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이2017. 10. 7. 01:15

2017. 9.17.

‘부정한 미녀’(질 메나주) - 한글문학 세계화의 걸림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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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여자와 비슷하다. 정숙하면 볼품이 없고 아름다우면 부정하다.’라는 르네상스 이래의 여성혐오성 격언(?)에도 불구하고, 번역문제에서는 형용사에만 집중해서 말하자.

“한국시의 걸작들”이 세계화를 위해서는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 “규범”적인 작품들은 국가주의적인 가치나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움과 인간의 가치를 담아냈다고 간주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이 예컨대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 한국스러움을 강조하고 한국어처럼 들리기를 고집하면, 시를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보는 미국에서 청중이나 독자들이 전혀 유머를 접하지 못해서 반응이 거의 없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한 마디로 감상적인 목소리로 말을 거는 한국시는 미국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다고. (이 단락은 2017 세계한글작가대회,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의 발표 발췌.)

 

어찌할꼬. 문학의 세계화가 입에 올릴 수 있는 간단한 개념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상당한 경험과 능력을 겸비한 전문가의 입으로 번역의 딜레마에 관해 들으면서 느낀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한국 시인들은 자신의 시가 정직한 추녀가 되더라도 꼼꼼히 충실히 번역되기를 원하는데, 정작 시를 들어줄 사람들은 부정한 미녀를 원한다니! 세계화는 무리인가, 정말 필요한가. 서양 사람들의 이해 구미에 맞는 번역을, 또는 아예 번역되기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한글문학의 세계화는 한글문학의 부분적 변화 또는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 서양 사람들의 의식주 따라잡기에 급급한 한국인들의 의식에 더해, 문화 예술 차원에서까지 세계화를 위해 서양 흉내내기에 나서야 하는 것인지. 당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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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15. 11. 5. 11:16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한 <제1회 세계한글작가대회> 중, 한 파트의 참관기를 쓰라는 청탁을 받았다. 빠듯한 일정에 힘들었지만 맡은 부분의 "숙제"는 공부다 치고 열심히 하려고 했다. 2015년 9월15~18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


 

[17일 둘째 마당, 모국어 문학 활약상]

 

이민 현장에 대해서 쓰라뇨?

 

세계한글작가대회를 되새김질하고 있다. 세계에 흩어져 한글로 글을 쓰는 사람들 - 이민지에서 한글로 글을 쓴다면 그 소속은 어디인가. 그래서 예컨대 국제PEN한국본부 산하에 국제PEN한국본부캐나다지역위원회가 있다. 3년 전 78차 국제PEN대회가 경주에서 열렸을 때 왜 그 많은 교포문인들이 ‘Korean PEN’이란 이름표를 목에 걸고 다니는지, 그땐 의아했었다. 이름표의 주인이 ‘한글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표지인 줄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이번 세계한글작가대회는 바로 그런 작가들 중심의 대회였고, 특히 ‘모국어 문학 활약상’을 논하던 자리로 돌아가 본다.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이사를 좌장으로, 이중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민용태 명예교수가 시작을 열며, 자화자찬 같다는 전제로 스페인과 한국에서 종횡무진 시를 쓴 이야기를 했다. ‘하늘에 별들은 너보다 많아 / 땅에 꽃들은 너보다 많아 / 하지만 너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네 이야기 밖에 할 이야기가 없어’로 끝나는 자작시를 스페인어로 이어서 한국어로 읊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민자의 고독을 어떻게 승화할 것인가. 한글로 글을 쓰면 본국 한국과 접촉하라. 바람직하기는 이중언어로 써라. 더 낫게는 아예 그 나라 언어로, 영어권이라면 ‘여지없이 절대로’ 영어로 써라. - 누구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민용태 교수의 이중언어 제안이란 실제로 어려운 것임을 전제로 시작한 정정호 교수는 비교문학 학계를 이끌었던 경험으로 ‘영어권에서의 한글문학 번역문제’에 집중했다. 영어권의 재외동포재단의 자료집을 기초로 문단의 현실을 방대하게 소개했고, ‘한글문학’이라고 정의할 때의 ‘문학’의 외연을 넓혀서, 문리가 있는 문자로 구성된 모든 것을 모두 문학으로 본 만해 선생의 견해를 지원했다. 이어서 이민1세의 경우에는 한글문학(만)이 가능할지라도, 2세와 3세는 다르다는 견해를 폈다. 영어로 써서 헤밍웨이 상을 받은 이창래 소설의 경우 미국문학 내 소수문학으로 분류된 것으로 미루어서도 그것이 한국문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에서의 한글문학의 문제란 결국 번역의 문제인데, 문학이란 ‘구체적 보편’이고 보면, 번역만이 평등한 사회로의 진입에 공헌하며, 번역은 모국어가 다른 언어로 거듭나는 정도를 넘어서 세계문학의 생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한글/한국문학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탁월한 최고 수준의 번역’이 없는 때문이라고, 번역에서의 완벽성을 강조했다.

질 메나주가 말했다는 번역에서의 ‘부정한 미녀’보다는 ‘정직한 추녀’를 지지하는 쪽이냐고 묻고 싶은 질문은 발화되지 못했다. 최홍규 시인 등의 열정에 넘치는 설명 조의 질의들에 ‘질의응답’은 어려웠다. 번역을 지원하라는 청중들의 일체감을 전달받은 좌장은 경주의 박목월 시인의 예를 들어 글을 발표할 수 없던 일제시대에 고향에 칩거해서 쓴 시들이 해방 이후 박두진 시인 등에 의해 『청록집』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하며 ‘글쓰기’에 집중하는 일이 우선임을 피력하며, 2부 외국에서의 활동상 소개로 차례를 넘겼다.

처음 발언자인 재독 서정희 시인은 구상 시선집 『드레퓌스의 벤치에서』를 시작으로 김남조 시선집 『바람세례』 등 12권을 독역한 경력을 지닌 분이라서 앞서 말한 ‘탁월한 최고 수준의 번역’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심정이 들게 했다. 시인은 한국통상 우호항해조약 이후 1893년 첫 『전래동화』가 독역되기 시작한 이래, 1950년 이전에 겨우 7종이던 사례가 2013년 말을 기준으로 291종에 이른 번역의 현실도 소개했다. 1968년 일본에 최초 노벨상수상자가 난 이후 한국의 현존 작가들을 독일에 소개하고 있는 《Han》과《Hören》문학지도 소개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과 독일의 문화적 차이가 번역에서도 문제점으로 작용하는 점을 들췄다. ‘착한 배달민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쓴 작품들이 경쟁적이고 진취적 독일인들에게 수용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 서부를 대표하여 발표한 LA의 이승희 시인은 올해로 28회째를 연 ‘해변문학제’ 이야기는 접어두고, 오직 이민1세와 2세의 한글문학 계승 문제에 집중했다. 본국에서 초청된 강연자들이 ‘현장에 대해서 써라’고 할 때는 야속했지만, 사실 이민1세대에게는 향수문학이 전부였다고. 30년이 되어도 언어는 멈춰있어 영어문학은 불가능하지만, 문학지와 단체들도 많아지고 안정되어간다고 한다. PEN 연간집은 한글과 영문 50%씩 낼 수 있게 되었단다. 그러나 2세와 3세에게 한글문학의 전수는 어렵고, 이중언어가 가능한 그들이 이민한글문학의 희망이라고, 미주중앙일보에서 ‘미래신인한글문학상’을 제정했는데 응모 열기가 뜨겁다고 했다.

PEN한국본부캐나다 지회장 이정순 시인의 캐나다 현황 소개에 따르면 약 300명 문인들이 PEN과 캐나다한인문인협회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2세의 한글문학 계승은 난제이며, 보다 활발한 번역을 모색하는 점에서 이민사회에서의 한글문학의 고민은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아베마리아’ 선율에 담긴 캐나다 한국문인들의 활약상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는데, 김양식 시인은 캐나다 현지 문인들과의 교류에 대해서 물었고, 100개가 넘는 언어와 150개 인종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마음과는 달리 실제 교류가 어렵다는 답이 되돌아 왔다.

마지막 사례발표는 본론과는 좀 다른 이야기로, 인도네시아 소수부족인 찌아찌아족이 한글문자를 가져다가 그들의 말을 표기하는 문제였다. 라틴문자 등이 아니고 왜 한글이었냐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 바우바우 지역의 아비딘 교사는 한국유학 시절에 이호영 서울대언어학과 교수의 추천으로 부족회의를 거쳐서 ‘부족의 문자’로 허가 받은 과정을 사진 자료로 보여주었다. 인구 10만명이 안 되는 찌아찌아족의 언어에는 문자가 없다가 한글자모가 들어간 것인데, 처음 반응들은 한국문화의 혼입에 대한 염려였지만, 부족의 지도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한글이 ‘소리의 기록’에 쉽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학교간판도 ‘세쿨다’ 등으로 쓰는데, 한글을 아는 우리가 소리로 읽을 수는 있지만 뜻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가 한글로 교과서를 써서 최근에 출판했다는 소식에 박수를 쳤지만, 정작 한국어 교육의 산실 세종학당은 철수한 지 몇 해라는 이율배반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질의응답 중에도 이중언어 창작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편파주의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민 교수의 염려는 이어졌다. 한편 이민2세대가 영어로 쓴 작품들은 미국문학에 속하더라도 한국의 정체성과 혼이 들어 있으므로 한글로 번역되기를 바란다는 정 교수의 발언으로 둘째마당이 끝났다. 필자는 이민자로서 ‘모국어 문학’의 고민은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국내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일 터, 한글 창제의 과학적 우수성에 우쭐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것, 자신이 쓰는 한글에 인류가 공유하는 문학어로서의 보편적 문법을 갖추어 작품으로서 문학성이 넘칠 때라야 세계의 독자를 얻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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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PEN한국본부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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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15. 10. 27. 00:28

 

한자 섞어쓰자면서 ‘치맥’은 잘도 쓰는군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④ 나라말 한글
2015년 10월 14일 (수) 17:18:18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한글날이 지났다. 훈민정음 8회갑을 기념해 제정된 ‘가갸날’이 한글날이 돼 지금까지 이어오지만, 정작 한글은 부침을 겪어 왔다. 공교육에서 한글이 통째로 사라졌던 암흑기가 지나고, 우리의 해방은 한글의 해방과도 같은 말이었다. [계속]

 

 

넷, 나라말 한글

 

한글날이 지났다. 훈민정음 8회갑을 기념하여 제정된 ‘가갸날’이 한글날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지만, 정작 한글은 부침을 겪어 왔다. 공교육에서 한글이 통째로 사라졌던 암흑기가 지나고, 우리의 해방은 한글의 해방과도 같은 말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법원에서는 판검사들이 ‘가갸거겨’를 낭송하면서 한글공부를 했다는 일화가 있었듯, 일제 때 최현배 선생이 국어의 문법 체계를 집대성한 『우리말본』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듬해는 최남선의 『신판 조선역사』, 이어서 『큰사전』 첫째 권이 간행되기 시작했다. 1차교육과정기(1959~1963)만 해도 국어공부라면 『우리말본』에 입각해서 쓴 교과서로 임자씨다 풀이씨다 꾸밈씨다 해서 낱말의 갈래부터 배웠다. 하지만 한자옹호론자들의 반론도 드세어서, 학교를 배움집, 비행기를 날틀로 해야 하느냐는 공격이 빗발쳤다고 한다. 정작 배우는 우리들은 전화를 번개딸딸이라고 말하는 상상만으로도 재미만 있었다. 오늘날 동아리나 새내기 같은 단어들을 만들어내어 정착시키는 언어감각으로 미루어, 말본 시대가 흔들림 없이 갔었더라면 순 한글의 정착이 더 빨랐지 않을까.

한글다운 한글의 사용은 이제 한국 내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난 달 경주에서 열린 ‘세계한글작가대회’는 세계 각처에서 한글로 글을 쓰는 작가들의 대회였다. 해외라면 주로 교포들의 한글문학을 지칭한다. 대회에서는 한글문학/한국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보급과 교육문제에 대한 관심도 주목을 끌었다. 훈민정음의 상형과 가획의 원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정교함을 갖추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과 한글문학의 세계화는 별자리만큼씩이나 서로 떨어진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류의 보편문법이 내재된 글을 다듬어 쓰는 일, 더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쓰는가, 철학이 관건일 것이다. 아무튼 경주 대회는 궁극적으로 한글문학의 세계적인 수용을 꿈꾸는 잔치였다.

그러나 국내 한글의 현실에서는 초등 한자교육을 지금도 거론하는 퇴행에 가까운 행보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퇴행이라면 단기 3779년 이전으로 물러간다는 말이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서’ 백성을 위해 새로이 스물여덟 글자를 만든 그때를 저버리고, 왜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4348년 오늘, 다시 특권계급의 전유물인 특종 어휘들 때문에 나라말이 계급화되어 간다. 한글은 이미 영어단어 혼용의 시대를 살고 있다. 높은 양반들은 의제는 시시하니 어젠다를 논하시고, 학계에서도 이펙트를 위해 어떤 어프로치가 좋을지 초이스를 따지는 것이 노멀한 일이 되었다. 낮은 양반들은 건강이야 어찌되었건 치맥만 있어도 행복한데, ‘치’는 꿩이나 닭이 아닌 치킨의 ‘치’자다. 영어에서 소외된 그냥 백성은 키친타월을 치킨타올이라 말해서 비웃음 사기 십상이다. 처음 그 물건 만들어 팔 때 종이행주라고 했음 좀 좋아, 이렇게 말하면 속 좁은 늙은이의 속 없는 불평으로 치부된다. 영어를 섞어야 튀고, 튀어야 팔리는데 무슨 소리!

이 스타일리시한 그레이 톤의 아이템을 입어 줘야 폼이……. 머리 좀 쉴까 하고, 산책처럼 운동화라도 꿰 신어야 하는 것 말고 간단히 좀 쉬려고 텔레비전을 틀면, 한글은 토씨뿐일 때도 있다. 영어단어로도 모자라 한자교육에다 중국어단어 혼용까지 나올 참이라. 어쩐다? 우린 우리 식으로 우리 말 좀 하고 살 수 없는지. 지금 사회에서는 어쨌거나 보수층이 대세라는데, 옛 것 좋아하는 대세가 세종의 옛 정신 좀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민주적 의미를 지닌 훈민정음은 물론, 공법(貢法) 제정을 위해 겪어낸 지난했던 민주적 과정을, 그 아래 깔린 민주적 사상의 바탕도 함께 배웠으면 싶다.

사족 한 마디. 누군가는 이 글에서 ‘단기’가 튀어 나와서 보는 눈을 어지럽힌다고 나무랄까. 언젠가 공적인 지면에 단기를 꼭 써보고 싶었다. 오늘 날 무엇인가 병기를 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한글과 한자 병기가 아니라 단기와 서기의 병기다. 우리 하던 대로라면 ‘단기(서기)’로, 세계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서기(단기)’로, 최소한 새 달력에라도 단기 표기가 있었으면 한다. 육십갑자를 표기할 정도로 전통과 옛것을 존중하면서 단기를 망각하다니,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는 우리가 아직 멀었나 보다.

<교수신문> 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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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2015. 9. 22. 17:54

세계한글작가대회 2015년 9월

 

 


*경주화백컨벤션센터 -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 경주 예술의 전당*

 

 

9월 15일 (화) 개회식

9월 16일 (수) 특별강연: 모국어과 문학, 한글과 문학

                   주제발표1: 한글과 한국문학의 세계화 

          •   세계속의 한글문단, 한글문학
          •   세계화 시대의 글쓰기
          •   한국어와 한글교육 현황

                문학역사기행 1: 동리목월문학관, 안압지 

9월 17일 (목)  주제발표2: 세계 속의 한글문단

                    문학강연: 한글문학의 세계화 

          • 재외동포 한글문단
          • 모국어문학 활약상 

                    한글문학 축제 및 폐회식

 

9월 18일 (금)  문학역사기행 2: 문무대황암, 감은사지,

                                         실크로드 경주 2015  

 

 


 

경주화백컨벤션센타 ▼

 

 

 

민용태 명예교수, 시인 열강 ▼

 

 

 

서정희 재독 번역가 시인과 함께

 

 

 

 

이정순 PEN캐나다 지회장, 찌아찌아 교사 Abidin 과 함께

 

 

 

 

독일 PEN 사무총장이자 Krimi 작가 Dr. Regula Ven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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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15. 8. 11. 23:02
세계한글작가대회가 열린다. 국제PEN한국본부 주관, 9월 15~18일 경주.

기념문집을 내는데 6개의 주제 중에서 한 편을 내도록 되어 있다. 

처음 것은 제출 한 것, 나중 것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이다.

 

 

주제: 내게 특별한 우리말

 

대단원을 지나서 다시 한글에

 

다행스럽게도 일제 치하가 아닌 세상에서 이 땅에 태어난 나는 한글전용 의식이 팽배했던 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았다. 지금 쓰는 용어인 문법은 말본이었고, 실제로 교과서 제목이 그랬다. 심지어는 전화를 번개딸딸이라고 해야 한다거나 모교는 배꽃큰애기배움터라야 한다고까지 한글 사랑에 목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글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말 우리글은 공부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식도 없었다. 모차르트의 멜로디로 동요를 배우면서 자랐기에 우리 음악도 당연히 7음계라 믿어버렸다, 제법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러니 우리 것은 모두 그냥 저절로 있는 것이고, 뭔가 낯설고 어려운 것이 학문의 대상이리라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일생을 살았다, 살았을 뻔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연구논문을 쓰면서 오직 갈수록 멀어지는 그것들을 쫓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순간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이런 고백과 함께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설 쓰기는 녹록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제야 내 글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하려니 내가 소설은커녕 글쓰기를 배워 본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글쓰기를 배워 본 적도 없이 논문이라는 이름의 글들을 써댔다니. 우와, 머리가 터질 듯 했다.

 

번갯불에 콩 볶는 심정으로 남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서 처음 한 일은 한글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누가 보면, 다 살고서 무슨 짓이람, 이라고 핀잔할 지경인데도.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아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계속 외국어만 파던 대학의 언어교육원 어딘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교사가 된다는 상상은 어색했지만, 분명 국어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때까지도 국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따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국어는 다만 나라말인 것을, 한국어라야 고유의 우리 언어를 국제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가며 부끄러움 속에서 단기간이나마 (한)국어를 배웠다. 내친 김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그룹 스터디도 하고 혼자 날밤도 샜다. 과락은 면했던지 2차 시험을 보러 갔을 때에는 한참 젊은 면접관들 앞에서 얼얼했지만, 막상 자격증을 손에 쥐자 부끄러움이 더 컸다.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일진대, 무턱대고 평생 써댄 글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게로 치면 어떤 것은 1킬로그램을 어떤 것은 2킬로그램을 넘는 것들이었으니 이들을 어쩐다?

 

기억을 왜곡하기로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고는 새로운 한글로, 내게는 새로운 한글로 글을 쓴다. 새로 쓰는 글들이 많아지면 잘 못 썼던 글들이 덮이기라도 하는 양. 덮는다고 사라질 것이 아님을 알지만 모른 체하기로 한다. 어차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밖에 하지 못하니까, 라고 위로를 한다. 나의, 우리의 한글로 글을 쓰면서 외국어 공부할 때만큼 사전을 찾는다. 글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보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서 살핀다. 잘은 아니더라도 틀리지는 말자고, 잘 쓰는 건 타고나거나 어떤 은총의 문제이려니 틀리게 쓰는 일이나 말자고 애를 쓴다. 물론 세상 일이 애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알 만큼은 살았다. 그래도 다른 묘수가 없다. 다만 한글을 다시 배우게 된 것이 기쁠 뿐이다. 내 말을, 우리의 말을 늦게라도 다시 찾은 것이 의미라면 의미다. 한 편의 연극일 인생의 대단원을 지난 오늘에서 굳이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니, 의미를 떠나 나는 그냥 한글에 파묻혀 있다. 내 글쓰기가 세계를 폭로하는가, 사르트르의 말인데, 그건 그 다음 일이다.

 

주제: 한국적인 정서

제목: 아서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어느 민족에게나 그 민족에 알맞고 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정서가 있으리라. 한국인에게도 한국에 알맞고 한국의 특징을 보여 주는 정서가 있어 마땅하다. 그러나 21세기 오늘날에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세계가 한 뭉텅이로 글로벌스탠더드에 입각해서 글로벌경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우리민족은 새로움에 능하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천재적 감각을 자랑한다. 식민지배의 질곡과 내전의 참상에서 놀라운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낸 것 또한 새로운 가치를 날렵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한 결과라고 한다. 유사 이래 공동체 의식 속에서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자유’가 초고속으로 우리 사회 속으로 이식되었다. 자유연애, 자유결혼,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온통 자유 천지다.

 

거기에 우리는 예부터 우물 안 개구리를 경계하리만치 독선적인 기질이 있다. 사전은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을 독선이라고 푸는데, 독선적인 사람은 자신이 독선적인 줄 모르기 때문에 독선적이 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또한 독선적으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 독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깊은 개성적 성찰보다는 유행되고 있는 가치들에서 버무려 낸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데 있다. 유행, 다시 말해서 외면적 평가의 기준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 유행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독선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자유경쟁으로 얻은 돈의 위력과 자유선거에 의해 잠정적으로 대표가 된 그들의 독선은 대중을 벼랑 끝으로 유치할 수도 있다. 대중의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기 때문에 회의도 주저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대중은 ‘훌륭히 성공한’ 그들이 내세운 기치를 추종하다 보면 거의 한 줄 서기를 해서 그리로 달려가게 된다. 그들이 내어 건 깃발에는 ‘자유’가 너풀거린다. 대중은 자유를 향해 죽을 경쟁을 한다. 친구도 형제도 팔꿈치로 제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당위성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앞서 달리는 사람들을 좇아 모두가 달려가는 길에서 옆도 뒤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물론 다른 가치나 방식을 거론하면 순간에 낙인찍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큰 소리를 낼 조건이 아닐 때에는 더욱 몸을 사려야 한다. 아서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오늘날 한국에는 정서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에 내어 줄 틈이 없다. 새것에 취한 채, 학문과 예술마저 유행을 좇느라, 정녕 우리의 문화유산의 뿌리 없이도 앞으로만 내달려도 좋을 것인지. 밥이 부족했을 때 서로 양보했던 우리네 인심은 밥이 넘쳐나는데도 나누기는커녕 빼앗는 현실로 바뀌고 말았다. 국민소득 2500불인 나라에서 연극에 예술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병들고 굶어서 죽어가는 불공정 분배를 자유경쟁의 이름으로 방치하고도 숨을 쉬며 살아간다. 언제부턴가 목소리 큰 사람이 대접 받는 일이 다반사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목소리 큰 아이가 늘 이겼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공동체도

늘 49%는 51%에 눌려서 소수의견으로 폐기되는 것을 견뎌야 한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은 종말의 시작이다. - 카뮈가 『페스트』 영문판 서문에 썼다는 이 말을 반추해 본다. 대중에게 깃발을 내어 건 위정자들이 이 말을 음미해보면 어떨까. 세계를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내건 깃발 만 옳지는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좇아가는 이 가치 만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이 자유이지 이 경쟁은 공평하지도 않고 심하면 살인적이라고. 나의 자유는 필히 너의 자유를 다소간에 다치게 하는 것이라고. 그 또한 한이 되고 한을 키울 것이라고. 그러니 자유의 천칭 다른 한쪽에 평등을 올려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발언에 별 효력이 없는 한 무명소설가의 부질없는 상상이다.

 

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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