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9. 8. 26. 11:23

나무

 

나방이나 채소밭의 상추도

밤에 달을 쳐다보면서

어쩌면 꿈을 꿀 지도 몰라요.

- W. 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에서

 

나무를 사 올까봐. 나무 심는 식목일이네, 벌써.

퇴근길에 말예요?

응. 작은 꽃나무를 고를까? 낼 쉬는 날이고. 아차, 낼은 마침 산소에 가는 날이네, 4월 첫 토요일. 이번엔 한식과도 맞아 떨어졌으니 딱 좋네. 산에다 심을 거면 좀 큰 나무를 살까?

산에다 나무를?

그냥. 사방에 산불도 나 쌓고. 올핸, 낼 한번 같이 다녀올까? 생각해 둬요.

 

닫히는 문과 함께 사라지는 말꼬리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우선 소파에 털썩 앉아서 달력을 들여다본다. 오늘 식목일은 청명과 겹치고, 낼은 한식, 다음은 음력으로 집는 삼짇날이다.

언제부터인가 시월상달의 시제는 봄으로 옮겨졌다. 음력 시월이면 눈 내리던 풍경일 때도 있었다. 시월 보름치는 ‘꾸어다’라도 한다 했던가? 보름께 올 눈비가 미리 올 때도 있었고, 바람까지 부는 언덕은 늘 추웠다. 나무들도 칼바람을 가려주지는 못했다. 음복이라고, 바깥에서 먹는 음식들은 다 식어 빠지고 말랐어도 유쾌하게들 먹었다. 밥은 그런대로 스티로폼박스에 보관해서 미지근하지만, 코펠 두 개로 끓여대도 국물을 데우기가 문제였다. 어떻거나 세월은 흐른다. 집안마다 어른들이 세상을 뜨시고 땅 속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차츰 세대가 바뀌니 참석자들이 점점 줄었다. 방식에서도 이것저것 원칙을 지키려는 뜻이 수그러들었다.

우선 축문을 한자로 쓰거나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한글로 써오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어색해했다. 소지(燒紙)를 두고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축문을 잘 못 읽더라도 분축(焚祝)이 대신해주니까, 우리들 기원이 충분히 전달되라고 하는 것이제. 암, 연기와 그을음이 하늘 높이 오를수록 감응이 크시지요. 손바닥으로 축문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해가면서 소지를 생략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반대도 만만찮았다. 밭두렁에서만 산불이 비화되는 것 아니라고, 축문 태우다 산불 내는 것을 조상님들이 원할 것 같냐고. 축문을 못 태울 거면 쓰지도 읽지도 말라요 뭐요, 설마. 갑론을박에서는 매사에 매우 이성적인 사람들이 결정권을 쥔다. 그래도 그쪽도 향불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절이 끝나면 향대 가득 생수를 부어 향을 끈다. 아예 불씨를 말린다, 아니 적신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좋은 일이다. 상차림도 완전히 간소화되어 주과포로 한정되었으니 따로 불 피울 일도 없다. 삼삼오오 차들로 나누어 타고 어느 식당에 가서 함께 점심을 나눈다. 이만하면 되었지, 조상님들도 우릴 기특하다 여길 것이네. 조상님들 아니라면 이리 모이기가 쉬운가. 옳은 말이다. 크게 나눌 것 없으니 다툴 것도 없는 일가들, 화기애애하다.

 

부엌은 아직 널브러져 있다. 아침 차리고 먹고 설거지, 점심 차리고 먹고 설거지, 저녁 차리고 먹고 설거지. 꼭 밥을 먹고 나면 그때야 오는 거지가 뭘까요? 답은 설거지! 며칠 전 라디오 영어방송에서 느닷없이 한국말 아재개그가 흘러나왔으니 웃을 밖에. 오늘은 그리 웃고 싶지 않다. 설거지하면서 벌써 다음 끼니 반찬 생각이라니, 무얼 먹을까. 무얼 먹을까. 무얼 먹을까. 무얼…….

삼짇날엔 진달래 화전이 얌전하다지만 맛은 여린 쑥을 따다 섞어서 찐 쑥떡이 일품이다. 내일 쑥떡이나 좀 해서 따라 나설까. 근년 들어서는 주과포라 해서 약식 시제를 드리니까 여자들이 음식에 매달리는 일은 사라졌다. 혹시 쑥떡을 하게 되면 오미자차나 보온통 하나 가득 담아가면 되겠지. 오지랖도! 뭣 하러 종일 부엌에 틀어박히나. 시키지도 않은 짓을 사서 할 것까지는 없지. 봄날을 즐기면 될 일이다.

 

봄은 4월이 되어야 봄 같다. 소프라노로 불리던 4월의 노래가 떠오른다, 4월의 시다.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하더니, 왜 또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라고 읊었을까. 이 행은 앞뒤가 맞지 않다. 내가 원래 시적 감흥력이 낮아서겠지만 이해가 잘 안 된다. 빛나는 꿈이 눈물어린 무지개가 된다!? 시인들을 시를 곧장 이해하기란 난수표 해독이나 다름없다. 세기의 시인이라는 한 시인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시간이라면서 4월을 왜 가장 잔인한 달이라 읊었을까. 100년쯤 흘러 먼 나라에서 막 피어나는 라일락 송이들을 몇 백 송이 째로 깊은 바다 속에 수장할 것을 미리 감지라도 했다는 말일까. 시인은 예언자도 신도 아닐 텐데.

아서라. 4월은 자연스럽게 무엇인가 움트는 시간임이 분명하다.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이란 긴 이름으로 4월을 부르는 인디언도 있다고 했다. 비슷한 다른 인디언들은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이랬다지. 씨앗을 뿌리며 느끼는 기쁨만 한 것이 있을까. 내 손으로 뿌린 씨앗이 뭐였더라? 있기나 한가? 분꽃 몇 알? 먹을 것이 아닌 볼 것을 위한 씨앗이지만,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새까만 씨앗에서 어찌 그리 예쁜 꽃이 피어날까. 경이롭다는 말은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을 보는 일에 쓰는 게 가장 적합하다. 게다가 꽃잎이라니! 유용성은 다음 일이다. 먹을 수 있는 것만 유용한 것도 아니다. 배가 불러도 불러도 불행한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 또한 배가 불러서 이러고 꼼짝 않고 앉아만 있는 것인지.

 

 

전화다. 집 전화다.

핸폰 왜 안 받아? 카톡도 안 보고!

안 받았어? 가만, 어딨더라? 충전기에 안 꽂혀 있는데 어딨나! 미안. 그런데 왜? 아침부터 급해서 전화야?

티비 안 보고 있냐고!

왜?

밤새, 아니 아침에도 티비 안 보냐고!

뭐, 산불 말야?

텔레비전을 켜니 불길이 아직도 훤하다. 무서우리만치 타고 있다. 밤새 손을 쓸 수 없었단다. 동 튼 지가 언제인데 여태도 못 잡았을까? 아니, 그 이상이다. 소나무 가지들이 송진으로 불타며 비화해서 100km를 날아갔단다. 설마 잘 못 들었나?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텔레비전을 보고 앉아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다.

은숙이, 은숙이 강릉 간 거 알지?

뭐야? 강릉엘? 지금 강릉엘?

그래, 어제 갔잖아. 케이티엑스 덕에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강릉 가서 여유 있게 점심 먹고 있다고 자랑질이더니. 오후엔 경포대 바다를 볼 거라고 하더니만.

이 봄날 무슨 바닷가.

바닷가 타령이 아니라니까. 강릉 일박이라고 했으니 이 불길 속에 강릉에 있었다는 말인데, 지금 연락이 안 된다니까.

호들갑이네. 그곳 사람들 집들이 문제지, 관광객들이야 빠져 나왔으면 된 것 아냐?

설마겠지만, 여자들만 갔다는데 일단 걱정이 되잖냐.

별일이야 있을라고.

하긴. 그런데 올케가 발언권이 세서 좋은 일도 있더라고. 그 집은 시누올케들만 남자들 다 떼어놓고 잘도 뭉치더라고. 해외도 가요, 며칠씩이나. 하긴 해외여행이야 어차피 여자들이 대세 아닌가. 남자들은 직장에 매어있는 동안에.

그러니 어쩌자고?

몰라 몰라. 그냥 연락이 안 되니까 여기 저기 돌리고 있지.

뉴스를 보면…….

친구가 불길 속인데 뉴스만 보고 있어? 매정하긴! 끊어!

성주는 전화를 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급하게 돌아선다.

 

매정하긴! 그래, 매정하다. 나는 매정한 편이다.

남이 씨, 그렇게 매정한 사람 아니잖아.

아뇨, 나 매정해요. 인정머리 없고 매정한 사람, 그게 나예요.

매사에 이런 식이다. 내가 따뜻함 넘치는 푸근한 전업주부의 인상을 주지 못 함을 알고 있다. 지적인 커리어우먼도 아닌 것이 따뜻한 사람냄새도 없으니, 뭔지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미안하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 모두에게? 똑부, 똑게, 멍부, 멍게! 누가 그런 분류를 해 놓은 것인지. 멍게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멍청하고 게으르고. 공감하는 일조차도 멍하고 게으르니까.

게으르지 말자. 멍청한 건 못 고쳐도 게으름은 개선할 수 있겠지. 우선 설거지나 마저 끝내자. 점심은 굶자. 간단하다. 간단한 하루가 흐른다.

조용한 한낮이다. 넷플릭스 - 영화의 세상으로 가보자. 두 시간은 좋게 지나갈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영화이야기가 진지하게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 들었던 어떤 제목을 검색해 보았더니 아직 넷플릭스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띄는 제목들도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변형이라는데. 아니, 청소년 버전인 모양, 패스! 〈첫 키스만 50번째 〉- 뭐야, 기억상실증인가? 정말 그렇다네. 단기기억상실증으로 매일 만나는 남자를 매일 처음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의 이야기란다. 첫 키스? 사랑은 키스로 시작되는가? 그럼 나에게 사랑은 없는 것이다. 고개를 젓게 된다. 입맞춤이 그리 쉬운가. 그것이 사랑의 충분조건인지 모르겠지만 필수조건은 아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입맞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마땅하다.

 

조용해! 엘뤼아르가 말한다.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숯으로 불을 지피며/ 입맞춤으로 인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인간의 뜨거운 법이다.’

‘쇼드 르와’, 엘뤼아르님, 죄송합니다. ‘입맞춤’은 그냥 상징으로 쓴 거죠? 진짜 묻고 싶은 것, 물을 수 없는 것은 그 제목이다. ‘좋은 정의’라고? 좋지 않은 정의가 있다는 말인가요?

 

 

아차, 이건 아니다. 헛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대문 밖으로 나가자. 아스팔트를 조금만 걸으면 흙길도 나온다. 길이라기보다는 도로 아래 천변의 산책로에 오솔길만큼 흙길이 남아 있다. 치유로서의 흙길을 찾아보자. 맑고 따뜻한 봄 날씨라더니 변덕을 부린다. 빗방울 냄새가 난다. 벌써 빗소리가 들린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집으로 향한다. 천변으로 오르내리는 층계 근처에 노점상이 있다. 오징어튀김과 어묵이랑 떡볶이를 판다. 요샌 김밥도 있다. 봄날 어울리는 메뉴는 없다. 봄날엔 봄날엔 봄날엔……. 봄날에도 배는 고프다. 아침에 뭘 먹었더라? 지금은 몇 시나 되었을까. 오징어튀김과 어묵과 떡볶이를 보다가 김밥을 집어들고 들어왔다.

점심 거른다는 거짓말. 김치 통에서 큰 무쪽만 달랑 하나 꺼내서 김밥을 씹는다. 아, 역시 여러 가지 맛이 서로를 죽인다. 왜 김밥에는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들어갈까. 우엉김밥, 계란김밥 그런 것은 왜 없을까. 일본사람이 하는 초밥집에서 오이김밥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수십 개 메뉴 중에서 오이김밥을 주문했는데 정말 오이만 들어있었다. 일본어는 완전 깡통에 영어도 별로라서 겨우 큐컴버를 알아보고 시켰을 뿐인데, 너무 괜찮았다. 평소에 내가 김밥을 헤집고 속을 빼내면 함께 먹는 사람들이 으레 한마디씩 한다. 자장면이나 비빔밥을 비비지 않고 먹을 때도 더러 궁시렁댄다. 이렇게 혼밥이니 누가 나를 탓할 일은 없겠다. 이럴 거면 그냥 묵은 김치를 잘 씻어 물기를 빼고 햇반을 하나 덥혀서 김밥을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스민다.

 

톡! 은숙이다.

내 걱정했었다고? 미안. 강은숙 완전 무사함다. 서울서 온 팀들 따라서 어제 강릉 철수, 서울 가서 밤새 놀았지. 늦잠 자고 뭐 좀 먹고 톡 볼 시간이 어딨어.

됐다, 그만. 우리 모두 성주 등쌀에 괜스레 놀랬지 뭐.

성주 미안! 고맙고! 울나라 기차 엄청 대단해. 새벽에 눈 비비고 출발했지만, 서울서 아침 먹고 강릉서 점심이 상상이 돼? 경포대가 당일 된다니까!

옹심이 맛 워뗘?

메밀전병 먹고파.

마음대로 드쇼! 직접 가서 먹어보삼! 강릉역서 시티투어도 있더라. 10시 전에 강릉역 도착해야 하니 당일로는 불가. 2박3일 한번 가자. 오죽헌, 주문진수산시장, 도깨비 촬영한 해변가, 물론 정동진 포함. 제대로 못 보고 와서 서운타.

못 보고 나오길 천만다행이지. 불구덩이 속에서 어쩔 뻔!

아슬아슬하지도 않아? 거길 다시 갈 맘이 난겨? 언제 불똥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곳엘?

이 불이 여름까지 계속 타고 있다고 하냐?

비화! 날아다니는 불! 그거 소나무라 더 그렇다네. 옛날에 불쏘시개로 송진을 썼잖아.

완전 벌거숭이라니, 새까만 숲, 상상이 안 돼.

암튼 벌거숭이 숲 보려고 관광객 밀릴 일은 없을 테니 한번 가자.

밀리긴. 관광지가 유지되려나 모르겠네. 웬만히 타버렸어야지.

그러니 더 가보자. 숲 말고, 시티투어도 말고, 경포대 가자니까.

누구 경포대 목매는 사람 있다냐?

한 두 사람 카톡에 따라 붙더니 곧 수다로 수선스러워진다.

나! 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친구들이 그때 그 옛날 일을 기억하고서 저러는 걸까. 강산이 서너 번 바뀌기 전 옛날이었다.

 

 

경포대로 갈 거다, 우린.

철없던 그때, 내게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이 경포대였다.

어딘데? 언제? 왜?

동해안 말이야, 여기선 꽤 먼 곳이라서 가보고 싶을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래사장이래. 1㎞도 넘는 해변을 거닐며…….

뭐야, 누구랑?

아니 뭐, 언젠가 결혼을 하면 말야.

결혼? 너 결혼 생각하는 누군가 있어? 그런 거야?

이 엉큼이 응큼이!

누구였더라, 날 막 때리는 시늉을 했었지…….

신혼여행을 경포대로? 꿈꿈스럽게 웬 동해바다야?

기껏? 신혼여행이면 제주도엘 가야지. 서귀포의 낭만을…….

아니, 대체 누구랑! 지금 장소가 문제가 아냐, 누구냐니까!

 

그때 벌써 우리는 전통과 서양이 뒤범벅되는 시절을 살고 있었다. 전통혼례는 촌스럽게 받아드려지고,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로망이었다. 명화극장에서 본 《졸업》에서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물론 도망은 아닌,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신랑과…….

우리는 《졸업》의 마지막 장면 때문에 유난히 개똥철학을 폈었다. 버스에 올라앉은 둘을 위한 테마음악이 ‘침묵’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그 애매모호한 표정 때문에, 그 불안한 눈빛 때문에. 하긴 젊음이란 개똥철학을 먹고 사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그 나름 새로운 출발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출발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변혁이다. 그럼에도 출발은 생각과는 다른 출발이기 십상이다. 나도 처음으로 새로운 출발을 생각했었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출발을 했다. 경포대에서의 출발을 접었기 때문에 신혼여행지는 정 반대쪽 남쪽이었다. 마침 겨울이라서 남쪽이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그런데 밤새 눈이 많이 쌓였다. 남북을 관통하는 큰 도로에 차가 오르질 못해서 호텔 근처 정방폭포만 봤을 뿐 종일 호텔에서 어슬렁거렸다. 찬바람에도 해변을 거닐면서 경포대 바닷가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귀가 윙윙거렸다. 하늘이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남이 씨, 나남이 씨!

허겁지겁 나를 부축하여 일으키는 신랑을 밀치며 다시 한 번 고꾸라졌다. 호텔 로비 쪽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나를 긴 의자에 눕혔다. 그리고는 곧 얼굴 양쪽을 붙잡고 흔들었다. 제가 의삽니다, 신랑이고요. 걱정들 마십시오. 자, 비키세요. 사람들이 몇 모여들었는데, 제복을 입은 직원들도 있었던 것 같다. 괜찮습니다, 저리 좀 비키세요!

그렇게 곧 동서남북을 회복한 내가 어찌어찌 앉을 수 있게 되자 그때서야 사람들이 흩어졌다. 그렇게 더 얼마를 앉아있던 내게 그는 뜨거운 커피를 가져왔다. 괜찮은 거죠? 괜찮죠, 남이 씨?

 

괜찮은 거냐, 남아! 너 괜찮아? 너 정말 괜찮은 거냐고!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가슴이 떨려온다. 나는 정말 괜찮다! 나는 그때도 괜찮았고, 지금도 괜찮다. 그 뒤로도 어쩌다 이석증이 일어나 성가신 일이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나가면 흔적이 없으니까. 내가 처음 이석증을 일으킨 그날, 그 남쪽 바닷가에서 들은 소리들, 그런 소리들이 문제였었다.

남아, 춥지 않아? 우리 이 모래밭 끝자락에서 순비기나무꽃 찾아볼까? 중부 이남에 피는 꽃이라지만 난 꼭 경포대 바닷가에도 피는지 찾아보고 싶었단 말야.

왜 하필 순비기?

아니 뭐. 내한성, 내염성을 다 갖췄으니, 좀 춥더라도 이 바닷가에서도 살아있지 싶어서. 있더라도 잘 안 보여서 세심하게 찾아봐야 해. 회색빛 잔털에 벽자색 자잘한 꽃망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얼른 눈에 띠지 않지. 꽃을 보려면 여름에 한 번 가자.

벽자색이 뭔데? 푸른 자색?

푸르스름한 회색빛. 푸르스름 보라스름 그런 회색.

보라스름이 다 뭐야! 응, 알겠어, 보라 냄새!

보라 냄새는 또 뭐야. 색깔에 무슨 냄새!

색깔마다 냄새가 왜 없어! 어떤 보라에서는 제비 꽃 냄새, 어떤 보라에서는…….

에이, 그거야 나도 알지. 핏빛에서는 피 냄새!

그만 해. 그건 아냐.

 

나는 정말 괜찮고, 순비기나무꽃을 찾던 선배도 괜찮을 것이다. 우린 경포대에 간 적도 없으니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입술을 살짝, 아주 살짝 스친 것만큼만 가까웠고, 입술을 아주 살짝 포갠 사이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다만 더는 누구와도 입술을 포갤 수 없는 것, 그것은 그냥 내 문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어느 두 사람 사이에서 입술을 포개는 것은 대단한 접촉인 것 같기도 하다. 입술이야말로 싱그러움과 관련된 어떤 신성한 곳이니까. 그에 비해 남녀의 접촉이라고 할 때 흔히 떠올리는 거기 그 곳은 생명의 창조와 관련된다 하더라도 적나라한 열기와 혼돈과…….

 

 

아이스 블루 톤이다. 톡이 아닌 전화소리다.

남이야, 나.

그래 은숙아, 왜? 톡 봤는데, 보고 있었어. 산불 용케 피했으니 잘 됐다 뭐.

남이야, 나.

뭐? 왜?

나, 누굴 슬쩍 본 것 같아.

누구를?

그 선배, 식물인간.

뭐라고? 선배를? 언제, 어떻게?

강릉에서지 어디야. 바닷가에서 나와서 감자옹심이 먹으러 가는 중에. 길에 지나가는 사람인데 왜 그리 닮았는지.

설마.

지나가는 모습이 틀림없었어. 옆의 사람이 귀에 올려대고 말을 하는데, 약간 오른 쪽으로 기우뚱 하고 그렇게 들으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그 뭔가 독특한 자세 있잖아.

시끄러, 잠시 지나가는 사람 모습을 보고 웬 옛날 생각을 해. 세월이 언젠데.

가슴이 덜커덩, 내가 왜 덜커덩이었는지, 암튼 틀림없었다니까. 애들 톡방엔 쉬쉬할게 염려 마.

 

 

약간 기우뚱 하고서…….

그랬다. 그는 그때 젊은 시절에도 약간 기우뚱 기울고서 걸었다. 키가 비쩍 커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다. 실루엣을 보면 피사의 사탑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가리켜 피사라고도 했다. 물론 식물인간이라고 돌려서 말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 시절 우린 참 너무나 순진해서 남자친구 이름들을 대놓고 부르지도 못했었다. 식물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뭔가 동물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는 화끈한 멋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또 그가 입만 벌리면 식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식물 이야기. 나는 지금도 식물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지만, 식물 이야기는 널려있다. 『나무수업』이라는 책도 재밌다. 『동물 속의 인간』 보다 더 먼저 번역된 책이다. 둘 다 독일인들이 쓴 것이 흥미롭다. 아니, 둘 다 인간적 식물과 인간적 동물에 대해서 쓴 것이 더 흥미롭다. 동물만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나무들도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고 하는 부분은 우리 인간들처럼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을 넘는다. 경쟁하고 부대끼며 지혜를 발견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도 인간과 닮았다. 정말이냐고? 식물도 설마 그러냐고? 내가 식물 관련해서 책들을 다소 무조건 사 보는 습관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책들의 광고를 보면 그 식물인간이 저자일까 흠칫 놀라기도 하는 이 심정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무가 경쟁을 하는 것쯤은 우리들 감각으로도 안다. 햇빛은 중요한 경쟁대상이고, 햇빛 잘 드는 자리를 위해 다툼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다들 햇빛을 향해 키를 키우고, 햇빛 쪽으로 굽는다. 이태 전이던가 『나무수업』을 처음 읽었을 때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하다가 그때도 호들갑이란 핀잔을 들었다. 5월 초 학교 후문에서 만나 점심 먹고 캠퍼스 내를 산책하던 때였다.

 

아, 이 이팝나무들 좀 봐. 곧 전체가 하얀 천지가 되겠네. 아카시아도 곧 만발할 테니까. 감탄사는 대게 정인이가 시작한다.

그러게, 이건 팥배나무 아냐?

팥배건 콩배건, 난 정말 하얀 꽃들이 좋더라. 어쩜 이렇게 싱싱하게…….

나무도 영양분을 두고 친구들과도 적들과도 나눈대. 『나무수업』이란 책에서 봤어.

미쳤냐. 움직일 수도 없는 그놈들이 무엇을 나누고말고 해.

아니, 막 움 터서 자라나는 새끼들에게 직사광선을 가려주려는데, 옆의 나무들과 합세해서 큰 가지들로 가려준대. 지나친 햇빛을 막는 거라고. 너무 빨리 자라서 아무 것도 학습하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지. 겁 없이 막돼먹지 말고 느리게 자라기, 뭐 그런 것. 느리게 자란 놈들이 장수하는 거래.

말도 안 돼.

아스팔트 가로수들이 왜 빨리 죽냐면…….

죽냐면?

숲을 떠난 아이들은 말하자면 집 나온 아이들이래. 처음엔 햇빛도 마음대로 누리고 뿌리도 맘껏 뻗지. 그러나 곧 아스팔트 속 단단한 물질들에 길은 막히고, 살려면 하수도관이라도 뚫어야 할 지경이 돼. 하수도 뚫리면 도로는 범람하고. 몇 백 미터도 자랄 뿌리들인데 막혀서는, 참 불쌍도 하지. 우린 숲의 나무를 데려온 순간 그들을 고아에 장애자로 만드는 것이야.

야, 여기 인간적 인간 나셨네. 얘가 요새 점점 더해요.

왜 그래. 일리 있는 말이다야.

그렇지. 동물애호가들도 더 나아가 식물애호가가 되어야 해. 난 물론 이기적 동물이라서 겨우 내 몸 내 주변 관리도 잘 못하지만.

그러니까 나무들에게도 알맞은 삶의 형식이 있다는 말이지. 간단하네. 아스팔트로 끌려오지 말고, 그건 유배니까. 아니, 사람들 좋으라고 기쁨조 노예로 끌려온 거니까. 완벽한 흙, 적당한 온도와 수분을 갖춘 흙 속에서, 숲 속에서 사는 것이야. 가능하면 같은 종끼리 모여서. 그러니까 사회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완벽한 흙을 갖춘 진짜 숲에서 성장하는 거야. 언제 책 가져와 봐, 나도 좀 보자. 미선이 거들어줘서 너무 다행이었다.

그렇다니까. 그렇게 해서 터득한 생존 지식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뭐야, 식물들이 자녀교육까지?

아니란 법 있어? 나무의 자녀교육, 참 좋은 말이네. 나무답게 사는 법, 그런 책이 있을 법 하네. 바람소리로 전달되는 책이.

날아가라 날아가, 상상은 자유다!

상상 아니라니까. 숲 전문가, 동물 전문가들이 쓴 책이니까.

이 애가 아직도! 너 책을 100퍼센트 신뢰하는 거야? 까만 글씨면 무작정 모두 믿느냐고!

난 글씨를 믿는 편인가 보다. 까만 글씨, 인쇄되어진 말은 확실히 무겁다. 말은 다소 즉흥적으로 튀어나오니까 독이 묻어도 살짝 묻은 것이지만, 글은 다르다. 곰곰 생각했고, 썼고, 아마 다듬었고…….

 

 

나무들 일단 들여올까?

대문을 여다 말고 그이가 말만 먼저 들여보낸다.

어, 왔어요? 나무들 큰 거예요? 뭘 샀는데! 뭐가 되었건 들여오세요. 현관에 두든지 발코니에 내놓았다가 가져가야죠. 차 안에다 두면 불쌍해.

그런 남이 씬 불쌍찮게 집밖에 나갔나요? 오늘도 집안에만 있었어?

그냥 좀. 빗방울 때문에.

그렇다니까. 사람이 바깥바람을 쐬야, 통풍이 돼야……. 내 무서운 말 한번 할까? 외로움은 치매의 지름 길이예요!

치이!

미안, 미안. 여기 봐요, 자잘한 것 두 종류. 둥근 측백, 이것들은 양쪽 앞 쪽으로 심을까 해서 둘. 또 배롱나무가 좋을 거래서 하나 샀네, 자손들이 우애를 한다나 뭐라나. 장소가 아직 마땅치는 않지만, 낼 보고서 심으면 되겠지.

배롱나무는! 가로수로 널려 있는 게 배롱나무들 아녜요? 새삼스럽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대충 씻고 와요! 저녁이 좀 늦었네요.

아무래도 나무들 고르다 보니까.

반찬은 밖에서 장만해 왔으니 걱정 없네요.

내가? 내가 반찬 장만을?

예, 울 할머니가 ‘가만 있거라, 반찬 장만해서 먹자’ 그러시면, 좀 기다렸다 시장하거든 먹자는 말씀이셨거든요. 실은 아버지 기다리시면서.

그런가. 시장이 반찬이다, 그 말이군. 그런데, 와우, 이 부추전! 이런 거면 배가 안 고파도 맛이 넘치겠네요. 물오징어에 알새우까지 넣어주니 입이 호강이군. 내가 오늘도 뭘 그리 잘 살았나!

애 많이 쓰셨죠! 환자 보는 의사님들 모두.

감기 환자들 기침 냄새 가래 냄새 맡고……. 이런 말은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그런 생각만으로 난 벌써 음식이 목에 걸린다. 애를 써서 먹을 양식을 버는 일이 짠하다. 남편 뿐 아니라 세상 누구나 다 짠하다. 먹을 것을 벌어야 하는 숙명이라니!

 

대강 치우고 앉으니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활활 타고 있다.

속초 의료원 큰 일 날 뻔 했더만. 세상엔 괜찮은 사람들이 더 많아. 지성으로 환자 대피시키고 보호하고.

어쩌냐. 숲이 저렇게 완전히 타버리면 개미가 돌아오는 데에도 13년이 걸린다네요.

그러게나. 그런데, 개미? 개미라고? 남이 씨 개미 무서워하지 않았어?

무서워하기까지는. 예, 개미 무섭죠. 어딘가로 옷 속으로 스며들 것 같은 느낌. 스멀스멀, 그래서 숲 속에 잘 안 가죠.

안 가기는, 아예 못 가지. 우리 그러니까 숲 속에 가 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숲 속은! 숲 속에 꼭 함께 가야되는 것도 아닌데 왜 안 가시고 그러시나?

아, 나야 가죠. 더러 가 봤죠. 남이 씨랑 숲 속에 함께 갈 수 있을지 이제부터 희망을 가져도 되나 싶어, 반가워서 하는 소리지. 가까운 축령산 편백 숲이라도 함께 가는 거요! 점심 먹고 거기 가면 피톤치드 확확 뿜어져 나오는 시간이니까 딱 좋을 텐데. 40킬로쯤인가, 한 시간도 안 걸려. 개미 무서우면, 가자마자 비닐천막 깔개를 넓게 깔고 삥 둘러서 모기 진드기 약을 뿌리면…….

아서요. 누가 개미 무서워 안 간다고 했나요.

그럼 왜?

 

새삼스럽다. 내가 숲을 피한다는 생각을 왜 할까. 산소에 갈 일 있으면 대강 따라 가는 편이다. 그러니까 일이 있으면 간다. 숲이나 밭이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흙속에는 작은 동식물들이 섞여있는데, 그것들에 가끔 놀란다. ‘나방이나 채소밭의 상추도 밤에 달을 쳐다보면서 어쩌면 꿈을 꿀 지도 모른다’ 비슷한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렇게 꿈꾸는 상추를 밟기도 하고 뽑아서 먹기까지 하면서 나방 애벌레를 보면 무섭다. 사람, 아니 어떤 위협적 생물의 발자국을 느끼면 동그랗게 몸을 말고서 도망가는 작은 생명들, 어쩌다가 으깨어져 뒹구는 물컹한 어떤 것들이 무섭다. 나를 해칠까 봐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바뀌었을 상황이 생각나면서 무서운 것이다. 나는 너를 무심코 밟았고, 어쩌면 내가 너였을 수 있고, 그런 것 말이다. 동물들과는 동일시가 되나 보다. 그러니까 생명이 무섭다. 곧 또는 조만간 손상되거나 사라질 생명이 무서운 존재다.

남이 씨, 나남이 씨!

응, 예.

올봄엔 정말 숲에 한번 갑시다. 아스팔트로 계속 달리다가 잠깐 숲에 들어가는 건데 못 갈 것 없겠죠? 쌍계사 벚꽃 길을 섬진강 따라서 종일 걷는 사람들도 있대요. 우린 그냥 어디로든 30분만 걷다가 딱 뒤로 돌아 하고 오면 될 텐데.

그렇게 유명한 델 어찌 가려고요. 꽃구경은커녕 사람들에 떠밀리고.

사람 참. 사람이 사람 속에 섞이지 그럼 코끼리 사이에 섞일 테요?

철새 따라 섞이지, 날 수만 있다면.

철새라고? 철새라!

아니, 만일 우리가 어딘가 다른 동물 그런 데 섞일 수 있다면, 그런 상상이라도 해본다면, 새가 낫죠. 것도 철 따라 이동하는 철새가.

웬 철새 찬양!

지금이 철새 대이동 시기니까 서해안에 가면 엄청난 새들을 볼 수 있다던데. 우리나라 새들이 500종이면 텃새는 100종류도 안 되고.

어, 거의가 다 철새네!

왜 철새들은 이 시기엔 북쪽으로만 나는지. 두루미 기러기는 벌써 시베리아로 떠나고, 어떤 놈들은 일단 우리나라에 들렀다가 시베리아까지 올라갈 것이고. 삼짇날이니 제비도 남쪽에서 올라오겠네. 바다제비며 슴새들 번식지도 따로 있대요, 가거도. 이름도 예쁜 가거도에.

남이 씨, 참. 워낙 방콕이 취미인 사람이라 철새 같은 건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네요.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모르는 것이…….

그거야, 사람이 변해서죠. 누구라도 변하죠. 할 일 없이 앉아서, 뜸부기다 뭐다 노랫말 때문에, 아니면 시 같은 데에서 귀에 익은 새 이름들 찾아보다가. 그런데 난 파랑새가 진짜 새인 줄도 몰랐다니까요. 파랑새는 그냥 상징으로, 파란 꿈에 대한 상징 같은 것으로 알았죠.

직박구리 그 이름을 찾느라고 온갖 새 이름을 뒤졌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다. 새 울음소리 때문에 내 생전 처음 듣는 청혼을 흘려들었다고, 아니, 새 울음소리를 핑계로 청혼을 흘려들었노라고, 그것을 누구에게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난 정말 못 들었다. 괜찮겠지? 너 나랑 결혼하자고!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나무 위 새 소리만 듣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던 새 소리,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키 큰 은목서 위의 그놈들은 직박구리였다. 내 첫 이별의 자리에 함께했던 새, 새 이름을 뭣 하러 애써 찾았는지, 누가 알랴. ‘훌우룩 빗죽새’라고도 불리는 시끄러운 직박구리, 그 울음소리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우리 남이 씨, 나는 한 마리 파랑새 되어 저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파~ 그런 것이네.

뭐예요. 그 노랫말을 어떻게?

어떻게 외우냐고? 남이 씨 노래인데, 당근 나도 외우지. 사랑한 것은 너의 그림자, 지금은 사라진 사랑의 그림자~.

무슨 내 노래가 있고 그런가.

그러게 말도 안 되는 소릴 왜 해요. 날 수 있다면 철새 따라간다는 소리는 뭣 하러. 죽었다 깨나도 사람이 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뭐. 찹쌀이 있으면 팥을 빌어다 찰밥을 해먹을 텐데 시루가 있어야지, 그런다잖아요.

뭐예요? 찹쌀도 시루도 암 것도 없다고? 우리 말 참 재밌네. 옛날이야기들엔 밥 타령이 많아.

좋아요, 말 나온 김에 찰밥을 찌죠. 낼 찰밥 해서 따라갈게요, 산소에.

어, 정말? 웬 찰밥! 여럿 먹이려면 남이 씨 힘들 텐데.

맛으로 나눠 먹을 것 좀 하는걸요. 다른 건 잘 못해도 찰밥 찌는 건 쉬워요. 찹쌀도 팥도 시루도 다 있는데요 뭐.

어마무시 고마워요!

낼 몇 시에 출발? 10시쯤 나갈 거죠? 그럼 시간 충분해요. 가만 나물 감이…….

혼잣말을 하면서 다시 부엌으로 향한다.

 

오늘 밤은 길어질 것이고, 그런대로 시간이 잘 갈 것 같다. 곡식들 꺼내려 뒤편 발코니로 나가 밖을 본다. 살짝 내리던 비는 멎었고 바람이 살랑거린다. 나무 잎들도 살랑거린다. 여전히 비를 품은 냄새일까. 낼 산소 가는 일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비가 내려야한다면 비가 내려야 한다. 먼 데 불을 끄기 위해서라면 우리도 비를 맞자.

그 땅의 나무들은 언제나 돌아오려나. 개미들 돌아오고 나서도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새들이 날아든다는데, 나무들은 또 몇 년을 더 기다려야 움터서 자랄 것인지. 그렇게 새로 자란 나무들을 보게 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은 느릿느릿 저절로 자라나서 하늘을 가리도록 무성한 잎들을 낼 것이다. 누군가가 숨죽이고 자신들을 기다렸을 것일랑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훗날 새파란 아기들이 태어나면 그들 선조가 겪은 대재난을 이야기해주려나.

얘들아, 세상엔 피할 수 없는 재앙도 있는 법이란다. 불이라는 게 비화하면 우리 나무들은 속수무책으로 타버린단다. 다만 그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는 기적을 꿈꾸는 거야. 어째도 꿈은 꾸는 거야. 살 떨리는 긴 기다림으로, 후훗, 살 한 점 남아있지도 않았지. 그래도 흙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는 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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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고문학 2019, 5호, 222~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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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