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25. 10. 10. 19:56

 

침묵12 – 너무나 종교적인

 

 
  우리 인간은 특권을 몹시 탐내는 것 같다. 그것도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의 출생, 이를테면 우리가 인간이고 지구 위에서 태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 우리는 그것을 인간중심적 과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과신은 인간이 신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생각에서 거의 절정에 다다른 것 같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1994)

 

 

     너무나 종교적인 – 이런 표현은 값싼 클리셰일 수도 있었다. 니체의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표현을 따라 ‘너무나’는 말 그대로 진부한 유행어였으니까. 그러나 승욱은 인간을 표현하는 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구가 다만 ‘창백한 푸른 점’임을 또렷하게 인식한 다음부터였다.

     ‘창백한 푸른 점’은 너무나 대단해서 그가 따옴표 속에만 쓴다. 보통형용사도 보통명사도 아닌, 너무나 특별한 표현이다. 이 함부로 내뱉기도 아까운 단어들은 먼저 사진으로 등장했다. 군대에 있을 때였다. 우주선이 보내온 우주 속 지구의 사진, ‘가족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행성들, 수금지화··· 아니, 그 차례가 아니라 해왕성, 천왕성, 토성, 태양, 금성, 지구, 목성이 찍힌 사진이었다. 저 사진 속에서 창백하게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초라한 작은 점 하나. 그것이 지구라 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는 것은 상상 속에도 없던 일이었다. 뭔가 아찔했다. 거울 속 자신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일도 드물었던 터에.

 

     아, 아버지는 저 사진을 못 보셨구나! 그때 60억에 육박하는 인구들 중 둘이 만나서 5년도 함께 살지 못하고 헤어진, 그 두 사람은 얼마를 부딪다 간 것일까. 그 흔적은 얼마 만큼일까. 연두와 나, 겨우 한 학기를 바라보다가 만 우리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흔적들은 원론적으로 너무나 초라할 것이다. 아무리 애달프고 강하더라도. 많이 우울해졌다.

 

     그렇더라도 군 생활도 지났고 쉬엄쉬엄 복학도 했고, 그러니까 여차여차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앞둔 1996년 겨울학기가 되었다. 졸업논문의 계절이었고, 논문 제목이나 개요를 미리 상담 받을 무렵이었다.

     ‘게르만족에 대한 기독교의 선교’라는 제목으로 쓸까 준비 중인데요.

     지도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하필 선교의 역사? 것도 게르만족에 특정해서요? 졸업논문은 보통 폭넓고 가벼운 지식으로 쓰는 것인데.

     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후에···. 승욱이 어물거리자, 다음 순간 덧붙이신 말씀은 달랐다. 계속 공부를 할 생각이라면 뭐, 괜찮겠네요.

     계속 공부를 할 생각이라면 – 그 말씀은 승욱에게 뭔가 방향타를 결정해 주었다. 그는 추워지는 날씨에도 땀방울이 맺히게 열심을 냈다.

 

     논문 제출도 끝나고 뭔가 좀 후련한 어느 날 광식이 전화를 했다. 한낮이었다. 광식은 외근직 소방관이라서 낮에도 비번인 날이 많았다.

     어이, 대학생! 이참에 졸업은 하겄지. 바로 취업할 거는 아니제?

     응, 뭐···.

     당장 뭣 허러 취업해! 취업공부 매달리느니, 니는 대학원으로 가그라.

     아마.

     뭐야, 시방 남의 말 하냐? 독일 다시 갈까 말까 그라냐?

     아무래도···.

     아이고 답답! 암튼 신학 그거는 넵둬라 야. 니는 엄니랑 살아사제.

 

     승욱은 중등 종교과목 교사를 은근히 꿈꾸고 있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은 교직과정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해야 했다. 주일 성당에서 깨우쳐지지 않는 계시 진리는 신학과에서 공부해야만 풀릴 무엇이었다. 늘 「가지 않은 길」 타령이지만, 다시 사학과에 대한 미련도 없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심 바라시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교사 자격증을 받을 것이니까. 오, 주여, 나의 마음이~~. 다시 어머니의 해바라기 밭에서 봄여름을 나고 싶은 생각도 간절해졌다. 그러다가 입학원서 제출 기간을 놓쳤다. 동기들에 비해서 이미 많이 늦었는데, 다시 한 학기 늦는 것쯤은 별 일이 아니었다.

 

 

     일단 마지막 겨울방학을, 졸업식 전의 겨울을 어머니 곁에 가 있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책들을 빌릴 참이었다. 그 순간 잊지 못할 그 충격의 단어를 다시 발견했다. 『창백한 푸른 점』이 책으로 출판되었다니! 우주선에서 행성들의 ‘가족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동료들을 설득했었다던 바로 그 칼 세이건의 저서였다. 여린 햇살이 닿는 창 쪽에 앉아서 크고 멋진 책을 펼치던 첫 순간이 지금도 떠오른다.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점에 살았던 것이다··· 우주의 어둠에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세이건, 26~27쪽)

 

     400쪽이 넘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처음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졸업논문을 쓸 동안에는 그런대로 잘 읽히던 이런저런 책들이 왜 갑자기 안 읽히는가. 대출 기간 내에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아무래도 사서 보아야 할 것이었다. 빌린 책, 산 책들을 들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제일 궁금해서 먼저 펼친 것은 당연히 『창백한 푸른 점』이었다. 앗, 볼테르! 3장을 열자, 볼테르의 이름과 함께 『미크로메가스: 철학사』 에서의 인용이 바로 거기에서 포문을 열고 있었다. 미크로는 뭐고 메가스는 또 뭐야? 작은-큰 그렇게 느껴지는 형용모순, 뭘까. 승욱은 사실 『캉디드』를 뭉클하게 읽은 뒤에 볼테르를 더 읽어볼 생각으로 도서목록들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그때도 『캉디드』의 쌍둥이 같은 작품이라던 『랑제뉘』 생각만 해두었지 『미크로메가스』는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았었다. 온갖 정보를 뒤져보았지만, 우선 번역이 없었다.

     겨우 영어로 찾아 본 『미크로메가스』는 지구를 여행하는 두 외계인의 이야기였다. 얼핏 SF 같기도, 『걸리버여행기』를 생각나게도 했다. 풍자물 같으리라는 선입견에다 영어 읽기가 편하지 않아서 그만둘까 했다. 아니, 왜 하필 볼테르일까, 18세기에 뭘. 하지만 궁금증을 이길 수 없었다. 오류가 있겠지만 대충이라도 읽고 싶었다.

 

     미크로메가스는 시리우스 행성에 사는 주인공이다. 지구에 비해서 둘레가 2,160만 배 더 큰 별에서 살며, 키는 대략 38km가 넘는다니 상상 불가다. 나이는 450살인데, 250년의 연구 끝에 출판한 미세곤충 연구로 종교재판을 받고 800년의 추방령을 받았다. - 숫자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 그러는 사이 우주여행을 결심했고, 중력 척력 인력 여행으로 토성에 도착했을 때, 키라고는 약 2km에 불과한 난쟁이를 만나서 그와 친교를 맺는다. 둘이서 여러 행성을 방문하는 동안, 이야기의 압권은 화성이 너무 작아서 앉을 데도 없을까봐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대목이었다.

     마침내 ‘저 멀리 흐릿한 빛’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1737년 7월, 드디어 지구에 도착한 그들은 36시간 만에 지구 일주를 끝냈는데, 대양들에 ‘두더지가 파놓은 흙두둑’을 둘러보면서, 물은 난쟁이의 종아리께, 큰 사람(?)의 발뒤꿈치를 간신히 적셨을 뿐이랬다. 이 구체의 무엇인가가 ‘존재라는 영예’를 누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리우스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떨어져 집어들다가 그것이 돋보기가 되어 발트해에서 작은 점을 발견했고, ‘하찮은 미생물’ 고래를 알아차린다. 토성인은 그렇게 미세한 ‘원자’가 지각이 있음을 놀라워하는 동안, 시리우스인은 한 무리의 신사들을 나르는 배를 발견한다. 이 작은 존재들이 ‘지능이나 정신을 갖기에는 너무 작다’ 싶으면서도, 시리우스인은 ‘눈에 보이지 않은 벌레들이여···’ 하고 인사말을 건넨다.

     여행자들은 온갖 노력 끝에 ‘꿀벌만큼이나 작은 동물들’인 인간에게서 지성의 폭넓음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동시에 인간의 허영심과 철학을 알게 되며, 인간의 영혼관을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 엔텔레케이아(완전 현실태), 데카르트학파는 순수정신이라는데, 말브랑슈학파는 우리가 아니라 신이 모든 것을 해주신다고 하고, 라이프니츠학파는 신의 완전성 이론을 편다. 그들 중 로크 추종자가 비물질이면서 지적인 실체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하자, 외계인들은 어느 정도 수긍을 한다. 압권은 이번에는 사각모자를 쓴 몹시 작은 동물(소르본의 신학자)이 함께 있는 아주 작은 철학자들의 모든 이야기에 훼방을 놓는 대목이다.

 

     한 철학자(사각모자)가 자신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성 토마스의 『신학 대전』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 당신들, 그리고 당신들의 천체, 태양, 별 모두는 오직 인간만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오. 이 말을 듣자, 두 외계인은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 그칠 줄 모르고 웃어댔다.(세이건, 43쪽)

 

     이 『미크로메가스』 본문이 세이건에 문자 그대로 인용되어 있었다. 이를 어째, 승욱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좌우를 둘러보았다. 책상 양쪽으로 늘어 쌓인 책들 사이에 감시의 눈길이라도 있는 듯 덜컥 두려웠다. 『신학 대전』이 어떤 저술인가. 종교개혁에 맞선 그 숭고한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동안  『성서』  옆에 놓아두었던 책, 인류 최고의 권위를 희화하다니!

 

     그렇게 작은-큰 이야기가 끝난다. 마지막까지 힘들었지만, 놀라움이 더 컸다. 크게 떨었다. 책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꼭 곧바로 읽을 작정을 했다. 아니, 번역을 해버릴까. 승욱은 처음으로 자신이 외국어에 약하다는 것에 풀이 죽었다. 인간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유인원과 함께 사람과科에 속한 인간도 속屬 단계에 이르면 따로 분류를 해야 할지도 몰라. ‘영어속 / 프랑스어속’ 그렇게. 마치 코끼리들을 ‘아프리카코끼리속 / 아시아코끼리속’ 그렇게 따로 분류하듯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내용은 실상 간단했다. ‘저 멀리 흐릿한 빛 지구’는 가까이에서 보면 ‘두더지가 파놓은 흙두둑’이고, 인간은 ‘한없이 작지만 무한에 가까운 커다란 자존심을 가진··· 좀벌레들’이다.

     맞다. 승욱이 바닷가에서 모래알을 보는 것만큼 우주에서 보는 지구는 그만큼, 아니 더 미세한 알갱이에 불과하리라. 성인이 되어서야 난생 처음 바닷물을 적시며 떨고 떨었던 잔트포르트 해변에서 발아래 흩어지는 모래알들을 밟았던 때를 회상했다. 모래알들이 서로 다를 것이다··· 눈곱만큼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작은 푸르스름한 점 위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인구들을 우주에서라면 어떤 망원경 현미경으로도 구분하겠는가. 우리가 오늘 바라보는 빛은 그 광원에서 3,000년 전에 떠난 것이라는데. 그 멀고도 머나먼 광원에서.

 

 

     세이건은 훨씬 더 나갔다.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 위해서 위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이해를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도시』에서 ‘최초의 인간 이후 아직 6,000년이 안 되었으므로···’ 세계 혹은 우주가 10만 년이니 어쩌고 하는 고대 이집트의 전통은 ‘혐오스러운 거짓말’이라고 단호히 말했다.(세이건, 47쪽) 하지만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 정도, 우주의 나이는 대략 150억 년이라는 과학적 증명들을 어떤 방식으로 부정해야 할 것인지. 지구는 ‘엄청난 격하’를 겪는다.

     머리가 아팠다. 앞서 『캉디드』를 머리통을 싸매고 읽을 때, ‘신이 주신 최고의 온전한 세계’라는 라이프니츠를 조롱하는 볼테르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른 표현들도 찾아 읽었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의 원어가 얼마나 듣고 싶었던지. 그때 승욱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것을 너무 후회했었다. 나중에 강사실 옆자리 불문과 손 선생한테 애들처럼 졸라서 그 발음을 들었던 생각이 난다. 씨 디으 네그지스떼 빠, 일 포드레 랭방떼. 씨디으···. 대단한 문장이었다. 하기야 독서의 어려움은 외국어 문제가 아니다. 다른 많은 한글 번역본도 한글본 자체도 어려운 기술들이 너무나 많다.

 

     난해하기는 볼테르의 ‘존재’ 개념도 마찬가지였다. ‘실재’와 더불어 생각해야 했다. 가능한 문장들을 생각해 보았다. 단군은 실존 – 실제로 존재했던 – 인물인가, 유령이 존재하느냐, 우리나라에는 아직 가난이 존재한다, 가난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러면 신은 존재하는가. 볼테르는 말했다. 신의 존재에 관한 내재적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사회적 질서와 도덕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 높은 힘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승욱은 자신의 이해력에 한계를 느꼈다. 그러니까, 신(의 개념)이 정의, 자유, 도덕을 지원해줄 것이라고 했던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뭘까. 신이란 인간사회에 필요한 개념일 뿐이라는, 개념일 뿐 실체는 없다는, 그러니까 볼테르는 냉담을 넘어 이미 적대적인가. 승욱으로서는 느닷없는 유학길을 떠났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상수시 궁전을 실없이 거닐며 마주쳤던 볼테르가 끊임없이 뒤를 쫒아오는 느낌이었다. 왜 그런···

 

     투틸로, 늦겠다이. 미사포를 손에 꺼내들고 마당에서 부르시는 어머니를 따라서 일단은 성당으로 숨기로 했다. 예, 어머니이.

 

 

     성당의 거룩한 분위기에서도 거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승욱은, 투틸로가 아닌 승욱은, 눈꺼풀 속으로 향했다. 도망, 그랬다. 그가 실제로 지리적으로 한국을 떠났을 때 그 원점은? 원점은 어떠할까? 연두는 어떠할까. 잘 살고 있겠지. 연두를 원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언제부턴가는 회피할 만큼 그는 정직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그의 두려움은 다가올 인생이었다. 그의 인생이었다.

     사랑에 빠져··· 요행히 호응을 얻어내고··· 어떻게든 청혼을 하고···.

     아니, 다시. 사랑에 빠져··· 요행히 호응을 얻어내고··· 어떻게든 청혼을 하고··· 앗, 가톨릭이 아니었구나! 세례명이 없는 연두를 어쩌나. 어머니는 연두라는 이름뿐인 연두를···. 어서와요, 연두! 그렇게는 못하셨을···.

    아니, 다른 버전. 사랑에 빠져··· 요행히 호응을 얻어내고··· 어떻게든 청혼을 하고··· 앗, 가톨릭이 아니었구나! 세례명이 없는 연두! 어머니는 승욱 투틸로에게 연두라는 이름뿐인 연두를 허락하셨을까. 다행히 관면혼이 있지. 나는 비신앙인과 결혼해도 신앙을 버리지 않겠으며 자녀를 낳으면 영세 입교시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겠습니다. - 나는 신앙인인 배우자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겠으며···. 투틸로는 연두는 서약을 한다. 고맙게도, 엄격했을 것 같던 연하오빠도 연두를 존중해준다. 그렇게 그 부모님도. 그렇게 결혼식을 하고··· 어쩌면 아들을 낳고··· 그 다음은 암흑, 아들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투틸로, 눈 떠라이. 영성체 모셔야제이!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채근하셨다. 승욱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앞서 나가시는 어머니의 미사포가 코앞에서 살랑거렸다. 그리스도의 몸! 말씀에 따라, 아멘!

 

     잊자. 고등학교 독일어 시간에 배운 「청춘은 아름다워라」의 헤어짐을 떠올렸다. 독일어에서 동사의 위치를 배울 때였다. 여러분,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 들어봤죠? 그의 단편 제목에 ‘쇤 이스트 디 유겐트!’ 여기 칠판에 쓸게요. 직역하면 ‘아름다워라 청춘은’입니다. 동사는 반드시 2번째 자리에 오니까, ‘청춘/이다/아름다운’ 또는 ‘아름다운/이다/청춘’이라고 쓰셨다. ‘-이다’가 접미사인 국어와는 비교하지 말고요! 내용도 궁금하죠? 주인공 이름이 헤르만이니까 자전적 이야기일까. 글쎄요, 도서실에 가면··· 읽어보세요. 추억은 아름다워라, 그런 것이랍니다. 아름다운 것만 추억에 남으니까요.

 

     그랬다. 연두는 아름다운 것으로 승욱의 추억에 남았다. 그는 다른 추억을, 추억이 될 더 아름다운 것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졸업식에서도, 어느 학번들에도 동기라는 소속감이 없이 떠나온 졸업식에서도 추억을 만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기쁨 가득한 표정을 하고, 오랜만에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는 추억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늘 현재였다. 당숙이 당숙모까지 함께 오셨고, 이모는 대학도시에 사시니까 당연히 오셨지만, 결혼한 이종 누이도 아들아이 손을 잡고 와서 감격할 뻔했다. 누이가 예약해 둔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언제나처럼 큰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광식이였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은 주말에 뭉치기로 했다고. 부족할 것은 없었다. 부족한 느낌은 뭔가 다른 기대가 있을 때나 오는 것이다. 뭔가 기대를? 승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코앞의 결정을 유보한 채 그는 독서에 빠졌다. 이어지는 독서는 그의 진로를 흔들었다. 흔들다 못해 멈추어 세웠다. 겨울방학, 정확하게는 졸업식을 기다리는 시간은 쉬이 지나갔다. 독서가 느린 탓도 있었다. 독서가 독이 될지도 몰라서 그랬다. 늘 혼자인 어머니랑 가까이 있고 싶었다. 말없이 함께. 고향은 안정된 곳, 기억에 아득한 아버지는 그를 단련하시는 대신 게으름뱅이로 살게 남겨두셨다. 알바도 하지 않았으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찔끔찔끔 휴학을 거듭하다가 난데없이 독일로 튀었더랬다. 젊은 시절의 현실도피가 맘에 걸리긴 했다. 그때로부터 먼 후일 카프카의 편지글에서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해.’(카프카 1907) 라는 대목을 발견하고서 조금 위안이 되기까지는.

 

     독서, 무엇보다도 『창백한 푸른 점』의 세이건은 승욱으로서도 까맣게 덮어두고 있었던 지구와 우주의 관계를 확실하게 짚어주었다. 우리의 - 여기에서 우리는 아마 서양인의 - 근간을 지배하는 유일신의 개념은 우주와 지구의 부정에서 시작되었음을. 그것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을 빌려서 소환시켰다. 구형의 지구에서 ‘반대점antipode’의 존재를 부정하며, 우리의 시조는 아담과 이브 한 쌍뿐, 그런 벽지에 아담의 자손들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세이건, 13쪽) 기독교 종파를 가리지 않고 추앙받는 성인, 다양한 종교와 철학들이 경쟁하던 서로마 사회에서 여러 종교와 철학들을 전전하며 내면의 방황을 겪었던 교부, 아, 마니교에서 빠져나온 회심의 증인, 그런 성인이 이렇게나 배타적이었다니!

     반대로 그보다 훨씬 전에도 지구를 하나의 점으로, 우리가 사는 곳은 그 점의 한 구석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던 철학자도 있었다. 『명상록』 (170년경)에서 이렇게 말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단호히 인간 중심의 사고를 지녔다는 사실에 놀랐다. 인간의 추론 능력을 동물과 차별된 능력이라 믿었고, 그래서 이성적인 마음이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끝없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지 마라. 죽음이 너를 덮으리라. 네가 살아 있고 능력이 있다면, 옳은 길을 가라.’ 이렇게 말했던 스토아 철학자, 그가 황제로서 박해했던 기독교가 황제의 철학을 삼켰다.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을 덮었다. 선교의 이름으로 문명 파괴가, 전쟁이···.

 

 

     종교, 종교들, 수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 그 모든 것들이 이 작은 푸른 점 위에서 명멸해 갔다는 사실을 승욱은 비로소 세이건에서 깨달았다. 이데올로기야 그랬다지만 종교들도? 그가 졸업논문이랍시고 쓴 선교의 역사가 사실은···.

     명멸 – 불이 켜졌다 꺼졌다, 생명이 켜졌다 꺼졌다. 생명이라는 단어를 종교를 빗대어 쓴다면 신성모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라 하더라도 생로병사의 길을 피하지 못한 것도 역사적으로는 어느 부분 사실이다. 그 위대 찬란했던 그리스 로마의 신들도 멸했고, 기독교가 그 자리에 공인되어 오늘에 이른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 그 불교는 세계로 퍼져나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으로도 남아있지만, 정작 인도에서는 수 세기 전 힌두교로 대체되었다. 인도에는 불교 유적만 남아있고 불교는 없다고들 한다. 다른 작고 큰 규모의 종교들이라 해서, 생명이 길어 보인다 해서··· 알 수 없는 일이다.

     종교, 종교들 – 하염없이 무거운 단어였다. 너무도 당연한 가톨릭과 개신교, 그러니까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종교들, 지구상에 명멸했던 종교들, 현존하는 종교들··· 갑자기 종교들이라고 하는 복수명사가 눈을 감아도 떠올랐다. 눈꺼풀 안쪽을 점령했다. 검은 바닷물을 대체했다.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아, 무슨 기억인가. 기억이란 놈은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 어느 한 순간 시야에 머물렀었던 그 문구가 하필 이 혼란 속에서 솟아났다. 89년 2학기에 입력되었던 상이 6년, 7년이 지난 순간에 갑자기 해마를 대뇌피질을 뚫고 나타나다니. 기억의 독성이 밀려왔다. 폭발했다. 연두가 어느 날 가져다 준 책표지 안쪽에 적혀있던 그 문구,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연, 이게 무슨 말이야?

     응, 형! 불교, 『대반열반경』의 구절일 거야. 연하오빠, 오빠가 써넣었나 보네.

 

     ‘창백한 작은 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식의 순간 하필이면 불경의 구절이 눈꺼풀 안쪽에서 시야를 막아버리다니. 독서의 독성과 기억의 독성이 합작으로 만들어낸 혼돈은 몇날 며칠을, 아니 이후의 수많은 날들에 승욱을 번민에 빠뜨렸다. 첫 순간은 메모의 내용 보다는 책을 내밀던 얄따랗고 마른 손이 손가락이 느닷없이 길고 흐릿한 기억의 바닷속에서 헤엄쳐 나왔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느리게 흐느적거리는 가느다란 팔, 짧은 소매 아래 송송 박힌 솜털을 살랑거리며. 연두의 팔 바깥쪽으로 난 솜털은 바람도 없을 천장에서도 승욱의 눈꺼풀 속에서도 풀밭의 강아지풀처럼 흔들리며 승욱을 간질였다.

 

     강아지풀들이 돋아났으려나. 승욱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마루로 나갔다. 날은 어스름 속에서 겨우 밝아오고 있었다. 어머니랑 봄 풀꽃들을 살펴봐야지. 슬쩍 이름들을 물으면 좋아하신다. 꽃마리나 동전초는 대뜸 답하시다가도, 큰개불알꽃을 가리키면 못 들으신 척 하실 것이다. 웬 이름들이 그런지. 그 푸르스름 하늘을 닮은 예쁜 풀꽃을 그리 부른다냐. 깽깽이풀, 요놈들 짙은 옅은 보랏빛이 얼마나 예쁘냐이. 어머니는 그날따라 기척이 늦으셨다.

 

     책은 인도불교의 쇠퇴에서 펼쳐져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기 시작한 때는 1203년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보자, 동인도에 위치했던 비크라마실라사 사원이 - 이름 참 어려웠다. - 무차별 파괴되었고, 승려들 또한 무차별 살해된 사건이 계기였다.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비판하는 평등 이데올로기로 부각됐던 이 불교 수도원에서 1,000년 전에 1,000명의 학생들이 100명의 교수들이 죽었다. 죽임을 당했다. 모든 생물은 그 문화와 함께 명멸한다! 선교는 결국 전쟁의 형태로···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을 내세운 십자군까지도.

     입술을 움직일 단어가 없다. 머릿속에 그 어떤 개념도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랐다 하더라도 내뱉을 수 없다. 종교에 관해서니까. 45억 년 동안 지구 위에서 명멸했던 종교들··· 침묵만이 답이다. 침묵이다.

 

 

     투틸로, 나와 봐라이!

     예, 엄니, 왜, 무슨 일?

     승욱의 어린양 반말 투에도 마루 아래 어머니는 웃지 않으셨다. 이것들 좀 봐라이. 누가 여기를 밟으고 지나갔을끄나.  

     마당 길 쪽의 풀밭에 풀꽃들이 사정없이 밟혀있었다. 방법이 없었다.

     엄니, 요놈들 안 죽어! 곧 다시 올라올 거요. 요놈들 진짜로 강하거든. 엄니, 엄마아, 걱정 마셔이.

     긍께이, 그래도 밟아분 데는 끝났제이. 끝나 부렀어. 허기사 사람도 죽고마는디···. 그냥 말끝을 흐리셨다.

 

     소박한 진리 하나, 생로병사! 생명 있는 것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 눈물 나게도 정직한 말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믿어대는 인간은 필멸 필사 유한의 존재와는 다를까. 전혀 다른 선택된 존재일까. 가능할까 정말? 가능할까 왜?

     사람을 생로병사에 가두지 않고, 가두지 않기 위해, 인간은 유일신을 믿고 영혼을 창조(?)했는가. 볼테르의 의미에서라면 지구상에서 말할 수 없이 작은 보잘 것 없는 생명체인 인간이 거만하기는 이를 데 없어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몽상이거나 망상으로서 그렇단다.

 

     아니, 큰일 날 소리. 그렇게 따라가면서 독서를 하던 승욱은 좌우를 동서남북 위아래를 둘러보았다. 휴우, 유아세례를 받은 투틸로가 내뱉을 말은 결코 아니다. 생각만으로도 이미 신성모독이다. 인간이 신이라는 신성한 관념을 상실하면 그런 관념을 대신해 허상들이 들어선다는 볼테르의 생각을 어떻게든 제대로 이해해 보자! 인간은 신을 종교를 믿고 따르며, 그러니까 종교적이어야 한다. 종교적인, 너무나 종교적인 인간만이 인간다운 인간이리라.

     그런 뜻에서 독서도 중요한 조건이다. 독서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유의 출발일까. 다시 세이건이다. 본격 과학자이면서 어떻게 이토록 진지한 신학적인 글들을 보여주는지. 기원전 500년 크세노파네스의 인용이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을 검은 피부에 납작코로 만들었다. 트레이스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푸른 눈과 붉은 머리털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황소나 말이나 사자가 손을 가졌고 손으로 사람처럼 그림이나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면, 말은 말처럼, 황소는 황소처럼 신을 그렸을 것이다··· (세이건, 41쪽)

 

     꺅! 말은 말처럼, 황소는 황소처럼 신을 그린다! 그럼 신은 없다? 크세노파네스를 찾아 읽어야 했다. 신은 없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은 유일무이한 정신적 존재다. 기독교의 유일신(The only God)이 아닌 단일신. 일자(The One)! 머리를 싸매고 눈이 충혈되어도 답은 없었다. 인간의 신 놀음(?)에 대한 비판이었나!

 

     어느 순간 철학사 시간에 간과했던 포이에르바흐가 떠올랐다. 그를 무신론 쪽으로 치부하였기에 기말고사 때 공부 말고는 관심에도 없었던 철학자였다. ‘자연인으로서 인간은 완전한 본질을 갖는다.’ 그 비슷한 말로 신학을 자발적으로 떠났다 했는데, 정작 『기독교의 본질』에서 신학적 거대 논란을 남겼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그런 궤변이었다. 이유까지 댔었다. 신이란 인간이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위로를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라고, 몽상처럼.

     포이에르바흐를 무신론자라고 그대로 지나쳐버릴 일이 아니라, 무신론자인 듯 한데 신을 어떤 방식으로 존중하는가를 읽었어야 했다. 요점, 요점은 미신이나 난센스가 아니다. 다만 중요한 이슈라는 것, 그것을 놓쳤었다. 승욱은 대학을 졸업한 지금에서야 겨우 독서를 배워가는 느낌이었다.

     신은 없다? 없더라도, 인간은 완전한 존재에게서 위로를 원한다. 자신의 갈망을 투사하거나 대상화하고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이 존재하지 않는 신은 그저 인간적 갈망의 투사일 뿐이다. 이것은 단순 무신론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를 포함한 인간학이다. 종교가 인간 존재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거울, 투영, 내면의 자아, 표현된 자아라는 생각. 그러면 부정이라기보다는 실체를 알고 유용성을 인정하자는, 옳거니, 신이 없다면 신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는 볼테르의 연장선이다.

     다만, 다만이 중요하다. 인간이 창조한 신이 인간의 위에서 인간을 억압하게 되면, 그러면 종교는 인간의 자기소외를 불러올 것이라고.

     대안은? 다시 『서양철학사』를 책장에서 꺼내서 정독하기로 했다. 관련 서적들을 어느 정도 읽고서야···. 결심만으로 부족을 느낀 승욱은 어느새 기록을 해나가고 있었다. 이해가 더디니까 써 둘밖에. 이제야 처음으로 수험생이 된 느낌이었다. 무슨 시험에 대비하는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승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단 한 번도 가톨릭 신앙 밖에서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았음을. 가톨릭 세상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가톨릭 공기를 마시며, 열심은 아니라 해도 진심인, 한 번도 회의하지 않은, 평범하다 못해 순해 빠진 너. 순명,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일 없이도 막연히 무조건적 순명의 태도는···. 평소라면 냉담자를 열등한 낙오자 정도로 생각해왔던 승욱에게, 교만의 악마 루시퍼가 눈독을 들였나. 미사 참여, 영성체, 고해성사가 신앙의 외연을 지키는 장치라면, 회의는 이미 냉담의 시작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오 4,10)

     냉담자 그리고 회심의 사례는 가까이에도 있었다. 어쩌다 고향집에 와서 머물다 가는 친척 수녀님의 오빠도 그랬었다. 수녀님의 오빠라 해도, 그러니까 피를 나눈 형제자매이지만 신앙은 피와 완전 일치할 수는 없다. 어느 수녀님이 수녀님이 되면, 대개는 일가친척들이 가톨릭에 입교한다. 하지만 대개는 대개다. 아예 모른 척해도 그만이고, 일단 신자가 되었더라도 곧 냉담자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런 오빠가 나이 들어 병이 깊어진 후에야 사죄소를 찾았다고 했다. 성실치 못한 죄, 알아내지 못한 죄를 고백하면서 신부님 앞에서 흘린 눈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부님도 울고 예수님도 울고 성모 마리아도 울고 수호천사도 울었다고. 그랬었다고.

     현재의 세계, 가톨릭 노승욱 투틸로에게 6,000년 창조주 이래의 세계란 과거 전체의 인간 가치로부터 우리에게 상속된 한 덩어리의 오류와 상상력의 소산일 뿐일까. 그 이전의 유산들은 그럼 무엇일까. 볼테르의 물음처럼 프로메테우스와 메시아는 얼마나 다를까, 델포이의 신탁은 선지자의 말씀들과 전혀 다른 기능이었을까. 쌓이고 쌓인 유산들로 우리는 너무나 종교적이 된 것일까.

 

 

     풀꽃들 구경은커녕 해바라기가 피기 시작한 것도, 더 이상 해를 따라다니지 않는 것도 승욱은 몰랐다. 어머니가 혼잣말을 하면서 해바라기 밭을 서성거리실 생각도 잊었다. 책들만을 읽어댔다.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다. 스스로 무거운 독서나 사유에 적합하지 않은 두뇌를 지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씁쓸하게.

     그런데 창백한··· 그것은 하필 창세기의 ‘창’과 울림도 글자도 같아서, 승욱으로서는 새로운 경이의 대상, 아니 경탄의, 숭배의 대상으로 대체될까 두려웠다. 어느 순간 천장에는 바닷물, 검푸른 바닷물 대신 창백하고 신비한 우주가 넘쳐나게 되리라는 상상, 불안은 현실이 되어갔다. 검고 깊은 바닷물 속의 아버지는 더 이상 하늘이 아닌 승욱과 같은 곳, 지구라고 하는 창백한 푸른 점 속에서 하나가 되어 있었다. 45억 년 지구의 나이 속에서 4년 5년의 인연은 아슬아슬 고마운 스침이었고, 셀 수 없는 모래알들 중 서로 부딪는 아찔한 행운이었다. 그 찰나의 행복을 위해서 아버지는 관면혼을 결심했고, 아들을 얻으셨다. 그러고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했다. 맞아, 나는 가톨릭으로 태어났구나. 승욱은 자신의 유아세례자임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봄여름을 조용히 어머니 곁에서 보냈다. 너무나 종교적인 어머니 곁에서. 그런 표현도 새로운 어법에 따라 괜찮다고 했다. 잘 가꾼 잔디 어느 부분을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니면, 길이 되는 것과도 같았다. 길을 내는 것이 자연스럽고 따뜻한 일이듯.

     너무나 종교적인 어머니의 곁에서 어머니의 신부님, 그보다 어머니의 신에게서 내적인 냉담의 조짐을 숨겨야 하는 고통쯤은 숨길 수 있었다. 그래, 침묵은 금이다. 근언신행謹言愼行! 어머니보다 더 말 없는 아들이 되어갔다.

     신은 (창조할 필요가 있는, 존재해야 할) 우수한 가치임이 분명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세의 고통과 불안을 성서에서 신부님들의 말씀에서 위로받고 있는지. 어머니만 보아도 그렇다. 어딘지 모를 그늘을 띈 어머니의 얼굴이 일요일마다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은 오직 성당에서 살고 있는 신의 마력이었다. 너무나 종교적인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우주의 어둠에 둘러싸인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신의 마력을 믿으며. 믿으려고 애쓰며. 회의는 다만 침묵의 영역이어야 한다.

 

------
<한국소설> 2025. 9월호, 통권 314호,  107~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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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이2025. 8. 20. 05:55


2025년 광복절 아침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 ~
지방 도시 낡은 아파트에도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           
            

영화 < 독립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La Resistance >
눈부시게 시리고 아픈,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 독립군(1920~  ) 

이귀우 준장 : 홍범도 장군 역
                       육사 출신, 35년간 포병 복무, 제7포병여단장으로 전역.  

이귀우: 홍범도 장군 역: 육사 출신, 35년간 포병 복무, 포병여단장으로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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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2025. 6. 20. 15:50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그 후 어머니와의 대화를 특징하는 서두가 되었다. 자, 해바라기 합시다! 해바라기가 되는 거예요! 어머니를 움직이게 하는 암호 같은 것, 요술의 말이었다. 50이 채 되지 않은 어머니가 노인들처럼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러고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니까 승욱이 1994년 초 독일에서 급히 일시 귀국했던 그 시점을 말한다. 급히, 예정에 없이, 정확히는 베네딕트 보이언 신학대학의 입학허가서를 기다리고 있던 철 이른 봄날이었다.

 

     당시는 유학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승욱이 독일을 선택했던 것은 일단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던 점이 주요했다. 결과적으로는 예상 외로 좋은 선택이었다. 바다를 몰랐던, 바다라면 무심코 두려워했고 무서워했던 그가 북해의 바다들을 경험했고, 냉기를 내뿜는 바닷물을 두 손으로 만질 수 있었으니까. 무엇인가 바닷물과 연결된 체험은 그를 전율케 했으니까. 먼 먼 바다였지만, 어쩌면 바닷속 아버지와 닿을 수 있었다고 느끼게 되었으니까.

     독일 행에서 그가 표면상 내세웠던, 스스로 그리 믿었던 이유는 이냐시오 신부님의 족적을 따라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주의 연속일 뿐이었다. 도주 –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쳐야할 객관적 이유는 전혀 없었다. 88년 대학 새내기가 여차여차 군에 입대했고. 거기까지는 동료 대학생들과 어슷비슷한 인생 행로였다. 그렇게 제대 이후 서둘러 복학을 했더라면 평이한 일일 터였다. 다만 그는 표면적인 어떤 이유도 없이 복학을 미루고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발작적으로 다른 어딘가를 향해서, 그러니까 독일로 향했다. 왜, 왜 복학을 미루었나. 왜 느닷없이 유학 핑계를 댔나. 그것은 군대로 도망치던 때와 비슷했다. 승욱의 입으로 뱉어낼 수 없는 단 하나의 단어가 목에 걸렸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아니, 누군가를 차마 만날 수 없어서.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물론 어떤 단어도 발설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급히 돌아와야 했던 일은 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돌아오자마자 향한 곳은 어머니의 시골집이 아닌 보훈병원이었다.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곳, 당숙이 일러주신 곳이었다.

     공항에서 고속버스로, 터미널에서 바로 시내 외곽에 위치한 병원으로 내달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큰 환자복 때문에 더 작아 보였다. 수술 하루 전이었다. 아들을 기다리려고 수술이 늦은 것이면 어쩌나. 그것은 무식에서 온 기우였다. 원래 고관절 수술은 며칠을 기다리기도 하고, 잡혀진 수술 날짜 전에 그가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반가움의 눈물임에 틀림없지만, 어머니는 입술을 올려서 미소를 지으려고 하셨다.

     투틸···.

     예, 엄니!

     투틸로….

     어머니는 그러고만 계셨다.

     승욱은 눈을 더 크게 뜨고 귀를 뾰족 늘려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나 인자 덜 아프다이. 첨엔 잔 놀랬지만 괜찮아야. 느그 당숙 참, 그냥 냅두제 알려갖고는. 투틸로, 거가 어디라고 요만 일로 와부렀냐. 그런데 소리가 안 들렸다.

     엄니, 투틸로 왔어요. 울 엄니 힘없어 말도 못하시네. 어쩌다가 이렇게. 아니 이만하면 다행, 다행. 글고 아들이 투틸로가 아님 누가 온다고.

     그래, 투틸로, 좀 앙거. 오니라고 피곤흐겄다아. 그리 대꾸하실 것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안 들렸다. 아예 입술을 움직이시지도 않았다.

     승욱아, 근간에 느그 엄니가 말이 더 줄어부렀어야. 욜로, 욜로 와 봐. 엄니 잔 보둠아 봐라이. 올체. 그라고는 대차 좀 앙거라. 엄니 어디 다치셨는가는 알제이? 엉덩뼈, 엉덩관절이랴. 다리랑 붙은 데가 글씨.

     아들은 어머니를,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좀 봐, 내가 인나야 승욱이 니가 앉제이! 인자 나는 바람 잔 쐬고 올께이. 말 더 혀 봐! 당숙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참, 숙모님, 얼마나 놀래셨을까. 고생 많으셨네요. 저 왔으니까 이제 댁에 내려가셔서 쉬셔요. 당숙도 혼자 지내시느라고….

     아이고, 그래도 엄니 옆에는 우덜이 낫제. 어쯔고 니가···. 나 좀 나갔다가 올란다이.

 

     승욱은 늘 지니고 있던 어머니의 목걸이, ‘기적의 메달’을 꺼내서 어머니의 손에 쥐어드렸다. 눈에 촉촉한 물기가 스몄다. 목걸이를 승욱에게 건네주셨을 때의 말소리가 새롭게 들려왔다. 그냥 목걸이가 아니여, 투틸로, 이건 기적의 메달이다이. 신부님 말씀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는···.

     어머니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오면서 가늘어졌다. 아니, 물기가 목으로 어깨로까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잡고 있던 바슬바슬한 손까지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목걸이를 손에 쥔 채 어머니는 침대 머리 위쪽을 바라보셨다. 아차, 환자복을 입은 상태니까 있었던 목걸이도 풀어놓아야 할 터였다. 사물함을 열고 작은 가방을 찾아서 넣어두었다. 엄니, 가방 속에, 지퍼 안쪽에다가. 귓속에다 말을 했더니 어머니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러고는 이튿날 아침에 수술이었다. 걱정에 비해서 수술 시간은 짧았다. 수술 후 여러 주의사항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는 병실로 옮겨오셨을 때도 아직 주무시는 듯 보였다. 듣기는 하실까. 말을 하기가 싫어서 입을 닫을 수는 있겠지만, 듣기 싫어서 귀를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니까. 그런데 안 듣는, 안 들리는 표정을 하고 계셨다. 듣고 싶은 말도 아예 없으실까.

     인간 해바라기요! – 담당 의사는 상당한 유머를 지녔다. 다음 날 일찍 병상에 오셔서는 큰 소리로 말했다. 환자분, 환자분! 눈 뜨세요. 깨어나신 것 압니다. 수술 잘 되었고요. 다른 고관절 환자들에 비해 젊으시고, 또 많이 안 다치셨어요. 곧 회복 되실 겁니다. 자, 이제는 인간 해바라기가 됩시다! 저랑 약속 하세요! 며칠만 빼고, 다음 주부터 물리치료 시작하시죠. 치료 끝나면 저 복도로 나가 햇빛 비치는 쪽으로! 해바라기를 해야 사는 겁니다!

     해바라기라는 단어는 담당 의사의 면허특허인 줄 알았더니 모두가 그리 말했다. 아시죠? 인간 해바라기! 해바라기가 되셔야 빨리 나으셔요! 간호사가 말했다. 환자분, 일어나세요. 연습하셔야죠! 해바라기 하시려면 우선 병실에서라도! 자아, 서 보시게요! 워커를 들고 온 물리치료사가 말했다.

     그렇게 워커에서 목발로 그리고 그냥 설 수 있게 되기까지 병원 근무자들은 일반인들보다는 참을성이 많아보였다. 의사는 목소리가 컸다. 높기도 했다. 노인들 수술을 많이 하다 보니, 노인들에게 말을 하려다 보니 목소리가 커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키가 상당히 컸는데 말을 할 때는 꼭 구부리고 말했다. 환자들 가까이에 대고 말하려고 했다. 참 괜찮은 의사였다.

     2주가 지났다. 이제 곧 집에 가시면 가족들 도움을 잘 받으세요, 영양공급도 철저히! 칼슘이 많이 든 우유, 멸치, 치즈, 콩, 고등어, 꽁치, 뭐냐 등푸른 생선들···. 다 외우기 힘들었다. 가족분들! 잘 들으세요! 환자를 보면서는요, 애기가 왔네, 잘 먹여서 키우자, 그런 심정으로 하세요. 회복기간 동안 관리가 엄청 중요해요, 가만 누워만 계시면 치명적임다. 근육도 평형감각도 잃게 되고, 인지능력도 감퇴해요. 계속 소통하시고···.

     어머니가 말씀을 잘 안하셔서···.

     답답하시겠네요. 뭐, 그래도 투정 많으신 분들보다 낫지 않을까요. 평소 참을성 많으시다면 딱히 할 말 있으시겠어요? 암튼 계속 말 시키고, 뭣보다 계속 움직이시게! 불평 없다고 가만 누워있게 하다가는 큰일 남다. 욕창 하나라도 생겼다가는 폐렴, 요로감염, 뭐 다른 질병들도 병발하거든요.

 

     무서운 예언 같기도 했다. 친절한 설명에도 조금은 겁을 먹은 채로 우리는 시골집으로 퇴원했다. 도시 사는 이모는 병원엔 자주 들리셨지만, 집에서는 주로 당숙모가 어머니 곁을 돌보셨다. 언제 혼자서 걸으실 수 있을까. 한 달은 족히 걸렸다. 해바라기 갑시다! 해바라기 합시다! 그 신호에 일어도 나시고 방 밖으로도 나오셨다. 마당도 따라 걸으셨다. 자꾸 허공을 땅을 둘러보시는 것 같았다. 무엇을 찾으시는 것일까? 그때는 잘 몰랐었다. 돌보지 않은 마당에도 어느새 봄이 흐드러져 있었다.

 

     은방울 수선화 알아? 순수한 아름다움이래. 순수··· 아름다움이 뭣일끄나. 청정하고 순수한···. 앵두는 수줍음이고. 여기 연분홍 복사꽃 이쁘다아. 사랑의 노예란다. 사랑하면 노예가 된다고···.

     생각할 틈도 대답할 틈도 안 주고 혼잣말을 하시던 어머니, 승욱은 어린 시절의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런 꽃 이야기가 그리웠다. 그럴 때의 어머니는 ‘저 집 말 수 적은 각시’가 아니었다. 하긴 그런 꽃 이야기들을 들은 것은 어머니의 아들 투틸로 뿐이었다.

     튤립들 이쁘제이, 투틸로! 어떤 색깔이 좋으냐? 빨강은 사랑의 고백이랴. 노랑은 슬퍼야, 헛된 사랑이라니. 흰색도 슬퍼야, 실연이랑께 힘들겄제. 우리 집 마당에 없는 보라색 튤립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다그네. 그건 영원한 사랑이라여, 영원한.

     우리 집 마당에는 보라색 튤립도 없었지만, 영원한 사랑도 없었다. 영원한 사랑의 부재를 어머니는 일찍 깨달을 수밖에 없으셨겠다. 대상이 사라진 사랑,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라면서 승욱은 그것을 느꼈다. 부재하는 대상은 허상일까. 위로를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할머니 하나, 어머니 하나, 나 하나. 그렇게 살았던 집에는 다른 집에는 다 있는 아버지가 없었다. 훨씬 자라서야 느꼈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한 늘 혼자였던 어머니가 더할 수 없이 안쓰러웠다.

 

 

     재활의 봄에 어머니는 거의 말을 피하셨다. 알아듣고 싶으신 것은 알아들으셨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비인후과로 입원을 더 했어야 했나. 아니지, 재활치료가 급했다. 말은 천천히 회복하시겠지. 입을 목을 다치신 것도 아닌데.

     당숙모는 가까이 사시는 죄로 어머니 식사를 계속 챙기시다 보니 걱정을 더 하셨다. 느그 엄니, 왜 밥을 못 묵을까이. 밥도 안 넘길라고 허지, 말도 안 허지. 목이 문젠가도 모르겄서야. 목뿐인가. 사람이 생기라곤 없어야. 얼굴 색 잔 봐라이.

 

     여름이 되어도 추위를 타시는지 몸을 웅크리셨을 때에야, 걷는 행동도 정상으로 회복될 조짐은커녕 손놀림까지 어눌해졌을 때에야, 다른 검사를 해볼 생각을 했다. 무슨 과로 가야하나, 상식이 없었다. 수술 때 기본 검사들을 했었는데, 그럼 내과는 아닌 것 같았고, 인지기능이 좀 떨어진다면 신경과인가. 젊은 나이에···. 잘 모르니 그냥 내과로 갔다.

     기본 검사에서 콜레스테롤이며 요산 수치가 이상하다고 했다. 요산 수치가 뭘까. 승욱은 자신의 무지에 놀랐다. 의사는 더 이상한 단어, 갑상선자극호르몬 수치를 측정해보자고 했다. 어머니는 갑상선저하증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어려운 병은 아닙니다만, 긴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왜 걸렸을까요? 승욱의 질문에 의사는 ‘왜’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하시모토갑상선염이라고 이름 좀 복잡한데, 암튼 만성 갑상선염으로 인한 저하증은 근본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어요. 외부 원인 없이도 오래 천천히 염증이 발생해서 호르몬 생성이 부족해진 경우라서요. 그런데 어쩌라고요, 라고 말하고 싶은 목소리였다.

    치료는 간단합니다. 레보티록신이라고 하는 합성 호르몬제를 투여하면 됩니다. 3개월마다 혈액검사 하러 오시고요! 의사는 기본은 했지만 덜 친절했다. 고관절 때 의사에 비해서 그랬다. 세상 의사들이 다 똑같이 친절할 수는 없는 법,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의사 공부를 시작했었을 것을! 의사공부 실력도 안 됐을 테지만, 아들이라면, 아들이라서, 그냥 그런 소리가 나왔다. 왜, 집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판검사 아들이 나오고 그런다는데.

 

     의대생도 법대생도 아닌 아들은, 노승욱 투틸로는, 우선 어머니 곁에 남기로 결정했다. 재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낙엽들 쓸다가, 낙엽을 쓸다 봉께, 먼지들 때문에야···. 독일에서 통화를 하다가 엿들은 어머니의 눈물 때문이었다. 유학이 뭣이라고! 신념도, 야심조차도 없는 주제에.

     베네딕트 보이언은 겨울학기도 포기해야 했다. 9,000km 10,000km를 멀리 떠나 있을 수는 없었다. 짐은, 슈베비슈 할의 짐은 로마에 계시는 가롤로 신부님께 부탁했다. 신부님은 크게 놀라지도 않으셨다. 인생 여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 이상하게 통화 중에 말을 놓으셨다. 이제 제자가 된 것인가. 신학이 아닌 인생학의 제자. 로마에서 슈베비슈 할까지 열 시간 넘게 직접 가실 수는 없었지만, 신부님이 거기 괴테인스티투트 다니실 때 묵었던 집주인에게 일체를 부탁하실 수 있었다. 비용 송금만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해주셨다.

 

     짐이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짐을 손으로 만졌을 때, 그 순간 무엇인가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현기증 비슷하기도 했다. 눈물이 찔끔 났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승욱은 지금도 숨이 잠시 멎는다. 어딘가의 문을 열다가 만, 열려는 순간 닫혀버린 두꺼운 문의 이미지가 코를 깰 듯이 가까이 닥쳤다. 어쩌면 내밀던 오른쪽 아니면 왼쪽 발등 위로 방화벽 같은 것이 내려오는 느낌에 이 발 저 발을 뒤로 뺀다, 지금도.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어느 발부터 먼저 내딛나···.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아니다, 그런 순간은 오래 전에 지나가버린 과거였다. 과거는 과거였다.

     가롤로 신부님은 그 후 간헐적인 편지에서도 말을 놓으셨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기뻤다. 그렇지만 울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직접 말은 어렵더라도 글은 쉽지 않았을까. 글로도 어려웠다. 말이건 글이건 속내는 발화되지 않는다. 다른 스승도 없이 신부님과 소통하면서 지냈다.

    신부님과 편지로 나눈 이야기들 중 「가지 않은 길」에 관해서 했던 말이 늘 남았다. 원문을 보면 ‘두 갈래로 나뉜 길(TWO roads diverged)’에서 ‘둘’은 전체가 대문자로 되어 있다고, 둘은 이 시에서 너무 큰, 매우 중요한 숫자라고 하셨다.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이야기할 것입니다. /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승욱은 썼다. 자신을 위로하시려고 보내신 시니까 답을 드려야 했다. 저는 사람들이 많이 간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지겠지요.

     신부님은 썼다. 지금 말고 훗날에 훗날에 이야기해라. 참, 그 시를 번역한 피천득 씨가 서울대 영문과 교수였던 시절 프로스트를 직접 알고 지냈더래. 프로스트가 한 세대 윗사람이지만 피 교수가 유학했을 때까지 장수했거든. 교수 말년에 쓴 『수필』도 읽어 둘 만한 글이다. 수필 작품이 아니라 수필론. 수필이 문학인가 아닌가 의심이 분분했을 때, 수필문학의 본질을 정의했다고나 할까. 마음의 산책, 독백,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형식, 그런 식으로 수필에 문학성을 부여했으니까.

     박학다식한 신부님! 감탄은 하면서도 수필론에 관한 부분은 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아리송하기도 했고, 수필론 같은 것이 그때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가만, 세월은 흘렀다. 흐르고 흘러서 세기가 바뀌고 강산도 변하자 승욱은 수필이니 뭐니 문학 형식에 관해서도 생각하는 잡학인이 되어 있었다.

 

 

     그해 가을에는 아무튼 복학을 했어야 했다. 독일을 마음속으로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다.

     투틸로, 유학은 어쩌고··· 한 살이라도 젊어.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계속 함께 있는 아들이 걱정되셨나.

     예, 하지만 어머니는···.

     승욱은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다가 곧 어머니를 생각했다. 스물여섯, 그맘때 아버지와 사별했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오싹해졌다.

복학 마감 날에야 승욱은 등록을 했다. 다시 집을 알아 봐야 했다. 터미널도 보훈병원도 학교도 가까운 곳이라야 했다. 학교에서는 좀 더 멀어졌다.

     어머니, 저 복학하더라도, 저 여기 없더라도 해바라기는 꼭 하셔야 해요, 숙모님이랑, 이모님이랑. 약속 안 하시면 저 복학 못해요.

     근데, 해바라기가 없어야, 투틸로.

     예? 해바라기요?

     왜 해바라기가 없어야.

     그때서야 어머니가 해바라기를 해바라기로 혼동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에 나가면 늘 두리번거리시는 품이 잡초처럼 피어 시들시들한 꽃들 사이에서 해바라기를 찾고 계셨나 보았다. 둔감한 아들! 승욱은 해바라기를 심으리라 마음먹었다. 어머니를 위해서는 은방울 수선화도 튤립도 아닌 해바라기를 심었어야 했다. 씨를 심나? 모종을 사오나? 일단 이듬해 봄을 기다려야 했다.

아, 그러네요. 엄니, 봄 되면 투틸로가 해바라기 심을게요, 꼭 심을게요.

 

     가을이 지나가는 속도는 불규칙했다. 주중에는 느리게 주말에는 빨리 가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규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간 캠퍼스가 그냥 예비역도 아닌 늦깎이 예비역에게는 생경했다. 이상하게도 군필 대학생들에게는 복학생이 아니라 예비역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학내 예비군 연대에 편입 신청을 했다고 해서 출결에 지장도 없었다. 군인 성분이라고는 물 한 컵에 잉크 한 방울도 못 되는 사람을 예비역이라고 부르는 관행은 어디서 왔을까. 대학에서 군대로 도망쳐, 다시 외국으로 도망쳐, 그러다가 학교로 돌아온 그로서는 군 시절의 토막이 잊힐 듯도 한데 새삼 예비역이라니!

     지독한 사투리의 여단 의무대 군의관이 문득 떠올랐다. 얌마! 털고 살어라이. 스톱이 뭔 말인가 알겄어? 알아 듣냐고! 미주신경성실신 때의 일이었다. 한글날 느닷없이 한글에 대해 ‘연설’해보라던 문 병장님 생각도 났다. 군 시절이 그립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었다. 88학번이면 예비역들도 94년 봄이면 졸업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2학년 2학기로 복학을 했으니 늦깎이는 늦깎이였다. 그냥 예비역 형이 아닌 예비역 형의 형 대우였다.

     승욱 스스로는 또다시 신입생 같다고 느꼈다. 태반은 거의 모르는 얼굴들에 섞이어 무엇이든 낯설었다. 수강신청은 입대 전에 망쳤던 과목들 이수를 우선으로 했다. 나머지 강의과목들을 살피며 갈팡질팡했다. 내가 뭘 알아, 학년 따라 추천된 대로 하지, 뭐. 승욱은 늘 주관이 없었다. 복학을 해서도 2학년 2학기는 뒤죽박죽이었다. 가롤로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둘, 2라는 숫자의 덫이 생각났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둘, 두 사람 사이가 문제다. 금요일이면 고향집으로 내달았고, 월요일 첫새벽에 학교로 돌아올 때까지 사흘 밤은 사학과 학생 노승욱이 아닌 그냥 아들 투틸로였다.

 

     밤이면 무엇을 하나. 또다시 천장을 바라보는 어두운 밤이 이어졌다. 북해의 바다들이, 바닷물들이 밀려들었다. 바닷물은 천장에서 휘돌다 떨어져내렸고, 승욱은 밤을 새고 나면 흠씬 젖어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바다로 나가 보리라던 북해에서의 기특한 결심은 실현 가능성이 멀어졌다. 밤을 보내려면 전공이 아닌 편한 책들이라도 필요했다. 유럽을 떠돌 때 꽂혔던 이름이··· 맞다! 캉디드!

     헛생각들에 들떠 있다가 캉디드 생각이 났다. 서둘러 책을 주문했다. 이런 소설이 왜 명작일까. 필명 볼테르, 원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겠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회가 설립한, 웬 예수회가 여기서도, 암튼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런데 20대, 30대에 필화사건으로 투옥 또는 추방을 당했다고? 50대에도 또? 그런 그가 팡테옹에 안치되어 있고 - 파헤쳐지지도 않고 – 심지어 프랑스를 ‘볼테르의 나라’라고 부른다니. 수상한 위인이었다.

     『캉디드 또는 낙관주의』라 하는 제목은 이름 뜻대로 순진무구한 젊은이가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로 보인다. 막연히 제정러시아 시절의 대하소설 같은 것을 기대했던 승욱으로서는 기껏 3쪽 또는 5쪽의 짧은 콩트 모음집 같은 구성에 첫눈에 시큰둥해졌다.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온순한 젊은이’가 베스트팔렌 어느 남작의 성에서 조카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다. 가문의 교사는 팡글로스, ‘모든 언어’라는 의미의 박식함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세상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가장 좋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고로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 팡글로스의 이런 가르침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능한 세계들 중 최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논리 그대로다. 뭐야, 재미있는 모험 이야기라더니, 철학 에세이인가.

     읽을수록 난감했다. 이런 캐릭터답지도 않은 인물이 왜 필요한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1장부터 등장하는 황당한 광경들은 유럽 소설들에서 기대했던 – 그것은 프랑스문학에 완전 문외한이어서 그랬었지만 - 심각성 같은 것과는 아예 멀었다. 게다가 사학과 학생이 부끄럽게도 듣도 보도 못한 역사적(?) 인물들과 사실들이 수없이 등장하곤 했다. 일단 메모를 해가면서 읽기로 했다.

     그렇게 주말이면 이런저런 독서로 밤을 보냈다. 겨울방학이 되자 아예 어머니 곁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정해진 대로 병원에 다니면서 다소 회복되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 기일에, 설에, 대보름에, 일들이 많고 친척들도 오곤 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봄을 기다렸다.

 

 

     봄날이 되었다. 1995년 봄, 3학년이 되었다. 2라는 글자를 피했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긴 주말을 고향집에서 보내는 대신 하룻밤만 보내고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둘러 해바라기를 심어야했다. 모종을 기다리기도 바빴다. 씨를 어디에서 구하나. 4월 어느 주말 이른 아침 불려두었던 씨를 심었다. 담벼락 쪽으로 넓게 1cm 깊이로 씨를 심고는 물을 뿌렸다. 대학으로 돌아온 주중이면 날마다 마당에를 나갈 수 없어서 불안했다. 금요일, 그러니까 5일 후에 집에 가자마자 씨 뿌린 곳으로 내달았다. 슬쩍 눈길을 주니 떡잎들이 나 있었다. 쏜살같이 어머니의 방으로 내달았다.

     엄니, 싹이, 잎이 나왔네요, 해바라기 잎들이.

     투틸로, 파란 그거이 해바라기 잎이었구나. 엊그저께 뭣인가 파란 것들이 올라왔드라. 물을 줬제이, 어쩐지 목이 마를 것 같아서야.

     예, 엄니. 잘 하셨어요. 이제 해바라기 하시면 되겠네요.

     응, 해바라기. 해바라기 하자. 근디 해바라기 꽃말은 뭣일까이.

     꽃말? 엄니, 꽃말 생각이 나셨어? 꽃에 말이 있는 것?

     투틸로, 뭔 말이여? 엄니가 꽃말이 뭣인지도 모르가니. 봐라, 앵두는 수줍음이제. 복사꽃은 사랑의 노예···. 근디 노예라니.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그 옛날의 꽃말들을 다 기억하고 계셨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입을 닫으셨나, 어머니는 이 초여름 해바라기 밭에서는 말을 제법 하셨다.

     글면 해바라기도 꽃말이···.

     해바라기는 해만 보니까··· 일변단심, 동경 그런 것 아닐까요? 알아볼게요.

     그러네, 일편단심.

     예, 어쩌면 일편단심.

     투틸로 우리 아들, 그새 박사님 다 되셨네. 모르는 것이 없어야.

 

     그렇게 한 여름을 잘 보낼 것이었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6월 하순부터는 맘 편하게 고향집에 있었다. 그때 놀라운 사고가 터졌다. 천재지변도 아닌,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다. 처음엔 말이 백화점이지 작은 열악한 건물이거니 했다. 하, 며칠을 붕괴 장면과 발굴 소식만 틀어대니 결국 어머니도 알게 되었다. 눈물만 흘리셨다.

     그럼 그 수가 다 그 속에 있다냐? 묻혔다냐? 다 찾아내기는 한다냐? 찾아는 내겄구나이.

     순간 『캉디드』의 구절이 떠올랐다. ‘지금 이것이 가능한 세계들 중 최고의 세계’라는 말인가. 작품에서 분명 볼테르는 라이프니츠를 비웃고 있었다. 최고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봄에 해바라기 잎들이 나는 데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도 대구에선가 폭발사고가 났었다. 100명도 넘게 사망한 그 사고를 어머니는 다행히 모르고 지나가셨다. 그때도 백화점 짓다가 그리되었다던가. 암튼 그때는 금요일 사고였고, 곧바로 어머니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었다. 그에 앞서 그 지난 가을 한강다리가 무너져 내렸을 때도 어머니의 걱정은 한참을 갔다.

     한강으로 떨어졌네이. 버스가 통째로이. 그럼 다들 건졌다냐? 어디로 흘러간 사람은 없다냐? 강물은 바다로 가겄제? 어디 바다로 갈끄나? 바다는 다 같을끄나?

     사람들은 다 구했어요. 누구도 흘러간 사람은 없다고요.

     그때도 곧 주말이라서 이리저리 둘러대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고, 사고들에 어머니는 아프고 만다. 어머니를 어쩔꼬! 겉으로는 단정해도 속으로는 심약한 어머니인가 싶었지만, 병약을 더하니 단정함마저도 흐트러지셨다. 성당에 함께 갈 때 보면 미사포를 잊고 가셨다가 놀라시기도 했고, 오른쪽 왼쪽 길이를 다르게 늘어뜨리기도 했다.

 

     해바라기 꽃들이 그때 벌써 피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해바라기에 열중하셨다. 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해를 향해서 고개를 돌리곤 하다가, 꽃들이 피면 그냥 있는 것을 발견한 것도 어머니였다.

     다 자라면 배신한다이.

     엄니, 무슨 배신?

     요놈들이 키가 더 큼서는, 꽃이 다 피어불먼, 해를 안 따라다녀야.

     아, 정말 그래요? 엄니, 해바라기 박사되시겄네요.

     요 줄기들이 뚱뚱해져 갖고는 둔해서 그랑가 모르겄다이.

     엄니, 요놈들 훌라후프 시킬까요? 도로 날씬해져 갖고 계속 해님 따라 돌게.

     투틸로, 니가 농담도 한다이. 엄니 웃길라고 그라냐. 그나 꽃들 참 이뻐. 키가 큰께 기대고 싶어질라그래.

     엄니, 넘어지실라고.

     말이 그라제.

     엄니, 씨앗도 맛있고 건강에도 좋대요. 잘 익으면 볕 좋으니 말리게요!

     그라자이. 투틸로가 묵은다믄 말려사제, 말리고말고.

     줄기를 말리면 가볍고도 질겨서 구명조끼를 만들기도 했대요. 타이타닉 때도 입었다고요, 그런 말은 행여나 튀어나와선 안 된다. 입을 꾹 닫았다. 말을 해서 탈일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의 힘, 위로.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입안에서 바로 무덤으로 가는가.

 

 

     해바라기 밭에서 행복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엉뚱하게 『캉디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리스본 땅을 밟은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대재앙, 그러니까 지진에 휩쓸렸을 때다. 팡글로스 박사는 캉디드가 돌덩이에 다쳐도, 겨우 죽음을 모면한 주민들의 비참상을 보고도 이 모든 일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라며 그들을 위로한다. 인간의 타락과 하느님의 벌이라는 원죄를 믿지 않으시냐는 구급대원의 질문에도, 그것들마저도 가능한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에 이미 필연적으로 담겨있다고 응수한다. 인간의 자유를 믿지 않으신다는 말이냐는 질문에는 ‘자유는 절대적인 필연과 함께 존재할 수 있다’고, 역시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인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읽고 읽은 『캉디드』의 독서는 실은 결론을 모르는 상태로 끝났다. 방학 내내 읽고도 모르는 채로 책을 덮었다. 결론을 찾아야 할 마지막 장면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온갖 모험을 온갖 불행들을 겪고 몇 해가 흘러 소박하게 정착한 그들은 터키의 최고승이라는 이슬람 수도승을 찾는다. 인간이라는 이 괴이한 동물이 왜 만들어졌는지, 이 세상에는 끔찍한 악이 너무 많아서 의문이라는 팡글로스의 질문에 수도승이 말한다. ‘선이 있건 악이 있건 그것이 뭐가 중요해? 술탄께서 이집트로 배를 보내실 때 그 배에 타고 있는 쥐들이 편안한지 아닌지 신경 쓰시더냐?’

     여기에서 무엇을 읽으라는 말일까.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해도, 인간의 행불행은 인간의 몫이라? 하느님이 그것까지 신경을 쓰시지는 않는다? 신의 섭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결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승욱의 독서능력, 아니 인지능력으로는 그가 읽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부님, 후미에가 『캉디드』에도 나옵니다. 일본을 다녀왔다는 어느 선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놀라운 일 아닌가요? 가롤로 신부님에게 쓰려던 편지도 중단하고 말았다. 그만한 책을 읽었으면 무엇인가 생각 같은 것을, 무엇인가 배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자신에게 실망한 승욱은 침묵을 선택했다. 머릿속일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들을 표현할 단어들이 없었다.

 

    볼테르를 더 읽어야할까. 굳이 볼테르가 아니어도 된다. 무엇인가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읽어야 할까. 그러니까 『캉디드』에서는 지금 이것이 최고의 좋은 세계라는 팡글로스 박사를 통해 라이프니츠의 신정론神正論을 통째로 조롱했었나 보다, 그 정도를 읽었다. 그것을 비웃는 볼테르도 따로 좋은 세계를 말하지는 않았다. 인간에게 좋은 세계란 결코 없다는, 있더라도 우연의 산물, 찰나의 것이라는 말이었을까.

    비교를 해서는 절대로, 감히, 안 되겠지만, 그때 당시의 승욱에게 있어서는 좋은 세계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발설되지 않는 세계였다. 누구에게도 발견될 리 없는 혼자만의 세계, 그것은 침묵의 세계였다. 그냥 머릿속 아니면 입 안의 단어들, 그러니까 많은 단어들은 발설되지 않는 것이 좋다. 중요한 단어들은 더더욱 발설되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가 해바라기를 말없이 좋아하시듯,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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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25 여름 80호, 220-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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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