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0'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5.06.20 침묵11 - 해바라기
  2. 2025.06.20 침묵10 - 베네딕트 보이언
소설2025. 6. 20. 15:50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그 후 어머니와의 대화를 특징하는 서두가 되었다. 자, 해바라기 합시다! 해바라기가 되는 거예요! 어머니를 움직이게 하는 암호 같은 것, 요술의 말이었다. 50이 채 되지 않은 어머니가 노인들처럼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러고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니까 승욱이 1994년 초 독일에서 급히 일시 귀국했던 그 시점을 말한다. 급히, 예정에 없이, 정확히는 베네딕트 보이언 신학대학의 입학허가서를 기다리고 있던 철 이른 봄날이었다.

 

     당시는 유학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승욱이 독일을 선택했던 것은 일단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던 점이 주요했다. 결과적으로는 예상 외로 좋은 선택이었다. 바다를 몰랐던, 바다라면 무심코 두려워했고 무서워했던 그가 북해의 바다들을 경험했고, 냉기를 내뿜는 바닷물을 두 손으로 만질 수 있었으니까. 무엇인가 바닷물과 연결된 체험은 그를 전율케 했으니까. 먼 먼 바다였지만, 어쩌면 바닷속 아버지와 닿을 수 있었다고 느끼게 되었으니까.

     독일 행에서 그가 표면상 내세웠던, 스스로 그리 믿었던 이유는 이냐시오 신부님의 족적을 따라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주의 연속일 뿐이었다. 도주 –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쳐야할 객관적 이유는 전혀 없었다. 88년 대학 새내기가 여차여차 군에 입대했고. 거기까지는 동료 대학생들과 어슷비슷한 인생 행로였다. 그렇게 제대 이후 서둘러 복학을 했더라면 평이한 일일 터였다. 다만 그는 표면적인 어떤 이유도 없이 복학을 미루고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발작적으로 다른 어딘가를 향해서, 그러니까 독일로 향했다. 왜, 왜 복학을 미루었나. 왜 느닷없이 유학 핑계를 댔나. 그것은 군대로 도망치던 때와 비슷했다. 승욱의 입으로 뱉어낼 수 없는 단 하나의 단어가 목에 걸렸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아니, 누군가를 차마 만날 수 없어서.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물론 어떤 단어도 발설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급히 돌아와야 했던 일은 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돌아오자마자 향한 곳은 어머니의 시골집이 아닌 보훈병원이었다.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곳, 당숙이 일러주신 곳이었다.

     공항에서 고속버스로, 터미널에서 바로 시내 외곽에 위치한 병원으로 내달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큰 환자복 때문에 더 작아 보였다. 수술 하루 전이었다. 아들을 기다리려고 수술이 늦은 것이면 어쩌나. 그것은 무식에서 온 기우였다. 원래 고관절 수술은 며칠을 기다리기도 하고, 잡혀진 수술 날짜 전에 그가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반가움의 눈물임에 틀림없지만, 어머니는 입술을 올려서 미소를 지으려고 하셨다.

     투틸···.

     예, 엄니!

     투틸로….

     어머니는 그러고만 계셨다.

     승욱은 눈을 더 크게 뜨고 귀를 뾰족 늘려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나 인자 덜 아프다이. 첨엔 잔 놀랬지만 괜찮아야. 느그 당숙 참, 그냥 냅두제 알려갖고는. 투틸로, 거가 어디라고 요만 일로 와부렀냐. 그런데 소리가 안 들렸다.

     엄니, 투틸로 왔어요. 울 엄니 힘없어 말도 못하시네. 어쩌다가 이렇게. 아니 이만하면 다행, 다행. 글고 아들이 투틸로가 아님 누가 온다고.

     그래, 투틸로, 좀 앙거. 오니라고 피곤흐겄다아. 그리 대꾸하실 것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안 들렸다. 아예 입술을 움직이시지도 않았다.

     승욱아, 근간에 느그 엄니가 말이 더 줄어부렀어야. 욜로, 욜로 와 봐. 엄니 잔 보둠아 봐라이. 올체. 그라고는 대차 좀 앙거라. 엄니 어디 다치셨는가는 알제이? 엉덩뼈, 엉덩관절이랴. 다리랑 붙은 데가 글씨.

     아들은 어머니를,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좀 봐, 내가 인나야 승욱이 니가 앉제이! 인자 나는 바람 잔 쐬고 올께이. 말 더 혀 봐! 당숙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참, 숙모님, 얼마나 놀래셨을까. 고생 많으셨네요. 저 왔으니까 이제 댁에 내려가셔서 쉬셔요. 당숙도 혼자 지내시느라고….

     아이고, 그래도 엄니 옆에는 우덜이 낫제. 어쯔고 니가···. 나 좀 나갔다가 올란다이.

 

     승욱은 늘 지니고 있던 어머니의 목걸이, ‘기적의 메달’을 꺼내서 어머니의 손에 쥐어드렸다. 눈에 촉촉한 물기가 스몄다. 목걸이를 승욱에게 건네주셨을 때의 말소리가 새롭게 들려왔다. 그냥 목걸이가 아니여, 투틸로, 이건 기적의 메달이다이. 신부님 말씀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는···.

     어머니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오면서 가늘어졌다. 아니, 물기가 목으로 어깨로까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잡고 있던 바슬바슬한 손까지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목걸이를 손에 쥔 채 어머니는 침대 머리 위쪽을 바라보셨다. 아차, 환자복을 입은 상태니까 있었던 목걸이도 풀어놓아야 할 터였다. 사물함을 열고 작은 가방을 찾아서 넣어두었다. 엄니, 가방 속에, 지퍼 안쪽에다가. 귓속에다 말을 했더니 어머니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러고는 이튿날 아침에 수술이었다. 걱정에 비해서 수술 시간은 짧았다. 수술 후 여러 주의사항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는 병실로 옮겨오셨을 때도 아직 주무시는 듯 보였다. 듣기는 하실까. 말을 하기가 싫어서 입을 닫을 수는 있겠지만, 듣기 싫어서 귀를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니까. 그런데 안 듣는, 안 들리는 표정을 하고 계셨다. 듣고 싶은 말도 아예 없으실까.

     인간 해바라기요! – 담당 의사는 상당한 유머를 지녔다. 다음 날 일찍 병상에 오셔서는 큰 소리로 말했다. 환자분, 환자분! 눈 뜨세요. 깨어나신 것 압니다. 수술 잘 되었고요. 다른 고관절 환자들에 비해 젊으시고, 또 많이 안 다치셨어요. 곧 회복 되실 겁니다. 자, 이제는 인간 해바라기가 됩시다! 저랑 약속 하세요! 며칠만 빼고, 다음 주부터 물리치료 시작하시죠. 치료 끝나면 저 복도로 나가 햇빛 비치는 쪽으로! 해바라기를 해야 사는 겁니다!

     해바라기라는 단어는 담당 의사의 면허특허인 줄 알았더니 모두가 그리 말했다. 아시죠? 인간 해바라기! 해바라기가 되셔야 빨리 나으셔요! 간호사가 말했다. 환자분, 일어나세요. 연습하셔야죠! 해바라기 하시려면 우선 병실에서라도! 자아, 서 보시게요! 워커를 들고 온 물리치료사가 말했다.

     그렇게 워커에서 목발로 그리고 그냥 설 수 있게 되기까지 병원 근무자들은 일반인들보다는 참을성이 많아보였다. 의사는 목소리가 컸다. 높기도 했다. 노인들 수술을 많이 하다 보니, 노인들에게 말을 하려다 보니 목소리가 커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키가 상당히 컸는데 말을 할 때는 꼭 구부리고 말했다. 환자들 가까이에 대고 말하려고 했다. 참 괜찮은 의사였다.

     2주가 지났다. 이제 곧 집에 가시면 가족들 도움을 잘 받으세요, 영양공급도 철저히! 칼슘이 많이 든 우유, 멸치, 치즈, 콩, 고등어, 꽁치, 뭐냐 등푸른 생선들···. 다 외우기 힘들었다. 가족분들! 잘 들으세요! 환자를 보면서는요, 애기가 왔네, 잘 먹여서 키우자, 그런 심정으로 하세요. 회복기간 동안 관리가 엄청 중요해요, 가만 누워만 계시면 치명적임다. 근육도 평형감각도 잃게 되고, 인지능력도 감퇴해요. 계속 소통하시고···.

     어머니가 말씀을 잘 안하셔서···.

     답답하시겠네요. 뭐, 그래도 투정 많으신 분들보다 낫지 않을까요. 평소 참을성 많으시다면 딱히 할 말 있으시겠어요? 암튼 계속 말 시키고, 뭣보다 계속 움직이시게! 불평 없다고 가만 누워있게 하다가는 큰일 남다. 욕창 하나라도 생겼다가는 폐렴, 요로감염, 뭐 다른 질병들도 병발하거든요.

 

     무서운 예언 같기도 했다. 친절한 설명에도 조금은 겁을 먹은 채로 우리는 시골집으로 퇴원했다. 도시 사는 이모는 병원엔 자주 들리셨지만, 집에서는 주로 당숙모가 어머니 곁을 돌보셨다. 언제 혼자서 걸으실 수 있을까. 한 달은 족히 걸렸다. 해바라기 갑시다! 해바라기 합시다! 그 신호에 일어도 나시고 방 밖으로도 나오셨다. 마당도 따라 걸으셨다. 자꾸 허공을 땅을 둘러보시는 것 같았다. 무엇을 찾으시는 것일까? 그때는 잘 몰랐었다. 돌보지 않은 마당에도 어느새 봄이 흐드러져 있었다.

 

     은방울 수선화 알아? 순수한 아름다움이래. 순수··· 아름다움이 뭣일끄나. 청정하고 순수한···. 앵두는 수줍음이고. 여기 연분홍 복사꽃 이쁘다아. 사랑의 노예란다. 사랑하면 노예가 된다고···.

     생각할 틈도 대답할 틈도 안 주고 혼잣말을 하시던 어머니, 승욱은 어린 시절의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런 꽃 이야기가 그리웠다. 그럴 때의 어머니는 ‘저 집 말 수 적은 각시’가 아니었다. 하긴 그런 꽃 이야기들을 들은 것은 어머니의 아들 투틸로 뿐이었다.

     튤립들 이쁘제이, 투틸로! 어떤 색깔이 좋으냐? 빨강은 사랑의 고백이랴. 노랑은 슬퍼야, 헛된 사랑이라니. 흰색도 슬퍼야, 실연이랑께 힘들겄제. 우리 집 마당에 없는 보라색 튤립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다그네. 그건 영원한 사랑이라여, 영원한.

     우리 집 마당에는 보라색 튤립도 없었지만, 영원한 사랑도 없었다. 영원한 사랑의 부재를 어머니는 일찍 깨달을 수밖에 없으셨겠다. 대상이 사라진 사랑,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라면서 승욱은 그것을 느꼈다. 부재하는 대상은 허상일까. 위로를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할머니 하나, 어머니 하나, 나 하나. 그렇게 살았던 집에는 다른 집에는 다 있는 아버지가 없었다. 훨씬 자라서야 느꼈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한 늘 혼자였던 어머니가 더할 수 없이 안쓰러웠다.

 

 

     재활의 봄에 어머니는 거의 말을 피하셨다. 알아듣고 싶으신 것은 알아들으셨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비인후과로 입원을 더 했어야 했나. 아니지, 재활치료가 급했다. 말은 천천히 회복하시겠지. 입을 목을 다치신 것도 아닌데.

     당숙모는 가까이 사시는 죄로 어머니 식사를 계속 챙기시다 보니 걱정을 더 하셨다. 느그 엄니, 왜 밥을 못 묵을까이. 밥도 안 넘길라고 허지, 말도 안 허지. 목이 문젠가도 모르겄서야. 목뿐인가. 사람이 생기라곤 없어야. 얼굴 색 잔 봐라이.

 

     여름이 되어도 추위를 타시는지 몸을 웅크리셨을 때에야, 걷는 행동도 정상으로 회복될 조짐은커녕 손놀림까지 어눌해졌을 때에야, 다른 검사를 해볼 생각을 했다. 무슨 과로 가야하나, 상식이 없었다. 수술 때 기본 검사들을 했었는데, 그럼 내과는 아닌 것 같았고, 인지기능이 좀 떨어진다면 신경과인가. 젊은 나이에···. 잘 모르니 그냥 내과로 갔다.

     기본 검사에서 콜레스테롤이며 요산 수치가 이상하다고 했다. 요산 수치가 뭘까. 승욱은 자신의 무지에 놀랐다. 의사는 더 이상한 단어, 갑상선자극호르몬 수치를 측정해보자고 했다. 어머니는 갑상선저하증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어려운 병은 아닙니다만, 긴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왜 걸렸을까요? 승욱의 질문에 의사는 ‘왜’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하시모토갑상선염이라고 이름 좀 복잡한데, 암튼 만성 갑상선염으로 인한 저하증은 근본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어요. 외부 원인 없이도 오래 천천히 염증이 발생해서 호르몬 생성이 부족해진 경우라서요. 그런데 어쩌라고요, 라고 말하고 싶은 목소리였다.

    치료는 간단합니다. 레보티록신이라고 하는 합성 호르몬제를 투여하면 됩니다. 3개월마다 혈액검사 하러 오시고요! 의사는 기본은 했지만 덜 친절했다. 고관절 때 의사에 비해서 그랬다. 세상 의사들이 다 똑같이 친절할 수는 없는 법,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의사 공부를 시작했었을 것을! 의사공부 실력도 안 됐을 테지만, 아들이라면, 아들이라서, 그냥 그런 소리가 나왔다. 왜, 집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판검사 아들이 나오고 그런다는데.

 

     의대생도 법대생도 아닌 아들은, 노승욱 투틸로는, 우선 어머니 곁에 남기로 결정했다. 재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낙엽들 쓸다가, 낙엽을 쓸다 봉께, 먼지들 때문에야···. 독일에서 통화를 하다가 엿들은 어머니의 눈물 때문이었다. 유학이 뭣이라고! 신념도, 야심조차도 없는 주제에.

     베네딕트 보이언은 겨울학기도 포기해야 했다. 9,000km 10,000km를 멀리 떠나 있을 수는 없었다. 짐은, 슈베비슈 할의 짐은 로마에 계시는 가롤로 신부님께 부탁했다. 신부님은 크게 놀라지도 않으셨다. 인생 여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 이상하게 통화 중에 말을 놓으셨다. 이제 제자가 된 것인가. 신학이 아닌 인생학의 제자. 로마에서 슈베비슈 할까지 열 시간 넘게 직접 가실 수는 없었지만, 신부님이 거기 괴테인스티투트 다니실 때 묵었던 집주인에게 일체를 부탁하실 수 있었다. 비용 송금만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해주셨다.

 

     짐이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짐을 손으로 만졌을 때, 그 순간 무엇인가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현기증 비슷하기도 했다. 눈물이 찔끔 났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승욱은 지금도 숨이 잠시 멎는다. 어딘가의 문을 열다가 만, 열려는 순간 닫혀버린 두꺼운 문의 이미지가 코를 깰 듯이 가까이 닥쳤다. 어쩌면 내밀던 오른쪽 아니면 왼쪽 발등 위로 방화벽 같은 것이 내려오는 느낌에 이 발 저 발을 뒤로 뺀다, 지금도.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어느 발부터 먼저 내딛나···.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아니다, 그런 순간은 오래 전에 지나가버린 과거였다. 과거는 과거였다.

     가롤로 신부님은 그 후 간헐적인 편지에서도 말을 놓으셨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기뻤다. 그렇지만 울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직접 말은 어렵더라도 글은 쉽지 않았을까. 글로도 어려웠다. 말이건 글이건 속내는 발화되지 않는다. 다른 스승도 없이 신부님과 소통하면서 지냈다.

    신부님과 편지로 나눈 이야기들 중 「가지 않은 길」에 관해서 했던 말이 늘 남았다. 원문을 보면 ‘두 갈래로 나뉜 길(TWO roads diverged)’에서 ‘둘’은 전체가 대문자로 되어 있다고, 둘은 이 시에서 너무 큰, 매우 중요한 숫자라고 하셨다.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이야기할 것입니다. /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승욱은 썼다. 자신을 위로하시려고 보내신 시니까 답을 드려야 했다. 저는 사람들이 많이 간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지겠지요.

     신부님은 썼다. 지금 말고 훗날에 훗날에 이야기해라. 참, 그 시를 번역한 피천득 씨가 서울대 영문과 교수였던 시절 프로스트를 직접 알고 지냈더래. 프로스트가 한 세대 윗사람이지만 피 교수가 유학했을 때까지 장수했거든. 교수 말년에 쓴 『수필』도 읽어 둘 만한 글이다. 수필 작품이 아니라 수필론. 수필이 문학인가 아닌가 의심이 분분했을 때, 수필문학의 본질을 정의했다고나 할까. 마음의 산책, 독백,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형식, 그런 식으로 수필에 문학성을 부여했으니까.

     박학다식한 신부님! 감탄은 하면서도 수필론에 관한 부분은 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아리송하기도 했고, 수필론 같은 것이 그때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가만, 세월은 흘렀다. 흐르고 흘러서 세기가 바뀌고 강산도 변하자 승욱은 수필이니 뭐니 문학 형식에 관해서도 생각하는 잡학인이 되어 있었다.

 

 

     그해 가을에는 아무튼 복학을 했어야 했다. 독일을 마음속으로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다.

     투틸로, 유학은 어쩌고··· 한 살이라도 젊어.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계속 함께 있는 아들이 걱정되셨나.

     예, 하지만 어머니는···.

     승욱은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다가 곧 어머니를 생각했다. 스물여섯, 그맘때 아버지와 사별했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오싹해졌다.

복학 마감 날에야 승욱은 등록을 했다. 다시 집을 알아 봐야 했다. 터미널도 보훈병원도 학교도 가까운 곳이라야 했다. 학교에서는 좀 더 멀어졌다.

     어머니, 저 복학하더라도, 저 여기 없더라도 해바라기는 꼭 하셔야 해요, 숙모님이랑, 이모님이랑. 약속 안 하시면 저 복학 못해요.

     근데, 해바라기가 없어야, 투틸로.

     예? 해바라기요?

     왜 해바라기가 없어야.

     그때서야 어머니가 해바라기를 해바라기로 혼동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에 나가면 늘 두리번거리시는 품이 잡초처럼 피어 시들시들한 꽃들 사이에서 해바라기를 찾고 계셨나 보았다. 둔감한 아들! 승욱은 해바라기를 심으리라 마음먹었다. 어머니를 위해서는 은방울 수선화도 튤립도 아닌 해바라기를 심었어야 했다. 씨를 심나? 모종을 사오나? 일단 이듬해 봄을 기다려야 했다.

아, 그러네요. 엄니, 봄 되면 투틸로가 해바라기 심을게요, 꼭 심을게요.

 

     가을이 지나가는 속도는 불규칙했다. 주중에는 느리게 주말에는 빨리 가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규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간 캠퍼스가 그냥 예비역도 아닌 늦깎이 예비역에게는 생경했다. 이상하게도 군필 대학생들에게는 복학생이 아니라 예비역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학내 예비군 연대에 편입 신청을 했다고 해서 출결에 지장도 없었다. 군인 성분이라고는 물 한 컵에 잉크 한 방울도 못 되는 사람을 예비역이라고 부르는 관행은 어디서 왔을까. 대학에서 군대로 도망쳐, 다시 외국으로 도망쳐, 그러다가 학교로 돌아온 그로서는 군 시절의 토막이 잊힐 듯도 한데 새삼 예비역이라니!

     지독한 사투리의 여단 의무대 군의관이 문득 떠올랐다. 얌마! 털고 살어라이. 스톱이 뭔 말인가 알겄어? 알아 듣냐고! 미주신경성실신 때의 일이었다. 한글날 느닷없이 한글에 대해 ‘연설’해보라던 문 병장님 생각도 났다. 군 시절이 그립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었다. 88학번이면 예비역들도 94년 봄이면 졸업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2학년 2학기로 복학을 했으니 늦깎이는 늦깎이였다. 그냥 예비역 형이 아닌 예비역 형의 형 대우였다.

     승욱 스스로는 또다시 신입생 같다고 느꼈다. 태반은 거의 모르는 얼굴들에 섞이어 무엇이든 낯설었다. 수강신청은 입대 전에 망쳤던 과목들 이수를 우선으로 했다. 나머지 강의과목들을 살피며 갈팡질팡했다. 내가 뭘 알아, 학년 따라 추천된 대로 하지, 뭐. 승욱은 늘 주관이 없었다. 복학을 해서도 2학년 2학기는 뒤죽박죽이었다. 가롤로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둘, 2라는 숫자의 덫이 생각났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둘, 두 사람 사이가 문제다. 금요일이면 고향집으로 내달았고, 월요일 첫새벽에 학교로 돌아올 때까지 사흘 밤은 사학과 학생 노승욱이 아닌 그냥 아들 투틸로였다.

 

     밤이면 무엇을 하나. 또다시 천장을 바라보는 어두운 밤이 이어졌다. 북해의 바다들이, 바닷물들이 밀려들었다. 바닷물은 천장에서 휘돌다 떨어져내렸고, 승욱은 밤을 새고 나면 흠씬 젖어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바다로 나가 보리라던 북해에서의 기특한 결심은 실현 가능성이 멀어졌다. 밤을 보내려면 전공이 아닌 편한 책들이라도 필요했다. 유럽을 떠돌 때 꽂혔던 이름이··· 맞다! 캉디드!

     헛생각들에 들떠 있다가 캉디드 생각이 났다. 서둘러 책을 주문했다. 이런 소설이 왜 명작일까. 필명 볼테르, 원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겠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회가 설립한, 웬 예수회가 여기서도, 암튼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런데 20대, 30대에 필화사건으로 투옥 또는 추방을 당했다고? 50대에도 또? 그런 그가 팡테옹에 안치되어 있고 - 파헤쳐지지도 않고 – 심지어 프랑스를 ‘볼테르의 나라’라고 부른다니. 수상한 위인이었다.

     『캉디드 또는 낙관주의』라 하는 제목은 이름 뜻대로 순진무구한 젊은이가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로 보인다. 막연히 제정러시아 시절의 대하소설 같은 것을 기대했던 승욱으로서는 기껏 3쪽 또는 5쪽의 짧은 콩트 모음집 같은 구성에 첫눈에 시큰둥해졌다.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온순한 젊은이’가 베스트팔렌 어느 남작의 성에서 조카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다. 가문의 교사는 팡글로스, ‘모든 언어’라는 의미의 박식함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세상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가장 좋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고로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 팡글로스의 이런 가르침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능한 세계들 중 최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논리 그대로다. 뭐야, 재미있는 모험 이야기라더니, 철학 에세이인가.

     읽을수록 난감했다. 이런 캐릭터답지도 않은 인물이 왜 필요한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1장부터 등장하는 황당한 광경들은 유럽 소설들에서 기대했던 – 그것은 프랑스문학에 완전 문외한이어서 그랬었지만 - 심각성 같은 것과는 아예 멀었다. 게다가 사학과 학생이 부끄럽게도 듣도 보도 못한 역사적(?) 인물들과 사실들이 수없이 등장하곤 했다. 일단 메모를 해가면서 읽기로 했다.

     그렇게 주말이면 이런저런 독서로 밤을 보냈다. 겨울방학이 되자 아예 어머니 곁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정해진 대로 병원에 다니면서 다소 회복되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 기일에, 설에, 대보름에, 일들이 많고 친척들도 오곤 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봄을 기다렸다.

 

 

     봄날이 되었다. 1995년 봄, 3학년이 되었다. 2라는 글자를 피했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긴 주말을 고향집에서 보내는 대신 하룻밤만 보내고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둘러 해바라기를 심어야했다. 모종을 기다리기도 바빴다. 씨를 어디에서 구하나. 4월 어느 주말 이른 아침 불려두었던 씨를 심었다. 담벼락 쪽으로 넓게 1cm 깊이로 씨를 심고는 물을 뿌렸다. 대학으로 돌아온 주중이면 날마다 마당에를 나갈 수 없어서 불안했다. 금요일, 그러니까 5일 후에 집에 가자마자 씨 뿌린 곳으로 내달았다. 슬쩍 눈길을 주니 떡잎들이 나 있었다. 쏜살같이 어머니의 방으로 내달았다.

     엄니, 싹이, 잎이 나왔네요, 해바라기 잎들이.

     투틸로, 파란 그거이 해바라기 잎이었구나. 엊그저께 뭣인가 파란 것들이 올라왔드라. 물을 줬제이, 어쩐지 목이 마를 것 같아서야.

     예, 엄니. 잘 하셨어요. 이제 해바라기 하시면 되겠네요.

     응, 해바라기. 해바라기 하자. 근디 해바라기 꽃말은 뭣일까이.

     꽃말? 엄니, 꽃말 생각이 나셨어? 꽃에 말이 있는 것?

     투틸로, 뭔 말이여? 엄니가 꽃말이 뭣인지도 모르가니. 봐라, 앵두는 수줍음이제. 복사꽃은 사랑의 노예···. 근디 노예라니.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그 옛날의 꽃말들을 다 기억하고 계셨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입을 닫으셨나, 어머니는 이 초여름 해바라기 밭에서는 말을 제법 하셨다.

     글면 해바라기도 꽃말이···.

     해바라기는 해만 보니까··· 일변단심, 동경 그런 것 아닐까요? 알아볼게요.

     그러네, 일편단심.

     예, 어쩌면 일편단심.

     투틸로 우리 아들, 그새 박사님 다 되셨네. 모르는 것이 없어야.

 

     그렇게 한 여름을 잘 보낼 것이었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6월 하순부터는 맘 편하게 고향집에 있었다. 그때 놀라운 사고가 터졌다. 천재지변도 아닌,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다. 처음엔 말이 백화점이지 작은 열악한 건물이거니 했다. 하, 며칠을 붕괴 장면과 발굴 소식만 틀어대니 결국 어머니도 알게 되었다. 눈물만 흘리셨다.

     그럼 그 수가 다 그 속에 있다냐? 묻혔다냐? 다 찾아내기는 한다냐? 찾아는 내겄구나이.

     순간 『캉디드』의 구절이 떠올랐다. ‘지금 이것이 가능한 세계들 중 최고의 세계’라는 말인가. 작품에서 분명 볼테르는 라이프니츠를 비웃고 있었다. 최고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봄에 해바라기 잎들이 나는 데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도 대구에선가 폭발사고가 났었다. 100명도 넘게 사망한 그 사고를 어머니는 다행히 모르고 지나가셨다. 그때도 백화점 짓다가 그리되었다던가. 암튼 그때는 금요일 사고였고, 곧바로 어머니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었다. 그에 앞서 그 지난 가을 한강다리가 무너져 내렸을 때도 어머니의 걱정은 한참을 갔다.

     한강으로 떨어졌네이. 버스가 통째로이. 그럼 다들 건졌다냐? 어디로 흘러간 사람은 없다냐? 강물은 바다로 가겄제? 어디 바다로 갈끄나? 바다는 다 같을끄나?

     사람들은 다 구했어요. 누구도 흘러간 사람은 없다고요.

     그때도 곧 주말이라서 이리저리 둘러대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고, 사고들에 어머니는 아프고 만다. 어머니를 어쩔꼬! 겉으로는 단정해도 속으로는 심약한 어머니인가 싶었지만, 병약을 더하니 단정함마저도 흐트러지셨다. 성당에 함께 갈 때 보면 미사포를 잊고 가셨다가 놀라시기도 했고, 오른쪽 왼쪽 길이를 다르게 늘어뜨리기도 했다.

 

     해바라기 꽃들이 그때 벌써 피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해바라기에 열중하셨다. 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해를 향해서 고개를 돌리곤 하다가, 꽃들이 피면 그냥 있는 것을 발견한 것도 어머니였다.

     다 자라면 배신한다이.

     엄니, 무슨 배신?

     요놈들이 키가 더 큼서는, 꽃이 다 피어불먼, 해를 안 따라다녀야.

     아, 정말 그래요? 엄니, 해바라기 박사되시겄네요.

     요 줄기들이 뚱뚱해져 갖고는 둔해서 그랑가 모르겄다이.

     엄니, 요놈들 훌라후프 시킬까요? 도로 날씬해져 갖고 계속 해님 따라 돌게.

     투틸로, 니가 농담도 한다이. 엄니 웃길라고 그라냐. 그나 꽃들 참 이뻐. 키가 큰께 기대고 싶어질라그래.

     엄니, 넘어지실라고.

     말이 그라제.

     엄니, 씨앗도 맛있고 건강에도 좋대요. 잘 익으면 볕 좋으니 말리게요!

     그라자이. 투틸로가 묵은다믄 말려사제, 말리고말고.

     줄기를 말리면 가볍고도 질겨서 구명조끼를 만들기도 했대요. 타이타닉 때도 입었다고요, 그런 말은 행여나 튀어나와선 안 된다. 입을 꾹 닫았다. 말을 해서 탈일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의 힘, 위로.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입안에서 바로 무덤으로 가는가.

 

 

     해바라기 밭에서 행복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엉뚱하게 『캉디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리스본 땅을 밟은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대재앙, 그러니까 지진에 휩쓸렸을 때다. 팡글로스 박사는 캉디드가 돌덩이에 다쳐도, 겨우 죽음을 모면한 주민들의 비참상을 보고도 이 모든 일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라며 그들을 위로한다. 인간의 타락과 하느님의 벌이라는 원죄를 믿지 않으시냐는 구급대원의 질문에도, 그것들마저도 가능한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에 이미 필연적으로 담겨있다고 응수한다. 인간의 자유를 믿지 않으신다는 말이냐는 질문에는 ‘자유는 절대적인 필연과 함께 존재할 수 있다’고, 역시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인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읽고 읽은 『캉디드』의 독서는 실은 결론을 모르는 상태로 끝났다. 방학 내내 읽고도 모르는 채로 책을 덮었다. 결론을 찾아야 할 마지막 장면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온갖 모험을 온갖 불행들을 겪고 몇 해가 흘러 소박하게 정착한 그들은 터키의 최고승이라는 이슬람 수도승을 찾는다. 인간이라는 이 괴이한 동물이 왜 만들어졌는지, 이 세상에는 끔찍한 악이 너무 많아서 의문이라는 팡글로스의 질문에 수도승이 말한다. ‘선이 있건 악이 있건 그것이 뭐가 중요해? 술탄께서 이집트로 배를 보내실 때 그 배에 타고 있는 쥐들이 편안한지 아닌지 신경 쓰시더냐?’

     여기에서 무엇을 읽으라는 말일까.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해도, 인간의 행불행은 인간의 몫이라? 하느님이 그것까지 신경을 쓰시지는 않는다? 신의 섭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결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승욱의 독서능력, 아니 인지능력으로는 그가 읽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부님, 후미에가 『캉디드』에도 나옵니다. 일본을 다녀왔다는 어느 선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놀라운 일 아닌가요? 가롤로 신부님에게 쓰려던 편지도 중단하고 말았다. 그만한 책을 읽었으면 무엇인가 생각 같은 것을, 무엇인가 배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자신에게 실망한 승욱은 침묵을 선택했다. 머릿속일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들을 표현할 단어들이 없었다.

 

    볼테르를 더 읽어야할까. 굳이 볼테르가 아니어도 된다. 무엇인가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읽어야 할까. 그러니까 『캉디드』에서는 지금 이것이 최고의 좋은 세계라는 팡글로스 박사를 통해 라이프니츠의 신정론神正論을 통째로 조롱했었나 보다, 그 정도를 읽었다. 그것을 비웃는 볼테르도 따로 좋은 세계를 말하지는 않았다. 인간에게 좋은 세계란 결코 없다는, 있더라도 우연의 산물, 찰나의 것이라는 말이었을까.

    비교를 해서는 절대로, 감히, 안 되겠지만, 그때 당시의 승욱에게 있어서는 좋은 세계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발설되지 않는 세계였다. 누구에게도 발견될 리 없는 혼자만의 세계, 그것은 침묵의 세계였다. 그냥 머릿속 아니면 입 안의 단어들, 그러니까 많은 단어들은 발설되지 않는 것이 좋다. 중요한 단어들은 더더욱 발설되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가 해바라기를 말없이 좋아하시듯,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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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25 여름 80호, 220-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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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5. 6. 20. 15:15

 

 

     베네딕트 보이언은 승욱에게 매력적인 출구로 다가왔다. 독일에서, 유럽에서 몇 달을 바닷가를 탐닉하며 보내는 동안 원천적인 소통부재에서 오는 침묵은 실은 놀라운 작용도 있었다. 반작용이었을지, 밤에 또는 혼자서 방 안에 있을 때면 소리 없는 장광설이 피어오르곤 했다. 침묵인지 말인지 모를, 어떤 단어로도 설명 안 되는 충족이었다. 그는 주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을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글로 쓰곤 했다. 그럴 즈음 그는 슈베비슈 할로 돌아왔다. 원래의 출발지였을 그곳이었다. 괴테 인스티투트에서는 당연히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 독일 대학에 진학하려는 외국인들 틈에 한국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덕분에 식사 시간은 활기를 찾았고, 연극을 함께 본다거나 명소를 함께 찾기도 했다.

     침묵과 수다의 변주곡 속에서 특이하게도 한국 신부님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조금 동선이 달랐다. 가롤로 신부님은 안동교구에서 로마에 유학 오신 분이었다. 독일어 공부가 더 필요하셨던지 한 코스를 하러 오신 곳이 슈베비슈 할이었다. 신부님과 더욱 친해진 것은 코스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다시 로마로 돌아가시는 길에 승욱을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해주신 것이다. 아니, 승욱이 적극적으로 따라 나섰다. 이냐시오 신부님, 어머니의 신부님의 길을 따라서 로마에는 반드시 가보려던 참이었으니까. 그 여행길에서 구체적으로 베네딕트 보이언 신학교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베네딕트 보이언은 바이에른 주 끝자락, 알프스를 면하고 있는 해발 1,800미터에 위치한 아주 작은 도시다. 8세기에 성 베네딕도가 수도원을 세운 이래 이루어진 도시였는데, 19세기 초에 베네딕도회가 그곳을 떠났다 했다. 그 뒤 100여 년 동안 군병원이나 대피소 등으로 쓰였고, 20세기 들어 이번에는 돈 보스코의 살레지오회가 들어와서 신학대학을 설립한 곳이라고 했다.

 

     사실 승욱이 무턱대고 독일어 연수를 하려고 떠나오면서 슈베비슈 할로 마음을 먹었을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곳이 가톨릭 도시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냐시오 신부님이 독일어를 공부하셨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믿었다. 게다가 한국 신부님을 또 만났으니 당연히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슈베비슈 할은 베를린이나 함부르크처럼 아주 일찍 종교개혁을 단행한 도시였다. 종교개혁이 싹텄을 때 성 미카엘 교회에 부임한 B.목사님이 루터의 대단한 추종자였고, 교회와 학계를 빠르게 복음주의(개신교)로 개편했다. 남부의 가톨릭에 둘러싸여서, 결과적으로 종교전쟁 30년 동안에는 너무도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보았다. 다행히 소금 생산과 와인 무역으로 회복 또한 빨랐다 했다. 그러니까 이곳을 좋아하셨던 이냐시오 신부님은 종파는 중시하지 않으셨었나? 직접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 알 수 없다. 키가 커서 어딘지 하늘 한 구석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았던, 독특한 멋의 신부님은 어른이 되어서 소통해보기 이전에 투틸로의 곁을 떠나셨다. 머릿속에는 마음속에는 여전했다.

     그래서였을까. 승욱은 슈베비슈 할에서 처음 가롤로 신부님을 만났을 때 무척 기뻤다. 수강 분반이 급이 달랐지만, 점심시간이면 젊은 일행들 보다는 신부님을 따라 다녔다. 가롤로 신부님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오셨고, 어머니의 신부님 이냐시오 신부님은 살레지오회 신부이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가롤로 신부님의 ‘가롤로’는 예수회 신부이셨다 했다.

 

 

     가롤로 신부님을 따라 로마로 가기로 한 며칠 전부터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일찍이 마음속에 두었던 상상이 실제로 이루어지다니.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당에를 찾아가리라, 천장화 〈성 이냐시오의 영광〉을 보리라 했다. 더욱 떨리는 것은 시스티나 경당에 가보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5년인가를 한 작업에 몰두하여, 그것도 벽화도 아닌 천장화를 그렸다는 사실. 아, 그 유명한 〈아담의 창조〉를 보리라. 아니 그보다 앞서 〈어둠과 빛의 분리〉를 보리라.

     ···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창세 1:2-4). 영, 하느님의 영이 무엇일까. 영이 태초의 거대한 물과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태동하지 않은 것이라 했다. 우선 어둠에서 빛을 생기라 하신 뒤에야. 어둠에서 빛을. 그런 다음에 영에서 비롯된 생명이···.

     승욱은 몇 번이고 꿈속에서 그곳을 다녀왔다. 어둠과 빛을 알아보기에 앞서, 그의 왼쪽 손가락 하나가 전율했다. 감촉이 없이도 그냥 전율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오른손으로 발가벗었을 몸을 가렸다. 손에 잡힌 것은 흐트러진 이불자락이었다. 방은 어둠과 빛의 분리 이전, 암흑이었다. 천장은 여느 때처럼 어두웠고, 하늘과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망망대해였다. 바다와 하늘은 어디에서 분리되는가. 둘은, 아니 전체는 분리가 되는 물질인가. 그것들은 물질인가. 가르기도 했으니까 물질이다. 어려서는 더더욱 물과 물질이 비슷한말인가 아닌가 어려웠던 기억이 새로웠다.

 

     엄마, 모세의 막대기는, 지팡이는 왜 한 번만 물을 갈랐어?

     투틸로, 뭐? 모세의 지팡이?

     응. 왜 옛날 옛날에, 그때, 왜 한 번만 바닷물을 갈랐어?

     왜 한 번만?

     응. 한 번만 말고, 사람들이 바닷물에 들어가면 맨날맨날 바닷물을 막아줘야잖아. 저리로 잘 건너가라고.

     그건, 모세가···.

     모세가 죽었어? 죽어서 없어? 어디로 갔어? 바닷물을 갈랐는데 바닷물로 갔어?

     응, 그건 신부님한테, 이냐시오 신부님한테 여쭤보자이.

 

     신부님에게도 물었다. 철없는 아이였다.

     신부님, 이냐쑈 신부님, 모세의 막대기는, 지팡이는 물을 어떻게 막았어요? 근데 왜 한 번만 막았어요?

     투틸로, 그것은 기적이야요!

     신부님, 기적이 뭐야요? 물이 멈추니까 기적? 근데 기적은 왜 한 번만 나요? 울 아빠가 바닷물에 들어갈 때···.

     신부님, 이 아이는 투틸로는··· 가끔씩 엉뚱한 소리로 놀래키네요이.

     어머니는 모세의 기적을 아쉬워하는 투틸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 알았지만 놀래킨다는 말로 넘어갔을 것이다. 바닷물에 빠진 사람들을 지팡이 한번으로 뭍으로 인도해주지 못한, 기적이 일어나지 못한 사고들, 숱한 해양사고들을 신부님인들 어떻게 설명해줄까.

 

 

     기적은 왜 있고 왜 없을까. 많은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들, 특히 신들이 나타내는 불가사의한 힘의 작용이라고, 상당히 자랄 때까지도 들은 말이었다. 심지어 승욱은 어머니의 목걸이 ‘기적의 메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냥 목걸이가 아녀, 투틸로! 이건 기적의 메달이다이. 메달이 기적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제. 그람 미신잉께. 우리가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믿고 살라는 말이제. 엄니는 또 구하면 되니께 투틸로 니가 갖고 댕겨라이. 꼭 갖고 댕겨! - 어머니의 목소리는 여린듯하면서도 깊었다.

 

     기적처럼 다가올 은총. 그 은총으로 시스티나 경당에를 간다는 생각에 들떴다. 가롤로 신부님도 시스티나를 우선적으로 추천하셨다.

     로마에 오면 이곳 한 곳만 보고 가도 되지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 저런 높이의 천장에 그림을, 한 편도 아닌 천장화 시리즈 전체를. 그 중에서도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바로 그 순간을. 생명이 손끝에서 손끝으로! 숨이 손가락 끝에서 끝으로 전해진다는 그 발상 그 창의력 그 창조성··· 여기서 창조라는 단어가 신성모독이려나.

     ···.

     4년이면 1,000일이 넘어요. 사람들은 4년간 꼬박 책상에서 글 쓰는 일도 못하는데.

     신부님, 미켈란젤로가 그냥 사람은 아니지요.

     맞네! 그냥 사람은 아니었지. 수백 편 소네트도 쓴 것 알아요?

     소네트···.

     당시 유럽에 흔했던 14행시, 정형시죠. 미켈란젤로는 시인이었지요.

     시를 썼다고요? 수백 편을요?

     그래요. 말년의 소네트들 보면, 아, 예술가는 예술에 대해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구나 그리 느꼈을밖에.

 

     육안으로 쳐다보아서는 겨우 손바닥만큼 작아 보이는 저 그림들에 4년을 매달려놓고도, 코끝이 아니라 저 손가락 끝에 숨결을 그려 넣고도, 예술은 만족을 모르는 것인가 보구나. 400년도 넘게 사람들이 감탄과 경외심을 보이는데도. 승욱은 천장과 신부님을 번갈아보기를 그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신부님은 서쪽 벽의 〈최후의 심판〉 앞에 아예 붙어 서 계셨다. 승욱이 그쪽으로 다가갔을 때 신부님은 혼자 중얼거리셨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벗겨진 피부에다가···.

     예? 누구요?

     미켈란젤로가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는 것은 알지요? 저거네, 저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자신의 벗겨진 피부를 들고 있는 저어기! 하필 거기에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니까. 바르톨로메오 사도, 잘 모르나. 예수님 승천 후에 아르메니아로 가서 선교 생활을 하던 중 가장 끔찍한 혹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분.

     ···.

     승욱은 그렇게 자세히는 알지 못했고,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로마로 오셨지요. 지금은 저 티베르 강 가운데 섬, 거기 세워진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에 계시지요.

 

     성당, 성당들. 사람들은 하늘을 하느님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다. 살아왔다. 그랬구나. 시스티나 경당을 나와서 정작 성 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안내하시는 신부님을 뒤따르며, 승욱은 이제쯤은 혼자서 보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몇 번을 보셨을 성당을 또 함께 가시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하지만 신부님은 오히려 승욱을 충분히 안내해주셨다. 유명한 성 베드로 청동상 앞에서는 사진도 찍어주셨다. 고대 로마식 복장이라는데, 왼손에는 열쇠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내리는 모습의 성 베드로. 청동상이 거기 자리한 이래 몇 백 년 동안 내세에 천국행을 꿈꾸는 순례자들이 만지면서 입맞춤을 해 온 탓에 닳고 닳은 발까지, 무엇이든 다 설명해주셨다. - 그때는 아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님의 순교자 성상은 없었다. 그때로부터 꼬박 30년 후 2023년에 안치되었으니, 이제 또 다시 베드로 성당에 가볼 이유가 생겼다. - 그러고는 이젠 밖으로 나가서 돔 중반까지를 직접 올라가서 로마를 내려다보고 오라고, 당신은 성당 내에 더 머무르시겠다고 하셨다. 관광객들을 따라서 돔에 올라간 그는 놀랄 만큼 놀랐다. 특히 그 수학적으로 정교한 원주들의 자리매김에는 뭔가에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전혀 진화하지 않아!

 

     내일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당엘 가려고요.

     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왜 특별히 거기를? 신학과로 전과를 할 생각, 진지한가?

     아뇨 뭐. 어머니의 신부님 이냐시오 그 이름이 오랫동안 귀에 박혔고, 그냥 머릿속에 들어있나 봐요. 자라서는 이런 저런 내력들을 찾다보니 예수회 관련 일들도···.

     아, 그럼 예수회 잘 알겠네. 교육과 성사를 통한 교회 개혁, 이단 혁파를 목표로 하지.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들을 많이 세웠지요. 유럽 전역에, 나중에는 세계 곳곳에. 우리나라에는 서강대학교를. 지금 박홍 총장님이 바로 예수회 출신이시네. 요즘 문제 좀 일으키셨지만, 암튼.

    그 박홍 총장이 예수회···?

 

     승욱은 놀랐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오죽 사고들이 많았었나. 하필 서강대학교 건물 옥상에서 전민련 회원의 분신자살 사건이 터지자 총장이 혹독한 기자회견을 했었다. 본교 학생이 아니어서 더 냉정했나. 많이 심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취지였다. 죽음을 선동한다니! 자살 방조, 심지어는 자살을 획책한다는 말로 들릴까 아찔했었다. 오비이락이었나, 유서대필사건이 터졌다. 한 젊은이가 죽었고, 그 여파로 다른 한 젊은이는 감옥에 쳐밖혔다. 맙소사! 총장이 예수회 신부님이셨어? 승욱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가롤로 신부님 앞에서 표를 낼 수는 없었다. 친절한 가롤로 신부님 앞에서.

 

     예수회는 그때 종교개혁으로 휩쓸린 중부유럽에서 어쩌면 가톨릭의 마지막 방어력이었어요. 청년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 프랑스군과 교전 중에 부상을 입고 고향 로욜라 성에 돌아왔답니다. 여기까지는 귀족 가문 아들의 전형적 여정이죠. 그러고는 독서, 주로 예수와 성인들의 행적에 관한 독서에 몰두했다가 생의 전환점을 맞았다는 분이죠. 회심의 길에서는 실제로 동굴 속의 기도와 고행으로 수련했고, 그 체험을 골격으로 『영신수련』을 저술했지요. 필독서!

     예, 신부님.

     청빈과 순결 그리고 순명을 맹세하는 일, 쉽지 않지요.

     예.

     흐음. 독서만이 아니라 실행, 4주간 수련을 되풀이해보는 것인데. 첫 주에는 무지 속의 삶, 죄를 회심하여 신앙의 터전을 닦는 일, 둘째 주부터는 묵상이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전까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로마에서의 일주일은 가롤로 신부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일 년 가까이 강요된 침묵 속에서 살았던 시간들에 대한 한풀이처럼 한국말을 실컷 나누었다. 가롤로 이름은 순천의 성가롤로병원 때문에 알고 있었다. 역사 속 그 분도 궁금해졌다.

     가롤로 그 이름은 더러 들었어요. 원래 어떤 분이셨나요?

     가롤로 이름으로는 성인들 복자들 여럿 있지요. 내 세례명은 일본에서 순교하신 카롤루스 스피놀라를 따랐어요. 우리가 보통 가롤로라고 하는데, 카롤루스는 이탈리아식 본명이고요, 대단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셨고.

     수학자이고 천문학자인데 신부님요? 일본에서 순교를?

     맞아요, 일본에서.

     어떻게···.

     도쿠가와 막부라고 아나, 사학과 학생 노승욱 군!

     예, 임진왜란 그 막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멸하고 쇼군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 도쿠가와가 집권 초기 완강한 쇄국정책을 폈지.

     아, 그럼 일본 선교도 시작부터 난관이었군요.

     아니, 그 이전, 그러니까 예수회 초기 하비에르 신부가 동양 선교에 중점을 두고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하비에르 신부님은···.

     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맞아요. 처음에는 호의적인 다이묘들을 만났어요. 화승총도 선물했고. 다이묘라면 서양식 영주쯤인데. 기리스탄에게, 뭐냐, 그리스도교 신자며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일본에서는 그렇게 부르는데, 포르투갈어인가. 아무튼 처음 한 50년쯤 기독교에 호의적이다가 돌연 박해로 변했어요. 한국으로 말하면··· 임진왜란 뒤쯤. 1597년 일본 26성인 순교 사건은 시작에 불과, 십여 년 후 선교사 추방령 이후에는 더 끔찍했거든.

     그럼 그때···.

     아니, 추방령을 내렸을 때는 가롤로 신부님은 교토의 예수회 대학에서 강의하던 중이셨고, 그대로 숨었을밖에. 암튼 나중에 겐나元和의 대순교로 악명 높았을 때는 50명 넘게···.

     언제까지 그런 일이. 하긴 우리나라의 경우도 1791년 정조 때에 시작되어 고종 때까지 갔으니까요.

     역시 사학도 답네, 신해박해를 연도로 알고 있군요. 일본도 박해는 끊임이 없었고. 화형은 기본, 산 사람을 태우는 것이 기본이었다니! 몇 시간에 죽는 것은 은총, 며칠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니 원. 곧 이어 도입된 희한한 배교 고문도 악명이 높아요. 후미에라고,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말인데, ‘밟는 그림’이란 뜻. 못 박힌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판 또는 금속판을 밟으라는 명령,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한테 밟고 지나가라고! 차마 밟지 못하거나 동요를 일으키면 바로 체포!

     악랄한 고문이었군요.

     보자, 1633년 쇄국령, 악몽의 반세기, 아무튼 그쯤 해서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면서 쇄국은 완성되었다고 할까. 천주교는 잠복시대로 들어갔지요. 공식적으로 금교령이 해제된 것은 메이지 유신 들어서야, 그러니까 19세기 중반이네.

     50년, 100년 끔찍한 박해를 견디어 낸 것, 그것이 신앙의 힘일까요. 내세의 천국을 믿는. 그런데 내세의 천국을 탐내는 것과 현세의 천국을 탐내는 것에 차이가 있나요? 친구 하나가 있는데···

 

 

     가롤로 신부님한테 광식이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망설여졌다. 광식이는 입만 열면 현세의 천국이 중하다고 했다. 이쁜 색시한테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꿈이랬다. 사실 이쁜 색시를 얻느라 무리(?)도 했고, 아들딸을 빨리도 낳았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우와, 혼신의 힘을 다하리라 믿는다. 우선 녀석은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준비에 돌입했었다. 소방학개론, 소방관계법규, 행정법총론 그것들만 내리따 파불면 될 겅께, 근디 법규가 어렵겄냐, 개론이 어렵겄냐, 하고 다녔다. 국어와 한국사 까짓것, 근디 문제는 영어여, 왜 영어시험을 보고 난리인지! 영어가 불을 꺼준다냐! - 아니, 졸업을 할라면 낙제를 말어야제! 다른 녀석들이 놀려도 힛힛 웃기만 했다. 아버지를 닮아서 구레나룻 자리가 풍성한 녀석은 소방관이 되어도 남성미 넘치고 멋있을 것 같았다. 녀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해버렸다. 광식이 제대했을 때는 대학생 승욱이 입대했을 때였고, 이듬해 승욱이 휴가 때 만난 광식은 풀이 죽어 있었다. 한 번의 고배를 들이킨 직후였다. 승욱을 만난 것도 딱 한번 뿐, 나 공부해사제! 그러고는 꼴도 안 보였다. 그러더니 승욱이 제대했을 때 만난 광식은 빛이 났다. 내가야 빛날 광자 광식이란 말이지, 라고 실제로 뻐겼다. 다행이었다. 군대 때 낳아놓은 딸 말고도 벌써 아들도 있었다. 속전속결이었다.

     광식은 털투성이 제 아버지처럼 거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일찍 이쁜 각시를 얻고는 철이 들었다. 현세에서 줄 수 있는 행복은 다 주겠다고, 훔쳐다가라도 주겠다는 품새였다. 죽자사자 판께 되더라이. 체력시험이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제! 긍께 빡세게 논 것도 시험준비였당께! 일단 어떠냐! 소방관 아부지, 멋있제! 근디 실속이 있어사제! 인자 두 번째 목표는 재테크여! 돈이 목표랑께! 일반직 중에, 아니, 토목직 머시기덜 쫌 알면 무슨 숨통이 트일랑가. 아니, 절대로 비리는 말고 방법론 같은 거 말여.

     수염자리가 깔끔하지 않아도 거침없이 빛나는 피부를 하고서 광식은 떠들어댔다. 긍께 현세에서 행복이, 현세에서 천국을 사는 것이 중요하잖냐. 현세의 일도 다 못함서 내세의 행복을 위해 살겄다, 그렇게 말하는 건 쫌 허풍에, 뭐시랄까, 오지랖 아녀?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있잖여. 근디 정말로 죽어서 천국 그것까장 원한다, 그건 진짜 지독한 욕심 아녀? 좋은 사람 될라믄 욕심부터 버리라며! 투틸로, 말혀 봐 어디!

     광식은 내근이고 외근이고 화재 구급 출동이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충천했다. 가족의 현세를 책임지기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르겠다는 친구 앞에서 딱히 목표 없이 막 제대한 승욱은 그를 응원할밖에. 스스로는 왜소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현세의 천국이 아닌 내세의 천국을, 아니 둘 다, 그것까지를 바라는 것이 욕심입니까?

 

     그러니까 승욱이 가롤로 신부님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 말이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침묵은 어떤 종류인가. 제대 후 복학도 하지 못하고 한국을 도망쳐 나온 주제에···. 승욱은 입을 꾹 다물고 성 이냐시오 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성당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한없이 높아 보이는 성당의 돔 – 안드레아 포초라는 화가의 천장화 〱성 이냐시오의 영광〉은 연극적 효과를 집약해서 구현해낸 것으로 정평난 작품다웠다. 디테일들을 승욱은 미리 다 외우고 있었다. 천장으로 가면서 저절로 소실되는 벽면의 효과까지를 포함하여 방대함을 실감케 했다. 이어서 중앙 통로 천장쯤에는 나오게 되어있는 교회의 돔, 그 돔이 실제로 고개를 들면 눈앞에 있었다. 그동안 설명들을 외우다시피 했던 승욱으로서는 그것이 ‘그려진’ 돔인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성당을 완공할 즈음 재정난으로 돔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돔이 없는 성당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화가가, 평평한 천장에 없는 돔을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실제였지만 사람들은, 승욱도, 착시현상으로 돔과 하늘을 드높고 드높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만 시각적으로 공간을 무한 확장했는데, 두 눈으로 보면서 눈속임에 빠져들고 있었다. 더구나 데자뷰라고 하는 환상, 그가 어찌 이곳을 와봤단 말인가. 너무도 디테일들을 상상했었던 나머지, 너무도 친숙한 감정 때문에 어떤 감동도 없이 그냥 돔을 바라보면서 하늘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가롤로 신부님을 만났을 때 대뜸 말했다.

     신부님, 저는 아무래도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해야겠어요.

     아니, 밤새 마음을 굳혔나요? 성당에서 부름을 들었나요?

     오래 갈등이 자리했던 것 같아요.

     같아요? 자신의 마음을 그런 것 같다고 표현하나요? 가슴에 두 손 두 발 얹고 생각해 보아요, 하하.

     예, 두 손 두 발을요?

 

     그때 가롤로 신부님이 추천해 주신 학교가 베니딕트 보이언 신학대학이었다. 로마에 가까운 남부독일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대규모 신학대학이 아닌 점도 어쩐지 승욱 자신에게 맞는 선택일 것이라 믿었다. 가롤로 신부님, 이냐시오 신부님의 분신처럼 여겨지는 가롤로 신부님의 추천이었으니까.

 

 

    베네딕트 보이언 신학대학은 유서 깊은 대학교는 아니었지만 철학신학대학(PTH)으로서 철학부와 신학부가 정식 대학으로 공인된 곳이었다. 가톨릭신학과 교회신학 학위과정까지도 인증되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성직자 양성 위주의 신학대학이라는 성역에 비해서 더 열린 대학이었다. 성서신학, 조직신학과 외에도 ‘청소년 사목학과’는 독일 내에서 유일하다고 했다. ‘참된 목자 및 평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영성적으로 교육을 받을 마음의 준비는 되었더냐. 자문해 보면 그것은 그리 확신적인 일이 아니기도 했다. ‘스승이요, 사제이며,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 그 부분은 더욱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에는 역사라는 학문에 대해서 회의가 일었다고 할지. 어떤 이유라 해도 사학과를 피해서 도망 중이었으니까.

     아무튼 학사 없이 바로 석사에 해당하는 신학 디플롬(Diplom Theol.) 과정만 해도 10학기였다. 철학과가 일반적인 선택일 것이었다. 실천신학과 등을 선택하면 사제양성과정이 아니라 신학 교육에 종사할 수 있는 증명으로 졸업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 수는 줄고 있어서, 개신교도 마찬가지였지만 각각 30퍼센트를 웃도는 정도라 해서 조금 놀랐다. 30년 하고도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종교전쟁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독일이니만치 전 국민이 양대 교회에 나뉘어 속하는 줄로 알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사실 가톨릭이건 복음주의교회이건 신자들은 크게 감소하고 있었다. 옛날 듣던 대로 인구 거의 절반이 가톨릭이고 나머지 거의 절반이 개신교도라는 말은 전설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두 종파를 합쳐서 절반을 조금 웃도는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유럽국가 독일의 가톨릭 인구가 동아시아 한국의 가톨릭 인구와 어슷비슷한 지경이 되어 있었다. 승욱은 그때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막연히, 하늘에 다가가는 길로서의 가톨릭 신앙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신학부로 마음이 쏠린 것은 가롤로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독일 가톨릭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서와 달리 청소년을 위한 미사 자체가 봉헌되고 있지 않았고, 세상에나, 주일학교도 없었다. 주일학교가 없다니! 그러한 추세가 한국 성당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복사들도 없어질라! 주일학교를 대신해서 정규 교육과정에 종교교육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다. 성당에 오기를 기대할 수 없으니, 의무교육 장에서 종교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수도자가 상주하는 본당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종교교육은 본당 신부님들이 맡는 것이 아니라 주로 종교학 학위를 받고 국가자격시험을 거친 평신도가 맡는 것이다. 우습게도 그들 또한 일요일 미사에 불참하기도 한다니. 아예 평신도도 아닌 경우라니. 신자가 아닌 일반인, 그러니까 다만 종교교육 종사자인 그냥 교사가 청소년들에게 첫 영성체와 견진교리를 가르치는 아이러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위기의식이 그를 신학대학 쪽으로 밀었나 싶었다.

 

     로마의 가롤로 신부님과 헤어져 다시 슈베비슈 할로 돌아오던 날, 신부님은 돈 보스코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발로서 땅 위에 서서, 가슴으로 하늘 안에 살다.’ – 발로는 땅을 밟고 가슴은 하늘에 살라는 말씀이셨다. 제자로 받아들이시는가? 가슴이 떨렸다.

     베네딕트 보이언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자 지난 코스 수강생들 중 혼자만 남겨져 재수 느낌이었을 독일어 과정에도 긍정적 힘이 실렸다. 부족한 독일어 때문에 한국어로 된 신학서적이 필요했다.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 이나 샤를 앙드레 베르나르의 『영성신학』은 번역이 되어 있는지, 사목학연구소 같은 것이 한국에도 있는지. 어떤 기초 서적들이 있는지도 모르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일단 독일어에 매진하자, 그랬다. 읽을 수 있어야 들을 수 있다. 0의 수준에서의 이 시작은 시작이라고 이르기도 너무 빈약한 상황이었다.

     성서 읽기에 돌입했다. 어쩌면 독일어 공부의 첩경인 것을 몰랐다니. 구약성경부터 차례대로! 그것은 쉽지 않았다. 가롤로 신부님의 예상 대로였다. 신부님은 당신이 좋아하시는 미카서를 추천하셨다.

     소예언서들은 짧다는 점도 좋아요! 미카는 주님도 이스라엘의 왕도 아닌 ‘나의 백성들’을 먼저 챙기신 예언자라고 하셨다. 잘 모르던  사실이었다. 부정한 지배층 엘리트들을 위협하셨고, 선지자들의 소유욕에도 일갈을, 소농을 착취하는 대지주들을 나무라시고, 일상의 권리 실현을 위해, 범법자들의 단호한 처결를 위하여 목청껏 싸우셨다고.

     미카서를 읽었다. 미카 예언자가 ‘나의 백성’이라고 하실 때는 나의 백성의 적인 대지주들(미카 2:8), 나의 백성의 살을 뜯어먹는 정치가들(미카 3:3), 나의 백성을 호도하는 다른 예언자들(미카 3:5)은 제외하셨다. 친구의 반대말: 적들 – 프로인데: 파인데, 먹다의 파생어: 뜯어먹다 – 에센: 프레센, 인도하다의 왜곡: 호도하다 - 퓌렌: 페어퓌렌···. 그렇게 독일어를 배워나갔다.

 

 

     시간은 무서운 존재다. 무섭게 흘러가버린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 30년이 흐른 뒤, 2024년 늦은 가을, 승욱은 눈을 의심했다. 11월 27일자 신문에서 그 미카서 구절을 읽게 되다니. Y대학교 교수들의 시국선언이었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거기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말라. 머리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리라. 재앙이 내릴 때가 가까웠다.’(미가 2:1,3) 선언문은 공동번역 구약성서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승욱이 보는 낡은 가톨릭 성경과 조금은 달랐지만, 쿡쿡 웃음이 났다. 웃다가 썰렁해졌다.

     가롤로 신부님이 새삼 그리웠다.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라고 하시며 당신은 으스대며 걸으셨을. 오직 ‘공정을 바로 아는 것’만이 지도자들이 할 일이라고, 그렇지 못하면 재앙의 때를 맞으리라, 그러시면서 눈을 반짝이셨을.

     하지만 가롤로 신부님은 침묵이셨다. 벌써 하늘나라에 계셨다. 그러니까 시국은 좀 험했다. 좀이 아니라 많이, 확실히 험했다. 그 며칠 후 벌어질 시국은··· 살과 뼈를 가진, 그리고 눈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경천동지할한 그런 일이 닥쳐오고 있었다.

 

 

     다시, 신학으로 향하던 그때, 승욱은 시간을 거슬러 베네딕트 보이언 입학을 위해 제법 정진하던 그때를 돌이켜 보았다. 밖으로는 여전히 침묵 속에 숨은 것 같았지만 승욱은 열심이었다. 우선 괴테 인스티투트에서 독일어 능력시험의 성적을 높이고자 애를 썼다. ‘제어 구트’는 못해도 ‘구트’는 받고 싶었다. 베네딕트 보이언 여름학기 4-9월 입학을 위해서 1월 15일까지 입학신청서를 제출해야 했다. 첨부서류들도 찬찬히 준비했다. 김나지움 졸업에 13년이 걸리는 독일 학제 때문에 승욱이 사학과에서 3학기를 마친 것은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으로는 1년이 부족한 것을 커버할 수 있었다. 입학허가증이 나오면 학생비자로 바꾸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 새로운 학문,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 속에 알 수 없는 불안도 자리했다. 입학허가증을 기다리는 동안 독일어 성서 읽기에 더욱 열중했다.

     어머니에게는 항공엽서로 빼꼭히 알렸다. 엽서 그대로 크기가 아니라 BY AIR MAIL / PAR AVION / MIT LUFTPOST,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위아래로 스탬프로 인쇄되어 있는 얇고 얇은 우편봉투였다. 봉투를 펼치면 열리는 안쪽 전체가 편지지였다. 이냐시오 신부님처럼 예수회 신부님을, 한국 신부님을, 가롤로 신부님을 만났고, 많은 조언을 들었고, 내년 여름학기에는 알프스 자락 신학대학에 입학하려고 한다고. 신학 공부만 하는 것이라고, 사제직이 아닌 교직에 갈 것이라고. 한국에 우편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우체국에 가서 전화도 드렸다.

     투틸로, 알았어. 이냐시오, 아니, 가롤로 신부님 고마우셔라이. 신부님이 인도해주시는 길이람서, 엄니는 그저 기도만 할겨. 어째등가 밥 잘 묵고···. 밥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북독일에서는 흔하던 굴라쉬 접시가 그리웠다. 그렇다고 밥이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정말 밥도 입학허가서도 아니었다. 기도만 하시겠다는 어머니였다. 지난해는 3월 윤달이 들어서 이번 설은 양력 2월에 가서야 10일에야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기일은 1월 말일이었다. 그 날이면 입을 열어 말씀을 하시지도 입을 열어 음식을 먹지도 않으시는 어머니. 며칠이 가도 다만 조용하시다가 까치설에 이르러서야 배시시 웃어주시곤 했는데. 웃어 보일 외아들 승욱 투틸로가 멀리 있는 설날에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 계실까. 승욱은 1월 말에도 설날에도 전화를 드렸다.

     투틸로, 또 전화냐. 엄니 괜찮은디 그라냐. 대보름까진 할 일도 밖에 내다볼 일도 없는디. 기도만 하면서 그냥 이라고 있제이. 먼 걱정이냐이. 그래, 이모, 이모도 가끔 오시제. 겨울엔 여가, 촌이 나스제. 군불 때는 요런 따순 디가 어디 있가니.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의 소식이 전보로 왔다. 전보가 왔다는 사실 자체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영어문자로 왔다. 맘 펠 다운. 돈 써프라이즈. 허트 리틀. 콤 투틸로. 신부님이 틀리게 쓰셨을 리 없었지만, 시골 우체국에서는 서툰 철자로 내용 전달만 타이프를 해서 보낸 것 같았다. 어머니가 넘어지셨다고! 다치셨다고! 우체국으로 달려 가서 전화로 당숙한테 들은 소식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사실 전보부터가 그랬다. 어머니는 정말로 성당에 열심이셨제. 니도 알제. 눈이 와도 가셨다. 때늦은 눈이 쌓인 길에서 넘어지셨다. 엉덩뼈 뭐라냐 고관절을 다치셨고, 사진 찍고 검사도 다 했고, 수술 날짜 잡혔다. 수술은 간단하다네. 그 다음은? 다음 말씀은 없으셨다. 설명 보다 침묵이 훨씬 겁이 나게 했다.

     고관절이 어딜까. 알아보니까 고관절 골절은 노인들에게서 흔한 사고였다. 가볍게 넘어져도 부러진다는. 말도 안 돼, 어머니는 노인 아니잖아. 승욱은 서둘러 간단히 짐을 꾸렸다. 일단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어머니 곁에 있어야 했다.

 

     베네딕트 보이언 신학대학에서는 곧 입학허가서가 도착할 것이다. 서류가 부족하다는 연락은 없었으니까. 규모가 크지도 이름이 난 대학도 아니라는 이상한 안도감은 과신이었을까. 비행기에 앉아서 의심은 없었다. 이번에 한국 가서는 한국어 신학책들을 구비해 오자. 일단 기본 지식들을 알아야 돌아가서 독일어로도 잘 하지. 아차, 가롤로 신부님께 연락드릴 정신도 없었네. 승욱은 어머니 때문에 정신 나갔던 자신을 책망했다. 신부님께 연락드리는 일이 무에 시간 드는 일이라고!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드려야지. 아니, 도착하는 대로 어머니에게 달려가야지. 비행기의 지정 속도가 있겠지만 유럽을 향했을 때에 비해 무척 느린 것만 같았다. 몸이 뒤틀렸다. (끝)

 

 

---- 전남여고문학 2025, 11호, 271-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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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