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구적 학문 vs 목적적 학문
이야기의 발단은 대화 상대자들의 신분에 맞는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관한 관심이었다. 대화 상대자는 인문대학
소속의 교수님, 주로 실용노선을 지지하는 소위 "신지식인" 개념에 동참하시는 분. 편의상 "가"와 "나"로 쓴다.
가: 요즈음에는 인문대 자연대 등에서 도전적인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경향입니다.
학문할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당연하다고 봅니다.
나: 당연하달 수는 없지요. 확실한 직업적인 미래를 선택했다면 나무랄 수 없는 현명한 판단이겠지만, 문제는
그 선택의 시금석이 주로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사회적 동물이 사회적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내적 필요를 무시한 데서
처음부터 문제를 내포합니다. 개인의 내적 욕구가 고려되지 않은, 외부요인에 의한 선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사회적 성취가 이루어진 이후에라도 - 본질적 회의를 수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은 타인의 삶이 아닐까요?
가: 그러나 졸업 후의 진로가 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나: 그러니까 졸업 직후냐 훨씬 더 멀리를 보느냐 차이 아닐까요?
가: 우선 사회에 좋은 조건으로 편입된 이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요. 여건이 성숙된 이후에 자신의 필요를
고려하자는 현실적 사고가 현명한 선택을 낳는다고 보는데요.
나: 섣불리 결정을 하고 나서 갈등하거나 다시 진로를 바꾼다면 더욱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닐지요....
아무리 사회의 요구에 의한 삶에서 라도 자신의 내적 욕구가 어느 정도는 합치되어야만 진정 의미있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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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화는 끝이 없다. 마치 종교에 관한 설왕설래와 마찬가지가 된다.
하여, 나의 주장보다는 존경할만한 분의 권위적 견해를 예로 들고자 한다.
多夕 유영모 선생님은『老子』20장 시작의 "絶學無愚"를 한글로 풀어 쓰시기를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라고 하셨다.
[물론 "하련"은 아래 아를 사용하셨고, 그 한글의 매력은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이다.]
아주 젊지는 않았을 때, 그래도 젊었을 때, 『늙은이』로 풀어쓰신 그 글을 공부했다. 실용적 필요는 아예 없던 터였다.
소위 좋은 환경에서 - 평범하므로 좋은 - 자라나서, 괜찮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적당한 직장경험, 그러다 우연히
사랑에 빠진 듯 결혼했고 이른 어머니가 되어있었던 시절, 그래도 한 가지, 필요에 의하지 않고 오직 즐거움 때문에
공부하는 버릇만은 지녔었지만, 그때는 그 취미마저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 스스로 경멸하여 대학원 진학을
완강히 거부했었던 반항기를 잊지는 못하고 있던 터였다.
해서, 그 서늘한 충격 - 공부가 죄는 아니구나, 써먹을 생각에서가 아니라면....- 그것이 나를 다소 해방시켰었다.
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실용적 학문이 못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실용적 필요에 굴하는(?) - 참으로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이 고집을 지켜갈 방책이 없기 때문임을 용서 바란다 -
다른 동시대인들을 다만 다르게, 존경하지도 멸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을 서로 존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물론 상황이 매우 다르다. 이제도 "도구적 이성" 운운하면 유행 한물간 이론에 매인 현학이라 오해된다.
오해뿐이 아니라 이제는 시대착오라고 멸시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다. 대다수의 유능한 사람들이 실용적-도구적 학문에 경도하여 이루어낸 문명문화의 혜택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소수의 다른 사람들- 즉 우리는, 인문학 따위에 매어있는 우리는 - 은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마찬가지로 사회에 기여하여 잉여인간이 되지는 말지어다. 그러나 그 기여는 바로 성취사회가 가져다 주는 그림자,
그 그늘과 그림자를 찾아 최소한의 광명을 선사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념에 잠시 눌어붙어 있는데..