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국무총리 인사청문특별위원회가 가동되었다 한다. 본회의 투표 전 10여일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가관은 적반하장의 행태들이다. 한 마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부재 탓이다. 이것은 ‘귀족의 의무’ 라는 뜻이지만 혈통귀족이 아니라 정신귀족으로서의 의무요, 출신성분이 무효화한 현대사회에서는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를 말한다.
단어가 서양에서 나오고 보니 서양문화권에서는 당연한 덕목이다. 최근 영화화로 유명해진 타이타닉 호의 침몰시(1912년 4월) 추운 밤바다에서 노약자들을 보호하며 생명의 보트를 양보한 것은 세력 있는 신사들이었다. 이들은 1852년의 버컨헤드 호를 기억했을 것이다. 영국해군의 자랑스러운 수송선에서 세튼 대령 이하 사병 전원이 ‘여자와 어린이 먼저’라는 숭고한 전통을 세우며 죽어갔으니까. 20년전 영국의 앤드류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헬기의 역할은 전함 주위에 떠서 날아드는 아르헨티나의 미사일로부터 전함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당시 전쟁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국의 핵잠수함에 의해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제네랄 벨그라노 호가 격침되고, 아르헨티나의 막강 프랑스제 엑소세 미사일은 영국 구축함을 두 척이나 침몰시켰다. 이러한 전쟁의 전면에 왕자가 참전하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러한 예가 없지 않다. 1965년 10월 4일, 수류탄 투척 연습 중이던 한 병사가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놓치고 말았을 때, 수류탄 위에 몸을 덥쳐서 부하들을 살리고 산화한 숭고한 강재구 소령의 행동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나라가 불안하다 하면 외국으로 빠져나갈 궁리부터 하는 부유층과 지도층이 적지 않다. 오죽하면 해외 원정 출산을 중개해 주는 여행 상품이 인기를 모으고 있을까. “베이비인유에스에이” 등의 웹싸이트는 “출장이나 여행중 부득이한 사정으로” 미국에서 출산하게 되는 한국인들을 돕는 명목으로 “유아시민권” 메뉴까지 달아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친절을 보이고 있다. “부득이한 사정”이라면 누가 왜 위화감을 갔겠는가. 그 동안 하필 모 정당의 대통령 후보 손녀가 미국에서 출생하자 끓어올랐던 서민들의 배신감과 좌절감은 오래 갈 것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격으로, 죄 지은 것이 없으나 죄지은 것으로 오해를 받았겠지만, 아무래도 떨떠름한 건 감출 길 없다.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논란 이후에 터진 연속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서 말이다. 이득은 명쾌할 때만 가치가 있다.
거제에 가면 시목리에 팥죽논이란 논이 있는데, 을유(1885)년 큰 가뭄으로 흉년이 되어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먹었다는 논이다. 그러길래 바른 집안의 가르침으로는, 아무리 재산을 늘리려 해도 흉년에는 남의 논을 사지 말라 했고, 파장에는 물건을 사지 말라는 금도가 있었다. 학문을 해도 지조와 의리를 꺾으면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명예를 목숨처럼 지키려는 집안이 존경을 받았다. 청렴, 강직, 기개, 남에 대한 배려, 예의범절 등 전통사회의 명문가들이 지녔던 이 같은 선비정신을 회복할 때이다. 물질의 부(富)와 정신의 귀(貴)를 맞 트레이드해야 살 맛 나는 세상이 된다.
사족으로, 트레이드라면 월드컵을 빛낸 선수들의 현안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세계 유수의 팀으로 이적되어 온갖 기량을 펼치기를 누가 바라지 않을까. 한편, 당연한 온갖 포상에 당연하지 않은 ― 특혜든 특권이든 당연은 아니다 ― 병역면제까지 받은 이들의 앞날 역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 속에서 보고 싶다. 누구도 이들의 병역면제를 사회지도층의 특혜라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이들의 역할이 전무후무한 애국심 고취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스포츠 명인이든 사회의 지도적 가치를 휘몰고 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인 세상이다. ‘너무 훌륭하였으므로’ 당연히 병역도 면제해주어야 하는 것은 뭔가 아니다. 병역의무란 ‘훌륭하지 않은 보통 또는 보통 이하의’ 아들들에게만 해당되어서는 살 맛 나는 세상이 될 수 없다. 너무 훌륭한 아들들이 보통 아들들이 하는 병역의무도 수행할 때 더욱 훌륭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스포츠 명인들의 병역면제는 귀하신 아들들의 병역면제와 더불어 그들이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기회를 다소 박탈한 것이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주랬으니, 옛 가르침은 멋스럽기까지 한다. (2002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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