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1. 12. 31. 16:47


고아가 되었다.
올 봄.
나의 어머니는 당신 나이 이른 다섯에 고아가 되시더니만, 우리더러는 더 일찍 고아가 되라시며 떠나셨다. 막둥이는 1963년생, 겨우 마흔 아홉이다.

피를 나누어주거나 물려준 후손 27명, 법으로 후손이 된 14명을 더하면 41명의 후손을 남기셨다. 그 중에서 참석자는 29명. 290명이 훨씬 넘었을 조문객을 생각하면 불참 수가 부끄럽다. 어머니 앞선 불효녀는 어쩔 수 없다. 머나먼 외국에 아기들이랑 사는 경우도 어쩌랴. 그래도 불참이 많다. 누구도 예상 못할, 설마 하던 불참도 있었다.

*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세월은 저 뒤편에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슬하를 떠난 셈이다. 대학시절은 정신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서울 살이. 젊디젊은 ‘엄마’는 서울나들이를 즐기셨다. 우리들 -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 함께 이화캠퍼스를 누볐다. ‘누볐다’는 물론 엄마의 표현이다. 실제로 이대 앞과 명동을 누빈 것은 엄마였다.

어머니는 이대 앞과 명동만이 아니라, 설악산과 제주도를, 전국을, 나아가서 가히 세계를 누비셨다. 어머니가 빠진 저녁밥상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던 세월. 불평도 별로 없는 집안에서 나 혼자 불평분자였다.

왜 엄마는 빨리 안 들어오셔요?
우리 학교에 가면 빨리 나갔다가, 우리 돌아오기 전에 미리 들어와 있지 않고!

외할머니가 할머니였다. 외할머니가 엄마였다. 엄마가 밥을 지어주거나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등록금을 함께 걱정해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집에는 다른 여러 엄마가 있었다. 물론 엄마도 엄마 노릇을 하긴 했다. 소질이 없어도 피아노다 미술공부다 시켜서 소질을 ‘계발’해내는 극성 엄마였고, 또 엄마의 유일한 자랑인 ‘밤 채’ 솜씨 덕분에 늘 예쁜 김장김치를 먹었다. 그래도 엄마의 부재를 못 참았다. 엄마를 엄마답지 않다고 볶아댔다. 엄마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도 엄마를 닮지 않고 불평만 해대니까, 집안에선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고까지 놀렸다. 연속극을 보면 더러 첫아이는 누가 낳아놓고 죽던가 도망가지 않던가. 대체로 나는 비판적인, 회의적인 인간이었다. 속으로 진단하기를, 일찍이 엄마에게 불만이 많아서 나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고까지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참 어려운 것이었다. 참 어려운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 의사의 손에 거꾸로 매달려 자두 빛보다 더 붉어진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었을 때, 나는 기절을 했다. 산고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무엇인가 꼼지락거리는 포대기가 옆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생명체가 밖으로 나온 것이란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다. 입은 뭔가를 향해 움질거린다. 내 아기, 내 젖을 탐하고 나와의 관계를 탐하는 아기. 어렵게 어렵게 겁을 잔뜩 먹고 만져본 손가락. 작은 손가락들이 무엇이라고 종알거린다. 이것은 대체 어떤 암호인가.

손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 - 그것을 남성 화가가 어떻게 알았을까? 짐작이나 했을까? 새삼스레 위대했다. 아담의 손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그림의 발상이 이 진자리가 아니고 어디였겠는가?

그렇게 나는 기절과 함께 새로이 태어났다. 그 어려운 엄마가 되었다. 불평을 하는 자식이 아니라 불평을 받는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들은 어떤 불평을 할까, 별안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나는 계속 괜찮은 딸이었고, 엄마는 나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엄마는 부족했다. 물론 불평의 말이 단번에 줄었다. 불평의 마음은 한 치 변함없이 여전했다. 반면 나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엄마이리라고 착각했고, 애들은 정말 괜찮았다. 제 엄마에게 불평을 해대지 않았다. 적어도 대놓고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유전자가 더 좋아져서 그랬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나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죽을힘을 다하고 조금 얻어도 행복해 했다. 나는 내가 인내심이 많아진 줄 알았다.

*

어머니가 떠나셨다. 조문객들이 무슨 소용. 41명의 후손 중에서 29명만 참석한 장례식장. 어쩌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불참 속에 들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면 다 똑같이 아프다고 하셨다. 당연하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네 언니는 참 쌀쌀해야. 동생들이 그 말을 전해주어도 당연하다 느꼈다. 나는 내 불평소리가 줄었더라도 어머니가 내가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랐다. 사실이니까. 인생관이 다른 것을 어쩌라고.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는 단 한 톨의 인내심도 내주지 않았다. 그 긴 세월 동안 큰 딸년의 부당한 불평을 감내하시던 어머니. 겉으로만 화려했던 어머니가 떠나셨다.

갑자기, 너무나 늦게 깨닫는다, 얼마나 서운했을꼬. 인생관이 다른 딸을 두고 평생 얼마나 참담했을꼬. 단 한 톨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나는 또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까. 아름다운 관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참아야 할까. 내 멋대로,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엄마’가 이제는 없다. 49재를 지났으니 어딘가로 정말 떠나고 없다. 머리에 꼽았던 하얀 리본이 타들어가는 초라한 불꽃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단 하나 지지대가 무너져버린 지금.
처음으로 처연히 외로운 순간을 맞는다.

.............................................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첫 클릭클릭』, 이대동창문인회, 2011, 8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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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10. 12. 31. 16:46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남자는 첫사랑이지만 여자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 그렇게 남자들이 말해놓고서 여자들의 망각의 묘기를 비웃곤 합니다. 망각은 양심을 접는 것과 같은 의미일 때가 많아서, 여자들은 양심이 덜한 족속으로 폄하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바닷물 한 움큼만큼,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라 해도 파도가 밀려오다 빠져 나가듯이 어느 때는 코앞에 다가와 눈을 떠도 감아도 그 자리에 있다가는, 또 언젠가는 슬며시 핏속으로 숨어드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내가 잊을 수 없는 것들은 당신에겐 아무렇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도 걸러내는 기억들은 제 나름일 테니 말입니다. 고운 차 거르는 체 마냥 촘촘하며 일정한 그물망이라 해도 우리의 기억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누가 들으면 웃을까. 늘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는 것은 이를테면 아무렇지도 않은 산자락 성긴 돌 틈으로 삐져나온 연초록 풀들 같은 하찮은 것들입니다. 또는 여름이 시작되고 2층 창밖으로 짙푸른 나뭇잎들이 무성해지는 이맘때면, 바로 이맘때 만났던 새 새끼들이 되살아납니다. 정확하게 큰 아이가 약혼식을 위해 잠시 집에 머물었다가 간 다음날이었습니다. 무심코 아이들 방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발견한 것인데, 날렵한 동작으로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이상한 일이었죠. 어느 결에 둥지를 튼 놈들은 놀랍게도 알을 낳았던 것입니다. 아파트 나뭇가지에. 스무날? 한 달 정도? 유난히 맑은 여름날을 뒤 베란다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그놈들 사는 양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새보다는 큰 것이 그래도 참새 모양이라 참새목 되새과 혹은 멧새과 쯤에 드는 새이리라 추측했답니다. 그렇게 흔한 새이지만 아무도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뒤적여보았던 백과사전에서 일러준 대로라면 3~5개의 알을 낳는다더니만 정말 딱 4개의 알을 낳았더이다. 그 다음은 누군가 정성들여 관찰해서 TV에 올려주는 그런 과정들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신기한 것은 그것을 덜 화려한 색깔로지만 프레임이 없는 실 공간으로 바라다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침조석(!)으로 뒤 베란다 나가기를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는 재미라니, 방안 퉁소 서생으로 살던 터에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사람들은 앉은 자리 뭉개지도록 눌러 앉아있기만 하던 사람이 왼 종일 촐랑대던 일로 즐거워했고, 더러는 놀렸답니다. 하여 그 여름은 더위라거나 짜증 같은 아름답지 않은 단어는 우리 집에서 사라졌더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늘 아름다울 수는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정말 상쾌하리만치 서늘한 날 아침 밥상. 밥상이라야 가볍게 풀 썰어놓고 빵 뜯어먹고 그랬을까요? 아님 그날따라 젓가락을 들었던 감촉이 살아납니다. 밖에서 자지러질 듯 하는 새 소리 사이로 알 수 없는 요란한 소리들이 날아와서 우리 모두는 기겁을 했습니다. 후다닥 튀어 일어나서 뒤 베란다로 내달은 나는 정말 기절할 것 같은 광경에 시간이 정지했다고 느꼈습니다. 저쪽 새둥지에서 두 나무 째를 건너온 바로 코앞이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그 네 마리 새끼들이 첫 비행을 하면서 그것이 곧 둥지를 떠나는 날인 줄 그때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누가 예전에 야생의 새를 키워보기나 했어야 말이지요. 그런데 한 마리씩 한 가지씩 날아오르려는 새끼 새들에게 저승사자가 나타난 것 때문에 어미아비 새들이 단말마의 울음을 울었던 것입니다. 주차된 차량들 사이를, 더러는 벌써 움직이는 차바퀴도 겁내지 않고 기식하던 주인 없는 고양이가 곧 영양식을 발견한 것이지요. 새끼들의 추락을 기다리는, 아니 소리로서 겁을 주어 추락을 유도하려는 고양이와 어미아비 새의 대결장이었습니다.

아아 안 된다, 아가 힘 내거라, 어서.

이 몹쓸 도둑고양이, 악마! 사라지지 않음 내가 쪼아 줄 테다.

네롱~ 하면서 달콤한 먹이를 향해 불을 뿜는 고양이도 질 기세는 아니었지요. 글로 쓰자니 여러 줄이지만 사건은 불과 몇 초였을까요? 어쩌자고 나는 젓가락을 든 채로 아파트 계단을 내달렸습니다. 아무 신이나 끌고 화단에 내려서선 고양이를 내쫒았지요. 평소라면 기분이나 나빠할 뿐 눈도 주지 않으려했던 그 고양이놈을. 상황이 너무도 아슬아슬했지만, 얕은 가지로 출렁이던 새끼와 뛰어 오르려던 고양이의 서커스가 원안대로 끝나고 상황이 종료되자, 난 그만 털썩 주저 않았지요. 흙에 앉아서 올려다보니까, 마지막 한 놈이 맨 윗가지를 정말로 날아오르더니 저만치 떨어진 큰 나뭇가지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없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젓가락 한 짝만 들고 계단을 기어올라 들어온 나를 식구들은 더욱 놀려댔습니다. 내가 뛰어나간 뒤로는 내 소리까지 가세해서 정말 한판 굿이었다는군요. 새 소리 고양이 소리야 비록 생사의 투쟁이었다고 하지만 자연의 소리였겠죠. 그러면 내 목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소프라노로 분류되는 목소리로 정말 무진 악을 다 썼더랍니다. 교양? 평소에 목소리 크다는 이야길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다 새침이었던 게지요. 급하니까 정신이 없더랍니다. 알 수 없는 나라 말로 새 새끼들에게 주문을 거는가, 했더랍니다.

그런데 이 새란 놈들은 진정 그들이 태어난 자리를 기억할까요? 그해 여름 어느 날엔 뜬금없이 앞 베란다의 가녀린 창살에 한 놈이 턱 앉아 있었다는 일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그 놈이 그놈일 거라고 수선을 떨며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저만치 담장 쪽에 앉은 놈들도 꼭 우리 집 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기색이었단 말입니다. 더구나 이듬해에도 때로는 해를 걸러서도 심심치 않게 그 예쁘지도 않은 소리로 찌이찌이 울어대는 새들이 우리 집 주변을 날아와 앉곤 한답니다. 창살 안쪽의 꽃잎을 한참 동안이나 쪼고 있을 때도 있답니다. 그러니 그놈들을 잊을 새가 있겠냐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을 새록새록 불러내주지 않더라도 물론 잊지 못할 일들이 늘 있지요. “언어란 꿀이 빠져버린 벌집처럼 거죽뿐인 줄을 알면서도 그 안에 어느 한 순간의 제 마음이라도 담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렵니다.” (오자 포함, 어느 작품의 인용입니다) 같은 쪽지 글을, 아니면 지구 속 마그마로 녹아들고 싶다는 마성적인 언어를. 아니,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요 진실은 언어 이상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던 순간들을. 순간들은 부서지기도 녹기도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순간들을 잠시 버릴 뿐입니다.

......................................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사랑에 세든 사람』, 이대동창문인회, 2010, 200-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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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10. 12. 1. 23:30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입니다.

작가가, 소설가가 작품을 쓰는 일은 일종의 도마뱀 꼬리자르기라고, 한 덜떨어진 소설가가 내게 말했다.

뭡니까?

절체절명의 순간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은 그 피투성이 기록으로 작품을 남기는 것입니다. 몸통을 살려낸 도마뱀은 꼬리만을 물고 허탈해하는 독사에 대해 승리감을 가질 것이고. 꼬리를 자른 선택에 관해서 의미부여를 하며.

도마뱀에게라면 위기 탈출이 절대적 선택이겠지만.

겠지만? 그 이상입니다. 천적을 만났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건 분명 비장의 무기이고, 예컨대 살모사가 아직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틈을 타 도마뱀은 목숨을 건질 수 있으면 되었지요. 이제 거기에 그 경험을 잘 다듬어서.

다듬어요? 죽다가 살아온 경험을 쓰면 문학작품이라는 말씀이오?

일단 꼬리 잘린 도마뱀은 특별한 경험을 했고, 그런 처절한 경험이 없는 다른 도마뱀들에 비해. 더구나 잘라진 꼬리는 나중에 다시 돋아난다고 하니까요.

그건 좀 다른 문젭니다, 제 생각엔.

다른?

도마뱀을 노리는 적이 주변에 많을수록 꼬리를 재빨리 자르고 도망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그럼 되었지 뭐 또. 게다가 그것을 가공하여.

그래도 꼬리를 자르는 건 도마뱀에게 큰 부담입니다. 꼬리가 없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그 험한 경험을 작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해도 일단 잡아먹힐 위험이 커집니다. 새 꼬리를 만드는 동안에는 몸통 자체도 자라지 못합니다. 동작도 굼떠지고, 심지어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도 떨어집니다. 어차피 소설가의 지위야 꼬리 잘린 도마뱀 수준이지만요. 더구나 이제 그 새 꼬리라는 놈은 더 이상 자를 수가 없답니다.

뭐요? 도마뱀 박사가 따로 없으시군요.

게다가 새로 돋아나는 꼬리는 척추가 아닌 연골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다시는 자르지 못한답니다. 소설 한 권 떴다가도 평생 타작만 내놓는 소설가와 다름없지요. 도마뱀으로서도 평생 꼬리 잘라먹은 놈이라는 꼬리표를 함께 달고 사는 것이겠지요. 새 꼬리는 원래 것보다 색깔도 안 예쁘답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 하겠습니까? 소설작품은 취소하고라도 일단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저는 꼬리 자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꼬리를 조금만 물려도 그게 독사라면 금방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니 잘라야겠지요, 싹둑.

아니 작가님, 뭐 싹둑 잘라낼 원망 같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저 따라서 해보는 소립니다.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닌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그냥 그 독으로 죽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일부를, 이를테면 마음, 심장, 가슴 뭐 그렇게 불리는 어떤 것을 잘라내고도 살 수 있을지, 그것을 가공하여 작품화하는 강심장을 가질 수 있을지, 그건 꽤 어려운 선택입니다. 아니 선택이기 이전에 운명입니다.

그냥 죽거나 그것을 쓰거나?

예, 실존과 방법의 갈림길입니다. 삶의 내용인가 글쓰기인가 하는 갈림길.

도마뱀과 갈림길이라. 우린 오늘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군요.

그와 내가 구동성으로 말했다. 그와 나는 늘 하나이면서 둘인, 둘이면서 하나인 도마뱀이다. 왜 쓰지도 안 쓰지도 못하는지 언제나 답을 모른다. (문학공간 2010.12월호 통권 253호 40-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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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2010. 11. 15. 23:30

[소설시대 18호 권두언]


불모지에서 더 성한 나무, 문학

 

유난히 무덥고 지루했던 장맛비 속의 여름이 갔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벌써 여름을 잊습니다. 잊은 체합니다.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맞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잊은 체하는 어제가 오늘을 결정하기에 우리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디디거나 아예 가슴을 부여안고 주저앉습니다. 밖으로는 씩씩하게 걷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미소까지도 지으며.

이 숙명적인 굴레 - 선택의 오류와 그 결과의 회환에서 오는 결핍의 감정은 그러나 우리들 작가에게는 유일무이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마 신(들)처럼 무오류성의 성질에 인간이 근접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애당초 문학이고 예술이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한 우리의 내면의 충동 뒤에는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한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습니다. 이 동경은 우리들 대부분에 내재해 있는 것이, 인간은 일반적으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감정은 지속적인 상황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하며, 이 결핍은 배고픔과 아픔 같은 육체적 유형일 수도 있지만, 고독이나 권태라는 정신적 ․ 영적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필수적 소여가 아닌,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향한 달랠 길 없는 동경은 아마도 오늘날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위 문화산업의 동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자들을 생의 단조로움으로부터 기분 전환시키는 일이 수요에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로부터의 도주에 있어 그 강도가 격심한 경우는 아마도 작가가 되고야 말 숙명적 요인일까 싶습니다. 때로는 그가 중심에서 너무나 떨어진 곳에 서 있음으로 해서 정상인과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라 해도, 바로 그 비정상적인 격렬한 사고가 이 사회를 자극해서 정신이 들게 하기도 하는, 그 이상한 숙명 말입니다. 그러기에 문학은 오히려 불모지에서 성장합니다. 작가 스스로 어느 중심에 안주하기보다는 경계인이라고 느끼는 동안 더욱 무서운 기세로 중후한 작품들을 내놓는 증거가 세계문학사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가까운 예로는 우리의 신문학 운동만 해도 국권피탈의 역경 속에서 폭발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학, 특히 내용적으로 응집력이 있다고 느껴지는 모든 소설은 다음의 세 요소로 약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와 둘의 기본 대립, 예컨대 개인/사회, 시민/예술가, 덕/악덕, 선/악, 자유/부자유, 빈/부, 현세/내세 등을 일컬을 수 있는 대립, 그리고 이 대립의 결과로써 생겨나는 제 3의 요소. 한 소설에서 기본 대립은 적어도 한 사람의 등장인물로부터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으로서 받아들여진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이 결핍은 줄거리를 전개시키고, 계속해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종결 상황에까지 밀고 나아갑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소설은 유일한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으니, 결핍의 지양입니다. 이러한 결핍의 지양을 위한 투쟁이 드라마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해설자/서술자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소설의 장르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간접적’ 접근은 이 적극적 시대에 매우 시대착오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이 소설쓰기가 점점 난항에 부딪힘을 우리 모두 실감합니다. 김현 선생은 언젠가 사물을 해석하는 힘의 뿌리가 욕망이라고 전제하고,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생생해지고 활기 있게 되며, 특히 소설은 그 욕망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고 적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우선 소설가의 소설 쓰는 욕망마저 그가 구하는 다른 욕망들에 눌려 변질된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 소설가의 욕망, 소설 속의 인물들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실어 참여하는 독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세상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은 고도로 발전하여 독자란 그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인문학 일반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위한 지도적인 힘을 상실해 간다는 염려가 식상할 만큼의 언어로 아우성이면 그럴수록, 그래도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 문학이 무엇인가를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정보오락의 시대는 우리가 본래적 의미의 인간성을 기억하며 그저 인간답게 사는 일조차 실로 어렵게 하고 있음이 사실이니까요. 우리 인류가 거대 우주를 품기 위해서라면 우선 그 작은 파편인 이 지구와 먼저 화해하고 섞이는 일부터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쉬이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첨단과학기술을 자연정복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게 하는 데 써야함은 우리 모두 깨닫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룡처럼 화석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인류는 몸을 낮추고 키를 줄이며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를 모색해야 합니다. 다만 그 첩경은 무엇보다 우리 몸뚱이[재산]를 부풀리고 무한정 먹어대는[소유] 공룡이 되라고 부추기는 파괴적 세력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할 힘을 꿈꾸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입니다. 유토피아는 아무데고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이 불발을 성찰하고 이 결핍을 생채기 나도록 파헤집는 문학, 문학 활동이 인류의 꿈을 위한 마지막 보루임을 자각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어딘가를 향합니다. 어딘가를 향해서인가 용케 우리가 방향키를 잡았다 하더라도 바다는 비웃듯이 늘 풍랑을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행여 편한 대양이더라도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잠시, 한시적 삶에 갇힌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 애써 소용돌이를 만들거나 다시 폭풍우를 호려내고 맙니다. 잔잔함은 뱃사람을 늘보로 만들 것이고, 정지해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한국작가교수회>는 소설 창작과 그 교육에 관한 연구와 정보를 교환하며 후진을 양성 지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2000년 2월 25일 창립총회를 가지며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이제 온이로 열 살을 먹었습니다. 집필과 강단의 활동으로 온 힘을 소진하는 것, 한 방울의 에너지라도 남아 있다면 잠을 청할 수 없을 정열에 떠는 것 - 우리 한국작가교수회에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 온갖 소여의 현란한 폭풍적인 기세에 맞서는 증거로서 또 한 권의 『소설시대』를 내놓습니다. 늘 그렇듯이 편집을 맡아 무진 애를 쓴 편집위원들께, 그리고 원고청탁에 마다않고 좋은 글들 보내주신 여러분께 진정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미미하게나마 사람들의 가슴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이 책을 펴든 여러분과 함께 꿈꾸렵니다.

 

 

 2010년 때마침 한글날을 기리며,

다시는 ‘언문, 암클, 아햇글’ 등으로 폄하되는 일 없기를,

 ‘그랜드 바겐’을 내놓는 지도층부터 한글사랑의 마음을 일깨우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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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10. 4. 1. 23:00

무거운 책들


뭘 많이 들고 다니시네요, 무겁게!

머리가 가벼우면 책이라도 무겁게 들고 다녀야지요.

남보다 느린 걸음으로 늘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오갈 때면 주고받는 인사말이었다. 그런 나날, 겨울이었다. 12월 중순 들어서야 시험지 보퉁이를 끌어안고 연구동 층계를 내려오는 늦은 오후, 해지는 저녁. 나는 그날 퇴근길에, 바로 그 층계참에서부터 퇴직을 결심했다. 아무 쓸모없다는 문학수업을 해놓고서 또 아무 쓸모없을 등급으로 나누는 작업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고, 아니, 그만 하겠다고.

해방은 이렇게 아주 급격한 염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염증이란 순간에 도를 넘는다. 펌프로 물을 길어 물탱크에 채우는 것을 바라보던 아이. 그렇게 저 만치 아래에서 천천히 조바심 나게 높아지던 물은 찰랑찰랑 가장자리에 차오르는가 하면 어느 순간 밖으로 넘칠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탱크를 넘치게 할 생각이 없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슬아슬하게 물이 넘치는 순간, 그 순간을 기다리던 심정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물이 입 속에까지 차올라와 익사당하기 전에 성큼 일어나 물 밖으로 나와 버렸다. 설마 하던 학과 식구들은 평상시 내 분별없는 고집을 떠올렸는지 곧 퇴직을 기정사실화했다. 한 겨울 숨 막히게 애쓴 제자들 중심의 간행위원회에선 내게 두 권의 책을 선물했다. 이름 하여 『창작과 사실. 양심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고찰 1983-2009』라는 논문집과 『반대말 ․ 비슷한말』이란 소설집이다. 여러 의미로 양장도 사양하고 흑백을 고집했더니, 책들은 내용 어슷하게 외형도 왜소하다. 표지만큼은 미술전공의 둘째아들이 많은 시간 공들여 만들어준 예술품이다.

나는 3월 한 달을 그 간행위에 참여한 78인에게 각각 책 두 권에 사인을 해서 보내는 일로 살았다. 이름마다 - 더러 동료도 섞이었지만 - 생각해 보았다, 이 젊은이들을 밥벌이 못하는 무능력자로 키워낼 뿐이라는 오명을 듣는데 지친 우리는 인문학을 송두리째 버려야한단 말인가. 인류의 원천적인 무엇, 시공간을 초월한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 분명히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인간을 효용성의 수치로 파악하려는 시대의 어리석음에 그리 쉽게 굴복해버리기에는 청춘이란, 아니, 생이란 너무 아까운 것임을.

책을 나누는 일은 대강 마무리되었지만 새로 서가 정리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한다. 다 버리고 온 것 같았는데 널부러진 짐짝인 채로 불어난 서가를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무소유의 가치가 다시 우리를 일깨운 즈음에 더욱. 누군가 신문에 ‘목침용으로도 쓸모 있을 것’이라 평을 한 1296g짜리 번역서나 그 두 배에 육박하는 양으로 써낸 책들이 눈에 들어오면 더욱. 이렇게 별 쓸모도 없이 무거운 책들은 기껏 지나온 세월의 나를 나타내주는 이정표에 불과하리라. 나는 이 시간을 살고 있고, 내일을 살고 싶다. 아직 꿈이 꿈틀대는 내일을. 제대로 교수도 소설가도 아닌 박쥐인생을 이제는 털고 동굴 밖으로 나가고 싶다. 아무튼 박쥐에게도 날개는 있으니까. 마음은 벌써 알 수 없는 자유로움과 환희와도 같은 떨림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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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연>에서 청탁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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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09. 12. 12. 02:51

 

평행선

                                                    『사랑은 아무나 한다』2009 (이화에세이)

 

 

사랑을 주제로 받은 순간 평행선이 떠올랐다. 평행선을 화두로 삼을 량이면 그건 이미 시시한 시작이리라. 그렇다. 하지만 “종교적인 긍휼”이라거나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같은 보편적 사랑이 아닌, “남녀가 서로 정을 들여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려는데 대뜸 평행선이 떠오른 것을 어쩌랴. 심장도 머리도 둘인 두 개체 간의 사랑이라면 서로 다른 선의 만남을 의미할 터인데, 그것이 잠시라도 우연이라 해도 평행선이 되어야 서로를 건네다 볼 수 있고 사랑 등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나 말이다.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선은 질풍노도처럼 만났다하더라도 곧 비껴가버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물론 이러한 염세적인 견해는 한 개체가 그리는 선이 곡선이라기보다는 직선 쪽에 가깝다고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만일 길가다 동무를 만나서 한 눈 팔 량으로 멈칫거리거나 굽어져 어울릴 수 있다면 사랑의 감정도 보듬고 어우러져 다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으련만, 어쩐지 그것은 희망이나 꿈같은 말로 들린다. 태어나면서 손발을 버둥대던 우리는 늘 어딘가로 버둥대면서 나아가고 그래서 그 길이 우리의 인생이 된다. 기껏 잘해야 비슷한 각도로 움직이고 있는 다른 길손을 동무 삼을 수 있으면 그게 낙일 것이다. 어쩌다 불꽃이 튀어 한데 어우러진 두 길이 있어, 다시 서로에게서 영 멀어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주변에서 서성대며 길을 간다면 그것 역시 축복 아닐까. 함께 세상에 새로운 길손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그 또한 잊히지 않아 더욱 버벅대고 주저앉아 그렇게 살아가는 삶. 사랑은 제 본디를 깨닫게 하는 일에도, 길을 계속 가게 하는 일에도 무르다. 사랑은 사람을 물러터지게 하고도 그것에 만족하게 한다. 사랑은 허술하고 바보스럽다. “현명한 이가 말하길, 바보들만 사랑에 빠지는 법이라 했지”라던 노랫말이 진리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무슨 그런 평생을 갈 중증의 바이러스에 옮는단 말인가.

이 병은 『폭풍의 언덕』 같은 중독된 사랑이나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치명적 사랑으로 소설 속에나 파묻혀 영생한다. 이 병은 실 인생에서는 애절하게 끝날 때가 많다. 중세 철학자 아벨라르와 제자 엘루아즈처럼 사랑 속에 결혼하여 아들을 두고도 생이별하는 연인들. 문중의 간섭으로 각각 수도생활에 들어갔으니, 그들의 “사랑의 서간”이 수백 년을 넘어서까지 세상의 연인들을 감동시키면 무엇 하리. 더러는 공권력도 사랑을 죽이는 변수다. 2차 대전 후, 보통 사람들처럼 십대에 만나서 몇 년 후 결혼하고 아들 둘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만 느닷없이 원자무기 비밀을 소련에 건넨 스파이혐의로 체포되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한 로젠버그부부. 폭력은 사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흑인이면서 명 쿼터백으로 이제 은퇴한, 네 아들의 아버지이자 멀쩡한 남편. 자선활동에서까지 돋보인 남부러울 것 없던 그가 별장에서 잠든 사이 갓 스물을 넘긴 여친에게서 네발의 총격을 받는다. 순수했던 첫 사랑을 접고 명사와의 인생을 꿈꾸었던 여자의 종말, 참혹한 비극. 허황한 것이 사랑일까. 사랑은 치기다. 사랑은 없다.

아니, 동서고금 세기적 스캔들을 뿌려댄 이들의 숨 막히는 열정들을 생각하면 사랑은 그 무엇인 것 같기도 하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끔은 가까이 이웃에서도 힘든 길을 선택한 대단한(?) 사랑도 없진 않다. 기어코 첫 연인을 기다렸다가 그녀가 아이 둘 데리고 고향 내려오는 기차간에서 훔쳐 달아난 집안 오라버니가 있었다. 그 아이들 둘하고 나중에 낳은 아이들 둘, 해서 네 자녀를 흠 없이 길러냈고, 아내의 조금 이른 임종까지 잘 지켜낸 오라버니. 더 기막힌 쪽도 있었다.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대처에 나와서 대학에 다니던 남자가 처녀 유치원선생님에게 반했다. 유치원선생님은 유부남의 구애에 발끈하여 보란 듯이 서울로 시집을 가더니만, 딸 하나를 낳았다는 소문과 더불어 곧 다시 낙향했다. 결국 각각 아들과 딸을 버리고서야 두 사람이 결합하더니 네 자식을 더 낳아서 남달리 유별나게 키워냈다. 70대, 80대 할아버지들의 청춘시절 이야기다 참. 그런 형질은 드물게 유전되는지, 속 좁은 내겐 불가사의다.

베란다 쇠창살을 저 너머로 바라보며 일요일의 늦은 아침을 먹는다. 조밀한 영국식 화단엔 이름 모를 푸르름이 가득하다. 창살 밖으로 선반에 내어놓은 몇 화분들에도 초록이 어우러져 있다. 그 밖으로는 짙푸른 나뭇가지들이 무겁게 흔들린다. 이십년도 넘은 낡은 닭장 아파트 2층에 앉아서 쇠창살 사이로 건너다보는 하늘도 하늘이다. 그런데 쇠창살 너머로 여름을 맞은 건 처음이다. 작년 추석에 다니러온 아이들의 걱정에 그제서 창살을 두른 것이다. 여름을 유난히 타느라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두고서야 잠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는 아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한숨을 쉰다니까요, 아버님 어머님 걱정에!”라던 며늘애 말이 주효했다. 원래 학교가 있었던 터에 지은 아파트라서 고목들이 즐비하고, 창살은커녕 창밖으로 너울거리는 푸른 나뭇잎은 성냥갑 아파트인 것을 못 느끼게 했다. 바로 창밖에 새들까지 집을 지어 새끼를 낳고 길러가지고 함께 날아간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꼭 네 마리를 낳아 데리고 날아갔는데,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항상 같은 울음소리의 그 새들이 날아든다. 베란다 바깥으로 내어단 화분 턱에 내어놓은 춘백 꽃잎을 갉아먹으러 와 앉는 놈들도 꼭 그런 꼬마들이다. 모양새도 목소리도 안 예쁜 놈들이 왜 예쁘기만 할까. 새들이고 사람이고 꼭 예쁠 필요가 없다 싶다. 어디 예쁜 사람들만 사랑을 하고 그러는가. 창살 속에 들어앉아 바라보는 새도 화초도 하늘도 뭐 다 괜찮다. 섬세한 감각들이 나이 따라 누그러진 탓도 있겠지만, 애들 사랑에 못 이겨 해 붙인 것이라서 창살도 답답치 않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아마도 창살에 갇힌 채로 적응하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기 시작하면 그렇게 창살 속에서도 갇힘을 모른다. 신기하게도 새 생명들이 태어나면 아예 바깥세상은 바라다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현혹되어 산다. 그때부턴 그리 많이 흔들리지 않고 평행선을 이루어, 왼쪽에서 오른 쪽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따라가며 산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우리를 걱정할 만큼 더 커버렸는데도, 우린 그저 그들을 뒤쫓느라 ‘거의 반듯이’ 평행선을 그리며 산다. 아주 엇갈리지 않으려면 조심히 평행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너무 서로에게 끌려 들어가면, 그 각도로 조금 더 내달으면, 그만 상대를 뚫고 지나가버리게 되니까. 그래서 조금 비겁한 채로 평행선을 따라 산다. 혹시 우리들의 가슴 한 편에 묻힌 작은 파편 같은 추억 하나도 진정 어떤 사랑의 증거가 되기엔 미미하다. 그건 그저 잠시 호수에 비친 구름의 그림자이거나 아예 호수 저 혼자의 일렁임이거나.

복숭아 껍질을 벗긴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따 들인 것들이라 당도도 높고 무엇보다 벗겨 드러난 속살에서 물기가 둑 둑 듣는다. 두 개를 벗길 양이면 늘 어느 하나가 더 먹음직스럽다. 너무도 당연히 더 맛있어 보이는 쪽을 당신의 접시에 올려놓으면서 느낀다, 누군가에게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내밀면 그것이 사랑일 것. 나란한 두 베게 깃을 새로 갈아놓으면서 풀기 더 고슬고슬한 쪽을 그리로 밀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 이 시시한 진부한 존중이 어우러져 나란히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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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09. 3. 28. 23:30

그림자 도시 - 개성 방문기 
                                                                  
소설시대 15호


개성을 방문하기 위한 10월 그믐께, 가을 내내 기다렸던 비가 하필이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지만 불평을 못한다. 해갈을 기다리는 푸른 잎채소들, 그 걱정에 사로잡힌 농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마음이 되어서. 들었다 놓았다 가벼운 우산을 꿍쳐 넣고 여차하면 요량으로 반 자락 비옷도 밀어 넣다보니 1박2일 봇짐이 커진다.


전날을 ‘통일’이라는 글자와 관련된 행사를 빌미로 서울에서 보낸 우리 일행은 이튿날 개성나들이를 위해 일찍 잠을 청하게 되었다. 덜렁 텔레비전 밖에는 없는 방에서 종이 한 장 글자 써진 것을 챙겨 넣지 않은 터라 심심하다. 불온한 문서라 분류되는 것, 수상쩍은 것은 집어넣지 않기로 작정했다. 언젠가 요상한 꿈에서도 분명 북한 땅을 떠나오기로 작정은 했었지만 그 끝이 불분명했고, 그 꿈을 꾸고 일년도 넘은 시점에서 느닷없는 개성행이라니 조금 켕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일을 누가 알랴! 돌아온 직후에 있을 사무(의무적인 일이자 나에게 보다 수십 명에게 중요한 것)를 미리 컴에 저장해 놓았다. 그러나 이리저리 뒤척이다 생각해보니 컴에 저장되어 있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남겨놓고 오지 않았으니 무슨 소용이랴 싶어 허망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꼭 돌아가야 한다. 또 정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알람을 켜두고 잠을 청하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낭패다. 다른 날은 몰라도 단 하루의 개성방문인데 잠을 못자두면 어쩌나. 그러저러 두어 시까지 시계를 본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지,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깬다. 5시 정각이다. 그로부터 10분 간격으로 깨우는 벨소리에 버스출발 50분 정각에는 승차할 수 있었다. 어제의 그 버스이기 때문에 자리는 남아있다. 우등고속으로 말해서 4번 좌석. 둘째 줄 복도 쪽 자리다. 어제는 종일 멀미약 탓으로 졸기만 하느라, 대한민국 명 정치가의 달변 중에도 고개를 쳐 박곤 했다. 오늘은 양을 반으로 줄인다. 평생처음 분단의 선을 넘는 나들이 길에 졸아서야…….


임진각 - 서울에서 임진각까지는 채 50㎞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며칠 전 어느 신문사 주최로 ‘꿈나무통일레이스’가 펼쳐지기도 한 거리이다. 버스 이동은 못다 잔 잠을 청하려다마니 금방이다. 우리 일행은 28인승 버스 둘로 움직이는데, 50명이 채 못 된다 했다. 이제부터 비상이다. 다른 짐들과 함께 우선 핸드폰들을 놓아두고 가야한다. 갈아탄 셔틀버스는 남북출입사무소까지 우리를 실어간다. 누구나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출경과 입경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대한민국 국적이건 아니건, 방문자나 현대 아산측 안내원이나, 심지어 개성근로자이거나 입출입 때 마다 입출경 수속을 해야 한단다. 출경이란 출국의 다른 말로서, 어쨌거나 남북한이 각각을 국가로 간주하지 않는 데에서 온 해결책이란다. 수속은 일반 외국여행 때의 수속과 같은 2단계를 거친다. 짐을 X레이로 통과시켜놓고 신체만 통과한다. 배율을 확인받은 디카만 허용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보이기 위해서 따로 들고 섰으랴, 다소 얼떨떨한 가운데 ‘녀자출구’에 줄을 섰는데 남자들도 섞이어 있다. 주황색 현대직원복을 찾아 물으니 괜찮단다. 여권에 해당하는 관광증에 사증을 찍는 절차는 배당된 차량번호와 일치하는 창구로 가야한단다. 그렇게 사증을 받아 통과했으니 북측인가? 아직 아니다. 정말 번호표가 붙은 차량이 즐비하다. 우리가 10호라 했는데 모두 ‘10-’으로 시작해 이상했다. 그게 총 10대 중 몇 호차라는 신호인가 보다. 그러니까 10호란 10-10호다. 서둘러 승차하고 나니 우리 차 담당 안내원이 오른다. 8시 정각을 조금 넘긴 시간이다.


이제 출발이로구나. 그게 아니었다. 8시 정각 군사분계선 통과 예정과는 다르게 군사분계선 통과 승인을 위한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안내의 말로는 통상 서쪽의 통신장비가 동쪽만 못해서 일어나는 지연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한 차량과 방문객들이 북측 입경을 못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으니 안심하고 다시 내려서 자유로이 기다리라는 안내다. 차량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서울-개성 표지판이며 남북출입사무소 입간판이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름에 다른 용도로 구입했다가 겨우 몇 장 찍어본 솜씨로 거리조절이니 뭐니 그냥 자동에 놓고 눌러보았다. 이제부터 증명사진을 찍을 양인데 눈에 들어오는 우리 일행은 없다. 어디선가 서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서 첫 증명사진을 찍었다. 입간판들을 증거로 하고서.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최소한 남북출입소까지는 다녀온 증명이 되어 줄 것이다.


정말 다들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을까? 서둘러 “온리 설렁탕” - 젊은 사장, 우리일행을 인솔하는 여행사 사장의 말대로 - 설렁탕을 먹고 내려왔던 그 곳으로? 하긴 해가 돋기 시작하니까 껴입은 옷이 불편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순간의 선택이 필요했다. 배낭의 짐이 부풀더라도 위아래 한 겹씩을 벗어 넣기로 작정하니 사무소 건물로 들어갈밖에. 화장실을 나서는 배낭은 정말 불룩 이가 되었다. 저만치 삼삼오오 모여선 일행들이 보였지만 끼이고 싶은 자린 없었다. 골라서가 아니라 전체로 무조건 없었다. 그것이 나이다. 어제저녁 공들였을 뷔페식 저녁 식사 후 색소폰 연주자까지 끼인 여흥시간, 그때에도 나이가 문제였다. 섞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섞이지 말아야 하는 세대의 의무다. 노래를 청하는 사회자의 마이크를 받아 대꾸한 내용이 그랬다. 듣기만 해야 하는 세대의 의무가 있노라고! 내심의 논리가 이랬다. 사람이 열 살까지는 벗을 할 수 있다 했다. 그런데 열 살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싶은 상황에서는 벗을 하지 말아야 미덕이다. 고조된 분위기를 깨느니 그냥 한 곡 부르다 말아도 될 일이지만 그것이 안 되었다. 약간의 취기에 실은 뭔가 노래 부르고 싶은 기분이 왜 아니었으랴.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이 아침도 딱 그런 이치였다. 어디에 끼어든단 말인가. 먼데 벽 쪽으로 의자가 연이어 있었다. 마침 고생하고 있는 다리를 위해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천천히 세상이 사려져 갔다. 혼자 있는 느낌이 되니 그 꿈이 되살아났다. 고층 아파트 위에 또 그만큼 높이의 아파트를 지어서 분배해주겠다는 북한상황의 꿈이. 고개를 흔들다보니 나도 모르게 목운동이 되고, 이어서 어깨운동도 되고 있었다.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쳤다. 꿈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회랑을 울리는 안내목소리와 더불어 서둘러 다시 버스 쪽으로 움직이는 발자국소리들에 천천히 눈을 떴다. 시계가 8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쪽을 향해서, 곧 북쪽으로 선회하겠지. 10여분에 군사분계선에 도착했지만, 다시 북측 입경 수속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주의사항과 일정에 관한 안내가 꼼꼼하다. 그러기도 하겠지. 마침내 9시 7분을 가리킬 때 버스는 다시 움직였고 널찍한 돌에 “평화를 다지는 길……”이라고 새겨진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비무장지대. 1953년 7월에 확정된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에 따라 남북으로 각각 2㎞씩을 포함한다.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출입할 수 없다던 그곳에 들어서는 것이다. 248㎞ 중 훼손하는 넓이는 버스의 넓이다. 군사분계선이 옛 베를린장벽 같은 담장이나 철조망이 아니라 200m 간격으로 황색 표지의 블록이 있을 뿐이라는 안내의 말이 생소했다. 그런 그것이 그런 위력을 지녔다니. 9시 10분, 그러니까 경계를 지나자마자 곧 ‘개성’이라는 간판이 초록색 바탕에 흰 글씨로 나타난다. 순간 등장한 인민군 초소와 마침 지나던 초병은 표정도 읽을 사이 없이 스쳐가고 만다.


그렇게 한 이십분 달리고 버스가 서자 북측 안내원 세 사람이 승차한다. 버스엔 처음부터 북측안내원 자리가 노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고, 셋이 타게 되면 맨 뒷좌석 가운데에 앉는단다. 이제 드디어 북측의 안내를 받게 된 것이다. 달변의 안내원은 하루 일정 등에 관한 ‘안내사업’을 시작한다. 처음 보이는 철길 경의선 봉동 역에서부터 봉동리 일대 개성공단에 관한 소개가 길다. 총 200만평 개발계획 중 1단계 사업으로 100만평이 개발되어 피복, 시계 등 70개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고. 놀라운 수치다. 설마 부풀릴 리는 없는데, 그동안 나의 무식함이라니. 패밀리마트 등 편의시설도 들어와 있고, 기술교육센터가 보였고, 그곳에서는 기술적인 용어들의 상이한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파트형 생산업체며 35000명 개성시 근무자들을 위한 푸른 버스도 출퇴근 보장용으로 운영되고 있단다.


약 40분쯤을 달려서 우리 버스가 개성시로 들어서자 정말 자그마한 몸집의 버스에 56번 번호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정지해 있는. 개성은 우리에게도 흔히 개성상인이란 말로 익숙하다. 북에선 개성깍쟁이라는데 남에선 서울깍쟁이라고! 깍쟁이의 유래를 북에선 ‘가게 방을 가진 사람, 가게 쟁이’에서 ‘각쟁이’로 줄다가 다시 된소리화한 것이 깍쟁이라 한다. 글쎄, 우린 그런 해설은 처음이다. 아무튼 개성 소개는 일품이다. 천년 전 고려 때 벌써 인구 10만이었다니, 유서 깊은 도시임엔 틀림없다. 주민들이 사는 마을들이 시작되고, 그 이름은 ‘해선동’. 38선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으로 그렇단다. 그런데 해방은 되었을지 모르나 푸르른 파주 땅을 지나 개성에 들어선 순간 차창의 푸르름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산들은 거의 민둥산이었다.


시내 쪽으로 오면서 이제 곧 심었을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이 보였다. 안내의 말로는 역병이 들어 완전 벌채를 하고 다시 심고 있는 중이란다. 개성시민은 적어도 산의 나무들을 몰래 베어다 불을 때는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다. 두문동 72인을 낳은 고장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차창 밖의 주민지구, 그러니까 주택지의 집들은 이삼층 공동주책이거나 5층 정도의 아파트이거나 파르르 얇은 종이 같은 인상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창문으로 미루어 보이는 벽의 두께는 마분지 정도. 그것은 스쳐가는 사물에 대한 편견이었을까? 편견이었기를 기도한다, 기도할 데가 있다면. 내가 본 것은 큰 오해이고, 집은 훨씬 더 두꺼운 벽을 하고 훨씬 더 따뜻한 방을 품고 있었어야 한다. 창문 안으로 움직임을 알아보기는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가 살아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을 받기엔 스쳐가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방에는 분명 학교에 가기 이른 대여섯 살 꼬마가 통탕거리고 있었지만, 키가 작아서 창문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주 난방은 구들난방이고 고층아파트는 온수난방이라는데 설마 사람들이 살지 않으려고? 그러나 거리엔 속도감을 주는 운동이 없었다. 그러니까 차가 없었다. 온 종일 가늘 길에 검은 승용차 한 대, 오는 길에 흰 색 승용차 한대를 보았을 분이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정차해 있을 때만. 질리도록 매연 속의 차량들과 불과 한 두 시간 이별한 후에 이 적막강산이라니. 가치평가의 뇌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시가지에서 60리, 박연포가 있는 박연지구로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이제는 명물 송악산도 잘 보인다. ‘만삭의 여인이 바다 쪽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을 가슴위에 가지런히 얹고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어머니산’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산은 지금은 바위산처럼 보인다. 이 도로로 계속 달리면 평양까지 2시간이면 간단다. 박연폭포에 대하 소상한 설명을 하던 안내원은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고는 잠시 마이크를 놓는다.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와 함께 송도 3절이라고 불린다는 박연폭포는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북한 땅을 처음 밟은 지점이 그곳이기 때문이리라.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500m 정도란다. 10여 미터 왼쪽으로 시작된 건물이 위생실(화장실)이다. 거기까지 그렇다 쳐도 사람들은 방문객들뿐인가? 10대의 버스에서 내린 울긋불긋한 사람들 말고는 짙은 감청색 차림의 북측 안내원 아니면 주황색 배색의 현대아산 안내원뿐이다. 평일이라 그렇다 쳐도 북한 사람들은 정말 관광지보다는 일터에서 열심인 듯 했다. 아까 시가지를 지나면서 보이던 사람들도 그리 열심히도 아닌 보통 걸음걸이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고, 더러 자전거를 가지고서도 타기보다는 짐을 실어 나르며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로의 드문 나무들의 색깔처럼 짙은 밤색 아니면 짙은 무슨 색 복장의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걷는다는 인상이었다. 물론 멀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겠지만, 걷는 속도로 보아 아예 소리가 없을 걸음걸이였다. 그러니 언제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겠나?


올라가는 돌계단은 작은 돌들을 일정하게 사각형 블록으로 찍어내어 계단길로 만들어 둔 것이다. 은행나무와 참나무 낙엽 사이로 돌멩이 하나 구르지 않는 완벽한 청소에 감탄한다. 어디든 가면 돌 한 조각을 탐내는 남편의 선물을 위해 유심히 들여다보아도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없다. 그렇다고 정해진 길 밖의 흙길로 나설 수는 없는 일. 물이 넘치면 폭포의 폭이 7,8m라 했는데, 지금은 갈수기라서 한자나 되는 폭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 폭포는 천마산 기슭에서 37m의 낙차로 그 아래 투명한 고모담(姑母潭)이라는 연못으로 떨어져 내린다. 박진사란 사람이 폭포에 놀러왔다가 못 속의 용녀에 홀려 결혼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자 진사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못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박연폭포와 고모담의 이름이 유래한다 했다.


폭포 곁을 돌아 오르니 주변에는 험준한 봉우리들이 이어진다. 10㎞ 정도 길이로 고려시대에 쌓은 대흥산성이 있고 그 안에 조선시대 규모를 확장하고 17세기에 개축했다는, 조형미가 뛰어난 관음사가 있다고 하는데, 지난 홍수 이후 도로가 유실되어 관광이 불가능하단다. 대신 폭포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까지 아슬아슬 올라가 볼 수 있었다. 박진사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더 위대한 어머니가 계시다는 가르침으로(?) 큰 바위벽에 새겨둔 강반석 조선의 어머니 예찬시보다 신기한 것은 범사정이란 얇은 바위가 있는 지점이다. 고모담에 떠있는 바위들을 그 곳에서 내려다보면 말 그대로 ‘뗏목이 떠있는(범사)’ 광경이 맞다. 개성 모약과 여남 개 담은 비닐 도시락에 두 달러, 인삼차 안 잔에 한 달러, 생수는 두 병에 한 달러란다. 그렇게 네 달러를 쓰고 차오른 숨을 달래고 내려와 보니 위에선 보이지 않던 고모담 안의 널찍한 바위 위에 황진이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거기까지 다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디카에 증명사진만 부탁하고서 들여다보니 알 수가 없다. 황진이가 폭포자락에 반해 머리를 풀어헤쳐 먹물을 묻혀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시구를 나중에 석공들이 파놓을 것이란다. 대충 ‘삼천 척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밤하늘 은하수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하누나.’ 정도의 뜻이란다. 버스들이 주차된 곳에 다시 모인 시간은 11시 40분. 올라갈 때 무심코 지나쳤는지 그 사이에 형성된 것인지 간이 판매소들이 보인다. 유난히 용머리를 조각한 나무지팡이들이 보여서 구경하고 있는데, 설명이 재미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용대가리’란다. 북쪽에서는 사람은 머리라 하지만 동물은 대가리라고 하고 그것이 비속어가 아니란다. 열 달러. 이제 관광 시작인데 짐이 될까 싶어 그냥 물러난다. 그보다도 단체사진 찍는다는 부름 때문에 서둘러 어딘가에 끼워 앉을 곳으로 행했다.


그렇게 조금은 싱겁게 오전관광이 끝나고 11첩반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점심상을 들러 가는 길이다. 정오를 지나며 버스는 다시 시내 쪽으로 들어오고, 그새 친근해진 안내원에게 이것저것 묻는 일행 덕에 들은풍월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산들이 바위산인 것은 10년 전 소나무 역병 때문에 그리 되었고 지금은 식목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며, 박연지구 쪽으로는 잣나무들이 그 나름대로 싱싱하다. 학교제도는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이 의무무료교육이고, 전문학교 2년과 대학 4~5년은 전체 학생이 국가장학생이란다. 결혼은 부모들의 중매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녀자는 24~6세, 남자는 26~8세에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문화어(표준어)에서 얼음보송이가 빠져 있는데 (우리 일행 중 국어학자의 말),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얼음보송이라 쓰고 있고, 아까 용대가리에서 대가리가 비속어가 아닌 것처럼 늙은이도 비속어가 아니라 한다. 오히려 아가씨, 아줌마가 비속어라 느껴진단다. 처녀는 처녀라 하고 결혼한 여자는 아주머니라 부른단다. 한편 남측 여행객들, 특히 처녀들의 옷차림새는 가끔 ‘나체화’라 싶어 눈살이 찌푸려진단다.


점심시간일 이 시간에도 도로근로사업에 부역 나온 사람들이 도로가에 쪼그리고 앉은 동작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멀리라서, 또 특별히 녀자라고 색깔 옷이나 짧은 치마를 입을 것도 아니니까 남녀의 구별이 안 된다. 소년학생궁전이 보이는데, 그것에선 방과 후 다과목 소조로 나뉘어 악기나 체육 등 소질을 연마하고 발표하곤 한단다. 그러는 동안 11첩(?)반상이 기다리고 있는 ‘통일관’에 도착한다. 화려한, 너무 화려해서 억지 같은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 안내원들의 안내를 바고 들어선 대 연회장. 둥근 식탁마다 10인조 11첩반상이 차려져 있다. 반짝이면서도 은근한 빛을 발하는 놋그릇에 뚜껑이 얌전히 덮여있는 10인의 11첩반상 차림을 보라! 버스에서 간단히 내려오면서 카메라를 놓쳤다. 서둘러 뛰어 갔지만 버스 문이 잠겼다니! 이런 곳에 누가 범한다고? 터덜거리며 돌아서는데 현대아산 안내원이 보인다. 그는 손쉽게 꽃혀 있는 열쇄를 돌려 버스 문을 열어준다. 배낭에서 카메라 찾는 시간이 미안하니 그냥 배낭 채 들고 내려온다. 다른 일행들은 벌써 놋그릇 뚜껑을 열고 시작하고 있었다. 열린 곳은? 일단 내 밥상을 뚜껑 덮여있는 모양으로 한 컷, 반찬그릇 열한 개와 밥그릇 국그릇 그리고 덤으로 나온 약식뚜껑까지 열자니 14개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펼쳐진 그림은 처음만 못했다. 대충 배운 대로 하더라도 김치류 셋, 장류 셋, 찌개 둘, 찜 하나, 전골 하나를 기본으로 두고서 비로소 생채, 숙채, 구이, 조림, 전, 마른반찬, 장과, 젓갈 회 또는 편육을 세어야 양반상 9첩이 될 터인데, 통일관의 점심상에서는 밥과 국을 제외한 모두를 세어서 11첩반상이란 것이 우선 셈이 달랐다. 왼쪽 줄은 숙주나물과 가지나물과 오이나물 등 숙채 일색이고, 앞줄의 묵무침과 가운데 어딘가의 계란찜 조각 그리고 감자와 고기의 조림, 다 마른 생선구이 조각 등으로는 7첩에도 미치지 못했고, 더구나 김치류라고는 향초를 담가서 다들 익숙해하지 않는 물김치 하나에 불과했다. 김치류가 11첩반상에 통틀어 물김치 하나라니! 오래 가물었다 하더니 김치감도 부족한가? 장난감 크기의 술잔에 부어주는 맑은 술이 아니었담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점심상이었다. 최고의 점심상을 이렇게 차려 내놓는다면……


점심으로 한 시간이 할당되었는지 1시 20분까지 승차하면 되고, 그 사이 길 아래로 남대문과 약간 언덕길 위 저만치에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주석의 금빛 동상이 서있다. 의례가 강요되거나 사진촬영이 금지되거나 하는 극단적 제약은 없었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동상이 일부분 가려지거나 잘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가 따랐다. (누군가는 사진 속의 동상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이유만으로 북측 출입소에서 그 사진을 삭제 당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이번 일핸 10대의 버스에서 내란 사람들은 그 동상께로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있는 것을 찍는 것이 뭐가 문제될까 싶어서, 북측안내원에게 나쁘지 않게 찍어달라고 할까 보다라고 혼잣말처럼 하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듣고 말렸다. 긁어 부스럼을 말라고! 그런데 북측안내원에게 사진 부탁할 생각은 왜 하게 되었냐면, 이미 남대문을 그가 찍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남대문이 멀리 보이는 길 아래엔 드문드문 양쪽 안내원이 서있었고, 그 내부에선 앞의 나무에까지 가려서 남대문이 보이질 않았고, 우리 측 안내원의 발끝에 내 발끝을 대고서 길이를 벌어서 애써 그걸 찍으려던 내 모습을 본 북측안내원이 자진해서 자신이 찍어다 준다고 여남 걸음 나가서 찍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아산 직원은 넘을 수 없는 그 ‘경계’를 북측안내원은 넘어도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은 그곳 소속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구한 남대문은 북안동에 있는 개성성 내성의 남문으로 국보급 유산이라 한다. 내성을 쌓았던 1391~1393년경에 함께 지은 것으로, 축대 위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고려사』에 보면 개성성을 쌓는데 목공 35만 명, 장정 24만 명, 기술자 8천 5백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정말 유명한 것은 한석봉의 친필로 쓰인 현판이라는데,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오후의 관광은 첫 코스가 선죽교이다.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 거리 선죽동에 있는 국보유적 159호라나. 이 돌다리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역사적 장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랑물 같은 노계천에 걸쳐있는 이 돌다리는 그 명만큼은 우선 크기에서 사뭇 작다. 길이 6.67m 정도는 홀딱 건너뛸 수 있는 느낌이고, 다리 난간의 너비 2.54m는 양팔을 벌려 품을 만하다. 원래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다는데, 고려 태조가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이 알려지지 않은 다리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1392년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해 「단심가」로 대답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보낸 조영규 등의 철퇴에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야 유명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름이 선죽교가 된 것은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것인데, 물론 대나무가 이 개성의 기후에서 지금 자라고 있을 리는 없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하여가」와 「단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어쨌거나 지금의 다리는 사람이 건널 수 없이 난간으로 둘러있는데, 이것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별교를 세워 보호한 때문이란다. 돌다리 동쪽에는 한석봉의 글씨로 ‘선죽교’라는 세 글자가 뚜렷한 비석이 있고, 돌다리 서쪽에는 비각 안에 1740년 영조의 어제어필의 포충비(褒忠碑)와 1872년 고종의 어제어필의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그 안에 암수 돌거북을 두고 (아들 얻기를 비는) 소원을 빌었다는 그 너머까지는 사람들의 무리를 뚫고 들어갈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늘에서 올려다본 은행나무는 유수한 세월을 증거하고 있었다. 매년 가을이면 노랗게 물이 들면서, 선죽교의 불그스레한 핏자국과 조화를 이루며.


다음에 들린 곳은 4차선 시멘트 길가 주차장에서 빙 돌아 올라간 숭양서원은 조선 중기 1573년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함께 정몽주의 충절과 서경덕의 학덕을 흠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곧 이어 ‘숭양(崧陽)’이라는 칭호를 내려받았고,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 되었다 한다. 후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견디어 낸 마흔 몇 개의 서원 중에 속한다 한다. 그런데 그 입구에는 개인지 원숭이인지가 부각된 1m 정육면체는 안내가 없었다. 일행들의 추측으로는 말에서 내리기위한 발판으로 쓰인 것일 거란다. 글쎄.


두시 반. 숭양서원을 떠나서 버스는 마지막 코스로 고려박물관으로 향한다. 고려박물관 터의 성균관은 부산동에 자리 잡아 고려 초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고쳐지은 교육기관으로, 1089년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1304년 국자감에 대성전과 기타 건물들을 세우며 국자감의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1310년 이름을 성균관으로 고쳤다. 지금의 건물은 1602~1610년경에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란다. 1호관부터 번호를 따라 박물관을 관람하는 데는 시간이 부족할 듯 하다. 여러 가지 놀라운 자료들 가운데도 적나라한 도표가 하나 있었다. 고려시대 「노비를 팔고 사는 값」이다. 어른 녀자종 (15세~50세)은 120필, 남자종은 100필에, 노령이나 어린 녀자종은 60필 50필이다. 녀자종이 값이 더 나가는 이유를 두고 양단으로 한복을 차려입고 하이힐을 신은 안내원은 녀자가 더 많은 노비를 생산할 수 있어서란다. 우리 일행은 아니나 군집한 사람들 중 누군가 남자 목소리가 킥킥거린다, 녀자는 밤낮으로 부리니까 그렇다고! 정말 웃을 일은 그게 아니었다. 그에 나란히 올라간 막대그라프에서 가장 높은 막대는 400필 값의 소 한 마리였다. 소만도 못한 노비의 인생이여. 누군가에게 어떤 형태로는 자유를 잠식당하고 산다면 인간은 소만 못한 존재이리라!


이어지는 토기와 자기의 전시실도 볼 만 했다. 처녀청자나 총각청자 등의 자태는 물론 일반적으로 고려청자야 너무도 유명하지만, 토기의 경우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욱 놀라웠다.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우리 남한 땅에서 출토되어 진열되는 토기들의 모양과 너무 비슷한 때문이었다. 청동거울 등 철제문화도 인상적이었다. 개성은 일찍이 형성된 도시임이 틀림없었다. 간다라 미술의 청동불상이 모셔진 작은 전시실을 뒤로하고 나서니 야외로 통한다.


야외박물관은 문자 그대로 야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여준다. 눈에 먼저 띄는 것은 현화사 7층탑이다. 1020년에 지어졌다는 탑은 높이는 8.64m로 큰 편에 속한다. 탑신마다 불상과 연꽃을 조각했던 모양인데 조금은 훼손되었고, 기단부에 돌을 마치 벽돌처럼 쌓은 것이 특이하다. 상대적으로 낮은 흥국사탑도 눈에 들어온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탑은 불일사 5층탑이다. 광종이 그의 모후를 위해 951년에 보봉산 기슭에 지었다는 불일사에 세워진 것이나, 1960년에 야외박물관으로 옮겼나보다. 나중에 붙여 올려 조금 어색한 상륜부를 제외하고도 높이는 7.94m라는데, 올려 바라보자니 참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이다. 역광이 되는 해가 들었다 났다 하는 날씨에 서둘러 정원을 돌아 나오는 곳에 개국사 돌등이 서있다. 개국사는 말 그대로 935년 고려 초에 세운 사찰로 고려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나 조선시대에 몰락했고, 높이 4m의 이 돌등은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아직 우표전시관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시간이 없다. 마지막 남은 관광코스. 북한의 풍물을 조금은 사가지고 가는 일이다. 큰 건물이 두 칸인데, 우선 들어간 곳의 입구에 뽕나무 버섯과 고사리 등 말린 식물을 파는 쪽이 붐빈다. 뽕나무 버섯 한 봉지에 24달러, 고사리는 8달러, 조각호두가 9달러 그리고 잣 한 봉지에 역시 9달러이다. 한국에 비해 싸고 안 싸고는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북한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사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루관광에서 허용된 달러는 200. 박연폭포에서 산 개성 모약과는 그저 양념에 불과하다. 노년의 건강챙기기가 주부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과제 아닌가.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챙기니까 양이 많아진다. 그러나 내심 진짜 표적이 있었다. 청심환 종류 하나. 연전에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북한산 물품판매소가 있었고, 거기서 구입한 청심환이 괜찮은 것 같았다. 양도 적고 다 합쳐 200달러 안에서 쓰기도 마땅하다. 우스운 말이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일 것 같다. 아서라, 남의 사정 봐주려다가 애 들어설라! - 어려서부터 들은 말인데 어려선 그 뜻도 몰랐다. 제 사정을 망각한 현명치 못한 철부지 행동에 대한 경계였으리라, 다소 성적인 버전으로.


아무튼 버스에 돌아와서는 미리 준비해간 편치는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더니 들기에 만만한 크기가 되었다. 오늘의 소비행태를 자아비판하자면 재산 상태에 비해 조금 많이 쓴 것 같지만 어쩌랴. 근년 들어 사적인 용도로 물품사기에 더욱 검소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상쇄가 될 듯 하다. 물론 아직도 멀었다. 슬쩍 스쳐간 텔레비전에서 프랑스라고 기억되는 젊은 여성들의 소비철학에 가슴이 뜨끔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자녀들에게 폐지로 만든 공책만 사주는 데도, 그 아이들이 “우리가 새 공책을 사면 나무들이 죽어서 종이가 되어야 되잖아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 젊은 어머니는 “속옷만 빼고는” 새 옷을 사지 않는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있었는데…….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들 시간이 없이 버스는 덜컹거리며 시가지를 지난다. 멀리에서 아이들의 하교시간인지 한 무리가 걸어 나오고 있다. 거무스레한 복장들에 검붉은 스카프들만 눈에 띄게 펄럭인다. 아이들은 목에 나라를 걸고 다닌다. 지나는 사람들도 아침보다 더 늘었다. 운동장으로 보이던 곳에 축구하는 아이들과 곧 이어 다른 운동장엔 네트를 중심으로 갈라서서 배드민턴 연습에 집중하고 있는 조금 더 큰 학생들이 보인다. 자유로운 놀이는 절대로 아닌 것이, 놀이의 낄낄대는 짓궂음이 아닌 훈련의 진지함이 하늘까지 굳게 하는 듯 했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저무는 해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님 내 선입견이 문제였는지.


‘식료품상점’, ‘과실남새상점’, ‘전기기구수리’ 등 상호가 눈에 띄는데, 그것도 독특하다. ‘닭곰집’ 같은 독특한 표현 때문이 아니라 도무지 상호에 고유명사가 없다. 평화식품점이나 개성식품점이 아니라, 그냥 식료품상점인 것이다. 아 하나의 변형이 있었다. ‘결혼식 사진관’과 ‘천연색 예술사진’. 이 두 사진관 간판은 나를 안심시켰다. 사람들은 적어도 사진을 잘 찍고 살구나. 추억해야할 일들이 생긴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판자에 쓰인 ‘종합편의’나 ‘아동백화점’ 입구에도 사실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주택 지구에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던 내 눈 탓일까? 작은 글씨가 안보이면 급한 김에 돋보기를 두 개 겹쳐서도 보는 내 눈이 눈이랴! 집들의 하얀 칠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회색의 그림자 인상과 미동도 없어 보이는 정적의 흔적은 내 눈 탓이다. 그래서 렌즈가 중요하다. 특히 미지의 미래의 인생을 분홍빛으로 보는 긍정적인 사람과 불안의 잿빛으로 느끼는 못난이들의 차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이 회색 안경의 개성방문기가 순 거짓이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개성공단 내 지역을 버스를 탄 채 설명과 함께 돌아본 우리는 로만손시계나 GS용인전자 등 우리가 흔히 보던 간판의 공장에 가슴이 찡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양쪽 동포들의 땀방울이 어느 공장에서보다 의미있게 다가오면서. 수박 겉핥기라도 개성공단을 돌아보는 것은 좋았다. 어쨌거나 버스는 다시 군사분계선으로 향하고, 그 동안 친숙해진 북쪽 안내원과 우리 측 순수한 한 일행 사이에 주체사상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게 되자 깜짝 놀랐다. 문제가 되어 서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하나다!」라는 대형 플래카드에 대해서인지 - 그건 올 때나 갈 때나 아주 크게 보이는 길목에 걸어두고 있었다 - 동포로서 뭐 좋다! 라는 응수 한 마디를 빌미로, 안내원은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이라고 늦게나마 자신의 할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평소에 명민한 분이라 곧 다른 화두로 빠져나왔지만, 아무튼 우리 일행이 어떤 계급(?)인줄 알면서도 기어코 주체사상을 입에 담은 안내원. 아마 그의 하루 자아비판은 조금 가벼워 졌으리라!


북측 안내원들이 처음 승차 때와 같이 예의를 갖춰 하차하고 나자 곧 버스 기사가 한 마디 했다. 오늘의 안내원은 거짓말 별로 안 했다고. 버스의 일행 구성을 보아서 “거짓말로” 막 해댈 때도 있단다. 그것만 보아도 그렇다. 안내원은 안내원대로 보조임무가 있을 것이다. 체제선전은 모든 체제의 주요사업 중 하나이니까.


우스운 에피소드. 북측 안내원들을 따라 버스기사가 내리지 않았을 때, 그 주체사상 단어에 노출된 일행은 왜 기사님은 왜 안 내리는 거냐고 되물어서 우리 모두를 까르르 웃겼다. 다시 한번 순수성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런 날 북측 남측 구별에 대해 무방비? 그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심오한 학문을 하는 분인데.


마이크를 다시 잡은 현대아산 측 안내로는 문상-개성간 철도 운항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었다. 수송해야할 물자가 있건 없건 날마다 정한 시간에 열차를 운행한단다, 철길이 끊기지 말라고, 조금 씩 조금 씩 더 길게 이어질 꿈을 담아서.


비무장지대 안의 풍경은 교과서처럼 판에 박힌 그대로였다. 다만 이번에는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하얗게 반짝이는 바라크 판문점과 그 판문점을 두고 대치한 높은 깃대들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얼핏 보아도 더 높은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쪽이 북이다. 귀성동, 일명 평화의 마을에 자리한 붉은 인공기의 높이는 자그마치 165m에 달한다고 한다. 자유의 마을 대성동에 위치한 태극기의 높이는 100m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 측은 그럼 그렇게 높은 깃발을 달 능력이 안 되는가? 설명에 따르면 첨엔 며칠 자고나면 북쪽에서 또 며칠 자고나면 남쪽에서 깃발 높이 올리기 경주가 벌어지곤 했더란다. 그것을 어느 날 우리 측에서 멈춘 것이 이 상황이란다. 웃지 못 할 사실 하나 더. 그렇게 높은 인공기를 게양하고 내리는 작업에 북측 인원은 얼마나 동원이 되어야 할까? 태극기 게양에 필요한 인원이 2명이면…… 그러나 아무도 맞추지 못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그 열배인 스무 명도 아닌 사십 명이 아침 조석으로 인공기 게양에 동원된단다. 하늘의 압력이 그런 것인가? 믿지 못할 숫자이지만 가장 믿음직한 소식통이 아닌가.


마지막 북측과의 접촉은 왼쪽으로 보이는 언덕의 인민군 초소이다. 초소로 들어가려는 걸음걸이의 군인을 만나 버스 속 사람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었지만 허무한 짝사랑. 노무현 대통령이 도보로 건너갔던 샛노란 횡단선. 그것은 페인트가 태워진 채 거무스름한 선으로 변해있다. 곧 이어 반가운 파주시 이정표가 다가온다. 5시 정각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시간이다. 실제로는 북측 용어로 통행검사소 - 우리 측 용어로 남북한출입소를 통과하면서 개성방문은 끝이 나는가 보다.


입경장에서는 카메라를 소지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줄을 구분한다. 짐들을 X레이로 투사하는 과정을 똑 같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카메라들을 북측 요원이 받아들고서 하나하나 촬영된 화면을 검사했다. 내 디카도 마찬가지였지만, 다행히 걸린 것은 없었다. 귀 달린 도기병 등 몇 가지 박물관 내부를 찍은 사진이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 첨엔 모르고 몇 장을 찍었는데, 실내는 촬영금지라 해서 그만두었었다. 그 보다는 아무렇게나 잡동사니 속에 밀어 넣어둔 박연폭포의 돌멩이 하나가 X레이에 걸리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개성모약과보다도 우황청심환보다도 내심 기다릴 개성돌멩이. 은행잎과 다른 낙엽들 집으면서 하나 겨우 집어든 못난 돌멩이. 일행 중에는 분명 반입금지 품목에 적힌 기준에 맞는데도 아무튼 반입불가 품목으로 분류되어 압류되었던 소니SR12 카메라도, 종교 관련 물품이라 해서 자진해서 맡긴 묵주도 당연히 돌려받는다. 종교도 정치만큼 위력을 갖는다? 사실 우연히 선물 받은 물건에라도 십자가 등이 새겨져 있음 곤란하다는 처음 안내에 많이 마음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서울 쪽으로의 검역은 마른 고사리 등 식물과 관련된 물품들이 해당된다고 한다. 물론 거의 형식적이다. 한 두 시간 전에 산 물건을 한 두 시간 후에 압류하고서야 개성관광이 유지되겠는가. 어둑한 사무소를 빠져나온 우리들은 다시 임진각행 셔틀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 걸터앉을 데도 없이 서성거리는 몇 분, 몇 사람과 말을 섞게 되니 조금 후회스럽게 된다. 주거니 받거니, 농담조의 언사들이 다만 상대가 아니라는 자괴감 때문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물론 얼굴은 사회적 표정을 띠고 있었기를 희망한다. 부질없더라도.


정말 해괴한 그 꿈은 다만 일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북한을 다녀온다는 예고에 불과했을까? 형제들을 다 모아 월북을 해서는 난민촌의 덜 지은 창고 같은 시멘트 반쪽 건물에 배당되었데…… 방도 아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샘가와도 같은 축축한 바닥에 어정어정 안고 선 우리 형제들. 하이힐로 종종거리며 뒤따라오던 한 녀석이 반짝이는 지갑을 팔에 낀 채 산들거리는 원피스 치마 자락을 날리며 뒷걸음질을 한다. “언니. 난 안 되겠어. 난 이런 덴 못 살아…….” 나는 어쩜 그리 냉정하고 단호했을까? 그래, 이런 문제는 형제라 해도 강요 못하지, 각자가 결정 하는 거다. 그래 할 수 없다. 뭐 그런 짧음 랄로서 우리는 이별을 했다. (사실 우리는 연초에 오래 누워있던 그 아이와 영영 이별을 한 터였다.) 문제는 꿈이 거기서 중단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앉아있는 난민촌 같은 숙소 저 앞에 검붉은 벽돌로 육중하면서도 높은 아파트 건물이 여러 동 있다. 그런데 책임자인지 담당자인지가 와서 하는 말이, 저 고층 아파트 위에 꼭 저만한 높이의 고층아파트를 또 올릴 계획인데, 그것이 완공되면 우리가 그리고 배치되는 것이라고. 물론 무엇인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도 없이 정지된 그림인데. 성냥갑 위에 또 하나 이런 성냥갑을 얹어서? 그러한 공법을 물론 아는 바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시멘트바닥의 냉기는 그때 계정이 무엇이었던 간에 황량함 그 자체이고 비전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월북을 감행했는가? 전후 사정은 모르나, 순간 나에게 깊은 후회가 일었다. 평상시에 스스로 기회주의적인 면이 없다 믿었던 내가 - 꿈에서도 그랬다 - 다른 형제들에 대한 책임의식까지 발동하여 넌지시 생각을 바꿨다. 사실 이 엄청난 행보를 학교에서 아직 모른다. 그러니 우리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어때? 어떻게 결정할까? 너희들 결정하는 대로……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 꿈이라지만 너무했다. 형제들이 온통 함께 월북을 했는데 재직 학교에서 그걸 여태 모른다? 다시 돌아 올 수가 있다?


참 꿈은 꿈이다. 그리고 꿈처럼 나는 다시 돌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버스 내부는 활기에 넘쳤다 서태지가 어떻게 데려왔는지 로열필하모니와 협연하는 온 시간 내내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한 소설의 노래도 따라 부를 수도 없었던 내 목이 잠긴 건 버스 안의 열기와 실제 에어컨의 냉기가 범벅되어 내 신경을 자극한 탓이리라. 나는 어떤 온도에 반응해야 하는가를 몰라서 저항력을 잃고 무너진다. 나는 목소리를 잃고 그 대신 지금 글을 쓴다. 꿈만 같은 개성 방문기를. 그림자의 도시 개성을 떠올리며.

 


소설시대 15호, 2009. 3월 186-2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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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08. 11. 20. 23:30

 

이 있었던 것

                                                     맛, 멋, 그리고 향기』2008 (이화에세이)

 

 

영화 《파니 핑크》의 주인공 파니는 “눈이 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눈 말이다. 눈이 있었던 것은 살아있었던 것이고, 그러니까 파니는 살아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 살아 있었던 것(과거완료)은 지금은 죽은 것(현재완료)을 의미한다. 파니는 살아있었다가 죽은 것을 먹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을 먹지 않는다.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파니 뿐이 아니다. 가녀린 체구로 강인한 여러 일들을 해내는 동료가 있는데, 상대적으로 젊긴 하지만 그 무궁한 에너지가 순 식물성에서 나온다.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는 엄마노릇을 잘 해내면서도, 고기를 멀리 하기 몇 년, 꾀나 공격적이었을 더 젊은 날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 지금의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마르고 부드럽고. 얼핏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지만, 바람처럼 가볍게 걷고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할 일은 누구보다도 야무지다. 어디에서 힘이 나올까. 아니 잡식성 동료들의 저녁자리에 끼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디에서 인내가 나올까.


*


2008년, 운하와 쇠고기로 들끓는 여름을 보낸다. 운하반대모임에 서명을 하고보니 그 동료가 적극적이었다. 원래 환경론자인 것은 알았다. “인간은 자연을 너무나 학대하고 있어요. 《불편한 진실》 보셨나요? 지구온난화 때문에 근년 들어 빙하며 킬리만자로나 알프스 만년설이 엄청 녹아내리죠. 온난화란 게 말뿐 아니라 그 진행속도가 심각해요. 인간의 소비행태가 CO₂를 증가시켜 북극 빙하를 1년에 1% 정도 녹여내는데, 반세기 안에 플로리다, 상하이 등 해변도시들 40% 이상이 물에 잠기고, 네덜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우린 사실 날마다 샤워도 해선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우린 이 지구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그런 판에 우리나라에선 잘 있는 물길 놔두고 인공운하라니. 그렇게 확실히 발언하는 그녀는 순 식물성 체력만으로도 어렵고 무거운 일들에 거뜬하다. 운하문제와 쇠고기수입문제의 경중은 나름대로 판단한 것 같았다. 자신이 쇠고기와 관련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총론과 각론의 관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운하문제에 지론을 폈다. 우리의 4대강을 인위적으로 손질한다는 한반도 운하계획은 잘 될 이유보다도 안 될 이유가 너무나 많다고. 청계천 공사도 말이 “복원”이었지 자연하천이 아닌 인위적 이벤트 하천으로 개조됨으로써 원래의 목적이던 청계천 복원이 영원히 무산된 것 아니냐고. 지금의 청계천이 잠시 위락시설이 될지는 모르지만 낙동강이나 섬진강이 갖는 자연에 비교가 되느냐고. 혹여 대운하의 경제적 효율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자락이 살아있는 한반도를 지켜온 우리 삶과의 의미관계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수 억 년의 지형형성 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4대강과 샛강들이 운하로 인해서 수리체계가 단절된다면 강유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형교란과 배수기능의 교란 그리고 생태교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고.


나는 사실 운하반대 서명을 하면서도 이론적 배경은 없었다. 놀이시설처럼 도구로 추락한 청계천과, 그것도 모범이라고 본을 따서 우리 고향에서도 유치찬란한 하천 외부정비에 혈세를 퍼붓는 행정에 놀라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 가녀린 동료의 실팍한 이론과 행동을 보고서야 날이 선 지식인의 비판의식에 감탄하면서, 그녀의 특별한 음식습관에 관심이 갔다. 주지육림에 빠져서는 명철한 사고를 정립하지 못하듯이, 이렇듯 명료한 사고방식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녀가 섭취하는 음식물과 생활습관이 큰 몫을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차 채식의 장점을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자칫 가난한 농민들이 밥과 김치를 주식으로 채식에 의존하고 부자양반들은 산해진미를 향유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류의 음식사를 보자면 채식은 유목문화에 이어 농경문화가 발달된 후에야 가능했던, 다시 말해서 한층 진화된 섭생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진화의 초기단계부터 정글의 법칙 속에서 육식을 했고, 구석기시대에는 채집수렵에 의존해야 했으니까, 채식 습관은 인류사에서 진화로서 나타난 것이다.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인간이 먹는다! 피가 살아 끓고 있는 생명체를 도살하는 잔혹행위, 그러한 잔혹행위를 일상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단말마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동물은 잔혹성을 심어놓는다. 잔혹성은 동물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동종인 인간 사이에 작용하여 작게는 드잡이와 싸움질, 크게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게 한다. 만물이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사고 또한 친자연적이 아닌 친인간적 사고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고의 틀에서 바라볼 때 친인간적이라는 것은 배타적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 주는 만큼만 자연에서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서 얻은 결론이다. 완전한 채식주의 - 그것이 비밀이었다. 그녀에게서 채식주의는 완벽한 수위다. 유제품마저 섭취대상에서 제외하는 것. 물론 그것은 심각한 불편을 야기한다. 하얀 밥을 지어놓고 그녀와 한 끼 밥을 먹으려던 계획도 무산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숟가락에 얹어 먹을 김치랑, 매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여린 고추무름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김치에는 젓갈류가 무름에는 멸치 몇 마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샐러드에 드레싱을 해놓았다가는 망한다. 계란 일부가 드레싱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마르고 왜소해지면서 정신이 강해지는 경우를 보통은 고행에서 본다. 그래서 속으로 그 작은 동료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내부에서 자연스러웠던 것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유년시절 샘가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죽은 “새”의 털을 뽑고 있던 것을 보았던 기억과, 별식으로 상에 오른 영계백숙을 그 기억 때문에 토해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실 유년시절의 고민은 무엇인가 뭉클한 그런 것을 씹어야하는 일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었던가.


어린이는 보다 더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그렇게 생각된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양을 고려한다고 해서 제 살과 비슷한 동물성 음식을 일부러 길들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원래 채식성 엄마를 두고도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잘한 일일까? 내 아이를 기를 즈음 나는 발언권이 별로 없는 엄마였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세뇌된 자신 없는 엄마였다. 다시 아이를 갖는다면 내가 어려웠던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호박 하나만 해도, 애호박과 농익은 호박 그리고 말린 호박…… 자연 속에 널려 있는 열매들과 푸성귀들에서 자연친화적 섭생의 보고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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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07. 12. 1. 01:55

 

멍난 옷

                                            내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2007 (이화에세이)

 

 

구멍이, 저기 이 옷에 구멍이 나버려서……


저물녘에 세탁소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초인종을 누르고서 어물거린다. 예고 없이 오가지 않는 것이 수년 간 이 세탁소와의 자연스런 일상인 터라 의아했다. 손에는 종이 가방을 꼬옥 움켜쥐고 있다. 부뚜막에는 국이 얹어져 있어서 나는 조금 성가셨다. 더듬거리는 말로는 옷에 아예 구멍이 나서 못쓰게 되었다는 말이고, 그 때서야 꺼낸 옷은 내 하얀 블라우스다.


그제야 감이 잡히면서 난감해졌다.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정도는 세탁소에 보내지 않은 내가 하필 처음 보는 천이라서 드라이를 맡겼던 옷이다. 면섬유인줄 알고 샀는데, 그것도 상황 때문에 어쩌다 ‘비싼’ 옷 집에서 구입한 것인데, 잘 보니 순면이 아니라 뭔가가 코팅되어 재킷 대용으로도 될까 싶은, 아무튼 얼른 보아도 복잡한 천이라서 자신이 없어 세탁소에 보낸 것이다.


여자는 계속 중얼거렸다. 다른 집 와이셔츠들 다리고 나서 같은 것인 줄 알고 다리렸는데, 다리미 대자마자 눌어가지고 그만. 보니까 새 옷 같아서…… 대신 사보려고…… 그래서 텍에 붙은 전화번호를 돌렸는데. 그런데 폐업이라니까……


처음 빨아야 했던 블라우스가 어찌하여 폐업이 된 상표인가의 내력은 좀 그렇다. 단벌을 샀기 때문에 적당히 맞춰 입기도 그랬고, 또 일터에 나다니는 경우엔 모양만 갖춘 단출한 옷들을 입기 때문에 구입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선뜻 입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몇 년 사이 폐업이라니 의아했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올 봄에는 아예 누렇게 헌 옷이 되는가 싶어서 몇 번 살짝 입은 것이다.


눋다 못해 구멍이 뻥 뚫려버린 옷을 받아들고 보니 짜증이 난다. 그러기에 과하게 비싼 옷은 내 것이 아니로구나! 부엌 쪽에서는 국물 냄새가 진동한다. 끓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럼 불이라도 줄여야 하는데……. 가만, 교양 있게 굴자. 이까짓 블라우스 하나가 뭔가. 나에게나 비싼 옷이지, 남편의 와이셔츠들을 줄줄이 세탁소에 보내는 여자들의 옷들에 견주면 이게 대술까. 기껏 블라우스는 블라우스지. 진정하자, 진정 해. 2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에서 이깟 일로 속보이면 되나…….


제가 지금 얼떨떨하네요. 일단 주세요, 주고 가세요. 불에 뭘 얹어 놓았고…… 좀 생각해볼게요.


다른 것으로 사시기라도 하라고……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요. 뭘 어쩌겠어요. 일단 주고 가시라니까요.


빼앗다시피 옷을 들여오고 여자를 내몰았지만 마음은 양편으로 무겁다.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비싼 블라우스를 망친 내가 밉고, 저자세로 굽실거리는 여자가 밉다. 국은 벌써 끓어 넘치고 있다. 넘친다, 넘친다…… 그때 생각이 났다. 내 그릇에 넘치는 복은 됫박을 넘치면 굴러버리는 콩되모양 넘치게 마련이다. 이건 내 옷이 아니다. 저 여자는 하필 나 때문에 저자세가 되었다. 평생 해온 세탁 보조가 느닷없이 엉뚱한 실수를 한 건 보조 탓이 아니라 옷 주인 탓이다. 그러다 짜증이 일면 또 다른 이유를 댄다. 그런 것 때문에 옹졸함을 보인다면 자신이 짜잔해져서 안 된다. 애써 좋은 마음으로 생각하려니 그런대로 별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세탁소여자의 처지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명에서 궂은 역할을 내가 아니라 그 여자가 맡아 간 것이다.


*


엄마, 제가 꼭 S.대학을 들어가게 되면 우리나라 누군가 한 사람은 S.대학에 못 가게 되는 거네요! 큰 아이가 중 3 적에 했던 말이다. ― 아니 뭐, 숫자로 따지면 그렇기는 하다만, 그럼 넌 그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S.대학을 갈 수 있어도 포기해야 된다 그 말? ― 아니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 너 그렇게 이타적인 건 좋다만, 매사를 그렇게 살자면 무진장 힘이 들게다. ― 엄마, 그게요, 이 세상에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을 드물걸요. 이타적 행동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이기적인 셈이지요 뭐.


기술시간의 숙제라나? 나무판자로 작은 책꽂이를 완성해 가는 숙제를 하느라 페이퍼 질에 팔려있던 아이는 대충 해가라는 이 어미의 말에 웃음기를 띠고 정색했다. 누가 알아요, 또 목수를 해먹고 살아야 될지도 모르니 미리 잘 배워둬야지요! 그것은 아이의 상투어였다. 누가 알아요, 또 양복장이를 해야 될지도 모르니 가위질도 잘 해야지요! 누가 알아요, 또……


아이들은 대강 물렁하게 자랐다. 남을 때리고 들어오면 나쁜 사람이고, 남에게 얻어맞고 오면 바보다! 나쁜 사람과 바보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형제간이라고 다툴 수도 없었겠다. 그래 겉보기엔 별 탈 없이 자랐다. 속으론 그렇게 한 말을 지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그런 걸 꼭 마음에 담아두어서라기 보다는 천성이 좀 무를 것이다. 해서 특별히 똑똑하게 자라진 못했지만, 이기적, 투쟁적으로 자라진 않았다. 어미인 내가 늙어간다고 자제심을 잃고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선 안 된다. 애들 보기 민망할 일이다.


*


세탁소 아주머니의 당황함에 빨리 면죄부를 주지 못하고 덩달아 곤혹스러워했던 몇 분간이 부끄러워진다. 서둘러 싱크대 아래 여닫이문을 열어본다. 거기 과일가게 전화 옆에 세탁소 전화 스티커가 붙어있다. 저 201홉니다. 지금 막……. ― 아 예……. 저쪽은 말을 잇지 못한다. 뭔가 호령을 기다리는 듯 숨마저 죽인다. 저, 그 옷 일 잊어버리시라고요. 생각 말고 편안히 주무세요. 그냥 걱정 마시라고요. ― 그래도 …….


아예 말을 잇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되풀이해서 걱정 말라고 말하고 나니까 내 맘이 비로소 편했다. 그런 일은 십여 분을 애탈 일이 아니다. 집에 처음 왔을 때 선뜻 걱정 말라 말하지 못한 내가 옹졸했다. 배웠다는 여자가 치졸했다. 다음 세상에 세탁소여자로 태어나서 다림질을 잘 못해서 누군가의 문간에서 고개를 숙이는 벌을 받을 일이다.


사실 누구라도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내 경우엔 이제 몇 번 입지 않은 새 옷은 오래 입어 내게 친숙한 그저 그런 옷보다 오히려 덜 아깝다. 작은 장신구 하나라도, 장신구라면 거창하지만, 실오라기로 짠 팔찌가 내게 소중한 만큼 진주귀걸이가 귀하지는 않다. 둘 다 각각 여행 기념으로 샀던 소품이긴 하지만, 특히 실오라기 팔찌는 해변의 포장집에서 산 싸구려 중에 싸구려다. 하지만 그 짙푸른 바닷물을 기억하며, 소금기 젖은 손과 입으로 ‘겨자’가 영어로 생각이 나질 않아서 순간 ‘섬씽 옐로’를 달라고 해서 핫도그를 사먹던 일을 추억한다. 나중에 특급호텔의 비치로비에서 마신 알 수 없는 음료와는 또 다른 맛을. 바가지나 쓰는 관광객이 아니라는 자존심과 굳이 핫도그를 들고 청승을 떠는 합리성의 속내에 대한 한심을.  


멀쩡한 블라우스가 못쓰게 되었지만 미련은 없다. 아무런 추억하나 없는 헝겊의 모임. 내가 좋아하는 연한 청록색의 한 줄 장식이 조금 아깝기는 하다. 소매 부분에 구멍이 났다면 반팔로 자르기라도 하지 싶다. 하지만 등 한 쪽이 아기 손 크기만큼이나 눌어붙고 아예 손바닥만큼은 구멍이니, 이제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기회가 온 것 같다. 너절한 옷걸이들이나 삼층장 속을 뒤져서 쓰레기들을 분류해 낼 일이다.


고등학교 때 가정과 선생님 한 분이 3년 째 입지 않는 옷은 죄다 버리라고 하셨다. 20년 넘게 같은 곳에서 사는 나는 이사 때면 저절로 살림이 정리되는 기회도 드물었다. 그러다보니 데이트 때 받은 스카프, 청혼 무렵 받은 머플러, 출장 다녀올 때 선물해준 핸드백들…… 30년에 몇 번 썼을까 말까 하는 소품들을 그냥 넣어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선물한 것들은 더욱 못 버린다. 유치원 때 만들어준 목걸이, 처음으로 접어준 여러 마리 종이학, 머리핀 세트, 손수건, 향수…… 손수건은 잃어버릴까 쓰지도 않고 보관하고, 향수는 빈 병이 되어도 포장지까지 간직한다. 합리적인 눈으로 보자면 포장지 정도는 이제는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아이들이란 성장하여 갈수록 (정신적으로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 내가 꼭 그랬으니까 ―, 작은 추억거리는 눈물겹게 귀하다. 이제는 여기저기 쌓이는 사진들까지, 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내게는 그렇게나 소중한 것들로 넘친다. 어떤 우아한 옷을, 훌륭한 장신구를 걸쳐도 더 이상은 멋이 나올 수 없는 몸에게 이제 어떤 물건도 소중치 않다. 몸을 위한 물건들보다는 맘을 위한 추억들이 귀하다. 구멍 난 옷을 버려야 하듯이, 옷가지들 등속은 좀 솎아 내야겠다. 물건들이 비워진 자리에 더 소중한 추억들이 들어올 수 있게시리. 길어 내도 길어 내도 줄지 않는 샘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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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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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06. 12. 3. 20:43

 

내적 자유

                                                                                    『 만남』2006 (이화에세이)

 

 

 

“자유로” -

 이것이 올해의 에세이 주제로 추천된 단어이다. 그 동안의 특정 주제 “모교” 또는 “어머니” 등에 비해, 자유로운 주제에 대해서 첫 순간 자유를 느낀다. 자유는 사전적인 의미로,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피상적으로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나 자유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권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자유선거도 하고, 자유언론을 누린다. 자유교육을 받았고, 자유연애를 통한 자유결혼에 이르렀으니 사적으로도 자유로워 마땅하다. 나는 내적 자유에 따라 글을 시작하면 된다.


 

그럼 나의 내적인 자유 지수는 어떠한가. ‘정신이나 마음으로 누리는 자유’를 말하자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다. 예컨대 국공립학교의 교원은 학문연구와 강의에서 원칙적으로 자유롭다. 정치범 혹은 파렴치범이 아닌 다음에야 퇴출될 일이 없으니까. 사적으로도 느긋한 가족 구성원들 덕택에 자유를 제한당할 일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무엇인가가 나를 옥죈다. 조금 더 많이 연구하고, 조금 더 잘 가르치고, 조금 더 신망을 얻고, 조금 더 사랑받기 위해서 부단히 내 자유를 감춘다. 쉬고 싶은, 잠자리에 들고 싶은 유혹마저 뿌리치면서 책상에 앉아 있게 되지만, 그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다. 누가 꼭 그만큼을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탈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일탈을 꿈꾸지만, 꿈은 늘 추상적인 안개에 다름 아니다. 인간관계의 역할강제에서 거의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것 또한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다. 자유의 대단한 능력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 목욕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오랜만의 목욕 준비에 빠진 것이 많기도 하고, 또 이메일만 보고 가려다가 혹시나 학내문서까지 체크를 하려니 여러 번 들락날락 하다가 정말 집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면 큰길이다. 벌써 골목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친다. 그때 손 안에 진동이 온다. 마지막 순간에 집어 들고 나오느라 전화기가 아직 손 안에 있었나 보다. 아차, 어제 이맘때 출근길에 받았던, 같은 이의 전화다. 두어 번 만난 소설가로, 누군가의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물었는데,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저장된 때문에 말해주기가 불가능했었다. 저녁에 전화해 주기로 했었는데…….

“아 네에, 안녕하세요. 저 오늘은 마침 집입니다.”

거짓말이 술술 나오다니 스스로 놀란다. 순전히 답전화를 하지 못했던 미안함 때문이다.

“저 지금 컴퓨터를 켜놓지 않아서요, 제가 지금 열어 보고 곧 전화 드릴게요.”

이 말은 참말이다. 거짓말에 근거한 참말.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의 발걸음으로 집안으로 쫒아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최근 들어 작동이 늦어진 컴퓨터가 안타깝다. 저쪽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으레 전화 담당은 나지만, 마음이 급한 김에 그냥 있어 본다. 남편의 목소리가 받는다. 이쪽에서는 누님에게 느린 위로의 변이다. 누님에게 단 하나 혈육이 미국에서 다니러 왔다가 다시 떠난 하루 이틀째 시간이었다. 이야기 끝에 나를 찾으시나 보다.

“집사람? 목욕을 가는가 싶던데요…….”

나로서는 그냥 숨죽이고 이 급한 일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다. 거실 전화에 신경을 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바보는 손을 번쩍 들고 거실로 나간다.

“저 여기 있어요, 아직 안 갔어요.”

무슨 자랑인가.

“아니 여태 안 나갔소?”

그러고서 달려가 전화를 받으니, 딸이 미국 제자리에 도착할 시간이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없으니, 그쪽에 전화를 해보라는 당부이시다.

“제 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으니, 본원에다 전화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꼬부랑말을 알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자네가 좀…….”

“예, 예, 그런데 제가 지금 급히 하던 일이 있으니 잠시 후 다시 전화 드릴게요.”

사실 본원의 전화번호를 내가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여차여차해서 도착시간이 정확하게 언제쯤인가도 미리 알고서 전화를 해야 하니.

그러고서 서재로 달려와 컴퓨터에서 전화와 이메일주소를 찾아서 답전화를 한다. 내 급한 사정과 팔순 노인네의 더 급한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녀에게, 가능하면 바쁜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 축하 말까지를 잊지 않는다. 작가가 책을 내는 일을 산고에 비하면 산모에게 모독이 될까? 어쨌거나 축하를 받아 마땅한 그녀였으니까.

그러고서 다시 누님에게서 미국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뇌의 코드를 얼른 바꾸고 혀를 꼬부려서 여전히 부자연스런 통화를 시도한다. “프롬 코리어”라는 키워드에 금방 느리고 똑똑해지는 친절한 상대 덕에, 누님의 외동딸이 “아직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지금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상황을 듣고 전해드릴 수 있게 되기까지. 숨을 적게 쉬면서 서둘렀지만, 목욕바구니를 들고 회항을 한 시점에서부터 쉬이 2,30분이 지나갔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던 이마에 어느새 미세한 땀이 배어나 있다. 이 땀만 아니라면, 그냥 바구니를 풀고 싶다. 다시 일어서서 대문을 나가거나 아니면 주저앉거나, 이 작은 망설임에 갑자기 자유의지가 멍해진다. 어느 쪽을 내가 원하는가.


살아간다는 것은 크고 작은 갈림길의 순간순간의 합계이다. 가도 안 가도 좋을 목욕이었으니 가도 안 가도 괜찮지만, 가다가 핸드폰에 돌아온 일, 와서도 그냥 있으면 없는 줄 알 것을 있다고 설쳐서 기어코 집 전화를 받은 일, 그런 순간의 선택이 하루아침을 숨차게 만들었다. 길에 서서 집이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집으로 내달려야 했고, 그 3,4분의 속도를 낸 것만으로 내 심장은 한참을 쉬기를 주장한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 ― 그 이후로는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자유의지가 작용한다고 믿는다. 필요한 일도 하지만 괜스런 일도 하고, 잘한 선택도 있지만 후회스런 경우도 많다.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면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더구나 후회스런 경우들은 꼭 기억에 남아서 다음의 선택들을 무겁게 하고, 그 때문에 또 자유라는 이름으로 감정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 하지 않아야 했던,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하지 않았던, 했어야 했던 어떤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그날 아침의 혼란스럽지만 나름대로 친절한 일들은 어쩌면 과잉이었다. 가던 길을 돌아와서까지 전화번호를 그 시간에 꼭 알려주어야 할 만큼 급박한 이유는 없었고, 시누의의 전화를 꼭 그 순간 자청해서 받을 일도 아니었다. 누님의 외동딸은 한 시간 남짓 지나 도착했다는 전화가 온 모양이다. 그럴 걸,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며,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줄로 알고 산다. 그러니까 그 과잉은 옛날에 했어야 했던, 그러나 하지 않았던 어떤 일에 대한 평생의 보상 심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리라.


과거의 시간들이 기억으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현재의 시간에 자유의 공간이 줄어든다. 미래의 시간이 기대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그 또한 자유의 공간을 줄인다. 과거 때문에도 미래 때문에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 존재가 여기에 있다. 나의 내적 자유여 ― 자판 위를 열에 들떠 떠도는 열 손가락들은 한 조각 자유를 토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이름 석자의 피복 속에서 자유를 꾸며대고 있을까?

그렇다고 자유의지대로 되는 일도 썩 없다. 특히 창작의 경우, 그 노력과 고통만큼의 결과는 미지수다. 사람이 예술과 학문에서 완전한 독창적인 자유로 창작을 할 수는 없다던 에.테.아. 호프만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영감이란, 그 영감 속에서만이 창작이 가능한 법인데,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보다 높은 원칙의 영향”이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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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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