 단정해. 알았어, 엄마. 근데 단정이 뭐야?

    그래, 궁금하냐. 이제 학교 가보면 알게 되어야. 학교 선생님들은 단정하시단다.

 

    어머니의 말은 알쏭달쏭했다. 모르게 되면 침묵이 답이다. 승욱은 말수가 적은 아이가 되어갔다. 단정함도 스스로 깨달아야 했다. 단정하다는 것은 비슷비슷한 것인가 싶었다.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선생님들은 머리 모습도 비슷했고, 수염은 아무도 없었다. 흰머리라거나 안경이 아니라면 많이들 비슷했다. 살짝 올라간 듯한 오른쪽 어깨도 같았다. 아니, 여선생님들은 분명 다른 옷들을 입으셨다. 하지만 그 나름 단정함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도 여선생님들하고는 달라도 뭔가 모르게 단정하다는 느낌이었다. 단정함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몰랐으려나,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특히나 성당에 같이 갈 때 어머니는 단정했다. 그의 손을 꼬옥 쥐고 오가셨다. 성당 입구에서부터는 머리에 흰 수건을 사알짝 덮어쓴 모습이라니! 미사포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는 일이 미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야 알았다.

    엄마, 왜 엄마들만 하얀 수건을 써? 예쁘기는 하지만.

    응, 딱히 예쁘라고 쓰는 것은 아니야.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 보다 깨끗하고 순수할 수 있으라고 그런단다.

    엄마들만? 투틸로는 왜 안 해?

    으응, 그건 엄마도 잘 모르지. 신부님 말씀으로…….

    고운 미사포는 세례를 받은 여성들만 쓰는 것이었다. 왜 여성들 만일까, 그것은 더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나 차별은 예수님 시절에도 있었나 보았다. 특히 머리카락으로 표현되는 성적인 특징을 세속적이라 간주했으니, 그것을 가리는 것을 미덕으로 봤다는 말이었다.

    왜 하필 머리카락? 아랍의 여인들, 무슬림 여인들에게서는 아예 머리카락을 볼 수 없다. 얼굴만 빼놓고 몸 전체를 가리는 검은 차도르, 겨우 눈 부분만 내놓는 니캅, 더 심하면 몸 전체를 가리며 눈 부위만 망사로 댄 부르카까지를 입는다. 터키나 레바논 등 비교적 개방된 나라에서도 히잡을 둘러 얼굴만 내놓을 뿐, 머리카락을 내보이는 일은 없다. 코란에서도 성서에서처럼 여성은 순결을 지키고 정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머리카락은 순결이나 정숙함과는 다른 차원의 무엇일까.

 

    머리카락…… 머리카락은…… 아, 머리카락은 마법이었다.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혼란의 시작이었다. 의식의 소실, 소실점에 그 간지러움이 있었다. 연두, 그 애의 머리카락. 징글징글한 순간, 찰나에 고정되어버린 그 순간은 영원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이냐시오 신부님을 입에 달고 사셨다. 우리 본당을 떠나신 뒤로도 그랬다.

    로마에 유학 가셨다는 말을 들은 것이 언젠가 몰라. 신부님들도 계속 공부를 배우시나 봐야. 독일에 계신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는데. 공부 마치고 거서 사목도 하시고. 내가 맨날 우리 신부님께 여쭈어 보았거든.

    첫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도 말씀하셨다. 투틸로, 이냐시오 신부님이 돌아오셨단다. 한참 되셨다던데. 그런데 그해 가을엔 신부님 이야기가 없었다. 승욱이 먼저 물었다.

    이냐시오 신부님은요? 진작 돌아오셨다며요?

    으응, 그게. 좀 아프셨나 봐.

    아프셔요?

    아니, 그게. 갑자기 선종하셨다네.

    예?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대신 자신도 모르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었다.

    엄니, 저 유학을 갈까 봐요. 이냐시오 신부님이라면 그리 하라셨을 것 같아요.

    아니, 투틸로! 무슨 생각이래! 신학으로 공부를 바꿀겨?

    거기까진 아니고요. 일단 로마에 가서, 이냐시오 신부님 다녔던 학교며 성당들, 엄니, 이냐시오 성당도 거기 있어요. 꼭 보고 싶어요. 공부도 하고요.

    저 도망치고 싶어서요, 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속내는 발화되지 않는다.

    아니, 무슨? 로마를 가야 해? 얼마나 멀 겨.

    군대보다는 안 멀어요. 거긴 맘대로 왔다 갔다 하니까요.

    그러네, 그러네. 이냐시오 신부님이시라면…….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실 일이 있으면 늘 내뱉는 어구, 이냐시오 신부님이시라면…… 그것이 이번에는 한참 걸렸다. 며칠을 어머니는 몇 잎 쌓이지도 않은 낙엽을 쓸고 또 쓸었다.

    이냐시오 신부님이라면…… 투틸로가 군대를 마쳤다고?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학을 미루고 있다고요? 왜? 하긴 쉼이 필요하지요.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어떤 결정의 시간에 앞서, 또는 그냥이라도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셨을 거다. 너 이렇게 쉬고 있잖여. 근디 로마인가 독일인가 가고 잡다면, 거까장도 미리 아셨을까? 암튼 투틸로 니가 그 길로 따라간다면 많이 좋아하실 건데. 근데 신부 공부는 말고야. 혹시라도 공부까지는 따라가더라도. 암케도. 니는, 투틸로 니는 느그 아부지 외아들이잖여.

 

    순간 승욱은 신부님을 보았다. 들었다.

    예, 신부님. 제대 후 조금 방황하고 있습니다. 길이 안 보입니다. 신부님처럼 로마에 가서…….

    로마, 로마. 그보다 독일어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신학도, 철학도, 참 사학과라 했지요. 복학을 망설인다면, 역사학 대신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말인가요? 아직 확실하지 않다면 이탈리아 가까운 남독일쯤에서 일단 독일어를 배우지요. 슈베비슈 할,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지요. 특히 여름에는. 그 사이 로마도 여행하고. 지금 교황님도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시잖아요. 폴란드인이지만 독일어 완전 잘 하시지요. 독일에서는 공부할 것이 엄청 많을 겝니다.

    왜 갑자기 로마에 가겠다는 말이 튀어나왔을까. 그 자신도 모르게 신부님의 그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충동일 수도 있었다. 대입 끝나고였을까. 어머니의 말을 듣다가, 언젠가 로마에 가면, 언젠가라도, 그레고리오 대학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당에는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기억이 순간 쏟아져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유학이라기보다는 그저 한번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는데.

 

      어쩌면 사투리 군의관의 경고가 계속 작용하고 있었을까. 얌마, 미주신경이 너무 억압받으면 스톱도 한다이. 뭣 땜시 자기를 억누르냐, 젊디젊은 넘이. 스톱이 뭔 말인가 알겄어? 알아 듣냐고!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스트레스를 조절하지 못하여 사회적 회피가 심해지면 미주신경이 스톱할 수 있다는 엄포이기도 했었다. 제대하면 어딘가 느긋한 환경으로 바꿔보라고, 어딘가 꽂히는 데에 적극적 관심을 가져보라는 훈수였다. 그래, 새로운 곳으로 가자! 여차하면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다니셨다는 뮌스터 대학에도 가보고! 독일 누비겠네!

    어머니는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만 아니라면 눈물로 승욱과 다시 헤어지는 일을 지원하셨다. 순간 유학의 길은 그의 진지한 미래가 되었다. 이냐시오 신부님의 말씀을 실제로 들은 것처럼 로마에서 가까운 남독일 괴테 인스티투트에 가서 독일어를 배우겠다는 시작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복학은 자동적으로 미루어졌다. 연두의 졸업식을 어색하게 기다리는 일은 없었다. 늦가을 아니 초겨울에 그는 홀연히 공항을 통해서 한국 땅을 벗어났다.

 

 

    독일이 행선지로 낙착된 것은 간단한 이유였다. 나랏말 한 마디도 모르는 이탈리아 보다 덜 불안한 땅이라는 점이었다. 대학도시는 언감생심, 조용한 지방에서 독일어를 정식으로 배우고, 로마 여행도 쉽게 할 수 있는 남쪽 도시, 슈베비슈 할은 복잡한 이름만큼 접근도 쉽지는 않았다. 뮌헨으로나 정할 걸, 하는 후회를 담으면서 어렵게 찾아가야 했으니까. 비행기에서 내려서 기차를, 그것도 갈아타다니! 그렇게 도착한 슈베비슈 할은 첫눈에 생각보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코허 강을 끼고, 그러니까 소금을 생산하여 일찍이 부를 이루었던 도시라는데, 유럽이란 곳이 다 그럴까. 앙상한 겨울 풍경에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환경에 깨끗함은 거의 비현실적이었다. 목적했던 독일어학원 괴테 인스티투트는 하필 휴무 중이었고, 근처에 무작정 들어간 숙소는 2층을 숙박으로 내놓은 음식점이었다. 그때 좀 이상했다. 어떻게 식당이라는 곳이 썰렁하게 아무도 없는가 했었다.

    승욱은 조금 삐걱거리는 층계를 올라 도착한 방에서 짐도 풀지 않고 드러누웠다. 조용한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주인이었다. 루어차이트 어쩌고 말을 그때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니까 브레이크타임이라고 말했다. 아, 식당도 일하는 사람들이 쉬어야 맞지. 점심도 앉아서 먹겠고. 작으나 문화적 충격이었다. 주인은 차를 대접하겠다고 그냥 천천히 영어로 말했다. 처음 만났던 순간 서툴게 내뱉었던 승욱의 독일어로 짐작해서 그것이 전부라는 것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차를 마시고, 하필이면 주말이 시작되어버린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월요일에 방문한 괴테 인스티투트에는 막상 그에게 적당한 수업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곳은 본격적인 독일어강좌로 곧 이은 대학입학을 위한 철저한 강의들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기초적인 독일어수업을 하는 학원들이 널려있을 법한 대도시가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아, 그럴 바에야 시의적으로 아주 궁금한, 보고 싶은 것이 널려있는 그곳.

 

 

    베를린으로 가자, 그것이 선택지였다. 말로만 듣던, 영화에서도 봤던가,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으니 그 파편들은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남아있을까. 상반된 진영의 최전선으로 대척했던 동서가 합쳐져 있을 베를린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장벽 위에 인산인해로 올라있던 사진이 세계로 송출된 것은 1989년 늦가을로,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았다.

    독일 내에서의 이동수단은 대단했다. 거미줄 같은 조직으로 유럽을 다닐 수 있다니, 언젠가 로마여행도 미리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방인의 길은 어려웠다. 다시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기차를 타야한다. 경유 없이 가는 열차는 아침 8시경 출발이니 그 시간에 거기 댈 수가 없다. 10시경에 출발하는 도이췌 반이라는 기차는 오후 4시쯤이면 베를린 도착이었다.

    베를린 중앙역 – 일단 역 내 로커에 짐을 넣어놓고는 관광 안내서부터 샀다. 원래부터 베를린의 상징이었다는 그곳, 브란덴부르크 문이 도보 20분 거리에 있었다. 1.4km라면 대학캠퍼스 정문에서 북문까지나 비슷했다. 거의 책 수준인 영어판 안내서는 깨알 같은 글씨로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큰길을 따라 걷다보니 국회의사당이 보였지만 곧바로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향했다. 사진에 본 그대로 그 위용이라니, 아, 고대 그리스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했다니까 그곳도 가 보아야 하나! 시공간의 일탈에 승욱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눈을 뜨자 꼭대기 사두마차가 성큼 다가왔다. 하필 개선장군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유린한 나폴레옹이 저걸 빼앗아다가 파리 개선문 위에 앉혀놓았었다니, 독일인들 분통 터지기도 했었겠다. 곧 다시 프로이센군이 파리로 진격하자마자 되찾아왔다니, 역사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독일과 프랑스를 견원지간이라 한다는 말의 근원을 알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마차가 호위하고 있는 여신상의 정체 또한 어찌 보면 서글픈 사실의 확인이었다. 처음 건설 때 평화의 문이란 이름 따라 당연히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가 조각되었지만, 프랑스에서 되찾아 온 뒤에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로 대체했다니. 그래, 평화 보다는 전쟁이라!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란 말의 증거로구나.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한탄 같은 것이었다. 승욱은 갑자기 힘이 풀렸다. 바로 그런 힘들 뿐, 세상에는 지탱할 다른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때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의 허기를 승욱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배도 입도 마음도 고팠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고, 아예 입을 열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말도 고픈가. 시간이 흘렀는지 몇 발짝 걷는데도 갑자기 으슬으슬했다. 베를린은 확실히 북쪽이었다. 북위 52도 선을 넘는다던가, 런던보다도 위쪽이라니 생각보다 더 북쪽이었다. 졸리기도 했다. 춥고 배고프고 졸렸다. 그러면 눈곱만 끼면 제대로겠네! 불쑥 태목이 생각이 났다.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눈곱까지 끼면 인간 끝장이라고! 밥부터 먹자이! 태목이 말이 아니더라도 어서 밥을 먹고 싶었다. 명동에 해당한다는 쿠어퓌르스텐담으로 가는 U반을 찾아보았다. 거기 가면 한국 음식점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한국은 어디에나 있었다. 김치레스토랑 – 이름만으로도 반가운 한국식당의 간판이 곧 눈에 띄었다.

    사거리에 가까운, 눈에도 잘 띄는 곳에 위치한 김치레스토랑은 한국인 노승욱에게는 그대로 행운이었다. 한국 떠나 며칠 안 된 시간이었지만, 김치라는 단어는 그를 위로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조금 어둑어둑한 너른 식당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베를린 사람들은 늦게 저녁을 먹나 싶었다.

    타크! 어서 오세요오! 아, 반가운 인사말.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컸고, 또 승욱의 귀에 익숙했다. 아무래도 고향 말투와도 비슷했다. 이름 그대로 맛있을 상상으로 김치찌개를 시키고서 멍하니 앉아있는데 아저씨 한 분이 들어왔다. 그런데 손님이 아니라 주인아저씨였다. 아, 가족들이 하는 식당이구나. 그가 그런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음식을 내온 아주머니가 이웃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고향에서 보는 편한 행동이었다. 학생은 관광객, 아님 유학생이요? 인자 왔지요?

    인자라니. 확실히 고향 사람들이다. 그가 피식 웃었더니, 오매 내 사투리 들켰는갑네, 그러셨다. 전라도에서 왔는갑소이. 내가 넘의 땅 와서 산 것이 30년 다 되가는디, 가만 1966년 첫 파견 팀잉께 거자 맞제라. 암튼 간에 여그 말로 겨우 삼시로 고향말은 그냥 사투리 그대로라. 알아묵는 사람 만나먼 넘 반갑제이.

    저, 그런데 베를린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호텔 말고 숙소를 정하고는 싶은데요. 혹시…….

    오매 뭔 일이다요. 우리 말고 옆에 옆집에 이참에 친정아부지 칠순에 맞춰서 석 달 한국 들어간 동생네가 있는디, 나한테 맽겼는디. 잠시 잠깐 빌려주든가 그라라고.

    빈 집에요?

    아니, 다 그냥 두고 잠가 놔두고, 방 한나만 비와놓고라. 갸는 74년에 왔응께 꼭 20년 만에 간 거여.

    제가 운이 좋은 거네요. 근데 동네는요? 도심에서 멉니까?
    당연히 멀제라. 우덜이 어떻게 도심 살어라. 아아주 변두리 살제. 슈판다우라고, 모르겄제. 한국학생들은 포츠담은 다 알더만. 포츠담 다 가성께 거자 끝어리제. 그래도 차편이 좋응께. 부엌도 놔 놨응께 라면 같응거 끓여묵어도 되고. 오래 있을라믄 밥도 해묵을 수 있고. 김치나 반찬은 내가 좀 주제이.

    아아뇨. 그렇게 까지는. 오래 있을 것도 아닙니다.

    그람, 오늘은 시내서 쫌 더 놀다가 우리 퇴근 때 같이 갑시다이.

    뭘 그랴. 내가 먼저 들어가제. 학생, 성씨가 뭐요? 짐은 어디다가 뒀소?

    저는 노가 승욱이, 투틸로입니다.

    어, 세례명이네. 그람 천주교요? 여긴 교횐데. 여선 한국이름보담 쉬우니 투틸로라 그랍시다. 갑시다. 짐은 공항이요?

    아, 저 말씀 편하게 하시고요. 슈투트가르트에서 기차로 왔습니다. 짐은 역 로커에요.

    그람, 가세! 우리 애덜 또랜게 말 편하게 하제.

 

    식당 주인분들은 독일파견 광부와 간호사로 만나 한국인 가정을 이루었다 했다. 아들은 함부르크 법대로 진학해서 나갔고, 딸애는 김나지움 입시반이라 했다.

    근디 학생은 뭔 공부하는디?

    아, 그게요. 대학에 갈 때는 사학과였고요. 일단 독일 와서 역사를 그대로 할지 신학을 할지 못 정했습니다. 독일어도 잘 못하고요. 우선 저기 남쪽 슈베비슈 할인가 신부님이 추천해주신 괴테학원서 독일어를 제대로 배울라고 왔다가요.

    근데 왜 베를린에?

    뭣이 좀 안 맞아서요. 일단 베를린에 오면 독일을 잘 파악하려나 싶었네요. 또 여긴 영어로도 좀 된다고 해서요.

    신학대학에를, 신부 될라고 그랑갑네이.

    아니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부모님 계심 그라지 말고 하던 공부 계속해요. 아따, 원효대사도 아들을 낳았는디. 아들 낳고 파계승 되얐지만, 부자간에 대단한 학자가 나왔잖은가. 이두문자면 세종대왕 다음은 가제. 암튼 간에 남자는 아들을 낳아사제.

    처음 만난 젊은이에게도 훈수 놓는 것이 고향 어른들의 맛이었다. 이 댁 아들딸에게는 아버지가 계시구나. 아, 아부지, 아부지이 – 승욱은 침묵 속에서 흐느꼈다.

 

    주인아저씨가 데려다 준 집은 독일식 보급형 주택인가 싶었다. 텐트처럼 열을 맞춰 들어섰으나 반듯하게 독립된 집들이었다. 위치나 구조로 보아서 최소한의 주택인 듯, 그러나 먹고 자고 사는 일은 보장해주는 단정한 집이었다. 단정하다는 이미지가 초라함에 가까울 줄은 몰랐었다. 온수 냉수가 나오는 작은 욕실에서 씻고 나니 곧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바닷물 소리가 들렸다. 물결도 보였다. 승욱은 생각했다. 바닷물은 온 지구를 선회하겠지. 바닷물은 더 이상 흘러들어갈 곳도 흘러나갈 곳도 없겠다. 울 아부지도 그 속에 계시겠다. 일단 울타리가 없으니. 바다엔 울타리가 없구나. 독일 바닷가에는 함부르크며 브레멘 항구도 있겠다. 『브레멘 음악대』에서 버려진 동물들은 버려진 사람들을 빗댄 것이라고, 5학년 땐가, 어떤 선생님이 말해주셨는데. 바닷물이 더 돌아 내려오면 진짜 동화의 나라 암스테르담이 나오겠다. 이미 네덜란드다. 그 다음은 그 유명한 『칼레의 시민들』에……. 첫날 저녁 천장에 그려지던 바닷물은 칼레에서 멎었다.

 

    눈을 떴을 때는 생각보다 낮은 천장에 그는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침대가 높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 출근 시간에는 15분, 낮에는 30분 정도의 간격으로 버스가 있어, 슈판다우 역으로 가서 시내로 이동했다. 전철 50분을 타고 가서 동물원 역에서 환승해서 15분쯤을 더 가야 시내가 나온다. 우와, 첫날부터 지쳤다.

    그렇더라도 베를린을 탐구(?)하고 다녔다. 무너진 베를린장벽 중 1km도 넘게 남겨둔 장벽들에 그려진 그림들은 최고의 관심거리였다. 낙서 같기도 한 그림들 중 한 곳에 서넛이 몰려 있었다. 그도 멈추어 섰다. 브레즈네프와 호네커의 포옹장면을 그린 〈형제의 키스〉였다. 가만, 동독 건설 30주년에 소련 서기장의 동베를린 방문이었으니 사회주의의 결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 상징적으로 남겼을까,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아, 분단을 쐐기 박았던 상징이었구나. 그런 걸 왜 부수어버리지 않고 남겨두었을까. 이방인이 알 턱이 없었다. 말을 가지지 못한 채로는 소통은 아예 불가능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연출은 나중에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2,000년이던가 그쯤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순안공항에서 연출된 김정일 위원장과의 포옹 장면 말이다. 똑같네, 똑같아! 아니, 우리의 포옹은 훨씬 의미심장한 것일까. 다음 순간, 두 정상이 조선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분열을 받는 영상을 보고 있다가 이상한 뒤틀림이 일었던 기억이 새롭다.

    뭐야, 6.25 전쟁 3년 동안 국군을 10만 명도 넘게, 민간인을 20만 명도 훨씬 넘게 죽였던 인민군의 총칼이 대한민국 대통령한테 최고의 예우를 한다?

    아니, 적이었던 인민군의 총칼도 대결 아닌 평화의 제스처를 다하는데, 광주를 유린했던 우리정부의 총칼은 세월이 흘러도 사죄는커녕 무장간첩 남파설을 단죄는커녕 그냥 둔다. 1980년 부처님 오신 날, 전날 밤 계엄군의 만행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사람들이 도청 앞으로 모여든 그날…….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를 메운 시위군중들도 주섬주섬 기립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시위대 맨 앞쪽 사람들            이  등 뒤쪽으로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런 다음 귀를 찢는 총성들이 들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도청 앞 광장에 정렬해 있던 군인들은 맨 앞열이 무릎쏴, 다음 열이 서서쏴 자세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았더라면 애국가가 집단 발포명령의 신호가 되는 참담한 비극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            다. 또 총알이 총성보다 빠르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D일보 K기자: 나무위키)

 

 

    모스크바 여행은 그런 와중에서 정말 우연이었을까. 왠지 동베를린 중심이었다는 알렉산더 광장엘 가보고 싶었다. 30년도 더 지난 오늘은 평화의 소녀상 때문에 미테구로 더 알려진 곳, 미테는 중앙이란 뜻이다. 텔레비전 탑은 서베를린 지역이었지만, 그런 경계는 없었다. 여기저기를 걷다가 카페 모자이크에 들어가서 2마르크짜리 커피를 마시며, 가방 속에 들어있던 토마스 쿡 여행사 안내서들을 들여다보았다. 모스크바?

    세상에나. 소련이, 모스크바가, 크렘린이 한국인들에게 어떤 개념이었었나. 누가 감히 모스크바 여행 생각을 할 수나 있었는가. 모스크바 ‘모’자만 잘못 내뱉어도 간첩이었을 세월들. 토요일에 출발하는 5일간의 모스크바 여행을 결정하면서 승욱은 남극인지 북극인지에라도 가는 듯한 흥분감, 아니 폭발감을 느꼈다.

 

    최근에 일없이 모자이크 카페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다가 실망했던 생각이 난다. 폐업이라니! 그는 오히려 또렷하게 그때의 회상에 잠겼다. 12월 5일이었던가, 토요일, 슈판다우에서 8시에 출발하여 쇠네펠트 공항에 10경에 도착했다. 좌석은 14F 우측 창가였었지, 12시 훨씬 넘어서 출발했고 국경을 꽤나 넘었을 텐데 오후 4시 반쯤 착륙했지. 모스크바 시간은 1시간이 빨랐었다. 5시 거의 다 돼서 검사를 통과해서 나오는데, 여행사 인투리스트의 현지 안내인이 나와 있었다. 모스크바 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는 여성인데, 안내인에 대한 예상 치고 많이 고급스러운 차림이었다. 영어도 물론 가능했다. 유창했다. 코스모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는 곧바로 저녁이었다. 독일에서보다 성찬이었다.

    모스크바 첫날 아침, 관광객들의 관심은 단연 붉은 광장이었다. 식사하면서 안내인 설명이 ‘로테 플라츠’가 로트 아니라 쉔이랬다. 겨우 알아듣는 단어, 로트는 붉다는 말이니까, 붉은 광장이 붉지 않고 쉔, 그러니까 아름다운 광장이었다는 말이었다. 승욱은 조금 어지러웠다. 일행들은 독일어가 모국어였고, 안내인은 그를 위해 가끔 영어로 말해주었다. 공산주의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16세기에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 광장을 지었을 리가 없다고. 기온은 베를린보다 훨씬 낮은 무조건 30°F 이하니까 옷을 잘 챙기라는 말도 했다. 그러니까 섭씨로는 영하였다.

 

    크렘린 200km 20개의 탑 루비의 별들이 1.5톤이라니, 그때 승욱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 못 알아 들었겠거니 했다. 호텔에서 샀던 영문판 모스크바 안내서에도 그런 자세한 것들은 설명이 없었다. 내려다보이는 볼가 강이 3,690km를 자랑하는 – 외우기도 쉬운 3,6,9라서 기억한다. - 유럽 최장의 강이라는 사실에 진짜 놀랐다. 아시아쪽 러시아에는 더 긴 강들도 있다고 했다. 대륙은 대륙이었다. 반도 출신, 그것도 남단에서 태어난 승욱으로서는 세상의 규모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양파형 돔 여럿으로 지어진 성 바실리 성당을 눈앞에 보고 있는 기분은 모든 설명을 초월했다. 이런 기분 때문에 악조건에도 여행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다. 누군가랑 눈이라도 맞추며 소통을 하고 싶어서 전날 밤의 룸메이트를 찾아보았다. 룸메는 꽤 나이 들어 보이는, 독일인 치고 몸이 작은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일행 중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행을 벗어나면 큰일이었다. 안내인을 바짝 따라다니기로 했다. 유명한 스파스카야 탑을 나가면 크렘린 궁이 나올 것인데, 놀랍게도 무슨 무슨 성당들 건물이 계속 나왔다. 성모 성당, 대천사 성당, 열두제자 성당……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성당들이 종교를 마약이라던 공산국가의 붉은 광장에 즐비하다니. 유럽에서 성당, 그러니까 기독교의 의미는 절대적인 무엇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승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난 몇 년 뒤부터, 그러니까 지금은 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당들에서 정교회 미사를 드린단다. 볼셰비키 혁명 때 성당들을 다 부수면서도 아까운 건물은 남겨서 박물관으로나 썼다더니,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 그러다가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그의 침묵은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강요당한 것, 말을 하려 해도 사용할 말이 없었다.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방대함에 비해서 귀는 소음만을 들이고 있었다. 소리를 낼 입도 숨을 죽여야 했다. 강요된 침묵의 시공간 유럽이라니, 그는 침묵을 찾아서 떠나왔단 말인가. 소음 속의 적막감 – 어쩌면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버지를 느낄 수 없었던 적막감 그것과도 같았다.

 

    모스크바는 안내서에도 없는 전혀 엉뚱한 놀람들로 다가왔었다. 그의 룸메는 매년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반쯤 러시아인이었다. 예쉬케, 그 이름도 정통 독일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독소전쟁 중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루마니아인으로, 그곳에서 만났던 독일인 아내랑 종전 후 소련점령지의 소개령에 따라 쫒겨났다. 하지만 다른 친척들은 소련으로 가기도 했고, 그래서 관광이 아니라 친척을 방문하러 오는 것이라 했다. 독일에서 자신은 1/4을 받는 연금생활을 하고 있는데, 단체여행 조건이 좋단다. 호텔에서 잠자고 아침저녁 식사도 하고, 낮 동안만 친척을 만나러 가면 되니까. 러시아에서는 친척집을 방문 할 때는 심지어 배급표도 가지고 다녀야 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서, 손님이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은 아예 없다고 했다. 어려운 계층이라 그러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승욱은 놀랐을 밖에.

    그가 더욱 놀란 것은 저녁식사 후에 룸메에게 시내 구경을 부탁해서 지하철을 타고 나갔을 때였다. 경험하고 싶었던 모스크바 지하철, 그 화려함과 역사성 등은, 우와, 말 그대로였지만, 룸메가 맥도널드를 가겠냐고 제안할 때부터 좀 이상했었다. 맥도널드가 뭐라고! 그런데 모스크바의 맥도널드는 대단했다. 궁정만큼 높고 넓게 지어진 건물에 완전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엄중한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라니! 음식은 세계적 레시피라서 애플파이를 시켜놓고는 그는 그저 놀라고 있었다. 코가 매섭게 추운 날이었지만 안은 따스했고, 룸메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 정도가 무슨 데이트 코스라고!

    역사 속의 제정러시아, 철의 장막 속의 강대국 소련, 이어서 대 러시아 연방 – 그런 거대한 이미지들은 완전히 깨지고 있었다. 오히려 말이 없던, 말을 못했던 승욱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눈길들에서 자존감 대신 이방인 혐오감 같은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래,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녀석이냐! 있어야 했을 캠퍼스를 떠올리며,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승욱은 절로 고개를 떨구었다.

 

    날이 새자 놀라움은 연속 이어졌다. 이삼일 째 되는 날엔 조금 여유가 생겨서 호텔 로비며 공동 공간인 1층과 2층을 돌아다녀 보았다. 그런데 세상에나, 한편에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세워져있었다니. 그들에게 태극기가 무엇인가. 1950년 6월 그들이 지원한 최신형 T-34/85 중형전차들을 앞세운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했을 때, 대한민국이 내걸고 싸운 깃발이 아니던가. 러시아연방 국기와 X자로 세워져 있는 태극기 – 그 안쪽으로는 더 놀랍게도 진도모피라는 간판이 보였다. 모스크바 속의 한국, 거리에는 말할 수 없이 거대한 삼성 입간판, 대학민국의 삼성이 비록 영문자이지만 너무나도 또렷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당연히 삼성뿐 아니라 현대나 뭐나 다들 들어왔겠지, 그는 생각했다.

 

    독일로 돌아올 때도 비슷한 줄의 창가, 좋은 자리였다. 앞자리에 아무나 앉았었는지 나중에 온 사람의 자리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냥 뒤로 가랬다. 가랬다고 갔다. 여행객들은 주로 남자들이었다. 시간에도 넉넉한 것이 한국이랑 달랐다. 불평도 없었다. 20분 연발 20분 연착 그런 것쯤은 보통인 모양이었다. 5시 10분 전이 아니고 5시 10분 도착이었다. 그만하면 준수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도 그러네, 승욱은 혼잣말로 그들에게 동조했다. 공항 밖은 불빛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초저녁이었다.

    1992년은 쉬이 끝나가고 있었다. 집주인이 한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베를린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강요된 침묵이 너무 무거웠을까. 살아남기 위해서였을까. 한 시간 거리, 노이에 슐레 – 새 학교라는 뜻의 학원 초보반에 등록을 했다. 반 배치테스트는 있으나 마나였다. 4주간 수업에 500마르크, 10시에 시작해서 1시 15분까지였다. 주말과 특별한 휴일 이외에는 쉬는 날도 없었다.

 

 

    새 달력을 보면서 맨 먼저 아버지 기일을, 고향의 설날을 생각했다. 음력 달력을 보기 위해서 혹시나 하고 쿠담의 김치식당에 갔다. 1월 22일이 까치설날, 23일이 설날이었다. 혼자서 식은 떡국을 드실 어머니의 모습이 벽에도 천장에도 있었다. 아버지 기일엔 성당에 다녀와서 모인 친척들만 챙길 뿐, 식은 것도 안 드실 것이다. 늘 안 드셨다. 아들도 없는 이번에는…….

    성당의 모습도 있었다. 타국에 온 몇 달, 미사를 보는 성당을 구경도 못했다. 군 시절에도 드렸던 미사를 빼먹고 있었다. 한인공동체라도, 공소라도 없을까. 찾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를린대성당, 아니 루터교회는 4개의 돔을 지닌 외관으로는 성당이지만 – 독일인들에게는 베를린 돔 - 보름스 의회에 당당히 선 루터의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 개신교 교회였다. 프로테스탄트 프로이센이 마치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 맞서려는 듯이 장엄하게. 그러고는 성당을 잠시 잊었던 터였다.

    그렇게 베를린의 겨울을 살고 있었다. 습관이 된 침묵은 도시에 일찍 찾아드는 어스름과 함께 무거운 안정을 주었다. 대신 학원에서만 열심히 말하기 - 기계적인 말 연습은 필요했다. 어느 도시에서건 괴테학원의 집중코스에 등록하려면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노이에 슐레에 다시 4주를 등록했고, 그러고는 친절한 식당 주인집으로 옮겼다.

 

    연두의 졸업식 날이었다. 2월 26일 금요일 아침, 여전히 베를린에서 가슴이 뭉클거렸다. 아니, 한국은 8시간쯤 빠르니까 벌써 끝났겠다 싶었다. 아무렇지 못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채 연두의 졸업식은 지나갔다. 아뿔싸. 나는 언제쯤 복학하여 졸업을 하려나. 복학을, 졸업을 하게 되려나. 애매한 의심 속에서 승욱은 이불을 다시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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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교수세계> 통권27호, 2024. 12. 130~150쪽

* 편집진의 희망으로 제목은 졸업식으로 단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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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