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2000. 9. 21. 23:30
2000년 9월 21일 목요일, 흐림.
 


 
 부산한 일과:

 
 알람을 해 놓았지만, 7시 일어나기는 무리였든지 다시 잠들어 허둥지둥.
  강의 시간 10분 전에야 연구실에 도착했는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항상 있어야 하는 그곳에 열쇠가 없었다. 큰 작은 가방을 털어 보아도 없었다.
  과실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고 - 3170 무응답 - 다시 아래 층 수위실에 가서
  열쇠를 얻어오기는 숨이 이미 막힌 상태. 다행히 대학원실에 올라오던 윤재를
  만나서 절그렁 거리는 열쇠꾸러미가 올라왔다. 그건 곧 반환해야 하는 비상 키.
  
  1교시 끝나고 과실에 들러서 과실용 전체 키에서 326방 열쇠를 빌렸다. 하루 쓰기.
  불안한 마음에 집에 전화를 해서 열쇠의 행방을 탐지하려다 발견 한 일!
  어제 우체국과 외환은행에 갔어야 했는데, 그만 외환은행에서 독일에 보낼 책값
  수표를 만들었는데 오리무중, 기억이 안나는 것. 집에다는 열쇠와 봉투? 찾는
  숙제를 남겨 놓고. 문제는 문제였다. 사실 어제도 우체국에 핸드폰 두고 왔던 것을
  외환은행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다시 우체국으로 지하도를 건너야 했지 않았는가.
  우체국에는 핸드폰 두고 오고, 외환은행 수표는 오리무중. 또 열쇠.......
  이 심란한 일상을 어찌 견디나. 그래도 3교시 수업, 그리고 5교시 수업.
 
  말썽났던 컴퓨터를 하나 새로 조립해서 집에 두고, 집의 컴퓨터를 몸체만 가져왔는데,
  수업 후 성호가 연구실로 옮겼고 - 3교시 때 옮기자고 차에 갔을 때는 차열쇠를 연구실
  책상에 놓고 온 상태였었다 -, 뭔가를 확인하다가 시간은 7시를 지나고 있었다.
  모처럼 찾은 00학번 홍모도 길게 이야기할 틈이 없어서 그냥 보낸 것이 참 서운했다.
  행운목을 들고 함께 온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끝나고 집에 다시 갔다가 온
  모양이었는데...
  아차! 빌린 열쇠를 돌려줄 시간이 지나버렸구나! 3170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임시로 열쇠 두 개를 묶은 까만 철끈은 내 손가락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어쩐다지?
  방법은 일단 가방을 챙겨서 집에 갈 차비를 하고 나간 뒤, 복도 어딘가 불켜진 방을
  찾아서 맡기면 되겠구나!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난데 없는 노크소리는
  반갑지 않겠지만 다른 방법이...

  문제는 다시 생겼다. 가방을 들고 나서려는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 열쇠. 방문을 열고,
  그렇다고 더 밝아질 것도 아닌데, 아무리 해도 열쇠는 없고, 집에는 이미 곧 출발한다는
  전화를 해버렸으니 차 걱정할 사람은 또 어쩌고... 혼란한 머리로는 어쩔 수가 없어서
  일단 복도로 나가는데 000교수의 등이 보였다. 방문 앞을 지나가던 참. SOS에 들어온
  그도 열쇠를 찾지 못했다. 다시 한번 가방을 쏟아보고... 사실 내게 필요한 것은 알리비.
  누군가와 함께 생각하고 그냥 문을 닫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무슨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 요새 뭐 생각에 빠진 일이라도... 뭐 그런 말로 의아해하며, 아무튼
  열쇠 문제 해결을 살짝 미루어 버리고 내려올 수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친절한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이 허둥지둥한 환경에서 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가능하면
  누구에게라도 작은 일이라도 의존하고 싶지 않은데...

  실수는 오늘만해도 또 있었다. 수업시간 중 핸드폰이 울리면 벌금내기로 한 것이 지난
  시간. 오늘 들어가면서 핸드폰을 책상에 놓아두고 가려다가, 예컨대 또 과실에라도
  전화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싶어서 꾹꾹 눌러서 전원을 껐다. 자꾸 무슨 글자가 나오길래
  아차 <통화>를 눌렀구나 싶어서 재차 꾹꾹 눌러서 껐었다. 그런데 그만 커다랗고 우렁차게
  폰이 울린 것이다. 기운차게 꾹꾹 눌렀어도 계속 <통화>를 눌러서 켜둔 것이라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희안한 것은 이런 머리로도 수업 시간 중에는 나름대로 살아나는 것 -
  오늘은 수퍼우먼 코드가 나오자 조금 흥분하여 무심코 앞 책상 위로 올라가 앉기도 하는
  정열은 어디에서 나왔을지. 교실을 나오면 <tot müde> -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 가라
  앉을만큼 피곤하다. 다음 순간을 예상하기 어렵다. 건물을 빠져 나오기 전에 벌써 어딘가
  벽 속으로 스며들고 말 것 같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큰 소리다.

  요즈음 빠져있는 노래 - <헤어진 다음 날>을 들으면서 차를 조심조심 운전했다. 더 이상
  실수는 말아야지. 돌아온 시간은 8시가 다 되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어서 나선 하루이니
  열 두 시간이 거의 되었다. 그 열 두 시간 내내 쉰 것은 몇 분인가. 일 아니고서는 얼굴 본
  사람도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하나 없다. 열 두 시간을 일로서 보낸 것이다.
  8시면 이미 저녁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손발만 씻고서 저녁 상을 차렸다.
  아무리 다 준비해 둔 것이라지만, 상 차리기 만으로도 지쳤다. 샤워를 했어야 하는데,
  함께 식탁에 앉기를 원하는 아빠 - 우리 집에서는 "아빠"와 "엄마"가 고유명사이다 - 의
  속을 알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세수만 하고 와서 앉았다. 아무래도 목이 열리지 않으니
  와인을 한잔 물 컵으로 따랐다. 항상 그런다. 물 컵이 내 와인 잔이다.
  둘째한테서 벨이 울렸다. 아침에 눈 떠서 하는 전화라 했다. 형은 그 동안 나일 강 위에
  있었기 때문에 통화가 되지 않았었다고. 이제 카이로에 도착해서 친구의 약혼식인가
  결혼식을 사흘 낮 사흘 밤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세 끼 챙겨 먹는 일상이 성가시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 놀랍고 선선히 "아뇨"라고 대답하는 아이. 원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아이다. 그러는 사이 남편은 먼저 식사를 끝냈고, 막 먹기 시작했던 난 숟가락을 놓았다.
  이것이라도 말자. 해야 할 일들이 넘친다. 생략할 수 있는 것, 하다 말 수 있는 일은
  이것 뿐이다 싶은 생각이었다. 다시 샤워를  하러 갔다. 그렇게라도 해야 일상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온 식탁에서는 먹으려던 음식을 모아서 < 버렸다>.  하느님은
  아셔도 어쩌시지 못하지만,  아침에 와서 알게 될 아주머니가 부끄러워서 음식물 쓰레기
  바구니 안쪽에 몰래 버렸다. 와인을 한 잔 더 따라서 마시고 - 서서 - 설거지를 끝냈다.
  벌써 서재로 돌아가 소리 없이 일하고 있는 남편을 부러워하며, 그러나 바로 책상에 앉을
  기운이 없어서 소파에 파묻혔다.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곧 다시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차! 꼭 읽어야 할 책이, 또 가져와야지 하고 생각했었던 책이 빠졌다. 주말 안에 다시
  연구실에 가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목록: 아침에 열쇠와 송금수표 부칠 것 안가져 갔고, 둘 다 어디 두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강의실에 휴대폰 그냥 가지고 들어갔고, 차에 열쇠없이 컴퓨터 가지러 갔고, 과실용 열쇠
  마저 잃어 버렸고, 필요한 책 안들고 왔다.

  이게 무엇인가! 이렇게 실수를 연발하면서 일상이 계속 될까. 새로 쓰기 시작한 컴퓨터는
  새 기능을 한다. 자판도 좋아졌고, 속도 또한 엄청 좋다. 홈페이지에 어느 한정 공간이
  있음을 처음 알았다. Upload가 절대로 되지 않아서 살펴보니 공간부족이라는 것이다.
  옛 문서들을 지워서 공간을 만들었는데, 옛 이미지들도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들을 지워야 충분한 공간이 생길 것이다. 메일박스도 지우다 보니 답장해야 할
  안부해야 할 곳도 있었다.

  은사님께:
  
잘 돌아 오셨겠지요. 어찌 해서 ... 통화 시도해 보았는데...잘 안되었어요.
  ... 그냥 잘 다녀 오셨겠지 하면서  인사가 늦었어요. 전 생각보다 일상이 짐스러워요.
  ... 왜 이렇게 <일>이 많아요, 사는 데.  너무 귀찮아서, 조금 전에는 밥을 먹다가 말았
  어요. 그것이라도 생략하고 싶어서요. 마음대로 생략할 수 있는 것, 거의 유일한 것!
  그렇다고 식욕부진의 히스테리 증후라고는 여기지는 마셔요.....
  요즈음에는 어떠셔요?  사방이 살벌해서.... 너무 재미가 없어요. 사방에 모임이지요,
  단 한군데도 가기 싫은. 그러나 정말 나를, 나만을 위한 자리는 아무 데도 없어요. 해서
  사람들하고 점심도 같이 안하는지가 오래 되었어요.  <끈>이 성가셔지니 어떡해요.
  안부 메일한다는게 넋두리가 되었네요. 말할 사람이 없었나 봐요.  의사소통은 시렁에
  얹힌, 그런 나날을 언제 다 사나요?
  여기까지를 지우느니 그냥 보내겠어요. 선생님, 그저 안부가 진하다 보니 그러는 것이라고
  이해하셔요. 두어 번 연락 시도하다가 이렇게 앉으니 그리 되는걸요.  아무 뜻 없는 안부
  이니 그냥 인사만 받으셔요.
  안녕히 계셔요, 어디선가 곧 뵙게 되겠지요
.

  안부가 너무 무례했을까? 심했을까? <최근파일>에서 단골 글마당에 들렸다.  편하지
  않은 안으로의 여행.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책상을 일어설 것이다.

  따뜻한 아빠. 따뜻한 손. 손의 힘찬 감각은 뼛 속까지는 아니라 해도 피부 깊숙이 들어
  올 것이다.  따뜻함 속에서 잠을 청하리라. 아직 꿈도 아닌데 꿈 같은 영상들이 밀려올
  것이며, 그 속에는 어김없이 그 회색 빛 형체가 북해의 저녁 비바람처럼 서성일 것이다.
  차갑고 암울하게. 어깨는 따스하고 꿈 속은 차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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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6. 8. 23:30
참으로 고마운 편지
 

   Subject:  꽃피는 봄사월 돌아오면...
    Date:  Thu, 27 Apr 2000 17:28:27 +0900
    From:
    Organization:
    To:

    "꽃피는 봄사월 돌아오면..."
    망향을 듣다가
    문득 선생님 생각이나서...
 
    해저물어가는 봄날
    연두색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어
    그림자가 창가에 부서지고
    왠지 모를 서글픔 때문인지
    그리움이 강물처럼
    가슴에 출렁이고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애닯은 노랫말이
    마음을 사로잡는
    어느 봄,봄,봄날에.
 
    사춘기 소녀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시기를...

   

 

이런 사랑스런 아이도 있네...........
 


사랑합니다..
==================================================
진정,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러한 생각들이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

      

                                                     2000.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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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5. 15. 23:30
萬行: 어느 수도자의 이야기
       

폴 뮌젠이라는 속세의 이름을 버리고 현각이 된 어느 수도자의 이야기.

독일계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의 9형제 중 7번 째 명석한 소년이
예일과 하바드를 거쳐 한국의 숭산 큰스님 Zen Master Seungsahn을
스승으로 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33면: 예수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 무엇이 옳은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나를 경험주의자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

      
   문명화된 국가에서 이 세상 존재의 증거를 찾는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존재
   의  증거를 안에서 찾는 것이고 도 다른 하나는 밖에서 찾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논리 그 자체에서
  존재의 증거를 찾는 체계는 문화와 전통을 성찰함으로써 수립되며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접근
  가능하다. 그 소수의 사람들은 선진화된 문명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고 성숙시켜 나간다.
  한편 두 번 째 종류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사고능력이 부족한 대다수 사람들이 수용하여 유지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원인과 논리를 자신이 직접 생각해보려 하지 않고 단지바깥에 어떤 것에 대한
  권위에 의존하여 믿는다. 이것은 흔히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며 많은 국가와 원시부족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신념의 근거는 자신의 성찰 속에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외부에서 주어지고 있다. 기적이나 어떤 상징 같은 권위있는 것들, 계시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 형이상학에는 주로 외부의 위협이 존재하게 되고 그 형이상학 체계를 따르지 않는
  불신자들과 단순한 회의주의자들마저도 적대적인 존재가 된다.
 


    종교는 필요한 것이고 유익하다. 그러나 만일 인류가 진리를 발견해 역사를 발전시키는 데
    장애물이 된다면 종교 자체를 파기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인간사회에서 종교라는
    것은 해당 종교가 지니고 있는 직접적인 진리에 의해 평가된다기보다 간접적으로 인간을 이해
    시키는 능력과 관련해, 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믿고 있느냐' 하는 데 따라서 평가된다.

                                                                                     

 에머슨: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철학의 주창자
        
           
  신학대학원 축사 Divinity School Address

예수님은 신이 아니다. 단지 우리 인간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 각자가 갖고 있는 본성, 진리, 지혜다. 인간들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 즉 우리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대상으로 만들어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지만, 그는 단지 인간이다. 나와 여러분들처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도덕경』, 오강남편역, 현암사 1995

무위란 '행위가 없음 non-action'이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이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인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행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도,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無爲之爲' 즉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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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4. 16. 23:30
유쾌한 편지 하나:

    

 
    Subject: Wie eine Schoene Frau sind Sie.
    Date: Sun, 16 Apr 2000 13:37:50 +0900 (KST)
    From:
    To:

    선생님 초면에 실례를 용서하십시요......... 저는 ..........ooo
    입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어 왔으므로 선생님
    께서 나이가 좀 드신 평범한 인상의 그러나 도수 높은 안경을
    쓰신 분으로 상상하였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 작은
    편지 한 장을 써놓고는 학교주소를 알까 하고 여기에 들어왔다가
    선생님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아름다움을 풍기는 분이십니다.
    내내 아름다우십시요.
    다름이 아니고 부족하지만 저도 ........
    
    끝으로 한가지 선생님의 인터넷실력 대단하시므로 존경합니다.
    오늘 멋진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나니 참 유쾌하네요.
    2000년 4월 16일  ooo 드립니다.
 


           가슴 깊고 깊은 곳에 묻어 둘 추억 하나를
                     수소풍선 잡았던 끈을 놓아 버리듯 날려 보낸 듯
                     요란한 바람이 참 서럽기만 하던 봄 날
                     움트는 싹들이 생경하기만 하던 봄 날
                     애써 "위스키~~~"하고 미소짓던 봄 날
                    "쏠"음으로 말하려고 입을 깨물던 봄 날
                     참으로 유쾌한 편지 하나가 위로가 되었소.
                                

    답장은 차마 이리 하지 못했다.
    그랬더라면 너무 놀랐을 터이니 당연히 못했고. 
    우선 그/그녀는 미지의 사람이니까.
    이 메일 이전에는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르던 그런 아무도 아닌 사이.
    사실 이러한 불특정 누군가에게서 오는 여러 메일에
    그들 중의 이 하나에 이만한 의미를 두는 것도 호들갑이다.
      

    그러나  편지가 어떠하면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지
    아이들도 아니지만 따뜻한 말에 감탄하게 되는 것을
    아이들도 아니지만 따뜻한 말을 그리워했기에 그러는지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싶어서 여기 쓰려나 보다.....
    그리고 그/그녀가 원하던 내 변변찮은 책 한 권을 보냈다.

                                      
  

 그래서 일까?
         며칠 뒤 정말 위로가 되는
메일이 왔다,

                               "꽃피는 봄사월 돌아오면..."
                                     망향을 듣다가
                                     문득 ... 생각이나서....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곳을 스쳐갔을 리 없는 누군가에게서.
         어느 날 오후 해는 저물어 가고
         그런 시간에 보낸 짧은 터치.
         사람이 위로받는 것은 순간이다.
         절망도 그처럼 순간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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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4. 7. 23:30
  2000년 봄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도 거의 끝나는데........
       그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메일을 공개합니다.
       이름만은 저작권 허락을 받지 않았으므로 생략, 나머지는 전문 그대로입니다.

 

  
   Subject: 따뜻한 봄날에...
   Date: Fri, 07 Apr 2000 21:08:48 KST
   From: ??
   To: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고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그대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그대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

    교수님, 학교를 휴학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졸업 한 동기들 보다는 가까이
    있으면서 교수님의 제자 노릇 제대로 하지 못 한 것 같네요.
    저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밖으로 튕겨나지 않음은
    같이 커났던 동기들과 저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 가고자 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신문사에 있는 친구가 막걸리 사 먹으라며
    쥐어 준 돈 몇천원을 받아 쥐고 따뜻한 봄볕 아래 서서
    한 없이 즐거워 웃었답니다.
    교수님 밝게 한번 웃어 보는게 어떻습니까?
    봄이니까! 믿음직한 제자들이 있으니까!!
    이상 00학번 000 였습니다.......꾸벅!

 

 

     이 얼마나 다정한 글인가!
      같이 커난 친구들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가리라는 다짐.
      이런 말 한 마디면 혹여 서러웠던 기억도 사라지리라.
      이런 말 한 마디면 다가올 재난(?)도 두렵지 않으리라.
      <신 지식인> 개념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인문대 사람들아!
      어디 어떻게 숨어들어 옴짝도 하지 않을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이 오아시스같은 글을 삼키자. 아까워 단숨에 들이키지 말고,
      생명수처럼
       - 아니다 이 말은 취소한다. 아주 사적인 이유로 -
[아래 주석]
          아니 새벽 이슬처럼 신선하게 간직하자.

  [주석] 우스운 주석: 난 개인적으로 "생명수"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쓸 수 없다.
            특정한 날의 특정한 물을 생명수라 했던 까닭이다.
            그 특정한 순간에 대해서는 그러나 세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 특정한 순간을 함께 한 누군가도 이미 잊어 버린 물!
            그 물 때문에 더는 생명수란 말을 쓸 수가 없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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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구적 학문 vs 목적적 학문

    이야기의 발단은 대화 상대자들의 신분에 맞는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관한 관심이었다. 대화 상대자는 인문대학

    소속의 교수님, 주로 실용노선을 지지하는 소위 "신지식인" 개념에 동참하시는 분. 편의상 "가"와 "나"로 쓴다.
 

가: 요즈음에는 인문대 자연대 등에서 도전적인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경향입니다.
      학문할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당연하다고 봅니다.

나: 당연하달 수는 없지요. 확실한 직업적인 미래를 선택했다면 나무랄 수 없는 현명한 판단이겠지만, 문제는
     그 선택의 시금석이 주로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사회적 동물이 사회적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내적 필요를 무시한 데서
     처음부터 문제를 내포합니다. 개인의 내적 욕구가 고려되지 않은, 외부요인에 의한 선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사회적 성취가 이루어진 이후에라도 - 본질적 회의를 수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은 타인의 삶이 아닐까요?

가: 그러나 졸업 후의 진로가 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나: 그러니까 졸업 직후냐 훨씬 더 멀리를 보느냐 차이 아닐까요?

가: 우선 사회에 좋은 조건으로 편입된 이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요. 여건이 성숙된 이후에 자신의 필요를
     고려하자는 현실적 사고가 현명한 선택을 낳는다고 보는데요.

나: 섣불리 결정을 하고 나서 갈등하거나 다시 진로를 바꾼다면 더욱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닐지요....
      아무리 사회의
구에 의한 삶에서 라도 자신의 내적 욕구가 어느 정도는 합치되어야만 진정 의미있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대화는 끝이 없다. 마치 종교에 관한 설왕설래와 마찬가지가 된다.  

하여, 나의 주장보다는 존경할만한 분의 권위적 견해를 예로 들고자 한다.

多夕 유영모 선생님은『老子』20장 시작의 "絶學無愚"를 한글로 풀어 쓰시기를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라고 하셨다.

[물론 "하련"은 아래 아를 사용하셨고, 그 한글의 매력은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이다.]

아주 젊지는 않았을 때, 그래도 젊었을 때, 『늙은이』로 풀어쓰신 그 글을 공부했다. 실용적 필요는 아예 없던 터였다.

소위 좋은 환경에서 - 평범하므로 좋은 - 자라나서, 괜찮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적당한 직장경험, 그러다 우연히

사랑에 빠진 듯 결혼했고 이른 어머니가 되어있었던 시절, 그래도 한 가지, 필요에 의하지 않고 오직 즐거움 때문에

공부하는 버릇만은 지녔었지만, 그때는 그 취미마저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 스스로 경멸하여 대학원 진학을

완강히 거부했었던 반항기를 잊지는 못하고 있던 터였다.

해서, 그 서늘한 충격 - 공부가 죄는 아니구나, 써먹을 생각에서가 아니라면....- 그것이 나를 다소 해방시켰었다.

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실용적 학문이 못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실용적 필요에 굴하는(?) - 참으로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이 고집을 지켜갈 방책이 없기 때문임을 용서 바란다 -

다른 동시대인들을 다만 다르게, 존경하지도 멸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을 서로 존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물론 상황이 매우 다르다. 이제도 "도구적 이성" 운운하면 유행 한물간 이론에 매인 현학이라 오해된다.

오해뿐이 아니라 이제는 시대착오라고 멸시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다. 대다수의 유능한 사람들이 실용적-도구적 학문에 경도하여 이루어낸 문명문화의 혜택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소수의 다른 사람들- 즉 우리는, 인문학 따위에 매어있는 우리는 - 은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마찬가지로 사회에 기여하여 잉여인간이 되지는 말지어다. 그러나 그 기여는 바로 성취사회가 가져다 주는 그림자,

그 그늘과 그림자를 찾아 최소한의 광명을 선사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념에 잠시 눌어붙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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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9. 15. 23:30

◐◑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 <친구>라는 개념과 관련된 변명 하나 -


 
근거 1)            "이 세상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Jeder auf dieser Welt steht außerhalb jedes anderen."
                                          - 하인리히 뵐 - 전집 13권 37쪽

                                   

   
    사람은
밖에 있다 사람의

         사람은 있다 사람의 밖에

                밖에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람의 밖에 사람은 있다

                           있다 사람은 사람의 밖에

                      밖에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사람은  확실하게 사람의 밖에 있다

    사람은 있다 모든 것의  밖에

    사람은 그냥 홀로 있다

    사람은 그냥 있다

    사람은 있다.   

렵게 쇼펜하우어 등을 대입하지 않아도 그저 맹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다.
목적은 허상, 가상이요, 잘해야 꿈이다. 꿈은 이루지 못할 전제의 목적이다. 이룰
수 있는 전제라면 목적일 것이니까. 그러므로 꿈을 꾼다는 것은 조금은 도피라 할
것이다. 도피가 아니더라도 삶의 유보, 그래서 꿈이란 생을 아름답게 장식해주는
무지개와도 비견되지만, 실제로는 "다른 상황"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생을
좀먹은 도구이다.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 꿈에 매달리는 인간일수록, 예컨대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고통을 즐긴다(?). - 꿈을 접으면 사라질
고통을 꿈 때문에 끌고 다니는 것을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 그러므로
꿈을 버렸을 때 어엿한 인격의 인간이 된다는 가정이 설립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야기가 될 법한 이와 최근에 나눈 짧은 대화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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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을 준비해 본다, 마음 속으로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친구는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인간에 대한 관심 --- 어떤 와 같은 종속인,
  같은 살과 피를 지닌, 슬퍼 울고 기뻐하는 종속인 인간. 따뜻한 음식과
  따뜻한 옷과 따뜻한 눈길에 따뜻해지는 인간.

  그러나 그것이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상태는 아니다.
  인간적인 이해라 부르거나 차라리 인간적 존엄을 전제로 한,의례적인,
  온건한, 중립적인, 다행히 바람직한 이웃관계일 뿐이다. 보편적인 인류애.
  그것은 차라리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도 매번 한계에 부딪치곤 한다. 가족은 상당히 예외가
  되지만,바깥 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완전한 이해란 Liebe auf dem ersten Blick 또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론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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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결론에 승복하는 이유들]

말하기
 
요즈음 세상에 가능하지 않는 것, 그 으뜸은 아무도 자신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언어학자 또는 직업적
   글쟁이들이 말하는 언어 자체의 소통 문제, 즉 텍스트 생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진짜 이유는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성산포에서> 라는 유행가 가사이다.
   노래를 그 속삭임을 들으면 서정에 눈물나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도시의 밤 술자리에서는 술에 취하기전에 외로움에 취한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혼자서 술을 마신다. 혼자서 외로움을 마신다.
   여럿이 둘러 앉아 뼈저린 외로움을 마신다.


 편지 : 요즈음 세상에 가능하지 않은 것 또 하나, 편지쓰기가 있다.

     편지는....

  생각에 이르기가 어렵다.

   생각이 간절해도 쓰기가 어렵다.

  썼더라도 부치기가 어렵다. 우편도 몰래도...

   
                               더구나 그런 편지 자체에 발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편지란 좀 쑥스럽다거나 유치하다는 논리만으로 그리한다.              
                               차마 말로 할 수 없어서 바라보고는 말을 할 수 없어서
                               편지로 말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므로....

  Kafka의 편지 빌려오기:

         "아시겠소, 나는 웃기는 인간이오. 만일 그대가 나를 약간 좋아한다면,
         그것은 연민이며, 내 몫은 두려움이오. 서신으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 서신이란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해변가에
         철렁거리는 바닷물과 같은 것이오. 펜은 모든 문자들의 그 많은 언덕위로
         미끌어지고 그리고 이제 그것은 끝에 이르렀소. 날씨가 서늘하니
         나는 나의 텅 빈 침상에 가야겠소."
                                                                                  (1907년)

      "Ich kann mit ihr nicht leben
          und ich kann ohne sie nicht leben."
                
                                                                      (1913년)

            그녀와 함께도 그녀 없이도 살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은
            인간의 원론적인 위치 "타자의 밖"을 확인해준다?
            아니면 그 무수한 편지들에 수신인이 있었음에 그를

     
     부러워해야 할까?


 차라리  꿈꾸기:
                         
기이하게도 꿈에 등장하는 인물은 꿈의 존재를 모른다.
                             꿈은 열린 창으로 남아서 현실을 방해한다.
                             
열어 보여도 좋을 지 .......

  혹은 은행잎:
                       
예컨대 여기에 쓰이는 한낱 표시가 왜 은행잎인지
                            그냥 우연히 은행잎인가를 아는 사람도 없다.
                            있어야 했겠지만 없다.

 그러니 사람은 사람의 밖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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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8. 1. 23:30
  R    E     N     내     E     조   N

     N     알     E      N       지     N    고    L    E    기    K
 


   서
를 전혀 모르고서 한 학기를 한 교실에서 보낸다는 것은 조금 모독입니다.
    겉보기엔 좌판을 들고 앉아서 지식을 파는 지식산업 행태로 전락되는 한이 있더라도,
    짧은 상호간의 영향이 남아 있는 한, 교수-학습 간, 학습자 상호간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얼굴과 이름은 기억해야 <없는>의미도 살아 날 수
    있으리니, 여러분 졸업 후에 <영2> 혹은<수2>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이 끔찍해서라도
    이름을 개강모임이라 하여 간단히 초대합니다.

   대상: 현대 독일소설, 독일여성문학 수강학생 따로.
   시간은 가까운 목요일, 단 미리 이야기 하기.
   장소는 상의해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우연히 두 과목 다 수강하며 열쇠담당으로
   수고하는 류oo(94학번)와 의논하세요.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3:30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욕망과 망집 없는 삶 - 그것의 허위?

 

죽음과 결부시켜서는 매우 생경한 나이에, 서른 해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젊다 못해 시퍼런
시인/글쟁이가 남긴 시들을 읽게 되었었다, 실로 우연히 지난 겨울에.그것도 시집을 선물받아서,
선물에 참 맞지 않은 시집이었는데....
섬뜩한 몇 구절은 곧 가슴에 박혔다. 입술이나 뇌리가 아니라 바로 가슴 속에.    
 아아,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고 또 쓰는 구나!

이 봄에 책방을 기웃거리다가 그 사람의 산문집을 발견했다. 10년 가까운 세월 지나서 28쇄 째의 책을 이제서야.생각보다 -- 시구절에서 얻은 표상에 비해 -- 훨씬 훤한 젊은 얼굴, 그리고 퍼뜩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욕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

 

     ■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도서출판 살림, 2000년 28쇄, 26면에서

이 글귀는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무망을 목표로......."라고 하는 입버릇과는 어긋나게, 빈 들 햇살에 녹아들면서도
안에서는 냉큼 녹지 못하는, 그래서 속이 굳어지는 잔설처럼 짓눌린 욕망에 평안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러나 그 시인은 시로써 말하였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것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겨울을 났고, 이제 미련없이 나며 우두둑 꺽어지는 나뭇가지들은 서럽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으려는 "
남루한" 나뭇가지는 추악하단다.

그는 그 "매달려있음"을 욕망이라 말하는 것으로 해석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다.  이제 산문에서 욕망없음을 위선 쯤으로 규정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한다?
시인의 글을 시가 우선하지 않을까? 산문은 지나가는 느낌일 뿐이며.
 

 또 다른 시 한편: {우연히 시집의 좌우 페이지에 해당한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두 시의 공통점은 "봄"이라는 시간이다.
봄의 이미지가 시작이 전혀 아닌 무엇인가의 끝을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봄이 무서우리만치 생경한 것은 이 시인으로서는 너무 오만하다. 그것은 우리들의, 나의, 것이다.
그는 완성되기에는 너무 젊은 인격으로 마쳤다. 그러니 불균형이 당연하다고?
그렇지만 사람이 나이와 더불어 별 되는 것도 없다. 불균형은 다른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라도 헤메는 것인가?

 누군가와 끝까지 이야기하고 싶다. 논쟁이 되어도 좋고, 마침내 서로의 몰이해에 화를 버럭내며
 나가 떨어져도 좋을 것이다.     벌써 그  "....하고 싶다"가 욕망이라고 힐난하려는 사람이어도 좋다.
 누구라도 허튼 이야기를 나눌 마음만 있으면 족하리라.
 이 세상 그러나 어디에 그 소용없는 일에 밤을 지샐 위인이남아 있을 것인가!
 혹은 속으로 왼다: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3:00

그 이야기 둘 : 스스로 격리된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中에서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치유할 수 없는 병?

 ♠  인용

아니면 사랑은 어느 날 우리 몸에 저항력이 떨어지고 발작 증세가 나타나면서 갑자기 피할 수 없는
병에 걸릴 때 까지 우리 몸 속에 둥지를 틀고 조용히 머물러 있는 바이러스처럼 침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포로처럼 우리 몸 속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가끔 씩이긴 하지만 사랑은 스스로를 해방시켜서 바로 자기가 갇혀있는 감옥인 우리를 부수고 나올 수도 있다.
사랑이 평생 갇혀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온 죄수라고 생각할 때, 왜 사랑이 자유를 맛보는 아주 드문 순간에
그렇게 날뛰고, 그렇게 은총과는 거리가 멀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희망의 나라로 이끌었다가 뒤이어 곧
불행으로 떨어뜨리는지, 나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이런 특성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허용하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랑이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용

사랑의 첫 단계, 모든 사랑의 첫 단계는 진정한 감사의 시간일 것이다.  한 인간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여러 특성들이 우리 내부에 파묻혀 있거나 아직 계발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특성들은
우리가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익숙해져 있던 특성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는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러워지며, 현명해진다.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그에게
헌신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베푼 그 기적을 위해 우리 삶을 바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그가 바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묻지 않는다. 바로 그가 우리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우리 삶의 윤곽을 분명히
그린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목표가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와의 만남의 순간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은밀히 조물주라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감지하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용

프란츠와의 관계된 문제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스스로 결정한 기억은 없다. 사랑이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결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빠져있었던
사랑의 그 완벽함으로 인해 나의 자존심이 상했을지라도 나는 오랫동안 사랑의 요구에 저항할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을 제지시키고자 한 몇 번의 나의 시도는 모두 사랑의 승리로 끝났으며, 나는 또 다시 완전히 기가 꺾였다.
그럴 때마다 사랑에게서 배운 교훈은 오로지 사랑의 계획에 따르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었다.              
                      

 인용

살아있는 동안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랑뿐........사랑은 현실의 삶 외부에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트리스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장애물을 설치해
나갔으며,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진정으로 구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불멸의 사랑을 죽을 때 까지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  우리의 의문 :

   ♤ 주인공은 "슬픈 동물"인가? 왜 "슬픈 동물"인가?

       사랑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저주를 사랑하는 - 떠나 버린 - 사람에게
       걸고  있는 일이 가능한가? 혹은 사랑에?

    ♤ 보편적인 질문: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한가?                                                                                                                                                                        

 소설의 개관

동베를린 태생의 주인공은 고생물학 전공자로, 결혼하여 남편과 성장한 딸이 있고, 1990년 당시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 중이다. 서독출신 개미연구가 프란츠가 박물관의 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왔을 때, 둘은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떠났고, 그는 어김없이 부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이다. 그에 대한 격렬한 사랑의 요구는 심한 질투로
변하고, 그의 부재 중에는 상상 속에서 그 부부의 흔적을 추적한다. 넘쳐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현실세계를 넘어서
주인공의 의지와 상상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영원히 그녀를 떠났고, 그 이후에도 이러한 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몇 십년을 회상하는 그녀에게
이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회상하는 몇 십년의 시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몇 십년은 곧 현재요
미래이다.    "뭉툭한 코와 몸을 휘감는 긴 팔을 가진 갈색 털의 원숭이" 처럼 그렇게 그녀는 꼼짝 않고 누워서 그를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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