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구중궁궐은 따로 있었으니… 모멸감의 폭발력을 진정 모르는가 | ||||||||||||||||||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5. 레미제라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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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불쌍한 사람들’ 또는 ‘비참한 사람들’이란 설명 없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레미제라블』은 지난한 소설읽기를 힘들어하는 대중들에게도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깊이 각인돼 있다. 옛날엔 불쌍한 장발장이 감옥을 탈출해 더 불쌍한 코제트에게 꿈과 같은 인생을 선물하는 줄거리만으로도 감동을 주었고, 오늘도 브로드웨이는 소설 『레미제라블』 초판에서의 삽화를 내걸고 공연을 진행한다. 실제 인생이라면 막다른 사창가의 판틴이 꿈을 꿀 수나 있는가, 흙수저 에포닌에게 사랑이 가능이나 한가. 실제 인생에서라면 그릇된 규율에 반기를 든 장발장이 시대적 정의감의 화신 자베르 경감의 대립에서 반드시 승리할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왜 시대를 초월하는 감동을 주는 것일까. 빅토르 위고는 젊은 시절에는 전형적인 근왕파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을 정점으로 확실한 공화파가 됐다. 혁명의 열매로 탄생한 제2공화국 의회에서 위고는 선출직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의 실용적 개혁주의에 적극 찬동했다. 그 대통령이 스스로 쿠데타를 통해서 황제임을 선언하는 일을 상상이나 했었겠는가. 실제로 혁명을 ‘물러버린’ 대통령의 쿠데타는 억지로 나폴레옹의 가계를 잇겠다던 그 황제는 그렇게 역사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그 지점에서 위고의 반대는 시작됐고, 시민군을 조직해 투쟁하다가 체포돼 추방당했다. 『레미제라블』은 그렇게 스무 해 가까운 추방 생활 중에 쓴 역작이었다. 그의 공화주의 사상은 더욱 심오해졌고, 민중과 민중의 실패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졌던 것이다. 작품 속 민중봉기 장면은 성공한 1848년 혁명이 아닌, 단 이틀 만에 진압돼 실패해버린 1832년 파리의 6월 봉기다. 바로 그 실패로 인해 더욱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리라. 그대 듣고 있는가 / 분노에 가득찬 노래 / 굴종의 삶을 거부하는 / 우리들의 노래를 / 너의 심장소리와 / 북소리 울려 퍼지면 / 어둠 뚫고 새날이 / 밝아 오리라…… 영화와 뮤지컬에서의 원제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 혁명을 선도하는 학생회 지도자 앙졸라가 선창하고 학생회 회원들과 군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를 육성으로 들은 것은 아직은 여름의 혹서를 예감하지 못했던 초여름, 광주 5월의 달거리 공연에서였다. 어둠에 쌓인 무대를 손에 든 촛불만으로 밝히며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를 노래하는 김원중과 작은 시민합창단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환하게, 장엄하게. 이 마지막 곡이 끝나고도 한참을 무대며 객석은 움직일 줄 몰랐다. 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은 위고의 작품 도처에 스며있다. 또 다른 작품 『비참한 세월』에서의 광부들의 일상도 비참 그 자체다. “주인은 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빵이 모자라서 석탄을 깨물고 있었다. 우리는 [……] 일을 조금 줄이고 임금을 조금 낫게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총탄이다.” 임금 대신 퍼붓는 총탄! 현대의 한국어로 바꾸면 총탄을 세금폭탄 정도로 바꾸면 될까. 허나 세금폭탄도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증세는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쓰일 것이라고 믿을 수 있으니까. 세금폭탄도 좋으니 제발 모멸감만은 주지 마시오! 21세기 한국의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모멸감을 견뎌내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이 오늘의 일상이다.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경찰의 물대포 직사와 관련된 실험과 디테일을 제 정신으로 볼 수 있었을까. 철판이 날아가는 방송 제작진의 실험보다는 유리도 안 깨진다는 경찰의 실험을 믿어야 하는가. 물대포 현장에서 쓰러진 응급환자의 수술을 집도한 교수는 ‘단순 외상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임상적 소견’을 피력했었다. 결국 300일 넘게 의식불명이던 환자는 사망했고, 사인은 병사라고 작성된다. 의학을 모르는 우리는 의대교수의 전문가적 견해를 믿어야 한다. 경찰은 어떤가. ‘대한민국 경찰이 설정한 15bar는 안전한 수압’이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사망사고가 있어도 사과를 하는 것이 법적으로 어긋난단다. 법을 모르니 경찰의 견해를 믿어야 한다. 믿으라면 믿어야 ‘혼이 정상인’ 국민이 될 터인데!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혼돈의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모멸감은 증폭해 망연자실에 이르게 한다. 온갖 재단이다 법인이다 설립하기를 무슨 종이접기 정도로 해대는 ‘실세’는 우리를 모욕하다 못해 돌게 만든다. 오늘날에도 왕자와 공주가 버젓이 존재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시중드는 시종들이 즐비한데, 공주들이 동화에서처럼 순결하고 착한 성품을 지닌 것도 아니라면 어찌 하오리까. 진짜 구중궁궐은 따로 있고 정치는 수렴청정을 거치는 모양새라는데, 이를 차마 어찌 믿으오리까. 아뿔싸,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셨단다! 차라리 절대로 아니라고 부정을 하실 것이지, 그렇게 대놓고 국민을 능멸하시다니! 우리가 위임한 성스러워야 할 국가권력이 길거리에 그리도 너절하게 굴러다니다니! 레미제라블! 국가의 품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삶의 근간은 불안하기만 하다. 불쌍한 사람들은 여전히 ‘임금을 조금 주더라도 일정한 일자리를 주시오!’라고 절규한다. 밥은 먹어야 하는데, 전망은 어둡다. 한국의 우상인 미국에서 최저시급을 올리겠다는 대선 선거공약에 그 반작용으로 생산비 절감의 묘수가 봇물을 텄다고 한다. 패스트푸드점 직원만 해도 36.5도의 온도를 가진 성가신 인간에서 무감각한 존재인 로봇으로 바뀔 전망이란다. 로봇은 원래 혼이 없으니 혼의 유무를 걱정 안 해도 돼서 좋아할 사람 많겠다. 인간을 로봇보다 저열한 위치로 끌어내리는 갑의 모욕질에 을의 모멸감은 도를 넘는다. 그런데 ‘돈 있어 실력 있는’ 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의 가공할 힘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모멸감의 폭발력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밀폐된 공간, 썩은 가스의 압력은 철판도 뚫고 폭발하는데. 역사는 「민중의 노래」를 기억하라고 하는데. 무지해서 모를까, 겁이 나서 외면할까. 충분히 불행한 오늘, 그것이 알고 싶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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