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24. 1. 15. 18:40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 프란츠 카프카 1904    

 

*                                                                    

의 시작을 생각해 보았다. 기억할 수 없을 유년기 어느 날 ㅁ이라는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시작되었을 말, 어머니를 향했을 그 말 그 언어가 한국어였다. 말을 애교 있게 재잘거리는 귀여운 아이는 아니었던 것이 말과 관련한 처음 기억이다. 첫 아이였으니 또래는 없었고, 온통 어른들로 둘러싼 환경에서 사실은 내 ㅁ자로 시작되었던 어머니 찾기도 쉽지 않았다는 기억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하긴 생명체라면 모두 적응을 통해서 살아남을 것이다. 세상은 경이 그 자체였고 아이에게 변별력은 최소 능력, 사물과 말의 연결은 엄청난 어려움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며 사물들을 어떤 소리로써 지칭할 수 있단 말인가. 어른들의 팔에 안겨 시장을 구경하면서 김이 모락모락 쪄서 팔고 있는 고구마를 어찌 고구마라 말하며, 뜬 눈알 때문에 무서워 보이는 생선들을 뭐라 칭할 것인가. 한번은 소금 가게 앞 ‘소금팝니다’라는 비뚠 글자를 읽고 와서는 소금을 보면 ‘소금팝니다’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더란다. 그렇게 그림책도 시원찮던 시절, 무언가를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이 우선이었다. 아무 말 않기 – 그것이 상책이었다. 말 수 적은 아이는 그다지 흠은 아니었다. 머피의 법칙은 존재한다. 애가 어른 말을 먹어버리네! 어른들은 말을 먹어버리는 것이 반항이 아니라 수줍음 때문인 것을 잘 몰랐다.

 

학교에 들어갔다. 글자로 말하기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글자를 익히자 글자로 말하기가 말로 말하기보다 나았다. 글자로 말하기는 순발력이 없어도 괜찮았고, 글자로 말하면 기특해 했다. 말을 먹어버리는 아이에서 글을 좋아하는 아이로 살짝 변신하면서 말에서 조금 해방된 느낌이었다. 글자는 질문 같은 요구사항도 없었다. 글자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글자들의 집합, 책은 제법 편한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고립이 된다는 것 따위는 누구도 관심두지 않았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어른, 대학생 말이다.

독문과 대학생 – 왜 하필 독문과? 중고등학교 시절,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겠지만 운동장 활동을 면제 받았던 터라 도서실은 무궁무진 소설책들이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명문이라고는 해도 240명이 졸업한 지방도시 중고등학교의 작은 도서관이 더 이상 소설책들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칸트가 손에 잡혔다. 『순수이성비판』 - 한 줄도 읽어낼 수 없었을 때, 나의 기본 지식의 결함과 미진한 독해력 탓을 하지 않고 번역문 탓을 했다니. 무지가 용맹이었다. 독문과로 진학해서 기필코 이 글을 원전으로 읽으리라. 고백하건대, 독문과 시절 내내, 대학원 시절에도 그 뒤로도 칸트의 원전을 통째로 펼쳐보지 않았다. 근시안인 내게 독일어는 눈앞의 숙제였고, 독일어로 쓰인 소설들에 푹 빠져버렸다.

 

소설들은 경이였다.

 

인생의 동반자, 반세기를 함께 한 동반자가 곁에 있지만, 나의 뇌 속에는 소설들이 녹아 살고 있다. 어려서 만났던 글자들은 뇌의 딱딱한 표피를 뚫고 증발해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하기, 철학이 녹아있는 독일 소설들은 소설 이상이었다. 칸트 철학은 2천년 본질주의적 존재론에서의 대전환이었고, 비로소 개별자가 된 인간들이 진리와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 인간들이 소설 속에 살아있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혁명적 사고는 2차 대전 직후 빈곤한 독일 정신세계에 폭발적으로 수용되었다. 실존에 대한 탐구는 무궁무진한 보고인 것 같았다. 아니, 주체로서가 아닌 구조로서의 인간! 욕망 또한 타자의 욕망! 현대독일소설은 작은 뇌세포 하나하나를 풍선처럼 부풀게 하는 작용으로 들끓었고, 다른 어떤 것, 현실 속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꺼버린 아이러니로 작용했다. 겉으로는 숨길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내면은 불균형의 존재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소설이자 문학이자 예술의 세계는 언어종속적인 무엇이라는 진리가 뇌를 때렸다. 카프카가 말한 의미에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말이었다. 외국말로 된 외국 소설들을 파먹으며 살아가던 나는 스멀스멀 꼬리가 돋아나는 느낌에 화들짝 소스라쳤다. 다른 누군가가 사냥해 놓은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말로 내 글을 쓰고 있었다. 소설이라는 이름의 무엇을 쓰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시작의 무서움을 모르는가. 누군가가 읽을 수도 있는 글자들을 어쩌라고 내놓는가! 내가 나이고 싶어서 나의 말로 나의 글을 썼노라는 변명은 서툴고 못나기 그지없었다. 한국문학의 대양에 수영의 초보 지식도 없이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뛰어든 이방인이었다. 잘해야 의붓자식이었다.

 

겁이 났다. 가장 무서운 것은 독자라는 존재다. 미지의 누군가가 글을 읽는다는 상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아니, 누군가 읽기나 할까, 그것도 무서웠다. 글을 쓰는 작가들 중에도 더러 지인이 생겨났고, 누군가는 스스럼없이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솔직히 독자로서 정말 재미는 없더군요! 긴박한 갈등이 있어야……. 엄청 고마운 일이었다. 읽었으니까.

그렇게 소위 문우들을 만났다. 내가 공부했던 존경하는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서독과 세계 PEN International 에서 활동했다는 기억으로 PEN을 기웃거린 늦깎이는 이화동창문인회라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졌고, 서울 그리고 고향에서도 더러 동지들을 만났다. 누구나 문학소녀였다는 그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의 선후배들과도 의미 있는 공간을 나누게 되었다. 의미는 늘 무의미를 동반하지만, 어찌되었건 큰 범주로 문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외국문학 연구보다는, 취업 효율성 떨어지는 강의보다는 소박한 소설가로의 변신이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피는 피다. 정신의 묽은 피는 몸속의 빈혈과 마찬가지로 현기증과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전혀 괜찮지가 않다. 짝사랑 출판사는 무심하고, 자존심과 품위를 무기로 활동을 하는 위상 드높은 작가를 만나기라도 하면 무참히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나이하고도 키하고도 비례할 리 없는 낮은 함량의 속아지 때문에 앓는다. 그러니까 문제는 나다. 덜 떨어진 나다.

우물 안 개구리, 개구리도 되지 못한 우물 안 올챙이 – ‘우올’로 생긴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하늘과 해를 달을 별을 볼 수는 있겠지. 늘 평강을 빈다! 스스로 안부를 한다. 그런데도 편치는 않다. 외부의 어떤 무엇보다 빈약한 글 때문에 앓고 있다. 글과의 만남은 진정 숨쉬기의 단초였을까.


........................

2023.10. 『아름다운 만남』, 이화동창문인회, 317~321쪽.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문집 <스물셋,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0) 2024.10.29
글은 독백이다  (0) 2023.01.30
빙하가 녹았다  (0) 2023.01.07
반석 위의 벽?  (0) 2021.09.07
사피엔스의 언어  (0) 2021.09.07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27. 23:02

자유를 증오한다

 

 

자유를 동경했다, 동경했었다.

 

1997년 겨울, 세 번째 독일에 갔던 그때만 해도 내게 자유는 아름다운 가치였다. 저 남쪽 어느 대학의 교수를 우연히 만난 것은 일종의 인문학 강좌에서였다. 쾰른에 거주하며 뷔페탈 대학에 오가느라고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코앞의 별다른 과제가 없다 보니 야간의 가벼운 강좌도 기웃거리다 유명한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갔던 참이었다. 연사였던 그 교수는 자신의 책과 논문들을 읽었다는 이역만리 한국의 시원찮은 독문과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이 기분 좋은 일에 속하겠지만, 이상한 질문을 했다. 마치 뭣을 구하러 가정과 애들이 있는 나이 든 여자가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실제로 전문자료를 구하게 위해서 독일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는 시대였으니까. 또 이미 교수자리에 있는데 - 독일에서는 교수 자리가 대단해서 그랬겠지만 - 뭣 때문에 애써 독문학의 본고장을 쓸쓸히 배회하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어차피 독일 사람들처럼 독일 정서에 함몰되어 독문학을 완벽하게 체득할 수도 없으면서? 문학이 뭐라고?

질문의 저 깊은 회의를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입술에 달고 있었다. 일상으로부터의, 강의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어쩌면 생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혹은 학교당국의 연구비로, 연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를 어찌 예찬하지 않았겠는가.

 

추상적인 자유는 아름다운 무엇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건배라도 할 일이 있으면 자유를 위하여, 라고 외칠 뻔도 했다. 이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시장경제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해온 우리들, 이 아니 자랑스러운가, 라고. 자유시장경제가 자유민주주의와 합심해서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우리들로부터 온갖 원래적 자유를 침탈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나는 막연히 자유를 예찬하고 있었다.

 

시장경제체제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하므로, 다른 말로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기업경제다. 기업경제가 자유를 보장받는다. 이 자유는 상대에게 창끝을 겨눈다. 창끝은 가진 자유가 적은 사람의, 창을 든 손은 가진 자유가 넘치는 사람의 몫이다. 기업의 순이익이 상승해도 노동자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최악의 경우, 기업이 투자는 미루면서 몇 년 하다가 타산이 안 맞다 하면서 손을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잘 준비된 시나리오만 있으면, 경영위기를 서류상으로 증명만 하면, 문 닫을 권리가 생긴다. 사람 내쫓는 것도 권리가 된다. 기업의 자유는 노동자들을 단박에 해고할 자유까지를 말한다. 자유가 보장된 세상이 그렇다.

 

이러고서 자유를 예찬해야 하다니. 나는 언젠가부터 자유를 증오한다.

원론적으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를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상충이 일어난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

 

고도성장의 시대에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 했다. 상당 수 자수성가를 꿈꾸던 사람들은 계층 상승을 이루어 냈다. 계층 상승을 이루다 - 이 말 자체가 사회에 상존하는 계층의 구분을 인정하는 씁쓸한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꿈을 준다. 자유 경쟁을 통해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꿈을. 경쟁할 자유? 그것도 자유인데 경쟁에서 낙오된 것은 낙오된 자의 무능이다, 라고들 한다. 자유 경쟁이란 어불성설이다. 같은 조건이 아닌 자유 경쟁은 자유 경쟁이 아니다.

 

느닷없는 생각. 내가 자유 경쟁으로 대입을 뚫었지만, 딸을 낳으면 꼭 이화여대에 보내겠다는 우리 어머니의 성화와 딸을 무슨 대학공부 시키냐는 다른 어머니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나는 분명 무심한 어머니의 딸 대신에 대학에 합격했을 것이다.

 

나의 자유는 많은 사람들의 부자유를 담보로 하기가 십상이다. 내가 마시는 물과 먹는 쌀은 누군가의 부자유의 대가이다. 쉬고 싶어도 하기 싫어도 물과 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쏟은 노력과 그 일의 결과다. 그들이 내게 물과 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과 가족의 생계비를 벌고자 했을 뿐이더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를 대가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퍼 쓴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 대가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내 자유를 담보로 나와 가족의 생활비를 버는 노력이 그 생활비를 충족하지 못할 때, 나는 내 자유를 다 내어 주고도 먹고 입고 사람답게 살 자유 - 인격을 유지하면서 살 자유 - 를 건지지 못한다. 내 자유는 저당잡힌다,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이 자유시장경제 체제 내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자유를 증오한다. 증오해야만 자유를 누릴 심보를 줄이게 된다.

자유를 누리고픈 심보가 문제다. 나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는 상대를 보면, 나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상대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은커녕 말도 자유롭게 못할게 뭔가, 하지만.

 

내가 자유를 느낄 때 그 자유가 온전히 내 몫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닐까. 내가 덜 자유로울 때 나 아닌 타인들의 자유가 덜 침해받으리라는 것이 공식이니까. 지구상에 자유의 부피와 무게는 일정한데, 내가 덜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누리는 자유만 해도 73억분의 1, 그 만큼의 자유로 만족하려면 아예 자유를 외면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지구는 온통 인간들의 소유물만도 아니다. 셀 수 없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의 자유는 인간들의 자유의 희생이 되고 있다. 땅과 물 또한 인간들의 자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태고의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미식의 자유를 위해 커피재배 단지로 변하고, 사육동물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변해간다.

 

자유라는 가치를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증오한다, 자유를. 원래는 꿈꾸었던 아름다운 가치, 자유를.(15.3매)

------------------

2015.11.10. 『바람으로 별빛으로 또 가슴으로』, 이화동창문인회, 개미, 230-233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27. 23:01

더불어 살기

 

오랜만에 강의를 준비했다. 독문학 강의 몇 십 년을 늘 낯설어하며 결국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었는데. 그 뒤 외국인대학생들에게 교양과목 한국어강의를 몇 학기 했었지만 그건 말하자면 강의는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인문학 - 스무 개의 강의로 이루어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 인문학 강좌라 했다. 그 중 두 강좌를 맡게 되어 제목을 결정하기에 앞서 내가 어느 속성에 속하는가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무명이지만 소설가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강의를 할 수 있는 소설가로는 어림없다고 느껴졌다. 어쨌거나 독문학 분야에서라면 너스레를 떨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망설여졌다. 인문학이 쓸모없다고 홀대 받으니까 권장하는 이런 (억지)강의에서 - 물론 자발적인 수강생들의 숫자는 예상 보다 많아서 흐뭇하기까지 했다 - 전문적인 독문학 강의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인류의 지적 진화와 사회의 발전 단계’라는 주제로 1)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2) 인간에게서 물질에게로 라는 강의 제목을 잡았다. 마음으로는 두 번째 강의에 역점을 두기로 하면서, 물질이, 물질의 풍요가 어떻게 인간을 ‘삼켜버리게’ 되었는가를 역설하고 싶었다. 초봄의 일이었다, 강의 계획은.

 

그리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가 현실이 되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그 정도면 얼마나 좋았을까.

강의는 6월이었지만 말하면서 속으로는 울었다. 물질을, 돈을 숭배하는 우리의 가치관이, 교황님의 말씀처럼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가 몰고 온 참극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인문학 강의가, 무슨 소설이, 무슨 시가…….

 

우리는 먹고 사는 일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의를 끝냈다. 아프리카 최빈국 에티오피아는 커피를 수출한다. 하지만 커피 농장 노동자의 하루 평균임금이 1달러도 안 된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무리 높게 잡더라도 소비자 가격의 1%도 되지 않는다. 유엔식량기구의 발표대로라면 오늘날의 농업시스템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일일 성인 기준 2,200칼로리로 계산해서 120억 인구가 먹고살 수 있는 양이다. 현재 세계 인구는 71억5,500만 명이다. 그러니까 식량이 절반 가까이 남아도는데, 매일 기아로 5만7000명이 죽고 8억4,200만 명이 기아상태라고 한다. 기아로 죽는 사람은 암살당하는 것이고, 살인자는 동족을 잡아먹는 식인적인 ‘글로벌’ 경제 질서다.

 

이 경쟁에서 질 새라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한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심한 수준이다. 스위스의 1,636시간과 비교하면 엄청나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시민계급은 사유와 학문이나 하고 노동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개신교에서 노동은 ‘신의 소명’이 되었다. 인문주의 시대에는 인간은 주체요 자연은 객체로서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과학 기술이 전권을 쥐더니 인간노동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추출하는 (귀)신이 되었다. 우리는 컨베이어벨트의 리듬이 명령하는 대로 정확히 인간노동을 제공해야한다. 그러므로 인간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저열한 것이다.

 

노동은 소득과 비례하지도 않는다. 미국 CEO의 연봉이 일반 사원 평균 보다 331배라고 한다. 1983년에는 46배였었는데. 우리나라도 어느 그룹 회장은 301억 원, 다른 어느 그룹 회장도 140억 원을 급여로 받으셨다고 한다. 대기업 일반 직원들 평균 연봉의 500배, 200배에 해당한단다.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 이근호의 연봉이 178만8000원으로 이번 월드컵 출전 선수 700여 명 중 최하라고 했을 때 우리는 (군인이라서 당연한 일인데도) 다 놀랐다. 선수들 중 최고 연봉 742억 원은 4만 배, 우리나라 선수 최고 연봉 40억 원도 2천 배가 넘는다니 ‘살인적인’ 격차다. 군인들 상호간도 예외가 아니다. 창군 당시 이등병과 대장의 월급 차이는 30배였지만, 지금은 200배라고 한다.

 

노동시간은 삶을 위한 필요 정도로 규제되어 마땅하다. 생명과 안전 그리고 환경 관련 규제는 강화되어도 모자라다. 필립 제닝스 국제사무직노조연합 사무총장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규제완화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올드 버전이며,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친다. 규제완화가 아니라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대도 우리 코끝엔 ‘474목표’라는 홍당무가 걸려있다. 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말이다. 지금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라 해도 대부분의 4인 가족 가정이 연 1억을 전혀 체감하지 못한다. 4만 달러 소득은 어느 계층 소수에게만 집중될 것인지? 허무한 꿈이다.

 

우리는 경쟁이 성공의 열쇠라고 교육받았고 또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열매 많은 것이 곧 진리라는 생각,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값있는 무엇, 태환권이라는 생각,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라는 생각이 미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 초창기 교육자들의 정신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행복한가? 이럴 때엔 노자의 ‘절학무우’가 떠오른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그 구절을 순 한글로 번역하시면서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라고 쓰셨다.

 

독일어에서는 경쟁사회를 ‘팔꿈치사회’라는 단어로 말한다. 동료를 친구를 심지어 형제를 팔꿈치로 젖히고서야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 - 결국 승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승자의 팔꿈치에 밀려 떨어져나간 많은 패자들이 함께 누렸어야할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구상의 자원도 재화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봉건 피라미드 위에 ‘신 대신 돈이 자리한’ 시대에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빈곤 못지않게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 인구 10만 명 당 33명,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연속 8년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 - 우리는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까? (끝)

 

---------------

2014. 11.20. 「더불어 살기」, 『어디쯤일까』, 이화동창문인회, 개미, 128-131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5. 10. 11:57

 

자유를 증오한다

 

 

자유를 동경했다, 동경했었다.

1997년 겨울, 세 번째 독일에 갔던 그때만 해도 내게 자유는 아름다운 가치였다. 저 남쪽 어느 대학의 교수를 우연히 만난 것은 일종의 인문학 강좌에서였다. 쾰른에 거주하며 뷔페탈 대학에 오가느라고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코앞의 별다른 과제가 없다 보니 야간의 가벼운 강좌도 기웃거리다 유명한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갔던 참이었다. 연사였던 그 교수는 자신의 책과 논문들을 읽었다는 이역만리 한국의 시원찮은 독문과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이 기분 좋은 일에 속하겠지만, 이상한 질문을 했다. 마치 뭣을 구하러 가정과 애들이 있는 나이 든 여자가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실제로 전문자료를 구하게 위해서 독일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는 시대였으니까. 또 이미 교수자리에 있는데 - 독일에서는 교수 자리가 대단해서 그랬겠지만 - 뭣 때문에 애써 독문학의 본고장을 쓸쓸히 배회하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어차피 독일 사람들처럼 독일 정서에 함몰되어 독문학을 완벽하게 체득할 수도 없으면서? 문학이 뭐라고?

 

질문의 저 깊은 회의를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입술에 달고 있었다. 일상으로부터의, 강의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어쩌면 생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혹은 학교당국의 연구비로, 연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를 어찌 예찬하지 않았겠는가.

추상적인 자유는 아름다운 무엇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건배라도 할 일이 있으면 자유를 위하여, 라고 외칠 뻔도 했다. 이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시장경제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해온 우리들, 이 아니 자랑스러운가, 라고. 자유시장경제가 자유민주주의와 합심해서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우리들로부터 온갖 원래적 자유를 침탈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나는 막연히 자유를 예찬하고 있었다.

 

시장경제체제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하므로, 다른 말로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기업경제다. 기업경제가 자유를 보장받는다. 이 자유는 상대에게 창끝을 겨눈다. 창끝은 가진 자유가 적은 사람의, 창을 든 손은 가진 자유가 넘치는 사람의 몫이다. 기업의 순이익이 상승해도 노동자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최악의 경우, 기업이 투자는 미루면서 몇 년 하다가 타산이 안 맞다 하면서 손을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잘 준비된 시나리오만 있으면, 경영위기를 서류상으로 증명만 하면, 문 닫을 권리가 생긴다. 사람 내쫓는 것도 권리가 된다. 기업의 자유는 노동자들을 단박에 해고할 자유까지를 말한다. 자유가 보장된 세상이 그렇다.

 

이러고서 자유를 예찬해야 하다니. 나는 언젠가부터 자유를 증오한다.

원론적으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를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상충이 일어난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

 

고도성장의 시대에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 했다. 상당 수 자수성가를 꿈꾸던 사람들은 계층 상승을 이루어 냈다. 계층 상승을 이루다 - 이 말 자체가 사회에 상존하는 계층의 구분을 인정하는 씁쓸한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꿈을 준다. 자유 경쟁을 통해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꿈을. 경쟁할 자유? 그것도 자유인데 경쟁에서 낙오된 것은 낙오된 자의 무능이다, 라고들 한다. 자유 경쟁이란 어불성설이다. 같은 조건이 아닌 자유 경쟁은 자유 경쟁이 아니다.

느닷없는 생각. 내가 자유 경쟁으로 대입을 뚫었지만, 딸을 낳으면 꼭 이화여대에 보내겠다는 우리 어머니의 성화와 딸을 무슨 대학공부 시키냐는 다른 어머니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나는 분명 무심한 어머니의 딸 대신에 대학에 합격했을 것이다.

 

나의 자유는 많은 사람들의 부자유를 담보로 하기가 십상이다. 내가 마시는 물과 먹는 쌀은 누군가의 부자유의 대가이다. 쉬고 싶어도 하기 싫어도 물과 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쏟은 노력과 그 일의 결과다. 그들이 내게 물과 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과 가족의 생계비를 벌고자 했을 뿐이더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를 대가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퍼 쓴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 대가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내 자유를 담보로 나와 가족의 생활비를 버는 노력이 그 생활비를 충족하지 못할 때, 나는 내 자유를 다 내어 주고도 먹고 입고 사람답게 살 자유 - 인격을 유지하면서 살 자유 - 를 건지지 못한다. 내 자유는 저당잡힌다,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이 자유시장경제 체제 내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자유를 증오한다. 증오해야만 자유를 누릴 심보를 줄이게 된다.

자유를 누리고픈 심보가 문제다. 나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는 상대를 보면, 나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상대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은커녕 말도 자유롭게 못할게 뭔가, 하지만.

내가 자유를 느낄 때 그 자유가 온전히 내 몫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닐까. 내가 덜 자유로울 때 나 아닌 타인들의 자유가 덜 침해받으리라는 것이 공식이니까. 지구상에 자유의 부피와 무게는 일정한데, 내가 덜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누리는 자유만 해도 73억분의 1, 그 만큼의 자유로 만족하려면 아예 자유를 외면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지구는 온통 인간들의 소유물만도 아니다. 셀 수 없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의 자유는 인간들의 자유의 희생이 되고 있다. 땅과 물 또한 인간들의 자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태고의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미식의 자유를 위해 커피재배 단지로 변하고, 사육동물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변해간다.

 

자유라는 가치를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증오한다, 자유를. 원래는 꿈꾸었던 아름다운 가치, 자유를.

------------------------------

모교 이화문인회에 내는 수필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12. 19. 10:25

 

 

 

  만일 여러분이 기자가 된다면 누구를 인터뷰하고 싶나요? 인터뷰할 대상을 정한 후 질문 목록을 작성해보는 것이 오늘의 숙제입니다. 왜 그 사람을 대상으로 정했는지 그 이유도 함께 적어서 보내세요, 이메일로!

 

  사실 이메일 숙제는 편한 작업은 아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외국인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은 ‘말하기’는 물론 ‘쓰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 때문이다. 일일이 고쳐줘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다. 무심코 쓰던 문장이었다가도 학생들의 표현에서는 갑자기 자신이 흔들려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는다. 그 버릇은 간단한 글을 쓸 때도 여전해서 이젠 마음 놓고 글 한줄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도 그럴 것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라고 열심히 외웠던 ‘뿌리 깊은’ 기억과 아무 상관없이 이제와 표준어는 ‘나라말’이라니 말이다.

 

  그동안 표준어는 ‘만날’인데 입에서는 맨날 맨날이라고 움찔거리다가, 어느 날엔가는 그것 또한 표준어란다. 이런 조변석개를 두고 반갑다고 해야 할지, 요새 아이들 말로 ‘멘붕’이다. 국적이 불명한 멘탈붕괴의 약자로, 말 그대로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이란다. 어떤 상황이나 말에 의해 평정심을 잃고 ‘정신이 나갔다’, ‘자포자기’ 또는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식의 뜻이란다. 누리꾼들의 장난이다.

 

  - 어땠어? 쌔끈?

  - 말도 마. 폭탄이었어! 얼큰이었다고.

  소개팅에 나가서 섹시하고 멋있는 - ‘쌔끈’ - 상대를 만났냐는 질문에, 소개받은 사람이 외모나 성격 등이 마음에 안들 때 쓰는 ‘폭탄’이란 답을 보낸다. ‘얼굴이 큰 사람’이었다고!

 

  은어를 피하면 돌아오는 것은 ‘은따’ - 은근한 따돌림이다. ‘리하이’라는 예법을 몰라도 당근 은따. 대화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인사는 그냥 ‘하이’면 부족하다. ‘re-’를 붙여야 예의(?)란다.

 

  음절 줄이기는 귀여운 부류에 속한다. 게임은 ‘겜’, 서울은 ‘설’, 애인은 ‘앤’, 어서 오세요는 ‘어솨요’로 줄인다. ‘아뒤’를 멋진 프랑스식 인사말인줄 알고 대꾸했다가는 혼난다, 곧 ‘강추’다. 그것은 강력 추천일 때도 있으나 강력 추방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아뒤’는 누리꾼들에게는 아이디의 준말이다.

 

  제일 따라가기 어려운 말들은 모음 비틀기다. ‘다덜, 모냐, 알쥐, 안뇽, 안냥하세엽, 화났나여? 넵’은 ‘다들, 뭐냐, 알지, 안녕, 안녕하세요, 화났나요? 네’의 비틀기다. 비트는 데 시간이 더 걸려도 비튼다. 왜? 모른다.

 

  ‘절친’에게서 문자가 날아온다.

  - 열공중? 반반무, 반반무마니 시켜노코 ㄱㄷ!

  - ‘베프, 방가방가. 냉무 아니쥐?’

 

  베프는 물론 베스트 프렌드의 준말이다. 영어도 막 줄인다. 한국어가 재미가 쏠쏠해 보인다. 그러나 신세대 누리꾼들이 아니고서는 불행하다.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야? ‘후라이드 치킨 반 마리, 양념 치킨 반 마리, 무 많이’ 시켜놓고 기다릴게! - 이것을 알아듣는 ‘사오정’이 몇이나 있을까. 실세(?)에서 물러난 것은 기정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가상세계에서는 아예 출입금지다. 어디에 살꼬?

 

  본론을 잊고 있었다. 이메일을 열어 숙제를 점검해야 한다.

이들이 인터뷰하고 싶은 대상이 누구일까? 에임 하이! 그렇게 권장 받으며 자란 대학생들임이 드러난다. 중국 학생이 버락 오바마를, 안젤리나 졸리를 인터뷰하고 싶단다. 셀레브리티에겐 이미 국경은 없다.

 

  독특한 것은 중국의 성전환 무용가가 여러 학생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진성 - 중국식 발음이 그러하지만 조선족이니 김성이라 불러도 되겠다. 1968년 조선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가족의 뜻과는 달리 인민해방군에 합류하여 무용과 군사훈련을 받고 청소년 무용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곧 현대무용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이어서 로마에서는 무용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세계적 무용수가 26세에 고국으로 돌아가 28세가 되던 1996년에 ‘성확정’ 수술을 받았단다. 그러니까 본래 여성적이었던 그가 그녀가 되었다, 용감하게도. 세상은 그녀를 더욱 반겼고, 2004년의 <상해 탱고>는 유럽 순회공연에서 “우리의 현대무용이 어디로 발전할지 망설일 때 동방에서 온 무용예술가가 우리에게 방향을 잡아주었다.”라는 찬사를 들었을 정도. 이미 아들을 입양했던 그녀는 38세가 되던 2005년에 독일인 남성과 결혼하여 현재 3명의 입양아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산단다. 무용의 열정은 더해서, 지난해 2월에도 이탈리아의 로마공원극장에서 <제일 가까운 것과 제일 먼 것>을 공연하여 극찬을 받았다고.

 

  내가 왜 이리 긴 이력을 말하는가. 그냥 놀라워서다. 말로는 다 못할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이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일까. 말로서 표현한 것은 진실인가. 말은 진실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혹은.

 

  학생들이 뽑은 인터뷰 상대가 점점 놀랍다. 터키에서 온 여학생은 신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단다. “왜 세상은 힘들고, 왜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보다 행복하지 않고, 세계를(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주(시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물론 서툰 표현이다.

 

  갑자기 전혀 다른 유창한 말이 떠오른다.

  정말 결혼을 잘 한 것 같아요! - 30년 넘은 결혼 생활 후에 남편의 면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말. 다른 남편들이 모두들 감탄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나는 믿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줄 모른다, 라는 생각에 압도되며.

 

  발이 시린 여름밤이 깊어간다.

  발이 시리면 맘도, 맘이 시리면 말도 시려진다.

   ..................................................................

 

『그리움의 빛깔』, 이화동창문인회 2012, 142-145.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1. 12. 31. 16:47


고아가 되었다.
올 봄.
나의 어머니는 당신 나이 이른 다섯에 고아가 되시더니만, 우리더러는 더 일찍 고아가 되라시며 떠나셨다. 막둥이는 1963년생, 겨우 마흔 아홉이다.

피를 나누어주거나 물려준 후손 27명, 법으로 후손이 된 14명을 더하면 41명의 후손을 남기셨다. 그 중에서 참석자는 29명. 290명이 훨씬 넘었을 조문객을 생각하면 불참 수가 부끄럽다. 어머니 앞선 불효녀는 어쩔 수 없다. 머나먼 외국에 아기들이랑 사는 경우도 어쩌랴. 그래도 불참이 많다. 누구도 예상 못할, 설마 하던 불참도 있었다.

*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세월은 저 뒤편에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슬하를 떠난 셈이다. 대학시절은 정신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서울 살이. 젊디젊은 ‘엄마’는 서울나들이를 즐기셨다. 우리들 -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 함께 이화캠퍼스를 누볐다. ‘누볐다’는 물론 엄마의 표현이다. 실제로 이대 앞과 명동을 누빈 것은 엄마였다.

어머니는 이대 앞과 명동만이 아니라, 설악산과 제주도를, 전국을, 나아가서 가히 세계를 누비셨다. 어머니가 빠진 저녁밥상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던 세월. 불평도 별로 없는 집안에서 나 혼자 불평분자였다.

왜 엄마는 빨리 안 들어오셔요?
우리 학교에 가면 빨리 나갔다가, 우리 돌아오기 전에 미리 들어와 있지 않고!

외할머니가 할머니였다. 외할머니가 엄마였다. 엄마가 밥을 지어주거나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등록금을 함께 걱정해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집에는 다른 여러 엄마가 있었다. 물론 엄마도 엄마 노릇을 하긴 했다. 소질이 없어도 피아노다 미술공부다 시켜서 소질을 ‘계발’해내는 극성 엄마였고, 또 엄마의 유일한 자랑인 ‘밤 채’ 솜씨 덕분에 늘 예쁜 김장김치를 먹었다. 그래도 엄마의 부재를 못 참았다. 엄마를 엄마답지 않다고 볶아댔다. 엄마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도 엄마를 닮지 않고 불평만 해대니까, 집안에선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고까지 놀렸다. 연속극을 보면 더러 첫아이는 누가 낳아놓고 죽던가 도망가지 않던가. 대체로 나는 비판적인, 회의적인 인간이었다. 속으로 진단하기를, 일찍이 엄마에게 불만이 많아서 나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고까지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참 어려운 것이었다. 참 어려운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 의사의 손에 거꾸로 매달려 자두 빛보다 더 붉어진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었을 때, 나는 기절을 했다. 산고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무엇인가 꼼지락거리는 포대기가 옆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생명체가 밖으로 나온 것이란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다. 입은 뭔가를 향해 움질거린다. 내 아기, 내 젖을 탐하고 나와의 관계를 탐하는 아기. 어렵게 어렵게 겁을 잔뜩 먹고 만져본 손가락. 작은 손가락들이 무엇이라고 종알거린다. 이것은 대체 어떤 암호인가.

손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 - 그것을 남성 화가가 어떻게 알았을까? 짐작이나 했을까? 새삼스레 위대했다. 아담의 손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그림의 발상이 이 진자리가 아니고 어디였겠는가?

그렇게 나는 기절과 함께 새로이 태어났다. 그 어려운 엄마가 되었다. 불평을 하는 자식이 아니라 불평을 받는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들은 어떤 불평을 할까, 별안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나는 계속 괜찮은 딸이었고, 엄마는 나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엄마는 부족했다. 물론 불평의 말이 단번에 줄었다. 불평의 마음은 한 치 변함없이 여전했다. 반면 나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엄마이리라고 착각했고, 애들은 정말 괜찮았다. 제 엄마에게 불평을 해대지 않았다. 적어도 대놓고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유전자가 더 좋아져서 그랬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나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죽을힘을 다하고 조금 얻어도 행복해 했다. 나는 내가 인내심이 많아진 줄 알았다.

*

어머니가 떠나셨다. 조문객들이 무슨 소용. 41명의 후손 중에서 29명만 참석한 장례식장. 어쩌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불참 속에 들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면 다 똑같이 아프다고 하셨다. 당연하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네 언니는 참 쌀쌀해야. 동생들이 그 말을 전해주어도 당연하다 느꼈다. 나는 내 불평소리가 줄었더라도 어머니가 내가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랐다. 사실이니까. 인생관이 다른 것을 어쩌라고.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는 단 한 톨의 인내심도 내주지 않았다. 그 긴 세월 동안 큰 딸년의 부당한 불평을 감내하시던 어머니. 겉으로만 화려했던 어머니가 떠나셨다.

갑자기, 너무나 늦게 깨닫는다, 얼마나 서운했을꼬. 인생관이 다른 딸을 두고 평생 얼마나 참담했을꼬. 단 한 톨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나는 또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까. 아름다운 관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참아야 할까. 내 멋대로,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엄마’가 이제는 없다. 49재를 지났으니 어딘가로 정말 떠나고 없다. 머리에 꼽았던 하얀 리본이 타들어가는 초라한 불꽃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단 하나 지지대가 무너져버린 지금.
처음으로 처연히 외로운 순간을 맞는다.

.............................................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첫 클릭클릭』, 이대동창문인회, 2011, 81-84쪽.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 알기도 전에 떠난 선배소설가  (0) 2012.06.13
미리 쓰는 묘비명  (0) 2012.02.28
중독 - 행복 에세이  (0) 2011.03.01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0) 2010.12.31
도마뱀 - <문학공간>  (0) 2010.12.01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0. 12. 31. 16:46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남자는 첫사랑이지만 여자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 그렇게 남자들이 말해놓고서 여자들의 망각의 묘기를 비웃곤 합니다. 망각은 양심을 접는 것과 같은 의미일 때가 많아서, 여자들은 양심이 덜한 족속으로 폄하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바닷물 한 움큼만큼,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라 해도 파도가 밀려오다 빠져 나가듯이 어느 때는 코앞에 다가와 눈을 떠도 감아도 그 자리에 있다가는, 또 언젠가는 슬며시 핏속으로 숨어드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내가 잊을 수 없는 것들은 당신에겐 아무렇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도 걸러내는 기억들은 제 나름일 테니 말입니다. 고운 차 거르는 체 마냥 촘촘하며 일정한 그물망이라 해도 우리의 기억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누가 들으면 웃을까. 늘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는 것은 이를테면 아무렇지도 않은 산자락 성긴 돌 틈으로 삐져나온 연초록 풀들 같은 하찮은 것들입니다. 또는 여름이 시작되고 2층 창밖으로 짙푸른 나뭇잎들이 무성해지는 이맘때면, 바로 이맘때 만났던 새 새끼들이 되살아납니다. 정확하게 큰 아이가 약혼식을 위해 잠시 집에 머물었다가 간 다음날이었습니다. 무심코 아이들 방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발견한 것인데, 날렵한 동작으로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이상한 일이었죠. 어느 결에 둥지를 튼 놈들은 놀랍게도 알을 낳았던 것입니다. 아파트 나뭇가지에. 스무날? 한 달 정도? 유난히 맑은 여름날을 뒤 베란다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그놈들 사는 양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새보다는 큰 것이 그래도 참새 모양이라 참새목 되새과 혹은 멧새과 쯤에 드는 새이리라 추측했답니다. 그렇게 흔한 새이지만 아무도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뒤적여보았던 백과사전에서 일러준 대로라면 3~5개의 알을 낳는다더니만 정말 딱 4개의 알을 낳았더이다. 그 다음은 누군가 정성들여 관찰해서 TV에 올려주는 그런 과정들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신기한 것은 그것을 덜 화려한 색깔로지만 프레임이 없는 실 공간으로 바라다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침조석(!)으로 뒤 베란다 나가기를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는 재미라니, 방안 퉁소 서생으로 살던 터에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사람들은 앉은 자리 뭉개지도록 눌러 앉아있기만 하던 사람이 왼 종일 촐랑대던 일로 즐거워했고, 더러는 놀렸답니다. 하여 그 여름은 더위라거나 짜증 같은 아름답지 않은 단어는 우리 집에서 사라졌더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늘 아름다울 수는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정말 상쾌하리만치 서늘한 날 아침 밥상. 밥상이라야 가볍게 풀 썰어놓고 빵 뜯어먹고 그랬을까요? 아님 그날따라 젓가락을 들었던 감촉이 살아납니다. 밖에서 자지러질 듯 하는 새 소리 사이로 알 수 없는 요란한 소리들이 날아와서 우리 모두는 기겁을 했습니다. 후다닥 튀어 일어나서 뒤 베란다로 내달은 나는 정말 기절할 것 같은 광경에 시간이 정지했다고 느꼈습니다. 저쪽 새둥지에서 두 나무 째를 건너온 바로 코앞이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그 네 마리 새끼들이 첫 비행을 하면서 그것이 곧 둥지를 떠나는 날인 줄 그때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누가 예전에 야생의 새를 키워보기나 했어야 말이지요. 그런데 한 마리씩 한 가지씩 날아오르려는 새끼 새들에게 저승사자가 나타난 것 때문에 어미아비 새들이 단말마의 울음을 울었던 것입니다. 주차된 차량들 사이를, 더러는 벌써 움직이는 차바퀴도 겁내지 않고 기식하던 주인 없는 고양이가 곧 영양식을 발견한 것이지요. 새끼들의 추락을 기다리는, 아니 소리로서 겁을 주어 추락을 유도하려는 고양이와 어미아비 새의 대결장이었습니다.

아아 안 된다, 아가 힘 내거라, 어서.

이 몹쓸 도둑고양이, 악마! 사라지지 않음 내가 쪼아 줄 테다.

네롱~ 하면서 달콤한 먹이를 향해 불을 뿜는 고양이도 질 기세는 아니었지요. 글로 쓰자니 여러 줄이지만 사건은 불과 몇 초였을까요? 어쩌자고 나는 젓가락을 든 채로 아파트 계단을 내달렸습니다. 아무 신이나 끌고 화단에 내려서선 고양이를 내쫒았지요. 평소라면 기분이나 나빠할 뿐 눈도 주지 않으려했던 그 고양이놈을. 상황이 너무도 아슬아슬했지만, 얕은 가지로 출렁이던 새끼와 뛰어 오르려던 고양이의 서커스가 원안대로 끝나고 상황이 종료되자, 난 그만 털썩 주저 않았지요. 흙에 앉아서 올려다보니까, 마지막 한 놈이 맨 윗가지를 정말로 날아오르더니 저만치 떨어진 큰 나뭇가지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없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젓가락 한 짝만 들고 계단을 기어올라 들어온 나를 식구들은 더욱 놀려댔습니다. 내가 뛰어나간 뒤로는 내 소리까지 가세해서 정말 한판 굿이었다는군요. 새 소리 고양이 소리야 비록 생사의 투쟁이었다고 하지만 자연의 소리였겠죠. 그러면 내 목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소프라노로 분류되는 목소리로 정말 무진 악을 다 썼더랍니다. 교양? 평소에 목소리 크다는 이야길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다 새침이었던 게지요. 급하니까 정신이 없더랍니다. 알 수 없는 나라 말로 새 새끼들에게 주문을 거는가, 했더랍니다.

그런데 이 새란 놈들은 진정 그들이 태어난 자리를 기억할까요? 그해 여름 어느 날엔 뜬금없이 앞 베란다의 가녀린 창살에 한 놈이 턱 앉아 있었다는 일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그 놈이 그놈일 거라고 수선을 떨며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저만치 담장 쪽에 앉은 놈들도 꼭 우리 집 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기색이었단 말입니다. 더구나 이듬해에도 때로는 해를 걸러서도 심심치 않게 그 예쁘지도 않은 소리로 찌이찌이 울어대는 새들이 우리 집 주변을 날아와 앉곤 한답니다. 창살 안쪽의 꽃잎을 한참 동안이나 쪼고 있을 때도 있답니다. 그러니 그놈들을 잊을 새가 있겠냐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을 새록새록 불러내주지 않더라도 물론 잊지 못할 일들이 늘 있지요. “언어란 꿀이 빠져버린 벌집처럼 거죽뿐인 줄을 알면서도 그 안에 어느 한 순간의 제 마음이라도 담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렵니다.” (오자 포함, 어느 작품의 인용입니다) 같은 쪽지 글을, 아니면 지구 속 마그마로 녹아들고 싶다는 마성적인 언어를. 아니,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요 진실은 언어 이상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던 순간들을. 순간들은 부서지기도 녹기도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순간들을 잠시 버릴 뿐입니다.

......................................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사랑에 세든 사람』, 이대동창문인회, 2010, 200-203쪽.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0) 2011.12.31
중독 - 행복 에세이  (0) 2011.03.01
도마뱀 - <문학공간>  (0) 2010.12.01
무거운 책들  (0) 2010.04.01
평행선  (0) 2009.12.12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9. 12. 12. 02:51

 

평행선

                                                    『사랑은 아무나 한다』2009 (이화에세이)

 

 

사랑을 주제로 받은 순간 평행선이 떠올랐다. 평행선을 화두로 삼을 량이면 그건 이미 시시한 시작이리라. 그렇다. 하지만 “종교적인 긍휼”이라거나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같은 보편적 사랑이 아닌, “남녀가 서로 정을 들여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려는데 대뜸 평행선이 떠오른 것을 어쩌랴. 심장도 머리도 둘인 두 개체 간의 사랑이라면 서로 다른 선의 만남을 의미할 터인데, 그것이 잠시라도 우연이라 해도 평행선이 되어야 서로를 건네다 볼 수 있고 사랑 등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나 말이다.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선은 질풍노도처럼 만났다하더라도 곧 비껴가버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물론 이러한 염세적인 견해는 한 개체가 그리는 선이 곡선이라기보다는 직선 쪽에 가깝다고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만일 길가다 동무를 만나서 한 눈 팔 량으로 멈칫거리거나 굽어져 어울릴 수 있다면 사랑의 감정도 보듬고 어우러져 다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으련만, 어쩐지 그것은 희망이나 꿈같은 말로 들린다. 태어나면서 손발을 버둥대던 우리는 늘 어딘가로 버둥대면서 나아가고 그래서 그 길이 우리의 인생이 된다. 기껏 잘해야 비슷한 각도로 움직이고 있는 다른 길손을 동무 삼을 수 있으면 그게 낙일 것이다. 어쩌다 불꽃이 튀어 한데 어우러진 두 길이 있어, 다시 서로에게서 영 멀어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주변에서 서성대며 길을 간다면 그것 역시 축복 아닐까. 함께 세상에 새로운 길손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그 또한 잊히지 않아 더욱 버벅대고 주저앉아 그렇게 살아가는 삶. 사랑은 제 본디를 깨닫게 하는 일에도, 길을 계속 가게 하는 일에도 무르다. 사랑은 사람을 물러터지게 하고도 그것에 만족하게 한다. 사랑은 허술하고 바보스럽다. “현명한 이가 말하길, 바보들만 사랑에 빠지는 법이라 했지”라던 노랫말이 진리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무슨 그런 평생을 갈 중증의 바이러스에 옮는단 말인가.

이 병은 『폭풍의 언덕』 같은 중독된 사랑이나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치명적 사랑으로 소설 속에나 파묻혀 영생한다. 이 병은 실 인생에서는 애절하게 끝날 때가 많다. 중세 철학자 아벨라르와 제자 엘루아즈처럼 사랑 속에 결혼하여 아들을 두고도 생이별하는 연인들. 문중의 간섭으로 각각 수도생활에 들어갔으니, 그들의 “사랑의 서간”이 수백 년을 넘어서까지 세상의 연인들을 감동시키면 무엇 하리. 더러는 공권력도 사랑을 죽이는 변수다. 2차 대전 후, 보통 사람들처럼 십대에 만나서 몇 년 후 결혼하고 아들 둘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만 느닷없이 원자무기 비밀을 소련에 건넨 스파이혐의로 체포되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한 로젠버그부부. 폭력은 사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흑인이면서 명 쿼터백으로 이제 은퇴한, 네 아들의 아버지이자 멀쩡한 남편. 자선활동에서까지 돋보인 남부러울 것 없던 그가 별장에서 잠든 사이 갓 스물을 넘긴 여친에게서 네발의 총격을 받는다. 순수했던 첫 사랑을 접고 명사와의 인생을 꿈꾸었던 여자의 종말, 참혹한 비극. 허황한 것이 사랑일까. 사랑은 치기다. 사랑은 없다.

아니, 동서고금 세기적 스캔들을 뿌려댄 이들의 숨 막히는 열정들을 생각하면 사랑은 그 무엇인 것 같기도 하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끔은 가까이 이웃에서도 힘든 길을 선택한 대단한(?) 사랑도 없진 않다. 기어코 첫 연인을 기다렸다가 그녀가 아이 둘 데리고 고향 내려오는 기차간에서 훔쳐 달아난 집안 오라버니가 있었다. 그 아이들 둘하고 나중에 낳은 아이들 둘, 해서 네 자녀를 흠 없이 길러냈고, 아내의 조금 이른 임종까지 잘 지켜낸 오라버니. 더 기막힌 쪽도 있었다.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대처에 나와서 대학에 다니던 남자가 처녀 유치원선생님에게 반했다. 유치원선생님은 유부남의 구애에 발끈하여 보란 듯이 서울로 시집을 가더니만, 딸 하나를 낳았다는 소문과 더불어 곧 다시 낙향했다. 결국 각각 아들과 딸을 버리고서야 두 사람이 결합하더니 네 자식을 더 낳아서 남달리 유별나게 키워냈다. 70대, 80대 할아버지들의 청춘시절 이야기다 참. 그런 형질은 드물게 유전되는지, 속 좁은 내겐 불가사의다.

베란다 쇠창살을 저 너머로 바라보며 일요일의 늦은 아침을 먹는다. 조밀한 영국식 화단엔 이름 모를 푸르름이 가득하다. 창살 밖으로 선반에 내어놓은 몇 화분들에도 초록이 어우러져 있다. 그 밖으로는 짙푸른 나뭇가지들이 무겁게 흔들린다. 이십년도 넘은 낡은 닭장 아파트 2층에 앉아서 쇠창살 사이로 건너다보는 하늘도 하늘이다. 그런데 쇠창살 너머로 여름을 맞은 건 처음이다. 작년 추석에 다니러온 아이들의 걱정에 그제서 창살을 두른 것이다. 여름을 유난히 타느라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두고서야 잠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는 아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한숨을 쉰다니까요, 아버님 어머님 걱정에!”라던 며늘애 말이 주효했다. 원래 학교가 있었던 터에 지은 아파트라서 고목들이 즐비하고, 창살은커녕 창밖으로 너울거리는 푸른 나뭇잎은 성냥갑 아파트인 것을 못 느끼게 했다. 바로 창밖에 새들까지 집을 지어 새끼를 낳고 길러가지고 함께 날아간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꼭 네 마리를 낳아 데리고 날아갔는데,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항상 같은 울음소리의 그 새들이 날아든다. 베란다 바깥으로 내어단 화분 턱에 내어놓은 춘백 꽃잎을 갉아먹으러 와 앉는 놈들도 꼭 그런 꼬마들이다. 모양새도 목소리도 안 예쁜 놈들이 왜 예쁘기만 할까. 새들이고 사람이고 꼭 예쁠 필요가 없다 싶다. 어디 예쁜 사람들만 사랑을 하고 그러는가. 창살 속에 들어앉아 바라보는 새도 화초도 하늘도 뭐 다 괜찮다. 섬세한 감각들이 나이 따라 누그러진 탓도 있겠지만, 애들 사랑에 못 이겨 해 붙인 것이라서 창살도 답답치 않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아마도 창살에 갇힌 채로 적응하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기 시작하면 그렇게 창살 속에서도 갇힘을 모른다. 신기하게도 새 생명들이 태어나면 아예 바깥세상은 바라다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현혹되어 산다. 그때부턴 그리 많이 흔들리지 않고 평행선을 이루어, 왼쪽에서 오른 쪽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따라가며 산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우리를 걱정할 만큼 더 커버렸는데도, 우린 그저 그들을 뒤쫓느라 ‘거의 반듯이’ 평행선을 그리며 산다. 아주 엇갈리지 않으려면 조심히 평행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너무 서로에게 끌려 들어가면, 그 각도로 조금 더 내달으면, 그만 상대를 뚫고 지나가버리게 되니까. 그래서 조금 비겁한 채로 평행선을 따라 산다. 혹시 우리들의 가슴 한 편에 묻힌 작은 파편 같은 추억 하나도 진정 어떤 사랑의 증거가 되기엔 미미하다. 그건 그저 잠시 호수에 비친 구름의 그림자이거나 아예 호수 저 혼자의 일렁임이거나.

복숭아 껍질을 벗긴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따 들인 것들이라 당도도 높고 무엇보다 벗겨 드러난 속살에서 물기가 둑 둑 듣는다. 두 개를 벗길 양이면 늘 어느 하나가 더 먹음직스럽다. 너무도 당연히 더 맛있어 보이는 쪽을 당신의 접시에 올려놓으면서 느낀다, 누군가에게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내밀면 그것이 사랑일 것. 나란한 두 베게 깃을 새로 갈아놓으면서 풀기 더 고슬고슬한 쪽을 그리로 밀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 이 시시한 진부한 존중이 어우러져 나란히 선.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마뱀 - <문학공간>  (0) 2010.12.01
무거운 책들  (0) 2010.04.01
그림자 도시 - 개성 방문기  (0) 2009.03.28
눈이 있었던 것  (0) 2008.11.20
구멍 난 옷  (0) 2007.12.01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8. 11. 20. 23:30

 

이 있었던 것

                                                     맛, 멋, 그리고 향기』2008 (이화에세이)

 

 

영화 《파니 핑크》의 주인공 파니는 “눈이 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눈 말이다. 눈이 있었던 것은 살아있었던 것이고, 그러니까 파니는 살아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 살아 있었던 것(과거완료)은 지금은 죽은 것(현재완료)을 의미한다. 파니는 살아있었다가 죽은 것을 먹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을 먹지 않는다.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파니 뿐이 아니다. 가녀린 체구로 강인한 여러 일들을 해내는 동료가 있는데, 상대적으로 젊긴 하지만 그 무궁한 에너지가 순 식물성에서 나온다.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는 엄마노릇을 잘 해내면서도, 고기를 멀리 하기 몇 년, 꾀나 공격적이었을 더 젊은 날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 지금의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마르고 부드럽고. 얼핏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지만, 바람처럼 가볍게 걷고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할 일은 누구보다도 야무지다. 어디에서 힘이 나올까. 아니 잡식성 동료들의 저녁자리에 끼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디에서 인내가 나올까.


*


2008년, 운하와 쇠고기로 들끓는 여름을 보낸다. 운하반대모임에 서명을 하고보니 그 동료가 적극적이었다. 원래 환경론자인 것은 알았다. “인간은 자연을 너무나 학대하고 있어요. 《불편한 진실》 보셨나요? 지구온난화 때문에 근년 들어 빙하며 킬리만자로나 알프스 만년설이 엄청 녹아내리죠. 온난화란 게 말뿐 아니라 그 진행속도가 심각해요. 인간의 소비행태가 CO₂를 증가시켜 북극 빙하를 1년에 1% 정도 녹여내는데, 반세기 안에 플로리다, 상하이 등 해변도시들 40% 이상이 물에 잠기고, 네덜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우린 사실 날마다 샤워도 해선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우린 이 지구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그런 판에 우리나라에선 잘 있는 물길 놔두고 인공운하라니. 그렇게 확실히 발언하는 그녀는 순 식물성 체력만으로도 어렵고 무거운 일들에 거뜬하다. 운하문제와 쇠고기수입문제의 경중은 나름대로 판단한 것 같았다. 자신이 쇠고기와 관련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총론과 각론의 관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운하문제에 지론을 폈다. 우리의 4대강을 인위적으로 손질한다는 한반도 운하계획은 잘 될 이유보다도 안 될 이유가 너무나 많다고. 청계천 공사도 말이 “복원”이었지 자연하천이 아닌 인위적 이벤트 하천으로 개조됨으로써 원래의 목적이던 청계천 복원이 영원히 무산된 것 아니냐고. 지금의 청계천이 잠시 위락시설이 될지는 모르지만 낙동강이나 섬진강이 갖는 자연에 비교가 되느냐고. 혹여 대운하의 경제적 효율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자락이 살아있는 한반도를 지켜온 우리 삶과의 의미관계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수 억 년의 지형형성 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4대강과 샛강들이 운하로 인해서 수리체계가 단절된다면 강유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형교란과 배수기능의 교란 그리고 생태교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고.


나는 사실 운하반대 서명을 하면서도 이론적 배경은 없었다. 놀이시설처럼 도구로 추락한 청계천과, 그것도 모범이라고 본을 따서 우리 고향에서도 유치찬란한 하천 외부정비에 혈세를 퍼붓는 행정에 놀라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 가녀린 동료의 실팍한 이론과 행동을 보고서야 날이 선 지식인의 비판의식에 감탄하면서, 그녀의 특별한 음식습관에 관심이 갔다. 주지육림에 빠져서는 명철한 사고를 정립하지 못하듯이, 이렇듯 명료한 사고방식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녀가 섭취하는 음식물과 생활습관이 큰 몫을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차 채식의 장점을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자칫 가난한 농민들이 밥과 김치를 주식으로 채식에 의존하고 부자양반들은 산해진미를 향유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류의 음식사를 보자면 채식은 유목문화에 이어 농경문화가 발달된 후에야 가능했던, 다시 말해서 한층 진화된 섭생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진화의 초기단계부터 정글의 법칙 속에서 육식을 했고, 구석기시대에는 채집수렵에 의존해야 했으니까, 채식 습관은 인류사에서 진화로서 나타난 것이다.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인간이 먹는다! 피가 살아 끓고 있는 생명체를 도살하는 잔혹행위, 그러한 잔혹행위를 일상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단말마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동물은 잔혹성을 심어놓는다. 잔혹성은 동물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동종인 인간 사이에 작용하여 작게는 드잡이와 싸움질, 크게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게 한다. 만물이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사고 또한 친자연적이 아닌 친인간적 사고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고의 틀에서 바라볼 때 친인간적이라는 것은 배타적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 주는 만큼만 자연에서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서 얻은 결론이다. 완전한 채식주의 - 그것이 비밀이었다. 그녀에게서 채식주의는 완벽한 수위다. 유제품마저 섭취대상에서 제외하는 것. 물론 그것은 심각한 불편을 야기한다. 하얀 밥을 지어놓고 그녀와 한 끼 밥을 먹으려던 계획도 무산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숟가락에 얹어 먹을 김치랑, 매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여린 고추무름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김치에는 젓갈류가 무름에는 멸치 몇 마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샐러드에 드레싱을 해놓았다가는 망한다. 계란 일부가 드레싱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마르고 왜소해지면서 정신이 강해지는 경우를 보통은 고행에서 본다. 그래서 속으로 그 작은 동료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내부에서 자연스러웠던 것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유년시절 샘가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죽은 “새”의 털을 뽑고 있던 것을 보았던 기억과, 별식으로 상에 오른 영계백숙을 그 기억 때문에 토해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실 유년시절의 고민은 무엇인가 뭉클한 그런 것을 씹어야하는 일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었던가.


어린이는 보다 더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그렇게 생각된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양을 고려한다고 해서 제 살과 비슷한 동물성 음식을 일부러 길들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원래 채식성 엄마를 두고도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잘한 일일까? 내 아이를 기를 즈음 나는 발언권이 별로 없는 엄마였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세뇌된 자신 없는 엄마였다. 다시 아이를 갖는다면 내가 어려웠던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호박 하나만 해도, 애호박과 농익은 호박 그리고 말린 호박…… 자연 속에 널려 있는 열매들과 푸성귀들에서 자연친화적 섭생의 보고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행선  (0) 2009.12.12
그림자 도시 - 개성 방문기  (0) 2009.03.28
구멍 난 옷  (0) 2007.12.01
내적 자유  (0) 2006.12.03
움직이는 긴 그림자 - <문학공간>  (0) 2006.09.20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7. 12. 1. 01:55

 

멍난 옷

                                            내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2007 (이화에세이)

 

 

구멍이, 저기 이 옷에 구멍이 나버려서……


저물녘에 세탁소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초인종을 누르고서 어물거린다. 예고 없이 오가지 않는 것이 수년 간 이 세탁소와의 자연스런 일상인 터라 의아했다. 손에는 종이 가방을 꼬옥 움켜쥐고 있다. 부뚜막에는 국이 얹어져 있어서 나는 조금 성가셨다. 더듬거리는 말로는 옷에 아예 구멍이 나서 못쓰게 되었다는 말이고, 그 때서야 꺼낸 옷은 내 하얀 블라우스다.


그제야 감이 잡히면서 난감해졌다.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정도는 세탁소에 보내지 않은 내가 하필 처음 보는 천이라서 드라이를 맡겼던 옷이다. 면섬유인줄 알고 샀는데, 그것도 상황 때문에 어쩌다 ‘비싼’ 옷 집에서 구입한 것인데, 잘 보니 순면이 아니라 뭔가가 코팅되어 재킷 대용으로도 될까 싶은, 아무튼 얼른 보아도 복잡한 천이라서 자신이 없어 세탁소에 보낸 것이다.


여자는 계속 중얼거렸다. 다른 집 와이셔츠들 다리고 나서 같은 것인 줄 알고 다리렸는데, 다리미 대자마자 눌어가지고 그만. 보니까 새 옷 같아서…… 대신 사보려고…… 그래서 텍에 붙은 전화번호를 돌렸는데. 그런데 폐업이라니까……


처음 빨아야 했던 블라우스가 어찌하여 폐업이 된 상표인가의 내력은 좀 그렇다. 단벌을 샀기 때문에 적당히 맞춰 입기도 그랬고, 또 일터에 나다니는 경우엔 모양만 갖춘 단출한 옷들을 입기 때문에 구입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선뜻 입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몇 년 사이 폐업이라니 의아했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올 봄에는 아예 누렇게 헌 옷이 되는가 싶어서 몇 번 살짝 입은 것이다.


눋다 못해 구멍이 뻥 뚫려버린 옷을 받아들고 보니 짜증이 난다. 그러기에 과하게 비싼 옷은 내 것이 아니로구나! 부엌 쪽에서는 국물 냄새가 진동한다. 끓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럼 불이라도 줄여야 하는데……. 가만, 교양 있게 굴자. 이까짓 블라우스 하나가 뭔가. 나에게나 비싼 옷이지, 남편의 와이셔츠들을 줄줄이 세탁소에 보내는 여자들의 옷들에 견주면 이게 대술까. 기껏 블라우스는 블라우스지. 진정하자, 진정 해. 2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에서 이깟 일로 속보이면 되나…….


제가 지금 얼떨떨하네요. 일단 주세요, 주고 가세요. 불에 뭘 얹어 놓았고…… 좀 생각해볼게요.


다른 것으로 사시기라도 하라고……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요. 뭘 어쩌겠어요. 일단 주고 가시라니까요.


빼앗다시피 옷을 들여오고 여자를 내몰았지만 마음은 양편으로 무겁다.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비싼 블라우스를 망친 내가 밉고, 저자세로 굽실거리는 여자가 밉다. 국은 벌써 끓어 넘치고 있다. 넘친다, 넘친다…… 그때 생각이 났다. 내 그릇에 넘치는 복은 됫박을 넘치면 굴러버리는 콩되모양 넘치게 마련이다. 이건 내 옷이 아니다. 저 여자는 하필 나 때문에 저자세가 되었다. 평생 해온 세탁 보조가 느닷없이 엉뚱한 실수를 한 건 보조 탓이 아니라 옷 주인 탓이다. 그러다 짜증이 일면 또 다른 이유를 댄다. 그런 것 때문에 옹졸함을 보인다면 자신이 짜잔해져서 안 된다. 애써 좋은 마음으로 생각하려니 그런대로 별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세탁소여자의 처지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명에서 궂은 역할을 내가 아니라 그 여자가 맡아 간 것이다.


*


엄마, 제가 꼭 S.대학을 들어가게 되면 우리나라 누군가 한 사람은 S.대학에 못 가게 되는 거네요! 큰 아이가 중 3 적에 했던 말이다. ― 아니 뭐, 숫자로 따지면 그렇기는 하다만, 그럼 넌 그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S.대학을 갈 수 있어도 포기해야 된다 그 말? ― 아니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 너 그렇게 이타적인 건 좋다만, 매사를 그렇게 살자면 무진장 힘이 들게다. ― 엄마, 그게요, 이 세상에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을 드물걸요. 이타적 행동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이기적인 셈이지요 뭐.


기술시간의 숙제라나? 나무판자로 작은 책꽂이를 완성해 가는 숙제를 하느라 페이퍼 질에 팔려있던 아이는 대충 해가라는 이 어미의 말에 웃음기를 띠고 정색했다. 누가 알아요, 또 목수를 해먹고 살아야 될지도 모르니 미리 잘 배워둬야지요! 그것은 아이의 상투어였다. 누가 알아요, 또 양복장이를 해야 될지도 모르니 가위질도 잘 해야지요! 누가 알아요, 또……


아이들은 대강 물렁하게 자랐다. 남을 때리고 들어오면 나쁜 사람이고, 남에게 얻어맞고 오면 바보다! 나쁜 사람과 바보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형제간이라고 다툴 수도 없었겠다. 그래 겉보기엔 별 탈 없이 자랐다. 속으론 그렇게 한 말을 지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그런 걸 꼭 마음에 담아두어서라기 보다는 천성이 좀 무를 것이다. 해서 특별히 똑똑하게 자라진 못했지만, 이기적, 투쟁적으로 자라진 않았다. 어미인 내가 늙어간다고 자제심을 잃고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선 안 된다. 애들 보기 민망할 일이다.


*


세탁소 아주머니의 당황함에 빨리 면죄부를 주지 못하고 덩달아 곤혹스러워했던 몇 분간이 부끄러워진다. 서둘러 싱크대 아래 여닫이문을 열어본다. 거기 과일가게 전화 옆에 세탁소 전화 스티커가 붙어있다. 저 201홉니다. 지금 막……. ― 아 예……. 저쪽은 말을 잇지 못한다. 뭔가 호령을 기다리는 듯 숨마저 죽인다. 저, 그 옷 일 잊어버리시라고요. 생각 말고 편안히 주무세요. 그냥 걱정 마시라고요. ― 그래도 …….


아예 말을 잇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되풀이해서 걱정 말라고 말하고 나니까 내 맘이 비로소 편했다. 그런 일은 십여 분을 애탈 일이 아니다. 집에 처음 왔을 때 선뜻 걱정 말라 말하지 못한 내가 옹졸했다. 배웠다는 여자가 치졸했다. 다음 세상에 세탁소여자로 태어나서 다림질을 잘 못해서 누군가의 문간에서 고개를 숙이는 벌을 받을 일이다.


사실 누구라도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내 경우엔 이제 몇 번 입지 않은 새 옷은 오래 입어 내게 친숙한 그저 그런 옷보다 오히려 덜 아깝다. 작은 장신구 하나라도, 장신구라면 거창하지만, 실오라기로 짠 팔찌가 내게 소중한 만큼 진주귀걸이가 귀하지는 않다. 둘 다 각각 여행 기념으로 샀던 소품이긴 하지만, 특히 실오라기 팔찌는 해변의 포장집에서 산 싸구려 중에 싸구려다. 하지만 그 짙푸른 바닷물을 기억하며, 소금기 젖은 손과 입으로 ‘겨자’가 영어로 생각이 나질 않아서 순간 ‘섬씽 옐로’를 달라고 해서 핫도그를 사먹던 일을 추억한다. 나중에 특급호텔의 비치로비에서 마신 알 수 없는 음료와는 또 다른 맛을. 바가지나 쓰는 관광객이 아니라는 자존심과 굳이 핫도그를 들고 청승을 떠는 합리성의 속내에 대한 한심을.  


멀쩡한 블라우스가 못쓰게 되었지만 미련은 없다. 아무런 추억하나 없는 헝겊의 모임. 내가 좋아하는 연한 청록색의 한 줄 장식이 조금 아깝기는 하다. 소매 부분에 구멍이 났다면 반팔로 자르기라도 하지 싶다. 하지만 등 한 쪽이 아기 손 크기만큼이나 눌어붙고 아예 손바닥만큼은 구멍이니, 이제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기회가 온 것 같다. 너절한 옷걸이들이나 삼층장 속을 뒤져서 쓰레기들을 분류해 낼 일이다.


고등학교 때 가정과 선생님 한 분이 3년 째 입지 않는 옷은 죄다 버리라고 하셨다. 20년 넘게 같은 곳에서 사는 나는 이사 때면 저절로 살림이 정리되는 기회도 드물었다. 그러다보니 데이트 때 받은 스카프, 청혼 무렵 받은 머플러, 출장 다녀올 때 선물해준 핸드백들…… 30년에 몇 번 썼을까 말까 하는 소품들을 그냥 넣어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선물한 것들은 더욱 못 버린다. 유치원 때 만들어준 목걸이, 처음으로 접어준 여러 마리 종이학, 머리핀 세트, 손수건, 향수…… 손수건은 잃어버릴까 쓰지도 않고 보관하고, 향수는 빈 병이 되어도 포장지까지 간직한다. 합리적인 눈으로 보자면 포장지 정도는 이제는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아이들이란 성장하여 갈수록 (정신적으로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 내가 꼭 그랬으니까 ―, 작은 추억거리는 눈물겹게 귀하다. 이제는 여기저기 쌓이는 사진들까지, 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내게는 그렇게나 소중한 것들로 넘친다. 어떤 우아한 옷을, 훌륭한 장신구를 걸쳐도 더 이상은 멋이 나올 수 없는 몸에게 이제 어떤 물건도 소중치 않다. 몸을 위한 물건들보다는 맘을 위한 추억들이 귀하다. 구멍 난 옷을 버려야 하듯이, 옷가지들 등속은 좀 솎아 내야겠다. 물건들이 비워진 자리에 더 소중한 추억들이 들어올 수 있게시리. 길어 내도 길어 내도 줄지 않는 샘물처럼.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자 도시 - 개성 방문기  (0) 2009.03.28
눈이 있었던 것  (0) 2008.11.20
내적 자유  (0) 2006.12.03
움직이는 긴 그림자 - <문학공간>  (0) 2006.09.20
내 딸의 어머니  (0) 2005.11.03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