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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없이 많이 소유한 자’의 빈궁한 철학 | |||||||||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⑪ 소유의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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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를 발표한 지 꼭 40년이 지났다. 이미 소유로서의 삶을 걱정해 진단한 이래 눈곱만치도 그 일은 뒤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에도 머피의 법칙이 적용됐다. 소유 관계로서의 삶은 벌써 그 꼭짓점에 달했다. 만일 이 꼭짓점이 반환점이 될 수 없다면 이 지점에서 인류는 살기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올 여름 너무 덥다. 습관처럼 에어컨은 손님이 올 때의 장비다. 나는 에어컨을 샀지만 소유하지는 못한 것 같다. 얼마를 무엇무엇을 소유했는가로 가리는 경주에서 아무래도 패배자군에 속한다. 생활철학으로서의 소유개념은 나를 제외한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자신의 잠정적 소유물이라고 여기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류의 역사는 무생물의 소유권을 두고 벌여온 각축장만은 아니었다. 동물은 물론 고등생물이라는 인간도 유사 이래 소유의 대상이었고 거래의 대상이었다. 비단 노예제도를 말함이 아니다. 거래는 금이든 돈이든 화폐가치로서 성사되기 때문에 일단 ‘많이 소유한 자’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할 기회를 얻는다. 망할 놈의 자비라는 단어는 그래서 늘 비굴함을 먹이로 유지돼 왔다. 조금 더 머리 회전이 잘되는 ‘많이 소유한 자’는 비굴함을 줄이는 방책으로서 사랑이라는 개념도 쓸 줄 알았다. 사랑의 당의정을 씌우면 수탈에 의한 소유도 아름답게 승화된다. 바로 그 자연적 생식의 방법으로서의 성교를 사랑과 연결시켜서 수탈한 것이다. 암수가 교미함으로써 생식 행위에 참여하게 되는 생식 행위는 성스러운 종족보존의 사명이기 때문에 자연은 쾌감을 함께 부여했을 것이다. 누가 불쾌한 종족보존의 사명을 이행하려고 하겠는가. 문제는 그 쾌감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상이 덧발라져서, 인간은 한편 사랑의 노예가 됐다. 사랑의 이름으로, ‘많이 소유한 자’는 소유를 늘려갔다. 여전히 남성이 더 우세한 ‘많이 소유한 자’ 집단은 상대성인 여성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족쇄를 걸고 소유해왔다. 이 조금만을 보아도, 자본을 ‘턱 없이 많이 소유한 자’ 집단은 턱 없이 많은 쾌감들을 누리게 돼있다, 구조가 그렇다. 이런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많이 소유한 자’ 집단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뿐인 인간은 그 ‘많이 소유한 자’ 집단이 소유한 개와 돼지들과 비슷할 터이다. 강아지도 얼마나 사랑을 받는가, 그 주인을 상처내기 전까지는. 돼지도 얼마나 극진히(?) -이건 좀 아니다, 요즈음 창살 속 사육을 보면- 대접을 받는가. 영양제도 먹이고 더운 날이면 에어컨을 틀어주기도 한다는데. 그러니 전기 누진세를 겁내서 에어컨 엄두를 못 내는 모두는 개와 돼지들만도 못하다. 이런 관점에서 대중을 개와 돼지에 빗댄 어느 고위공직자가 무슨 큰 죄를 지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에는 그런 싸가지가 -내 말이 아니지만- 고위공직자라니 분통이 터져서 열들을 냈었지만, 열기가 식고 보면 열 낼 일이 그뿐이더냐 싶어지기 마련이다. 100억원은커녕 10억원 뇌물을 받은 적도 없고 사석에서 삐딱한 말 좀 했다고 파면인 것이 뭔가 형평이 맞지 않아 보인다. 개와 돼지들을 달래려면 문제의 장본인을 눈앞에서 치워주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굳이 파면이라는 초강수를 두어서 개와 돼지들을 과하게 만족시켜준 데에 다른 의도는 없었을까. 진정으로 개·돼지 사육의 묘를 아는 높으신 판단은 역시 ‘많이 소유한 자’ 집단에서 나왔으리라 추론된다. 어쨌거나 개와 돼지들은 원래 마땅한 ‘타깃’을 잘 모른다. 그러니 ‘위에서’ 내던져준 먹잇감이 있으면 무작정 달려가 물어뜯고 분풀이를 한다. 오만방자한 말씀 한마디로 가버린 고위공직자는 이 경우 개와 돼지들의 먹잇감이 됐다. 덕택에 개와 돼지들은 보다 중요한 진정한 타깃을 놓치고 개돼지 발언자를 뜯어먹고 열을 올리기만 했을 것이다. 먹잇감이 나돌았을 때는 늘 뭔가 은밀한 다른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고, 나중에야 깨닫는 것이 개와 돼지들의 속성이다. 그런데 민중은 개·돼지란 그 발언은 몰상식적인 발언이어야 하지만 실은 거의 상식 수준의 말이다. 예를 몇 개만 들어도 안다. 증세 없는 복지가 대표적이다. 이것을 약속하는 발언 가운데도 개·돼지론이 버젓이 들어있다. 세금 올리지 않을게, 그러고도 더 배불리 해줄게! 이런 약속을 믿을 아이큐는 개와 돼지들의 것이 아닌가. 일전에는 어느 당의 당대표 경선에 나선 의원이 1980년 5월의 광주를 어처구니없게도 폄하했다. 광주는 기껏 밥그릇이 서러워서 나섰더란다. 비슷하게라도 그의 말을 옮기면, “인사에, 지역발전에, 많은 것에 소외를 받다 보니 가슴 속에 쌓인 게 많아서 어느 순간 탱크도 무섭지 않게 돼서” 나섰더란다. 아하, 지역구에다 밥그릇 큰 놈을 안겨줬더니 재선이 됐다는 말인가 보다. 그래서 더 큰 권력에 이르면 밥그릇 더 큰 놈을 어디로 가져간다는 말일까 궁금하다. 이렇게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사는 것이 어디 사람 사는 일인가. ‘턱 없이 많이 소유한 자’ 집단에서 개·돼지로 보는 우리들이 그냥 사람 축에라도 들려면 어찌해야 할까. ‘턱 없이 많이 소유한 자’ 집단에게서 그냥 사람을 개·돼지로 보는 생각이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어찌 개·돼지 같은 사람들이 없어질 것인가. 하나를 파면 시켜서 입을 틀어 막아봐도 소용없을 것은 ‘턱 없이 많이 소유한 자’ 집단님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이다. 하긴 우린 영영 개·돼지다. 꼬리 치면 사랑받고 미우면 차이고, 이렇게 사는 건 개·돼지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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