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4. 12. 21. 12:01
2014 PEN 겨울 이야기 2 -  PEN광주 문학상 

 

수상자: 오인철 희걱작가, 김정희 시인

신설 올해의 작품상: 정태헌 수필가 

 

12월 12일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있었던 이 문학상 시상직을 주관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 하나:

신설된 올해의 작품상은 전 회장 김영관 교수(희곡작가)의 상금 출연으로 시작되어,

초대회장 김종 교수(시인, 화가)의 그름 출연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프로그램:

 

 

 

 

 

 

 

 

  사진: 축사를 하는 강만 광주문협 회장, 오인철 김정희 정태헌 수상자들,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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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12. 19. 10:24

파도소리

  어머니이, 아버지!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시는 모양이 이른 저녁준비 중이셨나 보다.

  어떻더냐? 그래, 김 서방은 어떻더냐고?

  그게요, 아직 잘 모르죠. 검사다 뭐다.

  웬 검사? 몸이 부실해서 링건가 맞는다며? 은실이 어쩌고 있을꼬!

  그냥, 입원한 김에. 암튼 염려 마세요, 별일 없겠죠.

 

  아버지는 그날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5년째, 아버지는 은퇴생활에도 집에서 느긋하게 쉬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일을 본격적으로 하시는 것도 아니다.

 

  아버진 어디 가셨나 봐요.

  늘 그러시지. 요사인 부쩍 정문리엘 가시는구나. 차로 가믄 사오십분이면 너끈할 걸 기어코 버스를 타고 가시니. 오산까지 올라갔다가 게서 또 내려가는 길을 왜 우기시는지. 뭔 볼 일은 그리 있으신지.

  아버진 정문리 좋아하시죠. 어머니가 밀양 박 씨인 것도 얼마나 자랑하시는데 그러세요.

  밀양 박은 다 열년가, 네 아부지도 참.

  열녀라서 그러나요, 일단 청주 한 씨와 밀양 박 씨 하면 뭔지 어울리는 건 사실이죠 뭐.

  밀양 박은 빼고, 한 박사나 들어가서 쉬려무나. 아니, 점심은 먹은 거야?

  예, 먹었지요. 시간이 언젠데요.

  그럼 어서 들어 가 쉬어. 네 아부지 오시려면 멀었다.

 

  어려서 ‘아빠 방’이라고 불렀던 건넌방은 언제 보아도 먼지 냄새 느낌이었다. 지금은 내 책상도 거기에 끼어 있다. 한국 떠난 4년 반, 돌아와서 보니 내 물건들이 건넌방 한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내가 프랑스로 떠난 뒤 은실이 결혼을 하게 되자 우리 자매들이 함께 쓰던 부엌 옆 상하방에 자연스레 신혼살림을 차렸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또 그 사이 더 큰 변화라면, 막내 옥실이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 바로 위가 우리가 서울 나가 살던 곳 고모이시고, 그 위 셋째 큰아버지가 일찍이 미국에 가서 정착하셨는데, 다 함께 회갑에 초청받아 갔다가 옥실이 거기 남은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설마 하면서 옥실을 남겨두고 오셨다 했다. 큰아버지가 너무도 간절히 원했고, 옥실도 스스럼없이 남겠다고 했더란다. 결국 버티어 냈고.

 

  아차, 그러니까 아버지는 한 해에 딸자식 셋을 다 어딘가로 떠나보내셨구나!

늦은 봄에는 내가 떠났고, 여름엔 옥실을 두고 오시고, 그리고 그 겨울 은실이 결혼을 했으니까. 은실이 결혼해서도 함께 지낸 것이 얼마나 위인이 되셨을까. 새삼스레 제부가 고맙다. 어서 퇴원을 해야 할 텐데.

 

  내 책상은 짐짝처럼 올려진 책들로 빼곡하다. 노트북을 올려놓으면 남는 공간도 없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질서정연한 아버지의 책장에 얹어둘 수도 없다. 오늘 따라 책장 맨 위, 먼지가 누렇게 깃든 족보로 눈이 간다.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마을에서 유래한 청주 한 씨 후손들은 양절공파에 속한다던가. 아버지는 은근히 정문리 충렬문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신 편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상주목사 한 씨를 따라 자결로서 정절을 지킨 부인 밀양 박 씨를 기리는 충렬문이다.

 

  난 물론 요즈음엔 자주 집에 오지 않는 편이다. 아버지 보기가 어째도 늘 면목이 없다. 우리 셋 중 하나라도 아들이 되어드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렇다. 아버지는 실제로 첫째인 내게 기대를 걸으셨던 것 같다. 더구나 은실이 대학을 포기했고, 옥실인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셈이니까. 초등에서 시작하여 중등으로 옮기시는 동안 힘드신 기억들을 떨치고, 딸애는 보다 확고하고 늠름한 학교에 남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한때는 아버지 은퇴 전에 내가 자리를 잡게 되리라 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런 희망을 아예 접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책상 위에 덜렁 공책 한 권이 놓여있다. 읽다 둔 책처럼 종이가 끼워져 있다. 아버지가 책갈피로 쓰시는 종이들은 다양하다. 약간 두께가 느껴지는 종이들을 버리지 않고 적당히 오려두신다. 이를테면 광고지도 거기에 해당된다. 사용된 봉투들도 마찬가지다. 거기 노란 봉투를 잘라낸 종이가 끼워져 있는 공책. 나는 겨우 노트북을 올려놓았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자꾸 아버지의 공책 쪽으로 간다. 내 책상과의 경계 쪽에 놓여서 열어주기를 재촉하는 듯한 환상에 젖는다. 나는 유혹에 굴하고 만다.

 

*

 

  파도소리는 그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은실이 대입에 실패하고 집에 처박힌 겨울을 뒤로하고, 3월엔 다시 기지개를 켜게 하려고 탐색 차 서울에 나갔던 차였다. 은실을 데리고 개학 전에 입시학원 등록도 하고, 아무튼 다시 서울로 나갈 수 있게 하고픈 마음에서였다. 양재동 누님도 은실일 그렇게나 챙기셨다. 서초동까지만 가면 좋은 학원들이 엄청 많다고. 그날 은실인 어디서도 건성만 같아 보였다.

 

  갑자기 새로 완공되어가고 있다는 그 다리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은실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새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아무튼 잊을 건 잊고 털 것은 털도록. 과거는 과거의 그 자리에 두어야 쉽게 잊힌다 싶었고.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8분경.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 붕괴. 우리 아이들이 그보다 15분 쯤 늦게 8시를 막 지나서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10분 15분의 간격은 찰나에 비하면 영겁이지만, 영겁에 비하면 찰나다. 은실인 지각하더라도 언니와 재잘거리며 같이 가려고 늑장을 부린 통에 살아남았다. 꾸물대다가 지각을 자주 했다는 은실이 고맙고 아슬아슬하다. 은실이 지각하지 않게 언니인 네가 함께 서두르라고, 늘 큰애를 다그쳤던 일이 생각나서 바지를 적실 뻔 했다. 녀석은 결국 고등학교 시절 내내, 아니 그 다음에도 울렁증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아니, 고등학교를 미리 서울로 내보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집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금실인 아무 일 없이 대학엘 들어가지 않았나. 큰애 혼자 내보내느니, 아무리 누님 댁이라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누님도 이상하게 은실이랑 함께 보내라고 극성을 떠셨다. 하긴 뚱하다 싶은 큰애만 보내놓으면 혼자 사시는 누님이 아무 재미도 없으실 것 같기도 했었다. 후회가 무슨 소용, 은실이 고등학교 생활을 망친 건 아무래도 이 애비 탓이렷다.

 

  다시 찾아본 다리, 새 다리는 교하 공간이 넓어서인지 미완성인 그 자체로 광활한 한강수면에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강물은 여전했다. 아니 여전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날의 피를 삼킨 물은 아닐 터. 무심한 강물.

 

  파도소리는 그 강물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날의 강물이 씻기고 씻기어 내려난 천 날의 시간들. 밤낮으로 우는 탄식 소리가 어디로 흘러들었겠는가. 이제는 먼 바다에 흩어져 먼지만큼도 핏방울을 지니지 못한 채 흩뿌려졌더라도. 핏빛 물소리는 지금도 거슬러 올라와 강가의 아비어미의 귓전을 때리리라. 그날이면 그곳을 찾아 목이 찢어지게 뿜어내는 통곡도 눈이 찢어지게 흘리는 눈물도 다시 강물에 섞이어 뒤따라갈까?

 

  등 뒤로 학원들의 안내장을 힘없이 쥐고 있는 은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딸이, 여기 내 곁에 서있는 내 딸의 모습이. 우리는 뒤돌아서 서둘렀다. 계획으로는 뭔가 맛있는 것이라도 사 먹일 양이었지만, 무엇인가에 쫒기는 듯 집으로 내달았다. 파도소리가 뒤따라왔다. 한강물이 파도쳐 넘실거릴 리가 없는데, 그것은 분명 파도소리였다. 파도소리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다.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바람 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밤새, 그 이튿날도 파도소리가 멎질 않았다. 온 세상이 파도소리로 뒤덮였다. 소리를 막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돌발성난청입니다.

  동네 이비인후과의 나이든 의사의 말이었다.

  보통 한쪽 귀에 이런 일이 오는데, 돌발성난청입니다. 큰 병원에 가셔서, 입원치료를 시작하세요. 응급상황입니다.

  의사는 밀려든 다른 감기환자 치료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큰 병원에 가는 날엔 두 애들이 다 따라나섰다.

  큰 병원에서도 단 한 가지 검사, 그 흔해 빠진 청력검사 하나를 했을 뿐인데, 약간 애송이로 보이는 초진의사 말도 이 질병은 바로 이비인후과의 응급상황이란다, ‘물론 죽고 사는 일’과는 무관하지만. 이런 증상이 언제부터냐, 혹시 다른 병원에서 대강 치료받은 적이 없냐는 등을 두어 번씩 묻고 다짐받고서 그가 하는 말이 진지했다. 돌발성난청은 거의 대부분 노년과 관계없이 이유 없이 찾아들고, 결국 문제는 스트레스일 가능성이 높지만 심지어 1/100 쯤은 뇌종양의 가능성도 있고 또……. 이유야 어떻든 간에 치유되는 확률은 발병 일주일 이내에 시작했을 때에도 1/3 수준이라는 것. ‘난청’이란 듣기 좋은 말이고, ‘청력상실’ 그러니까 귀먹을 확률이 더 높은 질병이란다.

 

  질병이란 단어가 내 남은 귀를 의심케 했다. 내 의식을 흠집 냈다. 또 질병이라면서 치료해도 별 소용없을 수 있다는 말도 이상했다. 절대로 죽을병도 아니면서 치료확률이 절반도 안 되는 질병이라니 진짜 웃겼다.

치료방법은 입원해서 일정기간 강도 높은 스테로이드 주입식이 최선, 다음이 통원치료로서 일정 시간에 귓속에 직접 소량의 스테로이드를 주입하는 방식이란다.

  최선은 지금 입원 하시는 방식입니다!

 

  입원? 방학 잘 지내놓고서 신학년도 개학 첫날 입원하겠다는 말이 나올까? 안 된다, 못한다. 또 갑자기 2주일을 쉬게 되면 담임이며 수업은 어떻게 되는가? 요즈음은 고2도 이미 입시 체제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학기 초 2주 병가는 마음 무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귓속에 약물을 주입하고서 비뚤게 누웠다. 아마 약물이 잘 들어가도록 하는 조치 같았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 느낌이 문제였다.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애들은 입원치료가 마땅한 것이라고 종알거렸다. 은실이 더욱 졸라댔다.

 

  밤이 깊어갈 수록 치료받은 귓속에서 버걱대는 소리는 무서웠다. 파도소리를 넘어 날개달린 벌레가 파닥거리는 소리였다. 바퀴벌레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는가? 겁이 났다. 어색한 미봉책을 다 참고 입원을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입원하러 가는 환자라지만 멀쩡한 사지육신이라 어딘지 어색했다. 아내 보기도 그렇고. 아무튼 보호자가 필요 없는 환자였으니까.

 

  병실은 식구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남게 되자 오히려 호젓함으로 편안했다. 앞 침대의 환자나 병실에 들락거리는 인력들은 관계가 아니어서 편했을까? 방해받는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 신기했다. 그보다는 오른 쪽 세상, 내 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상이 방해였다. 온갖 소리를 섞어서 몇 성부의 음악일는지.

 

  노트북 앞에 앉아 보았다. 학교랑 연결은 되어야지 싶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담임을 떠맡게 된 동료선생님에게도 인사라도 쓰고. 아니, 인터넷이 안 된다. 치료 장비들에 대한 보호라는 미명에 노트북을 쓸 수 없다니. 복도 한 켠 휴게실 구석에 동전 넣고 쓰는 컴퓨터에선 가능하단다. 각종 질병과 환자들로 뒤범벅된 병원에서 공동으로 컴퓨터를 쓰라고? 그래도 이메일 정도는 확인해야겠다 싶어서 컴퓨터 쪽을 기웃거렸더니 두 대 다 젊은이들의 차지였다. 온 세상은 붕붕거리고 머릿속은 혼란하고…….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려 한 시간여를 들락날락하다가 드디어 한 쪽 컴퓨터에 않았지만 웬걸, OO학교를 치려는데 ‘교’자에서 ‘ㅛ’가 들어가지를 않았다. 어찌어찌 홈페이지엔 접속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로그인 이름자에서 ‘ㅗ’자가 먹지를 않았다. 시간은 6분, 7분이 지나는 데도 끄떡없다. 하릴없이 10분이 넘어가자 분통이 터졌다. 사방이 분통 나는 세상이다.

 

  밤이 늦었다 싶었는데 담당의가 간호사실로 불러낸다. 엠아르아이 결과 내 뇌 속은 깨끗하다고 했다. 살았다. 뇌와 혈관이 나이에 비해서 젊다면 젊은 편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는 뇌졸중의 위험은 낮은 사람이다. 혈당이 올라도 혈압은 오르지 않고, 그러니 심근경색으로 죽을 확률도 낮다. 복장이 터져서 복막염 수술을 하게 된다면 몰라도.

 

  치료방식에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을 한다. 스테로이드요법이란, 처음 4일간을 하루 한 번 80mg씩 투여하다가 차츰 줄여나가는 방식이란다. 스테로이드? 그건 간혹 욕심내는 운동선수들의 치팅용 약물 아닌가? 듣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이 끄덕이고 있다가 들어오는데 오른 쪽 세상의 소리는 더욱 자지러진다.

 

 

  진단서를 들여다본다. 그 사이 첫날의 패닉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벌써 며칠 째인가. 진단서가 꼭 필요해서 발급받은 것이다. 정식 병가서류에 첨부해 제출해야하는 서류다.

 

  우측돌발성감각신경성난청. 한국질병번호 H91.2 - 뭐? 91.2 메가헤르츠로 들리네.

  상기환자 상기병증으로 1997년 3월 4일부터 3월 14일까지 입원치료 요함.

  의사 아무개. 동그란 도장/싸인. 네모다란 큰 병원 직인.

 

  나는 그러니까 천천히 주로 왼쪽 귀로 찾아오는 노인성 난청이 아닌, 특수한 난청의 습격으로 입원치료를 요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스테로이드를 팍팍 근육주사로 집어넣는 것은 ‘기’를 올리는 방식이란다. 이명과 관련해서는 타마민이라는 약물을 하루 2회 한 앰플 씩 생리식염수에 혼합하여 혈관에 주사한다. 전에는 피검사나 혈관주사를 맞아야할 때 팔의 혈관이 잡히지 않아 무진 애를 썼는데, 요사인 조금 좋아졌나 보다. 팔에서도 곧잘, 또 여러 번 찌르다보면 손등에 바늘이 꼽힌다. 또 타마민을 주사하는 바늘은 아예 팔 어느 한곳에 심어놓는다. 3일 동안은 그대로 바꾸지 않기 때문에 팔을 뚫리는 고통은 훨씬 줄었다.

 

  물론 주사요법이 만능은 아니다. 약물마다 병발하는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이 스테로이드만 해도 평소 혈당이 높은 환자에게서는 혈당이 급격히 높아지는 문제가 병발한단다. 그것을 인슐린주사로 컨트롤해야하기 때문에 입원이 불가피하단다. 또 1/100 확률이긴 하지만 엠아르아이 검사를 해야 했다고. 왜냐고? 뇌 속의 청신경 주변의 작은 종양이 이러한 돌발성난청을 유발하기도 하는 거란다. 무섭다.

 

  하기는 그 어디에 속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입술에 조금 묻힌 만큼만 손상을 입은 것이다. 조금 우습게 보이면 어떠랴. 행동거지가 너무 바보 같다면 정년을 앞당기면 그만이다.

이제 입원 후의 내 몸은 내가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나는 그저 낮에도 침대에 누운 채 과거의 파편들을 다른 사람 이야기를 읽듯이 되돌아보고 있다. 썩 괜찮은 일들도 많았다.

 

 

  수돗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 있는 것 같은 공동 수돗가였다. 수학여행 중이었다. 화장실은 남녀가 있었지만 세면실은 그렇게 수도꼭지가 앞뒤로 여남은 개 씩 달린 공동수돗가였다. 여중학교에서 남교사들은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그때는 한참 젊을 때였고 교장선생님부터 여자인 교정에서 늘 어색한 기를 못 펴던 때였다. 젊은 수학교사는 담임 우선순위에 들기 때문에 담임을 맡게 되고, 또 담임을 맡다보면 수학여행이 따른다. 그날도 그렇게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입에는 칫솔을 문 채 수돗가 빈자리를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선뜻 내주지는 않는다. 여학생들은 남선생님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줄줄이 세수를 하는 광경은 어찌 보면 너무 적나라했다. 목이며 발이며를 드러내놓고 문질러대는 장면은 자칫 외설스럽기까지 했다. 가능하면 먼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저 끝 수돗가 여자의 동작에 시선이 빨려갔다. 귀를 씻고 있었다. 귀를, 한참 동안을 귀만 문지르고 있었다. 귓바퀴를 위아래로, 귓바퀴를 앞으로 숙이면서 뒷부분을, 귀 안쪽을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귓속을, 귓가를, 다시 귓바퀴를 위아래로, 귓바퀴를 앞으로 숙이면서 뒷부분을, 귀 안쪽을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귓속을, 귓가를.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귀를 만졌다. 귀로 손이 갔다고 하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귀, 귀가 어때서 저리 빡빡 문지르나?

 

  귀가 어때서? 물론 귀도 코만큼은 아니라 해도 돌출부분이니 대충 씻다보면 손에 걸리고 그러면 씻긴다. 하지만 저리 공을 들여서?

 

  귀를 한정 없이 씻던 여자는 얼굴에 비누거품을 내어 박박 문지르기를 한참 하더니 이내 목으로 내려갔다. 가을이라지만 산간의 아침, 추운 공기에 노출되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얄따란 스웨터가 젖어드는지도 모르고 세수에 열중한 여자. 여자의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 깨끗함 그 자체였다.

 

  상대적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의 세계는 더러웠단 말인가! 그랬다, 나는 귓바퀴를 잘 씻지 않고 아내와 함께 잠들었을 나날들이 부끄러워졌다. 그 수학여행 이래로 나는 정말 잘 씻기 시작했다. 귓바퀴만이 아니라 온 얼굴에서 후미진 곳을 찾았다. 팔다리로 나오면 팔꿈치 안쪽, 팔목, 손등, 손가락들 사이, 발가락들 사이, 발가락과 발바닥이 붙는 곳, 발뒤꿈치, 발바닥 움푹한 자리, 복숭아 뼈 아래, 몸속에도 움푹하거나 으슥한 곳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갑자기 온 몸을 후벼 씻는 내가 아내에겐 이상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피우고 들어온 남편들이 집에 들어가서는 늘 씻어댄다는, 그런 속설? 아내는 의심을 키워 갔을까? 의심이 100%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내가 욕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산간 수도꼭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교무실에서는 오른 쪽 비껴 옆으로만 보이는 그녀의 자리를 향하느라 고개가 삘 지경이었고, 운동장 조회시간이면 어떻게든 그녀가 서는 자리가 잘 보이는 곳으로 내 자리를 잡았다.

 

  그 동안에는 왜 한 번도 그녀가 눈에 띄지 않았을까? 미녀도 아닐뿐더러 젊지도 않았고, 여자냄새 없는 그냥 보통 사람 같은, 조금 깐깐해 보이는 것 이상으로는 별다른 특징 없는 아줌마교사. 그녀가 내 눈에 띄었을 리가 없다. 결국 평상시에 단 한 번도 따로는 쳐다보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은 그날 새벽 산간의 수도꼭지 아래에서 내 망막에 입력되고 말았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떨림과 불안과 환희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동 학년을 맡은 ‘우리’는 가끔 가까이 만날 기회가 생겼다. 교무실 내에서의 무심한 접촉 하나에도 전기가 일 줄을 누가 알랴. 무신경해보였던 그녀에게서 감춰진 섬세한 감각을 발견하고서는 얼마나 떨렸던가. 담임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예정이 발표된 그날부터 막혀오는 숨을 고르기가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이상한 행복을 수반했다. 방향이 달라서 택시도 한번 함께 탈 수 없었던 나날들. 무슨 일이었는지, 학기말 성찬이 끝나고 동료들이 하나 둘 술이 취해서 흩어진 어느 날 밤. 추운 겨울 밤. 어려서 한 방에 들 수 없었던 오누이마냥, 어디 한 데 참새구이 집으로 유인한 나를 따라나서 준 그녀. 내 평생 알고 있는 멋진 위인들 인용을 죄다 끌어내어 멋있어 보이고자 했던 처절한 짧은 시간. 그녀는 그렇게 함께 택시를 타고 오고간 시간만을 허락했다. 그녀의 집께 이르러 따라 내리려는 나를 말리며 잠시 내 손등에 얹어준 그녀의 손가락, 다섯 아닌 넷. 아니 짧아서 미처 못 닿은 새끼손가락 빼고 셋. 겨울이어서 차가왔을까? 오싹하리만치 얼어붙어서 꼼짝할 수 없었던 순간. 차가운 그 손가락을 마주잡지 못한 나. 그때부터 나는 내 오른 손 등을 철저히 씻어야할 몸에 넣을 것인지 아닌지 혼란 속에 살게 되었다. 나는 어느 새 오른 손을 덜 쓰는 양손잡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앙상한 손. 밖으로 뻗친 너무 짧은 새끼손가락. 완벽한 샤워. 비누칠이 아까운 오른 손 손등.

 

  그것은 참 길고도 오랜 어쩌면 영원한 이야기가 되었다. 생애에서 어떤 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 영원으로 변해있다고 깨닫게 되면서 나는 가끔씩 감정의 발작을 경험했다. 그해 겨울을 나면서 지독한 열감기에 시달리다 못해 봄방학에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녀가 타교로 전출되던 시기였다.

 

 

  소문은 멀리 빙빙 돌아서야 내게 이르렀다.

  수돗가 선생님이 다른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난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설악산 모퉁이에 이은 참새구이집 기억에 사로잡힌 내가 세상 물정과 담을 쌓고 멍하니 집과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는 진정한 진통의 시절로 들어가고 있었다. 교원이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지 못한, 대부분 타성에 젖었던 우리와 달리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첫 단추에 끼이지 못했고, 조금은 미안한 느낌과 죄스런 마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고칠 것이 기본적으로 산재해 있다는 진단 부분에는 동감했지만, 그것이 노조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천지가 그러거늘,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도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그런 우리는 그 조그만 생활안정으로 마치 기득권 세력에 속한 양, 꼭 그런 붙박이형은 아니라 해도 세상을 뒤바꿀 꿈 따위를 꾸어본 적이 없었던 셈이었다. 좀 더 열심히 좀 더 양심적으로 잘 가르쳐 보자는 것. 입시위주 공부만이 아닌 무엇인가를 더 심어주어야 하리라는 막연한 생각.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자는 정도. 무엇 보다 모든 학생을 평등하게 대한다면! 그런 변명으로 안이해져 버린 세월이었다.

 

  비겁했다. 그 동안 교육현장이 들끓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면 나는 비겁했다. 처음 전교조 결성 과정의 파장에 이어 이듬해 가을에는 조합원 교사들이 천 여 명씩 해직되었다. 그때도 가슴 아픈 한 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외면 한 것이 사실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몇 번씩 오고 가는 동안, 학교 한번 이동하고 거기에 적응하고 하다보면 생이라거나 교육이라거나 원래의 의미 같은 것에 골몰할 시간도 틈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듬해, 해직교사 거의 전원의 복직신청 뉴스와 물려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흘렸다, 나의 그녀인 것을 아무도 모르는 채로.

 

  그 새침데기 선생도 복귀했다는군요!

  누가, 그 새침데기 선생이 언제 해직되었더랬소?

  그걸 몰랐어요, 열성당원이었다던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그 꽁한 성격으로 어찌!

  성격하고 전교조하고 무슨 상관이요! 외려 꽁한 사람들이 거기 많으면 많았지.

  하기는.

  그러니까 삼년을 넘게 해직?

  그랬대요, 그게 공동운명체 아뇨!

  아니, 가정과에서 따로 무슨 참교육을 한다고!

  하기는.

  하기는 말고는 뭔 말이 없소? 아, 고로켄가 카스텔란가 그런 것 안 만들고 이밥에 쇠고깃국 맛있게 끓이는 법 가르치면 안 되겠소!

  이 양반들이, 빈정대기는. 하기는 여자가 시집가믄 밥 맛 좋게 짓는 것이 제일로 중하제요.

  아 거기선 어디 여자더러만 밥을 지으라 하는가요! 남녀평등하고 역할구분도 안하려 드니까 문제지.

  밥이 꼭 역할구분과 관련은 안 되지요, 전 혼자서 밥 잘 짓습니다.

  노총각 박샘이사 욕심에서 그리된 것뿐이고.

  욕심요?

  각시 벌어 먹이자믄 아까워서 혼자 살고.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 일로 이혼까지 갔다니까 그렇죠.

  누가? 아까 그 새침선생말여요?

  암튼, 그것도 시작하면 신앙이 될 거요.

  아무리 그것이 이혼사유가 될까요?

  것도 어찌 보면 이데올로기인데.

  그래요, 살을 섞어도 머리를 섞지 못하면 비극인거라…….

  맘 다른 사람하고 이혼 하지 않고 살면 뭐 하겠소. 더 끔찍하지.

  거 무섭네요.

  그만들 둡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가지고.

 

  1990년대 만해도 이혼율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으니 이혼이 화제감은 되었다. 그 여자가 이혼을 했다고? 이혼을 했구나! 그럼 더구나 복직이 되어야 했겠구나. 그제야 나는 전교조 관련 뉴스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이유에서. 대개 학교마다에 전교조 가입교사들이 있었으니, 조금 관심을 가지면 열성 노조원인 그 여자의 소식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전교조 탈퇴확인서를 쓰라는 정부에 맞서 위원장은 공무원법 준수 각서로 대체하는 조건에서 정부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단안을 내렸고, 교사들은 돌아왔다, 물론 나의 그녀도 함께.

 

  그러나 다시 한 번 같은 학교에서 근무 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았다. 내가 우선 여학교 발령을 원칙적으로 선호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돗가 사건 이후 그녀가 먼저 전근했고, 한 해를 더 근무하고 내가 전근신청을 할 시기부터는 단연 남학교를 택했다. 남자에게 편한 성은 역시 남성임을 절감하면서. 녀석들하고는 수학여행을 떠나도 수돗가에서 서성거리지 않아도 되고, 경이로운 어떤 장면들을 보게 될 일도 없으니 편했다. 삶이 무엇인가, 편한 것이 편한 삶이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제 다시 그녀의 해직과 복직이 화두로 떠돌 때에 이르러서야 잠복성 바이러스가 다시 활동기에 들어갔다. 또 다시 열심히 박박 문질러 씻기가 도졌다. 난 늘 그 수돗물 소리를 듣는다.

 

 

  강박증이 나를 삼켰다. 갑자기 내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지나 않을까 겁이 났다. 가슴통증 때문에 순환기내과를 찾았을 때, 내과의사는 정신신경과를 권했다.

 

  나에게는 어떤 더러운 것에 대한 억압된 생각, 감정 또는 충동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끈덕지게 되풀이하여 의식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경우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책상서랍에 열쇠를 채우고 퇴근하는 길인지 몰라서 다시 교무실에 들르곤 했다는 고백은 나를 강박신경증적 소질이 있는 소심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강박관념에 불안이나 공포가 따르는 것은 병은 아니라는 전제에서도, 나의 경우 남자가 살갗이 벗겨질 정도까지 씻어댄다면 분명 어떤 지우고 싶은, 잊고 싶은 불편한 기억의 방해라는 진단이었다.

 

  천만의 말씀. 나는 사실 내 몸이 청결하지 못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녀와 비교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녀와 비교해서. 상상 속의 그녀와 비교해서. 의사의 말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고민에 빠지게 되는 지적 강박증보다는 순한 놈이라고, 다만 나의 경우는 보통 손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강박신경증과는 달리 온 몸을 씻어대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느냐고.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은 완전한 청결을 유지할 수 없다는 대 전제를 나에게 인식시키고자 오랜 정기적인 상담을 권했다.

 

  그런 주인공들을 문학작품들에서 볼 수 있으셨겠지요?

  무슨?

  강박신경증적 행동의 주인공들 말입니다. 손을 너무 자주 씻는 사람, 또는 문은 제대로 잠갔는지 물은 잘 잠갔는지 나가다가 다시 들어가서 보고 또 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강박신경증 때문에 신경정신과에서 예컨대 그로민을 아침엔 25mg, 저녁엔 60mg 정도는 처방받아 복용중인 사람 말입니다.

  약물처방만 빼고는 제가 바로 그런데요. 남이 봤을 땐 우스워 보이지만 저로선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인도를 걷다보면 제가 무심코 빗금 선을 밟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이런 행동들이 본인 스스로도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행동이라고 인지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중지하려고 하면 심한 불안감을 경험하게 되신다는 거죠!

  예, 제 스스로는 제어할 수 없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초조해지기 때문에…….

  네, 그렇습니다. 그 정도가 생활에 장애가 된다고 느끼셔서 진료상담을 받으러 오신 게지요. 본인 스스로 인지한 것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판단하시는 건가요?

  당연하죠, 비이성적, 그래요, 비이성적 행동인 줄을 알기에 이렇게.

  그렇다면 그런 비이성적 행동을 무시하는 연습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조금 쉽게 해보는 방법으로, 머릿속으로 자신의 다른 자아를 설정해놓고, 이 다른 자아를 진정한 자아라고 간주하시고, 원래의 자아를 별개의 자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이성적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너는 참 이성적인, 비합리적인 녀석이다.”라고 큰소리로 외쳐보는 것입니다. “이런 멍청이야, 너 지금 뭘 하고 있어!” 이렇게 욕을 해보시거나.

  예, 바보 멍청이죠. (단 한 순간도 이 떨림을 말해보지 않은 너. 꿈에도 생각도 해보지 않은 너. 가슴앓이는 당연지사라고 믿고, 뭔가 낌새를 들키는 짓일랑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나서 가장 못난 짓, 몹쓸 짓이라 규정해버린 너. 거짓 평화가 최선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너…….)

  더 심한 모욕도 좋습니다. 만일 효과가 있으려면…….

  네? 꿈의 효과요?

  꿈이라뇨! 꿈 이야기는 드린 적이 없는데요. 선생께선 꿈속에서 불안감이 가중되시는 건가요?

  (아니, 꿈이라면……. 나의 꿈은 무엇이련가!)

  일반인들 가운데 유병률은 2~3%나 되니까 극히 드문 장애는 아니십니다.

  그건 그리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닌데요.

  아니 위안이란 이 경우 본인 스스로……. 그보다 발병 시기가 보통의 경우에 비해서 좀 늦게 나타나신 경우인데…….

  어른들이 걸리는 확률이 낮다 말씀이십니까? 확률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가 만일 강박신경증 환자군에 분류된다면 그건 1/2 확률이지요, 이다, 아니다.

  사실 이 경우 환자들은 대개 학력이나 지능이 높은 수준일 때가 더 많지요.

  지능이 높아서 걸리다니요? 지능을 감별하는 바이러스라?

  선생님도. 바이러스 감염이 아닌 것은 잘 아시면서. 차라리 유전성이라거나 가족성 발병 경향이 높은 셈이죠. 그러니까 가족력으로 미루어 우울증이나 대인공포증 등과 같은 정신과적인 질병이 공존하든가?…….

  그러면 저는…….

  선생께선 안정된 직장이 있으시고, 교사라는 직업 상 아무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실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문제에 대한 통찰력이 있으신 것으로 보아서 분석정신치료로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환경 여건에서 오는 자신의 증세 악화를 인정하면서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으신 것으로 보아서. 참 그런데 감정표현은 잘 하시는 편인가요?

  실은 그것이…….

  감정 표현을 스스로 억제하려는 것, 전형적으로 가부장제 하의 가장증후군입니다.

  가장증후군요?

  하하 농담입니다. 출세지향형이 아니라 해도, 이 시대 가장들께서 흔히 붙들려 계시는 군자삼락 말입니다.

  삼락? 우선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라지만, 어디 양친도 형제도 마음대로…….

  그것도 실은 자괴감을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불효로 돌아가신 것만 같고, 우애를 다하지 못함도 불효인 것만 같고. 그런데 이 시대에 효다 우애다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니지요.

  예? 우애요? (아차, 내겐 유난히 나를 따르던 사촌이 있었지. 친 동기간은 아니라 해도 유일한 동생. 밭둑을 지나다가 무도 쓰윽 뽑아 그냥 옷에다 쓱싹 문지르고 먹던 녀석.)

  남자들이 터놓고 말을 못해 그렇지, 가부장제는 안팎으로 협공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그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근거도 무너지고 있는 것이고. 게다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니 힘에 부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마지막 즐거움은 저절로 누리시겠지만.

  무엇인가 전도된 느낌이었다. 소위 정신과의사 자신이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라 할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정신과의사나 상담치료사는 자신이 말하기보다는 환자의 입을 마음을 열게 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사는 내가 사내 살갗이 닳도록 씻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병을 고쳐줄 뜻이 없어 보였다.

  다른 강박적 행동들을 수반하지 않고, 다만 강박적 씻기라면 중년남자들에게서는 흔치 않습니다. 능욕을 당한 처녀들에게서나 흔히 보이는 과민반응이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서는 병적 증후와 연관될 트라우마가 발견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숨겨진 원인이 이렇듯 애매하다면…….

  숨겨진 원인이 꼭 있어야 합니까?

  원인이 될 수 있을 심적 타격 등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대응기제를 찾아가기가 어렵다고나 할까요. 선생님께서는 혹시 마음속에 멀리…….

 

  중년남자가 혹시 ‘몸을 더럽힌’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눈빛에는 이상하게도 어스름 물기가 아닌 붉은 기름기가 번져 나오는 듯 했다. ‘마음이 더럽게’ 흔들렸으되 몸을 더럽힌 적이 없는 남자는 이곳에서 치유될 수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남자의 마음 흔들림을 상상하지 못하는 남자 의사라!

 

  선생께선 반복적인 손 씻기 이외에도 강박적 행동이 발견되시는지. 예컨대 물건 정돈은 어떠십니까? 정리정돈에 억매이시나요? 대문을 닫고서 의심하고 다시 올라간다거나, 아니, 책의 읽은 부분을 다시 읽고 확인하려는 것, 것보다 과거에는 어떠셨습니까? 학생 시절 시험답안지 같은 것을 제출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확인 또 확인해야…….

  지난 시절에까지 거슬러서요?

  아니, 뭐. 청소년 시절 손톱 물어뜯기 등도 강박행동에 속합니다만. 앞날에 대한 지나친 걱정, 걱정을 이미 걱정하신다거나?

  저는 그러니까 뭐랄까 다른 증상은, 아니 저는 실상 고민이 될 일이……. 그러니까 말씀드릴만한 일이. 해서 이만…….

  아니, 치료를 거부하실 의향이시라면…….

  아니, 제가 급한 다른 일이 생각이 나서. 그럼…….

 

 

 아차, 그럼 그 파도소리는 서러운 강물의 울음이 아니라 귀를 씻는 수돗물 소리였을까? 아니다, 지금은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는 대신에 내일을 생각하려고 한다. 나에게는 어쨌거나 내일이 있다. 아직은 병원에서 맞을 아침이겠지만. 언젠가는 새소리도 들려올 것이다. 어쩌면 벌레소리도.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복도 끝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커피봉지를 쏟아놓고 앉은 참이었다. 어느 녀석이 전화라도 하려나? 휴대전화를 살아있는 귀 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미미한 삐이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이명이거니 했다. 기다리자, 어제 오늘은 이명도 가만히 참고 있으면 더 빨리 잦아든다. 아니? 청각검사실에서 들려준 쇳소리인데 착각인가? 아니다. 그 미세한 불규칙한 것은 쇳소리가 아니라 분명 벌레 우는 소리였다. 살아있어서 불규칙하다. 아직 추운 3월 어느 아침, 내가 아직 벌레소리를 듣는다! 경이에 가까웠다. 1/6 확률을 뚫고 내 귀가 회복되어간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저 벌레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다.

 

  어라? 벌레소리를 따라 무심코 따라간 눈. 그곳엔 수풀도 동산도 아닌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시멘트벽사이에 난 나무문. 그 너머엔 길고긴 복도밖에 없는 병실건물. 벌레소리를 따라 병원복도로 향한 내 엉뚱함은 코미디였다. 청각 따라 방향감각을 잃게 되는가. 더 또 무엇을 잃어갈까.

 

  정말이었다. 내 고개는 창밖이 아닌 복도 쪽 닫힌 문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 쪽 귀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창밖의 나무는 오른 쪽인데, 벌레는 그냥 왼쪽 귀에서 울고 있었다. 내 세상은 이제 모두 왼편이다. 오른 쪽에 몸담고 왼쪽을 동경해온 삶의 귀결이런가. 내 오른 쪽 귀는 더 이상은 오른 쪽 말을 듣지 말라한다. 새가 울어도 벌레가 울어도 그것은 왼쪽 세상이라 한다. 왼쪽 온 세상. 반쪽 온 세상.

 

*

 

  아버지의 공책은 거기서부터는 하얀 여백으로 멈춰 있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남은 귀 하나로 무서움을 타시는 구나. 회갑이란 그런 것인가. 정년이란 그런 것인가. 늙으신 아버지에게 변변한 자식도 없으니…….

 

  드르륵, 어머니가 방문을 여신다.

  어둡지 않아? 불이나 켜고 있지. 아버진 아예 늦으신단다. 건너 온, 저녁 먹자.

  승연이 승주는요?

  빨리도 챙긴다. 아까 승연이가 방문을 열어도 모르고 있더니. 애들은 벌써 먹였지, 시간이 몇 신데.

 

  밥상은 늘 소박하다.

  엄마, 아버진 정문리 가심 맨날 늦으세요?

  낸들 알아. 윤달 앞두고 뭘 궁리하시는지. 느닷없이 부산삼촌 이야길 하시질 않나, 원.

  부산삼촌요?

  그래, 그 왜 부산에서……. 관둬라, 너흰 잘 모른다.

  어머닌 그 이야기를 접으신다. 그리고는 관심의 화살을 내게로 정조준하신다.

  그런데 넌 여태도 달랑 혼자서…….

  엄마, 엄마 나물들 언제나 맛있어요. 나물 맛이 어쩜…….

  나는 부지런히 밥을 먹는 척, 엄마의 화살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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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국제펜광주』 제10호, 2012, 238-260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2. 13. 00:13

 

3일


 

4월의 어느 수요일.

자매는 서둘러 집을 나서면서 둘 다 그것이 그 첫 날의 시작인 줄은 몰랐다. 언니는 자꾸 집을 돌아본다. 혼자 있는 남편이 마음에 걸려서다. 오늘은 그가 외출하는 날이니 점심 염려는 없는데도 본능적으로 점심 걱정이다. 혼자서는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남자인 셈. 챙겨먹지 못하기야 할까만, 그러면 슬퍼지는 남자니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손수 제 식사준비란 한국남자들에겐 치명적인 설움이요 수치의 근거였다. 동생의 남편은 하루쯤 아내를 언니 집에 두고 갈 만큼은 속이 넓다. 언니 집은 병원 가까이 있으니까, 게서 장모님이 오늘내일 하는 터에.


병원 입구부터 둘은 종종걸음이다. 간호사가 알아보고 웃는다.

뛰지 마세요, 밤새 많이 좋아지셨어요!

밤새 좋아지셔요?

좋아진다니? 불가능한 단어다. 그래도 간호사의 단호한 어조에 작은 안도를 느낀다. 둘은 숨을 돌리며 어머니의 병실로 향한다.


아침 인사.

어머니, 엄마!

그대로다. 급격히 악화된 상태라는 통에 자식들이 밀물처럼 닥쳤다. 몇은 남아서 밤새 곁을 지켰다.


어머니, 엄마!

좀 어떠셔요? 많이 아프셔요?

말을 끊다시피 한 것이 하루 이틀. 다만 무표정의 인사. 인사도 아니다. 듣기는 하실까?


언니가 서둘러 병실을 나간다, 일 때문에. 동생이 따라 나간다.

혼자 괜찮겠어?

걱정 마, 언니. 이따가 또 오빠랑 동생도 다시 들른다는데.

그래, 난 어제 해 줘야 할 일을 못해서.

알고 있어, 해 줄 일은 해 줘야지. 뭔만 안 나면…….

설마 뭔 일이야, 오늘은 아닐 거야.


점심시간이 지났다. 다시 언니와 동생이다, 어머니랑 함께.

어머, 혼자 있어?

아니, 응. 다들 다시 왔었는데, 언니 올 거라고 가라 그랬어. 교대해야지 어떻게.

그래, 너도 오늘은 집에 가 봐.

그래야지. 참 막내가 퇴근해서 오면 7시에는 온다네. 그때까지는, 그때까진 있겠지?

그럼, 당연하지.

엄마, 저 오늘은 집에 다녀와요, 낼 뵈어요. 언니랑 계셔요.


어머니가 뭐라 대답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으응. 그렇게까지 정확한 단어는 아니지만, 무슨 웅얼거리는 소리, 희미하게나마 알아듣는 척하는 소리인 것 같다.


*


나는 당번이 되어 일지를 쓰는 기분으로 어머니의 병상을 지킨다. 내가 원래 그 모양이다. 숨소리는 고르다, 다만 아침 보다 조금 커진 것 같다. 두 발과 다리는 여전히 부어있고, 가만, 창백한 발이 어쩐지 푸르스름하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은 자꾸 미끄러진다. 아예 내려놓는 것이 나을 듯싶다. 두 눈은 감겨있다. 주무시는 걸까?


어머니!

…….

어머니!

눈을 뜨시지도 않는다. 더 좋으실 때에도 나랑은 별 말씀이 없으셨다. 미열이 있는 듯. 혈압은 낮다고, 간호사가 그런다. 원래도 그런 것이, 집안 내력 중 하나인 걸 안다. 어쨌거나 무변화, 무반응.

뭘 하지, 뭔가 뜨개질거리라도 가져올걸 그랬다 싶다.



네 시경.

주렁을 집으신 백모님이 들어오신다. 사촌이 모시고 왔다.

꿈자리가 며칠 너무 안 좋아서야.

그렇다고 고맙게도 어떻게 걸음발을 하셨어요, 큰엄니!

느그 어무니 영 사람 못 알아보는 갑다.

글쎄요. 어째 말씀이 없으시네요, 어제 오늘.

젊어 이래 육덕 좋아, 기운 좋아, 멋대로 쓰며 살더니만. 나이 들어서도 펄펄 날고 다니던 사람이…….

큰엄니라도 건강하셔야 해요!

나가 먼저 가야하는디. 이 망령, 산송장이.

뭔 말씀을.

결국 어머니가 아무런 소리도 못 알아듣는다 싶으니 그냥 나가신다. 멀리 주렁의 여운만 남는다. 여운은 내 마음에 과거를 불러낸다.



어머니야 신나게 사셨지. 문자 그대로. 그렇다고 그렇게나 사사건건 어머니한테 대들었을 건 뭔가. 쌀쌀맞은 큰딸이 서운했을까, 콕콕 찔러대는 불평이? 어머니를 실망시킨 큰아들이 더 서운했을까? 어쩌면 그 배신의 대가로 더 잘 먹고 잘 사는 아들이? 

어머니는 전통적 가정부인의 삶을 일찍이 거부했다. 진부한 집안일 대신 새빨간 매니큐어가 자유부인의 상징이었다. 그래, 난 그냥 어머니를 용서 못했지. 아니, 어머니를, 정상적인 어머니를 원했을 뿐이다. 어머니가 없는 순간에. 어머니는 그렇다고 여성해방론자들과 가깝지도 않았고, 어머니의 삶은 자율권을 가진 여성의 정점에 이른 것 같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냥 없는 순간이 더 많았다. 그냥 삶의 진부함을 잊는 것. 두부와 콩나물을 사고 마루를 훔치는 이미지를 간단히 버렸다. 너무 멋진 어머니는 늘 죄스러웠다, 내가 어렸던 그 시대에는. 난 알고 있었다, 다른 어머니들은 더러 굶고 있었다, 자식들을 위해서. 젊어서 더러 굶었을 어느 어머니가 옆 침대에 누워있다. 그런 상상에, 저 새까맣게 말라빠진 저 손등을 보기가 부끄럽다. 간병 의자에 앉아서 멍한 상념에 빠진다, 점점 더 깊이.



그래, 언제였을까? 희미한 방, 서랍 속의 사진. 왜 그 방에를 갔을까? 그곳이 어머니의 방은 아니었다. 뜰의 샘가에서 가까운 동생들의 방. 집에 수도가 들어오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 때 우물이 식수의 유일한 원천이었으니까. 샘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어쩌고 - 분명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 무심코 그 방문턱에 앉았다가……. 그게 왜 그 서랍에서 나왔을까? 이상한 사진 한 장. 얼굴을 뒤로 한, 지금 생각하면 누드화의 모델 포즈? 피사체는 어머니? 그 반지, 보석 알이 큰 반지는 분명 어머니임을 알아보게 했다. 분명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다른 보통 어머니답지 않게 발이 넓었다. 어머니에게 화가 친구도 있었을까? 어린 마음에 화가 생각은 못했다. 예술적 시도라고 상상했다면 더 이해하기가 쉬웠을까? 분명 예술작품이었다! 사진을 누가 찍었을까? 그 의문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누가 찍었는지 모를 사진. 사진이 찬미하는 대상은 곧 나의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미움은 더욱 자라나기만 했다.


왜 지금 와요?

응, 조금 전에 나갔다.

미리 나갔다가 우리들보다 먼저 오지 왜. 왜 이제야 오느냐고, 이리 늦게!

몇 신데 그래? 무슨 일인데? 조금 전에 나갔다니까. 저녁들 잘 먹었지, 응?

저녁? 제때 밥이면 다야? 엄마가 날마다 늦게 오는 집이 어딨어! 놀다가!

다른 집 딸들도 이런다냐, 제 엄마한테. 이 쌀쌀아. 오빠동생들도 조용하고만.

다른 집은 딸들이 늦어 야단이지, 뭐 이런 집이 다 있어. 이렇게 사는 것 싫어.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를 할퀴어댔다. 어머니 나들이에 잔소리를 하는 딸. 어른들에게 말대꾸는 영 버릇없다는 사회에서, 아주 이상한 관계. 출구를 모를 악순환이었다. 엄마에 대한, 그러므로 온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우울한 세월이었다. 나는 내 삶이 정말로 싫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모른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존재하니까. 어머니는 발이 넓었다. - 아차, 이게 뭐야?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왜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지? - 반대로 나는 사람들을 피하는 편이다. 내 결혼식에 온 수백 명 손님 중에 내 손님은 단 네 명이었으니, 한 신혼부부와 두 동창생. 나는 집에 집중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언젠가 딸에게 질책당하는 엄마가 되는 것은 싫었다. 어느 정도 성공했을까?



7시 10분 전.

내 눈은 벽시계로 간다. 어머니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으로 살아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과거형으로 말했던 죄책감에 떤다. 어머니는 무표정. 다행하게도 고통스러운 표정은 아니다. 간호사가 고무호스로 코로 죽을 집어넣는 순간마저도 아주 조용하다.

은근히 집 저녁 걱정이 인다. 아침에 서둘러 나오느라고 아무런 준비도 안 해 놓았다. 휴대전화 벨 소리.


언니, 어머닌 어떠셔? 나 터미널에 도착했어. 나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 봐. 곧 병원이야.

응 그래, 뭐 아직은. 서둘지 마.

염려는. 다 왔다니까.

그래, 그럼 밤새 고생 하겠구나.

아니 걱정 마, 큰오빠도 올 거라 그러던걸. 



큰오빠도 올 거라니, 정말? 의아해 하면서 어머니를 바라본다. 오빠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을꼬. 병실 생활 7개월째를 접어들면서는 포기하신 줄 알았다. 적어도 말씀으로 그러셨다.


연락할까요? 

…….

연락할까요?

관 둬라.

연락해야죠?


묵묵히 고개만 가볍게 돌리시더란다, 동생 말이었다. 어머니는 오빠가 그 사건이래 모든 상황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줄 다 아시는 게다. 게다가 오뉴월 녹두 깝대기 터지듯 하니, 큰오빠에겐 사실 누가 말을 붙이지도 못한다, 하고 싶지도 않고.


오빠가 온다고?

아무튼 갈 시간이다. 나가려다 말고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또 시계를 본다. 아직 2, 3분이 남았다. 간호사가 그냥 가란다. 하긴 간호사 둘이 번갈아 붙어있다. 그걸 보면 위험하신 상황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막내가 곧 도착한다지 않은가. 


차로 향한다. 계기판에 표시등이 들어온다. - 기름이 바닥이다. 아차, 어제부터였지. 주유소까지 들리다 보니 마음이 더 바쁘다. 막내는 벌써 병원에서 전화다.

엄마 병실에 도착했어. 걱정 말고, 언니나 안심 해.

안심? 

최소한 아무도 없이 운명하시게 놔 둘 수는 없다는 뜻에 불과하다. 임종 자식이 효자다, 뭣보다 우선하는 효다. 유교에선 부모에 표시하는 최고의 존경이다. 관습이 그렇다. 어떤 탕자도 임종 시에는 용서된다. 아무튼 어머닌 숨을 규칙적으로 쉬고 계시는데. 큰 염려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심때부터는 삼키는 기능도 떨어졌다는 생각이 난다. 저녁식사는 호스로 직접 위에다 공급했지 않은가. 간호사는 그랬다, 호스공급은 필요하고 또 꼭 위험하지도 않다고. 그러고도 보통 몇 달을 가는 환자들도……. 왔다갔다 상념 속에 집에 이른다. 늦었다.



어머닌 참 안 좋으시네요. 하필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소까지 들르느라고.

누가 늦었다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 중얼거린다, 무언의 고발에 대한 보이지 않은 변명처럼. 그러면서 서둘러 쌀을 앉힌다. 불린 쌀이라 금방 끓어오르고, 뜸이 드는 동안 반찬들을 챙긴다. 김치만큼은 매번 새로 썬다. 간단하면서 전통적 맛내기 방식이다, 톡 쏘는 풍미를 살리려면. 또 그인 그래야 한 젓가락 먹을 것이다. 귀는 전화 쪽으로 향해 있다. 설마 하면서도.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따르릉. 차분하게 전화를 잡을 수가 없다. 갑작스럽게 종점에 다가왔다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전화 쪽으로 내닫는다. 올 것이 왔단다. 기다리던 것이었을까? 희망 없는 싸움을 끝내는 것.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심각하게 아프셨다. 어머니는 그간 특별한 고통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기적이나 같죠, 의사들이 우릴 위로했다. 그렇다고 그건 어머니 병실을 나선지 겨우 30분만이라는 생각이 났다. 그 30분으로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놓쳤다. 제 식구 저녁식사 준비하느라. 말이나 되는 소린가?


니 언니는 참 쌀쌀해야.

불과 며칠 전 겨우 말하실 때 그러시더라는 동생의 말. 내가 늘 어머닐 비난만 했다는 말씀이시렸다. 그 말이 이젠 귀가 아니라 가슴에 박힌다. 쌀쌀함을 그만 둘 기회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난 거기에 없었다.



다시 서둘러 사방에서 모여든 자식 손자들은 다들 놀라는 것 같았다.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나? 회복불능 환자의 끝은 예견되던 것이었을 뿐인데, 아니면? 빠르건 조금 느리건 다가온 일. 그래도 놀라웠다. 세상에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 그것은 진정 회복불능의 손실이었다. 아무렇더라도 자식들을 믿어준 존재. 자식들을 어쩌면 과장해서 믿어준 존재. 쌀쌀맞은 놈도, 살가운 놈도, 배신 때린 놈까지도……. 어머니에게는 다 같이 가슴 아픈 암시였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만 보여서. 어머니가 무시하고 싶었던 부분까지를 더해서.

 

다행이다. 살갑지는 않아도 도리를 잘 알던 막내가 있어 임종을 지켰다니. 임종이라야 평화스러운 끝이란다, 말씀 한마디 없고 소리 한 토막 없이 그냥 끝.

숨 안 쉬시네요.

함께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가 말했는데, 정말 숨이 그치셨더란다. 어쩌면 단 한 마디도.

큰오빠 연락할까요? - 관 둬라.

며칠 전 그것이 마지막 대화셨다. 유언은 없었던 셈.


아니, 유언이 있었다, 오래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큰살림을 정리하시던 무렵. 나는 그때 울고 또 울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새빨간 손톱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했다. 어머닌 아들들에겐 그때 벌써 상당한 유산을 분배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재산 - 상당한 큰 건물은 어머니 사후 전적으로 딸들 몫이라고 공언하셨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황은 바뀌어 어머니는 건물을 남기시지 못했다. 대부금 상환 때문, 큰아들 때문에 건물은 넘어갔다. 어머니는 난처해하시는 것 같았다, 특히 딸들 앞에서는. 아들 딸 차별 않는 관대함을 노래를 하셨던 평상시의 유세를 못 떨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딸들이 아니라 정작 큰오빠가, 정확히는 큰며느리가 어머니가 재산 잃은 것에 분기탱천했다. 분명 딸들의 몫이라고 천명했던 건물이었지만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용서할 수도 용서되지도 않았을까. 어머니의 유지와 상관없이 언젠가는 자신의 몫이라고 기대했던 터여서? 웃겼다. 그렇게 어머니는 마지막 건물과 더불어 큰아들을 잃었다. 어머니에겐 마지막 몇 년은 행운이 저물어 갔다. 더구나 상상해 보라, 어머니가 가끔은 손수 밥을 지으셨으니! 단 몇 번이라도! 그렇지만 어머니는 결코 두부나 콩나물을 사러 나가지는 않았다, 결코. 그런 건 어머니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러시길 잘 했다. 어차피 그렇게 어머니 나름의 자존심을 지니셨기를. 밖으로 향한 허영심이 어머니 몸속으로 들어가서 암세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화려했던 과거와 점차로 고갈되어가는 현재의 불협화음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분명한 것 하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큰오빠를 못 보고. 하지만 이제 장례절차를 생각해야 한다. 장례식장에서 차가 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문을 나선다. 아, 이젠 정말 끝이다. 다시금 아득하다. 이제는 세상에 어머니가 안 계신다. 이제 우리는 고아다. 쌀쌀맞아도, 배신 때려도 사랑해준 어머니가 없다. 다만 어머니의 미토콘드리아, 세포의 발전소나 같은 그것은 어머니를 사랑할 줄 몰랐던 딸에게도 남아서 살아갈 것이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큰아들에게서가 아니라, 그는 미토콘드리아를 나르는 딸의 계보가 아니니까.


그런데 어쩐다? 몸을 버리는 절차가 남았다. 우리는 갑론을박, 큰오빠에게 연락을 해? 말아? 누가 결정하는가? 작은 오빠 책임이야, 당연히. 원칙적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 여부라는 단어는 어불성설이다. 만장일치로 알려야 한다는 쪽이었다. 우리 모두 선할 수도 악할 수도 다 가능하니까, 누군가가 흘렸다. 배신 때린 자식이라 해도 마지막 이별의 자리에서 용서를 빌 시간은 있어야 한다는 것.


온대?

글쎄, 일단 알리기는 했으니까.

전화를 받긴 했어?

그러게, 어떻게 어젠 전화를 받데.


소식 있어?

응, 온다고는.

언제?

글쎄, 오겠다고 했으니 오겠지.

설마 싶은데.

설마 안 올까.

다음 하루 종일 화제는 문제의 아들이 초상마당에 오는가 아닌가에 집중된다.


소식 있어?

응, 온다고 했다니까.

언제?

글쎄, 조카 말이 아버지 모시고 온다 했다니까.

어머닌 맏손자를 무척 좋아하셨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이렇다 할 아파트에 새시까지 새로이 해주셨다던 생각이 난다.


그럼 입관 시간을 미룰까?

어떻게 그래?

그래도 와서 어머니 얼굴도 못 보면?

그렇다고 입관 시간을?

하긴 상복을 입으려면 미룰 수도 없고.


얼떨결에 입관 시간이 닥쳤다. 곱게 화장하신 얼굴에 평소에 준비해둔 연분홍과 연하늘의 수의를 입으신 모습은 옛날 궁중의 여인 같았다. 관속으로 내려가기에는 아까운 모습이다, 잠을 자는 듯, 아름답기까지. - 이상하다. 나는 평생 한 번도 어머니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곧 몸이 관 속에 내려진다. 그리고는 못들이 박힌다. 정말 끝이다.


못을 다시 뽑을 수도 있는 거야? 그때 누군가 자신 없이 물었다. 

무슨 못?

아니, 입관 식을 해버려서. 나중에 어머닐 보겠다고 우기면?

글쎄 뭐.

오긴 올까?

온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말없이 그 애가 왜 그런 엉뚱한 질문을 했는가를 느꼈다. 상주가 오기 전에 입관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호통 칠 얼굴이 떠올랐을 것이다. 다들 슬슬 출입문 쪽을 힐끔거렸다. 그렇게 이틀째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날 아침, 발인 식.

장례행렬은 10시에 장례식장을 출발할 예정이다. 조객들로 북적대던 어제에 비해 텅 빈 공간에는 조용하다 못해 썰렁한 기운이 감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피한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아무도 어제의 그 질문을 꺼내는 사람은 없다. 둘째오빠가 여전히 두 줄짜리 완장을 여벌로 손에 들고 안절부절못한다. 여차하는 순간에 형의 팔에 끼울 태세다. 시계는 똑딱똑딱 잘도 간다.


종일 비가 내린다. 무심한 봄 녘. 여린 초록빛 너른 들판 한 구석에 두루마기 대신 허연 비닐 비옷들이 춤을 춘다.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그렇게 셋째 날 하루도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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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Three Days」, 『펜광주』 9호, 2011.12.12. 19-32, 33-50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