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 Mauerspringer
<장벽을 넘는 사람> - 페터 슈나이더Peter Schneider(1940~ ) 원작, 들불 1991
그는 문학의 사망이 공공연히 고지되었던 1968년, 베를린 대학 연좌데모에서 유창한
연설로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다. 슈나이더는 문학사에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저
유명한 연설로서 등장했던 것이다. 그 한 토막:
우리는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우리는 순응했지요. 적응력이 있었구말구요.
그리고 우리는 과격하지를 못했습니다. […] 우리는 대학인이라는 특권을 누려왔습
니다. […] 학업을 시작했고, 필수과목 강좌에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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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설에서 그가 속죄하는 것은 대학인이라는 현존 자체였다. 시간소모에 불과했던 세미나, 복종을
강요당했던 시험 공부들이 비판되었다. 그의 눈에는 거리에는 사람간의 진정한 왕래도, 의견교환도
없고, 집에는 사람들 대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가구들이 버티고 산다. TV는 이 가구들이 진실하다고
외쳐대기 위해서 존재한다. 기존의 예술은 무용지물이다. 상상력의 천재들이 그들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기존의 예술, 또는 작가의 상상력과 꿈들이 자존에 의해 잠식 당했음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 참상을 그리는 데 그친 사실주의자들, 그 어느 것도 "인간적 소망을 자본주의로부터 보호하려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보쉬공장의 보조노동자로 일했다.
이 경험은 세계적 대기업의 작업환경의 의외적인 열악성, 콘베이어 벨트의 리듬에 종속되는 인간의
문제, 도급수당제의 살인적 노동력 착취의 관행 등에 대한 폭로적 글들을 쓰게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체류가 준 경험 --- 독일 운동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대한 인식 등이 반영된 작품
『렌츠 Lenz』(1973)로서 문단에 복귀했다. 이어서 『자칫하면 빨갱이』로 번역된 .....
schon bist du ein Verfassungsfeind (1975)등의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장벽을 넘는 사람 』에서는 "머리 속의 장벽"을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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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넘는 사람 Der Mauerspringer
이 작품은 그가 문학으로 복귀한지 10년이 흐른 1983년 작이다.
베를린 장벽을 적법하게 통과하면서 동쪽의 친구를 가진 주인공 과 그 동쪽 친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장벽에 얽힌" 이야기들을 뼈대로 하고 있다. "샴의 쌍둥이" 도시
베를린에서는, 우리에게는 놀랍게도 적법한 절차의 통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1970년대 브란트수상의 동방정책에 의한
<독독기본 협정> 이후 다시 적법한 통행의 길이 열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상적인
통로를 두고서도 "장벽을 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질문은 남겨두는 것이
쫗을 것이다. 소설 읽기의 재미를 미리 빼앗지 않고 싶지는 않으니까.
사족:
필자가 1992년 베를린 도착 이튿날 방문한 곳은 바로 이미 무너진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훼였다. 장벽에 남아있는 그림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물론 『장벽을 넘는 사람 』의 표지를 그린 그림이었다. ( 아래 사진 참조!)
그리고 물론 그 일부는 사진으로 구할 수 있었다.
우리 독문과 과실에 걸어둔 그 중 하나의
사진은 담장을 헐어내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담고 있다:
~~ 아직도 허물어내야 할 벽들이 많이 있다.
Es gibt noch viele Mauern, abzubauen. ~~
▲ 1992년 가을 필자 촬영. 베를린 장벽 잔훼에 남아있는그림들은 분단 당시의 염원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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