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20. 12. 27. 15:10

날마다 시작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 법정스님

 

 

날마다 시작이야, 은아, 다시 시작이다. 힘 내, 아자!

일곱 번째 시작이다. 대부분 그렇듯이 아파트다. 차에서 내려 12월의 매서운 바람을 느끼며 단지 내를 둘러본다. 전체적으로는 낡은 느낌이지만 바깥 인상이 깨끗한 편이다. 동과 호수를 확인하면서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안온한 기운이 돈다. 계단을 오르면 작은 대문이 기다리리라. 초인종을 누르면 어떤 사람들과 만날까. 오늘도 우리 집 대문을 나서기 전부터 스케줄을 확인했다. 내가 대단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그 반대, 일자리가 자주 바뀌고 또는 여럿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투잡은 아닌 것이, 한 가지 일인데 근무 시간과 일자리가 달라서다. 일자리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지금처럼 복지관 소속으로 재가방문요양을 맡으면 지 선생님이 되고, 요양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 지 여사님이 된다. 직업군의 이름은 요양보호사, 나는 요양보호사이다.

 

나를 설명해야 할까, 입을 열자면 아마도 그렇겠다. 지은이예요, 그렇게 내 이름을 말하면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개 조금 이상해한다. 어렸을 때는, 특히 학교에서는 꽤 성가셨다. 책가위에다 내 이름 지은이 석자를 쓰고 나서 책을 열어보면, 책마다 진짜 지은이가 있다는 사실에 나도 혼란스러웠다. 지금이야 유투브가 책들을 온통 삼켜버린 세상이라서 지은이가 어떤 뜻인지 아무도 별반 상관하지 않는다. 지은이라는 뜻으로 쓸 곳에도 언제부턴가는 저자나 작가라고 하니까 뭐. 물론 내 이름이 지은이인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도 영이와 순이 아래 또 낳은 딸을 은이라 이름 지었을 뿐으로, 내가 태어났을 1966년 당시에 우리 부모님이 지은이가 책이나 노랫말을 짓는 사람을 일컫는다는 것을 의식했을 턱이 없다. 자라면서 여전히 어린 내가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왜 농사짓는 사람은 지은이라 하지 않는가, 그런 정도였다. 밥 짓고, 옷 짓고, 약 짓고……, 여기저기 지은이가 더 많은데.

 

다시 오늘이다. 오늘 처음 방문하는 집에는 조금 어색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보통 때라면 우리 복지관의 과장이나 담당 복지사가 함께 방문하여 나를 소개해줄 것이다. 오늘은 이 집에 혼자 오게 되었다. 혼자 들어가서 자기소개를 한다? 오랜 직장생활을 해왔지만 그건 좀 쑥스럽다. 누군가 소개를 해주면 편하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이쪽은 지 아무개 선생님이세요! 어때요, 새 선생님 좋으시지요? 이제 날마다 댁을 방문해서 어르신을 도와드릴 거예요! - 지 선생님, 앞으로 어르신 잘 돌봐드리세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요양보호사를 절대로 아줌마라 부르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는 다짐도 시켜둔다.

그런데 오늘은 일이 꼬였다. 사회복지사 정 대리가 하필 연가를 낸 날이라서 차 과장이 동행키로 했었는데 그것도 틀린 것이다. 나는 벌써 출발해서 가고 있는데 전화가 떴다. 운전 중이라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어쩌나! 아무캐도 지 선생 혼자 가줘야 겠네여! 나 사고났어여. - 엥, 다친 거예요? - 아니, 아녀요. 살짝 인데 시끄럽네여. 미안해여, 그 집 오늘 꼭 가야 해여! 복지관을 나서며 차를 후진해 돌리려다가 화단 턱에 걸렸는데, 급히 뺀다는 것이 들어오던 작은 트럭과 스쳐서 실랑이가 벌어졌단다. 그렇다고 일주일 째 돌봄서비스가 끊긴 집이라서 미루기는 미안한 일이라고, 오늘 복지관에서 새 선생님이랑 방문한다고 알려놓았으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아무튼 그냥 혼자서 방문하랬다. 나 또한 이만한 일로 마음먹은 스케줄을 바꾸긴 싫었다. 자라서는 거의 꾸준히 직업을 가지고 살아온 나로서, 무엇이든 처음 하는 일이 한두 번이었을까. 이쯤은 약과다, 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대문 앞이다. 아파트는 어디나 역시 작은 문이다. 건물 중에서 가장 초라한 곳이기도 하다. 이 대문에는 교회나 성당 표시 대신, 입춘대길 그리고 또 하나 사자성어가 붙어있다. 입춘이 언제 적인데! 입춘은 보통 2월 4일이다. 한 해가 다 가서 낼모레면 동지고 다시 새해의 입춘이 다가올 시절인데 봄 여름 가을 지나도록 여태껏 입춘대길이란다. 이 새로 만날 어르신이 고리타분한 노인일까, 살짝 걱정이 올라온다. 그런데 아무튼 와버렸다. 초인종을 찾는다.

초인종으로 가르는 세상은 많이 다르다. 내가 일을 망치고 나온 여섯 번째 집이 눈에 선하다. 그 어르신은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재가장기요양급여를 받는, 곧 우리 요양보호사들의 돌봄을 받는 대상은 할아버지들 보다는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남자는 아내가 있을수록 여자는 남편이 없을수록 장수한다더니. 하긴 이 말도 참 우습다. 앞뒤가 이렇게 맞지 않는 말이면 창과 방패라는 모순인가. 신상정보를 요약하자면, 70대로 시영아파트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할머니 - 거기까지는 우리 복지관 담당에서는 흔한 조건이었다. 이처럼 보호자가 없는 경우도 흔하고, 어떠한 염려도 없었다. 그것보다 실은 신체적 조건이 문제다. 처음 소개받을 때 다행하게도 치매는 아니라 했다. 거동도 휠체어에 의존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전임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곧장 그만두곤 했다는 점이었다. 할머니인데 뭐 어떠랴, 그렇게 시작했는데 곧 심상치 않은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 일에 자신이 있는 편이다. 우선 간호사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정확히는 간호조무사다. 간호전문대에 합격을 해 놓고도 사정은 도저히 안 되고, 간호사는 되고 싶고. 나 같은 간호사 지망생은 간호학원을 거쳐서 간호조무사가 된다. 전문대를 마치고 간호사가 된다 해도 간호대학 졸업생과는 병원에서 처우가 다르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무엇보다 승진이 없다. 수술실에 오래 근무를 해봐도 마찬가지, 수간호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간호조무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소규모 개인병원에서 자잘한 온갖 일을 하거나, 큰 병원에 가면 평생 3교대 근무다. 그러다 보니 만 나이로 50이 되었을 때, 아니 그 전부터, 남편 말이, 50까지만 일하고 그 다음엔 좀 쉬고 살라 했었다.

남편을 만난 것은 1986년, 내 나이 스물한 살, 난생 처음으로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산부인과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때는 병원의 규모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작은 병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무과에 새로 직원이 왔는데, 이 조그만 병원에서는 원무과 직원이면 상관이었다. 더구나 임상병리를 겸하는 것을 알고는 살짝 존경스러웠다. 공식명칭으로 임상병리사이니까 그것도 간호조무사보다는 한 단계 위다. 게다가 첫눈에 그 야무진 인상에 믿음이 갔다. 곧 소문에 의하면 출근 전에 새벽에 가락시장에 가서 한 타임 일을 하고 온다고 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표정이나 동작에서는 지치거나 그런 기색도 1도 없었다. 날씬한 몸매도 근사했고, 가뿐한 걸음걸이도 멋있었다. 나이도 적당히 위로 보였다. 오빠라고 부르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괜히 설렜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생활력 때문에 나를 나의 미래를 걸어도 될 것이라는 신뢰감이 생겼다.

내가 생각하는 일등 남편감은 첫째도 생활력, 둘째도 생활력이 탁월해야 했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을 때, 순하디 순한 어머니는 물론 우리 형제들 모두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멍청한 몰골들이었다. 밥은 그냥 넉넉했었고, 한 말씀 하시던 아버지의 자리도 있었고, 무엇보다 남일면 은행리는 집성촌이었기에 그런대로 도움은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변화된 생활전선에서 강하지 못한 어머니는 농사를 다 내주었고, 당연히 소출은 확 줄었고, 우리에게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 이전에, 어머니가 우울한 얼굴로 어렵게 어렵게 진통제를 놓아드릴 즈음부터는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은 사라지고 없었다.

고향 청원에서도 남일면 쪽은 중등학교가 아예 없었다. 지금은 고향도 청주시가 되었지만, 당시로는 어렵사리 청주의 여고를 졸업한 나는 서울로 향했다. 낮에는 여러 가지 알바를 하면서 야간에는 간호전문대학 진학을 꿈꿨다. 나는 무엇보다 주사를 잘 놓고 싶었다. 아버지가 조금 더 살아계셨다면…… 기꺼이 주사를 놓아 드리고 싶었다. 만일 어머니가 아프시게 된다면 놀라지 않고 겁먹지 않고 주사를 잘 놓아 드리고 싶었다. 간호사는 희망사항이었을 뿐, 나의 현실은 불가능으로 점철되었다.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길은 까마득했다. 그렇다면 일단 간호학원에 다니자! 겁 없이 절친을 따라 미리 서울에 살고 있던 친구 언니만을 달랑 믿고 상경한 여자애로서는 일 년짜리 간호학원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교육비만 해도 엄청난데, 실습기간 중에도 학원비를 몽땅 내야 하다니! 무엇보다도 다섯 시 반이면 시작하는 수업시간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끝나는 알바가 있는가 말이다. 주말은 그래서 쉴 틈이 없이 일과를 짜서 일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간호보조사란 이름으로 병원에 근무하는 꿈을 이룬 때였다. 그 남자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푸른 신호등인 것 같았다.

그가 내 마음에 쏙 들어온 것은 그 사람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만 보니 그는 여리여리하고 나비같이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말 그대로 여자애 같은 여자애들 취향인 듯 했다. 카운터 김양의 뼈다귀 같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쳐다보면서 슬쩌슬쩍 말을 건네곤 했다. 자꾸 그쪽으로 귀를 쫑긋거리게 되는 내가 불쌍했다. 내 손을 내 몸을 살펴보았다. 나는 살랑거리는 맵시랑은 거리가 멀었다. 우선 나는 손도 크고 키도 컸다. 키가 크다고 해서 다 날씬한 것도 아닐 테고, 나는 아닌 쪽에 속했다. 식구들 대부분 크고 건장한 우리 집에선 누가 그리 몸매에 신경을 쓰고 그러지 않았었다. 이제 와서 어쩐다? 갑자기 다이어트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어느 세월에?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다. 벙어리 냉가슴인가 하면서 내가 속을 태우고 있을 때 어느 순간 그가 나를 보기 시작했더란다. 내가 무심코 명절에 고향에 다녀오면서 보따리에 날라 온 음식들을 병원에 가져가서 나누어 먹었을 때, 나중에 그의 말로는 그것이 가장 예뻤다고 했다. 아, 어머니 - 울 엄마는 애들이 집에 들르면 말 대신 무엇이든 싸주는 옛날 엄마였다. 하나 둘 집을 떠나 각 살림을 시작할 때도 묵묵히 보시기만 했고, 다니러 가도 특별히 반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손에는 꼭 무언가를 들려주셨다.

내가 예뻤다고? 예뻐? 이 여자 살림 잘 하겠다, 생각했을지. 하지만 그도 점치는 데는 틀렸다. 내가 알뜰주부들처럼 살림 예쁘게 하는 짓은 잘 못하니까. 하지만 크게는 그의 생각이 옳았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도 벌써 노후 준비하자는 그의 말을 신앙처럼 믿고 살 것을 알아챘으니까. 실제로 나는 소비라거나 하는 단어를 아예 몰랐고, 사치라거나 그런 욕구도 텅 비어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시퍼렇게 젊었던 첫 순간부터 노후를 향해서 살아왔다. 곧바로 신혼 때부터였다. 서둘지는 않았지만 곧 아이가 생겼고, 출산을 앞둔 설렘 속에는 걱정이 섞였다. 출산휴가를 석 달이나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넉넉한 원장님 덕택이었다. 하지만 받아놓은 날은 빨리도 닥쳤다. 어떻게 해, 어떻게 나가? - 은이 씨, 오늘보다는 내일이 중하지, 맘 강하게 먹어! - 그래도 6개월은 젖을 먹여야……. - 마찬가지야, 어차피 뗄 건데. 아기를 위해서 무엇이 현명한가 몰라서 그러나? 우린 빈손이야, 잊었어? 이렇게 미래를 기약해야 한다며 다독거리는 남편의 선택을 믿어야 했다. 사실 우리의 상황을 워딩 그대로 써보자면 이렇다.‘우린 양가에서 0원도 도움 받지 않았어요! 0원도!’지금에 와서 나는 거의 자랑스럽게 그리 말한다. 괜스레 떳떳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서러움의 기억을 얼굴에 달고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독하게 마음먹은 우리에게 맞벌이라는 단어는 호사 중에 호사였다. 투잡이라는 말도 싱겁디싱거운 보통의 단어였다. 그의 집안에는 아들들이 우리 집에는 딸들이 많은 것 빼고는 한 치도 다르지 않게 양쪽 집안의 형편이 비슷했다. 그의 형제자매들도 각자 알아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풍토였더란다. 이상한 평등이지만, 평등에는 불평이 따르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달려왔다. 지금에 와서는 3층 건물이 있고, 작은 아파트도 있고, 또 가까운 시골에 몇 백 평 밭이 딸린 농갓집이 있다. 나를 거절한 여섯 번째 할머니보다는 내 노후가 더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다.

 

아차, 막상 대문 앞에 서니 슬그머니 걱정이 인다. 이 집에 다녔던 요양보호사는 왜 그만두었다 했더라? 이 집의 펑크는 어르신이 낸 것이 아니라 우리 측에서 그만둔 경우라 했다. 그것도 갑자기. 얼핏 듣기로 장애아동돌봄으로 바꾸었다고 했는데, 이곳이 아주 만족스러운 환경이었으면 그만두었을 리가 없지 않았겠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뒷북처럼 이제야.

보통은 새로운 ‘자리’가 생기면 문자가 뜬다. 100명도 넘는, 120쯤이라던가, 우리 복지관 직원들에게 공동으로 단체문자가 뜬다. 간단히 띄운 조건을 보고 관심이 있으면 지원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 앞 근무자는 장애아동돌봄이 뜨자 그쪽으로 옮겼다 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정말 이 집에 문제는 없었을까? 전임자가 자발적으로 그만둔 것이 아무래도 걸린다. 실은 근무시간도 딱 들어맞지는 않아서 좀 그렇다. 이 집은 서비스를 1시 반에 시작해주기 원한다고 떴는데, 반시간 정도가 애매하다. 오전 일을 마치면 12시니까 1시 정도라야 간단한 점심과 이동시간을 따져서 알맞은 시간인 것이다. 거기다가 거리상으로 날마다의 기름 값을 고려해야 할 판에,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맞지 않는데 왜 덜컥 맡아보겠다고 나섰을까. 독거노인이 아니라 보호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것도 어떨지 모르겠다. 첫 방문에서 100% 성사는 아닐 수 있다. 조건을 따져보고, 정히 아니면 말 수도 있다. 지금처럼 오전만 일해도 월 60시간 조건은 채우니까 직장보험은 유지될 것이고.

초인종 보다 번호 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80대 어르신이라던데 번호 키를? 차 과장이 알려준 전화번호 끝자리로 키를 눌러 볼까? 아니다, 처음 방문인데 조신하게 초인종을 눌러야지. 어라, 초인종이 둘이다. 틀리지 않고 초인종을 누르고 싶다. 아직 일을 맡는다는 확정도 되지 않았으므로, 일이 되려면 초인종부터 제대로 누르고 싶다. 왜 초인종이 둘일까?

 

 

사실 내가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한지 4년이 되어 가는데, 바로 앞 여섯 번째에는 시작부터 터덕거렸었다. 초인종을 누른 순간부터 좋지 않았던 일이 마음에 걸린다. 그때는 정 대리랑 함께 갔었는데,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자 정 선생이 대문을 세게 두드렸다. 사실 정 선생으로서는 우리 요양보호사들이 바뀐다 해도 한 달에 두 번씩 관리 및 점검을 다니는 집이라서 크게 생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오메, 요 사람들, 대문을 아작 낼란가? 벤소도 지대로 못 가게 하네이. 근디 누구다냐, 요참에는? 이렇게 첫 만남의 순간부터 까칠하던 6번 어르신은 - 이렇게 불러도 되려나? 실명 보다는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 매사에 조금 심하긴 했다. 의심 많고 적대적인 것이 세상에서 인생에서 넉넉히 보상받지 못한 노인들의 특성이라 쳐도 유난했다.

요양보호사로서 일하면서 내가 요양병원 근무보다는 재가방문요양을 택한 것은 크게는 전일 근무보다는 파트타임 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속내는 그러나 바닥에 깔리고 싶지 않아서다. 간호보조사로 근무하던 젊은 시절에 내 나름 미소를 유지하던 얼굴을 하고서도 갑을병정 끊임없는 상하관계에 질렸던 터라, 다시 요양병원에 가서 일하면서 여사님이라 불리며 맨 밑바닥에 깔리고 싶지는 않다. 거기 요양병원에서는 여사님이 최하 직급이다. 육*수 여사, 김*숙 여사라 할 때의 여사 하고는 하늘 땅 차원이 다르다. 불리는 이름이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재가방문요양은 일대일 관계이기 때문에, 또 대개는 물심양면으로 어느 쪽으로든 취약한 노인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심리적 어려움이 적다. 자녀들이 없지 않은데도 혼자 그렇게 외로이 살아가며, 정말 우리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말동무도 없이 입술이 말라붙어가는 노인들은 어쩌면 태고 적부터 무표정이었을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내가 큰 소리로 무언가를 떠들썩하게 이야기해주면 가끔은 배시시 미소를 띠기도 한다. 기저귀 실수라도 해놓고는 새색시처럼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살면서 보람이랄까, 보람은 대단한 것이 아님을 느끼며 뭉클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일은 그러나 늘 예상을 빗나간다. 갑은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난다. 여섯 번째 어르신이 그랬다.

여그를 좀 딲어 조 바, 쩌그 거그는 또, 거그를 딲어주랑께!

워째 멋이던가 뿌옇고만! 노인네라고 도통 안 뵈는 줄 아남여!

나 젊었을 적에는……, 이런 것은 입에 달고 사는 화두다.

어르신, 저, 백내장 검사를 한번 받아보심…….

내가 시방도 바늘귀도 뀌는데 먼 병원이여! 돈도 쎄았는갑다!

남의 말은 아예 듣지를 않는다. 그러기를 반복하더니,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드디어 노인이 복지관에다 전화를 걸었다. 나 들으라고 면전에서 걸었다.

거, 복지관이제라. 보쇼이, 나 참 요상해서 못 살 것소.

어르신, 왜 또 그러세요……. 저쪽에서는 그런 소리로 응대를 할 거다.

아니, 긍께, 쓰레기봉토 안 있소, 거, 나오는 거 말요. 아, 긍께 그것이 언 날 봉께 팍 졸아져 부렀당께.

어르신, 왜 또 그러세요……. 저쪽에서는 여전히 그러고 있을 것이다.

아따, 요참 여자가 이상허게 꼭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닝께 글제. 안 의심스럽소이. 어짠다고 가방을 고롷게 큰 놈을 갖고 댕긴다요. 글고 쓰레기봉토는 졸아져 불고. 아, 몇 장 없당께. 다 없어져 부렀는디 워쩔 겨?

알만 하다. 배급으로 나오는 관급 쓰레기봉투도 손도 안 대고 알뜰하게 모은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혼자 사는 내가 그 큰 봉토를 쓸 일이 어디 있간디! 그러면서 나더러, 그러니까 요양보호사더러 자잘한 쓰레기들을 나오는 대로 가지고 나가서 버리고 오란다. 어디에? 기가 찰 노릇이다. 쓰레기장에 가면 이미 쓰레기를 담아 버려놓은 관급봉투들이 수북하게 있으니까, 그것을 살짝 열어서 헤집고 ‘요까짓 것’ 쑤셔 넣으면 된다고 우긴다. 실제로 막무가내다. 그렇게 모은 봉투를 손자인가 손녀에게 주련다고. 애들이 오는 것을 보진 못했다. 겨우 3주째였으니까. 아니, 요양보호사가 없는 주말에 다녀갈 지도 모른다. 그 애들 주려고 모아둔 봉투가 없어졌다고 성화였다.

어르신, 여기다가는요, 제가 추위를 타니까 스웨터 넣어가지고 다니잖아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스웨터요, 아시면서! 저 여기 것 봉투는 쓰라고 해도 못 써요. 우리 동네는 이 동네랑 구가 다르니까 여기 쓰레기봉투를 저 주셔도 쓸 수가 없다구요.

멋이 그래, 봉토면 봉토제. 글먼 내 것 봉토가 어디로 가부렀냐, 그 말이제.

우리 동네랑 같으면 저희 것 가져다 드리고 싶네요.

어먼 소리 말고 내 것 봉토나 내놔 보랑께. 집이 갖고 가도 못 쓴담서.

 

그것이 금요일이었다. 그 다음 주중에도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복지관에 들르면 차 과장이 살살 미소로 나를 달랜다. 그런 식으로 계속 선생님들이 바뀌니까 어쩌겠어용! 속 넓은 지 선생이 들은 둥 만 둥 참아 주세요! 사람들은 내 속내도 모르면서 내게 속이 넓다느니 그런 말들을 한다. 듣기 좋은 말일 게다. 어쨌거나 나는 사람들의 불평에는 신경 무디게 지낼 수 있다. 큰 문제만 없으면 특히 직업과 관련해서는 참는 자가 이기는 자다. 참으면 월급이 꼬박꼬박 모인다. 그렇게 살았다. 아니, 기본적으로 세상의 돈을 내 돈이 되게 하려면서 참을성도 없이 될 일인가. 그 정도가 내가 일할 때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이 일을 하면서는 내 간호조무사 경험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생과 사를 가르는 수술실 근무도 견뎌냈고, 온갖 오물들을 맞닥뜨리는 과정도 찡그리지 않고 해낼 수 있었다. 그래, 이 일이 병원 내에서 가장 깨끗한 작업이다. 이 작업이 없이는 병원이 오물들로 넘쳐날 것이니까. 이 더러운 똥오줌과 피범벅이 병원을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일차적인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세균과 병 따위를 없애는 정화작업의 최전선에 있는 전사다. 이 작업으로 나는 월급을 받고, 내 노후는 보장될 것이다.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버티어 왔다.

요양보호사 일은 수술실 근무에 비하면 거저먹기다. 시급 10,500원을 채워 정확히 계산해준다. 어쨌거나 최저임금 보다는 많고, 일 하는 시간 그동안만큼은 돈을 쓰지도 않을 것이니 두 배로 절약이 된다. 버는 것과 안 쓰는 것을 더하면 갑절의 가치가 된다. 고무줄 같은 신경 줄을 조금 무딘 쪽으로 단련하며 참으면…….

그래도 통하지 않는 때가 닥쳤다. 노인은 하루도 빼지 않고 복지관에다 전화를 해댔다. 복지관에서는 시영아파트 어르신들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까운 위치 때문에 총체적으로 서비스 비용이 절약되고, 무엇 보다 큰 불만사항들이 없는 편이다. 자신들이나 또 주변 사람들도 장기요양보험이니 하는 공적인 사실들에 관해 원론적으로 아는 사람이 드물어 불평불만이 적다. 일단 혜택을, 문자 그대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들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자질구레한 불평은 오히려 어리광이다. 나 좀 봐주라니까, 심심허다고! 나 죽겄서! 근디 나 요라다 죽는당가? 징허네이, 요라고 못 걸으믄 걍 죽게 놔두제이! 여그, 여그 좀 잡으랑께! 그렇게 저렇게 실랑이를 하면서 세월이 간다. 그런데 쓰레기봉투 민원은 끈질겼다. 나는 시쳇말로 잘렸다. 엊그제 11월 말, 하필이면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직장에서 ‘짤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모처럼 외식을 하는 토요일 - 주말이라서 딸아이도 왔었다. - 해고당한 이야기는 감췄다.

왜, 식욕 떨어지는 일 있어? 식당 잘 못 골랐나? 딸아, 우리 둘이 엄마 것 다 먹자!

속 모르는 남편은 펄펄 날지 않는 나를 의아해 하며 놀렸다. 젓가락 부딪는 소리 사이로 닷새를 계속해서 혼자 내지르던 성난 목소리가 날아다녔다. 즈그 집에서는 안 춥당가. 질가 댕길라먼 얼메나 더 추울겨! 집에서부텀 옷을 입고 댕기제, 멋허러 옷을 들고 다닌다는 거여. 멋한디 울 집에 들어와 갖고사 세타를 입는당가!

사실 복지관에서도 내가 옷을 많이 껴입는 것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른 체격도 아니면서 한심하다는 투다. 요새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라깽이를 이상형으로 삼는데, 교육 있는 날 모두 함께 밥을 먹다 보면 내가 제일 잘 먹는다. 뭐야, 지 선생은 애기들 같이 먹네, 애들 반찬도 좋아하고! - 아니, 저는 그냥 무엇이든지 잘 먹어요. 살 좀 빼야 할까요? - 알긴 아시네. 해도 지 선생 귀여워요, 먹는 것도 애들 같고, 인상도 애들 같고, 하하. - 애들 같아 뭐하게요! 나도 덩달아 웃고 만다. 멋지다 그런 말은 언감생심 기대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른한테 애들 같다니! 뭐, 어쩔 수 없기는 하다. 여리여리한 여자애들 때문에 속앓이를 했던 것도 옛날 옛적 일이다. 예쁘면 뭣해! 나는 제법 하얀 피부에 비뚠 데 없이 좌우대칭은 된다. 열심히 살았고, 아니,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절약했고, 지금은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아직도 계획이 있다. 당근 재테크와 관련된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 아직은 일을 더 계속할 것이다. 해야 한다. 하고 싶다.

착실한 재테크는 세상 살아가는 기본이다.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돈 관리는 따로 하지만 투자 때는 함께 한다. 결혼 초에는 다른 커플들처럼 내가 돈 관리를 맡기 시작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이의 월급을 챙겨서 적금 부으러 가던 날, 바로 그날 아침 버스에서 가방을 찢기고 돈을 통째로 털렸다. 평생 단 한 번도 찢기지 않던 가방이 월급이 통째로 들어있던 그 순간에 찢기다니. 그 일은 훔쳐간 그들에게는 마법이었고,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는 그것을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땀방울로 다져진 돈인가 말이다. 그 순간, 그 이후로 나는 돈 관리자 자리에서 데꺽 잘렸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싶기도 하다. 그이가 나보다 관리에서나 투자에서 월등하니까. 어느 집이고 아내들이 돈 관리를 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자존심이 묵사발 될까 봐 남들에게 테는 안 낸다. 누가 하면 어떤가, 결과가 좋으면 좋은 것이다. 한 푼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남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당연히 노담인데, 담배는 바로 돈을 말아서 태우는 것이라 생각해서 손을 대본 적도 없을 것이다. 둘이서 내기를 하면, 글쎄, 누가 더 절약의 천재인가 모를 일이다. 아니, 내가 밀리려나? 그 만큼 신뢰를 하기 때문에 그이의 제안이나 결정을 따르게 된다.

 

성남의 끝자락 미금에 청*마을 주공 42㎡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 1995년, 그 때도 오늘처럼 매섭게 추운 12월이었다. - 우리는 울었다. 대충 정리하고 딸아이 재워놓고 둘이서 입주파티를 하자고 마주앉아서……, 짠! 하고 잔을 부딪는 대신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 내가 먼저였나? 모르겠다. 둘이 다 울었다. 울다가 웃었다. 반지하 - 반지하에서 갓난아이를 품고 누어있는 순간, 그것을 표현할 단어는 없다. 그런 우리에게 이 공간 전체가 우리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 작은 36㎡도 아니고 42㎡ 아파트라니. 대출을 끼었다지만 우리 집이다. 요새 와서는 ‘영끌’이란 말이 유행이지만, 그런 말이 생겨나기 전에도 우린 그만큼 다 했다. 그랬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내 집을 샀다. 둘이 벌고 절약을 하며 살 테니까 까짓 대출쯤은 문제없었다.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내 집을 마련하다니. 아까워서 발을 크게 떼놓지 못했다. 몸무게가 한쪽으로 잘 못 실려서 바닥이 무너질세라.

꿈결 같은 세월이었다. 어느새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는 말 그대로 똘똘하고 키도 크고 공부도 제법 했다. 부러울 게 없었다. 머리카락은 나를 닮아서 검고 머리숱도 많았다. 머리를 묶어주면서 예쁜 머리핀을 꽂아주면서 생각했다, 나 어린 시절 보다는 더 행복하게 해주어야지. 아니, 이맘 땐 나도 거칠 것 없이 부족함 모르고 자랐었지. 아무튼 뒷받침을 더 잘 해주려면 돈도 모아야 하지만 무엇 보다 부모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된다. 아버지가 일찍 아프시다가 돌아가신 것 말고는 내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는 생각은 없다. 어머니는 책 속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온순하고 또 온순해서 우리들에게 따뜻했다. 내 검은 숱 많은 머리를 감겨주시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젖은 채 안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비눗물 때문에 울고 싶었던 눈이 스르르 감기곤 했다. 내 단정한 단발머리는 언제부턴가 약간 곱슬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늘 단정한 머리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곱슬이 더 나타나서, 사람들은 파마 값도 안 들게 생겼다면서 부러워한다. 하지만 난 하늘하늘한 노란 생머리가 예쁘다고 생각한다. 사알짝 흔들어서 뒤로 넘기며……. 하긴 그런 인상은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처녀 적에도 안 어울렸다. 은아, 튼실한 몸과 맘으로 날마다 파이팅!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그이가 뜬금없이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고향이라고? 그러고 보니까 그의 고향은 남쪽이었다. 얘, 조심 해. 걔 라도표야! 연애, 거기까지만! 서울 여자애들이 라도표라고 시집가기를 기피했던 전라도 남자였다. 나는 특별히 전라도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고향 제천에서나 더구나 서울에서 사는 동안에 전라도가 그리 매력 있는 고장은 아니었다. 오빠가, 그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시댁이 전라도인가 어딘가는 안중에 없었다. 외국인이어도, 어쩌면 외계인이어도 좋았을 것이다. 막상 ‘시집가는 날’ 시댁 동네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놀랐던 가슴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곧 잊혀졌다. 신랑은 전라도 출신(!)일 뿐으로, 서울사람이었다. 아들로는 둘째였고 누이들도 있었으므로 집안을 책임질 군번도 사정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고향으로 간다고? 참으로 낯선,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고향인 보성 봉*리, 선씨들만 모여 사는 동네, 하나 둘 떠나고 백 가호도 안 되는 마을로 가자고? 내 고향 제천도 우리 마을도 시골이긴 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시골인 시댁 마을은 그동안 잠깐씩 들르긴 했다. 하지만 아주 살 터전으로 받아들이라니, 날벼락이었다. 그는 공무원이니 걱정 없지만, 내가 취업할 수 있는 병원이 있을까? 설마 차밭 농사를? 무슨 말로, 어떤 말로 반대를 하지?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다. 내가 이 세월 살면서 남편 의견에 반대 한번 안하고 살았었나? 새삼 그것도 놀라웠다. 며칠을 끙끙 알았다. 언제나처럼 아무 말 않고 생글거리며 따라 나설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병원 핑계가 그나마 통할 것 같았다. 내 직장은 어쩔……

그러다가 걱정은 전쟁 없이 사라졌다. 내 속으로는 반대의견을 들고 나서기가 전쟁준비만큼 힘든 터였다. 그런데 그이가 우선은 이곳 광주로 내려오자고 말했다. 고향까지 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랬다. 휴, 나는 늘 운이 좋았다. 이곳에는 그이의 동창생이며 선후배들이 이렇게 저렇게 자리 잡고 살고 있었다. 나는 쉬지 못하는 습관에 잠시 알바도 했었지만, 곧 병원에 취직했다. 마침 건강검진을 집중적으로 하는 병원이었고, 광주 전남 여타 지역으로 건강검진 버스를 운영하는 팀에 들어갔다. 조금 늦을 때는 있어도 낮 근무였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그렇게 이곳 대도시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전학 온 딸아이도 서울 말씨로 친구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신이 나는 듯했다. 그 나름대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내 키만큼 자라는 건 정말 시간문제였다. 아슬아슬하게도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자는 말은 더는 없었다.

그러자 저녁 쉬는 시간이 뭔가 아까워졌고, 나는 야간대학에 진학을 감행했다. 간호학과는 이과라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벽이 있었고, 차선으로 사회복지과에 ‘등록’을 했다. 간호학전문대학에 간절히 등록하고자 했었던 옛 그 느낌이 살아나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게다가 4년제 대학이었다. 사실 마음 끝 간 데 깊은 속에는 그만큼 깊은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었다.

야간대학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이런저런 이력들을 가지고서 늦게 대학에 오는 경우가 많아서 친구처럼 가까워진 동료학생들도 생겼다. 그때는 2008년부터인가 시작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이슈가 되어서인지 사회복지과 학생 중에는 복지관이나 돌봄센터를 운영할 마음으로 와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실제로 소규모 센터를 운영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비슷하게는 유아교육과를 해서 어린이집을 차린 이도 있었다. 하나 같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복지관에서 일을 하면서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만났다. 나이들은 대부분 나보다 많지만 살짝 철이 없다고 할까. 일은 싫고 돈은 벌어야 해서 우울해하는 사람들 말이다.

나 같으면 못 산다 하지, 지 선생! 뭣 하러 그렇게 살어!

뭐가 어떤데요?

아니, 이깟 일 고만 좀 하고 쉴 일이지, 뭐가 아쉬워 그래요. 월세 받아서 쓰니 좀 좋겠어. 그냥 쉬라고 잡아 앉히지, 남편도 참. 짠돌인 게지.

아아니, 남편 탓 아니에요. 젊겠다, 두 손 두 발 성한데 어떻게 놀아요?

남편이 벌어다 주지, 월세 나오지. 그럼 매일 사우나도 가고, 산악회, 거긴 주 1회니 바람 쐴 만한데, 으샤! 그때가 그립다, 나는.

그런 건 취미 없어요!

그럼 일하는 게 취미다요? 세상에 일이 취미인 사람 어딨다고!

힘든 일도 아니고, 살림에 도움도 되고.

못 말려, 바보 같이!

내가 사는 방식이 바보 같은가? 그런 점이 없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남들이 칭찬을 하든 아니든 나는 그냥 그대로 일 테니까. 나이든 동료가 바보 같다고 흉을 보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어느 의심 많은 할머니가 나를 잘랐거나 칭찬했거나 나는 나다. 더구나 어제는 어제다. 일곱 번째 어르신님, 어서 나오세요!

 

아차, 초인종이 두 개! 어느 것을 누른다? 폭발물을 몇 초 안에 해체해야 하는 톰 크루즈식 액션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마지막 남은 두 개의 전선 중에서 어느 것을 자를까, 손이 떨린다. 똑딱똑딱 초시계가 흐른다. 잘 못 자르면 자신을 포함해서 사방이 날아갈 것이다. 그런 기분이다. 가만, 바른 초인종을 찾는 데 힌트는 크기가 아니겠다. 위치가 문제다. 처음부터 제 자리에 있었던 초인종은 고장이 났고, 그래서 새로 달아놓은 것은 좀 엉뚱한 자리에 붙어 있겠다. 옳거니, 요 하얀 녀석인 게로구나. 괜스레 옷깃을 한 번 더 만져본다. 새로운 시작이다. 좋은 인상이 필요해! 초인종을 보면 늘 젖꼭지 생각이 나지만, 검지 끝에는 딱딱한 플라스틱 감촉이 느껴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0.12. 국제PEN광주, 18호, 268-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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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12. 27. 23:20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이상한 노랫가락도 뭣도 아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한데 정자형 경로당이었다. 노래를 했을 것 같지 않은 할머니 한 사람만 몸을 웅크린 채 천천히 어딘가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근들근들 세운 무릎이 턱에 닿았다. 아직 철은 이르지만 사람들은 다 들로 나간 모양이다.

정자를 반쯤 덮고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동네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얼마나 긴 세월을 여기서 사람들을 보듬었을까.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느낄 수 없으리만치 마르고 갈라터진 몸통 사이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러고서도 연초록 새순을 내면 새날이 새봄이 온다. 늘 보아도 경이롭다.

삼월 어느 주말, 벌써 겨울에 있었던 약속으로 옛 도자기 마을을 찾게 되었다. 거기서 만나기로 한 가마 주인은 도자기 굽는 일 뿐 아니라 여러 장르의 예술적 작업을 하는 분이라 했다. 정작 본인은 평범한 주부의 취미생활이라고 한다는데, 그 여러 작품들을 생활과 곁들인 서사와 함께 도록으로 내고자 하는 일 때문이었다.

전화로 일러준 대로 정자 옆에는 몇 발짝 안 가서 비스듬히 놓인 한데 가마가 보인다. 울퉁불퉁 붙어있는 누룩두레는 몇 백 년 되었을 나이를 말해 준다. 그 건너 큰대문집에 묶인 덩치 큰 개는 멀리서도 눈을 맞춘다.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고는 정자에 웅크려 앉은 노인뿐이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이 동네 민 아무개 선생님 댁 저기가 맞나요?

어르신……. 누구 어르신 말이여?

아, 할머니 안녕하시냐고요. 그리고 도자기 굽는 민 선생님 댁이…….

선생님 누굴까. 긍께, 그럭 굽는 데믄 사모님 댁? 쩌어그, 누랭이 매진 디 거그. 근디 사모님 왔는강 몰러. 오늘은 못 봤잉께. 글고, 누랭인 등치만 크제 소양 없어.

노인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다 만다. 고개로만 저리 저리 가르쳐주고 나서는 입을 꽉 닫고 먼 데 하늘을 본다.

큰 대문 쪽으로 다가가자 컹컹 짓는 개 소리가 동천한다. 그런데 웬걸 곧 멎는다. 정자의 노인 말이 맞다. 순하다.

계셔요?

문을 흔들어 본다. 대꾸가 없다. 빙 둘러 보아도 초인종 같은 것은 없다. 대문이 가만히 열린다.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갈 수는 없다. 문틈으로 빼곡히 보이는 집까지는 한참 멀어서 낭패스럽다. 기차역에 내릴 때부터 시도했지만 전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시간 약속을 한 것은 아니나, 와도 좋다고 한 것이 분명 오늘인데.

오른 걸음을 다시 내려온다.

저기요, 여기 민 선생님 댁 문은 열렸는데 안에 아무도 안 계시네요.

글씨, 거까장은 모리고. 근디 오늘이 메칠이다우?

예?

메칠이냥께. 경칩이 지났능가. 엊그저끄 찰밥 묵었는디 그새 경칩은 아니겄제라.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민 선생님 어디 가셨을까요?

거까장은 모린당께. 일단지간 여 앉아서 지둘려. 거자 날마다 오긴 오는디. 정심은 우리랑 묵을 때가 많어라.

예, 그럼.

이리 올라 오랑께.

 

지금 누구랑 야그하고 있었냐믄…….

할머니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니, 아까부터 혼자 계셨잖아요? 누구랑 이야길 하셔요?

긍께, 남순이, 내 동생허고.

아, 동생 분 생각을 하셨다고요?

그래 말여, 내 동생 남순이. 남순이가 정순이 따라, 우리 육촌 가시나 말이여, 갸는 시방도 잘 살어. 우리 남순이가 금메, 웬선놈의 돈 땜시 정순일 따라 서울을 갔어. 가차이 광주까장만 갔더라믄 되얐을 것을.

……?

우리 방골 사람들은 돗자리를 짜서 묵었어. 학교는 문턱만 째까 디레다보다 말었제,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그랬시라. 그래도 울 아부진 우덜 돗자리 짜는 젙엔 못 오게 혔어라. 여자 아그들 볼 거시 못돼야, 허심서. 짠 돗자리를 무지게 큰 둥치로 지고 집을 나서믄 한동안썩 소식도 없었제만, 우덜한테 가시나그 소리 한번 안 허셨어라.

우덜끼리, 참 삼남매 사연도 많았제. 엄니 없이 큰께로 너메 동네 외할매가 더러 오심사 우덜 생일이나 진배없었제만. 그도 복이라고 얼마 못 사싰제. 글다가 아부지가 한번은 먼 아짐을 데꼬 왔어라, 새엄니 자리였제. 새엄니랑 항꾸네 온 짐 속에는, 기도 않차제, 틀이 있더라고. 방골 사람들 생전 첨 보는 틀이라. 솜씨꺼정 좋은디, 틀바느질로 혀갖고 명을 날렸제. 드르륵 박아내믄 순식간에 치매도 되고 내리닫이도 되얐응께. 방골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등지기 한나썩은 다 얻어 입었을 것이고만. 긍께 사람들은 안 입는 한복덜 어쩌고 해달라고 새엄니한테 내다중께, 새엄니 방엔 니 구퉁이 모다 헌옷들로 한짐이었제.

아, 근디 남순이가 말여, 내 손 아래 동생 말여, 만날 새엄니 방을 기웃거림시롱 말대꾸랑도 잘 허고 멋이든 맨지작거림시롱 틀질에 귀를 세우더라고.

어메, 드르륵, 진짜 신기혀, 성아.

갸는 외약팔을 쩌리 오린팔을 요리 댐시롱 천을 잡고 밀고 숭내를 내믄서 지랄이여, 좋아서. 나는이라 틀에서 나는 소리도 싫도만. 덜덜 들들, 몸까장 떨리도만 그거시 멋이 좋다고. 나야 그냥 광주까장만 가믄 로케트회사에 가넌 거시 소원이었제. 마을서 얼굴도 반반허고 몸도 튼실헌 성들 둘이가 나가 살믄서 모다 부러와 했제. 로케트회사 모링가?

느닷없는 큰 소리에 눈을 들었더니 노인은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셔요?

어메, 로케트회사도 모린당가.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그 시간에 젖은 노인은 내게 엉뚱한 타박을 하며 소상히 뭔가를 설명하는 품새였다.

제가 민 선생님을 만나려고…….

아, 온다니께. 날마다 오긴 와여. 긍께 여그서 지둘고 있으믄.

제가 전화 좀 한번 더 해보고요.

털고 일어나서 주위를 거닐며 통화 시도를 해도 잘 안 된다. 신호는 가는데 도통 대꾸가 없다.

남순아, 아야, 멋흐냐. 이리 오랑께.

좌우를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없는데, 노인은 이제 나를 동생으로 아는지 이름을 불러댄다.

아야, 성이랑 같이 로케트로 가장께, 사람 새로 뽑을 때 우리 데꼬간다 안 허드냐. 멋흐게 혼자 나스냐. 기언치 봉젠가 먼가로 할라고,

얼결에 나는 다시 정자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노인이 맨발로라도 내려올 기세였다.

 

노인의 이야기를 다 옮길 수는 없다. 첨엔 연락이 안 되는 민 여사님을 언제 또 만나러 오기도 마뜩찮고 해서 좀 기다리려던 것이 요상한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용은 독특한 말법 때문에 알아듣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간상으로도 왔다 갔다 해서 더욱 어지러웠다. 하도 진지한 그 표정 때문에 자리를 털고 나올 수도 없었다. 딱히 민 여사를 기다릴 만한 다른 장소도 없고.

하이틍간 정순이가 설레발을 쳤제. 당숙네가 젤 안 잘 살었냐, 정순이 덕에. 식우곤로가 다 뭐시였냐, 그 집이 젤로 몬자 디레놨제, 대리미도 라지오도 거가 젤 앞섰제. 아야, 멋보담 그 사탕가리 말은 국수 말여, 그 집 말고 어디서 그런 달코롬헌 것을 맘대로 묵었다냐. 어째 딸 많은 집이 더 잘 되얐이야 잉, 남순아.

내게 동생 대하듯 부르는 통에 기분이 묘해졌는데, 또 이내 내가 아무도 아닌 줄 아는 듯 했다.

금메 그렇게 남순이가 정순이 따라 서울을 갔어도 첨엔 멋이 먼지 몰랐제. 갸가 고향 땅도 제대로 못 볿음서 돈을 벌긴 벌었어. 남동생 하나 있는 것, 우리 순길이 말여, 갸는 남순이 덕 봤제. 국민학교 졸업허고 쫌 놀았어도 낭중에라도 중학하고 다 간 거시 남순이 덕이었제. 나는 큰누나가 되야갖고도 못 허는 것을 남순이가 했응께. 그나 울 아부지는 왜 신식 새엄니랑 오래 못 살었는지. 멋이 부족혀서 고렇게 가시부렀는지. 새엄니 탓들도 허더고만이, 동네 으른들이. 초승에 과부되면 또 과부 된다는디, 새엄니가 그랬디야. 원래도 곰방 과부되얐다더라고. 남자 없는 팔자 지닌 여잘 만나믄 남자가 가분다고. 암튼지간에 아부지 저 세상 가시고넌 새엄니랑 우리랑은 뜨제, 쌩 놈 아녀. 오래 같이 산 세월도 없응께. 글고 누가 어쯔고 중학을 보냈겄어, 방촌에서. 그저 돗자리나 짜묵넌 마을인디. 그랑께 남순이 덕에 동생은 성공했제. 째깐혀도 테레비도 우리집이 영 일찍 디레놨당께.

그러게 나도 정순이 성을 따라갔지, 성.

이거시 잘된 거여? 너 첨에 광주서 시장서 오천원 육천원 받고 틀질혔을 때도 보신이다 뭐다 밸것 밸것 다 맨들었담성. 그리 혔음 되얐을 것을, 멋허러 욕심은 내갖고.

성, 그래도 서울 가서는 댑방에 만원부텀 시작했으니께 어딘가. 나도 할 만큼은 했지.

그 고생을 혀갖고 종래는 뭐시여. 니가 낭중엔 그놈의 만오천원 소리에 넘어갔담성. 정순이년 땜시.

정순이 성 탓 말어. 이왕지사 고생함서 한 푼이라도 더 준다믄 다들 옮겨갔지. 모다 그랬다고.

웬선놈의 돈이랑께.

그 대목에서 나는 너무도 놀랐다. 사투리지만 뭔가 좀 다르게, 목소리까지 달라지면서 두 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챈 것은 두어 마디가 지나서였다. 갑자기 무서움증이 들었다.

헐만큼 헌 거이 그거여? 멫 년 뼈꼴 빠지게 허고는 먼 병신이 돼서 왔는디. 외약손 이리 내놔 봐. 시상에, 얼매나 아펐을겨.

노인은 내 왼손을 잡아끌려고 했다. 그 순간 다행스레 사람들이 나타났다. 구세주 다름없었다.

누군디, 먼 일로 여그를 오싯다요?

오매, 이 할매 좀 아픈디, 어쯔고 상대허고 있다요!

불현듯 나타난 아주머니 둘 덕에 나는 앙상한 할머니에게서 풀려났다. 서울사모님은, 여기 사람들은 가마 주인을 그렇게 불렀다, 차가 세워져 있으니 틀림없이 동네 안에 있을 거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든지, 아예 집안에 한번 들어가 보든지 하라고.

 

동네가 대문도 열어 놓고, 좀 멍한 사람도 혼자 놓아두고, 편하다면 편하고 느슨하다면 느슨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갈 수는 없지 않나 싶어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아까 지나간 아주머니 한 분이 그쪽 대문 앞에서 큰 소리로 부르며 손짓을 한다.

쩌그 안에 기시네. 이리 오시쇼. 쩌 안마당이나 웃채에 있으먼 누가 와도 몰라라. 근디 들어가 보도 않고 어쯔고 알것소이.

정자의 할머니가 누렁이라 하던 커다란 개가 몸도 가볍게 팔랑거리며 뛰는 모습과 주인이 문을 열면서 나타나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전화로만 인사를 나눈 민 여사인가 보다.

나는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야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자의 노인이 내 옷자락을 쥐면서 쉬지 않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피는 정말 무서웠어라. 남순이랑 둘이서 두 손을 꽉 잡고 뒤얀으로 나가 울었지라. 남순아, 남순아……. 울 엄니럴 으짠다냐. 울 엄니한테서 생각나는 거이라곤 피뿐이랑께.

노인은 지금 피를 보는 양 울먹였다.

엄니가 원래도 빼뺏한 몸이 점점 말라가도 누구나 그런갑다, 엄니덜은 밥을 잘 안 묵응께, 엄니덜이 다 그랬응께, 매일 지쳐빠진 모양을 봄서도 엄닝께 그런갑다 했어라. 그란디 내중에는 피까장 토허더니 얼메 못갔지라. 그란디 남순이가 거그서 서울서 피를 보고는 기냥…….

동순 씨, 오늘 말 잘하네. 첨 만난 선생님하고.

민 여사는 정자에 당도하여 내겐 눈인사만 하고는 노인에게 말을 건넨다.

누가 선상이여, 여가?

동순 씨, 아무랑도 이렇게 말 잘 해야 써, 그래야 다들 동순 씨 좋아해요.

으응, 그려. 근디 암도 없어.

봄비가 해갈은 안 되었어도 땅이 촉촉하니까 다들 바쁘지. 종자를 심어야 거두제!

어즈께 그놈만치 비가 왔어도 안적 해결이 안 되얐다고?

그래, 해결되려면 좀 더 와야 한대요.

이상한 대화에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는지 민 여사가 배시시 웃는다.

동순 씨, 쉬고 있어요, 응? 곧 있다가 무궁화배추 절이지 한다니까 점심 먹게. 나는 여기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하니까.

동순 씨라 불리는 노인을 달래 떼어 놓고서야 민 여사가 인사를 한다.

어쩌나, 한 선생님, 너무 미안하게 되었어요. 오늘 내가 휴대폰을 안 가져온 모양이네요. 위채에서 뭐 좀 찾느라고 대문 소리도 못 들었네요. 바쁘실 텐데 미안해서 어쩌나요.

아뇨, 좀 전에 왔는걸요. 동네가…….

아, 동순 씨한테 붙들려 놀랐겠지요. 아무한테나 동생 이야기죠. 말도 이상하죠? 여기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비가 와서 해갈되나, 잘 되었으니 해결되나, 결국 마찬가지 아녀요? 지난 설에는 원래목사님한테 너도 나도 집에서 낳은 계란을 선물한다고 해서, 누굴까 했어요. 누구는 원래부터 목사이고 누구는 신부님 하다가 목사가 된 건지 하고. 내가 교회 안 다니니까 모르기도 하고요. 그랬더니 글쎄, 면에 교회에 두 분 목사가 있는데 원로목사를 원래목사라 그런 거예요. 표준어다 맞춤법이다 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산지기 집 거문고예요, 여기선. 그래서 나는 설 쇠고 나서 원래목사님 집에 계란 훔치러 가야지…… 하면서 따라 웃고 말았지요.

아, 원래목사님……. 그럼 무궁화배추는 무공해 배추?

그래요, 한 선생님은 얼른 알아들으시네. 무공핸들 알겠어요? 그러니 무궁화배추라면서, 저이가 유난히 봄동 겉절이를 좋아하더라고요. 안됐죠 뭐. 여기가 원고향은 아니지만 명색이 시집 온 셈이라고, 좀 시원찮은 여동생이랑 데리고. 그러다 동생 죽고는 저 사람이 조금 멍하죠. 한참 되었어요. 여기 사람들 고생 안 한 사람 없더라고요. 그렇게까지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강남에 계속 살았더라면 모르고 죽었을 것, 여기 와서 많이 알게 되었어요. 환경이 참 중요해요, 사람은.

그럼 저 할머니는 무슨 사고라도, 피는 또 무슨 말이어요?

그게 이야기가 길죠. 사연 없는 사람 없겠지만. 궁금하세요?

민 여사는 오늘의 본론을 미뤄두고 정자의 노인 이야기를 한다.

동순, 남순과 순길 삼남매 이야기도 그 시절 모두가 궁핍한 채 살아가던 이야기와 비슷할 터였다. 돗자리 만들어 파는 마을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본 삼남매는 학교 교육은 의무교육까지도 다니는 둥 마는 둥 어려웠다. 새어머니는 재봉틀을 가지고 들어와서 제밥 신식 살림을 차리는가 싶었는데, 아버지가 곧 돌아가시고 덜렁 삼남매만 남자 한 해를 못 버티고 다시 떠났다. 남순에게 재봉틀에 대한 바람만 넣어주고 떠난 셈이다.

남순은 기어코 광주에 있는 시장 뒷전의 영세 봉제공장에서 견습공이 되어 틀질을 배웠다. 돈 오천원 받고 버선, 속옷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틀질을 했다. 그런 어느 명절에 서울에서 일하던 친척 언니를 만났고, 서울 소식에 혹해서 따라가더니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이 되었는데……. 그때까지는 상승 곡선이었다. 곧 만원을 받았으니 횡재 다름없었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했던 철야작업은 한창 피어나는 젊음도 삼켜버릴 기세였다. 두어 달 지나니까 코피는 일상이 되었고, 시간도 없고 돈도 아끼자고 사먹는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면 현기증은 다반사였다. 남순은 어쨌거나 서울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돈을 보냈고, 남동생 순길이는 제 할 일답게 공부를 계속했고 또 잘 해냈다. 맏이 동순은 건전지공장에 나갈 꿈도 접고 살림을 도맡았다. 순길에게 누나들은 어머니요 아버지였다.

그렇게 서울 생활 사오년이 계속되면서 남순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꿈은 점점 멀어지는 무지개 같았다. 타이밍이란 약까지 먹어가는 동안 젊다 못해 어린 몸은 파괴되어 갔다. 그들을 졸지 못하게 한겨울에도 찬바람 들어오게 문을 열어놓다가, 그래도 안 되면 나누어주고 먹이는 약이었다. 첨엔들 모르고 먹었고, 나중에는 청해서 먹었다. 졸음 쫒는 귀신. 하지만 약을 먹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졸다가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가 틀 속에 깊이 끼어 들어가 버렸다. 상처가 낫고도 엄지는 병신 모양으로 남았다. 두 가지 출구가 어른거렸다. 쉽게 살기 위해서라면 중랑천 뚝방으로 ‘언니들’의 그림자를 따라 섞이는 길, 아니면 아예 모두 다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뚝방 길로 나서자니 그들도 짙은 화장을 하고도 허무해보이기는 매한가지였고, 죽자니 내려 보내는 월급이 필요한 동생이 걸렸다.

가끔 야학 교사들의 한 마디가 이들의 삶을 지탱시켜주기도 했다. 못 배우고 가난한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다, 라고 가르치시던 ㅅ 선생님. 광릉 숲에 희귀새 한 마리가 죽으면 떠들어대는 신문들이 우리들 노동자 손가락 잘려나가도 행여 굶어 죽어도 한 줄도 보도 안한다. 신문들 믿지 맙시다, 서로를 믿읍시다, 라던 목사님. 차츰 어깨동무가 되는 친구들이 생겼다. 거기서 ㄷ 방직에서 노조 어쩌고 시작도 못해보고 똥물 사건 뒤 면목동으로 옮겨온 친구도 만났다. 그 가발공장은 바느질만 잘하면 대우가 훨씬 낫다는 소문에 남순도 그리로 옮겼다. OO무역주식회사 사원증을 받게 된 기쁨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든든한 유대가 좋았다. 남순 자신보다 더한 역경에서 대의원까지 올라간 언니도 돋보였다. 초등 졸업도 하기 전부터 진면에서, 누에고치를 삶아서 뽑아낸 솜에서, 실을 뽑아내는 일을 했다는 언니였다. 고향도 가까운 곳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 어느 날 갑자기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말이 없다. 면목동 공장을 충청북도로 옮긴다는 공고가 떴다. 그리고 따라 갈 수 없는 몇 백 명이 사표를 썼다.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다 정말 폐업공고가 나붙고, 기숙사에 물도 끊고 전기도 끊자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결의’를 하자, 그러자…….

‘우리는 거리에 내쫓겨 올 데 갈 데가 없다.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는 사이 누군가 혈서를 쓴다고 했다. 무서웠다. 무조건 무서웠다. 피는 무섭다. 어머니의 피……. 피로 무슨 글자인가를 썼겠지만, 남순은 한일자가 채 그려지지도 전에 그 장소를 빠져 나왔다. 한일자는 ㄷ자의 첫 획이었고, 나중에 알려진 대로 글자는 ‘단결투쟁’이었다. 그것을 다 쓴 언니, 타이밍 같은 것은 내뱉어버리고 삼키지 말라던 언니는 그날 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새벽에, 아니 깊은 밤중에 쳐들어온 사람들은 - 쳐들어온 것이 맞다고, 남순이 그리 말했다고 - 삼 백 여공들을 팔다리 하나씩 들어서 끌어냈고, 그 중에 그 언니는……없었다. 나중에야 들것에 실려 나왔지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 번 평택에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설 연휴에 굴뚝농성 걱정하던 틈에 나왔던 똥물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엷어지지 않은 그 상흔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귀가 아프게 들은 대로 이야그 해줄끄나?

민 여사가 갑자기 정자의 노인과 똑같은 사투리로 말한다.

웬선놈에 돈땜시. 그라고는 야도 내려왔제라. 서울은 통 무섭다고. 그때는 이상시레 날마다 헛소리만 했응께로.

그 언닌 절대 자살 아녀. 그 언니도 남동생 뒷바라지 하고 있었는데 왜 죽어. 엄니도 있었는데 왜 죽냔 말여. 그 언니한텐 엄니가 있었다니까. 글고 꼭 고향 내려와 산다고 했어. 사람이 고향을 잊아뿔믄 못 쓴다고. 시집을 가도 고향 사람 만나고 잡다고 했어. 시집 꿈도 꾸던 사람이 왜 절로 죽겄어. 절대로 아녀, 아니라고.

울 엄니라도 있었으믄 야가 맘을 잘 다스렸겄제. 그래도 고향 내려왔응께 우리 둘이 살어 남았제. 둘 다 박복했던 거시, 남순이는 다시는 틀질을 안 허기로 작정헌 듯 방에만 틀어배겼고, 그런 남순이 놔두고 내가 멋을 혔겄소. 젊은 날 나도 날벼락이었제. 쪼깨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었제만, 우리 사정이 그러코롬 됭께 다 틀려부렀제. 그 사람이 거그서 살림을 차링께 한동네 살기도 하잔코. 그라다 이 동네 나 먹은 남자 따라 왔는디, 야랑 거둬 준당께. 그라도 복이라고 죽어붕께. 그락저락 세월은 가드라고, 눈 깝짝에 가분당께.

우리 순길이 말이라? 순길이는 거장 다 배왔고, 남지기는 지가 알아서 혔고, 그라도 살어 남었는디. 요짐엔 고향도 모린다네. 그거시 흠이라믄 흠이제만, 고향 모리는 사람 어디 한 둘이여야제. 고향에 엄니가 있나 아부지가 있나. 고향도 고향이 아니겄제. 남순이 살았을 적엔, 그때까장은 더러 여글 댕겨가곤 했는디. 인자 멋허러 여글 오겄어라. 나는 지 갈친 누님도 아닌디.

 

새삼스레 도자기 굽고 염색하고 바느질한다는 이 분이 돋보였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여기 사투리를 그대로 흉내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얼굴은 영 아니다.

사투리가 너무 자연스러우신데 얼굴은 영 아니시네요.

숭악한 사투리 말예요? 여기 산 세월이 얼만데요. 나 여기 사람 다 되었죠. 강남 집 팔고 내려올 때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세 놔놓고 가지 그러냐고! 돈으로 말하자면 그 말이 옳았지요. 가만히 있기만 했어도 수십억은 족히 되는 아파트를 그때 시세대로 훌쩍 내놓고 왔으니. 이젠 강남 복판에 재입성은 글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왕창 손해 봤다고만 생각하니까.

그래 이제 완전히 정착하신 거로군요.

정착이고 뭐고, 사는 곳이 집이고 고향이겠죠. 여기 내려와서 배운 것이 얼만데.

배워요?

일테면 외지 사람, 그러니까 도시 사람들이 와서 감탄하는 잔디밭이 얼마나 수고로움의 대가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지요. 하루 세 번, 새벽 한낮 초저녁에 십분 씩 자동으로 스프링클러를 조정해 놓으면 그저 자라는 것이 잔디밭인 줄 알았죠. 게 다리 같이 퍼진 바랭이풀도, 그냥 보면 예쁜 민들레도 잔디밭에선 불청객이죠. 어찌 보면 사랑스런 강아지풀도 고맙지 않죠. 클로버는 어떻고요, 소녀시절엔 행여 네잎클로버라도 찾아볼까 반기는 것 아니었어요? 그런 잡초들, 손으로 하나하나 골라내야 잔디밭이 유지되지요. 아무려나 담장 대신 둘러선 나무들이 얼마나 대단한 꽃들이며 향기를 뿜어주는지. 대문 바로 곁이 조팝나무죠, 오늘 여기 이러다 말겠네요. 다음엔 4월 돼서 오세요. 산야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내 정원에 와 있지, 그 윤기 나는 밤색 가느라단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피는 하얀 꽃잎들. 바람만 우수수 불어도 죄 저버리지만 한동안 얼마나 아름다운데. 이런 걸 서울 복판 살면서 알았겠어요?

조팝나무, 상상이 안 가는데요?

이건 그냥 사치스런 말이라 할지도 모르겠네요. 강남에서라면 절대로 몰랐을 것들로, 그래서 풍요롭다면 좀 거하고, 폭이 넓어진 셈이죠. 물론 감탄할 일만 있는 건 아녜요. 실은 쓸쓸한 일이 더 많아요.

쓸쓸한데도 이곳이 더……?

쓸쓸하죠, 사는 것이, 다. 저이야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그렇다 치고요. 멀쩡한 할아버지 한 분도 벌건 대낮에 혼자 정자에 앉아있어 보았자 나무둥치 신세가 되죠. 바로 저 아래 길가 어느 집 나락 말려놓은 걸 웬 젊은이가 트럭 대놓고 착착 거두어 가더래요. 아, 저 집은 아들인가 조칸가 일이랑 도와주려고 오니 좋겠다, 그랬다는데요. 그거 온통 실어가 버린 날강도였죠. 여기 살면 인심이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사는가, 바닥을 보는 것 같을 때도 많아요.

아무래도 가난 때문에…….

가난이 처음 문제겠죠. 그러다 가난 말고도 가정 문제들이 심상찮게 생겨요. 여기 바로 이 아랫집도 지금 비었지요. 아저씨가 후두암으로 세상 떴어요, 자식도 없이. 아들 딸 데려온 여자랑 늦장가 식으로 합쳐 살았다는데, 여자가 좀 함부로랄까, 자격지심이랄까. 동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하면 그쪽이더라고요. 아무튼 아저씬 일해서, 노동일이죠, 돈 모이면 그 동안 각시 몰래 나한테 조금씩 맡겨서 저축을 했어요. 동생이 특히 주의를 주곤 했더래요, 형한테. 여자 좋은 일 말고 조카한테 뭐라도 남겨줘야 죽어서 찬물이라도 얻어먹을 것 아니냐고 채근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가 임자라고 그러고. 그 얄팍한 살림에도 쪽박 깨지는 소리가 나서 보기 안됐더라고요. 몇 년 그렇게 앓았는데, 결국 세상 뜨자 대충 초상치고는 여자가 동넬 뜨더군요. 동생 예감이 맞았죠. 데려온 애들은 벌써 결혼해 나갔고, 단 둘이 살다가 그냥 가버리더라고요. 이장한테 전화해서 헐값에 집 내놓으란 소리만 했다는군요. 그런 소리 듣고는 내가 갖고 있던 통장을 조카를 줘서 제사라도 지내게 해야 할지, 참 어려운 상황이 되더라고요. 그 여자, 가만있었음 집값 다 되는 저축 돈을 받을 뻔 했었는데, 집은 그냥 살고.

그러니까 가난이……. 우리가 부유함에 너무 애착하면 부의 노예라 하지만, 교황님 말씀이죠, 결국 가난이 모든 것을 망치는 거죠. 그러니 부유함에 돈에 집착할 밖에요. 축적된 돈은 계속 돈을 낳고, 돈은 계속 돈 쪽으로 몰리고. 쇳가루가 지남철에 쏠릴 밖에요.

그래요, 가난이 일상이 되면 뭐가 뭔지 아예 모르는 것 같아요. 보조금만으로 연명하는 사람들, 뭐라는지 아세요? 나는 요로코롬 나라에서 믹인게로 먼 걱정잉가. 정부다 군청이다 면사무소다 그런 개념은 별로 통하지 않죠, 불필요해요. 가끔 봉사단체에서 연탄이나 반찬들 보내주죠. 몸 그런대로 움직이니까 들판에서 이런저런 일 거들면서 함께 먹고 푸중가리도 얻고.

푸중가리요?

아, 푸성귀. 푸성귀를 그리 말해요. 우리 한 선생님은 서울분이겠지요?

서울은 아니고, 평택요.

평택이면 서울이지요, 경기도 살면 다 서울 사는 거죠. 전남 어디 살아도 서울 가면 광주사람이라는데요 뭐.

아, 그렇구나. ‘나라에서 믹인게로’ 우리나라 좋은 나라 투표가 나오는 것이구나. 가난은 의식마저 죽인다. 적선으로 의식을 죽인다. 그나마 월급쟁이한테서 세금 걷어 밑바닥에 적선함으로써. 부자는 부를 애착하기를 멈출 리 없고, 기꺼이 부의 노예임을 즐긴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지수가 높단다. 절대적 가난은 절대적 불행이다. 적선은 가난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도구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먹먹한데 노인이 꼼지락거린다.

남순이넌 왜 안 온당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넋 놓고 있던 노인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어쩜 좋아. 할매, 남순이 서울 도로 갔다고 했잖아. 남순이는 서울이 좋다잖아.

아니여, 나랑 끝까장 여그 산다고 그랬는디.

남순이가 좀 아파서 거기 서울 병원에 있다니까 그러네. 뭣보다 동네 사람들하고 잘 살라고, 그러고 갔다니까 그래. 맨날 남순이만 찾으면 동순 씨도 병원 보내버릴까 보다, 거긴 맨날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하긴 무릎 아파서 잘 못 걸으니 정말 병원에 가야할지 몰라. 보건소 선생 불러줄까?

싫여, 나 암시랑토 안흔디. 집에 갈겨.

금방 여기서들 밥 차릴 건데. 무궁화배추 무친다니까. 집엔 해름에 가셔.

무궁화배추 만난디. 삼천리강산에~.

그러고는 노인은 페트병에 물을 채운 베개를 모로 베고 저쪽으로 드러눕는다.

 

해가 지는 모습이 어떤 것일지.

나는 삼천리강산에~ 그것이 뭔가 묻고 싶었는데, 민 여사가 불쑥 해 지는 이야기를 했다. 연초록 잎들을 뚫고 비치는 여린 해가 중천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뜬금없다.

해가 꼴깍 산 너머로 넘어가기 까지는 어떻게 살았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렇죠?

해 지는 이야기는 왜 새삼스럽게요?

이 사람을 좀 봐요. 더 심해지면 이장도 어쩌지 못하고 요양원 보낼 거라 그러고 있고. 저기 저 목련, 백목련 피길 누구나 기다리죠. 놀랍게도 큰 꽃잎이 피면 누구라도 압도당하죠. 그러다 봄비라도 주르륵 내리면 절반은 시들어 붙어있지요. 조금씩 조금씩 죽는 거예요. 바닥에 나뒹굴어서도 얼른 죽지 않죠, 두툼한 살 때문에 그렇죠. 차라리 우수수 지는 꽃들이 더 예뻐요, 후두둑 지는 동백이 서럽다 해도 차라리.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랬나요, 송창식 노랜 잘 모르죠, 아마?

참다가 참다가 참을 수 없어서 뚝 떨어지는 꽃이 동백이라 했던가, 시인 김용택의 말은. 동백이건 목련이건 한 때가 있지 않았나. 그냥 풀꽃, 풀꽃처럼도 피어보지 못한 삶도 있는데. 동순 할머니가 아직 회갑도 안 된 나이라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 민 여사가 왜 말을 좀 편하게 놓나 했더니 실제로 더 젊다는 말이다. 훨씬 늙은 몰골을 하고서. 무엇이 이렇게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는 삶을 점지하는가.

봐라, 부유함에 집착하는 노예들은 당당하게 삶을 즐긴다. 평생 부유함 근처는커녕 그림자도 못 밟고 스러질 생은 뭔가. 동순 할머니의 경우 여동생의 트라우마에서 전염된 간접피해치고는 결과가 참담하다. 물론 그 YH사건 현장에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전부 다 후유증으로 폐인이 된 건 아니다. 사건 당시에 임신 중이던 몸으로 활동했고 그 신념으로 일생을 살아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경우도 있다고, 어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다수는 다잡고 살아남았지 않은가 말이다. 직접은 아니라도 그 여세를 몰아 유신정국을 흔들었고, 억울한 죽음도 늦게라도 인정받고 동료들과 시민들의 추모를 받고. 튼실하게 살아남지 못한 책임은 당사자의 신체적 정신적 나약함에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나약함은 죄인가. 모르겠다. 가난은 죄인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괜히 맘 아픈 이야길 했나 보네요.

내가 멍하니 있었던지 민 여사가 물었다.

아, 아뇨. 저도 알 만큼은 알죠. 그런데 여긴 굴뚝새는 없나요?

웬 굴뚝새요? 요즘엔 겨울에도 잘 안 보이던데요. 여긴 소쩍새다 쑥국새다 그런 얘기가 많죠. 솥이 적어 굶어죽었느니…….

시어메 무서워 쑥국도 못 먹고 죽었느니, 그런 거죠? 옛날엔 참 서러운 상상이었어요!

나는 얼결에 튀어나온 굴뚝새 이야기를 감추려고 말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저 아래서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벌써 이른 점심시간인가 보다.

나 좀 봐. 여긴 새벽밥 먹고들 들에 나가니까 점심이 일러요. 내가 오늘 작품 이야기는커녕 집 안으로 구경도 못 시켜드렸네요. 그런데 점심 같이 하고 가실래요? 점심 후엔 나도 읍내 나가야 해서.

아뇨, 오늘은 자료만 주셔도.

그래요, 그럼. 저기 차 안에 있어요. 검토해 보시고 나서 한번 만나게요. 난 책 내고 그러는 것 별 뜻이 없는데, 남편이 자꾸 권해서. 담엔 차분히 작품들 보시면서…….

검토라뇨, 잘 감상해보겠습니다.

몇 걸음 아래로 함께 걸어 내려오는데 다시 노랫소리가 들린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은 갈고 씨를 뿌린다~.

모로 누운 채 말도 안 되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사람, 여기 어느 한적한 마을, 아직은 추운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봄, 마을 정자에서 넋을 놓고 있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되었나. 먼저 떠난 동생의 무서운 기억이 전염되었을까. 무서움이 얼마나 무서우면 전염이 될까.

조팝나무 꽃 필 때 오세요.

연락 하셔요, 저는 토요일이 좋은데요.

손에는 가벼운 유에스비를 받아들고 맘에는 모로 누운 앙상한 그림자를 무겁게 안고 발걸음을 옮긴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벌써 들리지 않을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왔는데도 귓가에 그 요상한 멜로디가 아스라이 따라온다. 새봄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일까, 정말 누구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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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 단편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천년의 하루』, 광주전남소설가협회, 7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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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7. 1. 07:14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만약 우리가 부유함에 너무 애착한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예입니다. - 2015.3. 프란치스코 교황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이상한 노랫가락도 뭣도 아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한데 정자형 경로당이었다. 노래를 했을 것 같지 않은 할머니 한 사람만 몸을 웅크린 채 천천히 어딘가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근들근들 세운 무릎이 턱에 닿았다. 아직 철은 이르지만 사람들은 다 들로 나간 모양이다.

정자를 반쯤 덮고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동네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얼마나 긴 세월을 여기서 사람들을 보듬었을까.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느낄 수 없으리만치 마르고 갈라터진 몸통 사이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러고서도 연초록 새순을 내면 새날이 새봄이 온다. 늘 보아도 경이롭다.

 

삼월 어느 주말, 벌써 겨울에 있었던 약속으로 옛 도자기 마을을 찾게 되었다. 거기서 만나기로 한 가마 주인은 도자기 굽는 일 뿐 아니라 여러 장르의 예술적 작업을 하는 분이라 했다. 정작 본인은 평범한 주부의 취미생활이라고 한다는데, 그 여러 작품들을 생활과 곁들인 서사와 함께 도록으로 내고자 하는 일 때문이었다.

전화로 일러준 대로 정자 옆에는 몇 발짝 안 가서 비스듬히 놓인 한데 가마가 보인다. 울퉁불퉁 붙어있는 누룩두레는 몇 백 년 되었을 나이를 말해 준다. 그 건너 큰대문집에 묶인 덩치 큰 개는 멀리서도 눈을 맞춘다.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고는 정자에 웅크려 앉은 노인뿐이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이 동네 민 아무개 선생님 댁 저기가 맞나요?

어르신……. 누구 어르신 말이여?

아, 할머니 안녕하시냐고요. 그리고 도자기 굽는 민 선생님 댁이…….

선생님 누굴까. 긍께, 그럭 굽는 데믄 사모님 댁? 쩌어그, 누랭이 매진 디 거그. 근디 사모님 왔는강 몰러. 오늘은 못 봤잉께. 글고, 누랭인 등치만 크제 소양 없어.

노인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다 만다. 고개로만 저리 저리 가르쳐주고 나서는 입을 꽉 닫고 먼 데 하늘을 본다.

 

큰 대문 쪽으로 다가가자 컹컹 짓는 개 소리가 동천한다. 그런데 웬걸 곧 멎는다. 정자의 노인 말이 맞다. 순하다.

계셔요?

문을 흔들어 본다. 대꾸가 없다. 빙 둘러 보아도 초인종 같은 것은 없다. 대문이 가만히 열린다.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갈 수는 없다. 문틈으로 빼곡히 보이는 집까지는 한참 멀어서 낭패스럽다. 기차역에 내릴 때부터 시도했지만 전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시간 약속을 한 것은 아니나, 와도 좋다고 한 것이 분명 오늘인데.

 

오른 걸음을 다시 내려온다.

저기요, 여기 민 선생님 댁 문은 열렸는데 안에 아무도 안 계시네요.

글씨, 거까장은 모리고. 근디 오늘이 메칠이다우?

예?

메칠이냥께. 경칩이 지났능가. 엊그저끄 찰밥 묵었는디 그새 경칩은 아니겄제라.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민 선생님 어디 가셨을까요?

거까장은 모린당께. 일단지간 여 앉아서 지둘려. 거자 날마다 오긴 오는디. 정심은 우리랑 묵을 때가 많어라.

예, 그럼.

이리 올라 오랑께.

 

 

지금 누구랑 야그하고 있었냐믄…….

할머니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니, 아까부터 혼자 계셨잖아요? 누구랑 이야길 하셔요?

긍께, 남순이, 내 동생허고.

아, 동생 분 생각을 하셨다고요?

그래 말여, 내 동생 남순이. 남순이가 정순이 따라, 우리 육촌 가시나 말이여, 갸는 시방도 잘 살어. 우리 남순이가 금메, 웬선놈의 돈 땜시 정순일 따라 서울을 갔어. 가차이 광주까장만 갔더라믄 되얐을 것을.

……?

우리 방골 사람들은 돗자리를 짜서 묵었어. 학교는 문턱만 째까 디레다보다 말었제,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그랬시라. 그래도 울 아부진 우덜 돗자리 짜는 젙엔 못 오게 혔어라. 여자 아그들 볼 거시 못돼야, 허심서. 짠 돗자리를 무지게 큰 둥치로 지고 집을 나서믄 한동안썩 소식도 없었제만, 우덜한테 가시나그 소리 한번 안 허셨어라.

우덜끼리, 참 삼남매 사연도 많았제. 엄니 없이 큰께로 너메 동네 외할매가 더러 오심사 우덜 생일이나 진배없었제만. 그도 복이라고 얼마 못 사싰제. 글다가 아부지가 한번은 먼 아짐을 데꼬 왔어라, 새엄니 자리였제. 새엄니랑 항꾸네 온 짐 속에는, 기도 않차제, 틀이 있더라고. 방골 사람들 생전 첨 보는 틀이라. 솜씨꺼정 좋은디, 틀바느질로 혀갖고 명을 날렸제. 드르륵 박아내믄 순식간에 치매도 되고 내리닫이도 되얐응께. 방골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등지기 한나썩은 다 얻어 입었을 것이고만. 긍께 사람들은 안 입는 한복덜 어쩌고 해달라고 새엄니한테 내다중께, 새엄니 방엔 니 구퉁이 모다 헌옷들로 한짐이었제.

아, 근디 남순이가 말여, 내 손 아래 동생 말여, 만날 새엄니 방을 기웃거림시롱 말대꾸랑도 잘 허고 멋이든 맨지작거림시롱 틀질에 귀를 세우더라고.

어메, 드르륵, 진짜 신기혀, 성아.

갸는 외약팔을 쩌리 오린팔을 요리 댐시롱 천을 잡고 밀고 숭내를 내믄서 지랄이여, 좋아서. 나는이라 틀에서 나는 소리도 싫도만. 덜덜 들들, 몸까장 떨리도만 그거시 멋이 좋다고. 나야 그냥 광주까장만 가믄 로케트회사에 가넌 거시 소원이었제. 마을서 얼굴도 반반허고 몸도 튼실헌 성들 둘이가 나가 살믄서 모다 부러와 했제. 로케트회사 모링가?

 

느닷없는 큰 소리에 눈을 들었더니 노인은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셔요?

어메, 로케트회사도 모린당가.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그 시간에 젖은 노인은 내게 엉뚱한 타박을 하며 소상히 뭔가를 설명하는 품새였다.

제가 민 선생님을 만나려고…….

아, 온다니께. 날마다 오긴 와여. 긍께 여그서 지둘고 있으믄.

제가 전화 좀 한번 더 해보고요.

털고 일어나서 주위를 거닐며 통화 시도를 해도 잘 안 된다. 신호는 가는데 도통 대꾸가 없다.

 

남순아, 아야, 멋흐냐. 이리 오랑께.

좌우를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없는데, 노인은 이제 나를 동생으로 아는지 이름을 불러댄다.

아야, 성이랑 같이 로케트로 가장께, 사람 새로 뽑을 때 우리 데꼬간다 안 허드냐. 멋흐게 혼자 나스냐. 기언치 봉젠가 먼가로 할라고,

얼결에 나는 다시 정자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노인이 맨발로라도 내려올 기세였다.

 

 

노인의 이야기를 다 옮길 수는 없다. 첨엔 연락이 안 되는 민 여사님을 언제 또 만나러 오기도 마뜩찮고 해서 좀 기다리려던 것이 요상한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용은 독특한 말법 때문에 알아듣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간상으로도 왔다 갔다 해서 더욱 어지러웠다. 하도 진지한 그 표정 때문에 자리를 털고 나올 수도 없었다. 딱히 민 여사를 기다릴 만한 다른 장소도 없고.

 

하이틍간 정순이가 설레발을 쳤제. 당숙네가 젤 안 잘 살었냐, 정순이 덕에. 식우곤로가 다 뭐시였냐, 그 집이 젤로 몬자 디레놨제, 대리미도 라지오도 거가 젤 앞섰제. 아야, 멋보담 그 사탕가리 말은 국수 말여, 그 집 말고 어디서 그런 달코롬헌 것을 맘대로 묵었다냐. 어째 딸 많은 집이 더 잘 되얐이야 잉, 남순아.

내게 동생 대하듯 부르는 통에 기분이 묘해졌는데, 또 이내 내가 아무도 아닌 줄 아는 듯 했다.

금메 그렇게 남순이가 정순이 따라 서울을 갔어도 첨엔 멋이 먼지 몰랐제. 갸가 고향 땅도 제대로 못 볿음서 돈을 벌긴 벌었어. 남동생 하나 있는 것, 우리 순길이 말여, 갸는 남순이 덕 봤제. 국민학교 졸업허고 쫌 놀았어도 낭중에라도 중학하고 다 간 거시 남순이 덕이었제. 나는 큰누나가 되야갖고도 못 허는 것을 남순이가 했응께. 그나 울 아부지는 왜 신식 새엄니랑 오래 못 살었는지. 멋이 부족혀서 고렇게 가시부렀는지. 새엄니 탓들도 허더고만이, 동네 으른들이. 초승에 과부되면 또 과부 된다는디, 새엄니가 그랬디야. 원래도 곰방 과부되얐다더라고. 남자 없는 팔자 지닌 여잘 만나믄 남자가 가분다고. 암튼지간에 아부지 저 세상 가시고넌 새엄니랑 우리랑은 뜨제, 쌩 놈 아녀. 오래 같이 산 세월도 없응께. 글고 누가 어쯔고 중학을 보냈겄어, 방촌에서. 그저 돗자리나 짜묵넌 마을인디. 그랑께 남순이 덕에 동생은 성공했제. 째깐혀도 테레비도 우리집이 영 일찍 디레놨당께.

 

그러게 나도 정순이 성을 따라갔지, 성.

이거시 잘된 거여? 너 첨에 광주서 시장서 오천원 육천원 받고 틀질혔을 때도 보신이다 뭐다 밸것 밸것 다 맨들었담성. 그리 혔음 되얐을 것을, 멋허러 욕심은 내갖고.

성, 그래도 서울 가서는 댑방에 만원부텀 시작했으니께 어딘가. 나도 할 만큼은 했지.

그 고생을 혀갖고 종래는 뭐시여. 니가 낭중엔 그놈의 만오천원 소리에 넘어갔담성. 정순이년 땜시.

정순이 성 탓 말어. 이왕지사 고생함서 한 푼이라도 더 준다믄 다들 옮겨갔지. 모다 그랬다고.

웬선놈의 돈이랑께.

 

그 대목에서 나는 너무도 놀랐다. 사투리지만 뭔가 좀 다르게, 목소리까지 달라지면서 두 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챈 것은 두어 마디가 지나서였다. 갑자기 무서움증이 들었다.

헐만큼 헌 거이 그거여? 멫 년 뼈꼴 빠지게 허고는 먼 병신이 돼서 왔는디. 외약손 이리 내놔 봐. 시상에, 얼매나 아펐을겨.

노인은 내 왼손을 잡아끌려고 했다. 그 순간 다행스레 사람들이 나타났다. 구세주 다름없었다.

누군디, 먼 일로 여그를 오싯다요?

오매, 이 할매 좀 아픈디, 어쯔고 상대허고 있다요!

불현듯 나타난 아주머니 둘 덕에 나는 앙상한 할머니에게서 풀려났다. 서울사모님은, 여기 사람들은 가마 주인을 그렇게 불렀다, 차가 세워져 있으니 틀림없이 동네 안에 있을 거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든지, 아예 집안에 한번 들어가 보든지 하라고.

 

 

동네 대문도 열어 놓고, 좀 멍한 사람도 혼자 놓아두고, 편하다면 편하고 느슨하다면 느슨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갈 수는 없지 않나 싶어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아까 지나간 아주머니 한 분이 그쪽 대문 앞에서 큰 소리로 부르며 손짓을 한다.

쩌그 안에 기시네. 이리 오시쇼. 쩌 안마당이나 웃채에 있으먼 누가 와도 몰라라. 근디 들어가 보도 않고 어쯔고 알것소이.

 

정자의 할머니가 누렁이라 하던 커다란 개가 몸도 가볍게 팔랑거리며 뛰는 모습과 주인이 문을 열면서 나타나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전화로만 인사를 나눈 민 여사인가 보다.

나는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야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자의 노인이 내 옷자락을 쥐면서 쉬지 않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피는 정말 무서웠어라. 남순이랑 둘이서 두 손을 꽉 잡고 뒤얀으로 나가 울었지라. 남순아, 남순아……. 울 엄니럴 으짠다냐. 울 엄니한테서 생각나는 거이라곤 피뿐이랑께.

노인은 지금 피를 보는 양 울먹였다.

엄니가 원래도 빼뺏한 몸이 점점 말라가도 누구나 그런갑다, 엄니덜은 밥을 잘 안 묵응께, 엄니덜이 다 그랬응께, 매일 지쳐빠진 모양을 봄서도 엄닝께 그런갑다 했어라. 그란디 내중에는 피까장 토허더니 얼메 못갔지라. 그란디 남순이가 거그서 서울서 피를 보고는 기냥…….

 

 

동순 씨, 오늘 말 잘하네. 첨 만난 선생님하고.

민 여사는 정자에 당도하여 내겐 눈인사만 하고는 노인에게 말을 건넨다.

누가 선상이여, 여가?

동순 씨, 아무랑도 이렇게 말 잘 해야 써, 그래야 다들 동순 씨 좋아해요.

으응, 그려. 근디 암도 없어.

봄비가 해갈은 안 되었어도 땅이 촉촉하니까 다들 바쁘지. 종자를 심어야 거두제!

어즈께 그놈만치 비가 왔어도 안적 해결이 안 되얐다고?

그래, 해결되려면 좀 더 와야 한대요.

이상한 대화에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는지 민 여사가 배시시 웃는다.

동순 씨, 쉬고 있어요, 응? 곧 있다가 무궁화배추 절이지 한다니까 점심 먹게. 나는 여기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하니까.

 

동순 씨라 불리는 노인을 달래 떼어 놓고서야 민 여사가 인사를 한다.

어쩌나, 한 선생님, 너무 미안하게 되었어요. 오늘 내가 휴대폰을 안 가져온 모양이네요. 위채에서 뭐 좀 찾느라고 대문 소리도 못 들었네요. 바쁘실 텐데 미안해서 어쩌나요.

아뇨, 좀 전에 왔는걸요. 동네가…….

아, 동순 씨한테 붙들려 놀랐겠지요. 아무한테나 동생 이야기죠. 말도 이상하죠? 여기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비가 와서 해갈되나, 잘 되었으니 해결되나, 결국 마찬가지 아녀요? 지난 설에는 원래목사님한테 너도 나도 집에서 낳은 계란을 선물한다고 해서, 누굴까 했어요. 누구는 원래부터 목사이고 누구는 신부님 하다가 목사가 된 건지 하고. 내가 교회 안 다니니까 모르기도 하고요. 그랬더니 글쎄, 면에 교회에 두 분 목사가 있는데 원로목사를 원래목사라 그런 거예요. 표준어다 맞춤법이다 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산지기 집 거문고예요, 여기선. 그래서 나는 설 쇠고 나서 원래목사님 집에 계란 훔치러 가야지…… 하면서 따라 웃고 말았지요.

아, 원래목사님……. 그럼 무궁화배추는 무공해 배추?

그래요, 한 선생님은 얼른 알아들으시네. 무공핸들 알겠어요? 그러니 무궁화배추라면서, 저이가 유난히 봄동 겉절이를 좋아하더라고요. 안됐죠 뭐. 여기가 원고향은 아니지만 명색이 시집 온 셈이라고, 좀 시원찮은 여동생이랑 데리고. 그러다 동생 죽고는 저 사람이 조금 멍하죠. 한참 되었어요. 여기 사람들 고생 안 한 사람 없더라고요. 그렇게까지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강남에 계속 살았더라면 모르고 죽었을 것, 여기 와서 많이 알게 되었어요. 환경이 참 중요해요, 사람은.

그럼 저 할머니는 무슨 사고라도, 피는 또 무슨 말이어요?

그게 이야기가 길죠. 사연 없는 사람 없겠지만. 궁금하세요?

민 여사는 오늘의 본론을 미뤄두고 정자의 노인 이야기를 한다.

 

 

동순, 남순과 순길 삼남매 이야기도 그 시절 모두가 궁핍한 채 살아가던 이야기와 비슷할 터였다. 돗자리 만들어 파는 마을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본 삼남매는 학교 교육은 의무교육까지도 다니는 둥 마는 둥 어려웠다. 새어머니는 재봉틀을 가지고 들어와서 제밥 신식 살림을 차리는가 싶었는데, 아버지가 곧 돌아가시고 덜렁 삼남매만 남자 한 해를 못 버티고 다시 떠났다. 남순에게 재봉틀에 대한 바람만 넣어주고 떠난 셈이다.

남순은 기어코 광주에 있는 시장 뒷전의 영세 봉제공장에서 견습공이 되어 틀질을 배웠다. 돈 오천원 받고 버선, 속옷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틀질을 했다. 그런 어느 명절에 서울에서 일하던 친척 언니를 만났고, 서울 소식에 혹해서 따라가더니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이 되었는데……. 그때까지는 상승 곡선이었다. 곧 만원을 받았으니 횡재 다름없었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했던 철야작업은 한창 피어나는 젊음도 삼켜버릴 기세였다. 두어 달 지나니까 코피는 일상이 되었고, 시간도 없고 돈도 아끼자고 사먹는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면 현기증은 다반사였다. 남순은 어쨌거나 서울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돈을 보냈고, 남동생 순길이는 제 할 일답게 공부를 계속했고 또 잘 해냈다. 맏이 동순은 건전지공장에 나갈 꿈도 접고 살림을 도맡았다. 순길에게 누나들은 어머니요 아버지였다.

그렇게 서울 생활 사오년이 계속되면서 남순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꿈은 점점 멀어지는 무지개 같았다. 타이밍이란 약까지 먹어가는 동안 젊다 못해 어린 몸은 파괴되어 갔다. 그들을 졸지 못하게 한겨울에도 찬바람 들어오게 문을 열어놓다가, 그래도 안 되면 나누어주고 먹이는 약이었다. 첨엔들 모르고 먹었고, 나중에는 청해서 먹었다. 졸음 쫒는 귀신. 하지만 약을 먹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졸다가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가 틀 속에 깊이 끼어 들어가 버렸다. 상처가 낫고도 엄지는 병신 모양으로 남았다. 두 가지 출구가 어른거렸다. 쉽게 살기 위해서라면 중랑천 뚝방으로 ‘언니들’의 그림자를 따라 섞이는 길, 아니면 아예 모두 다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뚝방 길로 나서자니 그들도 짙은 화장을 하고도 허무해보이기는 매한가지였고, 죽자니 내려 보내는 월급이 필요한 동생이 걸렸다.

가끔 야학 교사들의 한 마디가 이들의 삶을 지탱시켜주기도 했다. 못 배우고 가난한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다, 라고 가르치시던 ㅅ 선생님. 광릉 숲에 희귀새 한 마리가 죽으면 떠들어대는 신문들이 우리들 노동자 손가락 잘려나가도 행여 굶어 죽어도 한 줄도 보도 안한다. 신문들 믿지 맙시다, 서로를 믿읍시다, 라던 목사님. 차츰 어깨동무가 되는 친구들이 생겼다. 거기서 ㄷ 방직에서 노조 어쩌고 시작도 못해보고 똥물 사건 뒤 면목동으로 옮겨온 친구도 만났다. 그 가발공장은 바느질만 잘하면 대우가 훨씬 낫다는 소문에 남순도 그리로 옮겼다. OO무역주식회사 사원증을 받게 된 기쁨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든든한 유대가 좋았다. 남순 자신보다 더한 역경에서 대의원까지 올라간 언니도 돋보였다. 초등 졸업도 하기 전부터 진면에서, 누에고치를 삶아서 뽑아낸 솜에서, 실을 뽑아내는 일을 했다는 언니였다. 고향도 가까운 곳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 어느 날 갑자기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말이 없다. 면목동 공장을 충청북도로 옮긴다는 공고가 떴다. 그리고 따라 갈 수 없는 몇 백 명이 사표를 썼다.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다 정말 폐업공고가 나붙고, 기숙사에 물도 끊고 전기도 끊자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결의’를 하자, 그러자…….

‘우리는 거리에 내쫓겨 올 데 갈 데가 없다.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는 사이 누군가 혈서를 쓴다고 했다. 무서웠다. 무조건 무서웠다. 피는 무섭다. 어머니의 피……. 피로 무슨 글자인가를 썼겠지만, 남순은 한일자가 채 그려지지도 전에 그 장소를 빠져 나왔다. 한일자는 ㄷ자의 첫 획이었고, 나중에 알려진 대로 글자는 ‘단결투쟁’이었다. 그것을 다 쓴 언니, 타이밍 같은 것은 내뱉어버리고 삼키지 말라던 언니는 그날 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새벽에, 아니 깊은 밤중에 쳐들어온 사람들은 - 쳐들어온 것이 맞다고, 남순이 그리 말했다고 - 삼 백 여공들을 팔다리 하나씩 들어서 끌어냈고, 그 중에 그 언니는……없었다. 나중에야 들것에 실려 나왔지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 번 평택에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설 연휴에 굴뚝농성 걱정하던 틈에 나왔던 똥물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엷어지지 않은 그 상흔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귀가 아프게 들은 대로 이야그 해줄끄나?

민 여사가 갑자기 정자의 노인과 똑같은 사투리로 말한다.

웬선놈에 돈땜시. 그라고는 야도 내려왔제라. 서울은 통 무섭다고. 그때는 이상시레 날마다 헛소리만 했응께로.

그 언닌 절대 자살 아녀. 그 언니도 남동생 뒷바라지 하고 있었는데 왜 죽어. 엄니도 있었는데 왜 죽냔 말여. 그 언니한텐 엄니가 있었다니까. 글고 꼭 고향 내려와 산다고 했어. 사람이 고향을 잊아뿔믄 못 쓴다고. 시집을 가도 고향 사람 만나고 잡다고 했어. 시집 꿈도 꾸던 사람이 왜 절로 죽겄어. 절대로 아녀, 아니라고.

울 엄니라도 있었으믄 야가 맘을 잘 다스렸겄제. 그래도 고향 내려왔응께 우리 둘이 살어 남았제. 둘 다 박복했던 거시, 남순이는 다시는 틀질을 안 허기로 작정헌 듯 방에만 틀어배겼고, 그런 남순이 놔두고 내가 멋을 혔겄소. 젊은 날 나도 날벼락이었제. 쪼깨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었제만, 우리 사정이 그러코롬 됭께 다 틀려부렀제. 그 사람이 거그서 살림을 차링께 한동네 살기도 하잔코. 그라다 이 동네 나 먹은 남자 따라 왔는디, 야랑 거둬 준당께. 그라도 복이라고 죽어붕께. 그락저락 세월은 가드라고, 눈 깝짝에 가분당께.

우리 순길이 말이라? 순길이는 거장 다 배왔고, 남지기는 지가 알아서 혔고, 그라도 살어 남었는디. 요짐엔 고향도 모린다네. 그거시 흠이라믄 흠이제만, 고향 모리는 사람 어디 한 둘이여야제. 고향에 엄니가 있나 아부지가 있나. 고향도 고향이 아니겄제. 남순이 살았을 적엔, 그때까장은 더러 여글 댕겨가곤 했는디. 인자 멋허러 여글 오겄어라. 나는 지 갈친 누님도 아닌디.

 

 

새삼스레 도자기 굽고 염색하고 바느질한다는 이 분이 돋보였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여기 사투리를 그대로 흉내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얼굴은 영 아니다.

사투리가 너무 자연스러우신데 얼굴은 영 아니시네요.

숭악한 사투리 말예요? 여기 산 세월이 얼만데요. 나 여기 사람 다 되었죠. 강남 집 팔고 내려올 때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세 놔놓고 가지 그러냐고! 돈으로 말하자면 그 말이 옳았지요. 가만히 있기만 했어도 수십억은 족히 되는 아파트를 그때 시세대로 훌쩍 내놓고 왔으니. 이젠 강남 복판에 재입성은 글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왕창 손해 봤다고만 생각하니까.

그래 이제 완전히 정착하신 거로군요.

정착이고 뭐고, 사는 곳이 집이고 고향이겠죠. 여기 내려와서 배운 것이 얼만데.

배워요?

일테면 외지 사람, 그러니까 도시 사람들이 와서 감탄하는 잔디밭이 얼마나 수고로움의 대가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지요. 하루 세 번, 새벽 한낮 초저녁에 십분 씩 자동으로 스프링클러를 조정해 놓으면 그저 자라는 것이 잔디밭인 줄 알았죠. 게 다리 같이 퍼진 바랭이풀도, 그냥 보면 예쁜 민들레도 잔디밭에선 불청객이죠. 어찌 보면 사랑스런 강아지풀도 고맙지 않죠. 클로버는 어떻고요, 소녀시절엔 행여 네잎클로버라도 찾아볼까 반기는 것 아니었어요? 그런 잡초들, 손으로 하나하나 골라내야 잔디밭이 유지되지요. 아무려나 담장 대신 둘러선 나무들이 얼마나 대단한 꽃들이며 향기를 뿜어주는지. 대문 바로 곁이 조팝나무죠, 오늘 여기 이러다 말겠네요. 다음엔 4월 돼서 오세요. 산야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내 정원에 와 있지, 그 윤기 나는 밤색 가느라단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피는 하얀 꽃잎들. 바람만 우수수 불어도 죄 저버리지만 한동안 얼마나 아름다운데. 이런 걸 서울 복판 살면서 알았겠어요?

조팝나무, 상상이 안 가는데요?

이건 그냥 사치스런 말이라 할지도 모르겠네요. 강남에서라면 절대로 몰랐을 것들로, 그래서 풍요롭다면 좀 거하고, 폭이 넓어진 셈이죠. 물론 감탄할 일만 있는 건 아녜요. 실은 쓸쓸한 일이 더 많아요.

쓸쓸한데도 이곳이 더……?

쓸쓸하죠, 사는 것이, 다. 저이야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그렇다 치고요. 멀쩡한 할아버지 한 분도 벌건 대낮에 혼자 정자에 앉아있어 보았자 나무둥치 신세가 되죠. 바로 저 아래 길가 어느 집 나락 말려놓은 걸 웬 젊은이가 트럭 대놓고 착착 거두어 가더래요. 아, 저 집은 아들인가 조칸가 일이랑 도와주려고 오니 좋겠다, 그랬다는데요. 그거 온통 실어가 버린 날강도였죠. 여기 살면 인심이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사는가, 바닥을 보는 것 같을 때도 많아요.

아무래도 가난 때문에…….

가난이 처음 문제겠죠. 그러다 가난 말고도 가정 문제들이 심상찮게 생겨요. 여기 바로 이 아랫집도 지금 비었지요. 아저씨가 후두암으로 세상 떴어요, 자식도 없이. 아들 딸 데려온 여자랑 늦장가 식으로 합쳐 살았다는데, 여자가 좀 함부로랄까, 자격지심이랄까. 동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하면 그쪽이더라고요. 아무튼 아저씬 일해서, 노동일이죠, 돈 모이면 그 동안 각시 몰래 나한테 조금씩 맡겨서 저축을 했어요. 동생이 특히 주의를 주곤 했더래요, 형한테. 여자 좋은 일 말고 조카한테 뭐라도 남겨줘야 죽어서 찬물이라도 얻어먹을 것 아니냐고 채근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가 임자라고 그러고. 그 얄팍한 살림에도 쪽박 깨지는 소리가 나서 보기 안됐더라고요. 몇 년 그렇게 앓았는데, 결국 세상 뜨자 대충 초상치고는 여자가 동넬 뜨더군요. 동생 예감이 맞았죠. 데려온 애들은 벌써 결혼해 나갔고, 단 둘이 살다가 그냥 가버리더라고요. 이장한테 전화해서 헐값에 집 내놓으란 소리만 했다는군요. 그런 소리 듣고는 내가 갖고 있던 통장을 조카를 줘서 제사라도 지내게 해야 할지, 참 어려운 상황이 되더라고요. 그 여자, 가만있었음 집값 다 되는 저축 돈을 받을 뻔 했었는데, 집은 그냥 살고.

그러니까 가난이……. 우리가 부유함에 너무 애착하면 부의 노예라 하지만, 교황님 말씀이죠, 결국 가난이 모든 것을 망치는 거죠. 그러니 부유함에 돈에 집착할 밖에요. 축적된 돈은 계속 돈을 낳고, 돈은 계속 돈 쪽으로 몰리고. 쇳가루가 지남철에 쏠릴 밖에요.

그래요, 가난이 일상이 되면 뭐가 뭔지 아예 모르는 것 같아요. 보조금만으로 연명하는 사람들, 뭐라는지 아세요? 나는 요로코롬 나라에서 믹인게로 먼 걱정잉가. 정부다 군청이다 면사무소다 그런 개념은 별로 통하지 않죠, 불필요해요. 가끔 봉사단체에서 연탄이나 반찬들 보내주죠. 몸 그런대로 움직이니까 들판에서 이런저런 일 거들면서 함께 먹고 푸중가리도 얻고.

푸중가리요?

아, 푸성귀. 푸성귀를 그리 말해요. 우리 한 선생님은 서울분이겠지요?

서울은 아니고, 평택요.

평택이면 서울이지요, 경기도 살면 다 서울 사는 거죠. 전남 어디 살아도 서울 가면 광주사람이라는데요 뭐.

 

아, 그렇구나. ‘나라에서 믹인게로’ 우리나라 좋은 나라 투표가 나오는 것이구나. 가난은 의식마저 죽인다. 적선으로 의식을 죽인다. 그나마 월급쟁이한테서 세금 걷어 밑바닥에 적선함으로써. 부자는 부를 애착하기를 멈출 리 없고, 기꺼이 부의 노예임을 즐긴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지수가 높단다. 절대적 가난은 절대적 불행이다. 적선은 가난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도구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먹먹한데 노인이 꼼지락거린다.

 

 

남순이넌 왜 안 온당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넋 놓고 있던 노인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어쩜 좋아. 할매, 남순이 서울 도로 갔다고 했잖아. 남순이는 서울이 좋다잖아.

아니여, 나랑 끝까장 여그 산다고 그랬는디.

남순이가 좀 아파서 거기 서울 병원에 있다니까 그러네. 뭣보다 동네 사람들하고 잘 살라고, 그러고 갔다니까 그래. 맨날 남순이만 찾으면 동순 씨도 병원 보내버릴까 보다, 거긴 맨날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하긴 무릎 아파서 잘 못 걸으니 정말 병원에 가야할지 몰라. 보건소 선생 불러줄까?

싫여, 나 암시랑토 안흔디. 집에 갈겨.

금방 여기서들 밥 차릴 건데 왜 가. 오늘 무궁화배추 무친다니까.

무궁화배추 맛있제 잉. 삼천리강산에~

그러고는 노인은 페트병에 물을 채운 베개를 모로 베고 저쪽으로 드러눕는다.

 

 

해가 지는 모습이 어떤 것일지.

나는 삼천리강산에~ 그것이 뭔가 묻고 싶었는데, 민 여사가 불쑥 해 지는 이야기를 했다. 연초록 잎들을 뚫고 비치는 여린 해가 중천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뜬금없다.

해가 꼴깍 산 너머로 넘어가기 까지는 어떻게 살았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렇죠?

해 지는 이야기는 왜 새삼스럽게요?

이 사람을 좀 봐요. 더 심해지면 이장도 어쩌지 못하고 요양원 보낼 거라 그러고 있고. 저기 저 목련, 백목련 피길 누구나 기다리죠. 놀랍게도 큰 꽃잎이 피면 누구라도 압도당하죠. 그러다 봄비라도 주르륵 내리면 절반은 시들어 붙어있지요. 조금씩 조금씩 죽는 거예요. 바닥에 나뒹굴어서도 얼른 죽지 않죠, 두툼한 살 때문에 그렇죠. 차라리 우수수 지는 꽃들이 더 예뻐요, 후두둑 지는 동백이 서럽다 해도 차라리.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랬나요, 송창식 노랜 잘 모르죠, 아마?

참다가 참다가 참을 수 없어서 뚝 떨어지는 꽃이 동백이라 했던가, 시인 김용택의 말은. 동백이건 목련이건 한 때가 있지 않았나. 그냥 풀꽃, 풀꽃처럼도 피어보지 못한 삶도 있는데. 동순 할머니가 아직 회갑도 안 된 나이라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 민 여사가 왜 말을 좀 편하게 놓나 했더니 실제로 더 젊다는 말이다. 훨씬 늙은 몰골을 하고서. 무엇이 이렇게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는 삶을 점지하는가.

 

부유함에 집착하는 노예들은 당당하게 삶을 즐긴다. 평생 부유함 근처는커녕 그림자도 못 밟고 스러질 생은 뭔가. 동순 할머니의 경우 여동생의 트라우마에서 전염된 간접피해치고는 결과가 참담하다. 물론 그 YH사건 현장에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전부 다 후유증으로 폐인이 된 건 아니다. 사건 당시에 임신 중이던 몸으로 활동했고 그 신념으로 일생을 살아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경우도 있다고, 어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다수는 다잡고 살아남았지 않은가 말이다. 직접은 아니라도 그 여세를 몰아 유신정국을 흔들었고, 억울한 죽음도 늦게라도 인정받고 동료들과 시민들의 추모를 받고. 튼실하게 살아남지 못한 책임은 당사자의 신체적 정신적 나약함에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나약함은 죄인가. 모르겠다. 가난은 죄인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괜히 맘 아픈 이야길 했나 보네요.

내가 멍하니 있었던지 민 여사가 물었다.

아, 아뇨. 저도 알 만큼은 알죠. 그런데 여긴 굴뚝새는 없나요?

웬 굴뚝새요? 요즘엔 겨울에도 잘 안 보이던데요. 여긴 소쩍새다 쑥국새다 그런 얘기가 많죠. 솥이 적어 굶어죽었느니…….

시어메 무서워 쑥국도 못 먹고 죽었느니, 그런 이야기. 참 서러운 상상이죠?

나는 얼결에 튀어나온 굴뚝새 이야기를 감추려고 말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저 아래서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벌써 이른 점심시간인가 보다.

나 좀 봐. 여긴 새벽밥 먹고들 들에 나가니까 점심이 일러요. 내가 오늘 작품 이야기는커녕 집 안으로 구경도 못 시켜드렸네요. 그런데 점심 같이 하고 가실래요? 점심 후엔 나도 읍내 나가야 해서.

아뇨, 오늘은 자료만 주셔도.

그래요, 그럼. 저기 차 안에 있어요. 검토해 보시고 나서 한번 만나게요. 난 책 내고 그러는 것 별 뜻이 없는데, 남편이 자꾸 권해서. 담엔 차분히 작품들 보시면서…….

검토라뇨, 잘 감상해보겠습니다.

 

몇 걸음 아래로 함께 걸어 내려오는데 다시 노랫소리가 들린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은 갈고 씨를 뿌린다 ~.

모로 누운 채 말도 안 되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사람, 여기 어느 한적한 마을, 아직은 추운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봄, 마을 정자에서 넋을 놓고 있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되었나. 먼저 떠난 동생의 무서운 기억이 전염되었을까. 무서움이 얼마나 무서우면 전염이 될까.

조팝나무 꽃 필 때 오세요.

연락 하셔요, 저는 토요일이 좋은데요.

 

손에는 가벼운 유에스비를 받아들고 맘에는 모로 누운 앙상한 그림자를 무겁게 안고 발걸음을 옮긴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벌써 들리지 않을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왔는데도 귓가에 그 요상한 멜로디가 아스라이 따라온다. 새봄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일까, 정말 누구에게나.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6. 14. 07:38

아직 발표되지 않은 단편이다. 너무 극심한 정신적 상태 이후 빨리 투고라도 해 두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시켰다. 가을에 나올 작품을 미리 보내라고!  - 편집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7월호에 소설 작품 하나를 더 싣게 되어 곧 빛을 보게 된다고.

<월간문학> 2015년 7월호 (통권 557호), 171-190쪽.

 


 

 

 

굴뚝새

 

 

굴뚝새 굴뚝새

어머니 -

문 열어놓아주오, 들어오게

이불안에

식전 내 - 재워주지

어머니 -

산에 가 얼어죽으면 어쩌우

박쪽에다

숯불 피워다주지

- 정지용

 

 

이다. 아직 연휴 마지막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는 중이었다. 일하지 않고, 통장의 잔액 생각하지 않고 지내는 며칠,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아무렇게나 뒹구는 방바닥은 너무도 편했고, 세상은 아득했다. 새 지저귀는 소리에 신선한 아침을 맞는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아버지가 먼저 마당에 계셨다.

금실이도 들었냐? 요 조그만 놈들이 굴뚝새 아니냐?

참샌지 굴뚝샌지, 구별이 안 가는데요. 벌써 날아가 버렸으니.

난 저 가지에서 종종이는 걸 얼핏 보았다. 소리가 다르지 않더냐. 길고 가느다랗지만 꽤나 적극적인 울음소리다. 그러니 굴뚝새다.

아버지, 서양에선 벌써 성 스테파노의 날이면 로빈에게 쫓겨 간다던데요, 크리스마스 다음날. 새해의 새는 로빈이라고.

뭐야. 꼬마 새들이 그런 터 바꿈을 하는가? 것도 그리 추운 겨울에? 우리나라엔 겨우내 굴뚝새가 있었나 보더라. 그러니 굴뚝새 산에 가 얼어 죽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시인도 있었지.

누구?

응, 정지용.

어머나, 찾아 봐야겠어요.

옛날 말이지, 근년엔 굴뚝새를 보았다는 사람들도 드물더라. 아깐 분명 굴뚝새였는데.

그랬다. 옛날에는 굴뚝새가 심심찮게 있었다.

고등학교 때이었던 것 같다. 새 학년이 되어 얼마 안 된 봄, 아버지가 굴뚝새 이야기를 하셨던 생각이 난다. 포항공대였던가 경북대학교였던가, 아무튼 어딘가, 그땐 교직원 출퇴근용으로 대형버스가 다녔는데, 하필 버스 엔진 사이 어딘가에 굴뚝새가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였다. 알을 여섯 개나 낳아놓은 굴뚝새 때문에 부화할 때까지 버스운행을 중지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아버지는 신문에 이런 좋은 뉴스도 났구나, 그러셨다.

왜 하필 이름이 굴뚝새인데요?

굴뚝청소부처럼 더러운가요?

소쩍소쩍 울면 소쩍새, 굴뚝굴뚝 하고 울면 굴뚝샌가요?

쏟아지는 우리들의 질문에 아버지 어머니는 한참 웃으셨다.

뭐, 굴뚝굴뚝 하고 운다고?

아버지는 그냥 참새 비슷한 작은 새인데, 좀 더 검은 갈색으로 색깔이 짙고, 또 굴뚝 근처에서도 보였으니까 그리된 것이겠지, 라고만 하셨다. 그러고서 몇 날 며칠 우리도 굴뚝새를 찾아보자고 나섰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까맣게 잊으신 건가.

아침이 빠른 줄 알고 부녀가 밖에서 노시나?

어머니가 내다보신다.

예, 얼른 세수만 하고요. 아버지랑 먼저 시작하셔요.

 

늦은 아침 밥상. 누군가 말문을 열기까진 조용하다.

오후엔 둥지로 내려갈 마음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는 며칠 더 쉬다 가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신다. 개강이 아직 며칠 남은 걸 아신다. 나는 굴뚝새 때문에 온통 굴뚝으로 정신이 가 있다.

아버지, 고공 굴뚝에도 굴뚝새가 있을까요?

웬 굴뚝새?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신다.

고공 굴뚝이라니? 아버지도 의아해 하시기는 매한가지다.

아뇨, 요즘엔 굴뚝들이 높잖아요. 공장 굴뚝들이…….

참 실없는 녀석이네.

아버지는 겨우 10킬로 떨어진 지근거리 고공 굴뚝에 올라가 있는 쌍용차 농성자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나 보다. 버스 속에 알을 낳았던 굴뚝새 이야기도 부러 잊으신 모양이다.

아버지, 어쨌거나 평택이네요?

평택이라니. 무슨 말이냐, 밑도 끝도 없이.

쌍용차 굴뚝 말이어요.

너도, 꼭 굴뚝농성 이야기를 끄집어내야겠냐. 그걸 누가 무슨 수로 끝내냔 말이다.

예. 지금도 사실 누구라도 굴뚝을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죠. 요상하게 알 수 없는 일은, 아버지, 철탑이건 굴뚝이건 고공 농성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상황이 더 어렵게, 무지 더 험하게 변하고 있으니 말이어요.

더 험하다고?

예. 새로운 무서운 단어들이 도입된 때문이잖아요.

무서운 단어?

손해배상, 간접강제금 - 그런 단어들은 처음에는 언뜻 이해하기가 어려웠지요. 더 옛날엔 똥물을 끼얹을지언정 - 이 말은 사실이었대죠? 서울 청계천인가 어딘가에서 방직공장 여직원들한테 말 그대로 똥물을 퍼부었다고, 건장한 남자들이 그랬다고, 신문에도 났으니까요. 또 여자들 반나체 시위를, 설마 벗은 우리를 끌어내지는 못하겠지 믿고 그랬겠죠, 그래도 짓밟고 막무가내로 끌어낸 일은 있었을지언정, 그때는 손배라는 단어는 없었잖아요? 저 아직 졸업하기 전 일이었죠, 기억나요.

그거야 그렇지. 일 안하고 농성한다고 사람들한테 매기는 손배는 그때만 해도 없었던 단어다, 맞다.

그땐 자살자도 없었고.

자살은 시대병이다.

손배 압박이 죽음으로 내몰잖아요. 구타나 폭언보다, 어쩌면 성희롱보다 무서운 게 손배라죠. 똥물보다 무서운 단어. 이 참혹한 판결로 아예 노동자들이 줄줄이 목숨을 끊잖아요. 여기 쌍용만 해도 그때 백 명 이백 명 무더기 해고 이래 스무 명도 넘게 죽어갔다죠?

넌 맘 아프게 뭣 하러 그런 소릴.

어머니가 화제를 피하고 싶으신가 했더니, 웬걸, 뜻밖의 이야기를 하신다.

파탄 난 집이 한둘 아닌 걸 누가 모른다니. 거기 차장인가 아내 죽고 본인 죽고, 그런 집도 있어. 쉬쉬 하고 덮고 살지. 그래야 사니까.

어머니, 설마 아내가 먼저. 하긴 궁핍을 못 이겨 죽는 데는 차례가 있겠나요.

그 집은 복직이 된다 된다 그러는 사이 아내가 우울증 와서 그러고 말았더래. 원래 여기 사람이었대, 안중읍, 남자는 타지에서 왔고. 어째도 뛰어내리는 사람은 못 말리지. 뛰는 순간 끝나는 것이니까. 정 죽고 싶으면 그것이 확실하기도 하고.

당신은 애 앞에서…….

아버지, 저 애 아녀요. 잘 알아서 듣습니다.

아니, 내 말은 남은 사람에게 타격이 젤 클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눈곱만치의 망설임이 없었다는데,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싹할까 말이다. 그러니 뒤따라 죽거나.

설마 그 남편도 자살을?

아니다,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조사는 나왔다. 모르면 돌연사라고 하지 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해도 남겨진 애들은 어쩌냐. 그때 중고등 학생이던데. 벌써 몇 년 된 일이다. 정리해곤가 되고 일이 년, 그쯤이었을 거다. 그 뒤로도 …… 너도 신문 보면 다 알겠지. 허나 관두자, 그만. 어쩌겠냐.

아버지는 오히려 피하시는 쪽이고, 어머니가 속말을 하셨다.

거기 칠원동 동광아파트엔 꽤 여럿들이 살았어. 저 위 장미아파트 살던 사람도 둘이나 그리로 갔더랬어, 그거 팔고 조금만 대부 받으면 되었으니까. 장미는 좀 좁았대, 지은 지 한 십오 년 되었나 그때. 새로 지은 동광아파트는 공장까지 10분이면 다니니까 다들 좋아했겠지. 잘 나가던 쌍용이 사고 터질 줄 누가 알았겠니. 입주해서 한 오년 지나서 탈이 난 거지. 그러다 보니 그곳이 피해도 많고.

그럼 그 두 집도?

그게 어떻게 길이 다르더라, 글쎄. 아버지가 한숨을 섞으셨다.

첨에는 팀장한테선가 모두한테 문자가 왔었단다. 잘 선택하라고. 그때 그 사람이, 가끔 왕래하던 박 씨 말이여, 폰을 열고 보여주더라고. 띄어쓰기도 하나 없이.

 

 

인사위원회및손배소준비완료노조강행에따른개인피해최소화위해냉정한판단부탁드림다 팀장

 

아버지가 빈 손바닥을 열고 보시며, 쏜살같이 읽었다. 마치 폰에 적혔던 문자를 그대로 보여주시려는 듯이.

박 씨가 노모 때문에도 많이 망설이며 내게 보여주더라고. 형도 먼저 보내고 조카들에 자기애들 올망졸망, 이래저래 박 씨가 짐이 많았어. 결국 냉정한 판단을 해서 살아남은 것 아니냐. 그때 판단이 달라서 농성장에 들어간 강 씨는 버텨내지 못했지. 몸은 약하고 맘만 강한 사람들이 더러 있더라.

그럼 병으로.

그렇지 뭐. 크게 말해서 굶어 죽은 것이지. 이천이 넘는 사람들, 공장 문 닫으면 만 명이 굶으라는 거 아니냐. 굴뚝농성은 그때 처음부터 있었다. 점거농성이 시작되었지. 실제로는 천명 넘게 정리해고 통보가 나갔다고 하니까.

왜 그렇게 갑작스런 정리해고가 터지나요?

쌍용차 문제도 시작은 아이엠에프 아니겠냐. 아버지도 경제를 통 모른다만, 쌍용자동차가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서 중국 기업에 매각된 게 나락의 시작이었겠지. 투자는 미루고 기술이전만 노린 것이었는지, 그 속을 누가 알랴. 몇 년 하다가 타산이 안 맞다 하면서 손을 떼어버리면 그만 아니냐.

잘 나가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 측에서야 준비된 시나리오가 있겠지. 경영위기를 서류상으로 증명하면 문 닫을 권리가 생긴다는데. 사람 내쫓는 것도 권리라니, 세상이 그렇다. 아버지가 가르친 수학의 숫자하고 사업 판에서의 숫자는 생판 다른 형제들이더구나. 직원들 입장에선 청천벽력이지. 두 달 넘게도 파업이 흩어지지 않아서 오죽하면 옥쇄파업이란 말도 생겨났을까. 그 현장을 지켰던 사람들, 오백 명도 넘었는데 상당수가, 한 백 명이 해고된 사람들이 아니라 ‘산 자’였다더라. 그것이 동지애 아니냐.

‘산 자’라뇨? 그럼 해고된 사람은 ‘죽은 자’?

그렇게들 불렀어. 입이 방정이라고, 곧 진짜 죽은 자가 나오기 시작했지. 그해 여름 벌써 농성장에서 투신자살 사건이 났지. 그 노조간부 부인이.

아버지, 스트레스로 정말 죽음이 닥칠까요?

그렇다지. 스트레스 호르몬이 독이 되는 거라 하지 않던.

벌써 몇 년째네요. 지난겨울 다시 굴뚝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어찌 될까요. 법원이 회사가 낸 퇴거단행가처분신청을 손들어주고는, 농성을 풀지 않음 한 명당 하루 50만원씩의 간접강제금을 내라고 판결했다니, 그걸 어쩐대요. 또 ‘손잡고’에서 이들의 벌과금을 모금해야 하는지.

 

손잡고, 그게 뭐라니?

어머니는 모르셨나 보다.

‘손잡고’란 단체예요. 장발장범죄 있잖아요, 배고파서 빵 훔치는 그런 경범죄. 그런 걸로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장발장은행’을 만들었다잖아요. 벌금형이란 원래 징역을 면케 해주려는 것인데, 100만원 벌금 못 내면 20일 감옥 가야죠. 남은 사람들 살 길도 막막해지고. 그런 극빈층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물론 이자 없이요.

그런 은행도 있구나. 그런데, 이 엄만 뭘 잘 몰라도 쌍용차 굴뚝에 돈이 과한 것은 분명하다 싶다. 안 내려온다고 하루 벌금 50만원은 누가 정했다니. 감옥 품도 5만원이라면서. 저 두 사람이 하루 백만 원씩을 날로 날려가면서…….

어머니는 거의 한숨을 쉬셨다.

어머니, 사람들이, 그냥 보통 사람들이 4만 7천 얼마씩 모으는 운동도 있었어요. 왜 어떤 주부가 앞장서서, 작년에.

엄마도 내볼까 했는데, 쑥스러워서 어정거리다가 보니 늦었더라.

어머나, 엄마가요? 그럼 저 주세요, 제가 했는데 엄마 몫으로 할게요. 그 노란봉투캠페인에 4만 7천명 넘게 참가해서 11억 이상을 모았대요. 삼백 가구엔가 긴급 생계비며 의료비를 지원했다잖아요.

늦게사?

한 사람당 수십억 원 손배가 처분되면 무슨 수로…….

아버지는 혼잣말로 머리를 내저으셨다. 너무 큰 숫자는 상상도 안 간다만, 개개인 앞에 몇 천 몇 억 그러면 그냥 머리가 아프구나.

어쩌면 이간질도 동원하고요.

이간질이라니.

노조를 탈퇴하면 손배를 철회해준다 뭐 그런 비슷한 거, 처음부터 그랬겠죠.

파업은 결국 불법 낙인을 찍히는구나.

죄송해요, 굴뚝 이야기 꺼내서.

허허, 그게 다 굴뚝새 때문이었잖냐.

 

 

식은 커피 잔을 들고 내 방으로 건너와 앉았다. 아침에 맑던 하늘에서 어느새 비가 흩뿌리자 눅눅한 공기에 주눅이 든다. 습기에 무너지기 쉬운 몸 따라 맘도 우울해진다.

얼마나 절망하면 뛰어 내리는가. 남편이 실직하면, 복직 가망이 없으면,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으면, 최소한의 생계유지가 안 되면, 인간적 품위를 운운할 수 없게 되면…….

나는 실직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비정규직.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나, 최소한의 생계유지가 되나, 인간적 품위를 운운할 수 있나…….

아버지가 뒤따라 들어오실 것이다. 내가 짐을 챙기는 날이면, 학기 시작을 앞두고 짐을 싸는 날이면 아버지는 가만히 용돈을 주신다. 마흔이 된 박사 딸에게. 함께 살지 않으니 맛있는 것 함께 먹지 못해서 주는 용돈이라고 하시면서. 식욕이 생의 의욕이다!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용돈을 주신다. 내가 내 수입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을 형편이 안 되는 것을 아시는 거다. 4월 5일이 되어 첫 달 3월분 강의료를 받기까지가 가장 힘든 날들이라는 것을 아신다. 학기 초에는 늘 돈이 모자라는 것을 아신다. 어머니도 부식을 양껏 싸 주실 것이다. 불혹의 딸한테 부모님이 내심 밥걱정을 하신다니.

금실이 일하니?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들어오신다.

오늘은 날도 궂은데 내려가려는 것 아니지?

예. 주말 피해서 갈게요.

그래, 그럼 천천히 준비해도 되겠구나.

뭘 또 하시려고요. 설음식들 많이 하셨는데 대충 가져갈게요.

그런 건 길게 밑반찬이 안 되는 것들이지. 너 보낸다고 마른 반찬들 해 놓으면 네 아버지도 옛날옛날 도시락 생각나시는지 좋아하신다. 가끔은 챙겨 드시기도 해. 엄마가 정해 놓고 나가는 날도 있다, 요새는.

어머나, 다행이세요. 뭘 배우세요, 아님?

배우는 것 맞는데, 아직은 말 안 할래. 네 아버지한테도 뭐라고는 말 안 했다.

문자 울림소리가 난다.

뭐 오는구나. 그래, 좀 쉬어. 어머니는 자리를 뜨신다.

 

아직 평택? 쌍차 아저씨들 굴뚝 내려오긴 힘드네. 어쩌나?

국문과 박 선생 문자다.

무슨 흰소리!

지난 번 장난 말 맘 걸려서. 아래 꽃집 왔는데, 집에 없다 느낌 확 오네요. 썰렁한 게.

돗자리 까세요! 아직 평택, 박샘 꽃 사는 것 무관. 끝.

티볼리 잘 되는데, 효리 씬 쇼 벌이나?

끝이라는 말도 무시하고 계속 문자를 보내는 그에게 보낼 정답은 무답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돗자리 깔라고 한 것은 진심이었다. 굴뚝새 소리로 아침을 깬 하루가 굴뚝으로 우울하던 참이었으니, 박 선생이 신 내린 것은 사실이다. 티볼리 운운하면서 굴뚝농성 이야기를 건드렸으니 말이다. 사실 지난 연말에 우연히 두 번 거푸 자리를 함께 했을 뿐,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것이 그를 내가 사는 원룸 옆 꽃집에서 만난 일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그가 꽃집에 또 나타난 것이 나하고는 상관없을 터였다. 그것보다 정말 맘에 걸렸던 게 있었나 보다. 헌재 판결 다음날엔가, 그가 불쑥 우리 이 ‘두려운’ 시대에 몸 엎드리고 살자고 이죽거리는 통에 내가 퍼뜩 그럼 쌍용아저씨들은 어쩌냐고 쏘았고, 그는 ‘효리’가 있지 않냐고 장난스레 답해서 썰렁했던 일말이다. 그렇다고 내게 계속 미안해 할 필요까진 없는데. 내 말은 그가 나의 판단을 중요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저렇게 긴 명절 휴가가 끝났다. 책 몇 권은 주문해서 내 숙소로 배송해 놓았다. 어머니가 싸주신 음식들만으로도 어깨가 휠 만큼이다. 이것들로 한참은 불행감을 모르고 살 것이다. 먹을거리가 많아서? 그보다는 혼자를 위해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낭비적이고 한심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다. 몸을 돌보는 시간을 더 아깝다고 생각하는 한 나는 아직 허영기에 들려있음이 분명하다. 동물에게는 음식이 최우선 과제인 걸 부정하려는 동안은.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은.

 

봄 학기. 어김없는 시작이다. 학교는 행복하지 않은 청춘들로 우울하다가 봄이면 관성으로 활기를 되찾는다. 멋모르는 새내기들 덕이다. 나로서는 운 좋게도 전공강의를 얻었다. 불문과며 몇 학과는 퇴임하는 교수가 있어도 새 교수인원 보충이 없는 지 오래다. 국립대학이라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세 강좌를 맡았던 교수가 떠난 자리, 전공필수는 다른 교수가 가져갔고, ‘프랑스혁명과 문학’과 ‘사실주의 소설’이 남겨져 있었다. 루소 전공이라는 구실로 그런대로 시대가 맞아 내게 떨어진 강의들이니, 충실해야 할 과제가 생겼다. 집중해야 한다. 거의 하늘로부터의 선물 아닌가.

그렇지만 요 몇 년간의 관심사가 프랑스에서 멀어지고 있었음도 사실이다. 사실 내가 불문학도의 멋진 꿈을 가지고 대학에 다니던 시절, 곧 이어 화려한 금의환향을 꿈꾸면서 파리의 유학시절을 보내는 동안 까맣게 몰랐던 현실사회의 단어들, 그것들을 여기 지방대까지 밀린 이후에야 뒤늦게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고는 하나, 원래 시골내기가 파리에 뚝 떨어져서 받았던 충격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이 좁은 나라 안에서도 이만큼의 다발성 충격이 가능할 수 있다니.

 

쌍둥이 - 갑자기 엉뚱한 쌍둥이 형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몸은 일란성이라서 꼭 닮은, 정신은 분열된 둘. 파리에 있을 때, 독일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단편, 쿠젠베르크이던가, 아주 짧은 단편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분할된 지식」이 제목이었던 것 같다.

쌍둥이 형제의 아버지는 무한한 지식욕으로 아들들에게 대백과사전을 암기시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페터에게는 알파벳 ‘에이’에서 시작하여 ‘엘’까지를, 파울에게는 ‘케이’에서 ‘제트’까지를 통달하게 하였다. 결과는 완벽했고, 쌍둥이 형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지식을 보충하여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쌍둥이들이 소통해야 할 경우였다. 그들은 ‘케이’에서 ‘엘’ 사이만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작은 영역이 그들의 천국이 될 수 있었을망정, 파울은 ‘에이’로 시작하는 사과도 몰랐고, 페터는 ‘피’로 시작하는 복숭아를 몰랐다고.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작가는 동서 진영의 대립을 풍자하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불통을 말하려 했겠다. 아니면 첨예하게 다른 목적을 가진 듯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불통을. 오늘날이라면 부자와 빈자의 불통에 해당되겠다.

어쩌면 세상은 두 개의 줄기로 꼬여있다. 노동 문제를 의식과 무의식에서 겪으면서 살아가는 한 줄기, 노동의 ‘노’자도 모르면서 성공 가도에 가볍게 안착한 다른 한 줄기. 두 줄기는 죽어라 공부했지만 소통을 모르는 쌍둥이 형제들처럼 무섭게 다른 머리와 가슴으로 하나의 세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 줄기는 가늘지만 무적의 강철로, 다른 한 줄기는 엄청 두껍지만 푸석한 지푸라기로 서로 감겨있다. 강철 줄기가 버텨 서 있으니 지푸라기 줄기도 서 있는 모양새를 낸다. 선진 대한민국의 현재는 강철 줄기로 하여 서 있다.

속으로는 강철과 지푸라기는 붙지 않고 따로 돈다. 그렇다. 너무도 그렇다. 청춘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젊은이들 곁에, 선진 대열에 들었다는 산업사회의 휘황찬란함을 누리는 동시대 젊은이들이 존재한다, 소수일망정. 부유함 또는 가난함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주연과 조연의 대비가 아니라, 아예 배우와 배경의 갈림이다. 단 한 번도 배우가 될 수 없는, 하찮은 조연도 될 수 없는 존재. 나무나 기둥 또는 벽면, 아예 무대 바닥이라는 이름의 존재. 어떻게 배울 만큼 배우고 노력할 만큼 노력하는데 <인생>이라는 제목의 연극에서 조연도 될 수 없는가.

 

전공강의, 다시 전공을 강의하게 된 기쁨은 첫 시간을 앞두고 며칠을 뒤숭숭하게 했다. 강의계획서를 이미 내놓았는데도 그랬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은 애매한 강의다. 랑송을 따르자면, 1830년대의 『고리오 영감』이나 『적과 흑』을 건너 1880년대의 『제르미날』도 사실주의라고 하는 용어 없이 설명된다. 다만 발자크가 여전히 대단한 낭만적 과장 속에서도 보통 사람의 비속한 영혼, 부르주아나 서민의 풍속,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현실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 사실주의를 열었다고 평가한 점에서 『고리오 영감』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대미는 졸라의 『제르미날』이 되어야 한다. 영화로도 보일 계획이다. 프랑드르 탄광촌, 그 일상과 노동운동의 진실은 어떤 의미로든 충격을 줄 것이다.

수강생들은 열 명을 겨우 넘겼다, 출석부 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열은 또는 스물은 얼마나 무서운 숫자인지, 폐강을 경험해 보지 않은 강의자는 모른다. 전공은 열 명, 교양과목은 스물이면 강의 개설 최소조건을 채운다. 이것도 아마 국립대학이라서 누리는 호사일 거라 생각한다. 지금 모교를 떠나온 지 한참 지나서 사정은 잘 모르지만, 거기서는 열 명을 두고 강의 개설을 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문학 비인기 학과들 죽이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대학들도 버젓이 신입생들을 맞고 있으니까.

첫 시간. 학생들은 깨끗한 책상 앞에 빈손으로, 아니 책상 아래 놓인 손에 휴대전화만 들고 앉아 있다. 강의계획서를 인터넷으로 미리 보고 왔거나 프린트해서 왔을 가능성이 적다.

프랑스에, 파리에 배낭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 맞죠? 기회가 된다면 무엇부터 보고 싶나요? 퐁네프? 에펠탑? 노트르담? 오르세미술관에 가거든 근처의 로댕정원을 가보세요!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을 올려다보면, 다시 한 번 의아하게 되죠. 오른팔 팔꿈치를 왜 왼쪽 무릎에 대고 앉았을까 하고. 그것 말고도 20년 걸려 만들었어도 미완성으로 남은 <지옥의 문> 등 여러 조각품들 다 유명하지만, 거기 <발자크 상>을 봐야 해요. 발자크 사후 40년쯤 지나 프랑스문인협회가 로댕에게 발자크의 조각상을 주문했어요, 에밀 졸라가 발의했지요. 거대한 비뚤어진 몸으로 서 있는……. 사실 발자크의 작가로서의 노동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면 생계형 작가인 셈이죠. 그러나 적당히 대충이 아니었죠. 하루 평균 열두 시간씩 글쓰기 노동을 했답니다. 시간외 수당요? 물론 자영업이니 그런 것은 없었을 것이고, 하루에 커피를 60잔까지 마신 적도 있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그런 기록도 있답니다. 결과로서 91편의 총서 『인간 희극』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반응이 없다. 한 인간이 91편의 소설을 썼다고 해도.

등장인물이 몇 명이나 될 거라 생각하나요? 가장 비슷하게 맞히는 학생에게 평소점수 플러스 2점 줄까요?

낚시를 던져도 무응답이다.

2천 명이라고는 상상을 못하죠, 2,472명! 그럼 혹시 우리가 마지막에 읽을 『제르미날』은 들어 봤죠? 영화도 아주 유명하니까. 광산촌 노동자들의 현실과 꿈을 담은 수작이죠! 지식인의 눈으로 본 부정의와……. 노동운동의 의식이 싹터 나오는…….

입을 닫기로 맹세들을 하고 온 모양이다. 학생들의 대응을 끌어내기에 아직은 어떤 매력도 마력도 통하지 않는다. 아직은, 이라고 어금니를 꽉 물고 계속한다. 한 시간 못 버티랴, 밤새 준비한 게 얼만데.

암튼 이번 학기 사실주의 소설 작품은 『르 페르 고리오』 읽기에서 시작하겠습니다. ‘페르’는 아버지이지만 ‘고리오 영감’으로 번역되었죠. 먼저 번역본을 숙독하고 주말까지, 그러니까 일주일 뒤 오늘 시간 전까지, 고리오 영감과 대학생 라스티냐크라는 두 인물에 대한 분석부터, 첨부파일로 작성해서 이메일 하세요. 반드시 첨부파일로.

얼마나요? 길이는요?

첫 반응이다.

처음이니까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세요. 하나 더, 선생님은 인터넷 검색의 명숩니다. 잊지 마세요!

마지막 말은 위협이었다. 자신의 글을 써오라는, 베껴오는 글들을 다 잡아낼 능력이 있다는 허풍이었다. 진실을 외면하고 돈으로 사랑을 사려는 비뚤어진 부성애의 근원에서 리어왕을 발견할지, 야심만만한 젊은이가 상류사회를 대하는 전략 등을 분석하면서 다음에 등장할 쥘리엥 소렐의 선구를 볼지, 그건 주말에 쌓일 리포트들에서 찾아 볼 일이다.

 

후문을 막 나서면 좋은 식당이 있다. 어쩌다 구내식당을 피하고 싶을 때, 돈가스, 웨지감자, 스파게티 등을 기분 좋은 값에 푸짐한 양으로 주는 곳인데, 커피가 없어서 더욱 좋다. 무심코 시켜 먹다가는 커피값이 밥값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커피는 봉지만 있음 강사실의 온수로 해결될 것을.

오늘 바깥을 택한 것은 한국어실 이유민 선생이랑 신 선생, 그렇게 셋이서 볼 생각이었다. 이번 학기 인문대 강의를 하게 되었으니 인사 비슷하게, 아무튼 일부러 보려는 것이다.

 

한샘, 잠깐만. 유민샘들이랑 만나기로 했다면서요. 나도 좀 끼죠!

인문대 앞에서 막 내려가는 길로 들어서려는데 어찌 알고 박 선생이 쫓아왔다. 강의 시간대가 같은지, 동선이 비슷하다 보니 자주 마주친다.

어찌 알고?

유민샘 점심 먹자 전화했다가. 나만 쏙 빼고 그럴 거요?

우리도 개강하고 처음인데.

후문까지 걸으면 십 분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까 쌍차공장이 평택에 있지요!

그는 아직 쌍용차에 머리를 박고 있다.

그래요, 우리 집은 더 시골 팽성. 그게 뭐요?

설 휴가 때 혹시 굴뚝에 가 보았나 해서, 근처니까. 쌍차공장 버스정류장에 ‘함께 살자’ 구호가 정말 붙어 있는지 궁금해서.

뭘 가서 뭘 봐요! 뭘 해도 가능해 보이는 것이 없는데. 그저 외면이죠. 단식도 굴뚝농성도 땅바닥을 기는 삼보일배도 무슨 소용. 힘 있는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 하잖아요. 괜스레 사람 불편하게 압박하는 그런 극한 시위, 원칙적으로 싫어요. 힘없는 우리가 뭐, 어쭙잖은 연민이 무슨 소용인데. 겨우 등 돌리는 것이 다죠. 더 이상 절망이나 피하자고.

한샘 씩씩하게 봤는데…….

잠시 조용하던 그가 말했다.

삼성 현대 엘지 에스케이 네 재벌이 버는 돈이 지디피 60퍼센트라면 믿겨요?

경제학자도 아니면서 웬 통계?

성장률도 거의 답보상태고. 80년대 8퍼센트가 90년대는 6, 2000년대엔 4퍼센트로 떨어지다가 지금은 2퍼센트 대잖아요. 신문 안 봐요?

이실직고, 경제면은 잘 못 봐요, 잘 못 읽어요. 안 읽히걸랑. 입력도 안 되고 소화도 안 되고. 지엔피 지디피 그렇게 말하면 난 여전히 헷갈리는데?

큰일 날 사람. 그러고 글을 써요? 그러고 강의도?

박샘은 국문과에서 경제 강의를 해요? ‘의의’를 ‘의의’ 또는 ‘의이’라고 발음할 수 있어도 ‘으이’는 안됩니다. 그런 것 가르치는 것 아녜요?

나 참. 물론 국어학 충실히 해야지만, 언어는 사회적 산물. 경제관념 없이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는데? 인문학을 고매한 철학 비슷하게 이해하는 건 위험천만이지. 인문학은 사회학에 바탕을 두죠,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한 학문 아냐!

새삼스레 인문학?

그래요, 인문학.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 인간의 가치 탐구를 대상으로. 거기서 사회 속 인간이 나올 밖에.

와, 예에.

비웃지 말아요. 참, 내가 한샘 만나면 뭔 얘기를 하려…… 아, 글이 농숙한 젊은 작가 이야기.

해보세요.

뭐요, 그 심드렁은. 난 제법 놀라운 구절을 읊을 판인데. ‘어쩌면 문학이란 유서의 수많은 변형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뭐 그런 말을 했더라고!

아, 손 아무개, 글 잘 쓰죠, 성공이지 그만하면. 그래도 뭐 색다른 말은 아님네. 모든 이야기는 끝까지 가면 죽음으로 끝난다고, 헤밍웨이가 벌써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가? 나야 뭐 소설가가 아니니까. 난 그냥, 죽는 대신 유서처럼 글을 쓰고, 그러니까 죽지 않고, 그러는 게 위로가 될 수 있나 그런 생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 알면서. 어느 것도 강심장, 아니 철심장이 된 우릴 움직일 수 있는 게 없지. 여전히 춥고 바람 우는 밤, 굴뚝 위엔 누가 ‘박쪽에 숯불’ 피워다 주나? 대체 겨우내, 대체 어떻게 게서 사람이 살고 있느냐고!

스타케미컬은 더 심해, 혼자 굴뚝 생활 300일 될 걸. 거긴 해고자가 소수이다 보니 포커스를 덜 받으니까. 구미라 수도권에서 멀기도 하고. 희망버스는 두 번인가 갔지만.

박샘, 다시 봐야겠어요. 뭐 존경이라고는…….

 

꽈당, 그렇게까지는 아니나 정말 놀랐다.

잔디 밭 틈새에서 큰길로 튀어나온 녀석이 내 코앞 10센티미터에 멈춰 섰다. 뒤따라 나온 녀석으로 미루어 뒤를 돌아보면서 뛴 모양이었다. 절인지 뭔지 꾸벅 하는가 싶더니 저만치 튄다. 공에 다름없다. 신입생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신이 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기껏 한 해 위 선배들이 격려하는 말에 한껏 들떠있는 것은 그들뿐이다. 대학이라는 황금기에 들어온 여러분, 이 시기가 아니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엄청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유가 여러분의 오늘입니다…… 따위에 고무되어. 이삼 년도 채 지나기 전에 자신은 바둑판 위의 돌은커녕 아예 굴러 떨어져버린 돌이 아닐까 움츠러들 운명인 것을.

난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놀라서이기도 했지만, 마음이 무거우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한샘, 왜 그래. 애들이 그러지 뭐.

그러게, 애들이.

일찍 사랑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아들이 되는 애들이다. 내게도 열리지 않은 미래가 내 아들들일 이 애들에게는 어떠할까. 이들이 나이 40이 되는 날엔……. 나는 하얗게 센 머리로 여전히 강의를 할까, 강의라도 할까. 살아는 있을까? 여전히 굴뚝에 오르는 사람들을 봐야 할까? 어두운 생각이 부푸는 동안 몸은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봄 하늘도 빛이 바랜다.

한샘, 학기 초에 벌써 이럼 어쩌려고. 힘내죠!

그래야죠.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 같네 뭐.

황사? 미세먼지?

그냥 껄끄러운 건지. 생각보다 머네, 후문이. 오늘따라.

 

그렇게 어물거리며 교정을 빠져 나왔다. 건널목에는 구름 떼처럼 아이들이 몰려 있다. 풋풋한 살 내음이 일렁인다. 하늘은 뿌열 뿐 구름 한 점 없다. 문득 새 한 마리 그립다.

철탑에는 철새라도, 굴뚝에는 굴뚝새라도 날아 올라가 다오. 날아 올라가 대신 속삭여 다오, 세상 마음들이 아직은 서러움을 나누고 있다고. 썩 적절한 행동까진 못하면서도 적어도 마음만이라도 아파한다고 전하렴. 작은 몸으로 지저귀면 위로가 되지 않겠냐. 그래도 몸 다치며 그러지 말고 내려오라고. 사람은 날개가 없지 않으냐고.(끝)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4. 1. 23:23

 

날마다 비겁함

 

 

연말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눈은 어느 해보다 많이 푹푹 내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라고? 그런 밤이다. 엉거주춤 따라 들어선 시장 통에는 지붕이 얹어져서 그리 질척거리지는 않는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술집 골목이 아니라 밥집 하나 겨우 문이 열려 있었다.

 

사실 그날 저녁 때 문학상 시상식장에 가게 된 것은 순 우연이었다. 원룸 입구와 나란히 붙은 작은 꽃가게에서 박 선생을 만난 때문이었다. 인문대에서 국어 강의를 하는데, 언어교육원의 한국어 선생들하고 터놓고 지냈기 때문에 나하고도 동료처럼 지내는 터였다. 고등학교 때의 은사님이 문학상을 받게 되어 꽃을 사러 왔다는 그는 무턱대고 나더러 그곳에 가자고 졸랐다. 내가 소설을 발표한 일을 알고 있었고, 그러니 이런 기회에 문인단체 분위기를 맛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서 은사님을 모셔다 드리는 길까지 함께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은사님의 아파트가 그곳에 있을 줄이야. 차가 천변 쪽으로 향할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고, 지나치거니 했던 참에 막상 그곳에서 정말로 멈추자 두 눈을 꼭 감았다.

잠깐이야, 내려드리고 우린 가면 되니까.

그런데 은사님이란 분은 게서 내리는 게 아니라 함께 탄 우리 모두를 끌어 내리셨다. 이런 날 지금 그냥 집에 들어가겠는가! 집사람, 막내 산바라지 하러 가고 없다고 안 했는가!

 

왜 하필 이곳인 거야! 근처 다리 밑에 노숙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 나도 모르게 사람을 찾아 몇 번이고 나다녔던 곳. 실제로 한 여자를 발견하고는 외려 도망친 이래 가슴만 졸이고 있던 참인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내리깔고 얼른 시장 안으로 숨어 들어갔을 밖에. 데면스러운 자리도 자리지만 미리 주눅이 들어있던 탓에 사제 간의 틈에서 술만 찔끔거리고 있었다.

 

 

오늘 말씀 의미심장하시던데요. 짧았지만, 내용은.

파리에서 학위 받아와서 프랑스어도 또 한국어도 가르치고 있고, 소설을 쓴다고, 나를 대충 소개한 뒤에 박 선생이 은사님에게 수상 소감 이야기를 꺼냈다.

프랑스제 프랑스문학 박사요? 왜 그럼 불문과 교수될 생각을 않고 소설을 쓰시려나?

은사님은 소설이라는 단어에 걸렸는지, 대꾸 대신 나를 주목했다.

외국문학 평원에서 하이에나가 된 느낌이었어요.

하이에나?

예, 자판 위 손가락이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털이 돋는 느낌요. 남의 글 파먹고 사는 비겁함이요.

그건 틀린 말이오. 하이에나가 실은 사냥선수라, 밤중에 사냥을 해 놓으면 동틀 무렵 사자가 나타나 빼앗아 갖고 느긋하게 식사를 즐긴다고 합디다. 어찌되었건, 그래, 하이에나 짓거리 안 하고 소설 쓰는 심정은 어떤 거요?

아니, 선생님. 소감 계속 하시라니까요, 괜히 한 선생 뭐라 마시고.

 

수상 소감을 다시 묻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시상식에서 그의 은사님은 마지막 순서였고, 소감은 우물우물 지나가 버렸다. 문학의 장르를 배울 때는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이라 했는데, 실 문학인생에서는 3대 양식에 들지 않은 수필도 앞서고, 아무튼 소설이 꼴찌였다. 시간상으로도 청중의 주목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연단 쪽 진행과 무관하게 시끌벅적한 것이 조금 놀랍기도 했다. 잘나갈 때 가끔 참석했던 학회장 분위기완 영 딴판인 것이, 문인들은 예술가이구나 싶었다. 더구나 음식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으니, 차려진 밥상이 기다리는 중에 행사를 진행하는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인지도 몰랐다.

 

듣기 좋은 노래도 석 자리 반이라는데 이제 마이크 차례가 되었으니, 예의 없는 사람이 될지언정 감사 인사는 접겠습니다, 하더니 그의 소감은 좀 엉뚱했다.

오늘이 어떤 날입니까. 오늘,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오늘……. 말이 막힌 듯 문장이 흐트러지더니. 오늘 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늘 불발입니다. 제 소설 또한 늘 불발이지만, 예술적 성취를 포기하고라도 이 불발인 이웃들과 함께 하는 글을 쓰겠습니다. 오늘, 하필 오늘 상을 주시니, 오늘을 기억하라고, 그렇게 알고 그렇게 쓰겠습니다.

 

그뿐이었다. 이제 제자가 다시금 소감 이야기로 화두를 돌려놓으니까, 소설가는 짧았던 소감 일부가 여태 목에 걸려 있었던지 나머지를 쏟아냈다.

내가 원래 뭔 말을 해야 되면 통 미리 써 갖고 가서 하지. 같은 내용을 자네들 열두 반씩 돌며 수업할라치면 들쑥날쑥해선 어떡하는가. 그렇게 수업내용을 죄 써 갖고 다니던 것이 습관이 돼 놔서. 오늘도 미리 준비한 원고가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거든. 근데 꺼낼 계제가 아니더라고, 시선도 다 흩어졌고. 실은 거기다 위방불입 난방불거(危邦不入 亂邦不居) - 위험한 나라는 드나들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선 거하지 말라는 공자님 말씀을 척 허니 써두었지. 그런데 헌재의 명판결 시점에서 이런 발칙한 말을 해서 쓰나? 주눅이 든 거제. 오늘 판결은 자유의 침탈이다. 문학이 뭐냐, 자유로운 글쓰기에서 출발한다. 의견을, 사상을 침탈하는 곳에서 무슨 문학이, 문학상이 필요하냐. 어지러운 나라, 못 살겠다…… 그런 말을 꿀꺽 삼켰으니 늙은 여우제 뭔가.

 

그래도 핵심은 말씀하셨는데요, 오늘을 강조하셨으니. 초심자도 알아들었습니다.

멍해진 박 선생 대신 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초심, 초심자. 누구나 초심자였지요. 그땐 참 간이 콩알만 하지는 않았었는데. 아까는 비겁해질 대로 비겁해져서 술도 안 마셨소, 거기서. 말 막 튀어나올까 봐서.

지금은 울 선생님, 하실 말씀 다 하시는데요?

자리가 다르잖나. 여서는 뭔 소린들 못 해요. 나 잡혀가라고 자네가 고발하겠나, 여기 이……. 암튼 세상이 얼어붙었네.

그렇긴 해요. 정당 해산 판결 같은 건 헌정 사상 첨이라죠, 선생님?

그건 좀. 건국 초창기에도 진보당인가, 조봉암 선생 사형 때 있었던 일은 어쩌고요.

나는 설마 처음일까 하는 생각으로 아는 체를 했다.

아니, 그건 달라요. 그땐 당수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되었고, 정당을 등록 취소로 한 것이니까 행정처분이었던 거고.

역시 연륜이 달랐다. 박 선생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우리야 원래 한국적 민주주의로 시작했다고 해도, 이제쯤은 한국적이란 수식어는 떼었을 만큼 그 동안 흘린 피가 얼만데.

수식어가 늘 문제이긴 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시장경제랑 맞물린 것 아닙니까.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또 끼어들었다.

그렇소. 자유, 그 단어가 거기 가 붙으면 묘해지는 것이라. 거기 가 붙으면 자본주의가 덧칠된다 그 말인데, 어불성설이라. 자유경쟁과 민주주의란…….

선생님, 경쟁의 기회가 공평하다고 하잖아요. 물론 누구는 바퀴 달고 달리고 누구는 모래주머니 끌고 달리는 환경에서 무슨 자유경쟁일까 싶지만요.

최고의 이상적인 시스템은 아직 없네, 영원히 사상누각이요, 신기루지 그게. 대의제 민주주의라 해도 다수대표제가 되고 보면 늘 소수는 있기 마련이니.

그렇담 개인이, 소수가, 국민 다수가 뽑은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있는가요?

나는 사제지간의 대화에서 엉뚱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대다수의 견해가 정의이니까…….

그럼 소수는 늘 죽어라 기어야 되는 겁니까?

자기 패를 다수로 만들거나 다수에 넘어가거나.

 

은사님이 빈정대는 투로 나오자 박 선생이 놀라는 듯했다.

그래서 말 아닌가, 오늘 소수의견이 단 한 사람이었다니. 하긴 그거라도 다행이제, 만장일치는 아니라서.

오히려 정말 암덩어리라면 단칼에 도려내는 것이 상책일지도 모른다고, 일단 여론조사 결과는 다수가 헌재의 판결을 찬성한다고 나왔던데요.

나는 비겁한 역할을 하기로 했다.

암덩어리라니, 그런 엄청난 말은 아무나 하면 되남요. 한 선생, 그거 표절이요, 표절! 함부로 써선 안 될 말이제라!

 

말꼬리가 사투리 색으로 변할 때쯤, 그날은 일찍 헤어졌다. 밥집 아주머니가 눈치를 준 때문이기도 했다. 시장은 온통 조용하고 술도 안주도 안 굴리는 서넛이 떠들고 있으니 술상이 끝나기를 노골적으로 원하는 것 같았다. 김장을 이백 폭을 해서 피곤하다고도 했다. 남쪽에선 김장이 늦나 보다. 엄마가 보내준 김치는 꼬마 냉장고 안에서도 다 익어 가는데.

박 선생이 은사님을 대문 앞까지 모셔다 주고 오는 동안 나는 그냥 아파트 입구에 서 있어야 했다. 가로에 가로등은 드물고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아무 것도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다. 다리 밑 여자는 어디에서건 잠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아예 천변을 등지고 서서 꼼짝 않고 아파트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찬바람에도 등이 따가웠다. 어둠 속, 알 수 없는 뜨거운 화살촉들이 쏘아댔다.

 

 

날은 삼한사온이 맞나 보다. 아니 딱히 들어맞진 않지만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다. 방학 때면 무궤도의 일상을 피하기 위해서 뭔가를 하겠다 작심하지만, 작심은 작심으로 끝나곤 한다. 그러니 요일도 시간대도 애매모호한 시간들이 이어진다. 해가 나면 낮이다. 배가 고프면 식사시간이고, 먹기 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샤워기 물이 시원찮아 긴 샤워가 힘들다. 그렇다고 추적추적 비누 바구니를 들고 목욕탕엘 가기는 싫다. 이렇게 대충 씻고 사는 줄 누가 알랴.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는 짧아졌다.

아니, 나는 너무 자주 씻는다. 다리 밑의 여자는 씻기나 할까.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는 공간이다. 땀을 흠씬 뺀 사람들은 사우나로 찜질방으로 향한다. 아파트에 스물네 시간 따뜻한 물이 나오지만 시원찮다고 그리로 간다. 날마다 씻지 않으면 사람 축에도 못 낀다. 국내총생산 세계 13위 부자나라에서 다리 밑 여자는 하천 물에 무김치 조각을 씻는다. 빨래도 한다. 몸은? 아무리 가난이 인격을 말살한다 해도, 그로 인해 모든 부끄러움을 잃었다 해도, 그 공공장소에서 목욕을 하지는 못하리라. 여름인들.

 

나는 여자가 징검다리 시작 부분에서 작은 속옷을 빨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상상에 빠진다. 앞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고 쭈그리고 앉아서.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는 못 보았다. 내가 피했나? 여자는 징검다리 시작부분 꼭 그 자리에서 몸집에 비해 형편없이 작아 보이는 속옷을 하천 물에 헹구고 있다.

 

 

문자 울림 음이 난다.

잘 지내심? 저번 날 넘 늦어 미안, 박박.

박박이란 말에는 웃음이 절로 난다.

미안은. 문인들 세계 좋은 경험. 감사!

담 금욜……

그렇게 문자가 오가다 말고, 곧 벨이 울린다.

 

난리도 아니네요. 창원대 교수 뉴스 못 봤어요? 헌법학 교순데, 국회에다 청원서를 냈대요. 헌재 8인 탄핵소추 의결 청원.

누가, 뭐라고요?

암튼 의원 제명권은 국회에 있는데, 헌재가 월권을 했다 뭐 그런.

국회에다 직접?

개인 미니홈피에다 올렸다는데요. 어라, 문자도 전화도 죄 들통 나는가?

설마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야. 하긴 너무 많이 배웠으니 보통은 넘지, 그래 봤자 수입은 88세대에도 못 미치니 그건 보통도 못 되네.

넘고처지고, 결국 보통인가. 보통 사람도 조심합시다.

뭐요, 그럼 공포시대?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자고? 다들 자기 할 일만 하고 살면 쌍용아저씨들은 누가?

효리 있잖아요.

효리가 왜 나와요?

웃자고! 오늘의 본론, 한국어실 몇 사람, 함께 저녁이나 하면서 올해를 넘기자네요.

글쎄요.

무슨 글쎄요. 미리 날짜 받는 것이니 꼭 나와요, 담 금요일. 디테일은 그때.

글쎄.

기다림다.

왜 박샘이 연락을…….

 

순간에 전화가 끊겼다. 기다린단 말에서 끝이었다.

사실은 반가운 연락이었다. 집중적으로 독서를 하거나 글쓰는 일도 불가능한 뒤숭숭한 시간에 계속 혼자 있는 것은 좀 두려운 일이다. 알 수 없는 초조함으로 잔뼈들이 떨릴 지경일 때가 있으니 말이다.

쌍용자동차와 효리 이야기를 하고 웃었지만 그런 세상 때문에도, 또 내면의 부조화 때문에도 초조감이 쌓인다. 쌍용차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어떻게 이 겨울에 한데 고공 굴뚝에 사람을 놓아두고 살아가는지 싶다. 물론 스스로 굴뚝을 선택한 그들은 다리 밑 여자처럼 홈리스는 아니다. 노숙인은 주거가 없다는 뜻이지만, 가정이 없다는 뜻에서 홈리스가 더 애절하다. 가만, 혼자서 굴뚝 위에서 200일 - 20일이 아니다 - 넘게 항의 중인 사람이 있고, 최근에 올라간 사람들도 벌써 2주째다. 사람 무릎 꿇렸다고 비난의 화살이 삼천리강산에서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해고당하고 굴뚝에 올라갈 지경은 삼천리강산이 외면한다. 이 매정한 오늘 속에 녹아서 작용하고 있는 과거의 조각조각들이 쑤시기 시작했다.

 

 

파리 시절, 여행에 소극적이던 내가 사를라에 간 적이 있었다. 몽파르나스 역에서 테제베를 타고 보르도의 리부른에서 갈아탔다. 와인을 좋아한다면 포도가 익어가는 여름 보르도에 내려 눈길마다 들어오는 포도밭을 즐겼을지 모르지만 오직 사를라로 향했었다.

손잡고는 돌아다니기도 버거울 좁은 골목들, 돌벽 쌓아올려 지은 집들, 12세기에 지었다는 생 마리 성당도 폐허가 다 된 채로 보존된(?) 그냥 시간이 정지해 있는 느낌의 소도시. 정말로 그곳에는 라 보시에가 탄생한 집이 보존되어 있었다. ‘위마니스트 - 인문주의자, 인본주의자, 인간주의자 뭘까 - 에틴 드 라 보시에 태어나다, 근대 민주주의의 시조들 중 한 사람’이라고 박혀 있었다.

라 보시에를 알게 된 것은 루소를 통해서였다. 『누벨 엘로이즈』는 머리로만 사랑을 알던 풋풋한 젊은 시절의 나를 매료하기에 충분했었다. ‘오 쥘리! 시간도 노력도 결코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인상이라는 것이 있어요. 상처는 아물어도 그 자국은 남아 있어요.’ 막상 파리에서 루소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소설은 물러가 버렸다. 『불평등 기원론』은 말하고 있었다. 소유는 도둑질이다, 부자들은 인민의 착취자들이다, 압제자를 제거하는 것은 일종의 권리다……. 그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주권과 자유는 소멸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을 알게 해준 자유의 아버지였다. 자유 - 얼마나 아름다운 개념이었나, 추상적, 아니 피상적 의미도 잘 몰랐으면서. 그런데 루소를 200년쯤 앞서 라 보시에라니! 오를레앙 법학도 시절 쓴 『자발적 노예상태』는 사후 십 년이 넘어서야 발표되었고, 실제로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는 보르도의 고등재판관으로 재직 중에 서른셋에 요절했고, 그에게서 모든 것을 위임 받은 친구 몽테뉴는 출판을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한참 되어서 잊었다, 내용인즉슨. 세르비튀드 - 이 단어는 종속, 예속 그런 의미이자 봉건 노예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 문제다. 우리는 노예상태로 태어나 그렇게 자라고 살기 때문에 자유를, 우리가 자유임을 모른다. 독재 치하에서는 사람들은 쉽게 비굴해지고 나약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앙탕드망 네트 - 순수한 오성, 그리고 에스프리 클레보아용 - 통찰력 있는 정신만이 우리가 자유인 것을 깨닫게 하고 자유이기를 원하게 한다. 솔직한 의지와 솔직한 소망이면 된다. 바른 행동을 위해서는 배우자! 그런 마지막 말.

몽테뉴가 영지로 은퇴한 뒤에 이 글을 발간한 것은 모나크마르키였다. 이 폭군방벌론자(?)들은 주로 박해당하는 위그노였다. 라 보시에는 요절이 그저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살아서 늙었으면 엉뚱한 변절과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르면서. 한 동양 대학생이 사를라 골목을 거닐고 라 보시에가 태어났던 집의 현판을 애정을 담아 쓰다듬고 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일만 단어 정도의 이 짧은 격문은 이미 500년을 넘어서 살아 있으니.

 

느닷없는 파리 시절에 대한 향수가 멋쩍게 느껴졌다. 자유를 향한 독서가 네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네 앞의 세상은 자유로우냐. 비겁한 넌 지금 라 보시에가 아니라 그보다 서른 해를 더 살면서 독서에 파묻혀 넉넉한 인생을 향유한 몽테뉴가 부럽지 않으냐. 『수상록』은 이 세상 얼마나 많은 서가에 꽂혀 있는가 말이다.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더러 밤에 꾸는 꿈들은 중요하지 않다. 낮꿈이 문제다.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원하는 것이 있기나 한지. 또 오늘의 어느 조각이 혹시 있을 내일에 흘러 들어갈는지. 혹시 있을? 나는 정말로는 내일을 은근히 그리고 있나 보다.

 

이 몇 년간 나는 가끔씩 머리가 돌게 불안할 때가 있었다. 내게 미래가 있어도 영영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 혼자서 할 수 없는 일, 아이를 갖는 일을 생각하면서 달력을 연두색으로 칠해놓기도 한다. 분홍색이면 수상해서 일부러 반대색을 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가임 기간.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나도, 칠하는 내 손도 알고 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어려선 나는 그 말이 낭만적인 말인 줄로 알았다, 하늘과 별에 관련된 아름다운 이미지. 그것이 적나라한 그 표현임을 깨달은 것은 최근이었다. 문제는 어떤 낭만적인 동기도 없이, 아이는 벌써 잉태되어 있고, 곧 태어나고, 그 다음 상상은 막히고 만다. 아버지가 없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혹시 아버지가 가능하다고 쳐도, 그 적나라한 순간에까지 어떻게 이르는가. 얼마의 시간이, 어떤 장소가 필요할까. 내 침대가 자연스러울까. 아니, 너무 좁다. 원룸에는 딱 이만한 침대가 붙어 있을밖에. 아니,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사랑에도 감정이입이 필요할 터인데, 내 방은 몰취미다. 유일한 유리문 밖은 가스레인지가 있는 옹색한 부엌이다. 부엌에 붙은 창은 바람막이 천 쪼가리 하나 없이 앙상하다. 복개상가에서 천을 사서 바느질까지 맡겨놓고는 찾으러 가지를 못한다. 비겁해서, 다리 밑의 여자를 정말로 만나게 될까 봐서 못 간다. 또 천을 가린다 해서 나아질 지도 의문이다. 시큼한 부엌은 일상이고, 사랑은 일상이 아니다. 나의 가능한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잃는다. 이렇게 말하면 가난한 연인들에 대한 모독일까? 아니, 한번 마음에 들어왔었던 - 과거형으로 말해야 하는 - 아버지들이 어느덧 천천히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빈 마음 때문에 초조감이 더하다는 것을 안다.

 

 

거울을 책상에 앉힌다. 2014년 마지막 금요일, 아침에 박 선생에게서 어김없이 문자가 도착했다. 6시 반, 청솔. 알? 나도 알! 이라고 답신했다. 최단 통신.

바삭바삭한 얼굴에 로션을 바른다. 립스틱을 들어본다. 아니다, 입술은 아니다. 아이섀도로 힘을 줄까 하다가 마스카라 생각에 괴롭다. 나를 ‘격파한’ 마스카라. 후배 강사의 눈 끝에서 빛나던 그것. 전임이 되었으니 강단에서 당당하게, 여전히 깜빡거릴 때마다 부스러기가 날릴 마스카라의 눈에 또 다시 아프다. 재빨리 아이섀도를 집어 든다. 초록빛은 고양이 느낌이라 피하자. 하늘을 보려면 하늘색을 써야지. 하늘 누구를?

 

 

하늘 후보는 아예 없었다. 박 선생이 모아놓은 그룹에는 그가 청일점이다.

김, 신, 유 그리고 정원, 유민. 이 선생 둘은 구별을 위해 우리끼린 이름으로 부른다. 인문계열에 남학생이 적으니 강사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하나쯤은 더 없을까, 남자가? 그러는 순간……. 나는 울고 싶어졌다. 거의 눈물이 나왔다.

 

아, 배 교수님, 여깁니다.

박 선생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서는 시선의 끝에 그가 오고 있었다, 배승한. 내 마음 속에 무심코 내 아이의 아버지로 들어왔다가 소멸해버린 그가.

 

아, 좀 늦었어요. 미안합니다.

어머나, 배 교수님 이야긴 안 하던데요?

뭐 굳이. 첨에 둘이 볼까 하시더니, 몇 사람 함께 만나자고.

네, 우리 좀 심심하던 참이어요. 괜히 속상하고 몸은 뒤틀리고.

다들 섣달 크내기라?

누가 개밥 퍼줄 일 있어요? 개나 고양이 프렌들리?

나는 안티. 그렇다고 모피 애호가도 아니지만.

애매하네요, 동물 프렌들리는 아닌데 모피 반대자라…….

 

이율배반이 인간의 속성 아닙니까.

그, 배 교수는 거창하게 시작했다.

나라면 지록위마 대신 이율배반을 골랐겠어요.

너무 쉬운 말 아녜요? 교수신문은 되게 어려운 말들 좋아하던데…….

민주주의하자고 민주주의를 흠집 낸 결과니까 이율배반이지 뭐겠소. 민주주의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이해인데, 옳다고 믿는 다수가 다른 소수를 틀렸다고 말살했으니.

 

모이면 또 그 소리. 머리가 아팠다. 국가 차원의 정치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요즘 다리 밑 여자 걱정만 했다. 겨울것을 웬만큼이라도 가졌을까. 어디서 잘까. 온전히 잘 수나 있나. 누군가가 굶주린다면, 우리가 호의호식하는 하루하루 때문이다. 물론 나는 호의호식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어도 잠자리가 있다. 그런 생각들로.

 

배 교수님, 독일공산당도 해산당했다고…….

알다시피, 그러니까 서독 초창기에 위헌 판정이 났죠. 완벽한 민주주의가 쉽지 않으니.

독일은 프랑스와는 정말 다른가 봐요.

누군가의 말에 다들 나를 쳐다보았다.

예, 전후 프랑스에선 파쇼 청산이 시급했으니까요. 내가 겨우 답했다.

서독에서는 나치스 색출보다 공산당 방어에 급급했지요. 그가 제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서독, 그러니까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그게 헌법이죠, 헌법에 아예 위헌정당 해산제도가 있었어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하거나, 연방공화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려는 정당은 위헌이고, 위헌 여부는 연방헌법재판소가 결정한다고. 그러니 규정대로 한 거죠. 공산당이 내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지만, 구체적 기도가 없이도 이 질서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위헌이라는 취지였으니까요.

구체적 기도 없이 의도만으로도? 우리나라랑 똑같네요!

다르죠, 우리 헌재판결문을 보면 ‘실질적 해악을 끼치는 구체적인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적시되어 있어요. 통진당은 구체적으로 위험하다는데요?

내란음모사건이 유죄인지 판결도 안 났는데 그걸 근거로 정당해산을 판결하기는 좀…….

판사 나셨네!

흔히 우리나라를 미국이나 외세에 예속된 천민자본주의라거나 뭐 그렇게들 말하는데, 바로 그 점이 헌재에서 밝힌 통진당 해산 이윱니다. 조심들 해요.

조심들 하자고!

말이 자유민주주의이지, 자본가 중심의 권력이 지배한다고 보는 견해는 일반적 아닌가요? 구조적으로 불평등사회인 것도 맞고.

통진당 강령에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진보적 민주주의 목적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소수의견도 분명…….

다수결이 민주주의 아닌가요. 어쨌거나 헌재 판단으로는…….

 

말들이 핵심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도 국회의원들 자격이 박탈되었나요?

그건 좀 달라요, 오년이나 걸렸으니까. 공산당이 제소되었을 때는 열댓 정도 의석을 갖고 있었지만, 곧 교섭단체권도 의안상정권도 잃었어요. 이어서 총 득표율 미달로 연방의회에 아예 입성을 못했으니까 정작 해산 땐 연방의원이 없었지요. 하지만 판결 이후도 문제였어요. 공산당과 관련해서 십만 명 넘게 조사를 받았고, 칠팔천이 어떤 식으로든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까.

 

우리가 웬 독일공산당 걱정, 것도 옛날 일을.

옆에 앉은 신 선생이 시큰둥해했다. 나랑 둘이는 싫증을 내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아직 뜨겁게 정치적이었다.

그게 역사는 여기저기서 되풀이되기 때문이지요. 이번엔 테솔도 가지고 있는 유 선생이 나섰다.

그 유명한 매카시 선풍도 딱 그 무렵이었잖아요. 국무성 안에 이백 명인가 공산주의자가 활동하고 있다는 억지 연설이 먹힌 게 시대 탓이지 뭐였겠어요. 중국이 공산화되었지, 한국전쟁 터졌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정치권에서 이용한 거죠. 수백이 감옥에 가고 만 명 이상이 실직을 했고. 정작 정치인들마저 매카시즘 공포에 떨었으니까, 외교노선은 경색된 반공노선을 걸었을 밖에요.

 

사람들은 왜 대세에 약할까요.

사람이니까. 비겁함이 살아남는 장치니까.

국가가 대외적 위신이나 지적 환경에 먹칠을 해도 사람들은 우선 대세에 손뼉을 쳐요.

대세는 있기 마련이죠, 언제 어디서나. 문제는 다수가 소수자를 존중하느냐 아니냐 그거죠.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서구에서도 그런 걸, 하물며…….

하물며 우리는 어설픈 민주주의다 그거요?

어설프기보다 아직 뿌리가 깊지 못해서…….

그런데 정말 후폭풍이 일까요?

며칠 전 창원대 교수의 헌재 8인 탄핵소추 청원도 해프닝으로 묵살해 버리나?

그런 일이 다? 뉴스에 못 봤네요.

혹독한 날들이 올 겁니다. 훨씬 모진 날들이…….

 

훨씬 모진 날들이 온다,/ 이의신청에 의해 유예된 시간이/ 지평선에 뚜렷이 모습을 보인다……. 시구가 허공에 어른거린다.

 

아, 아아. 그는 「유예된 시간」을 알고 있었다. 독문과 아니던가. 내가 아는 바흐만의 시를 그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가 ‘우리들의’ 유예된 시간을 예감하기나 할까?

우리들? 나는 헛꿈에 잠겨있고, 동료들은 여전히 현실에 들려있다.

사람은 생각보다 무력한 존재요, 생명의 일회성 때문에.

화제는 잠시 일반화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곧 심각해지고 말았다.

죽을 때를 안 사람도 있어, 단원고 교감선생님 같은.

맞아, 구조자 명단 76번째였어, 그 교감선생님.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300명 넘은 학생들 데리고 출발해서 단 75명 앞세우고 나왔으니. 믿기지 않았겠죠?

누가 세월호를 입에 올려? 아, 그 지독한 슬픔, 아니 절망의 단어를 오늘 좀 잠시 잊으면 안 되남? 지통재심(至痛在心) - 지극한 아픔이 내 맘에도 있다고요.

술이 좀 들어간 박 선생이 갑자기 물러 터진 소리를 해댄다.

그래요, 세상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이 있어요.

뭘 못 해요? 못 하면? 둘러댄다고?

그는 태도가 돌변해서 아무에게나 공격적이 되었다. 술이 그런 것이다. 이랬다저랬다.

뭐라도, 살다 보면…….

살다 보면 좋아하시네, 얼마나 사셨다고! 정치개입은 뭐고 선거개입은 뭔데, 것도 선거 기간에! 아, 참 미묘하고 멋지네요!

인간사 미묘한 것 이제 아셨나!

나도 괜스레 쏘아붙였다.

그 순간 내 호르몬은 너무 사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외적인, 그러니까 사회나 정치나 그런 화제가 정말 버거웠다. 나는 그냥 한 사람, 한 여자이고 싶었다. 아이 아빠 후보를, 후보였던 사람을, 이리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마당에.

 

어려운 문제요. 죽어서 살고 살아서 죽는다는 말은 진리 같은데.

우리 이러다 모두 병나겠어요. 어쨌거나 살아남은 오늘, 지독한 슬픔과 상실의 한 해였다 쳐도 우린 살아남았고, 살았는데 어떡하라고.

네, 그래요. 말 수 적은 유민샘이 모처럼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어느 심리치료사가 그랬대요. 병은 다 마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일테면 위장병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땜에 생긴대요. 새로운 것을 소화할 수 없어, 그런 무서움이 원인이라고.

별소리!

아니, 일리는 있는 말이야, 걱정이 위장병 된다는 건 통용된 사실 아닌가?

그래요. 건망증도 삶에 대한 두려움 땜에. 삶에서 달아나고자 그런 방어기제를 편다 그거죠.

설마.

더 재미있는 말도 있더라고요. 당뇨병은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달콤함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 깊은 슬픔 땜에 온다고.

뭐? 당뇨가 쓸쓸한 슬픔 때문이라…….

웃픈가? 아니 어떻게든 웃어야 할 게 아뇨, 살려거든. 애도 낳고.

아차, 나는 무심코 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섞인 마당에 속마음 내비치지 않으려고 술을 삼가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풀렸나 보다.

웃프담서 거기 애는 왜 끼어 넣는데요?

속 모르는 박박은 이제 놀리는 수준으로 가고 있었다.

잠깐만. 웃프다, 애 낳자. 이게 무슨 말이냐고! 아, 유민샘! 유민 에브리 씽 투 미. 어때요?

싱겁기는. 유민샘이 뽀로통했다.

 

 

다들 왁자지껄 와중에서 그, 배승한은 갑자기 말이 없었다. 나도 그만 입을 닫았다. 손이 그에게로 뻗침을 누르느라고 아파왔다.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니 눈을 감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서 원하는 것은 아이다. 나는 아이를 원하고, 내 아이의 아버지로서 다른 선택이 별로 없어서 그를 생각한다, 생각했었다. 최소한은 몸을 섞는 일, 그게 거북살스럽지는 않을까. 생각이 그에 미치면 껄끄럽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까지 한다. 잠깐, 오늘은 아니다. 연두색 날, 아기가 준비된 날도 아니다. 날이면 또 어쩔 건데. 번갯불에 콩 볶을 일도 아니고.

 

한샘, 술자리서 왜 핼쑥해요, 피곤한가 보다. 피로회복제 뭐 있더라?

피로를 회복해 뭐 하게요, 없애줘야죠!

그러네. 암튼 미리 도망갈 생각 말아요. 갈 때는 함께, 카풀 해야죠.

 

아, 박 선생 이 사람은 도통 겉만을 본다. 두어 시간 앉아 있고서도 공기를 감을 모른다.

아니, 공기다 감이다 하는 것이 나 혼자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 몇 백만 한국인이 희로애락의 술잔을 부딪고 있을 흔하디흔한 송년의 밤에 무슨 공기와 감이 특별할까. 어느 해보다 강렬한 감정들, 슬픔이건 절망이건 분노건 배신감이건, 알코올에 제곱되어 언제 발화점을 건드릴지 모를 아슬아슬한 순간일 뿐.

 

나는 마음과 상관없는 얼굴을 하고서 마음과 상관없는 단어를 내뱉으며 마지막 금요일을 보내버린다. 나는 홈리스가 아니다. 어머니의 밥이 떡국이 그립다. 벌써부터 새해엔 양처럼 순하게 살라고 덕담들이 공중에 떠있다. 순함, 말썽 일으키지 않음, 비겁함으로 무장하고 또 한 해를 살라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하지 않을 또 한 해를 살라고. 날마다 비겁함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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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광주문학상 수상자 특집

 

광주문학 2015년 봄호, 통권 74호, 46-64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3. 16. 21:37

 

다리 밑

 

 

거기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문화지원금을 받아 운영되는 썰렁한 극장에 옛 영화보기 프로젝트가 있어 갔다가 무심코 공원 쪽으로 향했더니 곧바로 천이 흐르고 있었다.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하천은 상당한 넓이라서 강 같았다. 큰 다리를 건너 공원으로 가 볼 수도 있었는데, 다리 밑으로 내려서는 앙상한 계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계단 아래로는 상부 도로를 따라 나란히 양쪽으로 천변 길이 펼쳐져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은 스크린에서 본 다니엘 오테이유의 차가운 눈빛 그대로였다.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얀 페인트로 길바닥에 그려놓은 자전거 표식에 금지표시가 뚜렷했다. 그런데 사람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다. 우측통행 화살표도 그려져 있다. 유치원 때부터 사람은 좌측통행을 하라 배웠다가 우측통행으로 바뀐 것은 5년이 채 안 된다. 그러니 좌측통행을 하던 누군가를 뒤에서 자전거가 건드렸나 보다.

아이쿠, 할머니, 조심하셔야지. 따르릉 해도 못 알아들음 어떡해요!

자전거 위의 사람은 노인을 부축하기는커녕 핀잔부터 내린다.

미안해요. 내가 못 들었나요?

할머니의 어디로 보나 굼뜨고 푸석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표준 존대어가 귀에 띈다.

난 괜찮으니 가세요.

깜짝 놀랐네, 그냥!

자전거는 씩씩거리며 서둘러 두 다리를 굴렸다. 나는 벌써 자리에 서버렸고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다.

 

정말 괜찮으세요?

네에. 괜찮답니다. 내 귀가 나빠서 그런걸요.

그냥 앞장서서 걷는 할머니를 따라 몇 발짝 걷는데 할머니가 멈춰 선다.

암, 임신이면 그렇게 앉혀야지요. 잘 생각했어요. 차가운 돌벤치에 그냥은 안 되지요.

그 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빽 하고 내지르는 고함이 돌아온다.

뭐예요? 무슨 임신! 웬 참견인지, 나 원.

아이고, 내가 뭘 착각했나요? 무릎에 고이 안고 앉아서 기특해서 그만.

기특이고 뭐고 그냥 가세요! 별꼴이야 참.

이 험난하고도 우스운 대화에서 난 또 다시 멈추고 말았다.

 

자, 이쪽으로요.

나는 할머니의 팔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되어주고 싶었다. 말없이 잠시 걷던 할머니가 나무벤치가 나오자 쉬려는 몸짓을 했다.

난 여기서 좀 쉴 테요. 젊은이, 아까는 고마웠어요.

뭘요. 그런데 말씨가 좀, 여기 분 아니세요?

엉거주춤 옆에 앉으며 건네는 질문에 아무 응대가 없다.

걸으시면서 바지도 안 입으시고. 좀 특이해서요.

아침에 입은 그대로 집에 있다가 나오니까요. 우리 어머니는 일상 한복에 흰 고무신 신고도 산장까지도 가셨다던 걸요. 물맞이라나, 동네 사람들 큰 나들이셨겠지만.

무등산장도 아시면 이곳 분이신데, 말씨가 여기 분이 아닌 듯…….

말씨야 평생 아이들 가르쳤으니 사투린 적게 쓰는 편이지요.

아, 선생님이셨군요. 저도 선생이긴 해요, 비정규직.

비정규직. 젊은 사람들이 다 그 모양이니. 우리 애도 그렇다오. 제 못나서 그런 거지만. 서울에 비집고 들어가려니 좀 힘들어요. 내가 부러 명퇴해서 힘을 보탰어요. 어미 마음에. 따로 버팀목이 없으니까 어미라도 올인 해야죠. 결국 집을 다 내줬지요.

어머나.

상관없어요. 살림 정리할 나이니까 점점 줄여가다 보니 짐이 별로 없답니다. 혼자 사는 데 뭐 필요한 게 있어야지요. 어쩌다 이런 말을. 아, 선생은 앞서 가 보세요.

밀어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뭉그댔다. 어떻게든 말동무를 하면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좀 전에 왜 느닷없이 임신 이야기를 꺼낸 것이냐고.

여긴 어떻게, 매일 나오세요? 여기 가까이 사세요? 저도 여기서는 혼자 지냅니다. 부모님은 평택에 사시고요, 팽성읍에.

평택이라뇨? 저 위네.

여기선 좀 멀죠. 서울 가면서 케이티엑스는 지나쳐 버리는 곳이죠.

그런데 선생은 어떻게……. 선생은 그래 서울로 안 가고 내려왔네요. 이곳에 와선 정이 좀 들었나요?

사오 년, 아직 정들 시간은. 여기 산책로도 처음 와 봤어요. 모처럼 영화관 갔다가요.

요샌 극장에도 잘 안 다녀서요. 영화도 무섭고…….

무서우세요, 요즘 영화가?

좀 그래요. 이런 말 하면 노인네라 그런다 하겠지만, 폭력도 성문제도 심하고. 그뿐 아니죠, 상상도 무섭게 심해서 못 따라가요.

상상이…….

스타워즈다, 이티다, 그때까진 괜찮았지요. 지금은 타임 슬립이라나 뭐라나 시공을 넘나드니까. 사람인지 로봇인지도 구분도 안 가는 존재에다…….

사실성 떨어지는 것 싫어하세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팅커벨이 사실성이 있나요 뭐, 그래도 아름다웠죠.

오늘 영화는 <금지된 사랑>이라고, 보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90년대 영화니까요.

<금지된 사랑>, 모르겠네요. 그 무렵에도 영화관 가고 그러지 못했어요. 사는 게 다 다르지요. 학교 그만둔 지도 십 년도 넘고, 거의 혼자 지내고 해서 아는 게 없어요. 더 옛날에 멈춰 있죠. 나 좀 봐, 별 이야기를 다.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아, 예. 그럼 안녕히 가세요.

 

엉거주춤 일어서 발걸음을 떼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인사드립니다, 그런 말이지요. 이런 만남도 인연이고. 잠깐만, 저 그런데 여기 혹시 오려거든, 내 선생한테 일러둘 게 있어요.

나는 다시 슬며시 앉아야 했다.

여기 산책 나오려면 아침 일찍이는 다니지 말라고 말해두려고요.

아침 일찍은 왜요? 저 아침 일찍 산책 다닐 만큼 부지런하지 못해요. 또 여긴 집에서 멀기도 하고요.

집이 멀군요. 아무튼 아침 일찍 다니지 말라는 것은…….

할머니는 멈칫거리며 주위를 돌아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 저쪽 광고 설치대가 죽 늘어선 곳 있지요, 그 근처엔 사람이 있어서 놀랄지 몰라요. 그 사람들을 놀래킬지도 모르고.

사람들이라뇨? 사람은 맨날 있지 않나요?

여기 운동 다니는 사람 말이 아니라, 저기 저 위 교각 틈새에 사람들이 자고 있어요. 낮에도 올려다보면 이불 같은 것들이 숨겨져 있어요. 낮에도 가슴이 아파요. 내 처지는 저보다 낫다고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다가…….

저 시멘튼가 돌 틈에서 사람들이 잠을 잔다고요? 그러니까 노숙…….

가만, 누가 듣겠어요. 낮엔 근처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원래는 아침잠이 없으니까 일찍 나와서 걷곤 했어요. 그러다가 거기에서 내려오는 어떤 사람을 딱 마주쳤지 뭐예요. 어찌나 무안하던지. 그건 정말 무안함이었어요, 절대로 무서움이 아니라. 무서움은 천천히 박혀왔죠, 지금은 좀 무서워요. 저 지경이 되기 전에 죽어야 할 텐데 하는 것.

선생님 하셨으면서 노후를 걱정하세요? 저희들 보따리장사는 나중에 어쩌지요? 우린 연금은커녕 방학 땐 월급도 없어요.

이 나이 되면 먹고 살 걱정이 아니라 죽을 걱정이죠. 죽어서 오래 발견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노인 자살률이 더 높다는 뉴스를 봐도 그렇고. 힘들어서겠지, 외로워서겠지. 결국 고통이에요, 산다는 것이. 시작부터 마감까지.

시작은 어렵지 않잖아요, 저절로 태어나지는 것 아녜요?

그야 그렇지요. 환경이 문제죠. 열이면 열 다 축복 속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라오. 혼외자가 드물지 않다는 말이오.

요샌 비혼모도 있잖아요, 의식적으로 아이만 낳는. 결혼은 못해도요 아이는 갖고 싶다는. 미토콘드리아의 복제를 위해서.

무슨 소리, 엄마의 욕심이지. 지브란 이야기 명심해요,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당신의 사랑은 줘도 생각을 주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런 말. 아이는 정상적인 가정이 있어야 해요. 아버지가 없다, 그건 매우 곤란한 일이에요. 난 그런 사정 때문에 친정도 멀리하고 살았어요. 이래저래 위장된 삶이었지요.

위장이라뇨. 누구나 지난날의 무엇인가는 드러내지 않고 살지요. 어차피 오늘만 있는 걸요.

오늘만이라고? 젊은이가 그렇게 말하다니요. 내일을 보며 살고 그러는 것 아닌가요?

우리 세대는 내일이 없다니까요. 눈을 뜨면 오늘인 거죠. 오늘이 힘들어서 노후 같은 단어는 감이 안 오죠. 날마다 바뀌는 맘 때문에 더더욱요.

맘이 날마다 바뀌다니요?

예. 맘이 바뀝니다. 전 날마다 맘이 바뀌어요. 뭔가를 끝냈다 했는데 어느 날 여전히 생각을 하거나…….

아, 맘에 둔 사람 말이군요.

아아니요, 맘에 두기는요. 그냥 맘에 없었는데 마음에 있다거나.

그게 그런 말이네요. 아직 젊어서 가능성이 있을 때는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구려.

아아니요, 전 좀처럼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 맘이 그냥 변하는 거죠.

참, 그 말이 그 말이라니까…….

 

예, 저는 그래요. 맘이 늘 바뀌어서 이러고 살죠. 하도 바뀌니까 종잡을 수 없어서, 뭘 원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요. 정말 아기를 갖고 싶다가도 겁이 나고요. 남편은커녕 남자친구도 없는데요.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노인과 교집합이 그리 있을 리도 없다.

 

저 그럼 가봐야 해서요.

다시 일어서려다가 생각이 났다. 아차, 그 임신 이야기다.

그게, 제가 궁금해도 머뭇거리고 있었는데요. 좀 전에 임신 이야기를 왜…….

이번에는 내가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네, 그게 좀 이상했어요? 간단해요. 저 둘이 그렇게 앉아있는 모습이 떨떠름하다 그 말입니다. 내가 아들 엄마라고 남자애 편을 들어서가 아니라, 다 큰 처녀들 요즘 다이어트들 한다 해도 몸무게는 몸무게지. 쌀 20킬로도 번쩍 못 드는 것이 요즘 남자애들 아뇨. 비실비실하기는 여자애들 똑같고. 그런데 그렇게 뭉개고 앉아서 욕보이지. 내가 멀리서부터 한참을 보고 왔어요. 그래서 거꾸로 말했죠, 임신이 아니라면 내려앉아라, 뭐 그런. 하긴 요새는 돌려서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아니기도 하고.

남자 무릎에 앉은 여자애가 미우셨군요. 저라면 부러운 편인데요?

부럽기는. 저렇게 밖에서 유난떠는 남자들치고 성격 더 불량하기 마련이에요.

보이는 친절이 별로다, 예 뭐. 저 그럼. 다음에 혹시 만나게 되면 이야기 더 들을게요. 안녕히 가세요!

여자애가 미우셨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정말로 뛰기 시작했다. 풀밭을 예상했지만 길은 좁은 포도였다. 조깅화와 러닝화의 구별 없이 신은 운동화 바닥이 아스팔트 느낌을 그대로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섰다. 무엇을 두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선생님 할머니도 보이지 않게 멀리 뛰어왔나 보다.

 

 

저녁가끔 일기를 쓴다. 쓰는 날이 많아졌다. 일기까진 아니고 일단 뭔가를 메모해 놓는다. 날마다 변하는 나를 알기 위해서,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써 두는 것이다.

 

1) <금지된 사랑>을 보았다. 1992년 작, 프랑스 원제로는 ‘겨울의 심장’이다. 다니엘 오테이유, 아니 스테판의 겨울처럼 차가운 심장이겠지. 앵 쾨르 앙 이베르, 향수에 젖는 프랑스어 발음. 향수라니, 이건 좀 미친 감정이다. 프랑스 문화는 부러 외면하고 싶은 억하심정이 들 때도 있다. 푹 빠져서 공부할 때는 언제고. 변덕이 죽 끓는다.

‘관중 속에 한 명이 감명을 받아 인생이 변한다면 연주자로서 만족을 느낀다.’ 그 비슷하게 바이올리니스트가, 여자가, 에둘러 말한다. 남자를 유혹하는 말이었다. 나는 내 소설이 단 한 명의 독자에게 감명을 준다고 만족을 느낄까? 아니다. 소설이 원칙적으로 소통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말만 한다. 만족이라면 이상한 말이겠지만, 나는 내 글이 문자화되어, 그러니까 살아서, 나를 떠나는 것으로 만족한다. 글은 문자화되면 제 생명으로 살 것이다. 출판사 창고에서 바로 죽든지, 중고 책으로 떠다니든지, 언감생심 누군가의 책장에 남게 되든지.

영화는 아주 절제된 사랑의 형식으로 감동을 준다. 다만 이런 섬세한 게임은 21세기엔 어림없다. 지금의 우리는 황량한 바다에서 살고 있음으로 해서 사랑으로 섬세할 여유가 없다.

사족: 영화에서 오테이유의 큰 눈은 멀건 공간을 바라보았지만, 실 인생에서는 에마뉘엘 베아르와 함께 살았다. 결혼식도 하고. 열세 살 나이 차 같은 것은 서양인들의 경우, 아니 우리나라도 이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 후엔 헤어진다. 딸도 있었던가.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이혼에 장애가 되지 않는 시대다. 참 자기중심적인 시대. 참 솔직한 시대. 참 현대적인 시대. 인간이 모노가미라는 환상, 그 거짓을 공공연히 법적으로 실행한다.

 

2) 처음으로 광주천변에 내려가 보았다. 어쩌다 처음 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칠십 세 정도, 전직 초등학교 교사였던 할머니. 아들 하나, 아마 서울에. 유행을 따르지 않은 차림새에 표준어를 쓴다. 조금은 괴팍할까? 관심은…… 모르겠다.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대신 진짜 글감을 건졌다. 혹시 천변에 다시 나가보기. 산책이 아니라 누군가를 확인하고 싶다. 실제로 모두 ‘다리 밑에서’ 태어난 우리들. 더러는 초호화 초고속 세상을 살아가는데, 누군가는 여전히 ‘다리 밑에서’ 살고 있는지 찾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우연인 것처럼 마주치기.

 

 

차가운 남자는 오테이유의 얼굴이 아닌 내 얼굴로 나타난다. 나는 남자이고 차가움을 가장해야 하는데 실은 매사에 참을성이 없다. 그가 - 절대로 여기에서 또 설명하고 싶지 않은 그가 - 나에게 비판적으로 내뱉었던 단어 ‘조급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내가 남자다. 그러니까 남자인 것만 다르다. 나는 여전히 비정규직인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가 번갈아 나타난다.

내 몸은 세상에서 외면 받는 상처로 뱀처럼 휘었다. 척추측만증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이올린의 몸통이 되어 줄과 활을 버티고 있었다. 줄과 활은 힘겨운 싸움 속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내가 줄이든 활이든 능동적인 무엇이 될 확률은 얼마였을까. 활에 닿은 줄이 하나 터져버린 어느 날 나는 허리를 펴고 곧게 걷게 되었다.

누군가로 빙의되어 꿈을 꾸는 일은 두통과 더불어 겨우 깨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남자는 좀 그렇다.

 

 

실제로 나는 천변에 나가 보기로 했다. 설마를 확인하는 일, 그리고 누군가를 만난다면, 다리 밑에서 살아가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찬찬히 살펴보거나 가능하면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쪽이 훨씬 생생한 체험이고 글감일 터였다. 여러 명일까. 노숙 인구가 서울역 근처에만 200명도 넘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믿기지 않지만.

한번은 정말 한 남자가 있었다. 흐르는 물을 향하고 앉아 있어서 등만 볼 수 있었는데, 옆에 두고 있는 가방이 조금 컸기 때문에 눈에 띄었다. 크다는 말은 일상 산책하는 짐이랄 수 없는 부피였으니까. 눈에 띄지 않게 속도를 줄이며 흘겨보았더니, 그는 입성이 우선 말끔해서 노숙인일 리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노숙인의 존재를 꼭 확인하고자 하는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글감으로 생각했었던 일은 죄로 갈 거라는 마음이 일었다. 그런데도 지나칠 수 없는 무엇 때문에 매달렸다. 몇 번 시간대를 바꾸어 나가 보았는데, 정말 밤이면 사용했을 얄팍한 이불이나 골판지 쪼가리들이 교각과 위쪽 도로 밑 틈새 여기저기에 끼어 있었다. 중간 높이의 단에는 그을음 흔적이 눈에 띄었는데, 일정 시간 지속적으로 불을 피운 것이 분명했다. 어딘가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틈새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구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교각 구조를 탓하려다가 멈칫 놀랐다. 틈새가 있어서 노숙인이 양산되는 것이 아니라, 노숙인들이 생기다 보니 틈새가 이용되는 것을. 그렇다면 다리 공법의 구조가 아니라 사람을 노숙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탓해야 맞다. 사람이 떠돌 것이라면 기술 부족으로 더러 틈새를 남겨둔 것이 오히려 잘 한 일 아닌가.

 

그러다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생겼다. 그날은 조금 덜컹거리는 창에 바람막이 정도 뭔가 천이 필요해서 복개상가엘 먼저 들렀던 터다. 베이지색 옥스퍼드 천 두 마를 떠서 수선 집에 시접을 박아 달라고 맡겨 놓고 천변으로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징검다리가 시작하는 자리에 이상한 자세로 앉아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잘못 오해하면 거기에 실례를 하려고 앉은 모양새여서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아니고,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서는 검은 비닐봉투를 물에 흔들며 무엇인가를 씻고 있었다. 차갑고 더러운 물에 뭘 씻어?

징검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거의 스치듯 여자를 지나쳐야 했는데, 내 눈은 탐색하듯 씻는 물체에 고정되었다. 여자는 놀랍게도 하얀 밥알들과 큼직한 무김치 조각들을 분리하고 있었다. 무 한 조각이 50cm쯤 물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내용물이 확연히 보인 것이다. 흐르는 개천에 음식을 헹구다니, 마치 먹다 버린 봉지에서 쓸 만한 무 조각을 건지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주체는 사람이었다, 여자 사람. 넓어진 가르마로 보아 오십은 훨씬 넘었을, 그렇지만 곱게 앞머리를 잘라서 앞으로 내린 모습, 절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아니라는 점에서 ‘미친’ 여자는 아닌 듯 했다. 짐작으로 키는 작은 편에 몸집은 꽤 있어서 굶기에 말라 지친 몰골도 아니고.

그러는 사이 나는 징검다리를 다 건너와 버렸다. 여자가 아무리 씻는 데 골몰해서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다시 돌아가 확인을 할 만큼 여자를 무안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정말로 여자의 허기가 그런 행동을 하게 했음을 확인하기가 무서워 도망친 것이라 해야 옳았다.

 

오후 서너 시 경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그렇다면 저 여자는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잠든단 말인가.

원래 예정했던 산책길은 중앙대교 아래까지 편도 15분, 거기서 뒤로 돌아 맡겨둔 천을 찾으러 다시 온다면 산책으로는 충분할 터였다. 그런데 발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지를 않았다.

그렇게 어설피 걷던 나는 슬그머니 뒤로 돌아섰다. 서려다가 발견했다. 여자는 어느새 건너편 길섶에 앉아 있었다. 원래 그쪽은 자전거 길인데 더러 사람들이 오가는 좁은 산책로가 있었다. 여자는 산책로를 뒤로 하고서, 그러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 피해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얼마 전에도 건너편으로 그 여자를 본 것 같았다. 뚱뚱해 보이는 모습은 있는 대로 옷을 다 입어서 그랬으리라. 그때도 양 옆에 짐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좋을까.

아이쿠. 그렇게 멍청하게 돌아서는 바람에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에이. 버럭 화를 내는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고, 바로 직전에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 여자를 잡으려고 쫓아가는 모양새였다. 다시 돌아다보니 그 여자도 꽤 무거운 가방을 팔에 걸고 있었다. 웬 여자들의 수난이람. 보퉁이를 싸들고 도망치려는 여자는 뭐고, 돌보는 이 없어 저리 하수구가 섞여 흐르는 물에 무김치를 씻는 여자는 뭐람. 머리가 빙글 돌았다. 씩씩거리는 남자와 나도 모르게 재차 부딪쳐서 걸고 넘어졌다. 도망치는 여자가 시간을 벌면 좋겠다. 사람들이 어디서 금방 에워싼다.

 

그렇게 그날의 탐색은 끝났다. 웅성거리며 수군대는 사람들이 하늘을 배경으로 눈에 들어왔을 때는 벌써 현기증은 끝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발목이 시큰거릴 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징검다리 저편을 찬찬히 보니 여자는 작은 소동에도 이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멀리에서도 팔이 움직이는 동작이 보였다. 다행히 - 다행히? - 무엇인가를 먹는 가벼운 동작이 아니었다. 왼손을 비껴 옆으로 폈다 오므렸다 반복하는 것이 긴 실로 바느질이라도 하는 동작 같았다. 바느질? 상상력치고는 빈곤했다. 여자가 게서 무슨 바느질을 할 것인가. 햇볕 드는 거실에서 탁자를 치워놓고 식구들을 위해 보송보송한 이불 홑청을 깁는 여자?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이렇게 빈곤한 상상력으로 무슨 소설을 쓸 것인가.

 

 

집에 돌아와 보니 창은 여전히 덜컹거렸다. 바느질까지 맡겼던 천을 찾아오는 것을 잊었다는 생각이 났다. 발이 좀 삐었기로서니 그렇게 줄행랑을 치다시피 곧바로 택시를 타야 했을까?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진실을 마주치는 일이 더 무서웠을까. 나는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바람막이 천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천을 찾으러 가면 천변 산책로를 외면할 수 없고, 그래서 가지 않았다는 설명이 옳다. 날은 갑자기 더 추워졌고 창문은 더 세게 덜컹거렸지만 나는 가능하면 창 쪽을 외면했다.

그 전에 나는 최소한 내가 왜 그 여자를, 그런 노숙인을 찾아서 확인하고 싶어 했는지 알아야 했다. 단순한 글감? 그것은 실은 매우 모독적인 발상이다. 여자를 대상화하고 있으니까. 샤덴프로이데? 나라말에 자부심이 대단한 프랑스에서도 번역을 못하고 독일어를 그대로 쓰는데, 서울 시절 함께 사무실을 썼던 독문과 강사의 설명으로는 ‘타인의 고통을 보는 기쁨’ 비슷한 말이라 했다. 그러자 통째로 백과사전인 사학과 이순규가 러시아엔가 중동엔가 더 재미있는 일화도 들려주었다. 한 농부가 우연히 램프를 하나 주웠는데, 무심코 문지르자 램프요정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겠단다. 농부가 하는 말이, 옆집에는 램프가 아니라 젖소가 한 마리 생기더니 온 가족이 먹고 남을 우유를 내어 곧 부자가 되었다고. 꼭 그런 젖소를 원하면 아예 두 마리라도 구해줄까요? 요정이 물었는데, 농부가 싫다고 했더란다. 아뇨, 난 그런 젖소 필요 없소. 이웃이 다시 가난해지는 것이 내 소원이요, 그러니 이웃의 젖소를 죽게 해 줘요! 동서고금 비뚤어진 심보.

 

이건 빗나가는 말이지만 가끔 독일어에 정곡을 찌르는 단어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영미권처럼 경쟁사회를 ‘활력 있는 자유경쟁사회’라는 의미로 그대로 쓰는데, 독일에서는 ‘팔꿈치사회’라고 쓴다고 들었다. 얼마나 적나라하고 정확한가. 영락없이 다리 밑 길바닥에 나 앉아 열심히 팔꿈치를 흔들고 있던 여자, 거기 그렇게 앉아서 그 팔꿈치로 누구를 제칠 수 있단 말인가.

팔꿈치사회에 더욱 만연하는 샤덴프로이데 - 그래서 내가 노숙인을 찾는 건 절대로 아니다. 많은 단점에 허점투성이, 하지만 그렇게까지 저열하지는 않다. 혹시라도 다리 밑 사람들의 고통을 나누고 싶고,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을 뿐이다. 그래, 어떻게 된 사회에서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왜 일인당 평균소득은 해가 다르게 치솟는데 탈락자들은 날로 더욱 늘어나는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 어떤 순간에, 얼마나 아래로 내몰리면 죽기로 하는가. 이 화려 장관의 세상 속 그런 어두움을 누군가는 써야 한다고 믿는다. 독자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출판사만 구하면 된다. 출판사도 못 구하면? 그건 일단 쓴 다음의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와 뒤뚱거리는 발걸음으로 잽싸게 천변 산책로를 빠져 나와서 택시를 타고 도망쳐온 나는 둘인가, 하나인가, 샴의 쌍둥이. 진실을 맞닥뜨릴 용기도 없이 싸구려 감상에 젖은 얼치기.

 

그것이 열흘도 넘은 일이다. 발목은 처음에는 상당히 부어올랐지만 그런대로 가라앉았고, 나는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그러고도 나는 특별히 다른 일들에 몰두할 일도 없으면서 천변을 외면하고 있다. 며칠 전 그 할머니는 영화도 무섭다 했는데, 나는 현실이 먼저 무섭다.

날마다 변하는 나. 나는 날마다 나를 배신한다.

 

 

꿈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다. 이번에도 나는 남자인 것만 다르고 불발인 채로. 느닷없이 고준생, 고시 준비생. 다음 순간에는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다. 표정은 밝았다. 인문계 쪽에서 이만한 자리는 완전히 로망이니까.

우린 일곱이다. 아래 셋은 안에서는 그냥 비서로 불린다. 끼리끼리 팔꿈치 다툼도 있다. 주군에 더 가까운 자리에 가기 위해서다. 충성도 경쟁이랄까. 우린 기간제이기는 하지만 별정직 공무원이다. 제대로 실력만 갖추면 하루살이 신세를 쉽게 면한다. 인맥으로 인해 대기업에서도 눈독을 들여 빠져나갈 수도 있다. 의원님의 연설문도 쓰다가 더 잘나가면 의원이 되고 더 잘나가면…… 언감생심. 하지만 소규모 회사처럼 의원님 맘대로 생사여탈권이 있다. 금세 괴로운 얼굴이 된다. 아, SSKK 신세!

 

외치다가 눈을 뜬다. 무슨 약자더라? 어디선가 봤었는데, 그래, 시시까까. 더 풀어 쓰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라는 대로.

다시 눈이 감기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금실아, 웬 일?

순간 늘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옆방 여성 보좌관이 날 불러 세운다. 누구라서 어떻게 내 이름을 부르는가?

소스라쳐 놀랐는데, 제대로 깨어나 보니 천정에 그 얼굴이 박혀 있다. 성글어진 가르마에 앞머리를 통째로 잘라 빗어 내린 여자, 천변의 여자다.

왜? 아무리 꿈이라지만 너무도 모순적인 맥락에 짜증이 난다. 의원 보좌관과 천변의 여자가 어떻게 뒤섞이는가? 들고 다니는 가방의 크기로 해서?

 

큰 가방 곁에는 작은 가방도 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너른 서너층 돌계단을 만들어놓은 한쪽에, 두 가방 사이에 앉은 여자는 고개를 처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고르고 있다. 오른손 왼손이 제법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쪽에서는 절대로 알아 볼 수 없는 동작으로. 나는 오던 길을 반대로 후퇴해서 징검다리를 건넌다. 이번 징검다리는 곡선을 이루어 그쪽 돌계단과 어울려 모양이 좋다. 내 눈은 멀리에서부터 여자에게로 고정되지만, 가던 길을 돌아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나를 여자가 거들떠보지 않아 다행이다. 무엇인가를 먹는가? 그저 보는가? 자전거 전용로 옆으로 억지로 난 좁은 길에선 여자를 자세히 관찰할 수가 없다. 어쩌면 여자는 장갑 같은 작은 무언가를 뜨는 손동작을 하고 있다. 뜨개질을? 그 순간 여자가 고개를 든다. 미셸?

퐁네프의 연인 미셸이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붉은 노을빛 하늘을 바라보면서, 연인이 주문한 대로 ‘하늘이 하야네.’라고 말하는 미셸의 얼굴. 시력을 잃어가는 비련의 화가, 왜 홀로인가? 구름 맑은 날이지만 약속대로 ‘하지만 구름은 검은색이네.’라고 말하는 알렉스가 없다. 미셸을 찾는 전단지도, 전단지를 죄다 떼어 숨기는 알렉스도 없다. 쓰레기처럼 버려진 연인들을 숭고함으로 비춰주는 불꽃놀이도 없다. 이곳은 파리의 퐁네프가 아니다. 이건 영화가 아니다.

내가 마주친 것은 키가 작은 나무에 걸린 검정색 아웃도어와 알록달록 색깔의 바지. 나뭇가지를 휘면서 거기 걸려 있는, 아직 물이 뚝뚝 듣는 빨래다. 여자는 이른 새벽 얼음장 같은 하천 물에서 빨래를 했겠다. 현실의 냉기에 도망치듯 징검다리를 다시 건너온다. 여자는 추위도 아랑곳없이 발목을 드러낸 채, 양말이 없었나, 느긋하게 너른 돌계단을 통째로 차지하고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조급하고 안달이 난 쪽은 나다. 휴우, 내 한숨 소리에 다시 또 잠에서 깨어난다.

 

 

이렇게 잠이 깬 날엔 다시 잠으로 돌아가면 더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게 된다. 아직 새벽은 멀었고 불 켜진 방에서 할 일은 책상에 앉는 일뿐이다. 지금은 방학이고 기껏 학기마다 계약서를 쓰는 신세이지만, 프랑스문학은커녕 언어교육원의 프랑스어 강의도 아슬아슬하지만, 논문을 써야 한다. 만일을 위해서 한국연구재단의 등재지에 게재 판정을 받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아직도 순진한 건가. 8만이 넘는 우리 회색인간들, 특히 지방시, 지방대 시간강사에게 빛줄기는 희귀종이다. 한 줄기 빛도 아직 새어 들어오지 않는다.

노트북 화면이 느리게 잠에서 깨어난다. 최적화 프로그램을 돌린 지 한참 되었나 보다. ‘한글’에 들어가서 ‘최근작업문서’를 연다. 뜨는 파일명은 논문 제목이 아니라 옆길로 샌 「다리 밑」이다. 그래, 다리 밑에 가 볼 일이 기다리고 있다. 창밖이 밝아오면 나는 무슨 마음일까. 내일 나는 누구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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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스프리』2015. 봄 4권 1호 통권 제13호 190-205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1. 23. 01:58

「유예된 시간」

 

다시 여름이 되자 가슴이 묘하게 조여 왔다. 지난여름 이맘때 물속에 빠졌던 기억이 문제였다. 봄, 수백 명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뉴스로 아수라장이 된 봄날 이후 더 나빠졌다. 나 또한 돌아오지 못하고 검은 바다 멀리로 떠내려가는 꿈이 계속되곤 했다.

언어교육원 휴가기간은 원어민 강사들의 귀향을 배려해서 꼬박 3주다. 나도 평택 집에 머물기로 했다. 가끔은 지치고, 엄마 밥이 그립기도 했으니까. 마침 미국에서 잠시 다니러 온 막내 옥실이랑 몇몇 친척들이랑 남쪽 바다로 휴가를 떠났다. 하필 바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옥실이 굳이 담양의 원조 대통밥을 먹어보겠다고 하고 - 옥이는 수습이지만 맨해튼의 꽤 유명한 식당 요리사다 - 다른 사람들은 땅끝의 의미를 내세웠다. 나는 뭐, 어른스럽게 그 일을 잊은 듯이 처신하면서 물만 피하면 될 일이었다. 거기서 뜻밖에 물 밖으로 나온 게 한 마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놈을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식당, 정확히는 식당의 밥상에서였다. 일은 아직 떡갈비가 나오기 전에 일어났다. 한참 접시들이 들어와서 밥상 위 교통정리를 하는 순간이었다. 승연이 벌떡 뛰면서 일어났다. 까악, 다른 아이들도 함께 소리를 질렀다. 소동의 진원지는 집게발이 유난히도 꿈틀거리는 접시였다. 대여섯 마리의 사나운 게들이 비명을 지르며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말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게들에게 입혀진 양념은 색깔로 미루어 간장과 고춧가루 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잘리지도 않은 통째의 게들이 단말마의 춤을 추고 있었다. 인간들의 이빨 사이에서 부서지지 않는다 해도, 진한 양념 탓에 그대로 몇 분이 지나면 생명을 부지할 길은 없을 것이다. 누구도 그 쌩쌩한 게들을 집어서 씹을 용기들은 없어 보였다. 서둘러 사람을 불러서 접시를 물리려는데 재경이 소리쳤다. 저 하나 주세요.

재경인 이종매의 아들이다. 은실의 아이들인 승연이 승주와는 달리 재경은 외동이라서인지 어려서부터 제 주장이 강했다. 재경에게 한 마리를 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순간은 다들 어리둥절해서 별 생각 없이 그래라 하고 말았다. 재경인 빈 접시에 옮겨진 게 위로 제 컵의 물을 부었다. 마치 양념을 씻는 동작이었다. 침착한 재경의 행동에 다들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놈은 재경이 일단은 자신을 숨 쉬게 해준 장본인임을 알 리가 없는 모양으로 그에게 덤볐다.

어쨌거나 게장 파동은 가라앉았고 떡갈비와 양념갈비가 반씩 담긴 접시들이 나오자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의 일상이 되살아났다. 대통밥을 본 아이들은 신기해했다. 문제는 밥이 끝나고 디저트 과일까지 다 먹을 때까지도 놈이 씩씩하게 살아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두들 재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경은 이마를 찡그렸다.

승주가 갑자기 일어서서 복도로 나가더니 종이컵을 들고 왔다. 여기 넣어서 가져가면 될 걸. 그러면서 종이컵에 게를 조심스레 옮겨서 재경에게 내밀었다. 재경은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흥미가 떨어졌는지, 아무튼 염려하는 낯빛이었다. 재경이 뒤로 물러서자 승주가 나섰다. 그럼 내가 가져가야지. 승주는 물까지 조금 넣었다. 누군가 소금을 좀 넣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금도 얻어서 넣었다. 완벽한 집이 지어졌다. 도망갈까 봐서 지붕까지 종이컵으로 씌우니 좁고 불편한 집이었다. 승주는 수백 년 수령의 나무들이 늘어선 둑을 따라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컵을 조심히 들고 다녔다.

 

우리 모두는 일단 다 같이 평택 집으로 가는 차들에 나누어 탔다. 나는 승연이 승주랑, 그러니까 게랑 함께 아버지 차를 탔다. 은실은 성수대교 ‘아차’사고 이후로 많은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하므로 운전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가 퇴임 후에는 큰 차를 가지고 다니신다. 순전히 은실네 때문에.

뒷좌석의 승연은 할아버지의 스마트폰을 가져다가 게의 종류를 찾는다고 야단이다.

엄마, 컨이모, 울나라 게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아셩? 18종이네용.

말 좀 예쁘기 하시지! 우리나라!

았써요. 그게…….

알았어요!

예, 알았어요. 여기 봐, 이 사진, 요게 농게래요, 농게!

논게? 논에서 살아?

엉뚱한 승주는 누나에게 핀잔을 듣는다. 논게라니, 농게라니까. 딱 이 분홍색 집게발이 농게야. 게 발이 몇 갠 줄 알아, 너?

그야 여섯 개!

뭐야, 게가 곤충이니? 집게발 두 개 빼고도 여덟 개야. 들어 봐. 집게발가락은 길고 숟가락 모양이어서 개펄에서 먹이를 긁어먹기에 알맞다. 수컷의 한쪽 집게다리는 암컷과 같으나 다른 한쪽은 커서 집게길이가 50mm에…….

언니, 이 게가 살까? 아이들 떠드는 데는 아랑곳없이 은실이가 걱정스레 말한다.

살아 있으니 걱정 마.

언니, 난 좀 무서운데. 이게, 이 게가 지금 무섭지 않을까? 난데없이 컵 속에 갇혀서…….

컵인 줄 알 리 없잖아. 집에 도착해서 넓은 데 놓아주고.

어떻게 살아?

걱정 마, 일단 살아 있잖아. 잠을 청해 봐, 너 깨어있음 멀미하잖아.

은실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다. ‘아차’사고란 우리가 서울 고모네 집에서 강 건너로 학교 다닐 때, 고1 은실이 늦장부리는 나랑 같이 나서서 지각하는 바람에 성수대교 사고를 비껴갔던 일을 말한다. 하지만 친한 친구를 잃은 은실에게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가 되었고, 그 이후 은실의 삶은 뭐랄까, 그리다가 반쯤 지워서 뭉그러진 수채화 같다. 아래 절반쯤을 손바닥으로 지워버린. 나무도 집도 살아있는 풍경이기는 하지만 아랫도리는 뭉그러져 불안한, 덧그릴 수도 없이 여전히 물감들이 흐르고 있는 그림.

은실이 농게 걱정을 놓아두고 스르르 잠이 든다. 아이들은 벌써 다른 주제로 깔깔대고 있다.

아버지, 일단 천당의 문턱에서 살아나왔으니 다행인 거죠?

그럼.

아버지, 이 게는 운이 좋아 살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님…….

아서라, 생사의 문제 어쩌고 은실이 들을라.

아니, 아버지, 자기가 맹렬하게 탈출을 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믿을까 궁금…….

그만 두래도. 게가 무슨 철학을. 아버지 운전하잖냐. 여보, 한박사 좀 말려요!

‘한박사’는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는 이름이다. 어머니는 뒤만 한번 돌아다보신다.

그날 저녁에도 아직 헤어지지 않고 다들 집에서 북적대느라 부산한 휴가의 연속이었다. 안방은 여자들…… 그런 식으로 분류된 잠자리는 불편해도 다들 즐거워하는 편이었다. 옥실과 은실을 가운데 두고 나와 어머니가 바깥으로 끼어 누운 잠자리에서 눈은 더 말똥말똥해지는 밤이었다.

올핸 모기도 별로 없어 다행이구나.

예, 엄마. 맘도 한번 오면 좋은데.

옥이는 엄마와 맘으로 엄마와 큰엄마를 구별한다.

그렇게 여름휴가가 끝나 갔다. 며칠 후 옥이가 돌아가자 나도 바로 내 굴로 돌아왔다.

 

철학이 다시 떠오른 것은 애들이 거의 날마다 농게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개학 전이라서 다른 재미있는 일은 없는 듯 보였다. 분홍 집게발 농게라서 ‘분농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다시마도 넣어줘 보고, 물속에 돌도 넣어주었다고. 제법 의식주가 갖춰져 가고 있었다. 그러니 게라고 철학을 하지 않겠는가.

밥이 없으면 죽지만 밥만으로는 살지 못하는 인간처럼, 생명체인 게도 그 나름의……. 아직 수업이 없어 빈둥대니까 이불 속에 누워서도 잠이 헛들곤 했다. 그러면 물에 빠지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눈을 버럭 뜨고 온갖 상상에 매달린다. 분농이는 행동에 점수를 주어 자유의지론자 쪽으로 분류해 두었다. 그 순간 아주 우연히 그 반대가 떠올랐다. ‘진드기 철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가, 배승한 교수가, 단 한번 함께 했었던 언어교육원 회식자리에서 읊어대던 이야기였다. 대충 소맥이 한 두 바퀴 돌았을 때였다.

술, 좋군요. 아, 현세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 최고의 세계다, 옳소! 더 나은 세계가 있다면 신은 인간을 위해 반드시 그 더 나은 세계를 주셨을 거라, 가라사대 라이프니츠! 세계에는 무엇보다 완전한 신이, 이 세계질서를 보장하는 선한 신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니까…….

말씀은 선한 신이라면서 어감은…….

아니, 모든 생물체며 자원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믿음이 오늘날 더 확고해지고 있잖슴까.

거야,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과 지능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니, 그건 인간을 상대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로 보았다는 뜻이죠. 빌헬름 베클린이라고, 라이프니츠에 비하면 달걀로 바위치기도 안 되는 위인이, 물론 라이프니츠 사후였지만 재밌는 글을 썼어요. 내용인즉슨, 치즈에 생긴 진드기도 철학을 한다 이 말씀.

치즈 진드기?

어라, 저도요 덩어리 치즈 속에서 시꺼먼 날벌레를 본 적 있어요. 날개랑 더듬이도!

눈 좋으시네요. 하지만 곤충학 말고 철학이라잖아요. 계속해 보시죠, 배 교수님.

제가 아니라 베클린이요. 진드기 철학자 말씀이…… 읊어요? 아, 이 치즈의 향기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 맛은 낙원과 같구나! 얼마나 영양가 있는 음식인가! 내 집은 편안키도 하여라! 헤아릴 수 없이 온통 먹을 것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여! 치즈를 만드신 그분, 우리 진드기를 위해 치즈를 창조하신 그분은 얼마나 전능하고 훌륭하신지! 우리의 존재는 그분의 의지요, 우리의 행복이 그분의 목적이다…….

그때 나는 배승한이 아니라 진드기 철학자라는 게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라이프니츠에 대해 나는 피상적으로만 알았을 뿐인데, 당대에도 프랑스에선 의견이 엇갈렸다. 디드로가 그를 플라톤만큼 치켜세우자, 볼테르는 철학소설 『캉디드』를 써가면서까지 드러내놓고 그를 비아냥댔다. 베클린은 철자도 모르는 생경한 이름이라서 찾는 데 한참 걸렸다. 제목은 「에담 치즈의 8층에 사는 진드기의 독백」이었다. 에담 치즈라면 진드기에게는 타워팰리스 정도는 되는 명품 집이다 싶었다.

은접시 위에 에담 치즈가 한 덩이 놓여 있고, 그 가까이에 촛불이 비추고 있다. 진드기는 치즈의 유기성분들이 내부에서 발효하여 생성된 생물체다. 꼭 그렇게 본문에 쓰여 있었던 것 같다. 분명 대혁명 이전의 글이었고, 그러면 다윈을 한참 앞서는데도 ‘생성’을 말하다니 놀랍다고 생각했었다. 진드기들 가운데 한 철학자가 치즈와 진드기의 근원과 운명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는데, 그때 은접시째로 치즈의 주인이, 한 신사가, 이 치즈를 먹으려는 찰나에 진드기 철학자의 독백을 엿듣게 된다, 그런 식의 재미있는 설정이었다.

어디엔가 내가 저장해 두었었는데? 못 말리는 조급증을 어쩌지 못하고 그만 일어나서 노트북의 폴더를 뒤져냈다. 파일 명 에담 치즈.

진드기철학자는 촛불을 찬미한다. 이 빛은 진드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로구나! 행복한 진드기들이여! 너희들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구성체들 가운데 중심이며 궁극의 목적이다. 빛은 너희의 기쁨을 위해 빛나고, 치즈는 너희를 위해 향을 풍기며, 치즈의 지방질 성분은 너희를 환락으로 초대하는구나! 바야흐로 이 연설가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할 참이다. 미래에 그 일부를 뜯어먹으면서 살게 될 치즈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진드기 형이상학의 수많은 기본개념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신사는 이 철학자를 그가 서 있던 강단과 함께 입안에 넣어 삼켜버리고 만다. 이 진드기 철학자는 교살자의 이빨 사이에 씹히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보존과 행복이 자연의 궁극 목적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푸훗. 그때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가 무슨 뜻으로 진드기 철학을 읊었을지 궁금한 내 꼴은 뭐냐 싶었다. 완전한 신은 그 행위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신은 항상 최선을 지향한다는 최선의 원리를 비웃는 그는 자유의지론자?

파독 광부와 간호원으로 돈 모아서 돌아온 착실한 부모, 어머니의 비밀 아닌 비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입양해야 했던 아픔, 그 아픔을 품어주고 첫아들로 키워낸 아버지. 유난히 키들도 작은 시골마을에서, 동네 사람들과 판박이인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훤칠한 서양아이로 자라나면서 느꼈을 형의 혼란. 멋모르고 순진했던 자신의 유년시절. 있을 수 있는 최상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상을 일찍 간파했을까, 형은. 친아버지를 찾아 독일로 떠난 형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지만……. 형은 아직 떠돈다, 무소식인 채로. 형을 찾아 형 따라 독일로 간 그는 독문학 박사가 되도록 형을 찾지 못했다. 그는 지방대학에 전임이 되었고, 언교원에 왔고, 그래서 만났고, 다시 독일로 떠났다. 그런 뒤에야 나는 그의 독일 해바라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독일에 가서는 얼마 지나서부터 내게 우편물을, 주로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그러나 꾸준히. 그러니까 자유의지로. 그가 찾는 형의 흔적은 브레멘에서 베를린으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까지 뻗쳤다. 그 또한 형을 찾아 거기까지. 그곳에서 형의 행적은 수상해졌다. 남미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형은 뉴욕에 두 번의 족적을 남겼지만 그 다음은 사라졌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형과 그가 차례로 찾아간 뉴욕의 한인은 서독 간호원 계약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취업해서 건너간 아주머니였다.

그 아주머니가 늦은 나이에 결혼한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 큰아버지였다는 우연을, 옥이가 자식 없는 큰아버지의 양녀로 미국인이 되었다는 더 거짓말 같은 우연을 그는 아직 모른다. 의지의 결과가 우연이라니. 그는 이 아이러니에 굴할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전근대적인 극이나 소설에서 가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엉뚱한 힘이거나 돌발사건이라고 비웃음 받을 우연은 또 있었다. 그는 뉴욕에서 독일을 거쳐 귀국한다고 말하고는 우편물을 하나 놓아둔 채 떠났다. 내 주소만 써둔 작은 소포를. 그것을 발견한 옥이는 수신인으로 기록된 내게 보냈다, 착실하게도.

내용물의 주인과 소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했다. 첨엔 이 장난스러운 혼란에 개봉을 미루었지만, 나는 곧 그에게서 연락이 있을 것을 믿었던 것 같다. 우연은 자신에게 발생하면 필연이 된다.

 

유예된 시간은 그의 침묵에서 비롯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돌아와 말이 없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어떤 마음으로 떨어져 있는 동안 이메일이나 우편물을 계속 보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와서는 이토록 침묵일까. 물론 그것들은 그냥 첨부파일이었다. 보관할 곳이 없는 물건을 퍼내듯이 보낸 메모 뭉치들에, 본문은 없었다. 그것은 그랬다. 모년 모월 모일, 모처에서, 아무개. 그 이상은 뭔가를 써 보낸 적은 없었으니까. 그 자신에 대해서 혹은 나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없어왔다. 아직 아닌, 유예된 관계는 한편으로는 유예된 삶이었다.

배승한이 떠났고, 메모들을 보냈고, 메모들이 쌓였고, 나는 그것들을 엮었다. 첨부파일들은 내 프린터에서 종이로 바뀌었고, 내 침을 발라서 종이들을 넘겼고, 내 손때를 묻혀서 글을 확인하고 다듬었다. 자판기의 비닐 커버가 구멍이 나서 버렸을 정도로 매달렸다. 원작자(?)와는 상의도 없이.

내 글이 혹여 『어둠의 자식들』처럼 성공하면 그가 저작권 문제를 거론할까. 하긴 그럴 염려는 없다. 그것이 단편으로 나간 지는 이태도 넘었고, 또 장편으로도 묶여 나갔지만 어느 중앙지 단 한줄 언급도 되지 않은 채 해가 지날 모양이니까. 또 그는 이철용이 황석영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설 그런 것 나도 쓰겠다 싶어서 써가지고 완성된 원고를 통째로’ 윤문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설명 없이 ‘조사된’ 글들의 파편을 보내왔을 뿐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들을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리했을 뿐이다. 누구라도 아무런 맥락 없는 파편들을 보면 정리하고픈 생각이 났을 것이다. 시간차도 있었고, 시간 배열도 아니었다. 쉽지 않아서 심혈을 기울였고. 그러는 사이 글들은 나의 것이라 여겨졌다. 내가 여러 단어들을 배열했고, 내가 문장을 문단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아마 알고서도, 발표된 글들을 보았음에 틀림없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발표된 글 때문에 시작을 못하는 것일까.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발표된 글 때문에 시작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들에게 유예된 시간? 어디선가 들었던 말인 것 같아서 움찔한다. 그런 구절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학부 때였다. 우리 과에는 아직 없던 여성문학 강의가 독문과에 있었다. 그때 담당 여교수는 이름부터 전투적인 『계급과 사랑』 같은 작품들은 간략한 소개로 끝내고는, 잉에보르크 바흐만이라고 하는 작가에 몰두했다. 「유예된 시간」으로 혜성처럼 나타난 독일어권 최초의 매체용 작가라고, 전후 50년대에 문학계의 스타였다고. 그러나 시는 시작 줄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님이 더 많은 설명을 곁들인 바흐만의 후반기 소설들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스타처럼 사적인 불행과 비극적인 죽음이 곁들여진 - ‘곁들여진’은 되돌릴 말이다, 이렇게 모독적인 단어들은 지워 마땅하다 -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졸업 후 파리로 직행한 나는 센 강을 보면서 가끔은 바흐만의 첫사랑 첼란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가 그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루마니아 태생으로 파리에 살며 독일어로 쓰는 시인 - 시는 심오하다 못해 해독 불능이라고들 했다. 두 시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었다. 따로 먼 데 떨어져서, 자살 그리고 자살 같은 죽음으로.

그런데 막상 시의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인터넷을 뒤진다. 유명한 시라서 금방 나온다.

훨씬 모진 날들이 온다, / 이의신청에 의해 유예된 시간이 / 지평선에 뚜렷이 모습을 보인다…….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제와 그 시의 제목이 갑자기 떠올랐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시를 표절하지는 않는다고 확신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배승한의 메모들을 표절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내 글의 출발이 그의 가족사를 정리하는 데서 비롯된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내 손이, 머리가, 그의 메모들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 그는 멀리에 나와는 무관한 세계에 있었다. 내 곁에는 교양한국어를 듣는 학생들과 가끔 전화를 하거나 불쑥 나타나는 이순규가 있었을 뿐이었다.

세상에!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쓰다니. 난 정말 혼자였음을 실감한다. 나는 일자리를 이유로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홀로 혼자서 살아왔다. 홀로 혼자서 - 이런 개념은 파리의 유학생활 이후로는 퍽 자연스럽다. 어떤 연관에도 불구하고 삶은 홀로 혼자서다. 어떤 의미에선 구원을 갈구하면서.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구원. 부재의 구원을.

 

구원 같은 것, 사실 우리는 그것을 이웃에서 찾지 못한다. 그 이웃도 구원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멀리 있는 타락한 - 노동도 질서도 모르고 때로는 가족도 모르는 - 어쩌면 조금은 미친 사람들의 예술에서 구원을 찾는다. 정상적인 삶 속에서 예술혼이 불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외도 있었지만 그건 옛말이다, 폴 클로델이나 괴테나. 실제로는 광기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경우가 더 많다. 물감이나 테레빈유를 먹는 정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귀를 자른 이야기에 이르면 으스스하다. 여행 혐오증은 취미라 볼 수 있지만, 씻기 혐오증은? 예술가들에게서는 도덕 또한 평가를 비켜간다, 다분히. 랭보에 집착한 베를렌, 수많은 카사노바 행각들. 그들의 광기는 비난받기보다 우리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예술로 인해서. 예술이란. 예술이란.

광기 한 톨, 앙 그랑 드 폴리 -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 최고의 것이라고, 고호가 동생 테오에게 그렇게 썼다. 폴 망츠의 <살롱 전> 비평문에서 비슷하게 인용해서. 그때가 서른두 살, 그리고는 겨우 5년 간 미친 듯 그렸고 가슴에 총을 쏘았다. 미쳐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도 귀를 잘라버린 이듬해 봄까지 그렸다. ‘캄캄한 어둠이지만 그조차도 색을 가지고 있는’ 밤을.

안락하고 안정된 삶을 위한 정직한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먹이는 데 그친다. 우리를,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안락하고 안정된 삶은 이론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안락하고 안정된 삶을 방해하고 얻는다. 재화가 한정된 이 세상을 떠올리면 그렇다. 또한 그 과정의 살얼음판, 그 외나무다리는 늘 불안하고, 그만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다스리기는 웬만한 철학으로도 어렵다. 뛰어내림은 자살이다. 그 사이에 광기가 자리한다. 조심조심 인내심을 가지고 걷기 아니면 그냥 뛰어내리기. 그렇다면 광기는 예술이다. 다음 발걸음을 좁은 길 위에 조심조심 내려놓기와 넓은 공간으로 몸을 던지기, 그 사이의 시간. 유예된 시간. 예술의 시간. 시의 시간.

순간 갑자기 그 이해하지 못했던 시구가 해명된다. 훨씬 모진 날들이 온다. / 이의신청에 의해 유예된 시간이……. 그건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판결이 완료되지 않았을 뿐, 처벌은, 힘든 날은, 예료되어 있다는 상황 아닌가. 물론 그 시에서 ‘모래가 연인의 죽음을 묻어버리는’ 혹독한 시련의 삶에 관한 이해도 부족했었다. 하지만 ‘유예된 시간’이란 단어를 어찌 그리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던가. 혹독한 처벌의 운명, 이라고 했다면 쉬웠을 것을. 유예된 시간이란 참 고상하면서 어려운 말이었다. 시는 어려운 말로서 사람을 매어두는구나.

예술의 시간은 아니되, 내게도 그러한 유예된 시간이 와 있었다. 나는 소포의 개봉과 소포 발신자와의 만남 사이 유예된 시간을 왜곡된 자학으로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먼저 봉투를 뜯을 것인가. 그가 먼저 연락을 할 것인가. 정당한 게임은 아니다. 그는 소포의 존재를 아마 모르니까.

유예된 시간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자 매력이 사라졌다. 해치우자.

저 한금실이예요. 소포가 저에게 …….

저 한금실이예요. 보내시려던 소포가 저에게 …….

저 한금실이예요. 뉴욕에 버려두고 오신 소포가 저에게 …….

‘보내려’ 했었는지 ‘버리려’ 했었는지를 모르니 단어를 고르기가 어렵다.

저 한금실이예요.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래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소포라는 단어를 피해서 썼다. 이번에는 <전송> 위에서 손가락이 멈춘다. 어쩌자는 말인가. 입력된 문자들을 주르륵 지우고 만다.

 

금세 가을이 깊어졌다.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9월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을은 경계의 계절이다. 더위와 추위의 권력 다툼 덕에 일교차는 있더라도 보통 상쾌한 날들이 이어진다. 유래 없는 청백 하늘이 나타났다는 뉴스가 있었다. 한쪽은 완전 흰 구름으로 다른 한쪽은 완전히 파란 하늘색이었다고. 하늘까지 양분돼서는 안 될 터다. 그렇게 양분된 땅의 세상은 이미 고정되어 석회로, 시멘트로 굳어 있는데.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나 주말은 완전 늦잠이다. 먹지 않으려고 일어나지도 않은 채 노트북을 끌어다가 뉴스를 뒤적인다.

국내 최고가의 아파트 값이 나온다. 면적은 192.86㎡로 가격은 65억 원. 단위환산에 넣으니 58평이다. 한 평에 일억 원이 넘는다고? 나는 내 셈이 틀리기를 바란다. 그 비싼 너른 집들에 누가 살까? 그런 곳에서는 부모 모시고 대가족이 사는 일이 드물다. 불효여서가 아니라 그들 차원에서는 아무리 넓어도 한 공간에서 부모 자식 세대가 겹쳐서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생활이 더 있는지도 모른다. 세련된 감각도 보통사람들 보다 훨씬 더 예민해서 서로를 더 존중해서 따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서울숲 갤러리아 포레는 90평도 있다. 런던에는 2,500억 펜트하우스도 있다. 일억 원 하는 집 2,500채와 맞먹는 한 채. 이런 기사들에 아픈 나는 좌빨이 아니다. 이 구조와 셈법을 의아해하는 멍청이일 뿐이다.

보자, 최저가 아파트도 있다. 통째로 500만원이 못된다. 최저가 아파트 스무 채가 최고가 아파트 단 한 평 값만 못하다. 이 무섭게 저열한 인생이 차라리 부끄럽다.

하필 고흥이다, 이순규의 고향. 고흥 어디일까. 고흥도 넓다. 도화면이라고, 네이버 지도에 보니 도화면은 섬이 아닌 본토에 속한다. 이순규의 고향은 그보다 더 오지, 섬이다. 섬을 지나서 다시 섬. 연륙교와 연도교로 이어졌으니 섬 아닌 마지막 섬. 어쨌거나 나는 지금이라도 이 원룸 보증금을 들고 그곳에 가면 아파트를 살 수 있다. 이상한 뿌듯함이 비굴함을 덮는다. 하지만 두 번 씩 시도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간다는 것을.

적나라하지만 아기를 상상했을까, 그때? 아기는 실체다. 실체를 향한 유예된 시간. 아뿔싸. 아기를, 아기 갖기, 아기 낳기가 유예된 상황이라니. 유예된 아기. 전제가 텅 비었지 않나. 내 난자가 어떤 정자를 잡아야 내 아기를…….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수학공식에 대입하면 정자는 뜬구름이 된다. 뜬구름으로서의 정자. 정자는 뜬구름이다. 은유법. 대표, 내 마음은 호수다. 내 마음은 은유다. 내 마음은. 그렇게 그에게 갔었다.

마음 다져 먹고 - 표현이 좀 이상한가? - 배승한의 소포를 닫아둔 채로 이순규를 향했던 것은 아마도 조바심 탓이었을 것이다. 여자에게 불혹은 불임과 동의어다. 그런데 그날, 밝다 못해 뜨거운 대낮에, 나는 자발적으로, 자동적으로 물에 빠졌다. 한 팔랑거리는 여자아이의 치맛자락을 따라서. 그리고 그가 오기 전인지 그맘때인지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둘 다 변을 면했다. 멀쩡했다는 아이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내가 의식이 없는 채로 앰뷸런스에 누워 큰 병원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후로 이순규는 좀 어눌해졌다. 역사를 줄줄이 외던 달변은 어디로 갔을까? 섬에 살면서 어부를 하지 않는 집안 내력이 되살아났을까? 분명 자신에게로 오고 있던 여자가 만나기도 전에 물에 빠졌다는 상서롭지 못한 일에 짓눌렸을까?

무솨서 다시고롬 올라고 허지도 않겄제.

어른들의 말씀을, 이순규는 내게 그렇게만 전했다.

이태 전에 그가 작심하고 낙향했을 때에도 근심 반 걱정 반으로 대했더란다.

뭔 일이랴, 느그들이라도 나가서 터를 잡고 살어야 하는디.

여그서 어짤라고. 누가 여그까정 와서 산다고 그랴.

나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의 걱정을.

뭔 마전이다냐. 처녀가 왔다믐서.

오면 뭔 소용이여, 지대로 왔어야 말이제.

뭔가 인연이 가당찬흔게 그랬겄제.

그려, 없던 일로 해사제.

근디 약혼자였당가?

아니 거까장은 모리고.

집안이며 동네 어른들은 겁을 냈을 것이다. 사고를 듣고서 하늘이 막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우린 약혼자도 아니었고, 사랑은 더욱 아니었다. 선을 보는 문화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결혼 시장이 공공연한데, 왜 꼭 사랑과 결혼을 엮는지 모르겠다. 아이 낳아 기르는 데는 결혼만한 좋은 장치가 없다. 성적 충동과 겹치면 금상첨화겠지만, 건강한 젊은 남녀가 서로 웬만하면 가정을 이루지 말라는 법이 없다. 어차피 오랜 사랑 기간을 거쳐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변함없는 나 - 그것부터 허구다. 하물며 누군가를 믿어 의지한다는 것은 치기다. 따뜻하고 듬직한 이순규는 참 괜찮은 후보감이었는데.

미운사위국이라는 매생이국, 우리 섬 특산인데요.

미운사위국?

안 이쁜 사위놈 오면 뜨거운 매생이국 끓여서 골탕 먹인다, 그 말이요.

사위가 미워요? 우리 제부는 아닌데.

요샌 더하지요. 사위는 그저 돈 잘 벌어다 앵기고, 집안일 잘 거들고. 뭣보다 마누라 말에 꺼뻑 죽어야하는데, 백점 만점 사위가 흔컸나요? 암튼 우리 섬엔 미운며느리국은 없으니까 안심하시요.

그는 이런 이야기들을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산이며 숲이며 그 나무들, 300년도 넘은 잣밤나무 몇 백 그루, 둘이 팔을 벌려야 안는다는 동백나무들. 나는 어느새 나로도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 봉래면에 발을 딛고 나서야 내가 난생 처음 이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했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배가 고파서 점심이 급했다. 잔치국수에 고춧가루 듬뿍……. 그제서 전화를 했고, 곧 물에 빠졌다.

 

금줄 - 산모가 있는 집에 쳐놓은, 숯과 가끔 고추도 달린 금줄 앞에 선 느낌이 이럴까. 나는 거부되었다, 그것이 그 느낌이었다. 금이 그려져 있으면 기어코 넘어가고 싶은 호기심도 욕구도 없는 나는 늙은이일까?

깨어났을 때, 다시 삶이 지속됨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오래도록 색 바랜 병실에서 몇 년 전에 보았던 천지의 검푸른 물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회복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돌아서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환생의 기쁨보다는 책임감 같은 것, 또 한참을 살며 결정하며 그런 일을 되풀이해야 하리라는 막연한 지루함 같은 것이었다.

설마 내게 남은 다른 가능성으로서 곧 바로 배승한의 낡은 소포를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스스로 우긴다. 몸이 거부되었다고 곧바로 맘을 쫓을 만큼 내가 양손에 떡을 쥐고 저울질하는 인간은 아니고 싶었다. 내가 남자를 찾아 섬에 갔다가 사고로 죽을 뻔했다는 것 - 그것을 풍문으로라도 그는 알고 남을 터였다. 작년 가을학기를 접었는데 모를 리 없다. 흉한 소문만 남기고 사라졌던 나를 두고 그는 어쩌면 일종의 마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개봉 못 하고 있는 소포뭉치를 감싼 아우라가 맴돈다. 황동규의 ‘어제를 동여맨 편지’같은 것일까? 단순히 유예된 시간일까?

우연히 마주친 농게로 하여 나는 나의 유예된 시간을 보았다. 농게와 내게 똑같은 의미의 유예된 시간을. 간장게장 속에서 살아나온 농게와 물속에서 살아나온 나. 대야 속의 농게와 원룸 속의 나. 나는 농게다. 농게는 나다.

사실 올 여름 농게는 사건이었다. 승연이 승주는 처음 얼마 동안은 거의 날마다 분농이 소식을 전했다. 바닷물 농도를 맞추려고 책을 찾아서 3.5% 소금을 넣었다는 자랑이 생각난다. 제부는 3.5%를 정확히 맞춰줄 사람이다. 주먹보다 큰 돌도 두 개나 넣어주었다고 그랬다. 숨기도 하고 또 물에서 나오고 싶을 때 나와 있으라고.

내게 필요한 산소 농도를 맞추려 애쓰는 사람은 없다. 내 방에 들어오는 공기에는 가깝게는 아래층 남자의 담배와 누군가의 찌개 냄새가 묻어든다. 창문 아래 자동차 매연의, 멀리는 가축농장의 오염물질로 적셔진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산소 농도에 무심하다. 그러니 분농이만큼도 보살핌을 못 받는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우리 모두가 은접시 위 치즈 덩이 속에서 생성된 진드기들의 운명은 아닐까? 지구 째로 우리를 삼켜버릴 거인은 원전 폭발일까? 억눌린 사람들의 자폭일까? 오늘날 잘나가는 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 맹신자들도 포함될까? 우리에게 유예된 시간은 얼마일까? 유예된 시간이 있기나 할까? 나는 불혹이 되도록 살아보지도 못한 나의 삶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 인류를 걱정하는 오지랖으로 빠져든다. 비혼여성세입자, 대한민국 400만 넘는 1인가구의 한 사람으로 최저생계비 월 61만7281원을 벌어야 하는 코앞의 사실을 잊다니.

아서라, 자기연민은 최악이다. 털고 일어나자. 살아있음에 탄식도 한다. 살아있음에 먹이를 탐한다. 기상을 하지 않아도 깨어있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나는 더위와 추위와 배고픔 등 감각의 총체에 불과하다. 흄의 말이던가.

바깥의 흐릿한 해가 따뜻한 빛으로 변해있다. 시간이 한참 되었다 싶다. 그만 이불 속에서 나와서 아점을 해결하려다 분농이 생각이 난다. 다시마를 정말 먹을까? 두 달인데, 아직 살아 있을까? 독감방에서 교도관이라도 그리울 완벽한 홀로서기, 아니 홀로 기기. 일단 사형집행에서 풀려났으니 행복해할까? 유예된 시간을 설마 원망할까? 물도 먹이도 있으니까 지루한 시간에 사색도 철학도 하지 않겠는가.

물을 끓이면서 안부문자나 넣을까 싶어 폴더를 연다. 아차, 거기엔 오다가 만 문자가 들어있다. 한금실 샘, 저 배승한입……. 단 한 줄만 뜨다가 사라진다. 뭣 하러 이름 부르느라 이름 소개하느라 겨우 보이는 한 줄을 다 써버린단 말인가. 메모리관리자가 말한다, 메모리가 부족합니다…….

풀더폰이라서 문자 수신 못 했슴다. 설마 그런 답을 쓸 수는 없다, 이 유예된 시간의 끝에. 무심한 폰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푸른빛을 내뿜다 사라진다. 또 하나의 금줄을 느낀다.

 

『한국소설』 2015-1-186호 139-156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12. 21. 12:01

 

화학반응

 

널따란 침대 이쪽저쪽으로 링거 줄이 걸려있다. 훤한 낮 시간에 침대에 누워서 링거액을 맞고 있었을 노부부는 평범하고 유복한 노년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다르다면, 노인들의 안방이라고 하기에는 꽤 너른 공간에 가구 또한 세월을 묵힌 때가 없이 성글다.

영감님이 손님들을 맞아 안내하는데, 그 얼굴을 아내 쪽으로 향하면서는 입이 귀에 걸린다.

임자, 팔은 안 아프고? 여기 이종동생네 가족들, 또 고향에서도 모두 왔소!

…….

아내 쪽은 대답도 않는다.

임자, 괜찮으냐고?

그래도 대꾸가 없자 살그머니 아내의 몸을 흔든다.

자, 어디 이쪽으로 좀……. 친척분들 오셨는데 눈인사라도 좀…….

그제야 눈을 슬며시 뜬 아내는 느닷없는 하품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왜, 어디 소화가 안 되나?

할아버지의 극진한 보호를 받는 이 할머니는 어머니의 이종언니시다. 오늘 이 댁을 방문하게 된 건 순 억지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이 할머니의 고향사람 두 분을 터미널에서 어머니가 만나서 이리로 와야 하는 일인데, 내가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이다. 한번 안 올래? 혹시 올라올 일 없냐고!

자잘한 말씀을 별로 안 하시는 어머니가 모처럼 원하신 일이었다. 우리 금실이 그쪽 사람들 함께 성남에 내리면 엄마가 얼마나 수월할까. 금실이라고 부르시는 소리에 마음이 움찔했다. 그래, 핑계 만들지 말자!

나는 동행할 두 사람을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안내데스크 앞 9시! 어머니가 주시는 번호로 미리 전화를 걸어서, 무슨 접선마냥 내가 새파란 배낭을 지고 있기로 했다. 파란 배낭요, 아주 새파란!

성남 터미널엔 어머니가 미리 와 계셨다.

오시느라 애쓰셨네요, 새벽부터 나서셨겠네요!

아이고, 사돈양반, 제가 금월서 온 질부예요. 우리 어머님이 못 오신다고, 대신 자세히 만나보고 오라셔서.

첨 뵙는디, 선상님 모녀간 신세를 지네요잉. 지는 순창 매우리서 온…….

예, 뭐. 우선 간단히 식사들을…….

어머니가 반가운 전화를 받으셨나보다. 조금 싱글거리시며 택시가 아닌 주차장으로 향하신다.

아버지가 오셨다, 생각도 안 했는데. 인사 겸 함께 가시겠다는구나. 넌 집으로 바로 갈래?

대답 대신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아버지가 보였다. 한박사, 애썼구나. 자, 한박사가 옆에 타라!

판교 집은 부자들이면 찬란한 아파트에서 살리라고 무심코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깔끔하고 너른 주택이었다. 어색한 수인사를 마치고 여자들은 할머니의 침대 곁에, 아버지는 주인 할아버지를 따라 거실로 나가셨다. 나도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방에 남았다.

이 판교할머니는 어머니와 왕래는 거의 드물었다고 한다. 한참 떨어진 나이도 그렇지만 어머니의 큰이모,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큰언니가 멀리 떨어진 담양이라는 곳으로 혼인을 했으니 그럴 밖에. 그 딸인 이 할머니는 거기서 자랐고 가까운 순창이라는 곳으로 시집을 갔고 한평생 무탈하게 거기서 살았었는데……. 그런데 어찌 보면 다 살고 나서 느닷없이 기이하게 이사를, 정확히는 엉뚱하게 신도시 판교에 새살림을 냈다고 하니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 간에 누구라도 다녀와서 속내나 알아두자고.

개가라고요? 개가는 무신!

그럼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네가, 아무리 혼자됐다지만. 자식들은 어떻게, 뭔 생각들을…….

첨엔 말들이 뒤숭숭했지라. 큰딸이 즈 어머니 모셔갈 사람 없으믄 막지 말고 내부두자 그랬다요. 가들도 거자 환갑 줄에 안겄제, 즈 자석들 치다꺼리에 심들 때 아녀라.

그렇다고 어머니를 팔자 고치라고…….

무슨 팔자를 고쳤다 그라요. 그냥 두 양반이 모타 산다요.

그래도 정식으로 모셔 갔으니까는.

허기는 나라도 늑발에 첫사랑이 손 내밀믄 따라 가겄소. 게다가 여 양반이 정신이 온전허들 못허잖소. 온전치 못헝께 판사아덜도 각시 눈치보니라 못 데리가고 딸들도 막상 친정 어메 못 데리가제. 그 참에 딱 허니…….

여기 사장님은 진작 혼자되셨던가요?

암만, 그짝도 상처허고 혼장께 가당체. 거그도 큰아덜은 공장인가 회산가 다 대물려 허고 둘짼가 셋짼가 또 뭐시냐 의사아덜도 있고 다 잘 되얐다요. 그래도 아부지가 첫사랑 아픈 양반 데리다 산다는디 먼 말 없었당께 효자들이제. 허기사 돈 있으믄 다 효자 받어라. 즈그도 홀아부지 모시다가 아부지가 아부지 돈으로 새 세상 산다는디 뭐시라 하겄소. 긍께 우리가 와보기를 잘 했소안. 솔직히 말혀서 고향서는 긴가민가 허는 사람들도 있었어라. 가문 말허는 사람들도 있고, 안 그러겄소? 다 묵은 밥에 코 빠친다고들도 허고.

이웃에서 일도 봐주고 오래 살아서 ‘참 형지간같이 살었어라’ 하는 매우리 할머니가 속내를 잘 안다고 하는 말에 다들 좀 어리둥절했다.

이야그가 길어라. 여그 김 사장님이 일 년에도 몇 번 씩은 그짝 고향에 들리고 그랬다요. 글다가 여 양반 소식을 듣고는 그냥 자석들한테부텀 상으를 혀갖고. 아, 요양병원 안 가고 여그로 왔응께, 우리가 한번은 꼭 봐야헝께. 글고 나보담은 올라올 수 있으먼 올라와서 함께 살자고 허는디 참. 여그 시방 일허넌 아짐은 낮에만 오고 밤엔 봐줄 사람이 없디야. 나도 자석들하고 상의를 혀야…….

영문도 모르고 들은 긴 이야기엔 첫사랑 소리만 있었지 내용은 없었다. 매우리 할머니로선 결혼 이후의 그쪽 생활만을 아는 때문이었으리라. 이른 저녁을 준비해 내놓고 부를 때까지 무슨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은지. 정작 마나님은 링거액이 끝나자 뽀얀 얼굴로 일어나더니 아장아장 화장실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고모님, 저예요. 순석이 각시, 금월 조합장 동생네 큰며느리라고요.

언니, 저 명순이, 박실이 이모네 명순이 모르겠어요?

…….

가늠이 안 되는 양 반응이 없자 순창서 온 할머니가 얼굴을 들이 밀었다.

지 성구어메라우, 매우리 사는 방촌댁, 성구어메.

성구…….

시상에. 성구어메를 모리면 진짜 암껏도 모리는구먼. 워쩌다가 이려.

콧잔등을 씰룩거리는 품이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저리 사람을 몰라본다면 치매라는 말이 맞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빤히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깨끗한 노인네가 그렇게 고약한 증상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더니 몸을 앞뒤로 흔들며 자장가 같은 무슨 곡조를 흥얼거렸다, 콧소리로.

에고, 옛날에 금잔디가 다 뭐라냐…….

옛날에 금잔디는 저녁상에서도 여전했다. 노마님은 밥을 먹다 말고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곁에 앉은 영감님이 손을 잡아주면 잠시 그쳤다.

두 손들은 너른 그 집에 짐을 풀었다. 당일로 다녀가기엔 힘든 거리였으니까.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머니는 이종언니의 옛날이야기를 흘렸다.

소문이 나자마자 난리가 났었다 하더라고. 오죽하면 단김에 시집을 보내버렸을까. 학교 다니던 중에 그냥, 것도 산 너머 순창으로 보내버렸다더라고. 저 김 사장 어른이 그땐 볼품없는 집안에서, 아버지가 없음 다 그렇지 뭐, 무지 고생하고 살았다지 아마. 나이도 더 어리고.

첫사랑이 뼈아픈 이별로 끝났다고 해서 한 세월 다 살고서도 그게 유효할까요?

보고도 그러냐, 금실아. 정이 뭔지, 한번 진짜를 줘버리면 그 구멍이 평생 가는가 보다. 아버지가 불쑥 말하셨다.

상대가 잘 몰라도요? 치매든 아니든 어쨌든 잘 기억도 못하고……. 설마 죽어버린 뒤에도요?

거기까지야 알겠냐. 한박사가 연구해 보렴.

 

 

나머지 이야기는 연구가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서 얻어들은 파편들이다. 오후에 두 분이 나눈 이야기들의 조각을 맞춰 본다.

그렇지만 맘이 두 갭디다. 향연이 아프단 이야기 듣고는 내가 홀애비 된 게 천만다행이다 했으니 몹쓸 놈 아뇨?

그렇게까지야.

옛날에 금잔디는 잊을 수 없는 가락이요, 나한테는. 그 옛날, 단 한번 용소까지 함께 산길을 걸었던 날. 바위 위에 앉은 향연이 이상한 노래를 부릅디다. 북망산 수풀은 고요타 매기, 영웅호걸이 묻힌 곳, 흰 비석 두러서 적힌다 매기, 아 우리가 놀던 곳, 고운 새들은 집을 짓고 어쩌고. 나중에 알게 된 그 노래는 다른 가사던데. 한선생도 아시다시피.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아 내 희미한 옛 생각 지금 우리는 늙어지고 매기, 머린 백발이 다 되었네, 그렇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향연은 북망산 어쩌고 라고 불렀으니.

그건…….

예. 윤심덕이 그리 불렀답디다. 윤심덕도 매기도 죽고 없지만, 어쨌거나 향연은 살아 있잖았소. 고향 갈 때마다 바람결에 듣는, 들어 모아지는 향연의 소식, 소식들. 이른 나이에 시집갔지만 넉넉한 집안에서 아들 딸 잘 낳고 잘 길러서 성공들 하고……. 멀리서 부는 훈풍이거니 하다가도 아린 솔잎처럼 쑤셔댔다가. 그러다가 연전에 혼자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덜커덩했지요. 그래도 차마…….

차마.

내 가정을 되돌아보았지요. 속절없이 새로이 시작했던 인생. 아니 ‘새로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되지. 원래의 인생을 시작한 적도 없었으니까. 더 말이 안 되는 건, 원래의 인생이란 게 대체 뭐겠소? 수수하고 단단한 아내. 깐깐하게 키워낸 자녀들이 눈앞에 얼씬거렸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길다면 길고 단출하다면 단출한 인생이었소.

 

 

아니, 안되겠다. 정리를 삼인칭으로 해서 이야기에 객관성을 주자.

김 할아버지, 김덕숭의 고향 금월마을은 금강수란 이름의 못을 두고 뒷산이 반월형으로 되어 있어서 금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은 농가마을이었다. 인근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흘러 흘러 황해로 입수될 영산강이 제법 물길을 갖추기 시작한 평지에 있어 농사는 잘 되는 편이었다. 지금은 바로 담양 군청 옆에서 시작된 옛 24번 국도를 따라서 금월교까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제법 알려진 마을이었다.

그는 그 길에 메타세쿼이아가 심어진 것이 70년대였다고 기억한다. 그가 사십을 바라볼 때였으니까. 자라면서 나무 몸통은 회색빛에 모양새 또한 부자연스러운 삼각형 모습을 보면서는 왜 하필 이런 수종을 심었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해 가을 불그레한 갈색 단풍을 멀리서 보는 순간 숱 많은 붉은 머리카락의 그녀가 떠오르면서 메타세쿼이아는 어느덧 추억의 시발점이 되곤 했다. 이제 사람 열 길, 아니 스무 길도 넘어 보이는 나무 꼭대기를 보면서 푸른 봄에도 가을의 붉은 단풍 머리카락을 생각하곤 했다. 그의 나이 일흔도 훌쩍 넘어 대머리가 된 걸 아랑곳 않고. 아니, 그녀의 붉은 숱 많은 머리카락도 성긴 백발이 되었을 틀림없을 사실 따위는 그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다 이른 봄 잎겨드랑이 가지 끝에 달려 밑으로 늘어진 꽃에서 스무 남은 개의 수술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벌써 가을의 붉은 단풍을,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떠올리는 형국이었다.

그날도 한식날을 맞아 고향을 찾은 김 옹은 바람결에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 봄이지만 팔각정 경로당에 나앉은 어중간한 늙은이들의 잡담이었다.

금과 마나님이 치매기가 있다네.

여그 참봉 댁 손녀 말여?

엉, 부잣집 며느리되어 갔다가 인자는 판사님모친에 뭣이 부족혀서 참.

설마 그 고운네도 치매라던가.

일흔 넘어 고운네가 어딧당가. 옛 말이겄제.

무슨 소리. 한번 해병대믄 죽을 때꺼정 해병대고, 한번 미녀믄…….

죽을 때꺼정 미녀라 그건가.

그렁께 그것이…….

덕숭을 힐끗 거리며 분위기를 띄우는 양이 소싯적 동티를 나이 들어도 잊는 법이 없는 동네가 맞다. 한마디로 어떤 홀어미 자식과 풋사랑에 빠진 마을 부잣집 고녀생이 억지 혼인으로 산 너머 순창으로 시집을 가게 된 사연 말이다.

덕숭은 가슴을 쥐어 잡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향연이 혼자가 된 것도 모자라 치매에 걸렸다고?

그가 부르르 떨자 중늙은이 하나가 놀린다.

케미. 이건 케미다. 야, 케미에는 나이가 없소 그랴.

케미? 그거이 뭔 소리?

케미도 몰르요, 이 양반들. 나이 묵는다고 테레비도 헛것으로 보남.

긍께 거이 뭐냐고!

그거이 우리말로 하믄 화학이라고, 우들도 농업학교에서 화학이 뭔가는 배웠제. 아니 화학비료다 그라믄 알지 않남.

화학비료 말이 여그서 왜 나와?

화학이라는 것이, 가만있자, 학교에서 말하는 것 말고, 여그 있네, 우리 김 사장 형님 사업해온 것 있잖은가, 화학공장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을 죄다 화학물질이라고 하잖던가.

화학물질 그런 것이 여그서 왜 나오냐고.

참도 급한 사람.

긍께 들어 보자고.

그 화학물질이 서로 붙으거나 떨어지는 - 아니 다시. 한 개 물질이란 놈이 다른 물질하고 작용을 혀서 생판 다른 물질로 변허는 것을 화학반응이라고 허는디.

허는디?

물질이 두 개가 만나믄 서로 파괴허거나 서로 결합혀서 어떤 다른 물질로 변허는디.

파괴허고 결합허고.

조용, 좀 들어 보장께.

요즘 애덜 말로 화학반응이라고 허면 남녀가 죽고 못 살게 붙어서 반응을 일으킨다 뭐 그런 것 말이라네. 케미는 화학이란 영어를 줄인 말인디, 어디 요새 애덜이 제대로 말들 허남.

자네랑 나랑 케미다 그라믄 동티났다 그 말이라고?

왜 자네를 거 갖다 붙이나. 좋게 내 첫사랑 찍어 말하제.

첫사랑 - 그 말에서 모두는 움찔거렸다.

덕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첫사랑이 요새 녀석들 말로 그 케미일 걸세. 화학적인 변화는 물리적 변화랑은 다르제.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 물리적 셈법이라면, 하나 더하기 하나가 도로 하나 되는 것이 화학적 셈법이네. 나 그거 케미 할라네. 두고 보소들.

그러고서 덕숭은 서둘러 자녀들을 불렀다. 아들 셋에 고명딸. 큰놈은 화학물질 사업 마다않고 이어 받았고, 둘째는 명문대 나와서 행시 준비하다가 안 되긴 했어도 썩 괜찮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셋째는 지방 의과대학 나와서 의사다. 막내이자 고명딸은 사대를 나와서 선생을 작파했으니 아깝지만 오빠 친구랑 결혼해 잘 살고 있다. 이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선언을 했다.

아부지가 새로 첫사랑이랑 살고 싶구나.

첫사랑이라뇨?

느그 어무니 삼년상 지난 지도 한참 아니냐. 나 첫사랑이랑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구나. 아프단다. 아파도 좋다. 얼마가 될 지 몰라도 그렇게 할란다. 그리 알아라.

이구동성으로 놀라는 아이들 앞에서 흔들림 없이 말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래, 케미였다.

아이들은, 이제 아이들이 아니라 중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지만,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원래 자녀에게 부모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냥 부모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 늙으신 아버지에게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도 믿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시 그 비슷한 것이 옛날 옛날에 있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언제인가. 자녀들이란 그렇게만 생각한다.

그랬다, 덕숭은. 그 옛날 배밭 일 도우며 야간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한번 내동댕이쳐진 이래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살아왔다.

단기 4287년 - 1954년이겠으나 그때는 아직 서기를 쓰지 않았다 - 의 일이었다. 그의 나이 열여섯. 아버지는 사오 년 전 전쟁이 날 무렵 벌써 집에서 떠나갔다. 아버지가 떠나신 정확한 날도 알 수 없었다. 여름이 들어 부쩍 바빠지셨던 아버지를 볼 수 없는 날이 많더니, 그해 가을부터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느낌으로 덕숭은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리라 알았다.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아버지 진지를 담아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한 아버지가 집에서 금기의 대상이라니.

크게 달라진 일은 농사를 짓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할아버지 할머니 묘가 있는 밭 뙤기에서 짓는 밭곡식으로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기 전이었으니 중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도 이 년을 늦게 야간중학교에 라도 가게 된 것은 마을의 대부이자 향연의 조부 참봉님 덕이었다. 참봉의 눈에 든 몇몇 아이들은 그렇게라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향연은 참봉의 후대라서 그냥 참봉 댁이라 불리는 그곳, 동네에선 대궐집에 살고 있었다. 별표나 거북선표 검은 고무신 하나로 일이 년을 버티던 당시, 그것도 닳아서 맨발로 뛰던 동네 소년들의 눈에는 하얀 동그란 코 구두를 신은 향연은 나무꾼과 선녀에 나오는 선녀만 같았다. 어쨌거나 액자 속의 그림이라거나 아무튼 근처에도 갈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이었다.

그러다가 성적표를 받아들고 참봉 댁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날, 덕숭은 향연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마침 여학교 교복 치마를 날리며 하얀 구두 뒤꿈치를 저으며 안채로 들어가던 뒷모습이었다.

조금만 빨랐더라면 옆모습을 지나쳐 볼 수 있었을 것을…….

덕숭의 걸음걸이가 마을 최고로 빨라진 것이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날, 참봉 댁으로 향하던 길은 덕숭으로서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고, 향연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는 보았어야 맞는데, 어쩌자고 한 발짝 놓쳐서 지나칠 수 없었을꼬. 덕숭은 작은 키와 더 짧은 다리를 원망했다. 아니 범인은 해찰이었을 것이다.

덕숭의 해찰은 유명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속을 썩인 것들이 모두 그 해찰 탓이었다. 심부름을 보내면 갈 때는 곧잘 간다. 하지만 일이 끝나면 천방지축이 되곤 했다. 질퍽한 땅에서 튀는 개구리 한 마리를 따라가다가 물 반 땅 반에 고꾸라져 오거나, 구름 따라 간다고 야산 등성을 넘어가 길을 잃곤 했다. 중학교에 가자 상황은 조금 나아지는 듯 했다. 학교에 지각하는 일은 농사일 때 말고는 없었다. 공부는 하고 싶어 하는 게 맞았다. 그것만이 돌파구요 희망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다가 향연을 만났다. 그녀가 돌아오는 길, 그가 나가는 길. 그 짧은 시간의 불꽃은 타오른 순간마다 전율로 요동쳤다. 다른 표현은 없다. 그런 것이 불꽃 아니라면. 스치기만 하고서, 다만 스치기만 하고서도 가슴은 터졌다.

수요일 하루는 조금 더 늦는 그녀를 길에서 만나고자 그제부터 덕숭은 야간학교 시간을 제 마음대로 맞춰서 나가곤 했었다. 빠르게 빠르게 늦게, 빠르게 빠르게 낮에. 스치고 마는 건 너무 아쉬워서 이내 뒤돌아 멀찌감치 따라가서 그녀가 대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학교로 향했다.

그랬다. 그러다가 그랬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고 떨었다. 눈이 마주치고 떨었고 알았다, 첫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헤어지고 눈에서 멀어졌어도 그 무엇은 타고난 재가 되어서도 불씨가 남아. 덕숭은 쪽지를 준비했다.

- 우리 산책 같이 해요, 누이.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 누이, 우리 용소에 가요.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저 덕숭이가.

- 향연 누이, 우리 용소에 가요.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저 덕숭이가.

또 쓰고, 또 쓰고……. 네모로 접을까, 연애편지라는 일곱 칠 자 모양으로 접을까.

멀리에서 향연의 모습이 보이면 쪽지를 오른 손에 감출까 왼 손에 감출까 가슴은 두 근 반 세 근 반. 향연이 그의 왼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는 쪽지는 오른손 안에 들어 있곤 했다. 반대로 향연이 그의 오른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는 쪽지는 왼손 안에 들어 있곤 했다. 차마 내밀 수 없어 그가 그리 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쪽지가 왼손에 들어있고 향연이 왼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도 손을 더욱 꼬옥 쥐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너무 쥔 탓에 한참 후에도 펴지지도 않았다.

 

 

을 좀 돌리자. 하늘은 인간에게 아주 가끔 마약을 허한다.

아무튼 그들도 꿈의 순간을 누렸다. 그가 쪽지를 건네지 않고서도 둘은 용소 나들이를 갈 수 있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폭포 입구에 이르니 오른쪽으로 출렁다리에 이르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이 너무 가파르기도 하고 길기도 했지만 용소를 내려다본다는 욕심으로, 아니 둘이서 함께 한다는 감동으로 둘을 그 많은 계단을 달렸다. 계단이라야 그때는 지금처럼 완벽한 철계단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산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출렁다리 왼쪽으로 무서 무서워하며 한숨을 내려가자 앞에 못이 있었다. 안개 같은 물방울이 퍼져 오르는 연못 주변은 춥기까지 했다. 추위에 질린 향연 때문에 용연폭포는 포기했었다. 아니 향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떨린 가슴에, 그저 불안에 행복감에 알 수 없는 떨림에 시간가는 줄 몰랐을 뿐이다. 어느 순간 어스름에 햇기가 떨어져 서둘러 내려와야 했었지. 다음 날, 다음 기회에는 용연폭포까지 함께 가리라는 믿음으로. 소리 없는 믿음으로.

믿음이란 소리가 있었건 없었건 깨어진다.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념, 신앙, 그런 믿음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다. 지금 말은, 그냥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 그런 것은 깨어진다고.

그럼 그것이 사랑? 사랑이 무엇인가 누가 알기라도 하는가? 애틋하게 그리운 것? 그냥 아픈 것?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것,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 남을 이해하고 돕는 것 - 사랑을 말하는 공식적인 풀이는 소용없다. 향연은 사라져버렸고. 대상이 없어졌는데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어디로 향한다는 말인가. 생각 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이 사랑은 아닐 터였다. 그런 설명도 없었다. 지우지 못하는 것은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채 알기도 전에 이별이 찾아왔다. 향연이 사라졌다. 동네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향연은 시집을 갔다. 가버릴 줄이야. 산 너머로.

덕숭으로서는 닭 쫓던 개꼴이었다. 애초에 덕숭에게는 꼴이 없었다. 꼴도 끈도 꾀도 끼도 깡도 없던 그에게 꿈처럼 나타난 연이, 향연이. 향연은 꿈처럼 왔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4288년 이월 말. 그땐 여전히 태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말했다. 하루 내내 감자를 심고 어스름에야 서둘러 돌아오던 길에도 아무런 눈치를 못 챘었다. 참봉 댁에 신랑이 장가들어 잔치가 벌어졌던 그 일을.

금성산에 꼭대기에 올라 그 너머 순창이라는 곳을 눈이 째지라고 쳐다보며 울부짖던 이튿날. 그 다음날, 그 다음날. 이산 저산을 헤매느라고 어려서는 빨치산 항거지 - 그에게는 아버지의 그림자로서 금기였던 그곳 - 라서 눈길도 돌리지 못했던 용추계곡 너머까지를 돌아다녔다.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얼마나 울부짖었던가.

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면 원통하고 원통했다. 원통하다고 할 이유는 아무래도 없었지만, 얼마나 급하면 영동달에 시집 장가를 가는가. 얼마나 급했으면, 얼마나 급히 떼어놓고 싶었으면……. 마음은 더욱 처량해졌다.

좋다. 내가 박사라도 되어 금의환향하면…….

환향하면? 이미 산 너머 시집간 향연을 어쩔 것이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직 열여섯 일곱이던 그가 사랑에 눈을 떴다면 말이 아니다. 이팔청춘, 나이로만 따지면 그 스스로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나이를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언감생심 이몽룡이라고? 부사의 아들도 아닌 것이, 중학교 진학도 제 힘으로는 어려운 홀어미 자식이 어사가 될 몽룡에 빗대다니, 어불성설 아니었나. 향연은 절름발이 양반이기는커녕 올려다보다가 목이 빠질 마을 최고 양반 부잣집의 막내딸 아니던가. 애초에 ‘쑥대머리 구신형용’이라 노래할 향연이 아니었다. 차라리 나무꾼과 선녀 버전이 맞다. 아니다, 그것도 틀렸다. 손 한번 잡아 본 주제에 자식 낳고 살다가도 날아 가버린 선녀에 비교하다니. 용소에 한번 가본 것으로 상팔담에 내려앉았던 선녀라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랬다. 용소에 이르는 길은, 단 한번 향연과 용소까지 손을 잡고 사라졌던 날은 그에게는 정지해 있다. 누가 순간을 사라진다고 했는가. 순간은 영원으로 변한다, 가슴 속에서는.

덕숭은 산중의 호수라면 평생 늘 설렜다. 실제로 선녀 이야기의 상팔담에도 가보았다. 회갑도 한참 넘은 2005년,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기를 산다, 해가 바뀌자마자 육로 금상산관광에 나섰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서 등록했다. 비무장지대를 버스로 통과한다는 스릴도 의미도 있었지만, 일정 중에 비로봉 동쪽 구룡대 아래 상팔담이 끼어 있다는 것을 보고 몸이 달았다. 안개구름이 있는 날이면 절벽을 휘감으며 피어오르는 실안개 같은 구름들로 신선들이 사는 선경을 보이겠지.

그러나 금강산에 도착하자마자 그 기대는 멀어졌다. 온통 옷을 벗은 벌거숭이 산, 때는 겨울이었으니까. 다섯 길은 되어 보이는 구룡폭포를 지났지만 물이 아닌 얼음만을 보았다. 하류엔 얼음이 얇아서 그 아래 물기를 느끼기는 했다. 더 꼭대기로 향했다가 상팔담을 만났지만, 선녀의 날개옷은 상상이 가지 않는 얼음뿐이었다.

바위와 물의 어울림을 보려했다면 여름에 올 걸, 옥빛 여덟 개 물웅덩이 물이 얼마나 투명했을까. 향연은 선녀처럼 이곳에서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오르고, 나는 하늘에서 물 길러 온 금 물동이 속에 타고서 하늘로 가면 되었을 것을.

 

 

다시 그의 목소리로 쓰자. 그쪽이 더 실감 날 것 같다.

첫 타격은 나를 쓰러뜨렸지만 이를 악물었소. 참봉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면 박사가 될 각오로 공부를 하고자 했소. 사정은 어림없었지. 그 댁 지원도 끊긴 것이, 더는 성적표를 들고 그 댁 문전을 넘을 수 없었으니까. 검정고시로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도 그렇게 마쳤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바빠서 공부나 하고 있을 여력이 없었소. 박사는 무슨. 요새는 박사 위에 밥사라고 합니다그려, 그때도 밥이 하늘이었소. 대학은 뒷전으로 우선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제대가 임박했을 때는 군에 못 박을까 하는 고심도 했더랬소. 따로 궁리해 둔 미래도 없었고, 뭣보다 군대 3년 동안 촛불만큼도 희망이 자라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선임 중에 박 병장이라고 고무신공장 사장 아들이 있었는데……. 함께 일하게 제대하면 들어오라고.

그렇게 찾아간 고무신공장은 아버지 같은 아버지를 만나게 했어요. 아버지를 몰랐으니 이런 게 아버지를 갖는 것이구나, 그랬어요. 박 병장 자신은 공장 체질이 아니라고 밖으로 돌고, 느닷없이 영화 쪽으로 정신을 빼앗기더니 조연출입네 하고 다닙디다. 사장님은 나한테 화학공학과를 다녀서 제대로 해보라셨으니, 공장을 위한 공부였지만 고마울 뿐이었소.

공장은 때마침 수출이라는 것이 시작되어 그쪽 대형공장들의 주문으로 호기를 맞으며 승승장구했고. 난 공부 와중에 화학산업에 눈을 떴어요. 독일이 후발주자로서 영국의 산업혁명을 따라잡은 것도 과학자들을 앞세운 화학산업인 걸 알았제. 마취제 클로로포름, 수면제 클로랄, 무기질 비료 등 리비히그 한 사람이 기여한 것만 해도 엄청났으니. 한국에서도 화학물질이 미래다 싶었고, 사장님도 새로운 구상을 적극 지원했고요. 본격적으로 화학산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덜컥 사장님이 쓰러졌으니, 그 일은 참 충격이었소. 요즈음 말로 하면 급성 장출혈인데, 그땐 그냥 하루 이틀 새 손을 써볼 시간도 없이 그리 되어갖고는. 결국 곁에서 운명을 지켜본 내가 공장 둘을 다 맡았는데, 고무신공장은 70년대 수출이 괘도에 올랐을 때 좋은 조건으로 큰 회사에 넘겼어요. 사실 그건 박 병장님 몫이었으니까. 아버지 것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요. 일을 했건 말았건, 아들은 아들이니까.

나머지만으로도 나는 충분했소. 화학물질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보물이었으니까. 이미 몇 화학공업사에서 플라스틱 가공제품을 생산하던 때였는데, 플라스틱시대가 열리고 있었으니 틈은 많았어요. 바닥재다 뭐다 건축자재들이나 자동차 공장 등 온통 화학물질 아니고는 어림없었죠. 파라크실렌과 스티렌, 아크릴로니트릴 등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이…… 아차, 선생은 화학과목이 아니라했지요.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었지요. 지금이라면 환경부 화학물질안전원 감시가 세지만, 그땐 그런 기관도 없었고 막말로 때만 안 묻히면 된다, 그러고들 했어요. 지금에야 화평법이다 화관법 등 엄격한 잣대가 있지만 그때 시절은 이현령비현령이 법이었으니까. 어느 업종이나 다 그랬다고 봐도 좋을 거요. 눈 먼 돈이 눈덩이처럼 굴렀고.

염화비닐부터 시작해서 건축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종류를 안다면 아마 누구도 대형 주택업자가 지은 집에서 살 생각을 못할 거요. 이들 화학물질에는 발암성, 중추신경 독성 등이 있다는 것을 그땐 누구도 몰랐지요. 집은 더 견고해졌고, 무엇보다 플라스틱 표준화된 자재라서 짓기가 편해졌고. 일하기 편하고 돈이 들어오는데 누가 토를 달았겠소. 석유도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화학공업은 승승장구였지. 새 집에 들어가서 두드러기나 비염 증상을 느끼면, 실은 못 느끼더라도 건망증이 심해지거나 불안감이 조성된다는 건데, 그것들 연구는 요즈음 말이지 그땐 아무도 몰랐소. 우리 같은 업자들은 면죄부를 받아 마땅해요, 그런 위험성을 말해주는 전문가도 행정 지도도 없었으니까. 성장은 좋은 것이었소. 나도, 나라도.

아내, 아내와는 백년해로를 다하지 못했어요. 조강지처 불하당을 어긴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죄책감은 마찬가지요. 마흔이 다 되어 결혼을 하다 보니 아내는 나이 얼마 아니었어요. 순하고 단단하고. 아들 셋에 고명딸을 끼워 4남매를 낳아 기르며 홀시어머니까지 잘 챙기던 사람이었소. 가슴을 내주었던가? 맘이 아프요. 한참 젊었으니 수를 못할 줄 누가 알았나요. 어머니는 무슨 미련이셨을지, 왜 고향을 못 떠나셨는지. 아내도 참 힘들었어요. 버스깨나 타고 시골 내려다니던 아내는 어머니가 세상 뜨고 나서 조금 수월한 삶을 사는가 싶었는데 그만 갑작스레. 입에 올리기도 싫소. 살만하면 긴장이 풀린다던가?

하지만 그랬소, 두 마음입디다. 향연이 혼자되었다는 소식 때에도 뭉클 흔들렸던 마음이었지만. 헌데 아프다니. 요것이 사악한 마음이건 어리석은 마음이건 어떠랴 싶었소. 늘그막에 하늘에서 내려온 마법인데. 향연의 옆에, 곁에 갈 수 있는 기회라. 가슴이 덜컹거려서는…….

 

 

그렇게 오늘의 장면이 연출된 것이란다. 조금 고쳐 써야겠다.

널따란 침대 이쪽저쪽으로 링거 줄이 걸려있다. 훤한 낮 시간에 침대에 누워서 링거액을 맞고 있었을 연인들은 평범하고 유복한 노년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다르다면, 노인들의 안방이라고 하기에는 꽤 너른 공간에 가구 또한 세월을 묵힌 때가 없이 성글고. 가만, 어디선가 화학반응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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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대 : 바다에 꽃지다, 예원 2014.11.25. 193-222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3. 25. 23:54

 

「목소리」

 

 

목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졌구나, 라고 느껴졌다. 오늘 아버지와 나누시는 가벼운 대화에서 그랬다.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되거든요. 내가 한다니까요.

빈 밥그릇 국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생소했지만, 그걸 그렇게 말리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높았다.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집으로 가자고 작정한 것은 명절엔 더욱 허전해하실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들 없이 딸 셋을 둔 부모님의 얼굴엔 딱히 썰렁함은 아니라 해도 뭔가 어색함이 어른거린다. 애써 괜찮다는 과장으로 포장되어 표피가 평상시의 부드러움을 잃는다. 부드러움을 잃은 주름은 갈라질까 말까 바스락거린다.

 

이번 설에도 막내 옥실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에 사는, 미국인이 된, 미국인과 결혼한 옥실인 만일 한국에 온다더라도 설이 아닌 추석에나 올 뿐이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이.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미국의 큰아버지에게로 입양되어 간 옥실을 어머니는 가슴에 두고 사실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지막 미토콘드리아의 전수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어머니에게서 딸들로만 유전된다는 미토콘드리아 ― 막내는 정말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름도 제이드가 되어 버렸으니까.

 

둘째 은실은 늘 가까이 있다. 바리데기 ― 일곱 번째 얻은 딸은 아니나 부모님 곁을 유일하게 지키는 은실이 바리데기가 맞다. 언니와 막내에 끼어 치인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고, 공부도 시쳇말로 다 못해서 그렇다. 은실은 고 1때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너무 가까이서 겪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대학진학을 접었다. 하지만 일찍 결혼해서, 지금까진 우리들 중 유일하게 손자 손녀를 안겨 드린 효녀다.

 

나 ― 어쩌다 막내서부터 거꾸로 설명이 되었는데 ― 맏이인 나 한금실은 교사의 자녀들이 많이 그러하듯 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일직선으로 나갔다가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땐 벌써 은실이 김실이 된 후였으므로, 나는 원래의 금실 대신에 한박사로 불렸다. 더구나 한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목소리엔 어딘가 자랑 비슷한 여운이 깔렸다. 지금도, 그 한박사가 명예도 돈도 별로 들여오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건 여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1944년생으로, 요즈음에 말하는 신중년 세대이시다. 일제 강점기 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그들은 일제 때 강제징집당한 146만 한국인의 숫자가 말해주듯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야 했던 세대다. 또한 형제들을 사상의 갈등으로 잃기도 한 세대가 그들이다. 국제평화기금이 들어오던 때에는 갑작스레 경제무대에서 은퇴 당한 신중년 세대의 운명 ― 거기에서 아버진 자유로우시다. 교사는 강제 은퇴는 없었다. 대학 공부는 겨우 열에 하나나 했을 이들 세대에서, 아버지도 사범학교 졸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가 야간대학 과정을 밟아서 대졸에 합류하신 전설적인 분들의 하나이다. 다만 아버지에겐 아들이 없다. 2008년 은퇴하시기 전에는 딸자식이긴 해도 자식인 내가 좋은 자리를 잡을 줄 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박사가 모교에서도 밀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은퇴 후 오륙년의 시간을 우울한 적응기로서 사시는 셈이다. 그 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묻지 마라 네 살 터울이시다. 6.25 때 기억은 없다 하시는데, 큰 이모는 엄마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담벼락에 붙어 선 채로 오줌을 줄줄 싸는 세 살짜리 겁쟁이였다고 놀리신다. 물론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겁쟁이란 느낌은 없었다.

 

엄마, 정말이세요?

뭘?

엄마 어려선 무지 겁쟁이셨다고?

느이 엄마 지금도 겁쟁이다.

엄마가 겁쟁이?

그래. 엄마가 뭐 딱히 하는 것 봤냐?

하루 종일 평생 하시는 건 뭐고요?

이런 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지. 엄만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만 하고 살다가 죽는 게지.

엄마는.

정말이다, 엄마는 한 것이 없다. 딸 셋 낳은 것 말고는.

우리 키우신 건 다 어떻고요.

키우다니, 그냥 너희가 절로 자란 것이지. 내가 뭘 했냐. 품을 팔아 과외를 시켰냐, 차를 태워 나르기를 했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분명 달라졌다. 무심한 듯 말 속에 심지가 생겼다. 뭘까. 설 명절의 부담 때문일까? 설은 아무래도 세배 문화 때문에 공휴일 상관없이 길어지고, 또 어떻게 된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떡국상이다. 그러려면 음식 수급도 절묘한 솜씨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라.

 

어머니가 시장보따리를 여럿 챙기셨다. 내가 유럽에서 가져다드린 낡은 무명 홑겹 가방을 여태도 쓰시며, 그 안에 다른 보자기 가방들을 넣으셨다. 모처럼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리 춥진 않았지만 추운 체 하면서 어머니의 팔을 꼈다. 생각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

 

 

외사촌의 전화번호가 떴다. 팔을 풀고, 양손 손가락에 여러 개 시장보따리를 걸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금실아, 오빠야.

아이쿠, 웬 일?

너랑 의논할 것이 좀 있어서.

나랑 의논을? 의논을? 어디 있는데?

그렇게 만난 외사촌은 더블 에스프레소를 훌쩍 마시고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따끈한 아메리카노 잔에 손을 굽던 내가 말을 꺼냈다.

오빠, 커피 취향이 바뀌었네! 참, 곤충 연구는 겨울엔 좀 쉬는가?

명색이 학문에 여름 겨울이 있겠어? 금실아, 넌 그런데 왜 결혼 안 하냐?

그러는 오빤 왜 안 하는데?

거야, 나는 남자고.

뭐야, 여름 캠핑장에서랑 똑같은 레퍼토리네. 다른 이유를 대 봐!

외사촌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환상이 깨진 지 오래였나 봐.

환상이 깨져?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래.

외숙모를? 외숙모가 왜?

그때 왜, 우리 아버지 갑상선 수술 하실 때.

언제 적 이야기를.

아버지가 수술을 앞 둔 날 밤, 어머니는 병원 침상 곁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 주무셨어. 물론 나도 보호자 노릇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었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거든. 혹시라도 수술이……. 기분이 묘했어, 어머니가 고생 덜 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머닌 만일의 사태가 걱정도 안 되셨는지.

그거야, 아버지들이 씩씩하시잖아. 울 아버지 돌발성난청 치료하실 때도 열흘 넘게 아버지 혼자서 병원에 계셨는걸.

그건 좀 다르지, 난청하고 암이 비교나 되나? 또 그 뿐이 아니었어. 수술은 잘 되었지만, 퇴원하실 때도 좀 거북했어. 아버진 동위원소 캡슐 치료하고 퇴원을 하셨는데, 퇴원 날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호텔에 가서 주무시고 오시랬거든. 식구들이 다 같이 동위원소에 노출되느니, 아버지 혼자 계시다 오시는 것이 맞다고. 생수병 둘을 챙겨 호텔로 따라나서는 날 아버지는 말리셨고, 어머닌 화까지 내셨다니까, 나더러 속이 없다고! 그 세월 지나고서도 부부라는 것이 영원한 평행선이고 남남일까, 난 혼란스러웠어.

그만 둬. 외숙모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지, 합리적이고. 다 지난 일을 왜 그래. 외삼촌도 건강하시면 되었지. 오늘은 뭔가 다른, 할 얘기가 있다는 것 아니었어?

 

외사촌은 더욱 뜸을 들였다.

그게 글쎄.

오빠 뭐? 누구 사귀는 거야? 집에선 반대하고? 아님 선 자리 나온 거야?

그게 글쎄.

글쎄 라니, 어떤 여자인데? 같이 살기라도 해?

살기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신경이 쓰인다는 대상은 …… 외사촌은 아예 더듬거렸다.

구내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 알고 보니 나이는 조금 아래지만 이웃 학과의 연구전임이 된 친구인데, 겨우 한 학기를 멀리서 보고 지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상쾌함과 긴장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단다. 그가 먼저 앉아 있다가 외사촌을 보며 갸웃하고 인사하는 동작, 함께 온 사람이 있더라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앞을 보는 순간, 상대가 아니라 사이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란다. 해서 식당에서 마주치면 자판기 커피를 함께 하자고 청한 적이 여러 번이었단다. 종이컵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마시다가 눈을 치뜰 때면 왼쪽 눈썹이 더 올라가고, 미소 또한 왼쪽 입술 끝이 살짝 더 밀려 올라가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뭐야, 같은 이공계면 철저히 다름의 매력 그런 것도 아니고.

취민 달라. 나는 사진을 찍으러 숲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편인데, 그 친구는 사진엔 관심이 없더라고. 대신 영화광이야, 안 보는 영화가 없어.

오빠도 영화 좋아하지 않았던가?

난 근년 들어선 뜨악한 편이었어. 그 친구랑 몇이 어울려 꼭 한번 함께 갔었지. <러시: 더 라이벌> ― 에프 원 그랑프리 실화라고, 뜨거운 가슴이 있는 남자라면 마다하지 못할 영화라고 부추겨서. 헌데 스크린 속의 무서운 질주나 크리스 헴스워스의 매력 대신 그 친구 옆얼굴만 훔쳐보게 되어 못할 짓이다 싶었어.

병이 깊네.

병이라고? 넌 유럽형 인간 아냐?

유럽이 왜 나와, 여기서?

네가 공부하던 파리는 자유의 심장 아냐?

웬 자유? 평등, 박애까지를 다 말하려면 또 몰라.

그게 아니라, 파리에선 동성애자 시장에, 또 대통령들도 사생활은…….

사르코지나 올랑드? 우리 눈으론 좀 고약하지. 난 성적으로 그렇게 자유분방한 쪽이 못 됩니다요, 오라버니!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석 달 만에 젊은 연예인하고 재혼을 했다! 그런 것 쯤 아무도 상관 않았었지, 프랑스 사람들은.

오빠,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어? 20년간 살았던 부부였어, 것도 이미 재혼으로. 그 사이 아이들도 셋이나 있고. 또 새 여자도 애 엄마고! 아이들 어지럽게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해?

금실이 너 고리타분 맹추구나. 그럼 지금 대통령한텐 더 욕을 해대겠네!

남의 인생에 무슨 욕까지야. 하지만 이 사람은 더 심해. 결혼이 아니고 동거관계라서 그러는 말이 아냐. 애를 넷이나 두고서도 첫 여자와 헤어졌다지, 그 여잔 사회당 당수였어. 차라리 그 여자나 대통령이 될 일이지. 암튼 따로 애가 셋 있는 두 번째 여잔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고 있었지, 잠깐. 그러다 또 여배우야? 뇌에서 분비되는 짝짓기 신경물질의 유효기간만 지나면 상대를 갈아치워? 정치적 역량은 역량이고, 난 그런 사람들 너절하다고 생각해. 섹스가 뭔데? 인간사 필수적 요인이라 치더라도 갈아치우는 게 능사는 아냐. 몸도 맘도 그렇게 둔갑을 한다면 그게 철새지 뭐야.

새는 또 왜!

 

내가 잠깐 실수를 했다. 동물학 전공의 외사촌에게 새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전문가적 지식이 쏟아질 판이 되었다. 나는 커피 잔을 얼른 들어서 식어버린 나머지를 홀짝거렸다.

 

 

갈매기도…….

뭐야, 곤충박사님께선 새를 능멸하는 것에도 분개하시나? 갈매긴 또 뭔데?

분개까진 아니지만, 갈매기도 동성애를 인정받는 세상에…….

동성애? 갈매기가 동성애를?

그래, 갈매기의 동성애.

너무 멀리 간다, 오빠.

아냐,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들 심심찮게 있어. 암컷 두 마리가 함께 둥지를 틀어서는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지.

알을 낳는다고? 암컷끼리?

아니, 미수정란이나 단위생식 그런 게 아냐.

그럼, 알은?

살림은 암컷 두 마리가 차리지만 짝짓기는 각각 주변의 수컷들을 만나는 방식이지. 어쨌거나 번식에 성공하는 거야.

그럼 그건 암컷들의 공동생활이지 무슨 동성애란 이름을 붙여?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오빠, 동성까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 동성애야? 그건 아니지. 암수 간에 사랑해서 살림을 차리고 자식 낳자고 성애와 교접이 따르는 것 아냐? 모르긴 몰라도.

로이와 사일로 이야기도 몰라?

누군데?

맨해튼 동물원의 펭귄들, 만화도 나왔는걸. 그 둘은 암컷 펭귄들일랑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뭐냐, 절정행위도 한대, 목을 감고 그러는 성관계를.

설마 아기도 낳았대?

또 아기 이야기냐! 돌멩이를 알처럼 품으려고 해서 유정란을 넣어주었더니 서른 날 넘게 품어서 알을 깨우고 또 길러냈대. 완전한 입양가족 아냐?

글쎄. 입양가족 쪽은 맞지만 부부도 부모도 아냐, 분명.

부모는 아니지만 동성애 양친!

나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천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녹청색 계열의 체크 패턴의 무늬에 집중하는 척 했다.

오빠, 난 이런 무늬가…….

소용없었다. 외사촌은 이야기를 접지 않았다. 돌리지도 않았다.

 

 

동성애 ― 외사촌의 생각으로 자신은 동성애 성향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일하다가도 문득 그 친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데……. 대체 뭐냐, 이건?

내게 그런 걸 묻다니. 외사촌은 아마도 긴 싱글 기간을 보내는 나 또한 그러한 기질이나 성향이 없는지 탐색하는 눈치였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파리에서 한 때 젊음을 보낸 내가 상당히 진보적일 것이라 믿었기에 이해받기를, 뭐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맹꽁이 답답이다. 엄격했다, 그 부분은.

 

외사촌은 알리바이 모양 역사 속 유명인들의 동성애 취향을 꿰고 있었다. 다빈치의 젊은 시절의 ‘불경한’ 행위들, 미켈란젤로가 미소년에 보냈던 소네트며 젊은 귀족에게 헌신했던 만년의 애정, 차이코프스키의 조카에 대한 비뚠 열정. 랭보는 어땠는데? 그건 부정 못할 것이라고 외사촌은 들이댔다. 푸코는 어떻고! 심지어 여자들도 마찬가지라면서, 사포의 레스보스 섬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팅게일도 사촌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거절당해서 전장으로 떠나버렸다는 둥. 외사촌은 마치 공부라도 해 둔 양,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신화며, 소위 그리스 사랑 ― 성인과 소년 간의 사랑 ― 또는 고대 아시리아의 보편적 동성애 문화까지 증거로 들이댔다.

 

나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때의 사랑은 분명 우정이 심화된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못 박았다. 철학을 사랑하듯 동료의 철학을, 철학하는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 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을 두고도 갑론을박이었다. 외사촌은 플라톤의 동성애 증거라 했고, 나는 바로 그 말이 동성애가 아닌 정신적 우정에 관한 증거라고 했다. 한 문장이 두 상반된 주장의 증거가 되었다. 나는 ―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와 가능한 번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행위는, 그러니까 의사 성행위는 암컷과 수컷의 사랑이 아니다, 결코 성애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몇 명의 잘난, 똑똑한, 개성 있는 유명인들이 동성애를 표방하고 경우에 따라서 결혼예식을 한다고 치자. 사실 파리 시장 들라노에만 해도 드러내놓고 동성애자임을 표방하고도 당선된 게 맞다. 2,3년 전 파리에선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50만 명 시위에 들라노에며 녹색당 대통령 후보며 그런 인물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력한 인사들의 성정체성이니까 특별히 존중해야할 필요는 없다. 내 주장은 이야기를 해 나가는 중에 점점 더 완고해져갔다.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 이게 결혼의 사전적 정의다. 헌법에도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한다고 된 것 같다. 불문율에서도 남녀 양성이 전제다. 남녀 아닌 두 사람이 사랑을 하든, 동거생활을 하든, 흔치는 않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결정이다. 자기결정권의 행사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 가능하다면 법적으로도. 그러나 남녀의 결혼 또는 동거와 동성의 동거를 동일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외사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예상치 않은 독설에 찔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나아가기로 했다.

 

왜냐고?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 복제를 위한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가 이루어지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의미에서 동성결합을 원하는 생물체는 특이종이다. 어쩌면 불완전하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또는 양성애는 ― 난 그런 이분적인 용어 자체의 도식이 틀렸다고 보는 쪽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닌 것이, 둥근 거울과 네모난 거울 중 어느 것을 살까 하는 소녀의 망설임이라거나, 점심에 설렁탕을 먹을지 순두부를 먹을지 망설이는 직장인의 고민과는 다른 차원이다. 거울은 거울이고 밥은 밥이고, 그런 건 늘 둘 다 똑같은 가치이니까. 하지만 동성애란 ― 성애의 변형일 뿐이다. 그저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암수의 결합이 껄끄럽고 내키지 않은 대신, 동성을 그리워하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동성애라고 할 뿐이다. 동성 간의 사랑, 동성에 대한 사랑 ― 동성애. 뭐라든지 단어는 가능하겠지만, 원래의 성애와는 성격이, 질이 다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생산적 짝짓기를 변호했다. 생물학자 외사촌 앞에서 점점 더 생물학 이야기로 빠졌다. 적진으로.

동성결합은 유전자 복제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복제라는 원초적 욕구를 모르는, 회피한, 버린 생물체들이 벌이는 사랑은 뭔가 자연의 범위를 벗어난다. 키가 병적으로 너무 작아도 커도, 정상 범위를 벗어나도 똑같이, 돈이나 생산성이 많건 적건 똑같이 그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만큼, 동성애 성향이더라도 인격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최근 교황님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말하는 성 소수자 동등권 운운도 사회적 인격적인 차별 금지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성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류의 비전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것’ ― 프랑스 추기경의 말이었다, 그때 파리의 동성애자들 시위 때. 어떤 종의 모든 생물체가 동성애 성향이라면 결과는 그 종의 도태다.

 

도태? 그 단어에서 외사촌은 완전히 함구했다.

나는 불확실한 전문용어까지를 동원해가며 개똥철학을 읊어댔다.

밈 ― 문화적 유전자라. 복제 과정에서 진을 살찌운다는 밈이라는 인자, 이 밈의 세력이 대단한 건 증명되었지. 우리가, 수백만 인간들이 예컨대 ‘신’이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처럼 확인되지 않은 믿음을 공유하게 된 것들이 그런 작용이라지? 그렇다고 동성애의 밈이 인류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체는,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 손해가 나는 방향으로 진화할 리가 없으니까.

 

외사촌은 눈도 껌벅거리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녹음기처럼 지껄였다.

알게 모르게 서양 흉내쟁이인 우리들,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글쎄. 물론 동성 간 혼인이 합법적이라고 간주되고 아니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것이 법으로 인정받는 서양 어느 곳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서양의 결정이니까 법이니까 옳은 것은 아냐. 옳지 않은 법을 몰라서 그래? 단 기간에 만들어진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 전쟁도 법의 이름으로, 인종청소도 법의 이름으로 행해졌어. 법 이야긴 접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 ― 소중한 말이지. 정치적 소수의견, 생물학적 약자, 모두 강한 다수가 배려해야할 대상이지.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 그가 그 일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것이 자랑은 아냐. 어쨌거나 프랑스에선 사정이 좋아지고 있어.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벌금형이 없어졌지, 120년 동안 ‘사회적 장애’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과했던 법이 사라진 거야. 곧 이어 정신병 리스트에서도 동성애가 삭제되었어. 그렇다고 육신이, 정서가 완벽한 건강상태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젊고 건강한 암수는 원초적 본능으로 짝짓기를 원하게 되어 있으니까.

 

넌 뭐야, 넌 왜 이렇게 사는데? 짝짓기가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라면서?

침묵하던 외사촌이 내 약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평소에 정리가 된 견해도 아닌 말들을 즉흥적으로 외사촌에게 떠들어대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침묵에 외사촌도 머쓱해졌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빈 커피 잔을 들기도 어색해진 나는 테이블보의 녹색과 짙은 청색 사이에 섞여 짜인 버건디 색상의 가느다란 올에 집중해서 비율을 셈하려고 했다.

 

 

아냐. 아니거든!

건너 편 옆 자리에서 제법 큰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다 같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오빠. 아녜요. 쟤네들 좀 봐. 요즘 젊은이들이 저래. 남자애 같은 남자애, 여자애 같은 여자애가 드물어. 유니섹스인지 옷도 저렇게 비슷하게 입고 다니지. 우리 둘 다 쟤네들 쳐다보면서 그게 여자애 목소리라고 느꼈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쪽이 여자애라니까.

그게 뭐.

남자들 입장에선 여자들이 버거워졌을 거란 말이지. 요즘 괜찮은 남자가 되려면 돈이 엄청 많은 집안이거나 빵빵한 직업이 있거나, 그러고도 키가 커야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갖춰? 다 갖췄다고 해도 연인에게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다고들 하지. 바꿔 말해도 그래. 괜찮은 여자란 돈 많은 집 딸이거나 최소한 연금이 보장된 직업이 있다거나, 그러고도 예뻐야 하는데…… 누가 그래. 다 어렵지. 이성에게 들이댈 자신들이 없어진 거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지.

 

오빤 대꾸를 않는다.

아님, 저쪽을 봐. 쟤네들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차렸네. 하지만 뭣들 하고 있나 봐. 각자 휴대폰 들여다보며 뭘 하느냔 말이야. 뭘 하러 만나서는.

우리처럼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음 아저씬가?

그래, 영락없는 아저씨 아줌마지.

그렇게까지 자조적일 필요는.

자조적이 아니라 현실이 우울하게 하지. 요즘 뉴스 안 봤어? 세계 부유층 85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이 가진 것과 같다는데 뭐. 1%의 부유층이 50% 빈곤층의 65배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거야. 인구 절반이 버러지야. 절반만 그런가. 아래 절반 보다 나아보았자 상대적 박탈감으로 꼬여있어, 마음들이. 뭔가 자연스러워야 생명력이 넘치고 짝짓기도 하고 싶고 그러지, 후손 번식에 대한 의욕이 솟구칠 것 아냐. 그런데 이렇게 움츠러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서로 위로받고, 가능하다면 유사 성애로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부의 불평등 문제까지 가냐! 넌 문학연구가 아니라 사회학 했어?

부의 불평등은 ― 전공과 무슨 상관? ― 우리를 지배하는 물신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선진국에서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하지만 후진국에서는 부패를 조장한다는 말이 맞아. 부의 완강한 대물림 속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살 맛 나지 않는 세상이지.

살 맛 나지 않아서, 이성에게 구혼하지도 후손을 구하지 않고 동성 사이에서 안주한다?

뭐,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요즈음엔 교육 자체를 포기하고 등 돌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잖아.

그래, 니트라 그러더라. 낫 인 에듀케이션, 엠플로이먼트 오어 트레이닝.

우리나라에선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니트족 통계가 70만 명도 웃돈다고 본 것 같아. 한줄 서기에 아이들이 죽어 가. 옆자리 짝꿍도 경쟁상대로 보라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를 도망치는 거야. 대학에서도 희망이 없어 자퇴하기도 하고. 자괴감이나 대인기피증은 당연, 사회구조 전체에서 비껴서있는 것이지. 가부장제로 받침 되는 건전한 사회조직? 어림없어. 반사회적, 아니, 비사회적인 건 틀림없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거야. 또 교육을 많이 받음 뭐해? 정규직이 안 되는, 못 되는 점에서 우리라고 다른가?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체제에 들어가? 결혼이 말이나 되냐고. 분업시대 이후론 싫든 좋든 어떤 톱니든 톱니가 되어야 겨우 사는데 말이야.

톱니 인생. 그래 정상적인 톱니만 되어도 다행인 것을.

틈새에도 끼이지 못하니까 다른 돌파구를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어쨌거나 우린 ―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불어났는데. 밖에 어둠이 내려앉자 커피숍 공간이 살짝 위로 솟은 느낌에 어디선가 스쳐 오는 바람기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린 ― 뭔가 위안이 그리운 시대를 사는 것 같아.

그래. 위안이 그리운 세대, 누가 누굴 위로할 줄 모르는 세대.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모르는 세대. 간혹 경쟁을 피하게 되면 우정도 사랑이라 믿는…….

 

 

사랑과 우정을 혼동한다고?

외사촌은 눈을 흘겼다. 내가 우정과 사랑을 구별 못한다는 말에 발끈했나 보았다.

넌 감정의 구분이 확실해서 위안은 그립고 누군가는 필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혼자 버티는데?

혼자, 그래 혼자 잘 지내는 편이야. 하지만 글쎄, 난 요즈음 희한하게 아기를 갖고 싶어. 그건 충동이라기보다는 딸을 낳고 싶은 소망, 낳아야 하리라는 의무감에서. 하지만 수컷이 없네! 암컷 갈매기나 같구나. 하긴 무슨 수로 애를 키워? 나 혼자도 버거운 세상에서. 많이 말고, 그냥 먹고 사는 만큼도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이참에 적극적으로 나서 볼까?

아버지 감을 낚겠다고?

감으로 괜찮은 사람이 보이기도 해. 사랑? 가슴이 뭉클하게 아프지는 않아서 사랑은 아니려나? 또 짝짓기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겠지만.

뭐야, 넌 그럼 여태?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옛날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처음 남자가 나빴어. 하필이면 극장 안에서 손을 잡았지 뭐야. 난 불 꺼진 극장 안에서 손을 잡히긴 싫었어. 그 무렵 어떤 소설을 읽었었는데, 자연 속에서, 이를테면 풀밭에서 햇볕 아래 누워서 혼자 오르가즘을 느낀 소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 그런데 극장은 어둠의 충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어. 사랑은 어둠이어선 안 되는 것 아냐? 암튼 어둠과 관련되는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소름 돋았어.

밝은 사랑?

그래, 밝은 이미지의 남자. 난 분명 남자가 필요해, 내 딸을 위해서.

딸은 무슨. 딸을 낳으라는 보장은 있고? 멀쩡한 처녀가 임신을 원한다니 세상 참.

그래, 바로 임신이야.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적 충동은 뭔가 빗나간 것일 게야. 그러니 동성애도……. 맞아, 임신이 좋은 비유야. 임신이란 100%이거나 아니거나 그거야, 누군가 절반만 임신일 수는 없어. 성교도 그래,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교란 반쯤만, 그러니까 성교가 아냐.

생물학자 밥 벌어 먹겠느냐, 어디!

미안해, 공자님 앞에서 문자네 정말. 하지만 사랑은 임신과 같아, 100%이거나 아니거나. 절반만 사랑한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야. 사랑에 어떻게 양이 있어. 양이 있는 것이라면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아길 가질 거라며!

아길 가지려고 사랑하겠다니까, 온이 사랑할 거야. 만일 누군가를…….

누군가를 만나면? 누군가를? 누구를?

그게 글쎄.

넌 말 다르고…….

아냐.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오빠, 오늘 이야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해 두자. 오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야, 어쩜 나도. 부부가 되려면 팔천 겁의 인연이 필요하댔잖아.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진.

겁?

그래, 겁.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사방 1유순 크기의 바위를 뚫는 시간.

유순?

소달구지가 하루 가는 거리라니까 최소 40리라고 하지.

평방 40리?

오빠, 내버려 두자, 단위는 잊고 그냥 시간에 맡겨 두자고. 건 그렇고, 오늘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설에 또 오기 어려울 텐데 울 아버지 뵙고 가야지.

오늘은…….

가, 가자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쪽은 내내 나였다. 왜 목소리를 높였을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소리 뿐, 말에 전혀 자신은 없는 채로. 가만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 자체가 말의 알맹이에 자신이 없다는 신호다. 아니면 진실을 감추려거나.

 

어머니는 요즘 왜 목소리를 높이실까. 혹시 감춰둔 심지가 뭘까? 집을 향하자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설을 앞둔 일시적 상황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음식 만드시면서 짜증스러운 내색을 보이신 적은 없었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늘 그러셨다. 설이래야 수십 명 씩 손님이 오는 대단한 집도 아니고, 그저 조금 북적대고 수선스럽고, 그래도 떠들썩하고 화기 넘치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받쳐주는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있는 존재라고 믿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명절이면 딸들과도 다 함께 하지 못하는 허전함에 더해 아들의 부재를 서러워하실까? 민망해 하실까? 아버지에게 미안함 대신, 그 미안함을 감추려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걸까?

 

혹시 아버지는 아들 없이 지내야 할 차례가 다가오면 우리들 몰래 한숨을 쉬시지는 않을까? 그 한숨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극할까? 유전자 복제에 실패하시고서도 한숨도 마음대로 못 내쉬는 울 아버지.

 

 

아버지이, 선준 오빠 왔어요.

집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안 계셨다.

엄마, 아버진?

내가 느이 아버지 어디 가신 줄 일일이 다 안다니?

어찌할꼬. 어머니의 목소리엔 여전히 싸한 여운이 감돌았다. 울 어머니의 목소리에 심지를 심어 넘은 범인의 정체는 뭘까. 그냥 세월일까. 내 눈으로는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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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문학』 2014. 3,4월호(vol. 119), 국제펜한국본부, 125~14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1. 25. 21:23

삼포세대 

 

 

 

 

 

솔직히, 나는 정복한 것보다는 패배한 것이 낫고, 영구적  소유의 독점적 고형성보다는 임시성과 불확정성의 느낌이 좋다. - 에드워드 사이드, 『도전 받는 오리엔탈리즘』 중에서

 

   

  삼포세대라네, 삼포!

  삼천포가 아니고?

  삼천포는 무슨, 삼포라니까. 우리 같은 루저를 삼포세대라요!

  삼포? 어디선가 듣긴 들었는데.

  그래요, 쓰리 포세이큰 제너레이션!

  뭐요, 셋을 포기한 놈들이라고?

   쳇, 영어라야 얼른 소통되는 우린 바로 바나나족이지, 무슨 삼포족. 겉만 누런, 속은 허여니 뼛속은 양놈들이지.

   김박은 삼천포로 빠지는 게 특지지. 뭘 포기해서 삼포냐, 그럴 물어야지요!

   뻔한 것 아뇨.

  이박, 그래도 읊어 봐요!

  입에 담기도, 그게. 그러니까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모두 포기한 세대란 말이외다.

하나마나 한 소리. 그게 다 직장 문제, 돈 문제 아뇨.

  그래도 그게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청년층’ 그 비슷한 정의가 있어요. 재작년인가, 신문의 취재팀이 만든 신조어이지만 정곡을 찌를 밖에.

 

  우린 그렇게 삼포세대라 낙인찍혔다. 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공부 때문에 공부에 심취해서, 그러니까 제법 고상한 삶의 방식 때문에 연애도 안하고 사는 줄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나도 그들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꼼짝없는 삼포세대.

 

 

  평균인 - 평균인은 누굴까.

  그날 저녁도 외주둥이 굶는다고 소보로빵 한 개로 끼니를 때웠다. 소주와 냉수를 1:3으로 타서 음료수 대신 마셨다. 왜소한 저녁상을 물리고 - 상에서 먹은 것도 아니었지만 - 하릴없이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헤아릴 수 없는 아메바들의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나 아메바는 갑자기 이 시대 평균 아메바 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평균치는 수많은 통계에서 찾아보아 골라내면 될 것 아닌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우리’ 중에서 평균적 수입을 갖고, 평균적 자녀 수, 평균적 기대 수명, 평균적 학력, 평균적 직업, 평균적 취미활동 …… 등을 고려하여 대표적 가정의 대표적 사람을 꼽는 일이다. 무엇부터 찾을까. 잠시 통계의 무시무시한 망망대해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사는가가 우선일 것이었다. 우선 가족의 평균 수입, 그런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수치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므로 통계를 찾기도 쉽고 평균이나 적절한 대표를 찾기도 분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중소기업을 가정하자! - 사장을 포함한 직원 전체는 70명이고 이들의 총 급여의 합은 2억 1000만원이다. 그러면 이 회사 직원들의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이 통계는 산술평균에 의거한 것으로 결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자. 대부분의 직원들은 월 300만원은 평생 가도 못 만져 볼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한다. 직원 50명이 1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10명의 작업반장들도 겨우 150만원씩 받을 뿐이다. 이들에게 300은 비현실적인 수치이다. 왜 그런 300만원 평균치가 나오는가. 그것은 과장들 3명이 500만원씩을, 부장 5명이 1000만원씩을, 부사장은 2000만원, 사장은 50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70명 중 50명이나 되는 최빈수가 받는 월급은 고작 100만원, 그러므로 대부분의 직원들이 통감하는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하다. 70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중앙에 있는 35 또는 36번째 높은 월급을 받는 사람을 대표라고 한다면, 대푯값 역시 100만원에 불과하다. 이 회사의 최빈수와 대푯값은 100만원 월급인데,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나는 초장에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열이 났다. 좀처럼 찬물 샤워를 못 하는 내가 찬물 샤워를 하고 나왔다. 컴퓨터는 여전히 켜져 있었지만 지나쳐서 창 쪽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웠다.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아스팔트의 미세 먼지가 날아오른다. 작은 도로라서 저 아래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도 보인다. 저들이 평균인일까. 운전자가 평균인일까.

 

  다음 순간, 대한민국 평균인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을 예감이 들었다. 일을 원론적으로 생각해보려니 한참을 물러서고 만다. 처음 자리가 아니라 마이너스 어딘가로. 도대체 누가 ‘우리’인가. 우리 국민이라 함은 대한민국 국민을 말한다. 그러나 간단하지가 않다.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에서 비롯되어 그 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현 우리나라의 건국은 참 오래 걸렸다. 1945년 광복을 맞았어도 다시 미군정의 주둔시기를 거쳐서 1948년 8월 15일에야 정부 수립이 선포된 나라다. 독립 선포 후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 수립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100,210㎢ 땅에서만. 그러니까 함께 독립선언을 했던 반쪽 123,138㎢를 북에 두고, 이제와 그들의 일인당 국내총생산 1,900달러를 살짝 조롱하면서. 우리는 그들보다 10배 이상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우리를 우리에 한정한다.

  그 한정된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회원국 중에서 수출입 선 순위권에 진입했다고 희희낙락이다. 1961년 우리가 여전히 전후의 비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생한 기구에 30년도 넘게 뒤늦게 합류한 우리가. 하지만 동시에 평균 자살률도 거의 3배나 더 이룩해(?) 냈다. 인구 10만 명 당 11명이 평균인데 우리나라는 서른 명이 넘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경제 위기로 유럽공동체에서 퇴출 위기에 내몰렸다는 그리스는 세 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그러니 경제가 행복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국민총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된 것과 자살자의 숫자는 비례하여 증가 일로에 있다.  

  왜?

 

  정말이지 평균 수입을 알아보고자 했던 내 의도는 한 순간에 좌절했다. 대신 여러 경제 지표를 조금 알게 되었다. 국민총생산이란 개념은 어느새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다. 보다 합리적으로 바뀐 것이란다. 국민총생산은 한 국가의 거주자 - 국민 - 가 일정 기간 동안에 생산한 모든 재화와 용역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마손된 고정자산의 소모분을 포함한 개념이고, 또 예컨대 우리나라 국민이 외국에 진출해서 생산한 것도 모두 포함된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의 대외수취소득을 제때에 정확하게 산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어, 우리나라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총생산만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으로 바뀌었단다. 그것이 또 1995년에는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는데,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생산 활동에 참여해서 벌어들인 소득의 합계란다. 실질 국민총소득은 실제 재화나 용역을 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실제 구매력을 측정하기 위해서 산출한다. 이 지표는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를 보다 잘 반영하기 위해 실질 국내총생산에다 교역조건 변화를 반영한 실질 무역손익을 차감하고 여기에 국외순수취요소소득을 더해서 산출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국민총생산이냐 국민총소득이냐는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다. 국민총소득이 2만 달러가 넘어도 왜 이렇게 허한가. 2012년 국민총소득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34위, 오매불망 우리가 모델로 삼는 미국은 5만 달러에 육박하면서 12위로, 여전히 우리를 훨씬 앞지른다.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는 뒤지지만, 34위라면 대단하다. 물론 2007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21,632달러를 기록했을 때만 해도 3만 달러 시대가 멀지 않다고 호들갑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1만 달러대로 떨어졌다가 2010년 2만 달러대에 재진입할 수 있었고, 3년째 2만 달러대 초반에 머물고 있지만 후퇴는 아니라는 것.

 

  문제는 불평등 성장이다. 한은에 따르면 1991에서 2011년까지 20년간 국민총소득이 연평균 9.3% 늘어났는데, 그동안 기업소득의 증가율은 11.4%인데 비해서 가계소득의 증가율은 8.5%에 불과했다고 한다. 개개인의 실질적인 주머니 사정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성장의 후퇴 때문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고 있기 때문임을 역설해주는 증거가 아닌가.

  또 1인당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에서 기업과 정부 몫을 빼고 개인이 실제로 쓸 수 있는 소득은 얼마일까. 개인의 근로소득과 재산소득을 합쳐서 거기에서 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을 뺀 것을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이고 하는데,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가장 밀접한 지표다. 그런데 지난해 1인당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인당 국민총소득의 57.9%에 그쳤다. 한 나라의 소득은 크게 자본에 대한 보수 - 영업 잉여라고도 한다 - 와 노동에 대한 보수 - 피용자 보수라고도 한다 - 로 나뉘는데, 전체 소득 중에서 피용자 보수가 차지하는 비율, 즉 노동소득분배율이 57.9%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미국은 75.3%로 세계 1위, 왜 그 많은 모순을 안고서도 미국이 제일가는 나라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스페인이나 일본 등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의 평균인 62.3%에도 못 미친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총소득이 별로 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정부와 기업이 가져가는 몫이 전체에서 40%를 넘다 보니, 우리 개개인의 주머니는 허할 수밖에 없는 일. 그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의 61.1%에 비해서도 낮아졌다. 그만큼 근로자 몫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3,148달러 - 그러니까 지난해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실제로 소비에 쓸 수 있는 돈은 (발표 당시 환율 1,126원으로 환산해서) 연간 14,80,457원으로, 대략 월 123만원에 불과했다.

 

  평균급여 - 월 123만원.

이 통계는 나를 울렸다. 마치 경제를 조금은 아는 사람모양, 나라 전체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관한 상심 때문에? 그랬다면 그것은 조금은 사치였다. 수치는 통계 속에서 존재했고, 나는 양심적으로 사고하면서 양심적으로 사고한다는 자존감을 지닐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개인적인 모멸감이었다. 나는 평균 123만원 세대에도 끼이지 못했다. 교양학부의 한국어 강의까지를 내려놓은 지금은 부정기적인 수입이 내 생활을 지탱해 주는 수입의 전부였다.

   『88만원 세대 : 절망의 세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을 감히 들춰 읽지 못하는 것도 자격지심이다. 그 책이 처음 나온 2007년까지도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영순위 강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세상 물정 모르고 인문학에 파묻혀 살았다. 승자독식 게임의 법칙도 예감하지 못한 채. 그러다 곧 닥쳐온 나의 추락은 부끄러움에 무조건 움츠러들게 했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 119만을 20대의 평균 소득비율 74%로 곱한 값이 88만원이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 40을 바라보며 88만원 수입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 자리를 비집고 든다 해도 - 아직 가능성은 있다. 국립대학은 매 학기 공채가 있기 때문에. - 동료들 사정을 보면 비정규직 평균임금 수준에 불과하다. 일이 있고, 책상이 있고, 동료가 있는 것, 그것이 그들을, 어쩜 나도 그 속에 다시 끼인다면 나를 지탱해 주는 끈이다. 가족들로부터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소원해지는 세월이다.

  지금까지는 전통적으로 가족이 가족의 복지를 떠맡았다. 대학생들은 FM(아버지 어머니)장학금에 기대고, 결혼까지를 부모에게 의존한다. 부모 세대는 어렵게 마련한 집을 자녀들 대학 뒷바라지와 결혼자금으로 다시 팔아야 한다. 그러고도 둘째나 셋째에겐 더 이상 뒷받침할 여력이 없다. 중산층에서 이미 밀려나 내려앉았다. 이제는 가족의 부담이 한계점을 넘어섰다. 가족은 소리 없는 신음 소리를 낸다. 가족의 구조와 성질이 이 시대 한국의 특별한 온도와 압력에 이르러 다른 상태로 바뀌는 임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도 일류기업에 입사하지 못하면 루저가 되는 세상, 연애는 사치의 극이요, 결혼 또한 비즈니스이다. 딩크족(더블인컴노키즈)은 삼포세대의 로망이다. 너 자신을 알라, 삼포족. 형언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루저인 나 자신을 향해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엉뚱한 곳으로, 정말로 삼천포로 빠졌다. 잠깐, 삼천포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변명이 필요하다. 옛날에 한 장사꾼이 진주장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한산한, 혹은 장날이 아닌 삼천포로 가게 되어 낭패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시발일 뿐, 나는 삼천포에 아무런 유감이 없다. 발길 가본 적도 없으니 좋고 나쁠 수도 없다. 그래도 그 이름 때문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곳 목록에 든다. 진주이건 삼천포이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종류를 가늠할 수 없는 화가 치민다.

 

 

  화 - 화가 나는 일을 당하여 우리는 주로 화를 참는 것이 인자의 길이요, 인자의 도리를 모르면 화로써 망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주입되었다. 하지만 화를 끓이고만 있으면 병이 된다고도 하질 않는가.

 

  분노는 많은 경우에 백해무익이지만, 사람이 분노해야 하는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를 모른다면 더 큰 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지도 있다. 2차 세계계대전의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을 대변하는 노익장이 남긴 짧은 글, 바로 『분노하라!』는 글이다. 스테판 에셀. 1917년생이니 90을 넘어서 쓴 글이다. 유명한 1917년생들이 다 떠나고 없는 세상에서. 정치라면 러시아혁명도, 케네디도, 박정희도. 문화라면 윤동주도, 윤이상도, 하인리히 뵐도. 에셀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일찍 파리에 정착해서 거의 한 세기를 살다간 지성인. 그냥이라도 90 노인의 발언은 경청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글이고 그림이고 저작자가 죽으면 값이 올라가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신속하게 번역되었다. 노익장의 분노 예찬 발언은 애늙은이들이 대접받는 동양적인 관점에서는 다소 색다를 수 있다. 아니 온 세계가 난공불락의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된 글로벌 경제시스템 하에서는 분명코 내민 돌에 정 박힐 일이다.

  프랑스의 현실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모양이다. 알제리를 비롯하여 비 코케시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갈수록 산이다. 이건 엊그제의 일이지만 명색 프랑스 하원의원 질 부르둘레라는 인물이 히틀러가 로마족, 그러니까 쉬운 말로 집시족을 충분히 못 죽였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일에는 장-마르크 애로 총리조차 법에 따른 처벌을 운운할 지경에 이르렀다지만. 세상은 금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권력들이 세포분열을 하는 장에 불과하다. 성실한 근로세 납세자는 없다. 바보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갑과 을만 존재한다.

 

  을순이 - 내 이름은 한금실이 아니고 통상 을순이가 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을식이와 을순이들의 하나. 그러므로 거의 무명 씨. 나에게 분노의 여력이 있을까.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

 

  첫 발걸음은 관심이다. 반세기 전에, 1960년대 유럽의 사회주의대학생연맹의 여대생들은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외쳤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의 여학생들은, 여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들의 관심은 외모와 이력을 통한 개인적인 성공에 있을 뿐이다. 여자 특유의 외모로서 남성 세계를 공략하거나 남성들과 똑같은 성공적인 이력을 쌓아 권력에 이르는 길이다. 그 이외는 무관심하다.

스물 세 명인가 네 명인가, 미스코리아 본선 진출자의 외모 사진들이 똑같다고 세계 여론에서 비웃는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미의 비용」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의 유수 저널이 한국의 성형수술 풍토를 대서특필했다. 얼굴에 독을 주입하는 것은 일상이고, 가정주부가 심지어 종아리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라고.

 

  그뿐인가. 얼마 전 폴라 비라운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화장품 경찰관(?)이란 별명의 전문가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이 바로 화장품 종류였단다. 스킨, 로션, 에센스, 아이크림, 영양크림이라는 필수(?) 코스도 모자라서 앰풀, 트리트먼트, 마사지 제품, 기능성 제품의 홍수들을 보고서 하는 말이, 수많은 종류의 기초 스킨케어 제품들이라야 파격적으로 말하자면 보습제 한 종류란다. 수많은 과정의 덧바름은 오히려 모공을 막아 트러블을 일으킬 수도 있고, 과한 영양분은 타고난 피부 루틴을 방해해서 자연스러운 재생력과 유수분 유지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데……. 나처람 단순 무식한 사람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피부도 인체의 일부이라면, ‘소식하면 장수한다!’라는 말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피부나 외모가 아니지만, 나만의 이력에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나 또한 사회적 무관심자에 속했다. 죽어라, 아니 충분히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러고도 갑의 근처는커녕 을의 세상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벌이라면 벌이다. 지식을 생보다 우위에 놓는 죄를 범한 일, 지식에 종사함에 우월감을 가졌던 일에 대한 벌. 이 창살 없는 수감생활 중에 나는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제서 무엇에 관심을 가질까. 무엇을 분노해야하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시작, 모든 새로운 시작은 반성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반성 시작 -

  나는 공부만 했다. 학문이 생을 의미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공부만 했다. 목표를 초월한 학문. 유용성을 생각하는 것은 저열하리라고 믿었다. 쓸모없음 때문에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어쭙잖게 노자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집의 쓰임은 벽이 아닌 빈 공간 때문이라고, 내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것은 발바닥 크기의 땅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땅, 내가 밟지 않고 있는 너른 땅 때문이라고.

  나는 사치스러웠다. 욕심을, 특히 물욕을 초월한 삶. 그 무슨 사치였는가. 착각 아니면 거짓말. 세 끼 굶으면 군자 없고,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 없다는데. 취직을 하든지 시집을 가든지 - ‘취집’을 향하여 전진을 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취직을 향한 노력은 적잖이 해왔다. 결과가 없을 뿐이다. 일단 안정된 직장이, 돈이 없으니. 그러면 곧 삼포세대에 속한다. 연애는 무슨. 혹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쳐도 - 그 정도는 생물학적 짝짓기 본능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렷다, 희망하건대. 하지만 결혼에 이르는 것은 사투에 가깝다. 생물체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할 것이므로, 남녀 관계라는 것도 다분히 계산적이 될밖에. 생물체의 상호작용에는 다소간 이해의 충돌이 내재한다고, 어디선가 읽었고, 또 동의한다. 자기 복제를 시도하려는 충동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미화되어…….

 

  틀렸다. 나는 반성 대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정작 중요한 반성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있다. 죽어라 공부하고도 일자리가 없는 것을 내 못난 탓으로만 돌리는 반성은 무의미하다. 부족하다.

  무엇을 더 분노해야 할 것인가. 내 탓은 제 앞가림 못한 데 대한 분노, 제 욕심에서 나온 분노에 불과하다. 애초에 나를, 우리를 대학입시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이 사회. 대학정원을 너무 부풀렸던 이 사회에 분노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이 에셀이 말하는 분노, 진정한 사회참여에서 오는 분노이다.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이름의 한 줄서기를 주입시킨 교육. 살벌한 경쟁심을 자유라는 당의정을 우리에게 먹였던 교육. 제 앞가림에만 매진하라고, 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평생을 달리라고 가르쳤던 교육 말이다. 그것도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 바로잡을 것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가 독문학을, 프랑스문학을 선택했던 대입에서 어른들 - 그런 곳을 진학하게 권했던 담임선생님이나 그런 학과의 대문을 너무 홀짝 열어놓고 우리를 습인했던 대학들 모두 - 그때 어른들은 우리가 바나나족으로 성장하게 될 것을 몰랐다는 말인가.

 

  바나나 - 바나나를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바나나는 병문안과 관련된 이미지였다. 아프면 바나나를 사주셨다. 조금 더 자라서는 해괴한 모양이 눈에 들어온 때문에 싫어하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바나나를 먹기는 뭔가 민망한 노릇이었다. 금방 바나나 송이에 꼬이는 하루살이들도 성가셨다. 하필 그 싫은 바나나로 지칭되는 우리들.

가야금과 거문고의 구별도 모르면서 현악기 종류들은 정확히 배워 알았다. 피아노 연습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필수다. 자연 단음계, 화성 단음계, 가락 단음계 구별도 배웠다. 자진머리, 휘머리, 중중머리는 구별할 줄 몰랐다. 조금 알았더라도 엇중머리 라고 하면 멍했다.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한국어교원양성과정 공부하면서야 제대로 알았으니, 지식분야인들 바나나 타령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 분야가 더했다. 개화기에 생산된 신문학은 어땠는가. 신소설, 신체시, 신파극 범주를 통틀어 서구문학과의 관련 양상이 문제가 되었다. 비록 김현과 김윤식의 자생적 근대화론이 정설로 굳었지만, 해방 직후에는 이식문학론도 만만치 않았다. 신문학을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 문학의 이식이라고 단언했던 임화의 논의는 그의 정치적 이력으로 묵살되고 만 것이니. 정치는 문학이론 위에 존재한다.

 

  쇼와 시대 이전, 그러니까 1870년대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 개화기의 서양 추종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수입 또는 주입되었다는 견해는 왜 백안시 되었을까. 메이지유신의 이름으로 서구의 자유주의 이론을 통한 근대화는 한 마디로 문명개화의 기치아래 수행되었다지만, 사실 일본의 경우는 무사들의 충성심과 사회적 조화라는 전통적 가치도 여전했거늘. 오히려 수입을 통한 수입에 해당되는 우리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한 동안 망각했었고, 그 기간은 사뭇 길었다.

  예컨대 무당이나 사당패처럼 홀대받던 것이 풍물이었다. 꽹과리, 징, 장구 그리고·북 어느 것도 손데 대면 천하다고 업신여겼다. 그게 사물놀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 난 것이 1978년의 일이었으니, 장구재비 김덕수 패거리가 - 정식명칭 김덕수사물놀이패 -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또 돈을 벌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풍물도 사물도 돈이 되는구나, 성공이 되는구나 하고서 관심을 보였던 셈이다. 우리 고유의 정서라거나 문화의 발흥이어서가 아니라, 돈이, 성공이 되니까. 결국 우리는 우리 가락을 연주는커녕 감상도 할 능력을 잃은 채, 국적불명의 음악에 취해서 산다. 글로벌음악, 글로벌문화.

 

  일찍이 매슈 아널드 같은 고급문화론자들이 세속적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문화’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유럽의 제국주의 문화였음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확실히 깨달았다. 벌써 반세기 전에. 그 반세기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종속되어 왔다. 유럽세계와 아시아세계의 차이에 관한 감각을 더욱 경직화시키는 압력에, 동양이 지닌 (서양과의)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사고에, 학문적으로 동양 위를 억누르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그런 교의에. 그러므로 (서양)문화에 근접할수록 고급문화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그뿐인가. 바나나족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글로벌문화 창달에 매진하며 산다. 미국 기업과 맞선 우리 기업이 자랑스럽기만 한가. 스마트폰은 주인의 자리를 넘본다. 눈을 뜨면서 스마트폰을 찾고, 머리맡에 놓고서야 잠든다. 그것도 ‘엘티이’라야 하지, 행여 ‘쓰리지’는 큰일이 난다. 여전히 ‘투지’를 쓰고 있다면 영락없이 비사회적 죄인이 되고 만다. 인간은 가까운 장래에 번호와 기호로 분류된 코드를 팔이거나 뇌 어딘가에 이식받아 글로벌하게 통제되어 살게 될 것이다. 인간로봇, 아니 아예 로봇으로 진보하기 전에 아직은 바보 같아도 사람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세상을 음미해야할 것 같다.

 

 

  음미 - 또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의 몫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도 굶어 죽는다 하질 않는가. 돈을, 성공을 향한 허기는 끝을 모른다. 산비탈을 한번 돌면 사람들 절반이 사라진다는 무서운 동화가 현실이 되어 있다. 한 단계를 지나면 절반이, 다음 단계에선 또 절반이 탈락하고 우량종만 남는다. 우량종들도 피터지게 경쟁하여 궁극에는 일인자만 남는다. 그 한 사람은 무엇을 향해 살리.

  차라리 삼포세대 바닥 헌장으로 삶아 읊어도 좋을 시가 있다. 스물일곱에 요절했다는 천 년 전 당나라의 문인 이하의 작품이다.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

    서리 맞으면 잡목되고 말지만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비루먹은 개. 이삼십 대 젊은 사람들 거의 절반이 이 무기력에 굴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었다. 어느 온라인 취업포털의 설문에. 이제 사람들을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적응인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자기암시로서 통제하는 적응력. 어찌어찌 결혼에 이른다 해도 출산은 망설인다. 출산율은 2012년 기준으로 1.23명, 사람을 세는 정수로 말하자면 한 명이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란다.

 

  난 그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객관적인 눈으로 삼포세대 일원이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으련다. 쓸 돈, 쓸 수 있는 돈을, 주머니 사정을 잠시 잠깐 망각하는 바보이고 싶다. 미래를 계획하느라 미리 겁에 질리고 싶지 않다. 겁에 질리지 않으면 포기가 아니다. 다른 유형의 삶. 신자본주의 이론으로 평가받지 않을 삶도 삶일 것이다. 자본주의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살았다. 자식이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던 한참 낙천적인 시절에도.

  낙천적이고자? 설마. ‘모든 것이 부조리함을 의식하는 인간’에게 어차피 실존은 이유도 종극적인 목적도 없을 것이니. 그냥 살 수밖에, 그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리라, 그래야 한다. 둘이 모여서 여섯을 포기하더라도. 셋이 모여 아홉을 포기하더라도. 허기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는. 봄버들이 되는 꿈을 꾸기 위해서라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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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펜문학 2013  Vol.9., 2013.11.20. 29-42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