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2020. 12. 27. 15:10

날마다 시작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 법정스님

 

 

날마다 시작이야, 은아, 다시 시작이다. 힘 내, 아자!

일곱 번째 시작이다. 대부분 그렇듯이 아파트다. 차에서 내려 12월의 매서운 바람을 느끼며 단지 내를 둘러본다. 전체적으로는 낡은 느낌이지만 바깥 인상이 깨끗한 편이다. 동과 호수를 확인하면서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안온한 기운이 돈다. 계단을 오르면 작은 대문이 기다리리라. 초인종을 누르면 어떤 사람들과 만날까. 오늘도 우리 집 대문을 나서기 전부터 스케줄을 확인했다. 내가 대단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그 반대, 일자리가 자주 바뀌고 또는 여럿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투잡은 아닌 것이, 한 가지 일인데 근무 시간과 일자리가 달라서다. 일자리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지금처럼 복지관 소속으로 재가방문요양을 맡으면 지 선생님이 되고, 요양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 지 여사님이 된다. 직업군의 이름은 요양보호사, 나는 요양보호사이다.

 

나를 설명해야 할까, 입을 열자면 아마도 그렇겠다. 지은이예요, 그렇게 내 이름을 말하면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개 조금 이상해한다. 어렸을 때는, 특히 학교에서는 꽤 성가셨다. 책가위에다 내 이름 지은이 석자를 쓰고 나서 책을 열어보면, 책마다 진짜 지은이가 있다는 사실에 나도 혼란스러웠다. 지금이야 유투브가 책들을 온통 삼켜버린 세상이라서 지은이가 어떤 뜻인지 아무도 별반 상관하지 않는다. 지은이라는 뜻으로 쓸 곳에도 언제부턴가는 저자나 작가라고 하니까 뭐. 물론 내 이름이 지은이인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도 영이와 순이 아래 또 낳은 딸을 은이라 이름 지었을 뿐으로, 내가 태어났을 1966년 당시에 우리 부모님이 지은이가 책이나 노랫말을 짓는 사람을 일컫는다는 것을 의식했을 턱이 없다. 자라면서 여전히 어린 내가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왜 농사짓는 사람은 지은이라 하지 않는가, 그런 정도였다. 밥 짓고, 옷 짓고, 약 짓고……, 여기저기 지은이가 더 많은데.

 

다시 오늘이다. 오늘 처음 방문하는 집에는 조금 어색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보통 때라면 우리 복지관의 과장이나 담당 복지사가 함께 방문하여 나를 소개해줄 것이다. 오늘은 이 집에 혼자 오게 되었다. 혼자 들어가서 자기소개를 한다? 오랜 직장생활을 해왔지만 그건 좀 쑥스럽다. 누군가 소개를 해주면 편하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이쪽은 지 아무개 선생님이세요! 어때요, 새 선생님 좋으시지요? 이제 날마다 댁을 방문해서 어르신을 도와드릴 거예요! - 지 선생님, 앞으로 어르신 잘 돌봐드리세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요양보호사를 절대로 아줌마라 부르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는 다짐도 시켜둔다.

그런데 오늘은 일이 꼬였다. 사회복지사 정 대리가 하필 연가를 낸 날이라서 차 과장이 동행키로 했었는데 그것도 틀린 것이다. 나는 벌써 출발해서 가고 있는데 전화가 떴다. 운전 중이라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어쩌나! 아무캐도 지 선생 혼자 가줘야 겠네여! 나 사고났어여. - 엥, 다친 거예요? - 아니, 아녀요. 살짝 인데 시끄럽네여. 미안해여, 그 집 오늘 꼭 가야 해여! 복지관을 나서며 차를 후진해 돌리려다가 화단 턱에 걸렸는데, 급히 뺀다는 것이 들어오던 작은 트럭과 스쳐서 실랑이가 벌어졌단다. 그렇다고 일주일 째 돌봄서비스가 끊긴 집이라서 미루기는 미안한 일이라고, 오늘 복지관에서 새 선생님이랑 방문한다고 알려놓았으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아무튼 그냥 혼자서 방문하랬다. 나 또한 이만한 일로 마음먹은 스케줄을 바꾸긴 싫었다. 자라서는 거의 꾸준히 직업을 가지고 살아온 나로서, 무엇이든 처음 하는 일이 한두 번이었을까. 이쯤은 약과다, 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대문 앞이다. 아파트는 어디나 역시 작은 문이다. 건물 중에서 가장 초라한 곳이기도 하다. 이 대문에는 교회나 성당 표시 대신, 입춘대길 그리고 또 하나 사자성어가 붙어있다. 입춘이 언제 적인데! 입춘은 보통 2월 4일이다. 한 해가 다 가서 낼모레면 동지고 다시 새해의 입춘이 다가올 시절인데 봄 여름 가을 지나도록 여태껏 입춘대길이란다. 이 새로 만날 어르신이 고리타분한 노인일까, 살짝 걱정이 올라온다. 그런데 아무튼 와버렸다. 초인종을 찾는다.

초인종으로 가르는 세상은 많이 다르다. 내가 일을 망치고 나온 여섯 번째 집이 눈에 선하다. 그 어르신은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재가장기요양급여를 받는, 곧 우리 요양보호사들의 돌봄을 받는 대상은 할아버지들 보다는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남자는 아내가 있을수록 여자는 남편이 없을수록 장수한다더니. 하긴 이 말도 참 우습다. 앞뒤가 이렇게 맞지 않는 말이면 창과 방패라는 모순인가. 신상정보를 요약하자면, 70대로 시영아파트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할머니 - 거기까지는 우리 복지관 담당에서는 흔한 조건이었다. 이처럼 보호자가 없는 경우도 흔하고, 어떠한 염려도 없었다. 그것보다 실은 신체적 조건이 문제다. 처음 소개받을 때 다행하게도 치매는 아니라 했다. 거동도 휠체어에 의존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전임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곧장 그만두곤 했다는 점이었다. 할머니인데 뭐 어떠랴, 그렇게 시작했는데 곧 심상치 않은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 일에 자신이 있는 편이다. 우선 간호사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정확히는 간호조무사다. 간호전문대에 합격을 해 놓고도 사정은 도저히 안 되고, 간호사는 되고 싶고. 나 같은 간호사 지망생은 간호학원을 거쳐서 간호조무사가 된다. 전문대를 마치고 간호사가 된다 해도 간호대학 졸업생과는 병원에서 처우가 다르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무엇보다 승진이 없다. 수술실에 오래 근무를 해봐도 마찬가지, 수간호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간호조무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소규모 개인병원에서 자잘한 온갖 일을 하거나, 큰 병원에 가면 평생 3교대 근무다. 그러다 보니 만 나이로 50이 되었을 때, 아니 그 전부터, 남편 말이, 50까지만 일하고 그 다음엔 좀 쉬고 살라 했었다.

남편을 만난 것은 1986년, 내 나이 스물한 살, 난생 처음으로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산부인과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때는 병원의 규모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작은 병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무과에 새로 직원이 왔는데, 이 조그만 병원에서는 원무과 직원이면 상관이었다. 더구나 임상병리를 겸하는 것을 알고는 살짝 존경스러웠다. 공식명칭으로 임상병리사이니까 그것도 간호조무사보다는 한 단계 위다. 게다가 첫눈에 그 야무진 인상에 믿음이 갔다. 곧 소문에 의하면 출근 전에 새벽에 가락시장에 가서 한 타임 일을 하고 온다고 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표정이나 동작에서는 지치거나 그런 기색도 1도 없었다. 날씬한 몸매도 근사했고, 가뿐한 걸음걸이도 멋있었다. 나이도 적당히 위로 보였다. 오빠라고 부르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괜히 설렜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생활력 때문에 나를 나의 미래를 걸어도 될 것이라는 신뢰감이 생겼다.

내가 생각하는 일등 남편감은 첫째도 생활력, 둘째도 생활력이 탁월해야 했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을 때, 순하디 순한 어머니는 물론 우리 형제들 모두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멍청한 몰골들이었다. 밥은 그냥 넉넉했었고, 한 말씀 하시던 아버지의 자리도 있었고, 무엇보다 남일면 은행리는 집성촌이었기에 그런대로 도움은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변화된 생활전선에서 강하지 못한 어머니는 농사를 다 내주었고, 당연히 소출은 확 줄었고, 우리에게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 이전에, 어머니가 우울한 얼굴로 어렵게 어렵게 진통제를 놓아드릴 즈음부터는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은 사라지고 없었다.

고향 청원에서도 남일면 쪽은 중등학교가 아예 없었다. 지금은 고향도 청주시가 되었지만, 당시로는 어렵사리 청주의 여고를 졸업한 나는 서울로 향했다. 낮에는 여러 가지 알바를 하면서 야간에는 간호전문대학 진학을 꿈꿨다. 나는 무엇보다 주사를 잘 놓고 싶었다. 아버지가 조금 더 살아계셨다면…… 기꺼이 주사를 놓아 드리고 싶었다. 만일 어머니가 아프시게 된다면 놀라지 않고 겁먹지 않고 주사를 잘 놓아 드리고 싶었다. 간호사는 희망사항이었을 뿐, 나의 현실은 불가능으로 점철되었다.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길은 까마득했다. 그렇다면 일단 간호학원에 다니자! 겁 없이 절친을 따라 미리 서울에 살고 있던 친구 언니만을 달랑 믿고 상경한 여자애로서는 일 년짜리 간호학원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교육비만 해도 엄청난데, 실습기간 중에도 학원비를 몽땅 내야 하다니! 무엇보다도 다섯 시 반이면 시작하는 수업시간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끝나는 알바가 있는가 말이다. 주말은 그래서 쉴 틈이 없이 일과를 짜서 일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간호보조사란 이름으로 병원에 근무하는 꿈을 이룬 때였다. 그 남자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푸른 신호등인 것 같았다.

그가 내 마음에 쏙 들어온 것은 그 사람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만 보니 그는 여리여리하고 나비같이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말 그대로 여자애 같은 여자애들 취향인 듯 했다. 카운터 김양의 뼈다귀 같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쳐다보면서 슬쩌슬쩍 말을 건네곤 했다. 자꾸 그쪽으로 귀를 쫑긋거리게 되는 내가 불쌍했다. 내 손을 내 몸을 살펴보았다. 나는 살랑거리는 맵시랑은 거리가 멀었다. 우선 나는 손도 크고 키도 컸다. 키가 크다고 해서 다 날씬한 것도 아닐 테고, 나는 아닌 쪽에 속했다. 식구들 대부분 크고 건장한 우리 집에선 누가 그리 몸매에 신경을 쓰고 그러지 않았었다. 이제 와서 어쩐다? 갑자기 다이어트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어느 세월에?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다. 벙어리 냉가슴인가 하면서 내가 속을 태우고 있을 때 어느 순간 그가 나를 보기 시작했더란다. 내가 무심코 명절에 고향에 다녀오면서 보따리에 날라 온 음식들을 병원에 가져가서 나누어 먹었을 때, 나중에 그의 말로는 그것이 가장 예뻤다고 했다. 아, 어머니 - 울 엄마는 애들이 집에 들르면 말 대신 무엇이든 싸주는 옛날 엄마였다. 하나 둘 집을 떠나 각 살림을 시작할 때도 묵묵히 보시기만 했고, 다니러 가도 특별히 반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손에는 꼭 무언가를 들려주셨다.

내가 예뻤다고? 예뻐? 이 여자 살림 잘 하겠다, 생각했을지. 하지만 그도 점치는 데는 틀렸다. 내가 알뜰주부들처럼 살림 예쁘게 하는 짓은 잘 못하니까. 하지만 크게는 그의 생각이 옳았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도 벌써 노후 준비하자는 그의 말을 신앙처럼 믿고 살 것을 알아챘으니까. 실제로 나는 소비라거나 하는 단어를 아예 몰랐고, 사치라거나 그런 욕구도 텅 비어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시퍼렇게 젊었던 첫 순간부터 노후를 향해서 살아왔다. 곧바로 신혼 때부터였다. 서둘지는 않았지만 곧 아이가 생겼고, 출산을 앞둔 설렘 속에는 걱정이 섞였다. 출산휴가를 석 달이나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넉넉한 원장님 덕택이었다. 하지만 받아놓은 날은 빨리도 닥쳤다. 어떻게 해, 어떻게 나가? - 은이 씨, 오늘보다는 내일이 중하지, 맘 강하게 먹어! - 그래도 6개월은 젖을 먹여야……. - 마찬가지야, 어차피 뗄 건데. 아기를 위해서 무엇이 현명한가 몰라서 그러나? 우린 빈손이야, 잊었어? 이렇게 미래를 기약해야 한다며 다독거리는 남편의 선택을 믿어야 했다. 사실 우리의 상황을 워딩 그대로 써보자면 이렇다.‘우린 양가에서 0원도 도움 받지 않았어요! 0원도!’지금에 와서 나는 거의 자랑스럽게 그리 말한다. 괜스레 떳떳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서러움의 기억을 얼굴에 달고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독하게 마음먹은 우리에게 맞벌이라는 단어는 호사 중에 호사였다. 투잡이라는 말도 싱겁디싱거운 보통의 단어였다. 그의 집안에는 아들들이 우리 집에는 딸들이 많은 것 빼고는 한 치도 다르지 않게 양쪽 집안의 형편이 비슷했다. 그의 형제자매들도 각자 알아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풍토였더란다. 이상한 평등이지만, 평등에는 불평이 따르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달려왔다. 지금에 와서는 3층 건물이 있고, 작은 아파트도 있고, 또 가까운 시골에 몇 백 평 밭이 딸린 농갓집이 있다. 나를 거절한 여섯 번째 할머니보다는 내 노후가 더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다.

 

아차, 막상 대문 앞에 서니 슬그머니 걱정이 인다. 이 집에 다녔던 요양보호사는 왜 그만두었다 했더라? 이 집의 펑크는 어르신이 낸 것이 아니라 우리 측에서 그만둔 경우라 했다. 그것도 갑자기. 얼핏 듣기로 장애아동돌봄으로 바꾸었다고 했는데, 이곳이 아주 만족스러운 환경이었으면 그만두었을 리가 없지 않았겠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뒷북처럼 이제야.

보통은 새로운 ‘자리’가 생기면 문자가 뜬다. 100명도 넘는, 120쯤이라던가, 우리 복지관 직원들에게 공동으로 단체문자가 뜬다. 간단히 띄운 조건을 보고 관심이 있으면 지원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 앞 근무자는 장애아동돌봄이 뜨자 그쪽으로 옮겼다 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정말 이 집에 문제는 없었을까? 전임자가 자발적으로 그만둔 것이 아무래도 걸린다. 실은 근무시간도 딱 들어맞지는 않아서 좀 그렇다. 이 집은 서비스를 1시 반에 시작해주기 원한다고 떴는데, 반시간 정도가 애매하다. 오전 일을 마치면 12시니까 1시 정도라야 간단한 점심과 이동시간을 따져서 알맞은 시간인 것이다. 거기다가 거리상으로 날마다의 기름 값을 고려해야 할 판에,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맞지 않는데 왜 덜컥 맡아보겠다고 나섰을까. 독거노인이 아니라 보호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것도 어떨지 모르겠다. 첫 방문에서 100% 성사는 아닐 수 있다. 조건을 따져보고, 정히 아니면 말 수도 있다. 지금처럼 오전만 일해도 월 60시간 조건은 채우니까 직장보험은 유지될 것이고.

초인종 보다 번호 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80대 어르신이라던데 번호 키를? 차 과장이 알려준 전화번호 끝자리로 키를 눌러 볼까? 아니다, 처음 방문인데 조신하게 초인종을 눌러야지. 어라, 초인종이 둘이다. 틀리지 않고 초인종을 누르고 싶다. 아직 일을 맡는다는 확정도 되지 않았으므로, 일이 되려면 초인종부터 제대로 누르고 싶다. 왜 초인종이 둘일까?

 

 

사실 내가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한지 4년이 되어 가는데, 바로 앞 여섯 번째에는 시작부터 터덕거렸었다. 초인종을 누른 순간부터 좋지 않았던 일이 마음에 걸린다. 그때는 정 대리랑 함께 갔었는데,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자 정 선생이 대문을 세게 두드렸다. 사실 정 선생으로서는 우리 요양보호사들이 바뀐다 해도 한 달에 두 번씩 관리 및 점검을 다니는 집이라서 크게 생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오메, 요 사람들, 대문을 아작 낼란가? 벤소도 지대로 못 가게 하네이. 근디 누구다냐, 요참에는? 이렇게 첫 만남의 순간부터 까칠하던 6번 어르신은 - 이렇게 불러도 되려나? 실명 보다는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 매사에 조금 심하긴 했다. 의심 많고 적대적인 것이 세상에서 인생에서 넉넉히 보상받지 못한 노인들의 특성이라 쳐도 유난했다.

요양보호사로서 일하면서 내가 요양병원 근무보다는 재가방문요양을 택한 것은 크게는 전일 근무보다는 파트타임 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속내는 그러나 바닥에 깔리고 싶지 않아서다. 간호보조사로 근무하던 젊은 시절에 내 나름 미소를 유지하던 얼굴을 하고서도 갑을병정 끊임없는 상하관계에 질렸던 터라, 다시 요양병원에 가서 일하면서 여사님이라 불리며 맨 밑바닥에 깔리고 싶지는 않다. 거기 요양병원에서는 여사님이 최하 직급이다. 육*수 여사, 김*숙 여사라 할 때의 여사 하고는 하늘 땅 차원이 다르다. 불리는 이름이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재가방문요양은 일대일 관계이기 때문에, 또 대개는 물심양면으로 어느 쪽으로든 취약한 노인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심리적 어려움이 적다. 자녀들이 없지 않은데도 혼자 그렇게 외로이 살아가며, 정말 우리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말동무도 없이 입술이 말라붙어가는 노인들은 어쩌면 태고 적부터 무표정이었을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내가 큰 소리로 무언가를 떠들썩하게 이야기해주면 가끔은 배시시 미소를 띠기도 한다. 기저귀 실수라도 해놓고는 새색시처럼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살면서 보람이랄까, 보람은 대단한 것이 아님을 느끼며 뭉클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일은 그러나 늘 예상을 빗나간다. 갑은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난다. 여섯 번째 어르신이 그랬다.

여그를 좀 딲어 조 바, 쩌그 거그는 또, 거그를 딲어주랑께!

워째 멋이던가 뿌옇고만! 노인네라고 도통 안 뵈는 줄 아남여!

나 젊었을 적에는……, 이런 것은 입에 달고 사는 화두다.

어르신, 저, 백내장 검사를 한번 받아보심…….

내가 시방도 바늘귀도 뀌는데 먼 병원이여! 돈도 쎄았는갑다!

남의 말은 아예 듣지를 않는다. 그러기를 반복하더니,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드디어 노인이 복지관에다 전화를 걸었다. 나 들으라고 면전에서 걸었다.

거, 복지관이제라. 보쇼이, 나 참 요상해서 못 살 것소.

어르신, 왜 또 그러세요……. 저쪽에서는 그런 소리로 응대를 할 거다.

아니, 긍께, 쓰레기봉토 안 있소, 거, 나오는 거 말요. 아, 긍께 그것이 언 날 봉께 팍 졸아져 부렀당께.

어르신, 왜 또 그러세요……. 저쪽에서는 여전히 그러고 있을 것이다.

아따, 요참 여자가 이상허게 꼭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닝께 글제. 안 의심스럽소이. 어짠다고 가방을 고롷게 큰 놈을 갖고 댕긴다요. 글고 쓰레기봉토는 졸아져 불고. 아, 몇 장 없당께. 다 없어져 부렀는디 워쩔 겨?

알만 하다. 배급으로 나오는 관급 쓰레기봉투도 손도 안 대고 알뜰하게 모은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혼자 사는 내가 그 큰 봉토를 쓸 일이 어디 있간디! 그러면서 나더러, 그러니까 요양보호사더러 자잘한 쓰레기들을 나오는 대로 가지고 나가서 버리고 오란다. 어디에? 기가 찰 노릇이다. 쓰레기장에 가면 이미 쓰레기를 담아 버려놓은 관급봉투들이 수북하게 있으니까, 그것을 살짝 열어서 헤집고 ‘요까짓 것’ 쑤셔 넣으면 된다고 우긴다. 실제로 막무가내다. 그렇게 모은 봉투를 손자인가 손녀에게 주련다고. 애들이 오는 것을 보진 못했다. 겨우 3주째였으니까. 아니, 요양보호사가 없는 주말에 다녀갈 지도 모른다. 그 애들 주려고 모아둔 봉투가 없어졌다고 성화였다.

어르신, 여기다가는요, 제가 추위를 타니까 스웨터 넣어가지고 다니잖아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스웨터요, 아시면서! 저 여기 것 봉투는 쓰라고 해도 못 써요. 우리 동네는 이 동네랑 구가 다르니까 여기 쓰레기봉투를 저 주셔도 쓸 수가 없다구요.

멋이 그래, 봉토면 봉토제. 글먼 내 것 봉토가 어디로 가부렀냐, 그 말이제.

우리 동네랑 같으면 저희 것 가져다 드리고 싶네요.

어먼 소리 말고 내 것 봉토나 내놔 보랑께. 집이 갖고 가도 못 쓴담서.

 

그것이 금요일이었다. 그 다음 주중에도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복지관에 들르면 차 과장이 살살 미소로 나를 달랜다. 그런 식으로 계속 선생님들이 바뀌니까 어쩌겠어용! 속 넓은 지 선생이 들은 둥 만 둥 참아 주세요! 사람들은 내 속내도 모르면서 내게 속이 넓다느니 그런 말들을 한다. 듣기 좋은 말일 게다. 어쨌거나 나는 사람들의 불평에는 신경 무디게 지낼 수 있다. 큰 문제만 없으면 특히 직업과 관련해서는 참는 자가 이기는 자다. 참으면 월급이 꼬박꼬박 모인다. 그렇게 살았다. 아니, 기본적으로 세상의 돈을 내 돈이 되게 하려면서 참을성도 없이 될 일인가. 그 정도가 내가 일할 때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이 일을 하면서는 내 간호조무사 경험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생과 사를 가르는 수술실 근무도 견뎌냈고, 온갖 오물들을 맞닥뜨리는 과정도 찡그리지 않고 해낼 수 있었다. 그래, 이 일이 병원 내에서 가장 깨끗한 작업이다. 이 작업이 없이는 병원이 오물들로 넘쳐날 것이니까. 이 더러운 똥오줌과 피범벅이 병원을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일차적인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세균과 병 따위를 없애는 정화작업의 최전선에 있는 전사다. 이 작업으로 나는 월급을 받고, 내 노후는 보장될 것이다.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버티어 왔다.

요양보호사 일은 수술실 근무에 비하면 거저먹기다. 시급 10,500원을 채워 정확히 계산해준다. 어쨌거나 최저임금 보다는 많고, 일 하는 시간 그동안만큼은 돈을 쓰지도 않을 것이니 두 배로 절약이 된다. 버는 것과 안 쓰는 것을 더하면 갑절의 가치가 된다. 고무줄 같은 신경 줄을 조금 무딘 쪽으로 단련하며 참으면…….

그래도 통하지 않는 때가 닥쳤다. 노인은 하루도 빼지 않고 복지관에다 전화를 해댔다. 복지관에서는 시영아파트 어르신들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까운 위치 때문에 총체적으로 서비스 비용이 절약되고, 무엇 보다 큰 불만사항들이 없는 편이다. 자신들이나 또 주변 사람들도 장기요양보험이니 하는 공적인 사실들에 관해 원론적으로 아는 사람이 드물어 불평불만이 적다. 일단 혜택을, 문자 그대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들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자질구레한 불평은 오히려 어리광이다. 나 좀 봐주라니까, 심심허다고! 나 죽겄서! 근디 나 요라다 죽는당가? 징허네이, 요라고 못 걸으믄 걍 죽게 놔두제이! 여그, 여그 좀 잡으랑께! 그렇게 저렇게 실랑이를 하면서 세월이 간다. 그런데 쓰레기봉투 민원은 끈질겼다. 나는 시쳇말로 잘렸다. 엊그제 11월 말, 하필이면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직장에서 ‘짤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모처럼 외식을 하는 토요일 - 주말이라서 딸아이도 왔었다. - 해고당한 이야기는 감췄다.

왜, 식욕 떨어지는 일 있어? 식당 잘 못 골랐나? 딸아, 우리 둘이 엄마 것 다 먹자!

속 모르는 남편은 펄펄 날지 않는 나를 의아해 하며 놀렸다. 젓가락 부딪는 소리 사이로 닷새를 계속해서 혼자 내지르던 성난 목소리가 날아다녔다. 즈그 집에서는 안 춥당가. 질가 댕길라먼 얼메나 더 추울겨! 집에서부텀 옷을 입고 댕기제, 멋허러 옷을 들고 다닌다는 거여. 멋한디 울 집에 들어와 갖고사 세타를 입는당가!

사실 복지관에서도 내가 옷을 많이 껴입는 것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른 체격도 아니면서 한심하다는 투다. 요새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라깽이를 이상형으로 삼는데, 교육 있는 날 모두 함께 밥을 먹다 보면 내가 제일 잘 먹는다. 뭐야, 지 선생은 애기들 같이 먹네, 애들 반찬도 좋아하고! - 아니, 저는 그냥 무엇이든지 잘 먹어요. 살 좀 빼야 할까요? - 알긴 아시네. 해도 지 선생 귀여워요, 먹는 것도 애들 같고, 인상도 애들 같고, 하하. - 애들 같아 뭐하게요! 나도 덩달아 웃고 만다. 멋지다 그런 말은 언감생심 기대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른한테 애들 같다니! 뭐, 어쩔 수 없기는 하다. 여리여리한 여자애들 때문에 속앓이를 했던 것도 옛날 옛적 일이다. 예쁘면 뭣해! 나는 제법 하얀 피부에 비뚠 데 없이 좌우대칭은 된다. 열심히 살았고, 아니,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절약했고, 지금은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아직도 계획이 있다. 당근 재테크와 관련된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 아직은 일을 더 계속할 것이다. 해야 한다. 하고 싶다.

착실한 재테크는 세상 살아가는 기본이다.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돈 관리는 따로 하지만 투자 때는 함께 한다. 결혼 초에는 다른 커플들처럼 내가 돈 관리를 맡기 시작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이의 월급을 챙겨서 적금 부으러 가던 날, 바로 그날 아침 버스에서 가방을 찢기고 돈을 통째로 털렸다. 평생 단 한 번도 찢기지 않던 가방이 월급이 통째로 들어있던 그 순간에 찢기다니. 그 일은 훔쳐간 그들에게는 마법이었고,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는 그것을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땀방울로 다져진 돈인가 말이다. 그 순간, 그 이후로 나는 돈 관리자 자리에서 데꺽 잘렸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싶기도 하다. 그이가 나보다 관리에서나 투자에서 월등하니까. 어느 집이고 아내들이 돈 관리를 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자존심이 묵사발 될까 봐 남들에게 테는 안 낸다. 누가 하면 어떤가, 결과가 좋으면 좋은 것이다. 한 푼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남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당연히 노담인데, 담배는 바로 돈을 말아서 태우는 것이라 생각해서 손을 대본 적도 없을 것이다. 둘이서 내기를 하면, 글쎄, 누가 더 절약의 천재인가 모를 일이다. 아니, 내가 밀리려나? 그 만큼 신뢰를 하기 때문에 그이의 제안이나 결정을 따르게 된다.

 

성남의 끝자락 미금에 청*마을 주공 42㎡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 1995년, 그 때도 오늘처럼 매섭게 추운 12월이었다. - 우리는 울었다. 대충 정리하고 딸아이 재워놓고 둘이서 입주파티를 하자고 마주앉아서……, 짠! 하고 잔을 부딪는 대신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 내가 먼저였나? 모르겠다. 둘이 다 울었다. 울다가 웃었다. 반지하 - 반지하에서 갓난아이를 품고 누어있는 순간, 그것을 표현할 단어는 없다. 그런 우리에게 이 공간 전체가 우리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 작은 36㎡도 아니고 42㎡ 아파트라니. 대출을 끼었다지만 우리 집이다. 요새 와서는 ‘영끌’이란 말이 유행이지만, 그런 말이 생겨나기 전에도 우린 그만큼 다 했다. 그랬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내 집을 샀다. 둘이 벌고 절약을 하며 살 테니까 까짓 대출쯤은 문제없었다.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내 집을 마련하다니. 아까워서 발을 크게 떼놓지 못했다. 몸무게가 한쪽으로 잘 못 실려서 바닥이 무너질세라.

꿈결 같은 세월이었다. 어느새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는 말 그대로 똘똘하고 키도 크고 공부도 제법 했다. 부러울 게 없었다. 머리카락은 나를 닮아서 검고 머리숱도 많았다. 머리를 묶어주면서 예쁜 머리핀을 꽂아주면서 생각했다, 나 어린 시절 보다는 더 행복하게 해주어야지. 아니, 이맘 땐 나도 거칠 것 없이 부족함 모르고 자랐었지. 아무튼 뒷받침을 더 잘 해주려면 돈도 모아야 하지만 무엇 보다 부모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된다. 아버지가 일찍 아프시다가 돌아가신 것 말고는 내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는 생각은 없다. 어머니는 책 속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온순하고 또 온순해서 우리들에게 따뜻했다. 내 검은 숱 많은 머리를 감겨주시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젖은 채 안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비눗물 때문에 울고 싶었던 눈이 스르르 감기곤 했다. 내 단정한 단발머리는 언제부턴가 약간 곱슬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늘 단정한 머리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곱슬이 더 나타나서, 사람들은 파마 값도 안 들게 생겼다면서 부러워한다. 하지만 난 하늘하늘한 노란 생머리가 예쁘다고 생각한다. 사알짝 흔들어서 뒤로 넘기며……. 하긴 그런 인상은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처녀 적에도 안 어울렸다. 은아, 튼실한 몸과 맘으로 날마다 파이팅!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그이가 뜬금없이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고향이라고? 그러고 보니까 그의 고향은 남쪽이었다. 얘, 조심 해. 걔 라도표야! 연애, 거기까지만! 서울 여자애들이 라도표라고 시집가기를 기피했던 전라도 남자였다. 나는 특별히 전라도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고향 제천에서나 더구나 서울에서 사는 동안에 전라도가 그리 매력 있는 고장은 아니었다. 오빠가, 그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시댁이 전라도인가 어딘가는 안중에 없었다. 외국인이어도, 어쩌면 외계인이어도 좋았을 것이다. 막상 ‘시집가는 날’ 시댁 동네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놀랐던 가슴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곧 잊혀졌다. 신랑은 전라도 출신(!)일 뿐으로, 서울사람이었다. 아들로는 둘째였고 누이들도 있었으므로 집안을 책임질 군번도 사정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고향으로 간다고? 참으로 낯선,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고향인 보성 봉*리, 선씨들만 모여 사는 동네, 하나 둘 떠나고 백 가호도 안 되는 마을로 가자고? 내 고향 제천도 우리 마을도 시골이긴 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시골인 시댁 마을은 그동안 잠깐씩 들르긴 했다. 하지만 아주 살 터전으로 받아들이라니, 날벼락이었다. 그는 공무원이니 걱정 없지만, 내가 취업할 수 있는 병원이 있을까? 설마 차밭 농사를? 무슨 말로, 어떤 말로 반대를 하지?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다. 내가 이 세월 살면서 남편 의견에 반대 한번 안하고 살았었나? 새삼 그것도 놀라웠다. 며칠을 끙끙 알았다. 언제나처럼 아무 말 않고 생글거리며 따라 나설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병원 핑계가 그나마 통할 것 같았다. 내 직장은 어쩔……

그러다가 걱정은 전쟁 없이 사라졌다. 내 속으로는 반대의견을 들고 나서기가 전쟁준비만큼 힘든 터였다. 그런데 그이가 우선은 이곳 광주로 내려오자고 말했다. 고향까지 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랬다. 휴, 나는 늘 운이 좋았다. 이곳에는 그이의 동창생이며 선후배들이 이렇게 저렇게 자리 잡고 살고 있었다. 나는 쉬지 못하는 습관에 잠시 알바도 했었지만, 곧 병원에 취직했다. 마침 건강검진을 집중적으로 하는 병원이었고, 광주 전남 여타 지역으로 건강검진 버스를 운영하는 팀에 들어갔다. 조금 늦을 때는 있어도 낮 근무였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그렇게 이곳 대도시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전학 온 딸아이도 서울 말씨로 친구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신이 나는 듯했다. 그 나름대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내 키만큼 자라는 건 정말 시간문제였다. 아슬아슬하게도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자는 말은 더는 없었다.

그러자 저녁 쉬는 시간이 뭔가 아까워졌고, 나는 야간대학에 진학을 감행했다. 간호학과는 이과라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벽이 있었고, 차선으로 사회복지과에 ‘등록’을 했다. 간호학전문대학에 간절히 등록하고자 했었던 옛 그 느낌이 살아나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게다가 4년제 대학이었다. 사실 마음 끝 간 데 깊은 속에는 그만큼 깊은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었다.

야간대학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이런저런 이력들을 가지고서 늦게 대학에 오는 경우가 많아서 친구처럼 가까워진 동료학생들도 생겼다. 그때는 2008년부터인가 시작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이슈가 되어서인지 사회복지과 학생 중에는 복지관이나 돌봄센터를 운영할 마음으로 와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실제로 소규모 센터를 운영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비슷하게는 유아교육과를 해서 어린이집을 차린 이도 있었다. 하나 같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복지관에서 일을 하면서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만났다. 나이들은 대부분 나보다 많지만 살짝 철이 없다고 할까. 일은 싫고 돈은 벌어야 해서 우울해하는 사람들 말이다.

나 같으면 못 산다 하지, 지 선생! 뭣 하러 그렇게 살어!

뭐가 어떤데요?

아니, 이깟 일 고만 좀 하고 쉴 일이지, 뭐가 아쉬워 그래요. 월세 받아서 쓰니 좀 좋겠어. 그냥 쉬라고 잡아 앉히지, 남편도 참. 짠돌인 게지.

아아니, 남편 탓 아니에요. 젊겠다, 두 손 두 발 성한데 어떻게 놀아요?

남편이 벌어다 주지, 월세 나오지. 그럼 매일 사우나도 가고, 산악회, 거긴 주 1회니 바람 쐴 만한데, 으샤! 그때가 그립다, 나는.

그런 건 취미 없어요!

그럼 일하는 게 취미다요? 세상에 일이 취미인 사람 어딨다고!

힘든 일도 아니고, 살림에 도움도 되고.

못 말려, 바보 같이!

내가 사는 방식이 바보 같은가? 그런 점이 없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남들이 칭찬을 하든 아니든 나는 그냥 그대로 일 테니까. 나이든 동료가 바보 같다고 흉을 보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어느 의심 많은 할머니가 나를 잘랐거나 칭찬했거나 나는 나다. 더구나 어제는 어제다. 일곱 번째 어르신님, 어서 나오세요!

 

아차, 초인종이 두 개! 어느 것을 누른다? 폭발물을 몇 초 안에 해체해야 하는 톰 크루즈식 액션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마지막 남은 두 개의 전선 중에서 어느 것을 자를까, 손이 떨린다. 똑딱똑딱 초시계가 흐른다. 잘 못 자르면 자신을 포함해서 사방이 날아갈 것이다. 그런 기분이다. 가만, 바른 초인종을 찾는 데 힌트는 크기가 아니겠다. 위치가 문제다. 처음부터 제 자리에 있었던 초인종은 고장이 났고, 그래서 새로 달아놓은 것은 좀 엉뚱한 자리에 붙어 있겠다. 옳거니, 요 하얀 녀석인 게로구나. 괜스레 옷깃을 한 번 더 만져본다. 새로운 시작이다. 좋은 인상이 필요해! 초인종을 보면 늘 젖꼭지 생각이 나지만, 검지 끝에는 딱딱한 플라스틱 감촉이 느껴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0.12. 국제PEN광주, 18호, 268-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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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20. 12. 27. 14:37

겨울, 바닷가

 

누가 이곳을 바다라고 하겠는가. 그곳은 바다, 겨울 바다였다.

오늘은 2020년 여름, 하늘에 갇혀 공기에 갇혀 암울한 나날, 길고 긴 장마에 집콕이며 방콕이 새로운 일상이 되자 먼 데 먼 날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해 겨울 - 하필 북해라고 하는 바다를 보고 싶었었지.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대로 얼마나 스산한지 확인하고 싶었었나.

 

1997년이 저물어가는 크리스마스 휴가철이었다. 그때 나는 연구년으로 쾰른에 머물고 있었고, 남쪽에서 온 일행을 만나서 북쪽으로 향했다. 가벼운 여행이었기 때문에 실은 정확한 목적지도 없었다. 북해를 보러 가는 데에만 뜻을 맞췄다. 일단 기차로 국경을 넘어 북해로! 유럽의 기차여행은 안전하기 이를 데 없고…… 천만에. 어떤 사고였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채로 바로 국경 앞 에머리히에서 기차가 멈췄다. 택시로 네덜란드의 아른헴까지, 역에서 제공해주는 버스로 다른 역으로 이동하여 다시 기차로 우트레히트까지. 거기서 내려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그러고서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는 운하를 경험하고, 다음 하를렘에서 잔트포르트 바다까지, 헤아려보니 정말 일곱 번의 우회 내지는 유희를 거쳐 도착한 바닷가였다.

 

바다는 많이 광활하고 그 광활한 만큼 엄청난 바람을 몰고 와서 우리를 내몰았다. 적어도 환영은 아니었다. 윌리엄 터너의, 아니 근처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했던 로이스달의 그림 <폭풍우>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해는 곧 질 것이었으므로, 아니 이미 지고 있었기에, 그에게 ‘증명사진’을 부탁했다. 이 한 장의 사진에 매서운 바람과 어둠의 기억이 박제될 것이다. 바닷가 쪽으로 향하는 뒷걸음이 사뭇 위태로웠다. 바람은 지는 해를 두고서 무섭게 폭우를 동반해 왔다. 십분 전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변해 버렸다. 겨우 몸을 가누고 도망치듯 바닷가를 벗어나야 했지만, 체험은 길이가 중요하지 않다 싶었다. 순간이 영원할 수도, 영원이 순간 일수도 있음이여!

 

완전한 장대비를 맞으면서 이리저리 헤매다 들어간 곳이 ‘카페 홀란드’, 나는 뜨거운 글뤼봐인을 그는 차가운 맥주를 한잔했다. 날은 아주 어두워 왔고, 푹 젖은 사람들이 가끔씩 들어왔다. 카페는 피난처였다. 그가 담배를 가지러 자리를 떴다. 고향에서 집에서 얼마를 멀리 떨어져 나와서 이 밤 낯선 바닷가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인가! 쾰른을 출발에서 이곳 바닷가에까지 - 하필 여정에서의 우여곡절은 뒤쫓는 사람을 피해서 도망치는 연인들이라 해도 합당할 코스였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의 15분에서 20분 사이가 영원처럼 길었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균열이 생겼다. 그것은 어쩌다 둘이 함께 있어도 먼 먼 거리감 때문이었다. 아무렇더라도, 나는 그곳을 떠나 쾰른으로 잘 돌아올 것이었다. 다음날 예정대로 잘 돌아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초록별에게 쓰는 편지』, 이대동창문인회, 2020.10.30.,49-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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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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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이2020. 12. 4. 18:31

이번 장편 『숨』을 냈는데, 11월 29일 토요일,
89학번 제자가 싸인을 받겠다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아들과 아버지를 집에 남겨 놓고.....

이런 시절에 “한참 무모한” 아무개에게 라고 했지만 내심은 기뻤다.

함께 인벤을 둘러보며 벼락 맞고 버틴 나무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2017년 여름 몸통에 벼락을 밪았고,
2017년 1월 눈사태로 가지가 찢겨나갔다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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