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문화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소모함으로써만 생명을 부지한다. 이 엄연한 자연법칙의 고리 안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소모한다. 꼭 흄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더위와 추위와 배고픔 등 감각의 총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가 기분 좋게 부르고 시간이 생기면 더 나은 무엇을 원하게 된다. 물고기를 찌를 창도 더 보기 좋게 다듬고, 아름다운 무엇인가에 몰두한다. 노국공주가 죽자 그녀가 좋아했던 모란꽃을 비단으로 만들게 하여 바라보았다는 공민왕은 채화 문화를 열었고, 무굴의 한 황제가 일찍 죽은 왕비를 추모하여 20년도 넘은 시간을 바쳐 지었다는 타지마할도 인류의 자산에 속한다.
견디기 힘든 여름 더위가 물러가면 곧 문화의 계절이 온다. 교정에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독문학제가 열리고, 나는 퇴임 후에도 철없이 참석한다. 올 가을엔 그에 앞서 인문대 퇴임교수 간담회가 있었다. 의례적으로나마 반겨주던 현직 교수들의 면면은 갈수록 줄어도 산삼주까지 곁들인 점심은 과분했고, 오후에 준비된 문화 코스는 국립나주박물관이었다.
나주시 반남면 고분로 747 - 국립나주박물관은 채 돌이 되지 않은 신선한 외관과 품고 있는 오랜 과거가 독특하게 어우러진 곳이었다. 이천 년 전 우리 땅의 문화유산 마한 고분군과 그 출토물을 함께 보면서 가슴이 떨렸다.
우리 세대는 모차르트의 멜로디로 동요를 배우며 자라면서 우리의 12율명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지금도 교육이 문제다. 존 듀이의 철학을 배워온 초창기 교육 원로들이 우리의 교육원칙을 세워나간 이래, 여전히 우리보다 서양의 가치가 앞선다. 진리로서의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 믿던 전통이 뒤집히고,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도구에 불과해졌다. 열매 많은 것이 곧 진리이고 보니,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기원전 3세기에서 서기 4세기까지 경기·충청·전라도 지방 54개 소국 연맹 마한을 우리가 우습게보고 지나쳐 배우지 않았겠는가. 햇볕 따스한 가을날 오후, 마한 고분군의 둥근 능선들을 가슴에 담고 현대적으로 진열된 출토물들의 정교함에 감탄하면서, 인류가 꾸준히 발전한다고 믿는 이론은 환상임을 확인했다. 칼이 아직 흉기가 아니고 다만 유용한 도구일 때 얼마나 아름다운 선으로 갈아 만들어졌는지, 뼈로 만든 낚시 바늘은 얼마나 정교하고, 그물코에 매단 돌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게 깎였는지. 돌들을 만졌던 손의 감촉에 지금도 전율한다.
독문학제는 이틀 뒤였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합창에 이어, 베데킨트 작 <사춘기>의 번역공연이었다. 인벤 근처에서는 구운 소시지와 맥주로 독일식 뒤풀이가 이어졌다. 소시지 굽는 냄새에 덮여 주눅 들었을 밀가루 전을 맹물과 함께 뜯어먹으면서 - 이 ‘팔꿈치사회(독일어로 경쟁사회)’에서 이만큼이라도 문학에 음악에 열정을 갖는 젊은이들의 가슴의 순간을 진정 응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스펙이라는 두뇌의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돌아가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친구들을 젖혀내야만 하는 전쟁이 그들의 삶이다.
한 몸에 다른 가슴과 다른 두뇌를 지닌 젊음을 보고 있었다. 십중팔구 강의 시간에 교수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녹음이라도 할 태세인 이들, 그러니까 A+때문에 창의적 사고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수용적 사고력에 의지하는 이들. 이들에게 나는 마한 고분군을 찬미할 수도, 빈둥거림을 예찬하는 카프카를 차마 인용할 수도 없었다.
“최소한 25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빈둥빈둥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라니, 그들이 참 안 됐소.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오.”
한시적 낭만의 축제를 빠져나오는 어두운 길에서 더 큰 어둠을 만난다. 태환권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버린 세상에 긴 어둠의 문화가 내린다. 앞으로 내닫느라 뒤를 돌아 반성할 틈 없는 삶, 끊임없는 의욕의 충족 과정에서 불충족을 외면하는 문화는 어둠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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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대학 소식지 2014-제3호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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