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9 – 연두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 한번 먹는 데
하루, 이틀, 사흘 [……]
낼 다시 만나면
속 시원히 말해야지
눈치만 살피다가
일 년, 이 년, 삼 년 [……]
눈치만 살피다가
지나는 한 평생
- 송창식 〈맨 처음 고백〉 중에서
*
연두에게서, 고백도 못해본 연두에게서, 붙잡지도 않는 연두에게서 도망치는 일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 입대를 앞둔, 군대로 도망치는 그에게 그녀가 물은 말은 단 한마디 단어였다.
왜? - 응.
왜? - 공부가 안 되네.
왜? - 그냥.
왜?
승욱이 도서관에서 맥없이 쓰러졌었던 일이 그 시작이었다. 전깃줄에 내려앉으려는 순간 풀썩 땅바닥으로 꽂혀 널브러진 새의 이미지와 더불어 끊겨버린 기억, 그리고 도서관 앞 풀밭에서 눈을 뜬 순간 바로 코앞에서 만났던 간지러운 머리카락. 연두, 처음 본 여자애, 과 새내기라던. 어쩌다가 그는 그 전깃줄에 닿았을까. 참새가 두 발로 한 줄에 서듯, 그도 두 손으로 한 줄에 매달리면 되었을 것을. 무심코 발생한 첫 순간의 감전은 그를 통째로 태워버렸다.
캠퍼스를 도망쳐 들어간 군대, 상상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침묵 속의 폭력을 실감하며 숨을 죽였던 30개월은 전도체 그 머리카락에 대한 그리움을 두려움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제대 후에도 대학에 등록을 하지 못했으니까.
더 멀리 도망쳐 간 독일에서, 베를린에서,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서구 68운동의 모토를 실감해 내자! 의지는 좋았다. 무비자로 입국한 승욱이 3개월 이상 체류하려면 우선 외국인등록이 문제였다. 외국인등록관청에 가서 예약 없이 새벽부터 줄을 서 있었는데, 어느 시간쯤에 저 앞에서 줄이 끊겨버렸다. 그대로 해산이었다. 하루 사무 할당량이 그것으로 끝이라 했다. 예약 번호 같은 것은 없었다. 원시적이었다. 사람을 원시적으로 대했다. 외국인등록을 원하는 외국인들에게 알맞은 수준이라는 듯이. 서울의 미국대사관인가 영사관 앞도 그렇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튿날은 꼭두새벽에 갔다. 기다리는 동안에 이런 저런 정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따로 등록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려니 하다가 일본도 그쪽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속이 좀 뒤틀렸다. 국격이구나, 분통이 났다. 은혜를 바라는 꼴에 근육들이 꼬일 것 같았다. 불가항력은 불가항력이다. 다음에는 경찰서에도 가야했다. 사무는 사무고 서류는 서류였다. 존재 증명이 확실해야만 했다. 만일 실종이 되더라도! 실종?
한국인의 실종, 사실 외국인등록증 유무와 관계없이 한국 국적 체류자의 해외 실종은 늘 가능했었다. 실제로 일어났었다. 1967년, 그러니까 승욱이 태어나기도 전이었는데, 서독주재 기자가 무슨 세계선수권 대회 취재 차 체코인가 헝가리인가 동구권 국가에 들어갔다가 실종되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동백림사건이라고 알려진 첩보영화 같았던 작전이 일어났다. 서독에 살던 교민들이며 유명 예술인들과 유학생들이 200명쯤이나 체포되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3, 4년 안에 대부분 석방되는 형식으로 종결되었다. 그래도 그 심각성은 대단했다. 파독 간호사가 유고라던가 동구권 남성과 결혼하여 이주했던 것도 문제 삼았다니, 참.
그건 그렇고, 실종되었던 그 엘리트 기자는 어찌 되었을까. 느닷없이 궁금증이 일었다. 유능했던 유학생, 남 몰래 쇠네펠트 공항에서 동구로 향했던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을까. 살아있더라도 노인 다 되었겠다. 장벽은 무너지고 없는데 사람은 어디에도 흔적도 없다니. 승욱은 일없이 그를 걱정했다.
그러니까 승욱이 맞닥뜨린 90년대 독일은 어쩌면 낙원이었다. 독일은 하나였고, 누구도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숨어들 필요가 없어졌다. 쇠네펠트 공항을 통해 모스크바를 관광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승욱도 어쩌면 철조망을 넘어 날아간다는 해방감으로 선뜻 모스크바부터 다녀왔는가 싶었다.
가만, 그가 난생 처음 의식 소실을 경험했던 여름이었지. 분명 그 뉴스의 충격이었어. 하지만 소위 방북여대생의 평양방문, 그 여학생이 넘어갔다던 베를린 장벽은 – 그 베를린 장벽은 그때 벌써 내적으로는 무너지고 있었음을 그땐 까맣게 몰랐었다. 어쩌면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그 뉴스의 충격 정도로 의식이 소실된 못난이가 새내기 연두와 마주친 그날, 그날은 정말 아무 것도 몰랐었다.
‘우리는 떠나기를 원한다.’라고 적힌 깃발을 들었던 동베를린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기록들이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다. 겟세마네 교회 등은 성지였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부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 열린 국경 경비울타리들을 통하는 방법으로 수만 명이 동독을 이탈했었다고. 부다페스트 등에서 마련된 특별열차에 타고 바로 서독으로 입국하는 동독인들에 대한 세계뉴스는 지배자 피지배자 모두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안겨주었을까. 우린, 한국에서는 왜 잘 몰랐을까. 2학기에 벌써 학교에 잘 나가지 않던 승욱은 정말 몰랐다. 장벽은 그해 연말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분단을 극적으로 증언하는 기념물로 남은 찰리검문소는 그 이름만으로도 대단한 역사적 장소였다. 역사적 현실은 변질되어 박물관처리가 되었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뭉클했다. 봉쇄 장벽을 왜 넘으려 했을까.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장벽을 넘으려다가 희생된 사람들에 관한 정보들 - 자국 군인들의 총격에 스러져간 국민들이 베를린에도, 그러니까 선진 유럽에도 있었구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그렇담 자국은 아닌가. 승욱은 또 다시 광주를 생각했다. 도망쳐 나온 광주 캠퍼스를.
통일 후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베를린 장벽의 그림들은 그때 장벽에서 좀 떨어진 아틀리에에서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을 생생하게 봤던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려 넣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바로 〈11월에 생긴 일〉의 작가 카니 알라비였다. 처음에는 여러 방면에서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장난하듯이 담벼락을,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을 넘는 남자의 그림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장벽을 넘는 사람』 이라는 동명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라고 했다. 습관적으로 장벽을 넘나드는 일이라니, 소설이니까 그랬겠지만.
그 그림이 유독 승욱의 머리를 깼다. 그것은 머릿속의 장벽 허물기가 더 오래 걸릴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였다. 우선 전철을 타고 가다가 동베를린 지역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거리를 만나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리가 잘 안된 집들, 차이 나게 어두운 색으로 내려앉은 그쪽 지역들은 아직 변화 중에 있었다. 외관의 변화라면 글쎄, 뭔가 조직적으로 느껴지는 이 사회는 동서의 벽을 곧 허물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의 장벽은 모를 일이다.
혹시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우리? 우리의? 연두라면, 연두의 오빠라면 베를린 장벽 파편들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가까이 간 적이 없으므로 알 수도 없는 연두, 그 이름이 느닷없이 왜 떠올랐던 것일까? 승욱은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히 대학 캠퍼스를 피해서 도망쳐온 그곳이 베를린이면 어떻고 로마이면 어떠랴. 변화가 정작 필요한 것은 승욱 자신임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난생 처음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여 방향감각의 상실이라고나 할까. 좌충우돌 이것저것 부딪고 다니면서 시간을 잊고 자신을 잊었다. 계획도 순서도 없이 베를린 이곳저곳을 가로지르는 일상이 무슨 의미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철없다는 말의 뜻을 알 것도 같았다. 철없는 그는 들어봄 직했던 장소들을 무턱대고 섭렵하고 다녔다.
어떻게 독일 군주이면서 프랑스 문화에 매료되었나, 프리드리히 2세가 볼테르를 초빙해함께 했었다는 상수시 궁전도 볼거리였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했다니 프랑스 문화 존중이 대단했구나. 역시 문화적 후진국 독일이었나. 독일 왕이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를 흠모했었다니. 하긴 여러 방면에서 독특했다는 프리드리히 왕으로서는 똘레랑스 한 마디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종교의 광신 그리고 배타성을 초월하는 종교적 관용 - 어려운 말이었다. 더 나아가면 종교로부터의 해방인가. 순명을 인지하면서도 본성과 상치되는 어떤 가치들……. 그때 상수시 궁의 뜰을 거닐면서도, 자신이 볼테르를 찾아 헤매게 될 줄을 승욱은 알지 못했다. 사탄과 의절하라! 임종 전에 신부님이 간곡히 설득했다는데, 새로운 적을 만들 필요가 있겠냐고 응수했었다는, 흥, 그런 볼테르를.
밤이면 승욱의 세계는 늘 되돌이표였다. 대륙 한복판을 누비면서도 계속 바다를 꿈꾸는 자신을 의아해했다.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칼레…… 기껏해야 그가 이름으로 알고 있던 바다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들떴다. 바닷물은 늘 푸르지만 어두웠다. 밝은 바다란 없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한국에 있을 때에, 아니 자라는 동안 내내, 그가 바닷가에 가 본 적이 없었다는 희한한 생각에 가슴이 덜덜 떨렸다. 내가 바다를 마주할 수 있을까. 바다, 바다를.
첫 번째 기회는 함부르크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치 레스토랑의 아들과의 연결이었다. 일이 쉽게 풀린다는 생각에 함부르크로 내달은 그는 허허벌판에 온 느낌을 받았다. 함부르크는 바다가 아니라 대도시, 거대한 부두였다. 우리나라 부산특별시쯤 되나, 소득 수준으로는 베를린을 넉넉히 제친다고도 했다. 부의 근원인 수출업 때문에 외국 회사들과 외국인들이 ‘득실거리는’ 거대 도시였다. 승욱과 같은 객들을 제외하고도 거주 외국인이 60만이 넘는다니, 7명 중 한 사람은 외국인이라는 통계였다. 근년 들어 독일에 8년 이상, 함부르크에 3개월 이상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시의회 투표권도 있다나 없다나. 무조건 과밀집이라는 느낌에 바다로 향하던 숨이 막혔다.
함부르크에서도 우선은 관광안내서를 펼쳐들었다. 발을 적셨으니 기본은 보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은 하자는 생각이 저열하다는 것은 어렸던(?) 그때는 잘 몰랐었다.
유럽답게 우선 웅장한 교회가 있었다. 성 미카엘 교회는 외관에서 본 예상과 달리 루터의 개신교였다. 2,000명도 더 넘게 들어갈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보면 어쩐지 개신교가 어울리기도 했다. 132미터 높이의 바로크 종탑을 오르는 갈래 길, 453개의 계단을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거나. 이런 선택의 유혹은 왜 있는 것일까.
훨씬 나중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시청은 조금은 더 단순한 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건물 자체의 거대함에 압도당했다. 스무 명인가 독일황제들의 입상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황제들은 다 아름다운가. 시청보다는 왕궁의 모습이었다. 안뜰에는 여신의 분수가 있었는데, 신들이 좀 많아야 성스런 그 이름들을 기억하지. 시청 근처 보행자들을 이끄는 쇼핑 거리들은 거기 그냥 있으라 내버려 두었고, 문화 문화…… 예술 예술…… 쿤스트 쿤스트…… 미술관들이 모여 있는 거리, 커피 박물관도 있다니. 마음 다잡고 공부하는 심정으로, 월요일을 피해서 미술관 투어도 커피 박물관 투어도 모두 해냈다. 정말 공부를 이렇게 했음 좋았을 걸, 승욱은 혼자 웃었다. 인생에는 어느 순간에나 후회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나중의 후회를 미리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더더욱 관광을 놓쳐서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존 레논의 이름으로 유명한 리퍼반 밤 문화를 체험할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엘베강 관광크루즈 같은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 그땐 젊었다. -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그는 그만 바다를 따라 내려가 암스테르담으로 칼레로 향하고팠다.
암스테르담에서부터는 실제로 일정한 주거도 없이 다만 떠도는 여행자가 되었다. 독일에 도착해서 반년이 지났으면서도 여전히 영어로 돌아다니던 승욱은 암스테르담에서 이상하게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곧 다시 영어로 물러났다. 일 인실 하나를 주문하면서 ‘아인 아인첼침머’ 라는 말에서 자신이 더듬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태생의 언어에 없는 관사 때문임을 알고는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자신이 독일어로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것은 예감도 아니었다. 자명했다. 그는 그냥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역시 역에서 준비한 안내서에 즐비한 프로그램에는 페리에서 시작해서 왕궁이며 교회며 쇼핑거리 동물원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무조건 덮어버렸다. 가슴 아프게 안네 하우스에 갈 생각도 없었다. 무작정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승욱은 보물을 발견했다.
내가 어쩌다가 고흐의 작품을 내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승욱은 좀 천박한 말을 쓰자면 횡재라고 소리칠 뻔 했다. 고흐 자신이 처음으로 ‘작품’이라고 말했다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 그것은 사람에게서 멈춤을 유발했다. 숨이 막혔다. 언젠가 미술책에서 보았던 기억과는 너무도 달랐다. 책상 넓이의 액자 안에서 칙칙하고 지저분한 채색으로 살고 있는 이 시커먼 사람들은 승욱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땅을 파던 투박한 손으로 진지하게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승욱에게로 들어와 버렸다. 숨을 가다듬고서야 다른 작품들도 눈에 담았다. 마지막 해에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 등을 그릴 때까지 겨우 6년뿐이었다니. 쉬라와 비슷한, 전혀 고흐 같지 않은 점묘파 화풍도 끼어 있어 놀랐다. 모르는 것 천지였다. 아름다운 〈꽃이 핀 아몬드 나무〉 앞에서도 한참을 서 있었지만, 머릿속은 시커먼 손이었다.
인공 운하 길을 따라 걷던 승욱은 다시 온전한 바닷가, 그냥 바닷가를 찾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30분도 떨어져있지 않다는 잔트포르트. 누가 들어도 잔트는 샌드 비슷하니 모래를 뜻할 것이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바닷가, 그런 뜻일 것이었다. 그는 다시 암스테르담 역으로 내달아 잔트포르트에 일인실 하나를 예약해놓고 바닷가, 진정한 바닷가로 내달았다.
바닷가는 바닷가였다. 계절이 아니라서 사람들은 드물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홀함 속에 슬픔이 밀려왔다. 바닷물을 향해서 내달았다. 바닷물, 바다의 물, 물들. 두 손을 바닷물에 파묻었다.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야 바닷물을 맞닥뜨리다니. 이것이 바닷물이구나. 이 너무도 너른 바닷속 얼마나 멀리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있을 것인가. 잔트포르트의 바다는, 이 북해의 바다는 다른 목소리로 울고 있을까. 아버지이, 아버어지이…….
해가 지고 밤이 오는지도 모르고 거기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실은 밤이 빨리 왔다. 북해에는 밤이 빨리 오는구나. 밤이. 적막이. 적막이 빠르구나.
바닷가, 다시 바닷물을 찾아서, 두 손에 움켜쥐고. 그는 이튿날 넋이 빠진 얼굴로 아침 바닷가를 헤매다가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거기라야 더 아래로 다른 바닷가로 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이름을 들어 겨우 아는 대로 칼레를 찾기로 했다.
칼레의 해변으로. 승욱은 암스테르담에서 칼레행 기차를 탔다. 5시간이면 가는 곳이니 서울에서 부산쯤으로 국경을 넘는 여행이었다. 기차 안에서 안내서를 읽었다. 맨발로 해변을 걷는 것은 매우 편안하며 바닷바람이 몸을 불고 기분이 좋습니다, 라는 내용의 도드라진 글씨. 그래, 나는 칼레의 바닷물을 만나러 가는 거야. 마음이 먼저 달렸다.
칼레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에 탈환되었다고 소개되었다. 백년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영국령으로 존재했다는 말이었다. 200년이 넘는 그 동안, 그렇더라도 칼레 사람들은 프랑스 말을 하고 살았겠지? 언어의 자존심이 대단하다는 프랑스인들이니까!
초등학교 때였지, 아마. 중학교였나.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은 무한 감동이었다. 영국-프랑스 전쟁은 아니었어도 그 비슷한, 그러니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했던 때의 이야기였다. 알자스-로렌 지방을 전리품으로 넘겨줘야 했고, 학교간판도 수업도 독일어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때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시간이라는 애틋한 설정은 우리를, 학생들을 프랑스 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선생님도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 한글 수업을 금지당했던 서러운 감정을 잔뜩 실어서 가르쳤다.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 프란츠, 완전 독일인 이름인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 의문점은 알자스-로렌 지역이, 특히 알자스는 역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독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야 풀렸다. 하지만 1차대전 후 다시 프랑스가 합병해버린 지역이라니, 이것은 또 무엇인가. 승욱이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런 사실들을 알았다고 해서 어린 시절의 감동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사실 알자스는 현재에도 프랑스로부터 분리주의 움직임이 커져가는 곳인데, 소용없다. 「마지막 수업」에서 독일은 적이다.
칼레에서는 승욱이 찾는 바닷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보다 훨씬 먼저 유명한 이미지로 굳어진 것, 로댕의 조각품 〈칼레의 시민들〉이 있었다. 실제로는 조각품보다 20년쯤 나중에 만들어진 드라마 작품을 먼저 알게 되었다. 연두를 따라간 독문학 수업에서 동명의 드라마 작품을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왜 독일 작가가 프랑스 칼레의 시민들을? 그런 것은 지금은 의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유럽은 유럽이다.
독문과 수업이 떠올랐다. 교수님은 이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되 충분히 성찰되고 해석되었다고 했다. 백년전쟁의 와중에 영국왕이 칼레를 포위하고 도시의 전멸 대신 조건을 내건다. 대표 시민 6인이 맨발에 탈모로 수의를 입고 목에 밧줄을 걸고 투항하라! 그렇게 예상대로(?) 유럽의 전유물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펼쳐진다. 주전론자 대위에 맞선 평화주의자 으스타슈 – 그 발음은 정확하지 않지만 – 가 희생을 자원하자 곧 이어 6인의 지원자들이 나선다. 2막에서는 7인이 된 지원자들 중 1인을 제외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의 희생이 일시적 흥분상태의 결정이 아니라 참된 내적 결단이 되는 승화작용을 한다. 결론은 아침에 시청 앞 광장에 나오는 순서로 정한다는 것. 3막의 아침, 놀랍게도 첫 번째 지원자 으스타슈가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들 따라서 관객들도 술렁술렁 그를 의심하는 순간, 그는 절대적 희생을 자처하고 죽어서 관 속에 누운 채 운반되어 온다. 관객의 정화작용은 한껏 상승된다. 극적으로 영국왕은 왕자의 출생에 맞춰 6인의 희생을 면하는 해피엔딩(?).
드라마를 현장에서 조각품으로 만나보는 감격은 남달랐다. 항복, 항복의 의식이란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 장면을 승화하고픈 어떤 이유는 질기도록 오래 가는 것인가 보다. 칼레 시가 로댕에게 조각품을 의뢰한 것은 항복의 시점에서 무려 500년도 더 흐른 뒤였다. 대단했다. 그런데 5년인가 10년인가 걸려서 만들었다는 로댕의 조각품은…… 의인 중의 의인, 희생정신에 투철한 영웅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앗, 눈앞에 서있는 그것은 이상한 뒤틀림들이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이별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수척한 모습들. 머리통을 움켜쥔 열 손가락, 되돌릴 수 있을까 뒤를 돌아볼까 망설이는 동생 피에르, 같은 마음이면서도 동생을 다독거리며 말리는 형의 슬픈 얼굴, 성문의 열쇠를 들고 나와서 넋이 빠져있는 모습의 자크 드 비상…….
겨우 이런 낙담한 인물들이었다고? 완성된 조각상들을 본 칼레 시민들은 무척 실망했었다. 그와 함께 로댕의 변도 전해졌다. 너무 아름답게 표현했더라면 사실성이 결여되었을 것이고, 드높은 받침대 위에 영웅성을 강조해서 만들었더라면 진실을 가렸을 것이라고! 영웅성이라는 환상을 찬양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도 힘도 아니라고 말했단다. 예술이란…….
당연히 조각품 〈칼레의 시민들〉은 세계 여러 곳에 수출(?)되었다고 자랑이었다. 너무도 유명하다보니 어디선가 한 사람쯤은 도둑맞기도 했고. 그러니까 영국 북단 글래스고에 전시되었던 작품 중에서 장 데르의 상 하나가 통째로 분실되었다는 것, 1949년이었다니 영원히 행불인가?
아, 로댕의 조각품을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누군가 훔쳐가지 않은 온전한 〈칼레의 시민들〉을! 승욱은 누가 볼세라 슬그머니 쓸어보았다. 사실 로댕의 〈지옥의 문〉 제목만으로도 떨렸던 옛날의 기억이 새로웠다. 멋모르고 미술책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에 관해 떠들다가 그 모델이 바로 단테라고, 『신곡』을 쓴 단테의 모습이라는 미술 샘의 말에 놀랐던 일, 그로부터 시작된 「지옥」편 탐구(?)가 새롭게 다가왔다. 어려웠지만 읽어보려고 애썼던 지옥 이야기를 보면, 형벌은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되돌려 받는 형식이었다. 콘트라파소 – ‘정반대의 고통’을 뜻하는 이 말은 인과응보와 통한다. 지상에서의 악행과 똑같이 대응하는 지옥의 형벌이라면…….
승욱은 생각했다. 내가 지옥의 문을 열게 될 어느 날, 마음을 숨긴 죄는, 마음을 모른 채 한 죄는, 그랬다, 마음을 속인 죄는 어느 지옥에 속할까? 승욱 자신은 아무래도 마지막 ‘배신 지옥’에 가게 될 것만 같았다. 유다와 브루투스가 악마 루시퍼의 발아래 눌려있다는 그곳에. 기독교의 신을 모르는 연두도 천국에는 못 갈 것이다. 예수 탄생 이전의 선인들도 천국에는 가지 못했다. 잘 해야 지옥의 천국이라 할 림보에 머물까? 진짜 지옥은 아닌 림보에.
걱정은 그때로 끝이 아니었다. 로댕, 대체 어떤 인간이냐, 당신은? 당신은 어느 지옥에 가셨나? 뒷날, 한국에 돌아온 뒤 빈둥거리던 어느 날 영화 〈카미유 클로델〉을 보고나서는 로댕에 대한 환상이 헷갈렸다. ‘나쁜 위대한’ 예술가! 승욱으로서는 자신의 간사한 마음도 미웠다. 사실 조각가로서의 로댕을 존경하는 데에는 〈지옥의 문〉만으로도 충분했었다. 예술과 예술가의 삶은 또 다른 차원의 성찰을 필요로 하는, 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도 풀리지 않은 애매한 과제다. 그러니까 그때 〈칼레의 시민들〉을 두 눈으로 보았으니, 안경도 필요 없던 젊은 날 직접 보았으니, 그것이면 되었다.
하지만 조각품이라고 하는 것이, 그, 어떤, 조각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술작품이, 그림이건 조각이건, 또는 문학작품이건! 드라마의 대사가 다시 떠올랐다. 영웅적 아들의 시신 옆에서 눈 먼 아버지는 외친다. ‘나는 새로운 인간을 보았소. 이 밤에 그가 태어났소!’ - 그때 우리는, 나는 생각했다. 새로운 인간이 무엇일까. 새로운 인간. 새로운…….
새로운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탄생한다. 삶의 루틴에서 깨어나는 순간 인간은 타락하기도 부활하기도 한다. 새로운 인간은 부활은 그러니까 죽어서 태어나는 인간을 말한다. 칼레가 아닌 어느 곳에서나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
승욱은 우리 역사의 지극히 치욕적인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 중 하나, 송파구 석촌호수 근처에 세워져 있는 삼전도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 말이다. 청태종이 공덕을 쌓았다고! 말도 안 돼! 게다가 사적이라니!
저무는 명과 떠오르는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과 인조의 서로 다른 외교정책을 어쩌랴. 흔히 ‘나쁜’ 광해가 외교적으로는 옳은 판단을 했을까. 인조반정파 대신들은 친명파였고, 성난 후금은 정묘호란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청으로 개명하며 승승장구하더니만 병자년에는 12만 대군을 파죽지세로 밀고 쳐들어왔다. 이듬해 곧 정축하성(丁丑下城)! - 우리 실록에는 성에서 내려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항복은 항복이다.
신하의 예를 갖추라!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 – 이라거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 – 그 삼전도의 굴욕을 그들은 청태종공덕비를 세워 기리라고 강요했었으니, 미칠. 1639년의 그 공덕비(?)를 고종이 1895년에야 귀부부터 뽑아버리라 했다는, 그러니까 250년도 넘어서야 겨우 엎었다.
그런데 일제는 왜 이를 미화해서 복구했는지, 왜 우리에게 주입해서 가르쳤는지. 뻔했다, 조선족은 항복에 걸맞은 민족이다, 라고. 진정한 굴욕의 광무 11년, 아,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정미7조약 후 일제의 만행을 떠올려 뭣하나. 아니, 어떻게 광복 후에도, 어쩌면 얼빠진 친일파들의 재집권으로 그랬을까, 삼전도비를 그대로 가르쳤다. 그대로 배웠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순간에도 새로운 인간은 있었다.
새로운 인간,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 선양에 끌려가 처형된 삼학사, 그들을 새로운 인간이라고 배운 적이 없었다. 승욱이 사학과에 진학을 하지 않았더라면, 삼학사의 이름들을 알기나 했을까. 평양 서윤(庶尹) 홍익한, 홍문관 교리 윤집, 사헌부 부교리 오달제 - 승욱은 그날 밤 그들의 이름을 세 번씩 불렀다. 이역만리 어두운 천장에 대고 큰 소리로 불렀다. 하늘은 어느 때고 어디에서고 통할 것이었다.
다시 날은 밝았다. 칼레, 명예회복을 위한 조각상을 세웠던 칼레 시, 그러는 가운데도 도시는 변화 또는 진화하고 있었다. 승욱이 〈칼레의 시민들〉을 감탄하고 있는 동안, 그 순간, 칼레는 숙적을 망각하고 있었다. 영국과 마주본 지정학적 조건은 현대사에 더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칼레는 어느새 동반자로 변해있는 영국과의 해저터널의 개통을 앞둔 최첨단 항구도시였다. 말이 그렇지 해협 – 해협이라니 – 을 통과하는 50킬로미터의 해저터널이라는 꿈이 이듬해면 실현된다는 세상이 되어있었다. 칼레 역에서 영국 애시포드 역까지 기차는 겨우 35분 걸릴 것이라 했다.
그러라지, 해변으로 가는 거야! 날씨가 좋으면 해협 맞은편 영국 해안을 볼 수 있다잖아. 프랑스에서 영국을! 바다 건너 아스라이 하얀 바위벽이 있는 땅끝을 두 눈으로 바라본다, 네 두 눈으로, 그것이면 되었다.
막상 해변으로 향하자 뭔가 아슬아슬했다. 급했다. 바다 보다는 바닷가 주거지 쪽으로 삼각 바닷물로 들어와있는 칼레의 등대도 외관만 보면서 지나쳤다. 우선 55미터라는 높이도 대단하지만 모습도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등대지기라 하면 애처로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지나쳤다. 진정한 바닷가, 쁠라쥬 드 칼레로 내달았다.
마른 바닷바람이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잔트포르트 이후 바다는 바닷물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바닷물과 닿아있는 느낌이었다. 바닷바람이 왜 물기를 머금지 않았을까? 그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바닷물을 볼에 느끼고 싶었는데. 날씨 때문일 수도 있었다. 파도는 넘실대고 있었다. 칼레 부두의 긴 다리는 주욱 뻗어있고 그 끝에는 또 작은 등대 하나. 정말 도버해협 건너의 하얀 절벽이 아스라이 보였다. 저 곳이 영국이라고? 영국?
하기야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인다고 했던 생각이 났다. 일본에서는 쓰시마 섬이겠지만, 우리는 대마도다. 세종 때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나 성종 때의 『동국여지승람』에는 경상도 계림에 속한다 했었고, 17세기의 『지봉유설』 에는 진도군 대마도였으니까. 을사의병의 노익장 최익현이 유배되었었다는 섬 대마도 – 그 섬이 부산에서 50킬로미터 정도로, 부산은 물론 울산 등지에서도 보인다 했다. 가보지는 못했다. 한반도도 모르면서, 한반도 바다들도 모르면서 이곳 북해의 바닷물을 품어 만지고 있다니. 승욱의 집에서는 사실 바다는 늘 금기였고, 그는 그때까지 바다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렇게 고향을 멀리 멀리 떠나와서 바다를 바다만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잠드신 바다가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목포 남쪽 조도 앞바다에서 북해의 칼레 항구까지는 얼마나 먼 거리일까. 직선거리라 해도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관통하자면 1만 킬로미터는 될 것이다. 바닷길로 인도양으로 아프리카를 돌아서 북해에 이르려면 좋이 3만 킬로미터는 파도를 넘어야 할 것이다. 돌아가면, 어머니의 고향 집에 가면 이제는 바다를 찾으리라. 어쩌면 어머니와도 함께.
칼레에 왔으니까, 바다도 보았으니까, 바닷물도 만져 보았으니까, 시청 건물도 시청 앞 광장도 느껴보는 것이 바른 생활(?) – 그때까지는 - 승욱이 할 일이었다. 잘 했다. 생각 보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세상은 볼 것, 만질 것, 경험할 것들로 넘쳤다. 그런데 프랑스는 다른 이름으로 ‘볼테르의 나라’라고 한단다. 참, 자유평등이라더니. 특이하게도 한 사람을 콕 찍어서 조국을 볼테르의 나라라고 한다고? 그래. 한국에 돌아가면 90권에 이른다는 그의 책들 중에서 우선 소설 『캉디드』를 읽으리라. 대표작이라니 번역은 되어있겠지만, 제목을 들어봤던 기억은 없었다. 소설을 여럿 썼다는 것은 아예 몰랐다. 독일이 그렇게 내세우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빙을 받았었다는 특이한 사실도 베를린 도착 후에야 알았으니까. 캉디드 – 그 이름 한번 이상하다.
괴테 인스티투트를 어느새 망각하고 있었다, 아차. 바다를 보려고 유럽에 온 것은 아니었는데, 바다를 따라 돌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어떻든 계획은 실행되어야 했다, 결과에 관계없이. 그런 생각에 지배되자 승욱은 괴테 인스티투트 초여름 학기 등록을 위해서 처음 예정대로 슈베비슈 할로 서둘렀다. 반년 이상의 체류기간에도 초급반에 배정을 받으면서는 풀이 죽었다. 본격적인 수업은 베를린의 사설 학원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해 보자, 하면서도 느꼈던 생각은 가을 학기에 대학 진학은 불가능하리라는 예감이었다.
늦으면 어떠랴.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해서 알게 된 상황으로는 어머니나 두루 별다른 변화는 없으셨다. 정미소 일도 전부터 이름만이지 거의 당숙이 도맡으시고, 딱히 할 일이 많지 않으신 어머니는 늘 성당 일이 전부였다. 언제 어디서나 조심해, 투틸로. 성호경과 주님의 기도는 늘 함께 하고오~. - 예, 어머니.
승욱은 소리까지 내본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악에서, 다만 악에서…….’
악이 무엇일까. 유일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왜 선만 존재하지 않고 악까지 있을까.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그런데 왜 사과가 있었을까. 사과 때문에 원죄가 발생하였으니, 죄로 인하여 악이 저질러졌다. 죄라는 관념은 실체가 되었다. 교만, 인색, 시기며 질투, 분노…… 이런 소죄들을 경계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유산, 간음, 배신, 사기, 불공정 임금, 타인에게 죄 짓게 하는 것, 거룩한 것을 불경케 하는 것…… 이런 대죄들은 고해성사가 필수적이라 배웠다. 불공정 임금? 그것은 대죄다. 대죄가 흔했다. 세상사람 모두가 가톨릭 신자는 아니니까. 배신의 죄 – 앗, 투틸로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죄인이었다.
악한 마음, 악을 가까이, 악에 물들기 – 악이 무엇일까. 여전히 오리무중인 개념이다. 독서에 몰두해봤지만 인식으로 저장되지는 않았다. 일찍이 오리게네스 때부터도 악은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라면 절대자 하느님이 창조하신 실체들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실체는 아니되, 실체로서의 선의 부분적인 결핍 정도가 악의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온전히 선하지 않음이 악이다. 선의 결핍이 악이라는 것이다.
논증에 야무진 친구들이 4단논법 정도로 따질 때는 조금 흔들린다. 그러다가도 어느 틈에 되돌아온다. 어려운 말이지만 체득되었다고 해도 될까.
너의 하느님이 선하시다면 악을 막을 의지가 왜 없냐.
너의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면 악을 막을 능력이 왜 없냐.
너의 하느님이 악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있다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왔냐.
너의 하느님이 악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너의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냐.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것 같았다. 슈베비슈 할에 웅장히 서있는 교회 이름도 성 미하엘 교회였다. 독일, 아니 유럽 어디에도 성 미카엘교회가 있나 싶었다. 1511년에 세워졌다는 그곳 성 미카엘교회는 그 자체로서 경이였다. 교회 앞으로 펼쳐진 광장 전체 넓이의 54개의 계단, 500년이 넘은 돌계단이라니! 게다가 그 계단 위에서는 전설적인 유명한 야외극이 공연되었다. 60년의 전통! 승욱은 그렇게 공연되는 연극들 중 한편을 보게 되었다. 보았다기보다 거기에 빨려들어갔다. 밤하늘에 검은 새 떼는 날고…….
그때 어둑한 계단 위 넓은 무대에서는 〈한여름 밤의 꿈〉이 펼쳐졌다. 셰익스피어의 밤? 기대했던 작품은 당연히 독일 고전극 정도였지만, 이상하게 그 여름에는 공연목록에 없었다. 〈한여름 밤의 꿈〉이 펼쳐지는 숲속, 밤의 숲 무대는 주변의 어둠과 어울려 충분히 실감을 돋웠다. 하지만 티격태격 우여곡절 끝에 요정들의 도움으로 세 쌍의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결말은 그 장소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들었다. 오히려 단골 메뉴였었다는 실러의 〈군도〉를, 그 숲속을 상상하게 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계단 무대 위에서라면 카를의 비극이, 한량 대학생에서 혈육의 배신으로 산적 두목이 된 그의 숲속 요새에 타오르는 불꽃이 적격이었으리라. 아버지 영주님의 비통, 그리고 절망 속에 계단을 오르내릴 아말리아의 풍성한 치마…….
희극을 보면서 비극을 떠올리는, 없는 것을 탐하는 죄, 이것은 어떤 죄일까. 무심코 「환희의 송가」를 서툴게 읊조렸다. 한국말로. 실러 사후에 베토벤이 〈교향곡 9번〉에 쓴 그 부분을.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낙원의 딸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에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
형제여, 별이 빛나는 하늘 저편에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계실 것이다! [……]
계실까,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실까. 그렇게 가을이 오고 있었다. 괴테 인스티투트 코스와 코스 사이는 짧았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한국 신부님을 따라 잠시 로마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등록을 했다. 학생 숫자는 엄청 줄었다. 대부분 독일어인증 시험에 돼서 대학에 겨울학기 등록을 하기 때문이었다. 승욱은 일종의 재수생 느낌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12월에는 여름학기 원서를 내야 할 텐데, 사실 아직 대학을 학과를 정하지도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일상 독일어는 조금 편해지고 있었다.
가끔은 집에 항공 엽서를 보내 안부를 전하기도 했는데, 한참을 게을렀다 싶어서 우체국에 가서 전화를 했다. 휴, 어머니는 웬일로 거의 훌쩍이셨다.
아니, 어머니, 왜 그러세요? 투틸로 잠깐 들어갈까요?
무슨, 아직 대학은 시작도 안 했담서. 그냥 가을이라. 가을 아니냐. 낙엽들 쓸다가, 낙엽을 쓸다 봉께, 먼지들 때문에야…….
먼지들 때문에 눈물 콧물을 흘리신다는 어머니는, 승욱의 어머니는 또 바다에서 일어난 참사 소식 때문에 며칠을 그러고 있었음을 그는 나중에야 알았다. 잊힐 만하면 떠오르는 바다의 노여움은 조용하다 싶을 때면 잠시 숨을 고르는 때인가 보았다. 부안이면 전북인데, 부안 앞 바다에 위도라는 제법 큰 있는 섬이 있었다는데. 새의 섬 조도(鳥島)이면 어떻고 고슴도치의 섬 위도(蝟島)이면 어떤가. 섬과 뭍 사이를 오가는 바닷길이 늘 문제다. 이번에는 위도에서 나오던 300명쯤 사람들이 삶을 멈췄다는 뉴스였다. 수습일까, 실종이면 어쩌나. 배가 꽤 컸었나 보았다. 파장도 엄청 났다. 몇 백 톤급의 예인선이며 인양선들이 동원되었다고.
조도로 향하던 사고 정도는 깡그리 잊혀졌다. 과거를 되새기며 다시 한 번 애도하는 목록에도 없었다. 바다 속으로 떠난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다. 바닷물에 갇힌 사람들은 방법이 없다. 몸 전체가 바닷물에 잠식되면 5분을, 아니 2, 3분을 버티지 못한다. 인체가 그렇다. 고통이 짧아서 어쩌면 다행일까.
아, 아버지이. 어머니를 보고 계셔요? 볼 수 있나요? 하느님은 어머니를 보고 계시겠지요? 무력한 승욱은 먼 먼 땅에서 따라 울었다. 나머지 가을을 또 다가올 겨울을, 겨울이면 돌아올 아버지의 기일을 어찌할거나. 빈 무덤에 혼자서 가시겠지. 어머니 혼자서. 왜 어머니는 계속 혼자이신가.
승욱은 마른 눈물로 흐느꼈다. 너는 왜 또 이리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이냐. 아무리 어색하더라도 연두의 곁에 머물며, 언젠가 틈을 보아서 맘을 전하고, 그러니까 고백을 하고……. 그렇게 그렇게 사람들이 모일 수는 없었던 것이냐. 거절당할까, 그것이 두려웠더냐. 차라리 연두랑 함께가 더 두려웠더냐. 어머니 혼자서 어른인, 외로운 집. 식구, 가족, 그런 단어들이 주는 이미지가 부실한, 부실해서 그 다음이 불안하기만 했던 너. 평생을 가도 시작이 어려운, 시작할 방법을 모르는 너. 너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연두에게로 다가갈 수 없었다. 너는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었다. 거기 그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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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PEN광주> 2024년 22호, 282~302쪽.
* 제목의 '침묵9'는 교정 실수로 '침묵6'으로 인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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